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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7월 7일)
제목: "일상의 기적"
말씀 요한복음 2:1~11
설교자: 천동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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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 유대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이는 기쁨도 없다라고 표현할 만큼 포도주는 기쁨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가 오늘 본문에 의하염 혼인잔치 집에 모자란 사태가 발상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도주가 모자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생의 불안전함을 대변하는 것 같다. 나름 친밀하고 완벽한 준비를 끝내고 이제는 샴페인만 터트릴 일만 고대하고 있을 때, 이같이 예기치 못한 인생의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순간 우리 인생에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이 메마른 때를 맞이하게 된다. 행복에 겨워 결혼했던 배우자지만 그 관계에 더 이상 기쁨이 없어 서로간의 갈등과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성공의 신화를 꿈꾸며 쉴 틈 없이 달렸던 인생도 그 정점에 이르게 되면 깊은 허무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토록 갈구했던 그 성공 속에 더 이상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기쁨이 메마른 정도가 아니라 표류하는 인생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그 정도의 극한까지는 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치 살아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삶을 견디고 있는 일은 없는가? 삶의 기쁨은 점전 사라져가고 활력은 떨어지고 또한 지쳐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기치 못한 모자란 포도주처럼 나름 준비하며 기대했던 일들이 한순간 무산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실의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그 사람은 사실상 하루하루를 표류하는 있는 것이다. 혹 인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노라 자처하는 이도, 붙들고 있는 인생의 그 포도주가 언젠가는 고갈될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기쁨의 원천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주일 담임 목사님의 온전함 시리즈 통해서 살펴보듯이 우리는 불완전하고 또한 온전하지 않음을 말씀 속에서 늘 상고하게 된다.

오늘 소개된 가나의 혼인집, 모자란 포도주 사건은 마치 우리 인생의 불완전함을 나타내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첫 기적의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이 첫 번째 기적을 표적이라고 불렀다. 이 표적이라는 의미는 보통 우리에게 정보를 주거나 혹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할 때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만큼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왜 하필 포도주 사건이냐는 의문이 든다. 표적의 내용과 그 규모에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 상황에 들어가 보자.


시골 한 작은 마을의 혼인잔치 집에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초청을 받으셨다. 이 시기는 예수님께서 지난 30년간 나사렛이라는 한 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무명의 목수로 지내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 공생애에 전면 등장한 시기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선지자, 세례요한으로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공생애 사역에 첫 걸음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제는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자신을 메시아로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보여주실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으셨고, 결과적으로 공생애 첫 표적을 이곳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적기사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혼인 집 모자란 포도주를 구한다. 여러분,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달라는 간청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든지, 아님 초자연적인 일을 두고 구하고 있지 않다. 단지 혼인잔치 집 모자란 포도주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모자란 포도주가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등장할 만큼 중대차한 심각한 문제였을까? 사실 그 기적 사건의 내용 그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굳이 예수님이 아니라도 수중에 돈이 있다면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간구를 현실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등장할 이 기적 사건 앞에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손쓸 수 없는 불치병도 아닌,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포도주 문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치고는 그 규모가 작고, 포도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소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주목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모자란 포도주를 그분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이루어 주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혼례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혼례에 대한 상호 관계적 요소가 있었다고 한다. 혼례를 준비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초대 받은 하객 사이에 상호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 당사자는 하객을 위해 그 잔치 준비에 만전을 다한다. 또한 초대받은 하객 또한 결혼 당사자를 위한 혼인 선물을 제공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한다. 이것은 상호간 엄격하게 준수해야할 책임이자 의무였다. 그러나 쌍방 간에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이행되지 않으면, 법적행동이 가능했던 그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 결혼문화였다. 소위말해 잔치 배설(排設)이 소홀하거나 초대받은 하객들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이행하지 않으면 금전상의 보상을 요구하는 법적 행동도 불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객들도 가까운 지인 중심으로 구성되고 철저히 인바이트 문화(Invite culture), 초청문화로 이루어졌다.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문이다.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하객이 많을수록 미덕이 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초대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참석하여 축하하며 그 자리를 빛낼 수가 있다. 그러나 고대 근동지역에 결혼문화는 달랐다는 것이다. 서구 문화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데, 평소에 아무리 가깝다 할지라도 결혼 청첩장을 받지 않으면 찾아갈 수 없다. 결혼 당사자 또한 자신이 초대한 자들을 계수하여 자리 배열과 잔치를 배설하기 때문에 사전에 초청장 없이 찾아가는 것은 큰 결례가 될 수 있다. 고대 근동지역의 결혼 문화는 보다 엄격한 초청문화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와 그 제자들이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라는 분명한 전제를 놓고 있다. 본문에 이렇게 말씀한다.
 
*요한복음 2:2절에,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이 혼례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한 이 혼례 예식에 기쁨이 절정을 향하던 차에 포도주가 모자란 전혀 예상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하객들의 원성을 불러일으켜 혼인잔치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은 그런 위기의 순간일 뿐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급기야는 금전상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법적 행동이 가능했던 심각한 상황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님 마리아가 다급히 예수님께 포도주를 아뢴 중요한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혼례 당사자는 마리아가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거론함에는 가까운 친척관계로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여러분, 예수님의 첫 표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기적이 아닌 평범한 포도주 사건을 보여주심에 주목하길 바란다.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 하나는 내 관심사가 주님과는 상관없는 문제라 생각하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안하고 주님께 아뢰기를 주저하는 일이다. 이 문제가 예수님과 무관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것 문제 같지만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바로 포도주 사건이 그러하다. 표면상에 드러난 이 포도주는 그 자체로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한 혼례 당사자로서는 그 경우가 다르다.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혼인잔치의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법적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마리아가 이 문제를 예수님께 아뢴 정황으로 봐도 당장 수중에 돈이 있어도 이 모자란 포도주를 공수할 수 없는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일상 속에 그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라 할지라도 아닌 주님과는 상관없는 모습처럼 와 닿을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 문제를 우리 주님께 아뢰면 우리 주님은 기적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내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에게는 물질적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청년들의 경우에는 취업과 결혼문제가 더없이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사춘기를 둔 상황에서는 더없이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혹여 이런 문제로 기도하는 일이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세속적으로 느껴지고 또한 주님 앞에 송구함을 느끼고 있는지는 않는가? 마리아는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다. 결과는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었다. 동일하게 우리 주님은 우리 일상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며, 함께 하신다.
 
*시편 68:19절에,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저는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는지 모른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매일 자신의 고민과 고충 그 짐을 토로한다고 생각해 보라. 한 두 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받아주겠지만 그 일이 매일 반복된다면 누구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다 날마다 매일 내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첫 번째 기적이 평범한 포도주 문제를 다루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 삶의 평범한 일상의 문제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느끼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시편 50:15절에,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찾고 구할 때, 그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실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말씀하고 계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언제든지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좋은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내 짐을 져 주시는 주님 앞에,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위탁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소개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이 사건은 어떻게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본문에 의하면 마리아가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예수님께 언급했을 때, 사실 우리 주님의 반응은 이것이 나와 무순 상관이 있느냐며 반문하셨다.

 
*요한복음 2:3~4절에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냉담하게 반응하시고 단호한 거절을 하신 듯하지만, 그러나 원문을 살펴보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자여,라는 단어는 귀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당시 왕후를 부를 때 쓰는 급 존칭이다. 결국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가장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보이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조금도 불손하거나 거친 의미가 아니라 거절의 표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여자야!, 이것이 나와 무순 상관이 있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어!” 이 표현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어머니, 이 일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아직 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씀하자면 표면상으로 모자란 포도주 문제가 무관한 문제이고 아직 기적을 베풀 때가 아니라고 거절하신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포도주 문제에 개입하셨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나와 상관이 없고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씀과는 달리, 왜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살펴보면 이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자만 오천 명, 아이와 부녀자를 합하면 어쩌면 이만이 훨씬 넘은 큰 무리 앞에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냐고 질문하신다. 그때 돌아온 제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빌립은 혹여 각 사람에게 조금씩 돈을 거둬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이라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그것에 있던 열두 제자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6:6절에,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이 무리를 먹이겠냐며 공을 제자들에게 돌리시는 듯 했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실 이는 당신께서 친히 행하셔야 할 일임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다만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 그들의 믿음의 반응을 살피시기 위해 이 같은 시험, 믿음의 테스트를 하신 것이다. 오늘 포도주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믿음을 살피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마리아의 반응이 참 놀랍다.

