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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31일)
제목: ''그들의 믿음 되게 하소서'’
말씀: 마가복음 2:1~12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복사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SaGa 예배아카데미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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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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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상황에 폭염이 더해지면서 쉽지 않은 기간인 것 같다. 작년 12월에 겪었던 혹독한 겨울에 참 오래간만에 처음이었는데, 오히려 그 겨울이 더 그리워지는 여름이다. 새벽에도 쉽지 않는 열대의 날들을 경험하면서 우리교회 성도님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이 상황들이 그저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더 힘쓰는 자 되기를 기도한다. 상황이 어렵고 마음속에 차오르고 할 때, 가끔 이 상황들에 대해서 입을 열어서 고백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에게 골리앗은 다윗이 반드시 밝고 지나가야 될 길들 주에 하나였듯이, 코로나와 폭염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르심 속에서 반드시 밟고 지나가야 할 길들 중에 하나임을 믿는다. 계속 상황들에서 우리가 움츠려드는 것이 아니라, 상황들에 대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 가운데 참으로 필요한 때이다.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토비새예배 때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처음 그 표현을 접했을 때, 그 단어는 저에게 생소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저의 마음을 저의 마음으 사로잡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주일예배를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혼자 생각하면서 보통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 담임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흔한 일인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도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성도님들이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교회를 오는데 성도님들이 교회에 주차장만 들어서도 주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21년 전에 남가주토비새를 처음 접해서 그런 생소한 표현이 그때 생소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처음 예배에 참여했을 때, 왜 그렇게 토요 날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주일예배에 나타나는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가 감격스러웠고, 대표 기도를 하시는 분의 그 기도의 센텐스 끝에 제 주위의 앉아있는 성도님들이 대답하면서 ‘네 주님 그렇게 해주세요.. 네 주님 그렇게 붙들어 주세요.’라고 했다. 그 진심어린 그 고백이 저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렇게 온라인이지만, 주중 교회 집회에 신실하게 참여하여 마음을 모아 예배하는 우리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격리 중에 집에서 예배를 드려보니까 토비새 같은 경우 주위 층간이 신경이 쓰이고, 또 모처럼 주말에 이웃에게 방해가 될까 해서 생중계를 크게 켜지 못하고 찬양을 따라 하기도 그랬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여러분이 1년이 넘도록 여기까지 함께 해 오신 정성과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보인다. 오늘 아침에 온라인으로 들어오신 여러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교회 모든 주역들임을 믿는다.
찬송가 중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인도 하셨네. ~,,, 문들아 들을 지어다~~영광의 왕께~, 왕께 만세.. 위대하신 주!~~♪

 
본문에 2절에 보면,
*마가복음 2:2절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 그 많은 사람들은 바로


*마가복음 1:45절에,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 그 사람들이란,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것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그 모인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엄청난 치유를 베푸시는 주님을 믿고 알기 원하는 것보다는 당장 자신의 육신의 현실적인 필요가 절실한 사람들일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 예수님을 바라고 모인 자들일 것이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그 누구도 행하지 못하던 나병환자를 치유하고 어눌한 자의 귀를 열고 눈 먼 자를 치유하셨는지를, 나의 문제만 모든 초점에 맞추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이 삶이 무너져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정말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찾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저에게는 사치였다.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나 힘든 상황으로부터 해방을 받으면, 만약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던 시기였다.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그때에, 그 끝에 인간을 만드셔서 각 사람을 향해 너무나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또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동정녀 몸에서 나셔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이 죄가 하나도 없으신 그분이 그 십자가에 오르셔서 인간의 죄로 인한 그 엄청난 진노의 잔을 담당하신 그 사랑을 아는 것보다는 당장 내가 사는 인생의 절박한 해결사로만 모시는 그런 수준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은혜가 있어서 예수전도 단이라고 하는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받고 예배자의 삶을 살면서 바로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
 
적어도 오늘 아침에 이 토비새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을 우리 삶에 여전히 도전이 있지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의지 하면서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이 예배자로 참석하신 줄 믿는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자신의 문제로만 함몰되어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여전히 자신의 약점들, 상처, 내가 여전히 미워하는 그 사람,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에 대한 감정들이 내 마음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현재를 온전히 사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과거 속에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다. 출석하면서 우리가 아닌 오직 ‘내가’, 내가 은혜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찬양을 하면 따라하고 내가 좋아하는 곡이 아니면 말고, 교회를 오래 출석했지만 섬기는 것과 봉사하는 기쁨보다는 그저 내가 은혜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그 삶이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제가 섬기던 어떤 교회에서 본당 주차 시설이 700대였는데 이미 주차장이 다 차버리고 그래서 주차를 섬기는 성도님들이 교회 정문 앞에서 이미 다 찼다고 Full이라고 써놓고 다른 주차장으로 가시라고 안내를 해도 그래도 밀고 들어오는 성도들이 있었다. 주차를 섬기시는 분들이 너무 놀란 것이다. 그 차를 멈추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멈추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 여러 번 있는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가 우리 중심에 삶을 살고 있는지 정말 우리가 속한 영적 공동체에 유익을 위해서 책임을 감당하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그날 설교나 찬양팀 찬양, 퍼포먼스나 연주에 의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니 또 한 그룹이 있다.
*마가복음 2:6절에,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본문에 나온다. 서기관이라고 부르는데 이 신약시대에 율법학자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의 위선과 외식, 간사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3~7에,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과 연관된 모든 기득권을 챙기기 위해서 종교의 탈을 쓰고 회칠한 무덤으로 살아가던 종교 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삶의 현장이었기에 종교지도들을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이 그들이 살면서 더 중요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도 알아보지 못하는 육적인 종교인들이었다. 예수님의 생명, 설령의 인도, 이런 것보다는 알지 못하면서 오직 자기들의 위치를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을 부리기만 하는 자들이고 마치 교회 오래 다닌 것이 오히려 자기들의 계급장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결국 주님의 음성보다는 자신의 목소리가 더 커진 사람들이었다. 누가 조금만 다른 의견을 표현하면 마치 자기를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하는 서기관들이었다.
 
