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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 7. 5.)

제목: ''숙련된 대장장이의 계보(系譜)''=(The Second Vision:Skilled Craftsman's Genealogy.)

말씀: 스가랴 1:18~21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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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찬양단, 찬약 곡으로 하나님께서 ‘샘물과 같은 보혈의 능력’으로 덮어주시길 바란다. 또한 오늘 말씀으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기를 바란다. 말씀을 잘 깨달아서 은혜의 고속도로를 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첫 번째 이 두 번 째 환상 중에서도 첫 번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네 뿔에 대한 것을 먼저 생각을 해보겠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말씀은 스가랴 선지자가 본 두 번째 환상으로 첫 번째 환상에 나타난 열방의 심판 모티브와 주제는 두 번째 환상에서 더욱 구체화 되게 된다. 네 뿔, 우선 네 뿔의 환상, 18절에 보시면 내가 눈을 들어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대장장이를 등장시킨다.

생애 잊을 수 없는 말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 뿔은 세력의 상징이다. 권력의 상징을 말한다. 파워, 세력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권세나 세력을 상징하는데 쓰여 지고 있다. 뿔은 종종 힘 혹은 권력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고, 전투에서의 승리를 상징하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뿔은 짐승들이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매우 거친 군사적 공격을 상징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뿔은 매우 거친 군사적 공격을 상징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이 뿔들은 유다뿐만 아니라 북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을 거칠게 공격하는 군사적 세력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비추어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과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록 이방 세력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며 고통을 안겨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손에 있는 장인들을 통해서 그들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스 1:18절, “18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개의 뿔이 보이기로 –이것은 스가랴가 환상을 볼 때마다 갖는 독특한 태도와 방식이다.

2:1절,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5:5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나아와서 내게 이르되 너는 눈을 들어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6:1절,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 산은 구리 산이더라.

 

l. 환경에 주눅 들지 말라.

 

-환경에 주눅 들지 말라는 뜻이며, 주님께 집중하여 바라보라는 뜻이다. 스가랴는 어려운 환경에서

눈을 들어 보라는 것은 주위의 환경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스가랴에게 환경에 주눅 들지 말고 주님주시는 환경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다.

▶뛰어넘어 영적으로 깨어라! 성전건축 터 닦고16년째 보류, 가나안보고 우린 메뚜기 같다, 골리앗 보고 모두 도망,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 상황, 코로나 같은 상황을 말한다. 그러니까 스가랴는 지금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었고, 성전 건축이 중단이 되었고, 모든 것이 어렵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남과 비교당하면 주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영적인 본능으로 주눅 들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DNA가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봤을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감옥에 넣고 했어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행 5:29절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환경 쳐다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는 것이며 너무 중요한 말씀이다.

오늘 스가랴 제 2환상을 바라며 여호와가 임하길 기다린다. 그리고 엘리야가 하늘에서 조각구름을 본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이 시간 영적인 눈을 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마음이 The day of the Lord(믿음의 보고)가 있기를 바란다.

 

ll. 네개의 뿔(18-19절).

1:19절

*스 19절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하니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이니라.”(해석천사)

내가 보니, 두 번째는 묻는다. 이 환상을 본 스가랴가 묻는 것이다. 해석 천사가 묻는 것이다. 네 개의 뿔이 뭐냐고 물으니,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리는 뿔이다라고 대답한다. 4개라는 뜻은 동서남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동물들의 서열 정할 때 사용하는 뿔이기도 하고, 힘과 권력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는 동서남북의 모든 대적들인 셈이다. 이 백성을 흩뜨려 놓았다는 것이며, 히브리어로 ‘제누’라는 것인데 이 시제가 완료형이다. 끝났다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도 흩뜨려 뜨리다는 것이다. 네 개의 뿔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1)바벨론 2)페르시아 3)헬라 4)로마.

 

▷ 4개 뿔

1.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흩뜨리는 대적,
2. 지금도 흔드는 미래도,
3. 잔인함 포악함,
4.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어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갈 때, 물어뜯는 장면을 읽는 중에 시드기야 왕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이 구절을 보고 괴로웠다.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몸서리가 쳐졌다.

*열왕기하25:7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

이러한 것을 보면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흩뜨려 뜨리려고 한 것이다. 잔인하게 약탈, 파괴. 노예로, 이 말씀을 보아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것은 우리 한국의 분단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러시아와 중국의 뿔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처참한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고통은 70년간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지금 북한 지하의 백성도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미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지금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노리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인재를 해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고 있는 것이다. 성전도 세워지지 않았고, 나라의 정체성도 없고 인간의 의식주 기본도 안 되었다.

 

*스 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을 잘 읽어보고 예배 전에 성경을 읽어보아야 하고 은혜의 게시판에 스가랴를 읽고 느낌을 올릴 것인가?이다. 이모티콘을 만들어서 좋아요!!라는 것을 만들어 보겠다.

 

III. 네 대장장이를 통하여 징벌하시는 하나님(20-21).

이 하나님이 오늘 위에서 4개의 뿔의 해결 방법을 이야기 하셨다. 반전의 역사를 주신다. ‘하나님은 네 대장장이를 통하여 해결하신다’.

 

*“20 그 때에 여호와께서 대장장이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대장장이(Craftsman), 숙련공(Tradesman)이다. - 나무를 솜씨 있게 다루는 목공, 돌을 닦는 석고, 하사쉰-대장장이의 최고의 예가 누구인가? 그것은 출애굽기에 나온다. 성막을 짓기 위해 하나님이 쓰신 자들이다. 바로 대표적인자인데 브살렛과 오홀리압이다. 두 사람이 숙련공이었다.

