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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6월2일)

제목: ''온전한 선교를 이루는 교회''
말씀: 요한3서 1:5~8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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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1:5~8,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성도의 온전함 블레싱 기도회를 오신 모든 분들을 주 예수님 이름으로 환영한다. 6월이 오자마자 날씨의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여름에도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채워주시길 소망한다. 오늘 주신 본문을 보자. 요한3서는 2절이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2절을 많은 분들이 암송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을 너무 사랑하는 어떤 교단도 떠오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요한3서의 전체의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다. 요한삼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곳에 나오는 두 명의 인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바로

첫 번째 인물은 가이오이다.
두 번째 인물은 디오드레베이다.
성경에서 보면 가이오라는 인물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마케도니아 출신인 가이오, 더베 출신 가이오, 로마 출신 가이오, 고린도교회에서 나오는 바울이 세례를 준 가이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이오이다. 그래서 요한삼서에 나오는 이 가이오도 앞에서 언급되는 어느 한 명이 아닐까를 생각할 수 있다. 정확하게 기록에 남긴 것이 없기에 누구인지 잘 살펴볼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흔한 로마식 이름이었고, 이방인이었던 사람이 복음을 듣고 교인으로 성장했던 초대교회의 사람이었다. 이 요한삼서를 통해 흥미롭게 살펴볼 것이 있다. 짧은 한 장의 본문에서 이 본문에서 사도 요한, 스스로를 자녀라고 칭한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사랑하는 자여’를 총 다섯 번이나 사용한다. 내가 참으로 사랑한다고 1절에서 말했다. 2절에서도 그 사랑하는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그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축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가이오를 진실로 사랑하고 마음속으로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인가?


귀납법적으로 대답을 하는 것은 훈련을 통한 사역훈련을 하고 있기에 바로 이렇게 전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가이오를 사랑하고 축복했던 이유는?

*요한삼서 1:3,4절을 보면,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가이오를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어서 그 가이오를 사랑하고 축복한다고 사도는 이야기 한다.
그럼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 좋은 말 같지만, 가이오가 어떤 일을 행하였기에 그러는가? -바로 5절과 8절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요한삼서 1:5,8절을 보면,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나그네 된 자들을 위해서 신실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8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나그네 자들을 잘 대접했다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나그네를 잘 대해서 바로 가이오늘 사랑과 축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가?
-성경 전체에도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여러 곳에서 명령하고 있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그네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그 때 나그네였으니 너희도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 또한 신약에서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부지중에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차원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지만, 특별히 여기서 요한 사도가 언급하는 나그네는 좀 더 다른 특징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삼서 1:7절을 보면,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여기서 나그네를 위해서 표현하는 쓰여 졌던 용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갔고, 이방인을 위해서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나그네들을 살펴보면,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또 주의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 순회전도를 하고 있는 말씀 사역자들이다.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쓴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 이단들의 가르침이 너무도 성행하였기에 그 이단들의 가르침 속에서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강력한 복음을 전파할 책임이 있었기에 사도들이 기른 여러 제자들을 여러 곳으로 파송(派送)했고, 바로 그렇게 파송된 나그네가 이 나그네들이다. 요한 서신이 쓰여 졌던 가장 강력한 이단은 헬라 철학자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이다. 설명을 하자만 좀 어렵지만, 그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적인 것만이 선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이 몸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사실마저도 부인하고 있었다. 요한이서에 보면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이 잘 나와 있다.


*요한이서 1:7절에 보면,

7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만 강조하고 그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면서 은혜로 보이는 육신의 세계는 아주 폄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다보니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보였을 뿐,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라고 가르치기까지 했다. 그런 가르침이 영지주의자들의 사고이다. 이에 맞서 요한사도는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을 강조했다. 그분은 친히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과 같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신 것이라고 그의 서신서와 요한복음에서 밝혀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배고프기도 하셨고, 친히 밥상을 차려서 제자들에게 먹이기도 하시면서 온전한 사람이요 온전한 하나님으로 이 땅 가운데 사셨던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2절의 축복을 보면,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영적인 것만 강조했던 영지주의자들에 반하여서 영원히 잘 됨과 같이 하나님의 축복에는 범사가 잘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터와 우리가 강건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이 이 안에 가르침이 담겨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가르침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것만을 다스리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주인이시고 이 모든 세계 가운데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회가 성장하였고, 사도들이 다 직접 다니면서 가르칠 수 없기에 사도들의 제자들이 많은 교회를 다니면서 제자들이 말씀을 적고 복음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른 자들에게 힘 있게 복음을 전파하며 교회를 개척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나그네들이 바로 선교사와 같은 자들이다. 전도자와 같은 자들이며, 가이오가 칭찬받은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와 같은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다. 복음을 위해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그 분들을 지극한 정성으로 영접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받았다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디오드레베를 생각해 보자.


*요한삼서 1:9절을 보면,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 도다.
-디오드레베 또한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가이오와는 달리 순회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후원하는 일을 금하고 있다. 오히려 주의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바로 그 선교사와 같은 분들을 비방하였고, 그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 순회전도자들을 잘 영접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려 하는 그런 일을 서슴치 않고 행했던 자가 디오드레베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9절에 그가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이 디오드레베는 어떤 인물로 분석되는가? 바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개척되고 이방의 많은 사람들, 주님을 한 번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관심은 그저 자기 자신이었다. 그러다가 으뜸이 되고 높아지고 교회에서 많은 권력을 갖고 자기의 생각과 자기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바로 그것 하나에만 관심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많은 다양한 사람이 모이기에 가이오와 같이 하나님의 복음 사역과 선교사들, 주의 말씀이 전파되는 바로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잘 섬기는 분이 있는 반면, 디오드레베와 같이 자기 자신이 교회 안에서 으뜸이 되고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더 많은 권력을 위해서 혈안이 된 사람도 있음을 보게 된다. 평소 사랑의 사도로 알려진 요한은 10절에서,

*요한삼서 1:10절에 보면, 10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 도다.
- 요한 사도는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사도가 그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을 때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그 죄악을 밝히고 엄중히 징계와 치리를 하겠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도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불렸지만, 과거 예수님께서는 불의 아들이라고 부르셨다. 한 성깔을 하였는데 디오드레베를 생각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느 정도 이 본문을 다 살펴보았는데, 이 요한삼서를 더 깊이 있게 살펴보자. 8절에 보면, 이 요한삼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의 말씀이다. 바로 가이오가 진리 안에 바로 서서 칭찬을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진리 안에서 행하고 진리 안에서 같이 행하는 복음의 동역자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진리 안에서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 하는 선교를 위해서 함께 동참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하는 그 위대한 일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갈 이유가 여기 있음을 발견해야 한다. 혹시나 디오드레베의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닌가를 살펴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이 관심은 ‘자기’가 있었다. 우리 또한 모든 관심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를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기도와 내가 갖는 관심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서 간구하고 있는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이 무엇이며, 많은 것을 기도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핵심이 내가 잘되고 내가 좀 더 편하기 위해서라면, 나또한 디오드레베와는 별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칭찬을 받은 가이오는 어땠는가? 진리 안에서 행했다. 하나님을 전파하기 위해서 기꺼이 자기의 많은 것을 드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섬겼음을 볼 수 있다. 오늘 가이오를 통해서 우리가 진리를 위해 함께 일 하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어떤 것을 힘써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요한삼서 1:6,8절을 보면,
6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8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특히 이 사도는 가이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고 있다.

