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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 예배 (2020. 5. 2)

제목: ''교육의 열매, 선교의 비전''

말씀: (디모데후서1:1~5)

설교자: 김경덕백승준 목사님  

김경덕 목사님.

 

김경덕 목사님.

사랑의 교회는 지난 10주차 정오기도회를 통해 마음을 모으면서 한마음으로 기도해 왔다. 오늘 토비새를 통해 이 기도의 은혜가 이어져 다음 세대가 실력과 영성과 정서를 겸비한 글로벌 인재가 세워지길 소원한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손으로 기록된 편지의 한 부분이다. 선교사요, 신학자요, 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이 선교의 현장에서 기록했던 13통의 편지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신약의 정점이 되었다.. 이 중 두 편의 편지는 이 한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고 바울이 밤낮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쉬지 않고 생각할 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 사람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다. 거짓 없이 깨끗한 믿음을 가진 이 사람은 바울에게 기쁨의 존재였다. 세계 전역을 다니면서 다양한 선교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의 마음의 각인이 되었던, 이 사람의 이름은 신약성경 두 권의 제목이 되었고, 훗날 바울이 사역한 에베소 사역을 계승했던 이 사람은 디모데이다. 디모데의 믿음은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났던 이 아이는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기는 여종으로 성경을 생명처럼 사랑했던 어머니 유니게의 기도 속에 자란 자였다. 이 두 여인이 가졌던 거짓 없고 순수한 믿음을 아름답게 계승했다. 성령께서는 신앙계승의 주역이 된 이 위대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여 영원히 기억되게 하셨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남성 성도들 가운데 신앙교육에 여성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바울은 디모데의 신앙을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의 공으로 돌리고 있지만, 실은 디모데 신앙의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바울 자신이었다. 디모데가 고향 루스드라에서 처음 바울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바울이 병자들를 고치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 선교 사역의 모습이 디모데에게 반복적이 되었다. 디모데가 바울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바울의 동역 자가 되어있었다. 바울과 디모데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성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에게 이 디모데가 가 가진 뿌리 깊고 요동하지 않는 신앙이, 고요하고 평온하며 품격 있는 믿음으로 그 바울에게 감동과 부끄러움에 대상이었다. 모태 신앙으로 자란 디모데에게, 바울이 가진 체험과 뿜어져 나오는 야성과 화산 같은 열정이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어디에서도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가말리아 문화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종교적인 명예도 모두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자랑하며 한 생애를 전제와 같이 남김없이 부어드리는 선교사 바울의 모습은 디모데에게 경이로움과 경탄 그 자체였다. 깊은 호수처럼 디모데의 열정과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 같은 바울의 영성이 만나 AD1세기 당시 지중해 전역이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이 두 사람의 신앙의 조화가 이루어 낸 선교 적인 쾌거였다. 우리가 가진 질문을 이것이다. 작은 아이 디모데를 위대한 선교사 바울의 동역자로 성장시킨 힘은 무엇인가? 본문이 우리에게 주신 대답은 이것이다. 성경을 사랑하고 복음의 헌신된 어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한 아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어른들 잘 만났기 때문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설교자인 체플엔더슨은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8가지 이유라는 것의 글을 보았다. 그가 내린 대답 가운데에 한 가지는 성경을 읽는 부모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디모데가 성경을 사랑하며 복음의 헌신된 사람은 된 것은 성경을 사랑한 어른들을 보며 자랐고, 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하는 어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315절을 보라. 우리의 기도의 제목인 줄 믿는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경 사랑을 주시고,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이길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을 읽을 때 저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경을 암송하는 중에 성령을 체험하게 되길 원한다. 우리 아이들이 진리와 비진리을 날카롭게 구별하게 되길 원하며 성경을 통해 주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우리 자녀들이 그 사랑을 깨달아 치밀어 오른 감격이 있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성경의 사랑으로 자란 아이 디모데는 성경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하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바울 선교 팀의 일원이 되었다. 이 뿌리 깊고 친절하며 거짓 없는 믿음이 찬란한 빛을 바란 곳은 선교 지였다. 후에 바울이 에베소 사역을 계승하였을 때 디모데는 목회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오직 성경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바울이 사랑한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이 사역은 디모데를 통해 계승되어졌다. 오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이 편지를 통하여서 우리세대가 누린 은혜와 승리와 영광을 다음세대에게 전달하기 원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세요.~~!!! 성경을 읽는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이 성경을 사랑하게 되고, 복음에 헌신하는 부모들을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각자의 세상에서 선교사로서 살아간다면 오래 황페 하였던 이 땅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실 줄로 믿는다. 사랑의 교회 주일하교는 주일학교 교장이신 담임 목사님의 비전과 지도에 따라 교육정책에서 선교정책으로 전환하여 다음세대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에게 바울의 열정을 품은 교사들이 보내주시며, 로이스와 유니게 심정을 가진 부모들을 일으키시며, 선교사의 절박함과 선교사의 야성으로 교육하길 기도한다. 사랑의 교회 주일 학교는 21세기의 선교같이 교육하고 양육하는 선교센터가 되고, 대학부와 청년부는 캠퍼스의 선교사로 보내며 청년들은 일터 선교사로 파송하는 선교의 전진기지가 되게 함께 기도하자. 우리 사랑의 교회는 사랑 ON에서 Sarang Together사역으로 나아가길 소원하고 있다. 지난 주일에 유투브 영상에서 호산나 찬양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세계의 젊은이들은 연결되어 있고, 세계 크리스천 공동체는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 세계적인 전염병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되어 이미 형성되었음을 본다.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는 세 겹 줄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음악과 문화로 연결된 세계 젊은 자들이나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 본다. 사랑 투게더를 사역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열방에 다음 세대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 받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백승준 목사님