이 네 대장장이의 역할은 네 뿔을 부수는 역할이며 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21절에 보면 뿔들을 떨어뜨리려고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네 개의 제국을 다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스 1:21 “내가 말하되 그들이 무엇 하러 왔나이까? 하니 대답하여 이르시되 그 뿔들이 유다를 흩뜨려서 사람들이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니 이 대장장이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의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흩뜨린 여러 나라의 뿔들을 떨어뜨리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를 말한다. 손대지 않은 돌이 나와서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네 뿔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동서남북의 모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상징 의미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이 권력 있는 네 뿔을 누가 넘어뜨리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소박하면서 겸손하며 숙련된 대장장이를 통하여 무너지게 하시는 것이다. 숙련공을 말한다. 바로 바울시대에 순수한 대장장이는 바로 더디오이다(바울이 눈멀었을 때 필사를 한 자), 대장장이는

반대되는 개념은 통치자, 권력자, 서기관들이었다. 성막시대에 오룰리압과 브살렛, 솔로몬 시대 석공, 성전수리에 사용된 사람들 등이었다. 정리를 하면서 감동이 되었다. 그러니까 네 쁠의 권력 앞에 주눅 들지 아니하고 맞받아치는 대장장이의 역할을 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

네 명의 대장장이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카운트 펀치와 거룩한 묘략이 대장장이인 것이다. 그래서 네 뿔에 대한 네 명의 대장장이를 맞서게 하시는 것이며,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댓글로 디스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결같은 숙련공 같은 자세로 삼으셔서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다.

“하나님의 역사는 순박하고도 소박한 숙련공과 대장장이를 통하여 제국을 패망시킨다.” 그래서 네 명의 대장장이를 통해 제국을 멸망시키시는 것이다. 기독교를 비방하는 댓글이 검색창에 너무나 많다. 우리가 숙련공이 될 때에 결론적으로 그 뿔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환상에 대장장이 숙련공이 있는 곳마다 이미 하나님은 심판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권력의 뿔들을 없애주시고 계신다. 아무리 교회를 폄하하고 교회에 수치를 주고 평가절하해도 대장장이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묵묵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린 자들에게 임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일에 묵묵히 대장장이를 통하여 일하고 계신다. 이 시대의 소박함과 순수성을 가지고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을 행사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21세기의 대장장이가 되기를 바란다.

 

IV. 21세기의 대장장이들.

이 대장장이가 숙련공이듯이 자기가 맡은 일에 모든 영역에서 각처에서 영성과 실력을 갖추는 숙련공이 되어야 한다.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시편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도 숙련공이 되게 하셨다.

 

*시편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마음 +비전+ 스킬, Heart + Vision + Skill), (목자의 심정 + 사명 + 숙련됨)

[목자의 심정 +사명+ 숙련됨] 이 세 가지가 잘 숙련되어야

- 이 시대 앞에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다. 21세기 대장장이이다.

 

*잠언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 이 코로나 사태로 인해 기회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젊은이들도 언어의 숙련공이 되어야 한다. 숙련공으로 계발되는 기회로 만들어라. 또한 표정의 숙련공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접목을 해보면 동성애라든가, 차별법등을 보면, 성경에서는 절대적으로 하지 말라고 했는데 끝까지 하고 있는 것인가?이다. 동성애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상이 힘들어도 대장장이의 계보를 이어가야 한다. 영역주권을 인정하기 바란다.

 

예) 20세기 아브라함 카이퍼이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였다가, 자유주의에 처음에 빠지다 스스로 대장장이가 된 것이다. 네덜란드의 대장장이 되어 하나님의 영역주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자신을 연마하여 대장장이가 되었다. 그 시대의 대장장이가 되어 네덜란드의 썩어져가는 것들을 대적하여 대장장이가 되었다. 나중에는 수상까지 되었고, 하나님의 영역주권을 주장하여 대장장이의 역할을 감당했다. 글로벌 사회는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뉴스와 노래 가사로 우리의 눈과 귀가 선회하고 있다. SNS에 빠져있지 말고, 오늘 우리는 꿈을 꾸고 만군의 여호와의 영역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왜 하나님은 두 번째 환상을 보여주시는가? 이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 네 뿔을 제거해야 한다. 노아, 더니오, 아브라함 카이퍼의 계보를 이어가기를 바란다.

- 인본주의를 전제로 한 것에 빠지지 말기를 바란다.

 

▷아브라함 카이퍼-내 삶의 모든 영역마다 하나님이 계신다.

 

 

 

▶직장을 변화 시키는 4가지의 자질이 있다.

▶ 일터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자질(일터사역 국제연합(IWM)대표, 오스 힐만(Os HiIlman)

➀ 탁월한 업무능력.

➁ 순전한 인격.

➂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사랑과 섬김.

➃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

 

♧ 요약

그리스도께서 결코 주눅 들지 않는 DNA를 통해 주권을 선포하실 때에 자신의 영역에서 소박한 사명의 숙련공이 되어 묵묵히 순종하는 자 되고, 인본주의를 벗어나 21세기의 대장장이의 계보를 바르게 이어가사 세상의 뿔을 이기고, 일터에서나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표적을 보이는 삶의 기본이 되어 하나님 앞에 스가랴처럼 경청하고 겸손 하는 삶이되어 섬기며, 소박하고 신실하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집중해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대장장이가 되기를 소망한다.

 

 

느낀 점.

-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 것을 느꼈다. 다만 우리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존재가 되는 일에 집중해야 하고, 스가랴의 친밀하고 일상화된 영적 소통을 보여 주어서 모르는 일에 대해 아는 척 하지 않고, 내가 안다고, 내가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겸손히 묻고 경청하는 스가랴의 모습을 바라봐야 함을 느꼈다. 두려움 없고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른 뿔들에 대해 대장장이의 망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선행과 순행하는 자에게 구원과 긍휼로 심판 하시며,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며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말미암음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올곧은 신실함으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기를 간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오늘 헌금봉사 기도회에 늦어서 본당 예배로 바로 갔더니 지역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셔서 마음이 편안했다. 어제 시댁에 일이 있어 큰댁에 갔다가 새벽에 도착했다. 남편은 예배를 다음 회차를 드리라고 미안한 마음에 이야기 했지만 나는 그 시간에 기다릴 사람들과 나의 빈자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을 생각하니 시댁에서 음식 만드느라 힘들었던 시간들이 오히려 싹 없어졌고 분주하게 챙겨서 예배에 참여하고 기쁘게 찬양과 예배로 그리고 기도로 나의 일상에 감사하게 되었다.


★이 찬송은 1918년도 사랑의 교회 예배 찬송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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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주후 2020. 7. 1.)

