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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예배는 영상이 나오는 2부 예배의 내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주후 2023년 3월 12일)
제목: "부흥의 실체를 경험한 사람"
말씀: 역대상 4:9~10
대표기도: 유주은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역대상 4:9~10,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 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 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ㅡㅡㅡㅡㅡㅡ
 
▶오늘 회중 찬송을 했는데,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그 보좌 앞에 둘러서 그 보좌 앞에 둘러서
큰 영광 돌리세 큰 영광 돌리세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그 보좌 앞에 둘러서 그 보좌 앞에 둘러서
큰 영광 돌리세 큰 영광 돌리세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찬송하며 올라가세
내 눈물 다 씻고 늘 찬송 부르리.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나 영광 누리리 나 영광 누리리.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주의 찬란한 성에
주의 찬란한 성에
주의 찬란한 성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제가 찬송을 준비하면서 많은 기도를 했다. 우리 성도들 오늘 이 예배당에 들어왔을 때에, 성전 뜰만 밟고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예배하게 하여 주시길 원한다. 모두가 다 지성소를 경험하게 되길 소망한다. 생수 강을 모두가 다 체험하기를 바란다. 
 
저는 지금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를 하는데, 국가적인 거대담론, 사회의 이런 내용들도 좀 제가 기드온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말씀을 했다. 오늘은 거대담론보다는 우리 개인적으로 필요함을 생각해서 역대상 4장에 야베스에 관한 말씀이다. 제가 볼 때에 그 사업이나 가정에 개업 할 때, 심방할 때 보면 액자가 거의 집안에 있는 말씀이다. 이 ‘야베스의 기도’의 액자는 말씀으로 것이 있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무리 산해진미가 있어도 먹어보아야 맛을 안다. 최고의 음식이라도 그림으로 있어보아야 잘 모른다. 내 것으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 것으로 와 닿아야 한다. 지금 신구약 모든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 흔히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를 이야기 하는데 이 야베스가 누구인가? 많은 분들이 야베스를 말할 때, 무슨 아브라함이나, 족장들이나 부잣집으로 생각하는데, 야베스는 그런 아들이 아니었다. 야베스는 오늘 본문을 보면 야베스는 앞에 3장은 찬란한 유다지파의 후손은 다윗이었다. 다윗의 계보가 나오다가 4장은 유다지파 가운데 비주류이다. 이름들을 나열하다가 갑자기 9절과 10절에 와서 어떤 인물 하나를 일방적으로 줌인 하고 클로즈 업 하듯이 그냥 이 야베스가 대단한 집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야베스를 클로즈업을 시킨 것이다. 야베스의 배경을 살펴보았더니 야베스가 오늘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부흥의 실체를 경험하는 데에 야베스가 그의 배경이 부흥의 실체를 이루는 배경은 아니었다. 야베스는 어머니가 야베스란 이름을 지을 때에 그의 이름을 수고로이 낳았다고 해서 ‘고통과 슬픔’으로 의미를 주었다. 그러니까 대단한 배경이 아니었다. 고통과 슬픔이다. 유대인은 이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했다. 그 이름의 뜻이 얼마나 소중한데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지 않는다. 야베스가 고통이다. 슬픔이다. 이렇게 지을 정도로 그가 평탄한 인생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환한 인생이 아니었고 그의 인생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 본문 9절을 보면, 
 
*역대상 4:9,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형제들도 특별히 내 세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이름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수고로이 낳았다. ‘고통, 슬픔’, 그리고 유대 나라는 웬만하면 자기 조상이 언급되는데 심지어는 아간도 언급될 정도인데, 오늘 야베스는 아버지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성경학자들은 이 야베스의 아버지 이름 없는 것을 보니 적어도 9-10절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데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아버지가 자랑스럽지가 않고 자식에게 무언가 물려줄 수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버지가 무책임한 아버지였다. 물려줄 땅도 없고 유대인들은 흉년이 되면 기업의 유산이 남에게 빼앗긴 뒤에 50년이 지나면 다시 찾아오게 되는데 그런 땅도 없을 정도로 였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아버지가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족들에게 치욕을 앗겨줄 사람인 듯하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오죽하면 자식의 이름을 너는 이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야베스’라고 지었겠는가!!
 
*역대상 4:10,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것을 보면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형제들도 존귀하지 않고 아버지 이름도 없고 오죽하면 야베스가 기도할 때,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했다. 환난이나 근심이라는 말이 야베스 이름에 슬픔과 고통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안팎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환난과 근심이 있는데 이것을 주님께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야베스라고 할 때, 보아스라고 하는 창세기 족장들처럼 그런 부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앞에 3장에는 다윗의 영광스런 족보이고, 4장은 비주류의 족보이고, 유대인은 족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지 계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을 정리하면 야베스는 모든 상황이 좋지 못한 조건을 가진 청년이다. 재산을 다 잃어버린 무책임한 아버지, 형제들도 대단하지 않고, 명예도 없고, 자신은 슬프다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 야베스와 동질감을 느낀 성도님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분은 어릴 때 자식을 버린 집안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 환경도 있을 수 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진짜 억울하게도 빚을 물려받는 자녀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야베스와 같은 동질감의 성도가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음성이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에서 이런 내용을 가진 야베스가 이 기도를 통하여 반전이 되는데, 아주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고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반전하게 해 주심을 믿어야 한다. 패자 부활전이 가능하게 하신다. 
 
I. 야베스의 배경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에게 미친것처럼 그렇게 어머니가 야베스에게도 기도의 대한 인식을 시켜준 것 같다. 그러니까 10절을 보면, 
 
*역대상 4:10a,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아뢰어 이르되~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히브리어로 찾아보면 적당한 기도의 뜻이 아니다. 아주 절절하게 부르짖음이다. 결사적으로 내가 부르짖음이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결사적으로 외친다는 것이다. 전력투구 해서 기도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래서 이 기도가 자기의 운명을 반전시킨 기도이다. 그의 결사적이고 절절기도이다. 그 핵심은 오늘 이 말씀을 다 외워야 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아무도 어려운 분이 계시면 안 된다. 이렇게 결사적으로 기도하면 인생이 반전이 되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고 기도의 능력이다. 
 
저는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강조하지만 기도지팡이를 어떤 분은 반대도 있지만 우리는 기도의 지팡이에 절실함이 있다. 사라의 교회 지팡이는 기도할 때, 이 지팡이로 마음의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절절하게 기도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⓵ 내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개혁 개정판에서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이렇게 나와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이 복은 초자연적인 복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복이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나 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게 해달라는 것이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복에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혜의 복이라는 것을 말한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기적과 같은 은혜이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것이다. 좀 더 들어가면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자각하게 해 달라. 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복이다. 나머지는 우수마발이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것이 복에 복을 더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⓶내 지경을 넓혀 달라.-세컨 찬스 구한다. 
-이것은 야베스 같은 경우는 부모로부터 어떤 좋은 환경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명예가 실추가 되고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돌파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주님 다 역사하여 주시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컨 찬스가 쉽지 않은 나라이다.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를 말하면 지금 세컨 찬스를 얻은 것이다. 지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옵소서. 했다. 결사적으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소서!’ 이것이 회복을 넘어 부흥인 것이다.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주여 저에게 세컨 찬스를 주시옵소서.” 하라.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⓷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주님의 손은 능력과 권능의 손, 여러분, 주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시다. 능력의 손이시다. 주의 손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네비게이션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내 인생에 네비게이션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다. 
 
⓸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고 내 인생을 향도하시고 내 인생의 가이드가 되어 주시면 그 이후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된다. 아마 야베스가 가정적 상황이나 배경적으로 좋지 아니었지만, 사람마다 연약하고 근심이 있는데 주님이 이 가운데 우리에게 샬롬의 평강을 주시기를 소망한다. 계속해서 절실하게 읽고 기도하여야 한다. 여러분, 우리는 토요일마다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나와서 기도하지 않은가? 절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 하면 내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민족적, 개인적으로 이렇게 해야 살 수가 있다. 많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와서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야베스는 기도를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붙잡고 절박하게 외친 것이다. 
 
II. 야베스는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기도했다. 
 
*역대상 4:10,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 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들을 허락하셨더라.’라고 하셨다. 저는 이게 너무 좋다. 고난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아니면 기대하지 않았는데 땅의 회복을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또 사람들에게 명예가 회복되어서 존경을 받았는지도 모르겠고, 여하간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그리고 앞에 순서가 왔다 갔다 하지만 앞에 2장 55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3장
*역대상 2:55,-야베스의 회복. 
55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곧 디랏 종족과 시므앗 종족과 수갓 종족이니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
-야베스가 땅의 회복을 받아서 이름을 야베스라고 이름을 붙인다. 마치 충무로, 이순신 장군, 세종로, 등으로 그런식으로 야베스의 이름이 회복된 것이다. 이렇게 성경학자들은 대게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기도를 앞에 놓고 나도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부르짖어 보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듣고 응답하실 것이다. 남들이 무어라 함은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 성경에 로또가 나온다. 롯,,, 하나님 없이 로또 맞으면 끝이 좋지 않다. 영적인 대 반전이 되어야 한다. 
 
*창세기 39:2,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남들이 뭐라하는 거 필요없고 하나님이 뭐라 하시는지를 잘 보아야 한다. 신약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와 같다. 죄의 횡포가 기승부리지 않도록 도우소서. 믿음보고 2.0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여러분이나 야베스의 참된 복을 구하자!!~ 아무리 세상 적으로 좋아도 하나님의 복을 달라고 해야 한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야베스보다 더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이 십자가를 깨달았으니 피의 복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에 나온다. 
*로마서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진짜 복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일이 안 풀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도전하라. 야베스처럼 절실한 기도를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못 박힌 기도의 손에서 나온 복이며 창에 찔리신 구세주의 옆구리로부터 나온 복이다.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으로부터 나온 복.
‘갈보리의 피 묻은 나무로부터 나온 복
‘창에 찔리신 구세주의 옆구리로 부터나온 복. 
-우리는 차원이 다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평강과 희락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성도와 연합해서 놀라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놀라운 복을 주시는 것이다. 생수의 은혜의 강을 체험해야 한다. 여러분들의 삶에 영적인 반전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말씀을 듣고 좋게 인식이 아닌 진짜 미치도록 구하는 것과 다르다. 오목사님은 복을 받은 분이시다. 우리 교회 장로님도, 권사님들도 다 복을 받은 분들이다. 모든 성도들도 복을 받은 분들이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신 결과로 나오는 모든 것이 진정한 복이다. 
 
