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주일예배 (2020. 5. 3.)
제목: “평강
말씀: (요한복음 20:19-26)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코로나 극복시리즈11
 
인터미션 예배 아름다운 동산 찬양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을 줄 믿는다. 이 자리가 아름다운 동산, 평화의 동산, 예배의 동산의 자리임에 확신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요연하고도 낮은 피조물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건강하게 나와 주님을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권이요, 크신 은혜요, 목이 메일 정도로 감사하다.
 
오늘은 평강에 대해서이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적 불안을 많이 호소한다. 오죽하면 코로나 불루’(blue)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다. 코로나 불루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일어난 사회적 현상으로 우울증이나 심리적 불안을 의미한다. 두 달 전에 비하면 엄청 줄었고, 국내 확진 어제는 확진 자가 O이었고 그래서 토비새에 그것을 기념하여 동그란 도넛을 나누어 주었다. 확진 자 수가 줄면 코로나 두려움이나 인생의 두려움도 실제로 두려움도 줄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런 코로나 사태가 없고 모든 것들이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되어져 간다면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가? 다 잘 되면 평안을 늘 누릴 수 있는가? 우리가 평안한 지, 불안한 지를 점검할 수 있는 미터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떻게 자고 어떻게 깰 것인가가 점검지가 될 수 있다. 눕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0.1.(시편35절에 보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 , 시편 4: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그러나 누워서 평안하게 자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또 평안이 쉬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야외를 갔다. 어떤 쉼의 장소를 찾는 것과 실제로 쉰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환경적으로 아무리 비싸고 좋은 침대에 누웠더라도 불안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면 그것은 평안한 것이 아니다. 쉬기 위하여 바캉스, 홈캉스를 누려도 참된 평안함이 없다면 뭔가 불안한 것이다. 내가 늘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 성도가 단잠을 자는 것이다
0.2.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자가 발전적인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다.
. 이 말씀의 평강은 세상의 평안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신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자가 발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위로부터 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강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단어이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듯이 평강도 스스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심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듯이 평강도 위로부터 부어주셔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 단어에 속할 것이다. 의심, 실패, 두려움, n원한, 부끄러움과 수치, 고민 후회 비애, 미래에 대한 염려, 좌절 억울함, 누구에게 부당하게 대우를 받거나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우리의 지위나 소유가 침해받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염려, 이런 것들은 이 인생길에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평강은 삶의 붙임, 삶의 인생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평강이요,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늘 평강이다. 정리하면,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참된 평강은 하나님께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오늘 안아주심 본당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에게 참된 평안이 넘치기를 바란다. 본문에 예수님은 3번이나 선포하신다. "중요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3번이나 강조하신 것이다.
요한복음20:19, “너희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20:26,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넉넉한 자원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평강이 중요하니 3번이나 예수님이 강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두려워해서이다(20:19).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했다. 같은 상황인데 - 누가복음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그래서 먼저 생각할 것은 두려움 많은 세상이다. 주님이 3번이나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I. 두려움 많은 세상
첫째, - 정치적 불안 때문에,
둘째,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셋째, 내적 불안 때문에.
 
첫째, - 정치적 불안 때문에, 예측으로 불안해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할 것이라는 정치적 예측 때문에 불안하고 제자들의 마음이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문을 꼭꼭 닫고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하더라도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하면서 환영 일색이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이 기세 등등 했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후에 군중들에 의하여 인민재판 같은 무법의 시대가 되었을 것이다. 인민재판의 증거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다. 제자들이 이런 이유로 두려움에 떨었다. 그것을 당할 까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저녁이었고 사람들이 저녁에 불안을 더 느낀다. 우리 교회는 서초역에 붙어 있고 지하철에서 10미터 상에 있다. 대법원은 가까이에 있다. 대법원은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고, 우리 교회는 죄의 용서를 받는 곳이다. 그러니까 죄의 대가는 두려움의 장소이고, 우리교회는 평강의 장소이다. 그러니까 두려움과 평강이 공존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절묘할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기가막히다는 절묘함을 느꼈다. 어떤 장로님이 우리 교회분이 아니시다. 중요한 판결을 두고 법원에 갔다가 우리교회 십자가를 보고 지나가다 내려와서 울면서 기도하고 주님 앞에 통곡하고 매달렸더니, 하나님께서 놀랍게 판결을 내려 주시고 놀랍게 평안을 주시고, 해결해 주셨다고 한다. 그 감사를 담임 목사님께 표현했다. 꽃다발도 보내왔다. 갈 때는 두려웠으나 우리 본당에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니까 무슨 판결이 내려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 안아주심의 본당은 정치적인 불안이 있어도 평강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믿기를 바란다.
 
둘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두려워했다. 왜냐면 인생을 걸고 따라간 제자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없어지니까 갑자가 불안했던 것이다.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지가 눈앞이 캄캄했다. 제자들도 자기들도 못 박을 거라고 두려웠던 것이다.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삶에 리듬이 깨어졌다. 심지어 몸에 리듬이 깨어진 것이다. 하루에 세끼씩 먹어서 운동을 안 하니까 확~ ~(살이 쪘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몸의 균형이 깨어지니까 마음의 균형까지 깨지고, 관계리듬, 신앙의 리듬, 신뢰, 미래에 대한 계획도, 깨어진 것이다.
 
셋째 내적 불안 때문에
내적 불안 때문에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 버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 때문에 수치와 부끄러워서 베드로 같은 경우는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한 행동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불안했고, 배신에 대한 상처이다. 오늘 이 시대도 비슷하다. 정치적으로 어렵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고 내적으로 한국 사회가 두려움의 바다에 빠져버렸다. 전 세계가 육체의 질고와 인생의 경쟁구도와 전염병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2.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박사는 "우리는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안개 자욱한 잿빛 바다 위를 떠돌고 있는 존재이며, 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확실성의 섬에 찾아가서 그곳에 정착하여 해답을 얻기를 원하고 있다... 잿빛 바다를 떠돌며 확실성의 섬을 찾다가 실패한 우리는 이제 믿음의 섬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철학적이고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이 그들의 신념을 통하여 현대인들의 불안증을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해답을 못 찾았다. 따라서 잿빛 바다를 떠돌며 확실성의 섬에서 찾다가 실패한 우리는 이제 믿음의 섬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자들은 정말 쉬운 말을 어렵게 이야기 한다. 그냥 주님으로부터 평강을 주시면 되는데, 인간이 아무리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불만을 해결할 불안, 어려움, 심리적 확실한 해결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섬에 정착할 때야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평강의 은혜가 있을 때에만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이나 심지어 의학적 치료의 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므로 해결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3. 평강의 유효기간을 확장시켜야 한다.
이 평강의 유효기간이 있다. 평강의 유효기간은 7일 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평강의 유효기간이 7일이 아니라 평생을 가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현장예배가 평강의 유효기간을 확장 시켜서 평생 시종일관하는 평강을 누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하나 있다. 도마 같은 현실이다. 회의와 의심이다.
II. 도마 같은 현실.
도마의 의심/, 될까?이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제일 평강을 누려야 했던 제자 도마가 환경적으로 평강을 누리지 못했다. 이유는 딱 하나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20:24,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함께 있지 아니해서이다. 아웃어브사이드 아웃어브마인드(Out of side, out of mind) 이다. 우리가 안보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현장에 있지 않아서 도마가 없었던 것처럼, 은혜 받는 현장에 빠지면 평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은혜의 현장에 있지 않아 고통의 일주일을 보냈다. 평강이 다 날아갔다. 그 불안의 표현이
 
