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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3년 3월 29일)
제목:"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말씀: 여호수아 15:16-19
찬양인도: 쉐키나, 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백승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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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15:16-19,
16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17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18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19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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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준 부목사님
-영혼의 봄 동산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성도님을 한 분 한분을 축복한다. 주님께서 회복을 넘어 부흥케 하시는 그런 은혜를 이 밤에 허락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읽어보겠다. 여호수아 15장 16절에서 19절이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믿음 보고의 대명사 같은 갈렙의 마지막 행적을 적고 있는 본문의 말씀이다. 여호수아 15장 말씀은 유대 백성들이 땅을 분배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 장면 속에서 특별히 이 갈렙 가족의 귀한 이야기를 우리 가운데 더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씀이 여호수아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사기 1장에 다시 한 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동일한 말씀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은 흔치는 않는데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저는 바로 믿음의 세대계승을 위해서 철저히 준비하는 갈렙의 모습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렙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잘 알듯이 열 두 지파를 대표해서 모세가 정탐꾼으로 보내게 되는데 유다지파의 대표로서 그 땅을 밟았던 사람이다. 여호수아와 함께 믿음 보고를 하였고 ‘그 땅을 능히 우리가 취할 수 있노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믿음대로 사십 년이 지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거인들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을 믿음을 가지고 취했던 사람이 바로 갈렙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드빌’이라는 곳을 점령하게 되면서 뭔가 새로운 장면을 우리 가운데 보여주고 있다. 잠깐 지도를 통해서 드빌이 어떤 곳인지를 한 번 살펴보기를 원한다. 작지만 사해가 보일 것이다. 사해 옆에 엔게디라는 도시가 보일 것이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보게 되면 드빌이 있다. 드빌 위쪽으로 갈렙이 정복했던 헤브론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예루살렘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저 드빌을 점령하면서 그가 잠시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드빌’이라는 곳은 원래 이름이 기럇세벨 이라는 지명이었는데 그 뜻은 책에 도시라는 뜻이다.


이름 자체가 세련된 듯하다. 무언가 문화가 발전되어 있고 그 문화가 있을 만큼 군대도 잘 갖추어져 있는 그런 방어 조직이 있었지 않을까 하는 곳이다. 이러한 드빌을, 기랏세벨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가 한 가지 조건을 내 본다. 이 드빌을, 기럇세벨을 정복하는 자에게 내 딸, 악사를 주겠노라고 선포하고 있다. 왜 갑자기 믿음의 사람, 그리고 승승장구했던 갈렙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꺼냈을까? 아마도 이렇게 추측해 볼 수가 있다. 그의 나이가 85세가 되었는데 헤브론까지는 점령할 수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와 같은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이제는 이 모든 것들을 그가 감당할 수 없기에 이제는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고 여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만용을 부리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것도 지혜로운 지도자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다. 저는 그렇지만 여기에는 특별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악사를 부인으로 줄 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땅을 유업으로 주는 것까지 치밀하게 갈렙이 준비하여서 다음세대를 일으키기 위해서 그가 한 가지, 한 가지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여기서 보면 악사를 전리품 같이 주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그러한 문화에는 현재의 문화로 평가할 수 없는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리고 악사조차도 이와 같은 아버지의 행동에 동의하면서 적극적으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제 믿음의 세대계승을 위해서는 마치 갈렙이 헤브론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믿음으로 행동하였듯이 그와 같은 믿음이 일어나서 그 드빌, 기럇세벨을 점령해야 되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우리가 갈렙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갈렙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갈렙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흥미롭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민수기 32자아 12절을 보면 이렇게 나온다.

*민수기 32:12,
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우리는 잘 알고 있듯이 갈렙은 유다지파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 또한 그나스 사람, 도대체 그나스 사람이 무엇인가? 성경을 잘 살펴보면 그나스 사람에 대한 힌트를 살펴볼 수가 있다. 바로 창세기 36장에 나와 있다.
*창세기 36:15을 읽어보겠다. 15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 말씀을 비추어볼 때 갈렙이 그나스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은 에서의 후손, 에돔 족속이었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다. 원래 유다족속은 아니었고 그나스 사람이었는데 출애굽 그 시절에 허다한 잡족들이 같이 출애굽을 하여서 이스라엘 백성과 나오게 된다. ‘그때에 유다지파에 함께 편입되지 않았나?’로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더 살펴볼 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뜻이 있지 않은가? 여러분 갈렙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뜻밖에도 그의 이름의 뜻은 개라는 뜻이다. 도그, 라는 뜻이다. 갈렙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에돔족속, 이방 족속 개였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그가 믿음의 대명사와 같이 변화된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출애굽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을 친히 경험하였고, 이 분,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요, 내가 유일하게 섬길 분이라는 것을 확신이 섰던 것 같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었던 갈렙은 확실히 깨달았다. 참된 이스라엘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향한 참 된 믿음에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이제 딸 악사를 통해서 이룰 다음 세대는 믿음의 세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그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런 세대를 일으키기 위해서 그런 기회를 제공하고, 믿음으로 자기가 마치 헤브론 땅으로 나갔듯이, 믿음으로 이제 드빌을 정복할 그러한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마치 보면 이 갈렙의 조카와 같이 표현되어 있는 옷니엘이 그 일을 취하게 되는 것을 본다. 옷니엘이 동일하게 믿음으로 일어나서 드빌을 취하게 되고, 그 옷니엘은 사사기를 보면 첫 번째 사사가 되어서 또한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구원자로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들을 보게 된다. 철저하게 준비되고 사람을 키웠기에 대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이끌 수 있는 믿음의 명문가를 이루었던 것을 보게 된다. 바로 갈렙은 후세를 준비하고 믿음의 다음세대를 위해서 애썼음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어제 저희 사랑의 교회를 사역하시다가 한 지역 교회로 맡아 섬기시는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목사님을 통해서 어떻게 목회를 하시는지 여러 가지 궁금하였는데 첫 마디부터 너무나도 한국교회 현실이 어렵다는 것을 들었다. 다른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교회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도 사랑의 교회에서는 많은 젊은 분들을 또한 이렇게 많은 젊은 세대들을 있지만 한국교회 목회 현장에 갔을 때 가장 절망적인 것은 젊은 사람들, 특히 3-40대를 찾아보기 너무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80대의 권사님이 식판을 받아 손을 떨면서 힘들게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고서는 그 애처로운 모습에 달려와 식판을 대신 받으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 또한 손이 떠시면서 그 식판을 받아서 대신 들고 가 주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제가 영국 웨일즈에 있을 때, 이와 비슷했다. 영국의 1904년 ‘모리아 교회’라고 그 교회에서 엄청난 대 부흥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영국이 웨일즈를 갔을 때, 그 교회를 방문하게 되는데, 그 교회를 소개해 주시고 부흥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는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이 손님들에게 차를 따라 주시면서 저에게 대접을 해주셨는데 손을 떨면서 차를 따라 주셨다. 그분이 그 일을 섬기시냐면 그 교회에서 가장 젊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나이대가 80대가 되셨던 것을 제가 기억한다. 참 한국교회의 현실이 저희가 그토록 유럽교회 모습과 비슷해지지나 않나! 그런 걱정이 된다.

그럴 때일수록 믿음의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이 갈렙의 모습을, 자기 딸 악사에게 믿음의 사람, 옷니엘을 예비시켜 주기 위해서 참으로 치밀하게 준비하는 갈렙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갈렙은 믿음의 세대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믿음의 세대계승은 사명의 계승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옷니엘은 드빌을 점령하였고, 악사를 아내로 얻게 된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 15장은 땅을 분배한 이야기이다. 이들 악사와 옷니엘에게도 땅을 배분할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들에게 어떤 땅이 주어지는 건가? 저희는 이 땅 분배에 관심이 많지 않은가? 한국 사람들처럼, 부동산에 한이 맺힌 사람들은 없는 것 같다. 갈렙이 정복한 헤브론 땅은 장차 수도권이 될 그런 요지였다. 헤브론 땅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믿음으로 살아갔던 땅이었고,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장사(葬事)한 땅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 와서 처음으로 7년간 다스렸던 땅이 바로 헤브론 땅이었다. 바로 그 헤브론 땅을 갈렙이 정복하였고, 그 갈렙이 정복한 땅에 헤브론을 조그만 내려갔을 때가 드빌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요충지(要衝地)였다. 소위 말해서 노른자위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갈렙이 이 악사와 옷니엘에게 준 땅은 바로 그런 노른자위 땅이 아닌 아니 흰자위도 되지 못한 네겝 땅(메마른 땅)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 네겝이 어떤 땅이었는가? 사진을 준비했다. 보면 사막은 아니지만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황무지(荒蕪地) 같은 곳이 네겝 땅이다. 겨우 낙타 떼나 지나갈 수 있는 그런 땅이다.

