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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3년 3월 25일)
제목: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영광스러운 교회"
말씀: 에베소서 2:19~22, 5:17
대표기도: 양명기 안수집사님(목양8팀, 남자대교구장)
찬양인도: 목양 8팀
말씀읽기: 청년 1국 송일광(청년1국 GBS리더), 김수민(대학5부 GBS리더)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에베소서 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ㅡㅡㅡㅡㅡㅡ
▶오정현 담임목사님-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영광스러운 교회
-함께 인사를 나눕시다. “우리는 영 가족입니다. 영적 가족입니다. 영원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가족입니다.!!!”오늘은 7천 기도용사로 기도를 하지만 특별히 다락방 식구들 같이 모여 기도할 때, 은혜를 더 주시리라 믿는다. 우리는 영 가족이다. 우리는 영적 가족이다. 영원한 가족이다. 우리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가족이다. 
 
-오늘 에베소서 2장을 여러분들과 하게 되는데 거기에 뭐라고 말씀 하냐면 2장 19절에 보면, 
*에베소서 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지금 이 말씀을 앞에 보니까 갓 교회에 금방 교회 성도들이 된, 특별히 ‘이방 출신 시민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너무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죽을 때는 두 개 밖에 안 남는다. 누가 남는가? 교회 식구와 육신의 식구밖에 안 남는다.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 밖에 안 남는다. 실감이 나는가? 젊은 분들은 실감이 안날 것이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파보면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 밖에 안 남는다.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만 남는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을 위하여 투자하는 인생이 정말 가치 있다는 이야기이다. 토요비전새벽예배에 특히 다락방 식구들이 한 다락방이 되어 함께 기도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일이다. 자, 여러분들 주보(뉴스레터)를 보면 다락방에 구호를 써 놓았다. 
 
★ 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와 다락방.
다락방은 영적 변화의 산실입니다.
다락방은 사랑의교회의 모판입니다.
다락방은 말씀과 기도로 생명의 계보를 이어가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다락방은 복음전도의 교두보입니다.
다락방은 사랑의교회 모든 다락방(소그룹)이 부흥의 체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2년 6월 11일 토비새 설교 중)
 
-작년 6월에 한 설교 중에 한 말이다. 새벽에 학습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권속’이라는 말은 식구, 한 가족이라는 뜻이다. 한 일가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그 다음에 한 가정이 되고 식구가 된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한 번 더 다락방의 구호를 다시 해 보자. 
 
제가 어제 e메일을 하나 받았다. e메일 이런 것은 잘 읽은데 퍼스널이기에, 저에게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주었기 때문에 잘 안 읽어 주는데, 본인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는데 다락방에 대한 것을 해도 될 것 같아서 양해를 구하면서 말씀을 드리겠다. 중략하고, “목사님, 저는 토비새와 매주일의 예배와 말씀으로 저는 매일이 소생함을 경험합니다. 중략, 제 생애 best찬송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를 계속 부르면서 평안과 감사와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다락방의 은혜가 큐티와 말씀과 더불어 풍성해지고, 가족과의 교제가 실재적인 일입니다. 제 모든 삶을 주님께 의지하고 기대하며 결정과 연습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다락방 교구 목사님은 정말 멋있습니다. 이 목사님을 다락방 심방으로 뵈었는데 와우, 정말 사랑의 교회 목사님들, 좋은 목사님들의 만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다락방의 교구 담당 목사님께서 집으로 순원들과 심방을 와 주셔서 부모님과 얼마나 큰 기쁨과 예배와 말씀으로 교제를 나누었는지 크고 위로와 사랑을 느끼고 기쁘고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주님과 매일의 신선한 인격적 교제와 부르심의 순종으로 답해 드리고 먼저 나서지 않고 주님께 먼저 묻고 기다리고 발을 떼는 안전한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다락방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배당에 강단에 서는 것이 편한 자리가 아니다. 여러분들 앞에 6-7천명이 서 보라, 편안하겠는가? 그런데 여러분들은 거기가 지금 불편한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가족 같이 형제 같이, 그래서 저는 이게 익숙해졌다. 그 수많은 분들이 계셔서 편안하다. 가족 같다. 아마 청년시절부터 소그룹과 다락방, 제자훈련, 이런 것이 익숙하다 보니까 가족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와 계셔도 편안하다. 아무쪼록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교회가 다락방을 통하여 영 가족임을 믿는다. 제가 주중에 빌리그래함 생애를 책으로 가지고 보고 있는데 이 만큼 두껍다. 그 책을 읽다보니 거기에 보면 빌리그래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해서 그 다음에 1973-4년도에 서울에 와서 80년도에도 와서 어마한 여의도 플라자 110만명 모인 것은 역사상 제일 전도집회에서 가장 많이 모인 자리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 빌리그래함과 함께 한 동지들, 그 다음에 매스컴과 이 매스컴 매스미디어가 함께 하고 미국의 대통령들 11분이 함께 하고 그 관계를 잘 하고 그게 중요하지 않지만 그게 보니까 빌리그래함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과의 관계였다. 그 두꺼운 책의 30%를 가족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가이다. 자녀들과 아내와 어떻게 보냈는지를 적어놓았다. 내가 깜짝 놀랐다. 그 두꺼운 책에 몇 %를? 30%를 가족들과 보냈다고 했다. 미국 사람들을 그의 인생의 가치, 보람, 그 인격은 가족과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느냐이다. 그 가족과 얼마나 축복이 있느냐이다. 그 아버지와 그 부모를 통하여 그 가족의 삶이 어떠하고 자녀들의 삶이 어떠하는지를 너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사랑의 교회가 이 대형교회라도 우리는 개척교회 심정으로 해야 한다. 개척교회 심정으로, 여러분이나 저나 가족들이 삶이 실패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럼 어떻게 회복을 할 것인가? 우선 영적 가족, 육신의 가족으로 회복을 해야 되는데, 육신의 가족은 영적가족의 축복이 육신의 가족의 축복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또 육신의 가족의 축복이 영적 가족의 축복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교회와 가정 같고 가정이 교회 같아야 한다. 사랑의 교회는 규모가 크더라도 교회가 가정 같고, 가정이 교회 같은 그런 축복을 주님이 주시길 바란다. 그럴러면 오늘 본문을 보면 19절에 보자.
 
*에베소서 2:19,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 말씀은 가족이라는 의미이다. 일가이다. 교회는 패밀리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가족인줄로 믿는다. 아무리 커도 교회는 가족이라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부류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 제가 옛날에 교회 대학부를 할 때, 사람들이 와서 은혜 받아가지고 외부에 어떤 교회를 세웠는데 교회 이름을 ‘젊은이 교회’ 라고 했다. 자, 젊은이 교회 그 교회가 처음에는 부흥하더니 2년 뒤에 문 닫아버렸다. 교회는 젊은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있는 것이다. 저는 우리 교회를 짓고 난 다음에 강남에 뭐 잘 나가는 분들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천만에 말씀이다. 우리 교회 짓고 난 다음에 정말 어려운 분들, 옥탑 방의 이런 분들이 많이 오셨다. 우리 교회는 다 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다. 교포 교회에 어느 교회는 의사들만 나오는 교회가 있는데 의사들만 있는 교회가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교회는 어떤 특정 그룹이 아니라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오는 곳이고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貧富)귀천(貴賤)이 다 있다. 그래서 가족이 되어서 오늘 이 시간 동안에 사랑의 교회가 우리는 영 가족임을 깨달아서 항상 서로 위로(慰勞)하고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서로 평안(平安)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가족이며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가족임을 믿는다. 
 
그러면 이 한 가족이 되려면 우리는 가족이 역사의식, 어떤 공감(共感)대(帶), 우리가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데 오늘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다. 
 