2. 요한복음20:25,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여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니라
도마는 증거를 넣어 보지 못하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비판자였다. 평강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들으셨으면 민망하셨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은혜 받을 자리, 주님의 임재의 자리에 없으면 의심과 불안이 가중이 된다. 대표적으로 중직 자가 특새벽 예배를 자주 빠지면 평안하겠는가? 계속 빠진다 합시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는 짐이 있는 것이다. 그 짐 때문에 수많은 아픔과 짐과 회의가 생길 수가 있다. 만약에 2~3년 빠지고 내 영혼 평안해 ~ 할 수 없다. 현장예배 두세 달 빠지면 그것은 안 된다. 공동체 주시는 은혜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은혜의 자리에 없으면 평안이 없는 것이다. 의심과 불안이 가중되니 그래서 영적 예배가 중요하다. 다음 주부터는 예배가 다 되니 문제가 없으니 본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있어야 할 다락방현장, 훈련의 현장, 있어야할 가정예배의 현장에서 의심을 날려버리길 바란다. 주님은 이 도마를 그렇다고 해서 꾸중하거나 뭐라고 하시지 않으신다. 다시 8일 뒤에 감사하게도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3. 요한복음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도마가 만지는 그 순간 하늘부터서 놀라운 평강이 임했다. 현장예배가 평강이 임할 것이다. 도마의 평강이 임하는 순간 신구약 중에서 최고의 고백 중에 하나인 도마가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주로 진실 되게 순간순간 고백할 때마다 평강을 부어주시게 된다.
 
III. 평강을 선포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직도 도마처럼 의심의 안개를 걷어내지 못한다면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서 어떻게 평강의 언덕에 오를 수가 있겠는가?’를 생각한다면, 먼저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통하여 평강을 얻기를 바란다. 축약하면 모든 평강은 주님께로부터 온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는 한 우리는 두려움이 없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면 다른 것은 두렵지 않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잘나든 못나든 아무 상관이 없이 그 얼굴에 하나님 주시는 평강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앞장서 일하는 우리 성도들의 평강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평강의 사도, 사신, 대사가 되어야 한다. 매 일주일 마다 새 힘을 주시니 설교를 한다. 그래서 말씀을 나눈다. ‘나의 주, 나의 주예수님 때문에 평강이 온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바울 사도가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딱 맞는 구절 하나를 주셨다.
 
1.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평강의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길 원하노라이다. 평강의 주께서 주시는 것은 무슨 뜻이다.
2. 구약의 평강평강을 대표하는 단어가
1) 샬롬(Shalm)’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적인 축복이며 고귀한 선물이다. 샬롬은 위로부터 부어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샬롬은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다. 위로부터 부어주는 단어이다. 이 샬롬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고귀한 축복이다. 이 샬롬은 커버하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이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 간의 관계, 직장인과 관계, 나라, 자연, 영혼 육체, 감정 간의 관계, 모든 영역에서 커버한다. 이 자리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나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샬롬이 위로부터 임하면 다 켜버가 된다. 영이 임하면 다 해결된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이다.
 
닥터윅스빈 비스트 유 - ‘샬롬라켐’,,, 속으로는 영어를 히브리어로 하니 샬롬라켐이 어려울 때 자주하니까 자주외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생겨서 히브리어를 열심히 하기위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복습을 했더니 포텐셜 히브리어 학자(잠재적 히브리어작가) = 그 능력을 주심을 잊을 수가 없다. 뜻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샬롬):하늘로부터 부어 주신다. 수많은 인생의 문제가 정리가 될 것이다.
2) 우리가 함께 모일 때마다 샬롬라켐의 은혜를 받아라.
속으로 계속 믿지 않는 남편에게 매일 아침마다 샬롬라켐!!!!!! 자주 해보라~
 
가정예배에도 그렇게 해라, 라켐은 투유로서 복수의 단어이다.
 
2. 신약의 평강
1) 샬롬에 대구는 신약의 에이레네(Eirene),는 동사 에이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헬라어로 참여하다, 연결되다, 영어로 Join의 뜻이다. 모든 평강은 누구에게 연결 되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조인(join) 된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목 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조인 된 것이다.
2)예수님과 접붙여 있으면 자동적으로 평강결과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평강의 은혜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접붙임 되었다면 평강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4. 데살로니카 3:16 때마다의 평강이다.
바울이 이를 깨닫고 모든 서신서에
1) “때마다의 평강 (“평강이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할 때 그런 수직적 평강이 아닌 때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라도 때마다 내적으로 누릴 수 있는 평강이다.
2) “일마다의 평강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또한 코로나 사태처럼 세상이 흔들리고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종말론적일 때에도 때마다 평강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어떤 좋은 환경이 있어도, 주님께서 때마다 쓰디쓴 환경을 통해서도 평강을 주신다. 이익이 아닌 손실일 때도 평강을 주실 때도 있다. 심지어 주님을 죽음을 통해서도 평강을 주신다.
3) “친히의 평강 (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친히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약속을 되새김질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친히 샬롬과 에이레네 축복을 주실 것이다. 찬송가 중에 너 근심 걱정 말아라를 우리의 삶의 주제가가 되기를 바란다.
 
IV. 적용
첫째 인생을 더 넓고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인생을 넓게 바라본다면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넓고 깊게 바라보면 마음의 평강이 임할 것이다. 지금 고난당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내가 Join에 따라서 에이레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주님과 화평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주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면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의심 없이 신뢰하여 모든 성도들이 평강을 누리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평강의 DNA가 없는 인종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우리나라는 전쟁도 많았고, 특별히 지구상에 가장 불안한 지역이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의 에이레이네 하늘에서 주시는 평강의 DNA가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투게더 평강이 있게 하시고 평강의 백신을 확산 시키는 축복을 주시길 원한다. 부부가 손을 잡고 생각해 보라, 내 인생에 언제 최고의 평강의 시대였던가를 생각하면서 지금이 가장 평강할 때라고 이야기 하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온 성도의 가정마다 축복한다. 평강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가정 가정마다 단잠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We go together!!! 다음 주일 현장예배 주실 줄 믿는다.
 
 
 
요약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방문하여 허탈감과 고통을 느끼는 그들에게 평강을 주셨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비난하거나 책망치 않으시고 새로운 약속과 사명을 맡기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강이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갔다. 마음은 꽁꽁 얼어붙었고, 자기들도 죽을까 두려워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선포하시며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신다. 어떤 아픔도 없는 예쁜 평강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을 통과한 강인한 십자가의 평강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가질 때, 그 평강을 누리며, 세상에 전할 수 있다. 의심 자체가 죄는 아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제자들의 말을 의심하며 직접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는 최고의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강은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이다. 참된 평강은 예수님께 접붙여 있으면 우리는 영원히 평강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그분의 선물이니 이제 코로나 불루를 지나 우리는 주님 한 분만 의지하고 안아주시는 본당에서 두려움을 이제 다 걷어버리고 평강의 주님을 바라보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자.
 
