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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2023년 3월 4일)-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
제목: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마태복음 26:31-35
대표기도: 오시연 권사님(목양7팀 여직장인대교구장)
찬양인도: 목양 7팀
말씀읽기: 손현영 자매(청년 N국), 나경제 형제(대학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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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31-35,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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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이 토비새에 불러주심을 찬양한다. 지금 우리 깃발도 들었고 지금 말씀 읽은 형제가 나 경제이다. 음성이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 참 감사하다. 자, 토비새에 나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다 뉴스레터를 보고 읽어보자. 토비새에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자.
 
▷평범한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됩니다.
버린 돌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모퉁이 돌 인생이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총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혜의 저수지, 사역의 병참기지가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고도의 순간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떤 선생님이 “야, 너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라고 선생님이 이야기 했다. 이 선생님이 다른 사람도 이렇게 똑 같이 생각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그 말을 스쳐지나가는 말로 안 믿고 선생님이 ‘나에게 꼭 필요한 귀한 인물이 되는가! 나도 그런 귀한 인물이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하고 그걸 그렇게 받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좀 되바라져가지고 알 걸 다 알아가지고 그게 되겠나? 라고 의문을 표시하면 그건 안 되는 것이고 그러나 그걸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아, 그렇구나!’ 하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가슴에 담고 그걸 하면 그렇게 하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참 신비한 것이다.
 
토비새에 나오면 평범한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되는 줄 믿는다. 버린 돌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모퉁이 돌 인생이 됩니다.!!! 이게 토비새 구호가 아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그냥 순수하게 받으면 어린애 되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할 때, 오늘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터인데 갈보리 산상기도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그럼 똑 같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어떤 사람은 그냥 십자가 그렇구나!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내 마음에 받아가지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 토비새에 나오면 이것을 받아서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

*토비새가 나오면,,,,
토비새에 나오면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총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혜의 저수지, 사역의 병참기지가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고도의 순간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새벽에 나오니까 평소에 매지 않는 넥타이를 잡고 나왔다. 나도 평소 매지 않는 것이지만 나도 얼굴이 달라져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 내가 마음으로 은혜를 받고 싶어서이다. 아침에 쉽지 않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져야 하고 밝아야 한다. 토비새 나오면 은혜를 받아서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자기의 있는 것 반 이상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진짜 부자가 되고 싶으면 자기의 있는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60-80%를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진짜 부자가 될 것이다. 사람을 알면서도 실천을 못한다. 젊어서부터 그렇게 나누어주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사람은 거부가 되는 것이다. 잠을 4시간 5시간 자더라도 집중력 있게 자고, 고도의 순간 안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이가 들면 입을 열고 자는 분들도 있다. 코도 울고 그 조신한 여자 분들도 60-70이 넘으면 코를 곤다. 그런데 입이 마른다. 요즘은 붙이는 테이프가 나왔다고 한다. 산소가 코로 공급이 되어야 하듯이 코로 공급되어야 뇌가 맑아지는 것이고 퀄러티가 있는 잠을 잘 수 있다. 생각을 해보라. 토요일 날 새벽에 나와야 되니까, 잠을 잘 자야 한다. 낮에는 일상의 삶을 유지해야 하니까 훨씬 더 질적으로 수준이 높은 잠을 자야한다. 아침에 입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입안이 촉촉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보면 알 것이다. 그 다음에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 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성경자본 헌신 자본, 기도자본, 찬양 자본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다. 환경에 너무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환경에 죄 짓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은혜 받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은혜 받는 환경이 있으면 그대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내 것으로 삼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이 마음을 가지고 오늘 ‘갈보리 산상기도회에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여러분, 찬송가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 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 주시네,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 눈보다~~~우리 새 찬송가 바꾼 지 몇 년 되었는데 가사가 좀 바뀌었다. 바뀌고 나니까 장수가 좀 바뀌었다. 오늘 십자가의 은혜가 믿음으로 받기를 바란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1.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주시네.
(통. 늘 흐르니 죄 많은 형제여)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 눈보다 더 희도록 참 성결 얻으리.
 
2. 저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 같이
곧 구원받으리.(통. 용서받으리)
 
3. 온 백성의 죄사하신 하나님 어린양
그 십자가 지심으로 온 인류 구했네.
저 영원한 새 나라에 다 같이 모여서
금 거문고 한 곡조로 새 노래 부르리.
 
후렴 : 나 믿노라 나 믿노라
그 보혈 공로를(통.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한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격한다. 십자가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한없는 하나님의 보물창고이다. 여기에 묵상이 제대로 되고 내 것으로 삼고,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그 보혈의 십자가를 체험할 때 이것이 한없는 보물창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고가 되신 줄로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적게 체험하면 적은 은혜가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얇게 묵상하면 얕은 은혜의 물가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문을 열고 그 안에 하나님의 보화를 캐내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얇게 묵상하면 얕은 은혜를 받는 것이고, 깊이 묵상하면 깊은 은혜의 문을 열게 됩니다.”아멘, 그래서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안목과 어떤 수준이 개인마다 다르다. 십자가가 갖는 넓이와 깊이가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보는 각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그 실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은 마태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이며, .
*마가복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고난의 증인 예수님”을 표현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저는 청년시절에는 김중권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 ‘예수칼럼’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다. 요즘은 많이 이렇게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예수칼럼’은 그분이 깨달은 십자가는 얇게 깨달으면 얕은 은혜라고 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우주 최대의 러브스토리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예수님이 한 손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은 부족한 인생인 우리를 붙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며 나를 행한 사랑의 고백을 하다가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김중권 목사님-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너무나 놀랍다. 오늘 베드로가 세 번 배반하는 갈보리 산상기도회를 시작하면서 베드로 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앞으로 여러분과 제가 실수를 하면 받아준다는 것이 아니고, 여기 나이 든 사람들은 실수하면 안 된다. 좋은 말 할 때, 더 이상 실수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은혜를 기대하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같이 실수하면 앞으로는 더 온전케 하셔가지고 우리 앞으로 실수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 기대하자. 아멘. 한 번 더 읽어보자. 김중권 목사님이 쓴 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장파열 사건이다. 심장이 터지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심장파열 사건이다. 심장이 터지신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그 심장파열 사건을 기억하면서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찬양을 다시 부르면 강도가 다르게 될 것이다. 은혜의 강도가 다르다. 성경도 얕게 묵상하면 얕은 것이고, 깊이 묵상하면 깊이 있는 은혜가 나오는 십자가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26장 후반에 보면, 두 인 물이 등장한다. 한 인물은 가롯 유다이고, 한 인물은 베드로이다. 사실 잘못의 경중을 따진다면 베드로나 가롯유다는 별 차이가 없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나,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나 거의 같다. 그런데 누구는 베드로가 되고 누구는 가롯유다가 되는가? 이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베드로만 슬퍼한 것이 아니다. 가롯유다도 슬퍼했다. 자기의 잘못을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슬픔으로 끝나고 후회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그는 제자들의 대표였다. 그는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했다. 제자대표가 스승을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은 당시에 신앙 스캔들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는 회복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가진 축복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깊이 각성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한 그의 삶과 헌신을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비슷하다. 베드로나 가롯유다나, 십자가의 각성이 얼마나 크냐? 유다는 그것을 포기한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각성(覺性)한 것이다.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가지고 다시 은혜를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오늘 갈보리 산상기도회에 이 놀라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나온 이 자리에 사순절 기간에, 부활절이 되기 전까지 갈보리 산상기도회를 통하여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깊은 은혜가 여러분의 것으로 체화되기를 바란다.
 
‘나 믿노라 나 믿노라.’ 다시 부르면 차원이 다를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깊은 묵상으로 우리 모두를 깨닫게 하시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하고 회복하고 돌아왔을 때, 심지어 천국 열쇠를 받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베드로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십자가 앞에서 깨어지고 그 회복의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알아주시고 쓰신 것이다. 오늘 35절에 보니까,
 
*마태복음 26:31-35,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만 그러한가? 모든 제자도 그와 같았다. 다 함께 그러하겠다고 한다. 세 번이라 부인했지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유대지도자들이 다 도망갔다. 심지어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버리고,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는데 도망가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께서 부인할거라고 해도 안 그렇다고 했지만 그런데 나중에는 배신하고, 도망가고, 보잘 것 없고, 볼품이 없고, 의심 많고, 평범하고, 경박하고, 배신자가 된 것이다. 이 배신자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각성이 일어나고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일류역사상 회복시켜서 가장 유명한 자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그들을 무장하고 세워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각성, 묵상이다. 십자가에 대한 은혜인줄 믿는다.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도 똑 같다. 우리도 나이 들어서 더 이상 실수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날마다 실수하고 어린아이 같고 우리도 보잘 것 없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이제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천국열쇠를 가지고 베드로처럼 그 초대교회 역사를 황금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려면 그 원천은 십자가의 깊은 각성과 은혜에 대한 각성이다.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각성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마음이 어떠한가?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너무나 고마워라! 라고 진정한 각성이 되는가?
 