하나는, 우리 가족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오늘 중요하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20절을 보면, 19절은 권속이고 가족이다. 20절은 
*에베소서 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우리가 가족이라면 아이네디티이다. 가족이라면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과연 사랑의 교회 영 가족이 맞는가? 난 하나님의 식구가 맞는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교회라는 어떤 특정 그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분들이 다 계셔야 되는데 어린아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어야 되고, 믿음의 4세대가 다 있어야 한다. 이 믿음의 4세대가 공유해야 될 영적 정체성이 무언가?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 교회는 첫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여기는 여러 가지 말씀이 있지만 교회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이 말씀은 사도들이 무얼 만들었는가? 신약을 만들었다. 선지자들은 구약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복잡한 것은 다 두고 교회는 신약과 구약의 터전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제일 중심은 신약과 구약, 하나님 말씀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볼 때, 말씀에 대한 해석이 저 정명석 같은 엉터리와 온갖 이단들이 다 나오지만, 별짓을 다 하는데,,, 이 말씀 위에 세워지는 가장 중요한 key는 ‘주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다.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일맥 하나로 관통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다. 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는 줄로 믿는다. 이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학습을 해야 한다. 사도는 무엇인가? 신약이다. 선지자는 구약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그 뒤에 여러 해석들이 다 있지만 예수님께서 친이 모퉁이 돌이 되셨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주겠다.” 라고 하신다. 그랬을 때, 그 카돌릭은 베드로의 어떤 인격이나 베드로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하지만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인격이나 삶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그 따지고 싸우고 문법적으로 보면 싸울만한 위력은 있다. 베드로 위에 세워진 해석에 관한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베드로가 고백한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거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반포대로 121번지 여기의 앞에 큰 벽에 써 놓았다. ‘이 교회의 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씌어져 있다. 이해가 되는가? 이런 것들이 다 연결이 되어 교회의 토대가 무엇인가? 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그 다음은 ‘주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성경중심이며, 예수님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고백되는 모든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셨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셨다는 핵심은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가 어디에 있든, 교단을 막론하고, 사이즈를 막론하고, 인종을 막론하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다. 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의 그 말씀 안에 포함된 놀라운 하모니가 교회는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다. 에베소서 5장 27절에 보면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이 새벽에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가족인 줄 믿습니다.” 교회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터 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그리고 교회는 영광스러운 줄로 믿는다. 그래서 오늘 이 영광스러운 교회, 여러분들이 다 와가지고 오늘 새벽 영광스럽지 않은가? 저는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평소보다 정장을 하고 나왔다. 이유가 영광스런 교회에 이 메시지를 전하는 곳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제가 오늘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나왔다. 물론 오늘 결혼식 주례가 있다. ㅋㅋㅋ 그런데 입이 피곤해서 터져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이 영광스런 교회를 미천한 종이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러분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중직 자들, 그리고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 이 토비새 나오셔서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자체가 너무 너무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자나깨나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교회 영광스러운 것을 위해 두 가지를 적용하고 기도를 하겠다. 
 
첫째는 5장 27절이다.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 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것이 이것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결한 신부, 여러분 결혼식을 앞에 둔 신부나 신랑은 눈빛이 반짝반짝한다. 기대를 한다. 여러분 결혼식을 앞에 둔 신랑과 신부가 아무런 기대도 없이 결혼을 폭망했다고 하는가? 결혼을 실패라고 하면서 뭐 오만 이야기를 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는가? 비록 결혼 생활이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신랑과 신부는 기대를 가지고, 서로 기대를 가지고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흠 없는 신부로 교회 생활을 통해 늘 정결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 주님이 기대를 가지신다. 
 
오늘 사랑의 교회 속한 신실하게 섬기는 성도님과 중직 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로 앞으로 교회를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섬기고 있는데 교회의 기대가 떨어졌다, 교회에 대해서 눈빛이 반짝 반짝이지 않는다면, 주일 예배를 오는데 그냥 그렇다면, 다락방에 그냥 가기 싫다하면 이렇게 하면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교회 영광이 무엇인지 모른다. 교회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 영광의 도로에 침입하는 것이다. 오늘 사랑의 교회 모든 다락방 식구들,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신랑과 신부와 결혼하기 전에 눈빛이 반짝반짝 기대하는 것처럼 그런 신선도를 주님이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신선도를 가지고 기대를 하게 되면 우리 교회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기대를 갖고 목표를 향하여 어쨌든 주일 예배에 올 때 기대하길 바라는 것이다. 영적 신선도, 매일 매일, 어쨌든 주일 예배를 기대하고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 20년을 섬기지만 내일 300명이 넘는 학습세례를 받는다. 우리 간증자들이 어떤 간증을 할지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른다. 나는 그분들을 모른다. 모르지만 제가 20년째 섬기지만 강단에서 학습, 세례식을 이렇게 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 교회 세례식을 한 번도 그냥 적당히 넘어가신 것이 없으시다. 그 세례식에 복음의 영광이 충만하게 하시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크고 영광스러운 것을 찬양드린다. 내일 기대한다. 만세 반석 열리네,,,, 그 다음에 이어서 하는 찬송, 날 자녀라 하시네,,, 이 찬양들을 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함께 해보자. 마음에 얼마나 감동인지 모른다. 교회가 영광스럽다고 했을 때, 20년째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예배와 사역에 모두가 은혜와 축복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가 눈빛이 반짝반짝 하듯이 그러해야 한다. 
 
택하시고 지키시며, 날 자녀라 하시네. 
택하시고 지키시며 날 자녀라 하시네.
그의 소유 삼으시고 날 자녀라 하시네.
택하시고 지키시며 날 자녀라 하시네.
독생자 예수 자유케 하네 주의 자녀라 하시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 있네 주의 자녀라 하시네!~~
Who the Son sets free 
Oh is free indeed
I’m a child of God
Yes, I am. 
In my Father’s house 
There’s a place for me 
I’m a child of God
Yes, I am.~~~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 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얼마나 흠이 많고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모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죽어 나자빠지고 우리는 끝나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엎어져 버리는 자이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기대를 가지고 눈빛이 반짝반짝하시면서 우리의 신랑이신 분이시니 우리가 좋은 신부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기대하고 그런 것이다. 오늘 이런 찬양송, 이런 말씀 속에 기대가 여러분들의 삶을 새롭게 정결하게 만들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광스런 교회를 위해서 모든 다락방이 사명 받은 다락방으로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하게 하는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한다. 이 영광스런 교회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해서 숫자와 상관없이 주의 일을 맡겨 주시라고 주의 용사된 나에게 주의 일을 맡겨 달라고 해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투력을 가지게 하시는지 우리는 빌리그래함이 그렇게 위대하지만 그는 가족이 가장 중요했다. 사랑의 교회에 속한 성도님이 소중하고 여러분의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한다. 
 
♧요약
다락방마다 부흥을 허락하셔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영 가족의 삶 가운데도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솔로몬의 성전 터가 되는 대 반전이 일어나는 것처럼 다음세대와 우리다락방에게도 대반전으로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한계를 극복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영 가족은 한 권속이며 가족이다. 우리는 영 가족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세워 주신 그 길을 따라가며 영광스러운 교회를 사랑하고 감사하며 예수님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시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는 교회와 다락방에서 풍성한 교제와 사랑이 넘쳐서 함께 이어져 가며 성전으로서 서로 기대하고, 의지하고 주님의 복음의 씨앗을 심어가야 한다. 
 
-그들은 아제 더 이상 이스라엘 나라밖의 사람들이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었다. 교회는 하나의 도시에 비유되고 있으며 모든 회심한 죄인은 그곳에서 자유한 자들로 비유되고 있다. 또한 교회는 하나의 집에 비유되고 있으며 모든 회심한 죄인은 하나님의 집에 종속, 자녀 등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 건물의 터로 비유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 의 돌로 비유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힘으로 그 건물을 지탱하고 계신다.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에 의해서 서로 결합되어진 모든 신자들은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풍성한 교제가 있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 택하신 장소로서, 그곳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주안에서 그러한 성전이 되어 진다. 너희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모든 참된 신자는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라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음을 보증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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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3월 18일)
제목: "예수님은 왜 어부를 부르셨나?(Why Did Jesus Call Fisherman?)"
말씀: 누가복음 5:1~11
대표기도: 송승현 장로님(주일학교 담당)
찬양인도: 다음세대 연합찬양대
말씀읽기: 남궁이삭(고등 1,2부), 성윤지 학생(다윗 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로이 그래함
산상기도회: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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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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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 그래함-(통역 정상익 부목사님)-"예수님은 왜 어부를 부르셨나?(Why Did Jesus Call Fisherman?)"
-한국말 하나를 배우려고 한 주간 굉장히 애를 썼다. “안녕하세요?”이다. 안녕하세요? 를 제대로 발음할 수 있도록 영어로 써 주셨다. 그 정도로 읽기 힘들었다. 저에 대해서 잘 모를 것 같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는 제 할아버지께서 말씀 전하실 때, 그 자리에 계신 줄로 안다. 50년 전이라니 믿겨지시는가? 그리고 제가 여기에 와서 그때 50년 전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는 분들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제가 이번 주는 여기 있는 친구들처럼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제가 그분들한테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 빌리그래함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시는가? 아마 많이 안 계실 것이다. 그리고 프랭클린 그래함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도 계시냐고 제가 물었다. 더 모르신다고 했다. 그래서 저에 대해서 진짜 모르실거라고 아마 생각한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 좀 소개를 하겠다. 저는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손자이며, 플랭클린 목사님의 아들이다. 저는 세 명의 자녀를 둔 아빠이기도 하다. 제 아내는 제 세 아이와 함께 집에 있다. 저한테 18살 된 딸이 하나 있다. 15살 된 아들이 있고, 그리고 12살인 막내딸이 있는데 본인은 한 22살쯤 되는 줄 알고 있다. 물론 저도 16살일 때가 있었다. 제가 18살 때 제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대해서 곧 말씀을 드리겠다. 제가 18살 때, 권총으로 쏘면서 한 가지 항의를 했던 적이 있다. 제가 매주 마다 천 발에 달하는 총을 쏘았는데, 저희가 6월 3일과 비슷하게 저희 부모님은 전도 집회로 많이 다니셨다.
 