 
*이사야 35:5-6절에,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영적인 실체와 권능이신 메시아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종교인들이었다. 저도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이 말씀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제가 50이 되었을 때에 희한한 경험을 했다. 사역도 많이 하고 예배음악을 많이 가르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성숙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중견나이가 되었으니까 대부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제자신이 진실 되이 틀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저는 정말 진실했다. 그 아이디어와 정말 진실되이 믿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이가 들수록 특징 중에 하나는 우리의 사고가 굳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 저 자신을 믿지 않는다. 정말 믿은 것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그래서 자주나이가 들수록 정말 주님께 간절하고 진실되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의 빛을 제 영혼에 비추어주시옵소서’ 정말 서기관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고 언제든지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으니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빛을 비추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어느 날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의 나눔을 접하게 되었다. 그분은 늦은 나이에 목사님이 되셔서 소매치기나 길거리 방황하는 아이들을 계속해서 섬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교회 담임목사님이 되게 하시고 참 아름다운 삶을 사시고 참 존경하는 분 중에 목사님이시다. 그분이 설교 중에 말씀을 하시는데, 본인이 본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본당 문이 열리는 인기척을 듣고서 그냥 나가면 되는데, 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나니까 다시 그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했다면서 자신을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설교를 통해서 고백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거짓말한 자들일 것이다. 이런 부분들에 주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 마음보다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를 소원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레미야 17:9절에,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들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찬송가 중에 446장에 보면, ‘주 음성 외에는 참 기쁨 없도다.’ 너무나 귀한 찬양이다. 그 후렴에 보면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로 번역되어 있다. 찬양인도 단을 섬기면서 여러 곡들을 번역했다. 그중에 특별히 이 찬송에 후렴부분은 영어가사와 상당히 거리가 먼 번역으로 되어 있다. 영어가사에는
 
“I need Thee, O I need Thee; Even hour I need Thee!” = 내 삶의 순간마다 함께 하옵소서.
“ Every hour I need Thee” = 함께 하옵소서
“O bless me now, my Savior, I come to Thee.” =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매 시간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내가 주께로 가오니 구세주여 복 주옵소서.~!! 정말 이 가사의 이름대로 우리가 정말 솔직 한다면 내 주님, 매 시간마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인정을 더 구하게 되고 사람의 인정을 그리워하게 되는 연약함이 내 삶 속에서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사처럼 오늘만 이 후렴 부분을 불러보자.
 
 
-그 다음에 나오는 성경에는 ‘중풍병자’이다.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해서 중풍 혹 즉 뇌졸중이 와도 시간 내에 병원에 가면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는 것을 피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 중풍이 정말 어려운 병이었다. 뇌졸중은 몸이 마비되기 때문에 평생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 마음에 답답함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 당시에는 매독이라는 성병도 그렇다. 오늘날처럼 항생제도 없으니 병이 오래될 경우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중풍을 걸리게 하는 주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이 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죄책감으로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중풍병자의 모습이 우리 삶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끊고는 싶은데 자기 힘으로 되지 않아서 낙망하는 자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또 우리의 죄로 인해서 죄책감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 질식의 상태일 수 있다. 자신의 형편으로 좌절하고 낙담하고 지쳐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내 모습일 수 있다.
 
또 식어버린 부부의 사랑과 대화 속에서 서로 바라보며 아무런 기대조차 없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상황일 수 있다. 바라볼 때마다 짜증나고 그렇다고 어찌할 수 없고 사사건건 부딪히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고 하면서 살 수도 있다. 내 인생만도 버거운데, 우리에게 말도 못하는 우리의 자녀들의 방황과 상황들, 수없이 상처받고 멍들어버린 부모님들의 마음일 수 있다. 상황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 삶을 살아오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떤 시기에 겪었던 마음들이기에 정말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 때 아픔들이 기억 속에 남는다. 정말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살고 싶은데, 아이들의 방황과 중독, 그런 것들로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피폐해지고 바로 이런 인생들 가운데서 내 자신이 중풍병자가 되어서 마비 된 것 같은 삶이 마비된 것 같이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그것으로 끝났다면 삶에 소망이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2:3-7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바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중풍병자는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 지붕을 뚫고 통해서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간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인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 어떤 때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가 있다. 그 주님의 임재를 특별하게 약속하신 것이 바로 예배이다.
 
*마태복음 18:20절에,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스스로 살려는 인간의 열망인 절대적인 고독과 불행을 내어던지고 주님 앞에 예배로 나아가는 것이다. 중풍병자의 가장 절박한 필요가 무엇인가? 당연히 중풍 병의 치유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절박한 육신의 필요보다는 주님은 그 중풍병자의 정말 필요한 것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2장에서 그 중풍병자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너의 병만 고치려고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질병의 문제는 언제든 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너의 안에 있는 모든 죄책감, 두려움 자체를 나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모든 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가 읽게 되면 그것 스트레스의 뿌리는 바로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책감이다. 바로 죄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병을 고치시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에 친구들이 나오는데, 때때로 주안에 있는 자매들과 중보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갈 만큼 인생의 어려운 일들이 닥쳐온다. 이 네 명의 친구들은 우리가 속한 다락방이며, 크게 보면 교회이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참다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에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만 있다면 그 일을 하고자, 대가를 지불하고자하는 친구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락방의 참 모습이다.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다락방의 참 모습이다 찬양 사역부에서 다락방을 섬기면서 암치료중인 교구장님이 최선을 다해서 날마다 카톡에 기도문을 올리시고 순장님들을 격려하고 섬기시는 모습을 보면서 교구장님이 몸이 연약한 상태에서 새벽에 일어나다가 힘을 주다가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안타까운 그런 상황이었는데, 순장님들이 합심하고 기도하고 교구장님을 위로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네 명의 친구들이 바로 순장님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분들이라고 모든 것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중심이 아니고 주님이 중심이기에 살아가는 삶이기에 그렇게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순원 각 사람에 대한 주님의 신뢰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의 치우치고 부족한 믿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믿음과 신뢰를 우리가 알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 서로를 통해서 우리를 깎아 가시고 다듬어 가시는 주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은 깍아 가시고 다듬어 가시지만, 부부 관계가 깎아 가시는 관계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하겠다. 그래서 부부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다듬어 가시고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점점 빛나게 하시는 그런 귀한 계획과 선하심이 있다. 오늘 이 아침에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리가 그 주님의 선하심을 정말 붙들고 소원하길 간절히 바란다.
 
