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a

주일예배(주후 2021년 6월 20일)
제목: ''증인(證人)의 사명(使命)을 통한 온전함''
말씀: 사도행전 1:6~8
기도: 박요셉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사도행전 1:6~8,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세상을 향한 모든 마음의 창문들을 닫아 내리고, 모든 시선을 주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과 생애 가운데, 우리 현장가운데 일하심을 확신한다. 오늘은 288의 형제, 자매들이 학습과 입교와 세례를 받게 된다. 코로나 펜데믹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귀한 세례식을 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오늘 증인의 사명을 통한 온전함은 선교 적 삶을 통한 온전함이다. 세례식 때에 설교가 좀 어렵겠지만 헌신된 내용의 설교이니 제대로 된 메시지를 받게 되심을 축하한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역사관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서길 바란다. 예수님 처음 믿을 때부터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처음 믿을 때부터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미리 보고할 영적 안목과 전투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미리 준비하는 영적 안목과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그 역사관과 내 삶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의 교육받은 이런 강남 같은 지역 출신이 아닌 갈릴리 촌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시각과 프레임이 무엇이냐면,

*사도행전 2:7절을 보면,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지역주의 대한 역사관이 있었다. 지역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인 제자들이 강력히 말씀을 전하니까 저들은 학문 없는 범인이 아니였다고 한다. .소위 엘리트 주의의 편견이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자 비포와 에프터가 완전히 달라졌다. 특별히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졌으며 지역주의 편견이 뛰어 넘고, 그 출신지역으로 귀 죽지 않았다. 엘리트주의의 편견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가진 대단한 사람들 앞에서도 귀 죽지 않았다. 그래서 그 귀 죽지 않는 증거가 무엇이냐면,

*사도행전 2:32절에 나와 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 모든 일에 증인이로다. 한다. 증인이라는 단어는 법정용어이며, 여기에는 자기 삶을 거는 것이다.
편견이나 엘리트주의라든지, 지역, 출신 등을 뛰어 넘는 것이다.
 

I. 모든 온전한 성도는 증인(證人)의 사명(使命)을 받은 역사관(歷史觀)을 가지고 있다.
 
-온전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프레임, 편견 등을 처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사도행전 전체 주제 핵심인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을 쓴 사람은 누가이다. 사도행전 1장, 2장은 누가복음 24장은 사도행전의 연속이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말하고 있다. 주님의 그 소명을 받아서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24:48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3년 동안 예수님께 훈련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편견과 지역을 그리고 엘리트주의를 다 뛰어 넘는 하나의 어떤 의식의 혁명이다. 사람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사고가 바뀌면 사고의 체계가 바뀌어야 되는데 사고 체계의 새판을 까는 패러다임 시트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 패러다임 시트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한 번 내가 새로운 꿈을 꾸고자 한 번 해보자는 것은 사치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증인의 사명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이다. 이런 역사관을 갖게 되면 우리는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뛰어 넘을 수 있다. 복음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전체를 위해 다 부족해도 젊을 때부터, 한 가지 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 증인들이다. 이것만 잘 되면 지혜와 통찰력, 사람관계, 다 물질도 채우시고 모두가 형통인 것이다.
 
오늘 온전함 시리즈로 간절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처음부터 세례받는 형제 자매들이 증인의 사명을 하나님이 주시면,,, 그럼 예수님의 증인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증인(말투스)-헬라어 => 순교자(martyr))-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죽음도 무릎 써야 한다는 말이다.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의 한 생에 사명을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할 증인됨을 마치려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생명을 걸었다. 우리는 부끄럽다. 가지 중심으로 다들 어리버리하다. 생명은커녕 이익 왔다갔 다 한다.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증인은 같은 말이다. 순교의 축복이 엄청난 축복이다. 순교는 특별한 축복이며 복락이다. 그런 증인에는 삶의 증거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짐 엘리엇이라는 청년은 에콰도르 출신의 순교자였다.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명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님의 것이 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를 주의 연료 삼아, 하나님의 불꽃이 되게 하소서.”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침된 영광을 가져다주시는 영광의 왕이여, 어떤 고난과 치욕과 손실 앞에서도 우리가 뒤로 물러나지 말게 하옵소서.” - 짐 엘리엇-

-사역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이런 고백이 삶 가운데 뿜어져 나오길 바란다. 증인된다는 것은 선교사, 목사, 어떤 특별한 전도자만이 아닌, 평범한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증인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이런 삶에 비포와 에프터가 나타나야 한다. 오늘 세례자들은 서약을 할 것이다. 증인이라는 말은 법정용어이다. 서약에서 있듯이 세레, 입교, 학습자는 그래서 성도는 안목과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
 
▷증인의 삶의 범위는 무엇인가?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우리는 지역적으로 이것을 무엇 때문에 증인이 되어야 하고 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예루살렘- 예수님을 못 박고 가시관을 씌우고 핍박한 곳이다. 새 역사.
*유대- 왜 증인이 되어야 하는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이다. 로마 식민지여서 힘든 곳이었다.
*사마리아-서로 상종도 하지 않던 곳이다. 그 땅도 밟기 싫어서 일부러 멀리 우회하여 다녔다. 민족적 인종의 편견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단순한 지역이 아닌 마음의 지경이 포함된다.
*이방인- 이것은 종교적인 편견을 뛰어 넘는 것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단순한 지역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마음의 지경이 포함된다.
가이사의 집안까지 복음의 능력이 일어난 것이다. 선포했다. 대부분 노예들이 크리스쳔이었다. 모든 것을 뛰어넘은 것이다. 지역적 한계와 계층을 뛰어 넘었다. 사회적 계층을 넘고, 글로벌 역사관을 갖는 것이다.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나에게 상처주고 힘들게 한 사람들.
-유대인-마음에 안 드는 사람,
-사마리아인-내가 무시하는 사람.
-땅 끝까지- 나와 상관없는 사람.
지역, 사회계층 한계를 넘어 그래서 가이사의 집안까지 복음의 능력이 임했다.
노예들의 복음 증거는 모든 것을 뛰어 넘은 것이다.
 첫 번째로 증인 된다는 것은 모든 한계를 뛰어 넘고 복음의 능력 안에서 증인의 사명이 선교적 사명의 삶으로 연결되어 있다.
 