알레스카에 전도 집회에 가신 적이 있다. 1995년도 일이었다. 아마 여기 있는 분들 중에는 핸드폰으로 보지 않으면 그 해가 어느 해인지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예전에는 그 부모님께 전화를 하려면 호텔을 통해서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해야 될 때, 전화를 직접 들고 해야 되는데 사실 이 전화를 통화하는데 아주 작은 기적과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를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리고 저희 부모님이 상당히 나이가 들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알레스카라는 땅 자체가 미국에서도 상당히 동떨어진 땅인 곳이다. 제가 친구들 집에를 방문을 했었다. 그때가 3월 15일이었다. 1995년도였고, 그런데 친구 집에 잡지 위에 있던 권총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다. 제가 의자에 앉아서 그 옆에 있는 테이블을 탁 치게 되었다. 그리고 권총이 툭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제가 그 권총을 들었고, 제가 그것을 들었을 때 권총을 쏘는 트리거를 잡게 되었다. 그러는 순간에 권총이 발사가 되고 그 친구에 그 형제를 맞추게 되었다. 그래서 제 친구의 바로 밑 부분에 맞았다. 바로 그 친구는 총에 맞자마자 땅바닥에 뒹굴었다. 너무 깜짝 놀라서 뛰어가서 그 친구를 살펴보았다. 제가 CPR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CPR을 했다. 심폐소생술을 하는데 그 친구가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런데 맥박이 뛰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숨을 쉬는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는데 피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제가 옆으로 움직여서 확인해보니 피가 너무 흘렀다. 도대체 내가 무얼 했는지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 친구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가 하나님을 마치 119를 부르듯이 구급차를 불렀다. 엠브런스가 실제로 연락을 받게 되고 40분 만에 도착했다. 제 친구를 응급차에 태우고는 병원으로 이송했다. 굉장히 큰 두뇌에 상처가 났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사고에 제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제가 전화를 했지만 부모님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호텔이 있는 분들께 전화를 했다. 제가 전화를 하니까 호텔에서는 당신의 부모님은 40분 전에 떠났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들을 찾게끔 호텔에서 직원들을 보냈다. 그래서 저의 상황에 대해서 저희 부모님께 이야기가 전달이 되었다. 딱 전도 집회에 설교하러 올라가시기 전에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께 전달된 메시지는 ‘당신의 아들이 권총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렸고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서 그 전도 집회에 참여하셨던 청중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기도해 달라고 이야기 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서는 전도 집회 중에 엄마를 보내서 시애틀로 빨리 돌아가실 수 있게끔 하셨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께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 전도 집회에서 매일 같이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하는 매일 동안에 저의 친구가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뇌에 전혀 손상도 없다는 판정도 받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시력은 잃게 되었지만 완전히 시력은 잃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뇌를 지켜주셨고 병원에서는 청력도 잃어간다고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청력도 지켜주셔서 완전히 잃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제 친구에게는 결론적으로는 두 개 골의 구멍이 난 정도로만 피해가 남게 되었다. 그 친구가 입원했을 때 제가 병원에 방문했는데, 방문했을 때, 그의 아내와 어머님께서 저를 안아주시면서 크게 위로를 해주셨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저는 하나님께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나요? 왜? 저에게 그렇게 하셨나요?” 그렇게 이야기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았다. 제 친구의 뇌의 대한 엑스레이 사진이 그 뇌를 가장 잘 보는 의사 선생님께 전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의사분이 제가 함께 하고 있는 빌리그래함 협회의 소속된 분이셨다. 저희 집으로 전화가 한 통이 왔었다. 제가 알레스카로 가려고 막 짐을 싸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 의사가 전화를 주신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로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네가 의시하고 있다고 들었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희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일만 한 집안이고 기독교 집안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를 오신 것처럼 저도 교회를 오게 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가 저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 왔다. 저에게 전화 주신 그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중에 직접 찾아뵙게 되었는데 98세가 되셨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쏜 권총의 총알이 정확히 두 개골을 뇌를 향해서 돌진 했는데, 뇌를 향해 가던 그 총알이 방향을 바꾸게 되었더라. 그래서 눈 쪽에 있는 신경 쪽으로 꺾여 내려갔다가 다시 꺾여서 올라갔고 그렇게 해서 다시 두뇌 쪽으로 다시 올라간 것을 내가 발견했다. 그 위에 있는 신경을 지나서 다시 그 시신경 쪽으로 내려온 것을 보았다. 그런데 밑으로 내려오면서 턱 쪽으로 안착되는 것이었단다.”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연필을 들고 그 총알을 밀어 넣는 것조차도 어렵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때가 제가 알레스카를 가겠다고 우리 부모님의 허락을 기다리고 짐을 막 싸던 때이다. 제가 거기 가서 사냥하고 낚시를 하는 일을 하려고 하던 때였다. 그때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성경책을 주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 성경책을 읽는다면 내가 보내줄게.”라고 하셨다. 제가 그 알래스카에 가서 55일 동안 성경책을 단 한 번도 펼치지를 않았다. 그런데 제가 있는 그 알래스카에 찾아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제가 아빠와 성경책을 읽는다고 약속을 했는데 빨리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알래스카에 있는 호수 근처에서 제가 알래스카에는 하나님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말씀을 읽었을 때,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셨다. 그리고 제 마음을 만져주셨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가 제가 예수 그리스도께 제 마음을 드렸던 때이다. 제가 그런 일들을 읽었던 말씀을 연구하게 되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이 말씀을 전했는데 제가 직접 쏘았던 그 친구가 바로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 젊은이 중에 한 사람이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자기의 삶을 내어놓는 일이 일어났다. 그 친구가 말씀을 듣고 그 당일에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총 맞았던 게 의미가 있었다.”라고 이야기 했다. 한 명의 영혼이라도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이야 라고 했다. 제가 알래스카에 가서 좀 낚시 가이드를 좀 했다. 저는 낚시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제가 마치 예수님의 제자인 것처럼 정말 좋아한다.
 
