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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2020. 66
)

제목: ''마른 땅에 굳게 서라''
말씀: (여호수아 3:14~17)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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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적 통일 쥬빌리티 기도회. 800차 기도회를 주신 하나님께 다함없는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가 다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셔서 이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심을 확신한다. 800차가 왜 소증한가면 1000회에 할 때에 반드시 평양에서 특새와 예배하도록 환경을 주시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믿음의 용량을 넓혔으면 좋겠다. 기도의 용량을 넓혀서 모든 순서 하나하나를 우리가 마음을 모아 기도하기를 바란다. 마음의 기도를 가지고 하면 천회가 되기 전에 평양에서 특새 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한다. 포에버 어른 들 찬양이 너무 좋다. 10년은 젊어지셨을 것이다. 현충일인 오늘 큰 의미가 있다. 나라가 바로 가느냐는 좌우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과 바로서서 좌우가 아니며 야당 여당도 아니고 예배당이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좌우가 아니다. 오늘 이 시간으로 인해 복음 역사가 새롭게 지필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길 바란다. 800차에 여기 화분을 가져왔다. 평양에서 이관우 목사님(전사무총장님 목사님)이 통일의 재물로 쓰셔서 먼저 가셨는데, 사모님이 이렇게 작은 나무를 심어서 가져다 주셨다. 누군가가 물을 주고, 애를 써서 오늘까지 온 것이다. 800차라는 것인데, 비가 오나 눈이오나 상록수 신앙이 쉬운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 마음으로 흙으로 가꾸고 나무를 가꾸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설교가 오늘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설교제목과 본문을 미리 주었다.
쥬빌리티 기도회에서 6개월 동안 여호수아 프로젝트라고 지금 17절에 보면,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이것이 기도의 제목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사역을 해오면서 결국은 사역은 믿음의 문제이기에 신앙도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 문제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이다. 본문에 앞서
여호수아서 2:24절에,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굉장한 말씀이다.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다고 한다.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주셨다 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찌르시며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제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밤새워서 열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모두가 다 우리는 저 가나안 사람들에 비해서 메뚜기 같다고 한다. 소위 잠재적 불신앙이 전염병이 확 확산되어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밤새도록 울고 안 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그 믿음 갖고는 안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3:19절을 보면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여호수아 갈렙 외에 이스라엘의 모든 민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딱하나이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교회, 가정, 믿음 공동체,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늘 믿음을 테스트 한다. 현실은 이런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5살에 죽어가지고, 80세에 묻힌다’ 25살에 죽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 설렘과 꿈과, 믿음과, 소망과, 비전과 하나님 나라 환상과, 기대와, 가슴 뛰는 것이 다 죽어버렸다. 그때 다 죽고 영적으로 하나님나라의 꿈으로 봐서 25살에 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육체는 70-80까지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이 너무 많다. 지난주에 노량진에 LABLY 청년센터를 마련했다. 거기 보니 12만명의 공시 생들이 거기서 공부하고 방황한다. 노량진에 청년들이 힘들다. 3퍼센트만 합격하고, 5천여 명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무엇이겠는가? 영적으로 다 죽어가고 한국으로 봐서 너무나 큰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적인 쉼터 라블리로 영적인 회복이 되도록 라플리티를 마련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신다. 그 잠재적 불신앙과, 메뚜기 신앙을 불식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럼 어떻게 불식시키시는가?
믿음을 테스트 하신다.
1.먼저 기다리게 하신다. 오늘 본문 12절 앞에 보면 요단강을 백성들이 앞에서 3일 동안을 기다리게 하신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으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신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한국교회에도 종교 지도 자들끼로 모여서 다 그렇지만 초파일을 연기한다고 하였지만 우리는 죽어도 부활절 지킨다. 했다. 애를 썼지만... 이태원으로 인해 지금 난리로 확진자 0가 있다가 또 생기니 일들이 생겨 기다리게 하신다. 평양에서 특새 할 것을 준비를 이미 해오고 있고, 특새할 장소와 심지어 전세 비행기까지 마련해 두었다. 갑자기 촛불혁명 등이 일어났고, 모든 것을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영적의 비전의 수준이 되도록, 테스트 하시고, 기다리게 하신다. 그게 요단을 건너기 위하여 히브리어로 소위 아바르(Abar)타임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요단의 물이 멈추고 마른 땅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요단강 물이 깊지가 않다. 크지도 않다. 당시 이 시기에 깊이 30미터가 넘었는데, 그걸 건너야 했다. 건너기 위해서 건너다라는 말이 20번 이상 나온다. Abar는 경계선을 넘는다는 뜻이다. 강과 산을 넘는 물리적 경계선도 있고, 국경을 넘거나 정치적 경계선도 있다. 물리적이든 정치적이든 다 건너는 것이다. 기금 남북문제 경계선을 우리는 넘어야 한다. 좌우의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 코로나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아바르 타임이 필요하다. 인간이 생각해서는 불가능한데 믿음으로 건너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인간, 공동체는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바르 타임인 것이다. 거저 되는 것이 없다. 가치 있는 것 치고 아바르 타임이 있는 것이다. 오늘 여호수아 3:15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강물이었고, 그 장정과 여인 아이들이 20만 명이 강물이 세게 흐르는데 여리고 성과 철병거와 거인들까지 앞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압도하는 두려움이 있고 3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감당했겠는가?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다시 돌아갈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통일에 있어서 우리에게도 그 문제도 아바르 타임을 주시고 계신다. 이 아바르 타임에 잘못 방향을 정하지 말고 이때에 이 시간을 통해 올바른 기도에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아바르 타임에 도망갈 필요도 없고, 싫어할 이유도, 무시할 이유도, 덮어버리고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요단강 법칙-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믿음 없는 시대에 하나님은 아바르타임을 주시는데 어떻게 하시는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홍해의 법칙이 있듯이 요단강 법칙이 있다.
1. 언약궤를 따르라.
백성에게 이르데 여호수아 3:3절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언약궤 뒤를 따르라는 것이다. 200만의 사람들이 따라간 초대형 GPS이다. 그 앞에 제사장들이 가는데 다 따라간다. 1킬로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 그냥 지나가도 되는 것과, 꼭 지켜야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선명하게 구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과 깨달음을 주셨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선명하게 지켜야 할 것은?
1).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 - 오늘도 기도제목과 본문을 보았고, 말씀 자체가 능력이다. “Let the Bible Speak“이다. 말씀 자체가 말하게 하라. 그것을 믿고 기도의 제목을 삼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의 절대권위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주님 앞에서
2). 예수님의 유일성.
3). 성령님의 주권적 인도.
4). 거룩한 공교회의 중요성.
5). 세계선교의 절박성.
6). 평신도 사역의 소중성.
이 여섯 가지는 우리교회가 지켜야 할 실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궤에 뭔가? 언약궤 안에는 두 돌비,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다. 주님을 집중하고 마음을 모아라. 죽음의 지팡이가 생명의 싹이 나겠나? 설령의 기름 부어서 역사가 아님 안 된다. 우리가 믿어야 할 약속의 언약을 그것을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특별히 축복받았다. 기본적으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교회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약의 말씀으로 절대적 권위를 믿어야 한다. 이 은혜가 계속 지속 될 것이다.
요단강 법칙-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2. 성결하게 하라.
여호수아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우리에게 하나님은 일보다 성결을 중요시 하신다. 거룩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성결해야 한다. 성결한 가정, 민족, 공동체가 성결해야 한다. 무엇을 성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바래야 한다.