지난 주일날 설교에 기드온이라는 설교를 했다. 그 말씀을 듣고 몇 분들을 만나니까, 그 설교를 들었을 때, 그 기드온을 듣고 울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해서 오늘 내게 본인의 것으로 체화가 되어야 눈물이 난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제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드온은 큰 담대하고 그냥 강력한 용사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쫄보였다는 말씀에 연약하고 비겁하고 그런 기드온이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큰 용사하고 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주의 영이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그를 붙잡으셔서 큰 용사를 쓰게 하신 것이 와 닿았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본인의 삶과 똑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아리와 같은 깨지기 쉬운 곳에 그 안에 불을 넣어서 혁신을 통한 일을 한 것도 놀랍다고 했다. 나이가 70이 다 되신 분의 이야기이다. 그냥 지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것으로 체화하니까, 내 것으로 들리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 이 십자가를 향하여 갈보리 산에 시작이다. 몇 주가 더 설교를 될 것이다. 각성을 가지고 우리가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 때에 십자가를 통한 각성의 기도의 지팡이가 되어 십자가의 큰 능력이 우리에게 체험될 줄 믿는다. 그러니까 은혜이다. 할 때는 이 은혜는 십자가와 떨어져는 생각할 수가 없다. 한 번 예전에 말씀을 했다.
 
※어릴 때, 성악가 여자 가수인 마리안 엔더슨이란 사람이다. 컨츄럴 앨토이다.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노래한 성악가이다. 어릴 때 가난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교회 성도들이 후원하여 고차원 성악교육을 받게 했다. 미국에서 일등 가는 교수에서 사사를 받았다. 그 마리안 앤더스의 창법이 톡특하다. 첫 독창회를 하고 나서 혹평을 받았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마리안 엔더슨은 마음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마리안 네가 깨달아야 한다. 민감하게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 혹평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혹평보다 크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의 재능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네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 다음에 그래서 마리안 앤더슨은 평생을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영혼의 울림의 노래를 부른다. 음악의 두께가 깊은 바다와 같다. 그녀는 가는 곳 마다 찬송을 통해 십자가를 더욱 깨달았다.

-우리의 실력, 우리의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고 경박하고 실수 많이 하고 배신 잘하는 베드로와 같은 우리를 유다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천국 열쇠를 받는 은혜를 십자가를 통한 놀라운 은혜의 저장창고의 문을 여는 자, 그래서 날마다 지치지 않고 시종일관으로 주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오늘 십자가의 능력이 갈보리 십자가에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오늘 지치고 힘든 여러분들도 환경보다 더 중요함을 깨달아서 여러분들의 재능보다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나 믿노라 !!!~~ 찬양을 한 번 더 하자.
 
지금 미국의 캔터키의 에즈버리 라는 곳에 리바이벌로 계속했는데 미국에 은혜를 깨닫고 하는 찬양을 하는 것을 우리가 다 벌써 그 이상으로 하고 있다. 십자가의 깊이가 연결되면 되는 것이다.
 
♣요약
그 주님의 보혈의 십자가를 체험할 때 이것이 한없는 보물창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고가 되어서 얕은 묵상이 아니라 깊은 주님을 묵상을 하여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천국열쇠를 가지고 베드로처럼 그 초대교회 역사를 황금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깊은 각성과 은혜에 대한 각성으로 우리의 실력, 우리의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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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1일)
제목: "덤으로 사는 삶"
말씀: 열왕기하 20: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고영민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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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20:1-6,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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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부목사님
사람들에게는 무너지는 순간들이 있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수능을 준비하고 면접도 보고, 또 열심히 노력했는데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 받았을 때도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그러나 목양을 하면서 제가 마음이 무너질 때가 언제였냐면 생명에 관한 것을 들었을 때이다. 어떤 집사님께서 병원에 갔다가 이상한 조직을 발견하시고 의사의 권유에 따라서 조직검사를 맡기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결과를 간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주일에 담당 교역자인 저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그 떨리는 마음을 아는가? 간절하게 기도해 드리고 다음에 또 연락이 온다. 그리고 나서 어떠한 말을 듣는다. “목사님 저 암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저는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마음이 무너지는 마음을 느낀다. 우리는 크고 작은 일에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피해갈 수 없기에 누구나 경험을 한다. 하지만 우리기가 함께 읽은 히스기아는 절대(絶對) 절명(絶命)의 위기의 순간들에 맞닥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고 참담함 그 자체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 내용이 아주 간단하다. 히스기야가 중병이 든다. 그리고 이 병은 선지자가 와서 히스가에게 삶을 정리 하라고 할 만큼 중한 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은 그가 살아갈 날을 15년을 연장하여 주셨다는 이야기이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아마도 이 시기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앗수르에 침공을 받는 시기와 겹치는 시기로 보인다. 히스기야 재위 기간이 29년이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삶을 15년을 연장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병들었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은 시기가 아마 히스기야 재위 14년 정도였을 것이다. 열왕기하 1
 
*열왕기하 18:13,
13 히스기야 왕 제십 사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열왕기하 10:6,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그리고 오늘 말씀에도 이 성을 앗수르의 성에서 구원해줄 것을 약속하는 것을 보면, 아직 침공이 끝나기 전으로 보인다.
 
*열왕기하 21:1,
1 므낫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오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15년을 연장 받은 것을 생각해보면 이때는 아직 자식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분 히스기야의 위기가 보이는가? 히스기야에게는 지금 적국으로부터 침공(侵攻) 받는 국가적 위기(危機) 뿐 아니라, 후사(後嗣)가 없는 가정의 위기, 그리고 시한부(時限附) 판정을 받은 개인의 위기까지 총체적인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위기의 상황이다. 오늘은 인생의 절대 절명의 위기이자, 총체적(總體的)인 위기를 맞이한 이유를 중심으로 기도하고 그 받은 응답을 받고 그 이유까지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하는 하나님이 말씀에 보면서 우리가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먼저 히스기야를 살펴보자.
 
히스기야는 이런 총체적인 위기에 맞이했을 때 어떻게 했는가? 즉시 그는 기도했다. 여러분, 성도는 위기의 순간에 기도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곳에 기도하는 자리까지 나오지 못하고 그리고 가지고 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히스기야는 그렇지 않았다라고 이야기 한다. 오늘 말씀을 203절을 보면,
 
*열왕기하 20:2-3,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첫째- 히스기야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다.
-이 본문은 히스기야가 기도한 내용이다. 오늘 히스기야 기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먼저 히스기야는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다. 먼저 죽음을 가지고 온 사람은 바로 이사야 선지자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평생을 히스기야와 함께 했던 사람이다. 그와 함께 의지하면서 전쟁을 겪은 사람이다. 영적으로 잘 통했던 사람이겠다. 그렇다면 히스기야에게 그 말을 해준 사람은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는 아주 가까운 사람이다. 여러분들도 이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 그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 할 수 있지 않은가? 이유가 뭐냐? 라고, 내가 무얼 해야 되느냐? 네 생각은 어떠한가? 라고 하여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다. 또 히스기야에게 많은 재산들이 있었다. 히스기야는 “왕의 건강과 회복을 위하여 이제 너희들은 기도하고 제사를 올려라.” 라고 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외 많은 의사들과 박사들도 있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도 부르지 않았다. 히스기아는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혼자 하나님을 대면하고 기도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독대하는 것이다. 독대하는 것에 동의하는가? 사람들의 조언과 생각을 듣는 것이 아니다. 사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을 듣고 사람을 의지할 때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를 어지럽혔던 말이 사라진다. 히스기아는 즉시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다.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사람의 소리,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도를 드린 것이다.
 
둘째- 히스기야는 하나님 말씀 앞에 즉시 기도했다.
 
*열왕기하 20:1,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찾아가서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이제 너는 죽는다.”라고 이렇게 이야기 한다. 여러분 보통 때는 예고의 말씀이 없어야 정상이 아닌가? 성경에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병이 중하여 지다가 명이 다하면 죽는 것이 일반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말씀에 중병을 앓고 있는 히스기야에게 와서 “너는 죽는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이것은 지금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인인 것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사인 앞에 지체하지 않고 즉시 기도했다. 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의 사인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 어떤 생각이나 조치를 하기 전에 바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이럴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신속하게 응답하신다. 4절을 보면,
 
*열왕기하 20:4,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여러분, 성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라고 이야기 한다. 즉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당신도 지체하지 아니하고 바로 응답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믿는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사인 앞에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즉시 나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가장 복된 하나님의 선으로 응답하실 줄 믿는다.
 
셋째- 하나님 앞에 전심을 다해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그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모든 눈물을 흘린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강하셨던 저희 아버지 인생이 힘드시니 우셨다. 사람은 다 운다. 그러나 그 눈물이 다 기도는 아니다. 운다고 하나님이 다 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눈물은 기도의 눈물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치고 응답받지 않는 자는 없다. 한나가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다. 여러분 예수님도 눈물로 기도하셨다.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뭐라고 하시는가?
 
*열왕기하 20:5,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셨다. 그의 마음을 보셨다. 하나님은 그의 슬픔을 아셨고 이 눈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시는 분이시다.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눈물로 나온 자에게 기도를 반드시 응답하신다. 그리고 5-6절을 보면,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응답하신다. 그 중병을 고치신다.
 
