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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7월 29일)-여름토요성령집회-4.
제목: “다윗의 길, 내려갈 때 보이는 것들”
말씀: 사무엘상 22:1-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홍성환 목사님-초빙(이천신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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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2:1-5,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3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4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은 다윗이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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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환 목사님-초빙(이천신하교회)
-할렐루야. 감격스러운 자리에 초청해 주시고 말씀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이 안아주시는 본당에 계신 성도님들은 아마 두 부류로 앉아 계실 것 같아요. 저를 절대 모르는 분들과 저를 아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줄 믿는다. 제가 누군지 알고 말씀을 듣는 게 소화가 잘 될 것 같아서 제가 잠깐 소개를 할게요.
 
저는 2004년도에 부임해서 2012년 11월 8년 8개월 동안 교구 목사로 또 새 가족 3년, 성경 대학 3년, 권사회 2년,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이 담임 목사로 또 불러주셔서 지금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이천 신하교회의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어설픈 창조보다 우리 오 목사님에게 배운 확실한 모방으로 우회를 하고 있고요. 저는 이 모든 강단이 다 두렵고 불편한 자리지만 이 친정 기회에서 설교한다는 게, 여러분들은 편안하게 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어느 자리보다도 불편하고 힘든 자리가 사랑의 교회 자리이다. 이 본당에서 여러분들을 보니까 더 반갑고요. 제가 이렇게 싹 둘러볼 때 아는 분도 몇 분 계신 것 같고 모르는 분이 더 많으신 것 같아요. 근데 하나님께 정말 감사한 건요, 교회를 건축할 때 제가 작정한 헌금이 2012년 11월 모든 것을 딱 마치고 다음에 부임하게 됐어요. 하나도 남김없이 더함도 없이 아니 박수 치라는 건 아니다. 제가 헌금했다니까 좋아하시는 거죠? 그래서 은혜 가운데 제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가 귀하게 세워지고 친정 교회가 이렇게 든든히 서갈 때에 시집 간 이 목회자는 굉장히 자랑스럽다.
 
사랑의 교회가 이렇게 든든히 서 있는 것만 해도 제가 사랑의 교회 출신이라는 것만 해도 굉장히 뿌듯하고 자랑스럽고요. 이 모든 사랑의 대의 건강성을 닮아서 이 지역에서 열심히 분투하고, 열심히 목숨 걸고 목회를 하고 있다. 고은 시인의 ‘그곳’이라는 시가 있어요. 그 시의 내용은 긴데 그 시의 내용 중에서 이런 내용이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곳을.’ 여러분 등산을 할 때, 가파른 등산을 특별히 하게 될 때, 너무 힘들면 머리를 푹 숙이고 정성만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도달해야 될 목표만 보이게 되고 나보다 먼저 앞서간, 먼저 올라가는 사람들만 눈에 보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결국 정상에 도달해보면 올라오면서 본 것이라고 오직 목표 하나밖에 없었어요. 근데 내려갈 때 보는 것들은 올라갈 때 보는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여러분 내려갈 때 보게 되는 것이 뭘까요? 산기슭에 피어 있는 무명의 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뭇잎에 있는 그 바람도 눈에 들어오게 되고요. 젊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을 인생의 황혼이 되고 나이가 들면서 보여주는 것이 있더라는 것이죠. 성공할 때 보지 못했던 것이 사업에 실패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를 떠나고 있을 때 또 보이는 것들이 있고요. 건강할 때 보이지 못했던 것들이 병들면서 환복을 입고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보이는 것들이 또한 있다. 라는 것이다. 이처럼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이 너무나도 참으로 많다. 라는 거예요.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내려갈 때 보는 것이 올라갈 때, 보는 것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한 경험들이 너무나도 많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보았던 그것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 되기도 합니까? 여러분 만약에 내가 지금 내리막길로 걷고 있다면 오늘 내가 지금 어딘가를 오르고 있지 않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오늘도 내가 내려가고 있다면 어쩌면 아주 소중한 것을 보기 위함일 수 있어요.
 
오늘 본문에 보면요 내려갈 때 보는 것을 아주 소중히 여김으로 인생의 역전을 경험한 사람이 나온다. 그가 누굽니까? 오늘 본문에 이 다윗을 이 다윗이 한때 잘 나갔다. 거침없이 올라갔다. 그는 성장 가도에 올랐었어요. 그는 청년회 때 블레셋의 이 골리앗도 쓰러뜨렸고요. 그 일로 인해서 많은 백성들에게 칭송과 환영을 받았고요. 심지어 당시에 왕이었던 사울보다 훨씬 더 큰 환영을 받았다. 그 순간부토 사울은 그를 주목하여 보죠.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의 거대한 대국을 이루기도 했다.
 
여러분 근데 그랬던 그가 평생을 왕이 될 때까지 오르막길만 걸었을까요?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 다윗이 항상 승선 가도만 걷고 성공의 길만 걸었을까요? 그렇지 않았다. 라는 것이죠. 그가 왕이 될 때까지 걸었던 길은 심한 내리막길이었어요. 절벽같이 거친 길을 그는 마다하지 않고 걸어야 했다. 다윗의 인생으로 보면 그 올라가는 길은 아주 잠깐이었어요. 사울을 피해 도망자의 삶을 10년을 살아야 했다. 그 길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길고 거친 길이었어요. 여러분 이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간 10년의 경로를 여러분 다 기억하십니까? 여러분 제가 이 사랑의 교회 성경 대학 강사였잖아요. 정말로요 제가 3년 동안 성경 대학을 가르치면서 제 목회의 평생의 기본 의식이 그 3년의 시간이었어요.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간 경로를 보면 작게 제가 정리해 보면 라마나욧에 있는 사무엘에게 피신해 간다.
 
여러분, 사무엘이 누굽니까?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은 자이다. 자신과 사울의 영적인 멘토였다. 적어도 사무엘에게 피하면 사울의 그 추적의 길로부터 피할 줄 알았어요. 보호해 줄 줄 알았어요. 그러나 이 광기 서린 사울을 사무엘도 막지 못했어요. 다윗이 라마나욧에 있다. 라는 말 듣고 사울은 군대를 보내서 그를 잡으러 간다. 자신의 도피처가 드러난 이상 다윗은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어요. 사무엘도 그를 지켜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가 그다음으로 간 곳이 어디냐 하면 요나단에게 찾아간다. 친구 요나단, “요나단아, 요나단아, 너희 아버지가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나는 너희 아버지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피를 흘리면서 수많은 나라의 정국 전쟁의 대승을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에게 들렸는데 왜 어찌하여 왜 나를 죽이려 하느냐?” 나와 아버지 사이에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그러자 요나단이 미안하다고 얘기를 하죠. 그러면서 아버지와 식탁의 자리에서 이 다윗에 대한 변호를 하고 그의 억울함에 대해서 호소를 한다. 그러자 이 광기 이미 어린 이 사울은 창을 던지면서 이 미천한 계집에 소생아! 하고 그러면서 그를 죽으라고 벽에 박아 죽이려고 긴 창을 던진다. 요나단은 가까스로 그 창을 피하게 되죠. 그럴수록 이 사울은 다윗을 향한 적개심이 더 불타오르듯 더 커져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같은 하늘 아래서 사울과 함께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멀리 멀리 사울을 피해 멀리멀리 가게 된다. 그리고 그가 갖고 선 놉땅의 아이멜렉 땅으로 찾아간다. 근데 거기에도 이미 첩자가 있었어요. 그곳에도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가 결국 가게 된 곳은 어디냐면 같은 사울과 유다 땅 안에서 같이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의 포위망과 그의 첩자들이 곳곳에 깔려 있기 때문에 사울은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먹고 수많은 넓은 영토를 가져도 다윗이 살아있는 한 그는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다윗을 추격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사울을 피해서 급기야는 그가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간다. 어디입니까? 블레셋으로 간다. 블레셋은 어딥니까? 이스라엘의 적국 아닙니까? 자신과 지금까지 엄청나게 싸워왔던 나라가 불레셋 아닙니까? 지금으로 말하면, 38선을 넘어 북으로 간 거예요. 절대 가면 안 되는 곳을 갔다.
 
그러나 그 블레셋으로 가면 사울의 추격이 더 이상 없을 거로 믿고 그 블레셋으로 가게 된다. 살기 위해서 투항합니다. 망명을 시도할 수밖에 없어요. 블레셋 가드 왕은 그가 다윗인지 몰랐어요. 어찌 감히 다윗이 여기 넘어올 생각을 했겠습니까? 나중에 그가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위협을 느꼈을 때, 그는 완전히 무장 해제가 된 이상의 상태로 침을 수험에 질질 흘리면서 미친 행세를 한다. 거의 미친놈이었어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위협할 수도 가해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고, 무능한 존재이고 정신 이상자이다.’ 살기 위해서, 목숨 연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있어야만 했다. 다윗은 블레셋 가드 왕을 피해서 먼 곳에 있다가 결국 이 블레셋을 탈출하게 된다. 여러분, 결국 이 다윗은 사무엘도, 친구 요나단도, 아이멜렉도, 그 땅 볼레셋도 그를 영원히 감춰주지 못했어요. 그가 결국 선택한 곳은 어딘지 아십니까? 황량한 유대광야였어요. 그 유대광야에서 무수한 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그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낸다. 그 유대의 광야는 물 한 모금, 풀 지푸라기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죽음의 땅이었다. 유대 땅에서 사울의 칼을 맞아 죽는 것이나 이 광야에 들어가서 굶어 죽고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이나 죽는 것은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다윗은 광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그 광야에서 다윗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윗으로 비쳐지기 시작한다. 여러분 우리도 다윗처럼 내리막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곤두박질을 칠 때가 있고요. 뜻하지 않는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광야 가운데 거할 때가 있어요. 건강 문제에요,,자녀 문제, 물질 문제, 관계 문제, 부부 간의 문제요.
 
여러분 그 광야 가운데 내가 섰다면, 어느 날 문득 나를 보았는데 내리막길에 내가 차 있다면 여러분 거기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게 뭡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통과해야 됩니까? 여러분 명심하세요. 내가 내려가고 있다면 오늘 내가 있는 것이 광야라면,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 있어요. 그 볼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볼 수만 있다면,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그 광야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바닥을 박차고 다시 오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의 점프대가 될 줄로 믿는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윗이 그 거친 내리막길에서 보았던 것이 과연 뭘까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오늘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이 광야 길을 걷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봐야 될까요? 여러분 다윗이 도망 길에서 아까도 말했지만 놉 땅에 아이멜렉 제사장을 만난다. 너무 배가 고프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서 제상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게 된다. 진설병을 그래서 한참 허겁지겁 먹고 있는 다윗을 향해서 제상에 물어본다. 왜 너는 홀로 있느냐 너와 함께하는 자들이 어디 있냐? 라고 묻게 된다. 그 말을 듣는 다윗은 적지 않은 당황을 하게 된다.. 아직 사울과 자신의 관계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가 뭐라고 둘러야 되는지 아십니까? “지금 왕의 비밀 명령을 수행하는 중입니다.”라고 한다. 이렇게 거짓말로 둘러댄다. 그렇게 당당했던 다윗이 자신의 처지가 부끄러워서 이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아무도 자신을 따르는 자가 없는,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이 황량한 사막 가운데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이렇게 거짓말로 둘러대게 된다. 이것이 다윗의 길이에요. 그뿐입니까? 여러분, 불레셋 땅에서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다윗이, 막대기 하나와 물맷돌 두 개 가지고도, 전혀 쫄지 않고 그렇게 당당했던 다윗이, 지금은 살겠다고 자신의 생명 연명하겠다고 미친 체하며 침을 수염에 흘리고, 그저적, 그적적 벽에다가 뭔가를 그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부끄러웠겠습니까? 여러분, 이 길도 다윗의 길이었다. 다윗은 이처럼 내리막길을 하염없이 가다가 문득 평생에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게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너무나도 매우 실망스럽고 초라하고 매우 비겁한 자신을 만나게 된 거예요. 내리막길에서 문득 자신 안에 숨어있는 나약하고 비겁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시간은 다윗에게 실패도 패배도 아닌 우리가 아는 다윗으로 만들어지는 위대한 시작이 바로 그 광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러분 모세도 그런 거 아십니까? 애굽 왕좌에서 바로의 후계자로 그는 천하를 호령했던 왕자로 살다가 애굽 인을 살해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야로 도망치게 되죠. 거기서 양을 치는 목자가 된다. 여러분 당시 양을 친다는 것은 아주 하루 계급들이고 천한 일이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애굽의 왕자에서 천한 광야의 목자가 되었다. 라는 이 수지 하락을 경험했던 모세 또한 그 광야의 자리가 실패의 자리가 아니었다. 라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세로 빚어진 자리는 애굽의 왕정이 아니었어요. 오직 나는 없고, 하나님만 있는 광야의 한복판에서, 다윗도 그랬던 것처럼, 모세도 광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아,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라는 시가 있어요. 시라기 보단 수필이다. 굉장히 긴 수필인데 제가 그것을 조금 정리해서 여러분에게 한번 읽어드리도록 하겠다.
 
한번 같이 공감해보세요. 작은 소제목이 ‘왜 나는 조그만 일에 분개를 하는가?’ 제가 읽어드릴게요.
 
“고궁을 거닐며 고대 왕궁의 권력과 부정과 부패를 생각하고 또는 비판하며 역사적 시각을 잔뜩 부풀려 관조하듯 고공을 나은 나는 고궁 근처 식당에서 갈비탕을 먹었는데 갈비탕에 고기는 없고, 기름덩이만 잔뜩 들어있었다. 그래서 식당 주인과 한바탕 실랑이를 했다. 그러면서 문득 갑자기 그런 행동 속에 자신의 매우 옹절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큰 역사를 관조하듯 내려다보면서 단돈 얼마 안 되는 음식 때문에 흥분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리고 쭉 이어지면서 마지막에 이런 자성의 내용이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만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만큼 작은 존재냐 정말 얼마만큼 나는 작은 자냐, 이런 글귀로 시가 마감이 된다.
 
