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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8월 6일)
제목: ''두 번의 코로나, 그(He) 안의 온전함''
말씀: 시편 68:1,19
찬양인도: 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홍재훈 목사님,선교사님(중동A국, 로드마스터 대표)

마감암송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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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8:1,19,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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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이것저것 많이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상황이 규제와 제약으로 인해 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면예배를 너무 드리고 싶었는데 아마도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대면 예배를 드리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어떤 가정과 교제하기 위해서 저희 남자팀, 여자팀, 저와 아들, 그 집에 남편 되는 사람과 아들, 그리고 저의 아내와 딸, 남녀가 분리되어서 약간 007작전을 하듯이 정부가 내리는 규제를 잘 지키면서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참 많이 아쉽더라구요...이곳에 오면 자유롭게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새 힘을 받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이 아쉽다.

 
제가 지내고 있는 곳은 코로나로 인해서 규제와 강화가 많고 유사점이 있는 그런 곳인 아라비아반도 석유부국 중에 한 곳이다. 그곳은 날씨가 매우 덥다. 한국도 덥지만 햇빛이 너무 세서 머리가 벗겨질 듯한 열사의 땅이다. 또 그곳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래도 그늘에 가면은 시원하지 않냐고 한다. 저희가 살고 있는 곳은 해안가를 따라 도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름에도 습도가 아주 곳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24시간 동안 에어컨을 켜두고 산다. 스스로 자발적인 격리를 하는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듯이 제가 있는 지역도 석유 부국이다 보니 생활비용이 아주 비싸다. 그래서 일반 선교사님들에 비해 평균 비용보다 더 높이 필요하다.
저도 생존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지금까지 해왔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 땅에서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곳이다. 또한 그곳의 갔으면 청지기의 업무를 잘해야 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하나님께서 주신 청지기 일들을 하는데 제약이 있는 것처럼 더운 날씨로 인해서 현지인들을 만나기가 참 어려운 곳이기도 한다.
 
또한 경제적 도덕적인 우월함으로 인해서 그들에게 다가가기에 참으로 많이 어려움 있고 열매가 없는 땅으로 많이 알려진 그곳에 있다. 지금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곳도 그냥 이곳과 비슷한 곳이 아닐까를 생각을 해본다. 그런 곳에서 작년에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퍼졌다. 그곳에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러던 작년 성탄 이브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선물을 받게 되었다. 성탄절 날 아부다비인 옆 도시로 제가 대면 예배를 드리러 갈 준비를 했다. 다른 도시로 이동시에 코로나 검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24일 날 양성 판정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 너무 하시지 않나요?”라고 했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러 가려는데 어떻게 이런 선물을 주시냐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 결과를 받고나서 마음이 있기 전에 현재 일어난 일의 사건들을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바로 점심에 어떤 가정과 약속을 했는데 그 가정에게 저희 집에 오시지 말라고 알려야 했다. 코로나 양성을 받았다고 속히 알리고 싶었다. 그날 저녁에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사막에서 주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초대하면서 그곳에서 사막 성탄 기념예배를 드리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사막에서 예배를 드리면 참 은혜가 되기도 한다. 우리 인생도 사막 같은 것이다. 그 사막에서 이정표가 하나 없는 방향의 감각이 전혀없는 사막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을 하다보면 우리의 인생길에서 주님만이 우리의 이정표 되심과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찬양하는 것이 너무 좋은 곳이다. 그곳에서 그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나아가는 그런 부푼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이제 취소를 하고 격리에 들어갔다. 그 국가에서 주는 GPS시계를 차고 한 방에서 격리를 하게 되었다. 격리하는 동안에 가족들을 너무도 철저하게 격리를 시켰다.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나가게 했다. 처음에는 대게 야속했다. 가족들에게 잠시만이라도 얼굴을 보겠다고 하니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강력하게 FM대로 격리를 시켰다. 많이 아쉬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났을 때, 내 주면에 이렇게 철저하게 규칙을 잘 지키니 나도 그 정도를 잘 지켜서 그런 가족으로 인해 섭섭함도 있었지만, 참으로 감사했다. 격리하는 기간에 방안에 있어서 제가 얼마나 아픈지,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 있었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그리 많이 아프지 않고 한 3-4일 고열을 지나고 버티니까 다시 회복되는 그러한 은혜를 받게 되었다. 격리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냐고,,,, 예배를 드리고 가고 싶었는데 혹시 제가 부족하여서 인지를 하나님께 질문했다. ‘성결하지 못해서 그러신지, 예배에 나아가는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막으셨는지요?’ 아니면 지난날을 돌아보고 부족한 것이 있는지를 질문했고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런 것이 있는지와 처음에는 각성과 회개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좀 여유가 생기니까, 내가 어디시 감염이 되었는가가 궁금해졌다. 몇 가지 의심의 장소가 있었다. 그 때 그 친구들과 그 장소들이 생각이 났지만 그 생각을 접기로 했다. 왜냐하면 제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알면 원망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아량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말에 가족들이 함께 격리를 하며 연말과 연 초를 망쳐버린 것 같은 그러한 죄책감이 있고, 양성 판결을 받은 이후에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에게 연락하면서, 특별히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과 교제하면서 정말 즐거운 교제를 했는데 그 가정 가운데 너무 죄송하다고 말을 했다. 혹시 저로 인해서 바이러스가 감염되었을지 모르니 조심을 하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검사를 해보도록 했다.
 
주님께서 오신 그 계절 가운데 그 땅에서 예수님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잘 지내고 싶었는데 저의 계획과 다른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으로 그 시절을 보내게 하셨다. 그 시절 가운데 갖는 마음이 그렇다.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에 막 회개를 했다. 회복이 된다면,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서 격리가 풀리면 이제 다시 이웃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러한 시간들이 허락되어 진다면 ‘이제는 이렇게 살게요, 남은 인생을 이렇게 살게요.’ 라는 그런 청지기의 삶의 대한 그런 계획들이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에 오셔서 음부에 권세 아래 있을 때, 제자들이 흩어졌다. 주님의 부재, 우리는 더 이상 어리로 가야할 될지 모르는 우리의 이정표인 지도자가 없음으로 인하여 흩어졌던 제자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아날게요. 다시 살아난다면, 다시 저에게 자유가 허락 되어 진다면 그러한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격리가 풀렸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했다.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세상 가운데 코로나, 코로나, 해서 걱정들이 많은데 하나님과 동행하면 잘 넘어갈 것 같은데, 괜한 걱정을 세상 가운데 더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담담하게 넘어가기 위해서 그냥 지냈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 했더니 나 코로나 걸렸다고 했다. 몇 명 친구들도 이야기를 했다. 자신들도 코로나에 걸렸었다고... 너도 나도 코로나에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죄인들의 모임인 듯, 컴잉 아웃, 코로나 양성을 경험했던 집단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죄인들이 서로 서로 나눈다. 이웃들에게 미안하지 않았냐고 서로 나누었다. 그냥 잘 살았는데 ‘내가 의도하지 않게 내가 죄인이더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그런 부족한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냥 죄인이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그 죄인이었다고 말했다. 그 죄인이라는 것에 묵상을 하는 그러한 시간을 갖었다고 이야기 했다. 내 이웃에게 얼마만큼 범죄를 했는지,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부끄러운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하나님을 붙들고 그 시간을 버티려고 했다고 말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 그 평안 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신 여러 가지 생각들, 그리고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 유형의 가치들에 따라가 살아가는데, 그것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비밀과 그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와 주님께서 주신 무형의 가치들을 묵상하며 지낸 삶을 살았기에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이렇게 살려고 한다고 그 집단 체 안에서 복음을 마음껏 나누는 복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시간들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셨다.
 
여러분, 세계 각지의 선교사님들이 코로나로 인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별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외부적인 어려움보다 가장 크다. 가장 큰 어려움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전해지지 못하는 그러한 제한된 제약된 환경인 것 같다. 저 또한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코로나가 막 창궐하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또 대면 만남이 위축된 상황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에 저에게 주신 선물이 있었다. 코로나 시간들이 다 지나고 났을 때, 그 이후에 마치 하나님은 그 코로나에 걸린 사람의 깊은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되니까, 이 시대에 맞는 그러한 사역으로 전환을 시켜 주셨다.
 