느낀 점
참된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그분의  선물이다. 나에게  주신  그분의  선물을  내가  충분히  누리지  함은 도마처럼 은혜의 현장에 없었으므로 인해 생겨난 의심과 두려움인 것이다. 그러니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때마다  일마다  친히  평강의  은혜를  주시는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여  은혜 받는  현장에서  최후  승리를  믿는  주의  자녀가  되길  기도하며  나아가겠다. 오늘부터  정상적인  예배가 되었다.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배에  준수 하고  헌신하는  자  되며  가족을  더  잘 챙기고  음식도  골고루  해주면서  믿음을 굳건이 세워가길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로 접붙여서 생활하기를  간구한다. 남편이  이번 주부터 교회에서  미루던  파노라마를 시작했다. 감사한  일이다. 걸음마를 하나님이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 좋겠다. 또한  내가 받는 훈련이 나의 삶에 평강이 되기를 더욱 구하며 모든 일들이 해결되고 주님 앞에 찬양과 경배만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전심으로 가족과 함께 나아가길 원한다. 샬롬, 에이레네가 선포되어 우리 가정에 평강과 내 이웃의 평강이 함께 하길 소망한다. 려움과 의심으로 불안해하는 우리를 주님과  나만  아는 참된  평강을 위로부터 부어 주셔서 은혜의  현장인 안아 주님의 본당에서 믿음의 섬에 정착하는 믿음의 평생 되길 기도하겠다.
 


 




♧♧♧♧♧♧♧♧♧♧♧♧♧♧♧♧♧♧♧♧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 (2020. 5. 3.)
제목: “평강
말씀: (요한복음 20:19-26)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코로나 극복시리즈11

 
인터미션 예배 아름다운 동산 찬양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을 줄 믿는다. 이 자리가 아름다운 동산, 평화의 동산, 예배의 동산의 자리임에 확신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요연하고도 낮은 피조물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건강하게 나와 주님을 찬양과 예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권이요, 크신 은혜요, 목이 메일 정도로 감사하다.
 
오늘은 평강에 대해서이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적 불안을 많이 호소한다. 오죽하면 코로나 불루’(blue)라는 말일 생길 정도이다. 코로나 불루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일어난 사회적 현상으로 우울증이나 심리적 불안을 의미한다. 두 달 전에 비하면 엄청 줄었고, 국내 확진 어제는 확진 자가 O이었고 그래서 토비새에 그것을 기념하여 동그란 도넛을 나누어 주었다. 확진자 수가 줄면 코로나 두려움이나 인생의 두려움도 실제로 두려움도 줄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런 코로나 사태가 없고 모든 것들이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되어져 간다면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가? 다 잘 되면 평안을 늘 누릴 수 있는가? 우리가 평안한 지, 불안한 지를 점검할 수 있는 미터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떻게 자고 어떻게 깰 것인가가 점검지가 될 수 있다. 눕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0.1.(시편35절에 보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 , 시편 4: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그러나 누워서 평안하게 자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또 평안이 쉬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야외를 갔다. 어떤 쉼의 장소를 찾는 것과 실제로 쉰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환경적으로 아무리 비싸고 좋은 침대에 누웠더라도 불안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면 그것은 평안한 것이 아니다. 쉬기 위하여 바캉스, 홈캉스를 누려도 참된 평안함이 없다면 뭔가 불안한 것이다. 내가 늘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 성도가 단잠을 자는 것이다
0.2.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자가 발전적인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다.
. 이 말씀의 평강은 세상의 평안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신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자가 발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위로부터 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강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단어이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듯이 평강도 스스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심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듯이 평강도 위로부터 부어주셔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 단어에 속할 것이다. 의심, 실패, 두려움, n원한, 부끄러움과 수치, 고민 후회 비애, 미래에 대한 염려, 좌절 억울함, 누구에게 부당하게 대우를 받거나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우리의 지위나 소유가 침해받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염려, 이런 것들은 이 인생길에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평강은 삶의 붙임, 삶의 인생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평강이요,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늘 평강이다. 정리하면,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참된 평강은 하나님께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오늘 안아주심 본당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에게 참된 평안이 넘치기를 바란다. 본문에 예수님은 3번이나 선포하신다. "중요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3번이나 강조하신 것이다.
요한복음20:19, “너희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20:26,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넉넉한 자원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평강이 중요하니 3번이나 예수님이 강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두려워해서이다(20:19).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했다. 같은 상황인데 - 누가복음 24: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그래서 먼저 생각할 것은 두려움 많은 세상이다. 주님이 3번이나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I. 두려움 많은 세상
첫째, - 정치적 불안 때문에,
둘째,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셋째, 내적 불안 때문에.
 
첫째, - 정치적 불안 때문에, 예측으로 불안해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할 것이라는 정치적 예측 때문에 불안하고 제자들의 마음이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문을 꼭꼭 닫고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하더라도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하면서 환영 일색이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이 기세 등등 했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후에 군중들에 의하여 인민재판 같은 무법의 시대가 되었을 것이다. 인민재판의 증거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다. 제자들이 이런 이유로 두려움에 떨었다. 그것을 당할 까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저녁이었고 사람들이 저녁에 불안을 더 느낀다. 우리 교회는 서초역에 붙어 있고 지하철에서 10미터 상에 있다. 대법원은 가까이에 있다. 대법원은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고, 우리 교회는 죄의 용서를 받는 곳이다. 그러니까 죄의 대가는 두려움의 장소이고, 우리교회는 평강의 장소이다. 그러니까 두려움과 평강이 공존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절묘할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기가막히다는 절묘함을 느꼈다. 어떤 장로님이 우리 교회분이 아니시다. 중요한 판결을 두고 법원에 갔다가 우리교회 십자가를 보고 지나가다 내려와서 울면서 기도하고 주님 앞에 통곡하고 매달렸더니, 하나님께서 놀랍게 판결을 내려 주시고 놀랍게 평안을 주시고, 해결해 주셨다고 한다. 그 감사를 담임 목사님께 표현했다. 꽃다발도 보내왔다. 갈 때는 두려웠으나 우리 본당에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니까 무슨 판결이 내려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 안아주심의 본당은 정치적인 불안이 있어도 평강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믿기를 바란다.
 
둘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두려워했다. 왜냐면 인생을 걸고 따라간 제자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없어지니까 갑자가 불안했던 것이다.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지가 눈앞이 캄캄했다. 제자들도 자기들도 못 박을 거라고 두려웠던 것이다.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삶에 리듬이 깨어졌다. 심지어 몸에 리듬이 깨어진 것이다. 하루에 세끼씩 먹어서 운동을 안 하니까 확~ ~(살이 쪘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몸의 균형이 깨어지니까 마음의 균형까지 깨지고, 관계리듬, 신앙의 리듬, 신뢰, 미래에 대한 계획도, 깨어진 것이다.
 