첫째는 전송(6절), 둘째는 영접(8절).
-길을 떠나는 사람을 잘가라고 하는 인사이기도 하지만, 신약에서의 전송은 다르다. 헬라어로 프로펨프라고 쓰이는 이 단어는 특별히, 초대교회에서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로 쓰였다.
※씨지 다드라는 학자가 이 본문을 주석하는데, 초대 교회시절 일종의 선교 전문 용어로서 순회전도자들을 후원하는 것을 전문적으로 조직하고 돕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어서 로마서


*로마서 15:24절을 보면,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여기서 너희는 로마교회이다. 바울이 그토록 가기를 원했던 땅 끝 서모나, 스페인 땅을 말한다. 로마 교회 성도들과 어느 정도 머문 후에 로마교회 성도들이 서머나, 여기서 말하는 전송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들이 다음 선교지로 떠날 때에 여비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다 준비했다. 교통편, 숙소, 경비까지 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을 위해서 선교사들을 위해 초대 교회는 이러한 계획과 이러한 헌신을 한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많은 헌신을 하고 재정적인 것을 채우고 이렇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전송하며 특별히 선교를 위해서 힘썼던 이유가 있다. 바로

*요한삼서 1:7절에 보면,
7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복음 사역을 위해 헌신 하였지만,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기대하지 아니했다. 그들을 향한 헌신이 마땅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복음을 위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선교사들, 또 순회 전도자들을 위해서 그 교회는 돌아봐야 된다고 사도는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주의 종들이 풍족하게 되면 게을러져서 기도도 안한다고 해서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풍족하게 후원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바가 아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기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돌보는 것이 교회의 가장 본질이 된 일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사도성, 이것은 아포로톨리스=사도, 보냄을 받은 자이다. 이 사도는 보낸 분이 일을 맡겼다. 보낸 분이 맡긴 일이 중요하니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요한복음 20:21절을 보면,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도성을 가장 중요시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예수님께서 처음 하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분명하게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사도이셨다.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원 계획을 몸소 일으키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아버지께로 가기 위한 새로운 길, 산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도로 오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듯이 이제는 이 보냄의 권세를 받는가? 바로 예수님께서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잘 아는 지상 명령인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처럼,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 땅 가운데 사도로 보내시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 계획을 성취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사도가 이제는 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곳 교회가 이 사도의 귀한 사역을 계승하여서 하나님의 일꾼을 보내는 장면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3장에 안디옥 교회가 개척된 이후에 금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금식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고, 그를 선교사로 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그래서 그들을 선교사로 보내고 열심히 기도하고 후원하는 그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교회란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께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 쓰신 그 사도의 직분을 이어받아서 하나님의 말씀 사역자들, 하나님의 사람을 파송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교회 사도성에 대해서 교회가 많은 가르침을 주신 분이 한스킨인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스킨 - 교회가 된다는 것은 선교를 한다는 것과 별개의 일이 아니다.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교회가 복종을 통해 계속적으로 인정하고 나타내는 것에서 사도성은 계승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사도성을 계승하는 것을 가장 영광스럽고 그 분명한 일은 선교사, 그 복음 전파자들을 이 땅 가운데 보내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교회란 하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는 책임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바로 파송 받은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돌보고 계시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요한복음 8:29절에 보면,
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파송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동행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고 아버지가 요청하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위대한 사명을 이루시게 도우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고 어떻게 하셨는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이, 주의 복음전파자들이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안 보시는 것 같지만, 스데반은 보았다. 순교의 그 순간에도 서서 기다리고 계시며, 손을 벌이면서 그의 사역을 마무리 하셨다. 교회가 사도이 이 계승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돌보듯이 복음의 사역자들을 위해서 영접하고 돌보는 것이 마땅해야 한다고 이 가르침에서 말씀하고 있다. 가이오가 칭찬을 받은 이유가 이것이다. 복음을 위하여 주의 진리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전송하고 영접하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동참했기에 사도는 그를 칭찬하고 기뻐하고 축복했다. 이와 같은 선교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7절에 있는 삶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받지 아니하고 주의 복음을 위해서 나아가는 일을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이 상황을 살펴보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두 가지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첫 번째 주님의 기도,
두 번째 기도는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청해야 할 두 번째의 기도가 지속적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비포와 에프터가 중요하다. 선교에서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과거에는 디오드레베로 살았지만 이제는 이 온전함의 말씀을 듣고 다른 어떤 것보다 선교에서 만큼은 비포와 에프터가 이것이 분명해져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듣고 가이오와 같은 사람되길 원한다. 내 자신만을 위해서 나하나 잘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가이오와 같이 주의 진리에 동참하고 함께 일하는 헌신 자가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복음을 위한 기도와 헌신을 해야 하며, 선교를 위해 돕는 일에 함께 동참하고 후원하는 일에 적극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주의 복음을 위해 디오드레베와 같이 하지 말고 가이오 같이 나그네들을 정성껏 섬기어 하나님께 귀히 사용되어 하나님의 온전한 선교를 이루는 교회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들이며 아마 요한 사도에 의하여 파송을 받은 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을 위하여 나간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고 값없이 나누어 줄 복음을 들고 나갔다. 그런데 직접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 받지 않았어도 그 전파를 위하여 공헌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은 그것을 처음 받는 사람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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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09 회 경제상식퀴즈

1.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여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세상을 뜻한다. 게임, 업무, 교육 등 활용 분야가 넓어지고 있는 이것은?
  1. ① 클라우드
  2. ② 메타버스
  3. ③ 테이퍼링
  4. ④ 로스컷
2. 주식, 채권, 원자재, 통화 등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특정 지수의 움직임에 따라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상장지수펀드는?
  1. ① ESS
  2. ② ELS
  3. ③ ETF: 
    Exchange Traded Fund
    ETF는 주식·채권·원자재·통화 등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특정지수의 움직임에 따라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설계한 지수연동형펀드이다.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집합투자상품으로 해당 원자재나 관련 기업에 투자한다.

