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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7월 9일)
제목: "참된 쉼"
말씀: 마태복음 11:28-30,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권진우 부목사님
사회: 손문수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ㅡㅡㅡㅡㅡ

 
오늘 제가 기도하는 것은 혹시 우리 가운데 마음이 어두운 분 또 이렇게 어려운 분, 계시다면 진리의 빛이 비춰질 때 환하게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제가 ‘참된 쉼’에 관해서 말씀을 드릴 텐데 3년 6개월 동안 고생한 모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이 말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준비를 했습니다. 자, 질문하겠습니다. 나는 참된 힘이 필요 없다. 한번 손 한번 들어보세요. 손들어보세요.
 
오늘 이 시대가 이 삶의 환경 자체가 우리에게 쉼을 주지 못하는 환경이다. 생태계가 그러니까 24시간 동안 sns라든지, 모든 24시간 동안 다 올 킹 하는 거예요. 다 하니까 쉼이 없어요. 데이터 연구 기관에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앞으로 향후 3년 동안의 데이터가 지난 30년 동안의 데이터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랬어요. 기가 막힌 거죠. 아니 지난 30년 동안의 빅 데이터는 말로 다 소이 많고 우리 스트레스 받게 하고 막 그러는데 앞으로 3년 동안에 나타날 수많은 데이터들이 지난 30년 보다 더 많다. 이거 얼마나 우리에게 그 침이겠어요 생태계 자체가 우리에게 힘을 주지 못하는 그런 환경이 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솔로몬이 얘기한 그 고백이 진짜 고백이에요. 전도서 말씀 전도서 2장 23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전도서 2:23,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24시간 계속 움직이니까 밤에도 쉬지를 못한다. 더더구나 해외에 있는 사람들 너 한국 처음이지? 그거 온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는 건 대한민국은 밤이 불야성이에요. 밤이 환한 거예요. 그러니까 밤에도 쉬지를 못하는 이 민족이, 저는 그 신학교 3학년 때 목회학이라는 패스트롤 미니스트리라고 목회학을 하는데 이 많은 성도들이 수많은 스트레스와 짐이 많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짐의 강도를 스트레스의 강도를 매기는데 최고로 스트레스가 많을 때가 언젠가?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자식이 먼저 이렇게 주님을 부름 받거나 또 배우자가 이렇게 어려워지거나 먼저 이럴 때가 최고의 스트레스라는 거 5점, 5점 그런데 동일하게 결혼도 스트레스 5점이에요. 좋은 일도 똑같은 취미에요. 자식이 태어나도 스트레스가 4점인가 하고요. 그러니까 그 총량제가 예를 들어서 30점이 넘으면 사람이 나 뒤집어지는 거에요.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서 이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우리가 참된 쉼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오늘 이 참된 심의 은혜가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여러분들에게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창조의 질서가 뭐냐 하면 우리 모든 피조물들에게 힘이라는 dna를 넣어놓았어요.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니까 하나님은 사실 심히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런데도 불구하고, 창세기에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어요. 맞습니까? 쉼이 필요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에게 쉼에 대한 하나의 롤 모델 역할을 해주셨어요. 범죄 하기 전에,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힘이 필요했는데 타락하고, 불순종하고 타락하고 난 다음에 더 큰 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희에게 주시는 특별한 쉼을 이 말씀을 통하여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다음에 하나님이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님 뭘 주셨는가 할례를 행하라고 그랬어요. 두 제도를, 할례를 행해가지고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다 너희의 정체성이 뭔지를 확고하게 인식시켜줬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할례를 받은 거예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안식일 제도를 둬가지고 쉴 수 있도록 만드셨어요. 그런데 이 심이라는 거는 이 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예를 들어서 멍 때리기를 하는 것이다. 잠을 충분히 자는 육신이 회복하는 그것만 정도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힘에 대한 개념은 어거스틴이 그런 고백을 했죠 뭐라고 고백했냐? 참회록에다가 앞에 서두에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는 진짜 쉴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
-동의하십니까? 주님 안에서의 쉼이 아니고서는 참된 힘이 없다. 칼이 참 기가 막힌 거죠. 왕궁에서도, 몰디브에 모이또, 모이또에 있는지, 몰디브에 있는지 모르지만 몰디브에 있어도 마음이 쉬지 못하면 영이 쉬지 못하면 주님이 주시는 힘이 아니면 힘이 없는 거에요. 왕궁, 왕궁에 그 최고로 멋있고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한 왕궁에 있다 할지라도, 여러분 왕궁의 암투와 모략과 중상과 오만 거 다 있고 왕비열전, 여인들끼리 힘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힘은 하나님 안에서만 잠시 쉼을 주신다고 그랬을 때 바울 같은 경우는 바울 같은 경우는 빌립보 감옥에서 태장을 받고 그렇게 고통스러운데도 마음의 쉼이 있으니까 거기서 신라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라. 나 사는 동안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왕국에서 모시는데 몰디브에서도 모시는데 감옥에서도 심이 있다 이거지.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이 심을 주셔야 우리가 참 심이 있다는 거 우리가 생각하면서 오늘 이 심에 대한 영안을 열기를 바랍니다. 오늘 마태복음 11장 28절-30절
 
*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내 짐은 쉽고 가볍다고 그랬어요. 왜 다른 복음서에는 마가복음이나 누가 복음이나 요한복음에는 이 내용이 없는데 성경에 보면 정말 중요한 거나 복음서도 반복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에만 이 내용이 나와 있을까? 마태복음에만 이 쉼에 대한 내용이 나와 있으니까 제가 가만히 분석을 해보니까 누가는 의사 누가, 그다음에 요한, 우리 예수님 제자 요한 그리고 마가 이 마가나 누가나 요한에 비해서 이 마태의 삶의 환경이 참 쉼이 필요한 환경이었어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마테는 뭐 출신이죠? 세리 출신이죠. 당시 유대인의 세리는 다른 거는 몰라도 돈 버는 거는 보장이 됐었어요. 돈은 좀 벌었는데 나중에 그의 삶에 어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있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매국노야. 마태는 왜 매국노야, 거기부터 시작해가지고 그 아픔과 스트레스가 말도 못하는데 마태복음 9장에서 오늘 앞에 9장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에 쉽게 말하면 정체성 회복하고 난 다음에 삶이 편하고 난 다음에 마태가 갖고 있던 그 수많은 점들이 벗겨지고 완전히 새로운 참된 안식의 은혜를 받고 나니까 이런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또박또박 기억해가지고 이렇게 오늘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마태가 경험한 쉼이었어요.
 
그런데 오늘 마태는 이렇게 되었는데 바로 6시 11장 30절 뒤에 그다음 뭐에? 12장이에요. 30절이 제일 마지막이고 그다음 12장 1절인데 12장에는 말하면 바리새인과 이런 친구들이 나와요. 바리새인과 유대의 지도자들인데 이 친구들은 겉으로 볼 때는 대단히 쉬고 대단한 사람들 같지만요 그 마음에 힘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사람이 마음에 쉼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면 남을 비난하는 거예요. 남을 비판하는 거예요. 그렇게 쌓이지 않는 거예요. 제가 최근에 한경직 목사님하고 그다음에 조영규 목사님 설교를 내가 가끔 이렇게 한번 들어보는데요. 참 놀라운 건 뭐냐 하면요 한경직 목사님이나 조용기 목사님은 강단 위에서요. 한 번도 남을 치는 설교를 하지 비판하는 설교를 내가 들어본 적이 없어요.그게 그분의 영적으로 마음의 풍요로움과 뭐가 있어서 그런지 비를 여러분 강단 위에서 막 뭐라 그러고 그런 분들은 저분은 좀 쉼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비난은 안 하더라도 아 나 섭섭해. 며느리 볼 때마다 너무 섭섭해. 그럼 그 시어머니가 쉼이 없는 거예요. 마음에 사회 볼 때 서서면 장모도 마음에 쉼이 없는 거에요. 마음에 쉼이 없으니까. 그런데 마태는 주님이 주시는 힘을 얻어가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내로야.
 
우리가 너무나 잘 하는 말씀, 그래서 오늘 제가 이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 힘을 말씀할 거예요. 두 가지 힘을 몇 가지 힘이 두 가지심을 첫 번째는 뭐냐 어떤 힘이냐 주어진 힘이에요.
 
I. 첫 번째는 주어진 쉼.
 
*마태복음 11:28,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는 힘이에요. 주님으로부터 얻어지는 힘이에요. 조금 더 나아가면 조금 더 하면 내게로 오라. 나아가기만 하면 얻는 쉼이에요. 나아가기만 하면 순전하게 마음을 순전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특별히 어떤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진 자로서 나아가기만 하면 주님이 주시는 이 오늘 이 주님이 주시는 쉼이 여러분들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기만 하면 주시는 쉼이에요. 이 안아주신 본당에 오늘 앞에 예배들 1부 드리면서 수많은 분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오는데, 우리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지만 그러나 또 우리에게 주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깜짝 놀랄 만한 보이지 않는 숨겨진 비밀이 뭐냐? 여러분들 이 예배 나오기만 해도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쉼을 주시는 것이에요. 이거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특별한 힘인 줄로 확신합니다. 이 희한한 힘을 줄을 주시는 거예요. 나오기만 하면, 그런데 나오기 만해도 시모지 그게 될까? 여러분 앞에 11장 25절에 보면요,
 
*마태복음 11:25,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지만 이렇게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쉼을 주실 것이다. 이걸 우리가 정말 순전하게 믿고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쉼을 주시는 것이에요. 다시 어떤 사람에게 쉼을 주신다고요? 수고하고 짐진자들이 이 수고란 말은 헬라어로 ‘코피온테스’ 라고 그러는데 이 수고하다는 말에는 노동으로 쇠약해지고 지쳐있다. 지쳐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도 마찬가지예요. 특별히 이 당시의 율법의 전통적인 굴레에서 큰 짐을 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 나오기만 하면 쉼을 주실 것이다. 본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창조되었을 때에, 아담이 일을 할 때 그 일을 아담이 부담으로 하거나 억지로 하거나 고통스럽게 하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아담의 기쁨으로 일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즐거워했어요. 그래서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할 때 아담이 기뻤어요.
 
근데 불순종하고 범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는 그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고통과 가시와 짐과 그다음에 쉼이 없는 그런 힘든 상태가 된 거죠. 그러니 오늘 우리 여러분 마음속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했을 때 이 말씀 그대로 믿고 주님 앞에 나올 때에 불순종을 통하여 파괴된 하나님과 나와의 질서가 회복돼가지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가 가정의 주부로서 또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또 비즈니스 직장 모든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고통과 가시와 짐과 슬픔의 내용들이 어떻게 바뀌느냐, 기쁨과 감사와 사명과 축복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똑같이 일을 해도 옛날에 일하던 거고 짐 일하던 거 하고는 달라요. 옛날에 일할 때는 억지로 다시 와 고통과 짐과 무거운 것인데 이게 우리가 참된 힘을 주로 받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감사와 기쁨과 이걸 하니까 이게 일을 해도 마음이 쉬는 것이에요. 오늘 이 참된 쉼을 여러분들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다시 불순종 때문에 생긴 고통과 가시와 짐을 다 벗겨주시고, 이 시간 사명과 기쁨과 지혜와 아이디어로 참된 심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쉼, 어떤 쉼이라고요? 주어진 쉼, 또 어떻게 해요? 나오기만 해도 주시는 쉼, 그래서 나중에 요한이 너무 큰 은혜를 받아가지고 요한 계시록 이전 성경 제일 마지막 22장 17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냐 하면 다 같이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22:17,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오 목마른 자도 올 것 이오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아멘. 우리가 정말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주님이 주시는 참된 힘을 허락하여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혈류 증 여인을 생각해 보았어요. 여러분 혈루 증을 앓은 여인은 참 비참했어요. 열두 해를 앓으면서 수많은 가산을 탕진하고 거기 보면 수많은 의사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의사들 계시면 용서하시고, 탕진하고 너무 살 길이 없어요. 근데 오늘 예수님이 지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야 내가 이 뭔가 좀 그 여인이 한 일이라고는 무슨 예수님 앞에 가서 무슨 큰 소리를 했다든지 아니면 뭐 예수님께 무슨 자신의 삶을 헌신을 희생해 드렸다든지 그런 건 전혀 없어요. 그냥 군중을 뚫고 나와 가지고 그냥 예수님께 나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에 기적과 같은 치유와 변화와 쉼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것이에요. 그게 망해가는 상황이에요. 오늘 우리 마음속에 그래요 하나님 아버지 여기에 나오기만 해도 주시는 은혜가 있는 줄로 확신합니다. 순산하게 이걸 다시 앞에 25절에 이걸 슬기롭고 지혜롭다는 것을 똑똑한 사람들에게 숨기시고, 혈루 증처럼 수고와 짐을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께 나오기만 해도 주님이시면 축복 그래서 그 당시에 헬로 증인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들, 귀신 들린 자들, 자식을 잃고 고통 하는 자들, 수많은 힘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오기만 해도 주시는 쉼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오길 원했다. 주님께 주님께서 나에게로 다 오라 하시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이 짐을 나에게 다 맡기라. 그 뜻이에요. 니 혼자서 짐 지고 간다고 헤매지 말고 나한테 이 짐을 다 맡겨라. 지금 이제 여름에 여행하는 분들 많이 계실 텐데, 그 공항에 가가지고 여러분들이 도착했을 때 짐을 찾잖아요. 베이스 클레어밍 가가지고 짐을 찾는데 수화물을 찾는데 가족들과 어린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같이 서서 짐을 찾는데 다섯 살쯤 되는 어린아이가 아버지가 한 20~30kg 되는 큰 짐 백이 있는데 그걸 보니까 우리 거네. 그러면서 그 집을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걸 지가 다 찾아가고 하겠다고 했잖아요. 컨베어 벨트가 올라가가지고 난리 치면 걔는 죽는 거예요. 다섯 살짜리 10kg 밖에 안 되는 애는 그걸 감당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의 삶의 컨베어 벨트에 큰 짐들이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내 힘으로 근데 내 우리 같이 연약한 어린아이 같은 우리가 그걸 감당하려고 그러면 우리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대신 짐을 컨트롤해 주시면 해결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게로 오라 하는 것은 짐을 나에게 맡기라 그 뜻인 줄 믿습니다. 알겠죠? 이제 또 하나 29절에 뭐라고 나와 있냐 하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마태복음 11:29,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이 우리에게 선명하게 선포하시는 거예요. 첫 번째 쉼은 주어진 쉼, 두 번째 쉼은 뭐냐 하면요 획득된 힘, 배우는 힘 멍에를 메고 얻는 힘 많은 분들이 첫 번째 내게로 와 주님께로 가가지고 주님이 주시는 주어진 신만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걸로 끝나니까 그 주어진 쉼이 오래가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이 주어진 쉼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아가지고 멍에를 메고
 
II. 두 번째는 배우는 쉼.
배우는 쉼, 배우는 쉼, 획득된 쉼, 주님 안에서 우리가 성숙해가지고 얻어지는 쉼, 그걸 얻게 되면 주님이 주시는 그 쉼을 더 오래 가게하고 더 성숙하게 하고 더 깊이 있게 하고 그 쉼을 통한 생수의 강이 체험되게 하시고 그다음 맑은 샘의 물이 터뜨려지게 하시고 그걸 통하여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멍에를 메워주시고 멍에를 통하여 배우는 쉼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대답 소리가 좀 작아요 네 멍에를 주님의 멍에를 갖고 배우는 쉼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 멍에는 코뚜레가 아니에요. 당시에 이스라엘의 밭을 좀 큰 바트를 가려면 소 두 마리가 힘 있게 같이 움직일 수 있도록 소 두 마리 어깨나 목에다가 이 나무 멍에를 연결시켜놨어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이 멍에는 뭐냐 하면 주인이 좌할 때는 좌하게 하시고 주인이 우할 때는 우하게 하시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끌고 가기 위하여 멍에를 소에게 씌워놓은 거예요. 멍에가 제가 그림을 그려가지고 이해를 시켜드리면 좋겠지만 설명을 해도 대체적으로 여러분들 이게 감각이 있으시죠? 소 두 마리 어깨나 목에다가 이 나무를 연결시켜가지고 소 두 마리가 제대로 밭으로 갈 수 있도록 아니 주인의 뜻에 좌우하라는 대로 주인이 가자고 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멍에를 매게 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망해를 통하여 배운다는 것이에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멍에를 주세요.
 