 
II. 그러면, 온전한 선교란 무엇인가?
 
*신명기 10:14,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모든 인류의 창조에 다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시편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신명기와 시편의 이 말씀을 재해석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오늘 우리가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 사도행전 1;8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다시 하나님께 되돌리는 역사라고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가는 선교만이 아니고, 땅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선교는 반드시 가는 선교 보내는 선교가 있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하나님께 되돌리는 것이다. 6.25때에 서울을 수복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를 수복하는 것이다. 선교는 지역이나 계층을 다 뛰어 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육정책을 선교정책을 포함한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이나 문화를 하나님께 되돌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가는 선교만이 아니라 사는 선교이다. 방탄소년단(BTS)-‘봄날’을 들어보니 괜찮았다. 그런데 그런 노래를 부른다고 봄날이 오는가? 너무 오염된 우리가 정말 집중해서 사고체계를 바꾸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쁜 자녀로 사는 것이다.

 
▷선교 ㅡ창조의 질서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는 선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절반만 수용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도 다 가라고 하더니 본인들은 안가더라. 우리가 실제로 갈 수가 없듯이 우리가 살아내야 한다. 사도행전 성령을 받을 때에, 그래서 증인의 삶을 위해 수복시키기 위해서 사는 선교를 하니 하나님 나라가 회복된다.
 
※로잔 선교회 오천 명이 모인 곳이다. 케이프타운 ㅡ세계선교회에서 첫 시간에 한국교회가 모두 함께 헌신을 했더니 첫 시간에 인도하라고 했다. 우리교회 손경주라는 학생을 데리고 갔다. 북한의 고위층 딸이었다. 탈북 했는데 그녀는 사명을 받은 뒤에 순교했다. 네덜란드 로잔대회는 17년만에 케이프타운에서 했다. 케이프타운에서 순교자 딸을 위해 그녀의 아버지가 간증했다.
 
우리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공간적, 시간적, 초자연적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이제는 전천후 선교가 되어야 한다. 때를 얻든지 안 얻든지, 온 오프라인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온전한 선교로 하나님 역사하길 기도한다. 영적인 전 방위적으로 증인의 사명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 역사하시길 소망한다.
 
 
지역적, 영적한계를 깨뜨리고, 슬픔을 당한 사람도 이 가운데 많겠지만, 어떤 분들은 상처로 힘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는가?
내 생각, 내가정, 내 자신, 내 이기주의를 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6~7,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내가 언제 잘 되냐고 묻기 전에 네 삶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증인된 사명을 감당 하냐고 하신다. 내 것만이 아닌 온전함의 고봉으로 가야한다. 성령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지역의 한계, 영적인 한계, 계층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내가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에게 기름 부어주시길 소원해야 한다. 오늘 이 능력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길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기를 간구한다.
 
우리는 세익스피어처럼 글을 쓰지 못하지만, 세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도 글을 쓸 수 있다. 음악인 모차르트처럼 그 음악이 식물도 살리는데 그 천재성이 없지만, 우리에게 주시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증인의 사명은 내 자신의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 증인의 사명 자는 내가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나를 이끌어 주는 삶을 바라는 것이다. 이 사명이 우리를 끌고 나가길 기도해야 한다. 사명의 말이 마차를 끌어야 한다. Why not now!! 왜 지금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 증인의 삶을 실천하고자 500명이 전력투구하여 120명만 남았다. 오늘 이 자리가 아니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요약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가지고 지역, 계층의 편견을 뛰어넘어 생명을 거는 복음의 헌신을 실천해야 한다. 선교는 내 자신이 의지적으로 생각하고 만들어 내는 고상한 윤리가 아니며 증인의 사명자는 내가 사명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나를 이끌어 주는 대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는 선교와 사는 선교를 위해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길 기도하며, 전천후 증인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깨달아서 이 땅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신다.
 
 

 



 

 

 

 


반응형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6월 19일)

제목: “생각과 생각사이에서”
말씀: 요한복음 1:1~4
설교자 : 이원준 부목사
성경읽기: 유영권, 서동주(청년 G국,A국)
사회: 송대영 부목사님

예배 인도 및 마무리기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요한복음 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AI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을 동일하게 하거나 더 잘 할 수 있다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제품도 사용하고 평가해 보고 구매하는 것이 보편화되는 것인데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 일대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동거해보고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기독교는 기독교를 믿으면 되었지, 왜 다른 사람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가? 우리 청년들이 삶의 순간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순간들 속에서 맞닥뜨려지는 실제 질문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질문을 어떻게 대답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관 그리고 그 내면에 있는 그 사고의 체계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잡고 있는 사고의 체계는 세속주의와 탈 근대주의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새벽부터 주의, 주의 하니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졸지 않기를 바란다.
 
세속주의란 종교와 신앙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뿐 공공의 영역에서는 다른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사고의 체계이다. 이처럼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이 사고의 체계들은 요즘에 일어나는 현대 문화의 현상이 아니다. 생각의 역사, 즉 천하의 역사의 제일 먼저의 질문은
아르케라는 무엇인가? 즉 이 세상 전체의 근원적이 무엇인가였기 때문에 삶의 모든 순간과 인류의 역사와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사고의 체계는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은 생소하거나 또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요한복음 1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그 수신자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 실로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과 그 구조적으로 유사함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시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는 그 빛이 바로 요한복음 1:1~4절까지 동일하게 반복된다.
 