  4. ④ ELF
3.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에 활용되며 여유 전력을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도록 만든 에너지 저장장치는?
    1. ① ESS:
      Energy Storage System 에너지 저장 시스템
  1. ② ELS
  2. ③ ETF
  3. ④ ELF
4. 국가가 보유한 자본, 노동 등의 생산요소를 최대한 사용하면서 물가 상승을 유발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성장률은?
  1. ① 명목성장률-경상성장률은=명목성장률(nominal growth rate)이라고도 쓰인다.
  2. ② 실질성장률
  3. ③ 잠재성장률
  4. ④ 경상성장률
5. 금융회사에서 대출을 이용한 사람이 취업, 승진, 재산 증가 등으로 신용상태가 좋아졌을 때 금리를 낮춰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1. ① 청약철회권
  2. ② 항변권
  3. ③ 금리인하요구권
  4. ④ 자료열람요구권
6. 미국과 일본, 인도, 호주가 참여하고 있는 안보협의체를 가리키는 말은?
  1. ① 사드
  2. ② 쿼드
    중국에 맞설 '쿼드' 협력 강조
  3. ③ 님비
  4. ④ 카르텔
7. 2004년 한국이 사상 최초로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나라는 어디일까?
  1. ① 스페인
  2. ② 미국
  3. ③ 칠레
  4. ④ 포르투갈
8. 기업이 보유한 자산 중 환금성이 높은 현금, 수표, 통화대용증권, 보통예금, 만기 3개월 이내 단기금융상품 등을 포함한 개념은?
    1. ① 가상자산
    2. ② 현금성자산
    3. ③ 재고자산
    4. ④ 고정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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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 스토리

-신제품이 너무 잘 팔릴까 걱정?…''카니발리제이션''의 딜레마-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서 사진을 찍던 시절, 필름 시장의 독보적인 1위 업체는 미국 코닥이었다. 1880년 설립된 이 회사는 세계 표준이 된 35㎜ 필름을 내놨고 시장점유율이 한때 90%에 달했다. 그러나 디지털 카메라의 급속한 확산에 대응하지 못하고 2012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지금은 변화를 두려워하다가 망한 기업의 대표적 사례로 경영학 교재에 남아 있다.

사실 코닥은 1975년 일찌감치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해 뒀다. 세계 최초 디지털 카메라를 1981년 출시한 일본 소니보다 6년 앞섰다. 하지만 만들기만 하고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괜히 필름 매출만 깎아먹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훗날 공개된 1981년 코닥의 내부 보고서는 디지털 카메라가 불러올 시장 충격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대응을 망설이다가 최대 희생양이 된 셈이다.한 식구인데…아이패드와 맥북이 싸운다?

코닥이 걱정했던 상황을 카니발리제이션(cannibalization)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자기잠식 효과’라고 한다. 기업이 새로 내놓은 제품이 매출 증대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기존 주력 상품의 매출을 떨어뜨리는 현상을 뜻한다. 이 단어의 어원은 약간 섬뜩하다. 동족 살해를 뜻하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에서 유래한 것이다.

카니발리제이션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기업의 고민거리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가 갤럭시A라는 이름으로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할 당시 고가 제품인 갤럭시S 매출을 잠식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수익성 낮은 신제품이 수익성 높은 기존 제품을 대체하면 회사 전체에 도움이 안 된다는 논리였다. 하이트진로가 테라라는 맥주를 선보일 때는 같은 회사의 하이트가, 농심이 짜왕을 내놓을 때는 짜파게티가 비슷한 걱정을 들었다.

하지만 자기잠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제품 출시를 미루면 경쟁사에 기회를 내주는 꼴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은 경쟁사의 시장 침투를 막기 위해 꾸준히 신제품을 출시한다. 애플의 경우 맥북 수요를 빼앗을 수 있는 아이패드, 아이팟 수요를 잠식할 수 있는 아이폰 등을 지속적으로 내놓으면서도 성장을 이어왔다. 뒤집어보면 자기잠식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시장에 아직 성장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뜻도 된다. 내가 차지하지 않으면 경쟁사가 비집고 들어온다는 얘기다.자기잠식 겁내는 기업, 성장에 한계 올 수도

은행연합회는 최근 금융위원회에 “금융지주도 인터넷전문은행을 설립할 수 있게 해달라”는 의견서를 냈다고 한다. 인터넷은행은 점포 없이 온라인으로만 영업하는 은행으로,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 두 곳이 영업 중이다. 은행연합회의 요구는 국민·신한·하나·우리 같은 대형 금융그룹도 인터넷은행을 직접 세워 경영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오프라인 점포와 직원이 많은 전통 은행의 특성상 아무리 애를 써도 디지털 전환 경쟁에서 인터넷은행에 뒤처진다는 이유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카니발리제이션을 우려해 인터넷은행 진출에 회의적인 목소리도 많다고 한다. 은행들의 요구는 아직 가벼운 아이디어 수준인데, 향후 전개가 주목된다.

기업들의 경쟁은 ‘졸면 죽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숨가쁘고 치열하다. 《혁신 기업의 딜레마》라는 경영학 서적으로 유명한 고(故)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선도기업의 실패 원인이 “해오던 방식대로만 열심히 해서”라고 짚었다. 만약 40여 년 전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를 내놓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필카’에 이어 ‘디카’ 시장까지 장악하며 승승장구하진 않았을까. 물론 코닥이 영원히 사진 명가의 위상을 지켜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디지털 카메라조차 스마트폰에 밀려 순식간에 시장이 쪼그라들었으니 말이다.

임현우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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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5월 30일)
제목: ''관계(關係)의 온전(穩全)함''
말씀: 마태복음 22:37~40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기도: 유이삭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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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2: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인구 절벽 시대에 오늘 143명의 유아들이 세례를 받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린다. 유아 세례는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하여 거룩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주의 음성이 되는 것이다. 아이를 하나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 대통령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우리는 그래서 모두 한국교회와 우리교회가 믿음의 계승을 이루어가야 한다. 오늘은 관계의 온전함 5번째 시리즈이다.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야 사람과의 관계와 자연과의 관계가 좋은 것이다.

오늘 본문운
*마태복음 22:35-36절을 보면,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다. “예수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신명기 6:5,을 인용하시면서 대답하신다.

첫째 된 계명=>*신명기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된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39절에 다시 둘째를 말씀하신다.
둘째 된 계명=>*마태복음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네 이웃을 제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신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은 토대(土臺)요, 골자(骨子)요, 핵심(核心), 키(key), 기본(基本)이라는 뜻이다. 이 내용들을 주님 말씀하시는 배경은 바로 앞에 23절에 보면,
*마태복음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사두개인을 이야기 하고 있다. 사도개인은 성경학자(scholar)였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고 말한다. 자기 높은 지식을 가지고 취사선택(取捨選擇)을 한다.
-다른 한 사람은 율법교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다 구약을 다 믿고 지키는데, 그런데 그 생명지식이 가슴에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종교인이다. 우리가 교회를 오래 몇 십 년을 다니다보면 나도 모르게 이러한 성향이 있을 수 있다. 편향적 성경지식, 머리지식이 가슴에까지 내려가지 못해서 생명지식이 되지 못한다. 오늘 이 유아세례와 이 예배를 통하여 그야말로 사두개인적인 것, 바리새인적인 것, 율법교사적인 것들이 정리가 되길 바란다. 생명지식이 되길 바란다.