여러분 다윗도 내리막길에서 이 광야길 가운데서, 이런 심정과 마음으로 시를 쓰게 되는데 그 시가 바로 시편 142편 6절과 7절 말씀이에요.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시작
 
 
*시편 142:6-7절,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
-다윗은 지금까지 자신이 제일 강한 영웅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억울하고 비참한 자라고 그는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그가 내리막길을 가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나는 그저 자신의 연민과 두려움이라는 옥에 갇혀 있는 아주 가련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7절에 보니까 다윗은 주요 내 영혼을 옥에서 끌어내달라고 절교를 하게 된다. 여러분 다윗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가 위대한 성공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이는 그만큼 비천하고 그만큼 가련하고 자기 연민과 자기 두려움에 옥에 갇혀서 시름하고 몸부림치는 시간이 다윗에게 있었다. 라는 것이다. 여러분 한번 물어볼까요?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성군이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 배워야 될 배움의 자리가 있다면, 여러분 그 자리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골리앗과 싸워 이긴 자리, 수많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백성들에게 칭송과 칭찬을 받던 자리에서, 그가 왕으로서의 갖추어야 될 리더십을 배웠겠습니까? 아니다. 오늘 이 낮아진 자리였어요. 버림받은 것 같은 이 광야의 자리에서 다윗의 진정한 리더십이 거기서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 다윗은 진짜 나의 숨어 있는 모습, 나의 정직한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는 오유일한 구원자 하나님을 그는 찾게 된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진짜로 어쩌면 자신의 진짜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는 이 다윗의 광야와 모세의 광야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여러분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한다. 그렇지만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자주 분개고 화를 낸다. 그리고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작은 이익이 걸린 문제에 숨 걸고 달려든다. 그런 내 자신을 볼 때, 참 초라하고 부끄러운 내 자신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런 모습이 여러분 모습입니까 아닙니까? 전혀 나 같지 않은 모습, 목사로서 장로로서, 순장으로서, 훈련받은 자로서 전혀 나 같지 않은 모습을 일상에서 만나게 될 때 낯설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 모습이 아니라고 여러분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에요. 어쩌면 그것이 나의 정직한 모습일 수 있어요. 내 안에 숨겨 있는 내가 만나야 될 내 진짜 모습이 아마 그 모습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줄 알고 인정해야 한다. 여러분 진짜 변화되길 원하십니까? 제가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분이 교회는 열심히 출석하는데, 삶의 변화가 전혀 없는 분들이에요. 정말 안타까워요.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보면 불교에서 40년을 보살처럼 생활하시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진리가 아닌 것 같아서 우리 교회를 찾아와서 말씀을 받아서 신앙생활을 너무 잘해요.
 
이 보살로 이 절에서 부처님을 섬겼던 그 신앙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데, 얼마나 정성스럽게 잘 섬기는지 몰라요. 저를 만나면요 어떻게 인사하는지 아세요? 주지 목사님, 아 나도 모르게, 그 말씀 앞에 얼마나 순전하고요.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었는지 날마다, 날마다 말씀 들으면서 울고요. 하루에 한 가지씩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해서 또는 고민을 하고 또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여러분 정말 신앙인이 되고 싶었어요. 제자 훈련하는 교회로서 이 말씀 앞에서 정말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의 정직한 모습을 만나야 된다. 내면에 숨겨 있는 낯설지만 익숙하지 않지만 숨기고 싶은 여러분의 모습을 볼 줄 알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어 있다. 내 안에 그 모습을 내가 진짜 만나고 내 자신을 인정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겸손해지고요 남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내려갈 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경험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길이에요. 여러분 다윗은 유다 광야에서 아돌람 굴에서 숨어 살게 된다.
 
여러분 이 아들놈 굴에 약 400명이 있었다고 그랬어요. 그들은 사회에 소외된 자들이다. 다윗이 평생 만날 수 없는 자들을,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만나게 되죠.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사울의 폭정에 의해서 도망 나온 정치적 망명자들도 있고요.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해서 함께 살 수 없는 도망자들도 있고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원망하고 원통한 자들이 그것에 모여서 서로를 위로하고, 그 가시가 온몸에 있는 자들은 서로 찌르면서, 서로 위로하면서, 함께 아파하면서 고슴도치처럼 살아갔던 것이 이 아돌람 굴이었다. 그들은 세상 사람과 섞여 살 수 없는 사회 부적응 자들이에요. 다윗은 그 아들람 굴에서 가장 낮아진 곳에서, 소위 인생의 패배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 아둘람 굴에서 그의 왕이 되어 준다. 여러분, 만약 이 다윗이 아둘람 굴에, 이 낮아진 자리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런 그가 왕이 되었다면 어떤 왕이 됐을까요? 힘이 센 권력자는 될 수 있어도 백성들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참으로 귀한 성군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다윗은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그리고 그 억울한 현실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의 연민에 빠져 누군가를 원망하고 분노하는 도망가는 자의 삶을 살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자신의 연민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내겠다.” 라는 새로운 사명과 꿈을 그 아둘람 굴에서 그는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다윗이 후에 유대에서 7년 6개월 동안 왕이 되고, 이스라엘에서 다시 왕으로 등극할 때, 그 초기 정부는, 초기 내각은 이 아돌람에서 만난 사람들 중심으로 초기 내각이 구성되는 거 아십니까? 다윗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영롱한 보석처럼 쓰임 받는 귀한 왕이 될 때까지의 그 리더십의 기초는 이 아둘람 굴이었어요. 자신보다 더 비참한 현실에 처해 있는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향한, 소외된 자들을 향한 그 마음을 하나님이 부어주셨어요.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래서 사울의 진노가 풀리기만 바랬고요. 머리 위에 지나는 재앙이 멈추기만을 바랬어요. 그러나 그는 이제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을 따라 살게 된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덮고 있는 어둠, 그리고 오늘의 역사의 현실을 겪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깨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로 그는 아둘람굴에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꿈과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결의를 담은 다윗의 유명한 시가 있죠. 시편 57편 7절로 8절 말씀이에요.
 
*시편 57:7-8,
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 하리이다.
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가 예전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서 모든 전쟁에서 전승하여 사람들에게 칭송과 영광을 받았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될지 몰랐어요. 인생의 방향성을 잃었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서, 낮은 광야에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를 위해 살아야 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그는 인생의 주어와 목적어를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이것이 다윗의 인생의 길이다. 다윗은 그때부터 더 이상 사울을 향한 치졸한 복수와 이 적개심에 지배를 나가지 않고 살 수 있게 된 것도 그의 사명감 때문에 그랬어요. 그는 10년 동안 사울 향을 피해 다니면서, 사을 향해서 얼마나 상처를 받았으며, 내가 저 사울을 언젠가는 ‘내가 복수하겠다.’ 라는 이 복수심에 그는 휘둘리면서 얼마나 지배를 받았을까요? 그런데 그는 가장 낮은 이 광야의 자리에서, 전혀 소망이 없을 것 같고 다시 기회가 없을 것 같은 그 정박한 이 죽음의 땅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발견하고, 더 이상 그 치주는 복수심과 적개심에 그는 휘둘리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 다짐한다. 여러분, 다윗뿐만이 아니었어요. 형들에게 팔려나온 요셉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요셉이 형들을 향한 복수심을 하나님의 구원의 승리로 승화시킬 수 있던 이유도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한민족을 이끌어내겠다는 그 꿈 때문이 아닙니까? 그의 꿈과 비전 때문에 형들을 향한 복수심이 다 사라진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것이죠.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내 안에 크고 작은 상처에 휘둘리거나 제한받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안에 상처와 원망과 원통함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은혜의 보좌에, 기도의 자리에 말씀의 자리에 나가기가 주저한다면, 여러분, 바로 그 실패의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서, 광야의 자리에서 사명을 발견하시고 사명을 붙들고 죽을 듯이 사명을 이루는 삶을 살아보시기 바란다. 주를 위해서 한 번 죽는 것도 순교지만 주를 위해서 죽을 듯이 살아가는 것도 순교일 줄로 믿는다. 그 사명 붙들고 “하나님 내게 주신 사명을 내가 이루기를 원합니다.” “내가 죽을 듯이 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사명을 향해서 살아갈 때, 더 이상 우리는 그 상처로 인해 아파할 시간이 없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는요.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는요. 때로는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야지만 통과하는 문이 있고 통과하는 길이 있다. 그러면 여러분 참 이상한 일이 생긴다. 예전에 그렇게 안 보였던, 보기 힘들었던 하나님이 그 낮은 곳에서 머리를 숙였더니 몸을 웅크렸더니,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그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다윗은 내려갈 때로 내려간 가장 낮은 광야에서 사명을 붙들었을 때, 그것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 그곳에서 성소를 삼으신 하나님께, 하나님 앞에 예배와 찬송을 드리게 되는데, 그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이 찬송의 시가 시편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다윗이 잘 나갔을 때, 성공할 때 불렀던 노래보다, 사막에서 광야에서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 있을 때, 나와 하나님만 있을 때, 하나님과 나만 있을 때 하나님을 불렀던 노래, 그 사막에서 성서로 삼으시고 내 예배를 받으셨던 내 눈물을 닦아주셨던, 내 통곡을 들어주셨던, 내 탄원의 노래를 들어주셨던, 그 하나님을 향한 그 노래가 시편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메시지를 쓴 유진 피터슨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광야는 하나님으로 가득하고 광야는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이다.”라고 고백한다.
 
여러분, 야의 길을 걸어보셨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있는 곳이 광야이십니까? 바로 내 곁에 주님이 계실 줄로 믿는다. 렇게 안 보이셨던 주님이, 선명하게 눈에 보이실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를 강제적으로 광야로 내몰 때가 있어요. 저는 그것을 하나님의 강제적 은혜라고 저는 말하고 싶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허허 벌판에 우리가 서 있을 때가 있다. 내가 그 광야에서 무엇을 해야 됩니까? 내가 그 광야에 섰을 때 누구를 붙들어야 되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여러분, 광야에서는 마음이 가난해지고 겸손해져야 된다. 그래야 자신을 만날 수 있고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요 사명을 붙들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머리를 들고 마음이 여전히 교만하고 내 마음이 여전히 더 광야 같아지면, 절대 만날 수 없는 것이 내 자신이고 하나님이고 사명이다. 마음이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저희 아버지는 오십에 개척을 하셨어요. 제가 7살 때이다. 형제 중에 제가 막내, 저희 아버님은 늦게 목회를 하시면서 성도들이 뜻하지 않는 고난 가운데 있으면 그 성도들을 향해서 굉장히 마음 아파하셨어요. 제가 어린 나이에도 성도들이 힘들어하고 잠을 못 주무셨던 아버지가 기억이 난다. 근데 우리 아버지가 했던 영혼이 지금도 기억난다. 성도들의 고통은 깨달음은 끝이 난다. 고 하나님이 나를 왜 광야 학교에 왜 나를 입소시켰는지, 그 하나님의 의미와 하나님이 내게 고난 준 이유를 내가 알고, 하나님을 만나고, 내 자신을 만나게 되면 그 고난은 끝이 난다. 왜 고난이 끝이 안 나고 왜 내 인생의 내리막길이, 이 광야길이 그렇게 길어지는지 아십니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자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광야를 만나면 좁은 길을 만나면, 무조건 머리를 숙이고 몸을 움츠려야 한다. 마음이 겸손해지고 마음이 가난해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이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게 된다. 오늘의 고난이 그치게 된다. 라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에서 광야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만 그 광야에서 서로 다른 두 가지만 볼 뿐이다.한 사람은 광야에서 텅 빈 들판에 아무것도 못 보는 사람이구요. 또 한 사람은 광야에서 내 자신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죠. 그래서 광야에서 더 마음이 광야처럼 되는 사람이 있고요. 광야에서 뜻밖의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따뜻한 안아주심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다. 그 전자가 사울의 인생이고요. 그 후자가 다윗의 인생의 길이다. 여러분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을 잘 봐야 된다. 내려갈 때 보이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 마세요. 성도의 삶의 이유 없는 내리막길이 있다면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 있어요. 들으셔야 돼요. 보셔야 된다. 듣고 보면서 내 마음이 가난해지고 겸손해져야, 여러분 정상에 섰을 때, 높은 곳에 오를 때 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며 여러분 머리를 들지 마세요. 제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우리 모두에게는 언젠가는 내리막길이 다 있어요. 절대 아닐 것 같죠? 내리막길이 있다. 여러분 내려가는 길목에서 보이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란다. 내려갈 때 보이는 것들을 제대로 보고 그것을 통해서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붙들고 그 사명을 이루는 삶을 죽을 듯이 살아간다면 우리 또한 다윗처럼 회복을 넘어 부흥의 경지에 이르게 될 줄로 믿는다. 여러분이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되는 축복을 평생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의지와 상관없이 거침없는 내리막길을 걸을 때, 내 죄 때문이라면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없는데 여전히 내가 내리막길을 걷고, 광야 가운데 내가 머물러 있다면, 내려가면서 보아야 될 소중한 것들을 내가 보게 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의 따뜻한 안아주심을 경험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겸손해지게 하고, 마음이 가난해지고, 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의미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내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의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고, 우리 안에 치밀어 오르는 감격과 감사가 되어 지고,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고, 영원히 잘 되는 복을 누릴 수 있는,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과 칭찬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의 부흥을 경험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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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7월 22일)-부흥헌신 여름성령집회
제목: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말씀: 열왕기하 22:1~2
찬양인도:(쉐키나)
설교자: 박정호 목사님-초빙(순복음의정부교회)
ㅡㅡㅡㅡㅡ
*열왕기하 22:1~2,
1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디다요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ㅡㅡㅡㅡㅡㅡ
 
날씨가 참 더운데 보시기에라도 좀 시원하라고 흰 양복을 좀 입고 왔다. 좀 튀는 것 같지만 이른 시간이기 때문에 졸ㄹ린 분들은 좀 깨셨으면 좋겠고, 제게 주어진 시간이 많이 없다. 저는 어떤 말씀을 전할까, 저는 순복음 교단 목사이기 때문에 성령운동을 한다. 방언기도, 심령기도, 통성기도, 신유기적, 이런 말씀을 좀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장로교회 교단에서 오셔서 순복음교회 목사가 하나님 말씀과 관련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듣고 또 함께 찬양 드리기를 원하는데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 주실 줄로 믿는다. 열왕기하 221-2절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 오실 때까지 꼭 기억할 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강조하시면서 경고해 주시는 말씀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아라. 왜냐하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만드실 때 하나님 모양 형상 따라 만드셨고, 하나님의 그 어마어마한 가능성과 능력과 잠재력을 주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나 죄가 임하고 그 죄의 결과로 죽음뿐만 아니라 죽이고 도둑질 멸망시키는 사단 원수마귀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속성이 있는데 그것이 뭔가 한 쪽으로 쉽게 치우쳐 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너무 좋은 것도요 너무 좋아하다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은 또 너무 시도하다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오늘 주시는 말씀 남은 2023년뿐만 아니라, 남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 특별히 우리 토비새는 4대가 함께 예배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할아버지, , 자녀, 손자 손녀까지,
 
제가 얼마 전에 유럽을 종교개혁 지를 탐방을 하고 왔다. 천년 넘게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흔한 길을 허락하셨는데 세속화되고 타락하니까 마틴 루터를 통하여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셨고 또 혼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동역자들, 종교 개혁자들 하나님께서 세우셨다. 300년이 세월이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화형당하고 그리고 지켜낸 신앙인데 불과 이제 한 3주 됐나요? 3주 전 가서 보니까 다녀오신 분들도 많이 계시겠죠. 그 큰 성전을 짓고 그 많은 핍박과 그 힘든 신앙을 지켜낸 그 모습은 다 사라져버리고 그다음 세대가 방황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과연 저들의 다음 세대는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봤다. 마틴 루터의 후예들은 어디 있는가? 존 칼빈의 찌빈 글리의 후예들은 어디 있는가? 반면에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이 문제지만 유대민족은 보니까요. 조상 대대로 여러분들이 하는 것처럼 4대가 함께 토요일 날, 예배드리고 주일을 준비하는 기도회를 하는데, 4대를 뛰어넘는, 그렇죠? 30, 40, 50, 그 조상을 거슬러서 올라가고 올라가다 보면 신약의 인물이 나오고, 구약의 인물이 나오고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도 이제는 이와 같은 영성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성도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도전의 말씀이죠.
 