제목: “다른 신은 없습니다”

말씀: 신명기 5:1-7절

설교자: 박상열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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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I. 말씀의 토대가 된 언약.

 

(1)모세는 회중들을 불러 모은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였다(1절).

(2) 그는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1절).

(3) 그는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맺었던 언약에 의해 스스로를 규제해 나아가야 할 계약에 대하여 그들에게 언급한다. 명령, 또는 계명을 이러한 언약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강림을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살펴볼 수 있다.

 

①이 언약의 대상자들 : "이 언약은 우리와, 아니 시내 산 앞에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부모들이 세운 것이요, 우리를 위해서 처리한 것이다."

 

②이 언약의 선포 : 계약의 공표는 하나님 자신이 하셨으니 이를테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조목조목을 읽어주셨던 것이다(4절). 여호와께서…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II.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말씀을 전한 모세.

 

③계약의 중계자 :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5절). 여기에서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에서 계신 분이다. 그가 우리의 머리 위에 축복의 손을 얹고 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말씀을 올리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와 세우신 언약 ( 5:2, 3 )모세는 시내 산 언약이 그들 조상이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현재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새롭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말씀을 전한 모세 ( 5:5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현현인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게 됨으로써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규례를 그들에게 전달했는데, 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예표하는 것이다.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호와 ( 5:6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 여호와로 계시하셨다. 즉 모세가 가져온 십계명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낸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심으로써 십계명의 신적인 권위를 입증하셨던 것이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받아들여서 이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어내고 이겨내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시름과 아픔을 아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다른 신은 없는 여호와 한 분 밖에 없는 우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이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길 기도하며,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임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행동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하신 참 신이신 것을 우리가 고백하여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를 받기를 바라며, 기록된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는 말씀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 말씀으로 주님께로 돌아가고 회복되는 은혜가 되기를 소원하며, 우리는 다른 신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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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주후 2020. 6. 28.)

제목: ''한국 전쟁 70주년, 질투하시는 하나님''

말씀: (스가랴 1:7~17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주일 아침부터 영광스런 찬양 듣게 되어 감사하다. 선한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만군의 여호와이시고,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하늘의 주관자이신 이 세상 가운데에서 그분의 품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한국 교회를 주님의 품으로 지켜주시길 바란다.

 

오늘 ‘한국 전쟁 70주년,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설교하게 되었다. 6.25 전쟁 발발 70년이 맞이하게 되었다. 마치 바벨론 해방 70년 가운데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회복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6.25 전쟁 발발 70주년이고, 정전, 휴전이 1953년이었다. 그러니까 3년 걸렸는데, 오늘부터 우리가 말씀과 기도와 집중력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앞에 한국교회가 의탁되면 한국 교회가 3년 내에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 믿는다.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기점으로 해서 휴전 70주년에서 전 24년, 하나님께서 한반도에 반드시 어떤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런 근거는 오늘 말씀을 가지고 집중해서 기도를 올려드릴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이다.

 

▶본문 12절에

*스 1:12,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칠십 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여호와의 천사가 하나님 앞에 말을 하는 말이다. 여호와의 천사는 스가랴 8가지 환상 가운데 첫 번째인데, 이 여호와의 천사는 The angel of God.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왜 여호와의 천사인가 구약에 보면 그 여호와의 천사가 구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현현이다. 또 여호수아가 모세가 떨기나무에 있을 때 여호와의 천사가 구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그렇게 할 때 모세도 40년 동안 그가 떨기나무 앞에 모세가 80세에 하나님께서 현현 하셔서 모세의 외로움과 소외감을 해소하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처럼 오늘 코로나 바이러스의 이 상황 가운데에도 주님이 나타나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이렇게 포로 70년 동안 포로가 되었으니 어떻겠는가!

12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내용은 70년 동안 고통당하고 포로 생활을 하는 유대 민족의 간절한 목자의 심정과 중보기도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구약 시대에는 스가랴에서 그 여호와의 천사, 현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간절하게 포로 생활을 기도하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직접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하나님 백성들과 제자들을 위하여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거룩하게 해달라고, 중보기도 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 ,해주실 줄 믿는다. 해방이후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이한 이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신 그 주님의 모습이 우리가 주님의 심정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 6.25 전쟁이후 지난 70년 동안 이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가장 마음 아파하는 분은 누구이신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우리가 하나가 되어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 가장 마음이 힘들어 하는 자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13절에 보면,

*스 1:13,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스 1;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이 말씀을 통해 첫 번 째 환상을 생각해 보자.

II. 첫 번째 환상

1.첫 번째 환상 : 여호와의 천사→ 예수 그리스도.

▷내게 말하는 천사는 →해석 천사이다. 지금 환상이 이 구절에 나오고 있다. 8절, 7절을 보면...

*스 1:8절, “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스 1:7, “다리오 왕 제이년 열한째 달 곧 스밧월 이십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환상은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현실에 대한 통찰이다.

▷환상(Vision)ㅡ 깨어있을 때 임하는 것이고, 의식 상태이다. 우리 지각을 뛰어 넘는 주님의 통찰력이다. 구약에 환상은 86번이나 나오며, 신약에는 15번 나온다. 베드로, 고넬료, 바울의 환상 등이다.

(▷꿈(Dream)은 잠잘 때 일어난다. 무의식 상태에서 보는 것이다).

※미국은 신앙의 바탕이 있기에 우리는 늘 협력해야 한다.

ㅡ지각을 초월하여 스가랴처럼 사모하고 애통하며 기도의 생명줄을 붙잡고, 주님 말씀 앞에 납작 엎드릴 때에 환상을 보이신다. 지금은 환상이 거의 없지만 대신 말씀을 통해 주시는 영감과 계시가 환상과 맞먹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 천사가 말하듯이, 잘 깨달아 기도제목을 삼으면 우리도 환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통해 영감과 계시와 조명을 통하여 환상을 보는 것이다. 오늘 다른 교회에 확진 자가 나타났으나 겁먹지 말고 환상을 보기를 바란다. 핵심은 스밥월 이십사 일에~ 스 1:8 화석류나무 사이 불은 말이 있다. 그것은 전쟁을 상징한다.