왜? 좋은 땅도 있는데, 헤브론과 드빌과 같이 그런 좋은 땅도 있는데, 갈렙은 자기 딸의 부부에게 이 네겝 땅, 남방 땅을, 바로 황무지와 같이 건조하고 사람이 살아가기 힘든 그런 땅을 그들에게 유업으로 주었을까?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네겝 땅이 분명히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지만 그들에게 사명을 맡긴 것 같다. 바로 그것을 사람이 거할 수 있고,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땅으로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바로 편하게 살 수 없는 그곳을 모든 것을 갖추어진 땅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근면하게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그 땅을 개척하고 하나님 백성이 살만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것에 대한 사명을 갖고 그들에게 네겝 땅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성경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바로 네겝 땅이 갖고 있는 전략적인 위치이기 때문이다. 바로 갈렙이 정탐꾼으로 자기가 젊은 40세에 정탐꾼으로 걸어왔을 때, 그 땅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민수기 13장 17절을 보면,

*민수기 13:17,
17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네겝 땅을 본인이 통괴 해서 네겝 땅을 정탐했던 것이다. 그 땅을 정탐할 수 있었던 곳이 그만큼 네겝이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고 그곳에 수비가 허술했기 때문에 쉽게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수기 13장 22절에도 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모세의 말씀이다.

*민수기 13:22,
22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든든하게 지키라는 그 사명을 지키면서 자기 딸 악사와 또한 사위 옷니엘을 그 땅으로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람들, 그리고 인물들은 어디서 길러지는지 아는가? 광야와 같은 네겝 땅에서 길러진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헤브론과 같이 좋은 곳, 그곳을 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인물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항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던 곳은 광야였고, 황무지였고, 고난 속에서였다. 또 하나님께서 네겝과 같이 황무지와 같이 어려운 시간을 주시게 된다. 왜? 그런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가? 그런 시간이 찾아와야지만, 그런 환경이 찾아와야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그 삶을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이란 언제 되는가? 우리의 힘에 능력으로 넘어갔을 때, 힘들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운동이 되고 그때부터 우리의 근력이 붙게 되면서 우리의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믿음 또한 그러한 것이다. 편안한 곳에서 모든 것이 갖추어진 환경에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훈련에서 우리를 광야로 부르실 때가 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이렇게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 광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에 순종하셔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네겝 땅으로 가는 이 모습 속에서 다음 세대가 준비되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와 같이 어려운 환경을 우리는 구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이런 것을 깨기 위해서 우리 담임 목사님께서 계속 말씀하신다. 자발적으로 고난을 받던지, 새벽기도회에 나오고, 토비새에 나와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바짝 엎드리든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쩔 수 없는 고난에 믿음에 성장하든지, 그 두 가지 아니고서는 우리 가운데 믿음이 성장할 기회는 없는 것 같다. 항상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을 받고 영문 밖으로 나가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서 모든 것을 쏟아부어주시는 그런 삶을 보여주셨다. 안전한 성합 그리고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영문 밖에 나가셔서 고난을 받으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걸어주셨다. 바로 그와 같이 사명을 위해서 네겝 땅을 가는 악사와 옷니엘의 모습 속에서 다음세대가 준비되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기꺼이 어려운 걸음을 걷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듯이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또한 동일하게 걸어가고 있는 사람인지 우리는 스스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그 십자가의 길을 걷고 예수님과 같이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고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을 통하여서 다음세대가 준비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렇지만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이 그 다음 말씀에서 기록되어 있다. 아름다운 장면이 그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네겝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길을 가려는 딸과 사위에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그래도 여인인 악사가 조금 더 현실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18절을 다시 한 번 제가 읽어보겠다.

*여호수아 15:18,
8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악사가 출가하면서 아버지기 네겝 땅을 준 것을 알았던 것이다. 아마 아버지를 통해서 그 땅을 받아야 될 이유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이다. “내가 정탐꾼으로 이 땅을 밟았을 때에 네겝 땅이 너무 허술해서 그곳을 쉽게 통과했으니 다른 적들도 그럴 수 있다. 네가 그 땅을 든든하게 지키고, 그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이제는 하나님의 땅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아마 그런 책임을 주었기 때문에 그 땅으로 갈 마음에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갈지라도 이건 그냥 가서는 안 되겠다는 이런 현실적인 생각이 있었다. 옷니엘은 그런 것도 없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남편을 설득해서 아버지에게 뭐를 청하자고 설득했다. 그리고서는 나귀에서 내렸다.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아버지는 직감을 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냥 가지 않게 두면서 아버지는 묻는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그랬을 때, “네게 복을 주옵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겝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주옵소서.” 네겝 땅으로 갈 때, “그 땅은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사명을 위해서 맡기신 그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가겠지만 그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축복과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오니 샘물을 주옵소서.” 라고 간구했다. 그랬을 때, 그 간구에 어떻게 응답했는가? 샘물을 달라고 단수로 간구했지만 어떤 응답이 듣게 되는가? 윗샘과 아랫샘, 두 배로 복을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버지 갈렙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네겝 땅에 가서 그 땅을 변화시키고 그 땅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샘물이 필요한데 그냥 샘물이 아니라, 윗샘과 아랫샘, 그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그들을 축복해야만 된다는 것을 아버지 갈렙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자에게 이와 같은 기도 응답의 축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은 누구에게 허락하시는지 아는가? 바로 주님의 나라와 그를 위해서 순종하며 그 길을 걷는 자에게 축복이 기도 응답의 축복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면 너무나도 많은 기도 응답에 대한 약속이 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기도에 대해서 쉽게 생각할 것이다.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너희가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에게 열릴 것이요.” 그러면서 수많은 기도약속에 대한 응답이 있기에 우리는 기도에 대한 그런 확신이 있지만, 막상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이 많이 없는 것 같다. 왜 그럴까? 한 번 생각해 보라. 기도라는 것은 그냥 우리가 편안하게 앉아서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응석부리기 위해서 그런 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악사와 옷니엘이 네겝 땅을 정복해서 그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왜적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순종하며 나아갈 때, 샘물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더 놀랍도록 채우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와 같은 기도응답을 경험할 때, 우리는 담대해지게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 맡기시는 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를 책임지시고 끝가지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의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갈렙이 악사에게 묻는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바로 그녀는 무엇을 원했던 것인가?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필요하다. 그 땅을 개척하기 위한 샘물이 필요하다. 이 사명을 위해서 도망치지 않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간구한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간구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한 번 돌아보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참 안타까워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복음 6장 31-33절이다.

.*마태복음 6:31-33,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늘에서 들으셨겠는가? 그런데 기도의 내용을 잘 들어보면 무엇인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내 생활의 안전한 지대를 벗어나지 않은 채, 좀 더 많은 축복, 좀 더 많이 흡족하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응석을 부리듯이 하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나? 하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돌아보게 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의 모습이 이러지 아니한가?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그런 세상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은행이 흔들리고 있는 이런 시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하나님, 나를 보호하여 주시고, 이 모든 환난에서 나를 지켜주시라고 우리는 기도하고 있다. 기도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악사와 옷니엘이 네겝 땅을 향하여 가면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명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신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듣기를 원하시는 기도가 하나 더 있다. 시편 2장에 나오는 기도이다.

*시편 2:7-8,
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듣기 원하시는 기도, 바로 2장 8절이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는 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확실한 약속을 주시는데 여러분, 이 기도를 해보신적이 있는가? 이방나라를 유업으로 구하는 기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듣기 원하시는 기도는 이 정도의 기도이다. 마치 네겝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기 위해서 사명을 위해 살아가듯이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지 않은 땅,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지 않은 불모지와 같은 땅, 바로 그것이 우리 가족일 수 있고, 우리 직장일 수도 있고, 아니 한참 라마다 기간에 하나님을 모른 채, 잘못되게 열심을 살아가고 있는 선교 현장일 수도 있다. 바로 그런 선교 현장을 품고 아버지 하나님, 그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땅, 하나님께 예배하는 땅으로 되기를 원한다고 그 열방을 향해서 부르짖는 그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다. 그 땅을 이제 네가 취라고 마음을 주셨을 때,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담대한 응답을 향해 가는 그러한 순종의 발걸음이 선교를 위한 기도이고, 또 전도를 위해 기꺼이 내 입을 벌려서 하나님 말씀을 담대히 증거 하는 그와 같은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가 담대한 믿음과 담대한 기도로 살아갈 때, 하나남께서 그 기도의 응답을 주시리라 약속하신다. 우리가 이 시대에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를 하나님께서 찾고 계심을 확신하기 바란다.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께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며, 기도를 응답하시는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필요한 땅을 위해서 내가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저 북한 땅이 변화되게 하시며, 저 아랍 민족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을 모르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 가운데 널리 퍼지게 되기를 소원하고 간구하자. 우리의 기도가 땅 끝까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순종하며 그리고 그 땅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땅위에서 살아가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그 선교사들이 믿음의 영웅과 같이 나가 있지만 우리의 기도와 함께 그것을 위해서 싸우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땅을 하나님의 땅, 우리의 소유의 땅으로 변화시키실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이 약속을 붙잡고 더욱더 주님의 나라를 꿈꾸며 믿음의 다음 세대가 힘 있게 일어나서 갈렙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용기를 얻었듯이 또 옷니엘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혼란의 시기에 첫 번째 사사로 그 땅을 변화시켰듯이 계속된 믿음의 계승으로 또 믿음의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 한국교회가 온 열방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제사장 나라로써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는 주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여 주시길 다시 한 번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쓰임 받게 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갈렙의 신앙이 딸 악사와 사위 옷니엘에게 이어져 믿음의 명문가문이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듯이 우리와 한국교회가 선대의 강점을 다음 세대들에게 체계적으로 계승하여 세계 선교에 사명을 감당하는 자가 되고, 제사장 나나로 쓰임 받으며,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 같이 열악한 복음의 불모지와 세계선교 현장으로 찾아가 그곳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로 변화시키는 부흥 도구의 주인공들로 헌신하며 십자가의 길을 위해 걸어갈 때, 위샘과 아랫샘의 은혜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더욱 더 담대하게 믿음보고를 써 가는 부흥의 용사로 쓰임 받아야 한다.