3. 지도자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야 한다.
여호수아 3:11-12,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고 그리고 지도자들이 먼저 앞장서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앞장섰다. 언약궤 성결, 지도자가 앞장서라. 요단물이 말랐어도 같이 건너가게 되지만 요단 물이 마르지 않을 때에 물속에다 지도자들은 집어넣으라는 것을 말씀 하고 계신다. 자기희생이다. 이런 마음으로 사랑의 교회 토비새 나온 성도들은 코로나 사태에 모이기가 어려운 가운데도 모여서 기도하고,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모여서 기도할 때에 800차 소원을 이루어야 한다. 절대적 언약의 말씀을 따르기를 다짐하여 주님을 따르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영적인 아바르 타임으로 믿음의 용량을 넓혀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기를 바란다. 영적인 앞장 선자들은 더욱 주님이 인도하시라 본다. 믿음의 용량, 기도의 용량을 넓히자.
요약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복은 자녀들이 번성하고 그 중에서 왕들이 나올 것을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큰 민족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430년간 애굽에 이스라엘이 살게 하셨고 마침내 큰 민족이 되게 하셨다. 430년 간의 종살이는 고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기간이였으며 그의 약속을 이루시는 기간 이였다. 우리의 살아온 날 들이 힘들었어도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하심이며 아바르 타임이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곧 들어 갈 줄 알았는데, 40년이 걸려서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앞에 도착한다. 이제 저 강 요단강만 건너가면 되었다. 멀리 강 건너 어렴풋이 여리고 성읍이 보였다. 얼마나 숙망했던 약속의 땅이었겠는가. 낮에는 불볕더위로 살이 타고 밤에는 추위로 벌벌 떨던 광야, 불 뱀과 전갈이 득실거리던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가. 날마다 죽어 넘어지는 동료들의 시체 썩는 냄새를 맡으며 오로지 저기 강 건너 꿈의 땅 하나만 바라고 살아온 인고의 세월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요단강의 수위는 한껏 높아 있었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약궤를 메고 간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는 때에 반드시 그 약속을 성취하시니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환경을 보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가 잘 모여서 이때 일수록 더욱 예배하고 모여 기도하면 그 아바르 타임에 크고 비밀한 능력을 말씀 가운데 주신다. 우리는 더욱 주님 앞에 모여서 기도하고 주님 말씀을 받아서 앞장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요단강 건너는 법칙-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1. 언약궤를 따르라.
2. 성결하게 하라.
3. 지도자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야 한다.
말씀 안에서 꼭 지켜서 우리는 순간마다 모여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그 마른 땅에 굳게 서서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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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 6. 3)
제목: ''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 (디모디후서 2: 9~10)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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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코로나로 인한 어둠이 지나가고 있다, 어둠의 때, 모든 것을 종식시켜 주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리라 믿는다. 많은 문제를 직면하며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선교부를 일하면서 그렇고 해외에 살고 있는 안전문제가 마음에 걸린다. 선교지가 의료체계나 힘든 열약한 한 환경의 건강이 염려가 된다. 코로나로 인해서 단기선교도 우리교회에도 취소되었다. 우리 성도들의 선교로 소통이 되었었는데 그런 일들로 인해서 취소가 되어서 좀 아쉽고 한동안 갈 수도 없게 되어 선교의 자원을 어떻게 하나님은 인도하실지 그것에 대한 숙제와 고민도 떠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더 마음을 누르는 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연일 메스컴에 대한 잘못된 뉴스들이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되는 그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코로나 이후의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도 있다. 그러나 오늘 디모데후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말씀해 주셨고 깨닫게 해주셨다.