이 멍에는 좋은 의미에서 사명이 될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어떤 비전이 될 수도 있고 그다음에 또 이걸 이 멍에는 내가 주님의 멍에를 더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배우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예를 들어서 작년에 9월 26일 날 9.26 한국 교회 섬기는 날을 했습니다. 사랑의 교회 한 교회가 그 당시에 5,596명의 우리 사역자들을 섬기는 거 그거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거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사명이요 어떻게 보면 좋은 의미에서 멍에에요.
 
그런데 그걸 우리가 먹여야지만 잘 감당하게 되니까 우리가 스테이도 하고 또 지방에서 오신 분들 다 집에 가정에 모시기도 하시고 우리가 정말 최선을 다해 섬기기도 하고 이렇게 다 했더니 나중에 사랑의 교회 지난 9월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은혜의 여진이 남아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진짜 깊은 어떤 수준의 쉼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이에요. 원래는 9.26이 12월 23일로 될 터인데 그 9월 그 근처는 추석이 있어가지고 12월 23일로 해가지고 한국 교회 한 7천여 명의 우리 목회자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미션과 거룩한 멍에를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 주님이 이리 가라 이리 가고 저리 감 쳐라 이렇게 잘 할 때에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축복해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멍에의 특징이 뭐냐 하면 멍에의 특징이 뭐냐 30절에 보니까,
 
*마태복음 11:30,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오늘 주님이 주신 이 명예와 짐이 여러분들에게는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겉으로 볼 때는 무거워 보이지만 사실은 이게 있어야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 함이 생기는 것이에요. 독수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데 처음에 날개를 퍼덕거리는데 그 어린 독수리가 날개가 어마어마하게 큰 멍에에요. 큰 짐이에요. 그런데 만약에 독수리가 그 날개가 없다면 어떻게 하늘을 찬국을 나눌 수가 있겠어요? 큰 생선 고기, 바다에 들어가는데 고기에 지느러미가 있는데 지느러미가 무겁다고 그래가 지느러미를 잘라버리면 그 고기는 죽는 것이에요. 독수리가 날개가 무겁다고 그래가지고 잘라버리면 하늘을 날지 못하는 것이에요. 멍에는 마치 독수리의 날개와 같고 고기의 지느러미와 똑같은 것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를 우선 쉽게 말하면 결혼이라는 것은 동성끼리 하는 겁니까? 남녀 간에 결혼하는 것입니까? 결혼은 동성이 아니라 남녀 간에 이것이 하나님의 멍이에요. 하나님의 법이에요. 지난주에 결혼 50주년을 맞이하는 목사님, 사모님 내외분을 내가 뵙고 대화를 할 때 참 축복이 됐어요. 5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그게 제 전달이 되어가고 저도 참 기쁨이 되었었어요. 근데 동성의 50주년 축하한다. 이게 있을 수 있습니까? 먹이를 넘긴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명예의 이 어떤 영역에 그게 물질이든 그게 이성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걸 테두리를 벗어나면 그때부터 재앙이 시작되는 것이야. 그때부터 잠시 사라져버리는 것이 모든 힘은커녕 인생의 재앙과 짐과 고통과 가시가 우리를 억누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명예의 그 영역 안에서 우리가 배울 때에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그래서 우리가 첫 번째 힘은 주어지는 쉼, 주님을 통해 나아가기만 해도 얻는 쉼, 두 번째 쉼은 획득된 심, 멍에를 통하여 배우는 쉼, 그랬을 때 우리에게 주시는 결과가 뭐냐 주님의 온유와 주님의 겸손을 배우게 되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을 배우라는 것이에요. 나와 있죠? 나는 마음에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러분 삶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면요. 마음에 쉼이 있어요. 열 안 받아요. 마음이 온유하다는 말이 뭔가?
 
*‘온유’라는 말은 예수님의 주권 앞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게 온유한 거예요.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께 컨베어벨트에 있는 짐을 다 부모에게 맡기듯이 전적으로 다 시원하게 하나도 주님께 다 맡기고 힘들 때마다 주님이 다 하시어 그게 온유한 것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는 겸손인데 겸손은 뭐냐?
*겸손은 자기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자세에요. 자아를 주장하는 자세 그러니까 자기 자아에 대한 자의식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든 나는 이 겸손이 있는 사람은 남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든 열을 받지 않는 것이에요. 근데 자기의 자아가 펄펄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자기의 자아를 주장하는 사람은 수많은 주의 환경 때문에 막 그 힘이 없어요. 고통이에요. 세상에 쉼이 없는 이유가 누군가가 여러분 대우 안 해주면 마음이 열 받잖아요. 여러분 인정 안 해주고 여러분 무시하고 함부로 하면 스트레스 받는 거 아니에요? 누가 나를 인정 안 해준다. 그래갖고 열 받을 때, 그거는 여러분들이 진짜 겸손의 의미가 좀 확보가 안 된 것입니다. 내가 아는 어떤 분들이 후배들의 모임에 갔어요. 후배들을 갔는데 후배들이 이분을 좀 대우를 안 한 것 같아요. 그래 열 받아가지고 씩씩거리시면서 이놈의 자식들 말이야 선배들 대접도 안 하고 막들이 열 받으셨어요. 제가 듣고 난 다음에 그런 데를 왜 갑니까? 스트레스 받을 일을 하면 안 되는데, 그런 데를 왜 가느냐고, 며느리가 나를 무시한다. 사위가 나를 무시한다.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한다. 여러분 그거 다 마음에 쉼이 없어서 그래요. 겸손은, 겸손은 뭡니까? 자기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게 쉼이 있어야 가능한 거죠. 그래 수고와 무거운 짐들이 온유와 겸손으로 바뀌게 되는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게 은혜의 선순환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에요. 은혜에 살 사람이에요. 아마 지상에서 마음의 쉼이 제일 없었던 사람 중에 하나가 모세일 거예요. 그러니까 모세가 얼마나 괴로운지, 날마다 그냥 백성들이 대모하고 막, 그러니까 모세가 열 받아서 날려났는데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3장 보면요. 그날도 출애굽기 33장 14절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같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3:14,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이 모세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처가 뭐냐 좀 쉬어라. 아니 내가 너에게 진정한 쉼을 주겠다. 그러니까 모세는 한때 사람도 때려죽이고, 열도 받고 하는 그런 성격이었는데, 모세가 참된 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쉼을 갖게 되니까 그다음에 정말 멋진 말씀 민수기 12장 3절에 다 같이 읽어요.
 
*민수기 12:3,
3 이 사람 오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할렐루야 그래가고 이겨낸 거예요. 이 사람 모세가 아니라, 오늘 이 예배 참석하신 여러분들 한 분 한 분은 여러분의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 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이게 참된 쉼이 있으면 이게 가능한 것이에요. 올리심을 통하여 여러분 워라벨이라는 말 들어봤죠? 워라벨, 워라벨이 뭐예요?
 
*Work –and-Life Balance. 워라벨이 아니라, Worship-and-Life Balance.워라벨이 되어야,
일하는 것과 쉬는 게 이게 이게 서로 균형이죠 그런데 우리는 워라벨이 아니라는 워십 앤드 라이프 밸런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진정한 쉼을 얻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해석이 좀 있지만 하여튼 하나님께서 21세기에 오늘 마태, 21세기에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겸손과 온유로 무장된 참 쉼이 있는 이번 여름 기간되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전에 우리가 청년 시절에 성경 구절을 가지고 그대로 찬송과 가사로 만든 소위 그걸 보고 가스폴 송, 혹은 스크립쳐 송 이런 말을 많이 했어요. 성경 구절을 그대로 찬송했는데 아주 쉬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 로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런 가사가 있는데 같이 우리 잘 몰라도 악보 읽고 가사가 있으니까 같이 한번 하시겠어요. 하시는 동안에 야 내가 좀 쉬어야지 너 나 좀 쉬어야 합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 되고 내 자식도 좀 쉬어야지. 내 부모님도 좀 쉬셔야지, 우리 공동체도 좀 쉬어야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고생만 쉬어야지, 우리나라 우리 한국 사람들은 쉬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부 다 화가 나가 있어요. 다 열 받아 있고 그냥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있고 근데 이걸 여러분 참된 쉼을 통하여 온유와 겸손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우리 주위가 하나님 주시는 참된 쉼으로 풍성해지기를 축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이 가사 그대로 한번 해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
 
요약,
만성의 피로에 사는 우리에게 참 된 쉼을 주님이 주실 줄을 믿고, 복음의 능력을 통한 진정한 쉼을 얻어서 주님께만 나가면 주어진 참 쉼을 얻음을 깨달아서 멍에를 메고 배우는 쉼의 대상자가 되어 우리의 짐인 무거운 짐들이 온유와 겸손으로 바뀌어야 한다. 지친 자들이 그 쉼으로 다 치유 받아서 영혼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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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7월 2일)
제목: "역사적 신앙관"
말씀: 에베소서 1:3~6
대표기도: 유종성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설교자: 박영선 목사님-초빙(노포교회 원로)
ㅡㅡㅡㅡㅡ
 
*에베소서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이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계획, 의지, 목적 같은 것을 어 증언하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 목적이라는 것의 중요성은 우리들이 다 같이 경험한 것 같이 예수를 믿으면 중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가장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우리가 아는 확인보다 더 큰 의미를 그 문장이 갖고 있다. 이 문장은 이 목적이 하나님의 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느냐? 어떻게 해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 우리가 기독교인이라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에서 자부심과 확신을 갖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시면 모든 종교란 신이 있어야 되고, 그 신의 정체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자들이 그 의도와 방법을 이해하고 쫓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 종교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느냐 하면 내가 진심을 가지고 간절히 빌면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보통 종교가 성립된다. 그래서 무속 신앙이라는 것은 신에 대한 설명이 없고, 신 자체가 없고, 그 갈급한 인간과 인생에서의 비는, 그 고함지르는 것들이 중요한 내용이 된다.
 
그러나 기록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주요, 부활의 주인이시며 심판자라고 얘기하는 것이 순서를 가지며 시간과 과정을 가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때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어? 그럼 난 구원의 확신이 있어.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를 만났어. 그리고 여기에 다음 질문은 모든 걸 건너뛰어서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걸 믿어. 이렇게 끝장으로 가서 그 간격이 없어졌다. 예수를 믿는 게 본인에게 확실하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게 확실한데. 오늘은 그 지갑 되는 거다. 믿고 감격했으면 데려가야 되는데 현실에 다 내버려둬서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할 때. 아무런 혜택이 없고 미 싸운 일을 아무리 외워도 곤란하고 지랄 같은 현실을 아무도 면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하시자는 건가? 라고 다시 돌아와서 왜 성경이 구약이 있는지, 신약이 있는지 우리가 왜 예수를 믿고 나서도 현실에 갇혀 있어야 되는지, 예수를 믿으면 우리 보통 승리주의라고 표현하는 것 같이 우리가 자리를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의를 베풀고 복을 베풀고 하는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이,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권력으로, 폭력으로 증언하시지 않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해놓고 우리에게 특권을 주시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실존적 신앙관에 역사적 신앙관을 보태야 된다. 실존적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은 규칙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아는 것 이것이 실천적 신앙이다. 난 예수가 누군지 알아. 나는 예수를 믿어. 예수님도 나를 알아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어. 이건 다 실존적 신앙입니다. 교훈이 아니며 어떤 구호가 아니며, 내가 알고, 내가 붙잡힌 어떤, 어떤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이 구원론적인 신앙 고백이다. 구원론 적이라는 것은 예수를 모르다가 예수를 알게 되어 구원받은 소위 말하는 중생 그리고 천국이라는 소망 속에 있는 것이 다 구원론이고 하나님은 구원론을 벗어나 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잘 외우시는 요한복음 3장 16장 같이,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조를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러면 안 믿는 것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 예의를 다해서 안 믿는 님 들은 어떻게 되나요? 놈이 되나? 남이 되나? 우리의 신앙을 확인할 때마다 여러분이 쓰시는 방법은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어. 라는 이분법이란 말이다. 근데 성경은 훨씬 크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범위를 창조 세계 전체를 끌어안고 계시단 말이다. 믿었느냐 안 믿었냐는 중요한 구별이지만, 하나님은 여기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쪽에도 하나님이시더라 말이다. 우리가 아직 믿었는데도 천국을 못 갔듯이 이들도 안 믿었는데 아직 지옥에 안 가고 살아남아 있고 둘이 합작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되는 인생을, 역사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는 믿어 난 천국 갈 거야’ 라고 얘기하는 것으로는 일상을 살 수가 없다. 안 믿는 사람들하고 살아야 되고, 믿음으로 분명치 않은 형편을 현실을 살아야 되고, 가서 직장생활을 해야 되고, 동료가 있고, 상관과 부하가 있고,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그리고 그 나라의 형편이 있고 사회의 정신이 있고, 하나님 속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백에 단순한 분명함같이 인도하시지 않고 이렇게 알 수 없는 자리에 우리를 두시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질문이 돼야 된다. 이 모든 질문들을 이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나는 믿었어. 착하게 살면 돼. 착하다는 거는 답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 착하다는 말에 반대는 뭔가요? 악하게 사는 거 아니요, 우린 악하게 살지 않는데, 착하게 살아도 아무 보상이 없다. 착하게 산다는 걸로는 예수님이 오셔야 될 필요는 없다. 착하게 사는 것은 맹자와 공자면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일을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썼는가? 이건 훨씬 큰 문제다. 하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착하다는 건 우리가 아는 도덕법이다. 윤리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거죠. 잘 아시는 욥기는 구약 성경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욥기 1장에서 그는 의인이다. 라고 소개된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고난을 받고 어려움에 처하자 친구들이 와서 너 회개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맞는 거래이다. 왜냐하면 설정이 욥은 의인이다. 그런데 고난을 당한다. 재산도 뺏기고 자식도 다 죽고 자기까지 병에 붙잡혀 있는데 그는 의인이라 한다. 친구들은 와서 그들이 아는 신앙은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벌 받는다. 라는 잣대밖에 없으니까 빨리 회개해라 그러니까 여기, 난 회개할 거 없다. 여러분한테 뭐라 그러겠어요? 우리도 다 하는 거야 너 교만해 니가 잘못한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야? 라는 식의 판정밖에 내릴 수 없듯이, 친구들도 그랬다. 야, 너 말 그따구로 하는 것만 봐도 니가 잘못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잘못했단 말이냐? 이렇게 됐죠? 그러니까 욕이 그게 내가 환장하겠는 거다. 내가 잘못하지 않는데 왜 이 꼴이냐 니들하곤 얘기가 안 되는데 하나님께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뭘 하냐 하면 창조 세계를 보이신다. 또 악어를 봐라 또 우박 창고를 봤냐 이거 누가 만들었느냐 왜 만들었느냐 이게 무슨 뜻이야? 이 있는 것들이 자기에게 조건이 있고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물이냐 아무 조건도 없는데 내가 만들었다 창조주시잖아요? 하나님이 욥에게 하는 대답은 이건가요? 욥의 질문은 “하나님 난 억울합니다.” “넌 뭐가 억울하냐?” 하나님, 왜 일을 이 땅으로 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당당하다 이거지 그렇죠? 난 잘못한 게 없잖아요? 야 그럼 애들은 잘해서 생겨났냐? 이건 하나님의 기쁘신 뜻, 하나님의 권능의 결과물들이다. 너희는 이런 세상의 창조물들과 훨씬 다른 내 상속자야. 내 후손이야. 내가 너를 잘잘못에 따라서 보상하는 정도에 불과하단 말이야?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데 너 잘못만 안 하면 돼. 매일 집 안에서 나오지 마, 그러는 부모 봤어 너 해봐, 해봐 자식이 뭐라 그래요. 저 공부 안 하고 나가서 장사할게요. 공부는 해서 뭐해요. 나 공부하기 싫어요.
 
