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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 6. 21)
제목: ''소망의 포로들''
말씀: (스가랴 1:3, 4:10, 9:12)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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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면 회복 된다II. 오늘 311명 학습 입교 세례식을 하게 됨이 기적이다. 세례식을 통하여 ‘나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제자이다’, ‘나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공교회의 충성된 성도이다’, ‘나는 다른 사람까지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전파자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이 세레식을 거행할 때 하나님은 이 자리를 복주시고 새롭게 하실 것을 믿는다. 3절이 중요하다. 돌아오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슈브’이다. 주님이 율법으로 돌아온다든지 아니면 과거의 전통으로 돌아 온다든 지가 아니고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하셨다. 주님이 아닌 어떤 것도 돌아가는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스가랴 전체의 첫 예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 첫 예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며, 권세자이시다. 만군의 여호와는 자명하고 존귀한 것이다. 왜 중요하냐면 이 내용이 뒤에 나오는 모든 구절의 기본이 된다. 우리의 삶의 목표나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 보면 모든 하늘의 주관자이시다. 장엄과 존귀하시다. 그러니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같이 부족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날마다 확인하고 꿈꾸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다. 오늘은 이 예배에 온 성도는 잘 이해하리라 본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到來가 임하는 것이다. 개인, 가정,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메이커의 말처럼 영역 주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모든 삶과 인생의 부족한 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다. 우리 모든 성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며 영역 주권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표에 맡기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원한다면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핵심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마가복음 1:15절에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구약과의 매칭이다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내가 너희를 사용하겠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소중하기에 이 말씀을 받아 표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은 강력하고도 예리한 요청인 동시에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다. 우리가 돌아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돌아감은 하나님의 도래는 같은 것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역사인가? 스가랴가 돌아가야 한다는 이 말씀을 한 것은 유대나라가 예후들(유다)은 작은 지방이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일 그곳에 일어나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겠는가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선다면 인생의 대 반전이다. 스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스가랴와 학개. 말라기가 비슷한 말로 기록했다. 마태와 마가가 공관복음인 것처럼, 스가랴와 학개가 공시적인 예언서이다. 이런 내용들이 다 서로 연결된다. 학개 2:2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驚天動地)이다. 이렇게 한 번 뒤집어지고 반전되기를 바란다. 그럴려면 무슨 뜻인가?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 예후드라는 작은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님나라의 작은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고 새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경탄할만한 사건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공동체와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여기에 우리에게 말씀의 권세가 있기를 원한다. 우리가 제대로 깨닫고 뒤집어지면 네이버나 구굴보다 영적으로 더 영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약한 자들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냥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돌아오라고 하신다. 그 당시 예후드 공동체는 성전을 재건하는데 16년이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절망하고 지치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면 하나님은 돕겠다고 하셨다. 신원의 날이 있을 것이라 하시며, 원통함을 갚아주신다고 하셨는데 16년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개인적인 일도 정말 신원의 날을 주시길 원할 때가 있다. 그동안 포로생활에 나름대로 신앙을 지켜서 돌아와 남은 자들이 되었는데, 어떻게 주님이 이렇게 박대하시냐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우리는 이렇게 초라하냐고 묻고 있다. 이것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제대로 성취되기 않고 더딘 것처럼 보이자 포로기에 공동체는 무기력과 좌절감에 맞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판벽(板壁)한 집이나 짓고 현실에 만족하고 살고 싶어 했다. 소확행이었다. 그들이 무실론 자가 된 것은 아니다. 문제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 나라의 큰 비전과 소망이 사라져서 현실에 안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만군의 하나님, 온 우주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시게 되었다. 결코 소망을 포기 말고 돌아오라고 하신다.


스 9:12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사로 잡혔있어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소망의 포로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1만군의 여호와, 2여호와의 날, 3우리는 소망의 포로이다.


*소망의 포로가 무엇인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심지어 13절에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화살과 확실한 활이라고 한다. 소망의 포로는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로잡힐 것이 소망의 포로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통치를 받는 것이 소망의 포로이다. 나는 예수님만으로 참 만족을 누리네~~ 나는 소망의 포로자입니다. 우리는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적 통일을 원하고 기도한다. 그래서 소망의 포로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의 포로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스 9:12절에 보면 돌아올 때 하나님은 갑절이나 갚아준다고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기를 바란다. 갑절로 갚아주신다. 갑절이라는 말은 *슈브(히브리어):돌아오라는 말, *미쉬네(히브리어): 갑절로 갚다이다. 주님은 돌아오면 갑절로 갚으신다는 것이며, 돌아오면 갑절로 갚아서 돌려보낸다는 뜻이다. 완전한 복귀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게 엄청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주셔서 말씀의 화살과 말씀의 능력을 주시길 바란다. 이사야 61장7절: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모든 수치가 물러갈 것을 믿는다. 우리 성도들이 배가 얻기를 바라며 즐거움과 능력이 회복되길 바란다. 돌아온다는 것은 갚아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승리가 된다.
유즌 피터슨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부족한 것은 신앙인으로 거룩한 상상력의 부족이다’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이 되어 승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모두가 다 상상력을 회복하여 소망의 포로가 되어 주님이 주실 역사를 기다리며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스 9:13절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우리 가족과 자녀가 이 소망의 포로가 되길 바란다. 초청 받은 자였지만 그들은 페르시아 통치를 받는 식민지의 사람들이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사회적으로는 포로로 끌려간 자였다. 사마리아 사라들로 인해 심신이 지친 자였고, 영적으로 메말랐다. 왕도 없고 나라도 없고 예배드릴 성전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초청장을 보내주시며 시대를 반전시켜 주시겠다며 갑절로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갑절로 갚아주실 것을 믿는다.
♧ 요약
우리 모든 성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며 영역 주권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표에 맡기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원한다면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핵심이다. 돌아오면 갑절로 갚으신다는 것이며, 돌아오면 갑절로 갚아서 돌려보낸다는 뜻이다. 완전한 복귀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게 엄청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주셔서 말씀의 화살과 말씀의 능력을 주시길 바란다. 이는 포로 생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약속을 바라보며 기다린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방의 약속이란 아직 바벨론에 남아 있는 유다 백성을 구원할 것과,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속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배가 얻기를 바라며 즐거움과 능력이 회복되길 바란다. 돌아온다는 것은 갚아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승리가 된다.