다만 여기에서 말씀도 있고 빛이 있는데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읽었지만,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라고 수신자들은 들은 것이다. 이 로고스라고 하는 단어는 말씀, 진리, 소통 표현, 이러한 것들을 담아내는 말이 맞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수신하였던 그 사람들은 유대인 뿐 만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고의 체계들을 구성하고 있던 헬라 문화권에 있었던 사람들이 받았던 소식이기 때문에 이 고로스가 하는 그 단어는 다른 의미, 그저 말씀이 가장 우리로서는 최고의, 최선의 번역이긴 하지만 원초적인 원리,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그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이성과 같은 그 로고스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라는 이 표현은 처음 수신자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이 당시 철학의 시류가 이야기하고 있던 그 로고스보다 훨씬 더 높고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있게 한 그 능력은 단순한 괴력이나 어떠한 이성이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이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의 개념을 뛰어넘어서 모든 우주의 존재에 이유와 기동력이 되신다고 1:3절에서 특별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보이는 생물들과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 생물을 뛰어넘어서 과학, 수학, 철학과 같은 그 학문들과 그 학문을 구성하는 다양한 법칙과 원칙들, 원리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물리 상수와 중력과 무중력, 예술의 아름다움과 전파의 기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그분으로 인해 그분으로 위에, 그분 아래,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 사실에 대해서 멋지게 표현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로고스 그 만물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세속주의의 사고체계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도전한다. 신앙은 신앙이어야지, 예수 같은 종교적 인물이 그 다른 공공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 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그들이 가진 핵심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어떤 공공의 영역은 팩트와 사실에 의거해야지, 가치, 신념, 종교 신앙과 같은 것들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전제 때문이다. 정말 가치중립적인 팩트, 가치중립적인 세계관이 가능할까?
 
하나를 예를 들어보면,
미국의 천문학자, 1929년 에드윈 허블이란 천문학자가 허블법칙을 발표한다. 긴 얘기를 짧게 말하자면, 허블이라는 그 과학자는 우주의 빛의 파장을 연구하면서 '레든 쉬프트'라고 하는 현장을 발견하게 되고 이 적색편이 현장을 통해서 우주는 팽창하고 있음을 물리학적으로, 천문학적으로 정리해준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시작점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우주의 시작점을 세속주의의 사고의 체계로 해석하면, 빅뱅우주론이고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힌트라고 말을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가치중립적인 그 어떤 영역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공공의 영역에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살아내지 않는 그 모든 동안에 이미 무실론 적 자유주의와 근대주의의 산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세속주의와 이 세속주의가 구축한 사고의 체계가 공공의 영역을 장악하기 시작할 때에, 그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은 우리에게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이 사고의 체계가 만들어 내는 세상은 어떠한가? 우리가 처음 이야기한 AI를 생각해보자. 세속주의 사고 체계에서는 인간은 고등한 동물내지는 기계적인 세포에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나아가서 사이보그, 또는 포스트휴먼(posthuman-현 인류보다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적인 존재가 인간보다 더 가치 있다는 주장, 이것들이 덜 가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가지고 있지 않다.
 
혼전 동거가 만들어 낸 수많은 내면의 파괴와 영혼의 피폐함,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불신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서는 수많은 낙태와 유기되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에, 그저 동물이나 기계로 만들어버리는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는 이 세상은 그저 어둠일 뿐이다. 프랜체프 세이커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가치, 의미, 정의, 윤리, 도덕과 같은 이런 내용들은 세속주의 안에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슬쩍슬쩍 우리 안에 있는 세계관에서 무단으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세속주의가 만들어내는 이 세상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속주의 사고 체계에는 결국은 사람들을 어둠 가운데 가두어 놓게 된다. 이 로고스를 만나지 못하는 어두움은 그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그림자로 드리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가지고 있지만 로고스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세속적주의 사고 체계가 만들어 놓은 그 경계선 안에 갇혀서 우리의 신앙이 마치 다른 곳에서는 제한되거나 좀 참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속박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은 어떠한가?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는 어둠 가운데 있거나 로고스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속박 가운데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들어가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적어도 분명하게 확실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영적인 어둠과 영적인 속박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해 낼 능력이나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어둠과 속박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실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데,
 
*요한복음 1:4절에 이은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우리 하나님께서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어둠 가운데 들어오시는 이 로고스가 어둠 가운데 왜 들어오시는가? 그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드러나는데,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가복음 15:33절에 보면,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우리가 피할 수 없고 스스로 건져낼 수 없었던 그 어둠이 십자가 위에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어둠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속박한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요한복음 8:31-32절에 보면,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로고스에 거하면 우리를 자유케 하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것을 대신 당하시고 그 어둠이 막을 수 없었던 능력으로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시는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 줄 믿는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보자.
 
*고린도전서 1:19절에 보면,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로고스를 초월하는 역사를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그분의 부활은 자연의 법칙 위에 그 계심을 로고스가 선포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고의 체계를 초월하는 사고의 체계를 우리 가운데 이루어 내시는 그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창조의 주인이신 그분은 창조에도 주인이신 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만 주인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온 우주의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 이신 분이시다. 모든 존재와 이유와 능력, 그리고 기도하시고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인 줄 믿는다. 그 안에 영혼의 공허함은 끝난다.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우리의 고통과 불편함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생긴다. 우리가 그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때에, 방향이 없던 곳에 방향이, 가치가 없던 곳에 가치가, 자유가 없던 곳에 자유가, 생명이 없던 곳에 생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을 입은 사람들이 이제 공공의 영역에서 생명을 선포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을 함께 만들어가며 이웃을 보살피고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 역할을 모든 영역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로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온전함을 사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담임 목사님께서 주일 강단을 통해서 이 온전함은 단순이 우리의 종교생활,
단순이 교회 생활, 신앙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지, 정, 의, 관계, 행실, 나아가서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 선교지, 창조세계, 그리고 사랑글로벌 아카데미가 포함하는 그 모든 영역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텔레이오스를 살아내시도록 우리가 함께 살아내도록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이다.
 
