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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6월 12일)
제목: “작은 자들이 갖는 꿈”
말씀: 이사야 60:21-22.
말씀읽기: 청년G국 최윤찬, 대학8부 박지은자매.
사회: 박주성 부목사님.
찬양: 소프라노 김순영, 테너 윤정수 찬양.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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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제 생애 처음 있는 일이 일어났다. 장미가 백송이가 들어왔다. 너무나 놀랐다. 칼세미나 교회사역으로 수고한다고 어느 권사님, 무명의 권사님이 그것을 보냈다. 그걸 찾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하고 대신 지난 35년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제자훈련 세미나를 헌신하고 수고한 우리 모든 교회 중직 자들과 특별히 이번에 많은 분들이 순장반, 오신 여러 사역자 분들, 보니 국내 전체, 서울부터 제주도에서 오시고, 해외에서 오시고 18개 교단이 다 참여했다. 할렐루야!~~ 다 세미나에 오신 말씀 중 하나가 순장님들이 ‘관계의 온전함’을 가지고 너무나 잘 하고 있다고 그런 피드백을 받으면서 너무나 감사했다. 그래서 꽃을 여러분에게 드리려고 가지고 나왔다. 장미 백 송이를 드리겠다. 특별한 시간이다. 다시 한 번 지난 35년 동안 모든 분들, 헌신자들 께 감사하다. 강명옥 전도사님은 우리 교회에 38년 시무를 했다. 35년 동안 칼 세미나를 위하여 헌신했다. 그래서 서로 귀한 시간이다. 이 꽃을 공유합시다. 모든 훈련생과 사역자들 모두 공유하길 바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보너스로 주는 은혜이다. 새벽이니 기쁘게 못하겠다. 그래도 세미나 어렵지 않게 된 것에 감사하다. 백신을 어제 맞았다. 미주 제자훈련을 담당하시는 선교사님도 와 계시는 것이 보인다.

저는 그 개척교회 목사님 자녀로 태어나서, 가난한 교회, 소형교회, 중형교회, 대형교회까지 섬기면서 우리 사랑의 교회는 어떻게 보면 수퍼 메가톤처럼 큰 교회로 섬기면서 왜 어떤 사역자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이렇게 잘 쓰시고, 사역의 열매가 있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분들은 왜 없을까를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고난도, 축복도 경험하면서, 무엇이,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붙잡아 쓰시고, 무엇이 지나가게 하는 고통인가! 특별한 사역자와 보통 사역자,(Extro orginl Pestor인지, Original Pestor)인지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What makes difference? 무엇이 특별한 사람과 보통사람으로 결정할까? 이것은 사역자 입장에서다. 우리 교우들 입장도 특별한 사람과 보통 사람과을 결정하며,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결정하는가? 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사명을 가지고 한 생애를 그리스도에게 매고 한 생애를 흔들림 없이 어떤 사역의 비바람과 폭우 가운데에서도 집중하고 달려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것이 결정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미션, 비전, (max difference)이다. 사명과 비전을 끝까지 지속해서 달려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젊을 때, 또 하나님이 개인에게 주신 비전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끝까지 가지고 달려갈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번에 세미나에 참석하신 반응들이 오늘 순서지에도 나왔듯이 민명기 목사님 외에 분들과 많은 분들이 어떤 사역의 비바람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그럴수록 목회의 본질, 사역의 본질과 함께 교회 론과 함께 제자훈련의 본질을 붙들고 전념하겠다고 반응들을 많이 하신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줌으로 강의 가운데서도 초 집중을 해서 들었고, 참관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았다고 말씀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교회 론과 제자훈도에 대한 핵심들을 한 결 같이 평생 붙잡고 새로운 차원에 사역을 원한다고 하는 이러한 내용들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영감과 착상과 비전이다. 이걸 어떻게 하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어떤 인생과 일반 성도들도 인생의 비바람과 폭풍 가운데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속해 나가고, 사역자들 같은 경우는 이 어느 비바람, 어느 구름이 떨어질지, 잘 모르는 수많은 예기치 못한 일들이 생길 수 있는데 이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를 한 결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사야 60:21~22절에,
21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원히 땅을 차지하리니 그들은 내가 심은 가지요 내가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22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 이 말씀을 자주 다루었는데, 요즘 보는 눈들이 새로워졌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 그 작은 자가,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는 것은 지난 40여 년간 많은 여러 가지 일들과 환경 가운데서도 이 말씀은 저에게 사역의 북극성과 같이 동서남북, 방향이 잡히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도 이 말씀은 저의 사역과 섬김 가운데 한 결 같이 수많은 환경과 역경가운데 집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해주셨다. key가 뭐냐면,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와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셨다. 교우들은 익숙할 말씀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일반적인 신앙의 법칙은 30배, 60배, 100배의 법칙이다. 그것도 엄청나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사는 인생은 하나님은 그 인생을 붙잡으셔서 30배, 60배, 100배의 은혜를 주실 줄 확신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다 인정한다. 그런데 제자훈련의 사역은 희한하게도,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처럼 제자훈련의 사역은 그 정도가 아니라 천배의 결실인 줄 믿는다. 이것은 부흥과 더 많은 개념보다는 어떻게 부족한 우리 인생이 천배의 결실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 이다. 일반적으로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한가이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이 자리가 천배의 결실의 자리이다. 아주 작은 자, 우리가 제자훈련, 우리가 제곱근의 원리, 천배 만 배, 100이라는 것은 열 곱하기 열, 만의 결실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이것보다도 백 명의 사람들이 제대로 제자훈련해서 백 명의 사람들이 영적 승법의 은혜를 깨닫고,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다는 꿈을 가지고 백 명의 사람들이 2의 n승으로 승법번식, 사명을 가지고, 한 결 같이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평생을 지속하면, 천배의 결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제곱근의 원리는 만 명의 사람들이 모일 때에 만 명이 아닌, 백 곱하기 백, 백의 제곱이, 만 명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코로나 바이러스를 지내오면서 사랑의 교회도 수많은 성도들이 모인다. 너무나 다 귀한 분들이다. 가만 보니까 교회를 지키는 진성 교우들은 만 명인 듯하다. 우리 교회 교우 만 명의 신앙인이 똘똘 뭉쳐서 이끌고 지켜 간다. 헌신하는 만 명이 거의 다 일을 한다. 가만히 보면 코로나 사태 이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훨씬 더 작년보다 더 좋다. 좀 더 나을 수도 있다. 주일 출석이 20퍼센트였고 한정되어 있었는데도, 오지 못해도 다 똘똘 뭉쳐있다. 그런데 다 뭉쳐서 만 명이 십만 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백 명의 훈련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가진 사역자가 그 제곱근의 원리를 가지고 똘똘 뭉치면 하나님은 역사한다는 것이다.


세 명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뭉치듯이,
열두 명이 제자들이 똘똘 뭉치고, 그다음에 칠십 인의 전도대가 뭉치고, 120명의 오순절의 성령 충만한 그 성도들이 뭉치고, 또 기드온의 삼백 용사가 되고,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았던 오백 명의 형제가 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칠천 명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생기는 것이다. 오순절 3천명 변화된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며, 그 역사 앞에 초대교회 뭉친 영적 제곱근으로 원리에 의한 천배의 결실이 있는 이 사람들을 통하여 대로마 제국이 항복한 것처럼 변화된 것이다.

그러면 이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 원리는 천배의 결실에 대해서 영적승법은 이해는 간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다. 때가 되면 다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하신다.” 이걸 이루시는 분, 우리에게 주시는 꿈과 비전을 주님이 우리에게 한 생애 집중력을 주셔야 되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앞에서 벅벅 기는 것이다.

이번에도 116기 참여하신 모든 사역자들과 말씀을 나누면서, 제가 40여년 사역 가운데 116기 가운데 80회 세미나를 인도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지금도 개척할 때의 마음과 동일하다. 수사도 아니고,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결 같은 심정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없으니 주님이 이루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도 이 말씀의 배경을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사야 60장 앞에 1절 2절을 보면,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너무 힘들어서 납작 엎드려서 벅벅 기면서 기도하는 상황이다. 2절에도 어둠을 덮던 그런 시기였다. 이사야 시대는 다윗 왕국의 찬란한 영광이 사라져 버렸다. 솔로몬 왕의 그 아름다운 성의 금빛 돔이 다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환경적으로는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는 그런 낙관론을 전혀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패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이제는 해도 안 되고 이제는 다윗의 영광이 다 사라졌다. 이제는 솔로몬의 영광도 다 어두워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1절 2절에 보라, 어두움이, 캄캄함이 다 만민을 가리운다. 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21절에는 그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21절 22절에 뭐라고 말씀하는가? 여호와가 내 빛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빛이 되게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유언을 잘 알고 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는다. 1세기에 그리스도인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비롯한 제자들이 한 번도 그 당시 로마에 가본 적이 없다. 나중에는 갔지만, 국제선 타고 다른 나라에 다른 나라 가 본 적이 없는 곳에서, 갈릴리가 전부인 것처럼 살던 그 사람들에게, 좁은 유대 그곳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이것은 불가능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네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신다.