그러면 부모가 뭐라 그래요? 내가 언제 너보고 돈 벌어 오라 그랬어. 이 새끼야! 이 니가 커야지 뭐 훌륭해줘야 될 거 아니야! 자식이 부모만 못하다. 라고 얘기하면 평생 원수가 되는 거다. 누구가 미우면 그러세요. 왜 본인은 훌륭하신데, 자식은 그 말 못하세요 그러면 그날로 이제 안 보는 것이다. 자식을 칭찬하면 아이 부모님도 훌륭하지만, 어우! 그 아드님은 바르세요. 그러면 그날부터 만날 때마다 뭐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고 한다. 성경이 그러는 거예요. 야곱이 그 하나님과 씨름을 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이 고집을 꺾지 않자, 환도 뼈를 꺾는다. 집어 간다. 못 간다. 축복해 주셔야 됩니다. 왜 축복을 해달라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물어본 거예요. “그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뭐냐? 그렇지 너는 야곱이지. ‘야곱입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고, 약탈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의 표현으로는 날강도다. 날강도, 날강도란 강도짓이 도덕적으로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라 저는 제 필요를 누구에게서 뺏어 와야 되는 자다. 제 필요를 채워줄 자가 없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너 다시는 그 이름을 쓰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이다.” 인간이 무슨 하나님과 싸워서 얻을 게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거예요. 너는 남의 것을 뺏어 와야 되는 보호자가 없는 넌 고아가 아니야. 넌 강도짓을 할 필요 없어. 내가 네 부모야. 자식이기는 부모봤어? 이게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위해 존재하라 그러지 않고, 너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라. 라고 얘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인데 예수가 오신 이후고 결과물인데 그걸 역사로 보인다. 야곱에게서도 그 유명한 창세기 28장 벧엘 사건이 그렇지 않은가? 돌베개하고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축복하신다. “너 누운 땅 동서남북을 다 너와 내 자손에게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약속을 주시면서 그때 “니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함께하고 너를 이리로 데려올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그게 20년이 걸린다. 근데 가서 개고생하고 말이 자꾸 험해지는 이유가 뭐야 분위기에 자신이 생겼나 보죠. 다 우리 편 내 자식이라는 느낌이 들어와서 그렇다. 20십 년을 왜 놔두는가? 거기서 악착 같이 번 것을 여기 와서 다 잃어버리잖아요? 형한테 다 내주고 혈혈단신으로 남았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거의 다 되고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럼 그 나라 이름이 돼요. 이 역사들이 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신대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경우예요. 경황, 도전, 시험, 경력 이라는 속에서 우리를 만들어 간대요. 왜 왜 결론을 꼭 짚지 않고 이런 과정을 나보고 그래요. 나보고 그래요. 철이 들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 맞는 자가 되래요.
 
오늘 본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래서 찬송을 하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영배하고 무릎 꿇는 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그가 사랑하시는 이 자녀들의 광으로 같이 화음을 이루겠다. 그런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건다. 그게 십자가이다. 그걸 만들려면 뭘 해야 되냐면 시간과 경호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을 나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두 단어이다. 사랑과 믿음, 이 두 단어는 상대가 없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사랑도 상대화해야 되고, 믿음도 상대화해야 되는데 우리는 계속 하나님 앞에 죽으라면 죽겠어요. 뒹굴라면 뒹굴겠어요. 지 까짓 게요 뭐.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윤리 도덕적으로 금욕적이고 자기 비하로서 증명할 줄만 알았지. 커바 커바 아버지가 너한테 뭘 원하는지 따라와 봐라. 는 데는 못 가고 있어요. 겁을 내요. 겁을 낸다고요. 사랑이란 믿음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걸 몰라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과 믿음이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한쪽이 다른 쪽에 조작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각각 자발성을 가져야 된다. 각각이 그래야 사랑이 믿음이 성립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저 아담에서부터 이제까지 전 역사에 걸쳐서 이 자발성을 기른다. 철이 들게 하며, 하나님이 누군가를 뼛속 깊이 그리고 자신의 이해와 인생이라는 경험 속에서 이 자리에 오게 만든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 제일 많이 하시는 게, 한국교회에서 제일 많이 하는 게 회개(悔改)이다. 회개의 약점은 뭐냐 하면 잘못한 것을 지우고 있지 더 나아가는 데가 없다. 윤리와 도덕과 양심은 결코 훌륭한 대로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잘못한 것을 꾸짖을 뿐이다. 기독교가 착하게 살면이 아니라, 커야 되는 문제라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교회에 올 때는 보통 뇌를 안 갖고 오더라고요. 그래서 뭐 얘기가 되는 얘기를 하면 어쩔 줄을 몰라요. 그러시면 안 돼요. 다음엔 꼭 갖고 오세요. 냉장고에 넣어놓고 온대요. 이제 상할까 봐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길러보면 다섯 살 때까지가 제일 예뻐요.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원수예요. 그런데 자식에게 이 병이 생기면 큰일이에요. 이게 뭐냐면 안 크는 거 애가 안 크면 큰일이에요. 그죠? 애가 다섯 살로 영원무궁이 산다. 그렇게 끔찍한 것도 없어요. 밤낮 도리도리 작곡만 하고 그럼 큰일이라고요 이가 커야 돼요. 크는 증거가 뭐죠? 키가 크죠. 체중이 늘죠. 그리고 말을 안 듣는다. 이건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크는 거다. 싫어가 나온다. 싫어, 난 이러고 싶어. 반발이 나온다. 우리는 이게 절정에 이 절정에 다 달았을 때를 사춘기라고 한다. 사춘기는 자기 주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납득을 해야 하겠어 난 이해가 안돼. 난 이렇게 해보고 싶어. 이걸 다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게 없으면 안 된다. 왜? 부모님이 그렇게 이렇게 하라. 그랬는가? 왜 부모님이 공부는 꼭 해야 된다. 그랬는가? 여러분 다락방 방장(순장) 정할 때도 학력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공부는 맞선 볼 때도 나오고, 성가대 대원들도 아마 학력은 봤을 걸로 생각이 든다. 학력은 학력에 등급이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해지는 인류가 발명한 최후의 방법이다. 공부는 지름길이 없다 노력해야 된다. 하고 또 해야 된다. 포기하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을 공부해서 배우는 것이고, 인생 자체에서 배우면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이제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는 그 아들을 보내서 출발시켜서 만들어가고 싶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에베소서 4장 30절식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라.” 라는 성경이 말하는 성숙과 신앙의 어떤 지점인 것이다. 왜 그러면 이걸 좋은 말로 하시고, 좋은 분위기에서 하시지 않고, 이렇게 못살게 구시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데 성육신에서 그게 나타난다. 성육신이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러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요한복음 17장을 유언같이 기도문으로 남기는데 거기 이런 약속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어.”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다. “우리 안에 있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게 하시리라.”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부르신다. 이게 기독교이다. 로마서 8장에서도 “우리는 다시 두려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이런 성경의 얘기들이 이렇게 복종하는 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만드는 싸움이고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분별과 판단에 절정에 올라와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의 연합을 할 수 있게 우리를 만드시는 일을 역사 내내, 모든 인생 내내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내신 것,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교훈한 것을 가르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배워 지키게 하라.” 라는 명령을 준다. 땅 끝까지, 땅 끝까지는 선교적 표현에서는 이방 나라들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땅 끝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에서 우리만큼 온 나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땅 끝이고 여러분이 거기 태어나셔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한 과거 유교와 불교의 유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우리로 하여금 내가 있는 거기가 내가 너를 보낸 자리다. 라고 얘기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지셨던 별명,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예수가 우리에게 오신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데 그 메시아가 인류 속에 들어오시므로 인류는 구원의 대상이 되었고, 그 복이 되었다. 를 나에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고 너희가 땅 끝까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 제자가 되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에 있는 것이다. 거기가 여러분들이 매일 일을 가는 그지 같은 현실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예수님이 볼 때 우리가 거지같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안 그런가? 죄인들 속에 오는데. 하고 아 모욕하고 드디어 죽인다. 거기에 예수님이 오시는 방식으로 우리가 보냄을 받고 있고, 우리는 그 부활을 본 자이고, 요한복음 14장식으로 얘기해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든지 내가 이루리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 에 들어 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기적을 도입하여 책임을 면하지 않는다. 죽는 길을 가신다. 죽는다는 걸, 여러분 최악의 진심, 최악이라 그러면 안 되고, 극단의 진심이라고 보시지 말고, 그 영광과 진리를 이해받지 못하는 데까지 가야 된다. 그들이 다 믿어야만 여러분의 사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자리에도 가라. 끝까지 몰라도 된다. 그러나 너는 내 책임을 해라. 이렇게 보냄을 받는 것이다. 로마서 12장식으로 얘기를 하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마라. 저주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이게 세상을 살아야 되는 신자들에게 준 명령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손으로 악을 이기라는 우리가 윤리 도덕적 정성에 묻혀 있던 신앙의 수준에서는 악을 감동시키는 선, 상상하곤 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악당이 악당 노릇하는 것 같이 너는 네 자리 지켜라. 지지 말아라. 그를 이겨야 된다. 가 아니라, 니가 흔들리지 마라. 이런 얘기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형통하게 살기는 글러 먹은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의 문을 열고 있다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고 있다. 라는 걸 알고 살아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복음적이고 선교 적이라는 것은 말투나 어떤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성에 있어야 된다. 세상이 만든 인간과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뭐가 다른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다려 줄 수 있다. 정죄하지 않는다. 보복하지 않는다. 여러분을 아주 완연하게 다르게 만든다. 그러나 얼른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누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너는 좀 이상해 뭐가 아니? 하여튼 이상해. 왜 너는 화낼 때서 화를 안 내 그리고 화 안 낼 때서 화를 내 판단 기준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길이 다른 것이다.
 
이 길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은 여러분을 그 아들을 보내셔서 만드신 구원 메시아에게도 이렇게 선언한 것 같이 히브리서 5장 8절같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권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 왜 순종과 온전함이 등장한가? 신인데 뭐가 부족하단 말이죠? 죄로 말미암은 사망의 자리를 경험하시는 것이다. 그가 육신으로 오신 것은 히브리서 식으로 사망을 맞보러 오신다. 사망으로 사망을 물리치러 오신다. 사망에도 들어오신다. 그러니 여러분, 어느 누구도 내가 살아있는 한,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운명이 끝났다고 저주하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현실에서 여러분이 제일 어려운 것은 나는 잘하고 싶은데, 내 옆에 동료들이 자라지 않더라. 말이죠. 악착하고 거짓말을 떡 먹듯 하고, 떡을 1년에 한 번 먹나? 이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왜 여기다 넣으셨어요? 그걸 모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구라이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는 순교시대도 지났고 부흥시대도 경험했다. 이것은 하나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과정이다. 목숨을 걸 수 있다. 그리고 너무나 풍성하다 감동적이다 이상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에 어디로 가야 돼요? 철이 들어야 되는 거야. 철이 들면 가장 중요하게 뭐가 있냐? 세상 짐을 같이 쳐야 된다. 이웃의 짐을 져야 된다. 저들은 모른다.
 
아버지와 저들을 사하소서! 는 멋있는 대사가 아니라, 실제로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다는 걸 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사실, 예수님 세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 제일 억울해. 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예수가 걸으신 길과 그 존재를 잊고 있다. 예수님을 아무도 못 알아봤듯이 세상은 우리를 못 알아본다. 예수는 왜 믿어? 그딴 소리나 하죠.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넌 몰라도 돼. 그 말할 때가 제일 좋다. 그러면 여러분이 신앙생활이 현실에 이어진다. 현실에 왜 이 지지고 볶는 걸 반복해야 되나?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환경과 조건을 요구하시는가? 해서 여러분이 거기에서 변한다. 어떻게 변하는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데서 아는 것이 한 걸음이라면 그 아는 것을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된다. 실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훈련을 해야 된다. 하고 싶은데 안 된다. 물어본 적 있는가? 왜? 나는 안 돼요? 내 정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실력이 모자라니 내일 다시 하자 다시 하자!! 다시 하자 언제쯤 처리되나요? 제 경험엔 환갑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좌절과 수많은 자책감에 사로잡히는 날들을 지나가야 처리된다. 안목이 생기며 분별이 생기며 선택할 수 있으며 책임질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더 가자 그러신다. 그 영광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종말, 천국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모든 인류를 예수를 보내서 구원한 것 같이 우리를 보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기르시며, 우리를 통하여 영혼들을 부르시며, 천국에 백성들을 만들어내신다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역사와 인생의 주인의 동반자가 된다. 이를 기억하여 여러분의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살아내는 그 아무것도 아닌 습관 같은, 개념 같은 그 나날들이 여러분을 만든다는 것 여러분의 그 분노와 원망과 그 절망들이 그게 우리에게는 한 단계씩 높아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뜻깊은 그 아들을 보내신 사람이 여러분들의 생애에서 다시 꽃피는 귀한 증거들을 기적들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요약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일하고 계시듯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녀들은 저희임을 알아서 복되고 명예롭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기적과 은혜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실패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영광의 찬송이 되고 세상이 상상하지 못하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인류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 인생으로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역사적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성부는 태초에 인간에 대한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성도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끝없는 사랑의 아버지로서 우리들을 향한 변함없는 도우심과 인치 심을 인하여 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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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6월 25일)
제목: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리라"-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 22번째 설교.
말씀: 요엘 2:28~3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이기원 부목사님
사회: 손문수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요엘 2:28~30,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ㅡㅡㅡㅡㅡ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리라“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 22번째 강에 성령을 한량 없이 부어주시리라라는 제목으로 복음적 평화 통일 주일 말씀을 전해 주신 후에 성찬식을 집례해 주시겠습니다.
 