*“대부분 성도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 -찰스 피니-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이 찬송은 노이 마르크라는 독일사람이 먼 길 떠나는데 강도를 만나 무일푼 거지가 되었다. 그 가운데 어떤 목사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법학을 전공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니 이 찬양 곡을 마음에 주셔서 작사, 작곡 했다고 한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요약 
우리가 인생이 힘든 자리에서도 절절하고 결사적인 기도로 부르짖으면 야베스의 패자부활처럼 은혜의 축복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나에게 새로운 기회로 지경을 넓혀주시고 환난과 근심을 벗어나게 하시고 영적 대반전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십자가의 피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역대서 기자는 그를 유다 가문의 신앙과 경건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시킨다. 그의 이름은 슬픔과 수고를 뜻한다. 하지만 그는 기도를 통해 축복된 삶을 얻게 되었다. 기도와 믿음을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역대 상에 타나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야베스는 그 같은 축복을 보여 준 산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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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3월 5일)

제목: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말씀: 사무엘상 7:2~14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정상익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사무엘상 7:2~14,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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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첫 주이다. 이 한 달 동안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시길 바란다. 보혈의 찬송했는데 어제 우리 토요비전새벽예배에서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우리도 베드로의 배신자 같은 자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다. 그래서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의 그 보혈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찬양을 했는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그 은혜를 주시는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제목을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에벤에셀 이라고 하는데,. 에벤에셀이 무언지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이고, 오늘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실 터이니 이 뜻이 무언지 모르실 것이니 뜻은 알아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 라고 여길 수 있으나, 그것도 그렇지만 아직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는데,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을 안 읽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아도 내 힘으로 자신 있게 잘 살고 있다고 이런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으로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에번: 도울 바(히브리어), 에젤: 돕는다(히브리어). 도움의 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이다. 시편에 보면 나온다.


*시편 54:4,
4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때, 그 도와주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도우시는지, 시편 121편에 있다.
*시편 121:2,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리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역대 하에서도 불 수 있을 것이다.
*역대하 14:11,
11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왜냐하면 사람은 제대로 도울 힘이 없다. 그래서 나중에 이 하나님의 도움을 제대로 받은 것을 사도행전에 나오고 있다.


*사도행전 26:21~22,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바울의 사역의 뿌리와 원천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에벤에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속성 가운데 빚 받을 것은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한다. 도움 받은 것은 속히 잊고 산다. 이게 우리의 죄 성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시는지 우리가 잘 모른 부분이 있다면 오늘 이 속성을 다 정리하고 우리 모두가 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를 기억하고 앞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도우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무엘상 7:2,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블레셋에서 아꼈던 언약궤가 이 십년 동안 있었다. 작은 시골 한 구석인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가 홀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사 가운데 마지막 사사이다. 이스라엘 사사는 왕권과 제사장을 겸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사무엘 상 7:3,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상 7:4,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바알림, 바알들을 아세라 다 복수형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말한다. 모듀 우상 숭배가 가득하고 여기 저기가 온 이스라엘 땅에 바알과 우상들로 우글거렸다는 것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수가 보혈의 십자가의 은혜가 더 강하기 때문에 좀 덜 하지만, 구약은 하나님은 그들이 행하신대로 징계하시고 노하신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징계의 패턴이 어떻게 되는지 보면, 우상 섬기면 어떻게 징계하시는지를 보아야 한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방식으로 그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패턴이 있다. 우상을 섬기고 그러할 때, 어떻게 징계를 하시는지를 보자. 대표적으로 야곱이 에서와 아버지를 속였더니 야곱은 라반에게 몇 배나 속는 것이다. 우상 섬기기는 것 때문에 하는 이야기이다. 요셉을 팔아 두려움에 떤 형들은 창세기 50장에 보면,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두려움에 떠는 값을 치렀다. 사사기 9장기에 보면 이 아비멜렉이 이복형제 칠십 명을 한 번에 쳐 죽였다. 나중에 그가 하는 대로 한 여인이 맷돌의 위짝을 들어서 아비멜렉에게 머리위에 던져서 머리가 바스러졌다. 기가 막힌 것이다.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이방 사람 아말렉 사람을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자기에게 순종하니까 안 죽였더니 결국은 나중에 길보아 산에서 사울왕은 아말렉 사람의 칼에 죽는다. 섬뜩하다. 열왕기상에 21장에 이세벨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게 하는데 나중에 이세벨을 예후가 쳐 죽여서 개들이 그녀를 핥게 하는 것이다. 너무 놀라운 일이다. 신약시대는 대신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서 그 주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있는 줄로 믿는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을까?
오늘 미스바의 도움이 이야기가 나온다. 3절 하반 절을 보면,
*사무엘상7:3,
3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상 7:5~6,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미스바는 70-80년대 여의도 광장 같은 것이다. 2000년대에 상암경기장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제 영적 각성을 위해 모인 것이다. 자 그리고 모여서 무엇을 했는가? 이방 신들을 섬긴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는 그 방식이 독특하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어, 또한
그날 종일 금식하고 하나님이 도우셔서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도우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척결하는데 있어 만연한 바알림을 척결하는데 행위 중에 하나가 물을 긷고, 금식하는 것이다. 물을 긷는 이유는 그 상황과 환경이 너무나 아프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당시 물은 생명연장의 가장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생명 연장의 가장 핵심 요소인 이 물을 마시는 것을 통해 절제하고 영적부도위기와 파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은 내 자신을 드려서 물을 부어서 하나님 앞에 절제를 선언하는 것이며 생명의 핵심이 되는 물을 부어서 나를 절제하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겠다는 것이며, 좀 더 들어가면 물은 회개의 상징이고 혼자서는 아니고 민족 공동체가 나와서 회개하는 것이었다. 골방에서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모여서 회개하는 것이 부흥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금식이다. 금식도 같은 개념이다. 먹는 것을 박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는 직무를 받아야 마땅한 자라고 고백하면서 ‘내가 살고 죽는 것이 이제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는 살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다. 육신의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영혼과 마음이 갈급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 하면 물을 붓고 금식을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라고 하면 그렇다고 응답하시면 좋은데 6절 뒤에 보면,

*사무엘 상 7:6,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렇게 하는데도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7절에 보자.

*사무엘상 7:7,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게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사무엘에게 요청하고 정리하고 물과 금식을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현실은 블레셋 사람들이 철기문화인데 가지고 쳐들어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불어 닥쳤다. 어두움이 밀려가고 서광이 비출 것 같은데 오히려 이전보다 더 극심한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붓고 금식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 사람들이 치러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스바의 광장에서 하나님이 도우심을 구한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도 6.3 상암 경기장에서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 그리고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하면 오히려 우리를 더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줄로 믿는다. 아멘. 그런데 이제 물과 금식으로 더 회개를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는 어려움이 생기면은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적당히 언약궤 매고 나갔다고 오는 것에 불과 했는데 자기 힘으로 으쌰 으쌰가 아니고 8절에 보면,

*사무엘사 7:8,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블레셋에서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전심으로 물을 붓고 금식하고 회개하니까 영적의 안목이 열려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며, 그것을 믿고 사무엘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마치 영적 전투 앞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이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사무엘에게 요청을 한 것이다. 사무엘이 기도가 얼마나 강력했으면 그렇게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지를 보자.

*사무엘상 7:9,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한 절 한절이 연결이 되면서 이것이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젖먹는 어린 양을 드리고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래서 응답하신 것이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병거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쳐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부르짖었더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어려움이 닥칠 때,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주일 예배와 우리의 온전한 예배를 주님 앞에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토비새나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와 주여!! 하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님의 피 밖에 없네. ~~~브르짖고 나는 믿노라, 보혈의 공로를~~~ 찬양해야 한다.
-그렇게 하니까 10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무엘 7:10,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늘에서 우레 소리와 천둥번개가 되고 그래서 타작 마당에서 겨들이 날린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을 덮어버리셨다. 그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한 줄로 믿는다. 놀라운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인격적으로 에벤에셀 참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을 영적세계에서 하늘의 세계에서 좀 이렇게 상징적으로 이해가 되기 위하여 설명한 것이다. 사무엘이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온전한 번제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브리엘아, 저 밑을 내려다보아라. 네 종 사무엘에 물을 붓고, 금식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성들과 함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도움을 구하니까, 가브리엘에게 불말과 불 전차를 가져오라고 하신다. 불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저 무지한 블레셋을 부수고 하늘에서 큰 불을 내려서 네 백성을 도울 것이라고 하신다. 번제와 부르짖는 기도를 잊지 않고 그리하여 싸울 것이라고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가지고 내가 싸울 것이다. 라고 하신다. 우레와 천둥소리를 발하시고, 적들을 혼란 속에 빠지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여러분 오늘 부흥의 뜻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가 회복되고 이 예배는 공적예배 생활예배가 다 포함된다. 우리의 온전한 예배가 회복되고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가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하나님이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주시는데 이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한나가 기도할 때 나온다.


*사무엘상 2:10,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한나의 기도가 아들 사무엘에게 연결된 것이다. 과거의 한나 엄마의 기도가 현재 사무엘에게 능력을 보여주신다. 한나의 과거의 기도가 현재의 사무엘의 기도가 만나서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심을 집필하는 것이다. 과거 한나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현재 아들의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을 찬양한다. 엄마의 기도가 자녀의 기도로 적용될 것을 믿어야 한다. 부모가 드린 기도는 죽지 않는다. 제가 그래서 토비새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토비새에 나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온전히 하면 그것을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한나의 기도로 오늘 사무엘이 그대로 경험하게 된 것을 믿어야 한다. 부모가 죽어도 기도는 죽지 않는다. 예수님이 피의 근거한 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그 기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미래에 응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도 결정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한나의 사무엘의 기도가 현실이 되게 하실 것이다. 아멘, 우리가 살다가 보면 쫄보가 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 영적 안목이 흐려져 가지고 헤매고 있을 수 있지만 역사의 상선에서는 하나님의 기도가 사무엘에게 그대로 응답되는 것이다. 그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 돌아와서 영적인 각성을 하게 되는데, 7절처럼 더 어려운 상황에 만나게 되면 앞으로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이루시려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더 큰 역사를 이루어주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에벤에셀을 믿을 때에 여러분이 임계점에서 낙심하지 말고, 간구하라. 그럴 때, 역사의 상선에서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예배하고 계실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철기와 철제문화가 없었기에 블레셋의 철제무기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블레셋 입장에서는 토끼 사냥과 같았을 것이다. 칼이나 창이나 막대기를 가지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식 탱크와 같은 것과는 상대가 안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불을 붓고 금식하여 회개하고 온전하게 간절하게 부르짖으니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하나님이 도우신 것이다.

*사무엘상 7:11-12,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완전 대승한 것이다.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와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물과 금식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사무엘상 7:13,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하나님의 도우심이 민족적으로 도우시는 것이다. 사무엘을 통한 개인의 회복이 민족적 회복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잘 기도하면 하나님은 저 휴전선도 지켜 주실 것이다. 늘 기도하니까 북한을 막아주시는 것이다.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면 쑥밭이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막아 주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불 병거와 불 말과 불 전차를 통하여 막아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아애가 2:19,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지난 주 3.1운동이 있었다. 104주년이었다. 아마도 3.1운동이 없었으면 민족적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랑거리인 것이 무리가 아니다. 33인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프로테스탄트이다. 여기에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된다. 지금까지도 3.1운동을 기념하듯이 당시 그리스도인은 2%가 안 되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40일 만에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상해임시정부 선언문이 있는데 깜짝 놀랄 것이다. 다시 보면,

*‘우리는 조국 조선의 정치적 민족적 자주독립만이 아니라 신국(神國)을 건설하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 선언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60년대 초반까지는 애국가가 ‘하나님’이 보우하사였는데, 어느 사이 하느님을 가사가 바뀌었다. 여러분 50-60년데 대한뉴스를 들어보면 애국가에 하나님으로 되어있다. City of God!! Nation of God!!!이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이 낮아져서 이 자리가 예배하고 부흥의 미스바의 각성이 되어야 한다. 양동이에 물을 하나님이 붓는 것처럼 “주여, 내 마음을 물 쏟듯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이 낮아지게 하소서.”