첫 번째는 인간에게는 멈추지 못하는 속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양심이다. 양심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주셔서 스스로 안다. 아 이거 잘못됐구나! 이거 잘못된 생각이구나! 잘못된 말이구나! 잘못된 행동이구나! 문제는요.
 
- 멈추지를 못한다는 것이 문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시야 라고 하는 왕은 모든 남 유다 왕들 가운데 그 이전에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모든 북이스라엘 왕들 가운데서도 유일하게 하나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던 사람이다. 이유가 뭔가 오늘 본문 2절에 보니까 요시아 왕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한 삶을 살았다. 우리 본문 2절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열왕기하 22:2,
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아멘. 사실 요시아의 할아버지 므낫세, 그 아버지 아몬 왕 또 그 아들, 여호 아하스라는 왕도 다 하나님께 범죄를 했다. 뿐만이 아니다. 열왕기하 상하, 역대 상하 역사서를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오는 모든 왕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다. 그 성경에 보니까 그가 열조가 행하였던 대로 야외 앞에 악을 행하였다. 악을 행하였다. 이런 말씀이 계속 나오죠. 왕이 되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꼭 왕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보면 돈이 생겼다. 권력이 생겼다. 명예가 생겼다. 위치가 올라갔다. 그럼 우리 안에 욕심이 생기게 된다. 그 욕심 때문에 한쪽으로 확 치우치게 되는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요시야 왕은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어느 법정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판사가 피고에게 질문을 한다. 진주 목걸이를 훔치다가 붙잡혀온 피고인데 판사가 이 피고에게 묻는다. ‘왜 당신은 금방에서 진주 목걸이를 훔쳤습니까?’ 이에 피고가 대답을 한다. ‘! 제가요? 아침에 진주 목걸이 앞을 지나가는데 그 앞에 뭐라고 써있는가? ’이 놀라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그래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진주 목걸이를 취했다가 이렇게 붙잡혀 왔다.
 
여러분, 욕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스스로 멈추지 못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야고보서 115절에 보니까 욕심이 은퇴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을 한다.
*야고보서 1:15,
15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에게 멈추지 못하는 죄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죠. 죄는 강한 것이다. 누가 나에게 죄를 줘서가 아니라, 아담 이후가 타락한 이후에 우리 모두가 죄 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서부터 이 죄 성이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는데 그 힘이 보통이 아니다. 권력도 주어지면 놓을 줄을 모른다. 정욕이다, 쾌락이다, 불륜이다, 죄를 지으면서 멈추지를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고린도전서 927절에 보니까 사도 바울도 이런 고백을 한다.
 
*고린도전서 9:27,
27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면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의 선교회를 감당한다고 하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까 봐, 그 죄의 유혹에 사로잡혀서 멈추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면서 항상 기억할 것은 주요 나로 하여금 멈출 줄 아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두 번째이다. 우리 속성 가운데 멈추지 못하는 속성과 함께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좌로 치우치거나 우로 치우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II. 두 번째는 좌로 치우치거나 우로 치우치는 속성.
-모든 사람이 좌에서 좌로 가는 게 아니다. 우해서 우로 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좌측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우측으로 끌려간다. 문제는요 좌가 됐든 우주가 됐든,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친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지 않습니까? 성격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고 어떤 사람이 이걸 좋아하는데 저기서는 싫어한다. 저것은 좋아하는데 이것은 너무 싫어한다. 모두에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는요. 이것이 됐든 저것이 됐든, 한쪽으로 너무 심하게 기울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정치도 그렇고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제가 순복은 교단이지만 너무 비성경적으로 신비주의에 빠지게 되면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까지도 쫓아다니면서 신령한 척하는 거, 그게 문제이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 말씀을 붙잡는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않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아예 자유주의에 빠져서 하나님까지 거부하는 그쪽으로 확 치우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요. 우리 성향이 한쪽으로 확 치우칠 수 있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한쪽으로 심하게 치우치는 것을 항상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잘 아는 이삭과 리브가, 쌍둥이 아들을 낳지 않습니까? 에서와 야곱인데 아버지 이삭은 어떻게 된 것인지 형 이삭만 편애를 한다. 어머니 리브가는요. 동생 야곱만 사랑을 한다. 결국에는 그 두 부모가 한 아들만 편애하다가 한쪽으로 확 치우친 결과 그 형제가 원수처럼 지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이 새벽에 끼운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 앞에 기도하실 때, “하나님, 제가 죄에 대하여 멈출 수 있게 하여 주옵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중요시 여겼기에 모세 이후의 리더십을 부여받은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을 하셨죠? 여호수아서 17절에 보시면
 
*여호수아서 1:7,
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내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할렐루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러면 어디를 가든지 형통할 것이다. 무엇을 하든지 형통하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셨다. 이유는 뭡니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유일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우리 병원 가면 저와 여러분들이 죄에 대해서 멈추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하는 이 속상을 잠잠케 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번 따라 하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III.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말씀을 듣자. 다함으로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 가운데 종로를 걸어가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1장 여호수아 18절에는 이런 말씀을 주셨어요. 우리 여호수아 18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다.
 
*여호수아 1:8,
8 이 율법 책을 내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지하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리하면 내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내가 형통하리라.
-아멘. 요시야 왕은 이 말씀을 붙잡은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8살에 왕이 되었다고 오늘 성경에 말씀을 한다. 8살에 왕이 되어서 18살 되던 해, 성전을 수리하기 시작을 한다. 그리고 서기관이었던 사반을 통해서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보내는데 3절 이하에 보면 그 할아버지 때부터 무너진 성전을 수비하다가 사라져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 책을 발견하는 것이죠. 그것을 발견한 서기관 사반이 요시야 왕에게 와서, 그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는 내용이 10절에 나오는데 10절에 보시면
 
*여호수아 1:10,
10 또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제사장 기아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중요한 것은 요시야 왕이 그 잃어버렸던 성경, 잊혀졌던 성경을 발견해서 서기관 사방이 읽어주었을 때 그 들은 말씀을 듣고 요시야 왕이 한 것이 뭔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하여서 그 말씀을 붙잡고 그대로 행하면 형통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 그대로 하나님 약속의 말씀대로 실천을 하기 시작한다. 우리 13절 말씀은 같이 한 번 읽어보실까요? 13절 같이 읽는다.
 
*여호수아 1:13,
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이 책에 우리를 위해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그러면서 그 말씀에 기록된 그대로 행하기 시작하는데 성경에 보니까 모든 백성들을 불러놓고 명령하기를 모든 바울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그릇들을 불사르라. 명령을 하고, 전국의 산당들에서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해달별과 하늘의 모든 별들을 분양하던 자들을 폐하고, 성전 안에 모든 우상들을 불살라서 빻아 가루를 만들어 평민들의 묘지에 다 하나님 말씀 그대로 요시야 왕이 실천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한 요시야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는가?
오늘 이 새벽에 하나님 말씀 붙잡고, 주여, 내가 이 말씀 붙잡고 멈출 줄 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정말 형통하고 평탄한 삶 살기를 원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다. 생각하시고 우리 25절 말씀 같이 한번 크게 읽어보자.
 
*열왕기하 23:25,
25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야 내 말씀 이대로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실천하고 순종한 왕은 요시야 왕밖에 없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과연 약속하신 그 말씀 그대로 요시야 왕을 축복해 주시고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시고 형통하게 하신 것을 그렇다면 이 어린 왕이 어떻게 이 놀라운 결단을 할 수 있었을까? 중요한 메시지인데요.
 
첫 번째는 그가 어려서 왕이 됐는데 남 유다가 흥하고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요시야 왕은 어려서부터 이 무너진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다.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할아버지, 그 아버지 때 망하고 다 무너진 그 모든 남 유다를 하나님께서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한번 보실까요? 7절에 보시면 18, 18살 되던 해에 성전 수리하러 나갔는데 이런 내용이 나와요. 7절 말씀입니다.
 
*열왕기하 22:7,
7그러나 저희 손에 붙인 은을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함이었더라.
-무슨 말씀인가? 성전 짓기 위해서 사람들이 은을 가지고 왔는데, 그걸 그냥 감동하는 자들에게 가져다주어라. 그리고 계수하지 말아라. 이유는 뭐예요? 너무 정직하기 때문에 회개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 할아버지 때부터 영적으로 우상숭배하고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제약된 길을 살았던 유다 민족 가운데 일어날 수 있었는가? 8살 때부터 18살 성전 수리 시작하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요시야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것이다. 그 하나님이 역사하심이 그 완악했던 남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주시는 것이다. 그 마음들이 부드러워지게 하는 것이다. 정직한 자가 세워지게 하는 것이다. 성전 지을 마음을 주실 뿐만 아니라 성전 건축 위해서 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자들이 생겨지게 하셨다. 우리가 항상 신앙 생활할 때 예배를 강조하지 않습니까? 예배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4대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함께 한 번도 아니고 매주 마다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할 때, 생수 되시는 예수님의 성령이 생수처럼 여러분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 가운데 운행하시면서 여러분들의 가정을 지켜주실 줄 믿는다. 교회를 지켜주실 줄로 믿는다. 나라를 붙잡아주실 줄로 믿는다. 8살이면 초등학교 나이지 않습니까? 어린아이가 됐든 노인이 됐든 누구라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요시야 왕처럼 예배드리며 기도할 때, 생수의 강되시는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역사해 주시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치유가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부흥이 일어나도록 축복해 주시는 줄로 믿는다. 그렇게 성전에 나가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지휘했던 요시야 왕이다. 그러다가 성전 수리해야겠다. 10년 뒤에 18살 되던 해 성전 수리를 시작하는데 세상에 성전 수리를 하다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 할아버지 아버지 때, 다 믿는 자들을 멸시하고 하나 된 말씀을 불태워버렸던 그 성경책이 성전하면서 발견이 돼요. 8절 말씀 한번 읽어보시면 8이다.
 
*열왕기하 22:8
8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 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아멘. 놀라운 일이다. 사라진 책이에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감춰두셨다가 성전 수리가 시작되는 그때에 발견되게 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이 주신 두 가지 놀라운 보물이 있지 않습니까? 그 하나가 성전이다. 성전은 사람의 죄를 씻어내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세상 어느 곳에도 우리의 죄를 씻어낼 장소는 없죠. 그런데 유일한 장소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피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다 씻어지지 않습니까? 죄로 타락한 양심이 치료되고 회복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 중에 값비싼 보물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이 주시는 깨끗한 양심인 줄로 믿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죄 없으신 예수님의 보회를 의지하여서 천부여 의지하여 주 앞에 나오니 죄 없으신 예수님의 피로 나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옵소서.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럴 때 요한일서 19절에 말씀한다.
 
*요한일서 1:9,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뿐만 아니다. 그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높이 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보시는 것이다. 회개한 양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해 주신다. 히스기아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얼굴을 벽으로 향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네 기도를 들었다. 생명을 연장시켜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성전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거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저들이 가졌던 아주 귀한 보물 중에 하나가 뭔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책이지 않습니까? 성경책은요. 보물 지도와도 같다. 보물 지도는 아무리 오래되어도 그 가치가 손상되는 법이 없어요. 지금도 보물 지도가 있다고 하면 그 보물 지도 따라가느냐 하면 감춰진 금은보화가, 보석이 여러분 발견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하나님의 복은요. 우리 눈에 보이는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의 복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복은 한 번 따라 하실까요?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다.’ 그 복이 뭔가 그 말씀을 통하여서 내가 있어야 할 위치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서 복 줄자를 찾고 계신다. 복을 받으려면 복 받을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위치에 있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복을 구하고 복을 따라다녀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강도가 강도 짓을 하려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으실 수가 있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붙잡고 그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께서는요. 저와 여러분들이 있어야 할 위치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가장 먼저 발견되는 것이 뭐예요? 내 교만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것이다. 감사하지 못한 것을 보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꾀 따라서 세상 사람들을 따라서 살았던 것을 보게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그 축복의 자리로부터 멀어졌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속상한 것이죠.
 
아 내가 마귀에게 속았구나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있어야 할 자리는 이곳이다 말씀을 하셨구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로 삼아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회개하지 못하고 씻어내지 못하고, 있어야 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엉뚱한 자리에서 마귀에게 죄에게 종 노릇하면서 살았구먼! 그걸 깨닫게 되면요. 억울하고 원통해서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울부짖어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있어야 될 자리를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제가 있어 엘 자리를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축복 나와 나의 가정 가운데 아니 우리 자손 가운데도 허락하여 주소서. 하나님의 선교 사명 잘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오늘 성경에 보니까 서기관 사반이 와서 요시야 왕에게 잊혀졌던 그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말씀대로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11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을 한다.
 
*열왕기하 22:11,
11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그의 옷을 찢으니라. 왜 우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이 말씀을 붙잡지 못했을까? 이 말씀대로 살지 못했을까? 왜 남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되는 자리에 있지 못했을까? 탄식하면서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부르짖어 기도한 것이죠. 그 후에 요시아 왕이 하늘이 뭔가 제사장들을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기도하도록 부탁을 한 그리고 여선지자 훌다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도록 하죠. 하나님께서는 여선지자 훌다를 통하여서 두 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두 가지를 말씀을 하시는데, 첫 번째가 유다 왕과 백성들이 우상 숭배한 것, 그 죄가 크다는 것이다.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죠. 요시야 왕이 그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 숭배했던 죄를 결국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훈련받은 이후에야 완전히 새로운 민족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뭔가 요시야 왕 때에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심판을 연기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것을 이미 아셨어요. 그러면서도 두 가지 희망을 주신다. 옷을 찢고 통곡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그 통곡하고 그 기도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요시야 왕 때는 남 유다를 망하지 않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라 민족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겠다. 그리고 정말로 한 세대 30년 동안, 그 나이 39살이 될 동안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붙잡아주시는 것을 본다. 결론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리가 옷을 찢고 통곡하며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내신 그 보유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회개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저 여러분들의 양심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수의 강이 넘쳐나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멈출 줄 알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하나님 뜻 가운데 정모를 걷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삶을 살 하나님이 요시야를 축복해 주시고 그 길을 평탄하게 하시고 그 세대 동안 그 나라와 그 민족을, 그 인생을 책임져주시고 형통케 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도 이 말씀 붙잡고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후손들과 이 나라 민족을 축복해 주실 줄로 믿는다. 형통하게 하실 줄로 믿는다.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을 우리 잘하는 시편 11절로 2절까지 말씀 같이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시편 1:1~2,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한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
2 오직 야외 율법을 증거 하여 그의 율법을 지하로 묵상하는 자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 나와서 기도하며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자, 그 말씀을 붙잡고 있어야 위치를 알아, 하나님 뜻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형통하게 하시는가? 평탄한 삶을 살게 하시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시고, 베드로전서 29절이다.
 