▶ 오늘 우리 복음서 평화 통일 주일이고, 또 성찬식도 있고, 이런 가운데서 오늘 이 말씀을 주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남과 북의 이 견고함은 힘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주의 영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다른 길이 없다. 그 오늘 성찬식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데 그냥 되겠는가? 오늘 주의 영이 우리 가운데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동시에 오늘 아마 이 자리는 개인적으로 참 너무 힘들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삶을 인생의 이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고통 하는 분들도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들 만져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 제목을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 주리라" 요한복음 3장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구절인데 성령을 어떻게 부어주신다고요? 한량없이 오늘 조금만 받고 가시겠어요? 아니면 한량없이 받고 가시겠어요? 오늘 한량없이 성령 체험하고 돌아가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들에게 유익하다 그랬다. 승천하실 때, 고아와 같이 고아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는 그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 아니 주님이 떠나는 것이 어떻게 유익합니까? 이유가 있다. 이유는 뭐냐? 내가 떠나야 보혜사 성령을 너희들에게 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나와 있어요. 내가 떠날 때 너희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Another 또 다른 Another! ‘보혜사’란 말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상담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를 comform, 우리에게 안전을 주시는 분이시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예수님이 오르신 날 예수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들을 성령께서 또 하실 것이다. 그것도 예수님이 땅에 계실 때는 이스라엘 그 공간의 제안을 받았지만, 이 성령님은 공간의 제한 없이 모두에게 허락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뭐 하다고요? 유익이다. 이게 참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너희들의 유익이다. 그래서 이걸 오늘 여러분들이 왜 우리에게 유익인지를 또박또박 좀 말씀을 살펴보고 성찬에 참여할 때, 개인적인 삶의 파도, 국가적인 통일의 과업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오늘 이 성찬식을 통하여 여러분의 것으로 확보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한다. 오늘 본문은 28절에 요엘서 2장의 본문에 보면,
 
*요엘 2:28,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너무 유명하죠. 그 후에 그래서 그 후에, 이 요일에서 이 내용은 주전 800여 년 경에 활동한 선지자죠. 요엘은,,, 이걸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데 이 말씀의 요지는 그 후에,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준다. 그렇게 돼 있고 이 요엘서 2장을 그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날, 베드로 사도가 설교를 할 때 이걸 그대로 인용을 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사도행전 2장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세의 내가 내 형을 모든 육체에게 보여주겠다.” 똑같은 내용인데 그 후예가 뭐로 바뀌었는가? 눈 감고 기도하시는 분들 저 좀 쳐다보세요. 아침에 얼마나 피곤하세요. 다들 주무시는 것도 교회 와서 주무시면 좋아요. 저는 아이 오픈 주무시다. 그러나 갑자기 불을 받기를 바라는 거에요.
 
첫째 요엘서는 뭐라고 되어 있다고요? 그 후에,,,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얘기한다고요? 말세에,,,,
여러분 지금은 그러니까 단순히 그 후에가 아니라, 말세에, 지금 이 순간에, 오늘 나에게, 지금 이 순간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이걸 여러분들의 것으로 완전히 확보해야 돼요. 다시 한 번 그 후에 내가 내 형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그래서 이 내용을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간략하게 이 요절이 28절인데 말세에, 오늘 이 시간, 내 영을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 네 가지가 여기 포함되어 있는데,
 
*요엘 2:28,
28 그 후에 ㅁ⓵내가내 영을 만민에게 ⓷부어 주리니 =성령님의 인격.
 
첫 번째 누가? 1 누가? 내가, 내가 누가 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두
두 번째로는 뭐라고요? 내 영을 내 영을 이 성령님의 인격이에요.
세 번째로는 누구에게 주리니 부어 주리니. 부어주겠다. 부어주겠다. 충만하게 그리고
네 번째는 뭐에 준다? 이거는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 목자의 심정, 선한 목자의 심정을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의 결심과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해요. 내가 하나님이 뭐해요? 주권 여러분의 실력과 능력이 결려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면 되는 것에요. 그러니까 이 시간 우리가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의 해가 이 빛나네. 주님을 우리가 목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는 거예요. 내가는 하나님이에요. 두 번째로는 뭐? 내 영을 성령님을 이거는 어떤 물리적인 이 정도가 아니라, 말씀을 통한 깨달음, 임재,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그다음에 부어주시겠다. 한 방울 두 방울이 아니라 부어주시겠다. 한량없이 부어주시겠다. 그리고 주시겠다. 사람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분명한지 그냥 적당히 하느라 30절에 보니까 뭐라고 나와 있냐 하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요엘 2:28~30,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 피와 불과 연기 기둥, 오늘 이 내용이 적당한 것이 아니라,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세요? 어떤 분들은 목사님, “쫄립니다.” 어떤 분들은 “장엄합니다.” 어떤 분들은 “너무나, 너무나 깊이와 영광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피는 구원을 의미하고, 피는 여러분들을 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다음 불과 연기는 심판도 있지만 불과 연기는 구약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 불과 연기 기둥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예요. 이만큼 장엄한 것이 이건 선포예요. 마치 마그나카르타와 대헌장과 같이 그러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통일의 문제가 있고, 그다음에 오늘 성천식의 은혜를 받고, 또 우리의 삶의 파도를 헤쳐 나갈 때에, 그냥 적당한 것이 아니라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그만큼 실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과 하나님의 인재가 있는 것이다. 사실적인 현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걸 다 한껏 묶어가지고 뭐라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3장 34절에 다 같이 시작.
 
*요한복음 3:34,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할렐루야!! 오늘 저는 1부부터 4부까지 한량없이 부어주셔야 되는데, 여러분들 일부에 있는 분 여러분들이 한 명 없이 성령의 부으심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한량없는 성령을 부어주심 이게 왜? 이렇게 요한복음 3장에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신다. 굉장한 여기가 포함돼 있는데 나중에 베드로도 깨닫고, 요한이 깨닫고, 다 깨달았는데, 여러분,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라는 말이 계속 이렇게 반복이 되는데 천국이 우리의 것이며 천국이 너희에게 있다. 천국이 너희 다른 데 찾아봐. 너희 속에 천국이 있다. 천국을 실재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하실 때 요한복음에는 천국이란 말 대신에 영생이라는 말로 바뀌어졌어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영생으로 치환이 됐어요. 그러니까 이 영생이라는 말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신다. 피와 연기와 그다음에 불의 역사, 이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저와 여러분들이 미래의 현장을 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인 줄 믿는다. 지금 여러분들이 기대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도 지금 맛볼 수 있다는 거, 지금 맛볼 수 있는 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이 너무, 너무, 너무 엄청난 것이다. 지금 영생을 맛보고 지금 성령을 한량없이 맛보고, 지금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찬식을 한다는 것이 보통이 아니에요.
 
이것은 늘 얘기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는 부족하고, 우리가 모자랄 수도 있고 우리가 연약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오늘 이 성령의 역사를 지금 체험하는 하나님의 백성과 대상이 되었다고 말할 진데, 영생을 지금 이 자리에서 현재로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진데 “하나님, 오늘 이 성찬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한량없이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오늘 말씀대로 성령을 한량없이 체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폭포수같이 그러면 성령을 한량없이 체험 받는다는 것은 오늘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드리겠다.
 
이 두 가지, 기도의 제목을 드리겠다.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으로 내 것으로 되고, 확인될 때에, 오늘 성령을 한량없이 부음 받고 체험 받는 현장, 성도, 개인 기도가 될 것이다. 첫 번째 기도제목은 뭐냐? 성령의 부어 주심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I. 성령의 부어짐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진다.
-이거야.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하나님의 뜻 성령의 역사는 오늘 요엘서에서, 선포하고 예언한 이것이 베드로 사도를 통하여 그대로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대답이 이렇게 희미하죠? 요엘서 2장에 있는 이 말씀이 사도행전 2장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에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난 곳 방언으로 들었어요. 대인 방언으로 들었어요. 우리 지금 무슨 내 영의 망언이 아니라, 막 말이 말 9개국으로, 10개국으로 막 들리는 거예요. 그 현지 사람들의 말로 막 베드로는 그냥 설교하는데 그냥 그 현지 그러니까 제가 한국말로 설교하는데, 브라질 사람 브라질 말로 들리고 미국 사람 미국 말로 들리고, 그 다음에 저 저 저 필리핀 사람 필리핀 말로 들리고, 일본 사람 일본 말로, 중국사람 중국말로 들리는 것이에요.
 
이거 기가 막힌 거 아니에요 주요 그런 날도 좀 오게 해달라고요. 하다못해 막 다 이해는 안 가더라도 그 영감을 느끼게 해달라고 말이죠. 이게 난 곳 방언으로, 대인 방언으로, 또 한꺼번에 3천 명이 주님 앞에 들어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에요. 뭘 말합니까? ‘하나님의 뜻은 오늘 하나님의 뜻은 성령에 부어주심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확장하고 진보하고 발전하고 성숙되는 것이다.’ 이게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것이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퇴보하는 거 아니다. 과거에 한때 잘하는 것으로 끝나는 거 아니다. 오늘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신 받으면 예외가 없다. 누가 그래요... “목사님 6.3 집회 후에 목사님 더 달라진 것 같아요!!.” 한다. 달라지기는 뭐가 달라집니까? 다 똑같은데요.. 그러나 뭐가 달라지냐면, 성령의 역사를 더 사모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일을 더 사모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더 발전하고 확장하고 성숙한다.
더 전진한다. 그러니까 성령에 부어주심이 있으면 예외가 없이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전진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고 발전하게 하는 줄로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도 그렇고, 우리 개인적으로도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하여 주님을 더 닮아가게 되고, 주님의 영광에 영광,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더 많이 체험하게 되고, 믿음은 더 전진하게 되고 더 성숙하게 되는 줄로 믿는다. 이게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지금 우리 우크라이나 사건도 있고, 개인적으로 보면, 수많은 낙심들, 일들, 좌절할 일들 많고 ,사회적 환경도 어렵고, 막 극단적인 우리 진영 대결들도 있고, 아버지를 아버지라(호부(呼父)호형(呼兄)) 말도 못하고, 그래요. 막 수많은 우리가 볼 때 너무나 이상한 일도 많고, 그런데 우리가 진실로 성령의 역사에 눈이 열리고, 진실로 집중하면 결국은 성숙하고, 진보하고, 하나님의 뜻은 더 많이 이루어지고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다 일이 안 돼도, 우리는 성령님 때문에 거룩한 낙관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를 보십시오. 도저히 낙관론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성전은 다 허물어지고 솔로몬과 다윗의 그 영광스러운 시기에, 다윗 왕국의 모든 영광은 다 사라지고, 폐허가 되고, 잿더미가 되고,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고, 퇴보되지 않고 확장될 것을 믿는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날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부으심을 통하여 하시는 이 일은 우리의 생각을 항상 뛰어넘는 것이에요. 1세기에 초라한 어부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겠다고 하시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로 하는 이 세계 비전을 갖게 하셨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성령의 부어주심이 역사 때문에 가능하게 된 줄로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여러분들 마음에 소원하세요. 그대로 될 거예요. 주님 내 생에 아직 최고는 오지 않은 줄로 믿는다. 사실이죠. 우리 영화의 몸을 입고 더 성화되는 것,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늘 말한, The best is yet to come. 더 베스트 이즈 엣 투컴. ‘최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주님을 더 닮아갈 수 있게 하시고 저도 그렇고 여러분 모두가 다 오늘 성찬식에 모두가 다 내 생에 아직 세워 오지 않은 줄로 믿는다. 우리가 주님을 더 닮아갈 걸 생각하며 영광의 몸을 걸 생각하면서 더 좋은 날, 더 귀한 날, 더 승리의 날이 앞으로 임할 줄로 확신한다.
 
이게 바로 오늘 내가 내 형을 만민에게 부어주시겠다는 그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에요. 영적인 전진과 성숙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 번씩 제가 얘기하잖아요. 토비새에 넣으면 그냥 헤맨다. 토비새에 나오면 적당하다. 이게 아니고, 토비새에 나오면 평범한 인생이 뭐가 된다고요? 비범한 인생이 되고, 토비새에 나오면, 버려진 돌이 뭐가 되고요? 모퉁이 돌이 되고, 토비새에 나오면 영적인 균형 감각을 갖춘 거룩한 역량이 생기고, 이런 일들은 모두가 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전전하게 하시고 확장하게 하시는 그런 결과로 나타나는 줄로 확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은 요엘서가 사도행전을 통하여 확장되고, 확인되고, 펼쳐진 것처럼 성령의 역사 성령이 부어주시면 여러분의 여러분과 저의 삶의 확장성과 전진성이 있는 줄로 믿는다. 늘 내가 이야기 하지만, 아브라함, 이삭 그다음에 야곱, 요셉, 점점점 확장되는 것이다.
 
모세의 출애굽은 여호수와의 가나안의 정복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옵시고, 여호수와의 가나의 정복은 다윗 왕국으로 이어지게 하여 주시며, 다윗 당국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로, 그리고 12 제자와 70인 전도 대와 마가의 다락방에 120명을 통하여 확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우리 육신의 몸을 죽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죽어도 하나님의 일은 결코 죽지 않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뜻도 죽지 않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람이 땅에 묻힐 때에도 하나님의 일은 땅에 묻히지 않은 줄로 믿는다. 왜냐하면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시고, 지금도 일하시고, 지금도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중국에, 참 중국 선교사로서 나중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죠. 그러나 중국 내지 선교회와 OMF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omf의 창시자 죠지보그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본향으로 갔다. 그런데 로고스와 둘로스의 그 사역은 지금도 세계를 누비고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성령을 부어 주셔갖고 확장시켜주시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주님 성령은 진리이다. 그리고 진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확장성이다. 전진하는 것이다.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연세가 많다고 이 생각하지 말고 또 내 삶이 어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 성령에 부어주심의 역사를 통하여, 성찬식을 통하여,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이 확장되고 전진하고 성숙되게 하여 주실 줄로 믿는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에요 성찬식을 통해, 그래서
 
※마이클 호튼이라는 복음주의 신학자는 “하나님의 나라는 세례와 성만찬이라는 두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계속 전진하고 확장된다.” 라고 했다. -마이클 호튼-
 
오늘 성찬식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더욱 견고하게 세워지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전진되고 성숙되고 확장되기를 소망한다. 또 기도 제목 하나 두 번째 기도 제목은 오늘 약속은 누구를 위한 것이? 먼 데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약속은 만민을 위한 모든 육체를 위한 약속이자, 그다음에 중요 나를 위한 약속인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것이다.
 
II. 오늘 부어주심의 약속은 만민을 위한 약속이지, 나를 위한 약속이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부어줄 거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의 부어 주심의 사건은 어떤 지도자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32절에 32절에 뒤에 보니까,
 
*요엘 2:32,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주듯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듯이, 오늘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특정 계층이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 없이 다 차별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은 차별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끼리 모이고, 닮은 사람끼리 교제하고, 우리는 차별한다. 우리가 차별하니까 성령님도 차별하는 줄 안다. 여러분 성령은 차별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오늘 28절과 29절에서 성령이 어떻게 차별이 없으신지 보면,
*요엘 2:28~30,
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첫째는 하나님은 나이를 차별하지 않으신다.
-성령의 부어주심은 나의 차별하지 아니하고, 세대 차이가 없는 것이다. 늙은이는 뭐예요? 꿈을 꾸고, 젊은이는 어떻게? 이상을 보고, 자녀들은 장례를 말하는 것이다. 늙은 애는 뭐 하고요? 제가 늙어내라고 하니까, 여러분들 저기 뭐야 섭섭해 하지 말라. 본문이 그랬죠? 본문이, 늙은이는 꿈을 꾸고, 그다음 너희 자녀들은 뭐야 장래를 말하고, 젊은이는 뭐예요? 이상을 말한다. 이상을 말한다! 늙은이가 꿈을 꾼다는 말은 지난주에 말씀했는데, 우리가 살다 보면 늙으니까 이 육신의 장막이 약해진다. 누가 그러대 80이 넘으면 종합병원이라고, 종합병원 이지만 종합병원이지만, 제대로 꿈을 꾸는 성령 받은 어른들은, 나이는 80이지만 외모는 60살, 언어는 40살, 꿈은 20살, 오늘 80대 분들 다 확인하세요.
 