오늘 우리는 순전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에 개척하는 마음으로, 지금 한국 교회나 지금 상황 보고 안 된다고 하지만, 우리의 평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과 기름 부으심으로 그 비전 소명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 한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제자훈련 수료예배이니까 일반 교우들은 들어서 좀 마음에 깊이 컨폼하라(conform). 일곱 번 정도 사역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 혼자서 골방에서 떼굴떼굴 굴렀다. 오늘 줌으로 들어오는 분들은 우리 지금 교회 본당을 보고 계시겠지만 우리의 땀과 눈물이 배어있고, 우리 성도들의 간절함과 사명이 곳곳마다 스며져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너무너무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과거에 수많은 사역에 한계와 절벽처럼 일 때 떨어져 죽을 지경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골로새서 1장 온전 론에 말씀 했듯이,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골로새서 1장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하셨던 말씀이 섬광처럼 내 가슴을 쳤다. 그래서 주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그의 남은 고난을 제가 무슨 능력으로 그걸 제가 무슨 능력으로 그것을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로 질문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무슨 능력으로 그 남은 고난을 채울 수있냐고 질문할 때, 26절에 말씀하신다.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너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이라고 하신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이사야 60장 22절이 신약의 연장선상의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환경, 여러 가지 이러한 경우가 있지만, 끝까지 너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하신다.

그분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감탄사가 매주, 매 사역마다, 지속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 일들을 위하여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만들기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는 말씀이 저를 덮어버렸다. 다시 한 번 끝까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인 것처럼, 우리의 삶에 한 결 같은 은혜의 감탄사가 되길 바란다. 이걸 알게 되면, 왠만한 사역에 좌절이 와도 낙심하거나 절망치 않고, 집중할 수가 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내 시각이 늘 흐려지지 아니하고 통찰력 예견력이 한 결 같이 무디어지지 않고, 시각이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그 시각이,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는 것이다. 오염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시각을 유지하고, 주님의 신선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영적 제곱근, 비밀의 병기, 약한 자가, 내 속에 주님이 비밀로 계실 때에, 일반적으로 이 세상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역사할 때에는 적은 자와 약한 자의 그 시각의 신선도가 늘 유지된다.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는 한 결 같이 익스트로 월드는, 하나님의 시각은 작은 자를 통해 위대해지고 약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를 통해 강해진다. 끝까지 지속하는 것이다. 세상에 오염되지 않는 적은 자를 통하여 약한 자를 통해 강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대단하지 않고, 벅벅 기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1978년도에 개척이 되고, 막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갈 때에, 한참 부흥할 때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선대 옥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에는 강남교회의 씨드머니(seed money) 중에 하나는 이수정 집사님이라고 가정 파출부를 하면서 백만 원을 드리면서 시작 된었다. 그래서 강남 교회 건축하는 중요한 씨드머니가 된 것이다.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는 하나의 예가 되었다. 제가 미국에서 교회를 처음 지을 때에 어떤 노처녀 자매가 있었다. 미용사였다. 시집도 안가고 캐쉬로 들어오면, 그것을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것인데, 어느 날 헌금을 했다. 그 액수가 백 불짜리 백장, 만 불을 남가주 사랑의교회의 씨드머니(seed money)가 되었다. 인간적인 어떤 야심으로 하면 안 되지만,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는 그런 은혜로 이런 숨어있는 거룩한 비사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짓고 건축을 하면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 일을 통해 수많은 역사가 이루어졌다. 옥 목사님은 건축한다고 뭐라 하신 분들도 많았고 비난을 받으셨다. 그러나 전 세계에 선교에 섬긴 비용이라든지, 다음 세대를 위하여 뿌린 교육비를 산정하면 건축의 천배를 썼을 것이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에 상관없이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줄로 믿는다. 정리하면,


사역을 하다보면 임계점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많은 사역자와 성도들은 어떤 임계점에서 힘들어 한다. 거기만 올라가면 될 일인데, 물이 100도가 되어야 끓는다. 남들이 볼 때는 다 같게 보인다. 그런데 98도에서 끓지 못하고 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 중에 마지막 1도 2도가 끓지 못해 좌절할 때도 있다. 그런데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듯이, 하나님 나라는 적은 자를 통해 위대해 지고 약한 자를 통해 강해진다. 낙관론을 펼치는 팽배주의에서도 주님을 묵상할 때에, 주님이 내 속에서 일하신다는 단순한 원리를 끝까지 지속하면 마지막 임계점인 1도, 2도를 돌파하게 하실 것이다. 각오로 마지막 임계점 1도 2도를 넘게 하신다. 영적인 쎄렌디피티(Serendipity=뜻밖의 행운)가 일어난다. 세렌디피티는 단어는 화학적 실험 용어이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왔다. 결과는 안 좋아도 나중에 마지막 결과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볼 때, 어렵지만 지나고 나면 임계점을 하나님은 돌파하게 하신다. 자연스럽게 신적 개입을 통해 하나님의 세렌디피티가 일어나날 줄 믿는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말씀이다.

116기 세미나에 참여한 사역자 여러분, 교회 론과 온전 론에 대하여 사역에 대한 모든 것들을 잘 새겨서, 한 결 같이 지속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하나님은 영적인 세렌디피티를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순장반이 사역하는 다락방이 현장이요, 안아주심 본당의 현장이 될 수 있다. 이번 세미나에서 저의 비전을 말씀 안 드렸다. 비전은 3,5,7비전을 가지고 있다. 3년 내로 한국교회가 글로벌 교회로 국제화로, 특별히 사랑의 교회를 통해 국제화를 기도한다. 지금에는 3비전이 이루어졌다. 스스로 선포해야 한다. 3비전이 이루었으니, 우리 교회들 글로벌 스탠다드로 미국, 중국 등 제대로 섬겨 네트워크가 되어야 한다. 지금도 중국에 피 묻은 복음이 일어난다.

1990년도에 연변에 말씀을 전하는데, 두 시간 설교를 하였다. 그 당시 밤새워 기차타고 멀리 왔는데, 두 시간만 하냐고 설득했다. 중국이 순수하다. 설교를 6시간 한다고 했는데 왜 안 하냐고 했다. 평양에서 특새하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적은 자를 통해 위재해지고 약한 자를 통해 강해진다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시시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사역이 시시하지 않도록 모둔 사역자들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 덧입혀 주시길 기도한다. 오늘 35주년 칼 세미나 생중계로, 줌으로, 모든 분들에게, 모든 제자훈련 동지 교회들에게도, 감사예배를 통해 이사야 60장이 그대로 아름답게 접목되는 평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35년간 개척했던 것처럼 변함없이 지속으로 이끌어주셨으니 찬양과 감사드리고, 수많은 어려움도 있지만, 우리는 끝까지 적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룸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마지막 사역의 임계점을 돌파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신적 개입을 통한 쎄렌디피티(Serendipity)의 은혜를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경험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은 작은 자를 통해 위대해지고 약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자를 통해 강해짐을 믿고 그 분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감탄사가 매주, 매 사역마다, 지속되는 은혜가 되어서 이 ‘작은 자들이 갖는 꿈’인 주님의 지상 명령을 우리는 기쁘게 이루어가야 한다. 오늘 229명의 수료식을 한다. 민명기 목사님 외에 수료식을 축하하며, 우리 교회 강명옥 전도사님의 사역으로 오랜 헌신과 섬김을 축하해야 한다.