*베드로전서 2:9,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거기서 끝나면 안 돼요.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니 이는 어두움 가운데 있던 저와 여러분들을 귀한 빛 가운데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신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의 선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악 가운데 죽어가는 많은 아까 유럽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대한민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가 예수 믿는다고 카톨릭 포함해서 20%인데 그 수가 점점 줄고 있다. 다음 세대는요 미전도 종족이 되어버렸다. 3%, 3%도 어린아이를 키우는 30, 40대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여러분들의 자녀의 자녀 세대, 어린 자녀들의 세대는요. 예수 믿는다고 손 들어봐라 줄 세워놓고 물어보면 손드는 아이가 100명 중에 한 명이다. 1센트밖에 안 되는 이 대한민국 가운데 오늘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셔서, 토요일마다 새벽을 깨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말씀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고 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여러분들의 길이 평탄하게 되기를 원하시고, 형통케 하는 삶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여러분, 그 복을 받아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 주신 말씀 붙잡고 죄에 대하여 멈출 줄 아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마시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가정 4대뿐만 아니라, 5, 6, 10대 계속해서 자자손손이 천대까지 하나님의 복을 받는,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잘 감당하는 가문이 되시기를 바라고, 우리 사랑의 교회 까닭에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한 번 일어나 빛을 바라고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의 손결을 감당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놀라고 귀한 일들이 다시 한 번 재연되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말씀 붙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성도의 삶을 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교 사명 잘 감당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요시야 왕과 같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기를 원하고, 말씀 붙잡는 자로, 말씀에 순종하여 나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이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다가 복을 받아 일어나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선교 사명 감당하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부족하고 연약하나 나를 제사장으로, 만민에게 그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자로, 선교 적 삶을 살아가는 자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요시야는 아주 어렸을 때, 즉 8세부터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영국에도 이런 어린아이가 왕이 된 적이 있는데, 그는 에드워드 6세이다. 어린 요시야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나쁜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곧 그들의 실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악한 행위에서 충고를 받게 하셨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보자. 하나님께서는 아비인 므낫세는 무시하셔서 자기 죄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버려두시고, 그의 아들인 요시야는 선택받은 그릇으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상황이 너무 곤란하기 때문에 하지 못하실 일은 없다. 그의 좌우편이 모두 실수로 가득 차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요시야를 지켜 바른 길을 가게 하셨다. 따라서 그는 미신 속으로도 오만함 속으로도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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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7월 15일)-여름 토요성령집회.
제목: “생수의 강을 체험하라”
말씀: 요한복음 7:37-3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강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이강일 목사님(구립서초요양센터 원목)
ㅡㅡㅡㅡㅡ
요한복음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아멘. 이 시간은 사랑의 교회 협동목사이시고 구립서초요양병원 원목으로 섬기시는 이강일 목사님께서 “생수의 강을 체험하라.”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선포해 주실 텐데요 우리 이강일 목사님 보내주신
 
▶이강일 목사님-“생수의 강을 체험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폭우를 일시 멈추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처럼 인생의 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완전히 포고를 멈춰주시고 사막과 강을 걷는 자가 있다면 생수의 강을 체험하는 이아침 되기를 소원합니다. 3년 6개월 전인 2020년 1월에 ‘구립서초 요양센터’를 우리 사람에 의해서 위탁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재 200여 분의 어르신들이 존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협력하고 있고요. 하나님의 은혜와 교회의 배려 그걸 오정현 담임 목사님의 말씀으로 저는 원목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매일 아침 200여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기도해 드리고, 같이 울어드리고, 웃어드리고, 필요한 것 급해 드리고, 그리고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생수의 강을 체험하라 7장 38절에 보면 우리가 조금 몇 가지 질문해야 될 본문이 나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의 이름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여기서 한글을 잘 모르는 분들에게는 좀 어렵다. 그 배가 어느 배일까? 우리 세 가지 배가 있습니다. 타는 배가 있고, 먹는 배가 있고 이 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학자는 저 배를 좀 불편하게 해석했더라고요. 그리스도의 배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스도의 배, 제가 동의를 쉽게 하기는 힘들 것 같고요.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그 마음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오늘 이 아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인 줄 믿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이아침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저기 성경의 말씀대로 도대체 성경 어디서 저런 말씀을 하셨냐는 거죠. 이사야 43장 20절에 보니까
 
노란색을 좀 집중해서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사야 43:20,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들짐승 곧 승냥이와 여기 있는 우리 초등학생들에게 승냥이 물어보면 저게 승냥인가 성량인가 잘 모를 겁니다. 승냥이는 이리와 늑대의 중간인데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1위로 번역을 합니다. 타조와 나를 존경할 것은 광야의 물 사막에 강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44장 3절에는
 
*이사야 44:3,
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노란색을 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늘 광야의 물 그다음에 목마른 지역의 물 사막의 감 마른 땅의 신해 오늘 이 내용들이 나옵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하면 불이라는 이야기로 정의가 되겠죠. 성경에는 두 가지 물이 있습니다.
▷사람이 손 된 물-우물 웅덩이
▷사람이 손대지 않는 물-비, 이슬, 시내, 강, 샘.
-사람이 손댄 물은 우물과 웅덩이를 두고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운물 그러면은 일단 좀 불편합니다. 성경에서 우물이 많이 언급되는 이삭인데요. 이삭은 우물을 파고 또 옮기고 또 옮깁니다. 당시의 우물은 역사학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200m 정도까지 깊었답니다. 어느 정도 깊은지는 이삭이 우물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큰 우물을 나았는데 옮겼던 것 그래서 물웅덩이 이 단어가 나오면 좀 불편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에레미야 2장 13절에 나온 말씀인데요.
 
*예레미야 2:13,
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내 백성이 이 두 가지 악을 행했다. 두 가지 악이 뭡니까?
첫 번째는 생수에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
두 번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저 웅덩이 웅덩이가 터진 웅덩이랍니다.
 
여러분,
웅덩이 웅덩이가 뭐냐 하면 우물은 물을 모으는 곳이고요. 물을 구하는 것이고 웅덩이는 물을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웅덩이는 이 당시에 보면 돌을 깎아서 돌을 파서 만드는 것이 운동입니다. 근데 돌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천간이 있지 않습니까? 거기다 시멘트를 발랐답니다. 지금도 시멘트가 그 당시도 그런 게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 터진 웅덩이 즉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악이 뭐냐 그들은 생수의 거인 나를 버린 것, 그리고 터진 운동이 오늘 이 본문은 뭘 이야기하느냐 그들이 고난과 수고를 의미합니다. 고난과 수고 여러분 웅덩이 우물 고난과 수고입니다. 여기까지 한 번 정리해 보십시다. 성경에 물이 있습니다. 물이 있는데, 이 물은 물 오면 곧 물은 생명과 같았습니다. 물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 사람이 손댄 우물과 웅덩이가 있었고요. 그리고 사람이 손대지 않은 물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비와 이슬과 신의 강, 샘. 이런 물들은 사람이 손대지 않은 물들입니다. 사람이 손댄 이 우물과 웅덩이에 놓을 때는 반드시 따라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가 뭐냐? 고난과 수고입니다. 고난과 수고 그리고 비, 이슬, 시내, 강, 샘. 그것을 따라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면 하나님의 은혜를 두고 이야기도 합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 물은 곧 생명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금기 때, 물을 잘 마시기 위해서는 우기 때, 흐르는 물 지금으로 말하면 10월부터 한 3월이 우기인데요. 우리나라 말로 하면은 그때 물을 잘 보관해서 금기 때, 이 웅덩이에서 물을 마셔야 했었습니다. 웅덩이는 바위를 깨서 만드는 것이 웅덩이인데요. 이 당시에도 비는 굉장히 중요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 강물 이슬, 샘, 이런 이야기들은 내가 고생과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유지하도록 주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물 이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서 습니다. 이 본문을 잘 설명하는 것이 요한복음 4장에 우리가 아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4장 11절에
 
*요한복음 4:11,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습니까? 두 단어가 나오네요. 우물 그리고 생수, 이 여인 함부로 돌 던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남편이 다섯이 아니고 지금까지 말하면 여섯 명이죠. 이 여인을 부도덕한 여인으로 안 몰았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이 여인에 대한 해석이 좀 달라지는 면도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알리시겠지만 계대의 결혼법이라고 좀 이 문화를 보면 좀 달리 해석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여인에게는 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그는 우물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얻기를 했는데 우물에서 물을 얻는 것보다는 생수를 원했습니다. 말씀 한번 정리해 볼까요? 이 여인은 그냥 오늘 우물과 생수가 나오는데 이 우물 인생의 고난이었습니다. 생수는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이 아침에 여기 나으신 여러분, 인생의 고난 가운데 인생의 폭우 가운데, 인생의 어려운 가운데 계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오늘 이 여인, 이 여인이 인생의 고난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옵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여인은 남편이 지금까지 여섯이나 바뀌었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아침 누구에게도 내 사정을 내어놓지 못하고 고민하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 인생을 고난 가운데, 이 여인처럼 고난 가운데 어려움이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 은혜가 뭐냐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 여러 정의를 할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인생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생수라 하면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생수 즉 살아있는 물입니다. 생수 즉 살릴 수 있는 물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고통이 있죠. 우리 가운데 고난이 있죠. 여러분 성경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물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하박국 2장 14절에 보면요 이는
 
*하박국 2:14
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하박국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바국에 처음 나온 말씀이 아니라 이사야 11장에 먼저 와 있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는 무리를 바라는 분과 똑같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할 것이니라. 여러분 한 번 정도 혹시 고민해보지 않으셨습니까?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도대체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의미가 뭔지 물은 뭐고, 바다는 뭡니까? 아 바다, 그래 바다는 짠 게 바다지! 물은요? 여러분 물과 바다를 덮는다는 것 여러분 고민 한번 해보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서는 갈릴리 호수를 바다라고 그랬습니까? 호수라고 그랬습니까? 갈릴리 바다는 분명히 호수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호수라는 단어를 한 번 썼고요. 바다를 일곱 번 쓰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바다를 6번 썼고 똑같은 곳을 호수를 두 번, 누가 복음에서 호수를 3번 바다를 10번, 누가복음에서는 호수를 5번 바다를 7번 썼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는다. 어느 학자는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갈릴리 사람들이 워낙 시골 사람들이라서 바다를 구경하지 못해가지고 워낙 넓어서 바다로 했다. 쉽게 동의를 못하게 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을 조금 자주 방문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너무 놀랐던 게 제가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이 틀리더라고요. 그래서 이스라엘 성지 학습을 좀 많이 했는데 그때 설명해 준 것 듣고 너무너무 감동스러워서 여러분께 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정말 그 갈릴리가 호수인 줄 모르고 바다를 그랬다고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바다, 그러면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바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굉장히 두려웠었습니다. 그래서 성인에서 바다, 고난, 두려움, 공포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물은 뭡니까? 물은 은혜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 뜻은 우리의 인생 고난 우리 인생 어려움 그 바다를 하나님의 은혜가 덮어주시는 것처럼 여호와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한다. 오늘 이 아침인생의 바다 위에 계신 여러분 인생의 공포 가운데 계신 분이 계십니까? 생수의 강, 은혜의 물이 공포의 바다를 덮어주시는 이아침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이렇게 질문하겠죠? 당신이 무슨 근거에서 그런 말씀을 하냐? 그래요. 근거를 대드리겠습니다. 욥기 7장 12절에
 
*욥기 7:12,
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욥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 내가 바다입니까? 내가 바다 괴물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괴롭게 하십니까? 지난 간밤에 한숨도 못 주무시고 오신 분이 계실 줄 압니다. 자녀 때문에, 사업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마음 아파 계실 줄 압니다. 성경에서 바다, 그러면 일단은 불편하고 공포스러운 것 입니다. 하박국 3장 15절은
 
*하박국 3:15,
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큰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주께서 성경에서 말 그러면 전쟁 또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결하시는 그런 은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말은 전쟁을 두고도 이야기합니다.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오늘 이 바다 이 건물의 파도는 누가 해결할 수 있느냐? 우리 주님께서 말을 타시고 우리 앞에 있는 큰 파도 우리 앞에 있는 큰 물결 해결해 줄 때만 이것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에
 
*마태복음 8:26,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아주 잔잔하게 되었다. 그때 이 사실을 본 제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왜 깜짝 놀라느냐? 그 사람들이 27절 놀랍게 여겨 이르되 네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여러분 바람과 바다를 순종했다. 공포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샬롬! 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 인생에 우리의 앞날에 샬롬의 은혜가 넘치는 이아침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이기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불안과 사람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 결과가 샬롬입니다. 여러분, 내 앞에 불안이 있어요. 내 앞에 두려움이 있어요. 내 앞에 부러움 내 앞에 두려움. 내 앞에 있는 불안. 어떻게 할 수 없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뇌출혈로 내출혈이 뭔지 아시죠? 3급 장애자 된 목사 사모님이 계십니다. 아버님이 사모의 아버지가 목사님이에요. 오빠 내가 이 있는데 3명이 목사예요. 목사 집안이 그래도 뭐 큰 죄는 안 지었겠다. 그렇죠? 그런데 이 목사 사무가 이민교회 유학생 중심의 목회를 하다 보니까, 굉장히 스트레스가 많았나 봅니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내 출혈이 와서 의식 불명의 상태로 옵니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사는 오늘을 넘지 못하겠다. 오늘을 넘지 못했다. 그게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모는 지금 살아서 매주 이곳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사모가 제 아내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목사인 저에게도 아버지가 목사인 그 사람에게도, 오빠가 4명인데 3명이 목사인 그 사모에게도 불안이 있고, 공포가 있고, 의사가 2주 동안 늘 하루하루 하루를 못 넘기겠다고 그랬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있어요. 어려움이 있어요. 좌절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안 바다를 덮는 것이 뭐냐 그게 바로 물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저는 ‘성령 충만’ 이라고 정의를 하고 싶습니다. 성령 충만을 정의를 내리라 그러면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겁니다. 저는 성령 충만을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시대를 받는 삶, 오늘 이 새벽에 놓으신 여러분 대단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이 나오시든 안 나으시든 그만이지만, 저는 꼭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오늘 설교니까 어젯밤부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실 수만 있다면 잠시만 폭우를 멈춰주시고 잠시만 비가 와야죠. 농사를 위해서 여러분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바다가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바다가 없어진다는 단어도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에
 