*마가복음 2:5절에,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그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라고 하신다. 항상 예배 때마다 내가 은혜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다. 왜냐면 은혜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 될 때 우리 예배 중에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특별히 토비새에 나온 모든 성도님들,
우리가 온라인으로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여전히 주님은 제한 받지 않으시고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하고 약속하신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우리를 살만하게 하는 것이 많다.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온전하게 예배를 드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 든 우리가 항상 예배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정말 그들의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 교회 가운데 주님은 우리가 가운데 계속해서 주님의 일을 하실 것을 믿는다.
 
전통적인 찬양대는 입례 송, 기도 송, 그다음에 설교 뒤에 3-4분, 이런 것만이 자기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는 벌써 많은 교회가 찬양대가 없어진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지금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찬양대, 찬양 팀, 성도님들은 어떤 것인가? 바로 담임 목사님과 함께 예배의 끝까지 영적 전쟁을 함께 감당하는 찬양 팀 성도들이다. 이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할 때, 예배드리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오늘 아침 특별히 찬양 팀과 찬양대원들 중에서 온라인으로 들어온 찬양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여러분들의 숫자가 몇 명이든지 간에 그들의 믿음이 될 때, 바로 네 사람의 친구가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왔을 때,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꽤 오래된 일이다. 남가주에 있을 때, 예배 기획을 하던 중에 성 금요일 날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를 주셔서 장로님 한 분, 교역자 한 분과 짝을 지어서 본당과 보조 예배 실에 배치를 하고 그날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본인의 질병 또는 가족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받기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그렇게 많은 분들이 질병을 위해 기도하고자 했다. 실질적으로 상황을 볼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이 줄지어서 나오는지, 성령대로 기도를 했는데,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시간을 마치고 성도님들이 좌석으로 돌아갔을 때, 담임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들 중에 인생에 절박한 기도의 제목이 있는 분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거의 80퍼센트 이상이 일어났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은 비 대면으로 주일에 보지는 못하지만, 정말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수요, 토비새예배 때에 겉으로 웃고 있지만 속으로 많이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줄 모른다.
 
한 번은 찬양대 지휘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어떤 여자 성도님이 몸 배 바지를 입고 들어왔다. 그분은 제 옆에 앉아서 보니 백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 내에 그 신발을 뒤집었다 엎었다 했다. 처음에는 ‘이 분이 마음이 어려우시구나!’ 했다. 그래서 그냥 기도했다. 주님 만져주시길 기도했다. 이 분이 정말 울기 시작했다. 그 경험을 하면서 조금 전에 말씀한 성 금요 예배 때에 80퍼센트 성도님들이 일어난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현실이라고 기도했고, 이민자이기에 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주일예배와 모든 예배 가운데 정말 인생에 어려운 가운데를 통과하면서 나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의 문제가 여전히 있지만 우리가 내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마가복음 2장에 약속하신 그들의 믿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런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가 상상치 못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이루어 주실 줄 믿는다. 이런 은혜가 그들의 믿음이 되길 축복한다.


 
♣요약
주님께서 역사의 시대마다 엄청난 도전과 시련들이 있었지만, 코로나 기후변화 그리고 혼란스런 정치적인 상황들 가운데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더 주님 앞에 나아가고 또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삶임을 믿고 감사하며, 주님만을 따라가며, 이 모든 상황을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상황일 때, 우리의 부르심을 더 믿고, 이런 상황에도 그들의 믿음이 되어 희생의 자리, 기쁨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우리 가운데와 교회 가운데 내려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도 주님 앞에서 치유를 받고, 본질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됨과 그 네 명의 친구들처럼, 우리는 주님만 만나게 되면 중풍병자와 친구에게도 임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임재하실 줄 믿는다. 우리도 그들의 믿음이 되어 순종하여 매 순간, 매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자.
 
-이들의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한 불굴의 믿음이었고, 위험을 감수한 담대한 믿음이며, 타인을 위한 이타적 믿음이요, 구원의 열매를 맺은 결실의 믿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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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7월 28일)
제목:  "예수를 통해 만나를 맛보다"
말씀: 요한복음 6:47~51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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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47~51,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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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요리를 드셨나요? 늘 먹던 저녁이라 특별한 것이 없나요? 근래에 먹은 음식 중에 특별한 요리가 무엇인가? 잊을 수 없는 음식일 수 있다. 음식은 참 중요하다. 왜냐하면 음식은 우리의 몸의 중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에너지원이며, 우리의 정서적인 에너지원이 되기 때문이다. 좋은 추억이나 좋은 친구, 좋은 여행에는 항상 좋음 음식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것처럼 음식이 정말 중요하다. 최근 저에게 좋은 음식하면 떠오른 분이 한 분이 있다. 그분은 얼마전 작고하신 故 임지호 쉐프라는 분이다. 사람들은 이분을 방락식객이라고 부른다, 그는 잔디나 잡초, 나무의 뿌리, 이끼 등, 자연 그대로 채취를 해서 사람들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그들의 텅 빈 마음을 채워주는 요리를 해주셨다. 그분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한 분이 있다. ‘그리움으로 짓고 진심으로 눌러 담아 정성껏 차린 한 상차림, 밥으로 인생을 나누는 참맛’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참맛을 느끼게 하는 이 밥은 맛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분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한 요리 연구가는 이분을 가리켜서 ‘밥그릇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채워주는 자’라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분을 만나고 싶어 하는가? 대화하고, 요리를 먹고 싶어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부족할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없는 게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모두가 채울 수 없는 마음의 허기를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든 우리가 허기를 달랠 수만 있다면, 사람이든 음식이든, 정서적인 만족감을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 사람, 솔로몬은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표현 한다.
 