열왕기하 20:5-6,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그 중병을 고치신다. 하나님께 즉시 기도했다. 그리고 그 말씀과 사인 앞에서 지체하지 않았다. 생명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신다. 그리고 전심을 다해 기도했다. 히시기야의 받은 응답을 보면 기도의 타임이 태도 내용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받은 응답도 너무나 완벽하다. 위기의 순간에 기도자로서 최고의 모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귀감이 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령은 히스기야에 대해서 이렇게 아름답고 귀감(龜鑑) 될 만한 내용으로 마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히스기야의 기도응답 이후의 삶을 통해서 메시지를 던진다. 이것은 하나님은 기도응답과 함께 변화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기도응답 이후에 히스기야의 변화 소식을 들은 바벨론 왕, 브로닥발라단이 사절단과 함께 편지와 예물을 보낸다.
 
*열왕기하 20:12,
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아마 이 예물을 보냈을 때에는 병이 해결되고 회복되었을 때로 보인다. 시간차가 있다. 어쨌든 그들이 온다. 그만큼 바벨론도 앗수르가 지금 남하하고 있는 국제정세에서 유다를 크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편지와 예물은 화해나 동맹 등의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 히스기야는 기분이 아주 좋아서 자기 창고에 금은, 향품과 기름과 군기고에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13절에 보면,
 
*열왕기하 20:13,
13 히스기아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
-마지막에 한 번 더 강조하고 있다. 히스기야가 보인 것 중에 그의 나라에 있는 모든 것 중에 그에게 보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일은 산헤립의 1차 침공 이후에 전쟁을 다시 준비하면서 다시 국고가 채워진 뒤에 일어났을 것이다. 특히 오늘 말씀에 보면 자기의 보물고, 그의 군기고, 그리고 그의 나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다. 아니면 화해와 동맹의 손길에 손 내미는 바벨론에게 자기의 나라의 영광과 부요함을 자랑스런 모습을 보여주고 잘해보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 하냐면, 역대하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 *역대하 32:25,
25 히스기아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성경은 마음이 교만하여졌다고 진단한다. 이 사실을 안 이사야는 얼른 달려가서 히스기야를 크게 책망한다. “무엇을 보였느냐? 질문에 히스기야가 해맑게 안 보여준 게 없다고 한다.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더 황당한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언하여 책망정도가 아니라
 
*열왕기하 20:17-18,
17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18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여러분,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히스기야의 개인적인 허영심? 아니면 어떻게든 잘 보여서 동맹국을 맺어 의지하려고 했던 마음인가? 이런 것들도 해달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여러분 그 당시에 바벨론이 사절단을 통해서 편지와 예물을 보낸 것은 무엇인가? 앗수르가 자꾸 남하를 하니까 그런 국제정세 안에서 유다와 함께 무엇인가 동맹을 맺을까를 하여서 온 것 아닌가? 그런 의도를 뻔히 알고 있는 왕이다. 왕도 그냥 왕이 아니라, 국가적인 위기, 개인적인 위기, 생명의 위기, 이 모든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넘치도록 받은 왕이다. 보통 사람은 경험할 수 없었던 그런 경험을 하고도 정작 그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궁금하여서 친히 자기 나라에 방문한 이방인에게 크게 역사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을 어느 한 점 비추거나 거론하지 않고 각종 보물과 무기고를 보여주면서 마치 자신의 재력과 자신의 무기와 군대가 지금 그 나라를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지금 으스대고 있는 것 아닌가? 여러분 굳이 죽을 사람에게 “너 죽을 것이다.” 라고 특별히 예고하시면서 기회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15년생을 연장해 주셨는데 하나님은 무엇을 하라고 그 생을 연장해 주셨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유대의 온 땅에,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알리고, 만국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증언하라고 15년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더 놀랍다. 19절에 보면,
 
*열왕기하 20:19,
19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만일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이 말씀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렵다. 다른 번역본을 보면 이렇다. <그대가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지당하신 말씀이요, 그리고 자기의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평안과 안전이 계속 되리라고 혼자 생각했다.>
-여러분 지금 남하하고 있는 앗수르에게서 유다를 보호하고 있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금과 보물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군대나 무기인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싸울 생각도 못하고 포위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는 히스기야에게 연장된 15년을 굉장히 크게 생각한다.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개인적인 기도의 응답으로는 아주 큰 응답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기도응답으로 끝맺지 않고 히스기아의 마지막을 지금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고 일들이 다 해결 된 이후 즉 기도응답을 받은 이후의 삶도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계신다.
 
여러분 히스가아는 생명을 건지는 은혜를 경험한다. 이런 은혜는 아주 특별한 은혜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이후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 신자에게는 히스기야의 이 큰 경험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다. 죄의 근간을 부수고 사망권세를 이기고 죄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은혜를 경험자들이 바로 신자요, 성도요, 교회가 아닌가? 이렇게 히스기아에게 15년이란 시간이 주어진 것처럼, 우리에게는 거듭난 이후에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의 시간이 주어진 것을 아는가? 죽음의 선물을 받은 인생들에게 사망으로 결론지어질 인생들에게 제2의 인생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다 죽은 자들이다. 생명이 없었던 자들이다. 사망으로 결론지어진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거듭난 은혜로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거듭난 성도는 모두 덤으로 사는 것이다. 삶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었던 모두가 다 그 죄 아래에서 종노릇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아들로 말미암아 히스기야처럼 그때그때 위기에서 건져주신 것도 아니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수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셔서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경험한 여러분이라면 이제 무엇을 하겠는가? 세상에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보겠노라고 하겠는가? 여러분 무엇을 사랑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가? 죽음의 권세를 깨부수시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시고 생명의 자리로 옮겨온 그 원천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가? 이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고 하면 히스기야처럼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을 내어놓으면서 무기를 자랑하고 자신의 군대를 내보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우리를 구원한 복음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내가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세상에 보여줄 것이 딱 한 가지 밖에 없다 라고 말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여러분, 복음을 증거 하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가운데 히스기야와 같은 축복을 주셨다. 복음을 증거 하라고 물질을 주셨고, 신분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다. 종흔 성적도 주셨고 작은 지혜로 주셨다. 그렇다면 여러분, 주어진 시간에 여러분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입든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겠는가? 이것이 여러분에게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구원이후에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그 두 번째 인생,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 복음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히스기야가 사랑했던 그 보물들, 그 군기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시는가? 다 팔려가겠다고 이야기 하신다. 여러분들의 인생이 히스기야 같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복음으로 가득 채워진 기쁨의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성도는 기도응답의 삶도 승리해야 한다.
 
넷째-기도응답의 삶도 승리해야 한다.
-여러분 히스기야는 기도의 성공이 있었지만 그의 평가가 좋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긴급할 때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히스기야가 너무 잘 한 부분이다. 맞다. 그러나 말씀의 히스기야처럼 기도응답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두손 들고 나온다.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 기도응답이후의 삶까지도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응답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절을 보면,
 
*열왕기하 20:3,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여기 히스기야의 기도를 보면 “여호와의 구하오니 기억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호소하면서 자신의 삶을 기도로 올려드렸던 삶이다. 먼저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주 앞에 행하였던 삶을 기도로 올려드렸던 사람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선하게 행하였던 삶을 기도를 드렸던 사람이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 자신의 삶을 근거로 기도의 응답을 요청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앞에 진실함과 전심의 삶, 선한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렇게 근거를 두고 기도할 만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앞에 살펴보았듯이 갑자기 자기에게 죽을 병이 들었던 것, 또 기도했는데 보란 듯이 너무나 즉시 병을 낫게 해주신 것,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약속을 주신 것, 또 그 약속의 증거를 주신 것, 이렇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티를 내도 너무나도 팍팍 티를 내시면서 응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12절 이후처럼 행동하는 것은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에 히스기야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여러분 분명 기도응답은 너무나도 기쁜 이야기이다. 여러분 기도하고 계신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보라. 기도응답은 얼마나 기다렸던 기도응답인가? 그러나 이제 성숙한 여러분이라면 그 응답과 함께 주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 의도,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하게 헤아리고 묵상하여서 한 차원 높은 기도를 올려드리며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소망한다.
 
어제 제자훈련을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히스기야가 제자훈련 과제인 큐티와 신앙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아버지 마음을 알았고, 감사하게도 한 차원 높은 기도를 드렸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든다. 여러분들도 그 기도응답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헤아려 더 높은 차원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두 번째로 예배를 통해 우리를 지속적으로 기도를 올려드리기를 바란다. 기도가 응답되어지고 문제가 해결함을 받으면 기도응답을 받았던 히스기야에게 찾아왔던 유혹들이 찾아온다. 내 보물고라고 말하고 싶은 이유, 내 군기고, 내 나라, 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이다.
 