본문에
-9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악을 행하는 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바울이 유언과도 같이 남긴 말씀이다. 이 말씀을 남기고 4장에 부음바 되어서 그의 떠나는 그 시간 직감한다.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으로 인하여 마치 악을 행한 범죄자처럼 감옥에 갇히기까지 고난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사슬에도 묶이지 않았고, 매이지 않았고, 갇히지 않았다. 여전히 복음의 말씀은 널리널리 전파되고 있었던 것이다. 괴로운 상황에서 보게 된다. 고린도후서 1123-27절까지 보면 그것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바울은 고생의 순간들을 마음속에 새겨놓았던 것 같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고 그의 복음이 평생이었지만 연일 계속되는 고난 속에서 신음했다. 그러나 분명히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몸은 엉망이었지만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귀신들린 여인을 치유해 주는 모습이 있다. 그 치유에 기적이 일어나자마다 바울과 신라가 감옥에 갇힌다. 옷이 찢겨지고 매를 맞지만 그들은 그래서 찬양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때 지진을 일으키셨고, 하나님께 백성들이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이 메시지가 빌립보 감옥에서 선포되었고,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었다. 또한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가택 연금되어 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그 기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 결과 가이사의 집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고 로마 그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에 하나님은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현실은 어둡고 좌절되고 낙망하게 만들고, 우리를 어둠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 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흥왕할 것이며 승리하고 결국에는 모든 민족과 백성 언어 모든 나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바로 그날이 우리 가운데 찾아 올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능력이 있고 살아있는 것이기에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게 할 수 없다. 토비새에서 스펄전 목사님을 인용하신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자와 같다~~” 이 말씀을 잘 몰랐다가 이 코로나 사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얼마나 놀라운지 묵상해 본다. 우리 어떻게 해야 전도를 잘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팬더믹 시기를 겪으면서 분명히 깨닫는 것이 있다. 전도의 중요한 키가 아니라 우리 어떤 것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복음은 어떤 것보다 가장 능력 있는 생명의 말씀임을 믿는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놀랍고 너무나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의 기적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224, 1920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은 힘이 있어 흥하여 세력을 얻느니라~ 등 사도행전 전체 역사를 보면 사단이 교회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복음 사역자들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흥왕하여 교회가 성장하고 힘을 얻어서 교회의 악한 것들을 이겨서 승리하는 기록이 사도행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에 어떤 날샌 검보다 날카로워서 이 세상 모든 악한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검이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우리 손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변화를 시킬지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서 이 세상을 변화 시킬 수밖에 없는가? -3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들었던 말씀이다. 한 번 이 시간을 통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진리란 사전적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 그것이 바로 진리라 여긴다. 진리란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거창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조건이 따라온다. 궁극적인 질문이란 무엇인가! 평소 우리가 먹고 살기 바쁘다보면 그런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잘 내놓지 않지만 우리 인생에서 이 질문들이 자주 떠올리는 순간들이 자주 온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세상을 떠난다든지 아니면 현실과 같이 인간이 큰 재난이나 재앙들이 찾아오는 그 시간일 때, 사람들은 근원적인 질문들을 마음속에 떠올리기도 한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죽은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며, 이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과연 진짜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러한 구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은 종교와 철학을 의지 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이런 것들보다는 과학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과학은 대단한 힘을 갖게 되지만 명쾌한 해답을 주기에 그렇다. 본인(목사님)은 화학을 전공했다. 어린 시절 독극물을 실험하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염산과 또 다른 양잿물인 수산화나트륨 독극물과 독극물을 섞으면 강력한 독극물이 될 것 같은데 그 둘은 소금물이 된다. 그러니까 NaCLNaOH이 섞으면 더 강력한 독극물이 아닌 소금물이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한 진리에 탄복했다. 그래서 그런 명쾌한 단순한 진리의 해답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과학을 통해서 질문들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들에 대한 과학의 논리를 살피면 그 초라한 논리를 보고 우리는 과연 우리가 신뢰하며 믿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우리가 많은 것들 중에 설명할 수 없는 진화론이 있다. 진화론이 인류를 어떤 기초를 설명할 때 더욱 그렇다. 태초에 어떤 물질이 있었다고 설명하는데 생명의 기원은 그 물질이 물과 암모니아 매탄 이산화탄소가 있었는데 어느 날 번개가 쳤을 때 이 물질들이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서 단백질로 변화되어 단백질이 우연히 좀 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바꾸기 시작하여 그 우연의 우연을 거듭하여 생명체로 발전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진리인 것처럼 배웠지만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정말 0이다. 어떤 학자는 타이핑을 칠 수 있는 원숭이가 삼국지 같은 소설을 써 낼 수 있을까? 이것은 자판의 우연의 일치로 써낼 그런 확률보다 더한 확률을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의지 한다면 이 세상을 의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다. 창세기 1:1절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자기의 선하신 뜻을 따라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사람이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아 이 땅을 하나님과 함께 다스릴 그 영광을 같이 누릴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기에 그렇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그렇게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하여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것이 망가지게 되었다. 이 세상의 유일한 소망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한 가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라는 그 단순한 진리가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되어있어 우리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다시 한 번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하나님과 영원토록 할 수 있는 바로 그 삶,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리가 왜 중요한가? 바로 역병이 돌던 시기 팬더믹이 있던 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질문에 해답에 되어주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은 그 시대에도 그 역병이 전 세계적이지는 아니라도 로마시대를 장악했던 두 번의 역병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역병을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가 엄청난 성장부흥이 있었다는 분석이 있다. 신학자 로드니 스타크란 사람이 쓴 책인데, 1차역병은 165년 마르크 아우렐리우스가 통치시에 천연두가 돌았다고 한다. 그 천연두로 인해 15년간 로마제국에 인구가 3분의 일이 줄어드는 죽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본인도 비엔나에서 이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체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251년 파괴력을 가직 역병이 다시 로마에 휩쓸게 되는데 이번에는 홍역으로 여겨진다. 그 홍역으로 인해서 수백만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역병의 시기, 우리와 같이 이 팬더믹의 시기에 하나님의 복음은 더욱더 흥하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이 책은 기록하고 있다. 로드니 스타크는 죽음에 한 복판에서 죽어가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하면서 근본적인 질문으로 사람들에게 있게 되었다. 러나 유일하게 기독교 인 들만이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들로 인해서 수많은 죄가 들어오며 수많은 악과 재앙이 찾아오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갈 때에 그 모든 재앙에서 벗어나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그 십자가의 복음을 힘 있게 전파했던 것이다.
백년이 지나지 않아서 처음 기독교인들이 첫 역병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인들이 수는 사만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백년이 지난 이후에 백육십 만 명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라는 그 확고한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을 다부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베드로전서 3:15절을 보면 우리와 같은 이러한 시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며 이 세상을 치유할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진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책임이 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절대로 매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2.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가 있다면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얻기 위해서이다. 이 성경은 바로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을 얻게 되는 책이라고 성경 스스로가 증거하고 있다. 요한복음 5:39절을 보면 성경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신약에만 아니라 구약에 어디라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인도 해준다. 창세기 316,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한 그 어린 양이 우리를 위해 구원할 소망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어린양 되신 출애굽기를 보면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받을 형벌을 이제는 벗어나게 만드는 놀라운 구원의 길을 보여주고 계신다. 구약 5경에 놀라운 제사에 대해서 보여주신다. 그 제사를 통해서 참된 제물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요, 우리의 유일한 제사상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하신다. 여호수아를 통해서 군대 장관으로 오셔서 친히 정복의 싸움에 최선봉에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군대장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끔 인도하시며, 다윗의 언약과 다윗의 전체를 통해서 참된 메시아 되심을 우리 가운데 소개하고 있다. 구약에서 신약 전체에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을 전파하고 있다. 우리는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 예수님으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영생을 먹고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만이 이 세상 가운데 담대히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죄악과 죽음과 싸워 이기는 유일한 사람으로 세워질 수 있음을 믿는다. 고전 1555-58절을 보면 바로 이와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했던 영웅스런 선배들의 모습이 또한 로마시대 바로 역병의 시기에 기록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 벌벌 떨 그 때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사명과 소명을 꿈꾸며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담대하게 섬겼던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승리했던 것을 본다. 우리 또한 하님께서 주신 생명이 있기에 우리에게 시시각각 찾아오는 모든 두려움을 떨쳐내는 백성이라 믿는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형벌은 없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율법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움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한 모습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떳떳한 모습으로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버리는 우리가 되길 소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절대로 매일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3.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요 우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만이 아니라 능력 그 자체이다. 어떠한 능력인가? 디모데후서 316-17절에 기록되어 있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바로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또 이 말씀을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온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연약하지만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이 되어 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면 우리는 조금씩 변화되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없었지만 매일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차근차근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초대교회 로마시대를 변화시켰다. 이 역병의 시기에 안타까운 기록이 있다. 치사율(致死率)25퍼센트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집단에서의 연구를 보면 10퍼센트였다고 한다. 그 당시 연구결과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이 교회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방인들은 서로 자기만 살기 위해서 힘쓰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하나님 말씀을 몸소 행했기에 실천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이다. 함께 병에 걸려서 죽게도 되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사랑 때문에 세상과 다른 놀라운 결과의 모습은 이방인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병이 끝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그 능력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생명이고 능력이다.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방해할 수 없고 매일 수 없다. 이 세상은 우리를 매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깨달아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승리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공동체는 승리 하 수 밖에 없다.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 주었듯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그 말씀은 승리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바로 말씀에 매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채울 것은 바로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에 나아가서 이 말씀으로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된다면 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 세상 미디어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라. 그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도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길 주 이름으로 부탁한다.