*전도서 1:8절에 보면,
8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 이 땅에는 만족함이 없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아무리 좋은 것을 들어도, 그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없다. 독일 시인 - 칼 부세 (Carl Busse 1872∼1918)는 ‘행복이란 산 머너에 있는 것이라서 평생을 찾아다닐지라도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며, 그런 행복을 찾아다니는 존재가 우리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분명히 믿는다. 우리 하나님 안에 참 만족이 있다는 것을,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텅빈 영혼과 마음을 채워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를 베푸신 그 기적의 사건 다음날 친히 말씀하신 내용이다. 저는 이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면 큰 은혜가 되고 위로를 얻는다. 이 오병이어가 있기 전에 무슨 일이 있는가? 바로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너무나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세례요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실 예수를 예비하신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너무도 비참하게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죽음을 통해 낙심하고 두려워했던가?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수만 명을 먹이시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복음은 여전히 살아있고, 복음은 세상을 여전히 이긴다는 것을 친히 보여주신 우리 주님, 그 사건이 바로 오병이어기기에 저는 이 오병이어를 통해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모든 복음서의 기자들이 잘 기록해 주었다. 그런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우리의 오늘 본문을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오병이어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전능자이시며, 우리를 물리적인 필요를 넉넉히 채워주신 분임을 우리가 보았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물리적인 필요주시는 예수님을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주님은 “내가 너희의 영혼을 영원토록 채워줄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이 땅에서 목마름뿐만 아니라, 너의 영혼을 영원토록 채워줄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주님이 주시는 깊은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를 경험하기를 바란다.
 
출애굽기 16장에 나타나는 만나를 살펴보자.
-왜냐하면 구원계시의 연속선상에서 바로 우리 예수님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광야의 생명양식이었던 만나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양식이 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에 이 만나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란 어떤면이 있는가를 살표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우리 주님을 맛보길 소망한다.

 
I. 첫 번째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충만함이다.
 
*출애굽기 16:13-14절에 보면,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 만나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광야의 지면에 있다고 한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오병이어는 빈들에서 생긴 사건이고, 만나는 광야가운데 덮여있다. 이 장소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바로 먹을 것이 있지 않는 없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심을 수 없는 곳이 광야이고, 그렇기에 그 광야를 통해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광야의 온 지면에 이슬처럼 만나를 내려 주셨다. 하나님은 광야를 덮고 있는 만나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는 어느 곳이나 충만하다.”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광야 가운데 충만한가? 우리는 이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다스리심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애굽에도 오늘 이곳 광야에도 앞으로 나아갈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동일하게 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떠한가? 우리 주님을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 이렇게 기록한다.
 
*요한복음 6:33절에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즉 예수님은 온 세상 가운데 충만하다. 세상 가운데 빛으로 오셨으나 그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이 그 빛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으로 이 세상을 비추신다. 비록 그곳이 광야일지라도 그곳이 광야를 덮고 있는 만나처럼, 그곳이 비록 죄악 된 세상일지라도 그 빛 보면 하나님을 두려함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함도 없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통치는 온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하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충만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분야에 다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다. 주님은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고, 주님은 모든 것 위해 다스리신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에서도 코로나로 뒤덮이 이 대한민국 가운데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영원하다.
 
 
II. 두 번째, -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충분하다.
 
*출애굽기 16:18절에,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제 호기심이 나는 많다.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도대체 만나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온 푸드 다이어트도 몸에 무리가 간다고 한다. 사람이 골고루 먹어야지 하는데, 만나 속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40년간 이 만나만 주구장창 먹으라고 하시는가? 만나 가운데 무엇이 들었던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필요하면 주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나를 주셨다면 그것만으로도 광야를 지날 수 있다. 우리 예수님을 살펴보자.
 
*요한복음 6:47~48절에,
47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8절에 정관사 ‘곧’이 쓰여 있다. 여기서 정관사는 ‘오직 나만이 생명의 떡이다’라는 것이다. 정관사를 딱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며, 완전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를 강력하게 도전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만나로만 광야 40년을 버틸 수 있을까? 정말로 이 만나로 살 수 있는가? 나 말고는 생명이 없고, 내가 아니고서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가를 생각해 본다. 다른 것이 없어도 이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갈 수 있을까? 누가 그러더군요. 서울은 서서 우는 곳이라고 한다. 정말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용할 양식이라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라면 과연 나는 그것만으로 살 수 있는가?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고 한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한 가지를 명확하게 깨닫게 하신다. 척박한 광야 길을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정말로 의지하게 되었다. 다른 모든 가능성이 닫혀있다. 하나님 밖에는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양식을 받을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는 이 하루를 살 수 없기에 절대적인 빈곤과 무기력 가운데에서 그들은 진정한 믿음과 신앙을 깨닫게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으면 한 가지는 명확해진다. 다른 길은 닫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이 열리고,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진리가 되시고, 우리의 답이 되심을 정말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III. 세 번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날마다 새롭다.
 
*출애굽기 16:21절에,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의 은혜이다. 은혜는 현재적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거 속에 갇혀 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오늘 살아계시므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오늘 우리에게 만나를 주시며 오늘 우리를 살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고를 만들라고 하시지 않는다. 내일 먹을 것을 저축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그날의 그 신선한 만나를 매일같이 새벽배송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날의 은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 6:51절에 보면,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지금 살아 있다 라고 하신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역사하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주님을 매일마다 생생하게 경험해야 한다. 소금보다 황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금이다. 우리는 오늘 정말로 신선한 것을 먹고 있는지, 살아계신 예수님을 올 해, 이번 달, 아니 이 예배 가운데 정말로 주님을 그렇게 만나고 있는가?
 
모세의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애굽에서 구출되었다. 이 은혜에 감사하다. 얼마나 놀랍고 역사적인 사건인가? 언제 또 그런 일을 경험하겠는가? 수백만이 건넜던 홍해 사건도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예전에 그렇게 감사하고 그렇게 좋았다고 한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 광야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가? 그런데 결코 과거의 은혜에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 우릭 말하곤 한다. 내가 처음 믿을 때, 제자 훈련 때, 사역훈련 때, 나 때는 말이야!!~~라고,,, 주님은 지금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2021년 상반기에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그 온전함의 고봉을 함께 손잡고, 힘차게 걸어왔다. 이 은혜를 잊지 말고 간직하라. 우리 주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이제 앞으로 놓여 진 하반기의 은혜를 준비하자.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들 축구 이겼대!!~ 생생한 소식이 도쿄에서 소식이 들린다. 순장님 중에는 그곳에 가셔서 음식으로 섬기고 계신 분도 있다. 그런 것처럼 생생한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처럼 생생한 은혜가 우리 가운데 영혼을 살찌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소원한다.

 
IV 네 번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달콤하다.
 