자 다시 한 번 나이는 몇 살? 외모는? 왜냐하면 예수는 사람은 술도 한 별로 안 하니까 이십 년 젊어지는 거야. 어른들 안 믿으시네요. 언어는 최소 40살 그다음에 꿈은? 왜 하나님은 저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지 모르겠어요. 한 번 더 우리 교회 80대 가까운 분들 나이는? 60, 또 이 젊은 분들 다 한 번 더 나이는? 외모는? 왜? 술 담배를 안 하니까 그다음에 언어는? 40, 꿈은 20!! 이게 말이 되는 거예요. 이게 성령이 부어주신 역사가 있으면, 20대나, 70대나, 80대나 차별이 없다. 이 말이에요. 젊은이는 뭘 주시는 거예요? 젊은이 이상을 본다. 우리 사도들은 환상을 본다. 그랬어요. 환상을 본다는 것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하여 젊은이들은 인생의 가장 영광스러운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는 것이다. 저는 젊은이가 이런 꿈과 이상을 갖고 환상을 가지고 인생에 최고의 날을 기대하고 고대하는 거 이 자체가 나는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젊은이 여러분, 우리가 이상과 환상을 성령님을 통해서 갖는다는 것은 아까 앞에 얘기한 것처럼, 우리 인생에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최고의 꿈도 아주 이루어지지 은 것이다. 최고의 노래는 아직 불러지지 않은 것이다. 최고의 시도 아직 쓰여 지지 않은 것이다. 최고의 설교도 아직 선포되지 않았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다. 최고의 믿음의 작품도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았다. 또 우리 교회적으로 보면 아직까지 우리가 꿈을 꾼다는 것은 우리 교회 최고로 멋진 주일학교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 안 해요? 최고로 기백이 있는 대학부도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슨 사랑의 교회가 옛날에 금잔디나 부르면서 과거에 좋았던 것만 생각합니까? 천만의 말씀!!! 오늘 성령 이 체험을 위하여 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사랑의 교회 최고의 주일학교까지 오지 않았다. 사랑의 교회 최고의 대학부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 가장 영광스러운 퍼에버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가장 훌륭한 교회도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넘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성별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내 영을 남종과 여종의 남녀를 차별하잖아요.
셋째는 사회적 계층도 차별하지 않으신다.
-종은 히브리어로 노예이다. 하나님은 남녀 차별 없이, 사회 계층 노예 차별 없이, 성령을 부어주신 줄 믿으시기 바라는 것이다. 이게 성령에 부어주심의 보편성의 보편성, 대단한 사람이나 특별한 사람만 무슨 오늘 신령하게 저 누구처럼 어떤 특별한 은사 받은 사람처럼 그런 분들만 하는 게 아니다.
 
제가 한번은 조용기 목사를 모시고 집회를 했다. 집회를 하는데 저녁을 안 드시더라고, 집회를 했는데 저는 그래서 “목사님은 저녁을 안 드시고 집회를 하십니까?” 안 드신다고 한다. 왜 안 드시냐 그니까 그 시간에 기도한다고 그럼 저는 어디 가서 집회하면 저녁 먹고 집회하는데,,,약간 떫어요. 제가 그래서 제가 조 목사님 보고 그랬어요. “그러면 저녁을 안 드시고 집회를 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한 두세 시간 어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성령 받고 성령 체험하고 말씀을 전하면 어떻게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목사님 뭐라고 하면 “온몸이 찌릿찌릿 해지지.” 그러더라고요. 아 그렇습니까? 그럼 “이 얘기를 누구한테 해준 적 있습니까?”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해 드렸는데,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그리고 기도하고 하니까, 어떻게 빌리그레함 목사님은 설교할 때, One or two feet.붕 떠서 설교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걸 제가 뭐라고 설명을 못하겠는데,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줄 믿어야 되시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이 말씀을 드려요. 조 목사님도 나중에 아프시고 이렇게 다 하시잖아요. 그런데 성령에 부어주신 역사가 있을 때는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 말이다. 성령의 역사는 세대 차이가 없다. 성령의 역사는 남녀 차이가 없다. 성령의 역사는 뭐 차이가 없다? 계층의 차이가 없다. 부유한 자나, 종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술집 여자나, 상류층 여자나, 세상에서 저 사람은 아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나, 병든 자나, 연약한 자나, 몸이 불편한 자나, 낙담한 사람이나, 소망이 없는 사람이나,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 있는 사람도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한 치유와 구원의 능력은 예외가 없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이 성찬식을 통하여, 성령에 부어주심을 체험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일? 보 아니 이 공동체는 시대 앞에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너무 놀라운 거다. 오늘이 성령의 체험을 부어주신 역사를 체험하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을 때에 이 자리에 어떤 위기에 빠진 결혼 생활을 갖는 분도 해결될 수 있을 수 있고, 꿈 없이 사는 젊은이들도 꿈이 회복될 수가 있는 것이고, 연세 드신 어른들도 다시 한 번 내 청춘을 독수로 가서 새롭게 하는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제가 이 성찬을 앞에 놓고 예외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 성찬식 거행하겠다.
 
※제가 아는 뉴욕의 브루클린 타버나클의 짐 심발라 목사님이 계신다. 그분의 딸이 하나 있었다. 첫째 딸이 16세쯤 방황을 시작했다. 미국에 만으로 16살은 이게 게임, 이거 참 이거 진짜 복잡하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 여자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약이나 성 중독 이런 거 심각하다. 그래서 그 딸이 아버지는 유명한 목사인데 하나님을 떠나버렸다 신앙을 버렸다. 그래서 심발라 목사님은 나는 딸을 위하여 별별 시도를 다 해보았다. 딸에게 빌어도 보고, 딸에게 사정도 해보고, 야단도 쳐보고, 울어도 보고, 싸워도 보고, 돈으로 어떻게 좀 마음을 돌려볼 것도 해보고, 오만 걸 다 해봤지만, 뒤돌아보니까 모두 부질없는 행동들이었다. 아무 소용도 없고, 아이는 더욱 완악해져 갔다. 그 아이에게는 16살밖에 없는 그 딸아이에게는 그냥 날라리 같은 남자친구 하나가 꺼벙한 남자친구가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어떻게 이렇게 목사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주일이면 정장을 입고 차를 몰아 교회를 가고 설교를 하지만, 그 순간 울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오늘 어떻게 제가 세 번 예배를 인도합니까? 내 영혼이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님 부디 저의 딸을 구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애를 쓸수록 목사님 애를 쓸수록 상황은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2월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인들과 함께 교인들과 함께 교인들과 함께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때 그 심발라 목사님이 그때 자기 기도를, 기도가 마치 어땠냐 해산하는 여인의 부르짖음으로 풍국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어떤 분은 기도는 요청하는 거, 구하는 거 아니라, 다른 거 기도를 하는 분과 교제하는 거다. 교제도 맞지만, 이렇게 미칠 듯이 힘들면요 통곡하는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는 줄 믿는다. 다시 해산하는 여인에 부르짖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로 끝나고 난 다음에 아내에게 사모님이 말씀했다는 것이다. ‘여보, 이제 이 고통은 다 끝났다고 무엇이 끝났다고 무엇이 끝나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제 악몽은 이제 끝났다.’ 고.... 그리고 서른두 시간이 지난 후 목요일 아침 딸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갑자기 딸이 정색을 하고 목사를 물었다는 것이다. “아빠 누가 나를 위해 기도한 것 같아요? 누가 기도해 줬어요?” “한밤중에 하나님이 나를 깨워가지고 내가 끝없는 잘못된 구덩이로 향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셨어요.” “그리고 하나님 같은 분이 나를 꼭 끌어안으면서 말해주셨어요. 아이 러브 유, 내가 너를 사랑한다.” “아빠, 그날 밤 누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나요?”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하여,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사탄의 가장 강력한 요새도 부순다.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사탄의 가장 강력한 요새도 부순다?” -심발라 목사님 부부-
 
여러분 이거 외에 이 세상을 그리스도인들이 이거 외에 해결할 길이 있는가? 저는 성령을 부어 주셔가지고 여러분들과 제가 갖고 있는 수많은 난관과 난제들을 이거 외에는 다른 길이 있느냐이다? 다른 문제들 앞에서 나는 더 소망이 없다. 포기하고 싶을 수 있지만 여러분 그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실력으로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이 땅을 살아오면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실력만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9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은 소매라는 부르시다.
 
*히브리서 12:29,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할렐루야! 이 땅에 살면서 삶의 경주를 해야 되는데, 인간의 애씀이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불이 있어야 우리가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정말 여러분 위태하고 절망 속에 있을 수 있다. 어때요? 이거 어떡하면 좋아요? 위로부터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불을 다시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이 기진맥진한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불이 있으면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오늘도 이 시간 그의 절대 주권을 가지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차별 없이 기도 제목 두 가지,
 
첫 번째는 성령이 부어주신 하나님의 뜻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점점 확장되고 성숙한다.
두 번째는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다.
-여러분 종말이 되면 말세에 되면 말세의 고난의 때가 온다고 그랬다.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다. 그런데 말세가 되면 고난 닥치는 거 있다. 이거 사실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뭔지 압니까? “말세의 내가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고난이 있다. 이해 못할 일도 있다. 그때 더 중요한 것은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부어 주리니.” 그래서 항상 그리스도 안에 살면 고난과 축복이 섞여 있는 것이다. 결국은 주님의 복을 주심을 통하여 이겨내게 될 것이다. 오늘 이 마음으로 모두가 다 성찬에 참여하는 축복을 한 분 한 분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소망한다. 다 손을 펼치시고 우리가 같이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같이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하겠다.
 
♬~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우리 같이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짐 심발라 목사님처럼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사단의 강력한 요새를 부술 수 있다. 는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 평생의 한이 되는 거, 평생의 고통이 되는 거, 오늘 처리해 버리시기 바란다. 자 우리 고난이 있다. 그런데 말씀이 뭐예요 “내가 내 영을 뭐에 부어 주리니.” 오늘 이 사실을 우리가 믿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면서 말세의 고난이 있지만 주님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을 믿는다.
 
짐 신발라 목사님의 딸을 주님이 해결해 주신 것처럼, 주여 내 삶의 고난의 모든 상황을 해결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성찬의 은혜를 주옵소서. 그리고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 이 어려운 갈등 문제가 해결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 하나님의 역사에, 갑작스럽게 놀랍게 하나님의 때 이루어지게 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약
성령의 부어짐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고, 오늘 부어주심의 약속은 나를 위한 약속이니, 고귀한 성찬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와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기를 사모해야 한다. 가장 영광스러운 날을 예비하도록 믿음으로 전진하고 성숙과 확장을 이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와 온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와 세계교회 위에 이제부터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하반기를 위해 충만한 은혜를 맛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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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6월 18일)
제목: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
말씀: 요한복음 14: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백승준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1.●설교자: 마크 영 총장(미국 덴버신학교 총장-초빙)-1부예배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통역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
2.○설교자: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4부예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
말씀: 갈라디아서 2:20, 5:24,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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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20, 5:24, 6:14,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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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교자: 마크 영 총장(미국 덴버신학교 총장-초빙)-1부 예배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통역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
 
미국 덴버 신학교 총장이신 마크 영 목사님께서 길가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라는 제목으로 주님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다. 통역으로 덴버 신학교 교수님이신 정성욱 목사님께서 섬겨주시겠습니다.
 
-네 예수님의 이름으로 덴버 신학교 이사회와 또 우리 교수님들의 안부 인사를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립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신앙과 또 여러분들이 선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헌신과 또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에 대해서 잘 듣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92세가 되셨는데, 여러분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 오셨습니다. 1951년 우리 6.25 전쟁 때 제 아버님께서 미군으로 참전하셨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님이 전쟁 통에 오셔서 참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한국전쟁 동안에 한국인들이 보여준 그 결단력과 또 환대와 또 그들의 참 섬김과 봉사 이런 것들을 굉장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과 함께 우리 요한복음 14장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생각과 우리의 모든 주의를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장을 다루기 전에 우리 13장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의 그 마지막 만찬 그때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 그 장면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요한복음 13장에 자세하게 나와 바로 그날 6월 절 식사를 그래서 만찬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서 모였던 것이죠. 사실 6월 절 식사는 우리 제자들이 오랫동안 또 여러 번 경험했던 여러분 알다시피 바로 오늘 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유월절 식사는 정말 그들에게 아주 유일한 경험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주님께서 그날 아침, 그날 밤에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그다음에 수건을 동이신 다음에 대야에 물을 뜨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바로 이것은 주님께서 사실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여러 번 했던 것이 아니고 그날 처음 하셨던 것이죠. 바로 주님께서 그들의 발을 시키실 때 그것은 그들의 주의를 끈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사로잡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내에게 이르노니 너희들 중에 하나가 나를 달리라. 바로 거기에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방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제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기 때문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알듯이 이 가른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고, 그는 그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떠나가고 바로 그때가 밤이었다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듣기 싫어했던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뭐냐 하면은 내가 오늘 너희들과 함께 잠시 있겠지만 그다음에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여러 도시를 다니고 그래서 함께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이 함께 갈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이제 올 수가 없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3년을 주님과 함께 있었고, 또 주님과 계속해서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따라올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이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이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제가 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서 제 목숨이라도 버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죠.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느냐? 그러나 오늘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밤에 여러분들이 12명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뒤에 있었어. 바로 여러분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여러분 가운데 안전감, 안전에 대한 그 감각이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미래는 불안해질 것이고 예수님은 어딘가로 가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그 제자가 결국 세 번을 예수님을 부인하겠다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제자들이 마음이 묻어졌겠습니다. 그들의 안전감, 그들의 확실성,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던 희망과 소망은 완전히 철저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우리 14장 1절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3장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본인도 예수님 자신도 마음이 괴로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1,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우리가 잘 알 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더 괴롭게,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괴로운 밤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감은 그들의 안정감이 상실되고 그들의 확실성이 무너지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 흔들리는 것, 그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예수님의 그 정체성,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그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안정감을 가지고 확실성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바로 너희들은 믿음을 가질 때,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너희들이 앞으로 너희들에게 닥칠 미래를 용기 있게 맞이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4:2절에 보니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이르렀으리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 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과거에도 몇 차례 사용하셨던 표현입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을, 그 당시에 그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2:16,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 아버지의 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데, 이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 이 표현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내가 먼저 너희들 먼저 아버지의 집으로, 아버지의 인재 가운데 가서 너희들을 위하여 너희들의 거처를 준비하시겠다는 것이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이 거처할 곳을 준비하시고,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인재로 나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은 그들을 지금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잠시 그들을 떠나지만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예수님이 제자들의 거처를 준비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 내가 가야 하는 ‘그 길을 너희는 따라올 수 없다.’ 고 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만이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아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먼저 가셔서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처를 준비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14장 4절에 보니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4,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님은 오늘 밤만 아니라 그 이전에 여러 차례 주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먼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정치적인 의미로 이루어질 줄로 믿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의 길을 가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 우리가 따랐던 사람, 우리가 정말 존경했던 그 사람이 우리를 떠날 뿐만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겠다고,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의 마음, 우리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14:5,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사실 도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도마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짧은 얘기가 나오고, 11장에 짧은 얘기가 나오고, 나중에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외에는 도마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많이 얻지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마에 대해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분명하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죠. 그는 정말 주님 앞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주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하고 계신지를 분명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도마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또 현실적으로 그의 의심을 풀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현실주의자인 도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믿음이 연약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시지 않고도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지금 따라갈 수 있고 어떻게 예수님을 끝까지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묻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대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마야 네가 가는 길, 네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싶으냐? 바로 내가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도마야 넌 정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알고 싶으냐?” “하나님의 임재가 바로 나고 바로 나는 너 앞에 있다.”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매우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We seek a sense of security.
 