*요한계시록 21:1,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다른 사람을 모르겠어요.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대요. 옛것은 다 지나갔대요. 그런데 받아도 다시 잊지 않더라. 고통이 다시없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 고난과 고통과 자존심이 있습니다. 받아도 다시 잊지 않는데 성경에 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바다가 하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5장 2절에 보니까
 
*요한계시록 15:2,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다. 내가 보니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예수를 이기고 벗어난 지는 유리 바닷가에 섰다. 유리 바다 도대체 유리 바다는 또 뭡니까? 그래요 우리 아이들 수족관에 갑니다. 상어가 옵니다. 하나도 놀라지 않아요. 왜요? 거기 유리가 있으니까요. 여러분 고난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좌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는 게 우리의 유리 바다가 되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유리 바다입니다. 유리를 투명하여 저기 다 다 보입니다. 그래요 오늘 예배 마치고 집에 가면 그 고난 여전히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 존재, 성령이 충만할 때요 성령이 지배를 받을 때, 바다가 유리 바다가 되는 그 역사를 체험하는 이아침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참 모진 인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41장 9절 보니까,
 
*이사야 41:9,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었다. 땅 모퉁이에서 너 부른다. 이걸 잘 이해를 못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저는 100% 이해합니다. 우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저를 늘 놀릴 때 저를 놀릴 때입니다. 제가 남자주 사랑의 교회에서부터 목사님 모셨으니까요. 이 강이 너 부산 촌놈이 본인은 고향이 어디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부산 촌놈이 그런데 저는 부산에서도 진짜 땅 끝에 살았습니다. 부산의 땅 끝이 경계선에 저는 철거민의 아들입니다. 땅 끝인데 아마 오 목사님이 그걸 아시나 봐요. 땅 끝이라는 땅 목털이라는 것, 본인의 고향을 여러분 더 잘 아실 겁니다. 땅 끝, 땅 못 중에서 나를 불렀다. 저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한마디로 너 출세했다 이야기입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안 해도 되겠죠. 그래요 저 출세했습니다. 정말 출세했습니다. 땅 끝, 딱 모퉁이, 이야기는 뭡니까? 인생의 끝자락에서 여러분, 아마 젊은이들은 잘 모를 거예요. 어르신들은 철거민이라는 단어를 아실 겁니다. 옛날에 철거할 때는요 군인 차 군대 차가 집을 다 실어가지고 철거를 했어요. 제가 그 차를 타고 간 게 7살인데 아직도 제 머리에 아주 진하게 남아 있어요. 그 땅 목통이, 그 가난한 데에서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주셔서 이 자리에 세우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41장 9절에 배경은 그들이 이렇게 나와 있죠 내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땅 모통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땅 끝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인생에 자주 중에 계신 분 계십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종이야, 내가 너를 택하고 실어버리지 아니하여 너 이게 이사야 41장 9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를 잘 기억 안 하고 그다음 구절만 우리는 기억하려고 그럽니다. 10절입니다.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사야 41:10,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아멘. 땅 모통이에 계신 분 계십니까? 지금 땅 끝에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평안한 사람에게 있는 소리 아니에요 10절 내가 너를 굳세게 할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어른 오른손이 너를 붙들어주시리라.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의 배경은 원래 이 말씀에도 보면 안 돼요. 40장 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0:1,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오늘 말씀을 오 목사님한테 부탁을 받고 어떤 말씀을 전할까, 고민하다가 목사님께서 네가 최고 잘하는 설교를 해라. 그런데 최고 잘하는 설교를 하려고 보니까, 제가 요양센터에 있다 보니까 어르신들 손 한번 잡아드리는 게 그렇게 그분들이 좋아하세요. 제가 아침마다 어르신들 찾아뵙거든요. 제 손 잡고 우셔요. 아들도 이런 아들이 없대요. 왜요? 어떤 아들이 매일 찾아갑니까? 저는 매일 찾아가잖아요. 저는 이아침 여러분을 위로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지금 고난의 바다 위에 있습니까? 땅 모퉁이에 서 계십니까? 자녀 때문에 눈물 흘리고 계십니까? 40장 1절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 문제 있지?
 
*이사야 40:15,17,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여러분 성경에서 열방 그러면 뭡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게 열방입니다. 그것 맞아 문제 있어 그러나 독이 한 방울이야 그러면서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구절 같이 한번 나누기 시작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7절입니다. 17절 같이 있습니다.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 아무것도 아니래요 아무것도, 문제가 있다니깐요. 어려움이 있어요.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언제요? 문제를 집중하면 문제의 시스 맞추면 우울증 걸려요. 문제에게 포커스 하면, 여러분 밤잠 못 자요. 저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하나 여러분에게 말씀해달라고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 신앙은 고개 돌리기입니다. 고개 돌리기, 문제의 문제를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 돌려서 주님께 우리 포커스를 맞추는 겁니다. 여러분 고개 돌리시오. 문제에 포크 하시면 밤잠 못 주무십니다. 문제 포커스 하면 인생이 괴롭습니다. 여기 장애자 가족 두신 분 계시죠? 저도 평생의 기도 제목 하나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우리 아내보다 하루 더 사는 것 3급 장애자를 둔 남편의 마음 여러분 아십니까? 아이들은 미국에 다 살고요. 제 꿈 중에 하나가 제가 아내보다 하루 더 사는 거예요. 우리 아내 장례 치르고 내가 가는 거에요.
 
오늘 이 아침 개로 분이 시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여러분 위로해드립니다. 저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그래서 밥 먹으러 가도 거의 제가 밥값을 냅니다. 그렇게 생겼나 봐요. 좋아요 뭐 그거 근데 저는 너무 가난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날 제가 부잣집에 입양을 받았습니다. 입양을 받아가지고 우리 아버지가 제게 부잣집에 입양이 돼서 네 마음대로 돈을 쓸 수는 없으나 필요할 때만 도와줄게. 필요할 때는 한 거 썼습니다. 그래서 돈이 없어서 일을 못 해본 적은 없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굉장히 부자신데 참 굉장히 인격적이라서 제 성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가고 우리 아버님 잘 아실 텐데요 성령 하씨, 를 쓰십니다. 존함은 나 자를 쓰시고 님자를 쓰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거는 제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서 8장 16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8:16,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저희 엄마는 저를 국수를 안 주고 밥도 줬다 하는데, 저는 밥 먹은 기억이 없어요. 어머님 밥 줬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한 중학교 1학년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돈 없어서 고민하지는 못했어요. 안 했습니다. 왜요? 하나님 아버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고민될 때마다 저는 이 말씀을 늘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이사야 4장 17절에,
 
*이사야 4:17,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다. 이아침 고민 있지요 고민 있지요 요한 계시록 15장 2절에 이런 말씀이 있죠
 
*요한 계시록 15:2,
2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금고를 가졌다. 어디 있었어요? 유리 바닷가에 서서 누가요? 이기고 벗은 자들이요. 오늘 이 아침 생명의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이기고 벗어나서 유리 바닷가에 있어서 찬송하는 이야 집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게 그냥 있는 이야기가 실제 이런 분이 계세요. 사도행전 16장 26절에
 
*사도행전 16:26,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에서 옥토가 움직였다. 물이 고다 열렸다. 사람의 맹인 것이 부서졌다. 여러분 오늘 바울과 신라는 억울하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언제요? 이에 갑자기, 이에 갑자기 움직였대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 남편의 마음이 이 아침 움직이는 이아침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혹시 이아침 결혼하시고 아직 태가 열리지 않는 자민이 계십니까? 결혼시켜서 기쁨의 시간을 오랫동안 누렸는데, 내 딸이 태가에 열리지 않는 가정이 있습니까? 우리 시어머님들 눈물로 잡을 수 있기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말씀 그대로 여러분에게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열려지는 은혜가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말씀 보니까 다 ‘벗어진지라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저희 아내가 가장 힘들 때는 링거만 한 열 뎃 개를 매고 있었어요. 매인 건 다 풀어지는 이 집에 여러분 묻고 있는, 맹인 것들이 풀어지는 이아침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언제요? 오늘 25절에 ‘한밤중에’ 저 한밤중은 영어로 미드나이트(midnight)입니다. 밤 12시입니다. 여러분 한밤중에는 잘 됩니다. 오늘 자지 않고 이아침에 오신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 기도할 때 움직이는 이아침 되기를 소원합니다. 뭐가 움직입니까? 뭐가 움직입니까? 우리 아들, 우리 자녀의 마음이 움직이는 이아침, 우리 남편의 마음이 움직이는 이아침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열려지기를 소원합니다. 뭘 열려집니까? 여기 우리 젊은 우리 청년들 계십니까? 직장의 문이 열리고, 학업의 문이 열리고, 막혔던 탐이 열리는 이아침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 여러분, 벗어지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빚 때문에 힘든 분 계십니까? 제 친구 목사님들 만나면 그래요 우리는 빚의 자녀라고, 제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알아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빚의 자녀 무슨 말인지 아시죠? 빚의 자녀, 빛이 아니고, 빚의 자녀, 이아침 대출의 문제로 정말 무척 힘든 분, 제가 많이 봅니다. “하나님 이 아침 부채로부터, 빚으로부터 그리고 링거로부터 벗어지는 이아침 되는 그런 아침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찬송을 참 좋아합니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왜 두 손을 들어야 됩니까? 왜 두 손을 들어야 됩니까? 그래요 두 손 들면 내 손에 있는 건 내려놔야 됩니다. 손에 무엇을 잡고 있으면 새로운 걸 잡을 수가 없어요.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그 다시 오실 왕이 아침 저와 여러분이 오셔서 우리의 묵은 짐을 맡아주신 이아침, 우리 바다를 덮은 같이 우리의 권한을 덮어주는 이아침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직 저만이 나를 낮추어주셔서 바다가 유리 바다가 되어 움직이고 열리고 벗으시는 거 같이, 이제 우리도 다 같이 두 손 들고 하면 찬양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요약
고난과 고통의 바다가 유리바다가 되어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우리 고난을 엄히 물로 덮어주시며, 우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떠나가고 메인 것이 풀어지고 막힌 것이 열려지는 기적을 맛보며,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 움직이고 열려지고 벗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적의 구경꾼이 아니라,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소원하며 한나 처럼 기도를 드리는 자녀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며 내 앞에 있는 고난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믿음으로 선포하고 샬롬의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수의 강을 체험하며 기쁨의 자녀로 나아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은 주님의 은혜를 받기를 소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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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7월 8일)
제목: "목마름, 채움, 흘러넘침"
말씀: 요한복음 4:13-14, 27-30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박영은 목사님(시드니 중앙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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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4:13-14, 27-30,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27~30,
27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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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훈 목사님(시드니 중앙장로교회 담임)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로 만나게 하시고 또한 말씀의 교재로 함께하도록 우리 박영은 목사님,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박수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강단이 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게 떠는 강단인데 오늘 아난 주심의 본당에 오랜만에 이렇게 서다 보니까 떨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 부족한 거 세워주셔서 하나님 말씀 기억케 하실 때, 우리 여름 토요비전새벽예배에, 성령집회 첫날 아버지 하나님께서 베풀만한 은혜와 자비를 충만히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인생의 완전하고 완벽한 순간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살만하다고, 완전하다고 말하는 순간에 우리는 새털같이 가벼운 인생임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쩌면 영적인 목마름이 항상 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 갈증의 현상은 예수님 잘 믿으려 하면 할수록 더 깊어질 수도 있는 것 같아요. 2023년 여름 토요 성령 집회의 첫째 날에 어쩌면 이 갈증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또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께 폭포수와 같은 생수의 강의 은혜를 부어주실 주님을 믿고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미 저는 오정현 목사님 주일 강단을 통해서 선포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받은 은혜를 사실 제가 좀 반복하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 받은바 은혜를 한번 되짚어보면서 또 망각의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생수 강의 3 단계에 대해서 한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생수의 강을 어떻게 체험하느냐? 하나님 주시는 처음의 단계는 목마름 즉 비움의 단계인 것 같아요. 성도님들 중에는 그렇게 풍성하고 좋았던 과거의 은혜에 비해 현재 쪼그라들어버리는 이 내 영적 상황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이거 의아하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분들이 혹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님 은혜 받아서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사역에 더욱 힘을 쓰고 있는 성도님들의 삶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극도의 피로 현상을 겪는 성도님의 하소연을 가끔씩 들을 때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8,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믿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복음의 선포의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그 마음에 영접한 이후에도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고 하나님을 계속 기대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그 기대와 응답에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임재하지도 않으시고, 그렇게 그 마음에 저 상황, 그 마음의 어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현상을 오래도록 지속하면서 힘들어하시는 성도님들을 또 보게 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는 없지만은 하나님은 이 어려운 시간을 통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진정한 송도, 우리 자신들의 자아를 발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는 줄 믿습니다. 껍질을 한 겹씩 한 겹씩 벗겨내는 그런 작업은 상당히 우리에게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이렇게 이런 작업을 통하여 우리 안에 진짜 있는 우리의 리얼 팩트, 우리의 리얼 셀프, 우리의 진짜 중심을 발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가 있더라고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통해서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가 아니면 소망 없는 우리의 삶을 직접 목도하게 하여 주시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에게는 심이 절망하는 마음을 주시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11-12,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스나 바람 가운데 여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이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아는 그전의 사역을 통하여 익숙하던 하나님의 임재의 현상을 이미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익숙했던 여호와의 모습, 강한 바람이셨습니다. 땅이 흔들리는 지축을 흔드는 지진의 능력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거룩한 불의 놀라운 능력으로, 놀라운 임자로 그의 사역 가운데, 세상 가운데 나타나셨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오랜 기간 동안 나타나지 않으셨던 거예요.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나시며, 하나님은 이 엘리아에게 그러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목마르게 하시는 줄 모르겠습니다. 세밀한 음성으로 나타나시며 우리를 갈망하게 하십니다. 길을 세워야만 들릴 듯 말 듯 한 그런 메시지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순간 우리 안에 채워야 할 빈 공간을 정확하게 보게 하시는 은혜가 있는 것 같아요.