-그들은 과거보다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그들 안에서 과거보다 더욱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은 기이하게도 더 많은 수를 이루며 강력한 나라를 형성하였다. 그리스도 교회도 처음에는 작은 수, 매우 작은 규모에 불과했었다. 그들 교회의 수는 한때 120여개에 불과했었다. 그렇지만 교회는 '천을 이루었다.' 그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애초의 미미했던 시작을 되돌아보며 어떻게 그렇게 성장하였는지 기이하게 여기며 놀라게 될 것이다. 그 약속은 지체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며 '속히 이루실'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혜로 정하신 때에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그때는 우리의 우매함이 규정하는 시기가 아니다. 그리고 이 일은 진정으로 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그 시기가 지체되는 것처럼 보여 질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라면 지체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이스라엘이 맞을 궁극적인 승리와 영광, 나아가서 하나님의 백성이 맞이할 최후 승리와 영광이라는 벅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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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6월 9일)
제목: ''나의 백성아, 보아라 들어라''
말씀: 이사야 6:1~8
설교자: 박유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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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 본문 이사야 6장은 위대한 왕의 부고(訃告)로 시작한다. 웃시야 왕은 남유다를 52년간이나 통치했다. 웃시야 왕이 통치할 때, 남 유다는 다윗과 솔모몬 이후에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역대하 26장에 기록에 의하면 웃시야 왕은 도시마다 성벽을 건축하였고, 지방 국토를 요새화 했고, 또한 이 왕은 농사를 굉장히 좋아했기에 농업이 발달했다. 비록 작은 나라였지만 앗수르 제국의 팽창 정책에 맞장을 뜰만큼 강한 나라였다. 주변국 모두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칠 때에 웃시야 왕이 통치하는 남 유다만이 유일하게 조공을 바치지 않을 만큼 부국강병을 이루었던 그런 왕이었다. 경제, 국방, 문화, 모든 면에서 아주 탁월한 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이 문제였을까? 그는 결국 자만심에 빠진다. 제단의 분향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했다. 왕이 막 제단에 불을 붙이는 순간 제사장 아사랴를 비롯한 용맹한 80명의 제사장들이 왕의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웃시야는 모든 만류를 무시하고 제단에 손을 댔다. 그때 그의 이마에 갑자기 나병(癩病)이 생겼다. 그리고 왕위를 아들인 요람에게 물려주고 별궁에 머무르다 생을 마감한다. 다윗 왕과 솔로몬왕의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은 백성들에게 충격과 혼란 그 자체였다.
 
*역대하 26장 22절에 보면,
22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이사야의 직업은 왕실 서기관이었다. 왕실 서기관이 하는 일은 왕의 치적과 업적과 말씀을 낱낱이 기록하는 것이다. 이사야는 왕의 치적(治績)을 기록하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왕인지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대단하고 위대하다고 생각했던 왕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처럼, 이사야의 마음에도 큰 좌절과 실망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성전에서 예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를 이사야에게 보여주신다. 그 순간 이사야는 세상 왕의 보좌보다 더 높은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이 세상의 보좌가 텅 비어있어서 좌절했던 이사야는 있다가 하나님의 보좌를 보며 이 세상을 진정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모든 영광의 주인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다윗과 솔로몬의 필적할만한 대단한 왕 곁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세계관으로 살지 않고, 바로 그 위대한 산 사람의 세계관으로 살 가능성이 높다. 이사야도 마찬가지였다. 웃시야라는 대단한 왕의 치세와 위엄에 눌려 그는 웃시야 적 세계관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보고 그리고 인간왕의 더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그분의 영광을 볼 때, 이사야의 웃시야 적 세계관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의 세계관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셨다. 그 세계를 보여주시는 순간 스랍들이 서로 창화하며 최고의 수준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 스랍들은 두 개 날개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고, 두 개의 날개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찬양한다. 이 사람들의 찬송을 듣기 전까지 이사야는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스랍들의 찬양을 들으며 성전을 넘어 온 땅에, 온 세상에 가득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까지 보게 된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과 그 임재는 어느 한 장소나 한 인물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금도 교회를 넘고, 이 나라를 넘고, 이 지구를 넘어, 온 우주에 가득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미지의 세계에서 거시의 세계로 거시의 세계에서 초월의 세계까지 뻗어나간다.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을 이사야가 본 것이다. 이사야 66장 전체에서 이보다하는 단어는 48번이나 사용된 만큼, 이사야 전체에서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는가이다. 오래 전 신문에 실린 기사가 생각이 났다. 도둑들이 어느 집 별장을 털었다. 귀금속을 다 훔치고 나서 허름해 보이는 가방에 골프채가 들어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도 돈이 되겠다 싶어서 들고 나왔다. 그리고 그 골프채를 125만원 받고 팔았다. 어떤가? 괜찮게 팔았는지 판단해 보라. 그런데 그 골프채는 타이거우즈가 매이저 대회에서 연속으로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기념 골프채였다. 당장에 내다 팔아도 수억 원을 호가(呼價)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이 기사의 제목이 뭔지 아는가? “안목(眼目) 없는 도둑”이다. 그 골프채 하나가 그들이 훔친 보석 전부보다 골프채의 값이 더 나가는 것이었는데 몰라본 것이다. 이사야서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는가의 이 질문은, 과연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갖추고 있느냐하는 질문과 같은 맥락(脈絡)이다. 명품과 진품이 있어도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안목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성경을 보는 안목이 없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잘 아는 CS 루이스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두 가지 독서법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첫 번째 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책을 이용하는 독서,
두 번째 는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는 독서이다. 라고 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이 두 번째 방법을 택해야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말씀의 인격성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의 인격성이 요구하는 것은 저자의 목적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말과 말하는 사람은 따로 뗄 수 없다. 그래서 말은 말하는 사람 자신이다. 따라서 말의 본질은 인격성에 있다. 아무리 화려한 말을 하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하다라도 사기꾼이 말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좀 말을 더듬고 어눌하게 해도 진실하게 하는 사람이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 말을 귀담아 듣는다. 바로 이게 말의 인격성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한 논문이나 보고서나 교과서가 아니다. 성경은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啓示)이다. 성경이 말은 인격 대 인격으로 하는 말이다.
 
※유진 피터스는 ‘이 책을 먹으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경에 명사는 어원분석의 대상으로,
동사는 문법 분석의 대상으로,
형용사는 감탄의 대상으로,
부사는 토론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한다.
 
※어느 편집인의 말처럼 성경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다. 성경을 책일 뿐 아니라 말이자, 인격이기에 연구대상에 그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상이며, 쳐다보는 대상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주목하여 바라보고 더 나아가 꿰뚫어보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안소니 불룸이라는 ‘살아있는 기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겨우 몇 분 내어 드리면서, 그 시간에 그분이 임재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을 노크하는 하나님께 죄송하지만 바쁩니다. 나머지 23시간 30분은 어떤가? 심지어 전혀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과 삶의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노크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 대해 불평할 권리가 없다. 그분보다 우리가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루 23시간 30분, 우리 영혼의 문을 쿵쿵 두드리고 계신다. 을지로와 세종로와 강남을 걷고 있는 그 시간, 직장에서 갑 질을 당하고 있는 그 시간, 암 말기라고 선고받은 그 시간, 나의 모든 시간에 하나님은 내 영혼의 문을 쿵쿵 두드리고 계신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께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인가? 여러분은 지난 한달, 하나님께서 그 두드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는가? 다시 한 번 유진 피터스의 말을 들어보자.

 
※유진 피터스
“이 책을 너의 내자 안으로 집어넣어라. 이 책에 나오는 말이 너의 혈관을 타고 움직이게 하라. 이 말을 씹고 삼켜서 근육과 연골과 뼈가 되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우리의 몸에 들어가고 사람의 인생으로 들어가길 원하신다. 이상하지 않는가?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씀이 영혼으로 말씀이 들어가야 하는데 유진 피터스는 왜 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결혼하시고 평생을 새벽 두시에 일어나셨다. 왜냐하면 용산시장과 가락동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가락동 시장이 있기 전에 용산의 그 시장이 있었다. 어릴 적, 제가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와 외삼촌들이 이른 아침부터 일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 장사를 그만두시고도 늘 새벽 두시에 일어나셨다. 왜 그러셨을까?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근육이 기억하는 딱 그만큼이 내 신앙이다.’라는 말이 있다. 무슨 뜻인가? 몸의 기억은 반념의 기억보다 앞서고 또 오래 간다. 그래서 몸의 훈련이 없는 훈련은 항상 부족한 채로 남을 수 있다. 그리고 훈련 자체를 허위로도 만들 수 있다. 여러분, 결심을 믿지 말라.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여러분의 눈물도 믿지 말라. 하루에도 수시로 변하는 내 감정을 신뢰할 수 없다. 대신 여러분의 몸을 믿어라. 결론은 내 몸이 말을 안 들어도 내 몸을 믿어라. 몸은 정직하다. 우리 몸은 많이 먹으면 살찐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몸은 정직하다. 그리고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늘 기억하는 대로 움직인다.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 몸이 기억하도록 훈련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생각만큼 몸의 훈련을 하지 않는다. 몸의 훈련이 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성경에 몰두하지 못한다. 왜 그런가? 이 질문에 답을 알기 위해서 생각해 보았다.