우리는 안전감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확실성을 추구하고 우리는 희망과 소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감을 추구하고 확실성을 추구하고 희망을 찾기 위해서 여러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내가 길이오 진리여 생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 주에 있는 많은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그것들을 지금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전해야 될 메시지를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요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헤어져서 예수님과 떨어져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생명이었고, 예수님의 말씀 그 생명은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내가 나는 부활이오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력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서 요한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생명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의 배타성, 이 말씀의 배타성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절대로 이 배타성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하실 때 여러분들에게 무슨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도마가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이 듣고 싶었던, 들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 바로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꼭 들어야 할, 반드시 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것은 여러분들이 들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 그것은 오늘 바로 이 세상이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하나 있는 메시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로 이 예수님의 자기주장이 우리들의 정체성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참되신 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기를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면 우리는 모든 다른 사람들, 우리 옆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들을 그 진리와 그 생명과 그 길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없이 진리를 찾고, 길을 찾고, 생명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여러분이 도시 중앙에 서서 여러분이 가는 길, 가야 될 길을 알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와가지고 길을 묻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저는 그 길을 압니다.’ ‘그럼 저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시겠어요?’ 라고 물었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알아서 가십시오. 내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아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길을 안다면, 여러분들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을 그 길을 어떤 사람이 찾고 있고 묻고 있다면 그리고 그 길을 나에게 가르쳐달라고 요청한다면 그러면 여러분 당연히 그 사람에게 여러분이 그 길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죠. 그 부분을 모르는데 어떻게 질문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 군데를 여행을 하다 보니까,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제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사람들은 제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챕니다. 그래서 도시에 서가지고 중앙에 서서 어디로 가야 될지 어디가 길인지 당황하고 있을 때, 그리고 제 얼굴을 보니까 벌써 제 인상을 보니까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어떤 친절한 사람이 다가와서 좀 도와드릴까요? 제가 길을 찾는 걸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 길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들에게 내가 그 길을 가르쳐주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바로 초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그것은 길이라고, 그 길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의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제가 속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드리는 유일한 기도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을 알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셨으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고백하며 믿고 감사해야 한다. 세상의 근심과 마음이 흔들릴 때,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이 임재하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길 소망하며,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증거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확실한 안전과 희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복음의 진수를 깨닫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 즉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사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우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되신 그리스도를 확고히 믿고 따라가야 하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 그 처소는 땅에 있지 않으며 사람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신령한 집이다. 이 처소는 성도의 헌신을 재료로 하여 계속 지어지고 있다. 우리는 불타 없어지는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금, 은, 보석으로 짓는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있는 처소는 지상의 비좁고 한정된 것과는 달리 온 인류를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무한하고 충분한 것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길은 어느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이나 통로를 뜻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진리는 변치 않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또한 여기서 생명은 영생을 뜻한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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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설교자: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4부예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
말씀: 갈라디아서 2:20, 5:24, 6:14,
 
*갈라디아서 2:20, 5:24, 6:14,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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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이 오후 시간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기쁨, 평강 또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 한번 인사합시다. 오늘 참 잘 오셨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 저와 여러분이 고백하고 믿는 기독교 신앙을 다른 종교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기독교의 유일 절대성 오늘 우리 1, 2, 3부 마르크 영, 덴버신학교 총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모든 다른 종교들과 우리 기독교를 구별해 주는 기독교가 모든 다른 종교들로부터 구별되는 절대적인 특성 특정이 있다면,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거죠.
 
여러분 믿으십니까? 기독교라는 게 영어로 크리시 애너디라고 할 때, 이게 바로 ‘크라이스트’라는 단어에서 나왔잖아요? 그죠? 그래서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크리시 애너디 이즈 어바웃 크라이스트-Chrissy Enerdy Is About Christ),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고 기독교는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너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된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있고 또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고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예수님과 관련된 일과 사건들 중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무엇이냐? 그게 뭘까요? 십자가죠. 한번 해봅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다. 그 믿습니까? 십자가가 빠진 기독교, 십자가가 빠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빠진 하나님, 십자가가 빠진 성경?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 성육신 그분의 삶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부활 그분의 하늘로의 승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장차 재림하시는 모든 사건, 예수님이 영혼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 보좌에 올라가셨다가 이제 장차 재림하시는데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사건의 중심 그것은 십자가다. 라는 겁니다. 아멘. 이제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우리가 이제 십자가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 많은 분들이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님뿐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잘 들으셔야 돼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뿐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사실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피 흘리시고 생명을 주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죄 사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모든 구원의 은혜와 은총이 우리들에게 오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 갈라디아서에서 오늘 세 가지 구절들을 여러분들에게 드렸던 것처럼 분명히 우리가 볼 때,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신데, 그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많은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해보세요. 다른 많은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뭐가 못 바뀌었을까요? 일단 우리가 큰 틀에서 큰 틀에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혔던 원 퍼슨(One person) 한 사람, 한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불변의 사실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거기서 피 흘리시고, 살을 찢으시고 생명을 주실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큰 틀에서 그게 뭐냐 옛 질서에 속한 것들, 옛 창조에 속한 것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라디아 2장 20절 우리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인데 한번 다 같이 한번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마이 페이버릿 벌스(my favorite verse)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이렇게 정해가지고 암송하고, 항상 묵상하는 분들이 여기 많으실 줄로 아는데, 갈라디아서 2장 2절 너무나 귀한 말씀인데 이 갈라디 2장 20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가 한번 우리 손을 가슴에 한번 얹어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면 너무너무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라고 할 때 이 ‘내가’라는 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은 ‘옛 질서’에 속한 나라는 거예요. 옛 질서 또 ‘사망의 질서’에 속했던 나, 사망의 질서의 노예가 되었던 나, 옛 질서에 사로잡혔던 나,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옛 자’라고 할 수 있겠죠? ‘옛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나의 옛 자, 옛 질서에 지배되고 옛 질서에 노예가 되고 옛 질서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줄로 믿습니다. 이 옛 자아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아예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도다.
어리석은 자아죠? 하나님이 없다고 했던 자, 그리고 하나님이 설령 있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던 자,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나 자신을 높여서 나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나를 하나님으로 대우하라고 주장하고, 요구했던 그 자, 그 내가 스스로 주인 되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스스로 왕이 되고, 임금이 되었던 스스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에 주라고 자기 자신을 높였던 그 자, 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가 처리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처리된 이 사실이 그냥 역사적인 사실로, 객관적인 사실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다고 할 때, 그 못 박힌 그것이 내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에 된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나의 구조로 인정할 때에, 그래서 예수님 앞에 우리의 신앙 고백을 올려드릴 때에, 우리의 옛 자아는 처리되고 우리의 옛 질서에 종속되었던 우리의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질서에 속한, 새로운 창조에 속한, 생명의 질서에 속한, 새로운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죽고, 나의 옛 사람은 죽고, 이제 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중생했다.
한 번 해보세요.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시면서 서로 나눕니다. “당신은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옛 질서에 속했던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고, 새로운 삶의 특권을 얻게 되고, 새로운 삶의 사명을 받게 되었다. 라 겁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고 내가 새로운 질서에 속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고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신부가 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러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거예요. 우리도 우리 가운데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된,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된,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라는 거예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어요. 또 새로운 특권을 얻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날마다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되었고, 거룩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는 놀라운 특권의 삶을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질서에 속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가 다시 거듭나고 중생했을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특권만 주어진 게 아니라 새로운 사명도 주어졌어요.
 
그게 뭘까요? 저와 여러분이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질서에 속한 자로, 새 창조의 질서에 속한 자로 거듭나고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아멘! 하세요. 한 번 합시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옆에 있는 분들 한번 다시 보십니다. 우리 함께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사랑하는 삶의 사명을 주시고 그다음에 마태복음 28장에서 뭐라 그러셨어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에게 분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지키도록 가르쳐라. 원문도 그렇게 돼 있죠? 결국 제자 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어요. 그것은 두 가지에요. 크게 봐서
 
하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심지어 멋까지 사랑하느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를 핍박하고 욕하는 자를 향하여 되돌려 욕하지 말고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수준까지 나아가라. 서로 사랑을 하셨고 그다음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서,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아멘 아시죠?
-우리의 옛 질서에 속했던 우리가 죽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질서에 생명의 질서에 새 창조의 질서에 속한 자들로 우리가 거듭나고 중생하므로,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특권, 새로운 사명을 받은 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게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에요.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니라.
-한번 다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못 박혔어요. 옛 질서에 속했던 내가 못 박히고 내가 죽었어요. 옛사람인 내가 죽었어요. 새 질서에 속한 자로 거듭나고 중생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요. 오늘 이 5장 24절은 굉장히 중요한 지금 말씀을 해 주고 있어요. ‘육체와 함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육체란 무엇입니까? 육체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 육체란 무엇인가? 육체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우리의 영혼과 대비되는 우리의 몸, 이걸 의미하는 ㄴ느게 아니고, 이 육체라는 것은 영과 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본성인데 인간의 본성이 죄로 물들고, 죄로 오염된 상태로 있는 인간의 본성 그게 육체다. 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육체라고 할 때, 이 육체는 단순한 영혼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우리의 몸, 우리의 바디가 아니고, 우리의 바디가 아니고 우리 헬라로 싹스라는 단어를 쓰고, 영어로는 지금 이게 플래시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 이것은 영과 육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죄로 물들어 있고, 죄로 오염되어 있는 그것을 육체라고 부르는데, 놀라운 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 죄로 물든 우리의 인성 죄의 본성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현실은, 현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싸우고 있어요. 날마다 싸우고 있고,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죄 가운데로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는 도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공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게 말씀하면서 정말 탄식할 때,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는 도다.”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그런지 현실적으로 영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로잡아가려고 하는 죄의 소욕, 죄의 정욕, 그 죄 성의 강력한 힘에 의해서 우리는 도전을 받고 계속 싸우고 있는데, 놀라 것은 놀라운 것은 오늘 갈라디아 5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함께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지금 현재 우리가 여전히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우리 안에 있는 정욕과 우리 안에 있는 탐심과 더불어 싸우고 있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에 대하여 승리했다. 라는 거예요. 아멘!. 한 번 합시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가려고 하고, 우리를 불순종으로 사로잡아가려고 하고,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지 못하게 사로잡아가려고 하는 죄의 소욕이 여전히 남아 있고, 우리 가운데 잔존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생명을 주셨을 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으실 때, 그와 함께 우리의 육체도, 탐심과 저녁 저녁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결국은 결정적으로 승리했고,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에요. 아멘. 결코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때대로 넘어지고, 때때로 갈등하고, 때때로 안타까운 범죄를 범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국,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점점 성화되어지고 더 성화되어지고, 더 성화되어져서, 장차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부르실 때 우리의 몸과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승리자가, 승리자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체가 아니라, 승리자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정력과 탐심이 아니라 승리자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소욕이, 거룩한 소욕이 결국은 최종적으로 이기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는 말이에요. 아멘.
 
현실적으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갈등과 영적인 싸움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되죠. 현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 죄의 존재와 죄의 현존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재림하실 때,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죄의 존재로부터 우리는 완전히 해방되는데,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고 중생에서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 중에, 영화의 단계에 가기까지 하나님께서 놀라운 섭리 가운데 죄를 우리 가운데 남겨주신 것은 이것은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이 죄를 결국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극복하고 넉넉히 이기고,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게 하시고, 근데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갈라디아서 6장 14절 한번 읽어볼까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갈라디아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놀라운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한 사람, One person,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힌 줄 알았는데, 오늘 갈라디아 6장 14절 말씀에서 바울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옛 질서에 속한 세상, 옛 창조에 속한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높이고, 하나님보다 다른 피조물에 속한 것들을 높이는. 옛 질서, 옛 창조에 속한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는 거예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 세상은 우리들을 유혹하는 세상이에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이고, 이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세상이에요. 어찌 보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의 싸움의 대상 중에서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 거대한 대적이에요. 그런데 오늘 주님 주님은 바울을 통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질서 안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새 창조 안으로 들어왔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In the world!,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그런 삶을 더 이상 우리는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오늘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이긴 자가 되었다.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선택,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결정을 함으로써 날마다의 삶 속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한번 해볼까요?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아멘 하시죠? 하면서 우리가 넉넉히 이겠느니라. 사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세상 옛 질서에 속한 세상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심판 당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성이고 이 세상은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아 멸망할 세상이다. 라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이 세상의 심판과 이 세상에 대한 멸망이 확정되었다. 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위협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맞장 뜨면서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무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한 번 더 “세상을 이미 이기고 극복했다.”
 