-이 갈렙의 이 마지막 행적을 통해서 믿음의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갈렙의 모습을 보고 우리 가운데서도 다음세대들이 필요함을 깨달아서 편안한 그런 곳이 아닌 네겝 땅과 같은 황무지에서도 주님을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시며 그들을 끝까지 지키시는 모습을 교훈삼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다음세대를 잘 세우고, 다시 한 번 그 믿음의 세대들이 그 땅을 밟고 그 땅을 책임지는 세대가 되기를 소원한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믿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우리가 그것을 구하면 우리는 주님이 일을 해주심을 믿어야 한다. 매일 삶이 네겝 땅 같이 황무지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주님 붙들고 나아가면 부족함이 없는 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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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3월 20일 (790)
1. 예금자들이 돈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며 발생하는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를 뜻하는 말은?
①오픈런 ②오픈뱅킹
③뱅크런 ④배드뱅크
2. 한국은행에서 기준금리를 비롯해 통화 관련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 핵심 역할을 하는 합의체 의사결정기구는?
①금융위원회 ②금융감독원
③금융지주 ④금융통화위원회
3. 한국은행의 설립 목적이자 가장 중요시하는 핵심 정책 목표는 무엇일까?
①환율 안정 ②물가 안정
③저축 증대 ④경기 부양
4. 커피와 설탕, 삼겹살과 상추, 실과 바늘, 자동차와 엔진오일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는?
①정상재 ②공공재
③대체재 ④보완재
5. 자기 소유 주택을 담보로 맡기고 노후 생활자금을 매달 받을 수 있는 금융상품은?
①국민주택기금 ②국민연금
③주택연금 ④연기금
6. 시장 수익률을 초과하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 펀드매니저들이 적극적인 운용 전략을 펴는 펀드를 가리키는 용어는?
①인덱스펀드 ②헤지펀드
③액티브펀드 ④매칭펀드
7. 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기 위해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사업자를 뜻하는 용어는?
①디벨로퍼 ②애널리스트
③퍼스트무버 ④헤드헌터
8.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특정 디지털 콘텐츠에 고윳값을 부여해 원본을 식별하게 해 주는 ‘대체불가능토큰’은?
①NDA ②NFT ③TDF ④T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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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혁신' 플랫폼과 기득권 집단의 갈등 해법은?


그래픽=이은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법률 서비스 플랫폼인 ‘로톡’이 변호사단체와의 갈등에서 일단 승기를 잡았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달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소속 변호사의 로톡 가입을 막은 데 대해 “경쟁을 제한했다”며 총 2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로톡은 매월 일정액을 받고 변호사들의 광고를 게재합니다. 변호사단체는 이것이 변호사법에서 금지하는 변호사 소개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소속 변호사의 로톡 이용을 막고 로톡을 이용할 경우 징계하기로 했습니다.
반면 로톡 측은 법률시장의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고, 소비자의 변호사 선택권을 돕는 단순 광고일 뿐 위법이 아니라고 맞서왔습니다. 법률시장에서 거래하는 당사자 중 한쪽(법률 서비스 이용자)이 다른 한쪽(변호사)에 비해 정보가 부족해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번 공정위 결정에 대해 벤처업계는 기득권 단체의 이익 대신 ‘혁신’의 손을 들어줬다고 반겼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단체는 “불복 소송을 제기하고,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겠다”고 반발했습니다. 양측의 갈등은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로톡 같은 플랫폼이 수없이 많이 등장했고, 이들 중 상당수가 기득권 집단과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의료계, 세무업계, 감정평가업계, 택시업계 등과의 갈등이 대표적입니다. 플랫폼과 기존 업계의 주장을 살펴보고 플랫폼과 기득권 집단 간 갈등의 해법에 대해서도 생각해봅시다.
플랫폼 "이용자를 위한 혁신이다" 기존 업계 "위법이라 반대한다"
로톡과 같은 플랫폼은 디지털 경제의 토대입니다. 디지털 경제는 인터넷, 정보통신 등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네트워크와 데이터 중심의 비즈니스가 이뤄지는 경제를 말하는데요. 플랫폼을 통해 여러 경제주체가 연결되고, 플랫폼에 남겨진 빅데이터가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원료가 됩니다.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이라는 이름으로 기존 산업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 디지털 경제에 편입시키려는 노력도 활발합니다. 로톡은 기존 법률 서비스 시장에 온라인 플랫폼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디지털 전환의 사례로 볼 수도 있습니다.
산업화의 역사와 디지털 경제
디지털 경제와 플랫폼을 더 잘 이해하려면 산업화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산업화의 역사에서 디지털 경제와 플랫폼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20세기 초 세계경제는 산업화를 통한 대량생산이라는 대변혁을 맞게 됩니다. 그전까지 장인(匠人·artisan)이 만들던 물건을 기계를 이용해 대량으로 생산하게 된 것이죠. 이 시기의 대량생산 방식을 가리켜 ‘포디즘’이라고 부릅니다. 미국 포드자동차가 비숙련 노동자들과 컨베이어 벨트를 활용해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했는데요. 이렇게 대량생산된 자동차가 비숙련 노동자들에 의해 소비됨으로써 대량생산·대량소비의 구조가 형성됐습니다. 이 구조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적 표준으로 자리잡습니다.
1970년대 대량생산 체제는 위기를 맞습니다. 대량생산된 제품으로 시장이 포화상태에 빠진 가운데 오일쇼크가 터지자, 세계적 표준으로 군림했던 미국 제조업이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 틈을 비집고 일본의 도요타시스템이라는 유연생산방식이 등장합니다.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 시스템’으로도 불리는 이 방식은 고객의 다양한 주문에 신속히 대응해 다양한 품종의 제품을 소량으로 생산합니다. ‘소품종 대량생산’이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뀐 것이죠.
플랫폼 기반 디지털 경제는 산업화의 역사에서 세 번째 분기점으로 일컬어집니다. 장인 생산방식을 극복한 대량생산방식과, 포디즘(대량생산방식)을 넘어선 도요타시스템(유연생산방식)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변화라는 것이죠.
플랫폼의 혁신과 거센 반대
디지털 경제에서 플랫폼은 해당 분야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혁신’을 내세웁니다. 이는 기존 플레이어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로톡에 대해 변호사단체가 크게 반발하는 것처럼 말이죠. 로톡은 온라인으로 변호사 정보(광고)를 소비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정보 비대칭이 해소되고, 불법 법조 브로커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변호사단체는 “법률 플랫폼이 영리를 극대화하기 위해 광고를 공격적으로 하게 되면 플랫폼을 이용하는 변호사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높아질 것”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선택을 받기 위해 저가 수임료 출혈경쟁을 벌일 수밖에 없고, 결국 법률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로톡이 혁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변호사단체는 말썽을 일으킬 위험한 시도로 보는 것입니다.
혁신을 주장하는 플랫폼과 그것에 반대하는 기존 업계 간 갈등 사례는 매우 많습니다. 성형 정보 플랫폼 ‘강남언니’는 대한의사협회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의사협회는 이 플랫폼이 성형 전문 병원들로부터 돈을 받고 광고를 게재하는 것이 의료법 위반인 병원 소개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강남언니 측은 “의사협회가 이용자와 병원 모두에 도움이 되는 디지털 서비스를 사실과 다르게 불법으로 몰아간다”고 반박합니다.
원격진료 플랫폼 ‘닥터나우’는 대한약사회 등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세금 신고 및 환급 서비스 플랫폼 ‘삼쩜삼’은 한국세무사회, 공간 AI(인공지능) 스타트업 ‘빅밸류’는 한국감정평가사협회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NIE 포인트
1. 산업화의 역사에서 큰 변화들을 정리해보자.
2. 플랫폼 기업들이 주장하는 혁신의 내용을 설명해보자.
3. 기존 업계가 플랫폼에 반대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갈등 해결하려면 기존 제도의 안정성과 혁신의 사회적 이익을 균형있게 고려해야
자동차는 18세기 유럽에서 발명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동차산업은 유럽이 아니라 미국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기득권 집단’에서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유럽에선 소수 귀족과 부유층을 위한 값비싼 자동차를 장인(匠人·artisan)에 의한 생산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 유럽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들이 생겨났죠. 자동차산업이 발달하려면 기계를 도입해 대량생산이 이뤄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장인 계급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앞세워 이에 반대했습니다. 반면 미국에는 장인 계급 같은 기득권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기득권이란
자동차산업을 태동시킬 수 있었던 20세기 초 미국과 달리, 보통은 로톡 사례처럼 기득권 집단이 존재합니다. 기득권은 ‘이미 차지한 권리’입니다.
예를 들어 ‘택시 제도’를 볼까요. 우리나라에서는 택시 사업을 하려면 관할기관에서 면허를 받아야 합니다(면허제). 정부는 택시가 지나치게 많이 늘어나는 것을 막고 택시 승객 수요와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지역별로 택시 등록 대수를 설정한 ‘총량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택시 면허를 가진 사람(혹은 택시회사)은 면허제와 총량제라는 제도에 의해 기득권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택시 제도를 보호하려 합니다.
이처럼 기득권은 법률과 제도에 따라 정당하게 차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득권이라고 하면 대개는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를 쓰거나 법을 위반하는 경우가 있고, 기득권을 차지할 때 부정이나 불법을 저지르기도 해 부정적 인식이 생겨났습니다.
갈등은 왜 생기나
플랫폼의 역할은 기존 제도에서 다루지 않거나 모호하게만 규정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존 제도를 보호하려는 기득권 집단은 플랫폼을 ‘제도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판단합니다. 기득권 집단의 자기 보호 본능은 혁신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승차 공유 서비스 플랫폼 우버 사례를 봅시다. 우버는 미국에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자신들은 소비자를 위한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기존 택시업계는 택시 서비스를 독점하며 새로운 경쟁을 거부하는 집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혁신’과
그것을 거부하는 ‘독점’ 간 갈등이라는 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해 정당성에서 우위를 차지했죠.
독일에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택시업계가 지역적으로 파편화된 미국과 달리 독일은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우버가 진출하자 “우버가 독일 시민의 복지를 저해한다”며 재빠르게 대응했습니다. 결국 독일에서는 우버의 혁신이 좌절됐습니다.
제도 내의 혁신
우리나라에서는 어땠을까요. 2013년 우버가 한국에 진출하자 기존 택시와 비슷한 서비스를 ‘면허제’와 상관없이 운영하는 점이 문제가 됐습니다. 택시업계의 주장을 고려해 정부는 면허제와 총량제의 원칙을 지키면서 새로운 서비스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결국 우버는 SK텔레콤 자회사인 티맵모빌리티와 합작회사인 우티(UT)를 만들어 택시 호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제도 내의 혁신’이라고 부릅니다. 혁신을 주장하는 플랫폼이 기존 제도에 편입하는 방식으로 순응해 기존 제도 내에서 혁신을 실현하는 것이죠. 우버에 이어 2018년 등장했던 타다는 ‘타다 금지법’으로 서비스를 중단했다가 지난해 4월 7~9인승 대형 택시 호출 서비스 ‘타다 넥스트’로 돌아왔습니다. 우버처럼 제도 내의 혁신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죠.
기득권 집단과 혁신을 외치는 플랫폼 모두 절대선(善)이나 절대악(惡)일 수 없습니다. 다만 모든 사회 발전은 ‘혁신’에서 비롯합니다. 기존 제도의 안정성과 혁신이 가져올 사회적 이익을 고려해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장경영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NIE 포인트
1. 기득권은 왜 부정적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자.
2. 기득권 집단과 플랫폼이 갈등하는 이유를 설명해보자.
3. 기득권 집단과 플랫폼 간 갈등의 해결 방법을 토론해보자.