 
▷다섯 가지 없음(5無)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지 않을까를 생각했다.
첫째, 무관심(無關心) -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다. 영적인 일 자체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더 나은 영적인 삶에 대해 호소한 일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없다. 영적 무관심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오직 현재만 있고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둘째, 무지(無知) – 관심 없으면 보고 있지만 볼 수 없고, 듣고 있지만 들을 수 없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이러한 태도가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낳는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감사도 없고, 다가올 시간에 대한 소망도 없고, 현재를 보는 눈마저 어둡게 만든다.

셋째, 무책임(無責任) – 영적인 일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가 무책임한 태도를 낳는다. 이 무책임한 태도는 자기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대신에 다른 사람과 상황에 그 책임을 돌린다. 이 시대에 이기적 개인주의는 책임을 지지 않는 인간형을 낳았다. 자신의 영혼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그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

넷째, 무감각(無感覺) - 영적인 책임이 영적인 무감각을 낳는다. 영적 무감각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서 주의 길을 간다고 말한다. 영적으로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다섯 째, 무분별(無分別) - 무감감이 무분별을 낳는다. 맹목적인 신앙과 과도한 열심히 말씀이 그러한가 하는 진지한 영성을 잃어버렸다. 확증편향성으로 판단을 중지하고, 특정 이론에 빠져 분별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런 분들과 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정보의 바다에서 유영할 뿐, 진리의 항구에 이르지 못한다. 정보는 있지만 그 가치를 분별할 수 있는 말씀의 지혜가 없는 것이다. 무관심, 무지, 무책임, 무감각, 무분별, 말씀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꿰뚫어보고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몸이 기억하는 말씀 훈련이 되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치워야 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없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부재가 일어나지 않기를 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하나님의 일을 경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된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방송국이 하나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늘 방송국 앞에 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한 여학생이 물었다. “너 어디서 왔니? 저요? 부산에서 왔는데요?” 옆에 옆에서도 물었다. 대답에 제주도에서 왔다고 했다. 엄마 모르게 왔다고 했다. 그 연예인이 스치듯 지나가도 그들은 마치 예수님을 본 듯이 환해지고 이 세상에 들을 수 없는 그 함성과 그 외침과 그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도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난다면, 그이상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여러분은 태어나서 언제 연예인을 처음 보았는가? 그리고 처음 본 연예인은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 본 것은 고3때 학원에서 황신혜를 처음 보았다. 그녀가 지나가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소리를 지르니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서 가던 길을 다시 갔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르켜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 이런 점에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분명한 자기 인식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사야 6장 5절을 보면,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난 후, 그 자신에게 일어난 자기 반응은 아주 격렬한 자기인식이다. 이 말은 나는 이제 파멸할 것이다. 이제 나는 끝장났다는 말이다. 스랍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케 하는데 자신은 부정한 입술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자기인식이 일어났다. 아마도 이사야는 자신을 볼 때, 꽤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던 것 같다. 원래 이사야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화를 선포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사야 5장 8, 11, 18, 20, 21절을 보면,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라고 심판을 전했다. 자신을 제외한 그 백성들이 화를 받을 것이라고 마치 경고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보니 자신의 존재가 부패하고 더럽고 큰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선포했던 그 화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화를 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만나는 참된 경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질량과 높이와 깊이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과 나 자신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볼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배할 수밖에 없고, 예배할 수밖에 없고, 전율할 수밖에 없고, 자복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위대한 영광 앞에 내가 형편없고, 존립할 수 없는 초라한 자로 무한 서로 자신을 낮추고, 한없이 부풀려진 옛 자아, 거짓으로 만들어진 옛 자아가 해체되고 무너지는 경험이 절대자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의 자기인식이다. 구약 판 자기부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자기부인, 자기인식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성경을 통해서 가능하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의해 내가 읽혀지는 것이다. 내가 성경을 읽기도 하지만, 성경이 나를 읽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자아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잊고 부인할 정도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경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 자아의 현주소와 본적이 낱낱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해 내가 읽혀지는 순간 나의 숨겨진 삶이 폭로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의 죄가 융단폭격(緞爆擊)을 당하게 된다. 그때 우리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도다! 이런 자기 부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그 경외감에 압도되어 있을 때, 이사야가 그 경외감 앞에서 자기 자신의 본적을 발견했을 때,

본문 6 저~7절에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네 악이 제하여졌다는 것은 이사야가 거듭난 순간이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은 이사야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 이사야가 하는 일은 오직 자기의 부족함에 대한 절망감뿐이었다. 이외에 그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와 화해하시는 데까지 이사야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스랍을 통하여 그를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셨다.
*시편 51: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상처가 있으면 안 된다. 어떤 제물이든 안전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그러나 유일하게 상차가 있는 제물을 받으시는데, 그 제물은 상한 심령, 찢겨진 심령, 자신의 죄악을 고발하는 심령, 바로 그러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신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에 나올 때에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갈 때에, 어떤 심령으로 나아가는가? 우리가 예배 가운데 나올 때에, 어떤 심령으로 나오는가? 오늘도 내일도,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이들을 우리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고 그 영혼들을 새롭게, 새롭게 만들어 주실 줄 믿는다. 이렇게 이사야의 존재가 정화된 후, 이사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정화된 이사야는 즉각 응답을 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을 본 자는 듣게 되고, 들은 자는 반드시 말하게 된다. 이사야도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고, 사도들도 그 사명을 받았다.

 
*사도행전 4:19-20절을 보면,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그리스도인이란, 보고 들은 것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보고 들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듣고 말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사야 50:4-5,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여기서 학자라고 하는 단어는 제자라는 단어이며, 여기서 학자라고 번역된 단어는 학자와 제자는 동일한 단어이다. 그 제자들에게 아침마다 말씀으로 깨우치신다. 아침은 창조의 시간이고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며, 이른 아침에 정적 속에서 찬송으로 새벽을 깨우고 성경 읽기와 묵상을 통해서 하나님 귀를 열어두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생활은 다를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만이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두려워하겠는가?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이 말씀이 참 따뜻하게 들린다. 그 아침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주변이 온갖 소음으로 들끓어도,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를 가려듣는 엄마처럼, 세상의 소음 속에서도 살면서도, 하늘의 소리를 가려들을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하나님의 질문에 귀를 기울여 본다. 너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느냐? 매 아침마다 매 순간마다 우리의 들을 귀가 이미 되어서 주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는 자 되길 소원하며 축복한다.
 
♣요약
이 세상에는 볼 것도 들을 것도 많은 세상이며,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세상이기도 한데, 성경을 통해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 하나님을 집중하여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주님의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무관심, 무지, 무책임, 무감각, 무분별, 말씀에 대한 이러한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꿰뚫어보고 체험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니, 이러한 다섯 가지 없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의 부재가 일어나지 않게 무장되어서 이사야처럼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훈련이 몸이 기억하도록 하는 것처럼,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는 주전 736년이나 혹은 735년경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이사야가 자신의 소명 시기를 밝힌 것은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한편 스랍이라는 말은 ‘불타는 자들이란 뜻이다. 또한 스랍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영물들이다. 이러한 행동은 이사야의 죄를 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죄를 덮지 않는다면 죄를 소멸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죄를 깨닫고 그 죄로부터 벗어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은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범적인 대답으로 간주되고 있다. 부르심을 사양했었던 모세나 예레미야와는 달리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신속성과 결단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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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0 회 경제상식퀴즈


1. 경기가 불황기, 회복기, 호황기, 후퇴기를 반복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1. ① 낙수효과
  2. ②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3. ③ 경기순환 이론
  4. ④ 롱테일 법칙
2. 정부가 자동차에 부과되는 ‘이것’의 인하조치를 연말까지 연장한다. 고가 사치품 등 특정 물품에 붙이는 이 세금은?
  1. ① 양도세
  2. ② 주민세
  3. ③ 개별소비세
  4. ④ 죄악세
3. 세금이 완전히 면제되거나 매우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국가 또는 지역을 뜻하는 말은?
  1. ① 프롭테크
  2. ② 페이퍼컴퍼니
  3. 택스 헤이븐
  4. ④ 카피캣
4. 기업의 신제품이 기존 주력상품의 매출을 깎아먹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은?
  1. ① 젠트리피케이션
  2. ② 카니발리제이션
  3. ③ 리디노미네이션
  4. ④ 글로컬리제이션
5. 해외로 나간 자국 기업에 세제 지원과 규제 완화 혜택을 제공해 자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은?
  1. ① 리츠
  2. ② 리커플링
  3. ③ 리쇼어링
  4. ④ 테이퍼링
6. 다음 중 소액으로도 각종 부동산 관련 상품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부동산투자신탁’을 뜻하는 말은?
  1. ① 리츠
  2. ② 리커플링
  3. ③ 리쇼어링
  4. ④ 테이퍼링
7.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주도로 만들어져 세계 다양한 혁신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는 펀드는?
  1. ① 액티브펀드
  2. ② 패시브펀드
  3. ③ 비전펀드
  4. ④ 하이일드펀드
8. 다음 중 ‘청약가점제’에서 점수를 매기는 평가 기준에 포함되는 것은?
    1. ① 연소득
    2. ② 부양가족 수
    3. ③ 담보인정비율(LTV)
    4. ④ 신용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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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

''국가 경제의 신호등'' 신용등급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나라는 신용등급순이에요.” 지구촌 경제에서 국가별 신용등급은 중요한 신호등입니다. 신용등급이 높은 나라에는 서로 돈을 빌려주려 하고, 신용등급이 낮은 나라에는 서로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죠. 신용등급은 개인들이 중요시하는 의리, 우정, 관계로 평가되지 않고 오로지 ‘돈을 잘 갚느냐 마느냐’로 결정되기 때문이죠. 국가 신용등급 평가에 인간미는 없습니다.