오늘 이제 세 가지 보면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두 가지만 더 살펴보고 오늘 말씀 마무리하겠습니다. 1. 갈라디아 2장 20절에서, 옛 질서에 속했던 내가 죽고, 새 질서에 속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존재로 우리가 거듭나고 중생했다. 그랬고
2. 갈라디아 5장 24절에서 육체와 함께 그 정력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우리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여전히 갈등과 현실적인 영적인 투쟁이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실패에
우리의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승리를 경험하고, 경험하고, 경험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우리가 승리자가 될 것을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셨고,
3. 세 번째로 세상이 내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위협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랬습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골로새서 2:14,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0절에 보니까
*골로새서 2:10,
10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고 말씀하죠. 뭘 못 박았다는 거예요? 율법에 기초해서 우리를 기소하는 기소장을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기초해서 우리를 해 우리를 대하여, 사망의 판결을 내렸던 그 판결문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소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가 너는 죄인이야, 너는 죄인이야, 그래서 너는 죄인이라고 고발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율법에 율법의 정제와 율법의 저주와 율법이 우리를 고소하는 그 고소장과 율법의 기초에서 우리를 향하여 판결문을 썼던, 너는 사형이야 라는 판결문을 내렸던 그 증서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말소되었다.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믿습니까? 한 번 해봅시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멘 하시죠? 우리가 예수님 믿고 살아가면서 성화 과정을 거쳐 가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때로 무너지기도 하고 때로 실패하기도 할 때 그때 우리가 느끼는 죄의식은 복음적인 죄의식이어야 돼요. 율법적인 죄의식이 되면 안 돼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적인 죄의식은 내가 이런 혹시라도 주님 앞에서 범죄하고 잘못했을 때, 이것 때문에 내가 지옥 가는 거 아닌가? 이것 때문에 내가 자꾸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거 아닌가? 이런 식의 죄의식이 바로 율법적인 죄의식이에요. 그게 아니고 복음적인 죄의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고 노력하다가 실수하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할 때 나를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의 마음을,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구주, 나의 주님, 나의 영적인 남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아프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참회하고 우리의 이 아픈 마음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 그것이 복음적인 죄의식, 복음적인 회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중생해서 영, 단번에 죄 사함을 얻은 자로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로 인하여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를 하고 허물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아와 하나님께서 “내게 오라. 내 아들아 내 따라 내게 와라. 내게 와서 자백하고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라.” 그렇게 하실 때 기쁨으로 아버지께 나아가고, 기쁨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부족하지만 주여, 이제 다시 시작하오니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나를 당신의 능력으로 새롭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 번 읽어봇시다. “아들아, 내게 와라 다시 시작해라. 딸아, 따라 다시 시작해라.” 아멘 하시죠? 왜? 율법의 저주와 율법이 우리를 고소하고, 기소하고, 심지어 율법에 기초해서 우리를 향하여 사형이라는 판결문을 내렸던 그 모든 증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처리된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우리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 말씀이에요. 제가 읽어볼게요. 히브리서 2장 14, 15절에 보니까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평생 메어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여기서 지금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는 그 정확한 언어가 나오지 않지만 여기 지금 말씀할 때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사랑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생명을 주실 때에 마귀도 십자가에 못 박힌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귀 처리된 거예요. 마귀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영 단번에,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신 줄로 믿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나서 주님께서 뭐라 그랬어요?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뱀은 그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하심을 확증하신 사건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사망의 권세를 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처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망아, 네가 서는 것이 어디 있느냐?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되고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이제 사망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거나, 두려움의 요소가 되거나, 겁내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기뻐하시고, 도리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죽음의 나를 담대하고, 소박하게, 정말로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죽음의 날을 기다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 알고 계세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과 마비의 종이 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반응이 완전히 다르다. 사망아, 네가 쏟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죽음의 사건 역시도, 신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한, 신비한 믿음의 사람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이제 우리는 사망을 조롱하며, 죽음을 조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죽음이, 죽은 것이 되었다 이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사망의 권세가 사망을 당했다는 겁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함으로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함께 이긴 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 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고백 그대로 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목숨을 조금 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순교자의 자세, 순교자의 영성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십자가는 옛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옛 질서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아, 나는 새로운 질서에 속한 사람이구나! 나는 새로운 질서, 생명의 질서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구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구나! 새로운 정체성을 받았구나! 새로운 특권을 얻었구나! 새로운 사명을 받은 사람이 되었구나! 이 사실을 확인하면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 사람은 누구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영적으로 하나가 된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나의 영적인 의미의 신랑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내 자신이 예수님의 영적인 신부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예수님과 연합됨으로, 예수님의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참 포도나무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 성령의 열매를 맺고, 전도의 열매를 먹고, 제자 삼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입술에 감사의 열매를 맺으며 ,찬송의 열매를 맺으며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함으로, 우리가 맺은 열매가 주님 앞에 상달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한 삶,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으로 깨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신 주의 말씀대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 우리가 죽어서 주님 나라 갈 때 누리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새로운 피조물의 삶.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 새 사람으로서의 풍성한 생명력 있는 삶에 주인공들로 여러분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한번 해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옆에 있는 분들 확인합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한 번 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아멘 하시죠?
 
♣요약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 질서에 속했던, 옛 창조에 속했던 많은 것들이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고, 이제 새로운 질서에 속한 사람으로, 생명의 질서에 속한 사람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신부로, 살아가길 원해야 한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결코 실패하거나 패배하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승리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나의 옛 자를 이기고, 내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마비를 이기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풍성한 삶의 주인공들로 주안에서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분리된 삶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전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삶인 동시에 부활의 새 생명으로 덧입게 될 영원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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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3년 6월 11일)
제목: "죽음의 신비(神祕)"
말씀: 고린도후서 5: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김은석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ㅡ

*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ㅡㅡㅡㅡㅡ

우리 찬양대와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사랑과 온유를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저희가 상암 집회를 한 지 한 주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 상암 집회를 앞에 놓고 저희 교회는 영적으로는 2년 또 실제적으로 1년을 준비해 왔는데 우리가 준비하면서 마음에 확정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번 상암 집회가 남북통일과 특별히 한국교회의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재 부흥의 결정적인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회 마치고 그냥 그걸로 끝나면 안 되고, 우리 교회부터 다시 한 번 재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겁니다.

재 부흥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의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 말씀에 부흥이 일어나면 되는 것이에요. 이제 지난주부터 성경 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꼭 이렇게 하죠. 기억나십니까? 금방 한 것도 잊어버렸어요. 그렇게 하는데 예배에 재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데 저는 지난 40여 년간 목회 생활을 통하여 내가 지금도 예배에 대한 감격과 은혜가 너무 크지만, 제가 정말 순전하고 순결하여 전력투구하며 예배드렸을 때, 나는 그때 어떤 자세였나, 그러면서 제가 한 10여 년 동안 예배를 시작하면서 항상 예배를 위해 드리는 말씀을 글을 따로 썼어요. 그래서 제가 글 쓴 처음 썼던 걸 제가 이번에 다시 한 번 보게 됐어요. 보면서 앞으로 1~2년 동안 우리 사랑의 교회가 온 성도들이 예배의 재 부흥을 위하여 좀 이렇게 정리를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떠세요? 좋습니다.!!! 설교하기 전에 한 1~2분간 꼭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핵심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 여러분 예배는요 예배드리기 전에 결정되는 거예요. 아주 중요한 거예요. 성공적인 예배는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정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결정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반드시 여러분 들어올 때마다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와야 됩니다. 반드시 매주 하나님 거룩한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이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는 줄 주님은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요. 그러면 거룩한 기대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도들을 쭉 보면요. 거룩한 기대감을 갖는 성도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에서 그것이 뭐냐 하면요 이것입니다. 하나님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모인다는 것은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모이는 것이에요.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인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잠시 세상에!~~ 내가 밑에서 보면 옆에서 보면서 기가 막혀요. 너무너무 찬송을 마칠 때, 또 찬송할 때, 찬송을 통하여도 들려주신 말씀이 있을 것이에요. 기도를 통하여, 들려 줄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분의 헌신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을 것이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있을 거에요. 오늘 마치고 나가면서 우리 선교 컨퍼런스에다가 여러 가지 하시는 거, 글로벌 광장 나가시면서도 주님께서 내 개인적으로 주시는 음성이었을 것이에요. 정리합니다.

“예배는 예배 들어오기 전에 결정되는 것이다. 반드시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거룩한 기대감의 핵심은 오늘도 주님이 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것이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헌신과 교제를 통하여 오늘 이것이 이번 주 여러분들의 삶의 여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오늘 좀 중요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31일 날 긴급 재난 경보 받으셨습니까? 아침 여섯시 몇 분쯤 됐는데 저는 그거 할 때 이렇게 상암 집회 종료 모임이 있어서 아침에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서 아침에 차를 타고 나가는 길이었어요. 들고 왔더라고요. 그리고 경보사이렌도 들으셨어요?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죽음과 같은 긴급함 저는 죽음과 같은 긴급함을 몇 번 맞이한 적이 있는데, 진짜 어려워지면요. 우리가 할 게 없어요. 사이렌은 울려도 갈 데도 없다니까 근데 마침 그날 우리가 일찍 출근한 우리 교회 직원들이 그 문자를 보고 우와!! ‘우리가 살려면 안아주심의 본당이 내려가야 되겠다.’ ‘여기를 내려와야 되겠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막 그 마음을 가지고 했대요. 여러분 재난이 있고 위기를 당하면 사람에게 본당에 오면 사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이에요. 그런 게 있었고 또 하나는 제가 빌리그레함 상암 집회 50주년 집회하면서, 이 집회가 우리가 애써서 수고하고 헌신하는데, ‘진리가 선포되는 집회’가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개회사에서 할 때, “진리가 선포되는 이 50주년 기념대회를 허락하신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진리가 뭐냐, 참 진리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이 참 진리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에 관해서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오늘 이 참된 ‘죽음의 신비’에 대한 진리가 여러분들의 것으로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는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다 끝난다, 죽음 이후에는 죽고 난 다음에 다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 무다.
-그런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니까 이 땅에 살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죽으면 수수깨끼다. 누구도 모른다.
죽어 그러니까 죽으면 수수깨끼이니까 염세주의자들처럼 살아가고 수수깨끼 같은 인생을 사는 거예요. 죽음에 대해서 세 가지 자세를 갖고 있어요. 사람들은 첫 번째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다 끝난다. 죽으면 모든 것 끝, 인생은 살아있는 동안이 전부 다 그러니까 뭐 살아있는 동안 내 마음대로 살고 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케스라 세라 왓 에버 윌비(What ever will be). 내 마음대로 사는 거야. 이래 살고 내가 하고 힘들어 살고 그냥 뭐 그냥 허상 하나 부르면서 죽으면 끝이 나니까 막 그냥 알코올이나 탐닉되고 이래 죽으면 끝이니까 그래서 사는 거예요.

세 번째로는 죽음 이후에 반드시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걸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사후 대책을 세우고 기백을 갖고 살게 되는 것이에요. 준비된 사람으로 믿음의 용사처럼 살 수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죽음에 관해서는 확실히 아는 거 있잖아요. 여러분들 제가 100% 아는 게 있어요. 그거 뭐냐면 우리는 100% 다 죽는다는 것이에요. 여기는 예외가 없어요. 우리 하나님은 무시간 대의 개념이 있어요. 우리 하나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개념 그 초월 점 초시간대의 개념 무시간대의 개념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두 100살 살고, 90살 살고, 사람 60살 살고, 다 50살, 이렇게 차이가 30~40년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여튼 여러분과 저는 100% 죽습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그 이후에 죽음에 대한 대책이 뭐냐고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 이후에 대책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대단해도 죽음에 대한 대책이 없는 사람은 대책 없이 매일매일 사는 사람이에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에 대한 대책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 땅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는 공자의 제자 자로가 여러분 잘 아시는 내용이죠? 공자에게 감히 스승님께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공자가 뭐라고 그랬어요? 야 이 땅에 삶도 모르는데, 죽으면 어찌 알겠느냐? 삶도 모르게 죽으면 어떻게 알겠느냐? 뭐 거기엔 또 나름 또 생각이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명확하게 얘기하면 여러분 공자 같이 사서삼경 뭐, 다 대단하지만 그런 거 대학, 춘추 이야기 다 있지만, 베드로는요 놀라운 얘기를 했어요. 저는 이 공자와 비교해서 베드로가 베드로서 1장 19절에 제가 지난 주간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너무 제가 이게 너무 귀한 말씀이 여러분 공자처럼 베드로가 많이 공부한 것도 아니고, 공자처럼 베드로가 무슨 많은 제자를 거느린 것도 아니에요.

그는 초라한 어부 출신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으로 그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생명의 진리에 대한 문을 열고 죽음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난 이 땅에 사람도 모르는데 죽으면 어떻게 알겠느냐는 공자와, 어부로서 살았지만 분명하게 확인된 베드로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시오. 베드로서 1장 19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같이 읽죠.

*베드로후서 1:19,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사람들은 다 깜깜해요. 아주 그냥 아주 그 마음이 죽음 이후에 그것에 대해서 모두가 다 깜깜한 암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빛이 없는 깨달음이 없는 통찰력이 없는 그런 깜깜함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깜깜한 어둠 속에 여러분 등불, 한 빛을 봐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거기에 손전등이라도 비추고 거기에다가 성냥불을 하면 켜 봐요. 환하게 빛나는 것이죠. 그것뿐만 아니라 1장 19절 뒤에 뭐라고 나와 있는가? 이렇게 나와 있어요.

*베드로후서 1:19,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날이 새어 새별이 너희 마음이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랬어요. 죽음 이후의 세계뿐만 아니라 여러 우리 삶의 영적인 어떤 질문들이 있을 때에, 그 모든 어두움의 시간이 지나가고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오느니라.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는데 오늘 죽음 이후 신비도 여러분들이 말씀하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샛별 같은 은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샛별의 청명함과 샛별의 청초함과 새별의 청명함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공자도 뭘? 복을 깨달은 것을 첫 번째,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I. 첫째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고린도후서 5장 1절 10절까지는 죽음이 의 신비에 대해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말씀이에요. 그런데 1절에 이렇게 절 뒤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뭐라고 돼 있어요? 아느니라. 오늘 첫 번째 우리가 주제가 뭐냐 아는 것 우리는 아느니라. 공자도 모르는데 이태백도, 이황, 이율곡도 한국의 철학자들 대단한 사람들 다 모르는데,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아느니라. 말씀에 대한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나온 성도들에게 알게 하시느니라. 뭘 알게 하시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이 왜 어려워요? 사람들의 죽음 얘기가 나오면 다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죽음은 두려움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극복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죽기 되면 죽기 직전 되면, 아무리 대단해도 다 두려워하고 다 힘들어하고, 몸도 육신도 아픈 거 있겠지만 영적으로 길이 없으까? 깜깜한 절벽이니까 꽉 막혀 있으니까 깜깜하니까 다 두려운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느니라 뭘 깨닫게 하시는가? 우리 성경 전체를 통해 아는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 보통 우리 성경이 성경에서 신약에서 말하는 성경은 대부분 구약 성경을 말씀하는 거예요. 구약 성경 전체를 딱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요약을 해가지고 깨닫게 하시는 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의 말씀인데 히브리서 가운데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기가 막힌 말씀이 있어요.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모든 사람의 죽음을 두려워해요.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피해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 이유가 뭘까? 히브리서 2장 14절 이와 같이 나와 있어요. 같이 보겠습니다. 14절만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해 있습니다. 잠깐만요. 우리가 어떤 혈과 육에 속했죠? 우리 다 육신의 몸을 갖고 있죠? 그다음에 또요.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중요합니다. 그가 누굽니까? 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소위 성육신을 입으셨어요.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다.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그 이유는 그다음 중요합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다음 또 15절에 같이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십니다. 너무나 이걸 말씀을 처음 보는 분들은 조금 더 깨달아야 되겠지만, 성경을 아는 분들은 딱 마음에 아까 말씀한 대로 샛별같이 깨닫게 하신 은혜가 있는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이런 뜻이에요. 보십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마귀의 세력을 멸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상처를 주고, 그다음 영원한 형벌을 갖게 하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서 온갖 더러움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표에요. 마귀는 한 생명이라도 더, 더 고통 가운데서 영원한 흑암 가운데로 갖고 가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표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중요하면 마귀의 세력을, 이런 잘못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하여, 고통과 저주와 더러움과 모욕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형벌 속에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오셔가지고 피의 복음을 통하여 용서의 강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세력을 멸(滅)하시기 위하여 그래서 2장 15절 다시 한 번 뭐라고 나와 있냐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히브리서 2:15,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매어 종노릇 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것이에요. 오늘 여러분과 저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된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신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 그 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마다 용서의 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피의 복음을 깨닫는 사람들은 용서의 강, 은혜의 강을 경험하게 되면, 그 우리 뒤를 따라오는 사냥개와 늑대와 마귀 같은 못된 군사들이 우리가 은혜의 강을 지나는 동안에 우리의 냄새를 다 잊어버리고 우리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죄가 용서받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왔고 피의 복음 앞에 주님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해 복음 때문에 용서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들인 거예요. 맞습니까? 이 세상에서 대단한 위인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일 위인이 누굽니까? 뭐 세종대왕이다. 그다음에 이순신장군이다. 그래서 그 광화문에 두 분만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런데 아무리 위인이라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이순신 장군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 적 있습니까? “네, 세종대왕님 나의 모든 허물과 모든 연약함과 모든 죄를 싸그리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이 안 되죠 이 땅에서 오직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열고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 내 죄의 문제는 예수님의 피의 복음 밖에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요” 이걸 믿는 사람들은 마귀의 세력을 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께서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겠다. 그 첫 열매라는 게 오늘 우리들을 위하여 첫 열매가 되신 것이 우리들을 위하여 복음이 되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죽음의 두려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이 땅에 있는 육신의 죽음을 죽이신 것이에요. 죽음을 극복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느니라.”