저명한 철학자 달라스 일리어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Jesus Christ is smarter person than anyone who has ever lived on this planet.”=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구 위를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이다.” 최고 권위자가 아니다. 우리 중에 프로그래머가 있다면, 그 프로그램보다 더 고능한 로직이 있게 하시고, 모든 것에 질서가 있게 하신 그 코딩을 가능하게 하신 바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어떤 경제학자보다 더 높은 권위의 경제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만물의 수요를 아시고 인간의 내면을 아시고 역사의 모든 흐름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을 수 있는 자는 없는 것이다. 예술가보다 더 뛰어난 예술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아름다운 자체가 존재하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술가 중에 예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제자도의 모습이다. 이 진리를 우리 가슴에 담고 새로운 결단을 하자. 먼저 우리의 모든 교만을 회개하고, 우리의 마음에 높아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가장 높은 분이신,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부끄럽게 하시는 그들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사고 체계를 선포하신 그분께 항복하길 소원한다.
 
▷두 번째는 우리 제자도를 향한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수확할 때에, 앞으로 근무할 때에, 가정에서 모든 일과와 관계와 행실에서 그리고 삶의 모든 공공 영역을 살아갈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 육신 가운데 성육신 하셔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가 발 닫는 그 모든 영역에서 이 생명을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성육신적 아버지를 통하여 독생자의 영광을 보길 소망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시간들은 기뻐하는 시간이 되고, 우리가 앉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은 우리 주님으로 위한 시간이 되길 축복한다. 이 세속주의의 횡포와 무게 때문에 상한 마음과 다친 마음을 우리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내가 그 삶 속에 가장 높은 권위자이다.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상사, 거래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최고위 권위자이신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온전함을 향하여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모든 청년들과 성도님들이 되길 소원한다.
 
♣요약:
로고스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에 높아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부끄럽게 여기며, 오직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권위가 제한 없는 모든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선포하시는 이 말씀을 쫓아 우리가 살아가길 소원해야 한다. 청년부에도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인지를 보고 깨닫기를 바란다. 시대의 젊은이들을 살리고 일터와 열방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어가며 영적인 재생산의 사명을 감당하고 시대의 표준을 준비하는 온전한 제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 삶의 고백들을 나누면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언어와 연설로 자기의 생각을 알리듯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리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소리였으나 그리스도는 말씀이셨다. ‘말씀’, ‘이성’ 등으로 번역되는 ‘로고스’는 헬라인들의 우주관과 범신론적 사상이 담겨 있는 단어이다. 헬라인들은 우주가 저절로 발생,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원리에 의해 형성,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원리가 바로 ‘로고스’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자로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증거 한다. 때문에 요한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사 그것을 다스리고 계시며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증거 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로고스’라고 설파한 것이다.
 
 














▲ 백송이의 꽃바구니, 두 개나- 목사님 고생하신다고 보내주신 꽃을 모든 성도님들과 기쁨을 나누시는 담임 목사님.





반응형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6월 16일)

제목: ''가장 큰 계명(誡命)''
말씀: 마가복음 12:28-34
설교자: 박성은 부목사님
---------------------------------------------
 
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사진을 한 번 살펴보기를 바란다. 산헤드린(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의결기구)공회라고 하는데, 그 그림이다. 이 산헤드린 공회에는 총 7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좌 장급이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70명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느냐면, 제사장 계열인 사두개파와 신흥 부자로서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로 표현을 하면 우리나라로 치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전체적으로 총괄되어 있는 최고 의결기구이다. 일종의 국무회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공회에서는 유대 지역에서 일어나는 많은 난제들과 또 각 도시마다 나라를 대적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고 법적으로 어려운 문제들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정리하는 대법원 역할도 했다. 산헤드린은 많은 의제로 등장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참 골치가 아파서 매번마다 등장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의 숫자가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아급수(기아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숫자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오병이어(五甁二漁)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적에서 남자 숫자만 오천 명이었다. 그 당시 여자와 아이는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성경학자들은 그 숫자를 합하면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으로 보고 있다. 누구 한 사람이 연설을 하는데 이만 명 군중이 모였다고 생각해보자. 요즘도 경찰 측 추산과 주최 측 추산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여론몰이로 보면 엄청난 숫자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거주만이 몇 명 정도냐면 약 3 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그러면 감이 좀 잡힐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에는 이 이만명 정도를 몰고 다니는 예수님을 예의 주시하시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세 부류의 당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안 되겠다고 하며 없애려고 조직적으로 예수님과 목숨을 건 한 판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것도 제일 먼저 등장하는 첫 번째 선수는 바리새파, 네가 해!!, 일회전, 그것도 안 되면 사두개파, 그것도 안 되면, 3회전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 네가 등장해! 하면서, 이 세 주류세력이 아예 짜고 예수님을 코너로 몰려고 하는 심각한 논쟁이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이 사람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말씀이다.
 
*마가복음 12:13절에,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마태복음 22:15절,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작심하여 나쁜 의도를 가지고 집단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한다. 그 당시 심각한 논쟁이었던 세금 문제를 들먹이게 된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법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께만 세금을 바치게 되어있다. 이것을 선전세라라고 한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가 되는데, 일을 열심 하다고 유월절이든 칠칠절, 부림절, 중요한 절기 때에 연봉의 을 성전에 와서 세금을 낸다. 그런데 이 때 상황은 로마의 속국이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직업이 있었는데 세리였다. 그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자 같은 매국노 같은 존재였다. 힘의 논리로 따지면 조공을 바치거나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 율법의 원칙으로 따지면 하나님께만 세금을 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우리 세금을 어디에 내야 될까요?”라고,,, 어느 선택을 하던지 예수님은 올무에 걸리게 되실 것이기에 대답을 성전 세를 내야 한다고 하면 로마법에 걸리고,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종교법에 걸리게 된다. 어느 것을 선택을 하던 예수님은 올무에 걸려서 감옥에 가실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지혜롭게 말씀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다. 이것을 논의하고 해석하는 것은 어렵긴 하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이다. 핵심은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한다. 어떤 집안에 여덟 명의 형제들이 있는데, 첫째가 결혼해서 형수를 맞이한다. 불행하게도 첫째 형이 단명해서 죽게 된다. 첫째 형이 죽으니까 형수님이 홀로 있게 되니 이스라엘 법에는 여자가 남편이 없게 되면, 죽은 생명과도 같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둘째 동생이 형수님을 아내로 맞이해야 된다.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고 한다. 둘째도 셋째도 다 죽고 넷째 다섯째,,, 여덟째까지 죽게 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 질문한다. 도대체 이 여인의 남편은 누구냐고 한다. 참 난감한 질문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람이 죽으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 같다고 하신다. 25절에 말씀하고 있다. 여기도 어려운 내용이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은 세 번째 논쟁에 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이다.
 