 

▶‘말(타는 말)’이란 전쟁을 상징한다.

*,스 10:3, “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돌보아 그들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이것이 환상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III. 골짜기 화석류 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탄 자.

▷*붉은 말 심판과 복수의 상징이다.-심판과 복수를 위한 상징이다. 그래서 전쟁을 위해 준비되었다.

*흰색 ㅡ승리와 정복이다ㆍ로마의 개선식을 할 때에 흰 말을 탔다.

*붉은 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골짜기 화석류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탄자 ㅡ예수 그리스도가 -골짜기 화석류 나무에 서 있다. 골짜기 고난 치욕, 낮은 곳이다. *(골짜기 : 치욕, 낮은 곳, 초라함)

여호와의 천사와 같은 말이다. 붉은 말을 타시고 골짜기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계신 것이다.

*화석류나무: 별모양의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나무인데, 이 나무를 짓이기면 진한 향기가 나오며, 그 잎사귀와 상록수는 풍요롭다. *(화석류나무: 회복, 우주적 통치).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천사가 어디에 서 있는가? 바로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있다.

이것은 나무 사이에 서있다는 것은 고난 치욕과 초라함을 상징하니 그것을 서 계심으로 인하여 그것을 극복하게 함이다. 8절 10절 서있다. 여호와께서 서 계신 곳은 승리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승리가 회복되며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이다.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이 서 계신다. 붉은 말을 탄자가 서 있다는 것은 하박국 3장 6절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박국3:6,“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그가 서신즉 ㅡ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정보전생도 극북하게 하신다.

 

▷ 4차산업의 전쟁은 바로 정보의 전쟁이다.

*스 1:11,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에게 말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하더이다 하더라.” 하나님이 서 계신 그곳만이 승리가 시작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다. 정보전쟁도 극복한다. 이 시대 전쟁은 정보의 전쟁이다. 회복과 갱신을 위한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계시기만 하면 새로운 역사 영역 주권, 하나님의 나라가 어김없이 회복된다.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 하나님이 서 계시기만 하면, 여호와의 천사가 계시는 장소라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실 것이다. 안타까운 가운데 우리는 6월25일 70주년을 맞이하는 가운데 온통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 분열이 되어 심각하다. 지난 20여간 일어난 일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 가운데에서도, 붉은 말을 타시고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계신 그 여호와의 천사를 통하여, 개인적으로는 절망적일지라로, 지금 해석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 가운데 붉은 말을 타고 계심을 바란다면,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상황에 그 붉은 말을 타신 여호와께서 서 계심을 마음에 있다면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 지금 해석을 듣고 붉은 말을 타신 화석류 나무사이에 계신다면 회복된다.

▷The city of God!! 여기서 영역 주권을 행하신다. 붉은 말을 타신 그 여호와의 천사가 골짜기 가운데서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서 계신 것을 인정하면 회복하며 주님께서 회복시키시며, 일하신다.

▷ Can you follow me? 더 깊이 들어가면 너희는 70년간 골짜기에서 치욕을 당하였다. 지금 이 무너진 성전도, 바벨론 고난, 밤. 등 모두 골짜기이다. 그런데 붉은 말을 타시고 화석루나무 사이게 서 계신 그 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확인 될 때에, 또 디지털 정보시대를 구름위에 띄어 놓았기에 클라우드 정보를 통해 사탄들이 들어와서 실제로 전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디지털 클라우드(Digital Cloud)가 아닌, 다바인 클라우드(Divine Cloud)를 기대해야 한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붉은 말 타시고 전쟁을 수행하신 그 여화와의 천사가, 화석류나무 사이에서 서 계신 그분을 우리가 믿을 때에 이 디지털 클라우드가 디바인 클라우드가 바뀔 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온 땅을 감찰하시어 정찰병을 보내셨다. 여호와께서 딸에 두루 다니라고 하심을 볼 수 있다.

*스 1: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페르시아 제국의 정찰병들이 있다. 다들 벌벌 떤다. 그 여호와의 천사 예수님이 묻기에 해석천사가 대답한다. 세상이 잘 되는 것 같이 잘 나간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을 보시고 70년간 고통당하는데 우리를 위해 아파하신다.

 

 

* 스 1:16,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영광의 귀환.-내가 예루살렘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2.▷거룩한 건축. - 4년 만에 완공되었다.

3.▷성읍 재건. - 예루살렘의 성읍이 재건되었다는 것이다.

4.▷풍성한 위로.- 예루살렘과 시온이 회복됨을 말한다.

 

*스 1:17,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이걸 먼저 말씀한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살려면,,,

예루살렘에 살려면 예루살렘이 살아야 하며 예루살렘의 심장이 성전이 먼저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전체의 나라는 예루살렘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스라엘 성전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이다. 한국 교회가 살려면 우리 한국 교인들이 살아야 한다. 더 이상 피해가 없기를 바라며 지켜 주시길 기도한다. 바이러스 상황 가운데에서도 한국교회가 살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살려면 우리가 살아야 한다. 철저하게 지켜 예배하게 해주시길 기도한다. 대신 예배를 제대로 드리길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구약에 화석류 나무 사이에 붉은 말을 타시고 바로 여호와의 천사가 되셔서 성육신 하셔서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 예루살렘 교회를 세우셨음을 믿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적 기백과 영적능력이 갖고, 깨달아 해석 천사가 이야기한다

*스 1:14절,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IV. 질투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질투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한다.

*스 1:15, “안일한 여러 나라들 때문에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바벨론 70년을 어떻게 보면 죄에 대한 징계로 고난을 당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런 나라들은 도구이다. 이것들이 오버하고 있다. 아주 강력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다. 하나님이 벌주시려는 그 수준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힌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그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 페르시아를 바벨론을 반드시 질투하시기에 멸망케 하신다. 지금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고 모욕과 수치를 주는 것을 보면 반드시 하나님은 질투하셔서 해결하실 것이다. 질투라는 말이 인간적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그런데 14절 새 번역으로 보면 “하나님은 예루살렘과 시온을 몹시 사랑한다”라고 하신다.