지금 부흥운동을 하는 에즈버리에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헝투 레오’라는 말레이시아 출신 교수님이 2015년에 그때 하나님께서 ‘너 교수직을 내려놓고 에즈버리를 위해서 기도하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보수주의 신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신비한 비전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많은 생각을 거쳐서 나중에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2019년에 이주을 하고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에즈버리에서 유명인사가 될 정도로 애썼다고 한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니까 방송사들이 인터뷰를 요청했는데도 인터뷰를 거부한 것이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부인도 남편을 따르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러분 이 자리에서 기도하고 물을 붓고 금식하고 온전히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우리의 겸손한 자세가 되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도우실 것이다.

우리의 힘과 죄와 연약함을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면 좀 더 깊은 각성이 있게 된다. 우리의 물과 우리의 금식, 우리의 온전한 번제는 신약의 복음이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회개하고 가슴아파할 때에 우리 마음속에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죄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 지금도 계속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 지금도 상처를 입힌다는 가책을 느끼면서 회개할 때에 단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드리게 된 것이고 우리가 잘못하고 범죄 한 것은 지금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는다는 생각만으로 안 되고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주님의 보혈을 흘린다는 것은 지금도 예수님의 몸에 상처가 나고 그 상처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저는 부족함이 있을 때마다 고민이 된다. 내 연약함으로 주님께 지금도 상처와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나의 죄를 씻기는 것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네.’ 라는 찬양을 할 때마다, 쉽게 말하면 내 죄가 지금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멘... 오늘 이런 내용은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내용을 여러분들 것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진실로 구할 때에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생애에 기도가 체험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까지도 포한된다. 한나의 과거의 기도가 현재의 사무엘의 기도를 만드는 것처럼, 한나의 과거의 기도가 현재의 사무엘의 기도가 만나서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심을 집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앞에 놓고 어떤 이는 불도 체험하고 어떤 이는 홍수도 지나가고, 노아와 광야에서, 어떤 이는 파도도 지나가게 하시고, 어떤 이는 피의 전쟁을 지나가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다윗처럼 시편을 보면,

*시편 94:17,
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우리의 약한 부족함으로 주님의 보혈의 피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요약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아들의 심장이 터지도록 나를 도우셨음을 깨달아 매일 내가 주님께 상처를 입히는 죄를 범하지 말고, 회개하여 하늘의 불을 경험하며 금식하고 엎드려야 한다. 어떨 때는 예기하지 못하는 큰일을 만났을 때, 사무엘처럼 쉬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온전한 예배와 온전한 번제를 드리는 쉬지 않는 기도의 물을 붓고 금식하여 응답의 도우심을 바라야 한다. 우리는 참된 미스바의 장소에 모여서 함께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두가 낙심의 임계점을 돌파해야 한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나안의 농경 여신인 아스다롯을 비롯한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온전히 마음을 여호와께로만 향해야 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겨야 했다. 이렇게 할 때 이스라엘은 압제받던 블레셋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미스바는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사무엘은 백성들이 비교적 모이기 용이한 이스라엘의 중앙부로 백성들을 모이게 했다. 이렇게 소집된 미스바 성회는 범민족적 회개 운동을 위한 최초의 성회로서, 사무엘의 주도하에 백성들이 금식과 회개로 동참한 민족의 성회였다. 미스바 성회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함으로 도래케 되는 평화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얻어지는 축복을 교훈한다. 하나님과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어그러진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종교 개혁 운동이고, 사무엘의 신본주의 적 통치 기반을 세우기 위한 민족적 단일화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자 할 때일수록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과 악의 세력들이 우리를 대적한다 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면 그것을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 이 전투의 핵심이자 교훈이다. 사무엘이 강력하게 단행했던 종교 개혁은 우상을 제거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합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의 은혜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욕심과 죄악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실천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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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2월 25일)-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시리즈 14번째 강의.
제목: "챗 GPT시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말씀: 사사기 7:1~2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조철민 부믁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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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7:1~23,
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더라. 
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1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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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
할렐루야! 
오늘 새로운 은혜가 넘치는 복된 주일이 될 줄 믿는다. 지하에 있는 분들은 잘 모르시는데 오늘 광장에 새로운 현수막이 딱 붙었다. 뭐라고 씌어 있는가? "새 봄, 새로운 호흡, 새로운 은혜“새로운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려면 시대를 극복하고 말씀으로 체화가 되어야 한다. 요즘 연초부터 SNS나 언론을 달군 빅이슈 중의 하나가 ‘챗GPT’이다. 채봇이라고도 한다. 챗GPT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것이다. 쳇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자동 회귀 언어 모델이며 딥 러닝을 사용하여 인간과 유사한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챗GP는 인공지능(chatGPT)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빅 데이터 시대이다. 수많은 빅 데이터를 가지고 이제 인공지능 이런 것들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무서울 정도이다. 어떻게 하냐면, 여러분 평생에 책을 만 권 읽을 수 있는가? 제목도 만권 보기가 힘들 것이다. 쉽지가 않다. 그런데 챗GPT는 순식간에 책을 만 권, 십만 권을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대한 내용도 종합적으로 판단도 한다제가 한 번 테스트를 해보았다. 
 
제가 한 번 오정현은 누구인가? 를 넣어 보았다.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 정말 세상에 깜짝 놀랐다. 저보다 더 많이 내용이 나왔다.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설교해 주세요!' 했더니 설교 문이 쫙 나왔다. 어떻게 보면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컴퓨터는 잘 못 되면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되지만 그런데 이 챗GPT는 플러그를 뽑아도 계속 역사한다. 왜냐하면 클라우드에 저장된 것을 다 가져오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챗GPT가 잘못된 방향을 잡으면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시대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칼빈대학의 신진학자, 기독교 철학자인데 이러한 시대 앞에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이고 갈망하는 존재이다. 사랑하는 존재이다. 이런 시대 가운데서도 이런 엉터리 예배하고, 엉터리 갈망하고, 엉터리 사랑하는 것으로 이 갈증을 채울 수가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하는 존재로 여기실 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명을 갈망하는 존재로 부르신 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사랑하는 존재로 부르신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주님은 온전한 제자가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 그야말로 참 존엄한 존재로 보시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를 고상한 존재로 보신다. 그러니까 온전한 인격, 고상한 인격, 존엄한 인격으로 만들었는데 이 챗GPT가 우리에게 아무리 두려운 마음이 있어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가운데서 아무리 그게 대단하더라도 본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웠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사사기 7:3,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미디안의 13만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니까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기드온도 굉장히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챗GPT 이런 시대에 이런 잘못된 빅 데이터를 가지고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럴 때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인격적인 것에 있어서 마귀가 우리를 훼손시키려고 하고 있다. 마귀는 우리를 타락시키고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챗GPT 두려워 보이지만, 아무리 발전하는 시대라고 해도 챗GPT는 영성이 없다. 챗GPT는 성령이 없다. 말씀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말씀에 기름 부으심과 말씀에 조명을 빅데이터를 가지고 설명하는 그것이 대신할 수는 없다. 성령께서 이 시간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의 영이 함께 하시는 그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함을 파괴하는 것, 고상한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온전한 사람 되기를 원하고 주님은 온전한 제자 되기를 원하신 것처럼, 아무리 이 챗GPT가 발전되었다 하더라고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는 될 수 없다. 그래서 온갖 일들이 다 있지만, 여러분 우리는 책 백 권, 천 권 읽기도 힘든 인생인데, 순식간에 책을 십만 권, 백만 권을 읽는데, 그것도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그냥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잠도 자야하고 우리는 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인공지능 이 채팅서비스는 잠도 안자고 그냥 한계가 없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난리를 치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마치 오늘 기드온이 미디안의 13만 대군을 앞에 놓고 두려워 떠는 것과 같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북쪽에 미디안 대군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별볼일없는 므낫세지파, 가운데 요하스의 아들, 기드온이라는 자를 택해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신다. 
 
그런데 이 기드온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두려움에 떠는 약자였다. 겁쟁이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용사를 이야기할 때 첫 번째 기드온이 나온다. 오늘 챗GPT 시대에 수많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어려운 시대이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 온전한 인격, 고상한 인격, 예수님의 오전한 제자가 되는데 무장되는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 육신의 눈은 흐려질 수 있고 육신의 몸은 약해질 수 있지만, 우리의 영은 펄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두려움이 일상화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이스라엘 곡식을 추수할 때면 미디안 족속, 아말렉 족속, 동방족속이 다 약탈하고 단합을 했다. 얼마나 심하게 억눌렀는지 사시기 6장에 보면 알 수 있다. 
 
*사사기 6:2,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백성들이 산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 살기도 하고, 참호 같은 것을 만들어서 피신할 정도였다. 두려움이 일상화 된 것이다. 그리고 미디안이 연합군이 추수할 때가 되어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격적으로 약탈하는데 어떤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성을 약탈하고, 훼손시키고, 파손시키는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3만 5000명이 들어와 진을 치는 것이다.
 
*사사기 6:11,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그 당시 10만 대군이 얼마나 큰 숫자인가? 빅 데이터를 가지고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것처럼,,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이라는 그렇게 소심하고 겁쟁이이고 소심한 사람을 택하신다. 앞에 6장에 보면 기드온이 밀 타작을 할 때 원래 타작하면은 마당에다 펴놓고 타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타작하는 누가 쳐들올까 겁이 나서 포도주 구덩이가 있는데 거기에 숨어서 거기 틀에 밀을 타작하고, 기드온이 그만큼 겁이 많았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겠다고 하시니까, “아이고!, 저는 므낫세 지파, 내 아버지 집으로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막 읍소(泣訴)를 한다. 
 
*사사기 6:15,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돕겠다고 하시는데도 세 번이나 시험을 한다. 양털, 이슬, 등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런 계속 안 해보려고 한마디로 겁쟁이고 쫄보였다. 이것을 우리가 보면서 너무 놀란 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이 생긴다. 그런 상황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사기 6:12,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우리가 믿음보고 2.0을 하고 그 다음 하나님나라의 정규군이 되고, 이런 말을 하지만 웃는다. 오늘 이 말씀을 내 것으로 삼고 확신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온 같은 쫄보, 겁쟁이에게도 여러분 큰 용사 라고 하신다. 여러분, 큰 영사, 시대적 영웅는 이 어려운 가운데서 어떻게 되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역사서 ‘사마천’을 보면, 많은 영웅을 시대가 영웅을 만들지만, 그런데 성경은 시대가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큰 용사여, 하신다. 
 
*사사기 6:12,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여러분 이것을 다 안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온전한 인격이 아니다. 마귀는 우리가 인격성을 초월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겁에 질리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만들고, 물파서 내려가게 만들고 이게 전문이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신다. 오늘의 찬양 중에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 이렇게 찬양을 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찬송을 통해서든, 예배를 통해서든,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든, 이유를 막론하고 여호와가 함께 하시도다 하신다. 그게 큰 용사된 비결이다. 시대가 용사를 만드는 게 아니다. 큰 용사가 시대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 챗GPT 가운데서 우리가 크로노스 시간과 카이로스 시간이 있는데 크로노스 시산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다. 연대기적 시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그것은 크로노스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 시간이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우리 남은 생애를 하나님과 함께 하시도다. 그런 은혜를 받아서 크로노스 연대기의 삶이 아니라, 신대기적인 카이로스로 살아야 한다. 믿음보고 2.0보고 정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대기 시대를 살아야 한다. 참 중요하다. 하나님이 어떻게 체험하게 하시는가? 두 가지를 말씀하겠다. 
 