코로나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지만 세계 많은 석학들과 메스컴에서는 이 팬더믹이 종식되면 이후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특별한 도약이 있을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번에 담임 목사님께서 V자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보배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반드시 V자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열방으로 섬길 수 있는 선교의 기회를 활짝 펼쳐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3,5,7비전이다. 이 비전을 가지고 달려왔다. 또한 제자훈련의 선교교회로서 전 세계 교회를 깨워 그리스도의 완전한 세우는 일을 계속 준비해 왔다. 더 큰 결정체로 사랑글러벌 아카데미의 사역이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전 세계를 섬기며 세계 복음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것이 본문에 담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세계 복음화를 위한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에 보면 디모데 외할머니 로이스, 그의 어머니 유니게 그리고 디모데로까지 흘러내려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전통, 바로 그 아름다운 신앙의 전 유산을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다. 이 디모데 가문의 흘러내려오는 믿음의 전통은 이들에게만 주신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축복은 디모데가 목회할 에베소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이후 오늘 세대들을 위한 축복의 산물이 되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우리에게 결국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을 우리만 누릴 게 아니라 바로 전 세계로 흘려보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랑의 교회에 주신 축복,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흘러내려오게 하신 이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은 무엇인지 마음에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많은 축복과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주셨다. 고난의 자본, 합심의 기도의 능력도 많지만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믿음의 자본인 제자훈련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워, 복음을 위해서 재생산하는 제자훈련의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해서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전 세계 가운데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선교지에 나가 있으면서 사랑의 교회가 얼마나 특별하고 교회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제자훈련이 얼마나 소중함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말한다. 영국 웨일즈에서 사역한 스티브 리비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해 주고자 한다. 컨퍼런스에 참여하신 분이다. 그분께서 우리 교회 칼 세미나에 참여하신 후 그 감동을 한마디로 말하고 있다. 바로 기독교회가 잃어버린 성경의 참된 교회 모습이 사랑의 교회라고 했다. 제자훈련과 다락방의 모습에서 살펴보았다고 했다. 유럽교회의 모습은 참담하다.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많은 교회가 훼파되었고, 개인주의라는 그 물결의 의해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개인주의란 내 것이니 아무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는 의미이듯이, 이 개인주의가 성경의 권위 위에서 교회를 지배했기에 교회는 유럽교회는 힘을 쓰지 못했다. 스티브 리비 목사님은 제자훈련이나 다락방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것을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다. 이 귀납법적인 응답이 나오고, 말씀을 통해서 충돌하여 회개가 나오고 그 삶이 느끼기 위한 결단이며 기도하고, 서로 돕는 공동체의 모습을 그 목사는 배워서 자신의 교회를 변화시킨다. 개인주의로 만연되었던 그 교회를 바꾸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을 오픈하고, 성경을 같이 읽고 읽는 데서 끝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삶으로 적용되게 하고 그 삶을 서로 돕고 함께 제자로 세워지기 위하여서 한 단계 한 단계 제자훈련을 도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자훈련은 세계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선교의 전략이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제자훈련의 국제화를 꿈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교지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할지 전력을 모은다. 가나 교회 선교사님을 통해서 제자훈련의 철학이 흘러가게 되었고, 미얀마에도 제자훈련이 펼쳐져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자훈련을 통해서 전 세계 교회와 선교지 현장을 깨울 수 있는 놀라운 신앙의 유산을 우리 가운데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을 사랑의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우셨다. 사단은 사랑의 교회를 얼마나 많은 공격을 가했는가?!!! 코로나사태 이후에 우리가운데 잘못된 신앙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제자훈련의 가장 본질을 붙잡아야 될 그런 책임이 있다. 제자훈련의 본질이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보라. 누가복음7:23이다. “또 우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제자훈련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 있다. 담임 목사님은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 망한다고 하셨다. 사랑 ON으로 우리 몸이 게을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점점 더 우리 몸을 게으르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싹트고 있는지 잘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제자훈련의 철학을 통하여서 전 세계를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 귀한 다음 세대들이 신앙의 계승을 통하여서 믿음의 선배들을 삶을 통해서 세계를 섬기는 선교사로 길러야 될 우리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깨어나야 한다.