그래서 현지인들의 만남, 그리고 그 땅 가운데 디아스포라로 와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저임금 노동자, 그 친구들과의 사역들, 그리고 소명을 가지고 소명을 가지고 한인 디아스포라,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잘 지내면 좋을지, 이 코로나 시대에 맞는 사역으로 하나님께서 다 전환을 시켜 주셨다. 너무도 감사했다. 이 시기에는 마치 부재의 기간, 공백의 기간, 아무것도 못하는 그러한 시간 같은데 신실하신 주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일하시고 계신다. 작은 등 가운데 그 빛이 비추어져서 그 빛을 통하여 우리들 가운데 계속해서 부르시고 일하시고 나아가시는 주님, 그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실 지난 상반기 동안 개인적으로 너무 감사했다. 주님이 이끌어주시는 그대로 그냥 따라가면서 그 선상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너무도 감사했다. 사실 오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으면서 그것을 나누고 싶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일했다’고 나누고 싶었다. 이런 방법으로 그 땅에서 일하고 계심을 나누고 싶었다. 오늘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오늘은 저의 좀 부끄러운 모습들을 많이 나누게 될 것 같다. 그런 상반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제가 이 여름에 한국에 올 일정이 있었다. 그것은 중동에 떠나기 이전에 중동 학을 공부를 했었다. 하나님께 중동에 대해서 제가 더 알고 싶다고 기도했다. 가기 전에 그 땅을 위해서 계속 공부를 했다. 그리고 박사 과정을 다 마쳤다. 수료를 마치고 그 땅으로 갔다. 작년에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이 수료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하기를 원하냐고 했다. 논문을 안 쓰면 끝나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메일이 왔다. 코로나 시기이니 시간이 많겠거니 하고 한다고 했다. 혹시 온라인으로 가능하냐고 했다. 논문지도를 받기로 하고 시작을 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그곳에서 있었던 그 사역들을 잘 정리할 수 있었던 그러한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감으로 익혔던 것이 있다. 이 친구들과 동거동락 하면서 지낸 것 등과 그렇게 규정했던 것들이 있는데, 다시 한 번 사회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주님이 이것이 맞는지에 점검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친구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 것이 좋은지를 연구하는 그러한 사간을 갖게 되었다. 1차, 2차, 논문 디펜스를 온라인으로 마쳤다. 마지막에는 최종 심사에는 꼭 오프라인으로 하게 되니 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 일정에 마쳐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도 한국보다 조금 더 신규 확진 자가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규제가 일어나고 학교도 온라인 오프라인을 계속 번갈아 가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왕 온라인 수업을 하는데, 한국에 올 때, 저희 아이들도 같이 오면 어떨지를 계획을 세웠다. 이번 여름에 하나님게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기도하고 간구했다. 그런 기회가 되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곳에 오는 여정에 출발 선상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기 바로 오기 직전에 저희 아들이 갑자기 고열이 되었다. 아들이 고열이 심했다. 그때 코로나인가를 의심을 하게 되었다. 저희 아들이 고열이 일어나기 전에 친구네 집에 이틀 연속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만약에 그곳이 가장 유력한 곳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친구 집에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고열이어서 코로나일지를 모르는데 내일 검사를 하게 되었다고 그 친구들에게 조심하면 좋겠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황당한 답변이 왔다. 그 아들 친구 어머니가 그러냐고 하면서 그런데 코로나 이미 걸려서 격리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 걸린 지 일주일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아들이 그 집을 방문을 했을 때, 방에서 격리 중이었다. 아들이 거기에 가는 것, 오늘 것, 몇 시에 올것인가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때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이나 방문을 했는데,,, ‘나 사실 코로나 이미 걸려서 격리 중이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도 황당했다. 자신의 아들을 아직 검사를 못했다고 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양성으로 나왔다. 그런 마음 가운데 분노가 차올라왔다. 사춘기 딸도 어마하게 분노를 하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막 화가 났다. 그러면 안 되어서 누르면서 괜찮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아침에 마음 가운데 증오 범죄자가 혐오 범죄자가 된 것을 느꼈다.
그 땅 가운데서 아랍 사람들을 특성들을 잘 알았다. 아랍의 문화를 잘 알았다. 이웃들이 그렇게 대했을 때,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어’라는 생각도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아랍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막 일어났다. 주님께 ‘저도 한 순간이군요!’ 하는 것을 깨달았다. 중동을 가기 십년 전부터 중동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중동 사람들을 만나고, 지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을 열심히 준비하면서 그 땅을 가기 위해서 준비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911 테러가 일어난 이후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중동 땅에 갑자기 관심을 많이 갖기 시작을 했다가. 우리가 중동에 땅에 그냥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모두 부정적이었다. 마치 우리를 위협하는 것 같은 그러한 그곳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곳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얻는 모든 정보들은 혹시 그 라가 우리를 해하지 않을까라는 그러한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도 공부하면 할수록 그들 가운데 무서운 일들이 참 많았다. 그러면서 제 안에 그들을 잘 알려고 공부했는데 그들이 더 무서워졌다. 그들 가운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제 마음에 장벽들이 세워지는 것을 너무 느꼈다. 그 이후로 이슬람, 중동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열심히 토로했다. ‘여러분, 이런 계기로 중동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런 높은 장벽을 우리 스스로 세우기 시작했으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선교적인 마음으로 나아갈 때, 이 장벽이 얼마나 그들 가운데 다가가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고 하면서 그곳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열변하고 다녔다.
 
그렇게 다녔는데 어떠한 사건, 작은 사건으로 인해서 제 마음에 그 장벽을 세우고 있었던 제 자신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제가 그런 사람이었군요!’ 하면서,,,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온전하지 못한 것이 확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은 대게 담담했다. 코로나를 걸린 이후에 저희 가족이 다 코로나를 번갈아 걸렸다. 코로나를 걸려보니 회복되는 시기를 감 잡게 되었는데, 버티면 회복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계속 낫지를 않았다.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 그 집을 향한 미워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툭툭 나왔다. 그런데 저희 아들은 아주 담담했다. 그 친구랑 놀기를 원했다.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주님을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에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친구랑 놀기를 원했다. 온전함의 고봉에 오른 저희 아들을 보았다. 주님께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던 마음을 갖지 못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양성으로 판정을 받으면서 한국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 후에 가족들이 감사하게도 계속 검사 가운데 음성 판정으로 나왔다. 코로나 느낌이 있는데도 음성 판결이 나왔다. 다행히도 마지막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자 감사하게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을 하고나서 다시 양성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제가 세워두었던 모든 계획들, 어떻게 보면 한 가정으로 인해서 뒤죽박죽 된 느낌이 들었다. 항공권도 바꾸어야 하고 특히 저렴한 비행키 티켓을 바꾸기가 너무 힘들었다. 마음속에 어려움이 왔다. 또 계속해서 격리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머무를 곳을 찾았다. 정하기가 힘들었다. 아쉬운 부탁을 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주셔서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닌 이제는 누구 때문에 그것이 무너진 것 같으니까 새로운 계획이 일어날 때마다 그 집,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이곳에서 양성 판정을 받고 계속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사랑의교회 예배를 드리면서 온전함 시리즈, 매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위로를 하셨다. 저의 부족함이 드러났지만 매주 위로의 시간이었다. 9년 전 마지막 설교했던 것과 함께 교제 했던 지체들과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이야기 한 찬양했던 것처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냥 작은 제자로 살아가고 싶은데 중동에서 한 번 살아가려고 한다고 하고 지금보다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여러분과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땅 가운데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갔을 때, 제가 조금 더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있을 거라고 그런 설교를 하고 제가 떠났다.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렇지 못한 나, 제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백신을 두 번 맞았다.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충분이 지났다. 그런데 또 걸렸다. 그 사실을 제가 아는 현지에 있는 지인분이며 사랑의교회 집사님께 이야기 했다. 그분이 모 병원에 연락을 해 주셨다. 그랬더니 그런 케이스가 좋다면서 그 병원 의사가 바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병원으로 갈 수 있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목사님은 어차피 격리 치료를 받아야 하니 그렇다면 그 병원가면 잘 진려해 줄 것이라고 했다. 몇 번 피를 뽑으면 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어차피 격리할 것인데 연구 샘플이 되기로 했다. 그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다. 이틀에 한 번씩 열심히 피를 뽑았다. 그 채혈하면서 처음에 이런 말을 했다. 간호사가 피를 뽑으면서 손이 무디다고 하면서 이해를 원했다. 그리고 나서 연구 동의서 같은 것을 작성하게 되었다. 피를 뽑고 이것을 얼마만큼 보관할지, 이러한 것들의 동의서였다. 작성하고 나서 설명할 때에 연구에 동참을 해서 소정의 30만원을 드린다고 했다.
 
힘든데 돈을 준다는 생각에 마음이 녹아지는 제 마음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껏 피를 뽑으라고 했다. 피를 뽑자마자 실수하기도 했다고 더 피를 더 뽑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번 뽑았다. 그 시간을 잘 지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을 시켜 주셨다. 오기 전에 격리 중에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 어려움 가운데 마음 속에 불평이 있었어도 불만을 보지 않자고 하면서 그것을 보지 않고 무언가를 덮고 있고 누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셨다. 사실 그곳 병원에서 일들이 있었는데, 일정 시간보다 회복되어서 속히 나올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기쁘게 ‘오늘 퇴원할 것’이라고 했다. 너무 기뻤다. 그런데 하나님, 어디로 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속히 나오다 보니 갈 곳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감사하게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제가 갈 장소를 마련해 주셨다. 어떤 한 권사님이 병원에 입원했던 소식을 듣고 그것 때문인지, 쉴 수 있는 곳을 제공해 주셨다. 대게 큰 사랑을 받은 것 같은데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너무 감사했다. 마치 자격 없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 넉넉함이 계속해서 부어졌다. 그때서야 조금 제가 은혜 속에 충만하게 거하니까 이전에 미워했던 그 친구들에게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은혜의 폭포가 충만하게 내려갔을 때, 그 시간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다. 한국에 와서 금요일에 설교를 하러 가는데 차를 몰고 가는데, 차가 막혀서 좀 늦었다. 마음이 좀 분주했다. 운전을 하다가 꺼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빨리 가려고 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깨달았다. 말씀을 전하러 갔다. 성령 충만하여 기쁜 마음을 창밖에 한국의 땅을 보면서 수많은 인파들을 보면서 주님 저들은 일을 마치고 ‘하나님의 청지기의 삶을 살았겠지요’ 하는 위로를 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운전하며 가야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난 상반기 사역을 돌아보면서 너무 감사하게 잘 갔다. 그런데 잘만 갔지, 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저에게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코로나를 통해서 저에게 말씀하셨다. 경험한 코로나를 다시 한 번 경험하면 잘 할 줄 알았는데, 두 번째 코로나 때에 다시 깨닫게 하셨다. 그들은 전심으로 사랑하고 있냐고 하나님은 나를 더욱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저를 온전케 하시려는 그 메시지를 계속해서 부어주셨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회개했다. 사용만 잘하면 뭐하니,?? 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주셨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분들이 참 많이 걱정을 해주셨다. 자주 소식을 주시고 위로를 해주셨다. 두 번째 코로나였을 때는 육신은 너무도 건강했다. 피만 뽑을 뿐 건강했다. 크게 아픈 줄 알고 사랑해 주셨던 분들게 너무 죄송함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닌가하는 죄송함이 있었다. 그러면서 저에게 주시는 몇 가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다. 너를 불쌍히 여겨서 그 땅에 관심을 일으킨 하나님, 그것을 경험하게 하게 되었다. 특별히 하반기에 뭔가를 준비해 가시는데 그 하반기를 위해서 힘을 실어주기 위한 그 땅을 온전케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들을 보게 되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이 있다. 지난 라마단 기간 동안에 서구 선교사님들에게 강의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서구 선배 선교사들에게 강의하게 되었음에 너무 감사했다. 동양의 작은 사람에게 한 달 동안 강의하게 해주었기에 너무도 감사했다. 마치 그곳에서 지내온 나날들을 위로하시는 것 같았다. 위로와 격려를 듣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셨던 그것을 나누고 하나님이 주신 노하우를 열심히 나누었다. 마지막 날 삼십 년 되신 미국 선교사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너는 코로나 이전, 이후의 어떻게 현지인들과 정기모임을 할 수 있냐’고 하는 질문을 하셨다. 본인은 삼십년간 선교사로 있으면서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 너는 어떻게 라는 질문이었다. 제가 사실은 노하우가 좀 있었다. 나름 동양인으로, 한국인으로 어떻게 접근하는지와 편하게 나누는 방법 등을 알게 되었다. 거절 받더라도 여러 가지 행함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선배님들의 기도라고 이야기 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이런 선상에 있다고 고백을 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떠하겠는가? 마치 예의상 한 것 같았다. 그분도 그러셨는지, 다시 되물으셨다. ‘너는 그것이 이전 선배들의 기도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초창기 때에 그곳에 가서 선물과 같은 영혼이 있다. 그 친구는 현지인이다. 그곳 친구는 한국 사람을 만나서 한국 이름을 받았다는 것이며, 그 이름은 ‘은혜’라고 했다. 그 한국인이 기독교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른다. 그리고 제가 만난 그 친구는 여전히 무슬림이다. 그 친구와 저는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고 계속해서 섬기면서 저의 딸로 삼고 싶다고 했다. 저의 성을 주면서 ‘홍은혜’가 되었다. 그 때 많이 느꼈다. 선교의 역사, 아라비아 땅 가운데 지금 열매가 없음에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사역을 하는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코로나로 인해서 격리한 것 같은 부지한 것 같은 공백된 것 같은 그러한 곳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고 계셨다. 현지인들을 물이 일 듯 보내주시고 그들과 계속해서 모임을 하면서 날마다 복음을 쪼개서 전하게 되었다.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었다. 너무도 감사했다. 그 때 느꼈던 것이 있었다. 이 친구에게 은혜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내 역랑을 아는데, 그것보다 더 어마한 은혜 가운데 사역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기도하고 이 맨 땅에 해딩을 하였기에 지금 하나님이 계속해서 일하시다가 성령의 바람을 불고 계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선배 선교사님에게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것을 제가 잘 알고 있다. 지금 코로나 이전 이후도 계속해서 복음을 쪼개서 나누어주고 있다. 그들이 회심하는 그런 열매를 보고 싶다. 그러나 회심을 안 봐도 좋다. 그 복음을 열심히 쪼개어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만족한다. 그런데 혹시 이후에 오는 또 다른 믿음의 사람이 ‘이곳에서 예수님을 마치 믿어요’라는 말도 하기 전에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는 그 선포, 그 고백 하나만으로 현지인들에게 그들에게 가서 ‘저를 양육해 주시오’ ‘저를 세례를 부어 주세요’ 라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소망을 저에게 하나님이 주셨다.
 