첫 번째는 
I. 하나님은 끝까지 남은 자를 택하신다. 
 
-오늘 보니까 13만 5천명이 쳐들오니까 기드온과 3만 2천명이 왔다. 하나님은 거의 4대 1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너무 많다고 하신다. 두려운 자들은 다 가라고 하신다. 몇 명이 남았냐면 만 명이 남는다. 하나님은 그것도 많다고 하시면서 물을 먹는 모습을 보시고 골라서 9,700명을 보내버리고 하나님께서 300명으로 남게 하신다. 기드온에게 있어서 피곤한 일이다.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대군이 13만 5천명이나 되는데 고작 300명을 가지고 가라고 하시니까,,, 그런데 한 명이 450명을 맡게 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 450명이 전문이신 것 같다. 우리는 늘 불완전하고 마귀는 우리를 늘 불완전한 인격으로 훼손시키려고 하고, 우리의 고상한 인격을 오염시키려고 하고, 우리의 온전한 제자 되기를 방해한다. 심지어 쳇GPT로 두려움의 상황을 가지고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하나님은 거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온전한 인격을 갖게 하시고 존엄성을 유지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내가 두렵고 쫄병같고 모자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되는 것을 믿고 끝까지 하면 남은 자의 은혜를 이런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쓰신다는 것이다. 이게 벼랑 끝 전술이시다. 항상 함께하시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라. 마지막 하나인 이삭을 바지라고 할 때, 여러분 기가 막힌 일 아닌가? 정말 답답하지만 칼을 들고 이삭을 찌르려고 하니, 하나님이 아니야, 스톱하신다. 우리는 거기서 이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생각하지만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그 덤불 뒤에 숫양을 준비해 숨겨놓고 계신 것을 보고 여호와 이레, 그런 그가 끝까지 남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이레를 믿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략은 벼랑 끝 전략이며 십자가도 벼랑 끝 전략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었다고 그러는데 보통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명을 다해주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것들을 온전케 하실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세대가 부족하고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상황에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격적,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온전한 제자로 될 수 있도록, 그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의 고상함이 파괴되지 않도록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미리 다 이루어주신 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마지막까지 남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끝까지 남는 자에게 하나님은 쓰시는 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특성은 이 어려움의 시대, 쳇GPT시대에, 기가 막히게 하나님의 전략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무기를 가지고 최상을 뒤엎는 것이다. 이제 기드온과 함께 전쟁에 나갈 사람은 300명이 남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9절에 보면, 
 
*사사기 7:9,
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아직까지 전쟁 시작도 안 했는데 하나님은 이미 이겨놓은 전쟁처럼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그것을 너의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고 하신다. 이미 이겼다고 하신다. 그런데도 기드온도 별로 마음에 안 닿은 것이다. 쫄보라서.., 그러면 혼자가 두려우면 부하를 붙여주시겠다고 하신다. 부라, 부라와 같이 하라고 하시며 조력자로 붙여주고 에너지를 주게 하신다. 기드온을 격려하게 하신다. 
 
II. 기드온에게 동역 자를 붙여주신다. 
*사사기 7:10~11,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이제 13만 5천명의 대군을 이겨야 하는데 부라와 함께 가라고 하신다. 만약 기드온이 담대한 사람이었으면 자기 혼자 내려갔을 것이다. 제가 볼 때 성경에 이 부라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부라와 함께 가서 적군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신다. 10절에 보면, 진영 안에 못 들어가고 진영 근처로 간다. 13절과 14절에 보면, 
 
*사사기 7:13-14,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의 진영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기드온의 칼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그 미디안의 진영과 그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넘겨주신다. 그 보리떡이 기드온의 칼이라고 하신다. 
미디안 진영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기드온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안이 두려워한다. 이 기드온과 부라가 드디어 사기충천해서 기드온으로 돌아간다. 이 보리떡 특공대가 이 미디안의 사람들을 떨게 한 것이다. 그리고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에게 여호와께서 미디안을 넘겨주셨다고 이제야 담대히 말하고 정작 그들의 손에 챗 GPT가 있었다든지 그들의 손에 칼이 있었다든지, 그들의 손에 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윗처럼 물맷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왼손에는 횃불을 담은 항아리와 오른손에는 나팔을 불고 있었다. 
 
*사사기 7:18,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하나님 나라와 기드온을 위하여 나팔을 불라고 하신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추석이나 대보름도 아니고 나팔과 횃불을 가지고, 칼도 없이, 창도 없이 이기게 하신다. 13500명을 어떻게 하시는가? 
 
*사사기 7:20,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한다. 개역개정 판에,,, 번역에 그렇게 되어 있다. 칼이다.라고 했지만 칼이여가 맞다. 300명의 기드온의 용사가 횃불을 들고 기드온의 칼을 들고, 
 
*사사기 7:22,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자기들끼리 내 분열이 일어나서 난리를 치고, 우리는 정말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할 줄 믿는다. 자기들끼리 정신이 혼미해서 자기들끼리 치고 박는다. 300명이 나팔소리가 엄청나게 들리게 해서 이기게 하신다. 기가막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할 줄 믿는다.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상한 인격과 존엄한 인격으로 이것을 원하신다. 두려움을 떨지 말고 지레 겁먹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기드온의 칼이여 하심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항아리는 곡식을 담는 것인데, 주님이 횃불을 숨기게 하셔서 아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이다. 그 어떤 사람도 전쟁에 위대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전쟁도구로 사용하신다. 패러다임 쉬트가 되게 하신 것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결국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바울도 우리는 질 그릇 같은 연약한 자라고 했듯이 고린도 교회도 성적으로 문란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문제투성이였다. 인생의 항아리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하나님 주신 말씀, 온전한 인격을 담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기드온의 300명의 나팔소리가 되면 이 시대의 소음을 덮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 하겠지만, 쳇GPT가 대단한 것 같지만 온갖 소리도 나팔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온갖 데이터를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압도하는 체험이 되기를 바란다. 벼랑 끝은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300명만 남게 하는가? 그 이유가 있다. 
 
*사사기 7:2b,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쳇GPT시대는 세상이 이런 것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신데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과학을 자랑해도 우리는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 십자가가 최고의 자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만 당시의 로마의 십자가는 수치의 어떤 상징이었다. 로마시대 최고의 상징은 강력한 부대가 행진하는 것이었고, 전쟁개선식이고 원형 경기장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짓밟는 것이고, 거기에 사람들은 감동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수치와 두려움이 최고의 도구가 되셨다.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사사기 6:34,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히브리서 11:29~31,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쳇GPT시대에 모든 사람들은 다 나그네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쳇GPT시대에 인공지능 챗팅 서비스 시대에 우리는 돌아갈 본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가 어떻게 제자가 되어야 할지, 마지막 남는 자로서의 사명을 주시고, 그리고 질그릇 같은 우리를 어떻게 혁신적으로 쓰시는지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135000×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0이다. 그러나 300명x3=900명이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가? 
 
*잠언21:31,
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오늘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사명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겠다. 
 
※일화하우드 핸드릭스가 비행기를 탔는데 그날 사람들로 붐볐고 아이들이 타고 다 칭얼대고 울었다.비행기에서 난기류를 만나서 기내식을 못주는 난항이었는데 그 중 여승무원 안내를 하면서도 친절하게도 웃으면서 섬긴다. 사람들이 욕도하고 짜증을 내는데도 그녀는 상냥하게 안내하고 섬겼다. 목적지에 다다라서는 핸드릭스 목사님이 여 승무원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당신처럼 충성된 사람처럼 일하는 이 항공사는 무척 운이 좋은 것 같다. 럭키하다.”고 하니까, 대답이 그녀가 하는 말이 "예수님을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요약
하나님 없는 13만 5천명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300명이 더 강함을 믿으며 주님이 함께 하시는 큰 용사가 되어서 성령이 없는 챗GPT 시대를 이겨내어, 벼랑 끝에서도 주님의 보리떡 특공대로 사용되는 기적을 맛보며, 세상의 모든 잡음을 뛰어넘은 자로, 온전한 제자로 새봄, 새 호흡, 새로운 은혜가 충만하여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드온의 큰 용사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는 기드온의 군대 숫자가 처음의 32,000명에서 10,000명, 300명으로 점차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일차로 돌아간 22,000명은 두려워하는 자들이었고, 그 다음에 돌아간 9,700명은 부주의한 자들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군사의 수를 줄이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겼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인간 생활의 승리는 외적인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들을 제외한, 손으로 움켜 핥아 먹은 300명을 선택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민첩하게 행동하는 자를 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람은 민첩해야 한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소수를 들어 쓰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 연약하다고 생각할 때에 온전히 하나님게 의존하게 된다.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300명의 군사적 자질보다, 하나님께서 소수를 통하여 승리케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부라라는 부하를 붙여 주신다. 서로에게 격려가 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동역자를 주신다. 성경에서 둘, 즉 ‘2’라는 수는 도움을 주는 경우와 확실한 증거를 확증할 때 주로 사용되는 숫자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 파송을 하실 때 둘 씩 보내셨다. 이는 지치기 쉬운 전도 여행 중에 서로를 격려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미디안의 진에 숨어 들어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용기백배한 기드온은 300의 용사를 지휘하여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다. 전투 방법은 병사들을 3개 조로 하여 기습하는 것이었는데 결과는 기드온의 통쾌한 승리였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기드온이 승리하게 된 것은 그가 끝까지 견디었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영상은 2부 예배입니다.  본문은 1부 예배여서 내용이 좀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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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2월 19일)-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13강의
제목: "비대칭(非對稱) 전략(戰略)의 신비(神祕)"
말씀: 여호수아 5:2~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모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임병영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여호수아 5:2~10,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10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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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본격적인 봄 사역이 시작된다. 말씀을 통하여 영혼의 따뜻한 봄 동산을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설교 제목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13번째인‘비대칭(asymmetry) 전략의 신비’로 했다. 부흥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은혜가 있어야 한다. 비대칭 전략은 대칭 전략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비대칭 전략은 ‘이러면 이럴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다. 예를 들어서 골리앗이 다윗을 치려고 칼과 창을 가지고 나왔을 때, 다윗은 칼과 창을 가지고 나간 것이 아니고, 물맷돌을 가지고 나갔다. 그러니까 칼과 창에 비해서 다윗의 물맷돌은 비대칭전략인 것이다. 그러니까 칼과 창의 판을 바꾼 것이다. 그 다음은 미디안 군대의 십삼만 오천 명의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에, 기드온이 300여명의 용사와 함께, 기드온의 전략은 나팔과 항아리 횃불을 가지고 전쟁을 했다. 십삼만 오천 명 앞에 대칭 전략은 대군을 끌고 하다못해 3만 명이라도 대군을 끌고 나가야 되는데 하나님은 그중에 하나님은 뽑으시고 뽑으셔서 생각이 다르게 승리하게 했다. 하나님은 300명을 뽑아서 항아리와 꽹과리와 항아리 횃불을 가지고 나갔다. 역사적으로 비대칭 전략으로 세계사를 바꾼 것 중에 하나가 미국의 남북전쟁 초기에 참혹한 전쟁이었다. 링컨이 이끄는 남군의 압도적인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해방 선포로 승리했다. 그 순간 남군과 북군이 싸울 때, 연방제의 견해의 차이로 시작된 그 남북 전쟁이 정치적 갈등이었다. 정의와 불의의 부류로 싸움이었다. 그리고 전쟁은 전략을 가지고 하지 않고, 갑자기 링컨이 기도하러 들어가 버렸다. 전쟁할 때, 기도하러 들어간 것이 비대칭 전략의 하나이다. 우리나라도 6.25전쟁 초기에 패배해서 낙동강 일부만 남아있고 공산당이 거의 다 점령당하고 있는 일보직전에 우리가 전투력을 강화시켜야 하는데 그중에 상당한 집중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부산의 초량교회에 남아서 목사님들이 눈물로써 기도하고 회개한 것은 비대칭 전략이다. 그래서 기도하는 동안에 비행기가 뜨게 해서 공군력이 강화됨으로 인해 날씨를 맑게 해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대칭전략은 이 땅의 법칙이고, 비대칭전략은 하늘의 법칙이다. 이 땅에 있는 모든 법칙은 예를 들어서 중력의 법칙이 있듯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중력의 법칙 때문에 다 죽는 것이다.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도 안 죽는 비결이 있다. 그게 무엇인가? 헹글라이더를 타면 안 죽는다. 그 공기 역학의 법칙을 가질 때에 떨어지지 않고 이렇게 날게 된다. 중력의 법칙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기역학이 상위 법칙으로 그 중력법칙을 압도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 가지 말씀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비대칭의 전략의 은혜를 가지고 세상에 법칙을 압도하는 하늘의 법칙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란다. 최상의 비대칭 전략이 무어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다음에 마귀의 세력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열두 명의 천사들을 다 두고 나는 다 처치할 있지만 그러나 아니야, 하나님의 뜻대로 할 거야, 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적들이 칼과 뭉치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온갖 것을 다하지만 예수님은 다하실 수 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최고의 비대칭 전략의 최고봉이다. 여호수아 5장 6장에 보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리고 성이 나오는데 이 여리고 성을 공략을 해야 되는데, 작전이 사다리를 놓고 화살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고 해야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돌라고만 하신다. 가만히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라고 하신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일곱 번을 돌라고 하신다. 외치라고 하신다. 이것이 비대칭 전략인 것이다. 아주 현장 중에 현장이다. 오늘 본문을 앞에 두고 여러분이 봄 사역을 두고 비대칭의 은혜를 받기를 바란다. 그 핵심은 딱 두 가지이다. 2절과 3절과 7절과 8절이다. 첫 번째 비대칭 법칙으로,
 