그러면 생명지식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이 대강령이라고 토대요 골자요 키요 기본이라는데 이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더 이해를 잘 할 수 있는가?


I. 파격적 주님의 명령

-핵심은 네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생명지식이 될 진데, 생명지식이 되는 것이다. 부부간에 이웃 간에 모두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인간의 죄성, 인간의죄의 뿌리를 잘라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죄의 뿌리를 잘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관심 갖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되었다. 타락한 이후에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 가인과 아벨의 형제관계가 깨어진 것처럼 관계가 깨어진 것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포스트코로나 이후에도 자기 행복만 계속 추구하고 남의 행복에 대해서는 둔감하고 관심을 갖지 않은 잘못된 자기 사랑이 죄의 뿌리이다. 오염된 관계를 정리하고 근본적으로 죄의 뿌리를 잘라내라 이다. 이것이 파격적인 명령이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연스럽게 자기사랑 하는 것은 창조질서였다. 음식을 먹고 자기가 보호받고 싶고 또 삶의 대한 보람을 갖고 싶고 안전하고 싶고, 편안한 집에 살고 싶고, 코로나 펜데믹 가운데서도 우리가 건강하게 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인간이 죄로 오염되어서 창조 질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자기 사랑이 오염되었다. 이것이 문제인 것은 자기만 만족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며 죄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착각이 죄이다. 조심스러운 것이다. 본인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22:40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염된 자기 생각을 잘라내라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의 관계, 종교적이 아니라 참된 사랑의 은혜를 수여받는 것이다. 네 이웃을 위해서도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고, 창조적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고 살아야 한다. 이웃을 위해 힘을 쓰고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우리 인생이 원더풀해진다. 우리 삶이 놀라워진다.


II. 네가 잘돼야 내가 잘된다.

-네가 살아야 내가 산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싶다면,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면 참된 사랑이 되고, 삶의 질이 높아진다. 이웃의 필요에 배려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면 된다. 우리의 삶을 놀랍게 경험하게 되며, 창의력을 갖게 될 것이다. 잘 섬기면, 놀랍게도 끊임없이 신선하게 하나님이 주신다. 거룩하고 극대화되게 해주신다. 부족하지만 남을 사랑하고 섬기고 살아야 한다. 주님이 숨은 재능도 주실 것이다.

발명와 에디슨이 백여 년 전에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싶었다. 하나님이 에디슨을 통해 빛을 만들게 하신 것이다. 빛이 들어오고 나서 귀신이 다 사라졌다. 삼국지의 조자룡을 좋아한다. 그른 남을 성공시킨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찌된 일인지 남을 잡아당기고 내려뜨린다. 이제는 남을 잘되게 해야 리더가 되는 것이다. 남을 살리는 사람이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대표적인 분은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다고 하신다. 이것이 내 자신을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남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생명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도 버리셨다. 남을 섬기려 하면 창의력이 생길 것이다. 교회로 말하면 개척교회 심정으로 섬겨야 한다. 어떻게 하면 섬기는지를 생각해라. 그렇게 한다면, 멋진 기업인들이 나올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남을 끌어내리는데 전문가가 많다. 저 사람으로 인해서 내 파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파이를 창출해야 한다. 경쟁구도가 아니라 미션구도로 나아가야만 한다.

단순한 감정이 아닌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헌신된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경쟁구도가 아닌 함께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일을 창출해야 하고 함께 감당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오병이어 사건을 보라. 어린아이 하나가 그것을 주면 못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처럼, 커져서 없어지는 것이 아닌 더 큰 축복으로 채우셨다.

*누가복음 4:25~26,
25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 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이 상황 가운데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과부에게 갔다.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사렙다 과부는 기름병과 밀가루 남은 것을 엘리야에게 주게 되어, 그것으로 그 파이가 기근을 살려냈다. 끊임없이 기름과 밀가루가 생긴 것이다.

이제는 남이 잘되어야 내가 잘 된다. 어려운 사람을 잘 살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남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 잘 사는 사람 끌어내리지 말고, 더 밀어주며, 어려운 사람은 더 잘 살도록 끌러올려 주어라. 우리 민족은 정신적인 대 전환이 필요하다. 진정한 이웃사랑이 필요하다.


▶핵심은 하나님은 남이 잘되게 바라는 자를 그 자신도 잘 되게 하신다.
-남이 잘되어야 나도 잘 된다.



※LA 다운타운에 가면 금방은방이 많이 있는 곳이 있다. 어마한 금방이 모여 있다. 같이 자리하고 있어야 장사가 잘된다고 한다. 남이 잘돼야 내가 잘된다. 이것이 관계의 온전함의 key이다. 힘든 이웃이 다 포함된다.

*고린도후서11:24, 바울의 고백이다.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바울은 유대인들은 골육의 지체라 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죽지 않을 정도로 바울을 채찍질 하던 유대인들에게 지체라 했다. 이웃사랑, 형제 사랑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로마서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ㅡ이것이야말로 오염된 죄의 뿌리를 끊었고 그 이후로 바울은 창의적 신학자, 창의적 사도가 되었다.
손양원 목사님도 이 고봉을 쳐다보고 실천했다. 그런데 바울처럼 깊은 은혜의 신비에 도달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다 기본적으로 율법이요 강령인 이웃사랑을 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의 차원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주신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자연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연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완벽함이 있었지만 창세기에서 자연이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17,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다. 환경오염과 자연오염은 인간의 죄악이 꽈리를 틀고 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면,

*에레미야 12:4,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 그 악함 때문에 자연도 저주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이 받은 저주가 로마서에 나와있다.

*로마서 8:19,21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모든 자연도 죄악 때문에 저주를 받았는데,

*골로새서 1:20,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만물도, 땅도 회복된 줄로 확신한다.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만물의 땅도 회복된다는 것이다. 복음이 들어가면 자연환경이 회복된다. 한국이 자연이 훼손되지 않고 친환경적이길 소원한다. 복음에 능력이 자연도 회복되게 할 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이웃 사랑은 그냥 윤리로 끝나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자연 사랑도 범신론적이다. 그런 것들을 돌파하는 신실한 올바른 관계의 주님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없는 이웃사랑은 윤리와 어떤 세상의 규범으로 끝나고,
♤하나님 없는 자연사랑은 범신론적으로 끝난다.(나무 앞에 빌고 기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는 인공지능 시대(AI시대,(artificial intelligence))이다.

이제는 이 관계에 관해서는 은혜를 주셔서 우리는
Spiritual Intelligence-영성지능 시대로 우리를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Servant Intelligence-섬김지능 시대로 개발되어 자연도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자연을 치유해 주시길 소망한다.