 
서기관이 등장하면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이 때 당시에 율법이 613개의 조항이 있었다고 한다. 모세 오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를 해보니까 이것 해!, 저것 해! 라는 조항이 248여개이다. 하지 말라는 조항이 부정적 명령이 365개 조항이나 된다. 이 조항들이 하나씩 하나씩 지켜가야 하는 율법의 완성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된다라고 율법학자와 유대 지도자들, 서기관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키라고 한 것을 인간이 613개의 조항을 지킬 수 있는가? 난감한 문제가 발생했다. 율법사 입장에서는 그 조항을 구분을 해서 높낮이를 주어서 등급을 나누고 싶었다. 어려운 난제에 봉착한 것이다. 그래서 서기관은 당당하게 여기서 예수님께 질문한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명확하게 답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대답하신다. 오늘 본문에 율법에 대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예수님은 못을 박는 것이다.
 
*마가복음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과 그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동등하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둘 다 같다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 다 동일하다고 하신다.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율법을 명확하게 범주를 만들어 주셨다. 613조항을 다 정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와 같다며 명확하게 정리를 해 주셨다.
 
두 범주에 속한 율법은 서열을 따질 것이 아니라 동등한 중요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려 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의 의도에 일격을 가한다. 우리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할 때, 이것 해, 이것 하지마, 모든 것들은 부모의 자식의 사랑표현일 것이다. 근데 내 속에 자식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순위를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정리한 가장 큰 계명, 이와 같은 율법을 통해 유대 지도자들에게 잘못한 것이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지적해 준다. 우리들에게도 지금 지적하고 계신다.


 
1.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37절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계명이고 강령이다. 누가 여기에 토를 달겠는가? 그날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야기 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다 안다고 한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데? 무엇인 중헌디?, 그 조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 하냐고 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동일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구약의 전통을 가지고 오셔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 때 마음은 외모와 상관없는 단어로 가식 없는 내면의 신실함을 가리킨다. 목숨은 생명을 뜻한다. 가시적인 행동으로 사랑하지 말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은 온 맘 다해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그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 연애를 해보면 안다. 온통 자신의 마음이 그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 자기의 자녀들이 온 맘 다해 사랑하기를 너무 원하신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으로 선을 긋고 마음보다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지도자들의 태도를 아주 강력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2.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다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또 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범위에 대해서 이웃의 범위에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다.
고르반(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다) 드렸기에 돈이 없다며, 내 부모를 공양하고 내 형제들에게 돕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상위법을 지켜서이라고 당연하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며 악용하기도 했다. 이웃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자기들이 자기 기준으로 철저하게 이웃을 정했다. 그런데 이 본문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고 말씀한 뒤에 어떤 본문으로 정리 하냐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정리를 하고 있다.
 
*누가복음 10:25, 28절에 보면,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입술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정한 이웃의 범위를 정해져 있었다.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여러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우리가 정해놓은 기준, 우리가 편안하고 좋은 기준에 따라서 이웃을 정해놓고, 내 마음에 들면 참 이웃이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쁜 이웃이라고 한다. 이웃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같은 민족인 사마리아 사람과 그 땅에 대한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다. 그 당시 심한 욕이 ‘사마리아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등, 예수님의 행적에 사마리아 인들이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 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정해 둔 기준, 아니라고 하신다. 정치가 정한 기준도 아니라 하신다. 세상이 정해준 기준도 아니라고 하신다. 문화가 정해주 기준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준은 범위를 넓혀서 초월하여 이웃을 섬길 때, 가장 위대한 계명, “이웃을 사랑하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뛰어 넘어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마태복음 5:44절에 보면,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요한일서 4:21절에도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에게 지적한 이웃의 범위는 동일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도전하는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3. 셋째로, 내 자신을 사랑하라.
여기서는 내 자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웃사랑의 근거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표현할 정도가 아닌 깊고도 넓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 우리를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분도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천국을 상속할 수 있게 한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의 뜻에 따라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시다. 이 아버지 관점에서 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각자를 사랑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키가 작은 것 등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천국의 가치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귀한 자이다. 자기를 쓰다듬으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다독여라. 그런 영적인 정체감이 없다면, 하나님은 정말 힘들고 어려우실 것이다. 우리 자녀가 뭐든 못한다고 하면 다 걱정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천지를 만드시고 상속까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믿음의 연륜 신앙의 깊이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리고 서기관들이 던진 가장 위대한 계명은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온맘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끄럽지는 않는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주변에 원수들은 없는가? 내가 정하는 이웃의 한계를 정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영가족들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온 마음을 소중하게 보시는 분이시다. 부족함과 실수가 있다해도 애써서 이웃을 섬기려고 봉사하는 것을 주님은 원하고 계신다. 온맘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온 맘 다해 이웃을 섬기는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이다. 그 기대대로 살아서 온전한 성도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요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 세상이 정한 이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이웃을 온전하게 섬기며, 세상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교회 지체들과 담임 목사님, 그리고 목사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며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기타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 모든 율법은 이 두 가지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올바른 이웃 사랑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으며 범죄 치 않도록 권면하고 보복하지 않으며, 원망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도움을 주고 후히 대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하듯이 사랑하고 덕을 세우며,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외모로만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반응형
반응형