I. 할례를 행하라.
 
*여호수아 5:2,3,7,8절,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큰 장애물 여리고 성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는 것이 뭐냐면 자기 백성의 몸에 칼을 대라는 것이다. 칼을 대는 것은 할례를 받게 해서 꼼짝 못하게 누워있게 하는 것이다. 힘을 쓰지 못하게 해서 칼을 대니까 소위 무장해제이다. 그 큰 여리고성을 앞에 놓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힘 빼기 작업이시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이다. 사람이 내 힘이 빠지면 주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다. 적들이 쳐들어오면 몰살을 당할 지경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순종 세대는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몸을 묶으며 순종하고 있다.
 
*여호수아 5:9,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할례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선택 받은 사람들이 행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의 표식이다. 할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창세기 17장에 보면 99세의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시고 계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언가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반드시 마음으로 준비하라고 하신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하나님이 더 원하시는가? 아니면 백성들이 더 원하는가? 하나님이 원하신다. 오죽하면 히브리서를 보면 나온다.
 
*히브리서 6:14,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기복신앙 이런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그런데 허를 찌르는 하나님의 신비한 비대칭 전략이시다. 하나님은 더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준비가 되어야 되는데 아직까지 애굽의 노예근성이 있어서 정리가 안 되는 것이다. 노예근성의 핵심은 자기중심이고 내 것만 생각하고 이런 것이 어쩔 수 없는 이것이 자기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야, 너는 축복의 근원이야, 하시며 너를 통한 사람들은 복을 얻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 17장에 보면 할례를 행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하신다. 아브람은 적당한 자기생각, 자기중심이지만 아브라함은 땅의 모든 족속의 축복이 되기를 원하신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신다. 완전하라고 하신다.
 
*창세기 17:1,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러려면 적당이가 아니라, 살을 베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 나라의 오합지졸 같은 사람이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비대칭 전략으로 살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에 새긴 것을 볼 때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너는 열국의 딸이야, 그리고 너는 세상의 방법대로 대칭전략으로 살지 말고 너는 비대칭 전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법칙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골로새서 2:11,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우리는 육신의 부패한 본성이 있고, 노예근성이 남아있고, 자기중심이 남아있고, 그 자기 중심으로 있어서 주님을 평생 믿음으로 받고 난 다음에 마음의 할례를 받는데 마음의 가죽을 베어야 하는데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 상처를 내는 것은 자기중심에서 십자가의 삶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십자가 삶이고, 구약에서는 할례이다. 이 시대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얻기 위해서는 내 내면의 할례를 받는 것을 소망한다. 아멘.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까 내가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은 내가 스스로 왕이 되는 것을 내리고 내가 왕좌에 앉아 있는 내 자아를 나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내 자아의 왕권을 끌어내려서 더 이상 나의 노예상태의 성향이 지배하지 않기를 도와달라고 해야 한다. 내 마음의 왕좌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육신의 자아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내가 스스로 왕권을 내려놓고 폐위 당하고 난 다음에 더 이상 죄에 휘둘리지 않도록 오늘 마음에 할례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비대칭 전략이다.
 
*우리 교회에 튀르키에와 시리아를 우리 교회가 함께 마음을 함께 돕기를 바란다고 플랜카드로 걸어두려고 했으나 비가 와서 관두었다. 그렇게 안 해도 우리는 마음으로 움직여서 도우면 된다. 자연스럽게 돕고 하면, 그것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줄로 믿는다. 또 하나의 비대칭 전략의 키는,
 
II. 유월절을 지키라.
 
*여호수아 5:10,
10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이제 여리고성을 공략하기 전에 주님 앞에서 길갈에 진 쳤고, 아까 할례를 행하고 수치가 물러갔다고 했다. 그리고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여리고 성을 공략할 때에 할례를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다. 유월절은 출애굽 할 때와 시내 산에 그랬고, 거의 40년 만에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기적 같은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유월절이다. 할례는 일생에 한 번 받는 것이다.
 
*할례는 남자가 모두가 다 받는 것이다. 유월절은 매년 반복하는 것이다. 할례가 서양에서는 나중에 세례가 되었고, 유월절은 나중에 신약에서는 성만찬이 되었다. 구약에서 할례=신약에서 세례, 유월절은 매년 반복이다.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더 잘 지고 나가고 비대칭 전략의 은혜를 더 실천하기 위해서는 매년, 매주, 매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힘과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할례는 내가 받는 것이지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압도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대칭 전략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서 이제 노예근성을 벗어버릴 뿐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홍해를 우리 힘으로 가를 수 없는 것이다. 여리고 성도 우리의 힘으로 공략할 수 없다. 하늘의 만나와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도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월절의 은혜를 허락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특별한 능력과 은혜를 주셔야 한다. 우리가 부흥하기 위해, 우리가 잘 되기 위해, 우리가 건강하기 위해, 조금씩 먹고 운동하고 이 땅에 것이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유월절을 지키는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유월절의 은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것을 여러분이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비대칭 전략의 중요한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주신 것은 일방적인 은혜이다.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어나가는데 이스라엘의 장자가 살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이다. 이게 유월절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주신 것도, 노아에게 방주를 주신 것도, 아브라함에게 백세 이상을 주신 것도, 요셉이 총리가 되게 하신 것도, 노아에게 방주 주신 것도, 무엇보다도 신약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요청도 안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일방적인 유월절의 축복인 줄로 믿는다. 아멘.
 
조금 더 나아가면 우리는 부족한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전 세계 성경이 번역이 잘 된 것도 많이 있지만 대한민국 한글 성경이 번역이 잘 된 줄로 믿는다. 이것도 유월절의 축복이다. 우리에게 교회를 주시고, 영적 가족을 주시고, 우리가 오늘 날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부족한 것은 많이 있지만 그래도 과거에 선진들의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이 시대에 좋은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어느 정도 느끼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유월절의 축복이다. 자기중심이 아니라, 열국의 아비가 되는 정말 노예근성을 벗어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는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힘과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힘과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능력이 유월절을 통하여 깨닫는 축복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유월절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가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구원의 감사와 은혜와 축복으로 소위 은혜의식으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유월절 은혜가 날마다 있을 때에 우리의 공로의식이 아니라, 은혜의식이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식이 2이고 공로의식이 1이면, 2/1이다. 그런데 은혜의식이 반쯤 되고, 공로의식이 1이면 마음이 똑같이 1이라도 은혜가 만분을 1이 되면 우리는 흔히 내 공로의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대체적으로 두 자기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할례사건과 유월절 사건이 늘 반복된다. 할례와 유월절을 통하여 비대칭 전략을 깨닫게 하시고 이것을 가지고 여호수아와 그 순종의 세대는 결사적으로 말씀에 순종했다. 결사적으로 그들은 몸과 마음을 말씀에 묶어버렸다. 드디어 이 비대칭 전략을 통하여 상상할 수 없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 그 금성철벽(金城鐵壁)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셨다. 비대칭 전략으로 마음에 준비를 하니까 여리성을 무너뜨려 주셨다. 총 한 번 쏘지 않고 돌멩이도 한 번 던지지 않고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께 다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여리고 성을 무너지게 하셨다.
 
*여호수아 6:3,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모든 군사는 유월절을 지키고 똘똘 뭉치니 어느 순간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다. 이 비대칭 전략을 하루에 한 바퀴를 돌 때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었겠는가? 우리가 비대칭 전략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많은 사람이 6일 동안 조롱(嘲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이 중요하다. 마지막 여호수아 명령에 따라고 비대칭 전략으로 외치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이다. 우리가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날마다 기도하면 어느 순간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이다.
 
*여호수아 6:10,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하고.
-이 뜻이 무엇인가? 영적 전쟁이다. 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들이 유월절과 할례로 하나가 되니까, 결사적으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고 결사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까 세상이 뒤집어지고 여리고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새 역사가 시작된다. 우리가 봄 사역을 앞에 두고 결사적으로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가정과 공동체가 말씀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결사적으로 교회 중직자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다시 한 번 여리고가 무너지고 홍해가 갈라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우리를 향하여 복을 주시려고 안달복달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내 마음의 자아, 자기중심의 왕좌를 포기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늘 감사함을 가지고 공로의식이 아니라, 은혜의식으로 충만해서 축복의 근원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을 받아야 한다. 우리 속에 노예근성, 애굽의 노예근성,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350킬로이다. 왕복 700킬로 거리가 40년이 걸렸다. 신앙의 비대칭 전략으로 하면 모두가 가족이 남편이 예수를 믿게 된다. 너무 신비한 것은 수많은 난제를 해결 되는 것이다. 날마다 충분하면 우리 속에 노예근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토요일마다 비웃지만 편하게 온라인 예배를 드리지도 않고 이곳 현장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하면 하나님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봉사하고 전도하고 비대칭 전략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호수아 5:1,
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주님 사랑과 축복을 끝없이 주실 것을 믿는다.
 