 

♧ 카나(quanah- 히브리어): 질투, 시기→하나님의 결단이나 행동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카나는 ‘정서’보다는 ‘행동’의 의미가 있다. 대표적으로 열왕기하 19장 31절에 보면,

*열왕기하 19:31,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열심이며, 돌아오라는 뜻이다. 부정적 질투가 아니라 돌아올 이야기 거룩한 질투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질투하시는가?

하나님과 피의언약이기에 나와 사랑의 관계로 있기에 그렇다. 질투로 인해 영적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R. T 켄달-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놓치지 않게 하며, 스스로 망치지 않도록 도와주는 안전장치와 같은 것이다.”

 

▶여기서 안전장치란 -→ 하나님의 행동

신명기4: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하시고, 소멸하시는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오염되고 악한 것들을 하나님은 우리를 정화시키신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불로 정화시키셔서 우리에게 안전장치가 되게 하신다. 불로 하심을 찬양한다. 결국은 하나님의 카나에 있다. 이스라엘 소망은 결국 하나님의 카나이다. 이스라엘 질투는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이다. 우리가 돌아오면 회복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이다. ★질투는 그분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은 사랑의 측정도이다. 붉은 말을 타신 그 천사가 거룩한 질투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읍을 다시 재건시키시는 것이다. 스가랴가 첫 번째 완성 거룩한 질투가 회복과 부흥이다. 이것이 이방인들은 나쁜 소식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하나님 백성들이 기도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로 거룩한 행동양식이 계시기에 환난 가운데에서도 우리를 회복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이 온 땅을 다 감찰하심을 믿는다.

 

*스 1:17,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 시온과 예루살렘은 우리 교회이며, 우리자신이다. ‘다시’~ 넘치도록 위로하고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전쟁과 같은 이 세상을 이기게 하시며 21세기 환상을 주시어 여호와께서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아브라함 카시퍼 “그리스도가 왕이 되게 하라”. Let Christ Be King!!!!

오늘 붉은 말을 타시고 여호와의 천사인 그분이 골짜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도, 화석류나무 사이에 풍성함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서 계시는 그 분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은 모든 영역에서 기적을 베푸시며 새롭게 해주시길 믿는다.

 

♣요약

  6.25 발발 70주년을 맞아서 우리를 하나님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심을 알아 더욱 깨닫고 시대의 아픔을 통해 스가랴의 말씀을 통해 회복되고 기도하여 고난과 치욕의 골짜기를 붉은 말을 타고 오셔서 화석류 나무에 서 계셔서, 우리를 개인적으로는 절망적일지라도 우리를 회복시키시며 모든 영역에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지금 해석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 가운데 붉은 말을 타고 계심을 바란다면, 우리의 마음과 감정과 상황에 주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 여호와의 천사를 통해 지금 해석을 듣고 붉은 말을 타신 화석류 나무사이에 계신다면 회복되리라 믿는다. 질투는 그분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은 사랑의 측정도이니, 그 분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은 모든 영역에서 기적을 베푸시며 새롭게 회복해 주시길 믿는다. 이 땅에 디지털 클라우드(Digital Cloud)가 아닌, 다바인 클라우드(Divine Cloud)를 기대하며, 회복되게 하심을 기대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토비새레 납작 엎드려 기도하고, 영혼을 깨우는 풀 워십과 예배를 통해 질투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이번 주 토요일은 내영혼의 풀(Full) 워쉽(Worship)을 하게 될 것이다.

◎ 느낀 점.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역사해 주실 것을 믿기에 이 코로나 사태를 뒤로 하고 교회에 무장하고 나갔다. 나는 헌금봉사를 통해 더 많은 봉사를 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고, 오늘 말씀을 통해 골짜기에 처한 나를 언제나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 계심을 믿고 나는 온전히 훈련과 예배에 그리고 봉사에 감사하게 참여하며 모든 영역에서 주님 감찰하시니 나를 깨어 주님을 깊이 더 알아가고 닮아가서 주님 나라의 복음의 일인자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오늘 우리 가족은 무섭다면서 교회를 나오지 않고 나에게 헌금을 대신 내달라며 주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렸다. 난 그것을 보오 안타까웠지만 기다려주고 이해하고 배려함으로 더 주님 앞에 깊이 다가오리라 믿는다. 그래서 가족을 위해 더 기도하게 되는 주일이 되고 말씀을 통해 담임 목사님이 전하시고 하는 그 스가랴의 말씀이 나에게 진정한 회복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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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0년 6월 27일)
제목:"믿음의 세대계승(世代繼承), 수선대후(守先待後)"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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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믿음의 축복을 담아서 다음 세대와 이 아이들과 함께 씨름하는 교사들을 축복합시다.
수선대후는 명말 청초(明末 淸初)의 사상가 천췌(1604∼1677)의 말로 선대가 남긴 좋은 전통과 유산을 지키며 후대를 키우고 세우겠다는 뜻이다. 훗날 청나라의 성군 옹정제가 이 말을 편액으로 만들어 맹자의 묘에 바치기도 했다. 오 목사는 이 말처럼 선배들로부터 받은 영적 정신적 혜택을 계승하고, 후배들을 양성해야 할 무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선대가 남긴 좋은 전통과 유산을 지키며 후대를 세우고 키우겠는 뜻이다. 담임 목사님의 책, 통찰과 예견을 보면 수선대후는 어떻게 사랑의 교회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중국 주성에 맹자의 묘가 있다. 그 묘에 청나라 송군 옹정제가 편액(액자)을 내렸는데, 그 안에 글귀가 바로 ‘수선대후’였다. 중국의 정신사의 핵심 중에 핵심은 바로 공자이다. 하지만 그 공자의 사상을 후대로 전하여 계승하지 않았다면 그이 사상은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다음세대로 건널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했기에 전해진 것이며 맹자가 있었기에 지금도 중국 사사을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중국 주성에 있는 이 ‘수선대후’ 이 맹자의 이 편액의 글씨를 담임 목사님이 보시고 목사님 마음 가운데 쑥 들어왔다라고 되어있다. 아마도 그 맹자의 묘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을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과 목사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 글귀가 담임 목사님의 마음에 확 들어온 것은 아마도 우리 사랑의 교회와 한국 교회에 주신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함께 해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믿음과 신앙의 절개가 있다.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들보다 먼저 복음이 들어왔다. 1884젼 첫 선교사는 먼저 알렌 선교사이다. 공관의로 입국되었고, 그보다 20년이 앞 선 1866년에 요동강변에 제너럴 셔먼호를 통하여서 토마스 선교사님을 통해 성경 말씀이 한국 교회인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선대의 말씀 사람은 정말 대단했다. 사경회가 열리면 멀리서 2박 3박4일을 마다하지 않고 산 넘고 물 건너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집을 떠나왔다. 또 한국교회 안에는 부르짖는 기도가 있다. 간난아이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대고 몇 시간이고 기도하는 선대들의 기도, 새벽이면 곤한 잠을 멈추어 깨고 자녀들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 불씨, 금요일 저녁이면 간절히 통성기오의 소리들, 기도하는 함성들이 그것이 바로 우리 선대의 기도였다. 찬양의 뜨거움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할머니의 찬송가를 본 적이 있다. 악보는 없고 글만 있는 찬송가였다. 정확히 음절이 없는 그 찬송가는 목사님의 입만 보고 따라 하는 찬송가였다. 심지어 8절 9절 10절까지 있는 찬송도 보았다. 요즘은 4절도 부르기 어려운데 10절을 불렀다는 것을 생각하니 전율이 흘렀다. 그런데 인도하시는 목사님은 후렴이 끝날 즈음에 목사님이 다시 “처음부터”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 그 10절의 찬송가가 20절이 되고 30절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선대의 믿음과 정신을 다음 세대로 전해야 되는 것이 수선대후의 정신이다. 부흥의 진원지였던 유럽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그 교회가 황페화(荒廢化) 되었는가? 다시 한 번 우리가 새긴다면 다음 세대를 우해 온 마음으로 집중하여 골든타임을 꼭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2020년 주일학교에서는 수선대후라는 주제아래 가정과 교회가 아름답게 연합하여 후대에게도 계승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주제로 잡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달여 동안에 여름 수련회의 대 장정을 시작할 것이다. 성도님들의 관심과 기도가 우리와 다음 세대로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선대의 말씀 사랑과 기도 찬양의 모습을 떠 바치고 있는 핵심중의 핵심을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버지의 신앙이 어떻게 아들이삭에게 계승되고 전수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다. 오늘 우리가 22장 1절에 먼저 보면 ‘그 일 후에’ 라고 시작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21장의 내용을 잠시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 가운데 어려운 문제 두 가지를 해결해 주신 것을 만나게 된다.