내가 이 땅 가운데서 하는 것은 보내주신 영혼들 가운데 외치는 자의 소리로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격리의 시간 같지만, 규제와 강화가 많은 이 땅 같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분, 이 땅 가운데서 어렵지 않는가? 힘들지 않는가? 현실의 장벽이 너무도 높아 보이지 않는가? 교회가 답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청년들을 보게 된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가 답이 됩니까?” 라고 절말 떠나가고 싶다고 이야기들을 해주어도 마음으로 그게 안 된다고 말한다.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저도 그랬다. 정답 같은 것은 아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매주 한 마디, 한 발짝씩만 하나님은 주셨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 거대한 장벽을 우리가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그 한 발짝 한 발짝 갈 수 있는 그 은혜만 구하지고 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이 일어나시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일어나실 때, 하나님이 원수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주 앞에서 도망하게 만드신다고 말씀하신다.
 
*시편 68:19절에,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이 장벽을 완전 무너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힘듦을 이길 수 있는 그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나눔을 가졌다.
 
성도 여러분,
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지시는 경험을 하길 원한다.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온전함의 고봉을 한 발짝씩을 걸을 수 있는 은혜의 폭포수 가운데 충만하게 젖는 여러분이 되길 원한다.
 
기도제목이 있다. 하반기 중동 아라비아반도 GCC 5개국에 책을 발행하게 되엇다. 그 책에는 예수님이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에스더 성경처럼 그 책을 통하여 이 사막에서 참 삶의 인도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예수님의 향내가 나는 그러한 서적이 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그런 출판 준비를 앞두고 있다. 그 책이 그 땅에서 잘 쓰여 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책을 통해 보내 주신 영혼들과 잘 연결되었을 때, 저희가 그 영혼들에게 날마다 복음을 쪼개서 힘든 짐을 잘 짊어지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정이 온전해 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땅이 온전해 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요약
주님 안에서 온전함이 되길 더욱 소원하고 간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음부의 권세 아래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그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여기며, 실망하고 낙담하여 떠나갔던 우리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시길 기도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를 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런 온전함의 여정 길 가운데 매일 주님과 동행하여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 가운데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땅을 온전케 하는 기도와 돕는 선교가 되어서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돌보아 주시는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으로 찬양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일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필요에 따라 채우시며 영원한 사랑과 구원을 공급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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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1년 8월 4일)
제목: "왜 주님은 나병을 만지셨는가?"
말씀: 마가복음 1:40~45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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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1:40~45,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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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시절 미술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정물화를 그리는 날이었다.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얶는데그림에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 해바라기 꽃은 매우 밝은 꽃인데 이 그림의 꽃잎은 어둡고 칙칙했다. 마침 옆을 지나가시던 미술 선생님께서 상황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붓으로 암술머리와 꽃잎 주변 배경을 어두운 색으로 덧칠을 하셨다. 그러자 그림에 해바라기 꽃잎이 환하게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예술가의 회화기법과 선생님의 솜씨에 놀랐다. 틀렸고 망쳐버린 것 같은 작품도 선생님 같은 예술가가 덧칠하시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혹 지금까지 그려온 내 인생의 그림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만약 위대한 미술가가 붓을 잡고 내 인생의 그림에 덧칠을 하신다면 분명 명작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절망적인 인생 그림을 들고 나아온 나병환자가 있고, 천지를 지으신 예수님이 계시는데 이 두 사람이 만났다. 나병환자는 내가 내 마음대로 열심히 그려왔으나, 탄식어린 인생의 그림을 그려온 우리들의 자화상 같다. 그를 주님이 손을 대어 내밀어 고쳐주신다. 이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해석해 나가면서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 그림도 새롭게 변화주시는 은혜가 가득차길 소원한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자.
*마가복음 1:40,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선 우리말 성경에서 나병이라고 번역된 이 질병은 히브리어로 ‘짜라트’ 헬라어로 ‘에투라’라고 하는 단어이다. 오늘날의 질병인 한센병과 유사해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정확히 같은 질병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관점이 아니라 성경시대에 그리고 성경 자체적으로 어떤 질병이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병은 성경에서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나병환자는 살아있는 시체와 같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디암이 하나님의 종, 모세를 비방하자 나병에 걸렸는데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다라고 말한다. 나병에 걸리면 살이 썩어간다는 것, 죽어서 나온 자, 즉 송장과 같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살아있는 송장과 같이 여겼다. 나병은 죄와 관련이 있다. 죄와 같다. 민수기 12장에 미디암이 나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종을 비방한 죄 때문이었고,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아왕이 이마에 나병이 걸린 사건이 나오는데 이 때 웃시아도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향로를 들고 분향하다가 나병에 걸렸다. 두 사람 다 죄를 짓자 나병에 걸렸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이기에 이스라엘 진영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부정함이란 무엇인가? 성경에는 정결법이라고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길 수 있는 상태와 관련하여 간단히 세 가지 구분이 있다.
❶거룩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바쳐진 것.- 거룩한 것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성별된 것, 온전히 바쳐진 것,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온전함을 사모합니다’를 통해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바로 이 온전함이 거룩함의 속성이요 거룩함의 비결이다. 우리는 모두 온전함을 사모하고 그 온전함의 고봉에 힘써 전력투구 하여 올라감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항상 나아가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길 간절히 간구한다.
 
거룩함 외에 부정함이란 상태가 있다.
❷부정함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이스라엘에서 부정한 자는 추방되게 된다. 이스라엘 진영 광야, 부정의 장소로 부정한 자는 추방된다. 이 거룩함과 부정함의 중간 상태의 정결함이란 상태가 있다.
 
③정결함 –거룩함과 부정함의 중간 상태인 거룩해질 수도 부정해질 수도 있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 세 가지 상태에서 부정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정결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정결한 사람이 부정해진다. 그리고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은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한 하나님의 성소와 이스라엘의 진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진영 밖으로 추방되어야 했다.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는 레위기 13장과 14장에서 규정하는 대표적인 부정한 자이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진영에서 추방되고 광야에 머물러야 했다.
 
*레위기 13:45~46절에,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 가운데에 어떤 상태에 있는가? 자녀들은 어떤 상태인가? 성경에 따르면 특별히 택하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성별하게 하지 않는 한 모든 인류는 원칙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나아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전 생애를 통해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이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나병의 중요한 특성의 또 한 가지는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
 
아람 왕이 아람나라에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달라고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보내자 이스라엘 왕이 ‘내가 하나님이 관대 나병을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필시 이것을 핑계 삼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이야기에서 볼 때, 성경에서도 나병은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질병이며,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임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나오는 나병에 관한 그 긴 유래는 나병을 진단하고 정결해진 나병환자를 다시 진영에 복귀시키는 절차만 규정되어 있지 나병을 고치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병환자는 사실상 부정하다는 선언을 받게 되면 언약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했고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나병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살아있으나 시체와 같고, 죄의 결과로 발생하였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추방되고 사람의 능력으로 고칠 수 없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너무 유사하다. 나병환자는 아담이 범죄 하여 하나님의 낙원에서 추방된 모습을 보여주는 마치 시청각 교재와 같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는 구원받기 전애 범죄 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모든 인류는 죽어가고 있고, 썩어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복과 임재로부터 추방되어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 나병환자가 우리의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와 같아 보인다. 우리를 대표하여 예수님과 시합하려고 경기장에 오르고 있고 성경저자가 우리에게 그것을 녹화 중계방송을 해주고 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과 경기장에 올라서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지 우리 대표선수로서 그 이기는 장면을 확인하면 우리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왔다. 40절에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를 한다. 정말 주소를 잘 찾아왔다.
 