♧요약
신앙의 비대칭을 전략으로 내 왕좌의 자리를 포기하고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법칙 가운데 주님께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날마다 압도적으로 내려주시는 축복을 받아서 유월절의 은혜를 체험하고 공로의식이 아닌 은혜의식으로 살아가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서로 나누며 영혼의 따뜻한 봄 사역에 헌신하는 모두가 되어야 한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명령하신 것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 하는 외적인 징표이다. 할례의 진정한 증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신약에서 할례는 세례로 변화되어지는데,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정한 할례(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 약속의 소유자가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 의식을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다.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육체적 증거이며,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할례는 언약 백성이 지니는 표시였고, 유월절은 출애굽의 구원을 축하하며 기념하는 축제였다. 가나안 땅에서 이 두 의식을 지켜 행한 이유는 아브라함 언약과 출애굽이 바로 이 성취의 때를 기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교회 대표전화 :02-349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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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2월 12일)
제목: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
말씀: 히브리서 11:13~16(1부,2부),
고린도전서 1:18-25(3부,4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장은진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전광식 목사님(전 고신대학 총장, 독수리 중고등학교 이사장)-초빙-(1부,2부),
에프렘 버클목사님(런던시티미션대표)-초빙-3부,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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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3~16(1부,2부)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사무엘상 22:1~2(3부,4부)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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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식 목사님(전 고신대 총장, 독수리 중고등학교 이사장)-초빙-(1부,2부)-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이 아침 영광스런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시니 우리 하나님을 찬양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20세기는 정치적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서 양진영이 세계 일종에 지도그리기 하면서 열정과 냉전을 치러왔다. 20세기가 끝나면서 한 쪽 진영이 현실 정치에서 이렇게 무너지면서 그 영역에 속해 있던 동구권의 많은 나라를 비롯하여 이렇게 세상이 바뀌게 되니까, 우리가 맞이하는 21세기는 더 이상 갈등, 이데올리기라는 대립이 사라지고 이제 인류의 앞날에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이렇게 자본주의 적인 물결이 확산을 하면서 영구 평화가 오지 않느냐의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여려분이 다 아시는 바대로 마치 유토피아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몽롱한 착각에 빠져있던, 특별히 미국 사람들에게 정말 현실은 이게 아니구나! 하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이 911, 극단 이슬람에 의한 미국의 무역빌딩에 대한 공격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미국이 아프칸 전쟁을 벌여서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전쟁에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지만 결국 그 이전의 40년 전과 똑 같이 미국이 월남에서 철수했듯이 아프칸에서도 철수를 해서 다시금 극단 이슬람이 그 지역을 장악(掌握)했다. 미국이 아프칸을 철수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코로나라는 것이 발생했고, 코로나가 조금 주춤해지려고 할 때에, 소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고, 우크라이나의 전항을 시시각각으로 뉴스를 보던 우리들은 최근에 약간 전쟁이 소강상태로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또 튀르키와 시리아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러분, 우리가 꿈꾸던 낙원과 같은 20세기는 결코 인간의 몽롱한 기대대로 전개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또 이러한 극변하는 세계와 이 자연의 현상에서 가장 희생을 당하는 것은 인간이며, 전쟁에서도 인간이다. 그리고 코로나에서도 인간, 지진의 이 무서운 사태에서도 희생을 당하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현상을 보면서 오늘 이 시간에 과연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지상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좀 철학적이고 성찰할 수 있는 이런 주제를 이아침에 설교의 화두로 던지고자 한다.
 
진화론과 같은 세속과학하고 성경이 인간을 보는 시각이 확연이 다르다. 그런데 이 대조적인 두 가지 입장이 하나에 동요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이라는 게 있다. 진화론에서도 인간을 이성에 부인하지 않고 우리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지.정.의가 있어서 동물과 달리 지성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이성을 가진 인간이 동물과 같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쓰면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사유하고 사고(思考)한다. 그러면 이 잘난 이성으로 도대체 무엇을 사고하고 무엇을 사유(思惟)하는 것인가? 좀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유의 대상은 두 가지이다 매우 경건한 성도님들은 그런 분들은 아마 주야로 히브리서 3장 1절의 말씀처럼 예수님, 하나님을 깊게 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칼빈 같은 사람, 흔히 칼빈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는데, 그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고, 그의 입에는 온갖 언어가 하나님의 관한 언어로 가득하고, 그의 가슴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하니까, 칼빈을 조금만 툭 건드리면 그냥 하나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정말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 예수님을 주야로 묵상(默想)한다. 일반인들은 어떨까? 우리 주변에 사는 대부분 일반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지적하신바 대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나 의와 같은 이런 고상한 주제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소유를 바라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를 밤낮 고민하는 것이다. 이 두 생각의 큰 주제 사이에 하나가 놓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너무 생각하다가 내가 누군지를 때로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놓치고, 세상을 너무 고민하가 세상에 사는 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이런 자기에 관한 물음을 다 놓칠 수가 있다. 이것을 놓치다 보니까 자신의 대한 성찰도 없고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 없으니까,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따지고 보면 무가치한 삶이 삶이라고 영위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자 그러면 대체 인생이란 것이 무엇일까? 여러분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대로 쉽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에 한 명인 세네카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고 했다. 평생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은 이것에 대한 정답을 발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로 다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서치라이트, 조명이 없이는 타락으로 인해서 우리의 어두워진 지성이 자기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들쳐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답변서(答辯書)이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 세상의 삼라만상(參羅萬像)에 대한 답도 다 나온다. 성경에는 구원에 관한 말씀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구원 받았다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답변도 보는 것이다. 자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그럼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까? 성경 안에도 숱한 정의들이 발견되지만 오늘 우리의 말씀의 화두처럼 ‘인생은 다 나그네’ 라고 말을 한다. 바로 앞에 선 족장 야곱이 자기의 120년 삶을 회상(回想)을 하면서 내 삶이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다. 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신약에 와서 제자 중에 수제자(首弟子)라고 하는 베드로가 흩어진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게 수신자들에게 지칭하는 말이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라고 믿음의 형제들을 부르고 있고, 이런 일반 성도들뿐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 우리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기라성 같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성경은 이 사람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 했다. 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 모든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살아가나는 이 인생살이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나아가는 지장의 나그네 들이라고 말한다. 성경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는 인생을 비유할 때, 연극에 비유해서 무대는 세상이고 배우는 인간이다. 라는 은유를 하기도 했고 우리 동양에서는 중국에 한시에 종종 나오듯이 여행에 비유해 가지고 세상은 여관이고 사람은 그대로 길 가던 나그네로 비유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살이는 길 가던 나그네, 호모 비아토르이다. 우리는 지금도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이러한 길 가는 존재이고 그것만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사실은 길 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구원(救援)과 영생(永生), 진리(眞理)를 찾아서 방황(彷徨)하면서 세상을 떠도는 구도(求道)의 모습도 길 가는 것으로 은유(隱喩)할 수 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정주자나 시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인간을 이야기 할 적에 흔히 이중국적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하늘을 국적으로 가지고 있고, 지상에 대한민국에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조금 더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 명쾌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면,
 
I. 인생은 나그네이다.

*​빌립보서 3:20,
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럼 여러분 이것은 이중국적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이중국적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시각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우리는 하나의 국적만 지닌 것인데 그것은 천상의 국적이고 땅 위에서는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든지, 미국 국민이든지 상관없이 이건 나그네이고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특히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오인의 정체에 대한 신약의 답변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는가? 이 땅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천국 시민권을 지녔다는 그 인식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이요, 미국의 시민이요, 이 의식이 사실 더 강하고 뿐만 아니라, 아예 자기가 나그네라는 이런 사실을 인정(認定)하지도 심지어 인지(認知)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그네 의식이 없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동료들, 우리가 우리를 돌아보면 그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가지고 기왕이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그네’이구나! 이렇게 의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나그네 의식이 없다는 것, 나그네 의식의 결핍이 무엇인가? 그저 이 세상을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살다가 이곳에 영원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난다는 것을 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세샹에 대해서는 타향(他鄕)성(性)을 느껴야 되는데 여기에서 편안함과 본향(本鄕)성(性)을 느끼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서 이질(異質)성(性)을 느껴야 되는데 무한한 동질(同質)성(性)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믿음의 선대(先代)를 좀 보라.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오늘의 뉴욕이나 파리와 같은 세계 최초의 도시인 우르이다. 세계 최초의 나라가 수메르이고 거기에 대표적인 도시가 우르와 우릎이다. 아브라함은 거기 출신이니까 우리가 누리는 오늘날 나라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도 당대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문명, 그런 속에 살았고 그 시애의 아마 재미거리들을 향유(享有)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네 아비 본토라도 진정한 고향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 거기에 동질성을 느끼면 안 되고 이질성을 느끼라며 떠나라고 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정말 죽치고 앉아 있는 살고 싶었던 그 롯의 아내와 그 식구들에게도 ‘너희도 거기서 왜 동질성을 느끼느냐’라고 하시며 떠나라고 하신다. 여러분, 개인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에는 애굽에게 나중에는 바벨론에 아예 죽치고 앉아서 그 나라 시민으로 살고 싶은 그들에게 떠나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의 본향도 아니고 네가 머물 곳도 아니라고 하신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서 지상에서 이스라엘만큼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세상에 살면서 본향의식을 못 느끼게 한 그런 민족이 없을 것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부터 떠돌이, 야곱부터 떠돌이 그리고 지나간 수천 년 시간 동안 디아스포라로 온 세상을 떠돌았고, 그리고 여러분 중동에 조그만 무슨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거기에 무슨 평안함이 있는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가난이고 어디고 다 떠나서 ‘너희들이 민족이요, 방랑민족이요, 로마드 민족이요, 너희는 유랑민이다.’ 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오늘날 영적 유대인이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의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아니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이런 많은 시련들을 통해서 거듭거듭 깨우쳐 주시는데 ‘그 세상이 너희가 정주할 곳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여러분 따라서 초대교회에 성경 다음으로 나오는 문헌이 소위 사도 적 교부들의 문헌인데 그 중에 하나인 디오게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고국에 거주하지만 그들은 마치 이방인(異邦人)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영어로, In the world, not of the world​. 말이 어원이 이 디오게네트 문서 안에서 나온 것이다.
 