장경영 기자 longr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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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3월 26일)

제목: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
말씀: 마태복음 27:27~32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오우진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마태복음 27:27~32,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ㅡㅡㅡㅡㅡㅡ
 
▶찬양대가 '험한 십자가 능력 있네.'를 불렀다. 이 십자가의 은혜 찬양으로 십자가의 능력과 기름부음의 체험이 있기를 바란다. 지금 찬양대 뒤에다 ‘새로운 호흡, 믿음 보고 2.0’의 배경이 바뀌었다. 벚꽃이 만개 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번 주부터 제주도 벚꽃 봉오리가 활짝 피어가지고 이번 주 시작으로 대한민국이 꽃 대궐을 이룰 것이다. 오늘 우리도 신앙과 믿음과 영적으로 만개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십자가의 은혜로 다 영혼의 봄 동산을 만끽하기를 바란다. 오늘 395명이 입교와 학습과 세례식을 앞에 놓고 모두가 생명의 봄 동산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이 예배에 한 명도 그냥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십자가에 관해서 우리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지만 좀 독특하게 제목을 정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인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여러분, 익숙하지 않는 성경의 인물을 앞에 놓고 세례식을 거행하도록 하겠다. 오늘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약칭으로 구레네 사람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로마 병정의 그 강제적인 명령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짓다가 억수로 은혜를 받은 사람이다. 오늘 이 자리에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 왔다가 계신 분은 놀라운 은혜를 받고 돌아가시기 바란다. 32절을 집중해서 보겠다.
 
*마태복음 27:32,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여기에 눈에 띄는 것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구레네 라는 곳은 지금 리비아, 아프리카 북부이다. 당시 고대 근동사회의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그 시대의 전체 세계였다. 아프리카 북부는 한니발을 비롯하여 굉장히 문화가 발달하고 번영하는 지역이었다. 요즘 말하면 디아스포라 교민 출신 유대인인데 당시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기도 하고 전 세계 118개국에 750만의 디아스포라가 흩어져 있는 것처럼 유대인으로서 디아스포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교표 디아스포라로 살지만 꿈이 있었다. 시간도 갖고 돈도 잘 저축했다가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께서 절기를 지키라고 하라는데 유월절이라든지, 장막절, 오순절, 이런 절기를 한 번 드려보는 것이 이 사람들의 꿈이었다. 그래서 이슬람 사람들이 메카에 가서 예배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이렇게 마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꿈이었다. 구레네 사람 시몬도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하는 것이었다. 캘리포니아 가면 우리 교포들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사랑의 교회 다음 달 특새 오는 게 소원이다. 서초 여기 근처에 살면서도 특새 안 나오는 사람들은 그것은 아니다. 이해 불가이다. 여하튼 구레네 시몬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다. 갑자기 지나가다가 보니까 사람들이 막 소음을 내고 때창이 들리고 와글 하고 소리가 들려서 보니까 시몬이 궁금해가지고 가보니 어떤 한 분이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온 몸이 채찍질을 맞아 엉망이 되신 것을 본 것이다. 본문 26절을 보면,
 
*마태복음 27:26,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그러면 어느 정도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을 보면 27-28절을 보면 더 알 수 있다. 저는 이 내용을 어릴 때부터 많이 읽었지만 이번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찡한 것이다.
 
*마태복음 27-30,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조롱하기 위해서 당시 왕에게는 자주색 옷을 입힌다고 했다. 홍포를 입히고 금관을 씌워야 하는데 그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서 머리에 엮었다. 기가 막히다. 그리고 갈대를 오른 손에 들렸다. 자세하게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 왕은 금 홀을 드는 것과 같이 대신에 갈대를 오른손에 들리고 그리고 그 밑에서 병정들이 희롱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하라.’ 하면서 예수님께 침을 뱉고 오른손에 들었던 갈대를 빼앗아서 그 갈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머리를 치는 것이다. 너무 아프셨을 것이다. 31절을 보면,
 