소천하신 이어령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던 거 기억합니다. 생명의 노래는 생명이 풍성할 때는 나오지 않습니다. 생명이 구발되어 갈 때 생명의 노래가 나옵니다. 아마 그분이 직접 경험했던 말을 옮겨 놓은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의미에서 꼭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해 보면 이 인생에 비워지는 듯한 순간을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게 되는 은혜를 받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때는 정말 하나님을 갈망하게 돼요.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갈망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되는 은혜를 받는 줄 믿습니다. 힘들면 하나님과 멀어질 것 같고, 하나님과 더 거리가 멀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물리적으로 눈에 보일 때는 어렵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심령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통하여 우리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 은혜의 기회를 통하여 생수의 강을 우리 모두에게 쏟아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때 더 큰 생명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을 주님은 바라보고 계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갈망하게 하시는 이 순간이 계시다고 하면, 이 순간이 우리에게 가장 복된 우리 인생의 한 순간이 될 수도 있음을 주님 앞에서 고백하고 믿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냥 찾아왔다가 이 토요, 이 성령 집회를 통하여, 이 첫날의 말씀의 은혜를 통하여, 이 은혜를 새롭게 주님 갈망하는 은혜로 지원하는 그런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비워지게 하시는 그런 순간을 통해서도 하나님만을 갈망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기로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는 주님은 비우시기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채우시는 주님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목마름의 현상을 우리는 보통 잘못 대처하는 경우들이 혹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실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실수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큰 죄악에 빠지는 경우도 있어요. 예레미야 2장 13절의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예레미야 2:18,
18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입니다. 첫째, 생수에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렸다. 암묵의 상황에서, 비움의 상황에서, 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는 상황까지 시험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둘째로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버린 대신에 항상 보면 무엇이든지 비워진 자리를 채우려고 하는 우리의 제약된 습성이 있거든요. 그런 습성 때문에 가두지도 못할 엉덩이를 스스로의 힘을 써가면서 파는 그런 죄악을 범하게 됐던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버리고 이건 안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거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였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을 갈망하면서 보내다가 시험에 빠지게 되고 스스로 엉덩이를 파고 하나님을 버리는 자리에까지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안에 눈에 보이는 생명의 생수의 그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담아보려고 이거라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웅덩이를 자기의 힘을 다하여 파서 이 정도 준비하면 문제없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도 되는 삶을 그렇게 유지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웅덩이는 결국 터져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힘으로 억지로 파서 만든 불 신앙적 운동이론은 절대 생명의 광수를 자기 뜻대로 보관할 수 없습니다. 저장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보고 계세요 우리가 어떤지, 우리 중심을 알고 계세요. 겉으로 아무리 엉덩이 그렇게 파도 잘 될 것 같아서 이 정도 하면 저장될 것 같아요.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만휼히 여김을 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 엉덩이는 결국 터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힘으로 열심히 억지로 퍼서 만든 그 불신앙적인 운동이론은 절대 하나님의 생수의 강수를 보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웅덩이에 둑을 터트려 버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보면 아무리 해본다고 열심히 해보고 난리를 치고 저도 왜 이 단어를 쓰는지 모르겠는데요. 아무리 열심히 하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상한 방향으로 상황들이 흘러가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 나 망가져 버릴 거예요. 정말 이렇게 하실 거예요. 정말 이러실 거면 저 할 수 없어요. 주님 나 망가져 버릴 거예요. 예 그런 말 안 하고 망가지면 되는데 얘를 그냥 망가져버릴 거예요. 주님께 이렇게 하소연하는 것인지 하나님께 경망스러운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속으로, 마음속으로 하나님 정말 방법이 없네요. 은근슬쩍 하나님 이기려 들려는 거예요. 모든 것의 주권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이 말로는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 안 하고 행동으로 그렇게 그토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들을 그렇게 표현하면서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살길을 위해서 하나님 상관없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 들어주시지 않았잖아요. 하나님 그러니까 내가 웅덩이 팔 거예요. 그 뒤에 보시지만 웅덩이도 내가 팔뿐만 아니라 그 정도까지는 안 돼도 물을 담을 수 있는 물동이라도 나는 준비할 거예요.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매진하여서 자기 스스로를 이렇게 자꾸 몰아붙입니다. 열심히 해보았지만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훨씬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일이 얼마나 잃고 얼마나 고된지 모릅니다. 꼭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듣는 이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보면,

*요한복음 4:14,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생수의 권원이신 예수님께 소망이 있다는 이 말씀, 예수님이 이 선포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 오늘 선물로 주어지는 이 새벽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수의 생수의 권인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고 전심으로 신뢰하게 되면은 어떤 현상이 우리 삶 가운데 생기기 시작합니까?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요한복음 앞에 4장의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를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28절의 말씀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요한복음 4:28,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도달했다 이런 식의 말씀이 있습니다. 생수를 확보하는 유일한 길, 더 웨이(The way)를 여자가 발견하게 됐던 거예요. 남편을 여섯이나 갈아치웠던 그 여자 다섯이나 갈아치웠던 이 여자가 마지막 여섯째 남편을 데리고 사는 이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생수를 확보하는 도우의 유일한 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방법들을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그 유일한 길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생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삶의 문제를 덮어버릴 수 있는 생명의 물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지 그 유일한 길을 알게 되니까 예수님을 만나게 되니까 유일한 생명에 덧붙여주니까 그 유일한 생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로 비우게 하시고, 여러 번 목마르게 하시는 것도 우리의 이 목마름에 빈 공간, 우리의 진짜 셀프, 우리의 진짜 존재를 발견하게 하시고 예수님으로만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생명의 길, 유일한 진리의 기를 다시 발견하게 하는 은혜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나쁜 게 아니더라고요. 해결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으면요? 초이스들이 여러 가지가 있으면 오히려 더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리고 일시적인 해결 방식은 나중에는 조금 지금 낫다가도 나중에는 문제가 더 크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유일한 해결책 이외에 유사 해결책, 물동이 같은 거, 물을 우선 담을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준비한 물똥이 이거라도 내가 붙들고 있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유일한 더 웨이를 만나면 유일한 끊임없이 흐르는 생수를 만나면 우리 주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주 예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발견하면 이 물동이와 같은 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은혜를 동시에 허락하여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힘들지만 이게 승리하는 길이 들어가요. 우선 편한 방법에 마음 뺏기지 않아야 되겠더라고요. 우선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아야 되겠더라고요. 우선 살 길 찾는 것보다 하나님 백 앞에서 우리가 실제로 지는 위에서 해야 할 일들을 집중해야 되겠더라고요. 보이는 대로 믿지 않고 믿음대로 보는 그런 연습을 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원합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폭탄이 떨어지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합창하여 사람들에게 평안의 은혜를 전하는 일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물동이를 버리는 일과 같은 것인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 위축되는 상황에서도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 예수님 생수에 근원되시는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알아야 될 것 오늘 한번 결단해야 될 것 오늘 결심해야 될 것 무엇입니까? 물동이 가져가면 안 된다 혹시 내가 물동이 의지하고 있는 거 있는가? 그거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일한 최고의 길, 유일한 생수의 강의 그런 생수의 그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영원토록 그리시는 생수의 방에 풍덩 빠지는 이 아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끊임없이 체험 받는 신비한 은혜를 오늘 이 아침에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물덩이를 버리는 것으로 끝나지만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동시에 선포되는 복음의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이 아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물동이를 버릴 때, 완전히 새롭게 열리는 그 세계를 그 사마리아 여인이 체험했던 것처럼 오늘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 여름 토요 새벽 이 성령 부흥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 정말로 우리가 부여잡았던 물동이의 작은 은혜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쏟아부어주시는 생수의 강들을 통하여 쏟아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은혜로만 이 모든 체험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고 혹시 내 가운데 있었던 붙들었던 부여잡았던 물동이들 생각나게 하시고 버리고 과감하게 주님께로 나아가는 이 아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 체험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 단순히 치워지는 은혜로 끝나지 않더라고요.
채워질 뿐만 아니라 흘러넘치는 은혜를 받습니다. 지구에서 제일 큰 강은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지구에서 제일 큰 강은 사실 보이지 않는 땅속에 있다 그러더라고요. 이 전문가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하수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담수 99%가 지하수다. 이 숨겨진 거대한 강의 수에 이 놀라운 우리가 눈에 보지 못해서 그렇지 왜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99%의 담수를 이렇게 가지고 있는 지하수 이걸 찾기 위해서 우리는 아프리카 같은 데 가면 이렇게 수맥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사역하는 분들이 많습니까? 이 수맥을 이 지하수의 강을 만나기 위해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합니까? 물이 터져 나오는 바로 직전까지 예 1m 전까지 파가지고도 수맥은 발견 못하는 거예요. 물이 있는 그 자리에까지 파고 들어가야 되는 것이 지하수 개발이었습니다. 그 바로 직전까지 땅을 파야 그 지하수의 생수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 찾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그 근원까지 찾아 들어가야 되는 작업이 이 이미지를 우리 신앙에 적용한다고 하면 우리 영혼의 중심 정말 양파처럼 이렇게 껍질이 여러 개 쌓여져 있는 그런 가운데 우리 자신도 이 코와 제 중심에 있는 이 중심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 이 생수에 그놈까지 찾아가야 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 영혼의 이 껍질에 쌓여 있는 가장 중심된 부 분이 예수님의 생수의 은혜로 덮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우리의 가장 영혼의 중심을 장악하셔야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7장 38절에 보면,

*요한복음 7:28,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배가 무엇입니까? 배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가장 중심된 부분을 의미합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부터 예수님 만난 사람은 은혜의 강수 생명의 강수가 흘러 넘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 생수의 강은 절대 마르지 않습니다. 성령은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절대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안 마른 것 같은데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말씀 들으면서도 아이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요. 오늘 선포하시는 말씀이 우리를 장악하시는 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중심에 가장 중심에 있는 부분이 거부하고 있는 그 순간 있을 수 있어요. 그 가장 중심된 부분이 예수님의 성령님의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로 덮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거는 절대 마르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으시길 바래요. 성령은 절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쉬지 않고 계속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 짓고 있는 그 순간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 축복이 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낙망하여 절망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내 안에서 흘러넘쳐서 이 부족한 거 사용하시기 위해서라도 말씀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내 안에 이 생수 강이 흘러넘쳐서 열망으로까지 생수강이 흐르는데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성령이 다시 임재하시게 된 예루살렘 성전의 환상을 여러분 다시 한 번 보십시다. 에스엘 47장 말씀을 크게 한 번 저와 여러분 크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에스겔 47:8,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그리 하겠습니다. 되살아나리라. 되살아나리라. 되살아나리라. 흘러내리는 물이 무엇입니까? 흘러내리는 물이 무엇입니까? 성전에서 성적 그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는 물 성령의 물 생수의 강을 신약시대 오늘 예수님 말씀하신 생수의 강 말씀합니다. 이 생수의 강 성전의 문지방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이 생수의 강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 생수의 강의 합장 성을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 물은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넓어집니다. 아멘 안 할 줄 알았습니다.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넓어집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헤엄쳐야만 하는 넓고 깊은 강이 된다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예언이 성취된 줄로 믿습니다. 성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물인데도 점점 멀어져 가는 멀어져가는 물인데도 수심이 더 깊어져 간다는 거예요. 그렇게 성전에서 멀리 물이 흘러갔는데도 물이 그냥 땅에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를 삼킬 만한 강으로 넓어져 깊어져 간다고 말씀합니다. 먼 해외에서도 6월 3일 빌리그래함전도대회 인터넷으로 저도 참여했습니다. 토요일 날 오후 시간 저희 내가 있는 날과 1시간밖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저는 거의 실시간으로 참여했습니다.