 

*요한복음 2:5절에,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한다. 이 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모자란 포도주 문제가 예수님 당신 스스로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며 아직 기적을 베푸실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리아의 이 같은 반응 이후에 우리 주님은 움직이기 시작하신다.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요한복음 2:6~8절에,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하인들을 불러 모은 마리아의 행동이후 우리 예수님은 일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일에 관여하여 일 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이 명령에는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지나치지 않으시고, 친히 개입하여 일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마리아의 모습은 참된 순종의 모습으로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는 즉 예수님을 순종하는 신앙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 5절 말씀에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한 말씀은 온전한 믿음의 성도에게 주시는 온전함의 황금률이다. 마리아의 명령대로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했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 앞에서도 그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하며 따랐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심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는 믿음의 결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주 사건을 살펴보면 5절은 예수님의 일하시기 전과 그리고 일하신 후에 큰 전환점이 된다.
 
본문을 살펴보면, 1~4절은 예수님의 일하시기 전이셨다면, 6~11절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장면이다. 그 정점에 5절이 있다. 일하시는 후를 결정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5절을 기점으로 볼 때, 5절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가나의 혼례의 잔치에 초청된 한 무명의 손님에 불과하지 않았다면, 5절 이후, 마리아의 행동이후에는 예수님의 위치가 변한다. 더 이상 손님이 아닌 하인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혼인잔치의 주인이 되신다. 무명의 손님에서 나와 이 잔치 집을 리더, 센토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 자리에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란 사실은 우리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주인이 되시고서 부터는 일하기 시작하신다. 때가 되지 않음에도 예수님은 움직이시고 기적을 베푸신다. 여러분, 예수님이 손님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일을 하실 수도 하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되면서, 우리 예수님은 이미 일하시기 시작한다.

 
4복음서에 의하면 우리 예수님은 당신을 맞이하지 않을 때는 능력을 베푸시지 않으셨다. 대표적인 예로, 고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할 때, 주님은 그곳에서 많은 기사를 행하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를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가 아닌 손님의 자리에 모신 사람이기에 우리 주님은 변화를 주시지 않는다. 주님을 내 인생의 어떤 자리에 모시느냐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내 곁에 계셔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허둥대는 인생이다.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지 않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나도 왜 변화가 없는가? 예수님을 알고 내가 그 능력도 안 되고 왜 내 삶 속에는 변화가 없고 기도의 응답이 없는가? 주님이 손님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일하시지 않으신다.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우리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혹여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으시길 바란다. 오늘 본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이 놀라운 기적을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을 알고 이 기쁨에 동참했던 이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들로 제한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하인들, 즉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회(宴會)를 책임지는 연회장(宴會場)조차 포도주(葡萄酒)의 기적 사건을 알지 못한다. 더구나 결혼 주체 당사자들 또한 모든 하객들도 알지 못한다.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극상품(極上品)의 포도주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포도주에 대해 칭찬을 할지언정, 정작 그 기적(奇蹟)을 베푸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오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들에게만 기적의 비밀을 알게 해주셨다.

 
*요한복음 2:9절에,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예수님의 첫 기적이 가나에서 행해졌다.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공개되었지만, 그것은 철저히 가리워졌다. 공개된 비밀이 되었다. 주님을 주인 삼은 자들에게만 나타난 제한적인 공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참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매주일 담임 목사님을 통해 온전함을 주제별로 다루었다. 담임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표현 중,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이란 말씀을 자주 말씀하셨는데, 결국 온전함의 고봉이란,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처럼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요, 변화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제한된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똑 같은 주님을 모시고 알고 있어도 내 삶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일이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주님과 상관있는 일이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사람을 위하여 일하신다.

 
여러분, 앞에서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기적을 베푸시길 원하신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이 일상의 기적은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이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제한적인 은혜이다. 내 인생의 절대 주권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이에게 우리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주님을 내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어 나를 위해 주님이 일하시는 일상의 기적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공개된 비밀이 아닌, 내 삶 속에 밝히 드러나는 일상의 기적이 되길 축복한다. 끝으로 본문에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이 사건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단순히 물을 포도주 맛이 나도록 흉내 내지 않으셨다. 조작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최상급의 포도주를 만드셨다. 앞서서 유대인들의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다. 포도주의 기적처럼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결단코 조작하지 않으신다. 기쁨을 흉내 내지 않으신다. 참된 기쁨을 주신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주님의 기쁨과 만족을 주신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처음에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다가도 점점 사람들이 취하기 시작하면, 질이 낮은 포도주를 제공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연회장도 1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요한복음 2:10절에,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는 기쁨, 그 자체를 상징했지만 혼인 집 포도주조차 좋은 포도주에서 질이 낮은 포도주로 대체했듯이 우리 인생을 영원히 만족시킬 기쁨은 없는 것이다. 그 기쁨이 변질되거나 혹은 모자란 포도주처럼 기쁨이 메마를 때를 언젠가는 맞이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다르다. 우리에게 기쁨을 조장하지 않으신다. 왜냐면, 우리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11절에,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당신의 기쁨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샘솟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경험할 때에는 이 기쁨의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물이 변화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신다. 두려움을 소망으로 바꾸신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신다. 죄를 은혜로 바꾸신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를 보면 다름과 같이 말씀하신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마침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우리 주님이 일하시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이야기이다. 은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풍성히 채워주신다. 또한 이것은 온전함의 이야기이다. 우리 주님을 만나면,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듯 어떤 인생이라 할지라도 변화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의 고봉으로 오르게 하신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주님의 은혜는 끝을 더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가장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사람들이 취하면 질이 낮은 포도주를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은혜는 달랐다. 우리 주님은 끝을 더 영화롭게 하셨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형편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속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항상 끝에 온다. 엄밀히 말씀하자면 우리는 끝이 보장된 인생이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끝은 무엇인가? 바로 영생이다. 우리는 끝이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성도의 끝은 항상 해피엔딩이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 인생의 끝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항상 끝에 온다는 것을 믿고 지금의 처지와 상황 속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생을 풍성하게 이끄심을 믿고 인내 할 수 있는 자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이 기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지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 거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기적은 만물에 대해 당신을 메시아적 주권을 여지없이 드러내시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권세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또다른 진리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혼인잔치 집에 모자란 포도주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주님께 아뢰면 우리주님은 짐을 지시고 나를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상의 기적은 주님을 내 인생을 모시는 이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조장하지도, 흉내 내지도 않으시고 참된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무엇보다 그 끝을 더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신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주님 앞에 문제를 토설하고 주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모셔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그 역사가 이루어지길 원한다. 우리의 삶 속에 온전한 고봉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매 순간 목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요약
오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고, 우리 일상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문제라 할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이니 이 문제를 주님께 아뢰어서 우리 주님께서 기적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어야 하며,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으로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 삶의 주제 권을 주님께 맡기고 참된 기쁨을 가득히 채워가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하여야 되도록 기도하고 끝이 더 영화로우심을 믿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 마리아가 믿음으로 간청할 때 예수님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예수님에 의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됨을 믿어야 한다. 무미건조한 삶이 기쁨과 희망에 불타게 되며, 무한한 질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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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4 회 경제상식퀴즈

1.이산화탄소, 메탄 등 온실가스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로 2015년부터 한국거래소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이것은?
  1. ① 비토권
  2. ② 탄소배출권
  3. ③ 콜옵션
  4. ④ 풋옵션
2.최근 펄어비스의 ‘검은사막 모바일’이 이것을 받았다. 중국에서 게임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받아야 하는 허가권을 뜻하는 이것은?
  1. ① 왕훙
  2. ② 유커
  3. ③ 판호
  4. ④ 웨탄
3.사전적 의미는 약속을 미리 잡아 대화하는 행위다. 실제로는 중국 정부가 ‘군기 잡기’식으로 내리는 구두 행정 조치를 뜻하는 이것은?
    1. ① 왕훙
    2. ② 유커
    3. ③ 판호
    4. ④ 웨탄-위에탄(豫談)
4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인 ‘인공지능’을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약어는?
  1. ① 5G
  2. ② XR
  3. ③ AI
  4. ④ OTP
5.대출을 받으려는 사람의 소득 대비 전체 금융부채의 원리금 상환액 비율을 말한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을 가리키는 약어는?
  1. ① LTV
  2. ② DTI
  3. ③ DSR
  4. ④ ROA
6.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을 강력히 반대하는 지역이기주의를 가리키는 말은?
  1. ① 핌피(PIMPY)
  2. ② 님비(NIMBY)
  3. ③ 딩크(DINK)
  4. ④ 팡(FAANG)
7.사들이고자 하는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빌린 자금을 활용해 기업을 인수하는 인수합병(M&A) 기법은?
  1. ① LBO-기업을 인수·합병(M&A)할 때 인수할 기업의 자산이나 향후 현금흐름을 담보로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기업을 인수하는 M&A 기법의 하나. 
  2. ② LCC
  3. ③ LED
  4. ④ LTV
8.기업이 해외 자회사나 지점과 원재료, 제품 등을 거래할 때 적용하는 가격을 뜻하는 말은?
  1. ① 공정가격
  2. ② 이전가격
  3.  ③ 세전가격
    4. ④ 이중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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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ver Story

    도시는 무엇으로 번영하는가?