자 여러분 이렇게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모두가 말씀 앞에서 ‘나그네 의식’이 중요하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길 가는 존재, 도상(途上)적(的) 존재이고 우리의 삶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過程)적(的) 삶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은 초대교회뿐만이 아니라, 일제의 암울(暗鬱)한 시절, 6.25의 그 참혹(慘酷)한 그 전항 가운데서 우리의 부모님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늘가는 밝은 길’을 부르시면서 이러한 나그네 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의식이 과연 있느냐? 이다. 우리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련(試鍊)과 박해(迫害)를 당해서 영적으로 이런 걸음을 교회도 나그네 교회요, 우리도 나그네 삶인데 우리는 깨달아야 되는데 우리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면서 이 세상이 영원한 집인 양 그렇게 나그네 됨을 망각(妄覺)하고 타향(他鄕)을 본향(本鄕)화로 시도하고 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길 위의 존재요, 천상으로 가는 지상으로 가는 나그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인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II. 나그네는 가는 길을 자지도 쉬지도 않는다.

-나그네 인생을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저 뜬 구름처럼 살다가 왔다가 가는 것일까? 아니면 불자들처럼 세상에 모든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나그네는 길도 열심히 가고 길 위에서도 쉬지 않고 자기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두고 우리가 따르는 칼빈도 유명한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지상에서 인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적고 있고, 그리고 지난 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클라스퍼 스킬드와 아브라함 카이퍼도 이 문제를 두고 서로 설전을 벌였다.
두 사람은 이렇다.

※클라스퍼 스킬드는
“우리가 나그네이니까 세상에서는 뜬 구름처럼 살다가 그저 복음 전파만 하고 그저 가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주장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명의 장소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완수를 해야 된다.” 라고 했다.
 
-앞의 버전은 1버전인데, 나그네로서의 복음전파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버전은 문화적 사명자로서의 삶이라고 한다. 사실 대조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보면 이 두 가지는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되는 그런 주장이다. 스킬드 말처럼 우리는 나그네이다. 그러나 카이퍼 말처럼 우리가 나그네이지만은 뜬 구름처럼 속세를 떠나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일터,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달란트를 가지고 또 인생의 소명을 이루면서, 열심히 살면서 그 방향은 천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특별히 카이퍼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저와 여러분을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렇게 위치 설정을 하면
※카이퍼: 창조-타락-구속 그 가운데서 우리는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면 그런 게 아니고 지상의 모든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할 때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 구원 받고 나서는 끝나는 것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카이퍼가 볼 때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창조를 하셨냐는 것이다. 타락한 상태로 해서 그러면 구원받게만 하려고 한 것인가? 그러면 애당초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지 말지, 그 보내신 이유를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 타락한 상태에서 태어나다 보니까, 구원받고 구원시키는 데에만 급급하다보니까 정작 구원 받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모르고 그리고 왜 하나님이 나를 왜 창조했고 보냈는지에 대한 우리가 그간에 망각하고 있던 창조의 목적과 내 삶의 의미에 대해서 못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상태에서는 창조된 목적을 망각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구원 받았다면 이제 다시금 돌아가서 하나님이 나를 이 왜 보냈을까? 이 달란트는 왜 주셨을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일까?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을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열매 맺으면서도 우리의 지향점은 현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상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 생명의 길이, 건강, 각종 달란트를 가지고 정말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정말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 공부를 할 때는 끝장을 내야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그게 무슨 공부이냐고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화끈하게 끝장을 내 봐야지, 인생이란 것을 좀 화끈하게 살아야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어쩌면 화끈하게 살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인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현재에서 천국을 선취하며 살고 거의 미쳤다. 그를 일반인이 볼 때는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음을 위해서 인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가 바울처럼 그렇게까지는 되지는 못해도 우리가 바울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고백할 정도로 정말 우리가 얼마동안 살지는 모르지만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소명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III.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가 나그네 길을 가다보면 여러 가지 유혹(誘惑)이 많이 있고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많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길 가다가 한 눈 팔기이다. 천상을 향해 가다가 천로(天路)역정(驛程)의 기독교처럼 허영의 시장, 번영의 시장 같은 데에 가면, 눈이 현혹되어가지고 길 가는 것을 잠시 중단해 가지고 거기에 한 눈을 판다. 무엇 때문에 한 눈을 팔까? 신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빌리면 대게 네 가지인데, 세상에서의 부요(富饒)함, 권력(權力), 향락(享樂), 명성(名聲), 뭐 이런 거라고 보고 있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빠지기 쉬운 우리 한 눈 팔기는 돈에 대한 유혹일 것이다. 오늘 날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사람들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이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재물(在物)과 부요에 대한 한 눈 팔기에 빠져 있는데 이 부요가 우리로 하여금 나태(懶怠)와 향락의 삶으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名譽)에 빠진 그런 일도 있다. 그러나 하여튼 우리의 눈에 이렇게 세상 것에 눈이 멀어가지고 탐욕(貪慾)의 비늘이 벗겨지지 않으면,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영안(永安)은 어두워지게 되고, 사실은 그런 지나가야 될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 하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성경은 이런 문제를 아주 신랄(辛辣)하게 비판(批判)한다.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 그것이 학벌, 지위, 겉으로 자랑하든지 속으로 자랑하든지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 온 마음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야고보서 4장 4절은 더 과격하게 말씀한다.

* 야고보서 4:4,
4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 원수로 살아볼래?” 하신다. 성경은 훨씬 비판적이고 소위 레디컬하다. 과격하다. 하나님과 원수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질문하는 것은 그러면 우리는 세상 것을 다 포기하고 살고 수도자처럼 금욕주의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세상에서 기쁨과 문화를 배제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여러분 성경은 때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많이 하고 진리 자체가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시다. 하나님이 예정은 했는데 전도를 해야 된다. 여러분, 모든 게 이성으로 볼 때는 이것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소위 페라독시컬(paradoxicaltrus), 역설적인 같은 게 우리가 이성을 초월해서 많이 있다. 그 차원을 넘어가면 이것이 얼마나 조화가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예정은 했지만 전도를 하라는 것은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그 영혼도 구원을 받지만, 우리가 전도함으로써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우리 전도를 안 해도 구원을 하신다. 우리보도 전도를 하라는 것은 우리가 전도 안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못 얻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괜히 헛일에 집중하지 말고 복음 전함으로 영혼구원 하므로 네가 더 복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복 주시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충돌이지 아니다. 여러분 넘어가보면, 이것이 영적으로 이 진리가 얼마나 깨달아지는지 모른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요, 지상의 길 위에 집을 짓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락(樂)을 누리고 분복(分福)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을 하고 나서 하나님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타락(墮落)하고 나서 아담의 후예들을 하나님은 짐승이나 벌레로 만들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으로 똑 같이 봄
, 여름, 가을, 겨울,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세상에 깔려 있지 않은가? 가을에는 낙엽 속에, 겨울에는 눈 속에, 봄에는 파릇파릇 솟아오르는 그런 꽃이나 풀 속에서 거기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이 발견되고 호수의 그 반짝임 속에서 어린아이의 볼에 촉감에서, 선에서, 소리에서, 색깔에서, 여러분 지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타락으로 인해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왜 여전히 창조의 아름다움을 남겨 두셨을까? 피곤한 나그네의 삶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慰勞)이다. 하나님의 위로이니까 여러분들이 자연을 즐기고 문화를 즐기고 예술을 즐기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으로 열심히 살아가게 하시는 부요가 있으면 그 부요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와 복도 누릴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누리다 보니까 그것이 명예라 여기고 여기에 더 절대화 하고 그리고 아예 천국 가는 나그네 인생을 모르고 지상의 정주(定住)자처럼 사니까 그거는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상에 살다가 우리의 나그네의 길에 방해 되는 한 눈 팔기 하는 것을 조심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땅에 주저앉지를 않아야 한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거스틴: “우리가 인생의 나그네 길을 가다보면 몇 개의 여관이 있다. 그 여관에서 휴식하고 쉬고 물도 마시고 차도 들이키고 과일도 먹고, 거기서 휴식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냐면 이 여관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게 문제이고 이 여관이 내가 살 집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천상으로 가는 나그네 길을 중단하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전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저 노르웨이에 사는 들오리들이 있다. 겨울이 되면 추우니까 늦가을에 따뜻한 남쪽을 찾아서 지중해 남녘을 향해서 날라 갔다가 거기에서 겨울을 지나고 자기들이 머무르는 노르웨이로 돌아간다. 어느 해에 이 들오리들이 날아가는데, 한 마리의 들오리를 보니까 네덜란드 상공을 날아가는데 거기에 튤립, 아름다운 호수, 정말 네덜란드가 화해의 세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듯이 아름다운 꽃밭이 있고, 그 꽃밭 사이에 예쁜 오리들이 옹기종기 노는 것을 봤다. ‘저기에 잠시 내려갔다가 구경을 하고 우리 일행을 따라가면 되겠지’ 싶어서 일행에서 빠져나온 들오리 한 마리가 네덜란드에 풀밭에 내려앉았다. 거기에 있던 집오리들은 이렇게 자기와 닮은 노르웨이에서 친구가 왔다고 먹을 것을 주고 환영을 해주고 놀아주고, 조금 놀다가 가면 된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좀 어두워지니까 밤이 되었다. 그래서 유혹을 한다. ‘그만 좀 지내다가 나중에 봄이 되어서 다시금 너희 가족이나 친구들이 남쪽의 지중해에서 날아갈 때, 그 때에 따라가면 되지 않느냐?’ 했다. 그게 좋겠다 싶어서 꽃밭에서 놀고 좋은 융숭(隆崇)한 대접(待接)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오리들과 뒹굴면서 놀았다. 드디어 봄이 되자 남녘에 갔던 친구들, 가족들이 이제 날개 짓을 하면서 북쪽으로 날아간다. ‘이제 따라가야 되겠지’ 하면서 퍼덕퍼덕 날개 짓을 하는데 살이 너무 쪄서 아무리 날개 짓을 해도 1미터도 못 올라간다. ‘내년에 봄이 될 때 따라가면 되겠지’ 하면서 다음 해에 또 날아가는데 몸이 더 무거워져서 날 수가 없었다. 해마다 자기의 가족들, 자기의 친구들, 자기의 고향에서 남녘으로 높은 창공(蒼空)을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날아가는데, 그것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결국은 날지 못하는 영원한 집오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날아가는 나그네 인생이다. 그런데 우리가 땅위에서 주저앉아 가지고 그냥 거기에서 전부라고 살아가니까 우리가 결국에는 영적으로 비상하지 못하고 신앙의 아름다운 대로에서 낙오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낙오된 오리들이 없기를 바라고 공중을 비상해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Ⅴ. 돌아갈 곳이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나그네들은 돌아갈 곳이 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이 세상을 왔다가 이렇게 뜻 없이 이렇게 살다가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하신다. 히브리서를 보면,