♣ 느낀 점.
세례식에 오늘 말씀을 세례자와 우리에게 잘 맞게 해주신 것 같다. 왜냐하면 코로나로 침체기에 지금 우리는 더 깊이있게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려면 이 말씀을 받아서 주님과 더 친밀하여 예배하고 찬앙을 드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자들의 간증 문이 참으로 눈물겨웠고, 그들은 절대로 주님을 멀리하지 않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목사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가 될 것 같다. 그들은 소망의 포로가 되리라 믿는다. 주님께 돌아와 절대적인 진리를 믿어서 주님 안에서 능력을 받아 주님이 돌아오면 회복되게 해주시고 갑절로 갚아주시니 우리는 소망의 포로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주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어가기를 나와 그들이 함께 하여 주님께 아름답고 거룩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한다.            
☆ ☆☆  

세상에는 눈물뿐이고 고통만 닥쳐와도
내 심령은 예수님으로 기쁜 찬송 부르네
나는 예수님만으로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한숨 쉬는 불행이 변해 기쁜 찬송 부르니
괴로움을 주던 환경이 천국으로 변했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금은보화 다 준다 해도 예수님만 못하며
명예 지위 훌륭한 대도 주님만은 못하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속지 마라 세상 허영에 마음 뺏기지 마라
세상 것은 일장의 춘몽 물거품과 같도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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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 6. 14)

제목: ''회복의 플랫폼''
말씀: (스가랴1:1~6)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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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부터 스가랴의 말씀을 하게 된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 앞에 다시 치유되게 하시고 회복되게 하시길 기도한다. 교회 역사를 세계역사를 보면 큰 질병 이후에는 부흥이 왔다. 참혹한 이후에도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한국도 선교 초창기에도 질병이 많았다. 장질고사, 호혈자(콜레라), 등이 한국에 대 부흥이 일어났기에 코로나 사태 이후에 부흥이 되길 바란다. 이 스가랴서로 영적 부흥이 되고 이 스가랴서가 마칠 때쯤 되면 코로나 백신 그리고 실제 의약백신도 나오길 원한다. 그래서 은혜의 잔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감사와 은혜를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기를 원한다. 스가랴서는 어려운 내용이다. 스가랴는 말라기 바로 앞부분 앞에 있는 말씀이다. 특권과 영광스런 전통과 자양분을 하나님이 주셨다. 동시에 부담이 많지만 스가랴를 말씀하게 되었다. 닥터 찰스 파인버거라는 사람은 유대 랍비들이 개종을 해서 전통 구약의 풍성한 바탕위에 복음을 받아 들였다고 한다. 그 사람의 강의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I. 스가랴서는 ‘회개의 회복’에 대한 책이다.
1. 구약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닥터 찰스 파인버거라는 사람은 유대 랍비들이 개종을 해서 전통 구약의 풍성한 바탕위에 복음을 받아 들였다고 한다. 그 사람의 강의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여호와의 날이 임한다는 것이다.(The day of the Lord!)
오늘 이 예배 주님의 자녀들이 ‘The day of the Lord!’를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를 바란다.
2. 4차 산업혁명시대에 우리가 지금 변화에 대한 반응과 각오가 있어야 한다.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앞장서서 교회를 섬기는 자들이 전문적인 빅데이타를 하시는 분들이 5주째 두 시간 동안 기도하고 있다. 사랑의 교회가 말씀을 통하여 잘 감당하게 되길 원한다.
3. 사람마다 역할 모델이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신학자였다.
그는 교육자, 정치가, 언론가, 자유대학을 창시자, 유명한 수상이며, 아트가였다. 그분의 치세와 역량이 나타나고 있다.


▶플랫폼시대는 정거장이다. 스가랴는 부흥과 회복이 되는 장이며, 구약의 종말론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평범한 책이 아닌 예언서이다. 스가랴서에 신약에도 71번이나 나오며, 요한계시록에 28번 인용되며, 아주 흥미롭고, 독특한 환상이 8가지가 나온다. 구약의 묵시록이며, 14장이며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이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보여주며, 구약의 예언의 정수가 되는 책이다. 대선지서는 길이가 더 길고 소선지서는 12소선지서인데 그 가운데서 가장 신비한 책이다.
1. 여호와의 천사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기도문.
2. 참된 성전 회복 교회론.
3. 스가랴서를 통하여 인류의 종말론이 담겨있다.
스가랴의 이름은 구약에 자주 등장한다.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이다. 아주 좋은 이름이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눈동자 같이 기억해 주시길 원하다.


1:1절에 보면 잇도는 바벨론 포로기였던 사람이며, 회개와 회복의 대한 책이다. 현재의 회개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고레스칙령으로 회환했다. 엄청난 사마리아 사람들이 공격하고 삼발랏과 방해에 의해서 16년간 중지를 했다. 학개서 1:4절에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도 삼발랏처럼 낙심했다면 다시 제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학개서와 스가랴서는 ‘다리오 왕 제 이년에 여덟째 달...’ 학개와 거의 같으며 학개는 외적이며, 스가랴서는 영적으로 내적인 것을 강조한다.
▶1:3절에 핵심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돌아와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돌아와 계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초청장으로 인해 우리는 이미 구원받아 있다.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다. 주님이 돌아오셔서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지속적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한다. 역동적인 관계이며 코로나를 뚫고 예배를 드린 것도 지속적인 일이다.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온전한 수준으로 닮아가며 회복의 플랫폼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건이 하나 있다. 1:4절에 “너희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옛적~”의 잘못을 따르지 말라 그들의 불순종으로 이스라엘이 폐허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조상들은 아니다. 조선시대는 노예를 삼는데 자신의 나라의 백성을, 자국인을 동족을 노예로 삼았다. 양반의 나라를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랬다. 무능한 선조 등, 북한은 복조선이라 지금도 조선시대 그대로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1:5절 “너희 조상들이 어디있느냐 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또한
1:6절을 보면,
6절 “내가 나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한 내 말과 내 법도들이 어찌 너희 조상들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들의 행위가 너무 엉터리였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아서 형벌을 받게 되었다. 1:2절에 “여호와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심히 진노하셨느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은 분노하셨다. 이 거룩한 진노는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도 자식을 누가 그렇게 두겠는가? 그럴 때 오염된 인생을 그 문제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돌아오는 조건은 거룩한 진로이며 제대로 회복하고 죄를 슬퍼하는 것이다. 에스켈 18:30-31절에 모든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며, 죄악을 버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것이며,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고 한다. 거룩한 진노로 죽고자 하냐고 묻고 계신다. 우리의 죄악의 걸림돌로 죽고자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간 거리끼게 하는 것들을 주님이 정화시켜 주시길 소원한다. 우리 주님이 해결해 주시려고 목자의 심정으로 정리하고 잘못된 관계도 정리하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회개하여야 하는가?