    누군가 여러분께 “도시가 좋아요, 시골이 좋아요?”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나요? 대답은 분명히 나뉠 겁니다. 도시가 더 좋다는 학생도 있고, 시골이 더 좋다는 학생도 있죠. 물론 ‘반반 치킨’처럼 반반씩 좋아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겠군요. 도시에 사는 학생, 시골에 사는 학생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이 대답 역시 개인의 선호에 따라 나뉠 겁니다. 도시 아이는 시골을, 시골 아이는 도시를 좋아하는 ‘교차 대답’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서 인류 문명사적으로 도시와 시골을 한번 바라볼까요? 어떤 그림이 그려지나요? 여러분은 아마도 도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일지도 모릅니다. 어지러울 정도로 건물이 높고, 자동차가 넘치고 경적소리가 시끄럽고, 수많은 사람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서로 경쟁하고 비즈니스로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고,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모습…. 반면에 시골은 조용합니다. 작은 언덕 위로 달이 뜨고, 나무 위에서 새가 울고, 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고, 벌레가 윙윙 날아다니는 목가적인 모습….

    그런데 이런 소식이 들립니다. 시골에 젊은이들이 없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 울음소리가 끊겼다, 젊은 부부가 없다, 어르신들뿐이다…. 언덕 위로 별이 솟는 시골과 작은 마을을 떠나 왜 저 부정적인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올까요? 서울 뉴욕 런던 파리 도쿄 베를린 로마 모스크바 상파울루 홍콩 상하이 멕시코시티 카이로 뭄바이 하노이는 왜, 어떻게 거주 인구가 1000만 명이 넘는 거대도시가 되었을까 하는 질문이죠. 《도시의 승리》(에드워드 굴레이저)와 《최대 도시》(수케투 메타) 두 책은 사람들이 복잡함과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도시로 오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도시가 번창한 것은 인류의 공통문명입니다. 그곳에는 일과 여가가 공존하고, 다양한 정보와 기회가 있고, 좋은 일자리와 소득이 있고, 변화와 혁신이 있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도시에선 다양한 기술을 가진 인적 자원들이 모여서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험하고, 그런 시도를 지원하는 거대 자본이 있기도 하죠.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가 서로 경쟁하지만 이젠 도시와 도시도 사람을 모으기 위해 경쟁합니다. 부자 도시, 가난한 도시, 이기는 도시, 지는 도시는 도시가 하기에 달렸습니다. 사람이 떠나는 도시는 실패하고, 사람이 찾아오는 매력적인 도시는 승리합니다. 도시 문명의 세계로 출발해 봅시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 나무엔 '살아라 살아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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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7월 4일)
제목: “일터의 온전함”
(Terios Workplace)
말씀: 요한복음 5:17, 창세기 2:15
기도: 정상익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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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7, 창세기 2:15,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찬양이 굉장한 뭉클함과 울림이 있다. 뭔가 찬양으로 나 같은 인생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게 인생의 최고의 감격이다. 내가 주님 앞에 나가 헌신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나에게 주신 축복인 것이다. 이 찬송은 대한민국 음악 작곡가 박사인 김두완 박사가 지은 찬송이다. 세계교회 앞에 내놓아도 될 찬양이다. 나 무엇으로서 그 은혜 보답하리까~~“나 주 위해 살리라”

 
오늘은 19번째 일터의 온전함이다. 우리의 삶의 실제로 와 다가온 것이고 우리의 삶의 제일 많이 사용하는 곳이 일터이다. 비지니즈 하고, 일터와 직장 생활하고, 학생들은 공부, 전업 주부들은 가정이 일터이다. 오늘 이 내용에 대해서는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다가가는 것이니 이 말씀을 통해 삶의 전후가 새로워지길 바란다. 일터가 전쟁터이고 무한 경쟁이 난무하고 가시처럼 나를 찌르는 상사와 동료에게 둘러싸여 있을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숨이 막힐 정도로 업무 성과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심지어 일 자체가 너무 치열해서 화장실 갈 시간조차도 없을 때도 있다. 지금 하는 일이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속에 내일이 보람이 있나? 나는 일터에서 관계가 괜찮나를 생각하면 그게 맞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양복이나 가방 속에 사표를 넣고 다니면서 언제 제출할까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일터에서의 사람과의 관계가 얼마나 힘든지 대기업 간판보고 애써서 들어갔다가 사람보고 다시 나온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치여서 인간관계가 힘들어서 그만 둔다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안정적인 공무원들도 정년까지 일하는 것은 좋은데, 맘에 안 드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더구나 4차 산업 혁명시대에 혁명적인 변화의 두려움이 있다. 코로나 이후에 어떻게 될까? 초 지능 알고리즘으로 인해서 어떤 부분은 로봇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분야도 있다. Well Defined Rule(잘 정의 된 규정)들이 이제는 인공지능이 빅데이터를 가지고 차곡차곡 쌓여가지고 앞으로 AI 로봇을 가지고 일을 하니, 법조분야, 의료분야, 공학 분야에 많은 직업군들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나이 든 분들은 이러한 상황이 너무 익숙하지 않다. 요즘 젊은이들은 스마트 폰으로 물건을 다 사는 세상에서, 나이 든 분들은 스마트 폰으로 물건을 못사니까 일일이 마트에 가야 한다. 키오스크 무인주문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연세 든 분들을 생각하면 동질감이 느껴진다. 농업화 시대에 태어나 산업화 시대에 청년기를 보내고, 지금 장 노년기를 초 현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열심히 사셨다. 존경 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터는 만만치 않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일터의 온전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시는 분명한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오늘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일과 우리가 믿는 생명의 복음이 결합될 때에 어떻게 새로워지는지,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해 질 수 있는지를 이 말씀으로 인해 정리를 하고 싶다. 먼저 일은,,,
 
*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거룩한 도구’가 된다.
-단지 일이 아니라 이 일이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거룩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자.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델, 예수님의 일 철학이 필요하다. 흔들림 없는 예수님은 신념과 근거와 토대가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십 년 이상 공생애 하는 동안 목수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목수의 일을 어떻게 하셨는가?

 
I. 하나님의 일 철학이 필요하다.

 
*요한복음 14:10절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유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을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예수님이 일하신다. 이것이 일 철학이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일을 한다.
주님을 모욕하고 침을 뱉고 배은망덕하고 온갖 공격을 감행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은 끄떡도 하지 않으셨다. 계속해서 사람들을 섬기시고 사랑하시고 구원사역을 감당하시고 제자훈련을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일을 온전하게 되도록 하셨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에 관해서 온전함을 이루어 가셨는가?

 
주님의 일 철학.
 
①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명 의식’
*요한복음 6:38절,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 앞에 죄가 아닌 한,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명을 주시길 바란다. 확신을 주시길 바란다. 자녀를 키울 때도 하나님이 내개 주신 자녀라고 생각하고 자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다른 차원인 것이다. 주님이 주신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여겨야 한다. 심지어 노예들이 일조차도 주께 하듯 하라고 할 때도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일이 될 수 있는가? 그들의 일이라도 하나님이 주셔서 한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유업의 상을 주신다는 것이다.

 
②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일하신다는 ‘임재의식’
*요한복음 14:10절, 후반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주님이 일할 때, 항상 혼자서 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나서서 함께 일하신다.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닌 주님과 함께 일한다. 찬송도 주와 함께 하는 것~~즐거운 것 일하는 것 아닌가? 누구와 함께 일하는가? 하나님이 일을 한다는 것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사명의식과 임재의식이다.

 
③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사람을 세우고 살린다는 ‘섬김의식’
-남을 섬기고 배려하는 이타적 동기이다. 주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목수의 일도 파괴가 아니라 세우시는 것이다. 베드로를 주님이 부르실 때,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다른 말로 하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게 하는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살아있는 고기를 잡아서 죽여서 자기의 생명을 연명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과 만날 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자 되게 하겠다는 것은 사람을 살리게 하겠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 주님은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이다. 이 세 가지로 남들을 세워내는 일을 감당하는 것이며 이런 일 철학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요즘 세상은 돈 많이 벌어서 일찍 은퇴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일철학과 좀 다르다. 세상에서는 30대에 열심히 벌어서 40대에 은퇴한다고 한다. 그래서 오죽하면 파이어족이라고 하겠는가?
 