*출애굽기 16:31,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 이 만나는 맛이 어떠한가? 맛이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맛이다. 샘표 간장 같은 것이다. 맛을 보아야만 맛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하늘에 만든 것이니 하늘의 맛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만나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나님, 아무것도 소확할 수 없는 땅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40년간 한 결 같이 내려주신 이 만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감히 이 만나를 맛으로 표현하겠는가? 예수님의 넓은 사랑은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은 알도다...
점입가경(漸入佳境-차차 재미있는 경지로 들어감)이라는 말이 있다. 경치를 더한다. 절경은 오를수록 그 멋을 더한다는데 오르지 않고는 말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광야를 걷고 있다할지라도 이 광야에서만 맛을 볼 수 있는 오늘의 만나가 너무도 달콤하고 맛있는 만나가 매일처럼 주어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맛을 보기를 바란다. 본문을 보면,
 
*요한복음 6:50절에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시고, 그분의 권세는 하늘에서 말미암았다고 하신다. 세상에는 없다. 누구를 만나도 어디를 가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며 그 맛이 하늘의 맛이다.
 
 
※임지호씨와 함께 출연한 패널들에게 그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이렇게 표현한다. 태어나서 처음 먹는 음식이라고 표현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로 나아오라, 그리스도께 나아와 그분의 손을 잡고 옷자락을 붙잡고 그분과 걷고, 그분의 살과 피를 들어야 한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역사시면 세상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위로가 경험될 줄 믿는다.


V. 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중단되지 않는다.
 
*출애굽기 16:35절에,
35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너무 감사하다. 충만한 은혜, 새로운 은혜, 달콤한 은혜, 그중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모자라도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신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랬는가?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다. 정성껏 아침을 차려주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얄미운 자녀가 있다. 그래도 엄마는 한 숟가락을 더 먹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광야가 힘들지, 너의 아품과 눈물도 수고도 잊지 않고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새벽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면, 언제나 만나를 내려주신다.


*요한복음 6:51절에 보면,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너무 감사하다. 충만한 은혜, 충분한 은혜, 새로운 은혜, 달콤한 은혜, 그중에서 단연, 가장 값진 은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이다. 우리가 부족해도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늘 한결 같았는가? 아니다.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을 동일하게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늘 부족했다. 하나님을 외면하기도 했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고, 함께하고, 여기에 계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을 해도 이스라엘이 백성은 더 달라고만 했다. 결국은 금을 녹여 송아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까지 만나를 주신다는 것인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데까지 곡식을 재배하고, 수확할 수 있는 곳에 닿을 때까지 만나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정성껏 아침을 차려주어도 안 먹는다는 자녀가 있다. 다른 것은 없냐고 하는 얄미워도 엄마는 더 먹으라고 한다. 이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광야가 힘들지만 포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의 아픔과 눈물도, 수고도 모두를 잊지 않고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만나를 내려 주신다. 아들아, 딸아, 더 먹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로 먹이기시l에 우리는 반드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6:51절에 보면,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떡을 먹으면 영생한다는 것은 떡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먹었을 때 어떤 독성이 있어서 먹기만 하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는 순간 관계가 깨어진 것처럼, 이 생명의 떡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은 영원히 유효하시게 하신다. 영원히,,, 우리는 모든 것을 얻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님은 부족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삶은 죄악으로 얼룩져 있을지라도 주님의 희생은 고결하다. 우리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우리는 의와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가나안 접경에 이를 때까지 만나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께서 길을 잃지 않도록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임지호씨는 그와 함께 티브이에 출연했던 칼럼니스트가, 이런 말을 했다. ‘임지호씨는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 ’손님이 먹을 음식으로 요리를 한 것이니 먹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것은 요리사의 정신 자세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식당 밖에서도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서 깨달았다. 그는 요리사가 아니고 그느 우리의 할머니이시고, 어머니였다. 우리를 먹이려고 기다린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임지호쉐프는 요리를 통해서 사람을 사랑했던 것이다. 참 좋은 분이었다. 그렇지만, 임지호 쉐프와 비교가 안 되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죽음을 선택하신 주님, 우리의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시기 위해 단번에 죽으심으로 영원토록 우리의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식은 부모의 등골 빼 먹는다. 우리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영 가족에게 도전한다. 혹여나 과거에 은혜에 갇혀살지 말고 우리에게 주시는 신선한 은혜를 놓치지 말고 살아야 한다. 체면, 자존심, 인정할 수 없었던 영적인 무감각, 갈증, 목마름, 주님이 없어 텅 빈 마음이 있다면, 그런 내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의 거울에 우리의 영혼을 비추어보아야 한다. 과연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의 만나로 잘 유지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치열한 영적 전쟁 가운데 피투성이가 되었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라. 주님의 품으로 돌아와서 그 깨진 나의 마음에 그 조각들을 하나씩 주님 안에서 회복될 것이다. 주님은 인도하시고 용서하신다. 주님은 오늘도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 안에 거할 때에 신앙의 맛을 맛보게 된다. 주님은 그렇게 회복하게 하실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약
주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떡이심을 믿는다. 지금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드리길 소망하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충만함과, 충분함과 날마다 새로우시며, 달콤하며 그리고 중단되지 않음을 믿고 주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귀하게 받아서 과거에 갇히지 말고 회복되어 신앙의 맛을 맛보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도록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 만나를 맛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는 비유 안에는 영생의 비밀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살렸던 만나와 비유된다. 하지만 만나는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했다. 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자는 현재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 생명을 소유하고 유지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살은 세상의 생명을 살리는 구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적인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시다.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 적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분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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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24일)
제목: ''새 계명, 사랑의 온전함''
말씀: 요한복음 13:30~35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홍장 선교사님(러시아, DMI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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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0-35,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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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장 선교사님(러시아, 전 DMI 대표).
-지난주에 너무 큰 은혜를 많이 누렸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밝게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누렸는데, 오늘은 큰 은혜를 못 누리더라도 설교를 못하지만 큰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다. 제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가진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제가 설교를 잘한다고 해서 가치가 올라가거나 못한다고 해서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먼저 성경에 주요한 태초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태초’이며, 이것이 가장 ‘태초’를 말씀이 물론 아니다. 가장 오래된 태초‘는 요한복음 1:1절에 나온다.
 