*마태복음 27:31,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치 짐승처럼 끌려가셨다. 속죄양으로 예수님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모습을 디아스포라 교민으로 있던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드리러 왔던 구레네 시몬이 이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형벌을 받고 있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로마 병정이 창을 들이대면서 큰 소리로 “너 이리와, 네가 대신 십자가를 져야 한다.” 당시 식민지 사람은 로마병정이 명령을 내리면 꼼짝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법적으로 옹호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시몬이 강제적으로 끌려간 것이다. 시몬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날벼락이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를 분통이 터지는 일이였다 일생동안 준비해서 오고 싶었던 예루살렘을 방문했는데 도대체 알 수도 없는 죄수의 십자가의 틀을 대신 짊어지고 형장까지 가야한다고 자신의 신세를 생각할 때, 너무 화가 났을 것이다. 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도록 하셨는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주님은 구레네 시몬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줄 확신한다. 구레네 시몬 같은 영혼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시길 원하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진 것 같지만 시몬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이었다. 거기에 이 시몬을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만들겠다는 주님의 놀라운 계획이 담겨있었다는 것이다. 주님은 골고다로 향하시는 그 어려움조차도 쓸모없는 시간으로 낭비하지 않으시고 한 영혼이라도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시는 놀라운 계획을 가신 것이다. 주님을 찬양한다. 그 대상이 구레네 시몬이었다. 오늘 이 예배에 아내가 가자고 하니까 억지로 이 자리에 오신 분도 계실 것이다. 오늘 이 자리에 내가 내키 않는데 계신다면 깊이 생각하는 예배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관련해서 십자가와 연관이 되어 있으면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늘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면 그 인생을 하나님은 내버리지 않으시고 놀라운 대 반전을 일으켜 주신다. 이 구레네 시몬 입장에서는 화가 날 일이고, 분통터지는 일인데 갑자기 자기 계획도 다 포기해야 되고 십자가를 지고가야 할 그런 상황인데,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 때문에 구레네 시몬의 집안이 놀라운 믿음의 가문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 십자가를 진 것 때문에 나중에는 이 구레네 시몬이 영광스러운 선교 적 삶을 살게 되었다. 제 이야기가 아니고 로마서 16장에 보면 알 수 있다. 바울이 뭐라고 하냐면,
 
*로마서 16:13,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여기에 바울 사도가 믿음의 영적 지도자들 가운데 루포와 루포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는데 루포의 어머니는 내 어머리라고 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마가복음 15장에 보면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5:21,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여기 보면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하고 나중에 누가복음에도 꼼짝 못하게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강제성이 담겨있다. 억지로 붙잡아서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이었는데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알렉산더와 루포에게 문안하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 내용이 뭐냐면, 로마의 알렉산더와 루포가 로마의 영적 지도자였고 어머니가 바울의 어머니와 같은 그런 대우를 받을 정도의 놀라운 가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믿음의 명문가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된 것이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졌는데 시몬의 아내와 알렉산더와 온 가족을 믿음의 놀라운 가족으로 만드신 주님을 찬양한다. 억지로의 부담을, 억수로의 축복을 만드신 주님을 찬양한다. 오늘 이 자리에 아내로 특별 요청으로 오신 분도 계실 것이다. 오늘 세례 받는 이들도 내게 주신 메시지가 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영적 가족 여러분,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가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실 것이다. 젊은이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하면 목걸이 십자가도 뒤로 넘겨 걸고 있다. ㅋㅋㅋ 여러분, 그런 게 아니고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힘이 들 때도 있고 힘이 빠질 때도 있다. 오죽하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의 짐 같은 고생’이라고 하겠는가?
 
저의 부친도 어려울 때, 두 분이 손잡고 찬송을 하시는데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고 찬송하신다. 신앙생활이 어릴 때부터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다. 쉬운 것은 아니다. 그 고생이 오늘 루포처럼 이유를 모를 때가 있다. 다시 한 번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가면 억수로 축복을 주심을 찬양한다. 구레네 시몬이 그랬다. 예를 들어서 토비새때에 기도의 지팡이 이것 들고 오라고 했는데 번호를 부를까 싶어서 억지로라도 참석을 하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나오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 이 기도의 지팡이가 그냥 지팡이가 아니다. 나중에 길갈에 열두 돌을 기억할 것이다. 나중에 자녀들이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냐고 물을 때에 하나님의 기적 같은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는 것이 거기에 기념비가 열두 돌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나중에 여러분들이 코로나의 강을 어떻게 건넜으며 우리가 힘들지만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이 코로나의 강을 건넌 줄 믿는다. 이것은 나중에 굉장한 신앙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코로나의 강을 건널 때, 마치 모세가 그 뱀 꼬리를 잡고, 그 뱀 꼬리를 잡으면 죽는다. 그러나 뱀 꼬리를 순종하여 잡을 때, 그 지팡이가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샘을 터트리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는 지팡이가 된 것처럼 이 지팡이를 억지로라도 감당할 때, 하나님은 베풀어 주실 것임을 확신한다. 제자훈련을 순장님들이 좀 받으라고 하면 일이, 삼년이나 튕기다가 하면 안 된다. 어떤 분은 “목사님, 저는 15년을 튕겼습니다.” 라고 한다. 제자훈련을 억지로라도 받으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다고 한다. 도망 다니다가 억지로라도 한 것이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했다. 새 생명축제에서 억지로 친구초대로 왔다가 예수님 영접하고 영적으로 수지맞은 분들도 계신다. 많은 분들이 내가 억지로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한다. 우리 순장님들이 5-10년씩 하다가 만만치 않은 분들은 내가 이렇게 힘든데 ‘내가 어떻게 이 어려운 가운데 영혼을 섬기냐’고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왜 없겠는가? 억지로라도 섬기는 자가 되면 하나님은 주실만한 은혜를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졌지만 하나님은 어떤 축복을 주셨는가? 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아주 탁월한 통찰력을 말씀한다.
-구레네 시몬이 짧은 시간 동안 십자가를 졌지만,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로인해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성경에 기록되었다. -스펄전 목사님-
 
그리고 오늘 2023년도 이 귀한 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아마 시몬이 이 알았다면 그 때 더 잘 졌을 것이다. 서울에 안아주심의 본당에서 본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기가 막힌 것이다. 시몬이 십자가를 억지로 질 때 성경에 그의 이름을 남긴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기쁘게 지면, 하나님 나라의 상급 책에 우리를 남게 할 것이다. 나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고, 핍박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 예수님 때문에 침 뱉음 당하고, 예수님 때문에 형제를 위해서 오리를 갈 것을 십리를 가게 되고, 예수님 때문에 남편과 아내에게 을이 되고, 이해가 되는가? 예수 잘 믿는 남편은 항상 을이다. 왜? 예수 믿으면서 그것 밖에 못해? 라고 그 순간 팍 죽는다. 예수님 때문에 자녀에게 부모가 을이 되고, 본을 보여야 하기에, 쉽지가 않으니까, 한 마디 쏘아주고 싶은데, 예수님 때문에 을이 되고 그렇게 되면 억지로 십자가를 지면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이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 구레네 시몬처럼, 아내나 남편이나 친구나 부모의 강권으로 참석한 분도 있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면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명에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여러분, 열두 제자들이 다 어디에 갔는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훈련했던 열두 제자는 어디에 갔으며, 주님이 특공대처럼 키운 70인 전도 대는 다 어디 갔고, 동지들이 많았는데 예수님께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겠다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똑 같은 베드로도 시몬이다.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다 있었는데 멀리서 구레네 시몬, 아프리카에서 온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어떤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는가? 여기에 하나님의 독특한 선교적인 섭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 지역에 있는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에도 구레네 복음이 필요한 것이었다. 선교 적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섭리가 필요한 것처럼 오늘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를 진 것 때문에 나중에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에 사람들이 막 성령의 역사가 있으니까 각 지역에서 대인 언어로 여러 출신들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다. 그 구레네 출신에 대한 아마 축복이 구레네 시몬이 가진 신앙적 은혜 때문에 영향을 끼쳐서 그랬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첫 교회가 된 것처럼 안디옥 교회의 무명의 전도자들 가운데 구레네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고, 또 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살로 파송시킨 그 Keyman들 가운데 루기오가 구레네 교포 출신이었다. 아마 이런 내용들을 볼 때, 구레네 시몬의 이런 십자가를 진 것 때문에 그 선교 적 삶을 통하여 구레네에 영향을 끼치므로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 된 것이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억지로라도 좋고, 떠밀려도 좋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오늘 시몬처럼 예수님의 형장까지 따라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세례식을 위해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죄를 짊어지시고 저주 받은 죽임을 당하고 계신 그 주님의 발자취를 오늘 한 번 따라가 보시기를 바란다. 이 순간이 사순절의 기간이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여기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고 다음 주에 있을 성찬, 오늘 세례식은 눈으로 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 체험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마무리 하려고 한다.