※파이어(FIRE)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다.
-빨리 벌어서 빨리 자리 잡고 은퇴를 하겠다는 자이다. 놀고 산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적인 노동관과 일 철학은 죄악 세상에서 구원의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성경적인 노동관(일, 철학)은 죄악 된 세상에서 구원의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 이 일터의 온전함이 거의 마지막 고봉인데, 이걸 위해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많이 와 닿은 것들이 있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과 계집종이 이야기가 나온다. 나아만은 아람 나라의 최고의 실권자였다. 그런데 그가 나병이 걸렸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천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그랬을 때에, 어린 계집종이 우리나라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 엘리사의 선지자의 말을 들으면 낫는다고 말했다. 어떤 상황인가? 이 계집종은 포로 되어 왔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노예(奴隸)이다. 거의 짐승 취급의 수준이다. 그것도 여자 계집종이니 별로 존중받지 못한 상황이다. 또 나아만과 직접 관계된 것도 아니다. 여주인의 계집종인데 얼마나 잘했으면 얼마나 신뢰를 받았으면, 자기의 형편은 지옥과 같은 형편인 노예인데 그 상황 가운데서 그 여자 계집종의 말이 아람나라 최고의 장군에게 먹힌 것이다. 그러니 그 계집종의 말을 들은 나아만이 이스라엘에 가서 엘리사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목욕하고 나온 다음에 그의 피부가 어린 아이 피부처럼 되었다. 할렐루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얼마나 신실하게 일했으면 적국의 권력자가 보잘 것 없는 계집종의 말을 듣고 그 천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나병(癩病)이 회복되고 치유(治癒)받는 그런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악 된 세상에서 구원의 공간을 창조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창조 때에 하나님이 창조하고 일하시기 전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으로 엉망이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수습이 되는 것이고 안정되는 것이다. 좋은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우리 교회 의사 분들이 계시는 곳에 아프고 혼돈되고 고통 받는 육신들이 질서를 잡고 구원받아야 한다. 우리 교회 사업가들이 가는 곳마다 그 혼돈된 수많은 사업에 어려운 영역들이 정리가 되고 질서가 잡혀야 한다. 사랑의 교회 중직 자들, 헌신 자들의 헌신을 통하여 우리 교회 수많은 사역의 혼돈 된 것들이 자리를 잡고, 질서를 잡아야 될 줄을 믿는 것이다. 미화원들이 가는 곳마다 깨끗하게 되고, 교사와 교수들이 가는 곳마다 무지에서 질서가 잡히고 잘못한 것들을 질서를 잡아줘야 한다.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될 뿐 아니라, 일은 죽어가는 공간, 죄악 된 세상에서 구원을 창조하는 그런 역할을 하게 할 줄 믿는다.
 
오늘 이런 내용들을 우리가 배경을 놓고 본격적으로 생각할 것은 나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말한 일 철학을 갖게 되고 사명, 임재, 이타적 동기, 그리고 주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는 도구이다. 우리의 일을 통하여 혼돈된 질서가 창조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정리가 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그 은혜와 창조주 하나님의 일에 대한 DNA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온다. 따라서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사역에 일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는가? 이 세상의 일이라는 것은 범죄 이후에 저주로 주어진 생각이 많다. 그래서 일을 하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신앙생활 좋다는 사람이 기도원 가서 기도만 하고 일을 안 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균형을 놓지는 것이다. 그것은 무얼 말하냐면, 일이라는 것은 저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부터 일은 축복의 도구였다.

 
 
II. 나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성되고 있다.
 
-일은 우리가 불순종해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와서 그 일을 할 때, 불순종을 통해 그 어려움이 되었지만,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일은 에덴동산에서 축복의 도구라는 것이다.
 
 
*창세기 2:15절에,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범죄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일하는 자체가 축복이라고 하신다. 그때부터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일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낙원을 의미하는 에덴동산에 미리 일을 주셨다는 사실은 오늘날 노동을 필요악이나 징계처럼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만한 일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일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들이 사람을 창조해서 사람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이 예수님 시대 때에도 영지주의 자들이 있었다. 영은 좋은 것이고 육은 악해서 육신으로 일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했다. 또한 한국의 유교주의의 문화가 우리 양반, 상놈, 구분하여 양반은 일을 안 하고 에헴, 하면서 상놈은 일만해야 하는 것이라며 한량(閑良) 문화가 충만한 대한민국이었다. 일 안 하는 것이 축복이라 여겼다. 그게 아니고 오늘 성경은 창조할 때부터 일이 저주가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축복의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일을 했다. 그것을 정리해야 한다.

 
♠일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 역사에 끼어든 저주의 결과물‘이 아니라,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의 정원, 에덴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였다.

아담이 일을 하는 것,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여러 가지 일들을 아담이 감당하게 된 것이며 축복의 일부이다. 일은 범죄 이전 창조 때부터 있었던 축복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빨리 은퇴하고 쉬고 싶다고 말한다. 그게 올바른 생각인가? 우리가 세상의 제도들 때문에 리타이어 당하지만, 우리는 나이 들어 죽을 때까지 일하다가 돌아가셔야 한다. 그 일은 젊을 때, 어릴 때, 우리가 했던 일과는 다른 차원이다. 육신 노동도 있지만, 나이 들면 다 그렇게 못한다. 20대처럼 살라면 못 살 것이다. 그리 열심히 하라면 그렇게 못하지만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일 열심히 하다가 9988234로 살아야 한다. 아차 하면 백세까지 살아야 하니 일하다가 더 섬기고, 남을 위해 기도하고, 찬양하고, 영혼 섬기고, 이웃을 위한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질문을 하겠다. 평생 의식주 걱정이 안 되는 돈이 많다면 여러분은 일을 하겠는가? 우리는 30대 40대 돈 다 벌고 그 다음에 리타이어 되가지고 함 살아봐라. 미국에서 잘 산다는 돈 많은 사람들도 많이 보았는데, 은퇴하고 어떤 사람들은 멋있는 차로 캐나다 몬트리올 등으로 놀다가 코피 나는 사람도 보았다. 그렇게 일이년만 놀면 그냥 징그러운 것이다. 내게 필요한 일, 사명으로 주신 그 일을 주님 앞에서 서는 그날까지 일하다가 서면, 그것이 소중하고 온전함의 방향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는 줄 믿어야 된다. 창조하시고 팽개쳐 두신 것이 아니고, 이원론적으로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일은,,,

 
♠일은 ‘불순종의 징벌’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축복의 일부’이고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일을 해야 한다.

연령 제한으로 사람들이 리타이어도 하지만, 남은 인생을 이전보다 더 보람 있는 일, 더 가치 있는 일,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연세 드신 분들은 교호에 와서 남들을 위해 기도하고, 가족적인 부양의 책임을 뛰어넘어서 더 보람과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평양 가서 특새하자는 것이 다른 뜻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함께 일하자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지금도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가려고 우리가 주님의 온전함을 위하여 적용하고 헌신하는 일 자체가 가치이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주님의 뜻을 더 알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일이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하는 그 일 때문에 최고가 되면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차원에서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르다. 예수 믿는 것이 인생 최대의 사건이다. 그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 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영도 거듭날 뿐 아니라, 저주 받은 그 일이 거듭난다. 일도 거듭난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일하심을 믿는다. 창조 사역에 동참시키신다.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든 분들과 공부하는 학생과 가정의 주부들도 일터가 된다. 여러분, 성경에서 최초로 성령 충만하다고 직접 언급된 분이 있다. 노아 모세 아브라함이 아니다. 물론 요셉에 대해서는 있지만, 직접 성령 충만하다고 한 사람이 있다.

 
*출애굽기 31:2~5절에,
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4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 일 잘하고 여기에 브살렐은 최고 수준의 디자이너였다. 건축과 공예와 이런 실질적 일에 최고의 기능공이었다. 그는 선지자도 사도도 왕도 아니었다. 일꾼이었다. 그런데 성경에 직접적으로 명화하게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했다는 표현이 모세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아닌 브살렐에게 임했다는 사실이 시사 하는바가 많다. 우리가 일을 통해 구원의 공간이 창출되고, 일을 통하여 주님을 더 거룩하게 닮아가는 것을 믿고, 주님이 나와 함께 일하시고 일이 사명이고, 거룩한 동기가 되어 그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정교하고 이렇게 되어서 모두가 창조적인 능력이 확산되는 것이다. 브살렐은 당시에 레오나르드 다빈치였다. 오늘 소원하는 것은 일터의 온전함의 소원을 가지고 오늘부터 새로워져서 눈을 뜨면, 하나님이 우리를 21세기의 브살렐로 하실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삼아 주시길 기도한다. 그 축복이 예외 없이 된다. 일에 대한 올바른 방향만 갖고 있으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내면의 숨겨진 창조력이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일 철학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니 구원받고 새로워진 우리는 거듭나게 하셔서 우리의 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되기를 바란다.
 
 
 
 
III. 일을 즐거움의 경지로, 일을 예술의 경지로.
 - 브살렐이 되면 예술의 경지가 되고 일이 즐거워지는 것이다.
 
*전도서 3:22절에
22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아, 그의 뒤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이랴.
-여러분들이 지금 하는 일이 즐거운가? 일이 즐거워야 한다. 자기 일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고 한다. 믿음이 좋다는 평가는 예배드리고 헌신하고 찬송하는 것도 귀하다. 거기에 하나 더하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믿음이 좋은 사람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으로 기쁘게 일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라도 그 일을 기쁘게 하면, 이제 얼굴이 달라진다. 얼굴에 그늘이 없어진다. 교우들을 보면 기쁜 사람은 그늘이 없다. 일터에 온전함을 가지고 일을 기쁘게 하여 믿은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끊임없이 엔들리스 컴플레인(Endless Complain)의 사람이 있다. 일을 진짜 잘하면 불평할 시간이 없다. 정말 눈빛이 달라져야 한다.
 