오정현 목사님 인도하시는 합심 기도에 저도 시키시는 대로 책상 밑에 무릎 꿇고 그렇게 그 자리에서 혼자 있는 자리였지만 함께 그 자리에 동참하며 기도했습니다. 디아스포라 교회들을 위한 기도의 제목을 말씀하셨습니다. 더 마음에 사무치는 기도의 제목 말씀하실 때 한국 교회의 초대를 옮기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탄원의 기도의 장면에서 저의 심령도 그 문 곳에서도 뜨거워졌습니다. 열방을 향해 흐르는 생수의 강의 확장이 사랑의 교회와 한국 교회를 통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이 생수강의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은혜 역투합의 능력이 있다는 거. 역 투합 이 말이 좀 어렵습니다. 원래 농도가 높은 쪽에서 농도가 낮은 액체가 영향을 받는다. 농도가 높은 곳의 액체의 농도가 낮은 곳의 액체가 영향을 받는 이게 삼투학 현상이라 그러는데, 그런데 역 삼투압 역 투합이라는 게 있다는 거예요. 그 반대 현상을 말합니다. 자연계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인위적인 기술을 위력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막 노력을 해야만 일어나는 게 이게 역 투합 변상이라 그러더라고요. 오염된 물이 보통 농도가 이렇게 오염돼 가지고 탁한 물이 깨끗한 물을 오염시키는 게 맞는데 역 투압 현상이 무엇입니까? 오염된 물이 오히려 깨끗한 물에 합류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그 물이 그렇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생수의 강이 그렇습니다. 그 물이 흘러서 어디까지 흘러가느냐 아라바를 지나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사의 바다로까지 그 바다잖아요. 강이 아니에요. 죽음의 바다 사회로까지 그 생수의 강에 물이 흘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다시 한 번 따라 합시다.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제사는 아니라 제사는 아니라, 생수의 강이 소금으로 죽은 바다를 생명의 바다로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합니다. 강이 바다를 삼킬 수 있습니까? 어떻게 강이 바다를 삼킬 수 있습니까? 강이 바다에 형제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강이 바다에 들어가면 바다에 그냥 녹아버리는 것이지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을 만난 성도들의 삶,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주님 선포하시는 이 아침, 이 말씀이 믿어지는 이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 생명의 강수가 최악의 바다를 덮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생수의 강수가 흘러내리는 성도의 그 존재하는 삶의 현장 자체가 그 소금기만은 최악의 바다와 같은 변할 것 같지 않는 그 어려운 바다의 상황을 생수에가 깨끗한 물로 변화시키는 은혜의 시점이 될 줄로 믿습니다. 물리 생명의 강수가 재악의 바다를 덮게 하고 죽은 바다를 살아나게 하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주님이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 오늘 이 아침에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입을 벌려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읍시다. 또 믿게 하시는 성령을 의지합시다.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의 중심에 가장 중심 부분이 변화되는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혹시 전성기를 지나서 쪼그라든다. 이 쪼그라드는 게 표준화인지는 모르겠어요. 전성기를 따라서 지나가지고 내 모습을 보니까 자꾸 쪼그라더라고요. 사람이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그 시각이잖아요. 그게 끝이잖아요. 전성기를 지나서 쪼그라들어서 사망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은 몸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되던 일이 지금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쪼그라드는 것 같은 그런 물리적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다시 생수의 강의 역투합의 능력으로 오늘 새롭게 하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성령의 역투합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 강수가 죽은 바다로 흘러들어가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요 오늘 수십 년간 내가 예수를 믿어 와도 오늘 이 아침에 다시 회복할 은혜인 줄 믿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이루실 리을 믿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실 주님의 은혜를 믿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강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이 토요, 성령 은혜의 집회의 시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하나님의 물방울이 되어 생수의 강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흘러 내시는 생수의 강에 한 일원 되어서 그 흘러내리는 생수의 강의 은혜로 말미암아 죽음과 같은 사해의 바다도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심을 깨달아서 이 목마른 영혼들을 해갈하는 강력한 진원지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서 우크라이나 소녀 합창단에게도 은혜가 충만하여 주님의 손길 가운데 찬양이 그 나라의 전쟁이 그치고 평화로 살려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기쁜 자녀로, 귀하게 서로 쓰임 받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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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7월 1일)
제목: "자유와 연대"
말씀: 마태복음 12:46~50
대표기도: 이윤기 부목사님
찬양인도: 다음세대 연합찬양대
말씀읽기: 천혜진 학생(고등 1,2부), 봉하민 학생(다윗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박명수 목사님-총빙(서울 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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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46~50,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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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목사님-총빙(서울 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항상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가운데 어느 민족 누구 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어느 편에 설 건가 때때로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건가, 라고 하는 결단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 민족이 어느 편에 설 건가 하는 것을 결정해야 되는 중요한 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지금까지 1948년 자유 대한민국으로 세워진 이 나라를 자유세계와 연대해서 계속 발전해 나가야 된다고 하는 세력이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중국이 지금 부상하고 있으니까, 옛날 우리는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니까, 중국과 연대해서 동아시아의 한 나라로 나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두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세계와 연대해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명령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셔서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세계와 연대를 강조하는 윤석열 씨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는요 이런 2022년에 우리 한국 민족의 결단은 매우 중요한 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결단하는 것은 경제가 조금 나아지고 사회가 조금 안정적이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내가 누구며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지난 427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연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우리 한국이 어떤 나라고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에 대한 확신, 동맹에 대한 신뢰,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하는 결의 우리 다 같이 한번 따라서 해볼까요? 자유에 대한 확신 동맹에 대한 신뢰 새로운 미래를 위한 결단 이 세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자유세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손잡고 나가야 되겠습니까?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와 손잡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나가야 되겠습니까? 아직 지금 자유를 무시하고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세력과 맞서서 자유 세력과 연대해서 세상을 보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나라로, 나라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미래입니다. 여러분들 문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대한민국의 자유가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대한민국의 헌법의 기초가 된 자유와 연대의 가치는, 19세기 말 미국 선교사의 노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널리 소개되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헌법의 기초는 자유와 연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연대야말로 대한민국의 기초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이것은 우리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왔고, 발전되었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로서 수많은 우리나라의 대통령 가운데 이 기독교가 한국의 역사 가운데 미친 영향력을 이렇게 분명하게 국제사회에서 선포한 대통령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까지도 이런 얘기를 미국 사회 가서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기독교로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은 문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 이것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동양사회에는 자유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자는 딱 한 사람입니다. 중국의 천자 그 사람은 자유입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아요. 한 사람은 자유고 모든 사람들은 자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체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해서 하나님의 영상을 따라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한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입니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천부적인 권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쳤고 그것을 구체화한 나라가 바로 미국인 것입니다. 그 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자유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성경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억압해서 자유로 만드는 자유의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이 땅에 자유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정치적인 자유가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임금님은 주인이고 모든 백성은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주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서 만든 새로운 나라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고 정치가 하는 것을 도 없는 나라입니다. 민주국가입니다. 경제적인 자유가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가난에 매여 있습니다. 가난이 우리를 엄습하면은 우리는 가난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세계에서 몇 번째 간 두 다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거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자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부자 동네에 살고 있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가난에서 해방되었어요. 경제적인 자유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임금님이 정해주는 대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유교다. 그럼 무조건 유교를 믿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 누구 강요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발적인 의사에서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 그리고 믿음을 고백하고 여기에 나왔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많은 나라가 있습니다마는 우리 대한민국만큼 종교의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나라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정치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교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이 자유 너무 귀한 거예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자유에 귀한 것을 몰라요. 다른 것에 대해서는 다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를 통해서 이런 자유를 주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자연은 너무 귀한 보물입니다. 이 보물은 뺏어가고 파괴시켜버리려고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자유를 지킬 수 없는 거예요. 한번 눈을 들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어떤 나라입니까? 중국이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수 있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고 지켜줄 나라니까? 옛날에 중국은 자유라고 하는 개념을 몰랐어요. 그런데 개방하면서 자유를 약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아 중국이 자유로운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옛날 중화주의 자유가 없는 그런 세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두만강 건너에 소련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어요. 공산지에서 해방되어서 한때 개방을 했습니다마는 다시 소련의 통치자 푸틴 짜르 황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는 백성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연결되어 있는 가장 큰 나라 중국과 소련이 자유를 모르고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우리 옆에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 나라가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도 과거에는 자유를 몰랐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한테 패배를 하고 우린 자유 국가가 되겠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유 국가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한반도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변의 나라와 연대해야 되는데, 지금 어떤 나라와 연대해야 우리가 이 자유를 지켜갈 수가 있을까요? 중국이겠습니까? 소련이겠습니까? 일본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제 말로 크게 말하고 싶진 않아요. 여러분들이 지금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일본의 자유가 의심스러워요. 지금 자유로운 세계로 왔다고 하지만은 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천왕을 섬기고 있고 신도이즘을 섬기고 있고 위험합니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지만은 일본이 우리를 지켜줄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동양에는 근본적으로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를 지키려면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와 손을 잡지 않고서는 자유를 지켜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연대가 필요한 거예요. 자유와 연대가 필요 것입니다. 이것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압니까? 1880년에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라고 하는 사람이 일본 나카사키에 왔습니다. 원래는 우리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려고 왔지만은 고종이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일본 나카사키에서 조선을 살펴본 다음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잘 기억하세요.
한반도는 운명적으로, 운명적으로 주변의 세 나라와 싸울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틈바구니에서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는 나라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세 나라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는 자유의 세계와 손을 잡는 길밖에 없다.” -미국 제독 슈펠트-
 
-이것이 1880년에 슈펠트가 미 국무성에 보고한 보고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 여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무엇인 줄 압니까? 1882년에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입니다. 미국과 우리 조선이 조약을 맺은 거예요. 그 조약 제 1조에 뭐가 되어 있는 줄 압니까? 거중조정이라고 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조선이 다른 나라에 의해서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미국이 와서 도와준다고 하는 거예요. 영어로 굿 오피스, 좋은 역할을 감당한다고 하는 것이 고종은 이 말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했습니다. 미국이 도와주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미국이 도와주겠지. 그래서 미국이 이제나 저제나 도와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가만히 보니까 한반도가 그 싸움터예요. 중국과 소련과 일본의 싸움터예요. 여기에 잘못 발을 내딛으면은 자기도 원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 전쟁에 말려들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초대 공사로 왔던 푸트 공사한테 훈령을 내렸습니다. 당신 한국의 조선에 가면은 다른 행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고종이 와서 뭐라고 해도 그냥 듣기만 해라. 이렇게 훈령을 내렸어요. 그래요. 고정이 아무리 도와달라고 얘기해도 그냥 듣기만 하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 미소 잘 짓잖아요. 웃는 낯으로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사인이 있겠지 아무 사인이 없는 거예요. 바로 이때 누가 등장한 줄 압니까? 일본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메클레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게 1884년의 일이에요. 종이 수호조약이 1882년에 맺어졌고 2년 뒤인 1884년에 일본에 있는 메클레이의 선교사가 와서 우리가 조선을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정작 도움을 기대했던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데, 일본에서 선교사가 와서 우리가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우리가 학교 사업이랄지 병원 사업이랄지 하면 안 되겠냐고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고종의 귀가 번쩍 뛰었죠. 그리고 몇 달 뒤에 알린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제중원이라고 하는 병원을 만들었어요. 이 병원이 오늘의 세브란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민영익을 살려냈어요.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다니 서양 문명이라고 하는 대단하구나. 그리고 곧바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이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올 것을 기대했던 미국의 도움은 오지 아니하고,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와서 우리가 도와주면 되겠냐고, 우리 학교 세워주면 안 되겠냐고 우리가 병원 세워주면 안 되겠냐고, 우리가 한국 사람들을 사랑해서 같이 일하고 싶다고 고종은 너무 고마웠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길 바래요. 미국이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닙니다. 미국이 한반도를 그리 사랑하는 나라도 아니에요. 미국이 한반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제가 얘기하려고 하는 얘기는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한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한국 근현대사를 이끌어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역사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1894년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 줄 압니까?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어요. 우리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했습니다. 청일전쟁이 청나라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에요. 우리 한반도에서 일어났어요. 고종은 청나라도 싫고 일본도 싫었습니다. 미국 선교사와 손을 잡고 대한민국이 미국과 연대해서 나가기를 원했어요. 선교사들이 도왔습니다. 고종이 일본의 그 입제에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음식을 제공한 사람도 선교사들이고, 이 고종을 보호해줬던 사람들도 선교사예요. 그러나 정작 미국 정부는 그런 일 하지 말라. 잘못해가지고 한반도에 발을 내디뎌가지고 수렁에 빠지면 나올 길이 없다. 똑같은 일이 1904년에도 벌어졌습니다. 그때는 너일 전쟁입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어요. 고종은 이 승만을 미국에 보냈습니다.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이 승만을 도와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정작 누지벨트가 한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칼을 흔들지 않는 사람에게 미국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느냐? 일단 나라를 지키려면 임금이 먼저 나서서 싸워야지 임금은 뒤에 있고, 다른 사람 보내가지고 도와 달라. 이건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고종은 그래도 거중조정 도와준다는 그 말만 믿은 거예요. 그런데 그 조항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 1919년 삼일운동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가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독립 만세 일본 사람들이라고 독립 만세 부른 것이 아닙니다. 미국 들으라고 독립 만세 부른 거예요. 그래서 미국 대통령한테 우리 독립을 원한다. 당신 애들이 민족 자결 주의에서 모든 나라는 독립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렇게 주장했으니 그 주장대로 우리를 도와 달라. 여기 앞장 선 사람이 누군 줄 압니까?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고 선교사들인 거예요.
 
여러분들, 대한 독립만을 품은 것은 한국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국제사회에 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전달한 줄 아세요? 우리 선교사들이 전달한 거예요. 선교사들이 한국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국제사회에 알려준 거예요. 이승만 박사와 그 앞장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목이 매 라고 독립만세를 불렀지만은, 국제사회에 들으라고 독립만세를 불렀지만은 국제사회는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공산주의로 넘어가기 시작했어요. 그전에 도았던 기독교인들이 이제 미국이 도와주지 아니하니까 공산주의로 넘어간 사람들 많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여운용도 그때 공산주의로 넘어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기도를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1941년에 벌어졌습니다. 그때 미국에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호소했어요. 당신네들이 약속한 거중조정그 약속에 따라서 우리를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어 달라. 이렇게 요청했어요. 194241년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고, 42년에 미국에서 첫 번째 3.1절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호소했어요. 그리고 43년에 카이로 선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카이로 선언의 내용이 뭔 줄 압니까? 미국은 국제사회와 더불어서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어줄 것이다.
 