성경은 12제자 중에 일곱 명이 낚시를 했다. 물론 어부들은 현대시대에 쓰고 있는 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보다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낚시를 하려면 적어도 새벽 4시는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대부분이 새벽 4시에 오셨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아는 청중이다. 낚시가 어느 정도 어려운지 아시는 분이다. 그런데 바로 낚시를 하려고 뛰어드는 것은 쉽지가 않다. 여러분 이 조류가 어떻게 흐르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물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간대를 알아야 한다. 그게 다 이 물고들이 움직이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제가 알래스카에 일할 때 매일 16시간씩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너무 좋아서 일로 여기지 않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저희 아버지께서 낚시를 하시기를 원하셨다. 제가 우리 아버지를 어부로 여기지만 제가 아는 아버지는 가장 낚시를 못하시는 분이시다. 저희 아버지는 늘 낚시를 던질 때마다 물고기가 올라오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저와 아버지가 두 보트로 나누어 타고 낚시를 갔는데 제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친한 친구의 배를 아버지가 타고 가셨다. 제 친구가 저희 아버지께 아들이 낚시를 제일 잘한다고 설득했다. 물론 그런데 그 친구가 낚시를 잘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한 번도 이 강에서 낚시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강에서 낚시를 해보았다. 저희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은 그 친구와 함께 낚시를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제가 탔던 그 배는 배에 가득 채워서 돌아왔다. 이 알래스카에서 잡을 수 있는 왕 연어들을 잔뜩 잡아왔다. 저희가 그래서 그 다음에 한 번 더 낚시를 하기로 하고 저희 아버지께서 제 배를 타기로 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가 낚시 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그것이다 바로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이 어부의 특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훨씬 더 좋고 자기가 영위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만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을 선택하셨다. 의사였고 과학자였던 누가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면 더 좋은 직업을 가진 자가 필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할 수 있다. 한 번 예전 예수님 시대에 어부가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아마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마 굉장히 냄새가 많이 났을 것이고, 그러나 굉장히 터프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여러분, 이 건물에 환하게 비치는 빛과 같은 조명이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이 현대시대에 제가 한국에 와서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 제가 여기로 차를 타고 오는데 초승달을 보았다. 제가 그 초승달을 보면서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그 달의 모양이 그들의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유일한 수단 중에 하나를 갖지 않았을까? 어부들이 사용했던 수단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아마 별을 보고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와서 한 번도 별을 보지를 못했다. 워낙 불빛이 강해서 그런 것 같다. 환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를 생각해보시면 아마 풍랑이 많았을 것이다. 직접 손으로 만들었던 작은 나무로 된 배를 생각해 보라. 아마 아주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풍랑이 일면 얼마든지 배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 어부들은 그런 상황에서 낚시를 하러 나간 것이다. 여러분, 이 어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이들은 실제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굉장히 인내심을 가져야 했고 물고기를 많이 잡지 못했다고 해서 낙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일을 했어야 하니까, 여러분,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 날에 마지막에 보니까 아무소용이 없는 적이 있지 않은가? 여러분이 하루 동안 열심히 일을 했는데 결과물이 보여줄게 없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런 경험을 늘 어부들이 했기 때문에 늘 어부들이 낙망해서는 안 되었었고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저의 이야기를 통해 보신 것처럼 저는 이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시대에는 이중 언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 낚아 올린 물고기를 팔려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해야 했다. 여러분이 이야기를 몇 분 전에 들었던 것처럼 이 물고기를 잡자마자 그 그물을 던져놓고 움직이기도 했다. 그렇게 따르라고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이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루 밤 내내 물고기를 잡았는데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하시니까 저희는 그물을 던져볼게요.” 라고 하며 그래서 물로 다시 나가서 그물을 던졌는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정말 많은 숫자의 물고기를 잡는다. 지금까지 그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물고기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정말 다행스럽게도 한 가지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잡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식이나 그들의 스킬로 이 물고기를 잡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 잠깐만요, 잡은 물고기 좀 팔고 올게요.” 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예수님 잠깐만요. 배 좀 팔고 그물도 좀 팔고 올게요.”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팔고 돈을 가져오면 저희들 몇 달 동안 살아갈 돈이 될 것 같아요.” 라고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려두었다. 다 버리고 예수님만 찾았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어부를 부르지 않았을까를 저는 생각한다.
 
제가 알래스카에서 지내면서 왜 하나님께서 어부들을 부르셨는지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시든, 저 사람을 구원하시든, 저를 구원하시든, 여러 가지 다른 미끼들을 사용하시겠구나! 를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미끼를 사용하셔서 저희를 구원해 주셨다. 여러분의 부모일수 있고, 저에게 있어서 냄새나는 물고기이기도 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제자들인 어부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냥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기만 했다. 저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면 제 친구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일들인 것 같다. 여러분이 천원을 더 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가서 좋은 차를 구입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냐는 것이다. 또 이 제자들에 대해서 하나 묵상한 것은 그들이 소속된 사회에서 맡은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사회에서 먼저 사역을 시작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여러분이 모인 줄 안다. 여러분 중에 주일학교 교사도 계시고 내일 특별히 주일에 섬기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은 줄 안다. 제가 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깨달은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도이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그 친구들의 리스트를 한 번 작정해 보기를 바란다.
 
6월 3일 날 여러분이 잘 사용할 수 있는 최신 미끼가 도착한다. 플랭클린 그래함 목사님께서 복음을 명확하게 제시하실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데리고 온 친구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 친구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 주면 좋겠다. 물론 그 친구들이 상암경기장에 오게 하려면 여러 가지 미끼를 사용해야 될 것이다. 저희 전도 집회를 위해서 굉장히 많은 헌금을 한 적이 있다. 제가 그래서 그 지역으로 전도 집회를 가면서 헌금하신 집사님께 전화를 했다. 같이 가서 점심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저는 그날 식사는 어렵고 전도 집회가 끝나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바쁘시냐고 했더니, 밴을 하나 빌려서 알콜 중독자와 약물 중독자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재활센터를 방문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픽업해서 전도 집회를 해야 해서 못 만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분들이 오는 대신에 저녁을 제공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했다. 그 분은 본인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도 집회를 위해 보상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을 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올 수 있기를 기도하면 좋겠다. 제가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제가 기도를 하겠다. 먼저 빌리그래함과 함께 해주시는 사랑의 교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저희가 이곳에 찾아오면, 이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집회가 열리게 되는데, 저희가 와서 혼란을 야기 할 수 있지만 그런데 그 혼란 가운데서도 우리 사랑의 교회도 올 수 있는 영혼들이 찾아올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들의 책임이 수반된다. 여러분들이 영혼들을 모시고 와야 한다. 여러분들이 잘 하실 것이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도 제가 여기 올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기네스북에 오른 가장 큰 언더그라운드에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가장 큰 교회는 중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중국에 많이 가보았으나 그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 저를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요약
주위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는 자가 되어, 기도해 주고, 복음의 선도자가 되어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 집회의 부흥이 우리 교회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서 부흥의 신대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6.3 상암 대회에 모두가 참여하여 결사적으로 기도할 때, 나라를 뒤흔드는 부흥의 세컨드 찬스가 임하여 걷잡을 수 없는 거룩한 공진이 일어나게 하시며, 전도네트워크가 구축되어서 빌리그래함 전도 협회와 우리 사랑의 교회가 함께 세계 선교 마무리로 귀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해야 한다. "예수님은 왜 어부를 부르셨나? 를 기억하여 진정한 제자로서의 복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내용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허탕만 치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다. 인생은 이처럼 자신 있는 분야에서조차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가장 귀하고 값진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얄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삶의 심오한 차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배에 가득히 차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만난 죄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베드로의 반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사건들은 초점을 예수의 구속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하셨고, 절망의 인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으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튀르키에와 시리아에 구호금 전달함-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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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3월 11일)

제목: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II.
말씀: 마태복음 27:27-36
대표기도: 권오정 집사님(남 사역훈련)
찬양인도: 제자, 사역훈련생 찬양대
말씀읽기: 김하임 어린이(초등부), 김승현 어린이(유년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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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27:27-36,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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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
 
-이 새벽에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한결 같은 은혜이다. 우리 아이들, 승현이와 하임이! 둘 다 저 위 성경읽기에 올라갔기에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오늘 계속해서 지난주에 이어서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도록 하겠다. 여러분들은 순서 지를 보기를 바란다. 1면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우주 최대의 러브스토리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예수님이 한 손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은 부족한 인생인 우리를 붙잡으시고, 또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며 나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하다가 사랑의 심장인 터지는 것이다. 이게 무언지 깨달은 은혜주심을 알고 오늘은 한 절 한 절 강의를 하지 않겠다. 뭉뚱그려서 십자가의 각성, 십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십자가의 은혜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를 바라며~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저녁에 생각한 찬양이,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우리가 십 년 전에 부른 곡이다.
십자가에 대한 각성은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각성이다. 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나 각성이다. 그러니까 이 지팡이가 그냥 물건이긴 하지만 여기에 마음을 담아서 “주님, 십자가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과 각성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단순히 기도지팡이를 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든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늘은 기도지팡이와 무엇을 든다고 했는가? ‘주님의 십자가를 든다.’라고 생각하라.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 이 아침 내 심장을 덮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능력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도 그냥 돌아가지 않게 하시길 소원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7장 본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세 가지이다. 하나는 정신적인 수치, 육체의 고통, 영적인 큰 짐을 지신 것이다.
 