※우리 아파트에 19년 정도 살고 있다. 우리 아파트의 고참이다. 보니까 자주 사람들이 옮긴다.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들을 보면 인사도 잘하는데, 간혹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경비아저씨들도 무표정한 분도 있다. 경비란 일이 좁은 공간에서 힘들다. 그 가운데에서도 밝은 사람은 오래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일을 즐겁게 해서 창조사역에 동참하여야 한다. 내 일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에 얼굴을 항상 기쁘게 표현하라. 비록 환경이 좋지 않아도 기쁘게 일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남보다 항상 일찍 출근하라. 남보다 일찍 해라. 소풍가는데 지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소풍가는데 지각하는 사람은 소풍갈 자격이 없다. 직장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하나 더하고, 서양 속담에 Go extra one more mile.- 일 마일을 엑스트라만큼 더 가주라.’이다. 그리고 일을 기쁘게 하면 예술의 경지로 올라가는 것이다. 21세기의 브살렐이 되어가지고 예술의 경지로 올라간다. 남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산을 올라가는데도 그냥 직진하는 것보다 기쁨으로 올라가면 전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Faith report이다. 그냥 사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의미가 다 있고 보는 것 마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일터의 온전함을 통하여 예술의 경지로 올라가길 바란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3년 5년 일하다보면 지루하게 되어있다ㆍ어떻게 극복하는가? 그것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비결은 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로 통하여 새롭게 된다. 신선해진다. 우리의 방향과 안목이 새로워진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위해 살리라... 오늘 예배에 왔기에 가능한 것이다. 매주일 예배를 통하여 우리 인생의 새싹 같고, 점점 돋는 햇빛 같고 늘 신선한 새 영과 새 힘을 가지길 바란다. 일터의 온전함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즐겁고 예술의 경지로 창조사역에 동참하도록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길 소망한다.
 
♣요약
일은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도구로써 하나님의 사역에 일조하는 것임을 깨달아 사명 의식, 임재의식, 섬김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일이 신비하고 놀라운 예술적인 차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또한 내 일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에 항상 얼굴을 기쁘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표현하며,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을 기쁘게 하여야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고. 일터의 온전함으로 항상 새 힘을 얻어서 성령 충만한 21세기의 브살렐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로 칭하심으로써 이를 명백히 하신다.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심을 주장하신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그러므로 나 역시 그 분과 더불어 일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의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에 의해 만물을 유지케 하시며 다스리고 계시다. 그 모든 일을 하시는 이는 그 모두의 주인이신 것이요, 이에 의당 안식일의 주인도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임명하셨다. 낙원이라고 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서 다음 네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빈둥거리며 지내도록 이 세상에 보냄을 받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영혼과 몸을 주신 이가 또한 그것을 가지고서 일할 거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이가 또한 우리에게 그와 우리의 세대를 섬기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 할 일을 주셨다.
둘째, 이 세상에서 직업을 지닌다고 해서 순결의 상태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생활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농부로서의 소명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명예로운 소명이다. 그것은 낙원에서조차 필요한 소명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창조주를 찬미하는 기회를 주는 소명이었다. 그의 손이 나무를 매만지고 있는 동안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시키시는 일에는 참된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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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3일)

제목:''하나님의 시선으로''
말씀: 사도행전 3:1~10
설교자: 윤대혁 목사님(LA 사랑의 빛 선교교회 담임)-초빙
 
기도: 김영수 안수집사님(목양5팀 남자대교구장)
찬양: 목양5팀-행군 나팔 소리에
말씀읽기: 곽승윤, 서유진(초등부, 소년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마무리 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암송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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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윤대혁 목사님(LA 사랑의빛선교교회 담임)
-이 새벽에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나온 온 성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줄 믿는다. 작년부터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펜데믹(pandemic) 가운데에 모든 교회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될지의 길을 찾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민 교회들과 많은 목회자들이 그 가운데에서 우리 사랑의 교회의 오 목사님의 말씀과 사랑의 교회 사역에 현장들을 통해서 펜데믹 가운데, 어떻게 교회가, 또 성도들을 양육하고, 사역해야 될지, 큰 은혜와 지침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서 오 목사님께, 교회의 성도님들에게 교회에게, 이민 교회를 대표할 수 없지만 큰 은혜를 받았음에 감사의 말씀을 진심으로 드리고 싶다.

 
-▷뉴저지 주의 드류 신학대학교에 있는 ‘레너드 스위트’라는 목사님은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교회는 ‘4가지의 단계의 변화(變化)를 갖는다’라고 이야기 하며 4M단계를 말하고 있다. 복음이 되고 나서 이후이다. 그 M자의 4개를 이야기 한다.

1M 첫째단계(Mission Church)-복음이 시작되고 나서 미션을 첫 단계로 시작한다고 한다. 복음을 전하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첫 단계를 뜻한다.

2M 둘째단계(Minist Church)-교회 안에 사역이 시작되면서 그 다음은 Minist Church로 바뀐다고 말한다. 교회마다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만의 교유한 사역, 이 교회는 말씀, 저 교회는 찬양, 저 교회는 양육이, 이런 교회만의 고유한 특징과 소문난 것 등)도 있으며, 교유의 특징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3M 셋째단계(Maintenance Church)-시간이 지나면서 Maintenance로 바뀐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동안 해왔던 많은 사역들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운 도전보다는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교회로 바뀐다.

4M 넷째단계(Museum Church)-박물관 교회로 바뀐다는 것이다. 주일에 성도들이 오고, 평일에는 관광객들이 오는 유럽교회처럼 바뀐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교회 변화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변화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시간이라 여겨진다. 펜데믹을 우리가 겪으면서 나는 무엇을 걱정했는가! 무엇을 고민했는가에 따라 나의 영적인 상태를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펜데믹이 터지고 나서 한 영혼이 혹시라도 잃어버릴까봐 고민하는 교회가 있었을 것이다. 펜데믹이 터지고 나서 앞으로 우리 교회 사역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 교회는 어떻게 유지 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을 통해서 교회와 우리들이 고민하고 걱정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복음의 사명, 한 영혼을 더 구원하기 위한 그 선교적인 삶과 그 사는 선교의 삶, 온전함을 이루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그 삶을 우린 더 고민하고 기도하고 나아가야 될 줄 믿는다. 오늘 본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본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제자들은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뿐만 아니라 저주하여 그는 도망쳤다. 부활하신 이후에 나타난 그 예수님을 보고나서도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들은 모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3장의 내용은 2장과 4장에 중간에 있는 것이 3장인데, 이 3장의 내용은 사도행전에서 너무나 쉽게 보일 수 있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에 이어서 3장에 기록된 데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하고 그가 온전해짐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본문이 이 3장에 말씀이다.

 
*행 3:1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제 구 시는 오후 3시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린다. 오전 9시, 오후 3시, 오후 12시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성전에서 기도하는 유대인의 관습과 신앙의 모습들이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기도로 올라갈 때에 또 한 사람이 늘 성전에 매일 갔다. 그 사람은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었다.’라고 한다. 이 사람 역시 베드로와 요한처럼 항상 매일 성전을 향하여 나갔던 사람이다. 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은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있다.
 
*행 4:22절,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 사람의 나이가 나온다. 자신의 나이가 사십여 세라고 말하고 있다. 이 나이가 나왔다는 것은 이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냈는가를 한 번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기, 13,4세부터 40여세에 근 25년이나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항상 어김없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求乞)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날을 통해서 우린 유추해 볼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매일 성전을 향하여 갔고, 그리고 매일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도 매일 성전으로 갔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갔고, 이 사람은 돈을 얻기 위해 구걸하러 간 것이다. 같은 장소였지만 오는 목적은 달랐다. 성전 미문은 예루살렘의 아홉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성전 미문을 직접 보았던 이스라엘 역사가 요세프스는 이 성전 미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높이가 28미터였고, 이 문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금과 은으로 입힌 황동 문이며 이중문으로 웅장하고 장엄하기가 그지없었다고 말한다. 이 문을 보기 위하여 베드로 요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많은 유대인들이 왔다. 그 문을 통과해서 성전에 들어가면 내가 특별한 은혜를 받을 것이라 생각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문 가운데서도 이 성전 미문을 통과해서 성전을 향하여 왔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의 이 사람 앉은뱅이 된 만남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 사람과의 만남은 오늘 사도행전 3장에서의 첫 만남이었겠는가? 성전에 하도 많은 사람들이 다니니까 이 구걸하던 베드로와 요한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가면 그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보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늘 보아도 베드로와 요한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늘 있었지만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누가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민망해서 우리는 얼굴을 시선을 주지 않고 돌려버린다. 그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도 기억 못한다.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만남이 오늘 어떤 만남이 되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적(奇蹟)의 만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체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변화, 어떤 온전함이 나타났기에 이런 변화된 삶을 가졌던 것일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또 사는 선교의 삶 가운데서 오늘 변화를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에게 온전함이 임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관심이 바뀌기 시작한다. 오늘의 본문, 4절에 말씀을 보자.
 