1.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는 이삭이다. 이 이삭을 태어나는 것을 이 위기 가운데 탐탁지 않는 눈으로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는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이삭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권리와 권한을 빼앗아 가는 장본이 될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이삭을 부모님이 보지 않을 때에 많이 괴롭힌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많이 놀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라가 그것을 지켜보던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한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이제 집안의 분란이 없어지는 것이며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가 이 문제가 해결 되었다.


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

 또 한 가지는 22장 2절 이후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당시 강국 블레셋의 왕의 방문을 받게 된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되자 그랄 왕 아비멜렉은 그의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과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찾아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제의에 應하고 이제 상호 불가침 조약을 締結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국의 한 왕이 일국의 족장이 和親條約을 맺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 성경을 봅시다.
*창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렇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화친조약을 맺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가문에 입장으로 본다면 이제 가정 안의 문제도 해결되었고, 또 가정 밖에 있는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이제 평안을 누릴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주변을 정리 시켜 주시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두시지 않는 상황 가운데 본질적인 가장 중요한 문제 속으로 아브라함을 초청하신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하신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험에는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었던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이 설교를 통해 그 내용이 무엇이며 다음 세대에 우리가 무엇을 계승할 지를 핵심적인 내용을 찾아보고자 한다. 시험의 내용은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올라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처음 이 성경을 접했을 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 많으시고 사랑의 결정체인 하나님께서 그것도 아브라함이 백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다시 번제로 달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가나안의 문화를 살펴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게 된다. 가나안 땅에는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함과 가나안의 노아의 수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절상태이다. 하나님을 없는 이들은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고 자신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고수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가나안 땅의 모습은 치열한 전투장의 모습이기도 하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타락의 땅이기도 하였다. 이 우상 제단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을 자해하고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는 제사의식이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아이들을 불 가운데에 지나가게 하거나, 혹은 제물을 바치는 인신 제사가 있었다. 바알을 섬기는 우상중에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런 시대적인 관점으로 볼 때,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청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아브라함은 지체함 없이 이삭과 종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했다. 산이 가까이 눈앞에 가까이 왔을 때에 종들을 머물라 하고 이삭과 함께 아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둘이서 또 다른 출발을 하게 된다. 그때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번제 드릴 나무와 불은 준비가 되었는데 이상합니다. 왜 제물이 없는 것인지요?”라고 묻는다. 그 아들의 질문에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아이가 아플 때에 병원에 가서 주사를 여러 번 맞힌 경험이 있다. 작은 주사바늘 하나가 아이의 피부를 뚫고 있는 모습도 지켜보기가 어렵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삭은 백세에 얻은 아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다. 그 아들을 이제 번제로 바쳐야할 상황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삭의 질문을 아마도 回避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질문을 한 번 하겠다. 우리는 결말을 잘 알고 있기에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잘 파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정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 작정이었을까요? 이삭은 죽이고, 각을 뜨고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불태워 올리는 이 번제를 드릴 마음이 있었을까요? 속으로 대답해보자. 있다. 없다. 아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성경을 읽어보고 보자.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오늘 아브라함은 아들과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모두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고 올 것이라고 모두들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5절을 읽으니 조금은 햇갈리기도 할 것이다. 읽어보니 같이 오겠다는 말에 의하면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정답은 없다. 다시 말씀을 진행 후에 하겠다. 이윽고 아브라함과 이식이 제단 앞에 도착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제사를 드릴 준비를 위해서 분주했을 것이다. 이때 이삭의 나이을 살펴보면 보통 학자들은 15-20세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 유대 전승에는 30세가 넘은 이삭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장성한 아들이었고, 아브라함이 나무를 쌓고 이를 주도하는 가운데 마지막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위 나무에 올려놓았을 때에 이삭은 아브라함의 이 일을 피해 도망을 할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다그치고 훈계할 때에 3학년까지는 어머니의 훈계를 잘 듣는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 어머니가 아이들 앞에 꼼짝을 못한다. 때로는 너무 화가 나서 체벌하려면 그 아이가 어머니의 그 손을 붙잡고 오히려 억제한다. 이삭은 최소 15-20-30세까지의 장성한 모습이었다면 멀찌감치 도망가며 아버지를 항하여서 아버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하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이삭은 순종적이었고 결박당한 체 그대로 누워있다. 참으로 이상한 모습이다. 아브라함이 이제 이삭을 잡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아까 질문의 정답을 찾아봅시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찾아봐야 한다.