1)정신적인 수치
2)육체적인 큰 고통
3)영적인 큰 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주님은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아주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의 과정을 거쳤다. 아무리 잘못된 죄인이라도 심지어 총살을 시키는 죄인이라도 얼굴은 가려주고 몸은 가려서 형벌은 가하는데, 예수님은 벌거벗겨져 가지고 아무도 예수님을 막아주는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그런 일이 없는 수치를 당하셨다. 그러니까 최악의 모욕과 수치를 당하신 것이다. 헨델은 이것을 가지고 그 주님의 모욕과 수치를 당한 이사야 53장을 연결시켜서 메시아를 주님의 고난과 수치를 담은 곡을 만든 것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만든 곳이다. 예수님의 수치와 멸시를 느끼고 그것을 보는 친구가 주님의 모욕과 육체적인 고통과 영적인 큰 짐은 이것을 준비하면서 사순절의 기간 동안에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각인이 된다.
 
그 이유의 핵심은 내가 받아야 하고, 내가 감당해야 하고, 내가 모욕을 당해야 할 것을 그 주님이 대신 가 주신 것이다. 내가 받아야 할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가 주신 것이다. 복음과 십자가의 은혜는 항상, 그러니까 나 무슨 말로 주께,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나를 위하여 수치와 멸시와 조롱을 당했다는 것이, 주님이 대신 받았다는 그것을 우리가 열 번 듣고, 백번 듣고, 수백 번 듣고 심지어 천 번을 들었더라도 이게 형식으로 지나가면 안 되고 여기에 늘 마음이 와 닿아야 한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가 지금 여러분에게 기름부음이 체험되기를 바란다. 그럴러면 그것이 내게 와 닿아야 되는 것이고, 내 것으로 고백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핵심은 내가 서야할, 내가 받아야 할, 내가 담당해야 할, 그 모욕과 그 수치의 자리에 주님이 대신 거기에 서셨다는 것이다. 주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그 당대에 1세기에 그레꼬로망, 고대근동 로마시대에 그때 이 사람들의 세계관, 일반 사람들의 이 정신적 세계관, 내세관은 뭐냐면, 일단 사람은 죽으면 편안하게 그냥 고통이 다 없어지고 죽으면 편안해진다고 여기고 죽으면 안식하고 편안하게 쉰다는 하는 것이다. 그 로마 고대근동 사회에 정신세계에 내세관이었다. 그러니까 로마의 위정자들은 아주 극악한 죄수들이나 극악한 흉악범들을 처리할 때에 갑자기 죽어버리면 바로 편안한 쉼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해자가지고 죽기는 죽되, 오랫동안 치욕스럽고, ‘오랫동안 최고의 고통과 수치스러움을 겪으면서 죽을 수 있는 형벌이 무얼까?’ 를 고안하다가 고안해 낸 것이 십자가의 형벌이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은 십자가를 맞으면 그냥 죽을 수 있지만,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양발과 양손에 못이 박혀가지고 매달려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일주일씩 심지어 최장, 십일씩 대롱대롱 매달려서 목숨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죽이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형벌로 고통을 오랫동안 하도록, 바로 죽으면 그냥 편안한 세계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 아심을 믿고,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갈보리 산에 주님을 바라 볼 때’ 할 때, 우리가 이 지팡이를 들면서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는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는지, 어떤 그리스도인이 써 놓은 것을 읽어본다.
 
‘참으로 끝없는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뒤틀리는 고통, 관절을 꺾는 고통, 간헐적으로 찾아 든 질식 상태, 몸을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그 거친 통나무에 찢겨진 그 등이 마찰되면서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셨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심하게 혈장이 점점 차오르며 심장을 압박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왔다. 예수님의 생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살 속에 수액이 빠져나가면서 심장은 걸쭉하고 진한 피를 핏줄로 보내기 위해 펌프질을 해댔다. 고통스런 폐도 최후에 노력을 하고 있었다. 탈수 상태에 놓인 세포조직들은 모든 자극과 고통으로...’
 
정신적인 수치, 모멸감, 육체적 큰 고통, 영적인 고통의 큰 짐을 다 거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제대로 깨달으면 왜? 기독교가 우리가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별을 상징하고, 불교 같은 것은 만자, 저 만자를 상징하는데 그 다음에 이슬람 사람들은 초승달을 상징하지만, 우리는 왜 십자가를 기독교의 십자가를 상징하는가?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은 이미 그때 예수님께서 함께 참여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벽한 교제와 완벽한 팔로우 십이 있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지 않더라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더라도 삼위 하나님이 완벽한 교제 때문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실 텐데, 왜 우리를 돌보시고, 왜 우리를 보호하시는가? 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는가? 왜? 죄 없으신 주님께서 이런 처절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는가? 왜 그러한가? 오늘 주님께서 이 커다란 십자가의 고통과 그 고난을 당하신 핵심이 무얼까?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가 서야할 자리에 주님이 서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죄의 무겁다는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앞으로 수많은 부족함의 다 우리가 총량을 재어보면, 우리의 죄의 무게가 이 십자가의 고통이 이렇게 가져올 정도로 무겁다는 것이다. 왜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 그래서 왜 죄의 무게가 무겁고 우리가 각성을 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이 갈보리 십자가!!~` 이런 찬송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오늘 이 토요비전새벽예배에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우리의 죄의 무게가 무거워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음에 우리가 각성을 해야 되는데, 두 가지 각성을 해야 한다.
 
첫째는, 인생의 짐 고통 가운데, 나를 헤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주님께서 당하신 그 고통의 무게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도전을 주냐면 여러분이나 저나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짐을 지고 온갖 고통을 당하는데 많은 경우는 여러분 헤칠 사람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여러분 자신, 나 자신 밖에 헤칠 사람이 없다. 남들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내가 나를 헤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상처주고 내가 나를 나가떨어지고 내가 스스로 좌절하고, 내가 그 트라우마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우리의 죄의 각성과 고통과 무게가 그만큼 큰데,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위해 당하신 고통이 너무 큰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스스로 상처받고 내가 스스로 어려워하고 그럴 때에 저는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의 무게를 다 희석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를 상처 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예수님의 깊은 십자가 복음이 들어가면 내가 나를 상처준 것으로부터 내가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환경적으로 어려운 것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환경이 나를 상처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를 파괴시킬 사람은 나 자신이며 나를 파괴시키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깊은 각성을 하면 내가 나를 상처 주는 자리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파괴하는 자리에서 내가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다시 한 번 믿음의 부요함과 회복을 통하여 내가 나를 상처 주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다시 한 번 회복의 능력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각성을 하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를 주님을 바라볼 때에 여러분,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수많은 짐을 지고,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일들이 지나지만 그러나 한 가지 우리의 마음속에 다짐해야한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가 나를 스스로 크라우마를 갖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내가 나를 어렵게 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받는 그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새벽은 아주 영광스런 자리이다. 여러분, 여기서 치유가 일어나고, 여기서 자유가 일어나고, 여기서 힐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들을 때마다, “주님, 내가 나에게 스스로 어려워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하겠습니다.” 내가 서야할 그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의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서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내가 나를 상처 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둘째는, 이 십자가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면 십자가의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늘 우리가 고백하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그 일이 너무 고마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수록 내가 상처의 자리에서 뛰어나갈 뿐만이 아니라 주님을 더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주님은 그렇게 고난의 십자가에 달리실 분이 아니셨다. 그렇게 죽어서도 안 되시는 분이셨다. 그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도 안 되는 분이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런 죽음의 저주를 당해야 하는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러니까 십자가의 깊은 은혜를 깨달을수록 제가 복음을 이야기 할 때마다 누가 돌아가셨는지, 창조주 하나님이 돌아가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왜 돌아가셨나? 죄인인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죄인인 나 같은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있어서는 안 되는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순간 주님의 사랑을 절제하지 않는다. 성령의 아홉 가지 가운데 첫 번째가 사랑이다. 마지막이 절제인데 주님의 사랑만큼은 절제하지 말고 주님의 대한 사랑을 우리가 온통 내 마음과 내 평생을 드려도 이것은 답이 없다. 그러니까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 사랑이 이 동기가 되고 이 사랑이 여러분에게 고백이 될 때, 저와 여러분이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다. 늘 말씀하지만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예수님을 이 십자가를 받고 나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진실로 다른 것 못해도 주님 사랑을 절제하지 아니하고 살다보면 얼굴이 달라지고 품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 ‘말할 수 없는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이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은 내가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위한 사랑만이 절제가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오늘 주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성경 읽기를 통하여 나에 대한 모든 연약함을 회개하면서 그 모든 내가 서야할 그 수치와 모욕과 육신적 고통과 정신적인 수치와 영적인 큰 짐을 주님이 내 대신 짊어지셨다는 그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영역과 방향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마태복음 27장을 조용히 듣고 주님이 터치에 주시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가 흑암에 갇힌 세상을 합심하여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전진할 때, 순전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밝히시는 만군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승리함을 믿고, 제자, 사역훈련생들이 자기 부인을 통해 회색지대가 없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무장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이 시대의 거룩한 비밀병기가 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진정한 회개와 각성을 통해 믿음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세워가는 부흥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나를 헤칠 사람은 나밖에 없고, 십자가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면 십자가의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십자가에 못 박는 죄에서 돌이켜 온전한 기도로 나아가 안아주심의 본당이 온가족과 함께 갈보리 십자가를 모두가 바라보는 미스바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선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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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2023년 3월 4일)-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
제목: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마태복음 26:31-35
대표기도: 오시연 권사님(목양7팀 여직장인대교구장)
찬양인도: 목양 7팀
말씀읽기: 손현영 자매(청년 N국), 나경제 형제(대학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ㅡ
*마태복음 26:31-35,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
 