II. 예수 그리스도 지배를 위해 회개해야 한다.
  스가랴 1:1절 “다리오 왕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이것은 그 이스라엘의 통치를 이국의 나라의 연표를 받아들었기에 그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강력한 통치자였다. 다리오 1세이다. 그게 얼빵한 3세가 아니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였다. 내 인생의 연표는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연표를 사용했다. 명나라, 청나라 등 이런 식으로 중국의 연표를 받았다. 북한은 주체 몇년이다. 우리의 연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가 연표이다. 시작이고 끝이 되는 것이다. 우리를 역사하시는 순간이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 어느 치세 몇 년이라 하지만 참고이고, 껍게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연표를 받아야 한다. 무엇을 사용하는 것일 때 관등성명(官等性名)에 주후를 붙여 써라. 모든 사람들이 '주후"0000 몇 년이라고 써야 우리 사랑의 교회 확인증이다. 우리교회 사람은 다 그렇게 사용하기를 바란다. 주후는 하나님의 나라는 실체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출발의 근거지 영적 생태개를 회복하는 내용으로 풀레슈폼이 회복된다.


III 영적 주권으로 '주후'를 쓰면 무슨일이 일어나는가?
 스라갸 1:1절 “다리오 와 제이년 여덟째 달에 여호와의 말씀이 ~ ”살아계신 말씀이 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임하며, “1:3절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성경에 많이 나온다. 하나님의 연표가 주권이 임할 때 만군의 하나님은 The day of Lord.이다. 모든 천군천사의 왕이시다. 임하실 때 만군의 여호와가 되어 주실 것이다. 큰 군대의 왕으로서 영권을 접붙여 주실 것이다. 구글 네이버가 아닌 우리는 정보주체주의가 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 The Lord of horse이다. 완전히 달라진다. 신앙생활도 다르다. 만군의 여호와로 스가랴의 시동이 걸려야 한다. 사랑ON에 반응해서 함께 나누길 바란다. 아무리 멋진 좋은 차라도 엔진이 걸려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가 존재하는 모든 삶의 영역들 중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


▶스가랴 1:17절에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 요약
  스가랴는 다리오 왕 2년 8월부터 여호와의 말씀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한다(1:1). 이때는 포로에서 돌아 왔지만 방해를 받아 짓지 못하고 있던 성전의 건축이 시작된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때에 스가랴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현재에 짓기 시작한 보이는 성전 건물을 성전이라고 생각하지 말하고 하나님이 지으실 참된 성전과 예루살렘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것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성전은 바로 우리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악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우리를 회복의 플랫폼으로 다시 세우시고 살리실 때, 날마다 회개하게 하며, 주님 앞에 지속적으로 돌아오는 새 마음과 새 명을 받아서 말씀이 임하는 곳에 만군의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연표를 사용하여 내 삶의 전 영역에서 주님 통치에 순종하여 官等姓名이 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스가랴 시리즈 설교를 통해 우리가 코로나와 우리의 질고가 회복되어 주님의 나라에 아름답게 쓰임 받아야 한다.


♣ 느낀 점.
 오늘 말씀을 듣고서 나는 스가랴를 통해서 회복을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모든 일들이 회복되면 좋겠지만, 자녀들이 어린시절 교회에서 열심하고 나누는 모습이 좋았는데 지금 자주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음에 마음이 편치가 않다. 나의 미래가 바로 이런 고민이었는데, 정말 자녀가 믿음 좋고 하나님 앞에서 찬양과 경배를 열심하는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바쁘다는 핑계도 있지만 교직으로서의 본이 되려면 주님을 더욱 가까이 했음 좋겠다는 생각이다. 내가 정말 주님 앞에서 올바르다면 아이들은 따라오리라 믿기에 온전히 나는 예배를 드리기를 바라며, 봉사에도 게으리지 않게 하고 있다. 매일 나는 기도하고 있다. 제대로 주님을 만나서 결혼도 하고, 즐겁게 주님과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눈물로 기도하며 지내고 있다. 오늘도 딸은 교회는 다녀왔고, 십일조도 냈다. 그러나 대충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맘에 안 든다. 진정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길 간절히 소원하며 이 번 스가랴를 통해 믿음이 회복되는 가정이 되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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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 6. 7일)

제목: ''낙심하지 않는 질그릇''
말씀: (고린도후서 4:7~12)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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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선한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만지시고 터치하시길 바란다. 말씀의 영감과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덧난 것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다 코로나사태에서 영적승리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전사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까지 말씀하고, 다음 주부터 스가랴를 공부한다. 본문은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인들을 그릇으로 본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몸을 그릇으로 보는데 그것은 한계가 있다. 우리 몸은 상처도 많고 조급하고, 답답하고, 사실 상처의 몸, 상처의 전이기고 하고, 조급함의 전이기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피로 값으로 대신 산 성령의 전이라고 하셨다.


I. 성령의 전이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후 4: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8절에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바울사도가 낙심한 일이 많았는데 고후 1:4절에도 늘 눈물이 떠나지 않았다. 1:8절에도 얼마나 힘든지 고난을 당하여 사형 선고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상황이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신구약 전체에 생태계이며, 우리 삶의 반격이다.
이천 년, 삼천년 전에 시편 42편5절에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하는가? 이것이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본문에 바울은 본래 종교적으로 학문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며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 바울이 그 마음속에 큰 짐이 하나 있다. 고전 15:9에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의 입장에서는 늘 치명타를 안기고, 바울의 마음속에 큰 고통을 안겨준 것은 스데반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인 일들이며, 바울의 손에 피 묻은 손이다. 그걸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상처이고 힘든 일이었기에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전 15:10절에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무리 익숙하더라도 어제와 오늘 받은 은혜가 다르다. 바울이 낙심이 있었고, 치명타가 있었어도, 그래도 깨어진 질그릇으로 성령 충만 질그릇으로 남아서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가 낙심을 극복하려면,
1.은혜를 받으면 낙심하지 않는다.-
낙심은 불신앙의 열매이다. 내가 예수님의 사랑 받는 그 순간 낙심이 사라진다. 코로나 불루로 낙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영혼의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시골에 가면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여름에 누워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처럼 낙심을 버리라.
2. 고전 8절부터 10절
♥ 4가지 우리를 깨뜨리는 것.
1)우겨쌈 - 포도를 짜는 것(취빌레이션)-상황이 어려울 때 예상치 않는 일이 있을 때 등이 우겨쌈이다.
2) 답답한 일의 도구-불확실한 일을 말한다., 코로나도 끝이 안 보이니 그렇다.
( 개척 교회에서는 확진이 없기를 바란다).