♣요약
-잘못된 자기 사랑으로 남을 끌어내리는 그 죄성 있는 뿌리를 잘라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남을 잘되게 하고, 끊임없이 신선한 창의적으로 남과 이웃을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크고 놀라운 은혜로 인도하실 것이니 남이 잘되게 하여 주님과 온전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ㅡ첫째 되고 큰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할 첫째 되고 큰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는다.
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할 것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7절)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사랑하는 것은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우리의 하나님이신 그에게 순종하고 의지함으로써 그를 따르는 것이다.
②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 이 말들이
하나의 의미를 가진 똑같은 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즉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의 말들이라고 한다. 또한 그 말들을 각각 구별하여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마음과 목숨과 뜻은 각각 의지와 감정과 이해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며 단지 말과 혀로만 나타내는 사랑이 되어선 안된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강렬한 사랑이어야 하므로 우리는 가장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독자적이면서도 최고의 사랑이어야 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그 밖의 어떤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분산된 마음이 아니라 연합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영혼의 온 힘을 바치며 하나님에게 그 영혼의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왜냐하면 이 계명에 대한 순종은 다른 모든 계명들에 대한 순종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순종은 사랑으로부터 나올 때에만 열납 될 수 있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둘째로 큰 계명이다. 둘째는 그 같으니. 둘째로 큰 계명은 첫째 되는 큰 계명과 같이 둘째 돌비에 새겨져 있는 모든 계명들을 총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과 유사하다. 왜냐하면 둘째 계명은 첫째 계명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또한 첫째 계명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 둘째 계명 속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며 또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 부정한 자기 사랑이 있는데 이런 사랑은 제거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적이며 가장 큰 의무의 규칙이 되는 자기 사랑은 보존되고 성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곧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 속에 담긴 위엄을 적당히 존중하고 우리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복지에 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 둘째 계명 속에는 또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존경해야 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부당하게 대하며 감정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참되고 성실하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이 계명들의 중요성과 위대성은 무엇인가?
모든 계명은 사랑의 율법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율법을 제거해 버리면 모든 계명들은 효력을 잃고 쓸모없이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계명들보다 더 뛰어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율법의 정신으로서 율법에 생기를 준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다른 의무들의 원천으로서 성경 전체, 곧 율법과 선지자뿐 아니라 복음의 요약이 되는 것이다. 모든 계명들은 이 두 계명과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에 맞추듯 이 두 계명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개념과 명칭과 언쟁에 힘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이 계명들을 지키고 증거 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야 한다. 모든 것들은 이 두 계명의 강력한 힘 앞에 굴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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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5월 29일)

제목: ''한결 같은 신앙순도 유지(II)''
말씀: 시편 103:1~5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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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3:1~5,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신앙의 순도가 유지되려면,,,
두 종류의 인생이 있다.

첫째는 - 성령께서 사로잡힌 자이다. - 이 새벽에 여기 나와 기도하고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은 성령께 사로잡힌 자들이다. 그 인생은 한결같은 신앙(信仰)의 순도(純度)를 유지(維持)한다.


둘째는 – 자기 뜻에 사로 잡혀 사는 자이다. - 내가 컨트롤 하는 인생은 사탄에게 속는 삶이다. -분제는 자기 뜻에 사로잡혀 사는 자가 문제이다. 내가 내 뜻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엄밀히 자기 뜻에 사로잡힌 자는 사탄에 속고 사는 것이다. 내 고집을 내 세워 영적으로 어리석기에 예수님을 깊이 알아서 지각을 살려서 분별하고 이것을 돌파해야 한다.


*사탄에 있다는 것은 =>무지이다. 고집, 어리석음 영적어림이기에 그렇다.


-다윗의 고백을 우리 아이들이 방금 성경을 읽었는데 기쁘다. 그러나 과연 아이들이 이해할까? 이 아이들이 정말 자기 것으로 고백하고 이해하고 안다면 따 놓은 당상(堂上=당상관)인데, 앞길의 당상이다. 우리 신앙인은 늘 조심해야 하는데, 내 생각이 성령으로 사로잡혀 있는지를 아니면 내 뜻에 잡혀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탄에 속아 쫓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앙의 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맑아야 하고 순전해야 하며, 나름대로 늘 확인하고 조심(操心)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모르게
성령의 생각을 지켜주신다. 업로드 할 것은 곡조 있는 찬양과 기도를 통해 우리를 힘과 능력으로 대이동시켜 주실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하다. 우리 권속들은 토비새 믿음의 4세대로서 이렇게 사모하니 예수님에 대해서 깊이 알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뜻에 잡혀 살지 말고,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성령께 사로잡혀서 성령이 주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을 해야 한다. 그것이 축복이다.


※초대교회 정통교회를 확립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던 암브로슈스 감독이 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말했다.
“내가 아플 때는 예수님이 약이 되셨고,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예수님이 힘과 에너지가 되셨고,
내가 죽음을 두려워 할 때에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 되셨고,
내가 천국을 갈망할 때에 예수님은 나의 천국 길을 주셨고,
내가 사방이 어두울 때 예수님은 나에게 빛이 되셨고,
내가 굶주릴 때 예수님은 내 양식이 되셨다.”
-생각해보면 ‘암브로슈스’가 나의 약, 힘, 생명, 길, 빛, 양식이 되셨다고 한다. Any case,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한 답을 하나님이 주시니 그는 신앙에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도 한 결 같이 흔들림이 없었어야 한다.


*오늘 시편 103편은 다윗의 일생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다. 시편 103편이 성경 전체를 말씀하는 것이다. 1~5절까지 보면, 내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한 결 같이 신앙의 순도가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 모든 은택을 주신다. Any case situation.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경우에도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내 모든 병을 고치셨다.
지금 이 코로나 모든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은택을 주셨다.


‘은택, 은총, 긍휼, 은혜, 자비‘ 사랑이라는 말은 (헬라어로)-카리스(Karis)이며, (히브리어)로 –헤세드(Hassed)이다. 이것을 입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사랑과 충성을 고백 할 수밖에 없다. 신앙 순도를 유지한다. 사랑과 충성을 고백한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신앙을 업앤다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순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신앙의 순도가 유지 될 때에 내 모든 죄와 병을 해결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해결되면 민족적으로 해세드, 카리스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두 종류의 인생인데, 사탄에 속지 말고 은혜로 해딱해딱 말고 묵묵하게 신앙의 순도를 유지해야 한다. 모두가 한 결 같이 내 속에 있는 것들아 감사하라ㅡ이것이 본능적 감사이다. 내영혼아 송축하라!~~우리는 잃을 것이 많다. 가정 자녀를 생각해서 귀한 것이 많다고 여기고,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는다. 나는 잃을 것이 많다 적다는 영적인 대차대조표를 해보라.~ 내가 받은 은총이 크기에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이 시대 정말 잃을 것이 많으니 본능적으로 깨달아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체적인 축복, 구체적인 benefit(보상), 그 구체적인 보상이 무엇인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은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내 속에 있는 것. 함부로 내 몸 내 생각은 하지 말고 귀한 은택이 많으니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그 모든 죄악을 사하신다.