나라도 개인이나 기업처럼 돈을 빌릴 때가 있습니다. 돈을 서로 빌려주고 받으려면 공신력 있는 신용평가가 뒤따라야 합니다. 믿을 만한 신용평가 주체와 객관적인 평가 항목, 잣대가 필요하죠. 신용평가는 그 성격상 돈을 많이 빌려주거나, 세계 경제를 이끄는 나라에서 발달했습니다. 미국이죠. 돈을 빌려준 뒤 떼이지 않으려면 국가별 신용등급이 있으면 좋겠지요.

국가신용평가와 관련한 신문 기사나 방송 보도가 나올 때 여러분은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000사’라는 표현을 들은 적이 있을 겁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Moody's), 피치(Fitch)를 말합니다. 미국이 번창하던 19세기 중반과 20세기 초기에 설립됐다고 하니 신용등급 평가 노하우가 어마어마할 듯합니다.

신용평가사들은 서로 각자 독특한 방식으로 등급을 표현합니다. 영어 알파벳 대문자 A, B, C, D와 소문자 a, b와 1, 2, 3 숫자를 이용합니다. A가 많을수록 좋다고 보면 됩니다.

신용등급이 낮은 나라와 기업은 돈을 빌릴 때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합니다. 돈 갚을 능력이 그만큼 낮기 때문에 이자를 많이 내야 하죠. 신용이 높은 사람이 은행에서 낮은 이자율로 돈을 빌리는 것과 같습니다. 돈을 빌려 놓고선 못 갚겠다고 나자빠지는 나라도 있어서 골치입니다만, 신용등급이 좋은 신호등 역할을 하는 것은 맞습니다.

신용등급이 높은 나라를 보면 경제가 성장할 여력이 많고, 정부의 재정과 국가 채무 규모가 통제 가능한 범위에 있으며, 좋은 기업이 많은 나라입니다. 미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위스 싱가포르가 대표적인 곳이죠. 신용평가사들은 대한민국을 아직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디스는 일본 중국보다 한국의 신용등급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적자 살림살이를 늘리고, 국가채무를 증가시키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점점 높아가는 게 흠입니다. 보다 자세한 신용등급의 세계는 4, 5면에 있습니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나를 놓지 마소서-시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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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6월 6일)
제목: ''성령 충만한 선교''
말씀: 사도행전 2:1~13
기도: 강경식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폴 칠더스 목사님(YWAM하와이 열방대학 총장)
통역: 이원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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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폴 칠더스 목사님(YWAM하와이 열방대학 총장)
안녕하세요. 알로하!~~
하와이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제가 사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로부터 이렇게 문안을 전달하고 싶다. 특별히 ‘YWAM 예수 전도단’ 코너에서 창시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 목사님으로부터 사랑과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분의 사랑을 전한다. 오늘 아침에는 초청해 주신 오정현 목사님께도 감사드린다. ‘성령 충만한 선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다. 저는 이 자리에 함께 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전세계가 펜더믹을 겪고 있는 가운데서도 우리 하나님은 세계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을 능력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글로벌 펜데믹도 하나님의 능력을 막을 수 없다. 경제적인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막을 수 없다. 우리 하나님은 왕 중 왕이시고, 주의 주이시고, 그리고 그의 나라를 완성되어 우리 가운데 오시고 계신다. 오늘 우리 삶 가운데 그 어떤 역사의 시간보다 우리 하나님의 나라를 점점 더 확장되고 있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자의 편에 서 있는 줄 믿는다. 이 승리자의 삶의 있는 것 좋아하시지요? 저는 그런 삶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그 생명 가운데 함께 접붙임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 또한 맛볼 수 있다. 우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교회의 시작점으로 보인다. 이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승리가 절실한 그런 상황이었다. 이 상황 몇 개월 전까지 제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들이 사랑했던 그 리더가 잔혹하게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다. 그들의 소망과 꿈은 사라지고 만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가 3일 뒤에 다시 사라졌다. 그들의 절망가운데 다시 승리를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40일이 지난 다음에도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면서 그가 승천하시는 장면이다. 그리고 올라가시는 장면을 제자들이 목격한다.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참 인간적으로 정말 그 정서적인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았을 것이다. 기쁨에서 경이로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그들이 해야 할 한 가지는 기다리고 예루살렘이 기다리라는 그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 오순절이 강림하였을 때,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었고, 그들이 함께 하면서 한 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가운데 이것은 굉장히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일이다.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여러 채널이 있다는 것이 좋은 일이겠지만,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함께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그 공간에 함께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께서 그 관계 가운데 움직이시는 것을 느끼면,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한 분의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줌으로 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이 세상의 그 몸 된 교회와 이 초대교회의 제자들과 함께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물리적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현장가운데 우리가 한 교우로서 함께 성령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함께 연합하게 될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명령하신다.

저도 하나님의 축복을 부으시는 그 현장에 있고 싶다. 대면하시고 있는 이 현장에 아멘! 하시고 그냥 조금 이렇게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본당에 있는 은혜의 폭포와 같이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이곳에 있기를 원한다. “하나님!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냥 이슬비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였을 때에, 이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줌도 좋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 자 이 제자들은 이것이 기도하는 현장의 자리였다. 갑자기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바로 다른 나라 언어로 방언을 하는 것이며, 그리고 사람들이 달려 나와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정말 경이로움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경이로움을 경험했다. 그들이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 것을 듣게 된다.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 성경에 16군데 장소를 언급한다. 거기에 정말 경이로운 가운데 있다. 이 오순절에 방문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정말 알고 있었던 세상 곳곳에서 모였던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예루살렘 엑센트도 모르고, 그러나 그저 예배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었다. 외부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그 놀라운 일들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언어로 선포된 것을 듣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미리 구하였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로 서로 쳐다본다. 그리고 서로 이게 무슨 일일까요?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왔지만, 이제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저는 이 질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12절 말씀,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2 They were all amazed and perplexed, saying to one another,
“What is this?”

-이곳이 어떤 일일까?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이 변화될 것이라는 말씀이며, 이제 더 이상 외부에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도 이곳에 포함되는 것을 그들의 정체성이 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그 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이 날, 3천 명이 더해지는 것이었다. 외부에서 들여 보는 게 아닌 이것은 전도의 좋은 날이었다. 성령 충만한 선교는 이런 결과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교제 권으로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의 교제로 들어오면, 서로가 나누게 되고 함께 하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아침 3가 포인트를 나누고자 한다.
 
▷성령 충만한 선교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가?
첫 번째 – 기쁨으로 충만한 선교이다.
-여기서 기쁨으로 충만한 것을 본다. 환경과 상관없이 용광로처럼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기도를 그들은 했다. 성령 충만하면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두 번째 – 정체성으로 빚어진 선교이다.
세 번째 - 능력으로 부음 받고, 유지되고, 이끌림 받는 선교이다.
 
-먼저 기쁨에 대해서, 성령 충만한 선교는 기쁨으로 하는 선교이며, 이것은 우리의 깊은 곳에서 시작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깊이 담겨있는 그 생명력을 봉인해제 하시기 시작하신 것이다. 기쁨이란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그 생명력, 그 온전함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 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 충만한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생명력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기쁨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 생명의 그 충만하면 어떻게 접속할 수 있는가? 바로 중요한 key이다. 임마누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 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도전들과 종종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바쁨과 굉장히 쳇바퀴 속에서 계속 돌아가는 그런 삶을 사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이 있다. 이 이풍성한 기쁨으로 가는 이 생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실제가 되게 할 수 있을지를, 어떤 때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 이 기쁨을 앗아가기도 한다. 저는 결혼한 지 20년이 되었다. 결혼생활이 너무 좋다. 결혼에 대해 좋은 것으로 나누고 싶다.
 