*요한복음 1:1절에,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태초’라는 것은 하나님만 계시던 때를 말씀하는 것이며, 이 때 말씀이 계셨다.는 것은 말씀이 ‘하나님’이시다. 라는 선언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엄청난 선언이시다. 이 말씀과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니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느껴지지만 ‘함께’라는 말을 찾아보면, 헬라어로 프러스라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냐면 영어로는 Indeed fellowship with, 이 성자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깊은 친밀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지만 별로 강조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세 분은 어마어마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인간창조의 하나의 단서를 주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실 때 그것이 단순히 그냥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분명이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은 아담과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 그 사랑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을 아담이 누리게 하는 그런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셨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아담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창세기 보면 사랑은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이 혼자서 아무리 누리더라도 사랑의 대상이 있어서 주고받을 때에, 그 엄청난 행복은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은 20세기 초 실존주의 철학이 있다.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던져진 존재다.’ 그렇지 않다.
 
*잠언 8:31절에 보면,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주어는 지혜이지만, 지혜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니, 함께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직까지 땅은 만들어졌는데, 거처할 것은 아직까지 인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거기서 하나님께선 굉장히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하셨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제 만들어질 사람으로 인해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쁨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기대 가운데, 존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깊은 사랑, 표현할 수 없는 그 친밀함을 통해서 행복을 전제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좋았다’라는 의미의 뜻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에,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과 깊은 친밀함을 나누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져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우리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그러니 인격을 주셨다. 인격에는 지, 정, 의 세 개가 요소가 있다. 그것은 사랑의 지적인 차원, 사랑의 정적인 차원, 사랑의 의지적인 차원을 다 누리게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복음 13:30절에,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본문은 이 시점을 알라는 것이다. 시점이 마지막 만찬이다. 이제 가롯 유다가 떡 한 쪽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기 위해 나가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시기 바로 직전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그 말씀은 ‘새 계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 내용이 새 계명인데 ‘사랑하라’이다. 사랑이란 말은 신명기에도 나오고 자주 나오는 말씀이다. 그러면 왜 새 계명이 되냐면, 지금까지 있던 사랑을 왜 여기서 다시 새 계명이라고 그것을 바꾸어서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기 전인, 이 시점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굉장한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는 율법시대가 끝나고 은혜의 시대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나라가 끝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시대이고 하나님 나라의 여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새 계명은 새로운 차원이다.’ 지금까지 율법시대에서 갇혔다가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걸 새로운 차원을 알려면, 이제 율번시대가 언제이고 율법시대를 알아야 한다. 그 시대는 인간이 타락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혼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잣대를 주신 것이다. 모든 행위를 율법에 비추어봐서 잘못되면 고치고 치우쳤으면 다시 돌아가지 않게 해주시는 것이 율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행실을 율법에 비춰보게 되어있다. 그런데 율법에 비추어봐서 어떤 판단이 나오면,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38절에,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눈을 다치게 한 손은 그 눈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남의 일을 그르치면 자기를 내 놓아야 한다. 이것이 율법이다.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어떤 사람이 사랑스런 일을 하면 사랑을 하는 것이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하면 미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율법에서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사랑은 행위라는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에게 선하게 잘 대해주면 선한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살지 못하면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래서 선과 악의 판단인 그 기반위에 서있다. 그래서 우리가 ‘선악과’를 율법이라고 가르키며 말하기도 한다. 물론 구약에서도 이런 선한 경우를 벗어난 것을 말씀하신다. 호세아를 보면 알 수 있다.
 
*호세아 3:1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여기서 나오는 사랑은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여인이 가서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고 음행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보통 율법에 한계 안에 갇힌 사람들은 율법에 판단, 율법의 판단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시실은 그 하나님 말씀 안에는 이 예수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율법의 눈을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을 가지고 율법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그 무한한 갇혀있는 자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주관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율법시대와 이스라엘 나라의 한계였다. 그 제자들도 이 시점이 오기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그 이스라엘을 나라를 알지만, 하나님 나라를 듣기만 했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 먼 나라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부르지 않고 그때는 야훼라고 불렀고, 하나님의 관한 것은 그렇게 멀게만 생각하고 자신들과 상관없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는 지금 로마의 통치에서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회복하기엔 정말 급박한 현실이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한복음 12:16절을 보면,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제자들도 사실은 예수님 같은 직감을 받으면 바로 깨달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 성령께서 오셔서 가르치기 전까지는 몰랐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니 생각을 해보니 그때를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제 부활하셨다가 승천하시려고 하는 순간 ‘예수님의 나라가 이때이니이까?’라고 묻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나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뒤에 부활한다는 것을 들었을 때에, 사실 돌아가신다는 것은 귀에 들어왔어도 부활하신다는 것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사실 제자들의 삶은 꽤 살만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다 버렸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수만 명이 예수님을 만져보려고 난리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문등병자, 눈먼 자, 앉은뱅이를 고치시는 그 영광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니네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것이 할 만한 것이다. 뭐 베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뭐가 부족하셔서 그런가 했다. 사역이 안 되는 것이 없고 나타나시면 말할 수 없이 모여드는데, 그 당시 수만 명이 지금의 수십만 명이다. 예수님의 아무리 1대 제자라도 성령님께서 그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가 되어서 헌금도 많이 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 나라의 사랑은, 율법시대 나라와 그 사랑이 다르다. 성령시대의 사랑은 율법시대 사랑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힌트를 주신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는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가?
우리가 예수님의 원수였을 때에,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죽음에 처에 있을 때에, 그때 우리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시고, 그래서 죽음은 예수님이 맞으시고 생명은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 시점, 이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열기 전에는 이 말씀이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옛날에 율법적인 것, 그때가 아니라 이제는 새 나라가 시작되고, 새 사랑이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을 잠시 보겠다.
 
*요한복음 15:12~13절을 보면,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예수님께서는 친구만을 위해서 버리셨다고 하신다. 우리가 원수를 위해서 버리신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을 가장 최초로 실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하나님 나라가 열리면서 가장 최초로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들과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임하면 모든 관계가 바뀐다.
 