*마가복음 1:8절에,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성령님은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으면 모든 병이 씻겨나갈 것이다. 참으로 나병환자는 주소를 잘 찾아왔다. 나병환자는 결사적인 각오로 예수님께 찾아왔다.

*레위기 13:45~46절에,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병환자는 자신이 알리기 위해 부정하다고 외쳐야했고 진영밖에 혼자 살아야 했는데 이런 모든 규레를 다 버리고 예수님께 고침 받기위해 주님 앞에 나아왔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사적인 각오로, 주님 앞에 치료받기 위해 왔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오늘 본문에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을 쏟아 예의를 갖추고 주님 앞에 진지함과 겸손과 경배의 자세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주님은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믿음으로 나아왔다.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들, 큰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마 이 수여저녁기도회를 듣는 성도님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생명이 길이라는 것을 다 알 것이다. 교구 다락방 순원들 심방을 하면, 다락방에서 예수님께 나가는 길에 거부하겠다는 성도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주님 앞에 나오면서 이 나병환자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죽음의 결사적인 자세가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한다. 진실 된 겸손의 자세가 주님 앞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도님들이 욥과 같은 길, 광풍이 일어나는 바다를 건너는 순간의 위태한 분들과 가족, 그리고 친척이 분명히 정상적이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만난다. 오늘 나병환자의 모습에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나타나있다.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주님은 분명히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러한 결사적인 자세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길이 우리가 은혜 받는 길이요, 회복되는 길이요, 고침을 받는 길이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러한 나병환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마가복음 1:41~42절에,
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주님은 범죄 한 인류의 자화상인 나병환자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주님 저를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며 그에게 내밀며 깨끗하게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서두에 말씀드린 구약의 정결 법에 따르면, 나병환자, 부정한 자는 만지만 안 되게 되어있다. 정결한 자가 부정한 자를 만지면 정결한 자가 부정해진다. 그런데 왜 주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는데, 주님이 부정해 지셔야 하는데 나병환자가 정경하게 되었는가? 왜 하필 주님은 정결법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손을 대어 고칠 수 있었는가? 우선 왜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고 나병환자가 정결해졌는가? 왜 구약의 정결법이 뒤집어지는 일이 발생했는지를 확인해보자. 정결 법을 위반했는데도 부정해질 상황에서 부정해지지 않은 주님의 손은 평범한 인간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손이 매우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30~31절에,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9:25~27절에,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말 못하고 귀신 들린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이 마가복음에서 질병과 부정과 죽음과 장애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구원을 주시는데 이러한 손이 과연 누구의 손인가? 이 손을 보고 누구의 생각이 나는가? 이것은 바로 구약성경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로 여호와의 손의 권능이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의 손은 애굽의 열 가지 심판을 내리시고 바로의 압제에서 초자연적으로 구출해 내셨던 여호와의 강한 손의 능력과 구원을 재현하고 있다.
 
*출애굽기 6: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신명기 5:15절에,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바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권능과 능력을 가지셨고 여호와와 같은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구원 주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손이 정결의 관한 율법을 능가하는 손이신 이유를 우리는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던 시내 산에서 수여된 율법이 아니라 여호와의 강한 손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켜서 노예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의하여 여호와의 강한 손이 역사하사 이스라엘이 죄악 된 구출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재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손은 구원 역사에서 율법보다 크신 손이시다. 율법에 앞서 계신 손이시며, 정결 법에 절대 갇힐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권능의 손, 여호와의 손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이 재현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손은 구약성경에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과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다. 사무엘상 4장과 5장에서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을 치시는 손으로 나타나신다. 에스라 7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손으로 나타나시며, 에스라 8장에서는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시는 손으로 여호와의 손이 나타나신다. 시편 10장에서는 가난한 자, 외로운 자를 도우시는 손이 여호와의 손이셨다. 전도서 2장에서는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일상의 기쁨의 손이 여호와의 손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사야 14장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열방을 점령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자의 손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은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는 창조주의 손으로 나타나신다. 여호와의 이 귀한 역사와 은혜를 묵상하면서 특별히 마음에 가는 부분이 전도서 2장에,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일상의 기쁨을 주시는 손이 참으로 감사하고 아름다운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코로나 펜데믹 사태로 인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고 우리의 일터와 사역현장에서 수고하며 일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이 손이 하루 속히 이 대한민국과 온 지구촌을 치료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의 부정이 씻겨나가고, 우리의 대적이 쫓겨나가고, 가난과 외로움이 회복되고, 우리의 일상이 회복될 수 있는 비결은 율법과 의식과 제도와 인간의 수단이 아니라 이러한 주님의 손이 우리의 병든 삶의 환부를 만져주실 것이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주님께 여쭙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은 마음속에 생긴다. ‘주님 원하신가요? 그 손을 내게 대주시는 것을,,,’ 주님이 과연 우리도 만져주실까?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주님은 본문에 나병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다 만져준다는 것을 우리들은 확신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여호와의 권능의 손을 재현하고 계시지만 왜 하필 정결 법을 어기고 손을 대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아무에게나 손을 댈 수 없다. 지구상에 수십억명의 인구가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서 손을 펼쳐서 막을 수 있는 이성은 제게는 두 명 밖에 없다. 제 아내와 제 딸이다. 이와 같이 아무나 손대고 만질 수 없다. 우리는 악수할 때도 아무나 악수할 수도 없다. 바로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친척, 나의 교우들, 좀 더 넓게 정리하자면 아는 사람과 악수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손을 대는 것은 이 나병환자와 가족이 되시길, 친구가 되시길 원하신다. 교우가 되시길 원하시고, 한마디로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신다. 특별히 정결 법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에 나병위에 손을 대는 것은 매우 불쾌 하고, 거리끼는 일이고, 미련한 일이다.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일인데,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을 대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은 매우 깊은 관계성을 형성하시기를 원하셨고, 본인이 불쾌함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와 관계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손 대심은 바로 피조물의 고통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손을 재현하시는 주님이 참여하시겠다는 표시이다. 나병환자의 고통은 전혀 관계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거기 함께하고 나병환자를 위해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후가 무엇인가? 이러한 관여와 관계 맺음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발생했다. 오늘 본문에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는 단어가 나온다. 불쌍히 여기사, 헬라어 동사는 스플랑 크니스 페이스라고 하는 단어이다. 우리 한국식으로 번역을 하자면, 애간장을 태우는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 바로 우리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이야기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이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 목자의 심정 때문에 부정한 자에게 손을 내미셨다. 주님은 기독교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기독교적, 주님의 사랑은 함께함과 희생을 동반하는 사랑이라고 보여주신다. 이렇게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그를 사랑하신 것은 더 큰 사랑, 더 큰 부정의 손을 대시는 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마가복음 15:22, 25절에,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십자가형의 특징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못은 어디에 박는가? 손과 손목에 박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요한복음서나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박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정결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정결법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레위기 16장에 대속 제에 드리는 속죄제와 의식들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한다. 총신대 박철현 교수님은 그의 레위기 주석에서 대속제일을 해석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제일 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레위기 16장에 대속제일은 어떤 날인가? 이스라엘은 성소에 모든 부정을 씻는 날이었다. 그리고 대속제일은 이스라엘 회중의 모든 죄와 부정을 씻는 날이 대속제일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제일의 성취로서 모드 택한 받은 백성의 죄악과 부정을 씻는 우주적인 대속제이 제단이요, 모든 부정과 허물을 씻는 우주적 대속제일의 제단이다. 모든 피조 세계의 만백성의 죄와 허물과 부정이 올려 진 그 제단에 우리 주님이 자신의 손을 내어 대시고 그 손이 십자가 제단에 처참하게 못에 박히시면서 결박되신 것은 우리 주님이 그 십자가 제단에 쌓여져 있는 모든 인류의 죄와 부정과 고통과 고난과 질병의 속량에 우리 주님이 손을 대셨다라고 우리는 볼 수 있다. 주님은 손이 고난당하시고 대신에 주님을 영접할 모든 백성들의 부정을 씻어주시고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주시는 장소가 십자가 제단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예수님이 그 사건과 패턴이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 상징적인 예고편과 같았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손뿐만 아니라 나병환자와 똑같이 되셨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지고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자였는데,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
 
마가복음 15:34절에,
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 주님이 나병환자처럼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셨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사람의 이미지는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송장과 같았다. 신약학자 마틴 렘헬이라고 하는 ‘십자가의 처형’이라고 책에 보면 당시 십자가에 달린 중요한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독특한 문제는 십자가형의 형태가 매우 다양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범죄자를 산 채로 달아 처형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처형된 자의 시체를 십자가 위에 전시한 것인지의 사이의 구분은 항상 분명하지 않다. 어떠한 경우이든 간에 십자가형은 희생자를 대단히 모욕하는 방식이었다. 세네카에게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 겪는 고통과 비결될 수 있는 인생, 그리고 처형될 것으로 유일한 위로를 삼는 인생은 더 이상 생명을 부지할 가치가 없다... 천천히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생명‘이라고 부를 가차가 없다.”- 마틴 렘엘 –십자가 처형-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나병환자를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신다. 자신이 송장과 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고난당한 죄인들을 그대로 취한 모습은 복음서에서 나온다. 무덤가에 사는 광인을 고쳐 주셨는데,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송장과 같았던 환자도 주님은 회복시켜 주셨으나, 주님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송장과 같이 되셨다. 고난 받은 모든 백성들의 아픔과 질병과 상처를 주님께서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고난당한 고통을 아신다.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가 주님께 탄원할 때 그 고통을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는 확신하여 주님 앞에 결사적으로 나아와야 한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믿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로마서 8:32절에,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일서 3:16절에,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에베소서 5:2절에,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21절에,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축복이 경험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한 하나님이 자녀로서 일평생 하나님께 바쳐져서 사나죽으나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마가복음 16:14-18절에,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닮아가고 함께 있고, 고난당한 주님의 길을 함께 가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평생 설명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이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그 사랑,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보여주셨던 그 사랑의 길을 동일하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손을 얹어 병을 고치라고 하시는 말씀이 단순히 손을 얹으라는 그 은혜도 있겠지만, 그러한 의미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우리 예수님이 손으로 행하신 모든 의미의 일을 그 안에 다 담고 그것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희생하셨던 것처럼 나의 소유와 시간을 드려야 한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면 그분의 손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고난의 사명 가운데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손을 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못 박인 자만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란,
주님의 사랑의 손으로 쓰임 받아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어 온 세상을 거룩하게 회복시키는 자이다. 우리 삶 가운데 항상 있어야 한다.