여러분 이 히스기야가 이 유혹에 넘어가서 내 보물고, 내 군기고, 내 나라라고 말하는 그 순간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심과 전심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전한 동기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의 삶, 온전한 마음을 다하여서 주님만을 의지했던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하였던 삶도 잃어버렸다. 판단의 기준이 자기가 보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옳다고 했던 것,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삶을 위해서 최선을 살아갔던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무엇인가? 그 한 마디에,,, 내 보물고, 내 군기고, 내 나라, 우리는 주위에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기에 주님만 붙들고 살다가 기도응답 이후에 주님과 멀어지고 바른 태도를 취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았다. 여러분 히스기야 이야기는 먼 이야기가 아니다. 기도응답의 이후의 삶도 영적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예배를 통해 우리를 주님께 지속적으로 올려드려야 한다. 동의하는가? 말씀의 능력의 은혜를 올려드릴 때에 우리 인생의 주제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를 올려드릴 때에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그 유혹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증거자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여러분, 이 모든 시작은 예배이다. 날마다 드리는 예배를 통해 여러분들의 인생의 최종 결정권을 지속적으로 주님께 올려드리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서 성공적인 기도생활을 영위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정리하겠다. 성도가 인생에 절대 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성도는 위기의 순간에, 오직 하나님께 지체하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을 주실 것인데, 그 응답과 함께 반드시 변화된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주님은 기도응답 이후의 삶도 영적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기도의 제목이 끊일 날이 있겠는가? 기도의 제목은 계속해서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의뢰하고, 그러면 분명히 응답을 주실 것인데 그 응답의 의미를 깨닫고 기도응답의 요구하시는 변화된 삶의 순종을 위해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그 영적인 선순환의 기도생활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도하고 응답받고 영적으로 또 올려드리고, 응답받고 이것이 기도생활의 선순환이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생활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기쁨과 승리로 인도하실 줄 믿는다.
 
요약
인생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모든 주재권을 주님 앞에 내어드리고 전심으로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의 위기를 초월한 새 차원인 인생으로 인도하실 것이며 기도응답이후의 삶도 한결 같이 주님을 바라고 기도하는 영적 선순환의 기도생활이 되면 인생의 상상할 수 없는 승리를 주님이 주님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살아가서 덤으로 사는 삶에 보답하는 복음의 산 증거를 보여야 한다.
-히스기아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했다. 히스가야의 이런 기도는 세상을 등지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는 참 믿음의 기도이다. 뿐만 아니라 전인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였다. 기도는 우리의 전인격을 바쳐서 드리는 헌신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의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는 땀이 피가 되기까지 기도하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우리들도 환난을 만날 때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관하시며 모든 사람의 수한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는 오직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순종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도와 의학적 치료방법은 둘 다 병행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의술이나 지혜는 인간들을 위해 사용하게 하신 귀한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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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2월 27일 (787)

1. 부동산, 미술품, 저작권 등 실물자산 소유권을 불특정다수 투자자가 나눠 갖고 자유롭게 거래도 하는 신종 투자 방식은?

①분산투자 ②조각투자
③대체투자 ④퀀트투자

2. 경기가 경착륙이나 연착륙을 겪지 않고 호황을 이어가는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는?

①하드 랜딩 ②노 랜딩
③어닝 서프라이즈 ④어닝 쇼크

3. 다음 중 세계적 위상이 가장 탄탄한 기축통화로 볼 수 있는 것은?

①달러 ②유로 ③엔 ④위안

4. 기업의 외부감사인을 정기적으로 교체해 기업과 감사인 간의 교착관계를 끊고 부실감사를 막겠다는 취지를 내세운 제도는?

①리베이트 쌍벌제
②IFRS17
③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④K-ICS

5. 정식 유통망을 통하지 않고 불법과 합법의 중간 성격을 띤 매매 시장을 가리키는 말은?

①레드 오션 ②블루 오션
③블랙 마켓 ④그레이 마켓

6. A국이 B국에 불이익이 되는 무역 조치를 취할 때 B국이 이에 대응해 A국에서 수입하는 물품에 비싼 관세를 물리면?

①상계관세 ②반덤핑관세
③계절관세 ④보복관세

7. 우리나라의 ‘이것’은 5~6 수준이다. 경제력 상위 20% 소득이 하위 20% 소득의 몇 배인지를 보여주는 분배 지표는?

①소득대체율 ②상대적 빈곤율
③소득 5분위 배율 ④지니계수

8. 기차나 영화관에서 손님이 몰리는 주말에는 평일보다 비싼 요금을 받는 전략을 잘 설명하는 용어는?

①역선택 ②대체재
③초과이윤 ④가격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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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예금과 대출의 차이…'예대마진'이 문제?

그래픽=신택수 한국경제신문 기자

우리는 물품보관소에 귀중품을 맡길 때 보관료를 냅니다. 반대 상황도 있을까요? 물건을 맡기는 사람이 거꾸로 돈을 받는 경우 말입니다. 있습니다. 바로 돈입니다. 은행에 돈을 맡기면 돈을 받습니다. 이자라는 것이죠. 은행은 돈을 맡아주는 수고를 해야 하는데 왜 보관료를 안 받을까요? 이유는 은행의 역할에서 비롯됩니다.

은행은 기본적으로 예금된 돈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곳입니다. 1000원 맡기는 사람(예금자)에게 10원의 이자를 주고, 빌려가는 사람(대출자)에게 이자 15원을 받아 5원을 남기는 식이죠.

이것이 바로 이자 수익, 즉 예대마진이라는 겁니다. ‘예대마진=대출이자(여신이자)-예금이자(수신이자)’이죠. 요즘 이 예대마진이 논란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행들의 예대마진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은행들이 자기 돈도 아닌 남의 돈으로 이자 장사를 해서 직원들에게 엄청난 보너스·퇴직금을 준다는 겁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5대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행)이 거둔 이자수익은 50조원에 달합니다.

최근 대통령이 나섰습니다. 금리가 올라서 대출자들이 이자 내기에 허덕이는데 은행들은 이자수익으로 돈 잔치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반 기업들은 돈 많이 번 것을 자랑하는데 은행들은 전전긍긍합니다. 돈으로 돈(이자)을 버는 걸 죄악시했던 조상들의 생각이 맞는 걸까요? 아니면 은행도 할 말이 있는 걸까요?
은행은 예금자와 대출자를 이어주는 존재…3자가 만족하는 교집합은 어디쯤일까요?

은행은 예금자와 대출자를 이어주는 존재…3자가 만족하는 교집합은 어디쯤일까요?
여기 김씨, 박씨, 이씨가 있습니다. 김씨는 여윳돈을 은행에 예금하려는 사람입니다. 박씨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는 사람이고, 이씨는 은행에서 예금과 대출 업무를 관장하는 임원입니다. 세 사람의 이해관계는 다릅니다. 김씨는 이자를 많이 주는 은행을 좋아하고, 박씨는 싼 이자로 대출받으려 합니다. 이씨는 예금이자를 주고도 이익이 남도록 대출이자를 더 받으려 합니다. 세 사람이 모두 만족하는 교집합은 어디쯤일까요? 수학적으로 답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은행의 기본 업무는 김씨와 박씨를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은행이 없다면 김씨와 박씨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이럴 겁니다. 김씨는 돈을 빌리려는 사람을 직접 찾아다닙니다. 집집마다 다니면서 “돈 필요하세요?”라고 물어야 하죠. 욕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박씨 역시 이집 저집 다니면서 “돈 좀 빌려주세요”라고 호소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생각했습니다. “돈을 맡아주고, 빌려주는 곳을 만들자.” 그랬더니 예금자와 대출자가 이곳에서 쉽게 만났습니다. 예금하면 이자를 주고 대출하면 이자를 받고. 이런 곳이 점점 더 생겼고 우리가 은행이라고 부르는 기업으로 진화했습니다.

여기 또 다른 세 명이 있습니다. A씨는 열심히 저축하는 사람입니다. B씨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인공지능을 만드는 사업가이고, C씨는 빌린 돈을 떼먹은 적이 있는 신용불량자입니다. 은행은 신용이 다른 A, B, C씨에게 다른 대출이자를 적용합니다. 은행은 대출이자를 정할 때 신용을 가장 중시합니다. 신용도가 높은 사람에겐 돈을 빌려줘도 떼일 염려가 적기 때문에 낮은 이자를 받고,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겐 돈을 빌려줬다가 못 돌려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반영해 높은 이자를 물립니다.

은행도 기업이어서 흑자를 내야 생존할 수 있답니다. 돈을 벌어야 월급도 주고 시스템 투자도 할 수 있어요.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이 망하듯, 적자를 보는 은행은 망할 겁니다. 한 은행이 망하면 불안감이 다른 은행으로 번져서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돈을 인출해가려는 ‘뱅크런’이 발생할 수 있어요.

흑자를 내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대표적인 게 예대마진입니다. 예대마진은 대출이자에서 예금이자를 뺀 이자 수익을 말합니다. 예금자에게 주는 이자보다 대출자에게 받는 이자가 많으면 이익이 나는 거죠. 우리나라에선 예대마진이 가장 큰 수익원입니다. 5대 은행(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행)은 2022년 50조원가량의 예대마진을 올렸습니다. 전체 수익의 70% 정도라네요. 비(非)이자 수익(유가증권 매매 수수료·자산운용 수익 등) 사업도 있죠.

은행이 대출·예금 업무만 하는 곳은 아닙니다. 은행 종류도 한국은행,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민간은행, 저축은행 등으로 다양하고, 업무도 성격에 따라 다채롭습니다. 일일이 설명하기는 지면이 좁네요. 제1금융권(일반은행+특수은행), 제2금융권(저축은행+새마을금고 등), 제3금융권(사채+대부업체)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은행은 굴릴 자금을 두 가지 방법으로 마련합니다. 하나는 예금을 많이 유치하는 겁니다. 예금이자를 다른 은행보다 많이 주면 돈이 몰릴 겁니다. 은행채를 적정 금리로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죠.