*본문에 시편 103:3~5,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다섯 가지만 있으면 만사 O.K이다. 한결 같으면 우리는 지치지 않는다.
① 죄악을 사하심
② 모든 병을 고침
③ 내 생명을 속량
➃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고
⑤독수리 같이 하신다.

-이 다섯 가지만 있으면 신앙의 순도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렇게 지킬 때, 우리는 그렇게 신앙의 순도를 유지하면, 화장실도 죽을 때까지 스스로 갈 것이다. 우리의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는다. 바보 같은 인생이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내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내 모든 병을 고치신다.


*나를 치료하신 여호와 라파 질병을 치료하신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신앙의 순도를 가지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심을 믿어야 한다. 어떤 질병인가?
-1. 영적 질병 - 하나님의 관계가 깨지는 이런 질병이 영적 질병이다.
-2. 정신적 질병(Mental disease) -우울증, 의부증, 심리적 질병이다.
그래서 모두 자비와 긍휼과 사랑으로 헤세드로 치유해 주실 것을 믿는다.
-3. 관계적 질병 –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갈등과 싸움과 원수 분노가 있는 질병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화해사역으로 주님 치유하신다(Reconsimulation).
-4 성격적인 질병 – 성품, 성격적으로 지나친 고집, 과거로 아파하는 자, 격한 분노, 자기 과대평가 지나친 열등감, 교만 등이다. 이것도 성격상의 질병도 주님이 치료하실 것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순도를 유지하여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
-5 육체적 질병 – 코로나로 무증상 환자도 많다. 자기도 모르게 왔는데 그냥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과 접촉만 안하면 끝나고 스스로 백신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각종 질병들도, 디스크 각종 암, 당뇨 육체적인 질병도 모든 질병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일반적인 병도 의료와 약품을 통해서 주님이 치유하실 것이다. 일상적이 치유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치료자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이신 헤세드와 카리스를 사모하고 나아갈 때에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실 것을 믿는다. 의사와 간호사는 자연 치유를 돕는 보조자일 뿐이다. 아무리 똑똑한 의사라도 피부의 세포하나도 못 만든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모든 병의 치유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한 결 같이 신앙 순도 유지하여야 한다.


♣요약
우리는 한 결 같은 신앙의 순도를 유지하여 온전한 지체들로 살아 가정과 공동체에 은혜를 선포하고 충만한 그 은혜를 채워서 생명을 살리는 자로 살아야 한다. 여호와를 찬양하고 전인격적으로 주님을 경외하면, 모든 죄와 질병을 해결해 주실 것을 믿s는다.  사탄에 사로 잡히지 말고 성령께 사로 잡혀서 오직 오직 주님의 온전한 제자로, 한 결 같은 신앙의 순도를 유지해야 한다.


ㅡ 다윗은 영혼과 몸과 몸 속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찬양했다. 영혼은, 한 사람의 전부를 나타내는 전인격을 그리고 몸과 몸 속의 것들은 구체적으로 지체와 내장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여호와를 찬양할 때 전인격과 모든 것들이 총동원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ㅡ찬양을 받아야 할 대상은 바로 여호와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송축해야 하는 주체는 우리의 영혼과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다. 그 일은 우리의 깊은 곳으로부터 전심을 다하여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니다.
(2) 그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위하여 얼마나 풍부한 소재를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는가. "내 영혼아 오라, 와서 하나님이 네게 행한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그는 네 모든 죄를 전에도 용서해 주셨고 또 지금도 용서해 주고 계시다. 이것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못하게 하는 죄가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함 받음으로 우리가 죄의 길로부터 돌아서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범죄하고 회개함을 거듭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도 여전히 우리를 용서해 주고 계시다.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우리는 매우 중대한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해 줌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실 때 병도 함께 고쳐 주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벽하여 반쯤하고 그만 두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자비로써 우리들의 죄를 없애 주시고, 새롭게 하는 은혜로서 죄의 권세를 깨뜨리신다.
"그가 모든 위험으로부터 너를 구해 주셨도다." 영혼을 구속해 주는 것은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을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즉 우리를 영원히 구속해 주신 하나님께 더 많을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너를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구해 주셨을 뿐 아니라 영광과 기쁨과 긴 생명을 누리게 함으로써 진정으로 완전한 행복을 주셨도다."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불쌍한 영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많이 받는 것보다 더 존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장수하리라는 기대감과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는 장수하는 날짐승이다. 자연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독수리는 늙으면 모든 깃털을 새롭게 간다(독수리는 실제로 매년 털가는 시가가 되면 모든 깃털을 간다). 즉 새 깃털이 돋아나는 것을 다시 젊어지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은혜와 위로를 통하여, 그 자비하심을 통하여 자기의 백성들을 부패한 상태로부터 다시 회복시키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기쁨을 채워주실 때 그들은 다시 '소년 때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기도-김정한 안수집사님.


★성경읽기 -초등부 - 김요섭,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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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예배(주후 2021년 5월 26일)
제목:)"은혜의 반석 위에서 계십니까?"
말씀: 마태복음 16:16-25
설교자:장광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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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16-25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장광천 부목사님 설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의 은혜를 받으면 참 많은 것이 변한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생기니 내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타인을 섬기며 살아가기를 힘쓰게 된다. 이것이 변화이다. 그러나 이와 달이 예수님의 온전함을 위해 몸부림치지만 연약한 자신의 모습, 더 잘하고 싶지만 실패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실망하고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훈련을 받으면서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았는데, 깨달은 만큼, 은혜 받은 만큼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경험한다. 잘하려고 몸부림치는데도 참 어렵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도 또다시 무너지는 모습 가운데, 나의 이 이중성과 양면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언제나 완벽하고 온전해질까를 그렇게 자책하게 되고, 소망과 함께 실망감도 커져간다. 또한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본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 상처도 받고 실망하기도 한다. 이처럼 성도의 온전함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잘 알지만 그만큼 온전하지 못하다. 영광스럽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갈등하고 고민한다. 오늘은 이런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 시몬 베드로는,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교회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다. 또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는 뜻이다. 그래서 깊은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세 종류이다. 왕, 선지자, 제사장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죄인 된 인간들과 거룩한 하나님을 연결하는 그 일을 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완전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뜻을 온전히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특별히 메시아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된 종말론적인 약속을 성취할 구원자를 의미한다. 바로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된 종말론적인 구원을 성취할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참 기뻐하시면서 칭찬을 하신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여기서 이 복이 있다는 표현은 베드로의 외에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지 않으셨던 특별한 칭찬이셨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아람어로 ‘게바’이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이며 예수님은 시몬을 만났을 때, 게바, 반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 예수님은 이 반석위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 반석이 무엇을 말하는가? 카톨릭과 개신교는 사실 해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먼저,

♤카톨릭: 반석을 = 베드로, -베드로가 ‘반석’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고 반석위에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신다고 카톨릭은 믿고 있다. 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고 그래서 카톨릭은 계속해서 베드로의 그 권위가 교황을 통해서 계승되고 이양된다 라고 주장을 한다. 그래서 이 본문은 카톨릭에서는 교황제도를 옹호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베드로의 권위가 교황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양된다는 근거는 없다.