 
※아랍추장이 있었다. 이 아랍 추장은 큰 말 때를 거느리고 사막을 횡단하던 중에 갑자기 저 멀리 물이 보이자 그냥 사막을 달리던 말 떼들이 그 물을 향하여 질주를 향하기 시작했다. 그 추장 파라스가 말들을 시험하려고 전투 신호를 알리는 나팔을 불었다. 막 갈증에 시달리는 말들 가운데 가다가 멈추고 다섯 말만 전투 신호를 추장에게 돌아왔다. 이게 1635년의 있었던 이야기인데, 지금 이 아랍의 최고의 종마가 이 다섯 마리를 통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갈증에 시달리던 말들이 그 생수를 앞에 두고도 주인에게 순종한 이유가 무엇인가? 일순간에 물로 갈증을 채우는 것도 좋지만, 억지로라도 주인의 나팔소리를 따르는 것이 결국 자신에게 최고의 복이 된다는 것을 이 말들이 경험적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 말들이 순종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갈증에 시달인 말들처럼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주일 날 아침에 지난 한 주간 분주했으니까 오늘은 쉬고 싶을 때, 혹은 다락방이 있는 날은 마음에 안 드는 순원이 보기가 안 좋아서 빠지고 싶을 때가 있고, 친구가 벚꽃 구경 가자고 토요일 저녁에 기차표를 끊어 놓았다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한다. 세상을 향해서, 이럴 때일수록 토비새에 나와야 한다. 주일예배와 다락방에 가라고 제가 상징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주님의 나팔 소리를 좇아 억지로라도 주님께 참여하면 하나님은 구레네 시몬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이다. 아멘.

 
*누가복음 9:23,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신앙이다. 오늘 구레네 시몬을 통해 대 반전을 이룬 것처럼,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21세기의 구레네 시몬이 되어서 부활주일 날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믿지 않는 자들을 초청하는 그런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라고 소망한다.
 
♧요약
오늘 주님을 순종하여 한 분 한 분 세례를 받아서 인생의 before와 after가 달라지는 새 차원이 되고 그 은혜가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고 21세기의 시몬이 되어서 모두가 다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 억지로라도 기도의 지팡이를 들면 억수로의 축복이 될 것이다.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루게 하시며 영원한 명예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흥이 만개하는 영혼의 봄 동산을 경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사형 선고를 받고 나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하여 약간의 시간적 여유를 가졌어야 했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에 의해 제정된 법에도 죄수는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적어도 10일이 지나서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는 잠깐의 여유도 주어지지 않았다. 폭풍이 그치지 않고 계속 몰아쳤던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진 것으로도 그가 받아야 할 처벌로서는 충분했다. 몸을 죽이려는 자들은 몸만 죽이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하고자 했다. 즉 그리스도를 지키는 자들이 그를 능욕했던 것은 아마도 그에게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유희를 즐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면류관을 탐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게 면류관을 탐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에게 면류관을 씌워 조롱함으로써 즐기려했다.
 

 























-세례 간증- -서용구 성도, 우경의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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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3년 3월 25일)
제목: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영광스러운 교회"
말씀: 에베소서 2:19~22, 5:17
대표기도: 양명기 안수집사님(목양8팀, 남자대교구장)
찬양인도: 목양 8팀
말씀읽기: 청년 1국 송일광(청년1국 GBS리더), 김수민(대학5부 GBS리더)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에베소서 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ㅡㅡㅡㅡㅡㅡ
▶오정현 담임목사님-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영광스러운 교회
-함께 인사를 나눕시다. “우리는 영 가족입니다. 영적 가족입니다. 영원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가족입니다.!!!”오늘은 7천 기도용사로 기도를 하지만 특별히 다락방 식구들 같이 모여 기도할 때, 은혜를 더 주시리라 믿는다. 우리는 영 가족이다. 우리는 영적 가족이다. 영원한 가족이다. 우리는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가족이다. 
 
-오늘 에베소서 2장을 여러분들과 하게 되는데 거기에 뭐라고 말씀 하냐면 2장 19절에 보면, 
*에베소서 2:19~22,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지금 이 말씀을 앞에 보니까 갓 교회에 금방 교회 성도들이 된, 특별히 ‘이방 출신 시민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너무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죽을 때는 두 개 밖에 안 남는다. 누가 남는가? 교회 식구와 육신의 식구밖에 안 남는다.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 밖에 안 남는다. 실감이 나는가? 젊은 분들은 실감이 안날 것이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파보면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 밖에 안 남는다.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만 남는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영적 가족과 육신의 가족을 위하여 투자하는 인생이 정말 가치 있다는 이야기이다. 토요비전새벽예배에 특히 다락방 식구들이 한 다락방이 되어 함께 기도하는 것이 어마어마한 일이다. 자, 여러분들 주보(뉴스레터)를 보면 다락방에 구호를 써 놓았다. 
 
★ 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와 다락방.
다락방은 영적 변화의 산실입니다.
다락방은 사랑의교회의 모판입니다.
다락방은 말씀과 기도로 생명의 계보를 이어가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다락방은 복음전도의 교두보입니다.
다락방은 사랑의교회 모든 다락방(소그룹)이 부흥의 체험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2년 6월 11일 토비새 설교 중)
 
-작년 6월에 한 설교 중에 한 말이다. 새벽에 학습이 가장 좋은 시간이다. ‘권속’이라는 말은 식구, 한 가족이라는 뜻이다. 한 일가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그 다음에 한 가정이 되고 식구가 된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한 번 더 다락방의 구호를 다시 해 보자. 
 
제가 어제 e메일을 하나 받았다. e메일 이런 것은 잘 읽은데 퍼스널이기에, 저에게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주었기 때문에 잘 안 읽어 주는데, 본인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는데 다락방에 대한 것을 해도 될 것 같아서 양해를 구하면서 말씀을 드리겠다. 중략하고, “목사님, 저는 토비새와 매주일의 예배와 말씀으로 저는 매일이 소생함을 경험합니다. 중략, 제 생애 best찬송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를 계속 부르면서 평안과 감사와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다락방의 은혜가 큐티와 말씀과 더불어 풍성해지고, 가족과의 교제가 실재적인 일입니다. 제 모든 삶을 주님께 의지하고 기대하며 결정과 연습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저희 다락방 교구 목사님은 정말 멋있습니다. 이 목사님을 다락방 심방으로 뵈었는데 와우, 정말 사랑의 교회 목사님들, 좋은 목사님들의 만남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다락방의 교구 담당 목사님께서 집으로 순원들과 심방을 와 주셔서 부모님과 얼마나 큰 기쁨과 예배와 말씀으로 교제를 나누었는지 크고 위로와 사랑을 느끼고 기쁘고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주님과 매일의 신선한 인격적 교제와 부르심의 순종으로 답해 드리고 먼저 나서지 않고 주님께 먼저 묻고 기다리고 발을 떼는 안전한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다락방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예배당에 강단에 서는 것이 편한 자리가 아니다. 여러분들 앞에 6-7천명이 서 보라, 편안하겠는가? 그런데 여러분들은 거기가 지금 불편한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가족 같이 형제 같이, 그래서 저는 이게 익숙해졌다. 그 수많은 분들이 계셔서 편안하다. 가족 같다. 아마 청년시절부터 소그룹과 다락방, 제자훈련, 이런 것이 익숙하다 보니까 가족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와 계셔도 편안하다. 아무쪼록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교회가 다락방을 통하여 영 가족임을 믿는다. 제가 주중에 빌리그래함 생애를 책으로 가지고 보고 있는데 이 만큼 두껍다. 그 책을 읽다보니 거기에 보면 빌리그래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해서 그 다음에 1973-4년도에 서울에 와서 80년도에도 와서 어마한 여의도 플라자 110만명 모인 것은 역사상 제일 전도집회에서 가장 많이 모인 자리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 빌리그래함과 함께 한 동지들, 그 다음에 매스컴과 이 매스컴 매스미디어가 함께 하고 미국의 대통령들 11분이 함께 하고 그 관계를 잘 하고 그게 중요하지 않지만 그게 보니까 빌리그래함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과의 관계였다. 그 두꺼운 책의 30%를 가족들과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가이다. 자녀들과 아내와 어떻게 보냈는지를 적어놓았다. 내가 깜짝 놀랐다. 그 두꺼운 책에 몇 %를? 30%를 가족들과 보냈다고 했다. 미국 사람들을 그의 인생의 가치, 보람, 그 인격은 가족과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느냐이다. 그 가족과 얼마나 축복이 있느냐이다. 그 아버지와 그 부모를 통하여 그 가족의 삶이 어떠하고 자녀들의 삶이 어떠하는지를 너무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사랑의 교회가 이 대형교회라도 우리는 개척교회 심정으로 해야 한다. 개척교회 심정으로, 여러분이나 저나 가족들이 삶이 실패하면 안 되는 것이다. 안타깝다. 그럼 어떻게 회복을 할 것인가? 우선 영적 가족, 육신의 가족으로 회복을 해야 되는데, 육신의 가족은 영적가족의 축복이 육신의 가족의 축복과 연결이 되어야 한다. 또 육신의 가족의 축복이 영적 가족의 축복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교회와 가정 같고 가정이 교회 같아야 한다. 사랑의 교회는 규모가 크더라도 교회가 가정 같고, 가정이 교회 같은 그런 축복을 주님이 주시길 바란다. 그럴러면 오늘 본문을 보면 19절에 보자.
 