*요한복음 15:14~15절에 보면,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이란 윗사람 앞에서 편한 경우가 거의 없다. 직장 생활에서도 그렇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 잘 보이는 것도 편하지 않다. 그런데 친구는 무엇인가?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아이들이 놀러오면 안 가려고 한다. 못 떨어진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못 떨어진다. 그런 사랑이 임하면, 관계가 일 중심이 아닌 사랑의 관계가 된다. 더 이상 일로는 정리가 안 된다. 그리고 율법의 심판은 예수님께 오면 끊어지고 없어진다. 대표적인 경우가 간음한 여인이다. 서기관들이 끌고 오면서 몇 번이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쳐 죽이라고 했지만, 이런 확신한 경우는 예수님은 피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확신을 갖고 함정에 빠질 것이라는 확신으로 끌고 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그때 마치 엠마오로 내려가는 그 제자들을 열어주신 것 같이 그 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그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신다. 그런데 간음한 여자가 심판이 멈추었다. 예수님은 그 죄를 자신이 품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까지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다.
 
*마태복음 5:43~44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지금까지는 율법의 한계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지만,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율법이다. 선악의 판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사랑은 그것이 아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만든 새롭게 열어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시고 하나님 나라의 사랑의 온 차원을 갖게 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아닌 인과응보였다면, 하나님 나라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율법에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는 이해가 되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성령님께서 어떠한 사랑인 것인가를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이해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이스라엘 나라에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라. 아무리 교회를 나오고 주일 예배를 나와도 우리가 영성이 깨어있지 않으면, 여전히 이스라엘 나라에 살 수 밖에 없다. 사람을 칭찬하고 못하면 미워하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면 좋아하고 못하면 미워하면 손가락질 하고 그것은 아무리 예수님 믿는다고 하더라도 새 계명이 아닌 율법안에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 나라에 사는 자들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다. 온전함이란, 테리오스란, 목적, 목표, 목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완전히 이루어지고 인간이 엄청난 행복을 누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목표이고, 우리가 그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텔레이오스’이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이 완전히 회복이 되어서 우리가 사랑장이라고 하면 고린도전서에 보면, 지금 우리가 깨닫는 것은 그 때가 오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했다. 그 말은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나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두렵다. 그것처럼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사랑의 원형적인 것을 깨닫기에 서로 사랑이다.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그렇다. 다락방, 봉사 부서에서 만나면 반갑듯이 그것이 수천 개가 되면 말할 수 없이 기쁜 것이다. 그 기쁨이 사랑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 모든 사랑의 한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우리도 비로소 우리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슬픔이 있다. ‘케리케본은 말한다. 우리는 죽음이 있다.’우리의 슬픔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고린도후서에 예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은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를 안다는 것,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한 것 같이 나도 예수님을 사랑할 것이다는 것이다.
 
그 기쁨이 정말 크다. 우리가 이야기 하는 그 새 계명은 온전한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다. 자연적인 상태, 십자가의 사랑이다. 자연적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은 천연기념물처럼 많지 않다.
 
*마태복음 16:24절에 보면,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의 사랑은 험하고 고통스럽고 험하지만, 그런데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는 이렇게 생각된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사랑을 드러내서 그 사람을 사랑해서 드러내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락방에 다 괜찮다고 하면서 딱 한 사람만 빼놓고요..라고 한다. 그 한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순원들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순장님에게 맡기는 것이고 제자의 삶이며 새 계명이다. 예전에 장로님께 목사님의 속을 많이 썩였다. 그래서 정식으로 목사가 되면서 사죄를 했다. 지금은 제자훈련을 하면서 교역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목사님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를 안 해주었는지를 모르겠다. 제자 반을 다시 하고 싶다. 제자훈련이 쉽지는 않지만, 두 가지 경우이다.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면 여기가 마음이 커지지 않고 머리만 커진다. 그런데, 과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품고, 사랑하고, 만져주고, 애정을 가지면 변화한다. 제자훈련은 사랑하면 변화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파라칼레오로란 말이 있다. 제자들이 힘들게 돌아오면 옆에서 쓰다듬어 주시고 수고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그 애정 표현이 큰 힘이다. 거기서 나온 단어가 파라클레이오스이다. 러시아에 간 것은 건물을 짓거나 뭐 바라는 것으로 간 것이 아니다. 러시아 분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갔다.
 
사랑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니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대표총무로 있을 때, 미주를 담당할 당시에 옥한흠 목사님이 캠페인을 하게 했다. 엄청나게 교회가 부흥이 되었다. 남미에서 유행하는 것이 무너졌다가 부흥된 것이다. 남미에서 일어나는 부흥을 보고나서 소련 선교를 위해 유명한 교회였다. 소련교회 판의 번역을 요구했다. 지금 러시아 판권을 달라고 했는데 없다는 것이다. 겁도 없이 판권을 달라고 한 것이다. 그 나라에만 넘어가기에 한 사람이 달라고 하기에 그 나라 사람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려했다. 한국 사람이 달라고 하니 나중에야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복음화를 책임지게 했다. 그리고 나서...
 
사흘 후에 하나님께서 저희 둘째아이를 데려가셨다. 토요일에 데려가셨다. 바로 어제가 소천한 기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길 원했는데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마음에 정립이 안 되었다. 그 아이가 갑자기 가게 되니 가장 궁금했다.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지를 궁금했다. 과연 천국에 갔는지가 궁금해서 그 친구헤게 물었더니 신학교에 가서 열심히 살겠다고 베프(베스트 프렌드)에게 그런 약속을 말했다고 했다. 그 이후로 그 판권을 가지고 러시아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을 하면서 두 사람의 몫을 하고 있다. 하나는 아이가 하지 못한 것과 두 몫을 하고 있다. 러시아에 가게 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아뭏튼 모든 성도님들이 사랑이 온전함을 회복해서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와 세게 교회에 온전한 사랑을 비추는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바란다.
 
♣요약
새 계명을 주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삶의 현장에서 서로 사랑하고 온전하여져서 주님의 제자답게 살고, 이웃을 품고 사랑하고 살리며 치유하는 자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지적인 차원, 사랑의 정적인 차원, 사랑의 의지적인 차원을 다 누리게 하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기에,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사랑을 드러내서 그 사람을 사랑해서 드러내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이다.
 