제 711 회 경제상식퀴즈

1.최근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해커가 취득한 ‘이것’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익명의 개발자가 만든 암호화폐인 이것은?
  1. ① 알트코인
  2. ② 도지코인
  3. ③ 비트코인
  4. ④ 라이트코인
2.기업이 일반 투자자들에게 재무 내용을 공시하고 주식을 공개하는 절차다. 증시 상장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1. ① SPAC
  2. ② PEF
  3. ③ M&A
  4. ④ IPO
3.특정 상품을 미래의 특정 시기에 시장 가격에 관계없이 미리 정해둔 가격에 팔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말은?
  1. ① 콜옵션
  2. ② 풋옵션
  3. ③ 액티브펀드
  4. ④ 패시브펀드
4.기업이 보유한 건물, 기계 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제적 가치가 떨어진다. 회계 처리할 때 이런 가치 감소분을 평가하는 데 쓰는 것은?
  1. ① 부채비율
  2. ② 물가상승률
  3. ③ 손해율
  4. ④ 감가상각률
5.도로, 항만, 공항, 철도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뜻하는 약어는?
  1. ① ESG
  2. ② MCSI
  3. ③ ICO
  4. ④ SOC([Social Overhead Capital])-사회 간접자본.
6.명품 브랜드가 가격을 대폭 인상했는데도 판매량은 오히려 증가하는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용어는?
  1. ① 밴드왜건 효과
  2. ② 트리클다운 효과
  3. ③ 디드로 효과
  4. ④ 베블런 효과
7.최근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들이 이 세금을 최저 15%로 설정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기업이 부담하는 세금인 이것은?
  1. ① 부가가치세
  2. ② 양도세
  3. ③ 법인세
  4. ④ 소득세
8.한국 헌법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노동 3권’이 아닌 것은?
  1. ① 단결권
  2. ② 단체교섭권
  3. ③ 단체행동권
  4. ④ 참정권
---------------------------------------------------------------------------

over Story

작지만 강한 나라 ''강소국''이 사는 법


‘작은 거인’이라는 표현은 참 멋집니다. 몸집이라는 하드웨어는 작지만 그 몸과 정신이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는 위대하다는 의미겠지요. 언어가 뿜어내는 은유와 대비의 아름다움이 ‘작은 거인’ 속에 깃들었습니다. ‘작지만 강한 나라’는 어떤지요? 인구와 면적 중 하나가 다른 나라에 비해 비록 작지만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 국민성을 가진 나라라는 인식을 줍니다. 우리는 이런 나라들을 ‘강소국(强小國)’이라고 부릅니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보면 우리는 대륙별로 강소국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선 대만, 싱가포르가 가장 눈에 띕니다. 대한민국은 강소국이라기엔 좀 큽니다. 강대국은 아니지만 강중국은 될 듯합니다. 대만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를 합친 크기의 작은 나라지만, 어느 나라에도 지지 않는 강한 중소기업 경제를 구축한 ‘큰 나라’입니다. TSMC라는 반도체 제조회사는 미국이 부러워할 만큼, 그래서 중국으로부터 보호해줄 만큼 높은 경쟁력을 지녔습니다. 싱가포르는 면적과 인구면에서 모두 서울보다도 훨씬 작지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경제 자유도와 개방성을 앞세워 부자 나라가 됐습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양 물류 기지라는 점을 경제자유와 개방성과 엮어서 특화한 결과입니다.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미 한국의 두 배를 넘었습니다.

중동 지역에선 이스라엘과 카타르가, 유럽에선 스위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핀란드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스라엘은 늘 이슬람 국가들과 분쟁을 겪지만 강소국의 지위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이스라엘의 강점인 혁신 경제가 있습니다. 생명과학, 바이오, 정보통신기술(ITC), 군사기술 분야는 이스라엘의 강점입니다. 스위스는 강소국의 대표 국가로 자주 거론됩니다. 인구와 면적, 국내총생산 규모가 우리보다 작지만, 1인당 국민소득과 경제자유도는 세계 톱의 대열에 있습니다. 시계산업과 같은 고도의 기술 집약적 경제구조는 ‘짱’입니다. 국민들도 검소해서 국가가 국민 삶을 돕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국민의 3분의 2가 ‘기본소득’ 도입을 투표로 반대했어요. 나라가 왜 공짜 돈을 주려 하냐는 거죠. 네덜란드는 이미 선진국이지만, 인구와 나라 크기가 작다는 측면에서 강소국입니다. 주식회사 제도를 만들어낸 나라이고 자유무역의 상징인 나라죠. 강소국들이 지닌 공통의 DNA를 더 알아봅시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리 김대환 BEST 찬양모음 "Could Not Do Without Thy Grace"


은혜아니면 나서지 못하리 김대환 BEST 찬양모음 "Could Not Do Without Thy Grace"


반응형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1년 6월 13일)
제목: ''행실의 온전함''
말씀: 고린도후서 5:8~10
기도: 안승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찬양대: 영광 찬양대(오케스트라)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고린도후서 5:8~10,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오늘 주일 30분 전부터 성도들이 기대하면서 예배당에 차니 터질듯한 기대가 있게 된다. 한 명도 주님이 그냥 돌려보내지 말아달라고 소원한다. 복음의 깊은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말씀의 은혜가 가득하며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길 소망한다. 지금 16번째 ‘행실의 온전함’인데 실체가 나타나야 하는데, 텔레이오스, 가장 큰 관심사는 온전함 시리즈를 통해 before, afterrk 분명하게 달라지는 삶이 되길 바란다. 백신을 맞았는데 뭔가 달라졌다. 백신 맞기 전과 후의 변화가 있다. 질병관리청에서 코로나 19를 예방접종 인증서를 보내왔다. 그리고 조심하는 문자가 오기도 한다. 이것은 대한민국 좋은 나라이다. 차이는 우선 홀가분해졌다. 백신을 맞은 후에 이전과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첫째는 홀가분해졌다. 그 다음은 좀 자유함이 생겼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영적백신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 우리 교우들이 영적인 자유함과 짐을 벗고 하는 이런 영적 백신이 무엇이며, 교우들이 무장하고 확보해야 할 영적백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지난 주간 제자훈련 지도자, 칼 세미나 230여명의 18개 교단, 전 세계 줌으로 들어온 분들과 참 뜻있게 잘했다. 반응을 보면 목회의 본질에 구체적으로 사역을 할 만한 무장을 할만한 반응들이 있었다. 그 제자훈련 세미나 때보다 마음 속에 확증하는 것 하나는 사역의 수많은 비바람과 폭우와 그리고 많은 과정들이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일에 우선순위를 하면 절망, 좌절 실망을 할 것도 없다. 그게 우리 교회는 함께 하는 분들은 영적백신이 된 것이다. 그러면 사랑의 성도들이 코로나 펜데믹 시기에 본당에서 이렇게 사모하면서 예배와 방송으로 들어오는 모든 분들, 모두,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무장하게 하고 자유하게 하고, 자신을 추스르게 하는 영적 백신은 무엇인가? 그걸 오늘 온전함 시리즈를 통해서 이 말씀은 행실의 온전함은 시리즈 중에 클라이맥스 중에 하나다.