셋째 내적 불안 때문에
내적 불안 때문에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 버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 때문에 수치와 부끄러워서 베드로 같은 경우는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한 행동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불안했고, 배신에 대한 상처이다. 오늘 이 시대도 비슷하다. 정치적으로 어렵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고 내적으로 한국 사회가 두려움의 바다에 빠져버렸다. 전 세계가 육체의 질고와 인생의 경쟁구도와 전염병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2.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박사는 "우리는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안개 자욱한 잿빛 바다 위를 떠돌고 있는 존재이며, 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확실성의 섬에 찾아가서 그곳에 정착하여 해답을 얻기를 원하고 있다... 잿빛 바다를 떠돌며 확실성의 섬을 찾다가 실패한 우리는 이제 믿음의 섬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철학적이고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이 그들의 신념을 통하여 현대인들의 불안증을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해답을 못 찾았다. 따라서 잿빛 바다를 떠돌며 확실성의 섬에서 찾다가 실패한 우리는 이제 믿음의 섬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자들은 정말 쉬운 말을 어렵게 이야기 한다. 그냥 주님으로부터 평강을 주시면 되는데, 인간이 아무리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불만을 해결할 불안, 어려움, 심리적 확실한 해결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섬에 정착할 때야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평강의 은혜가 있을 때에만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이나 심지어 의학적 치료의 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므로 해결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3. 평강의 유효기간을 확장시켜야 한다.
이 평강의 유효기간이 있다. 평강의 유효기간은 7일 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평강의 유효기간이 7일이 아니라 평생을 가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현장예배가 평강의 유효기간을 확장 시켜서 평생 시종일관하는 평강을 누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하나 있다. 도마 같은 현실이다. 회의와 의심이다.
II. 도마 같은 현실.
도마의 의심/, 될까?이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제일 평강을 누려야 했던 제자 도마가 환경적으로 평강을 누리지 못했다. 이유는 딱 하나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20:24,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함께 있지 아니해서이다. 아웃어브사이드 아웃어브마인드(Out of side, out of mind) 이다. 우리가 안보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현장에 있지 않아서 도마가 없었던 것처럼, 은혜 받는 현장에 빠지면 평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은혜의 현장에 있지 않아 고통의 일주일을 보냈다. 평강이 다 날아갔다. 그 불안의 표현이
 
2. 요한복음20:25,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여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니라
도마는 증거를 넣어 보지 못하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비판자였다. 평강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들으셨으면 민망하셨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은혜 받을 자리, 주님의 임재의 자리에 없으면 의심과 불안이 가중이 된다. 대표적으로 중직자가 특새벽 예배를 자주 빠지면 평안하겠는가? 계속 빠진다 합시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는 짐이 있는 것이다. 그 짐 때문에 수많은 아픔과 짐과 회의가 생길 수가 있다. 만약에 2~3년 빠지고 내 영혼 평안해 ~ 할 수 없다. 현장예배 두세 달 빠지면 그것은 안 된다. 공동체 주시는 은혜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은혜의 자리에 없으면 평안이 없는 것이다. 의심과 불안이 가중되니 그래서 영적 예배가 중요하다. 다음 주부터는 예배가 다 되니 문제가 없으니 본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있어야 할 다락방현장, 훈련의 현장, 있어야할 가정예배의 현장에서 의심을 날려버리길 바란다. 주님은 이 도마를 그렇다고 해서 꾸중하거나 뭐라고 하시지 않으신다. 다시 8일 뒤에 감사하게도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3. 요한복음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도마가 만지는 그 순간 하늘부터서 놀라운 평강이 임했다. 현장예배가 평강이 임할 것이다. 도마의 평강이 임하는 순간 신구약 중에서 최고의 고백 중에 하나인 도마가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주로 진실 되게 순간순간 고백할 때마다 평강을 부어주시게 된다.
 
III. 평강을 선포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직도 도마처럼 의심의 안개를 걷어내지 못한다면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서 어떻게 평강의 언덕에 오를 수가 있겠는가?’를 생각한다면, 먼저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통하여 평강을 얻기를 바란다. 축약하면 모든 평강은 주님께로부터 온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는 한 우리는 두려움이 없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면 다른 것은 두렵지 않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잘나든 못나든 아무 상관이 없이 그 얼굴에 하나님 주시는 평강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앞장서 일하는 우리 성도들의 평강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평강의 사도, 사신, 대사가 되어야 한다. 매 일주일 마다 새 힘을 주시니 설교를 한다. 그래서 말씀을 나눈다. ‘나의 주, 나의 주예수님 때문에 평강이 온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바울 사도가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딱 맞는 구절 하나를 주셨다.
 
1.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평강의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길 원하노라이다. 평강의 주께서 주시는 것은 무슨 뜻이다.
2. 구약의 평강평강을 대표하는 단어가
1) 샬롬(Shalm)’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적인 축복이며 고귀한 선물이다. 샬롬은 위로부터 부어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샬롬은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다. 위로부터 부어주는 단어이다. 이 샬롬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고귀한 축복이다. 이 샬롬은 커버하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이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간의 관계, 직장인과 관계, 나라, 자연, 영혼 육체, 감정 간의 관계, 모든 영역에서 커버한다. 이 자리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나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샬롬이 위로부터 임하면 다 켜버가 된다. 영이 임하면 다 해결된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이다.
 
닥터윅스빈 비스트 유 - ‘샬롬라켐’,,, 속으로는 영어를 히브리어로 하니 샬롬라켐이 어려울 때 자주하니까 자주외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생겨서 히브리어를 열심히 하기위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복습을 했더니 포텐셜 히브리어 학자(잠재적 히브리어작가) = 그 능력을 주심을 잊을 수가 없다. 뜻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샬롬):하늘로부터 부어 주신다. 수많은 인생의 문제가 정리가 될 것이다.
2) 우리가 함께 모일 때마다 샬롬라켐의 은혜를 받아라.
속으로 계속 믿지 않는 남편에게 매일 아침마다 샬롬라켐!!!!!! 자주 해보라~
 
가정예배에도 그렇게 해라, 라켐은 투유로서 복수의 단어이다.
 
2. 신약의 평강
1) 샬롬에 대구는 신약의 에이레네(Eirene),는 동사 에이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헬라어로 첨여하다, 연결되다, 영어로 Join 의 뜻이다. 모든 평강은 누구에게 연결 되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조인(join) 된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목 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조인 된 것이다.
2)예수님과 접붙여 있으면 자동적으로 평강결과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평강의 은혜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접붙임 되었다면 평강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4. 데살로니카 3:16 때마다의 평강이다.
바울이 이를 깨닫고 모든 서신서에
1) “때마다의 평강 (“평강이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할 때 그런 수직적 평강이 아닌 때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라도 때마다 내적으로 누릴 수 있는 평강이다.
2) “일마다의 평강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또한 코로나 사태처럼 세상이 흔들리고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종말론적일 때에도 때마다 평강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어떤 좋은 환경이 있어도, 주님께서 때마다 쓰디쓴 환경을 통해서도 평강을 주신다. 이익이 아닌 손실일 때도 평강을 주실 때도 있다. 심지어 주님을 죽음을 통해서도 평강을 주신다.
3) “친히의 평강 (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친히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약속을 되새김질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친히 샬롬과 에이레네 축복을 주실 것이다. 찬송가 중에 너 근심 걱정 말아라를 우리의 삶의 주제가가 되기를 바란다.
 