*히브리서 11:19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은 비장의 마음을 먹고 그를 정말 죽일 작정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마음은 이미 번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 드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장면이 너무나 극적이기에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당신들의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램브란트가 그린 그림이 참 좋아한다. 지금 보는 이 그림을 보아라. 이 그림은 1635년에 그렸다. 이삭에 희생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 보여 지는 부분이 있다. 천사가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고 힘주어 칼을 떨어뜨리게 만든다. 그런데 그 반대의 손을 보면 얼마나 다급했으면 아브라함의 의지를 꺾기 위해 마치 때리려고 하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대답이라고 하는 듯이 아브라함이 쫄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브라함은 당황했다. 아브라함이 당황하는 저 모습은 이미 그 마음 가운데서 이삭을 죽이려는 결연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아브라함의 믿음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그 이삭을 정말로 죽였다. 그런데 그가 이삭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히브리서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히브리서에 나와 있다.


히브리서 11:17~18: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서 자손들을 주실 거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붙잡고 믿었던 것이다. 믿음이란 막연하게 상황이 열릴 것을 기대하거나 혹은 막연하게 잘 될 거라는 희망, 포기하지 않는 어떤 신념, 이런 것들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통해서 함께 살펴볼 수 있는 믿음은 일반적인 기대와 희망, 신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은 신실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태도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다. 왜 그런가? 그의 평생의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늘 질척거리며, 늘 의심하였던 그의 삶과는 정 반대로 늘 신실하게 주신 그 약속을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나타내고, 드러내고, 이루시고,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 우리 이전 선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신실한 약속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신뢰하며,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뢰하며, 그 신뢰하는 믿음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 그것이 우리 믿음의 선대에게 필요한 믿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종중 학생들이 세상 불안한 느낌으로 부모님을 바라본다. 세상 불안한 눈빛으로 목사님을 바라보고 선생님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입으로는 이제 자기가 소망이 없다고 더는 틀린 인생이라고, 누구에게도 소망이 없는 자라고, 자기만 없으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하면서 부모님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비관하는 자신을 흔들리고 두려움의 모습가운데 오히려 확신에 찬 모습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다라는 것을 부모님의 눈빛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오히려 부모님이 더 그것을 보고 떨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을 모르기에 불안해하는 것이다. 코로나의 사태가 다가올 때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코로나 뿐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녀들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녀의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에? 우리 자녀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아니다. 그런 것 보다. 이 자녀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자녀를 끝까지 약속의 자녀로 키워주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과 현실이 조금은 불안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향하여서 우리의 눈을 고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확신에 찬 눈빛으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야” 하나님이 너를 부르셨고, 너를 세상 가운데 보내시고, 부르시고 널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표현 하고 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사지로 이삭이 비록 내 몰릴지라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겠지만 하나님은 어떤 상황도 해결하실 수 있는 그 믿음만을 붙잡고 아브라함은 나아갔던 것이다. 눈을 질금 감고 아브라함은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꽂으려는 순간 ”아브라함아!“ 급하게 멈추시고 이삭의 생명을 구하셨다. 나는 너의 아들이삭을 바치는 것이 기뻐하는, 인신제물을 바치는 여러 신과 같지 않다. 나는 그런 이방신이 아니다, 나는 비인격적인 이방신이 아니라고 하신다. 내가 너와 화평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은 내가 준비하게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길에서만 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준비하심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탈락, 실패되지 아니하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여호와 이레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 떨어져도 침묵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어쩌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거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 언어를 통하여서 우리가 붙잡아야할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수선대후, 우리가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을 때 상황 가운데 열어줄 것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너를 감당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너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원형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이 우리에게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자녀의 신앙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선대인 우리는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다음 세대를 위해 먼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붙자고 있는가를 점검해봐야 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20년 여름학교는 단순히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수선대후는 우리 아이들만이 아닌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께 달려 나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본 것이다. 계속되어지는 스가랴를 통해서 회복되고, 재건, 그것이 하나님이 온전하게 주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믿음이 되고 이 시간이 선대의 신앙과 후대의 순종이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다시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사랑의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서 나아가 한국과 나아가 세계 가운데로 하나님의 부흥이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는 기회로 그 놀라운 날개짓과 초석이 놓일 수 있는 여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후 예배.
 오늘 주일 학교 축복 송에 감동했다. 대포를 쏘고 시작하고 축하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보니 이 아이들을 보니,,,성도는 신앙 따라서 신앙 지켰네를 생각하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를 생각했다. 워쉽 댄스를 할 때도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환난과 팹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오늘 설교 소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듯이 우리 아이들 이 시대의 옷을 입고, 또 시대에 앞서서 선도를 하지만, 신앙의 본질 헌신과 충성, 영적 전쟁, 겸손, 깨어짐, 고난, 자기 죽음, 십자가, 이런 어떻게 믿음으로 가르칠 것인가? 복음의 순수성에 사랑 의교회가 승리하길 바란다. 왕성교회에서 코로나가 나타나 마음이 짐이 컸다. 우리가 철저히 지켜서 방역을 지키고 이 마음을 가지고 주의 전을 지키고 교회를 죽도록 충성하겠네를 믿고 지켜야 한다. 어려운 교회들이 많은 것도 마음이 아프다. 승리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다. 이 것 외에는 없다. 기도는 타종교도 한다. 우리의 기도의 차이는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는 것이다.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Niothing이고 헛것이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사랑의 교회는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어 기도를 잘 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누가 뭐라해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생각하여 이 신앙 지켜 기쁨이 충만했듯이 그래서 이 여름을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쉽지 않다. 멀리서도 교회를 온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안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사명으로 순교적인 정신으로 모두가 조심하자.