♤개신교: 반석 = 베드로의 신앙고백, -참 좋은 해석이고 이 해석을 믿는다.


신학자들은 헬라어 단어 ‘베드로’는 남성명사인데 이 뒤에 보면 반석은 페트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명사로 되어 있다. 원래는 헬라어에서는 남성명사, 여성명사를 맞추어서 표현한다. 그런데 이 남성명사, 여성명사가 맞지 않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베드로와 뒤에서 말하고 있는 반석 페트라는 사실 다른 것을 지칭한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곧이어 등장하겠지만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게 되었다.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은 인간 베드로는 결코 믿을만한 반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개혁자들이나 우리 교회는 이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베드로가 했었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이라는 신앙고백이며 베드로가 했었던 ‘이 반석 같은 신앙고백 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저명한 성경학자들인 마이클 위킨스나, 헤르벤 이데부스, 디엘 칼슨, 프렌스, 이 이름을 말하는 이유는 이 앞서 해석이 워낙 종교개혁자들의 내용을 믿어야 하기 때문에 언급을 한다. 이 학자들은 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해석한다. 왜냐하면 베드로라는 단어는 사실 예수님이 게바라고 말씀하신 아람어를 기초로 두고 있다. 그렇기에 ‘페트라도 게바’이고, ‘베드로’라고 표현한 것도 ‘게바’이다. 어법상 이 성에 문제나 여성, 남성, 이런 의미에는 상관이 없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반석이며 베드로이며 게바이며 이 게바 위에 바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은 바로 언어유희(言語遊戲)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실 때에 베드로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언어유희를 통해서 하신다. 베드로는 초대교회 반석과 같은 역할을 감당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임한 다음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3천명 5천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진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게 될 때, 그 때에 성령이 임하게 되고 사마리아 교회가 세워지며, 고넬료와 그의 과정이 복음을 듣게 되고 그 때 성령이 임하게 되므로 말미암아 이방인의 첫 교회가 그 가정에 세워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베드로는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반석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엡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 위에 우리 교회가 세워졌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여기서 시작된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시작되는 시점 이후부터 예수님 자신이 어떻게 행하실지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한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고 다시 살아나게 되실 것을 이때부터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베드로가 이것을 듣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마음 가운데 불안하게 된다.


*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붙든다는 것은 옆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옆으로 데리고 가서 항변했다는 것은
꾸짖고 책망했다는 것이다. 예수님, 정신 차리라고 하며 이방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받으시고 3일만에 살아나신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묻는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정신을 좀 차리라고 한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정말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한 것을 들린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을 보면 23절에 나온다.


*마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서운 책망을 하신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고백을 했었던 하나님의 복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가로막고 있는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증명받고 있다. 예수님께 책망 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넘어지게 하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론(걸림돌, 덫)이다. 뭔가에 걸려 넘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3:41-42,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심판이다.

*마태복음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심판 받은 사람으로 주님께서는 경계하고 계신다. 영어로는 스텀블럼 럭(Stumble luck-비틀거림, 넘어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 방해물)이다. 예수님의 교회를 장차 든든하게 세워나갈 사람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가로 막고 있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뿐이겠는가? 우리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반석과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교회와 이웃을 넘어뜨리고 시험에 들 수 있는 사단으로 인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무서운 경고가 주어지고 있다. 그 경고와 핵심에는 은혜와 십자가가 있다.



첫 번째는 은혜이다.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혈육이라는 것은, 사람의 힘과 지혜이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으로 지혜를 얻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앙고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렇게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를 깨닫고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그 부활의 능력과 생명을 믿고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님의 깨우쳐주심과 도우심을 점점 선명하게 경험하게 된다. 예수님은 요나의 아들, 시몬아, 이것을 알게 하는 이는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라고 표현하신다. 베드로라고 표현하지 않으신다. 어떤 의미냐면, 시몬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표현할 수 없는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이 영광스런 믿음을 갖게 하시고 이 영광스런 신앙고백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그 다음에 너는 베드로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다. 무엇이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하시는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반석과 같게끔 만드는가? 우리의 열심이가 아니다. 신앙의 연륜이 아니다. 우리 직분이 아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고백인 앞으로의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우리 가운데 말씀을 하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 그 베드로 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간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이 아닌 그동안 충성 봉사하고 노력하고 많은 것들을 일구어 나간 그 어떤 중직자나 그 어떤 사람을 통해서 세우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은혜에 붙들린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결단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록 베리’라는 목사님이 계신데, 베드로를 부르실 때에 ‘베드로야 너를 믿는다. 나는 너를 충분히 잘 알고 있고 너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았기에 내가 너를 제자로 선택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한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다 버리고 떠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때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지 않는다.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예수님을 베드로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다. 자신감이 느껴진다. 예수님 사랑이 담겨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지 않으신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뺀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아주 용맹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예수님이 잡히자 제자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다. 베드로 역시 연약하다. 두려워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된다. 자기 확신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가 호언장담을 했던 자가 몇 시간도 안 되어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그대들에게 맹세하고 예수님을 부인했다. 요즘 드라마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 있는데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들 한다. 사람을 고쳐 쓰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를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다고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사랑하셨기에 베드로를 믿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게 될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셨다.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을 믿으셨다. 온전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마태복음 21:4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마태복음 16장에 이 베드로, 반석, 신앙고백을, 베드로 위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고,
21장에서는 “내가 반석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구원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코 반석이 될 수 없는 시몬을 반석과 같은 게바로, 베드로로 만드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은혜이다. 걸림돌 같고 때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 사탄에 속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해도 마침내 우리를 반석과 같으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열심인줄 믿는다.



*베드로전서 2: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마태복음 21장에 본인이 바로 반석이며 산 돌 되었다는 표현을, 사도 베드로가 본인을 표현하고 있다. 구원의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라고 한다. 그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언제 우리가 산 돌 같이 되는가? 우리가 보배로운 산 돌 되시는 구원의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움을 받게 될 때에만 우리는 보배로운 산 돌 같이 신령하게 세워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반석 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만을 믿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의 경계선에 있고 은혜의 울타리에서 멀어질 때에 믿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받을만하지 않고 믿을만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반석 되게 하셨다면 우리는 반석인줄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되심으로 말미암아 너는 반석이라 내가 너를 통하여 영광스런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를 간절하게 소원한다.



두 번째는 십자가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의 내용이 있다. 23절에 보면,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핵심은 예수님께 베드로는 말한다. 다른 것 다 하셔도 되는데, 십자가를 지시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 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말씀하신다.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던 마태복음 4장 10절과 거의 흡사하다.