우리나라엔 5대 은행 쏠림 현상이 있습니다. 전체 금융회사에 들어오는 예금의 74%, 대출의 63%가량을 5대 은행이 차지합니다. ‘과점’ 논란이 나오는 이유죠. 예금자들이 5대 은행에 몰리는 것은 아무래도 큰 은행의 안전성을 보고 돈을 많이 맡기고, 대출이자가 상대적으로 낮으니까 돈을 많이 빌리려 하기 때문입니다.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은 2금융권, 3금융권으로 갑니다.

은행들도 서비스 경쟁을 합니다. 예금이자와 대출이자를 조정해 고객을 유치하죠. 기술 변화에 맞춰 모바일뱅킹 투자를 늘리기도 합니다. 토스뱅크 카카오뱅크 등 정보기술력을 앞세운 금융기업이 들어오면서 경쟁은 한층 치열해지고 있지요. 은행은 설립할 때 매우 까다로운 조건이 있고, 정부의 인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일반 기업보다 정부 감시를 많이 받습니다. 은행이 위험해지면 경제 전체가 휘청거리기 때문인데요. 금융당국은 감독이라고 말하고, 은행들은 기업 간섭이라고 합니다.
NIE 포인트
1. 예금자, 대출자, 은행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토론해보자.

2. 은행이 하는 주요 업무의 종류를 찾아보자.

3. 은행이 대출자의 신용을 중시하는 이유를 알아보자.
아리스토텔레스 "돈이 이자를 낳으면 안 돼요"…"은행이 없었다면 기업·산업 성장하지 못했죠"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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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돈이 이자를 낳으면 안 돼요"…"은행이 없었다면 기업·산업 성장하지 못했죠"
은행들이 요즘 욕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서민들은 대출이자 갚느라 허덕이는데 은행들은 ‘이자 장사’로 번 돈을 성과급으로 나눠 갖는다는 비판입니다. “은행들이 예대마진으로 돈 잔치를 한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비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습니다. 반대 의견도 있습니다. “은행도 민간기업이고 일반기업과 마찬가지로 이윤을 남기는 게 당연한데 이자 수익을 너무 죄악시한다”는 거죠.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BC 322)는 이자를 ‘극혐’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돈이 돈(이자)을 낳는 것을 정말로 싫어했습니다. 그가 주장한 ‘화폐 불임설(doctrine of the sterility of money)’은 그래서 유명합니다. “동식물은 자연스럽게 번식할 수 있지만, 화폐가 새끼를 치는 것은 비자연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새끼는 이자를 말합니다.

중세 성직자들도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1139년 라테란 종교회의 포고령은 아무리 이자율이 낮다고 해도 빌려준 돈에 이자를 물리는 행위 자체를 부도덕한 일로 간주했고, 교회가 고리대금업자를 파면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파면당한 사람은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누가 죽여도 하소연할 수 없었습니다.

위대한 문학 작품에서도 이자는 죄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그 선봉에 선 작가였습니다. 그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최악의 악마로 그려졌습니다. 유대인인 샤일록은 재산을 탕진한 뒤 돈이 필요했던 친구 바사니오의 부탁을 받고 돈을 빌리러 온 안토니오에게 끔찍한 제안을 합니다. 안토니오를 몹시 싫어했던 샤일록은 대출해주면서 “돈을 기한 내 갚지 못할 경우 안토니오 가슴살 1파운드를 떼겠다”고 했죠. 이자를 받는 대금업을 천시한 당대 유럽 경제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1821~1881)도 <죄와 벌>에서 선이자를 떼고 물건을 맡아주는 전당포 주인을 탐욕스러운 인물로 그렸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가 살해한 전당포 노파 알료나를 돈만 밝히는 노파로 묘사했죠.

이자를 죄악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착각’은 대항해 시대와 네덜란드 무역, 영국 금융 시대, 미국 월가 전성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바뀝니다. 돈이 돈을 버는 시대가 금융업 덕분에 도래하기 시작한 거죠. 먼 곳을 항해하려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전혀 모르는 이방인에게 신뢰를 바탕으로 대부해주고, 사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가능성을 보고 대출해줬어요. 빌려주는 측은 돈을 떼일 위험(리스크)을 감수해야 했으므로 조건에 따라 이자율과 이면 조건을 다르게 책정했습니다. 돈줄을 움직였던 메디치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 JP모건 가문은 오늘날 은행이 하는 업무를 거의 다 하게 됐습니다.

당대 선진국이었던 영국은 이런 금융업을 키워서 세계 금융의 허브가 됐죠. 이것이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월스트리트가 생겼습니다. 은행들은 개인과 기업에 자금을 지원해 산업을 키우고 일자리를 만드는 데 일조했습니다. ‘금융 크기=국가 크기’가 성립했습니다.

어느 나라 은행이든 예대마진을 주요 수익 창출 창구로 삼습니다. 작년 예대마진이 늘어난 이유를 국내 은행들은 고금리 기조와 예금금리 인하 압력에서 찾습니다. 대출금리는 ‘기준금리+코픽스+은행별 가산금리’로 정해집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여덟 차례나 인상했고, 8개 은행의 평균 자금조달 금리인 코픽스도 올랐습니다. 은행들이 결정하는 가산금리도 불경기와 대출 회수 어려움 등으로 올랐다는 겁니다. 반면에 예금금리는 높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5대 은행들이 연 5%의 고금리 예금상품을 내놨는데 금융당국의 지시로 없앴다고 합니다. 제1금융권 은행들이 예금이자를 높이면 제2금융권의 자금이 빠져나가 위기가 생긴다고 했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예대마진 폭이 커졌다는 것이 은행들의 해명입니다. 대출받은 사람들은 “대출이자를 내릴 여력이 많다”고 합니다. 은행 이자는 예나 지금이나 논란 대상입니다.

NIE 포인트
1. 화폐 불임설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비판해보자.

2.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독후감을 써보자.

3. 메디치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 JP모건 가문에 대해 알아보자.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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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2월 25일)-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시리즈 14번째 강의.
제목: "챗 GPT시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말씀: 사사기 7:1~23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조철민 부믁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사사기 7:1~23,
1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 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 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12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느니라 하더라. 
1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1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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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
할렐루야! 
오늘 새로운 은혜가 넘치는 복된 주일이 될 줄 믿는다. 지하에 있는 분들은 잘 모르시는데 오늘 광장에 새로운 현수막이 딱 붙었다. 뭐라고 씌어 있는가? "새 봄, 새로운 호흡, 새로운 은혜“새로운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려면 시대를 극복하고 말씀으로 체화가 되어야 한다. 요즘 연초부터 SNS나 언론을 달군 빅이슈 중의 하나가 ‘챗GPT’이다. 채봇이라고도 한다. 챗GPT는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것이다. 쳇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자동 회귀 언어 모델이며 딥 러닝을 사용하여 인간과 유사한 텍스트를 생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챗GP는 인공지능(chatGPT)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제 빅 데이터 시대이다. 수많은 빅 데이터를 가지고 이제 인공지능 이런 것들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무서울 정도이다. 어떻게 하냐면, 여러분 평생에 책을 만 권 읽을 수 있는가? 제목도 만권 보기가 힘들 것이다. 쉽지가 않다. 그런데 챗GPT는 순식간에 책을 만 권, 십만 권을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대한 내용도 종합적으로 판단도 한다제가 한 번 테스트를 해보았다. 
 
제가 한 번 오정현은 누구인가? 를 넣어 보았다. 저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 정말 세상에 깜짝 놀랐다. 저보다 더 많이 내용이 나왔다. 그리고 '믿음에 대해서 설교해 주세요!' 했더니 설교 문이 쫙 나왔다. 어떻게 보면 참 기가 막힌 일이다. 컴퓨터는 잘 못 되면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되지만 그런데 이 챗GPT는 플러그를 뽑아도 계속 역사한다. 왜냐하면 클라우드에 저장된 것을 다 가져오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챗GPT가 잘못된 방향을 잡으면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시대이다. 
 