♣요약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조명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우리가 믿음과 진실함과 결사적인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의 손을 통해 거룩하고 정결한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우리가 닮아가서 세상의 죄악에서 부정을 깨끗하게 씻기어져서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등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겸손의 표시이다. 사실 문등 병은 잘 고칠 수 없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엎드리고 무릎을 꿇음으로써 결국 고침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와야 해결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므로 언제나 그의 뜻은 선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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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8월 1일)

제목: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
말씀: 호세아 6:1~3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기도: 한재준 부목사님
 
설교자: 박성규 목사님(부산 부전교회 담임목사님)-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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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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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박상규 부전교회 담임 목사님)
-1975년도에 건축 기술자인 임채희씨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원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는 중동 산유국에 건설 붐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근로자들이 열사의 중동에 달려가 외화를 벌던 시대였다. 한국에서의 월급의 다섯 배에서 열배까지 올리는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중동 근무는 근로자들에게 매우 선호되는 직업이었다. 신혼의 꿈을 꾸던 그런 신랑이었던 채희씨는 아내와 함께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열사의 나라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모래폭풍과 싸우며 그 뜨거운 더위와 싸우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근무했다. 아내로부터 보내온 편지는 한없는 격려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일 년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면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수 있는 돈을 모을 수가 있었다. 매달 보내주는 돈을 성실하게 적금을 들어서 일 년 후에는 집을 살 수 있는 그런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일 년 근무를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아내가 일러준 주소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에는 아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인이 있었다. 알아보니 동창회에 갔다가 어린 시절 함께 공부했던 사람과 눈이 맞아서 집을 팔고 도망간 것이었다. 아내를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수소문해서 아내를 찾아가 설득하여 그 아내를 대려와 같이 살게 되었다. 이미 집은 다 사라졌고 그들은 월세 방에서 신혼의 삶을 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 아이와 함께 그리고 배신한 적이 있는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2차 중동근무를 지원했다. 이제는 쿠웨이트였다. 실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굳은 약조를 받고 그는 쿠웨이트로 날아갔다. 열심히 일하고 이제는 아내에게 월급 전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만 보내고 집을 살 수 있는 돈은 본인이 적립하게 되었다. 드디어 일 년이 되었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귀국하여 살던 집을 가봤지만 역시 이번에도 아내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아내를 설득하여 다시 데려와 살았다. 이제는 집을 장만했다. 이제는 꿈을 이루고 함께 그 집에 살고 있지만 이 남편의 마음속에는 나를 배신한 아내에 대한 분노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둘째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자신을 배신한 아내가 자신의 자녀가 아닌 아들과 딸과 함께 산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모래폭풍이 이는 중동의 삶이 그리웠다. 그래서 그는 다시 3차 중동근무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이라크였다. 이라크에서의 근무지는 그 당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근무지인 작업장 근처까지 포탄이 떨어지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기에 재희씨는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장에 날아온 오발탄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버리고 만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고국의 아내에게 남편의 숨진 소식이 전달되었고 유족에게 보상금이 전달되었는데 그의 월급이 70만원이었는데, 보상금은 3500만원이었다. 그 돈은 부산에서 섬이나 어디에 집을 열채나 살 수 있는 거액의 돈이었고 그 보상금이 아내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남편의 죽음의 소식과 보상금의 소식을 듣고 그는 통곡하며 오열했다. 남편을 배신했던 것이 너무나 미안했고 너무나 죄송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살다간 남편에게 송구함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 마음속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제가 호세아 1장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여기 나오는 재희씨는 예수님이시다.
 
재희씨=예수님, -장차 신약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임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는 비련(悲戀)의 선지자이다. 슬픔 사랑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비련의 선지자이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호세아를 보면,
 
*호세아 1:2절에,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북이스라엘의 성도들이 너무나도 영적으로 타락하는데, 영적 간음인 우상 숭배를 저지른 것을 하나님께서 고발하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으로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삶으로 메시지를 전하게 해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음란한 여자를 만나 음란한 자식을 낳음으로써 불륜의 씨앗인 자식을 낳음으로써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고발하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내용이 호세아이다.
 
*호세아서 1:3절에,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세아와 고멜과 결혼했다고 한다. 히브리말로 그 어원이 끝이라는 뜻이다.
▷고멜-어원은 끝(end), 완전히 끝까지 가다.(come to an completely)
-고멜은 음란한 여자이고 성적으로 타락한 여자였다. 완전히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여자였다. 고멜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의 영적상태를 말씀 하신다. 얼마나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었냐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영적으로 심각한 타락에 빠져있었다. 호세아시대의 북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이다. 북이스라엘은 가장 넓었던 땅,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가장 부강했던 시대이다. 그들은 그 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 우상인 바알이 주었다고 착각함으로써 깊은 바알에게 빠졌던 시대가 바로 호세아의 시대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오늘의 상황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제가 자라나는 60년대만 해도 우리는 헐벗고 굶주렸다. 지금은 정말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깊은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진 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 우리 모습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씀을 들으면 ‘목사님, 나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형상 앞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다.
 
*골로새서 3:5절에 보면,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무엇인가를 탐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다.
 
▷카일 아이들만 목사님의 [거짓 신들의 전쟁]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보면 이 목사님은 현대인의 우상을 아홉 가지로 이야기 한다.
▷현대인의 아홉 개의 신.
①음식의 신
②섹스의 신
③오락의 신
④성공의 신
⑤돈의 신
⑥성취의 신
⑦로맨스의 신
⑧가족의 신
⑨‘나’라는 신
 
-①음식의 신-하나님보다 음식이 더 중요하다. 이 사람의 스마트폰에 수많은 맛 집의 사진이나 그림이 담겨있다. 메뉴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사람이 주로 보는 것은 티브에 먹 방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음식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②섹스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남편과 아내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자녀를 낳는 이런 놀라운 복을 주신 것이 성이다. 그러나 내 배우자와의 관계를 넘어 또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면 이 사람은 섹스의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음란 영상물을 보고 있다고 한다면, 섹스의 신을 섬기는 것이다.
 
-③오락의 신-스포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그리고 우리가 인터넷 게임 등이다. 적절한 오락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긴장을 풀어주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적정선을 넘어선 오락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만이 아닌 오락의 신을 SNS로 말하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하루에 수없이 보고 있다면, 우리 한국 사람은 카톡을 수없이 보내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오락의 신이 될 수 있다.
 
-④성공의 신-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명성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는 성공의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만물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회의 시스템을 변혁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과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로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다면 우리는 성공의 신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⑤돈의 신-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복음 전파와 세상이 변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돈에만 매달린다면 그든 돈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⑥성취의 신-성취의 신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과잉성취면 중독이라면 그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
 
-⑦로맨스의 신-연애 감정을 말한다. 내 배우자가 아닌 사람에게 직장이나 동호회나 동창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로맨스는 조심하지 않으면 불륜이 되어 섹스의 신이 될 수 있다. 부부가 오랜 결혼생활을 하면 로맨스의 감정보다 신뢰와 존경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⑧가족의 신-배우자든, 자녀든, 부모님이든,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가족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큰 부자였지만 하나님은 돈을 가지고 그를 테스트하지 않으신다. 백세에 낳 너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 단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테스트에 합격한다.
*창세기 22:12절에,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러분은 어떠한가? 혹시 가족의 신을 섬기고 있지는 않는가?
 
-⑨‘나’라는 신-‘내가 최고야, 내 의견이 최고야,’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를 우상숭배 하는 데 빠진 사람이다. 현대인들은 ‘나’라는 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밀턴 로키치(1964년)라는 정신의학과 교수가 쓴 유명한 책이 있다. [입실랜티의 세 그리스도]-이것이 2017년도에 영화로도 나왔다. ‘세 명의 그리스도이다.’ 영화 [Three Christs]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이며, 영화이다. 1960년도 미시간의 한 입실렌티라는 한 도시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과대망상증 환자를 치료하게 된다. 세 명이었는데, 이 세 명이 똑 같이 메시아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메시아이다’고 하면서 ‘내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고 잘못된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환자들이었다. 로키치 박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고칠까를 고민했다. 저마다 메시아라고 말하니까 서로 모여서 함께 서로 대화를 하다보면, 다 메시아라고 한다. 그 메시아는 한 분이니까, 이러면서 현실로 돌아오게 집단 치료를 시도하게 된다. 집단치료가 시작된 날- 한 환자가 말한다. ‘나는 메시아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라고 한다. 그래서 로키치 박사는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 하셨나요?’ 라고 질문했다. 답변은 ‘어제’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다른 옆에 있는 환자가 ‘나는 너를 보내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세 번째 환자가 말하기를 ‘그러니까 너희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모두가 우주의 중심을 ‘나’라고 나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형상 앞에서만 절해야 우상숭배가 아니다. 그것도 우상숭배이지만, 카이 아이들만의 목사님의 아홉 가지 우상숭배 중에 그 하나라도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 가담되어 있는 것이다. 한 번 더 아홉 가지 우상을 읽어보면서 나는 어떤 우상을 섬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해당되어 있지 않는가? 적어도 현대인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카일 아이들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상숭배는 많은 죄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죄를 낳는 큰 죄이다. 우상숭배는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본질이다.’라고 말한다.
 