요약
바울의 위로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핍박하는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는 막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인간의 힘에 의해서도 결코 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디모데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 함으로 매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바울은 왜 즐거이 고난을 당하였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이 구원 받은 후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일하고 고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도구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으로서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길 바라며, 교회사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인지, 이 세상 어떤 것도 하나님 말씀이 매일 수 없고, 하나님 말씀이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까이 하여 우리의 삶 또한 승리하는 삶이 되고, 말씀이 다시 흥왕하여 한국교회가 힘을 얻고, 전 세계를 향해 선교의 열정이 타오르는 그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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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0. 5. 31)
제목: ''성령 충만한 그릇''(Spirit -Filled Vessel of Clay)
말씀: 고전 (6:19~20, 고후 4:7)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한 사람의 기도와 한 교회의 사명을 붙잡아 주시고 한 지역의 부흥을 통하여 시대를 변화시킨다. 평안북도 선천에 선교 보고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자들이 기도처 예배에 믿음과 부흥이 무수히 일어났다고 한다. 한국 교회가 역사와 은혜를 가지 민족이니 하나님께서 세계 수많은 코로나 사태가 있지만 한국 교회는 복음의 능력과 기름 부음으로 회복시키실 것을 확신한다.


성령강림 주일
이 분들이 주님 앞에서 변화 받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I.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부패한 속에 고린도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어려운 사태에도 성령강림주일을 지키게 되어 감사이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특별한 사명의 실체가 되면 우리의 삶의 차원이 놀랍게 달라진다. 우리는 모든 육신의 제한을 받고 살고 있다. 제한이 없는 자가 없다. 조급함, 두려움, 육신의 고통, 정욕, 우리가 늘 두려움의 전, 아픔의 전, 근심과 고통의전이 되기도 하며 배고픔으로 성격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지며 배가 너무 불러도 불쾌하기도 한다. 그리고 잠을 못자면 힘들기도 한다. 우리의 부족하고 연약한 몸을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이 말씀이 신비한 것이다. 성령의 전인 것을 어떻게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잘 살펴보자.
우리 몸을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의 전이다라고 하신다.
성령의 전이 되게 하기 위해서 성삼위 하나님께서(성부와 성자 성령) 총체적으로 임해 주셨다.
우리의 미래는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피 값으로 사주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것이 과거의 몸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것이며, 현재는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성령의 전으로서 현재 임재가 있게 하시고, 미래는 성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가지고 영광을 올려 드리라는 것이다.
과거- 그리스도 예수의 피 값으로 산 것,
현재- 성령의 임재를 통한 성령의 전,
미래- 성부하나님께 우리 몸을 가지고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
그래서 우리는 聖靈殿이다. 전이라는 것은 성전이다.
예루살렘 성전과 같고, 광야의 성막과 같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의 예배하며 하나님께 제자를 올려 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기둥이 빽빽하게 임한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전으로서 역할이 제대로 감당된다면 육신의 한계도 있고, 우리의 분노나 조급함을 감당 못하고 분노가 전도되기도 하고 우리의 마음이 상할 때도 있지만, 이 성삼위 하나님께서 총동원되셔야 할 만큼 은혜를 주시는 몸이라면 제대로 되면 오늘 우리 시대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영광의 구름 기둥으로서, 우리에게 예고편으로 확인될 수 있다. 동시에 광야 길의 성막이 어떠했는가? 물도 없고, 어둡고 환경자체가 척박하지만 그런데 유일한 소망이 여기서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광야의 성막이다. 모세의 성막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리고 했을 때에, 그 성막에 쉐키나의 영광이 구름 기둥으로 뻭빽하게 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은혜로 신약시대의 우리에게 모두를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샀지만, 너희 몸을 성령의 전인 줄 믿으라고 하신다. 성막의 영광, 쉐키나의 영광, 예루살렘의 찬란한 영광을 오늘 이 시간 예고편으로 맛보는 성령강림 주일이 되길 원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눈이 뜨이길 원한다. 정말 중요하다. 특별한 것이다.


우리의 몸에 성령이 거하시는 영광스런 주의 인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길 바란다. 워킹 템플, 무버블 템플(Working Temple, Movable Temple)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의 성령의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자유함을 가지고 주의 쉐키나의 영광이 임하기를 찬양하고 싶다. 코로나로 방역 지침을 우리는 기도를 지속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움직이는 주의 전이되기를 간구한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인 줄로 확신한다. 그런 마음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주의 임재가 있기를 원한다. 믿음의 용량이 커져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면


디엘(D.L) 무디는 이 세상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 온전히 그의 몸이 의탁된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미국의 대 부흥 신학자이다. 뉴욕 거리를 걸으면서 묵상하는데 충격이 왔다. 그래서 본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기도를 했더니 그때에 성령님께서 무디를 사로잡으시고, 장악하시고, 성령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고 놀라운 전 세계의 대각성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니...우리는


II. 그리스도의 몸은 질그릇이다.
고후 4:7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몸 질그릇이다. 성령의 전일 뿐 아니라 우리 몸을 질그릇에 보배로 담고 있는 것이니, 신앙눈으로 볼 때, 신앙으로 사람을 볼 때에 우리가 그릇인 것이다. 성경에 토기장이가 사람을 빚을 때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으로 하나님이 쓰실 그릇으로 말한다. 특별히 바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시려고 했을 때도 그랬다. 하나님의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도행전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어떤 사람은 귀히 쓰고, 어떤 사람은 천히 쓰고,,,,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보배가 질그릇을 결정한다. 바울은 예수님은 보배여서 어떤 자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보배의 그릇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연약한 그릇이라고도 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릇이 되어 질그릇이 되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질그릇도 두 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귀한 것- 중요한 것과 보배로운 것을 담는다. 또 하나는 천한 것- 인간의 배설물로도 쓰인다. 질그릇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보배가 질그릇에 담겨있으니 질그릇이 보배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보내가 질그릇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늘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나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어떤 무식쟁이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순간, 우리는 보배를 담은 그릇이다. In Christ!!!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질그릇이다. 그러므로 말씀 중에
골로새서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질그릇은 그래서 기가 막힌 그릇이 된 것이다.


질그릇은 질그릇인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그 당시 구리그릇도 고린도 당시에 동 그릇과 있었다. 사도 바울은 왜 값없는 것을 사용했는가? 값어치 없고, 화려하지 않는 질그릇을 사용하는가? 그 이유는 질그릇은 세상의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르다. 고린도 당시에는 동 그릇이 더 가치가 있었지만, 세상 가치관은 화려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은 따르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이 질그릇을 심는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 디지털 세상 가운데에서도 가치관이 달라진다. 기독교의 가치관은 내적으로 예수님을 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외적으로는 질그릇이지만, 이 그릇이 예수님을 담으면 최고의 그릇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에 기죽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의 학벌, 지위나 이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백악관의 주인보다 하나님의 성전의 문지기가 더 낫다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성령 강림 주일에 예배하는 자가 더 가치가 있다. 오늘도 수고하는 자가 많다 그러한 사람들이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주차, 교육 안내 봉사 등 가치가 있는 삶이다. 코로나 재 확산 때문에 조심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사모하기에 이렇게 예배를 드린다. 주님의 초청장이기에 우리는 그 가치를 믿고 헌신한다. 질그릇의 가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릇의 용량을 키워서 유기적인 믿음으로 영적인 용량을 넓혀서 살기를 소망한다. 찬양 길 만드시는 주님은 상한 심령을 치유하시기에 우리의 찬양도 중요하다. 오늘 은혜의 찬양은 길 만드시는 주이다’~ 찬양도 영적인 용량이 넓어져서 질그릇에 보배로 담아지길 바란다.