그 법이 뭐냐 하면 능력으로, 능력으로 해석할 수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오늘 제가 말씀드린 죽음을 돌파하는 마귀의 세례를 면하게 하시는, 정말 우리로 하여 선한 목자 되시는 이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마귀의 죄와 사망의 능력을 압도하였느니라. 극복케 하였느니라. 이걸 깨닫는 사람에게는 모든 성도들의 죽음은 이 땅은 사망이 왕 노릇하지만 성도에게 죽음은, 영광의 궁전에 입성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올라가는 불 병거가 되는 것이고, 독수리의 날개가 되는 것이고, 천국의 한 문에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우수사례와 수많은 참 환난, 근심이 있다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이 땅에 살아가는 또한 남은 인생을 즐거워하느니라. 확실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가 아는 것이다. 두 번째로 아는 것은 본문에 좀 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본문을 통하여 아는 것이 1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여기 보니까 본문에서 장막집이라는 말 텐트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요. 장막집이 무너지면 그다음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짐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러니까 두 가지가 대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은 영어로 텐트인데 이것은 뭐 여러 해석도 있지만, 이거 땅에 있는 장막 집을 우리의 육신의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와 여러분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 그런데 이 육체의 몸의 특징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낡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하고 있어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 절감하고 있어요. 젊을 때 탄탄했던 장막집이 나이가 들수록 장막집의 지붕이 처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요 머리가 빠지는 것입니다. 봐요 말뚝이 느슨해지는 것입니다. 장막 집의 말뚝은 두 다리의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막 집 볼 때 못은 흔들 조금씩 흔들리게 되는 거예요. 갈수록 다시오. 지붕이 처지는 것은 머리가 빠진 것이고, 말뚝은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이고, 못이 흔드는 것은 이빨이 흔들리는 것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이에요.

제가 최근에 10여 년 만에 만난 어떤 분이 있었어요. 그분을 제가 10여 년 보면서 아이고야 왜 이렇게 많이 늙으셨습니까? 라고 말은 하지 아니하고 속으로 만나 그리 얘기했어요. 그냥 깜짝 놀랐어요. 근데 그 순간 제가 아 내가 늙은 걸 네가 모르구나. 어떤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야, 요즘은 거울도 예전 같지 않네. 사실은 거울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진 것이죠. 내가 달라진 것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은 무너지고 낡아지는 것이에요. 이 땅에 지금 의약과 눈부신 진보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있어도요. 우리는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고 다시 사망률 100%예요. 예외가 없어요. 텐트 무너지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 하나님 또 하나 더 우리가 아는 것은 더 중요한 것은 2절 하반 절 뒤에 보면,

*고린도후서 5:2,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 내용은 어떤 장소적인 개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확실히 입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에요.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어요.

*고린도전서 15:51,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마지막 나팔이 불리는 그 시간에, 순식간에 우리 모두가 다 호연히 변화되리니 여기에 이제 뭐 이렇게 다른 신학적인 여러 내용들은 제가 다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재림의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아는 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이 뭔가 이렇게 확실히 피의 복음과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시고 장막 집과 영원한 집에 대한 한 주님의 몸을 입는 것을 깨닫고, 아는 사람이 나타에게 모든 분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 어떤 것인가? 6절이에요.

II. 우리가 담대하여.

*고린도후서 5:6,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6절에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우리가 항상 뭐 때문에 어떻게 됐어요? 담대하여, 그러니까 앞으로 오늘 이후로 사라에게 모든 성도들은 담대해야 돼요. 제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는 담대히 살아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깨닫고 난 다음에 우리의 마음속에 간절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바울이 고백한 대로 담대하게 살아야 한다. 이 담대함이 우리 사랑의 교회의 특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이 담대함이 앞으로 한국 교회 성도들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의 특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담대한 용서가 되는 것이 담대한 주님의 용서가 되는 것이에요. 제가 이 담대함을 얘기할 때에 담대함은 용기를 냅시다. 그리고 입술을 꽉 다물고 파이팅 이게 아니고, 이 정도가 아니고, 영적 기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내면 속에서 명맥이 흐르고, 어떤 경우에도 상록수 신앙을 유지하면서 한결 같은 시종일관(始終一貫)을 갖는 것이 영적인 담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거예요. 담대함을 가지고, 죽음 이후를 예비하고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를 사모하게 되면, 이 땅에 있는 것들도 우선순위(優先順位)와 더 중요한 걸 딱!! 과감하게 정리할 수 있는 안목(眼目)도 생기는 것이고, 담대함, 저는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다윗도 실수가 많았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다윗도 부족함도 많고 그러는데 왜 그랬을까?

나는 다윗이 가진 놀라운 통찰력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나는 왕궁에 삽니다. 나는 나름대로 궁에 삽니다. 나는 나름대로 대단한 거 다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지상에 정복 왕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얘기냐 합니까? “내가 왕국에서 거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건 다윗의 대단한 고백이.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의 첫날보다도 천국에서의 한 날이 더 낫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죽음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들은요. 제가 좀 이런 용어를 써서 죄송한데 앞으로 문지기 신학이라고 그럴 거예요.

문지기 신학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야 이 땅에서 왕국에 사는 것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로 있는 게 더 낫다. 어떤 장소적 개념을 뛰어넘어가지고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땅의 삶에 담대함과 역동성,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서 그래서 이런 담대함이 있으면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너무 자고우면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용사가 되어가지고 거룩한 홀로 서기가 가능하다 이 말이에요. 좀 누가 상처 주고 좀 이렇고 어렵고 이런 게 있어도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 신앙을 가진 줄로 믿사오니, 이걸 통해서 거룩한 용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걸 통해서 주님 내 사람들에게도 영향 받지 않고 사건이 되면 영향 받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뭘 걱정합니까? 하나님 내가 믿음에 홀로서기 있게 하여 주시고 일마다 때마다 믿음 보고 하게 하여 주십시오. 믿음 보고 1점0, 믿음 보고 2점0, 믿음 보고 3.0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떠나고, 가족도 떠나고, 육신의 장막도 약해지고 그럴 때마다 우리가 환경에 얽매여서 우울하고 힘들어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다윗처럼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용기 있는 홀로서기를 하면서 내 능력과 내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갖고 빛을 받고 샛별을 경험하고 벌떡벌떡 일어서야 될 줄로 믿는 것이에요. 이걸 5절에서 보니까 성령으로 보증을 받았다.

*고린도후서 5:5,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에게 보증서를 다 쓰여 주니, 여기에 대해 성령께서 보증서를 쓰시고 도장을 찍어주시고.

*고린도후서 5:7,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그리고 7절에 보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소위 믿음 보고 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장막 집이 무너지고 영원한 집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눈을 뜬 사람들은 순식간에 주님 오실 때, 우리가 홀연히 주님의 옷을 입기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담대함을 평생 유지할 줄로 믿습니다. 담대함의 표현이 다윗처럼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서 수많은 하늘나라에 차루가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이리 생각하고 그렇게 살 때 매일매일 삶이 하나님 앞에 믿음에 보고를 하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8절에 담대함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5:8,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주님과 보냄 갈 것을 확신하고 현재는 육체의 몸을 떠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담대함을 가지고 문지기 신학을 가지고 홀로 서기를 갖고 주님의 주님 앞에서를 우리가 기억하면서 이제 중요하면서 9절에,

*고린도후서 5:9,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주님을 기쁘시게, 믿음의 용사로,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어제 우리 설교 컨퍼런스를 하면서 어제 그런 말씀 나눴잖아요? 남김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담담함을 가진 사람의 나타난 특징은 9절에,
*고린도후서 5:9,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죽음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들은 죽음을 해결하는 사람은 어떡하든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 현장으로 나온 것이 10절이에요.

III. 담대함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늘 준비하는 삶을 산다.

*고린도후서 5:10,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섰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이라는 것은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대하고, 그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선악 간에 우리가 상급을 받을 것이다. 심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심판을 우리가 끝난 사람들이에요. 피의 복음을 통하여 정리가 된 사람들이 줄을 믿습니다. 아까 우리가 용서해달라고 어떤 위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게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분 받은 자에게 우리가 말씀한 거예요. 우리가 기도한 것이 그래서 그 문제로 해결된 거예요. 이제 나타난 것이 우리에게는 뭐가 있냐, 상급 심판이 심판대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받은 공적을 따라서, 선악 간에. 이거는 무슨 누가 이 땅에서 뭐 잘하면 축복받고 못하면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이거는 이거 완전히 다른 차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우리 우리의 삶을 쭉 이렇게 사는 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상급 심판을 받는 것이에요.

이걸 왜 이렇게 제가 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과거에 16세기에 캐톨릭이 너무나 그 당시에 캐톨릭이 너무나 부패를 하고 그다음에 이 소위 사람의 구원을 가지고 장난을 쳤어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원은 예수님 피로 받는 것이에요. 맞습니까? 그런데 그 구원을 공로 주의로, 공로 주의로 우리가 행한 바에 따라서 구원을 받는다고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해가지고 한 것을 마르틴루터가 너무 열 받아가지고 그건 아니다. 그러면서 그 캐돌릭의 공로주의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없는 성경에 연옥도 막 만들고, 그다음에 또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막 이런 것도 만들고 막 그렇게 했어요. 그것이 싫어가지고 우리가 물을 버릴 때 그냥 와장창 버렸는데, 버린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선악 간에 심판받는다는 이 상급 심판에 대한 걸 버려버린 것이에요. 구원받은 자는 상급 심판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은혜로 준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에요. 이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급은 은혜 받은 자에게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시험 준비를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이렇게 한 사람은, 시험 볼 날이 두려워요?. 시험 볼 날을 막 기대해요? 저는 그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그런 분도 있을지 모르는데 정말 시험 준비를 최선을 다해서 잘하고 막 그렇게 하면 시험 볼 날을 기대하면서 막, 막 기대가 돼요. 그래요.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면 그날이 와도 두렵지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상급 심판, 이런 것들이 좀 늘 마음속에 다짐이 되고 확고하게 좀 뭔가 와 닿을 수 있는 뭐가 없을까? 그런 좀 현장을 보고 좀 도전 받고 그런 게 없을까? 그게 바로 양화진이에요. 아멘. 양과자 선교 사람들 묘에 가면 거기가 상급 심판과 살아온 삶의 선교 사람들의 히스토리가 다 들어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올해도, 천오백 몇 십 명이 선교 나가잖아요? 국내 선교 750명, 단기 선교가 700명, 그 거의 1500명이나 해외 선교 700 넘게 나가는데, 그 나가기 전에 단기 선교 팀도 나가기 전에 야마지 묘소에 가가지고 서 있기 해도 좀 각오가 되는 것이에요. 나를 좀 추슬러지고, 나를 문지기 신앙으로, 나를 그리스도의 용사로, 믿음에 홀로 서기를 감당할 수 있도록 다짐하게 하는 곳이 양화진 묘역이에요. 거기 가면, 몇 분들 제가 좀 골라봤는데 거기에


“하나님께 영광”(Give God Glory)
- 이렇게 해가지고 윌리엄 베어드 2세 묘지에요.
-숭실 대학을 만들었던 윌리엄 베어드 선교 사람의 자녀들이 죽어갖고 계세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he buried in Korea the in Westminster Abbey.(헐버트)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조선에 다 바치리라.”(If had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루비 캔드릭-Kendrick, Ruby R)

“뜻이 이루어지이다”(Thy Will be Done).(에이커 홈)
-저런 내용들을 보면 우리가 마음에 숙연해지잖아요. 근데 양화진에 가서 양화진에만 봐야 되나 저 무슨 길이 없나? 근데 우리가 몇 년 동안 준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동산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사랑의 동사를 위하여 기도 저희 메모얼 파크인데 양평에 아주 참 괜찮은 지역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어요. 제가 그걸 이거 도대체 하나를 우리에게 왜 주시나? 오목사, 앞으로 양평 사랑의 동산(사랑 메모리얼 파크)는 제2의 양화진 묘가 돼야 하는 것이에요. 양화진은 풀타임 선교사들이 거기 가서 살았다면 여기에 양평에 있는 사랑의 동산은 사랑의 교회, 제자 훈련 목회 철학을 가지고 한 3년 동안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평생에 달려갈 길을 달리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돼야만 하는 것이야, 에요. 라틴어로 히스토리아 미션 히스토리, ‘선교 적 삶을 살았던 곳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야.’ 그런 깨달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양평 ‘사랑의 동산’에 대해서 ★사랑의 동산은 죽은 자의 고귀한 삶을 통하여 산 자의 영혼을 깨우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런 깨달으셨어요. 죽은 자의 고귀한 삶을 통하여 산자의 영혼을 깨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걸 하면서 제가 깨달은 몇 가지 진리가 있는데 여러분과 저는 태어난 곳은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지방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서울 태어나고, 도서 팔도에 태어나고, 심지어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북한에서 태어난 우리 북사선 식구들이 있어요. 북한 사랑의 선교회 어떤 사람은 또 해외에서 태어난 분들도 있어요. 태어난 고향은 다 달라요. 그런데 돌아갈 본향은 같아요. 그래서 제가 태어난 고향은 다를지 모르지만 돌아갈 보향은 같다. 나와야 되는데 시작.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향은 다르지만 본향은 동일하다.”

그래서 성경은 참 재미있어요. 태어난 생일보다도 장례식을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어요. 오죽하면장례식 가는 자가 더 지혜로운 자다. 돌아갈 본향에 대해서 깨달음이 있으니까. 성경의 생일은 창세기 4장의 바로의 생일과 또 복음서에 보면 헤롯의 생일 잠깐 언급하고, 나머지는 다 장례식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묻히는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태어난 고향보다도 죽고 묻히는 장례 장소가 중요한 것이에요. 제 얘기가 아니고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면서 후손들에게 꼭 필요한 유산을 남겨 레가스를 남겼어요. 그 물질적인 것이 영적 유산의 표현으로서 뭘 남겨냐 하면 막벨라굴을 사가지고, 거기에 자기도 묻히고, 아내도 묻히고, 이삭도 묻히고, 야곱도 묻히게 했어요. 3대가 다 같이 묻혔어요. 여기는 너무 성령이 주신 음성이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나 제가 다시 한 번 태어난 고향은 달라도 돌아갈 본향은 같아야 되는 것이야. 그 3-4대가 같이 묻힐 때 더 은혜가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동산’이 돌아갈 본향의 하나의 예표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선대들의 믿음의 순례를 보고 후대들이 이 땅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리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먼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랑의 동산을 볼 때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걸 결심하고 도전받는 그런 장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아픔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떠날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믿음에 홀로서기를 하고 상급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죽음조차도 담담하게, 대담하게,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선교 적 삶이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어 피차사로 격려하고 서로 축복하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약
주님은 죽음조차 극복하시고 마귀의 세력을 멸하여 주시려고, 우리 모두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니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몸이 약해지고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시점에,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궁전에 들어가는 영광의 문인 줄로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함으로 승리해야 한다. 문지기의 신앙을 가지고,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용사가 되어서 이 시대에 믿음 보고를 하고, 기쁨으로 심판대 앞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예비하여 주신 ‘사랑의 동산’이 영혼 구원의 플랫폼이 되기를 간구하며, 제2의 양화진 묘지가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바울의 주된 관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신령한 옷을 간절히 사모하고, 육체 가운데 사는 현재의 삶보다, 죽어서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더 소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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