*행 3:4절,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성령 충만하여서 온전함을 이룬 베드로와 요한의 변화는 수십 년 동안 앉아있던 이 사람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성령 충만하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시선을 갖기 시작한다. 성령 충만하면 돈을 많이 버는 능력도 아니고 성령 충만함이란 사업의 성공도 아니고, 성령 충만함이란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며, 성령 충만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고 예수님의 시선이 나의 시선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지금도 영적인 굶주림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님이 와서 선교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는 다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하는 내가, 어느 순간 선교가자고 할 때, 선교의 사인 업을 하고 있고, 선교 동호회가 되어 선교 가자고 말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목사님이 우리 영혼을 위해서, 우리 이웃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 이름을 호명 하시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왜 이러지?’ 내 안에 온전함이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나를 바꾸어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펜데믹에서 정말 우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예수님처럼 되어 지고, 살아가는 이 온전함에 이르는 모두가 서야 될 줄 믿는다. 이 페데믹을 겪는 가운데 성도들의 유익이 어떤 것이 나타났는지를 많은 조사를 통해서 접하고 있다. 이민교회와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성도들이 잘 견딜 수 있을까?, 신앙적으로 잘 지켜나갈 수 있을 까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비록 모이지는 못했어도 만날 수 없었지만, 이 펜데믹 가운데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게 되었다고 말하는 자도 있고, 성경을 1독,2독 했다는 자도 있고, 필사를 했다는 자도 있다. 내가 교회가 얼마나 은혜의 선물인지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성도들을 사랑하게 되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그 은혜의 풍성함 등을 우리는 누렸으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을 우리가 누려야 될 줄 믿는다. 그 영혼에 대한 귀한 소중함이다. 그 마음으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부흥을 맛보았던 교회이다.

 
※우리 부모님은 개척교회를 하셨다. 상가 2층에 조그만 교회였다. 목회하실 때에 주일학교예배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는 열시쯤 봉고를 타시고 차량운행에 성도님들을 모시고 오시고 나서 11시 예배를 시작 될 때까지 방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준비하시면 좋으실텐데, 교회 앞에 서서 서성거리셨다. 저 멀리에서 성도가 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다. 마치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듯이... 누가 성경책을 들고 오면, 아버님은 부랴부랴 올라오셔서 중간층에서 기다리신다. 혹시나 우리 교회에 들어오시지 않나를 기다리신다. 그런데 들어오지 않고 훅 지나가면 마음이 훅 꺼진다. 그 모습이 기억난다.(짠함). 하루는 설교를 열심히 하시는데, 갑자기 설교 중에 말씀의 톤이 바뀌고 설교가 힘차고 재미있을 때에 느끼는 것은 우리 가족이 자연스럽게 살짝 뒤를 돌아보게 된다. 돌아보면 새 가족이 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좋으셔서 신이 나셔서 설교하시는 모습이다. 티가 났다. 그러다가 성도님이 안 나오면, 집사님이나 안 나오거나 아프다고 연락이 오면, 고기도 사주시고 위로 하신다. 우리는 신경도 안 쓰신다. ㅋ ~ 주일학교 때에 성경학교 때에 끝나면 하루는 피크닉도 있고 중고등부수양회도 있을 때에, 항상 외부에 가면 안전사고를 위해 조심한다. 그런데 항상 한 사람이 다칠 때가 있다. 대체로 목사님의 아들이 다치더라. 항상 그러면, 아버지는 말씀 가운데 이번 ‘수양회에 중고등부가 하나님의 은혜로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와서 감사하다. 주일학교에서 수고하신 선생님들 너무도 감사하다. 이번에 많은 아이들 가운데 다친 아이가 우리 아이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라고 말씀하신다. 나도 아프다, 무쇠 다리는 아닌데 그래도 그것을 은혜라고 말씀하신다. 이유가 뭐냐면, 성도님들 가족이 다치면, 혹여 마음이 시험 들어 주님을 떠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 그게 안타까우신 것이다. 우리 아들이 다친 것이 얼마나 감사하다고 하신다. 간증하실 때마다, 그 마음을 그때는 서운했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안다. 여러분 한국 교회가 이런 심정으로 성장한 교회들이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미의 마음으로 충만했던 교회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마음일 어떻게 변하였나? 어는 순간 영혼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목회자인데 영혼을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일이 사명인데 어느 순간 마음이 식어져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가끔 성도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간접적으로 들을 때가 있다. 교회 오면 얼굴을 찡그리고 오신 그분이 다른 교회로 갔다고 말씀한다. 얼마나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다. 내가 편한 것만 섬기며 살아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새 가족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면 다락방에 순원에 넣어드리려 하면 한 영혼이 오면 감사했던 그 마음이 어느 순간 성도의 수가 차고 넘치기 시작하면 그 구역 원을 연약한 구역 원을 정말 잘하고 좋은 구역장에게 주면, 순장님이 지난 일 년 동안 힘들었다고 하면서 이제 가족 같고 집도 오픈하고 좀 안정되려고 하는데 그분을 주시면 분위기가 흐려진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못 받는다고,,, 순장님께 나는 이렇게 전해드린다. 무슨 말씀이냐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혼을 누구든지 기도하고 변화시키고, 나누어야지, 사람을 가리냐고 조언하고, 순장님이 되셔가지고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틀리지 않네요,,, 하면서 이 성도님을 안타깝게도 이리 보낼까, 저리 보낼까를 생각하게 한다. 많지는 않지만 간혹 경험할 때가 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가 흘리신 피와 땀과 그 모든 희생에 이유가 어디 있느냐?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도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 역시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이 땅에서 드려야 하는 예수 제자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
 
오늘 성전 미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30년에 가까운 성전에서 그 자리를 지킨 이 사람의 마음 안에 진짜 간절한 소원은 무엇인가? 이 사람의 소원은 그곳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을까? 만약 그것이 소원이었다면, 베드로 요한에게는 원수 중에 최고의 원수일 것이다. 나의 생계의 끈을 끊어버린 사람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말씀을 보면 귀신들려 점을 봐주는 계집종을 사도바울이 자유케 해서 고소당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딱 고소당하기 쉬운 컨디션인데, 이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었냐면, 오늘 본문 8절에 나온다.