IV. 적용
첫째 인생을 더 넓고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인생을 넓게 바라본다면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넓고 깊게 바라보면 마음의 평강이 임할 것이다. 지금 고난당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내가 Join에 따라서 에이레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주님과 화평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주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면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의심 없이 신뢰하여 모든 성도들이 평강을 누리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평강의 DNA가 없는 인종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우리나라는 전쟁도 많았고, 특별히 지구상에 가장 불안한 지역이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의 에이레이네 하늘에서 주시는 평강의 DNA가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투게더 평강이 있게 하시고 평강의 백신을 확산 시키는 축복을 주시길 원한다. 부부가 손을 잡고 생각해 보라, 내 인생에 언제 최고의 평강의 시대였던가를 생각하면서 지금이 가장 평강할 때라고 이야기 하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온 성도의 가정마다 축복한다. 평강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가정 가정마다 단잠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We go together!!! 다음 주일 현장예배 주실 줄 믿는다.
 
 
 
느낀 점
참된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그분의 선물이다. 나에게 주신 그분의 선물을 내가 충분히 누리함은 도마처럼 은혜의 현장에 없었으므로 인해 생겨난 의심과 두려움인 것이다. 그러니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때마다 일마다 친히 평강의 은혜를 주시는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여 은혜 받는 현장에서 최후 승리를 믿는 주의 자녀가 되길 기도하며 나아가겠다. 오늘부터 정상적인 예배가 되었다.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배에 준수하고 헌신하는 자 되며 가족을 더 잘 챙기고 음식도 골고루 해주면서 믿음을 굳건이 세워가길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로 접붙여서 생활하기를 간구한다. 남편이 이번 주부터 교회에서 미루던 파노라마를 시작했다. 감사한 일이다. 걸음마를 하나님이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 좋겠다. 또한 내가 받는 훈련이 나의 삶에 평강이 되기를 더욱 구하며 모든 일들이 해결되고 주님 앞에 찬양과 경배만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전심으로 가족과 함께 나아가길 원한다. 샬롬, 에이레네가 선포되어 우리 가정에 평강과 내 이웃의 평강이 함께 하길 소망한다. 려움과 의심으로 불안해하는 우리를 주님과 나만 아는 참된 평강을 위로부터 부어 주셔서 은혜의 현장인 안아 주님의 본당에서 믿음의 섬에 정착하는 믿음의 평생 되길 기도하겠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비새 예배 (2020. 5. 2)

제목: ''교육의 열매, 선교의 비전''

말씀: (디모데후서1:1~5)

설교자: 김경덕백승준 목사님  

김경덕 목사님.

 

김경덕 목사님.

사랑의 교회는 지난 10주차 정오기도회를 통해 마음을 모으면서 한마음으로 기도해 왔다. 오늘 토비새를 통해 이 기도의 은혜가 이어져 다음 세대가 실력과 영성과 정서를 겸비한 글로벌 인재가 세워지길 소원한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손으로 기록된 편지의 한 부분이다. 선교사요, 신학자요, 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이 선교의 현장에서 기록했던 13통의 편지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신약의 정점이 되었다.. 이 중 두 편의 편지는 이 한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고 바울이 밤낮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쉬지 않고 생각할 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 사람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다. 거짓 없이 깨끗한 믿음을 가진 이 사람은 바울에게 기쁨의 존재였다. 세계 전역을 다니면서 다양한 선교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의 마음의 각인이 되었던, 이 사람의 이름은 신약성경 두 권의 제목이 되었고, 훗날 바울이 사역한 에베소 사역을 계승했던 이 사람은 디모데이다. 디모데의 믿음은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났던 이 아이는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기는 여종으로 성경을 생명처럼 사랑했던 어머니 유니게의 기도 속에 자란 자였다. 이 두 여인이 가졌던 거짓 없고 순수한 믿음을 아름답게 계승했다. 성령께서는 신앙계승의 주역이 된 이 위대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여 영원히 기억되게 하셨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남성 성도들 가운데 신앙교육에 여성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바울은 디모데의 신앙을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의 공으로 돌리고 있지만, 실은 디모데 신앙의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바울 자신이었다. 디모데가 고향 루스드라에서 처음 바울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바울이 병자들를 고치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 선교 사역의 모습이 디모데에게 반복적이 되었다. 디모데가 바울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바울의 동역 자가 되어있었다. 바울과 디모데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성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에게 이 디모데가 가 가진 뿌리 깊고 요동하지 않는 신앙이, 고요하고 평온하며 품격 있는 믿음으로 그 바울에게 감동과 부끄러움에 대상이었다. 모태 신앙으로 자란 디모데에게, 바울이 가진 체험과 뿜어져 나오는 야성과 화산 같은 열정이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어디에서도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가말리아 문화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종교적인 명예도 모두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자랑하며 한 생애를 전제와 같이 남김없이 부어드리는 선교사 바울의 모습은 디모데에게 경이로움과 경탄 그 자체였다. 깊은 호수처럼 디모데의 열정과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 같은 바울의 영성이 만나 AD1세기 당시 지중해 전역이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이 두 사람의 신앙의 조화가 이루어 낸 선교 적인 쾌거였다. 우리가 가진 질문을 이것이다. 작은 아이 디모데를 위대한 선교사 바울의 동역자로 성장시킨 힘은 무엇인가? 본문이 우리에게 주신 대답은 이것이다. 성경을 사랑하고 복음의 헌신된 어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한 아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어른들 잘 만났기 때문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설교자인 체플엔더슨은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8가지 이유라는 것의 글을 보았다. 그가 내린 대답 가운데에 한 가지는 성경을 읽는 부모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디모데가 성경을 사랑하며 복음의 헌신된 사람은 된 것은 성경을 사랑한 어른들을 보며 자랐고, 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하는 어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315절을 보라. 우리의 기도의 제목인 줄 믿는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경 사랑을 주시고,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이길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을 읽을 때 저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경을 암송하는 중에 성령을 체험하게 되길 원한다. 우리 아이들이 진리와 비진리을 날카롭게 구별하게 되길 원하며 성경을 통해 주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우리 자녀들이 그 사랑을 깨달아 치밀어 오른 감격이 있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성경의 사랑으로 자란 아이 디모데는 성경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하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바울 선교 팀의 일원이 되었다. 이 뿌리 깊고 친절하며 거짓 없는 믿음이 찬란한 빛을 바란 곳은 선교 지였다. 후에 바울이 에베소 사역을 계승하였을 때 디모데는 목회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오직 성경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바울이 사랑한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이 사역은 디모데를 통해 계승되어졌다. 오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이 편지를 통하여서 우리세대가 누린 은혜와 승리와 영광을 다음세대에게 전달하기 원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세요.~~!!! 성경을 읽는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이 성경을 사랑하게 되고, 복음에 헌신하는 부모들을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각자의 세상에서 선교사로서 살아간다면 오래 황페 하였던 이 땅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실 줄로 믿는다. 사랑의 교회 주일하교는 주일학교 교장이신 담임 목사님의 비전과 지도에 따라 교육정책에서 선교정책으로 전환하여 다음세대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에게 바울의 열정을 품은 교사들이 보내주시며, 로이스와 유니게 심정을 가진 부모들을 일으키시며, 선교사의 절박함과 선교사의 야성으로 교육하길 기도한다. 사랑의 교회 주일 학교는 21세기의 선교같이 교육하고 양육하는 선교센터가 되고, 대학부와 청년부는 캠퍼스의 선교사로 보내며 청년들은 일터 선교사로 파송하는 선교의 전진기지가 되게 함께 기도하자. 우리 사랑의 교회는 사랑 ON에서 Sarang Together사역으로 나아가길 소원하고 있다. 지난 주일에 유투브 영상에서 호산나 찬양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세계의 젊은이들은 연결되어 있고, 세계 크리스천 공동체는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 세계적인 전염병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되어 이미 형성되었음을 본다.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는 세 겹 줄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음악과 문화로 연결된 세계 젊은 자들이나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 본다. 사랑 투게더를 사역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열방에 다음 세대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 받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백승준 목사님