 
영적 백신이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 이 내용은 우리가 매주 토요일마다 암송을 하는데 마지막 72구절, 행실에 온전함에 나오는 본문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일생의 간절함은 이만하면 됐으니 주님을 만나고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다. 이제 천국에 은혜를 누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 오매불망 사모하는 것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영광의 궁전에 입성하는 것이다. 불 마차, 독수리의 날개, 천국의 황금 문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바울처럼 신실한 자들이 주님 만나는 것이 소원인데, 이 10절에 보면,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구절을 우리가 암송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소원이지만, 이 땅에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을 다 마치고 주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까지 바울의 마음의 소원이 뭐냐면, 어떻게 보면 상당히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이다. 우리가 천국 가는 소망이 있고 오매불망 사모하며 주님 함께 하는 것이 소원이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을 안고, 이 땅에서 주님 부르실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데, 그 살아갈 때에 우리를 긴장케 하고 우리를 좀 표준을 정하고, 삶을 누수하지 아니하고 집중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 모두가 심판대 앞데 선다는 것이다. 행위의 심판, 선악 간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심판대는 헬라어로 베마이다(Bema).=심판대석이다.
 
이 심판은 신학적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두 가지의 심판이 있다.
 
①백보자 심판(영원한 형벌).
-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는 것,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영원한 형벌, 지옥을 말한다.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없는 백보자 심판은 우리의 행위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 구원은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예수님의 의의로 가는 것이다. 구원을 얻는 심판이기에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이미 통과한 줄로 확신한다. 통과했는데 문제는 우리의 님은 생애동안 감당할 몫이 있는데 우리 모두가 다 선악, 행한 행위, 우리가 살아온 여정, 모든 것들을 가지고 행함 심판이 따른다는 것이다. 행함의 심판. 대부분 사람들은 한국교회와 우리 문제 중의 하나가 이 구원에 심판에 대해서 행위 론이 된다고 하고 그다음에 선악간의 심판에 관해서 상급 심판이다.

 
②구원의 심판
-우리는 예수님의 피와 보혈로 구원 받는 것이다. 소위 구원 심판은 우리는 결정된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의 관해서는 이미 우리는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천국 가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우리 앞에 남은 선악간에 심판대, 그 남은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위 행실의 온전함은, 세상에서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도덕,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이런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깊은 신비 안에서 우리가 선악 간에 우리의 삶이 행위의 심판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이다. 이것을 집중해야 한다. 9절에 참고 되어 있으니 보자.

 *고후 5: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섰을 때에, 선악 간에 우리의 사명대로 삶의 모든 여정들을 하나님 앞에서 정리 할 때에, 그걸 위하여 우리가 거룩한 긴장을 하고 부르심에 상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 순종을 할까? 오늘도 이 예배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주님께 어떻게 하면 영광 돌릴까를 위해 사모한다. How can we gIory for him.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좋은 시금석(試金石)이라고 말할 수 다. 내가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체크할 수 있는 하나의 테스트 용지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알려면, 내가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 증거가 된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천국의 소망을 갖고 있다 해도, 다 구원받은 증거 중에 증거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남은 생애에서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이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까? 어떻게 하면 주님께 순종을 할까? 이것이 신앙의 중요한 본질이다. 돌아온 탕자가, 허랑방탕하고 자기 맘대로 살다가 아버지 집에 가면 그래도 이 거지 생활보다는 낫겠다하며 마지막 삶에서 아버지 앞에 갔다. 아버지가 그 더러운 탕자를 아버지는 뭐라 하시지 않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근사한 잔치를 했다. 나는 이런 아들의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부끄러워한다. 나를 일꾼으로 써 달라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 순간 아버지 마음을 너무 몰랐구나 하면서 깊이 각성을 했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한다. 아버지에게 마음에 잘 듣고 순종하고 사랑할까를 깨닫는다. 바울은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상급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것은 서로 은혜의 선순환이다.

 
I.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망.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과 상급에 대한 거룩한 동기’가 은혜의 선순환이 된다.
-이게 비포와 에프터의 중요한 것이며, 7월 11일 전교우가 성도 서임 식을 할 것이다.마치 취임을 하는 것처럼, 내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백하는 날이 될 것이다.
 
 
전교인들 서임 식을 하겠다. 이것을 고백하게 하겠다. 다 세상 것은 우수마발(牛溲馬勃-소와 말의 배설물 하찮고 형편없는 것)인 것이다. 흡족한 자식도 다 소용없다. 인간과의 관계도 상처도 받는다. 그것은 다 기타 등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문제가 해결되면, 환경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독립할 수 있고, 비포와 에프터가 분명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제는 천국의 소망에 살았다가 아닌 남은 생애에 사명 주신 대로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원해야 한다.