▶변함없이 토비새에 불러주심을 찬양한다. 지금 우리 깃발도 들었고 지금 말씀 읽은 형제가 나 경제이다. 음성이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 참 감사하다. 자, 토비새에 나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다 뉴스레터를 보고 읽어보자. 토비새에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자.
 
▷평범한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됩니다.
버린 돌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모퉁이 돌 인생이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총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혜의 저수지, 사역의 병참기지가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고도의 순간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떤 선생님이 “야, 너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라고 선생님이 이야기 했다. 이 선생님이 다른 사람도 이렇게 똑 같이 생각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그 말을 스쳐지나가는 말로 안 믿고 선생님이 ‘나에게 꼭 필요한 귀한 인물이 되는가! 나도 그런 귀한 인물이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하고 그걸 그렇게 받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좀 되바라져가지고 알 걸 다 알아가지고 그게 되겠나? 라고 의문을 표시하면 그건 안 되는 것이고 그러나 그걸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아, 그렇구나!’ 하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가슴에 담고 그걸 하면 그렇게 하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참 신비한 것이다.
 
토비새에 나오면 평범한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되는 줄 믿는다. 버린 돌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모퉁이 돌 인생이 됩니다.!!! 이게 토비새 구호가 아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그냥 순수하게 받으면 어린애 되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할 때, 오늘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터인데 갈보리 산상기도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그럼 똑 같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어떤 사람은 그냥 십자가 그렇구나!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내 마음에 받아가지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 토비새에 나오면 이것을 받아서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

*토비새가 나오면,,,,
토비새에 나오면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총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혜의 저수지, 사역의 병참기지가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고도의 순간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새벽에 나오니까 평소에 매지 않는 넥타이를 잡고 나왔다. 나도 평소 매지 않는 것이지만 나도 얼굴이 달라져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 내가 마음으로 은혜를 받고 싶어서이다. 아침에 쉽지 않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져야 하고 밝아야 한다. 토비새 나오면 은혜를 받아서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자기의 있는 것 반 이상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진짜 부자가 되고 싶으면 자기의 있는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60-80%를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진짜 부자가 될 것이다. 사람을 알면서도 실천을 못한다. 젊어서부터 그렇게 나누어주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사람은 거부가 되는 것이다. 잠을 4시간 5시간 자더라도 집중력 있게 자고, 고도의 순간 안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이가 들면 입을 열고 자는 분들도 있다. 코도 울고 그 조신한 여자 분들도 60-70이 넘으면 코를 곤다. 그런데 입이 마른다. 요즘은 붙이는 테이프가 나왔다고 한다. 산소가 코로 공급이 되어야 하듯이 코로 공급되어야 뇌가 맑아지는 것이고 퀄러티가 있는 잠을 잘 수 있다. 생각을 해보라. 토요일 날 새벽에 나와야 되니까, 잠을 잘 자야 한다. 낮에는 일상의 삶을 유지해야 하니까 훨씬 더 질적으로 수준이 높은 잠을 자야한다. 아침에 입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입안이 촉촉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보면 알 것이다. 그 다음에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 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성경자본 헌신 자본, 기도자본, 찬양 자본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다. 환경에 너무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환경에 죄 짓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은혜 받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은혜 받는 환경이 있으면 그대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내 것으로 삼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이 마음을 가지고 오늘 ‘갈보리 산상기도회에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여러분, 찬송가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 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 주시네,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 눈보다~~~우리 새 찬송가 바꾼 지 몇 년 되었는데 가사가 좀 바뀌었다. 바뀌고 나니까 장수가 좀 바뀌었다. 오늘 십자가의 은혜가 믿음으로 받기를 바란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1.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주시네.
(통. 늘 흐르니 죄 많은 형제여)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 눈보다 더 희도록 참 성결 얻으리.
 
2. 저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 같이
곧 구원받으리.(통. 용서받으리)
 
3. 온 백성의 죄사하신 하나님 어린양
그 십자가 지심으로 온 인류 구했네.
저 영원한 새 나라에 다 같이 모여서
금 거문고 한 곡조로 새 노래 부르리.
 
후렴 : 나 믿노라 나 믿노라
그 보혈 공로를(통.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한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격한다. 십자가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한없는 하나님의 보물창고이다. 여기에 묵상이 제대로 되고 내 것으로 삼고,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그 보혈의 십자가를 체험할 때 이것이 한없는 보물창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고가 되신 줄로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적게 체험하면 적은 은혜가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얇게 묵상하면 얕은 은혜의 물가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문을 열고 그 안에 하나님의 보화를 캐내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얇게 묵상하면 얕은 은혜를 받는 것이고, 깊이 묵상하면 깊은 은혜의 문을 열게 됩니다.”아멘, 그래서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안목과 어떤 수준이 개인마다 다르다. 십자가가 갖는 넓이와 깊이가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보는 각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그 실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은 마태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이며, .
*마가복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고난의 증인 예수님”을 표현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저는 청년시절에는 김중권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 ‘예수칼럼’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다. 요즘은 많이 이렇게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예수칼럼’은 그분이 깨달은 십자가는 얇게 깨달으면 얕은 은혜라고 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우주 최대의 러브스토리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예수님이 한 손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은 부족한 인생인 우리를 붙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며 나를 행한 사랑의 고백을 하다가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김중권 목사님-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너무나 놀랍다. 오늘 베드로가 세 번 배반하는 갈보리 산상기도회를 시작하면서 베드로 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앞으로 여러분과 제가 실수를 하면 받아준다는 것이 아니고, 여기 나이 든 사람들은 실수하면 안 된다. 좋은 말 할 때, 더 이상 실수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은혜를 기대하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같이 실수하면 앞으로는 더 온전케 하셔가지고 우리 앞으로 실수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 기대하자. 아멘. 한 번 더 읽어보자. 김중권 목사님이 쓴 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장파열 사건이다. 심장이 터지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심장파열 사건이다. 심장이 터지신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그 심장파열 사건을 기억하면서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찬양을 다시 부르면 강도가 다르게 될 것이다. 은혜의 강도가 다르다. 성경도 얕게 묵상하면 얕은 것이고, 깊이 묵상하면 깊이 있는 은혜가 나오는 십자가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26장 후반에 보면, 두 인 물이 등장한다. 한 인물은 가롯 유다이고, 한 인물은 베드로이다. 사실 잘못의 경중을 따진다면 베드로나 가롯유다는 별 차이가 없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나,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나 거의 같다. 그런데 누구는 베드로가 되고 누구는 가롯유다가 되는가? 이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베드로만 슬퍼한 것이 아니다. 가롯유다도 슬퍼했다. 자기의 잘못을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슬픔으로 끝나고 후회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그는 제자들의 대표였다. 그는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했다. 제자대표가 스승을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은 당시에 신앙 스캔들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는 회복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가진 축복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깊이 각성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한 그의 삶과 헌신을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비슷하다. 베드로나 가롯유다나, 십자가의 각성이 얼마나 크냐? 유다는 그것을 포기한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각성(覺性)한 것이다.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가지고 다시 은혜를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오늘 갈보리 산상기도회에 이 놀라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나온 이 자리에 사순절 기간에, 부활절이 되기 전까지 갈보리 산상기도회를 통하여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깊은 은혜가 여러분의 것으로 체화되기를 바란다.
 