※제임스 스미스는 칼빈대학의 신진학자, 기독교 철학자인데 이러한 시대 앞에 우리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이고 갈망하는 존재이다. 사랑하는 존재이다. 이런 시대 가운데서도 이런 엉터리 예배하고, 엉터리 갈망하고, 엉터리 사랑하는 것으로 이 갈증을 채울 수가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하는 존재로 여기실 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명을 갈망하는 존재로 부르신 줄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짜 사랑하는 존재로 부르신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주님은 온전한 제자가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는 그야말로 참 존엄한 존재로 보시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를 고상한 존재로 보신다. 그러니까 온전한 인격, 고상한 인격, 존엄한 인격으로 만들었는데 이 챗GPT가 우리에게 아무리 두려운 마음이 있어도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런 가운데서 아무리 그게 대단하더라도 본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웠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사사기 7:3,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미디안의 13만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하니까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기드온도 굉장히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챗GPT 이런 시대에 이런 잘못된 빅 데이터를 가지고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럴 때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인격적인 것에 있어서 마귀가 우리를 훼손시키려고 하고 있다. 마귀는 우리를 타락시키고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챗GPT 두려워 보이지만, 아무리 발전하는 시대라고 해도 챗GPT는 영성이 없다. 챗GPT는 성령이 없다. 말씀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말씀에 기름 부으심과 말씀에 조명을 빅데이터를 가지고 설명하는 그것이 대신할 수는 없다. 성령께서 이 시간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의 영이 함께 하시는 그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온전함을 파괴하는 것, 고상한 인격을 파괴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온전한 사람 되기를 원하고 주님은 온전한 제자 되기를 원하신 것처럼, 아무리 이 챗GPT가 발전되었다 하더라고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는 될 수 없다. 그래서 온갖 일들이 다 있지만, 여러분 우리는 책 백 권, 천 권 읽기도 힘든 인생인데, 순식간에 책을 십만 권, 백만 권을 읽는데, 그것도 잠도 안자고, 밥도 안 먹고, 그냥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잠도 자야하고 우리는 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인공지능 이 채팅서비스는 잠도 안자고 그냥 한계가 없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난리를 치는데, 우리는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마치 오늘 기드온이 미디안의 13만 대군을 앞에 놓고 두려워 떠는 것과 같다. 오늘 본문을 보면, 북쪽에 미디안 대군이 쳐들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것을 약탈하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별볼일없는 므낫세지파, 가운데 요하스의 아들, 기드온이라는 자를 택해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우신다. 
 
그런데 이 기드온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고 두려움에 떠는 약자였다. 겁쟁이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용사를 이야기할 때 첫 번째 기드온이 나온다. 오늘 챗GPT 시대에 수많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어려운 시대이다. 우리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통해 온전한 인격, 고상한 인격, 예수님의 오전한 제자가 되는데 무장되는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 육신의 눈은 흐려질 수 있고 육신의 몸은 약해질 수 있지만, 우리의 영은 펄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두려움이 일상화 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이스라엘 곡식을 추수할 때면 미디안 족속, 아말렉 족속, 동방족속이 다 약탈하고 단합을 했다. 얼마나 심하게 억눌렀는지 사시기 6장에 보면 알 수 있다. 
 
*사사기 6:2,
2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백성들이 산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 살기도 하고, 참호 같은 것을 만들어서 피신할 정도였다. 두려움이 일상화 된 것이다. 그리고 미디안이 연합군이 추수할 때가 되어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격적으로 약탈하는데 어떤 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성을 약탈하고, 훼손시키고, 파손시키는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13만 5000명이 들어와 진을 치는 것이다.
 
*사사기 6:11,
11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그 당시 10만 대군이 얼마나 큰 숫자인가? 빅 데이터를 가지고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것처럼,,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이라는 그렇게 소심하고 겁쟁이이고 소심한 사람을 택하신다. 앞에 6장에 보면 기드온이 밀 타작을 할 때 원래 타작하면은 마당에다 펴놓고 타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타작하는 누가 쳐들올까 겁이 나서 포도주 구덩이가 있는데 거기에 숨어서 거기 틀에 밀을 타작하고, 기드온이 그만큼 겁이 많았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겠다고 하시니까, “아이고!, 저는 므낫세 지파, 내 아버지 집으로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막 읍소(泣訴)를 한다. 
 
*사사기 6:15,
15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돕겠다고 하시는데도 세 번이나 시험을 한다. 양털, 이슬, 등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런 계속 안 해보려고 한마디로 겁쟁이고 쫄보였다. 이것을 우리가 보면서 너무 놀란 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이 생긴다. 그런 상황을 앞에 놓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사기 6:12,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우리가 믿음보고 2.0을 하고 그 다음 하나님나라의 정규군이 되고, 이런 말을 하지만 웃는다. 오늘 이 말씀을 내 것으로 삼고 확신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온 같은 쫄보, 겁쟁이에게도 여러분 큰 용사 라고 하신다. 여러분, 큰 영사, 시대적 영웅는 이 어려운 가운데서 어떻게 되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역사서 ‘사마천’을 보면, 많은 영웅을 시대가 영웅을 만들지만, 그런데 성경은 시대가 영웅을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큰 용사여, 하신다. 
 
*사사기 6:12,
12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여러분 이것을 다 안다고 하면 안 된다. 우리가 온전한 인격이 아니다. 마귀는 우리가 인격성을 초월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겁에 질리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구덩이 속에 들어가게 만들고, 물파서 내려가게 만들고 이게 전문이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신다. 오늘의 찬양 중에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 이렇게 찬양을 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찬송을 통해서든, 예배를 통해서든, 영적인 교제를 통해서든, 이유를 막론하고 여호와가 함께 하시도다 하신다. 그게 큰 용사된 비결이다. 시대가 용사를 만드는 게 아니다. 큰 용사가 시대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 챗GPT 가운데서 우리가 크로노스 시간과 카이로스 시간이 있는데 크로노스 시산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다. 연대기적 시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그것은 크로노스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 시간이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제가 우리 남은 생애를 하나님과 함께 하시도다. 그런 은혜를 받아서 크로노스 연대기의 삶이 아니라, 신대기적인 카이로스로 살아야 한다. 믿음보고 2.0보고 정도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대기 시대를 살아야 한다. 참 중요하다. 하나님이 어떻게 체험하게 하시는가? 두 가지를 말씀하겠다. 
 
첫 번째는 
I. 하나님은 끝까지 남은 자를 택하신다. 
 
-오늘 보니까 13만 5천명이 쳐들오니까 기드온과 3만 2천명이 왔다. 하나님은 거의 4대 1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너무 많다고 하신다. 두려운 자들은 다 가라고 하신다. 몇 명이 남았냐면 만 명이 남는다. 하나님은 그것도 많다고 하시면서 물을 먹는 모습을 보시고 골라서 9,700명을 보내버리고 하나님께서 300명으로 남게 하신다. 기드온에게 있어서 피곤한 일이다.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대군이 13만 5천명이나 되는데 고작 300명을 가지고 가라고 하시니까,,, 그런데 한 명이 450명을 맡게 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이 450명이 전문이신 것 같다. 우리는 늘 불완전하고 마귀는 우리를 늘 불완전한 인격으로 훼손시키려고 하고, 우리의 고상한 인격을 오염시키려고 하고, 우리의 온전한 제자 되기를 방해한다. 심지어 쳇GPT로 두려움의 상황을 가지고 우리를 두렵게 한다. 하나님은 거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온전한 인격을 갖게 하시고 존엄성을 유지하게 하신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내가 두렵고 쫄병같고 모자랄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큰 용사가 되는 것을 믿고 끝까지 하면 남은 자의 은혜를 이런 마음을 가진 자를 하나님은 쓰신다는 것이다. 이게 벼랑 끝 전술이시다. 항상 함께하시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라. 마지막 하나인 이삭을 바지라고 할 때, 여러분 기가 막힌 일 아닌가? 정말 답답하지만 칼을 들고 이삭을 찌르려고 하니, 하나님이 아니야, 스톱하신다. 우리는 거기서 이제 이삭을 살려주실 것을 생각하지만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그 덤불 뒤에 숫양을 준비해 숨겨놓고 계신 것을 보고 여호와 이레, 그런 그가 끝까지 남은 사람들에게 여호와 이레를 믿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전략은 벼랑 끝 전략이며 십자가도 벼랑 끝 전략이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었다고 그러는데 보통 다 이루었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명을 다해주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것들을 온전케 하실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세대가 부족하고 시대의 흐름과 시대의 상황에 두려움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격적,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온전한 제자로 될 수 있도록, 그의 존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의 고상함이 파괴되지 않도록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미리 다 이루어주신 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마지막까지 남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끝까지 남는 자에게 하나님은 쓰시는 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특성은 이 어려움의 시대, 쳇GPT시대에, 기가 막히게 하나님의 전략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무기를 가지고 최상을 뒤엎는 것이다. 이제 기드온과 함께 전쟁에 나갈 사람은 300명이 남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9절에 보면, 
 
*사사기 7:9,
9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진영으로 내려가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아직까지 전쟁 시작도 안 했는데 하나님은 이미 이겨놓은 전쟁처럼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그것을 너의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고 하신다. 이미 이겼다고 하신다. 그런데도 기드온도 별로 마음에 안 닿은 것이다. 쫄보라서.., 그러면 혼자가 두려우면 부하를 붙여주시겠다고 하신다. 부라, 부라와 같이 하라고 하시며 조력자로 붙여주고 에너지를 주게 하신다. 기드온을 격려하게 하신다. 
 