III. 우리의 질그릇의 용량을 넓히고 깨끗하게 하려면
디모데후서'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말씀의 용량을 넓혀야 한다.
-1) 말씀으로 깨꿋하게 해야 한다. 주일에 아이들과 암송하고 예배에 나와서 아이들과 기도하라. 말씀으로 믿음의 용량의 넓혀달라고 할 때 일해 주신다.
-2)기도하여 깨끗이 씻어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지키신다.
에베소서5:26,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말씀의 용량을 넓힌다. 기도의 용량, 찬양의 용량을 넓히기를 바란다. 믿음과 기도의 용량이 커져서 우리의 그릇을 깨끗하게 되길 기도하라. 마틴 루터 말씀 용량을 넖히니 하나님이 지키셨다.
바울은 사도행 16:25~26,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래서 말씀과 기도의 용량을 넓혀서 살라.
-만입이 그 입다 가지고~^ 찰스웨슬리 영국을 변화 시킨다 그 형제가 그렇다.


요약.
성도의 몸은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성도들에게 주어진 은혜는 위대한 변화를 낳는다. 그 변화의 기초는 성령께서 우리들의 심령에 믿음으로 내주하시는 것이다. 죄에 종노릇하던 인생들이 이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 것이다. 질그릇 속의 보배란 인간의 연약함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인간 자체는 약하지만 성도 각자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귀한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세상에 대하여 강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몸은 성전이니 거룩한 가운데 근심 걱정 연약함 다 주님 안에서 맡기고 성령님의 임재와 능력을 완전하게 덮어 주심을 믿고 모든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성령 충만한 그릇으로 평생을 살게 되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만하게 지배해 주시길 간구하여 말씀의 용량을 넓혀서 모든 질병을 치유 받고 모든 일들을 해결 받기를 원하니 바울이 질그릇을 귀히 여기는 것처럼 보배로우신 주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성령 충만 받고 주님 안에서 귀히 쓰임 받은 질그릇이 되어야 한다.


느낀 점.

내가 매주 새벽부터 주일을 준비를 한 것은 늘 주일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주님 전에서 예배드리는 감사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며, 예배 헌금위원으로 일찍 미리가 가서 기도하고 준비하면 왠지 뭔가 은혜를 더하는 느낌이 든다. 기도를 응답하시는 느낌이 들기에 아무도 도착하지 않는 시간에 좀 일찍에 가서 기도를 한다. 본당에서의 예배를 내가 (타자속도가)속기를 좀 잘하다 보니 다 손으로 따다닥 내용을 치면서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 질그릇이 보배가 되기 위해서는 준비로 잘 해야 하고 훈련도 잘 받아야 하고 봉사도 성실히 해야만이 하나님은 성령 충만을 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면서 주님과 교제를 사모하는 주일이 되기를 무척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목사님은 오늘 성령 충만이신지 헌금을 빼고 예배를 마치시려 해서 우리가 깜짝 놀랐지만 센스가 극치셔서 금방 알아 차리셔서 다행히 순서가 순적하게 되었다. 성령 충만 받아 이렇게 귀히 쓰임 받는 질그릇도 되고 싶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진정한 질그릇이 되고 싶다. 세상 가치와 비견하는 아름다운 질그릇으로 변화시켜 주실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날마다 성령 충만한 그릇이 되기 위해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겠다.

☆ 길 만드시는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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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2020. 5. 30)
제목: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2:13)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믿음 계승을 위한 가장 중요한 말씀의 절대적인 진리를 계승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정말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를 바란다.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한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진리로 이 역사는 히스토리가 아니라 Working(일하시는 것이다). 역사는 그냥 이 세상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제적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볼 때마다 더 많은 간절함이 있고, 사모함이 있고, 또한 귀한 교회라 하는 인식이 박혀있었다.. 목회자의 아들로서 신앙의 프레임, 어떤 조직 신학적인 복음화가 머리 속에 인식되어 있었다. 부친은 장로교 12신조가 있는데 주일마다 매주 하나씩 하셨다. 조상은 해 오셨기에 한국교회의 강점을 살려나가는 것이 되었고, 나름 익숙해져서 내가 고백되어지고 일방적으로 교회에서 하는 것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확장되어가는 것이다. 내 것으로 내 삶으로 체화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활연구인 귀납법적 성경연구가 있는데, 그것이 전에 선교단체에서 pbs가 있었다(Personal Bible Style). 개인 성경연구를 하는데 개인 성경연구를 처음으로 공부한 것이 데살로니가전서이다. 6권까지가 있다. 21세 때에 은혜를 매장마다 은혜가 되었다.
토비새의 나오는 성도들은 모든 믿는 사람의 본이 되길 바란다. 우리가 주를 본받는 자가 되고 모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나도 저렇게 본이 되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가 어떻게 세워지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요즘 확진 자가 늘어나서 방역지침을 잘 지키기를 바란다. 주일을 예배하는 기쁨으로 누리고 시간이길 바란다.


I. 우리 사랑의 교회가 지난 주일날 앞으로 코로나 사태 이후의 몇 주간의 방향을 통하여 수 년 간의 예배가 결정될 것인데 우리가 어떻게 끝까지 꼭 지켜나갈 것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1.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진리를 지킨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지킨다.
3. 성령의 능력과 주권이다.
4. 거룩한 공교회의 중요성.
5. 세계 선교의 절박성.
6,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소중성)
-이것을 잘 지켜나가야 한다.


이것을 지켜 내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중요하다.
II.이번에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잘 못된 이단들을 드러내게 하시게 하신다.
1)신천지를 드러내시고,
2)동성애를 드러내시고,
3)공산주의 우한 폐렴을 드러내시고,
4)극단적인 이슬람(라마단) 드러내게 하시고,
5)마지막에는 안티 기독교 세력을 드러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해 주시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주의 백성들은 철저하게 무장이 되어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통해서 우리가 흔들림 없이 믿음의 계승을 통해 내 것으로 고백이 되어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러한가를 보며 자기 신앙으로 고백이 되어야 오래 간다. 내가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는가? 아주 마스크가 독특한 분위기이다. 그 모습이 그렇다. 모두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한다. 담임 목사님도 목사님들을 불쌍히 여겨라.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가지고 가정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기를 바란다. 마스크를 쓰고 이렇게 새벽에 나와 예배함을 주님을 주님 사랑하시는 것을 많이 본다. 우리가 그래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통해서 내 것으로 고백되고, 내가 공부해서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으로 적용을 통해서 묵상으로 내 것으로 고백하여야 한다.