 

후예배--- 담임 목사님.

특별한 시간이다. 사랑 ON 사역에서 Sarang All Together 집중해야 하는데 투게더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토비새를 통하여 신앙의 계승이 이어가야 한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은혜가 축적이 되어서 자연히 되어야 한다. 기도할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게 된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긴 속뜻을 알아야 한다. 그 안에 뭐가 있을까를 보아야 한다. 이 교회가 현대적이기에 교회의 전통이 들어가 있다.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다. 있는 그대로 구상되어있다. 전 세계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와 사랑목자가 양쪽에 있고 중앙에는 Jejus christ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나무가 있고 저 안에 여러 가지를 놓친 것이 너무 많다. 생명의 역사가 있다. Sun of 소더 God가 있다. Messia The truse, 이런 모든 내용들이 보통은 잘 모른다. 왜냐면 디자인하고 그 뜻을 담았다.스테인드 글라스도 불이 없음 아무것도 안 보인다. 빛이 비쳐져야 보이듯이 아무리 좋은 자료가 있고 많은 것들이 갖춰져도 성령의 조명, 말씀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이 투과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빛이 아니면 투과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빛을 투과하고 그렇게 해야 선명하게 본래의 용도가 된다. 주일학교 정책이 교육이 선교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신앙의 계승이 순도 높게 투명하게 더 환한 빛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요약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 안에서 생명의 약속대로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한다. 먼저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구하며 바울은 밤낮 간구하며 쉬지 않으며 디모데를 생각하는 것은 그의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청결한 양심의 섬김을 감사하고 기쁨 가운데 있기 위해 보기 원한다고 한다. 이것은 외조모와 그의 어머니의 거짓 없는 믿음이 디모데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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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

2020. 4. 18.