여러분 보라, 섹스의 신을 섬긴 사람이 얼마나 문란해진 사람이 많은가? 지도자들 가운데도... 성공의 신을 섬기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잊어버리고 이웃, 가족 사랑도 다 끊어진 사람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오락의 신을 섬기다가 신앙의 근본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돈의 신을 섬기다가 인생이 무너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로맨스 신을 섬기다가 불륜으로 끝나 가정이 파탄으로 망가지 사람들이 이 시대에 많은가?
 
주안에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고 이것을 찍어버리고 깨뜨려버리고 우리의 신앙의 새로운 결단이 오늘 이 시간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이다.
-치료하고 살린다는 이야기는 지금 병들었다는 이야기이고 지금 죽어간다는 것이다. 본문을 보자.

호세아 6:1절에,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매 맞고 다치고 죽어가게 되었을까?

*호세아 6:10절에 보면,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지파이다. 에브라임을 말하면 북이스라엘 전체를 가르키기도 한다.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다고 한다. 영적 간음에 빠진 그들을 지금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른 바 혼합주의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며 분노하신다. 그래서 이들은 매 맞고 죽어가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다시 치료받고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그 조건을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하신다.
 
I.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다.
 
*호세아6:1절에,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치료받을 수 있는 조건, 살아날 수 있는 조건은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다의 히브리 동사는 굉장히 많이 나오는 동사이다.
▷돌아가다(슈브) -뜻은 ①돌아가다. ②.회개하다.(悔改)-여호와께 돌아가라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면 우상숭배를 회개하면 치료하고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돌아갈, 회개의 대상에게 할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 여호와는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온다. 하나님이란 말씀도 많이 나온다. 우리 말고 엘로 힘이라고 한다. 이 엘로 힘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킬 때에도 쓰고 천사에 대해서도 쓰고 또 하나는 이방 신을 가르킬 때도 엘로 힘을 쓴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단어는 정말 구별된 단어이다.


▶여호와
1. 이스라엘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다른 종교에는 없다.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2. 생명을 주시는 분, 창조자.-죽어가는 자도 살리시고 창조하신 분이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3. 절대적이고 변함이 없으신 분.-모두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든 절대적이며 변함이 없으시다.
4. 자기모순과 변함이 없이 영원히 사시는 분.-우리는 우리말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순이 없으시고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다. Ever Living의 하나님.
5. 지존 자, 본질상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不可解하신 분.-스스로 존재하는 분,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출애굽기 3장 2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스스로 존재하는 분)


그리고 놀라운 것은 본질 상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 분이시다. 여호와라는 이름만 묵상해도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일어나는지 모른다. 생명을 주시는 분, 창조자, 절대적인 분, 변함없는 분, 자기모순이 없고 영원하신 분, 자존 자, 불가해 하신 분,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여호와께 돌아가면 우리를 살려주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가 즐겨 찬양하는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루, 그곳에 달려간 자 안전하리.’ ~
이 가사가 잠언 18정 10절에서 나왔다.


*잠언 18:10절에,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그분이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그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요, 그분이 절대적인 지위와 권력과 권세를 가지셨기에 그분을 믿는 자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를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분께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돌아가다의 뜻인 히브리어로
‘슈브’는
①돌아가다
②회개하다.
③회복하다
④고치다.
⑤구조하다
⑥부흥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회개하고 회복하게 하시고 망가진 우리를 고쳐주시고 우리를 고난에서 구조해 주시고 그리고 다 죽어가던 우리를 부흥시켜 주신다. 우리가 회개할 때 부어주실 줄 믿는다. 오늘 우리가 회개의 기도가 있기를, 하나님과 우상을 섬기는 것을 모두를 섬기는 것을 고백하고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면 우리 모두에게 부흥을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회개를 통하여,,,
 
*호세아 6:2절에,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일으킨다는 단어가 헬라어 단어에 보면 부활이라는 단어와 같다. 이것이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한 말씀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살아날 소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면,,,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내가 하나님을 떠나고 영적인 간음인 우상숭배에 빠져서 내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사역 반에서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다. 장로님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분은 사업을 하다 보니 잘되어서 술친구가 너무 많이 생겼다. 알콜 중독에 빠지고 도저히 치료가 안 되어서 그 부인께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게 되었다. 그런 후에 퇴원하고 교회에 왔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찬양의 은혜를 받다보니까 술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는 말씀과 찬양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슈브’, 회개하고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 집사님이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정말 상처 입은 치유 자, 교회의 어떤 여자 집사님이 본인의 남편이 알콜 의전 증에 빠져있다고 도와달라고 한다. 그분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면 우리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고 고쳐주시고 부흥시켜 주시는 은혜를 죽은 지 2일 3일이 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불가능 한데도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려주실 줄 믿는다. 게임 중독인 자녀도 살려주실 것을 믿는다.

 
II.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이다.
 
*호세아 6:3절에,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 이것은 인격적 신앙을 말한다. 인격적이란 성품이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인격적이란 말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존재를 인격적이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다, 우리도 인격적이다. 그리고 천사도 인격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짐승은 인격적이 아니다. 타락한 천사도 인격적이다. 그래서 감정과 의지를 공격하는 게 사탄이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격적 신앙이 무엇인가?
지식적으로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지식(성경을 읽고 연구)+김정(묵상, 기도 사랑)+의지(순종)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감정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면 감사와 사랑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타나고 그다음에 의지적인 요소인 감사에서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격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있는가?이다. 그 지식에 근거해서 그리고 사랑에 근거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이다. 여기까지가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식적인 사랑이 많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져 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이 없다. 이것은 지식적 사랑이고 신앙이다. 인격적 신앙은 지식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있는가이며 그 지식에 근거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이다. 여기까지 신앙일 때 순종이 인격적 신앙이다. 머리로는 성경을 너무도 잘 알지만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식어져버렸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순종일 때, 인격적인 신앙이 된다.
 
▷제임스 패커는 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이 책을 80년대에 많이 읽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내가 인격적으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경험하는 신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신앙이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생은 지금 죽어 천국간다는 뜻도 있지만 지금 현재 여기에서 좋은 신앙은 하나님과 지식 감정 의지를 교제하는 삶,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 영생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 바로(Knowing God)이다.
 
좋지 않은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Knowing about God). 바로 하나님과 교제도 없이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배우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순종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지식적, 감정적 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면 우상숭배와 바알숭배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전적으로 하나님을 알면 아홉 가지의 우상을 던져버리는 신앙의 좋은 결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알게 되면 새벽빛처럼 우리를 인도하신다. 뿐만 아니라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하신다. 이른 비는 파종을 위한 비이다. 흙이 부드러워지도록, 늦은 비는 열매가 풍성해지도록 주는 비이다. 그래서 추수직전에 비가 많이 내리면 수분과 양분을 머금고 이 곡식들이 아주 튼실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진 삶에는 인생에 열매가 없다. 하나님께서 늦은 비의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 인생의 풍성한 열매,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는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
1)여호와로 돌아가는 것(회개).
2)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전인격적 신앙).
 

III. 여호와를 인애하는 것이다.
 
*호세아 6:6절에,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는 오늘날 예배인데, 예배보다 인애를 원한다고 하신다. 인애는 어떤 단어인가? 인애는 히브리어로 헤쎄드이다.
 
▷(인애-헤쎄드)-충성, 사랑, 언약 적 사랑, 변함없는 사랑. -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진정한 사랑은 충성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결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이 사랑이 변질되지 않는 충성된 사랑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와 사랑의 관계에 원한다는 것은 예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면서도 사랑의 충성이 진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결혼은 언약(covenant)이지, 계약(contract)이 아니다.

*말라기 2:14절에,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지금 하나님과 이스라엘, 성도들은 언약을 맺었다. 출애굽기 20장에 맺었다. 이 시내 산 언약을 맺기 전에 19장에서 이 언약을 지키겠냐고 할 때, 우리가 다 지키겠다고 말한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20장을 주셨는데, 20장이 십계명이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약속이다.


*출애굽기 20:3-5절에,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4절에,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애굽기 20:4절에,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질투라는 이야기는 속 좁은 사람, 째째한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째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독점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호세아 6:6절에,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주일에 한 번 예배하고 일주일 내내 아홉가지 우상 중에 하나에 빠져서 그 우상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는 않는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병든 모습이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침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인생은 무너져 내리고 있을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을 순저하게 사랑해야 한다. 충성스럽게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너희들과 독점적인 사랑을 원하신다고 하신다.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주일만 예배드리고 다른 아홉 가지 우상숭배를 하고 있지 않은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해야 한다. 충성스럽게 사랑해야 한다.
 
*에베소서 6:24절에,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호세아 6: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인애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변덕 부리지 말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말고, 우상에게 기웃거리지 말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신부들이 되길 축복한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징계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치료하고 살리신다. 세 가지 조건이다.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
1.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다.-회개
2.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이다.-지식(성경을 읽고 연구)+김정(묵상, 기도 사랑)+의지(순종)
3. 여호와를 인애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 충성하는 것이다. 우상에게 빼앗기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요약
이제 우리 가정에 모든 우상을 버리고 전인격적 신앙을 가져서 이제는 감정적,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힘써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온전하게 하나님만 사랑하고 치료해 주시고 살려주심을 믿고 순종하여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여야 한다. 여호와께 돌아가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고 하나님을 인애하며 충성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바로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치는 불행과 행복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재난에 빠졌을 때는 그 재난에서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처분, 곧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실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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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7 회 경제상식퀴즈

1.경제활동의 주축이 되는 만 15~64세 인구를 가리킨다. 한국은 급격한 감소가 예상되고 있는 이것은?
  1. ① 경제활동인구
  2. ② 비경제활동인구
  3. ③ 생산가능인구
  4. ④ 주민등록인구
2.지방자치단체의 총수입에서 자체수입의 비중이다. 지자체의 세입 징수기반이 좋을수록 올라가는 이 지표는? 
  1. ① 재정건전성
  2. ② 재정자립도
  3. ③ 조세부담률
  4. ④ 국민부담률
3.국내총생산(GDP)에서 국세와 지방세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특정국 국민의 세금 부담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인 이것은?
  1. ① 재정건전성
  2. ② 재정자립도
  3. ③ 조세부담률
  4. ④ 국민부담률
4.저축은행, 보험사, 카드사, 증권사 등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용어는?
  1. ① 1금융권
  2. ② 2금융권
  3. ③ 3금융권
  4. ④ 투자은행
5.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이 동시에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경기 침체 상황을 뜻하는 말은?
  1. ① 하이퍼인플레이션
  2. ② 디플레이션
  3. ③ 스태그플레이션
  4. ④ 리디노미네이션
6.국민연금의 ‘이것’은 1998년 60%에 달했으나 10년 후쯤엔 40%까지 내려갈 전망이다. 퇴직 전 평균 임금 대비 연금의 비율인 이것은?
  1. ① 만기환급률
  2. ② 소득대체율
  3. ③ 한계대체율
  4. ④ 한계효용
7.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부터 기존 경영진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가장 거리가 먼 것은?
  1. ① 차등의결권
  2. ② 황금낙하산
  3. ③ 액면분할
  4. ④ 초다수결의제
8.회사가 영업을 중단하고 보유자산을 모두 처분한다고 가정할 때 채권자, 주주 등 이해관계자에게 줄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를 계산한 것은?
  1. ① 청산가치
  2. ② 존속가치
  3. ③ 내재가치
  4. ④ 순자산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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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여름방학에 마무리할 학생부·자소서.