코로나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지만 세계 많은 석학들과 메스컴에서는 이 팬더믹이 종식되면 이후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특별한 도약이 있을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번에 담임 목사님께서 V자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보배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반드시 V자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열방으로 섬길 수 있는 선교의 기회를 활짝 펼쳐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3,5,7비전이다. 이 비전을 가지고 달려왔다. 또한 제자훈련의 선교교회로서 전 세계 교회를 깨워 그리스도의 완전한 세우는 일을 계속 준비해 왔다. 더 큰 결정체로 사랑글러벌 아카데미의 사역이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전 세계를 섬기며 세계 복음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것이 본문에 담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세계 복음화를 위한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에 보면 디모데 외할머니 로이스, 그의 어머니 유니게 그리고 디모데로까지 흘러내려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전통, 바로 그 아름다운 신앙의 전 유산을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다. 이 디모데 가문의 흘러내려오는 믿음의 전통은 이들에게만 주신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축복은 디모데가 목회할 에베소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이후 오늘 세대들을 위한 축복의 산물이 되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우리에게 결국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을 우리만 누릴 게 아니라 바로 전 세계로 흘려보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랑의 교회에 주신 축복,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흘러내려오게 하신 이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은 무엇인지 마음에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많은 축복과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주셨다. 고난의 자본, 합심의 기도의 능력도 많지만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믿음의 자본인 제자훈련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워, 복음을 위해서 재생산하는 제자훈련의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해서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전 세계 가운데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선교지에 나가 있으면서 사랑의 교회가 얼마나 특별하고 교회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제자훈련이 얼마나 소중함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말한다. 영국 웨일즈에서 사역한 스티브 리비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해 주고자 한다. 컨퍼런스에 참여하신 분이다. 그분께서 우리 교회 칼 세미나에 참여하신 후 그 감동을 한마디로 말하고 있다. 바로 기독교회가 잃어버린 성경의 참된 교회 모습이 사랑의 교회라고 했다. 제자훈련과 다락방의 모습에서 살펴보았다고 했다. 유럽교회의 모습은 참담하다.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많은 교회가 훼파되었고, 개인주의라는 그 물결의 의해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개인주의란 내 것이니 아무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는 의미이듯이, 이 개인주의가 성경의 권위 위에서 교회를 지배했기에 교회는 유럽교회는 힘을 쓰지 못했다. 스티브 리비 목사님은 제자훈련이나 다락방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것을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다. 이 귀납법적인 응답이 나오고, 말씀을 통해서 충돌하여 회개가 나오고 그 삶이 느끼기 위한 결단이며 기도하고, 서로 돕는 공동체의 모습을 그 목사는 배워서 자신의 교회를 변화시킨다. 개인주의로 만연되었던 그 교회를 바꾸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을 오픈하고, 성경을 같이 읽고 읽는 데서 끝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삶으로 적용되게 하고 그 삶을 서로 돕고 함께 제자로 세워지기 위하여서 한 단계 한 단계 제자훈련을 도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자훈련은 세계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선교의 전략이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제자훈련의 국제화를 꿈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교지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할지 전력을 모은다. 가나 교회 선교사님을 통해서 제자훈련의 철학이 흘러가게 되었고, 미얀마에도 제자훈련이 펼쳐져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자훈련을 통해서 전 세계 교회와 선교지 현장을 깨울 수 있는 놀라운 신앙의 유산을 우리 가운데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을 사랑의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우셨다. 사단은 사랑의 교회를 얼마나 많은 공격을 가했는가?!!! 코로나사태 이후에 우리가운데 잘못된 신앙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제자훈련의 가장 본질을 붙잡아야 될 그런 책임이 있다. 제자훈련의 본질이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보라. 누가복음7:23이다. “또 우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제자훈련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 있다. 담임 목사님은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 망한다고 하셨다. 사랑 ON으로 우리 몸이 게을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점점 더 우리 몸을 게으르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싹트고 있는지 잘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제자훈련의 철학을 통하여서 전 세계를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 귀한 다음 세대들이 신앙의 계승을 통하여서 믿음의 선배들을 삶을 통해서 세계를 섬기는 선교사로 길러야 될 우리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깨어나야 한다.

 

후예배--- 담임 목사님.

특별한 시간이다. 사랑 ON 사역에서 Sarang All Together 집중해야 하는데 투게더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토비새를 통하여 신앙의 계승이 이어가야 한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은혜가 축적이 되어서 자연히 되어야 한다. 기도할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게 된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긴 속뜻을 알아야 한다. 그 안에 뭐가 있을까를 보아야 한다. 이 교회가 현대적이기에 교회의 전통이 들어가 있다.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다. 있는 그대로 구상되어있다. 전 세계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와 사랑목자가 양쪽에 있고 중앙에는 Jejus christ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나무가 있고 저 안에 여러 가지를 놓친 것이 너무 많다. 생명의 역사가 있다. Sun of 소더 God가 있다. Messia The truse, 이런 모든 내용들이 보통은 잘 모른다. 왜냐면 디자인하고 그 뜻을 담았다.스테인드 글라스도 불이 없음 아무것도 안 보인다. 빛이 비쳐져야 보이듯이 아무리 좋은 자료가 있고 많은 것들이 갖춰져도 성령의 조명, 말씀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이 투과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빛이 아니면 투과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빛을 투과하고 그렇게 해야 선명하게 본래의 용도가 된다. 주일학교 정책이 교육이 선교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신앙의 계승이 순도 높게 투명하게 더 환한 빛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요약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 안에서 생명의 약속대로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한다. 먼저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구하며 바울은 밤낮 간구하며 쉬지 않으며 디모데를 생각하는 것은 그의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청결한 양심의 섬김을 감사하고 기쁨 가운데 있기 위해 보기 원한다고 한다. 이것은 외조모와 그의 어머니의 거짓 없는 믿음이 디모데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예배(2020. 4. 29.)