모두 결혼하라! 모두 결혼하라고 늘 격려하고 있다. 성경적인 것이다. 제가 겪고 있는 도전 중의 하나가 제 아내와의 관계이다. 제 아니는 독일 사람이다. 강하다. 은혜이며 도전이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이다. 그러나 도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상담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고, 좋은 상담사를 만나서 서로 듣고 이해하는 시간을 갖고, 제가 받았던 도전은 이 결혼에 대해서 잠잠히 기도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마음에 담고 있는 것들과 내면에 있던 것들의 간구하는 것보다 우리가 잠잠히 그가 하나님이신 것을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성령하나님께서 그런 시간들을 우리가 가지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시다. 너무너무 좋으시기에 하나님은 우리 삶을 변화시킨다. 우리의 실망도 바꾸신다. 우리의 착각과 실망도, 우리의 모든 고통도 바꾸신다. 그의 구원으로 바꾸실 수 있다. 우리에게 어떤 것이 닥치든지 우리는 그의 임재 앞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성령 충만한 삶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쁨으로 가득하는 삶인 것이다. 그의 임재로 가득할 때, 이것이 이루어진다.
 
※저는 나이지리아 북부에 파괴된 교회를 재건축 하는 사역을 몇 년 동안 하고 있었다. 파괴된 교회들을 그 과정 가운데 나이지리아 있는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열악하고 위험 가운데에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저희 교회를 통해서 저에게 마음을 주셨다. 그냥 보낼 것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직접 가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직접 갔다. 너무 긴 이야기라 다 할 수는 없지만, 정말 위험한 곳까지 제가 가게 되었다. 제가 생명의 사실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예수를 위해서 오늘 이 순간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말 두려웠다. 작은 교회에 그 교회로 성령의 임재가 임했다. 그 자리에 함께 모였던 사람들은 그들의 아내와 형제들도 함께 저도 만져주셨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임재가 있게 된 것이다. 그를 아는 것으로 인해서 그 기쁨과 평강이 온 것이다. 기쁨의 삶 가운데 그분이 부으시도록 하길 바란다.
 
두 번째 성령 충만한 선교는 정체성으로 가득하다.
이 초대 교회는 다양한 삶으로 함께 모인 도시들이었다. 다양한 삶으로 모습들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 로마인들도 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있었다. 그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저는 아내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로마인들은 독일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말을 한다. 이 교회는 또 종들도 노예를 데리고 있었던 사람들도, 의로운 사람, 죄인들도, 다양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는지를 아는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들은 가능을 보지 않았다. 예수님을 보았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무엇을 보는가? 왓두비씨?(What do be see?) 우리는 차이점을 보고 있다(We are seeing the difference). They see each other and see the light of Jesus Christ.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 있다. 우리에게 정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우리가 그들의 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충만하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면 정체성을 보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면 선교에는 능력이고 효율적이며 유지되는 선교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우는 이유는 그 생명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그에게 초청할 수 있기에 효율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들의 내면속에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으시고 나누는 일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그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정말 놀라운 일은 코로나가 있기 전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 라이나 몽키라고 하는 전도자와 함께 전도할 때,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7천 8백만 명의 예수 전도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전도자였다. 하나님이 움직이신 것이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은 사용하시길 원한다. 하나님은 삶의 놀라운 일들과 사람들을 변화시키시길 원하실 것이다.
 
아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내가 그녀는 인도에 있을 때에 거기에 전도 집회에 합류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 전도 설교하시는 분이 설교 마무리에 이런 이야기를 많은 교인들 가운데에서 “독일에서 오신 분들이 치유의 은혜로 기도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제 아내는 거기에 보니 당황하여 인도분 중에 등이 휘어진 분을 위해 기도한다. 이 등을 똑바로 펼 수 없느 분이였다. 그녀는 가서 “제가 어떻게 해야 되죠?”라고 이야기 했다. 순간 아내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영어로 기도했다고 했다. 하나님께 그녀는 이분이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며 부끄러울텐데요. 이것이 그녀의 진짜 기도였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다. 하나님이 이것을 이루실 줄 믿는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저를 통해서 원하시면 하시길 원한다.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그 등이 휜 인도 사람이 바라보면서 갑자기 허리를 펴고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아내는 공포에 질렸다. 어떻게 할지를 몰랐다. 여기에서는 정말 놀라웠다. 하나님 어떤 일이신지 모른다고 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훨씬 더 크신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정확히 아신다. 모든 면에서 놀라우시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일을 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길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할 때,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런 사역자로 세우신다. 우리는 정말 놀랍고 수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관계의 치유, 삶이 회복되는 것,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놀라운 기적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상 가운데 역사 하고 계신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사랑의 교회를 통해서도 일하길 원하신다. 성령 충만한 선교는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는 삶을 기쁨으로, 정체성으로, 기도와 능력으로 충만해진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심을 감사하며, 함께 예배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하기를 원한다. 기쁨으로 충만한 그 생명이 이 삶 가운데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하는 정체성으로 형성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실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나와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물결이 일어나고, 하나님 역사하심으로 기쁨과 차고 넘치는 은혜를 주시길 원한다. 하나님에 속한 사람으로 깨닫게 되길 원한다.
 
♣요약
가서 모드 민족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고 전파하라고 하신다. 날마다 성령 충만한 생명력으로 기쁨이 넘치어 그 무엇보다도 막을 수 없는 경이로운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와 교회 이 나라 가운데에 있어야 하며, 모두가 폭포수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기쁨으로 충만한 선교, 정체성으로 빚어진 선교, 능력으로 부음 받고, 유지되고, 이끌림 받는 선교를 우리는 아름다운 관계로 합심하고 헌신하여 복음의 마중물로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바람소리와 같은 것과 더불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 즉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이었다.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불과 함께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때 성령 충만의 증거로 받은 은사는 방언이다. 방언은 교만한 백성의 언어를 혼란시킨 것과 달리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으로, 성령을 통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며,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때 방언을 들었던 사람들은 다 놀라며 의혹하여 그 제자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했다.


 




















※위에 기록한 설교는 1부 에배이며, 지금 영상은 2부 예배로 약간의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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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1년 6월5일)
제목: ''온전한 선교를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 마태복음 28:19~20
사회: 백승준 부목사님
설교자: 로젠스 통 목사님(국제 OM선교회 총재)
간증: 심우 선교사(미얀마 DDM)-''제자훈련 국제화사역나눔 및 미얀마 교회돕기''

예배 마무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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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기쁨으로 생각한다. 직접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기술 덕분에 직접 여러분과 함께 하지 않고도 제가 여러분께 말씀을 전할 숭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다. 담임 목사님을 비롯한 사랑의교회 리더분들게 이 선교 컨퍼런스에 참여할 기회를 주신 것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싶다. 우리가 읽은 이 선언문은 지상명령이라고 불려왔다. 다른 이름으로는 대업, 큰 과업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 선언문은 교회의 사명(선고) 선언문이라고 불려왔다. 여러분이 이 선언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의 삶에 급진적인 영향이 생길 것이다. 여러분의 삶의 방식, 행동 양식,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여러분이 가는 모든 곳에, 여러분이 이 선언문과 신념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선교적 가르침을 주신다.


첫 번째로,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하신다.
두 번째로, 그분은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하신다.
세 번째로, 그분은 우리에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지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분석하도록 도와주는 비결을 주요 동사를 살펴
보는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주요 동사는 ‘제자로 삼아’라는 두 단어이다.
우리는 성경과 주님을 통해 회심 자가 아닌 제자를 삼으라는 말을 듣는다.


♤회심 자와 제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누군가 이것을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회심 자는 주 안에서 늙는 것(grow old)이고,
제자는 주 안에서 자라는 것(grow up)이다.


제자훈련은 양육(멘토링)이라는 노력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로 하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정과, 주님 안에서 그 사람이 자라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어디에서 제자를 삼아야 하는 지를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세상 민족 중 일부, 또는 대부분을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야 하되, 모든 사람, 모든 인종, 모든 언어의 사람들이 포함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이들이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선언문에서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지에 대해 말씀하시는 세 가지 보조 동사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보조 동사는 ‘가라’이다.
두 번째 단어는 ‘세례를 베풀라’이다.
세 번째 단어는 ‘가르치라’이다.
-이 세 단어들은 ‘제자 삼아라’ 라는 주요 동사를 도와주는 동사이다. 그래서 지상명령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인데, 그러러면 우리는 가야하고, 세례를 베풀어야 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지상명령의 방법이다. 그럼 잠시 동안 그 단어들을 살펴보자.