‘나 믿노라 나 믿노라.’ 다시 부르면 차원이 다를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깊은 묵상으로 우리 모두를 깨닫게 하시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하고 회복하고 돌아왔을 때, 심지어 천국 열쇠를 받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베드로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십자가 앞에서 깨어지고 그 회복의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알아주시고 쓰신 것이다. 오늘 35절에 보니까,
 
*마태복음 26:31-35,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만 그러한가? 모든 제자도 그와 같았다. 다 함께 그러하겠다고 한다. 세 번이라 부인했지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유대지도자들이 다 도망갔다. 심지어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버리고,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는데 도망가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께서 부인할거라고 해도 안 그렇다고 했지만 그런데 나중에는 배신하고, 도망가고, 보잘 것 없고, 볼품이 없고, 의심 많고, 평범하고, 경박하고, 배신자가 된 것이다. 이 배신자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각성이 일어나고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일류역사상 회복시켜서 가장 유명한 자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그들을 무장하고 세워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각성, 묵상이다. 십자가에 대한 은혜인줄 믿는다.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도 똑 같다. 우리도 나이 들어서 더 이상 실수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날마다 실수하고 어린아이 같고 우리도 보잘 것 없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이제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천국열쇠를 가지고 베드로처럼 그 초대교회 역사를 황금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려면 그 원천은 십자가의 깊은 각성과 은혜에 대한 각성이다.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각성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마음이 어떠한가?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너무나 고마워라! 라고 진정한 각성이 되는가?
 
지난 주일날 설교에 기드온이라는 설교를 했다. 그 말씀을 듣고 몇 분들을 만나니까, 그 설교를 들었을 때, 그 기드온을 듣고 울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해서 오늘 내게 본인의 것으로 체화가 되어야 눈물이 난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제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드온은 큰 담대하고 그냥 강력한 용사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쫄보였다는 말씀에 연약하고 비겁하고 그런 기드온이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큰 용사하고 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주의 영이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그를 붙잡으셔서 큰 용사를 쓰게 하신 것이 와 닿았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본인의 삶과 똑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아리와 같은 깨지기 쉬운 곳에 그 안에 불을 넣어서 혁신을 통한 일을 한 것도 놀랍다고 했다. 나이가 70이 다 되신 분의 이야기이다. 그냥 지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것으로 체화하니까, 내 것으로 들리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 이 십자가를 향하여 갈보리 산에 시작이다. 몇 주가 더 설교를 될 것이다. 각성을 가지고 우리가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 때에 십자가를 통한 각성의 기도의 지팡이가 되어 십자가의 큰 능력이 우리에게 체험될 줄 믿는다. 그러니까 은혜이다. 할 때는 이 은혜는 십자가와 떨어져는 생각할 수가 없다. 한 번 예전에 말씀을 했다.
 
※어릴 때, 성악가 여자 가수인 마리안 엔더슨이란 사람이다. 컨츄럴 앨토이다.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노래한 성악가이다. 어릴 때 가난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교회 성도들이 후원하여 고차원 성악교육을 받게 했다. 미국에서 일등 가는 교수에서 사사를 받았다. 그 마리안 앤더스의 창법이 톡특하다. 첫 독창회를 하고 나서 혹평을 받았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마리안 엔더슨은 마음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마리안 네가 깨달아야 한다. 민감하게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 혹평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혹평보다 크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의 재능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네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 다음에 그래서 마리안 앤더슨은 평생을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영혼의 울림의 노래를 부른다. 음악의 두께가 깊은 바다와 같다. 그녀는 가는 곳 마다 찬송을 통해 십자가를 더욱 깨달았다.

-우리의 실력, 우리의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고 경박하고 실수 많이 하고 배신 잘하는 베드로와 같은 우리를 유다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천국 열쇠를 받는 은혜를 십자가를 통한 놀라운 은혜의 저장창고의 문을 여는 자, 그래서 날마다 지치지 않고 시종일관으로 주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오늘 십자가의 능력이 갈보리 십자가에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오늘 지치고 힘든 여러분들도 환경보다 더 중요함을 깨달아서 여러분들의 재능보다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나 믿노라 !!!~~ 찬양을 한 번 더 하자.
 
지금 미국의 캔터키의 에즈버리 라는 곳에 리바이벌로 계속했는데 미국에 은혜를 깨닫고 하는 찬양을 하는 것을 우리가 다 벌써 그 이상으로 하고 있다. 십자가의 깊이가 연결되면 되는 것이다.
 
♣요약
그 주님의 보혈의 십자가를 체험할 때 이것이 한없는 보물창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고가 되어서 얕은 묵상이 아니라 깊은 주님을 묵상을 하여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천국열쇠를 가지고 베드로처럼 그 초대교회 역사를 황금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깊은 각성과 은혜에 대한 각성으로 우리의 실력, 우리의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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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2월 25일)
제목: "믿음의 세대 계승은 반드시 이어져야"
말씀: 히브리서 11:17~22
찬양인도: 다음 세대 연합찬양대
대표기도: 
말씀읽기: 이민기 학생(대학부2부), 이율 학생(다윗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히브리서 11:17~22,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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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믿음의 세대 계승은 반드시 이어져야“
-할렐루야! 잠을 포기하고 이렇게 토비새에 나온 학생들이 나왔다. 이 새벽을 기대하고 실천의 현장이 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여러분 크게 따라 하라!
 
“우리는 땅 끝까지, 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들이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의 일만이 영원하리라!”
 
오늘 이 믿음과 사명이 다음세대 아름답게 잘 계승되기를 바란다. 오늘 온전한 믿음의 계승이 반드시 이어져야 하는 그런 차원의 말씀을 드리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똑 같은 것이라도 어떤 사람에게 들렸을 때는 그것이 긍정적으로 자주 사용되고 또 잘못 되면 그것을 폄하한다. 예를 들어서 자, 물이 있다. 어떤 불은 잘 되어서 명품 청자를 만들고, 어떤 불은 집안을 다 불태워서 집안을 망하게 해버린다. 또한 어떤 산속의 옹달샘 그 물은 갈증 있는 자에게, 허덕이는 자에게, 사슴에게 생수를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의 물은 아무 쓸 데 없는 것이다. 홍수가 지나가면 흔적도 없다. 그러나 어떤 좋지 않고 그리고 파격적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똑 같은 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칼이 잘 길들여지면 명품의 목각을 만들되, 어떤 잘못하면 연필도 못 깎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믿음의 4대 계승이라는 온전한 믿음의 세대가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그 아름다운 여호수아 세대의 최고의 멋있는 그 세대가 다음세대로 제대로 전달 되어질 때 여호수아 믿음의 세대가 좋았지만, 그 다음 세대는 그 선대의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다 말아먹는 그런 세대가 되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3층, 2층, 1층에 있는 우리만 제대로 하면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저는 믿음의 세대 계승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젊을 때부터 나에게 ‘세대 계승이 나에게는 어떤 뜻이었나?’ 믿음의 세대계승이 어떤 뜻이었나? 를 생각해왔다. 
 
저는 예수 믿는 집안의 4대째 태어나서, 우리 증조부인 경북 안동지역에 처음 선교사님 오셔서 그때 미국 선교사님 말씀을 듣고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9남매가 계셨는데, 예수 안 믿으면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할아버지 세대가 다 복음화 되고, 저의 부친세대 저와 다음 세대 6대까지 저에게 있어서 세대계승이 어떤 뜻인가!? 젊을 때, 오늘 대학부가 와 있지만, 저는 믿음의 세대계승은 항상 영적 재생산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만 복음 듣고, 나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은혜 받는 사람이 자기 믿음세대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음세대로 연결된 줄 믿는다.
 
저는 저에게 늘 그런 질문했다. '오정현, 너의 디모데가 어디 있냐?' '너의 디모데는 어디 있냐?' 저는 저에게 그것이 가장 절실했다. 
 