*히브리서 11:16,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땅위의 집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한 성을 예비 하셨다고 하신다. 여러분 도마행전이라고 가경인데 성경은 아니라서 읽지는 않는데 초대교회에서는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 위경은 읽지 못했는데 가경은 허락했다. 거기에 보면, 도마가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하실 때에 제비를 뽑아서 세 개의 지역을 담당을 하는데 도마는 인도를 뽑았다. 가기 싫어하는 도마를 예수님께서 집을 완공을 짓고자 군다프로스라는 인도의 왕의 그 상인에게 목수 도마를 팔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파니까 팔려가지고 이제 인도로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갔는데, 거기에 가니까 군다프로스라는 왕이 자기의 궁전을 지으라고 은과 금을 주면서 자기는 순시를 다녀올 테니까 지으라고 했다. 그래서 도마가 그것을 짓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다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돌아와서 보니까 집은 짓지 않고 다 재산을 낭비(浪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를 속인 그 상인하고 도마를 감금(監禁)시켰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밤에 그 임금의 동생 갓이 세상을 떠났는데, 천국에 가니까 천사들이 그를 안내했다. 그래서 어느 집에 살 것인지를 성을 보여주는데, 물어보니까 가장 못한 집, 자기는 지상에서 올바로 살지 못했으니 좀 못한 집을 지적을 했는데 이 천사가 하는 말이 “이 집은 너를 위한 집이 아니라, 너의 형님, 군다프로스 왕을 위해서 지은 집이다.”라고 하고 이 집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잠을 깨서 이야기를 했다. “형님 보니까 저 도마라는 사람이 지상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집을 지었는데, 지상에 집을 지은 형님의 왕궁과는 비교가 안 되고 너무 찬란하고 화려한 왕궁을 저 도마라고 사람이 형님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천상에 지은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저 사람을 풀어 놓으라고 했다. 이래서 도마가 인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그런 전설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상을 떠나게 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 상급(賞給)으로 성(城)을 주셨다. 우리는 여러분 지상에 살면서 아무리 우리가 사는 것이 유복하고 행복해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좀 보자, 우리가 성령님의 열매를 신앙의 등목으로 이야기 하고, 거기에다가 요즘 시대에는 뭐 정의(定義)라든지, 뭐 자선(慈善)이라든지, 이런 추가적인 등목도 많이 지녀야 된다고 이야기 한다. 개인이나 교회가, 특별히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은 가장 으뜸이 되는 신앙의 등목으로 말하는데 믿음의 등목이 있다. 사랑을 실천한다. 소망은 어디 갔는가? 여러분 모든 현대 교회에서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성경의 신앙의 등목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소망이다. 그 소망은 구약에서 말하는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 모든 소망은 히브리서 본문에 나오듯이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所望)이다. 너무 유복(裕福)하게 살고 잘 살다보니까 지상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다른 사랑이니, 정의니, 사회정의니 다 추구하면서 정작 소망은 놓치고 있다. 그러면 소망이 무엇일까? 핵심이 이것이다. 소망이 안 보이는데 뭐 중요하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눈에 안 보이는 그 실상이 그게 있다는 것인데 믿음이라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을 있음으로 믿는 것이고 손에 안 잡히지만 있음을 깨닫고 그 실제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믿음의 절정(絶頂)이 바로 소망이다. 믿음이 최고에 올라간 사람은 어떤 경지냐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지닌 것이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가 정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저의 표현으로 정의를 하면 소망이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향수병이다. 믿음의 절정도 천국에 대한 노스텔저, 하나의 향수병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이다. 제가 여러 분야의 책을 썼지만 문학과 지성사에 나오는 우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 고향’ 이라는 글이다. 이 고향이라는 책은 왜 썼냐면 그 안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별로 안 나온다. 문학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깨우침을 주자는 뜻이다. 핵심은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실향민(失鄕民)이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류는 진정한 귀향(歸鄕)이다. 여러분들이 다 명절 때에 고향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인생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인지를 성찰(省察)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화두(話頭)를 던질 거리이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신앙생활에 가장 큰 것은 본향에 대한 무감각이다. 돌아갈 것에 대해서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키에르케고르의 들오리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시간의 모두가 길 위에 집을 짓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다시금 되새기고 가슴에 품고, 그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답게 평온을 찾고 이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소망을 붙들고 힘 있게 믿음으로 헤쳐가기를 소원한다.
 
♣요약
정치 경제와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소망을 다시 되새기고, 나그네 의식과, 가는 길을 자지도 쉬지 않아야 하며, 길 위해 집을 짓지 말고, 우리가 돌아갈 본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이 소망을 붙들고 힘 있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살아가며 열매 맺는 자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천국의 소망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11:13~16)
-온전한 믿음, 최후 승리를 얻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하기 위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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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렘 버클 목사님(런던시티미션대표)-초빙-3부,4부)통역(정상익 부목사님)-“하나님의 영광은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 -(고린도 전서 1:18-25)

 
-안녕하세요. 엘프렘 목사이다. 여러분 환영해 주셔서 감사하다. 제가 한국에 처음 방문했다. 런던으로부터 이곳에 온 것이 큰 영광이다. 오정현 담임목사님의 친절함에도 감사를 드리고, 유니온 신학교와 함께 사역하는 고성삼 목사님과의 파트너십과도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런던시티미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유니온 신학교화 협력하여 런던에서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여러분 런던시티미션에 대해서 잘 모르실 것이다. 데이빗 나스미스란 사람에 의해서 1835년에 시작된 미션이다. 그의 마음과 열정은 가장 약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서 가는 것이었다. 190여년이 계속 되면서 이 사역이 진행이 되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팀 켈러 목사님도 런던시티미션과 함께 하신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이다. 우리 런던시티미션의 아주 중추적인 일을 했고, 그래서 저희 사역가운데 팀 켈러 목사님의 두 아들을 직접 훈련시키기도 했다. 우리 영국에는 안타깝게도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기독교를 따르는 숫자가 훨씬 적어졌다. 거의 50%의 인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줄만한 친구나 가족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이 일 하시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여러분과 함께 파트너를 맺고 이렇게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높여진 나라가 굉장히 작았던, 낮추어졌던 것을 제가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
 
오늘 여러분께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선택하신다. 이렇게 높여진 대한민국에 대해서 제가 알게 되었을 때, 이 웨일스, 영국에 있는 웨일즈 지방에서 한국으로 보낸 선교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여러분이 아시는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이다. 27세의 나이에 이 땅에 와서 그 목숨을 잃게 된 그런 선교사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를 처형했던 사람에게 그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막 처형을 하려고 한 사람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했던 사람의 사촌이 목사님이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조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선택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연약함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읽었던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이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는 그 십자가의 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심을 본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한다. 그라니 하나님께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타고 있던 차량이 갑자기 멈추었다고 생각해보라. 제가 여러분을 도와준다고 갔다. 제가 자전거를 타고 여러분을 도와주러 갔는데 페달이 없는 자전거이다. “제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함께 합시다.”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신뢰하시겠는가? 여러분, 페달이 없는 제 자전거를 보고 “참 미련한 소리 하네.”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이렇게 말씀을 하고 싶다. 천성에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때 미련해 보이는 것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보기에 인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로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이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나타내신 것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21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전서 1:21,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마치 그 미련해 보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그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점을 사용하셔서 스스로에게 영광 받을 수 있도록 일하신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방의 아비로 삼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녀를 가질 수 없었던 상황에 놓였다. 아브라함이 연약했지만 하나님은 강하신 것을 본다. 우리가 야고보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을 때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점을 통해 일하셨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셨다. 우리가 기드온을 볼 때에도 가장 작은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군대가 주어졌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군대를 더 작게 만들라고 하셨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약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지만 여전히 다윗은 가장 젊을 사람으로 보이고 있었다. 너무 작았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울 때 갑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저 물맷돌을 가지고 있다는 약함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강함을 그에게 약함을 통해 드러내셨다. 이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에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아둘람 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여러분이 다윗 왕과 아둘람 동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안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을 자주 이 말씀을 전해 주셨다고 들었다. 다윗이 그 동굴에 있을 때에 장정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다윗과 함께 했던 그 장정들이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우울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정들이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장정들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 이 다윗 왕과 함께 다윗 왕국을 세우는데 쓰임 받았다. 그리고 다윗 왕국이 세워졌을 때 그 장정들도 함께 세워지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연약하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약함을 통해 일하셨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데 다윗왕의 이야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필요한 상태이고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이고 그리고 우울한 상태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데 애를 쓴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워질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약함을 통해서 드러내신다. 우리에게 많은 예들이 있다. 여러분 이사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을 했다. “나의 입술은 부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의 입술을 정결하게 만드셨다. 그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우리 호세아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다. 호세아도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정조를 지키지 않는 아내였다. 그러나 이 호세아의 이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약했다고 성경에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제자들을 보고 교육받지 못한 어부들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제자들 중 한 명은 미움을 받고 있었던 세리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의 약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셨다.
 
여러분이 아시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사도바울도 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썼을 때에 눈의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썼다. 그게 아마도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힘과 능력은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약하다고 느끼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사용하셔서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사용하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견디시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함을 오히려 선택해서 사용하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6절을 보면,
 
고린도전서 1:26,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세상에 미련한 것을 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미련해 보이는 것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가 연약(軟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救援)할 수 없다. 우리의 지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가족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 교회조차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 영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복지 정책(政策)들이 있는데 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지(福祉)를 통해서 건강과 또 재물을 전달하고 있다. 만약 그 복지정책을 사용하려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무언가 가지고 있다면 그 정책대로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손을 열고,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야 한다. 네 맞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그 강함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 여러분 여러분이 연약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딱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완벽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사용하시고, 그 약함을 선택(選擇)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찾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혜를 의지(依支)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의지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오류를 범(犯)하면 안 된다. 우리의 전통은 따르면서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財物), 그 재물에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교제(交際) 하는 것을 거리 두어서는 안 된다. 부자에게나 말씀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것도 안 된다. 하나님의 그 강함을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싫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강함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고 항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강함을 싫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대신에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내 마음을 싫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런던시티미션에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제 바로 위에 있는 대표가 그러라 밀러라는 분인데, 굉장히 비극적인 일을 겪으셨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끔 허락해 주셨다. 제 아들이 5년 전에 열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번 주가 그가 아들이 죽었던 것을 추모하는 주간이 되었다. 제가 그와 함께 이야기 하면서 한국에 왔을 때 저를 축복해 주셨는데 그래서 그분께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강함이 드러난다고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그러자 대표님께서 동의하시면서 “맞습니다. 목사님, 가셔서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고 하십시오.” 라고 하셨다. 제가 아들을 잃고 난 후에 지난 5년 동안 참 약하다고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 지난 5년 동안 런던시티 미션을 통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강함을 통해서만 일어났던 일이었다. 하나님의 그 강함은 약함을 통해 드러난다. 제가 이 대한민국이 건립되고 세워진 것을 볼 때, 손양원 목사님의 이 이야기가 떠오르게 된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두 아들의 아버지였는데 둘 다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을 때에 그 범죄자를 찾았을 때에 그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그를 용서해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던 사람을 자신의 양 아들로 삼기로 했다. 정말 강력한 간증거리이다.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을 사실 안아줄 수 있을까? 그렇게 희생하고 그렇게 안아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아멘,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시도록 선택하고 계신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떤 강함이라도 의존하고 있다면 회개(悔改)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의지를 한 것들을 이제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한다.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약점을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 라고 말한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많은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내가 배웠던 것들도 다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힘과 능력으로 3일 만에 일어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우리 하나님을 더 신뢰합시다. 그리고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갑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마을로 초대한다고 이야기 해 줍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에 감사를 드리자. 아멘.
 
♣요약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생명을 구원하는 반면, 사람의 지혜는 아무리 고상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며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게 되니 우리는 인간이 소유한 지식의 한계성과 상대성을 인식하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참된 구원 행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고,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드러내 주심에 감사하며, 우리의 약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이름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오히려 선택해서 사용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헌금 찬양(3부)-김주은집사, 김진영집사, 홍혜천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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