제목: ''사람아, 아들아''

말씀: (마가복음 5:35-43)

설교자: 박유관 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인터미션 --- 물 댄 동산 수요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따뜻한 사랑으로 축복하시길 간절히 바란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안전하다고 매일 음식을 먹는다. 버스나 지하절이 사고 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에도 내가 있는 이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밤에 잠자리에서 잠을 잔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 모든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기초가 된다. 믿음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고, 믿음 없이 이 세상은 가능하지 않고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서지 못한다. 우리가 그런 현실을 부분적으로 범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모든 믿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감염되지 않는다는 믿음, 감염이 되어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없다. 그래서 누구도 편히 만나지 못하고 또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사람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그동안 우리가 겪으면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결국 믿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면 불편한 삶을 넘어서 고통이 우리들에게 찾아온다. 이 또한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의 사망자가 20만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약 59만 명이나 실직을 했다고 한다. 고용절벽을 만난 것이다. 이 모든 겪는 사람들과 가족은 큰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회당장야이로이다. 그의 외동딸이 죽기 직전이다. 부모라면 야이로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죽고 딸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길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회장장으로서 예수님께 나아가가 엎드리고 간절히 구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을 행하고자 원한다면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당시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해서 지탄을 받고 있었다. 야이로도 회당장이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과 동일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자신이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지위, 체면 사람들의 시선, 수근거림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나와야 했다. 야이로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3개의 동사가 있다. 와서 엎드려 구하여, 이 세 사를 살펴보겠다. 야이로는 바로 엎드려 오랜 시간 동안 간곡히 예수님께 구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주님께 매달리고 매달렸다. 특히 야이로가 이렇게 예수님께의 발 앞에 엎드린 행동은 나병환자나 거라사의 광인이나 이방 여인이 취했던 그런 행동과 동일한 것이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춘 겸손한 행동이었다. 그의 종교적 지위 사회적 신분을 고려한다면 정말 파격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지위가 높아도 권력이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그것보다 더 큰 세력 앞에 직면할 때 얼마나 그것이 무기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야이로는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대단한 사람일지 몰라도 죽음의 세력 앞에 장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왜 야이로가 체면과 사회적 신분과 종교적 입장을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 앞에 있는 딸을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질병과 가난과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는가요?? 물론 죄 때문이다. 인간의 질병과 죽음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내 고통이 있을 때 나와 하 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알고 하나님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당할 때 자신에 대해서 가장 많이 한다. 그런데 신앙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당할 때 나와 하나님을 생각한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하신다. 욥도 그렇다. 나의 삶의 고통의 답이 있을까요? 왜 고통이 나에게 있어야 되냐고 묻는 순간에 답은 없다. 욥은 하나님을 찾는다. (욥기 42:5) 욥은 피조물이 연약하고 무지한지 낮은지를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도 위대하신 지를 깨닫는다. 전 세계 코로나 확진 자가 300만명이 넘고 사망자도 20만명이 넘었다. 아프리카가 폭발할지 모른다고 한다. 국가마다 문을 걸어 잠갔고 사람마다 직장을 잃었다. 기업들은 부도의 위기에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생필품이 없어지고, 부족한 마스크를 가지고 싸운 자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교회를 겨냥한 사회적 책임이 부족하다는 비난과 분노,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 이 세계는 야이로의 딸처럼 죽음 직전에 놓인 것처럼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 전 지구적인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무

엇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인가?

 

첫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았기에 나왔기에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했던 것이다.

그에게 찾아온 고통을 한 순간에 내려놓게 했다. 문제는 생각할수록 고통이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나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리 바꾸기 시선 바꾸기라 여긴다. 서있는 위치가 다르면 모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인다. 도라산에 전에 효도관광으로 노인들을 모시고 간적이 있다. 도라산 젊은 봉사자들은 꽃을 보며 환호성을 쳤지만, 할아버지들은 북한 땅을 바라보셨고, 할머니들은 쑥을 캤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보는 지리가 현실을 바꾼다.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정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다는 뜻이다. 내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자아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리로 고통에서 자리로,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바꿈 시선 바꿈이 있을 때 나를 진정으로 도우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드려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없던 힘이 생겨나고 잃어버린 용기는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만성적인 고통에 산다.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이 시대는 인생의 문제가 고통에 단기적인 처방이 난무하다. 일본 동경대 강상균 교수는 고민하는 힘이라 한다. 이 시대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간다. 그러다 보니 본질을 바라보는 삶의 테도가 부족하다.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부족해진다. 야이로가 겪는 교통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이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이 영적인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야이로에게는 심장이 절박했겠는가!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간절한 기도가 드디어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이며, 응답의 신호탄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고난 중에 기도해야할 이유의 타종교와 차이가 있겠는가? 그들도 그들이 믿는 신에게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기도를 경건하게 한다. 우리가 타종교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그들도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는 야이로의 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 간곡히 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야이로는 전심으로 오래도록 기도했고 줄기차게 기도했던 것이며 한 번으로 끝나기 않게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왜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면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까지 줄기차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는데, 유독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면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은 세상의 북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세상이 주눅들고 위축들고 있을 때,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세상사람들이 걸어가는 사람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드소의 제자인 줄로 믿는다. 왜 우리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멈추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도 멈추게 된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당장 문제 해결이 아니라 줄기차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 고통의 때에 야이로처럼 멈춰선 예수님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힘, 더 힘차게 의지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셋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야이로의 집을 향하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사건이 있다.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는 여인으로 인하여 시간이 지체가 되었다. 한시가 급한 야이로가 얼마나 초조했겠는가? 그런데 야이로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오직 그녀가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의 딸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딸에게 손만 얹으시면 그냥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서 비보가 왔다. 네 믿음이 구원하였다는 순간에 예수님을 가로 챈다 그러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야이로는 간곡히 기도한다. 야이로는 선택을 하게 된다. 딸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한다. 혈루 증 여인과는 다른 두려움이 야이로에게 왔다. 신적 경이로움에서 오늘 것이다. 호명하니 하나님의 경외로움으로 그런 두려움이 온다.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이 벗어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야이로는 힘을 얻는다. 그의 집으로 간다. 도착하니 직업적으로 곡을 사람들이 죽었다고 리를 불면서 곡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소녀가 잔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 소녀에게 가셔서 말씀으로 일으키신다. 인류 역사 속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게 된다. 처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릴 때 요한처럼 터져 나왔던 야이로의 눈물은 기쁨과 감사가 되었고, 사랑하는 딸이 음식을 먹고 걸어 다니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믿게 된 것이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질병과 죽음의 고통 앞에 떨고 있는 인간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 지를 말씀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두려움과 불안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대신 올바로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두려움, 불안 염려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앙과 믿음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 모든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성경은 인간의 비참함이라고 말한다. 이 인간의 비참함을 극복할 유일 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뿐이다. 이 인간이 비참함을 극복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도 돌아오는 길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성령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온몸을 던져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단한 반석처럼 의지하며 반석처럼 튼튼하신 분이시기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사야 7:9절에 굳게라는 단어는 아만이다. 아멘과 같다. 너희는 하나님을 굳건히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멘이 없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전통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 한다는 것이며 아멘의 믿음이며 의지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절망과 두려움이 있다. 절망의 이 자리에서 무엇이 그렇게 일으킬 수 있는가? 절망의 그 자리에서 백신인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뿐이시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고통과 절망이 점령당하지 않도록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단단하고 굳건하게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안에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만이 사라지게 된다. 그 믿음으로 우리교회도 일어서고 한국교회가 일어서는 믿음으로 극복하기를 소망한다.