대학 입시에서 2008년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된 것은 점수로 나타나지 않는 학생의 잠재력과 창의성 등을 감안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지금은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도입 취지에 맞게 고교 내신이 3, 4등급에 그쳐도 SKY(서울·연세·고려대) 등 명문대에 합격한 사례가 그동안 많이 나왔습니다. 생글생글 학생기자를 거쳐 명문대에 진학한 대학 생글이들의 합격 수기를 들어보면 대부분 교과와 비교과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고교 3년 동안 성장한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남과 차별화해 대학 측에 어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교과학습이나 동아리 활동 주도, 다양한 프로그램 참여를 통한 여러 가능성 모색, 학생회 활동 등을 통해 기른 리더십, 봉사활동 등을 통해 육성한 공감능력과 사회적 책임 의식, 일찌감치 대학 희망전공을 정하고 그 전공에 맞춰 해온 심화활동, 희망전공을 빨리 정하진 못했지만 다양한 탐색을 통한 나만의 길 찾기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또한 자신의 활동을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하고 희망하는 대학의 인재상에 부합하게 자기소개서 등 서류를 작성하되 단순한 나열이나 추상적 표현이 아닌, 학년이 올라가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구체적 사례와 엮어 서술했다고 합니다.

올해(2022학년도) 대학입시에서는 교사추천서가 폐지되고 자기소개서 문항과 기재내용이 대폭 축소된 데다 고려대 등 일부 대학이 아예 자소서를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소서는 자신만의 ‘끼’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서류입니다.

마찬가지로 학교생활기록부는 학교에서 이뤄진 모든 활동을 기록하는 서류로 1학년 때부터 착실히 관리해야 합니다. 2024학년도부터는 개인봉사활동이나 자율동아리 활동 등은 학생부에 기재하되 대입전형자료로 활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학생의 성장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록으로서의 중요성은 여전히 큽니다. 1학년부터 학년이 올라가면서 보충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꾸준히 내용을 채워야 하는 것이죠.

올해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에 접어든 지금 고3 수험생들은 자소서 작성과 학생부 마무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입시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2학기가 시작되면 수시 원서 접수와 대학별 고사를 준비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죠. 고1, 2학년은 1학기를 마무리하면서 학생부를 보완해야 할 시기입니다. 조정숙 종로학원 수시전략연구소장의 도움으로 자소서 작성과 학생부 보충을 위해 꼭 점검할 내용을 4, 5면에서 알아봅시다.

정태웅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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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31일)
제목: ''그들의 믿음 되게 하소서'’
말씀: 마가복음 2:1~12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복사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SaGa 예배아카데미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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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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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상황에 폭염이 더해지면서 쉽지 않은 기간인 것 같다. 작년 12월에 겪었던 혹독한 겨울에 참 오래간만에 처음이었는데, 오히려 그 겨울이 더 그리워지는 여름이다. 새벽에도 쉽지 않는 열대의 날들을 경험하면서 우리교회 성도님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이 상황들이 그저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더 힘쓰는 자 되기를 기도한다. 상황이 어렵고 마음속에 차오르고 할 때, 가끔 이 상황들에 대해서 입을 열어서 고백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에게 골리앗은 다윗이 반드시 밝고 지나가야 될 길들 주에 하나였듯이, 코로나와 폭염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르심 속에서 반드시 밟고 지나가야 할 길들 중에 하나임을 믿는다. 계속 상황들에서 우리가 움츠려드는 것이 아니라, 상황들에 대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 가운데 참으로 필요한 때이다.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토비새예배 때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처음 그 표현을 접했을 때, 그 단어는 저에게 생소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저의 마음을 저의 마음으 사로잡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주일예배를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혼자 생각하면서 보통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 담임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흔한 일인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도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성도님들이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교회를 오는데 성도님들이 교회에 주차장만 들어서도 주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21년 전에 남가주토비새를 처음 접해서 그런 생소한 표현이 그때 생소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처음 예배에 참여했을 때, 왜 그렇게 토요 날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주일예배에 나타나는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가 감격스러웠고, 대표 기도를 하시는 분의 그 기도의 센텐스 끝에 제 주위의 앉아있는 성도님들이 대답하면서 ‘네 주님 그렇게 해주세요.. 네 주님 그렇게 붙들어 주세요.’라고 했다. 그 진심어린 그 고백이 저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렇게 온라인이지만, 주중 교회 집회에 신실하게 참여하여 마음을 모아 예배하는 우리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격리 중에 집에서 예배를 드려보니까 토비새 같은 경우 주위 층간이 신경이 쓰이고, 또 모처럼 주말에 이웃에게 방해가 될까 해서 생중계를 크게 켜지 못하고 찬양을 따라 하기도 그랬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여러분이 1년이 넘도록 여기까지 함께 해 오신 정성과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보인다. 오늘 아침에 온라인으로 들어오신 여러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교회 모든 주역들임을 믿는다.
찬송가 중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인도 하셨네. ~,,, 문들아 들을 지어다~~영광의 왕께~, 왕께 만세.. 위대하신 주!~~♪

 
본문에 2절에 보면,
*마가복음 2:2절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 그 많은 사람들은 바로


*마가복음 1:45절에,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 그 사람들이란,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것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그 모인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엄청난 치유를 베푸시는 주님을 믿고 알기 원하는 것보다는 당장 자신의 육신의 현실적인 필요가 절실한 사람들일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 예수님을 바라고 모인 자들일 것이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그 누구도 행하지 못하던 나병환자를 치유하고 어눌한 자의 귀를 열고 눈 먼 자를 치유하셨는지를, 나의 문제만 모든 초점에 맞추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이 삶이 무너져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정말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찾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저에게는 사치였다.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나 힘든 상황으로부터 해방을 받으면, 만약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던 시기였다.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그때에, 그 끝에 인간을 만드셔서 각 사람을 향해 너무나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또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동정녀 몸에서 나셔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이 죄가 하나도 없으신 그분이 그 십자가에 오르셔서 인간의 죄로 인한 그 엄청난 진노의 잔을 담당하신 그 사랑을 아는 것보다는 당장 내가 사는 인생의 절박한 해결사로만 모시는 그런 수준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은혜가 있어서 예수전도 단이라고 하는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받고 예배자의 삶을 살면서 바로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
 
적어도 오늘 아침에 이 토비새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을 우리 삶에 여전히 도전이 있지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의지 하면서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이 예배자로 참석하신 줄 믿는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자신의 문제로만 함몰되어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여전히 자신의 약점들, 상처, 내가 여전히 미워하는 그 사람,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에 대한 감정들이 내 마음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현재를 온전히 사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과거 속에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다. 출석하면서 우리가 아닌 오직 ‘내가’, 내가 은혜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찬양을 하면 따라하고 내가 좋아하는 곡이 아니면 말고, 교회를 오래 출석했지만 섬기는 것과 봉사하는 기쁨보다는 그저 내가 은혜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그 삶이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제가 섬기던 어떤 교회에서 본당 주차 시설이 700대였는데 이미 주차장이 다 차버리고 그래서 주차를 섬기는 성도님들이 교회 정문 앞에서 이미 다 찼다고 Full이라고 써놓고 다른 주차장으로 가시라고 안내를 해도 그래도 밀고 들어오는 성도들이 있었다. 주차를 섬기시는 분들이 너무 놀란 것이다. 그 차를 멈추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멈추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 여러 번 있는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가 우리 중심에 삶을 살고 있는지 정말 우리가 속한 영적 공동체에 유익을 위해서 책임을 감당하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그날 설교나 찬양팀 찬양, 퍼포먼스나 연주에 의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니 또 한 그룹이 있다.
*마가복음 2:6절에,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본문에 나온다. 서기관이라고 부르는데 이 신약시대에 율법학자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의 위선과 외식, 간사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3~7에,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과 연관된 모든 기득권을 챙기기 위해서 종교의 탈을 쓰고 회칠한 무덤으로 살아가던 종교 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삶의 현장이었기에 종교지도들을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이 그들이 살면서 더 중요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도 알아보지 못하는 육적인 종교인들이었다. 예수님의 생명, 설령의 인도, 이런 것보다는 알지 못하면서 오직 자기들의 위치를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을 부리기만 하는 자들이고 마치 교회 오래 다닌 것이 오히려 자기들의 계급장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결국 주님의 음성보다는 자신의 목소리가 더 커진 사람들이었다. 누가 조금만 다른 의견을 표현하면 마치 자기를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하는 서기관들이었다.
 