*디모데후서 2:2,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랬을 때, 그 디모데후서 2장 2절 말씀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하는 말이다. 바울에게 있는 그 믿음의 은혜가 디모데에게 네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한다. The others, 그래서 폴-티모티-충성된 사람-또 다른 사람. 이렇게 믿음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에게는 항상 마음속에 질문이 '너의 디모데가 있냐?'였다. 이것이 한국에 있든 외국에 있든, 또 좋은 상황이든, 어려운 상황이든 상관없이 오늘 이 자리에 대학부 리더들이 많이 다 있는데 마음속에 “너의 디모데는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싶다. 대학부들, 여러분들은 디모데가 어디 있는가? 없을 것이다 아마 쉬운 게 아니다. 
 
바울과 디모데 관계는 영적 아비와 자식의 관계였고, 자기의 모든 것을 자기의 모든 것을 줄 수가 있었다.
 
※며칠 전에 청년 시절에 저와 같이 디모데처럼 살았던 형제가, 이제 대학교수 그만 두고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저런 디모데 관계로 과거의 어떤 그런 관계들이 다시 한 번 새록새록 샘솟았다. 그 형제는 자기가 갖고 있는 그 은사를 가지고 대학캠퍼스에서 영적 재생산 하고, 또 앞으로 일본을 위해 재생산할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늘 마음에 저에게는 ‘너의 디모데는 어디있느냐?’라고 질문하고 있다. 
 
오늘 우리교회 중직 자들, 순장님들, 토비새 오신 모든 우리 교회 성도님들과 모든 세대들의 마음속에도 ‘너희 디모데는 어디 있느냐?’ 라고 묻고 싶다. 실질적인 디모데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랑의 교회는 사역과 섬김을 통하여서 이 영적 재생산, ‘너희 디모데는 어디 있느냐?’ 이 믿음의 세대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 세대에서는 이사야 58장에 나오듯이, 
*이사야 58:11,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항상 이게 참된 영적 재생산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이것은 마태복음을 보면 나온다. 
 
*마태복음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영적 재생산에 참여하고 소위 디사이플 메이킹(disciple making)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제자들을 키우는 그의 삶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이게 똑 같은 믿음의 세대계승이고, 똑 같은 제자훈련이고, 똑 같은 양육이란 이런 말이 있지만, 이것이 진짜 올바른 옹달샘 물과 같이, 진짜 명장을 만드는 불과 같이, 진짜 명장을 만드는 칼과 같이, 이것이 제대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뭐라고 나와 있는가?
믿음의 4세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아곱, 요셉.... 오늘 대학부 형제자매들이 다 있지만, 여러분들의 생애를, 아직 젊지만 여러분들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1대는 아브라함 조상처럼 하게하여 주시고, 2대는 이삭처럼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다음 세대는 야곱 같은 축복을 주시고, 마지막은 요셉과 같은 전 세계를 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리라고 하시는 그 마음이 확실했다. 이게 아브라함에게 이삭 드리라고 했을 때는, 죽을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드리는 건 나를 각을 떠서 드리는 것과 똑 같았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너무나 어두움 같고, 너무나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로마서 4장에 뭐라고 나와 있냐면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바로 연결되어 있다. 
 
*로마서 4:17,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한다.
 
본문에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이 조상이라고 한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그 믿음이 그냥 된 곳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부터 쭈욱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큰 특색이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제단을 쌓은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이 그냥 토비새가 아니다. 여러분들의 큐티도 하고, 주일 예배들 드리고, 대학부집회도 하고, 청년대학부 등 다 21세기 판 여러분들의 생애의 믿음의 제단을 쌓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그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최후의 결판까지 가는 정말 신중한 상황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한다. 제단을 쌓는 신앙, 부활의 신앙이 이런 신앙이 자연스럽게 그 다음 세대에 이어지는 것이다. 갑자기 판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평온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삭의 신앙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이삭은 어디서나 어떤 곳이나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아버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아내 리브가를 얻는 것도 그러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신앙,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신앙이 이삭의 순종의 신앙이 되었고, 말씀을 묵상하는 신앙, 어느 날 묵상하다가 자기 종이 자기 아내를 저 멀리서 데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주 미스코리아였다. 미스 이스라엘이었다.!!!. ㅋㅋㅋ 오늘 우리 가운데에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주시고 이삭과 같은 축복도 주시기를 바란다. 아멘,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곱 같을 것이다. 야곱은 특별히 한국 사람들의 성향은 체질이 비슷한 사람이 야곱이다. 그냥 아등바등한다. 7전 8기이다. 하면 된다. 그리고 또 안 되면 되게 하라, 등등,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 영광스럽게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 야곱의 생애는 최선을 다하는 신앙이었다. 오뚝이 같은 신앙, 웬만한 것은 끄떡도 안 하는 신앙,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해볼 수 없을까? 의 신앙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향이 다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이 처음에는 거칠고 다듬어지고 가면 갈수록 점점 온전해지고 점점 성숙해지는 것이다. 오늘 그 축복을 여러분들에게 주시길 소원한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어떤 신앙인가? 요셉은 자기 혼자 살았던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잘 순종하고 잘 감당하고 방향을 잘 잡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가정을 살렸다. 그 다음, 요셉은 자기 가정만이 아닐, 자기 민족도, 애굽이라는 당대의 최고의 민족을 살렸다. 자기만이 아니라, 통큰 신앙이었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스탠다드로 올라가 버렸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처럼 이 영광스러운 토요비전 새벽예배에, 1년에 한 번 있는 성인식과 선교사 파송 식을 통해 오늘 이 시간들을 통해서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살리고 세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는 글로벌스탠다드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지난주에 튀르키에와 시리아에 구호헌금을 했다. 내 생각만큼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헌신을 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하면서 전전주 금요일에 UNHCR-세계긴급난민기구, 그다음에는 WFP-세계구호기구가 있다. 전 세계에 이런 NGO 단체 가운데 가장 큰 단체이다. UNHC, WFP는 기아대책 등도 다 있지만 전체 게임이 안 될 정도로 큰 단체이다. UNHCR는 소장들이 외국인이다. 그러니까 한국소장들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그 UNHCR은 천억이 넘는 일 년에 결산이 그 정도이다. 전에는 전부다 외국인이었는데 한국이 2차 세계대전이후에 한국은 원조 받다가 전 세계 이제는 원조하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UNHC, WFP이 난민기구 소장이 한국 사람이 되었다. 물론 외국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 한 분은 WFP 소속은 우리 교회에 교인이시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역이 우리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UN과 전 세계, 우리의 사역도 글로벌 스탠다드로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게 요셉의 역할이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오늘과 같이 믿음의 세대 계승을 반드시 이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시기를 축복한다. 정말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는 사사기에 보면 그 유일한 순종의 세대가 참 멋진 순종의 세대가 다음 세대는 사사기에 보면, 
 
*사사기 2:11,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그 선대의 신앙을 다 잃어버렸다. 구약의 유일한 여호수아 세대이다. 거의 흠결이 없었다. 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 신앙계승을 잘못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사사기에 암흑과 같은 어려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이 ‘주의 영광이 이곳에 가득해’ 를 부른 것이 은혜이다. 우리 다시 한 번 찬양해 보자. 다음의 세대 계승을 위해서 찬양을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기백을 가지고 모두가 다 소망을 가지고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확신하며 부르겠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 올 한 해 주제곡이다. 잘 불러서 은혜와 평강이 가정에 있기를 바란다. 
 
♧요약
오늘 대학부와 청년들은 하나님 한국교회 아름다운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루는 신실한 제자가 되어서, 주일학교 자녀들과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너의 디모데가 어디 있느냐?’ 를 생각하면서 양육과 섬김을 통해서 다음세대를 계승할 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가야 한다. 우리들은 나의 디모데는 어디 있는지를 깨달아서 똑 같은 물과 똑 같은 불과 똑 같은 칼이지만 제대로 된, 물과 불과 칼이 되어 명장을 남기고, 시대를 섬기고, 주님의 심정을 깊이 아는 자로, 착한 목자, 착한 양이 되어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영적 성인식과 캠퍼스 선교사 파송 식을 통해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무장되고, 비대칭 전략으로 비상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복음이 되기를 바란다. 
-사도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서 그 누구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시험과 이에 따르는 믿음의 행위의 본보기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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