3) 박해의 도구 - 초대교회에 박해가 어마했다. 운명처럼 그랬다. 당연한 것처럼 그랬다. 요즘은 배척받고, 냉대 받고, 비판 받고, 명예가 훼손되고, 신체적은 공격을 받고, 심지어 고의적인 박해가 많다.


4)거꾸러뜨림 - 갑작스런 천재지변을 말한다. 교통사고나, 예상치 않은 천재지변 등이다. 코로나사태가 그렇다.
*이것이 우리를 기절 시킬 만큼 산산조각이 나기도 한다. 치명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신앙을 당황하게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무서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이다. 모두가 부정적이지만,,,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우리는 성령 충만으로 깨어지고 변화되어 성숙해지는 것이다.ㅡ영적으로 재해석 되면 성숙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제대로 해석을 했다. 우리가 깨닫는 것 중의 하나가 해답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해석은 올바른 가치관 올바른 신앙관에서 나온다. 우리는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해석하지만, 우리는 성령님께 묻고 해석을 해야 한다. 올바로 해석을 해야 한다. 우리 입장에서 해석을 잘하면 성숙의 신앙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그 상황 자체도 괴롭지만, 우리가 해석에 있어 더 괴롭다. 보는 관점이 너무 달라서이다. 그리고 특별히 사회주의 신념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우리 기독교는 공산주의 해석은 절대 안 된다. 해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신념 화 시키기 때문이다. 진실과 비 진실을 떠나 갑자기 이념 싸움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교회의 성도들은 이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성령님께 물어보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일들을 이념화나 상황화를 시키지 말고 절대적인 말씀에 계시와 조명을 비추어 성령님께 물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령님을 통해 위아래 주님이 주시는 해석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겨쌈, 답답함, 박해, 거꾸러뜨림 이런 상황을 만나면,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필요한 질그릇으로 만들어 주신다. 성숙한 질그릇이다. 깨어져서 그 속에서 나는 향기가 보배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할 때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죄의 본성은 그냥두면 교만해진다. 성경에 모든 인물들은 몽땅 다 겸손했다. 그래서 질그릇이 되었다. 겸손하지 않는데 무슨 일을 하겠는가? 우리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모두가 깨어질 때 우리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II. 깨어지면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된다.


*깨어질 때 일어나는 일.
고후 4:5절에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후 4:15절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4가지 상황을 당하였을 때 어떤 해석을 해야 하느냐에 따라서 올바른 겸손을 배우고 우리는 예수님을 더 드러내게 되고 특별히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5절이나 15절은 보면서 낙심하지 않는 질그릇은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통하여 낙심하지 않게 하여 감당할 수 있도록 깨어짐의 4가지 도구를 주셨는데 그 모든 것들을 통해 결국은 내가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되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깨어지면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겸손해지니 남에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늘 이 4가지를 통하여 늘 죽는 것이다. 나 때문에 이웃이 살고, 가족이 살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짐을 통하여 예수의 생명의 능력이 공동체가 이웃과 가족에게 에너지를 주게 된다. 낮아져서 교회도 살고 가족도 살고, 나도 산다. 문제는 자신이 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게 문제이다. 자기는 안 깨어지고 남을 깨뜨리려 한다. 그렇게 된 사람들은 말년이 비참하다. 말년이 초라하다. 누가 그 옆에 가고 싶겠는가! 이 말씀 앞에 경험을 통해 영적 에너지를 주는 자 되라. 두 종류의 자가 있다. 깨어져야 보배가 되고 향기가 나오며 주님의 영광을 드리게 된다. 복음의 깨어진 전사가 되기를 바란다.
고후 4:16- “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바울은 은혜를 받아서 수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는 에너지 발전소이다. 서로 영적에너지를 나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통해 바울은 나누었다. 디모데에게도 주고, 21세기 오늘 우리도 이웃들에게 에너지를 주시기 바란다.


♣ 요약
낙심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성령님께 묻고, 성경적인 조명으로 해석하며 교만한 죄의 본성을 깨뜨려서, 주님이 주시는 해답을 얻어야 한다. 또한 남을 깨뜨리는 인생이 되지 말고, 자기 의가 와장창 깨어져서 남을 낫게 여기고, 자신을 겸손하게 하여서, 우리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져야 하고 영적인 에너지로 준비하고 발전소가 되어서 늘 사람들에게 전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질그릇이며 낙심하지 않는 질그릇이 되어야 그리스도인답다.


▶느낀 점. 낙심되는 모든 일들을 주님께 맡기고 온전히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나는 늘 낙심을 많이 할 때가 많았다. 자녀 남편, 친구, 나의 형제, 이웃 등을 보면 잘 사는데, 나는 신앙인으로서 더 당당하게 못살았음이 회개가 되었다. 이제는 주님 안에서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남을 사랑하고 높이고, 남을 영적으로 세우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다짐해 본다. 오늘 예배와 찬양도 좋았지만, 우리교회 공동의회 투표용지를 한 번 더 헌금 위원들이 나누어주고 걷었다. 단지 어떤 분들이 도대체 장로님이 되시며 교회의 중직 자가 되시는지에 알 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만 궁금했다.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사람이길 바래보며 기도해야겠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든든히 이끌어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래본다. 나도 정말 낙심하지 않는 질그릇이 되어서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자로 살아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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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0. 5. 31)
제목: ''성령 충만한 그릇''(Spirit -Filled Vessel of Clay)
말씀: 고전 (6:19~20, 고후 4:7)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한 사람의 기도와 한 교회의 사명을 붙잡아 주시고 한 지역의 부흥을 통하여 시대를 변화시킨다. 평안북도 선천에 선교 보고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자들이 기도처 예배에 믿음과 부흥이 무수히 일어났다고 한다. 한국 교회가 역사와 은혜를 가지 민족이니 하나님께서 세계 수많은 코로나 사태가 있지만 한국 교회는 복음의 능력과 기름 부음으로 회복시키실 것을 확신한다.