II. 기드온에게 동역 자를 붙여주신다. 
*사사기 7:10~11,
10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서 
11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그 진영으로 내려가리라 하시니 기드온이 이에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군대가 있는 진영 근처로 내려간즉.
-이제 13만 5천명의 대군을 이겨야 하는데 부라와 함께 가라고 하신다. 만약 기드온이 담대한 사람이었으면 자기 혼자 내려갔을 것이다. 제가 볼 때 성경에 이 부라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부라와 함께 가서 적군들이 하는 말을 들으라고 하신다. 10절에 보면, 진영 안에 못 들어가고 진영 근처로 간다. 13절과 14절에 보면, 
 
*사사기 7:13-14,
13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14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더라.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의 진영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기드온의 칼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그 미디안의 진영과 그 모든 것을 그의 손에 넘겨주신다. 그 보리떡이 기드온의 칼이라고 하신다. 
미디안 진영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기드온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안이 두려워한다. 이 기드온과 부라가 드디어 사기충천해서 기드온으로 돌아간다. 이 보리떡 특공대가 이 미디안의 사람들을 떨게 한 것이다. 그리고 기드온의 300명의 용사에게 여호와께서 미디안을 넘겨주셨다고 이제야 담대히 말하고 정작 그들의 손에 챗 GPT가 있었다든지 그들의 손에 칼이 있었다든지, 그들의 손에 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윗처럼 물맷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왼손에는 횃불을 담은 항아리와 오른손에는 나팔을 불고 있었다. 
 
*사사기 7:18,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하나님 나라와 기드온을 위하여 나팔을 불라고 하신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추석이나 대보름도 아니고 나팔과 횃불을 가지고, 칼도 없이, 창도 없이 이기게 하신다. 13500명을 어떻게 하시는가? 
 
*사사기 7:20,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한다. 개역개정 판에,,, 번역에 그렇게 되어 있다. 칼이다.라고 했지만 칼이여가 맞다. 300명의 기드온의 용사가 횃불을 들고 기드온의 칼을 들고, 
 
*사사기 7:22,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자기들끼리 내 분열이 일어나서 난리를 치고, 우리는 정말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할 줄 믿는다. 자기들끼리 정신이 혼미해서 자기들끼리 치고 박는다. 300명이 나팔소리가 엄청나게 들리게 해서 이기게 하신다. 기가막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할 줄 믿는다. 온전한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는 고상한 인격과 존엄한 인격으로 이것을 원하신다. 두려움을 떨지 말고 지레 겁먹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기드온의 칼이여 하심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항아리는 곡식을 담는 것인데, 주님이 횃불을 숨기게 하셔서 아주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발상이다. 그 어떤 사람도 전쟁에 위대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전쟁도구로 사용하신다. 패러다임 쉬트가 되게 하신 것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결국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바울도 우리는 질 그릇 같은 연약한 자라고 했듯이 고린도 교회도 성적으로 문란하고 자기들끼리 싸우고 문제투성이였다. 인생의 항아리에 무엇을 담아야 할지, 하나님 주신 말씀, 온전한 인격을 담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구로 사용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기드온의 300명의 나팔소리가 되면 이 시대의 소음을 덮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 하겠지만, 쳇GPT가 대단한 것 같지만 온갖 소리도 나팔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온갖 데이터를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압도하는 체험이 되기를 바란다. 벼랑 끝은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300명만 남게 하는가? 그 이유가 있다. 
 
*사사기 7:2b,
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쳇GPT시대는 세상이 이런 것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신데 세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과학을 자랑해도 우리는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 십자가가 최고의 자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지만 당시의 로마의 십자가는 수치의 어떤 상징이었다. 로마시대 최고의 상징은 강력한 부대가 행진하는 것이었고, 전쟁개선식이고 원형 경기장에서 식민지 사람들을 짓밟는 것이고, 거기에 사람들은 감동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이 수치와 두려움이 최고의 도구가 되셨다.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사사기 6:34,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히브리서 11:29~31,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쳇GPT시대에 모든 사람들은 다 나그네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쳇GPT시대에 인공지능 챗팅 서비스 시대에 우리는 돌아갈 본향이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가 어떻게 제자가 되어야 할지, 마지막 남는 자로서의 사명을 주시고, 그리고 질그릇 같은 우리를 어떻게 혁신적으로 쓰시는지를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135000×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0이다. 그러나 300명x3=900명이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가? 
 
*잠언21:31,
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오늘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사명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겠다. 
 
※일화하우드 핸드릭스가 비행기를 탔는데 그날 사람들로 붐볐고 아이들이 타고 다 칭얼대고 울었다.비행기에서 난기류를 만나서 기내식을 못주는 난항이었는데 그 중 여승무원 안내를 하면서도 친절하게도 웃으면서 섬긴다. 사람들이 욕도하고 짜증을 내는데도 그녀는 상냥하게 안내하고 섬겼다. 목적지에 다다라서는 핸드릭스 목사님이 여 승무원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당신처럼 충성된 사람처럼 일하는 이 항공사는 무척 운이 좋은 것 같다. 럭키하다.”고 하니까, 대답이 그녀가 하는 말이 "예수님을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요약
하나님 없는 13만 5천명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300명이 더 강함을 믿으며 주님이 함께 하시는 큰 용사가 되어서 성령이 없는 챗GPT 시대를 이겨내어, 벼랑 끝에서도 주님의 보리떡 특공대로 사용되는 기적을 맛보며, 세상의 모든 잡음을 뛰어넘은 자로, 온전한 제자로 새봄, 새 호흡, 새로운 은혜가 충만하여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드온의 큰 용사가 되어야 한다. 
 
-본문에서는 기드온의 군대 숫자가 처음의 32,000명에서 10,000명, 300명으로 점차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일차로 돌아간 22,000명은 두려워하는 자들이었고, 그 다음에 돌아간 9,700명은 부주의한 자들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이 군사의 수를 줄이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겼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인간 생활의 승리는 외적인 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자들을 제외한, 손으로 움켜 핥아 먹은 300명을 선택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민첩하게 행동하는 자를 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람은 민첩해야 한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소수를 들어 쓰신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 연약하다고 생각할 때에 온전히 하나님게 의존하게 된다.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300명의 군사적 자질보다, 하나님께서 소수를 통하여 승리케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부라라는 부하를 붙여 주신다. 서로에게 격려가 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동역자를 주신다. 성경에서 둘, 즉 ‘2’라는 수는 도움을 주는 경우와 확실한 증거를 확증할 때 주로 사용되는 숫자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 파송을 하실 때 둘 씩 보내셨다. 이는 지치기 쉬운 전도 여행 중에 서로를 격려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미디안의 진에 숨어 들어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듣고 용기백배한 기드온은 300의 용사를 지휘하여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한다. 전투 방법은 병사들을 3개 조로 하여 기습하는 것이었는데 결과는 기드온의 통쾌한 승리였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기드온이 승리하게 된 것은 그가 끝까지 견디었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영상은 2부 예배입니다.  본문은 1부 예배여서 내용이 좀 상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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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2월 25일)
제목: "믿음의 세대 계승은 반드시 이어져야"
말씀: 히브리서 11:17~22
찬양인도: 다음 세대 연합찬양대
대표기도: 
말씀읽기: 이민기 학생(대학부2부), 이율 학생(다윗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히브리서 11:17~22,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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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목사님-"믿음의 세대 계승은 반드시 이어져야“
-할렐루야! 잠을 포기하고 이렇게 토비새에 나온 학생들이 나왔다. 이 새벽을 기대하고 실천의 현장이 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여러분 크게 따라 하라!
 
“우리는 땅 끝까지, 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들이다.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의 일만이 영원하리라!”
 
오늘 이 믿음과 사명이 다음세대 아름답게 잘 계승되기를 바란다. 오늘 온전한 믿음의 계승이 반드시 이어져야 하는 그런 차원의 말씀을 드리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똑 같은 것이라도 어떤 사람에게 들렸을 때는 그것이 긍정적으로 자주 사용되고 또 잘못 되면 그것을 폄하한다. 예를 들어서 자, 물이 있다. 어떤 불은 잘 되어서 명품 청자를 만들고, 어떤 불은 집안을 다 불태워서 집안을 망하게 해버린다. 또한 어떤 산속의 옹달샘 그 물은 갈증 있는 자에게, 허덕이는 자에게, 사슴에게 생수를 공급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의 물은 아무 쓸 데 없는 것이다. 홍수가 지나가면 흔적도 없다. 그러나 어떤 좋지 않고 그리고 파격적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똑 같은 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칼이 잘 길들여지면 명품의 목각을 만들되, 어떤 잘못하면 연필도 못 깎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믿음의 4대 계승이라는 온전한 믿음의 세대가 다음 세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그 아름다운 여호수아 세대의 최고의 멋있는 그 세대가 다음세대로 제대로 전달 되어질 때 여호수아 믿음의 세대가 좋았지만, 그 다음 세대는 그 선대의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다 말아먹는 그런 세대가 되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3층, 2층, 1층에 있는 우리만 제대로 하면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저는 믿음의 세대 계승에 대해서 어릴 때부터, 젊을 때부터 나에게 ‘세대 계승이 나에게는 어떤 뜻이었나?’ 믿음의 세대계승이 어떤 뜻이었나? 를 생각해왔다. 
 
저는 예수 믿는 집안의 4대째 태어나서, 우리 증조부인 경북 안동지역에 처음 선교사님 오셔서 그때 미국 선교사님 말씀을 듣고 우리 할아버지 세대는 9남매가 계셨는데, 예수 안 믿으면 내 자식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 할아버지 세대가 다 복음화 되고, 저의 부친세대 저와 다음 세대 6대까지 저에게 있어서 세대계승이 어떤 뜻인가!? 젊을 때, 오늘 대학부가 와 있지만, 저는 믿음의 세대계승은 항상 영적 재생산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만 복음 듣고, 나만 은혜 받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은혜 받는 사람이 자기 믿음세대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음세대로 연결된 줄 믿는다.
 