 
*이사야 35:5-6절에,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영적인 실체와 권능이신 메시아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종교인들이었다. 저도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이 말씀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제가 50이 되었을 때에 희한한 경험을 했다. 사역도 많이 하고 예배음악을 많이 가르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성숙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중견나이가 되었으니까 대부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제자신이 진실 되이 틀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저는 정말 진실했다. 그 아이디어와 정말 진실되이 믿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이가 들수록 특징 중에 하나는 우리의 사고가 굳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 저 자신을 믿지 않는다. 정말 믿은 것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그래서 자주나이가 들수록 정말 주님께 간절하고 진실되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의 빛을 제 영혼에 비추어주시옵소서’ 정말 서기관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고 언제든지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으니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빛을 비추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어느 날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의 나눔을 접하게 되었다. 그분은 늦은 나이에 목사님이 되셔서 소매치기나 길거리 방황하는 아이들을 계속해서 섬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교회 담임목사님이 되게 하시고 참 아름다운 삶을 사시고 참 존경하는 분 중에 목사님이시다. 그분이 설교 중에 말씀을 하시는데, 본인이 본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본당 문이 열리는 인기척을 듣고서 그냥 나가면 되는데, 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나니까 다시 그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했다면서 자신을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설교를 통해서 고백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거짓말한 자들일 것이다. 이런 부분들에 주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 마음보다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를 소원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레미야 17:9절에,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들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찬송가 중에 446장에 보면, ‘주 음성 외에는 참 기쁨 없도다.’ 너무나 귀한 찬양이다. 그 후렴에 보면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로 번역되어 있다. 찬양인도 단을 섬기면서 여러 곡들을 번역했다. 그중에 특별히 이 찬송에 후렴부분은 영어가사와 상당히 거리가 먼 번역으로 되어 있다. 영어가사에는
 
“I need Thee, O I need Thee; Even hour I need Thee!” = 내 삶의 순간마다 함께 하옵소서.
“ Every hour I need Thee” = 함께 하옵소서
“O bless me now, my Savior, I come to Thee.” =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매 시간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내가 주께로 가오니 구세주여 복 주옵소서.~!! 정말 이 가사의 이름대로 우리가 정말 솔직 한다면 내 주님, 매 시간마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인정을 더 구하게 되고 사람의 인정을 그리워하게 되는 연약함이 내 삶 속에서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사처럼 오늘만 이 후렴 부분을 불러보자.
 
 
-그 다음에 나오는 성경에는 ‘중풍병자’이다.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해서 중풍 혹 즉 뇌졸중이 와도 시간 내에 병원에 가면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는 것을 피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 중풍이 정말 어려운 병이었다. 뇌졸중은 몸이 마비되기 때문에 평생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 마음에 답답함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 당시에는 매독이라는 성병도 그렇다. 오늘날처럼 항생제도 없으니 병이 오래될 경우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중풍을 걸리게 하는 주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이 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죄책감으로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중풍병자의 모습이 우리 삶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끊고는 싶은데 자기 힘으로 되지 않아서 낙망하는 자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또 우리의 죄로 인해서 죄책감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 질식의 상태일 수 있다. 자신의 형편으로 좌절하고 낙담하고 지쳐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내 모습일 수 있다.
 
또 식어버린 부부의 사랑과 대화 속에서 서로 바라보며 아무런 기대조차 없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상황일 수 있다. 바라볼 때마다 짜증나고 그렇다고 어찌할 수 없고 사사건건 부딪히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고 하면서 살 수도 있다. 내 인생만도 버거운데, 우리에게 말도 못하는 우리의 자녀들의 방황과 상황들, 수없이 상처받고 멍들어버린 부모님들의 마음일 수 있다. 상황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 삶을 살아오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떤 시기에 겪었던 마음들이기에 정말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 때 아픔들이 기억 속에 남는다. 정말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살고 싶은데, 아이들의 방황과 중독, 그런 것들로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피폐해지고 바로 이런 인생들 가운데서 내 자신이 중풍병자가 되어서 마비 된 것 같은 삶이 마비된 것 같이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그것으로 끝났다면 삶에 소망이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2:3-7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바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중풍병자는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 지붕을 뚫고 통해서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간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인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 어떤 때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가 있다. 그 주님의 임재를 특별하게 약속하신 것이 바로 예배이다.
 
*마태복음 18:20절에,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스스로 살려는 인간의 열망인 절대적인 고독과 불행을 내어던지고 주님 앞에 예배로 나아가는 것이다. 중풍병자의 가장 절박한 필요가 무엇인가? 당연히 중풍 병의 치유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절박한 육신의 필요보다는 주님은 그 중풍병자의 정말 필요한 것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2장에서 그 중풍병자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너의 병만 고치려고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질병의 문제는 언제든 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너의 안에 있는 모든 죄책감, 두려움 자체를 나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모든 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가 읽게 되면 그것 스트레스의 뿌리는 바로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책감이다. 바로 죄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병을 고치시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에 친구들이 나오는데, 때때로 주안에 있는 자매들과 중보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갈 만큼 인생의 어려운 일들이 닥쳐온다. 이 네 명의 친구들은 우리가 속한 다락방이며, 크게 보면 교회이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참다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에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만 있다면 그 일을 하고자, 대가를 지불하고자하는 친구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락방의 참 모습이다.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다락방의 참 모습이다 찬양 사역부에서 다락방을 섬기면서 암치료중인 교구장님이 최선을 다해서 날마다 카톡에 기도문을 올리시고 순장님들을 격려하고 섬기시는 모습을 보면서 교구장님이 몸이 연약한 상태에서 새벽에 일어나다가 힘을 주다가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안타까운 그런 상황이었는데, 순장님들이 합심하고 기도하고 교구장님을 위로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네 명의 친구들이 바로 순장님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분들이라고 모든 것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중심이 아니고 주님이 중심이기에 살아가는 삶이기에 그렇게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순원 각 사람에 대한 주님의 신뢰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의 치우치고 부족한 믿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믿음과 신뢰를 우리가 알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 서로를 통해서 우리를 깎아 가시고 다듬어 가시는 주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은 깍아 가시고 다듬어 가시지만, 부부 관계가 깎아 가시는 관계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하겠다. 그래서 부부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다듬어 가시고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점점 빛나게 하시는 그런 귀한 계획과 선하심이 있다. 오늘 이 아침에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리가 그 주님의 선하심을 정말 붙들고 소원하길 간절히 바란다.
 
*마가복음 2:5절에,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그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라고 하신다. 항상 예배 때마다 내가 은혜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다. 왜냐면 은혜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 될 때 우리 예배 중에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특별히 토비새에 나온 모든 성도님들,
우리가 온라인으로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여전히 주님은 제한 받지 않으시고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하고 약속하신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우리를 살만하게 하는 것이 많다.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온전하게 예배를 드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 든 우리가 항상 예배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정말 그들의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 교회 가운데 주님은 우리가 가운데 계속해서 주님의 일을 하실 것을 믿는다.
 
전통적인 찬양대는 입례 송, 기도 송, 그다음에 설교 뒤에 3-4분, 이런 것만이 자기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는 벌써 많은 교회가 찬양대가 없어진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지금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찬양대, 찬양 팀, 성도님들은 어떤 것인가? 바로 담임 목사님과 함께 예배의 끝까지 영적 전쟁을 함께 감당하는 찬양 팀 성도들이다. 이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할 때, 예배드리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오늘 아침 특별히 찬양 팀과 찬양대원들 중에서 온라인으로 들어온 찬양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여러분들의 숫자가 몇 명이든지 간에 그들의 믿음이 될 때, 바로 네 사람의 친구가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왔을 때,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꽤 오래된 일이다. 남가주에 있을 때, 예배 기획을 하던 중에 성 금요일 날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를 주셔서 장로님 한 분, 교역자 한 분과 짝을 지어서 본당과 보조 예배 실에 배치를 하고 그날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본인의 질병 또는 가족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받기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그렇게 많은 분들이 질병을 위해 기도하고자 했다. 실질적으로 상황을 볼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이 줄지어서 나오는지, 성령대로 기도를 했는데,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시간을 마치고 성도님들이 좌석으로 돌아갔을 때, 담임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들 중에 인생에 절박한 기도의 제목이 있는 분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거의 80퍼센트 이상이 일어났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은 비 대면으로 주일에 보지는 못하지만, 정말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수요, 토비새예배 때에 겉으로 웃고 있지만 속으로 많이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줄 모른다.
 
한 번은 찬양대 지휘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어떤 여자 성도님이 몸 배 바지를 입고 들어왔다. 그분은 제 옆에 앉아서 보니 백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 내에 그 신발을 뒤집었다 엎었다 했다. 처음에는 ‘이 분이 마음이 어려우시구나!’ 했다. 그래서 그냥 기도했다. 주님 만져주시길 기도했다. 이 분이 정말 울기 시작했다. 그 경험을 하면서 조금 전에 말씀한 성 금요 예배 때에 80퍼센트 성도님들이 일어난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현실이라고 기도했고, 이민자이기에 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주일예배와 모든 예배 가운데 정말 인생에 어려운 가운데를 통과하면서 나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의 문제가 여전히 있지만 우리가 내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마가복음 2장에 약속하신 그들의 믿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런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가 상상치 못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이루어 주실 줄 믿는다. 이런 은혜가 그들의 믿음이 되길 축복한다.


 
♣요약
주님께서 역사의 시대마다 엄청난 도전과 시련들이 있었지만, 코로나 기후변화 그리고 혼란스런 정치적인 상황들 가운데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더 주님 앞에 나아가고 또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삶임을 믿고 감사하며, 주님만을 따라가며, 이 모든 상황을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상황일 때, 우리의 부르심을 더 믿고, 이런 상황에도 그들의 믿음이 되어 희생의 자리, 기쁨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우리 가운데와 교회 가운데 내려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도 주님 앞에서 치유를 받고, 본질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됨과 그 네 명의 친구들처럼, 우리는 주님만 만나게 되면 중풍병자와 친구에게도 임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임재하실 줄 믿는다. 우리도 그들의 믿음이 되어 순종하여 매 순간, 매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자.
 
-이들의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한 불굴의 믿음이었고, 위험을 감수한 담대한 믿음이며, 타인을 위한 이타적 믿음이요, 구원의 열매를 맺은 결실의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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