▷첫 번째 단어는 ‘가라’라는 단어는 강한 성경 말씀이다.
-구약성경, 또 신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한 선언문이다. 여러분은 헬라어, 히브리어, 중국어, 영어, 베트남어, 여러분이 원하는 어떤 언어에서도 똑같은 ‘가라’라는 의미를 묘사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단어는 ‘머물지 말라’ 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너는 가는 일을 통해 제자 삼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어디에서 어디까지만 구별해서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지상명령의 의미가 아니다.
그 의미는 이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참된 하나님, 참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있는 곳에서 한 분이신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복음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누군가가 떠나고, 가서, 예수님에 대해 전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를 것이다. 여러분이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을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저는 우리 모두 다 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가는 것에 대한 이 선언문을 선포할 때마다 돌보아야 하는 가족, 돌보아야 하는 부모님, 헌신해야 할 일과 다른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 모든 사람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위대한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갈 수 있는 사람은 가라. 이웃에게 가고, 여러분의 친구에게 가고, 여러분이 사는 나라의 도시로 가고, 심지어 주님이 인도하시는 해외로도 갈 수 있다. 그래서 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야 한다. 갈 수 있는 사람들을 보내는 자로서 섬기고, 선교 사역을 후원자가 될 수 있다.


저는 이 설교를 쓰면서 폴리 캐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이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을 터인데, 그는 인도에 가서 홀로 많은 인도 부족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그와 매우 가까웠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여동생 폴리였다. 폴리는 사지 마비 환자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움직임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유일하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신체의 부위는 입과 얼굴이었다. 후에 윌리엄 캐리는 그가 자신의 선교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그녀가 펜을 입으로 물고 쓴 편지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정보부로부터 받은 약간의 연금을 자기 몫으로 취하지 않고, 인도에서 윌리엄 캐리의 사역을 위해 헌금했다.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제약 때문에 인도에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오빠를 후원하고 기도함을 통해 진행되는 선교 과정 전체에 참여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윌리엄 캐리의 삶과 사역이 강력하게 사용하셨다.


▷두 번째 단어는 ‘세례를 베풀라’이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이것을 말씀하실 때는 목사님이나 사역자가 예배 중 세례를 거행할 때 해야 하는 말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세례는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영존하시는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일시됨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는 것은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그들 자신과 유일하신 참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일시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는 것과 세례를 베푸는 것을 통해 제자 삼을 수 있다.


▷세 번째 단어는 지시 동사 ‘가르치라’ 이다.
-20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이다. 오늘 아침 지금 여러분이 계신 곳에서, 가정, 혹은 친구의 집이나 혼자서 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일들을 행하고 있다. 선교사, 교회, 목사, 오엠(OM)의 복음 파트너들 등, 그들은 오늘 이 아침에도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거기서 그들은 그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고 있다. 그것이 지상명령의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오늘 아침 제가 여러분께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저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 아침 저의 핵심은 지상명령에 대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상명령은 19절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18절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럼 성경에서 18절 말씀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8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 것인가? 그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영적인 땅과 육적인 땅, 어디라도, 그 모두를 내가 다스리고 있다. 내가 모든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주권자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무슨 뜻이었을까? 이것은 그분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상명령의 시작점은 지상명령이 아니다. 지상명령의 시작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주라 한다‘ 이 말씀 기억하는가?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 모든 이들에게 해야 할 일을 말해 주시는 분이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제가 좋아하는 후렴 중의 하나가 ‘그는 주’이다. 그는 주, 죽음에ㅓ 부활하신 주, 예수는 나의 주,~ 이 후렴을 좋아해서 여러 번 부르곤 했다. 최근 저는 이 찬양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르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날 주님과 제가 개인 묵상 시간에 제가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저는 제가 예수님이 제 인생의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었다. 내가 예수님이 주님이라 말하고 있지만, 내가 모든 계획을 세우고, 미래르 계획하고, 내 인생을 계획하고, 내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를 결정했다. 그리고는 이 모든 계획을 세운 후, 주님께 저와 함께해 달라고 기도했다. 제가 한때 출석했던 모임의 어떤 사람이 ‘당신이 계획을 세워야 하고 하나님을 반드시 그 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계획을 세워야 하고, 하나님을 반드시 그 계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이 말을 지켜왔다. 그러나 그 후 저는 제가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에 포함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은 신실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세워져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세운 그런 모든 계획 중 많은 것들이 그 자체로는 잘 준비되고 합리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이 만든 계획에 포함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계획이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려 주신다. 우리를 위한 계획 중의 하나는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가 중국의 선교지로 파송 받았을 때, 제가 중국에서 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리스트를 만들어 그곳에 내 이름을 적고는 이것이 내 목표이고 미래를 위한 계획이라고 여기며 “주님 제가 이것들을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의 이름을 여기에 넣길 원합니다 저희 둘이서 이 계획을 성취해보시다”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으며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시다. 왜냐하면 중국에 있을 때 저는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지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2008년에 일어났고, 그것이 제 계획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제가 중국에서 했던 모든 것은 원래 제가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그 경험을 통해 이것은 나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뜻만이 성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이후부터 이제껏 해온 일은 빈종이 한 장을 가져와 주님께 드리고는 빈종이 하단에 “이것이 제 사명입니다’라고 사인을 하고 주님께서 저를 위해 빈 종이를 채워주소서, 내 인생을 위한 계획, 주님께서 내가 하기를 원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합니다.” 저는 그것이 어려운 일처럼 들린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이 종이 위에 적으실 일들이 꼭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항상 옳으며 항상 선하다. 자 20절 말씀을 설교하지 않고 끝낸다면 잘못일 것이다. 마태복음 마지막 말씀이자 지상명령의 가장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다. '반드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다른 번역본은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되어 있다.


여러분은 혹시 '내'가 누구인지 모르신다면 그는 예수님이시다. 그는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내가 가진 능력이며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저는 수 년 전에 파나마에 임무를 띠고 방문을 했던 것을 기억한다. 군 캠프의 매우 중요한 군 장교의 손님이었다. 30년 전에 파나나 운하는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고 매우 강력한 미국의 주둔군이 그 나라에 있었다. 저는 공군군부대에 머물렀다. 거기서 일할 때 어디를 가든지 군 경찰이 저의 신분증을 요구했고 제가 부대에 무슨 일을 하는지 확인 했고, 거리에서 걸어가면 군 경찰이 멈춰 세웠고, 신분증을 검사했으며 볼링장이나 가게에 가거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곳은 많을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제가 하는 모든 것이 제한되었다. 며칠 후 저를 초청한 분이 승인된 통행증을 가지고 왔고 그 이후에 그것을 가지고 다녔다. 그날 이후 나는 어디든 출입이 허락되었고 그 통행증이 모두를 허락했다.
심지어 군인 몇몇은 내가 지나갈 때, 나에게 거수 경례를 했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들은 나를 돌봐주고 있는 사람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당시 나를 초청하신 분이 중남미를 담당하는 참모부장이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권세이다. 그 권세는 다른 권세들 위에 있다. 우리가 빈 종이에 서명을 하고 주님이 우리가 가길 원하시는 것을 행할 때, 우리가 누구인지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인지 때문에 가는 것이다. 저 혼자라면, 저는 외국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다시 배우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저 혼자라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역할의 부담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교사가 아니라면 구석진 어딘가의 가게에서 그저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을 사는 재고관리인 노릇이나 하고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저 혼자라면 매우 제한적이며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며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하실 수 있다. 그분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그분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확신을 주시고 약속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주라 내가 주이기 때문에 너는 갈 수 있다. 내가 너와 함께 갈 것이기 때문에 너는 갈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를 위한 지상명령은 제자를 삼는 것이며,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가르침을 통해 제자를 삼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주님께서 우리를 가능케 하시고 그분의 임재가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We included in his plan, not your plan, in God's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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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 선교사님 설교
미안마에서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다. 셔츠 생산 공장이었다. 선교열정이 넘쳐서 피곤한 줄 모르고 복음을 위해 힘썼다. 그 결과 전도한 직원이 많아서 자신감이 넘쳐 선교가 어렵지 않다고 느꼈다. 노동쟁의가 극심한 2012-2013년에도 대부분의 공장이 데모와 파업으로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공장은 조업이 잘 되어서 노동부 장관이 직접 방문을 해서 정부표창을 해주었다. 그 이후부터 선교사가 운영하는 공장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고들 했다. 하지만 첫 전도 열매였던 임마엘이라는 직원이 폐결핵으로 숨지자 그를 중심으로 사역을 확장해 나가는데 차질이 생겼으며, 요나처럼 마음에는 분노가 일었다. 주님, 저는 나이가 적지 않으니, 현지 사역을 속히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데 어찌해서 저의 선한 일을 하는 저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냐고 물었다. 실망 끝에 귀국 보따리를 싼 후, 그간 해보지 못한 북부 미얀마로 여행을 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여행의 끝 무렵, 은퇴를 앞둔 어느 선교사님의 질문 하나로 다시 그 미얀마 땅에 다시 남게 하셨다. 이 분은 미얀마의 영혼을 위해 진정으로 사랑해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은 처음 공장 출근에 보았던 순수한 눈빛의 많은 공원들을 떠오르게 하였고, 그들이 천국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할 때마다 엄청난 눈물이 흘렸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그리고 오늘 고린도전서 3:6-8절 말씀을 묵상하게 해 주셨다.