제목: ''선한 사마리아인''

말씀: (누가복음 10:30~37)

설교자: 이기원, 남동우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

 

이기원 목사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에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율법 교사들을 만났다. 그 교사들에게 질문을 받으시는 내용이다.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한다.“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다. 이 질문을 하면서 율법 교사들이 두 가지 말씀을 인용하는데 신명기6:5절과 레위기 19:18절을 합쳐서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여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옳다 행하다. 그러면 살리라 하신다. 이때 율법 교사들이 자기들이 옳게 보이려고 가지고 율법적 지식을 피력하고 과시해 보이려고 두 번째 질문을 더 한다.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한다.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 이야기에는 다섯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첫째는 신분이 확실치 않은 어떤 사람이다.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있는 강도를 만난 사람, -옷이 벗겨지고 죽게 되고 거의 버려져 있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한 제사장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간 사람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 같이 그냥 지나간 레위인이다. 이 두 사람은 종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볼 때 어려움에 처에 있는 자들을 정성스럽게 돌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치에 있고, 책임에 있는 사람들임에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이 사람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꾼다. 이 사람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다. 위헤 두 사람과는 달리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붓고 싸매고 자기의 짐 싣는 곳에 태워서 주막에 가서 돌봐주는 사람이다. (다섯 번째는 주막 주인이다).

그 어떤 사마리아 인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주막에서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주인에게 이 사람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인부의 하루 품삯이며 주막에 묵는 하루 비용이 12분의1 데나리온의 비용인데 과 24일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양의 분을 두 데나리온을 숙박비와 치료비를 주면서 게다가 또 한 가지를 추가하며 나중에 더 갚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신다. 그 순간에는 어렵지 않게 대답한다. “자비를 베푼자입니다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하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보면 그 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끝난 것 같지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해주신 이웃 사랑에 대한 개념은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했고 그리고 자기들이 갖고 있던 생각 등이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을 순수하지 못하다하여 개처럼 동물처럼 여기기까지 했다. 이런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을 도왔는가? 어떤 사람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고 있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아마도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는 대상이 유대인이고, 도움을 준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그런 대조적인 강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통 기록에 보면 이 지역의 도둑들이 금품을 갈취하는 일은 흔하게 있었지만 사람이 죽기까지 해를 가하여서 버려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죽도록 때린 후 옷을 벗기고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을 가지고 학자들이 추측하는 근거는 아마도 이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어떤 한 사람이 옷이 벗겨진 상태로 확인 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에 있는 그 대상이 누군지 상관없이 도왔다. 만약 유대인이라면 자신의 가족들을 민족들을 경멸한 자신들을 경멸한 유대인일 수도 있는데, 그냥 도왔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고 피하고 지나치지 않고 원수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도운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새로운 차원의 이웃사랑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제사장과 레위인 들에게 길에서 버려져 의식이 없는 어떤 사람을 도와 줄 수 없고, 도와서는 안 되는 정당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러면 레위인은 12지파 중에 성결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이다. 제사장은 레위인 중에서도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지파로서 다시 성별되어서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 당시 자기 반열 4개의 반열이 있었는데 반열 순서가 되면 일 년에 2주간 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일 년에 2주간 성전에 봉사를 하게 되는데 제사장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이 살지 않았다. 전국에 흩어져 살다가 어쩌다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데, 특히 여리고가 제사장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자기 반열 순서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봉사를 하면 된다. 딱 두 주간 너무 중요했다.

 

하나님께 섬기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당시 가장 부정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시체와의 접촉이다. 레위기에도 나오는데 심지어 부모의 시체도 가까이 가면 안 되었기 때문에 벗겨진 사람이 죽은 사람일 수도 있기에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부정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도와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남을 도와야 할 때, 할 수 있는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합리화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셨다. 이런 말씀에는 방향이 있다. 성경에 예루살렘은 올라가는 곳이다. 지리적으로 그렇다. 여리고는 좀 낮은 곳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언제 어디서나 올라간다. 그런데 제사자은 그 길로 내려가다가 나온다. 레위인도 이와 같이 모든 임무를 마치고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중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상황에도 오르던 내리던 부정해 지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는 사람이라면 곤경에 처에 있는 이런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교훈을 예수님께서 주고 계신다. 33절에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보면서 가졌던 그런 마음으로, 하트 봉으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교회로, 주님의 제단으로, 성전으로 올라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최선을 다해 돕는 대사회적 시대적 사명을 담당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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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우 목사님.

예수님이 누가 강도만난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신다.