*에베소서 2:19,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 말씀은 가족이라는 의미이다. 일가이다. 교회는 패밀리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가족인줄로 믿는다. 아무리 커도 교회는 가족이라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부류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 제가 옛날에 교회 대학부를 할 때, 사람들이 와서 은혜 받아가지고 외부에 어떤 교회를 세웠는데 교회 이름을 ‘젊은이 교회’ 라고 했다. 자, 젊은이 교회 그 교회가 처음에는 부흥하더니 2년 뒤에 문 닫아버렸다. 교회는 젊은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있는 것이다. 저는 우리 교회를 짓고 난 다음에 강남에 뭐 잘 나가는 분들만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천만에 말씀이다. 우리 교회 짓고 난 다음에 정말 어려운 분들, 옥탑 방의 이런 분들이 많이 오셨다. 우리 교회는 다 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다. 교포 교회에 어느 교회는 의사들만 나오는 교회가 있는데 의사들만 있는 교회가 잘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교회는 어떤 특정 그룹이 아니라 교회는 모든 사람들이 오는 곳이고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貧富)귀천(貴賤)이 다 있다. 그래서 가족이 되어서 오늘 이 시간 동안에 사랑의 교회가 우리는 영 가족임을 깨달아서 항상 서로 위로(慰勞)하고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서로 평안(平安)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가족이며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할 가족임을 믿는다. 
 
그러면 이 한 가족이 되려면 우리는 가족이 역사의식, 어떤 공감(共感)대(帶), 우리가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데 오늘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다. 
 
하나는, 우리 가족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오늘 중요하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20절을 보면, 19절은 권속이고 가족이다. 20절은 
*에베소서 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우리가 가족이라면 아이네디티이다. 가족이라면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과연 사랑의 교회 영 가족이 맞는가? 난 하나님의 식구가 맞는가? 남녀노소 빈부귀천, 교회라는 어떤 특정 그룹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분들이 다 계셔야 되는데 어린아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어야 되고, 믿음의 4세대가 다 있어야 한다. 이 믿음의 4세대가 공유해야 될 영적 정체성이 무언가?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 교회는 첫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여기는 여러 가지 말씀이 있지만 교회를 위해 중요한 것이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는 이 말씀은 사도들이 무얼 만들었는가? 신약을 만들었다. 선지자들은 구약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복잡한 것은 다 두고 교회는 신약과 구약의 터전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제일 중심은 신약과 구약, 하나님 말씀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볼 때, 말씀에 대한 해석이 저 정명석 같은 엉터리와 온갖 이단들이 다 나오지만, 별짓을 다 하는데,,, 이 말씀 위에 세워지는 가장 중요한 key는 ‘주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이다.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일맥 하나로 관통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다. 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는 줄로 믿는다. 이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학습을 해야 한다. 사도는 무엇인가? 신약이다. 선지자는 구약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다. 그 뒤에 여러 해석들이 다 있지만 예수님께서 친이 모퉁이 돌이 되셨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주겠다.” 라고 하신다. 그랬을 때, 그 카돌릭은 베드로의 어떤 인격이나 베드로 위에 세워져 있다고 하지만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의 인격이나 삶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그 따지고 싸우고 문법적으로 보면 싸울만한 위력은 있다. 베드로 위에 세워진 해석에 관한 문제가 있는데, 우리는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베드로가 고백한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거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반포대로 121번지 여기의 앞에 큰 벽에 써 놓았다. ‘이 교회의 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씌어져 있다. 이해가 되는가? 이런 것들이 다 연결이 되어 교회의 토대가 무엇인가? 이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그 다음은 ‘주님이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성경중심이며, 예수님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 예수님 중심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고백되는 모든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셨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으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셨다는 핵심은 교회가 크든 작든, 교회가 어디에 있든, 교단을 막론하고, 사이즈를 막론하고, 인종을 막론하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다. 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의 그 말씀 안에 포함된 놀라운 하모니가 교회는 영광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도 나와 있다. 에베소서 5장 27절에 보면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이 새벽에 “하나님 아버지, 저희는 가족인 줄 믿습니다.” 교회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터 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줄로 믿는다. 그리고 교회는 영광스러운 줄로 믿는다. 그래서 오늘 이 영광스러운 교회, 여러분들이 다 와가지고 오늘 새벽 영광스럽지 않은가? 저는 오늘 아침에 나오는데 평소보다 정장을 하고 나왔다. 이유가 영광스런 교회에 이 메시지를 전하는 곳이 너무 영광스러워서, 제가 오늘 평소보다 더 신경 써서 나왔다. 물론 오늘 결혼식 주례가 있다. ㅋㅋㅋ 그런데 입이 피곤해서 터져버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 이 영광스런 교회를 미천한 종이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러분 저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중직 자들, 그리고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 이 토비새 나오셔서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주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자체가 너무 너무 영광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자나깨나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교회 영광스러운 것을 위해 두 가지를 적용하고 기도를 하겠다. 
 
첫째는 5장 27절이다.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 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는 것이 이것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순결한 신부, 여러분 결혼식을 앞에 둔 신부나 신랑은 눈빛이 반짝반짝한다. 기대를 한다. 여러분 결혼식을 앞에 둔 신랑과 신부가 아무런 기대도 없이 결혼을 폭망했다고 하는가? 결혼을 실패라고 하면서 뭐 오만 이야기를 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는가? 비록 결혼 생활이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신랑과 신부는 기대를 가지고, 서로 기대를 가지고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흠 없는 신부로 교회 생활을 통해 늘 정결하고 새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 주님이 기대를 가지신다. 
 
오늘 사랑의 교회 속한 신실하게 섬기는 성도님과 중직 자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로 앞으로 교회를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섬기고 있는데 교회의 기대가 떨어졌다, 교회에 대해서 눈빛이 반짝 반짝이지 않는다면, 주일 예배를 오는데 그냥 그렇다면, 다락방에 그냥 가기 싫다하면 이렇게 하면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교회 영광이 무엇인지 모른다. 교회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 영광의 도로에 침입하는 것이다. 오늘 사랑의 교회 모든 다락방 식구들, 교회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신랑과 신부와 결혼하기 전에 눈빛이 반짝반짝 기대하는 것처럼 그런 신선도를 주님이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신선도를 가지고 기대를 하게 되면 우리 교회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기대를 갖고 목표를 향하여 어쨌든 주일 예배에 올 때 기대하길 바라는 것이다. 영적 신선도, 매일 매일, 어쨌든 주일 예배를 기대하고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 20년을 섬기지만 내일 300명이 넘는 학습세례를 받는다. 우리 간증자들이 어떤 간증을 할지 얼마나 기대가 되는지 모른다. 나는 그분들을 모른다. 모르지만 제가 20년째 섬기지만 강단에서 학습, 세례식을 이렇게 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 교회 세례식을 한 번도 그냥 적당히 넘어가신 것이 없으시다. 그 세례식에 복음의 영광이 충만하게 하시고, 교회의 교회다움을 크고 영광스러운 것을 찬양드린다. 내일 기대한다. 만세 반석 열리네,,,, 그 다음에 이어서 하는 찬송, 날 자녀라 하시네,,, 이 찬양들을 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함께 해보자. 마음에 얼마나 감동인지 모른다. 교회가 영광스럽다고 했을 때, 20년째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예배와 사역에 모두가 은혜와 축복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랑과 신부가 눈빛이 반짝반짝 하듯이 그러해야 한다. 
 
택하시고 지키시며, 날 자녀라 하시네. 
택하시고 지키시며 날 자녀라 하시네.
그의 소유 삼으시고 날 자녀라 하시네.
택하시고 지키시며 날 자녀라 하시네.
독생자 예수 자유케 하네 주의 자녀라 하시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 있네 주의 자녀라 하시네!~~
Who the Son sets free 
Oh is free indeed
I’m a child of God
Yes, I am. 
In my Father’s house 
There’s a place for me 
I’m a child of God
Yes, I am.~~~
*에베소서 5:27,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 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얼마나 흠이 많고 얼마나 오염되었는지 모른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죽어 나자빠지고 우리는 끝나야 하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엎어져 버리는 자이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기대를 가지고 눈빛이 반짝반짝하시면서 우리의 신랑이신 분이시니 우리가 좋은 신부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기대하고 그런 것이다. 오늘 이런 찬양송, 이런 말씀 속에 기대가 여러분들의 삶을 새롭게 정결하게 만들어 주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영광스런 교회를 위해서 모든 다락방이 사명 받은 다락방으로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하게 하는 영적 전투를 감당해야 한다. 이 영광스런 교회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해서 숫자와 상관없이 주의 일을 맡겨 주시라고 주의 용사된 나에게 주의 일을 맡겨 달라고 해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투력을 가지게 하시는지 우리는 빌리그래함이 그렇게 위대하지만 그는 가족이 가장 중요했다. 사랑의 교회에 속한 성도님이 소중하고 여러분의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한다. 
 