내 것으로 고백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위해서 주신 말씀은?
1. 계시를 주셨다.
2. 영감을 주셨다,
3. 조명을 주셨다.
-그래서 오늘 살전 2;13절에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교회처럼 데살로니가 절대적 성경의 권위를 정리를 하겠다.
지난주에는 계시를 공부했고, 오늘은 영감에 대해 하겠다.
1) 영감- 영감에 대해서 설이 있다.
-영감에는 성경 전체가 다 영감이라는 것이다.
부분적 영감설-성경 전체가 영감이 아닌 자유주의적인 신앙이다. 괜찮은 신학자들도 가감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기계적 영감설이 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딱 받아 적었다는 것이며 기계적이라고 말하고 한다.
부분적인 것은 성경전체가 다 영감이 아니다. 다른 것을 추가하거나 감한 것이다. 너무 과한 것임.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닌 우리는 유기적인 영감(Organic aspiration)을 받은 사람들이다.
한 개인의 인격, 한 개인의 개성, 한 개인이 가지는 지성을 하나님이 다 사용하셔서 성경의 감동으로 적은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모세를 하나님이 사용하셨을 때에 모세가 가진 그의 배경 실력 능력 다 사용하신 것이다. 모세는 애굽의 법률학 적인 모든 학문에 통달했다고 하고 있다. 법률학 수사학, 모든 계통의 학문에 특히 법률학자와 같다. 통달할 실력자인 모세 5경은 방대하고 세밀하고 잘 조화되어 지성이 풍부하게 들어있다. 이사야는 왕궁 선지자였다. 그는 시인이었다. 그의 시적인 그 은사로 하나님의 영적인 위엄과 왕적인 선포로 살았다. 아모스는 시골 출신 목자였다. 그는 시골의 소박한 항취가 나타났다. 다윗은 시의 천재이며 음악의 마에스토로였고, 솔로몬은 지혜와 잠언을 기록했고, 누가 사도행전 누가복음을 역사적 안목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당대의 최고의 바울의 율법학자인 바울은 어릴적부터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서 치밀하고 완벽하며 논리적이다. 바울의 그 모든 지성의 토대를 하나님은 사용하고 계신다. 이런 사람의 개성을 가지고 하나님은 사용하신다. 이것이 유기적 영감설이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 성령의 감동을 불어넣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불어넣어 주셨다.
베드로후서 1: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에 적시적소에 이렇게 말씀하셔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신다. 성경의 영감설에 우리는 당당하게 느끼며 귀하게 여긴다. 영감이라는 것은 완전하고 초자연적이며 문자적이고 변함이 없다. 그래서 수 백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정리가 되었다. 따라서 절대적 권위임을 믿는다.


2) 조명-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진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이 기록된 성경이 Saying word이다. 이 사이에 하나님의 뜻과 기록된 것, 하나님의 심정이 기록된 것, 이것 사이에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깨달으려면 중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기록된 사이를 깨닫는 것이 조명이다. 계시는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조명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기록된 말씀이 조명을 통하여 깨달아지는 축복을 주시길 바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조명은 고전에 나오고 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것이 성령님의 조명을 받아서 깨달아져서 접수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육에 속한 사람은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고전 2: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래서 조명은 성령님을 통해서이다. 계시와 영감과 다 성령님의 역사가 있지만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기록된 말씀이 깨달아 지기 위해서는 조명이 필요하다. 존 스토트 목사는 어느 비석 개막식에 개막하기 위해서는 커버를 씌워놓는다. 참석한 사람 중에 안대를 한 사람이 있다. 이 비석에 있는 것을 안대를 하고 있는 자는 못 본다. 그러나 안대를 벗어야만 비석에 있는 천을 벗겨내서 보게 되려면 안대를 벗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벗어내는 것을 조명이라 한다. 절대적 성경의 권위를 이해하기 위해 비석의 큰 천을 걷어내는 것이 계시 안대를 벗는 것은 조명이다. 계시로 기록된 말씀을 안대를 벗어서 깨닫는 것이며, 우리의 비늘이 벗겨지시길 원하신다. 돈 많은 자들이 얻고자 한 자들도 안대를 벗어버리면 조명을 통해 깨달아진다. 하나님은 과연 계시인가? 평생 추구하고 했던 인생의 질문의 답이 다 나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비늘을 벗어지게 하는 것이다. 조명을 통하여 안대를 벗어버리면 이것이 깨달아 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의 조명을 통하여 깨달아진다.


시편 27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영적으로 우리는 이런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지속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가 다 성령님의 조명이 깨달아져서 내 것으로 하라. 계시, 영감, 조명을 말했다. 이 절대적 권위를 방해하는 계략이 있었다. 초대교회 때는 수많은 박해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려고 성경을 없애려 했다.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성경을 일반사람들이 읽지 못하게 하는 악한 마귀의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잘못된 지성인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려고 온갖 공격의 행동을 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고, 온갖 참소, 불화살로 공격하고 있다. 18세기까지 성경을 못 읽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지배했다. 19세기 인간의 지성을 통해 내부공격을 했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의 공격이었다. 기독교 이미지를 먹칠하는 21세기 내부 사람들끼리 공격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안목을 가지고 내부 총질 싸움에 우리가 약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올바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지속하고 지켜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 믿는 것은 있다. 오늘 2020. 530일 토비새에 참여한 자들은 성령강림주일을 앞두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절대적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기름을 부음 받아서 선포하는 것이다. 선포하면 역사가 일어난다. 인간의 합리적 지식도 포문을 이루지만 성경의 절대적 권위이기에 선포하면 역사가 이루어지게 하신다. 정말 중요하다. 선포하면 역사하기에 암송을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72구절을 암송하는 것이다. 어떻게 암송할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디모데후서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그래서 어려서부터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능력이기에 그렇다.
찰스스펄전- “성경은 마치 동물의 왕 사자와 같다. 누가 사자를 변호하고 보호해 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사자는 풀어 놓아주면 스스로 방어한다. 성경 말씀도 이와 같이 역사할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선포하면 계시와 영감과 조명이 자연스럽다. 우리의 삶의 능력이 채워질 것이다. 가정도 공동체도 그래서 새로워진다. 이번 주는 어떻게 접목하고 있는지를 보기를 바란다. 주일학교에서 어떻게 하는지를 보아라 이 소리는 카톡의 소리이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이다. 자녀에게 물려주는 말씀이 이사야 영원하며 절대적인 말씀이라 여겼다. 그때부터 청소년 부모들과 카톡방을 넣어 기도를 시작했다. 30초도 안 걸리는 말씀이지만 너무 의미가 있었다. 힘이 되는 하나미의 말씀이 적용되는 것은 암송되어지고 실제로 선포되어질 때 최고의 선물은 기도이다. 기도에 절대적인 말씀에 근거로 기도를 한다면 실체가 아이들에게 실천하는 것이다. 선포 되어져서 살아 움직여서 자녀들의 삶에 실체가 되기를 바란다.