저는 저에게 늘 그런 질문했다. '오정현, 너의 디모데가 어디 있냐?' '너의 디모데는 어디 있냐?' 저는 저에게 그것이 가장 절실했다. 
 
*디모데후서 2:2,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그랬을 때, 그 디모데후서 2장 2절 말씀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하는 말이다. 바울에게 있는 그 믿음의 은혜가 디모데에게 네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한다. The others, 그래서 폴-티모티-충성된 사람-또 다른 사람. 이렇게 믿음이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저에게는 항상 마음속에 질문이 '너의 디모데가 있냐?'였다. 이것이 한국에 있든 외국에 있든, 또 좋은 상황이든, 어려운 상황이든 상관없이 오늘 이 자리에 대학부 리더들이 많이 다 있는데 마음속에 “너의 디모데는 어디 있느냐?”라고 묻고 싶다. 대학부들, 여러분들은 디모데가 어디 있는가? 없을 것이다 아마 쉬운 게 아니다. 
 
바울과 디모데 관계는 영적 아비와 자식의 관계였고, 자기의 모든 것을 자기의 모든 것을 줄 수가 있었다.
 
※며칠 전에 청년 시절에 저와 같이 디모데처럼 살았던 형제가, 이제 대학교수 그만 두고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저런 디모데 관계로 과거의 어떤 그런 관계들이 다시 한 번 새록새록 샘솟았다. 그 형제는 자기가 갖고 있는 그 은사를 가지고 대학캠퍼스에서 영적 재생산 하고, 또 앞으로 일본을 위해 재생산할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늘 마음에 저에게는 ‘너의 디모데는 어디있느냐?’라고 질문하고 있다. 
 
오늘 우리교회 중직 자들, 순장님들, 토비새 오신 모든 우리 교회 성도님들과 모든 세대들의 마음속에도 ‘너희 디모데는 어디 있느냐?’ 라고 묻고 싶다. 실질적인 디모데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랑의 교회는 사역과 섬김을 통하여서 이 영적 재생산, ‘너희 디모데는 어디 있느냐?’ 이 믿음의 세대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 세대에서는 이사야 58장에 나오듯이, 
*이사야 58:11,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항상 이게 참된 영적 재생산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이것은 마태복음을 보면 나온다. 
 
*마태복음 28:19~20,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영적 재생산에 참여하고 소위 디사이플 메이킹(disciple making)을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제자들을 키우는 그의 삶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하신다.이게 똑 같은 믿음의 세대계승이고, 똑 같은 제자훈련이고, 똑 같은 양육이란 이런 말이 있지만, 이것이 진짜 올바른 옹달샘 물과 같이, 진짜 명장을 만드는 불과 같이, 진짜 명장을 만드는 칼과 같이, 이것이 제대로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 뭐라고 나와 있는가?
믿음의 4세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아곱, 요셉.... 오늘 대학부 형제자매들이 다 있지만, 여러분들의 생애를, 아직 젊지만 여러분들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1대는 아브라함 조상처럼 하게하여 주시고, 2대는 이삭처럼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다음 세대는 야곱 같은 축복을 주시고, 마지막은 요셉과 같은 전 세계를 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리라고 하시는 그 마음이 확실했다. 이게 아브라함에게 이삭 드리라고 했을 때는, 죽을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드리는 건 나를 각을 떠서 드리는 것과 똑 같았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너무나 어두움 같고, 너무나 희망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로마서 4장에 뭐라고 나와 있냐면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 바로 연결되어 있다. 
 
*로마서 4:17,
17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한다.
 
본문에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이 조상이라고 한다. 그렇게 아브라함이 그 믿음이 그냥 된 곳이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부터 쭈욱 보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큰 특색이 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 제단을 쌓은 것이다. 오늘 여러분들이 그냥 토비새가 아니다. 여러분들의 큐티도 하고, 주일 예배들 드리고, 대학부집회도 하고, 청년대학부 등 다 21세기 판 여러분들의 생애의 믿음의 제단을 쌓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그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자연스럽게 연결된 것이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마지막 최후의 결판까지 가는 정말 신중한 상황에서도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한다. 제단을 쌓는 신앙, 부활의 신앙이 이런 신앙이 자연스럽게 그 다음 세대에 이어지는 것이다. 갑자기 판이 뒤집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삭의 평온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이삭의 신앙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이삭은 어디서나 어떤 곳이나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아버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아내 리브가를 얻는 것도 그러고, 이삭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신앙,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신앙이 이삭의 순종의 신앙이 되었고, 말씀을 묵상하는 신앙, 어느 날 묵상하다가 자기 종이 자기 아내를 저 멀리서 데려오는 것을 보았다. 아주 미스코리아였다. 미스 이스라엘이었다.!!!. ㅋㅋㅋ 오늘 우리 가운데에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주시고 이삭과 같은 축복도 주시기를 바란다. 아멘,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곱 같을 것이다. 야곱은 특별히 한국 사람들의 성향은 체질이 비슷한 사람이 야곱이다. 그냥 아등바등한다. 7전 8기이다. 하면 된다. 그리고 또 안 되면 되게 하라, 등등,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 영광스럽게 지팡이를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 야곱의 생애는 최선을 다하는 신앙이었다. 오뚝이 같은 신앙, 웬만한 것은 끄떡도 안 하는 신앙,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해볼 수 없을까? 의 신앙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성향이 다 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이 처음에는 거칠고 다듬어지고 가면 갈수록 점점 온전해지고 점점 성숙해지는 것이다. 오늘 그 축복을 여러분들에게 주시길 소원한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어떤 신앙인가? 요셉은 자기 혼자 살았던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잘 순종하고 잘 감당하고 방향을 잘 잡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가정을 살렸다. 그 다음, 요셉은 자기 가정만이 아닐, 자기 민족도, 애굽이라는 당대의 최고의 민족을 살렸다. 자기만이 아니라, 통큰 신앙이었고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글로벌스탠다드로 올라가 버렸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처럼 이 영광스러운 토요비전 새벽예배에, 1년에 한 번 있는 성인식과 선교사 파송 식을 통해 오늘 이 시간들을 통해서 자기만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살리고 세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는 글로벌스탠다드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지난주에 튀르키에와 시리아에 구호헌금을 했다. 내 생각만큼 많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헌신을 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하면서 전전주 금요일에 UNHCR-세계긴급난민기구, 그다음에는 WFP-세계구호기구가 있다. 전 세계에 이런 NGO 단체 가운데 가장 큰 단체이다. UNHC, WFP는 기아대책 등도 다 있지만 전체 게임이 안 될 정도로 큰 단체이다. UNHCR는 소장들이 외국인이다. 그러니까 한국소장들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그 UNHCR은 천억이 넘는 일 년에 결산이 그 정도이다. 전에는 전부다 외국인이었는데 한국이 2차 세계대전이후에 한국은 원조 받다가 전 세계 이제는 원조하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UNHC, WFP이 난민기구 소장이 한국 사람이 되었다. 물론 외국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 한 분은 WFP 소속은 우리 교회에 교인이시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역이 우리의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UN과 전 세계, 우리의 사역도 글로벌 스탠다드로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게 요셉의 역할이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오늘과 같이 믿음의 세대 계승을 반드시 이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위에 은혜를 덧입혀 주시기를 축복한다. 정말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는 사사기에 보면 그 유일한 순종의 세대가 참 멋진 순종의 세대가 다음 세대는 사사기에 보면, 
 
*사사기 2:11,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그 선대의 신앙을 다 잃어버렸다. 구약의 유일한 여호수아 세대이다. 거의 흠결이 없었다. 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 신앙계승을 잘못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사사기에 암흑과 같은 어려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여러분들이 ‘주의 영광이 이곳에 가득해’ 를 부른 것이 은혜이다. 우리 다시 한 번 찬양해 보자. 다음의 세대 계승을 위해서 찬양을 해야 한다. 여러분들이 기백을 가지고 모두가 다 소망을 가지고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확신하며 부르겠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 올 한 해 주제곡이다. 잘 불러서 은혜와 평강이 가정에 있기를 바란다. 
 
♧요약
오늘 대학부와 청년들은 하나님 한국교회 아름다운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루는 신실한 제자가 되어서, 주일학교 자녀들과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너의 디모데가 어디 있느냐?’ 를 생각하면서 양육과 섬김을 통해서 다음세대를 계승할 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가야 한다. 우리들은 나의 디모데는 어디 있는지를 깨달아서 똑 같은 물과 똑 같은 불과 똑 같은 칼이지만 제대로 된, 물과 불과 칼이 되어 명장을 남기고, 시대를 섬기고, 주님의 심정을 깊이 아는 자로, 착한 목자, 착한 양이 되어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영적 성인식과 캠퍼스 선교사 파송 식을 통해 온전한 신앙고백으로 무장되고, 비대칭 전략으로 비상하는 은혜를 체험하고 복음이 되기를 바란다. 
-사도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다시 아브라함에게로 돌아가서 그 누구에게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대의 시험과 이에 따르는 믿음의 행위의 본보기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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