성령강림 주일
이 분들이 주님 앞에서 변화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I.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부패한 속에 고린도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어려운 사태에도 성령강림주일을 지키게 되어 감사이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특별한 사명의 실체가 되면 우리의 삶의 차원이 놀랍게 달라진다. 우리는 모든 육신의 제한을 받고 살고 있다. 제한이 없는 자가 없다. 조급함, 두려움, 육신의 고통, 정욕, 우리가 늘 두려움의 전, 아픔의 전, 근심과 고통의전이 되기도 하며 배고픔으로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며 배가 너무 불러도 불쾌하기도 한다. 그리고 잠을 못자면 힘들기도 한다.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몸을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이 말씀이 신비한 것이다. 성령의 전인 것을 어떻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잘 살펴보자.
우리 몸을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의 전이다라고 하신다.
성령의 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성삼위 하나님께서(성부와 성자 성령) 총체적으로 임해 주셨다.
우리의 미래는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피 값으로 사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몸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것이며, 현재는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성령의 전으로서 현재 임재가 있게 하시고, 미래는 성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가지고 영광을 올려 드리라는 것이다.
과거- 그리스도 예수의 피 값으로 산 것,
현재- 성령의 임재를 통한 성령의 전,
미래- 성부하나님께 우리 몸을 가지고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
그래서 우리는 聖靈殿이다. 전이라는 것은 성전이다.
예루살렘 성전과 같고, 광야의 성막과 같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예배하며 하나님께 제자를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기둥이 빽빽하게 임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전으로서 역할이 제대로 감당된다면 육신의 한계도 있고, 우리의 분노나 조급함을 감당 못하고 분노가 전도되기도 하고 우리의 마음이 상할 때도 있지만, 이 성삼위 하나님께서 총동원되셔야 할 만큼 은혜를 주시는 몸이라면 제대로 되면 오늘 우리 시대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영광의 구름 기둥으로서, 우리에게 예고편으로 확인될 수 있다. 동시에 광야 길의 성막이 어떠했는가? 물도 없고, 어둡고 환경자체가 척박하지만 그런데 유일한 소망이 여기서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광야의 성막이다. 모세의 성막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리고 했을 때에, 그 성막에 쉐키나의 영광이 구름 기둥으로 뻭빽하게 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은혜로 신약시대의 우리에게 모두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샀지만, 너희 몸을 성령의 전인 줄 믿으라고 하신다. 성막의 영광, 쉐키나의 영광, 예루살렘의 찬란한 영광을 오늘 이 시간 예고편으로 맛보는 성령강림 주일이 되길 원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뜨이길 원한다. 정말 중요하다. 특별한 것이다.


우리의 몸에 성령이 거하시는 영광스런 주의 인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길 바란다. 워킹 템플, 무버블 템플(Working Temple, Movable Temple)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의 성령의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자유함을 가지고 주의 쉐키나의 영광이 임하기를 찬양하고 싶다. 코로나로 방역 지침을 우리는 기도를 지속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움직이는 주의 전이되기를 간구한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인 줄로 확신한다. 그런 마음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의 임재가 있기를 원한다. 믿음의 용량이 커져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면


디엘(D.L) 무디는 이 세상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그의 몸이 의탁된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미국의 대 부흥 신학자이다. 뉴욕 거리를 걸으면서 묵상하는데 충격이 왔다. 그래서 본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를 했더니 그때에 성령님께서 무디를 사로잡으시고, 장악하시고,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고 놀라운 전 세계의 대각성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우리는


II. 그리스도의 몸은 질그릇이다.
고후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몸 질그릇이다. 성령의 전일 뿐 아니라 우리 몸을 질그릇에 보배로 담고 있는 것이니, 신앙눈으로 볼 때, 신앙으로 사람을 볼 때에 우리가 그릇인 것이다. 성경에 토기장이가 사람을 빚을 때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으로 하나님이 쓰실 그릇으로 말한다. 특별히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했을 때도 그랬다. 하나님의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도행전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어떤 사람은 귀히 쓰고, 어떤 사람은 천히 쓰고,,,,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보배가 질그릇을 결정한다. 바울은 예수님은 보배여서 어떤 자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보배의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연약한 그릇이라고도 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릇이 되어 질그릇이 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질그릇도 두 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귀한 것- 중요한 것과 보배로운 것을 담는다. 또 하나는 천한 것- 인간의 배설물로도 쓰인다. 질그릇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있으니 질그릇이 보배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보내가 질그릇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어떤 무식쟁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순간, 우리는 보배를 담은 그릇이다. In Christ!!!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질그릇이다. 그러므로 말씀 중에
골로새서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질그릇은 그래서 기가 막힌 그릇이 된 것이다.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그 당시 구리그릇도 고린도 당시에 동 그릇과 있었다. 사도 바울은 왜 값없는 것을 사용했는가? 값어치 없고, 화려하지 않는 질그릇을 사용하는가? 그 이유는 질그릇은 세상의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르다. 고린도 당시에는 동 그릇이 더 가치가 있었지만, 세상 가치관은 화려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은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 질그릇을 심는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 디지털 세상 가운데에서도 가치관이 달라진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내적으로 예수님을 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외적으로는 질그릇이지만, 이 그릇이 예수님을 담으면 최고의 그릇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에 기죽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의 학벌, 지위나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백악관의 주인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가 더 낫다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성령 강림 주일에 예배하는 자가 더 가치가 있다. 오늘도 수고하는 자가 많다 그러한 사람들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주차, 교육 안내 봉사 등 가치가 있는 삶이다. 코로나 재 확산 때문에 조심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기에 이렇게 예배를 드린다. 주님의 초청장이기에 우리는 그 가치를 믿고 헌신한다. 질그릇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릇의 용량을 키워서 유기적인 믿음으로 영적인 용량을 넓혀서 살기를 소망한다. 찬양 길 만드시는 주님은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기에 우리의 찬양도 중요하다. 오늘 은혜의 찬양은 길 만드시는 주이다’~ 찬양도 영적인 용량이 넓어져서 질그릇에 보배로 담아지길 바란다.