후 예배
사람의 교회 부임이후 성경말씀에 암송의 복음주의 쇠퇴를 막는 것이다. 주빌리티 800차 기도회이다. 국가정책에 얽매이지 말고 와서 다음주에 기도해서 평양에서 예배하는 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613일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적용할 청년부가 어떻게 할 것인지 보여줄 것이다. 사랑온 게시판 4000번 성경을 준다 사랑온 게시판에 4사천번에 목사님의 성경을 2권을 주게 된다. 가장 은혜스럽다는 사람에게 줄것이다. 사랑온 5000천번 입학금을 면제해 줄것이다. Sega를 하나님이 인도하시리라 믿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암송한다. 꼬배기를 먹고 꼬인 일들이 다 사라지길 기도한다.
요약
내 것으로 고백을 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에 절대적 권위를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1. 계시를 주셨다.
2. 영감을 주셨다,
3. 조명을 주셨다.
이들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런 자세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살펴볼 부분은, 어떤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합니까이다.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바로 그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응답을 기다리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응답으로 기다리지 사람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를 때로는 귀를 기울여도, 때로는 무시해도 될 때가 있다. 그것을 판단하는 몫은 순전히 내 자신의 판단력에 달려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는 것은 그 말씀을 내가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원위를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면, 거기에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흘려듣지 않게 될 것이며,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로 받아야 한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아 이렇게 암송하고 주님과 항상 친밀하여 주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며,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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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2020. 5 27)
제목: “위대한 신앙, 다윗처럼
말씀: 역대상 19:1-9
설교자: 정은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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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역대상 19:1~절까지이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바라볼 때 흔히 그들이 나타냈던 결과에 주목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모세 -홍해를 갈라선 사건, 여호수아 -여리고 성 무너진 사건들이 있다. 승리했던 그런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 결과를 내기까지 기도의 문제 이런 것들이 강조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을 주목하는 것이 당연지사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믿음이나 기도가 부족했나? 신앙의 회의를 느끼면서 놀라운 그런 기적들을 바라볼 때 마음속에 열등감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에 어떤 인물과 나타나는 사건과 기적들을 바라볼 땐 그 결과도 존경하지만 그 사람이 그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그 능력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그 사람만의 가치, 생각의 방향, 마음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이런 결과를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 바른 가치가 결국 그 사람의 삶과 신앙의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으면 기도하면 그 이전에 그 사람자체가 기도하는 그 사람자체가 뭔가 행동하는 데 사람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중심된 가치, 그 마음의 방향, 그 방향과 가치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낼 때에, ‘무언가 내가 해내어야지’, ‘뭔가 내가 보여줘야지라고 하는 노력과 열심히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통해 성경에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변화와 하나님의 나라를 감당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하신다. 성경 속에 나타났던 기적과 능력을 오늘 우리 삶 속에서도 경험하게 해 주신 줄 믿는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성경에 어떤 인물의 가치와 마음의 태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가? 많은 인물들이 떠오르겠지만 다윗이라고 생각한다. 왜인가? 가장 평범한 목동에서 가장 높은 왕의 자리에 올랐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의 진면목과 실패함을 둘다 보여 준 사람이 다윗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다윗을 기억할 때 골리앗을 이긴 믿음, 악기를 내어준 찬송, 절말과 낙심 속에서 기도했던 그 다윗을 생각하기 전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루어 냈던 다윗의 승리를 우리가 마음속에 담기 전에 그런 믿음과 찬송과 기도와 승리가 가능할 수 있었던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을 주목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아 우리의 삶을 힘 았게 걸어간다면 지금 평범한 삶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 위대한 사람으로 서가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삶, 그리고 자신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삶의 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그게 어떤 것이었기에 하나님도 사람도 기억하는 가장 위대한 신앙이 될 수 있었는가? 두 가지가 있다. 말씀을 통해 살펴보면 은혜가 될 수 있다.