내 입장에서 강도를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강도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볼 것인가? 본문에 나타나는 두 사람은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상을 바라보니까 지금 당장에는 도와주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자신의 입장을 돌아보니 도저히 도울 수 없어 피하여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강도 만난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니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도와 줄 수 없지만, 강도만난 형편을 보니 도와 줄 수밖에 없어 가까이 가서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자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빈들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배고파하는 제자들을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 백성들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고 도우신다. 우리 사랑의 교회 대사회적 섬김도 마찬가지다. 교회나 성도들의 입장에서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았다면 결코 그들을 도우지 못하고 그들을 피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 교회는 연약한 자들과 장애인들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들을 필요를 채워지며 지금까지 달려왔다. 때로는 내가 힘들고 어려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을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섬기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대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사랑의 교회에 24년 전에 사랑의 복지 재단을 세워주셨다. 지역사회를 섬기게 하신 것이다. 특히 서초 구립 요양센터를 우리 직원들이 섬겨오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섬기고 있는데 지금 코로나19가 있어 면회가 안 되었고 섬기지 못하고 있지만 속히 회복되어서 발걸음이 이동되어 섬기기를 바라고 있다. 어르신들을 돕기를 바란다. 그곳에 노인들이 행복해 한다는 이야기와 매주 마다 예배드림과 프로그램이 좋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한 행복한 꿈 터가 있다. 문제아가 있는데 60여명의 아이들이 양육 받고 보호받고 있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돌봄을 통해서 행복한 꿈을 갖고 주님이 쓰시는 자녀가 되리라 본다. 오늘 말씀을 준비 중에 복음성가가 생각이 났다.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한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가지고 더 섬기기를 바란다.

사랑은 더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더 버리는 것” ~~이라 한다. 이 코로나19로 인해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베푸는 믿음의 성도가 되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웃을 향해 실천하고 베품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았음 좋겠다. 위기가 곧 기회임을 느껴서 실천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고 복음의 약속을 실천하길 원한다.

 

- 요약-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마침 제자장과 레위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주막주인에게 부탁하여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비용을 대주었다. 예수님은 자비를 베푼 사람처럼 너도 실천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살아있었던 그는 누군가 자기를 구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제사장도 레위사람도 그를 피하여 돌아갈 뿐 이었다 그러나 유대사람에게 멸시를 받던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측은히 여겨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까지 데려가 돌보아 주었으며 주막집 주인에게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그 비용까지 대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런 대가 없이 생면부지의 사마리아 사람을 통하여 긍휼함을 입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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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예배

 

담임 목사님.

드디어 모였다. 우리가 늘 주일예배 드리면서 본당이 꼭 차면 즐겁고 기뻤듯이 오늘 그래도 함께 모이니 본당뿐만 아니라 아래층과 몇 곳에 사회적 거리 등 흩어져 앉아 예배하니 너무 감사하다. 본령 첫 번째이다. 우리가 장애사역과 북한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칭찬하고, 우리 장애인, 북한 선교 등 격려하자. 우리는 영 가족 여러분 본령이니 기쁘다. 예수님 때문에 보혈의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적 차원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에 눈이 열려야 한다, 세속역사를 고민하지 말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우리의 본질 사역에 집중을 주시길 원한다. 온라인 등 모두가 주님 앞에서 찬송과 경배로 이 코로나 사태가 벗어나길 기도한다. 삶의 모든 짐들이 벗겨지길 바란다. 고민하지 말고 복음의 영광을 알아 본질 사역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기업인 회사를 잘 지켜야 하고 학자는 학문을 연구를 잘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예술가는 좋은 예술성을 펼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한다. 교회는 뭘 하는가? 본질은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웃사랑, 주님이 교회에 주신 대 사명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고 대 계명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 둘을 잘해야 한다. 잘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 가족을 주셨다. 영 가족은 영원한 가족, 영적가족 동시에 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는 가족이다. ‘Young 가족은 젊은 대학, 청년부 주일학교이다. 교회는 위임명령과 대 계명을 잘 실천하고 영 가족을 치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 앞에 올바른 가치관으로 젊은이들을 잘 키워내야만 한다. 이제 우리 모든 중직자를 포함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예배에 집중하도록 기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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