III. 우리의 질그릇의 용량을 넓히고 깨끗하게 하려면
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말씀의 용량을 넓혀야 한다.
-1) 말씀으로 깨꿋하게 해야 한다. 주일에 아이들과 암송하고 예배에 나와서 아이들과 기도하라. 말씀으로 믿음의 용량의 넓혀달라고 할 때 일해 주신다.
-2)기도하여 깨끗이 씻어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지키신다.
에베소서5:26,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말씀의 용량을 넓힌다. 기도의 용량, 찬양의 용량을 넓히기를 바란다. 믿음과 기도의 용량이 커져서 우리의 그릇을 깨끗하게 되길 기도하라. 마틴 루터 말씀 용량을 넖히니 하나님이 지키셨다.
바울은 사도행 16:25~26,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래서 말씀과 기도의 용량을 넓혀서 살라.
-만입이 그 입다 가지고~^ 찰스웨슬리 영국을 변화 시킨다 그 형제가 그렇다.


요약.
성도의 몸은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혜는 위대한 변화를 낳는다. 그 변화의 기초는 성령께서 우리들의 심령에 믿음으로 내주하시는 것이다. 죄에 종노릇하던 인생들이 이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것이다. 질그릇 속의 보배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인간 자체는 약하지만 성도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귀한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니 거룩한 가운데 근심 걱정 연약함 다 주님 안에서 맡기고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을 완전하게 덮어 주심을 믿고 모든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성령 충만한 그릇으로 평생을 살게 되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만하게 지배해 주시길 간구하여 말씀의 용량을 넓혀서 모든 질병을 치유 받고 모든 일들을 해결 받기를 원하니 바울이 질그릇을 귀히 여기는 것처럼 보배로우신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성령 충만 받고 주님 안에서 귀히 쓰임 받은 질그릇이 되어야 한다.


느낀 점.

내가 매주 새벽부터 주일을 준비를 한 것은 늘 주일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주님 전에서 예배드리는 감사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며, 예배 헌금위원으로 일찍 미리가 가서 기도하고 준비하면 왠지 뭔가 은혜를 더하는 느낌이 든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느낌이 들기에 아무도 도착하지 않는 시간에 좀 일찍에 가서 기도를 한다. 본당에서의 예배를 내가 (타자속도가)속기를 좀 잘하다 보니 다 손으로 따다닥 내용을 치면서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 질그릇이 보배가 되기 위해서는 준비로 잘 해야 하고 훈련도 잘 받아야 하고 봉사도 성실히 해야만이 하나님은 성령 충만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 주님과 교제를 사모하는 주일이 되기를 무척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은 오늘 성령 충만이신지 헌금을 빼고 예배를 마치시려 해서 우리가 깜짝 놀랐지만 센스가 극치셔서 금방 알아 차리셔서 다행히 순서가 순적하게 되었다. 성령 충만 받아 이렇게 귀히 쓰임 받는 질그릇도 되고 싶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진정한 질그릇이 되고 싶다. 세상 가치와 비견하는 아름다운 질그릇으로 변화시켜 주실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날마다 성령 충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겠다.

☆ 길 만드시는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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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0. 5. 24)
제목: ''믿음의 계승''
말씀: 창세기 25:19~23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오늘 어린이들이 성경봉독을 자리가 이글 앱튼이며, 독수리 성경 보면대이다. 46장 찬송을 믿음의 계승으로 하는 찬양이다. 조부께서 찬송하신 것을 鮮然하다. 찬양도 계승했다. 주 오늘 이 찬양으로 모든 코로나 바이러스가 씻어지길 바라며 주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천군천사께 예배하는 것을 예고편을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도 이 찬양이 계승되길 바란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강력한 기쁨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줄 믿는다. 믿음계보이며 신앙의 계승이다. 사역은 수선대후가 되어야 한다(선대의 은혜를 후대에 이어가다). 일관된 마음의 소원이다. 우리 어느 한 대에만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를 아우러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믿음을 계승되어야 할 줄 믿는다. 그리고


계승해야 한다는 말에게 3가지가 있다.
守先待後係昇 (수선대후의 믿음의 계승)
1. 신앙계승-아브라함처럼 계승하는 것이다.
2, 비전계승-요셉처럼 자기를 통하여 그 가정 공동체를 살리며 민족을 살리는 것이다.
3. 사역계승-사역을 계승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처럼, 영적 전략을 갖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예수님처럼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다. 신구약 전체에 일관된 내용이다.


  이사야 59:21,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대대로 3456대 금방이니 이렇게 이 믿음의 계승에는 육적인 계승도 있고 영적인 계승도 있다. 육신의 혈통의 계승은 아브라함-이삭-야곱처럼 혈통에 따라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에도 육신의 혈통으로 믿음의 계승이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계승할 사람이 없을 수 있다. 그런 분들은 영적인 믿음의 계승이 되면 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성된 사람이 영적이 계승을 하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사역에 잘되고 안되는 것을 체험해보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신앙생활의 선행과 잘한 일을 떠나 부를 쌓고 세상에서 대단해도 중요한 것은 부모가 떠난 후에 자녀들에게 복음적인 제대로 세대계승을 했는가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제대로 키웠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 그가 떠난 뒤 얼마나 세대계승을 했냐는 것이다. 우리 교회 제자훈련이 목표와 중요점도 제자훈련의 목적이 복음적 세대계승을 보장하는 정말 중요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 마찬가지다 개인 가족뿐만이 아니다. 30년만 지나면 영국의 종교가 이슬람으로 떠오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 18세기, 19세기, 200년 전에 전세계 믿음의 모태의 나라가 지금은 수술대 위에 놓여있는 응급실 환자와 같이 전락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영국의 신앙의 모태 나라가 응급상태로 전락했는가! 그렇게 믿음이 강한 설교의 황태자 스펄전, 기도의 롤모델인 조지뮬러, 현대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텔러와 찰스웨슬리의 형제의 섬김의 그런 나라가 왜 이렇게 된 것은 나라가 그것은 바로 복음, 믿음의 계승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마지막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에 사람의교회 모든 성도들과 우리교회 사역은 결정적일 때 승리한다. 사역의 계승과 믿음의 계승이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대한 말씀이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늘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먼저 나온다. 여기 본문에서 다 나오고 있다. 뭘 말하는 것인가 바로 신앙계승을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 25절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렇게 나오고 있다.