 
*행 3:8절,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사람은 유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을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고 성전 미문에 내려다 주고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예배하러 가는데 누구 한 사람 나를 성전 안으로 데려가는 사람이 없다.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고 싶은데, 나도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싶은데, 아무도 성전 안으로 데려가 주지 않는다. 내 간절한 소원하는 것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의 영혼에 있는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하고 뜀을 뛰며 주 앞에 영광이 되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펜데믹을 보내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과 상황이 힘든 분들이 참 많다. 하지만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막막함,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렇게 많은 복잡함이 있을 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뭐가 생기는지 아는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예수 믿고 소망을 얻고 싶은 것이다. 어려우니 돈과 어떤 것이 필요할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진짜 문제와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 부르짖는 소리에 귀가 열려 있어야 되고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말씀한다. 그 자리를 지킨 선교사님들이 “목사님, 펜데믹 전에는 30-40명이 신학교에 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80명이 등록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어려울 것 같았는데, 더 하나님을 찾는 물결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강제적인 제약 때문에 힘들고 복음주의가 어렵고 신뢰가 말이 아니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역사가운데 말이 되는 때가 있었는가? 편할 때가 있었는가? 환경이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었던가? 아니다. 계속 핍박과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환경과 상황을 뚫고 펼쳐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될 줄 안다. 여러분, 큰 교회가 있고, 작은 교회가 있다.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있고, 부족한 교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과 은은 없지만 모든 성도님들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얻은 자들이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이 땅에 놀라운 펜데믹 시대에 영적인 풍부만이 아니라 펜데믹 이후에 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허락하실 줄 믿는다.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음을 믿는다. 우리 주변을, 가족을 살펴보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말 회복을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자 되길 축원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한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달라졌다. 온전함을 이룬 그 이전의 삶고 그 이후의 삶은 달라진 것이다. 우리 역시도 주님과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헤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자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의 사명을 주신 것과 날마다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걷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어두워가는 이 시대에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삼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온전한 삶을 이루어 이 땅에 많은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충성스런 제자가 되어 주님께 향한 시선이 되어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3시(오전 9시), 6시(정오), 9시(오후 3시)로 시간을 정하여 하루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였다. 규칙적이고 성실한 신앙생활은 우리를 점점 성숙하고 능력 있는 신앙으로 이끌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간 때도 기도 시간이었다. 그때 그들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했다. 베드로의 치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기도의 능력은 사람이 감당치 못한다. 이때 치유 받은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찬미했다. 앉은뱅이는 배후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보다 도구로 사용된 인간 베드로에게 더 감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 한 것과 그 사실을 믿은 앉은뱅이의 믿음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자기 능력의 과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데 만족했다. 이처럼 치유의 목적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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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6월 30일)
제목: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말씀: 여호수아 24:1-15
설교자: 박인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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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4:1-15,
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3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
4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고 에서에게는 세일 산을 소유로 주었으나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
5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들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노라.
6 내가 너희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들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의 조상들을 홍해까지 쫓아오므로.
7 너희의 조상들이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들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
8 내가 또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매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
9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10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
11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주민들 곧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넘겨 주었으며.
12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13 내가 또 너희가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들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에 거주하며 너희는 또 너희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하셨느니라.
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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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코로나 팬데믹 기간을 보내고 있다. 조금 있으면 끝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가면서 변이 바리러스가 등장하고 지금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줄어들지 않는 코로나 확진 자와 또한 매일 착용해야 하는 마스크, 불편함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껏 만나지 못하는 우리 마음 가운데 불편함도 있다. 그런데 이런 불편함도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적응이 되는 것 같다. 또한 적응됨과 아울러서 우리 삶 가운데 즐거움과 기쁨도 조금씩 사라지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삶들 가운데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들이 있다. 좀 불편함이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가 무슨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삶들 가운데는 또한 우리 생활 가운데는 하나님이 주시는 그 풍성함이 있는가를 돌이켜 본다. 어느 날 저녁 길을 가다가 광고판에 걸린 어느 문구를 보았다. ‘오늘 하루도 잘 버티셨습니다’ 그런데 그 문구를 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뭉쿨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약속하시고 또한 그 풍성한 삶으로 우리를 초청해 주셨는데, 우리의 삶, 우리 생활은 어떠한가를 돌이켜 본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들은 어떠한가? 삶에 대한 풍성함, 하나님이 쥐는 만족들이 우리의 삶들 가운데에 가득한가? 아니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생존의 의미에 더 가까운가? 이런 고민들이 저에게 있었다. 한동안 나는 생존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 가운데 거하며 힘 있게 살아가는가? 이런 고민들 속에 있다가 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풍성하고 힘 있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오늘 본문은 나누고자 하는 그 한 사람의 삶에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의 이름은 여호수아이다.
 
여호수아는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자기와 함께 하였던 민족의 지도자들을 세겜으로 부른다. 각 지파의 장로들과 또한 지도자들과 족장들을 다 불러 모은다. 아마 이들은 여호수아 함께 하였던 광야 40년 동안 동지들이었고, 가나안 정복 기간 동안 함께 영적 전투를 감당하였던 용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불러놓고 여러 가지 이야기, 자기의 삶을 마무리하는 유언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여호수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대하는 모습 중에 우리 또한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삶이되길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 예배를 통하여 또한 말씀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나누시는 주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한다.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I.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한다.
 
-여호수아는 본문 가운데 그의 모든 삶, 그의 과거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세겜의 모든 민족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아 이스라엘의 역사들을 쭉 ~~ 나열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출애굽 과정, 광야생활, 모든 것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여호수아의 이야기를 가운데 무언가 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한다. 3절부터 13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가 있는데, 무려 14번이나 등장하는 단어는 ‘내가, 나’라는 단어이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세우셨고,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고, 어떻게 홍해를 가르게 하셨고 어떻게 광야 생활을 인도하셨는지에 대하여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호수아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여호수아 주변의 인물들이 다 아는 내용이었고, 어쩌면 여호수아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가 아니라 여호수아는 11절부터 14절 사이에도 ‘내가, 나’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읽으면서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조금도 다른 각도에서 본문을 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오른다. 왜냐하면 11절부터 14절까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이며 동일하게 여호수아가 경험하였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수많은 민족들을 쳐부수며 성을 함락시키며 그 피비린내 나는 목숨 건 전투를 통하여 행하였던 그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여호수아는 자신이, 우리가, 우리 민족이, 우리 군인들이 이런 전투를 통하여 여기를 함락시키거나 아니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삶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요단강을 가르게 하시고, 여리고 무너뜨리게 하시고 수많은 적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 땅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모든 것들을 평가한다. 여호수아는 역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족적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서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의 삶을 그렇게 보는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세계관이 열리는 획기적인 일이다. 자기의 생각을 뺀, 하나님의 관점으로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런 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이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기도 하다. 그는 서른 살에 애굽이라는 강대국에 총리가 된다. 남부럽지 않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삶을 찬찬히 살펴보면 요셉의 삶은 처참하다 못해 비참한 인생이었다. 그는 열일곱 살에 형들의 시기(猜忌)로 말미암아 형들로 인해 팔려간다. 인신매매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이억 만 리 타국에서 보디발이라는 장군의 집에 노예(奴隸)로 들어간다. 그런데 거기서 어찌어찌 잘 풀렸다. 괜찮은 듯하다. 하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언제 나올지 모르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 당시 감옥(監獄)은 형기(刑期)가 정해 있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거기에 있다가 거기서 죽어서 시체로 나올 수 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것이 요셉의 인생이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생각해보았다. 팔려가는 요셉, 감옥에 갇혀있는 마음과 그 심정이 어땠을까? 완전 배신감(背信感)과 분노(忿怒)로 부글부글 끓지 않았을까? 어떻게 동생이 나를, 어떻게 내 인생이 이렇게 불행한가? 라는 자포자기(自暴自棄), 한 심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있다 라면 당연히 형들에 대한 복수심(復讎心)도 있고, 만나기만 하면 분명히 이것을 몇 배로 갚아 주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요셉의 생각들이 전혀 다르게 표현 되는 것들을 본다.

 
*창세기 45: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어떠한가? 요셉의 이 표현 가운데 형들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심이 느껴지는가? 1도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요셉은 거의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觀點)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호수아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그 인생이라고 짜증나는 일이 없었겠는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앙을 보고를 하고 그 열 명의 정탐꾼들 때문에 그의 인생 110세까지 근 40년 동안을 그것도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청장년 40년간을 광야에서 뺑뺑이 돌았다. 얼마나 아까운 시간이었겠는가? 또한 전쟁에서 실패하고 졌다. 어쩌면 그의 인생 가운데 쓴 뿌리 흑 역사가 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의 실패조차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 인생을 재해석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자세하게 이야기 해주지 않지만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것은 이들은 이들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의 흘러나오는 그 감정의 소리에 자기의 삶을 의탁하거나, 자기의 생각을 두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 만약, 요셉이 자기의 감정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열 두 지파의 역사가 아니라 요셉과 베냐면 두 지파의 역사로 전락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여호수아가 40년 광야 시간동안 열 명의 정탐꾼들, 그 보고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다고 불평과 원망과 짜증스럽게 그 40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자기의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와 동행하는 것으로 모든 감정들을 잠재웠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의 성공뿐 아니라 그의 실패조차 아픔조차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에 있으면서 참 많은 훈련을 한다. 제자 훈련과 사역훈련을 한다.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의 첫 시간에 항상 자기를 소개한다. 맡은 반에서 특별히 하는 것이 있는데, 자기를 소개 할 때, 인생그래프를 그리도록 한다. A4용지에 자기의 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먼저 검은색 볼펜으로 그리게 하면 인생의 고봉도 있지만 인생의 깊은 절망인 골짜기도 있다. 이것이 반복된다. 골짜기에 그 사람의 실패도 있고, 아픔도 있고, 건가의 어려움, 관계가 틀어짐도 있었을 것이다. 그 그래프를 가지고 본인들의 인생을 설명하고 난 후에 또 다른 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이번에는 빨간 볼펜으로, 영적인 그래프를 그리게 한다. 자기 인생 가운데 영적인 모습은 어떠했는지, 그리게 하면 신기한 것은 자기의 인생그래프와 영적 그래프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정반대의 그래프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인생 가운데 실패고 좌절이고 절망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를 깊이 만나시고, 우리를 다듬으시며,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시편 기자가 동일한 고백들을 우리에게 하는데,,,
 
*시편 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어떻게 고난이 유익이 될 수 있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그 고난을 바라볼 때, 그 고난은 오히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줄 믿는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분들 중에 어쩌면 요셉의 경우만 13년의 종살이와 옥살이를 동일하게 비슷한 감정으로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여호수아가 경험한 그 40년 동안의 광야의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실패, 좌절, 절망이라고 생각하는 그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다. 우리의 인생을 그 오른 손으로 붙들며, 나를 위로 하시며, 힘내라고 응원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의 과거를 볼 수만 있다면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쓴 뿌리나 상처가 아니라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 하고 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임을 믿는다. 아멘,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II. 현재를 하나님 주신 소명(召命)에 집중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집중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산전수전(山戰水戰)을 이야기 한다. 공중전까지 다 경험한 사람이다. 40대까지는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그리고 40년 동안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했다. 이후에 요단강을 건너는 30년 동안 가나안 정복전쟁, 그 가나인 땅을 차지하는 일들을 하였다. 여호수아의 110년의 삶 동안, 그의 삶 가운데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모든 삶이 쉬었을까? 전혀 아닐 것이다.
 