먼저는 본문의 배경은 이러하다.
다윗이 직위에 올라서 계속 정복 전쟁이 진행되었다. 그런 가운데 암몬의 왕 나하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에 다윗 왕국은 영토의 확장이 최고로 이루어져 있었고 당시에 최고의 강대국으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암몬와이 죽었다. 그의 아들인 하눈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 복잡한 상황이 된다. 다윗은 정복전쟁 계속해 가고 있는 가운데 암몬도 정복할 나라 중에 한 나라였다. 그런데 혼란스럽고 어순한한 상황이지만 그러면 정치가이자 군사전문가였던 다윗은 그가 틈을 놓치면 안되었던 것이다. 암몬을 공격하기에 최고의 적기다. 그럼에도 다윗은 암몬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하스의 위로하는 조문단을 꾸며 보낸다. 그런데 조문단을 보내는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 2절에 그이 아버지가 의를 베풀었으니 그리 아들에게 보낸다. 문상의 이유가 암몬의 왕이었던 나하스가 이전에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호의라는 말은 히브리 말로 헤쎄드이다.=호의이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나하스가 다윗이 필요할 때, 은혜로 사랑으로 친절로 베푼 적이 있었고, 그 다윗이 그것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기억하고 지금 나하스의 죽음 앞에 사절단을 조문으로 암몬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문상 보내는 것이 대단한 것이냐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지금 다윗은 영토를 정복해야 할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땅을 차지하는 것, 승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적이 약점을 보이거나 뭔가 승리할 수 있는 허점이 보이게 되어지면 집요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함이 상식적이고 지혜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조문단을 보내는데, 이유가 이전에 나하스에게 받았던 성경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사소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은혜로 기억하고 그 은혜를 내가 받았기에 모든 것을 멈추고 조문단을 보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
1.하나님의 싸움과 나의 싸움을 구별하여 내 싸움에 집중하기.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전쟁으로부터 내가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전쟁의 주인이다. 다윗은 그것을 철저하게 몸으로 지켰던 사람이다. 곰과 양떼를 지켰던 그 시절부터 시작해서 골리앗을 쓰러뜨린 모든 과정까지 다윗은 의자할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님이 주인되셔야 한다는 것,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가셔야지만이 된다는 것, 힘과 능력과 승리의 원동력은 오직 내 하나인 한 분 밖에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언제나 대단한 무기와 뛰어난 병기를 찾지도 않았고, 그것을 구하거나 입지도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이서 그렇다. 내가 개입해서 이렇게 하면 이기고 저렇게 하면 승리할 것이다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본인이 개입하면 내 힘으로 되어지면 패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싸움은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나는 내가 싸워야 할 그 일, 내 해야할 일에 집중하겠다는 생각한 사림이 바로 다윗이었다. 하나님의 승리를 위해서 쓰임을 위해서 거룩한 도구로써 자기를 만들기 위한 싸움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싸움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도구로 나를 만들어 낼 것인가에 집중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싸움에서도 자기 자신에만 집중했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적국이 공격을 해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 절호의 기회를 내려놓고 어쩌면 왕으로서 멋지게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욕심을 내려놓고 사절단을 만들어서 그들은 보낸다. 자기 자신에게 베풀어 주었던 그 은혜를 기억하여 집중하며 승리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윗은 자기 욕심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때 언제나 패베 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늘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뭔가 거창하게 이야기 하며 계획하는 다윗은 그럴 때마다 졌다. 인구조사나, 우리아 아내를 범했을 때, 다윗은 번번이 패배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본문의 자기에게 허락된 은혜에 기억하는 것,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승리함을 알았다.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자기싸움이 될 수 있을까요? 내가 힘이 생기면 그래서 이전에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를 잘 모른다. 내가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러는 줄 안다. 그래서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그 은혜를 잊는다. 우리의 죄 된 인간의 본성이다. 다윗의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경조차 기억하지 않는 그 작은 호의, 자기가 힘들었을 때에 자기에게 베풀어 주었던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조문단을 보내는 그 다윗에 모습을 통해서 자기의 싸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 그래서 하나님을 통해서 베풀었던 은혜이든, 사람을 통해 받았던 그 은혜이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거기에 집중했던 이 다윗의 모습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서 갔던 다윗의 핵심 가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위대한 신앙이란 대단한 결과와 업적이 나타나고 보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정말 위대한 신앙으로 가는 것이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위대한 사람이며 보답의 길이다. 그 은혜의 통로가 되었던 사람을 잊어버리고 사람들을 하대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하나님의 싸움에 어떤 사람을 사용하는가? 자기 싸움에 승리한 사람을 사용한다. 내가 드러나지 않고 하나님만이 드러난 준비된 사람으로 된 것만이 거룩한 실천이다. 자기 싸움에 승리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사람을 사용하는 줄 믿는다. 하나님의 사람은 호의와 친절과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을 중심 가치를 놓고 한 걸음 씩 옮겨가는 자이다. 그이 신앙의 모습은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보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 소중함 예의로 대하는 모습이다. 다윗이 조문단을 보내고 나니 그 암몬의 새로운 신하들이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핵심은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호의를 생각해서 아니고 저들이 자기 나라를 염탐하고 정탐하러 왔다고 말해주며 믿지 말하고 한다. 그래서 하눈이 사절단을 잡아다가 이렇게 하고 있다. 본문 4절에 보면, 이에 다윗의 신하들을 잡아서 수염을 자르고 의복을 자르고 엉덩이를 들쳐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를 보면 사절단은 다윗에게 한 짓이나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수치와 모욕을 했다. 다윗이 이 내용을 듣고 어떠했겠는가? 보복하고 싶을 것이다. 험한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복수를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암몬을 정리하고 나라의 자존심을 찾겠다는 거창한 슬로건을 가지고 전쟁의 명분을 삼을 수도 있었는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5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부끄럽게 하도록 하지 않고,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고 한다. 오히려 상처를 입었던 자기의 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만져주는 것을 최고로 먼저 해준다. 엉덩이를 드러나는 수치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사절단의 상처를 알고서, 참고 상처받은 자들을 여리고에 모든 것을 제공해 주고, 휴식을 취하게 한다. 수염이 자라고 치유되기까지 있다가 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함부러 여기지 않고 무례히 하지 않는다. 큰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는 것이 우선 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람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소중히 여길 수밖에 없다. 내가 받은 호의와 친절을 기억하고 보답해야 한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의 태도
2.세상 방법이 아닌 하나님과 연합하기.
6절에 하눈이 상황파악이 된다. 하눈이 해결책을 내놓는데, 은 천 달란트와 병거와 마병과 영병을 가지고 해결하려 한다.
첫째 -잘못된 것은 다윗에게 찾아가서 직접 이야기와 사과를 해야 했다. 사과가 전혀 없었다.
둘째 -잘못된 것은 당사자인 이스라엘과 전혀 상관없는 아람을 끌어 들여서 그들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방식이 잘못 되었다. 지금 세상에서 발생하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방식을 알지 못한 문제 해결 방식은 딱 두 가지이다. 책임해피와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니까 문제 해결 방법은 세상은 사람으로 해결하려 한다. 세상의 가치를 힘과 돈만 있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게 하눈과 세상이 보여주는 방법이다. 그러면 힘과 돈에 이런 것과 맞서는 다윗의 방법은 역대상 19:12-13절이다. 지금 암몬은 아람과 다윗에게 맞서는 상황이다. 그런데 암몬과 아람군과 맞서고 있는 자는 요압과 아비새얐다. 요압과 아비새가 전장을 지키는 자였다. 실질적으로는 다윗이 행하는 일이기에 생각과 방향대로 모든 것을 수행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새와 요압의 고백은 무엇인가? 서로 돕자고 한다. 암몬과 아람의 사이에 낀 요압과 아비새는 하나님만 계시면 된다고 한다. 다윗을 대표하는 요압과 아비새는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는 자들이기에 하나님과 연합된 자이기에, 어떻게든 하나님과만 연합되고,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 승리함을 믿는다. 그렇게 살면 내가 다 세상의 방법 앞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하나가 되면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다. 코로나 바리러스로 인생에 지나가고 있는 이때에 지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정말 마음먹으시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멈추시게 하셨다. 모든 것을 스톱하게 하실 수도 있다. 우리에게 모두에게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과 연합하는 것을 보시고 멈추어 나를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세상과 연합함을 버리고 나하고만 연합하여 믿어서 우리를 바라보기를 바라신다. 지금 이 시간을 의미 없이 지나가면 안 되며 하나님의 방법만을 바라며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잘 생각하는 시간이 되고 정리하는 시간으로 되길 바란다. 하나님은 무언가 대단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면 축복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며하게 포장하지 말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 과정이 지나가길 바란다. 다윗의 이 놀라운 핵심 가치와 태도가 우리의 뼈에 새겨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뭔가 내 삶이 힘들어도 결과가 없어도 거리가 없어도 안 될 때 어떤가? 내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 싸움에 집중하고, 나를 선대해 주었던 사람에게 갚아주기를 바란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위로 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눈에 보이는 믿음의 결과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나는 내 싸움만 집중하자.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기억하여 그들에게 그 은혜를 갚아야 한다. 허물을 덮어주고 약점을 안아주고 눈물 닦아주는 자가 되길 바란다. 이것이 쌓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칭찬해 주실 것을 믿는다. 또한 주님과 더욱 가깝게 지내며 내 생애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하는 분별력으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위대한 결과는 나타내지 않아도, 위대한 신앙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길 바란다.


 요약
다윗의 순수한 의도를 오해한 하눈이 조문 사절단을 모욕하고 돌려보낸다. 하눈과 암몬 자손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나하스의 호의에 대해 하눈이 이를 수치와 모욕으로 갚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런 상황이 되면 억울함을 느낄 수 있고, 낙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이 조문 사절단을 여리고로 보내 시간을 갖게 하며 끝까지 주님의 때를 기다렸듯이, 요압과 아비새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끝까지 암몬과 아람 연합군에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했듯이 모든 것은 주님께 맡기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행해야 할 선을 행하는 것, 베풀어야 할 호의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정성껏 갚아서 주님의 뜻을 바라보라. 의도치 않은 수치와 모욕이 있다 해도, 호의와 은혜에 대해 생각하는 결과가 다르더라도 낙담하지 않고 더욱 더 힘내서 해야 할 일을 하며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코로나 바리러스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이때에 더욱 주님과 가까이 하여 그리고 당연히 그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온전히 그 분의 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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