 
II. 신학적 동기(성경적 근거).

-이 고린도 교회에 말씀을 받는 성도들은 좀 복잡했다. 책망 받을 일등, 문제도 많았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 5장 뒷부분을 말씀을 하면서 중요한 말씀을 전한다. 이제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이지만 너희들은 삶이 너무 복잡하고 문제가 있다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남은 생애가 중요한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면서. 중요한 테스트가 있다 한다. 사람에게는 공적(work), 업적이란 것이 있다며, 그 업적이 불로써 테스를 할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다 태워지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영원히 남는다고 한다. 너희들이 구원받은 자라고 하더라도 풀이나 짚같이 타서 없어지면 안 되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이 영원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전 3:12-13,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고전 3:15,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 예수님이 내 구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의 공적, 업적, 그이 행한 삶의 모든 발자취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으면 상을 받고, 그의 삶의 발자취가 나무나 풀이나 불에 태우면 15절처럼 불에 태우면, 해를 받으며,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때 들은 이야기인데, 불가운데 받은 구원만 받지 말라고 했다.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은 하지 말라했다. 천국의 개털 모자, 의로운 면류관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까? 이며, 우리가 남은 인생을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불에 타서 없어질 나무나, 풀이나 짚이나, 그런 것처럼 공적이 되지 말고 금이나 은이나 보석처럼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 것이다. 유치한 상급이 아니다.
 
자식이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은 잘하는 것인가 아닌가? 자식이 부모에게 기쁨 되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은 잘 된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칭찬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고전 3:8절에 보면,

*고전 3:8,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래서 성경에 이 상급을 비유를 말씀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누가복음 19장에 보자. 열문화의 비유가 나온다. 이 문화의 비유를 위하여 정리하면, 선악 간에 심판은 유죄, 무죄의 심판이 없고, 소위 심판에 대한 것은 백보자 문제는 해결이 될 것이다. 이제는 남은 선악 간에 공적 심판을 받는 것이다. 한 문화를 가지고 열 문화를 남긴 사람에게 주님께서 네게 열 고을을 맡기신다고 하신다. 또 한 문화를 가지고 다섯 문화를 남긴 자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긴다 하신다. 그런데 한 문화를 수건에 싸가지고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 사람은 책망 받고, 그것을 빼앗아 열 문화에 있는 자에게 주라고 하신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와 좀 다르다. 오늘 우리의 삶에 우리의 재능, 우리의 시간, 하나님 앞에서 기쁘시게 준비되길 바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나? 이미 구원 받은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①창조의 원리 -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 유명한 목적 있는 삶, 이미 구원받은 목적 있는 삶이 무어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우리가 구원 받은 자이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데 주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할 때이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 같은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이다.
 
②영광의 원리.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영광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께 올려 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공적 사상과 다르다. 이것은 피의 복음의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인과응보의 차원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과 착한 행실의 영광의 대상이 사람이 아닌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③열매의 원리.
*골로새서 1: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 구원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 우리의 삶에 행실을 통하여 선한 열매를 주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며, 상급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며 이것이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삼을 변개함이 없도록 영적 백신이 되길 소망한다.

 
III. 신앙의 동기.
- 청년시절부터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와 같은 믿음의 동지들과 함께 나누었던 마음에 간절함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해 왔는데, 상급에 대한 거룩한 동기가 있었다. 지금 상급을 이야기 하면 인문학, 지성적으로 대단한 인물들은 상급을 폄하하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어떤 신학자들이 상급을 희석시키는 분들이 있다.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 상급은 도덕윤리나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을 뛰어넘는다고 했듯이,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소원하는 사람은 마음에 상급에 대한 갈망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상급에 대한 부르심에 대한 말씀을 보자.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부모는 자녀가 상 받을 짓을 하면 좋은 것이다. 너무 마음이 기쁜 것이며 만족이 되고 감사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최고의 상을 받으면 다른 자녀의 부모 앞에서 표정관리를 한다. 상상해보면 부모나 자녀도 좋은 것이다.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순전한 신앙으로서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이것이 타종교의 공로사상과 비교되며, 복음의 사상, 창조사상, 열매사상인 줄 믿어야 한다. 주보를 보면 오늘 드린 주보에 보면 나머지 주님이 주실 상급을 요약을 해 놓았으니 참고하라.
 
 
Ⅳ. 주님 주신 면류관 상급.(주보)
 
①신앙의 경주자에게 주시는 썩지 않을 -승리의 면류관(고전 9:24-27)
-온전함의 고봉을 향한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자기 자신을 절제하고 추스르는 자가 받는 면류관.
 
②순교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계 2:10)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죽을 만큼 충성한 자, 순교자적 삶을 사는 자가 받는 면류관.
 
③목자에게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주님께서 맡기신 영혼을 목자의 심정으로 섬기는 자가 받는 면류관.
 
➃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딤후 4:6-8)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전심으로 사모하는 자, 마라나타의 신앙을 가진 자가 받는 면류관.
 
⑤복음 전도자에게 주시는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20)
-복음을 전하여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한 자가 받는 면류관.
 
 
요약
우리 인생 졸업식인 심판대에서 주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여야 하며, 주님을 사모하여 우리가 승리와 생명과 영광과 의와 자랑의 면류관을 부름 받는 상급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매 순간마다 ‘행실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창조의 원리, 영광의 원리, 열매의 원리를 깨달아서 비포와 에프터가 확증되는 삶으로 변화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실천 있는 자로서, 구원을 받고 행위에 따라 보상 받는 자가 되고, 영적으로 백신을 맞아야 한다. 승리자는 생명을 얻고, 영광 의자(자랑)에 앉게 될 것이다.
 
 
-이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그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기꺼이 원하게 된다. 이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눈을 감고 영광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눈뜨게 하기 위해서이다. 믿음은 장차 눈에 보이는 것으로 변할 것이다. 바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의무를 수행하도록 격려하기 위한 추론, 하늘나라에 기초를 둔 소망은 결코 나태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9절의 '우리는 힘쓰노라'가 그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사도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썼다. 즉 그것은 최선을 다해서 힘썼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다가올 심판에 대한 숙고로 더욱 격려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불신자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고, 성도들은 구원을 얻고 자신의 행위에 따라 보상을 받게 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