I, 믿음 계보의 겉표지와 속 내용.
-로마서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믿음으로 되나니...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


  -믿음 계보의 믿음 계보의 신앙 계승 의미는 겉표지와 속 내용은 무슨 말인가?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조상이다. 우리 모두도 믿음의 조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브라함의 생애는 그 생애로(175) 마치는 것이 아닌 그 계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대 계승되어 실효성 있게 우리에게 영형을 끼치고 있다. 영적인 유효지배이다. 영적인 믿음의 계보가 더 중요하다. 육신은 생애는 겉표지이며 아브라함의 영적인 세대계승을 통하여 나타나는 모든 일들이 믿음의 속 내용들이다. 아브라함 겉표지보다 속 내용 믿음의 계승을 통하여 특별히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믿음의 영적 계보가 계승된 줄로 믿는다. 이제 그것이 더 확장되면 그 아브라함의 자손인 모세를 통하여 깜짝 놀랄만한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주시고, 더 놀라운 것은 여호수아 같은 사람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꿈도 못꾼 태양과 금성철벽같은 여리고 성을 무너지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영적 믿음의 계보를 통하여 다윗의 물맷돌로 골리앗을 물리친 일들, 온갖 묘략 속에 다니엘, 에스더의 여성으로서 민족을 구원하는 일 등이 한마디로 겉표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영적 계승을 통하여 믿음의 그 후대들이 가졌던 영광스런 일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으로 살았던 속 내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을 통해 계승되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의 순종을 통해, 또 이삭의 순종은 야곱은 최선을 통하여 야곱의 순종은 요셉의 최선을 통해서 나타난 줄로 믿는다. 오늘 본문에 이삭은 아내 리브가를 맞이한다. 아이를 갖지 못해서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 임신하기까지 20년이 걸려서 60세에 야곱과 에서를 낳는다. 그리고 에서가 장자였지만 그가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고, 비록 야곱은 둘째로 낳았지만 장자권인 믿음의 계승을 사모했기 때문에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이 계승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겉표지와 속내용을 살피고 둘째로는 참 믿음의 계승을 이야기 한다.


II. 야곱을 통한 믿음의 계승.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민족이나 이삭 민족이라 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민족이라 하신다. 나중에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받은 이름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야곱은 승리만이 아니라 실패도 많았다. 성경은 믿음 계승자의 좋은 면만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야곱은 그의 선대나 후대에 힘겹게 살았다. 처음부터 몸부림치며 힘겹게 살았고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다. 삶의 중간 중간에 심적 고통도 많았다. , 비난도 받았다. 한마디로 우리와 비슷하다. 그러나 야곱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는 믿음이 큰 사람이었다. 많은 인간의 계략과 책략이 있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도 끝까지 애썼다. 그런 인간적인 부분이 많았지만 되게 안 어울리는 조합의 인간이었다. 형도 속였는데 천사와 씨름하고, 아버지도 속인 하나님께도 바라는 연구 대상이다. 우리도 야곱과 같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오직하면 성경은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 하신다. 한 가지가 있는데 그는 야곱은 장자 권을 주신다. 축복, 믿음의 계보도 함께 주신다.
우리도 그렇다. 많은 안 착실한 야곱처럼 사는 자가 많다. 우리는 파란만장하기도 하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용하여 믿음의 계승을 하신다.
-히브리서 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이렇게 야곱은 각 아들을 축복하는 계승한다. 모든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반드시 자녀들을 축복하고 가야한다. 한 명도 예외 없이 주의 백성들은 그러해야 한다. 주를 의지하여 오늘 믿음의 아름다운 장자 권을 사모하는 것이다. 사모하길 바란다. 그리스도의 삶은 릴레이 경주처럼 선대로부터 받은 믿음의 계승을 넘겨주는 것이 삶의 완성이다. 믿음의 경기자가 다음 경기자에게 바통을 넘겨주지 않으면 경주가 완성 될 수 없다. 육신의 죽음이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다음세대에 믿음의 바통을 넘겨주어야 끝나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제대로 신앙 생을 한 것이 아니다. 목사님은 3대가 개척을 했다. 아들이 자신이 개척 시에 교회에 걸어 놓은 슬로건이 하나 있다. 바로 영어로 걸었다) Honoring our Roots, Reviving our generation!이다(우리의 뿌리를 존중하고 우리 세대를 부활시키는(계승)하는 것이다). 선대의 존경과 자기 세대에서 부흥을 말한다. 전혀 관계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걸어 놓은 것이라 참으로 고마웠다. 믿음의 계승을 본인도 원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세대 계승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와 보람과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 가족과 개인의 저주와 상처 고통이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바뀌어 버리길 당대에 축복을 주시길 바란다. 아담의 불순종이 아브라함이 뒤집었듯이 우리도 반전을 시켜야 한다. 죽음의 역사가 생명의 역사가 되고 자녀가 없는 분들은 영적인 계보를 이어가시길 바란다. 그래서 세대 계승을 하여야 한다.