저는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첫 번째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유와 독립을 외쳤는데 많은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어요. 그런데 1943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카이로 선언을 통해서 응답을 주셨어요. 이 카이로 선언이 기미 독립 선언서 못지아니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국제사회가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거예요. 그리고 이 약속에 따라서 1945815일 우리는 일본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을 물리치고 우리는 일본에서 해방시킨 거예요. 이때 내가 맥아더 원수가 포구 령을 내렸습니다. 포구 령 전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 줄 압니까? 우리는 1943년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기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역사 교과서에 이거 빼놓고, 미군이 와서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그러니까 점령군이다 이 말만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공부를 좀 제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할 때 남이 알려주는 것만 잊지 마시고, 전체를 다 보시기 바랍니다. 남이 알려주는 거 공부하면 안 돼요. 스스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는 그런 능력이 있어요. 저기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있어요. 우리가 새롭게 역사를 볼 줄 아는 그런 안목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대한민국의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세계와 연대하기를 원했고 자유세계를 약속을 했고 그것을 그 약속을 이룬 것이 1945년 일본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됐으니까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적이 나타난 거예요. 일본이라고 하는 적이 물러가니까 또 다른 세력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련인 거예요. 이승만 박사가 미국 가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일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더니 우리를 소련에게 팔아먹으려고 그러느냐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이승만 박사가 이 목소리를 쳤을 때 미국이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19471114,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유엔이 결의를 했습니다. 앞으로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 것이다. 투표를 통해서 한국 사람들 전체가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서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결의했습니다. 그 유엔 총회의 결의에 의해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진 것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국제사회에 자유세계에 참여하겠다고 요청을 했고, 국제사회가 그것을 응답을 했고, 유엔이 이것을 결의했고 그 결의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1945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맥아더 장군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맥아더 장군에게 기념사를 부탁을 했어요. 그때 맥아더 장군이 뭐라고 말한 줄 압니까? “우리는 1882년에 조선에게 우리가 당신 애들을 돕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우리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지키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 이것이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건국 직전에서 맥아더 장군이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지키기가 쉬운 것이 아니에요. 이 자유로운 나라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싫어했습니다. 이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든지 자유로운 나라를 없애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공산체제를 남한에도 확대시키려고 했던 거예요. 소위 국토 안정론, 북한의 민주기지, 여러분들 공산주의자들이 민주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공산주의를 뜻한다고 하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북한의 민주 기지, 다시 말한다면 공산주의 기지를 만들었으니까 이제 그 힘을 가지고 국토 완정 론 한반도 전체를 완전히 정복해서 공산국가로 만들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은 19489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기념대회 때 이 국토 완정 론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 차례 여러 차례 얘기를 한 거예요. 이제 북조선의 민주 기지를 완성했으니까 남한까지 완정해서 남한까지 가서 국토를 완전히 공산주의로 정복하겠다. 그런데 이 소련과 북한 스탈린과 김일성이 잘못 판단한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소련과 북한이 힘을 합하고 중국이 연합해서 전쟁을 일으켜도 아마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선례가 있습니다. 1948년에 49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압니까? 중국에서 장개석 총통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군이 철수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장개석이 질 수밖에 없었어요. 미국이 중국도 포기하는데 미국이 중국도 포기하는데 한반도 그것을 위해서 미국 젊은이들을 죽게 만들겠는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북한이 남침을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6.25 전쟁의 전제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제가 틀렸어요. 스탈린과 김일성이 모르는 비밀 병기가 있었습니다. 그 비밀 병기를 아직도 우리 한국 정부도 몰라요. 그 비밀 병기가 뭔 줄 압니까? 한국 기독교와 미국 기독교의 자유 연대라고 하는 거예요. 좀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1950625일 약 일주일 전에 미국 특사 돌레스가 왔습니다. 여러분들 미국 워싱턴에 가면은 돌레스 공항을 통해서 워싱턴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그 워싱턴 공항 돌레스 공항에 돌레스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입니다. 이분이 특사로 우리나라에 왔어요. 이분은 기독교 장로입니다. 아버지 계열이 다 선교사회 목사입니다. 어머니 계열이 미국의 유명한 외교관 계열입니다. 철저한 기독교 신앙으로 자랐습니다. 자유세계를 지켜야 된다고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이 돌레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선교사들이 돌레스를 영락교회로 안내했습니다. 당신 장로니까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가라. 영락교회에 갔더니 그날따라 북한에서 내려온 우리 피난민들이 기독교인들이 거기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북한에서 자유와 믿음을 찾아서 월남했는데 지금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자유와 믿음을 매석하려고 합니다. 이 남한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됩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모습을 이 돌레스 장로가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돌레스가 국회에 가서 연설했어요. 연설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한국이 자유세계에 분명하게 서 있는 한국은 혼자가 아니다. 코리아 이즈 낫 얼론, ‘한국은 혼자가 아니다.’ 미국이 도와줄 것이다. 라고 하는 약속이 있죠. 그리고 며칠 후에 6.25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돌레스는 맥아더 장군과 같이 일본에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는 얘기를 했을 때, 바로 그 옆에 있었던 사람이
이 돌레스였던 거예요. 덜레스는 즉각 미국 대통령에게 정보를 줬습니다. 오늘 저녁 당장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라. 그래서 유엔을 통해서 한국을 지켜야 된다. 한국을 버리면 안 된다.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전쟁이 625일날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안전보장이사회가 같은 날 저녁 저녁에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습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압니까? 원래 625일 모여가지고 안전 보장이 사회가 이렇게 결정했어요.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나라 유엔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나라를 불법적으로 침략하는 것은 불법이니까 즉각 철수해라 요청했어요.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틀 후에 627, 북한이 우리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국제 질서를 무시하고, 우리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유엔 회원국들은 다 군대를 모아가지고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남한을 막아야 된다. 67일의 결입니다. 71일 오늘이 71일이죠? 오늘 무슨 일이 결정된 줄 압니까? 미국 대통령이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들 놀라지 마세요. 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2차 세계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는데 이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6.25 때 미국이 한국에 한국전에 참여하는데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돌레스가 미국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한국에 가서 영락교회에 가서 한국 신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봤는데 자기는 지금까지 세계에 수많은 나라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나라들의 신자들을 보았고 그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보았는데 한국 사람들만큼 한국 기독교인들만큼 자유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라가 없다. 하나님께서 왜 미국을 세우셨느냐 민주주의를 지키고 기독교를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미국을 세워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저렇게 애타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한국 사람들을 미국이 못 본 채 한다면, 하나님께서 미국에게 주신 사명을 미국은 무시하는 것이다. 미국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 미국을 더 이상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연설한 거예요. 그래서 미국이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정말로 6.25 전쟁 때 닷새 만에 닷새 만에 미국이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몰라요. 맥아더 인천 상륙 작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그 빠른 시일 내에 한국에 전 한국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우리의 비밀 병기,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과 미국 기독교인들이 연대해서 자유의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자유와 연대가 이루어졌습니다마는 이 연대가 분명한 것이 아니에요. 어떤 때는 미국이 도와줄 것 같다가 어떤 때는 포기할 것 같다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바로 이때 만들어낸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미국을 믿지 마라. 조선아 조심하라. 여러분들 미국이 찬성의 나라가 아닙니다. 미국도 자기의 국가적인 이익에 의해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의 국가의 이익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미국도 한반도를 버릴 수 있어요. 미국이 뭐 때문에 한반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우겠습니까? 자기한테는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 이걸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유 연대가 동맹으로 바꿔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동맹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피를 같이 나누면서 싸우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 1953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 올해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정전 70주년 727일이 정전 70주년이 되는 날이고, 101일이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정전이라고 하는 것하고 한미동맹이라고 하는 것하고 이것이 올해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70주년이 되는 그런 해입니다. 여러분들 이 한미 동맹이 맺어진 다음부터 우리나라는 달라지게 되었어요. 여러분들 한미 중 동맹이 맺어지기 이전에는 10년 단위로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일일이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청일 전쟁 노일 전쟁 대동아 전쟁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1953년 한미 동맹이 맺어진 다음부터는 칠십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여기에 주한미군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한미군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세계 최고 강국인 미국과 전쟁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한미군은 평화 유지군이 되는 것입니다. 힘을 통해서 평화가 유지되는 거예요. 막연하게 그냥 잘 살아보세요. 같이 잘해봅시다. 이렇게 해가지고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국제정치학 교과서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상에 빠지지 말아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이런 한미 동맹이 맺어지게 되었을까요? 여러분들 잘 알아야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죠? 미국은 믿기 어려운 나라다. 왜 그런 줄 압니까? 미국은 4년마다 한 번씩 대통령 선거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1950년 두 많은 한국전쟁에 참여했지만 이제 다음에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무엇을 공약으로 내세운 줄 압니까? 빨리 전쟁을 끝내겠다. 이것이 아이젠하워의 공약이었어요. 그러니 아이젠하워는 이게 어떤 수단을 다 써서라도 전쟁을 끝내야 되는 거예요. 미국은 전쟁을 끝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생각이 달랐어요. 한반도의 가장 큰 비극은 분단입니다. 그래서 둘로 나눠져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으니 이런 기회에 한반도를 통일해야 되겠다.
그래서 19507월 달에 이승만 박사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38선은 무력화 되었다. 왜냐하면 북한이 이것을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38선을 넘어서 통일하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6.25라고 하는 전쟁을 계기로 해서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전쟁을 끝내기로 했고 이승환 박사는 동의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서로 의견이 안 맞는 거예요. 여러분들 미국은 세계 최강국입니다. 한국은 그 당시에 세계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갑과 을이 바뀌어졌어요. 이승만 박사는 우린 죽어도 전쟁 끝낼 수 없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전쟁 끝낼 수 없다. 그러니까 미국이 이제 아쉬운 거예요. 이승만 박사한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슨 조건을 들어주면 무슨 조건을 들어주면, 전쟁을 끝내는 것을 동의해 줄 수 있겠느냐? 이승만 박사 이때 넌짓 하게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주한미군을 우리나라에 보내서 우리나라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침략해올 때 막아 달라. 지금 북한에 중공군들이 현재에 있는데 언제 내려오는지 모르는데 미군이 여기에 있어야 그래야 우리나라가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러분들 한미동맹은 미국이 원해서 맺은 동맹이 아닙니다.
 
이승만 박사가 한미동맹을 안 내주면 종전선언에 전 이 협정에 동의할 수 없고 종전협정에 동의할 수 없으면 미국은 계속 전쟁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여러분들 꼴찌가 아니고 1등을 움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국제정치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꼬리가 머리를 흔든다고. 이승만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꼬리가 미국으로 움직인 거예요. 그래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미국에게 부담이 되는 조약을 맺은 것이 한미 상호 방위조약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고 이승만 박사는 끝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통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미국이 미국은 이승만 박사의 조건을 안 들어주면 안 되게 돼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한미 조약 1953101일에 맺어진 한미 조약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이 한미 조약이 맺어졌을 때 이승만 박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여러분들 이 한미 조약이야말로 한미 동맹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그렇게 기다리던 것이다. 세계의 최강국을 우리의 군대로 만들어가지고 우리를 지키는 경비대로 만들어 사용한 거예요. 여러분들 생각해보세요. 기막힌 것입니다. 여러분들 1948년에 나라가 세워졌습니다마는 이 나라는 울타리가 없는 나라예요. 그런데 주변에는 어떤 나라가 있습니까? 큰 나라가 있어요. 중국도 있고 러시아도 있고 일본도 있고 큰 나라가 있습니다. 울타리가 없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1953101일 맺어진 한미 동맹이라고 하는 것은 울타리, 그것도 말 장성보다 더 충실한 울타리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여러분들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여,. 이제 염려하지 마세요. 이제 우리는 3-4대 동안, 3-4대 동안 어떤 면에서는 더 길게도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1953101일 맺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바지가랑이를 잡고 이거 들어주지 아니하면, 야곱이 얍복강 나룻터에서 씨름했듯이 그렇게 씨름하면서 만든 동맹이 한미동맹인 거예요. 이 한미동맹이 없으면은 단 아무것도 들 수가 없는 거예요. 한미동맹이 가리다 준 축복이 뭔 줄 압니까?
 
첫 번째로 자유민주주의를 만들었어요.
-여러분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너희들 잘 다스려라.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임금님 노릇해본 경험밖에 없기 때문에 임금님 되려고 했어요. 이승만 박사도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임금님 노릇 하려고 했을지 몰라요.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다른 나라에 독재자처럼 해볼 이런 마음이 있었는지 몰라요. 이승만, 박정희 다 존경합니다마는 다 인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미국은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반도에는 절대로 공산주의가 되면 안 된다.
 
두 번째는 한반도에는 전체주의적인 파시트 독재자만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장 경제를 통해서 경제가 발전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여러분들 6.25 후에 휴전선이 그어졌죠? 휴전선이 커지게 되니까 이제 대륙과는 더 이상 왕래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나가야 됩니까? 바다를 통해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우리는 축복입니다. 여러분들 대륙과 교류 안에 가지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소련의 공산주의 중국의 봉건주의 이것밖에 얻을 것이 없어요. 그러나 바다를 통해서 미국을 가고 영국을 가고 유럽을 가면은 자유를 배우게 되고, 과학을 배우게 되고, 신앙을 배우게 되는 거예요. 바로 그래서 이 자유를 통해서 경제적인 발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만한 경제적인 발전을 얻게 된 것이 자유세계를 통해서 자유 통상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에요. 우리 기독교가 1950년에서부터 1990년까지 어마어마하게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공산주의도 기독교를 위협할 수 없어요. 유교도 더욱 내 기독교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오직 길은 미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서구운명이에요. 그것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는 우리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서운명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한국 기독교는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이에요.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는 것은 곧 한미 동맹이 그 일부분 도와주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 드렸지만은 한미관계는 불변의 관계가 아닙니다.
 
미국은 4년마다 한 번 선거를 하고, 선거할 때마다 미국의 정책이 언제든지 바꿔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1969년에 일어났습니다. 닉슨이 새롭게 대통령이 됐어요. 월남전 때문에 곧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닉슨이 왜 아시아 문제를 우리가 가지고 하면 하냐? 지금 우리 미국 문제만 가지고 고민하기 너무 말라. 그래서 아시아 문제는 중국과 잘 타협을 해서 중국한테 맡기고 우리는 발을 빼자 이렇게 됐습니다. 지금까지는 미국과 연대하기는 미국이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줄 알았는데, 미국이 아시아에서 발을 빼고 이제 아시아의 맹주로서 중국과 손을 잡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냥 깜짝 놀란 거예요. 여러분들 1970년대에 유신이 나오게 된 배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월남은 패망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북한의 김일성은 1967년도부터 김신조를 보내가지고 한반도를 넘어뜨리려고 가진 계획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시아에서 손을 뗀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6.25 직전에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매달려서 기도했던 것처럼, 1973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모여서 기도한 빌리그레함 전도 집회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를 바래요. 빌리그레함 전도 집회의 1차적인 목표는 불신자들을 구원해서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73년도는 아시아의 판도가 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공산주의와 싸웠던 우리, 우리가 이제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겠다. 핑퐁 외교한다고 그래서 닉슨과 대통령이 만나고 있고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걱정이 된 거예요. 정말로 닉슨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고 그랬어요. 실질적으로 일기의 사단을 철수를 했습니다. 정말로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때 한경직 목사님이랑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나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 닉슨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초청하자. 바로 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빌리그레함이에요. 빌리그레함이 닉슨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것입니다. 한국에 오면서도 닉슨과 전화하고 한국에서 가서도 닉슨과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안 된다 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나라다.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가 거기에서 스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저는요 이 사랑의 교회가 오종현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서 빌리그레함 전도대회 기념 대회를 여는 것은 매우 매우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1973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모였던 이 자유연대 자유세계와 더불어서 대한민국을 지켜야 되겠다고 하는 자유 연대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만든 또 하나의 중요한 모멘텀입니다. 많은 한국 교회들이 이런 것들을 기억하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사랑교 오정현 목사님이 이것을 기억하고, 다시 한 번 이 일을 계승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저는 마음속으로 한국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 누가 우리와 연대해야 될 사람입니까? 혈통이 같다고 그래서 우리의 현대가 됩니까? 우리와 가장 혈통이 같은 북한은 우리에게 핵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와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를 지키게 해줄 연대가 됩니까?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미국이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있는 거예요. 이 세계와 연대해야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세요. 자유가 그냥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세요. 중국에 한때 자유가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러시아의 자유가 올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자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지금 전 세계의 많은 정치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입니다. 민주주의를 향해서 점점점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독재주의가 점점점점 등장하는 거예요. 저는 한반도에도 그런 나라가 그런 일들이 올까 걱정인 거예요. 그런 일들을 막으려면 자유세계와 연대해서 자유의 귀한 가치를 알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입니다. 고비 고비마다 이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했고, 싸웠고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누가 우리의 형제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로 뭉쳐야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와 연대해야 됩니다. 자유세계와 연대해야 됩니다. 이것을 결정한 것이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에 꼭 그래서 좋은 지도자를 선출했고 그 지도자가 지금 그런 방향을 향해서 나가려고 합니다. 제가 안타까워 한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국민들이 없는 거예요. 언론도 여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사랑하기 위해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이 자유의 연대의 귀함을 알고 여러분들이 자유의 연대의 핵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 통해서 여러분들의 노력을 통해서 자유 대한민국이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만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잘 위로를 잃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많은 나라들에게 우리나라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온 세계에 전해서 우리도 자유를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우리의 자유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기뻐해 주셨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우리 한국 기독교는 우리가 세계에 선택된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 일에 앞장서는 우리 사랑하기 위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 귀한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는 이 자유의 귀함을 모르고 살고 있듯이, 이 자유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자유세계와 연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점점 굳건하게 만들어서 우리만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세계를 자유롭게 만드는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항상 우리가, 우리교회가 이 일에, 사랑의 교회가 앞장설 수 있기를 소망하며, 우리 안에 자유 함을 주신 주님께서 이 나라, 이 민족, 보이는 나라, 보이는 민족 뒤에 거룩한 나라의 연대, 거룩한 나라의 동맹, 영 가족끼리 합심하여 올려드리는 그 마음과 기도에 역사하여 주실 줄로 확신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다음 세대가 바른 역사 인식을 통하여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져서, 비 진리를 막아서는 시대의 거룩한 방파 자가 되어야 한다. 주일 학교 여름 성경 캠프와 대학 청년부 여름 수양회를 비롯한 다음 세대 여름 사역을 통해 인격적으로 만나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여, 온전한 수선대후의 역사가 일어나고, 아웃리치에 참여하는 모든 훈련생들과 단기 선교사들이 지역과 민족 열망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나아갈 때, 밟는 땅 끝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아울러 이번 여름 코로나 이후에 코로나의 넓은 강을 건너서 아웃리치에 1510여 명 이상의 우리 많은 영 가족들께서 국내외로 오고 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고, 우리가 나아갈 때에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만 남는, 우리의 공로가 아닌 주님의 사랑만이 남게 되기를 기대하며, 우리의 고집과 생각은 내려놓고, 한마음으로 우리 안에서도 은혜만 남는 헌신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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