♣요약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준비하신 번제물은 숫양으로 하고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친히 숫양을 준비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준비하실 것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순종하여 큰 시험에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이 임한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들도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인내로 승리하여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수선대후인 믿음의 다음 세대들과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믿고 붙잡고 나아갈 때에 오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다음 세대는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오니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주심으로 어린양을 준비하여 주시고 그 어린양을 통하여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줄로 믿기에 그 아름다움 만남과 기쁨의 회복이 모든 성도와 우리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가슴마다 새겨지기를 원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준비하심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탈락, 실패되지 아니하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여호와 이레인 것이다.
선대의 신앙과 후대의 순종이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다시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사랑의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서 나아가 한국과 나아가 세계 가운데로 하나님의 부흥이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는 기회로 그 놀라운 날개 짓과 초석이 놓일 수 있는 여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쳤다기보다는 철저한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임을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세 번이나 나온다(하늘의 소리1,11,15,). 이로 미루어보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게 된 것은 그의 믿음이 좋아서나 당시 고대근동의 인본주의적 인신제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본문을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400년 후 모세의 제도(레1:1-9)와 맥을 같이하면서 또한 2천년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요19:17,18)과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 직결되는 예표(豫表)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제물은 흠 없는 어린양이어야 한다는 점, 제물은 자발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물은 희생되어 그 피가 뿌려져야 된다는 점 등이다(히9: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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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 6. 24일)

제목:''아버지와 아들''
말씀:누가복음 15:11-20절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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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본문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는 '복음중의 복음이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당시 유대사회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향한 원망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그에게 나아옴을 용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 사람(예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까지 함께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다. 여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 중에 '그 둘째'(아들)에 대한 주님의 비유를 생각해 본다.


Ⅰ. 그 둘째는 자율 방종하는 탕자였다.


1) 그 둘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였다.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여기 '내게 주소서'라는 말 은 청원이 아니고 일종의 명령적 어투의 강요를 의미한다. 그는 구약 신명기 21장 17절에서 명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재산 중 2/3는 장자의 몫이고, 1/3은 차자들의 몫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반역적 어투로 아버지께 감히 강요를 하였다. 누가복음 15장 12절 하반 절에 보면 이에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의 몫을 떼면 나머지는 자연히 맏아들의 것이었다.


2) 그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하였다.
눅 15: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고 했다. '재산을 다 모았다'고 했다. 여기 '다'는 '무엇이든지'를 의미하며,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다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 나라(distant country)! 그곳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상거가 먼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이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이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3) 그 둘째는 허랑방탕했다.
눅 15: 13절 하반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여기 '허랑방탕'은 어떤 기준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낭비생활을 뜻한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했다. 이는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육적 타락의 생활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하였다.


4) 그 둘째는 기생(寄生)하는 종이 되고 말았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라고 했다.
다 없이한 후」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설상가상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결국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더 가난하고,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도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갔다는 말이다. 사람의 어떤 필요에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말았다. '붙어산다'는 말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기생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 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쥐엄열매'는 돼지의 사료이다. 결코 사람의 식료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실로 그 둘째는 육체의 마지막을 만나는 저주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결코 인생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복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둘째!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절망과 싸움을 하는 탕자의 모습이다. 그 둘째!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Ⅱ. 그 둘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말씀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온다.


1) 「내 아버지」라고 했다.
누가복음 15장 17절 상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며, 결정적인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뜻한다.


2) 양식이 풍족한 품꾼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라고 하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하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였다.


3) 그 아버지는 탕자의 소망이다.
누가복음 15장 18-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다.
4) 선수적(先手的) 사랑의 아버지였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선수적(先手的)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①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먼저 보고 마중을 나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떠나 버린 '그 둘째를 잊지 않고 늘 고대하며 기다린 사랑의 표'이다.


② 측은히 여겼다. 이는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 준다.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의 죄와 죄로 인해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 둘째만', 자식만 보인 결과이다.


③ 달려갔다. 바로 사랑은 여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④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선수적 사랑(initiative love)이다.
저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 아버지 야곱이 30년 세월 후에 만났을 때, 그 부자(父子)도 이렇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5) 온전한 회복의 아버지였다.
돌아와도 겸손하게 성령 충만으로 돌아가야 한다. 큰아들은 욕심을 내지만 나중에 받을 상급보다는 지금 현재 누리지 못하는 것에 불만하고 있다. 예수님께 찾아온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습이다. 아버지는 문밖에 큰 아들을 향해 위로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폼페이의 웅장함이 지진으로 어마어마한 폼페이가 묻힌다. 폼페이를 후에 발굴하고 보니 발굴자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보초병이었다.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그림의 설명을 보라. “하늘에서 화산대와 불이 눈송이처럼 품페이 성 안에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기 위해 성문 밖으로 밀려 나가기에 온통 아수라장이 돼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성문을 지키는 군인 한 사람이 성문 곁에 서서 전혀 동요 없이 보초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보초 임무를 완수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제목이 '충성'이다. 우리는 한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내가 감당할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그 충성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주님을 찾는 자가 되어라. 주님께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 요약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낭비합니다.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게 되자 그는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며 큰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내 몫을 달라 하며 먼 타국으로 떠나려는 죽어 마땅한 패역한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돌이켜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아버지 품 안에서 내 것을 찾기 위해 어쩌면 위장된 성실, 위장된 순종을 하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이 또한 스스로 돌이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올 때도 제대로 돌아와야 한다. 겸손하고 완벽하게 회개하여 주님 앞에 회복되어 온전한 자세로 충성 되이 바로 서야 한다.그 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은 때까지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우직하고 충성스런 사명을 다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내가 회개와 회복을 위해 속히 제자리로 돌아와 보초병처럼 충성하는 자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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