III. 믿음의 계보를 위한 적용.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계보를 위하여 그 하나님의 사람들을 평생에 다듬으신다. 모세는 팔십 년을 다듬었다. 이삭은 20년 동안 다듬었다. 착해서 40세에서 60세까지이다. 아브라함은 25년간 다듬었고, 야곱은 100년을 다듬었다. 평생 다듬었다. 에서가 더 멋져보여도 야곱은 좀 그랬다. 우리 모두가 거친 돌과 같다. 이삭은 모범생이었다. 이 자리에서도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다듬으시고 추적하시며 기다리시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이 계승될 때까지 우리의 인생의 겉표지뿐만 아니라 속 내용도 속 컨텐츠가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은 멈추시지 않으신다. 길을 만드시는 주님은 멈추시지 않으신다. 기적도 시간이 걸린다. 예수님의 성육신도 열 달을 기다리시듯 하나님의 믿음의 계승도, 우리의 상처도 기다리며 치유하시며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한 가지 야곱처럼 지금 당장 아니더라도 우리의 믿음의 계승을 위해 다듬어 주시리라 믿는다. 에서는 왜 믿음의 계승을 못했는가? 그는 육체적인 욕구로 살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사람이었다. 우리도 다듬어져서 자녀에게 믿음 계승하여 인생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살아갈 때 주님이 장자 권을 부여하시리라 믿는다.
이사야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이
사랑의 교회가 믿음의 계승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어어가야 하는가?
1.13세에 영적 계보를 이어간다. 자신의 신앙을 책임져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앙을 책임져야한다.
2.대학생 선교사 파송이다.
3..암송이다. 72구절 암송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들을 보호하고 강력한 무기를 장착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하나님이 내 속에서 일하심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 현실이 어떤가? 지금 평균스마트폰을 2600번을 만진다고 한다. 그래서 신앙을 영성화하고, 큐티, 사랑 온, 암송 등의 모두 시스템을 바꾸어 놓는다. 아이들이 집중하는 것으로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제자 훈련에 많이 투자해야 한다. 골든타임을 만들고 놓치지 많고 출 코로나를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 사태이후에 놀라운 변화가 되었다.
에듀케이션 시스템이 파도처럼 슈팅이 되었다.
 교육시스템이 대변혁이 일으키고 있다. 과거에 교육은 장소에서만 이루어졌다. 학교 가정, 교회만을 했다. 그러나 교회는 영성 교육을 했다. 항상 교회가 앞장섰다. 현대 교육이 발달한 이후 교육의 힘이 학교로 집중했다. 과거 기독교 교육이 균형이 있었다. 늘 앞장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교회 교육이 무너져서 인성과 영성이 엉망이 되었다. 이번에 학교에 문을 닫음으로 인해 온라인이 되고 출 코로나로 합력하여 지식 교육이 교회에서 영성교육이 잡아져야 한다. 인성과 영성이 엉망이 되었는데 백년에 한 번 나올지 모를 일이 생겼다. 목양이 제대로 살아있는 균형 잡힌 대학이 되어야 한다. 학교의 교육이 아닌 사랑글로벌 아카데미에 들어가길 바라보라 출 코로나 1호가되길 바란다. 그래서 부모의 사명선언이 있다. 믿음의 계승위한 부모사명 영상대로 자녀들을 축복하는 환경을 주시길 바란다.


IV. 믿음 계승을 위한 부모 사명 선언.
. 부모인 나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녀를 말씀으로 교육하는 사명자로서 세상 교육에 빼앗긴 교육이 주도권을 다시 찾아오는 출 코로나 작전의 선봉장이 되겠습니다(:7).
. 부모인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백성으로서 자녀가 세속적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갖도록 양육하겠습니다(벧전 2:9)
V. 믿음의 계승을 위한 자녀 사명 선언
. 자녀인 나는 부모님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공경하고 주의 뜻대로 가르쳐주신 믿음의 유산(遺産)을 계승하겠습니다(딤후 3:14)
. 자녀인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임을 기억하며, 세상의 휩쓸리지 않는 당당한 기백을 가지고 분별력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12:2)


요약
그들은 기도의 결과로 잉태되었다. 그들의 부모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이 지내다가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들을 얻었다. 이삭은 사십 세에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그가 이 아들들을 낳을 때 그의 나이는 육십 세였다. 그러니까 그는 결혼한 후로 20년 동안 자식이 없이 지낸 셈이다. 이삭은 모리아 산으로 자기 아내를 데리고 가 그녀와 함께 그리고 그녀를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또한 바로 그곳에서 세워진 그 언약을 내세워 탄원했다는 전승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탄원을 받아 주셨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그에게 지혜의 말씀을 구하는 것은 마음에 큰 위안을 준다. 그녀는 자기의 질문에 대해 그 비밀을 밝혀 주는 답변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 두 자녀를 임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국민을 임신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태도와 성격에 있어서 서로가 매우 다를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반목하고 다툴 운명이었다. 그리고 그 다툼의 결과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선대의 강점을 지키게 하시고 현재 우리의 부흥하는 수선대후(守先待後)의 은혜 안에서 신앙계승, 비전계승, 사역 계승을 완수하는 결정적인 승리를 베풀어 주시길 원하며, 세대간의 갈등과 북음의 세대계승으로 모두 치유받고 항해와 태양, 사자굴과 같은 위기에서도 구원 받아 영적 계보를 계승하고, 우리를 평생 다듬으셔서 믿음의 산 증인으로 살고 영적 장자권의 바통을 잘 넘겨주어서 자녀에게 인생경주를 완성하는 인생이 되어 이 시대에 교육이 교회에 집중하는 자녀로 성장하게 되길 소망한다.


느낀 점.
  오늘 예배는 이른 아침부터 비가 와서 좀 일찍 채비를 하고 갔더니 헌금 봉사실 기도회에는 아무도 도착하지 않아서 이때다 싶어 깊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그간 많은 기도를 했지만 물론 가족을 위한 기도이다. 이곳 사랑의 교회를 먼저 선택해서 교대 다니면서 우리에게 서울에 오면은 다 함께 헌신하자고 했던 나의 딸의 믿음이 늘 오락가락하기에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나님께 애타게 간곡히 기도드렸다. 하나님의 은혜로 딸에게 임용고시도 단번에 합격하게 하셨고 기다림 없이 응답하셨는데 지금 5년이 지난 뒤는 어떤 응답을 주시려고 기다리게 하실까를 생각하고 기도하게 했다. 응답은 늘 없지만, 인터넷으로 본인의 방에서 드린다고 문자만 왔다. 본당에 들어와 다시 기도했다. 우리 자녀가 정말 믿음으로 살기를 간절하게 하고나서 보니 강대상에는 여전이 젊은이들이 찬양하는 모습이 성령 충만해 보였고 부러웠다. 저렇게는 못하더라도 교회에 함께 만나서 예배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들었다. 정말 우리 자녀들을 세대계승 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지만 나는 지속적으로 주님 앞에 매달리려 한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교육이 바뀌어 가고 있음을 좋아 하셨는데 어렸을 때 오히려 주일을 잘 지키고 오히려 더 인성도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집만 세지고 말하면 간섭이라 하니 나의 신앙생활이 그간 아무것도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다려 주신다고 하셨으니 끝까지 기도하면서 기다릴 것이며 조언을 더 지혜롭게 할 수 있는 부모가 되어 진정한 믿음을 계승하고 싶다. 오늘도 간절히 원한다. 가족 모두가 믿음의 온전한 가족이 되어 한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이 나의기도 일번이다.
☆ 46장 찬송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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