*고전 3:6~8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이 말씀 앞에서 선교에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며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소중히 배우고 하염없이 겸손해졌고 그간 자기만족을 위한 미성숙함을 깨닫게 되었다. 2015년 여름 사역에 변화의 전기가 왔다. 제자훈련의 과정을 선교에 포함시키자 하는 임상실험차, 국제제자훈련 박주성 목사님께서 제자들을 인솔하여 미얀마에 오셨고, 현지 선교사를 위해서 선교지에서의 제자훈련이라는 제목으로 일일세미나를 해주셨다. 이 세미나 후에 현지의 반응은 과히 폭발적이었다. 모든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제자들에게도 사랑의 교회 제자훈련을 받게 해달라며 이구동성으로 요청을 하였으며, 세미나의 속하지 않았던 타 지역 선교사들도 지지부진한 미얀마 선교에 오직 제자훈련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며 간청을 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국제제자훈련과 협의하니 현지 세미나 준비를 하는 데에만 최소한 5년의 시간이 필요하며, 그 후에도 열정이 넘치는 사역자가 지속적으로 현지 상황을 해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도를 먼저 했다. “주님,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가두리 양식장, 일터 사역이 정말 저의 은사에는 잘 맞습니다. 제자훈련 사역은 평신도인 저에게는 물의입니다. 안수 받으신 목사님의 영역이니 다른 선교사님을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주님의 응답은 예외였다. 이 일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일이라시며 1979년 종합상사 섬유 부분에서 일하게 한 것, 사랑의 교회에서 18년간 순장사역을 하게 한 것, 키르키스탄이 아닌 미얀마로 방향을 틀게 한 것, 사랑의교회의 큰일 작은 일 하나하나가 처음부터 모든 일이 이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응답으로 씨 뿌린 자의 역할에서 물주는 자의 역할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주께서 미션을 주셨으니 할 수 있는 능력도 같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의 허락과 국제제자훈련의 전폭적인 협조로 2016년 1월 미얀마 제자훈련, ‘EMM 디사이플 풀 메이킹 인 미얀마’ 개원 예배를 드렸다. 파송 선교사, 윤정희 선교사와 다섯 명의 번역자를 구성하고 기도하며 개원예배를 드리고 준비 작업을 하였다. 번역은 6개월 만에 마치고 실험 반을 운영해야 하는 상황의 작업에는 그 후로도 6개월이 소요되었다. 2017년 2월, 제자훈련 교재를 3권을 출간하게 되어 감사 봉헌예배를 드렸고, 5월에는 큐티 세미나에 이어 대망의 제자훈련을 시작하였다. 제1주 훈련은 사역하고 있는 교단 소속교회의 21명의 현지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훈련까지 56주간의 걸쳐 쉼 없이 진행되었고 몇 명은 교회 칼 세미나에 참가해서 그 깊이를 더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이 세운 이 교단은 현재까지 46개 교회가 개척되었으며 개혁주의 신앙, 새벽기도, 제자훈련을 3대 기둥으로 삼아 목회하고 있다. 모든 교회의 누군가는 제자훈련을 하거나 제자훈련을 받고 있으므로 매해 2월 첫 주에는 개강예배를, 11월 마지막 주에는 수료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교회들은 미얀마에서 가장 건강한 모범교회를 성장하고 있다. 작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대면 예배를 못 드렸지만, 제자훈련만은 지속할 수 있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였다. 처음 저에게 훈련 받았던 제 기 목회자들이 훈련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후 교재도 계속 완성되어서 사역훈련교재 3권, 제자훈련인도자 지침 3권 모두 출판되었으며, 특히 2019년 11월부터는 우리 교회 큐티집 ‘날마다 솟는 샘물’이 미얀마어로 출간되어서 지금도 매월 발간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이 책은 가장 내용이 알차고 새련된 큐티집으로 인가가 매우 높다. 특별히 코로나 사태로 5명 이상이 모임이 중지 되었던 작년에는 하나님 말씀과 대면할 수 없는 귀한 수단으로 여러 미얀마 교회로부터 많은 추가주문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우리는 처음 계획했던 5개년 계획에 마지막 단계에 와 있다. 내년이면 평신도가 인도하는 다락방이 15개 교회에서 개설되며, 이 다락방이 정착되면 2년 뒤에는 선교지에서의 세미나를 현장주도형으로 개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세미나를 통해서 제자훈련의 건강성, 충만한 영성, 그리고 사람을 바로 세우는 교회들의 부흥의 모습을 미얀마 전국에 있는 중견 목회자들에게 투명하게 보여주고 제자훈련에 대한 강력한 동기부여를 하게 될 것이다. 이 코로나 사태가 빨리 끝나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미얀마에 직접 오셔서 온전론 강의를 현지 지도자들에게 직접 들려주시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로서 제자훈련 선교 교회는 온전함에 선교계획을 잘 이어가고 있음을 보고 드린다. 이 의미 있고 귀한 열매를 주변 동남아 각국으로 씨앗을 날려 보낼 것이다. 하지만 미얀마 현실은 녹록치 않다. 아시다시피 지난 2월 1일 군부 구데타가 발생하여서 현지 상황이 최악이다. 800여명의 사망자와 3천여 명의 부상자를 낸 이 시위는 근래 들어서는 시가전 양상으로 바뀌고 매일 어디선가 폭발물이 터지고 있다. 자동차 연료는 두배 가까이 오르고 물가는 폭등하며 품귀현상이 보이고 있다. 향후 6개월 후에는 340만 명이 기아선상에 노출될 거라는 WFP(세계식량기구)의 발표도 있었다. 군부는 절대 단시간 내에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최소 2년이상 현 사태는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부족 간에 소규모 전투도 계속 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인도발 변형 코로나 바이러스가 동부를 통해서 들어오고 있다. 코로나 통제 기능이 거의 사라진 미얀마에 전폭적 3차 파동으로 커지는 것은 이 또한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미얀마 교회들은 신음하고 있다. 과거 49년 만에 군부 독재시절 자리 잡았던 상호 감시정보정치가 빠르게 분할되고 있다. 젊은 목회자들이 설교할 때, 정치에 대해서 언급하면 누군가가 밀고하고 바로 경찰에 소환되고 일단 경찰서에 끌려가면 모진 구타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우리 교단의 목회자들도 지금 피신 중에 있다. 교회는 이제 감시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5월 중국 카야주의 피신 중이었던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4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은 사례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다. 미신을 숭배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개입해 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우리 부부는 얼마 전 한국대사관이 마련해 준 긴급 구호기 편으로 귀국했지만 아직 100여명의 한국 선교사들이 남아 있다. 지금이야말로 복음 전파의 큰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쿠테타를 방관하는 불교계에 대한 실망감으로 영적 공백을 주님의 복음으로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바란다. 영 가족 여러분, 어려울 때 핍박받고 있는 7천여 명의 미얀마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 주길 바란다. 특별히 미얀마 제자훈련, 선교 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심 감사하겠다. 제자훈련이라는 씨앗이 이제 막 발아해서 싹을 틔우고 있다. 연약한 순이 허무하게 마른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위하여 기도해 주
시길 바란다. 여기까지 오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손니치(러시아 블라디 보스톡)원(이윤상-정복희) 선교사님의 은퇴 수여식.


♣요약
주님께서는 모든 사역을 제자들에게 맡기셨다. 우리의 주님 되심을 깊이 깨달아야 하며,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랑의 교회 믿음의 4세대가 복음화에 앞장서고 파송한 선교 지를 위해 기도하고 특히 미얀마의 상황을 기도해 주며, 모든 선교에 후원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섬기는 미션도구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주님이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온전한 선교를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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