 

요약---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딸이 죽어 가고 있음을 알렸으나, 혈루증 앓던 여인과 대화하는 도중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야이로는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보면서 분명 자신의 딸의 목숨도 시급한 사항이라 안절부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비보를 들었으니, 아버지로서 그의 비통함은 매우 컸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회당장의 집에서 통곡하는 자들을 향해서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말씀으로 일으키시며, 신적 권능을 다시 한 번 보이신다. 이처럼 모든 일을 바라보고 행할 때는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자들은 자신의 이성적 한계에 갇혀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하며,.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며 가르치고 있다.

 

-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두려움의 안개가 사라지게 하시고 영 가족 모두가 아멘의 삶을 살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길 바라며. 믿음으로 일어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 은혜의 삶으로 인도하시길 간구하며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 2020. 4. 26.)
제목: ''순도(純度) 높은 사랑의 능력''
말씀: (요한복음 20:15~20)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코로나 극복 시리즈 10)
------------------------------------------------------------------
본당에서 이렇게 10주 만에 부활주일의 감사예배 드림이 감사하다. 부림절이 재현하는 것 같다. 영적 이 자리가 영적 부림절이 되길 바란다. 부림절에는 되어서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이 안식과 평안과 기쁨의 잔치가 되었음 한다.
*부림절이 무엇인가?
경제가 무너지면 가정이 흔들린다. 교육이 무너지면 다음 세대 미래가 무너진다. 정치가 무너지면 백성들이 마음이 힘들어진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의 현장 예배가 무너지면 신앙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01.시편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평생에 여호와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의 평생소원이 주의 성전에서 주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교회를 건축 후에 - 예수님 안에서 하루 교제가 세상의 천 날 교제보다 낫다.고 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일을 잘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의 영적인 토대와 영적인 힘을 주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교제가 세상에서 천 날 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e)이다. 우울증 등 불안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 이후에 새롭게 나온 단어가 ‘Untact’(언택트) 비접촉이란 단어가 일상화 되었다. 이제 한국 교회가 많이 회복이 되고는 있다. 세상이 희한한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비첩촉(Untact)이 아니라 ONtact(온택트)가 되어야 한다. 그 결과 사랑의 투게더가 되길 원한다.
I.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면 주님이 기쁨을 주신다.
1. 요한복음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그 결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말자 마리아의 눈물이 기쁨으로 변하였고, 막달라 마리아 두려움도 기쁨이 되었다. 심지어 베드로도와 요한 남자 제자들도 두려움에 사람에서 용기의 사람이 되었다. 제자들과 마리아만 경험한 것이 아닌 베드로는 훗날 오늘 우리가 이때를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전서를 아래 말씀에 놀라운 말씀을 한다.
2. 베드로전서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주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기쁨을 주신다. 오늘 이 기쁨이 한국 교회 전체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기쁨의 은혜를 받아 문제를 뛰어넘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한 순도 높은 사랑을 고백하면 마리아든지 제자들이든지 오늘 21세기에 살아가는 모든 주의 백성들 다 동일하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 이 기쁨이 있으니 두려움에 도망친 겁쟁이 베드로가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변했고, 의심의 찬 도마가 확신의 삶으로 바뀌었고, 비겁한 요한이 사랑의 사람으로 되었다.
3.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비례한다.
사랑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사랑이 부족하면 기쁨도 부족하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듣고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열받았다.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니까...유독 막달라 마리아 별 볼일 없었던 제자들은 그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서 외친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그렇다. 주님을 사랑하면 기쁨이 올 것이다. 사랑의 크기가 기쁨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처럼 사랑과 기쁨은 동면의 양면과 같다. 참사랑에는 참사랑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II.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면 영가족이 되게 하신다.
1. 요한복음20:17 “...너는 내(예수님)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2.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3.‘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보다 ‘아빠 아버지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가 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 용량이 결정된다.
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부활 전’에는 ‘내 양, 친구들’이라 하셨으나 ‘부활 이후’에는 ‘나의 형제들’이라고 재조정(Reset) 하셨다.
5. 베드로의 새로운 언어 습관
사도행전1:6 “형제들아”~
6. 바울 사도의 형제 신학
* 로마서 12:1 고전12:1, “형제들아”*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하느라”
7. 우리는 영가족이다. 영가족이란 ➀‘영적인 가족’ ➁‘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는 가족’ ➂‘영원히 함께하는 가족’ ➃‘영원한 유업을 아버지로부터 함께 받아 누릴 가족’ ➄’마음이 젊은 영(Young)가족‘을 말한다.
이 놀라운 차원은 구약에서도 히브리 문학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 십자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 영광스런 순간이 의존과 순종을 통하여 한이 은혜의 평온으로 가는 것이다. 내가 실력이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믿음의 용량이 커지며, 우리 아빠 아버지가 얼마나 능력이 계신가, 놀라우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장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다가 오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깨닫는 순간 역사가 시작된다. 바울도 자기가 최고인줄 알았다.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후 철저하게 세계를 품게 했다.
III.지금, 주님은 누구를 찾으시는가?
1. 능력 있는 자가 아니라 순도 높은 사랑을 하는 자를 찾으신다.
2. 요한복음 21:15-17... “1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16, 또 두 번째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17,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4. 하나님을 순도 높게 우선순위로 사랑해야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5. 인생의 한 번이라도 순도 높은 100% 사랑을 주님께 드린 적이 있는가?
♧느낀 점
오늘 예배에서 담임 목사님은 예배를 많이 함께 드리니, 너무 좋은 마음이심을 보이시고 즐거워하셨다. 우리도 정상 예배를 드리니 너무 좋다. 모든 지체가 즐거우면 다 즐겁듯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서 좋고, 예배에서 은혜를 누리는 일이 중요함을 깨닫는 본당 예배였고, 헌금 봉사로 기쁨이 넘치는 예배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영가족으로서 영광과 고난을 함께하고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 감사로 넘치는 시간이었다. 은혜로운 예배가 항상 이렇게 드려지길 소망하고, 다시는 코로나 이런 바이러스가 없으면 좋겠다. 정말 서로가 주님의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는 예배가 되고 모두가 위로와 치료가 되길 기도하면서 매일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자 되고, 순도 높은 사랑의 능력을 주시길 기도한다. 우리 훈련에 이렇게 봉사도 함께 하면서 주님의 능력을 바라면서 주시는 은혜에 늘 순종하기를 결심해 본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