사탄의 세 가지 유혹과 시험이 있다.

1.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라
2.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라 그리하면 많은 사람이 너에게 오리라.
3. 나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주리라.


-하나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모든 영광과 성공과 만족을 얻어도 된다라고 말한다. 놀라운 간증으로 은혜 받을 내용이지만 문제는 십자가가 없다. 십자가가 없는 영광, 십자가가 없는 성공, 그것을 얻으라는 것이 마귀의 유혹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샤와 빌립보로 가셔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자신의 할 일을 가르치신다. 자신의 할례도 말씀하신다. 가이샤와 빌립보는 헤롯이 세운 도시이다. 그래서 가이샤는 ‘황제의 도시’이다. 다산의 동물의 신이 유명했고, 로마 황제를 위해 웅장한 대리석으로 지은 신전들이 많이 세워져 있었다. 그 배경 속에서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로 나타내신다. 로마 황제, 화려한 신전 가운데서는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하고 보잘 것 없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임금과 다른 가치관과 방식으로 이 땅에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 가운데 그르쳐 주시고자 하셨다. 로마 황제는 더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그 위에 군림했다. 그러면서,


*누가복음 22: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이방인 로마의 황제들은 그들 위에 주관한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은인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권력을 행사하고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면서 그래도 자기들이 주는 혜택이 있으니 너희들도 나를 은인이라고 부르라고 말한다. 이게 바로 로마황제이고 팍스로마나의 길이다. 로마의 평화와 번영을 의미하며 강한 군사력으로 강한 힘으로 유지되는 평화였다. 만약에 로마에 대항하거나 반역하면 무참히 짓밟는다. 십자가에 못 박아서 그것으로 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것이 로마 황제의 일이었다. 그것이 그 사람들을 군림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은인이고 나 때문에 너희가 산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을 현혹하고 예수님을 미혹하는 사람의 일이며, 황제의 일이다. 영화 곡성을 보면, 거기에 유명한 대사가 있다. “무엇이 중한디”..... 영화가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 패러디가 되어서 영화를 보지도 않았지만 잘 알고 있다. 포스트에 나오는 코미디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이다.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를 강조한다지만, 현혹되기 쉬운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우리도 신앙생활에서 정말 무엇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과한 채 우리가 교회서나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간과한 채 세상의 목소리에 유혹되고 현혹되기 쉽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혹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는데, 엄마들의 모임이다. 가서 이야기 듣고 나면 그때부터 불안해진다. 사랑으로 인내하고 기다리고 있다가도 갑자기 정보들과 잘하는 아이들을 듣고 와서는 불안해진다. 절대 현혹되지 말라고 하는데도 우리는 듣지 않는다.

제자들 역시 메시아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로마의 압제 식민 통치로부터 유다를 구원하고 독립시켜 주셔야 한다고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기대했다. 그러면서 제자들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가? 누가 더 헌신할 것인가? 누가 예수님을 사랑할 것인가? 누가 더 큰 사람인가? 예수님께서 왕위에 앉으셨을 때, 누가 그 우편, 좌편,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인가를 제자들은 이것으로 끊임없이 싸우는 일이 제자들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서고 사람의 길, 황제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것들이 바로 제자의 모습이고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방법을 통해서 더 높은 길로 올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어느 순간에 나의 성공이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은 갖고, 내 권리를 확장하고 누리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사탄의 유혹이다. 네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너의 권리와 능력을 최대한 사용해서 너희 욕구를 채우라. 너는 그것을 가질만한 권리가 있다 라고 한다. 이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일. 바로십가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길이었다. 십자가의 핵심은 권리포기와 순종이다. 

 

*빌립보서 2:6-8절에 보면,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나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 됨의 권리를 포기하신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바로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온전한 순종으로 구원의 반석이 되어 주셨다. 십자가 없는 성공과 영광은 모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리 많은 일을 할지라고 그 과정에 십작의 권리포기와 사랑의 순종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가정. 일터에서 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내 자존심을 지킬 권리가 있다. 이정도는 받아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이만큼 했으니 은인이라고 칭함을 받고 싶고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우리 가운데 불끈불끈 올라오지는 않는가? 그런데 이런 말은 가장 친근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서 들린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그렇게 칭찬했던 그 베드로의 입술에서 바로 사람의 이야기, 사탄의 속임수로 그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 관계 가운데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직위, 위치에서 대접 받는 것이 당연하고 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옳다라고 여기는 것,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참된 사랑은, 참된 제자의 길은 권리포기와 사랑의 순종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전히 권리를 포기하기 힘든 우리의 모습을 본다. 그때마다 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늘의 영광과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가운데 오신 그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랑과 소망, 새 힘이 생겨날 줄 믿는다.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다. 로마의 그 강한 압제로 인해서 본인이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래서 합당한 존재여서 그렇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과 존귀함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쁨으로 자원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마찬가지이이다.

우리가 권리포기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포기해도 마땅한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인가? 내가 무지 당해도 싸서 그런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만큼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귀한 자녀이기에 그렇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 포기를 본받아 우리도 권리포기를 하게 될 때에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역사가 나타날 줄 믿는다.


*마태복음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한다는 것이다. 나의 공로,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기적인 욕망과 욕심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무거운 짐이 아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의 죽음이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주인이 바뀐다. 죽으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내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것이다. 우리 가운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이다. 네 주인이 바뀌었음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언제 권리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는가? 내가 주인이 아닌데,,, 바로 나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랑으로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셨음을 믿고, 깨닫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소원한다. 자기 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는 성령 충만한 자가 되어 그 자기 부인으로 기도의 능력을 무장되어야 한다.


♣요약
구원의 반석이신 우리 인생길 가운데서 나의 능력과 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늘의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시고 모든 권리를 버리고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아가야한다. 성령 충만으로 채워져서 자기를 부인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왕 되심을 인정하고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광이 나타나야 한다. 걸림돌이 되지 말고 은혜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견고하고 온전한 예수님을 본받아서 세상에 유혹이나 현혹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오직 주시는 지혜로 날마다 구원의 반석 되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그 은혜의 반석 위에 세워져가야 한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성부에 의해 구별되었고 임명되었으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대예언자이시다(신18:15). 또한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시110:4), 영원한 왕이시다(시2:6). 베드로의 이러한 신앙 고백은 개인의 자격으로가 아닌 열두 제자를 대표한 것이고,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의 빛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었다. ‘베드로’는 ‘반석’이란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는 천국 열쇠를 소유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한다. 우리는 자기 본래의 것에 대한 모든 신뢰를 포기하고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 한 분께만 매달려야 하며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도 기꺼이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자기의 것을 챙기려는 이기적인 사람은 정죄를 받지만, 주님을 사랑하며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칭찬을 받는다. 우리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다가 예수님께 책망받은 일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잘못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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