-예수님의 영광은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다. 사람의 가장 큰 영광은 희생에서 오는 영광이다. 전쟁의 최고 영광은 살아 돌아오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지 못하는 영령에게 주어지며, 의사의 영광은 환자의 치유와 의료 발달을 위해 헌신하는 데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이는 길은 순종이듯이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최고의 영광을 돌리셨던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의 이 말은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심같이 서로 관심을 갖고 돌아보라는 뜻이다. 또한 귀중히 여기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셨듯이 남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하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셨듯이 상대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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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7월 21일)
제목: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3:1-5
설교자: 현승원 의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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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5,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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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모세의 생애는 사십년 단위의 세 시기로 뚜렸하게 나뉘어진다. 첫 번째 사십년을 그는 바로의 궁전에서 왕자로 보냈으며, 두 번째 사십년은 미디안에서 목자로 보냈다. 그리고 세 번째 사십년은 여수룬의 통치자로 보냈다. 두 번째 사십년을 마무리지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기 위해 그들을 부르실 때, 때때로 훨씬 이전에 계획을 세우시고서 그것에 대해 그들을 은혜롭게 준비시키신다는 것에 유의하자.


-모세가 양무리를 치려고 호렙 산 밑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다. 떨기나무는 광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목이다. 그래서 사막의 열기 속에서 쉽게 불이 붙고 금방 타오르며 곧 사라진다. 그러나 모세가 본 그 떨기나무는 불이 붙었으나 타서 사그러들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것은, 떨기나무와도 같이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고난과 압제를 당해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그러들지 않고 타오를 것임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 쓰신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살고 순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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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16 회 경제상식퀴즈

1.가계 소비지출 중 식료품비의 비중을 뜻한다. 보통 소득이 높아질수록 하락하게 되는 이것은?
  1. ① 지니계수
  2. ② 소득 5분위배율
  3. ③ 상대적 빈곤율
  4. ④ 엥겔지수
2.채권을 발행한 곳이 파산했을 때 다른 채권자 부채를 모두 청산한 다음 마지막으로 상환받을 수 있는 채권을 뜻하는 말은?
  1. ① 선순위채
  2. ② 후순위채
  3. ③ 외평채
  4. ④ 신용부도스와프
3.현재 국내에 적용되고 있는 법정최고금리는 얼마일까?
  1. ① 연 10%
  2. ② 연 20%
  3. ③ 연 24%
  4. ④ 연 28%
4.서울 지역 부동산 거래를 강하게 규제하니 경기·인천 등 수도권에서 부동산 매매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에 어울리는 말은?
  1. ① 낙수효과
  2. ② 풍선효과
  3. ③ 분수효과
  4. ④ 기저효과
5.상장사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언론 보도나 소문에 대한 확인 요구에 해당 기업이 직접 사실 여부를 답변하도록 한 제도는?
  1. ① 기업공개
  2. ② 외부감사
  3. ③ 조회공시
  4. ④ 감사거절
6.주가지수선물, 주가지수옵션, 개별주식옵션의 만기가 동시에 겹치는 일명 ‘세 마녀의 날’을 뜻하는 말은?
  1. ① 블랙 먼데이
  2. ② 사이버 먼데이
  3. ③ 트리플 위칭데이
  4. ④ 쿼드러플 위칭데이
7.주식을 액면분할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로 가장 거리가 먼 것은?
  1. ① 주식 수 증가
  2. ② 액면가 하락
  3. ③ 거래 촉진
  4. ④ 자본금 감소
8.주가가 일정 범위 안에서 등락을 거듭할 때 흔히 증시가 ‘이것’에 갇혀있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이것에 적절한 말은?
  1. ① 가격제한폭
  2. ② 박스권
  3. ③ 지지선
  4. ④ 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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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 Story

독서를 통한 ''지적 성장의 경험'' 자소서에 녹여내라

서울대 입학본부가 올해 웹진 아로리에 공개한 ‘2021학년도 서울대 수시모집 지원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은 전년도에 이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장 지글러)이고, 2위는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 3위는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였습니다. 오종운 종로학원하늘교육 평가이사는 “서울대가 중시하는 것은 지원자들이 충분한 독서 활동을 통해 연마한 우수한 독서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점”이라며 “자신의 삶과 학습 활동에 가장 큰 감동이나 변화를 준 도서를 선정해 이를 통해 지적 성장, 영향 등을 중심으로 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에 기술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교보문고와 생글기자 출신 대학생들이 추천하는 ‘여름방학에 꼭 읽어야 할 책’을 소개합니다.

◆《공간의 미래》(유현준)
코로나19로 우리의 일상이 바뀌면서 공간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집, 회사, 학교, 공원 등 우리가 친숙하게 생활하고 있는 이 공간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볼 수 있게 하는 책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창의력을 키울 수 있게 도와줍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릭 와이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몽테뉴까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의 삶과 작품 속에서 우리 인생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찾아가는 책. 저자 에릭 와이너는 ‘미국의 작가 빌 브라이슨의 유머와 스위스 출신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통찰력이 만났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고구려 세트》(김진명 역사소설 전7권)
《고구려》는 김진명 필생의 역작으로 고구려 최전성기를 관통하는 다섯 왕(미천왕-고국원왕-소수림왕-고국양왕-광개토대왕)들의 살아 숨 쉬는 일대기를 한 번에 만나볼 수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가장 뜨거운 시간을 마주했던 다섯 왕을 통해 현재 우리가 나아가야 할 외교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디 에센셜: 어니스트 헤밍웨이》(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헤밍웨이의 대표 단편과 에세이를 한 권으로 만날 수 있는 책입니다. 작가를 꿈꾸거나 문학을 좋아하는 학생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시리즈죠.

◆《클라라와 태양》(가즈오 이시구로)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며 명실상부 현대 영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최신작.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와 인간 소녀 조시가 그려내는 가슴 저미는 슬픔과 사랑, 그리고 헌신의 이야기입니다. 과연 ‘인간됨’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 개개인을 고유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이죠.



◆《페인트》(이희영)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 양육 공동체가 실현된 미래 사회의 부모, 나아가 가족의 의미에 대해 고찰의 계기를 던지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김선영)
제1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 흐르는 시간이라는 소재를 다룬 소설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국면에 대한 통찰을 주는 책이죠.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매트 헤이그)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방법,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려주는 소설로 올해 상반기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입니다.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이 다양한 삶을 살아보면서 진정한 삶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기발한 상상력에 감동을 더해 읽는 재미까지 줍니다.

-이제 역전되리라 - 시와 그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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