※한 달 정도 전에 동네에 놀이터에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어린 꼬마 두 명이 놀이터에 왔다. 아마 형제 같았다. 한 명은 2학년쯤, 한 명은 일곱 살쯤 되어 보였다. 코로나 시기라 밖에 나가 놀지 못하니까 엄마가 운동 좀 하고 오라고 보냈을 것이다. 줄넘기를 몇 개를 하더니, 형이 200개를 하고 다 끝냈다는 것의 신호를 했다. 그의 동생이 보고 있다가 줄넘기를 두 개 넘다 걸리고 또 걸리고 하다가 좌절하는 눈빛이 역력히 보였다. 그것을 보는 형이 동생에게 어깨를 만지면서 하는 이야기가 “사는 게 다 그래” 라고 한다. 어린 아이들이었는데도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발견하고 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이다. 일상이 불평인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란 쉽지 않았다. 죽느냐 사느냐 그 심각한 전투였기 때문에 어쩌면 자기들의 처자식까지 죽을 수 있는 전투였기 때문에 너무 마음에 큰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주께서 여호수아 1장에서 말씀하신다. “강하고 담대하라” 몇 번이나 강조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면서 여호수아 인생은 피곤하였다. 아마 누구보다 쉬고 싶고, 그 짐들을 벗고 싶을 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그 모든 삶의 과정들을 쉬거나 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가운데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나안 땅이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었고, 또한 소명이며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홍해를 건너는 순간부터 삶을 마치는 순간까지 그의 마음도 오직 하나님이 주신 소명,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심심할 틈도 없었고 지루해서 어떻게 시간을 때우나 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의 모든 인생은 소명에 의하여 움직여졌다. 소명은 한 사람의 생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이기도 한다. 또한 소명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목표점이다.
 
※인도에 가면 마주리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한 때, 살림이 울창한 아름다운 섬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 때문에 그 아름다운 나무를 벌목해서 또한 흐르는 물로 인하여 참 많은 흙들이 유실되면서 황폐화되었다. 마치 사막처럼 변해갔다. 어느 날 그 섬에 사는 열여섯 살 된 소년이 해변 가를 걷다가 나무가 없어 땡볕에 말라죽어가는 파충류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날부터 그는 그 섬에 나무를 심기를 시작한다. 한 그루 두 그루, 계속해서 심기 시작한다. 그 일들을 무려 사십 년간 하였다.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 섬이 없어질 거라 이야기 했지만 40년이 지난 그 섬은 다시 울창한 숲으로 바뀌었다. 코끼리가 많고 코뿔소, 동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아름다운 숲으로 만든 것이다. 그 숲의 넓이가 117만평이다. 그 넓이가 짐작이 안 된다. 여의도이 두 배라고 한다. 혼자서 감당한 것이다. 없어질 섬이 그로 말미암아 그 섬은 아름다운 낙원이 된 것이다. 왜 그러는가? 그 마음 가운데 한 가지 꿈을 가지고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그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 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소명의 초점을 맞추고 달려갈 때, 역사가 일어난다.
 
※돋보기를 들고 놀았던 이야기이다. 여름이 되면, 검은 종이와 돋보기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 검은 종이에 돋보기를 들고 햇빛의 초점을 맞추어 집중한다. 처음에는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나 시간이 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검은 종이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결국 불까지 난다.
 
-우리 인생 수많은 관심과 재미있는 것들이 있다. 어쩌다 학교 앞에 문방구에 아이들이 들려서 문방구에 정신을 팔려서 학교에 못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소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재미있는 것 가운데 시간을 빼앗겨 우리의 소명에 집중하지 못할 때가 있다. 또 이야기 한다. 나이가 몇 살인데 무슨 소명이냐고.,, 60,70이 다 되어 가는데 라고, 소명이란 나이에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꿈인 줄 믿는다. 그 소명을 붙들고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가 뚜벅뚜벅 걸어갈 때, 우리가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들을 이루고 하나님의 기쁨이 될 줄 믿는다. 여호수아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 약속의 땅 가나안. 그 소명 붙들고 마지막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끝내 그의 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명이 이루어지는 것들을 본다. 청년이라고 소명이 없으면 무기력하지만, 나이가 많아도 소명 자는 매일 새롭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인생은 그러했다.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
 
III. 미래를 믿음의 계승으로 준비한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의 정복으로 삶을 마무리하지 않는다. 그에게 한 가지 더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믿음의 세대계승이다. 담임 목사님께서 참 많이 강조하시는 내용이기도 하다. 여호수아는 자기를 둘러싼 수많은 지도자들을 바라보며 14절과 15절을 이야기 한다. 요약하면,
“여러분, 나는 이제 떠난다. 지금까지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너무나 좋은 분이셨다. 그래서 나는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한다. 주위에 선 사람들이 당신처럼 우리의 족속이 여호와만 섬기겠다라고 확답을 한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확답으로 시원치 않은 것 같다.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한다.
 
 
*여호수아 24:26~27,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 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우고.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 돌들을 세우고 그 돌들을 증거라고 말한다. 여호수아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셨다. 여호수아가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 할 때, 그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묵상을 해보니, 상상이 갔다. 여호수아의 얼굴 가운데는 너무나 감사한 미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일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대한 추억들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풍성한 삶의 온전한 마침표는 우리 자녀들과 다음 세대에 우리가 만났던 주님을 전해주는 것인 줄 믿는다. 우리 집에는 두 아들이 있다. 내년에 수능을 치는 아들과 중2가 있다. 사춘기를 한참 지나고 있다. 두 아이들을 보면 부모로서 마음이 있다. 모든 부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들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직장 가서 좀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씩은 아이들이 열심히 하지 않으면 잔소리도 한다. 한 번은 아이들을 싫어하는 소리를 하고나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공부를 잘했었나?’ 그렇게 잘하지 못했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볼 때에 삶은 풍성했다. 하나님 때문에 너무나 풍성했고 너무나 감사했다. 마음속에 만족감이 있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은 없지만, 하나님이 제 안에서 일하셨던 수많은 이력들이 있기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그 삶 가운데, 곳곳 가운데, 켜져 있기에 보석처럼 빛나고 있기에 삶은 언제나 풍성하고 감사하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들을 위하여 열심히 저축하면서 조금이나마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인생 가운데 계신 그 주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주님을 가르쳐 주면, 그 주님이 아이들의 인생을 책임질 것이며, 주님은 풍성한 삶, 후회 없는 삶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모든 성도님들의 고백이라 여겨진다. 우리 인생 가운데 정말 끝까지 놓지 않아야 할 것은 다음세대에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경험하였던 그 주님을 함께 물려주는 것임을 믿는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들과 함께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 그것이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바이실 것이다.
 
-여호수아의 인생, 110년을 살고 24장 뒷부분을 보면, 그의 삶을 마무리 한다. 수많은 일과 사건들이 있었던 어쩌면 아픔, 슬픔, 괴로움, 인생의 경험을 동일하게 겪은 여호수아의 삶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그 아픔과 고통이 지배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풍성한 삶이었고,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 그는 그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재해석했고, 그의 현재를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열심히 달렸으며 그의 미래를, 믿음의 세대계승으로 준비했다. 아마 그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 평가로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였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은혜의 기쁨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요약
여호수아를 통해 볼 수 있는 풍성(豊盛)한 삶의 비결(秘決)을 배워서 과거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현재를 하나님 주신 소명(召命)에 집중해야 하며, 미래를 믿음의 계승으로 준비해야 하나님의 은혜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생존을 넘어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집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소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그리고 출애굽 역사와 가나안 정복·정착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무한한 사랑, 그리고 수고도 하지 아니한 땅과 성읍을 거저 주시는 복으로 살고 있음을 배워야 한다. 인간은 자기의 노력이나 공로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에덴 동산에서 인간은 완전한 타락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받은 이후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돌보심 속에서 안전하게 거하게 된다. 이렇게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이라 한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셔서 그가 친히 구원자이심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세워 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누구도 거스릴 수 없다는 것과 미혹하는 자들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발람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우상 숭배에 빠지도록 배후에서 계략을 꾸몄다. 때문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잔재했던 우상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이 기사를 말했던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여러 이방신들을 섬길 것인지 택하라고 하면서 자기만이라도 결코 하나님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다. 여호수아의 유언과도 같은 고별 설교이다. 모세가 죽기 전에 했던 것처럼, 여호수아도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강조하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섬길 것을 다짐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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