♧요약
다락방마다 부흥을 허락하셔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를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영 가족의 삶 가운데도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솔로몬의 성전 터가 되는 대 반전이 일어나는 것처럼 다음세대와 우리다락방에게도 대반전으로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한계를 극복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영 가족은 한 권속이며 가족이다. 우리는 영 가족이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세워 주신 그 길을 따라가며 영광스러운 교회를 사랑하고 감사하며 예수님이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시는 것을 기억하여 우리는 교회와 다락방에서 풍성한 교제와 사랑이 넘쳐서 함께 이어져 가며 성전으로서 서로 기대하고, 의지하고 주님의 복음의 씨앗을 심어가야 한다. 
 
-그들은 아제 더 이상 이스라엘 나라밖의 사람들이 아니며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었다. 교회는 하나의 도시에 비유되고 있으며 모든 회심한 죄인은 그곳에서 자유한 자들로 비유되고 있다. 또한 교회는 하나의 집에 비유되고 있으며 모든 회심한 죄인은 하나님의 집에 종속, 자녀 등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그 건물의 터로 비유되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모퉁이 의 돌로 비유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힘으로 그 건물을 지탱하고 계신다.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에 의해서 서로 결합되어진 모든 신자들은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풍성한 교제가 있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 택하신 장소로서, 그곳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주안에서 그러한 성전이 되어 진다. 너희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모든 참된 신자는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라고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음을 보증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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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22일)
제목: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
말씀: 시편 128: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권진우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시편 128:1~6,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
 
▶오늘 시편 128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1절에서,
 
*시편 128:1,
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 ‘경외하다’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여기서 ‘경외’는 누군가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존경에 나오는 두려움, 혹은 조심스러운 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잘못하면 불이익 당하고 벌 받을까봐 갖게 되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 관계 속에서 감동을 받게도 하고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어서 관계가 멀어짐이 없도록 마음과 짐과 행동을 매우 조심하게 된다. 일례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인격이 존경스럽고 나를 아껴주는 선생님이 계시면 어떻게 하는가? 그 과목은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된다. 더 선생님께 주목 받고 싶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행동거지를 더 조심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저는 대학교를 신학교를 나오지 않고 화학을 전공했다. 제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문과와 이과를 선택하지 않는가? 제가 딱 이과를 선택했는데, 이후에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전공해야 될지 참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저의 고민을 알고 있던 저의 친한 친구가 옛날 그 유명한 한샘학원을 하실 것이다. 그 학원에 단과 화학 선생님이 정말 잘 가르치신다고 했다. 자기와 함께 다녀보자고 권면을 했다. 그래서 그 친구를 따라서 그 학원 화학 단과 반을 다니게 되었다. 그때 처음 본 학원 선생님의 첫 인상이 어땠냐면 요즘 인기 있는 요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슬램덩크에 안 감독님을 알 것이다. 그 분과 외모가 아주 비슷했다. 안 감독님보다는 좀 더 젊으시지만 연세가 지긋이 있고 아주 인자하게 생기셨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그 어려운 고등학교 화학을 너무 재미있고 쉽게 잘 가르치셨다. 게다가 인품도 아주 훌륭하셨다. 학생들이 집중 안하거나 졸면 혼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천 원짜리 한 장, 또는 두 장을 딱 꺼내 놓고 돌발퀴즈를 내셨다. 그때 천원은 그 당시 학생들에게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손을 들어서 돌발퀴즈를 딱 맞히면 그 돈을 그 자리에서 직접 건네주시면서 잘했다고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그런 선생님을 저는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돌발퀴즈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 화학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게 되었다. 그것은 결코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이다. 한 번이도 더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고 싶고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제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수업시간 보다 일찍 와서 칠판 정리도 다 하고 선생님이 드실 음료수를 미리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다른 친구가 사온 것이라고 착각 하실까봐 포스트잇에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권진우 올림”을 딱 크게 써서 음료수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보는 Test도 있었는데 정말 선생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거의 매번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그것은 절대로 선생님한테 매 한 번 덜 맞고, 선생님에게 안 찍히려는 동기에서 나오는 열심이 아니었다. 너무나 존경하는 그 선생님과 멀어지고 싶지 않은 그런 마음의 동기였다. 그러다가 제가 화학과를 가게 된 것이다. 이 성경에 나오는 경외라는 단어가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심에 바탕한 두려움, 다만 잘못하면 벌 받고 혼날까봐 갖게 되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여서 나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그분과 관계가 단절되고 멀어지는 게 싫어서 갖게 되는 두려움이 바로 경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호와를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경외하는 자가 나타나게 되는 삶의 모습은 무엇인가? 오늘 1절 중반에 나오는 것처럼 그의 길,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분께 더 잘 보이고 싶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과 사랑과 존경에 대한 경외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두려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고 만나려고 하고 의지하려고 할 것이다. 만일 인격적으로 존경을 갖지 않는데 그냥 무섭고 엄하기만 한 선생님이 계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피해 다닐 것이다. 우리한테 가까이 오면 멀리 돌아서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존경과 사랑이 전제가 되어 있으면 그 선생님이 계신 자리에는 항상 함께 하려고 하고 누구보다 곁에 있으면서 눈에 띄려고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 반응이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을 더 자주 만나고 찾으려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려고 할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경외는 더 자주 찾고 만나려는 모습으로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을 오늘 말씀에서 크게 네 가지로 말씀하신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당사자에게는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다. 라고 오늘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당시에 농사짓는 배경으로 표현하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수고한 대로 먹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매우 중요했다.

첫 번째는, 농사를 지을 물이 넉넉해야 한다.

두 번째는, 그 수확한 것에 대해 주변 나라들로부터 약탈을 당하지 않도록 안전이 보장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 성경에 쓰여 진 이 고대사회에서 이러한 조건을 잘 갖춘 천혜(天惠)의 지역이 있었는데 거기가 어디였냐면 오늘날 이집트에 해당하는 애굽이었다. 애굽은 나일 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름에 큰 비가 내리면 이 나일 강 물이 막 범람(氾濫)을 하면서 그 강 주변으로 농사짓기에 좋은 검은 흙들이 막 쌓이게 된다. 이게 뭐냐면 따로 거름이나 퇴비(堆肥)를 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큰 비가 멈춘 후 홍수(洪水)가 멈추고 나면 그 나일 강 주위에 그 기름진 땅, 그 검은 흙 위에 씨만 뿌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곡식들이 알아서 잘 자라서 애굽의 왕과 그 고위층만이 아니라, 하층민까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을 할 수가 있었다. 더군다나 애굽은 지형적(地形的)으로도 이 사방(四坊)이 사막(砂漠)과 지중해(地中海)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것이 천연의 요새(要塞)가 되어서 외부의 침략을 받는 일도 거의 드물었다. 이처럼 애굽은 농사짓는데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옛날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인 피라미드 같은 고난도 건축물도 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정이 달랐다. 이스라엘은 일단 큰 강이 없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강은 뭐가 떠오르는가? 그런데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강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수량도 부족하고 그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이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로부터 때에 맞게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려주어야지만 포도농사도 짓고 올리브 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제때 풍족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 물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해 농사를 완전히 망쳐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토록 하나님께서 의지 말라고 하는 비와 폭풍의 신인 바알을 끝까지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의 나라는 적군이 많았다. 서쪽으로는 블레셋이 있고 동쪽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딱 버티고 있었다. 하늘로부터 제 때 내려주어서 농사를 잘 짓고 나면 그 수확의 시기에 맞추어서 외부의 세력들이 호시탐탐 약탈할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힘이 약해지고 경비가 허술할 때 치고 들어와서 모든 수확물을 다 거두어 가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요즘 날샘(날마다 솟는 샘물) 큐티에 등장하는 블레셋인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동안 애썼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애굽과는 달리 제때 비가 내리지 않고 외부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면, 수고한대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무어라고 하시는가? “너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도록 때에 맞게 비를 내려줄 수 있다.” 고 말씀하신다. 모든 풍족한 수확(收穫)을 위한 조건들, 그 조건들을 다 갖추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확한 것을 이방민족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내가 창과 방패가 너희에게 되어주겠다고 하신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다고 느낄 정도로 오늘 2절에 말미에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라고 나오고 있는데,
 
*시편 128:2,.
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다고 느낄 정도로 당시에 애굽 못지않게 수고한대로 풍족히 먹게 해주겠다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너의 존재하지도 않는 바알 같은 것들 의지 하지 말고 오직 만물의 주관자 되신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날 우리는 이 성경 본문에 나오는 당시보다 훨씬 문명화된 곳에 살고 있고, 지식과 정보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오늘 날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만큼의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때에 맞게 지혜의 단비를 내려 주셔야 한다. 시대에 맞는 창조적인 창의력을 허락해 주셔야 한다. 또한 때가 되면 주저하지 않고 담대함을 갖고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우리 마음 가운데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셔야 한다. 풍성한 수확을 위한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옛날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 날 이 시대에 맞게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 비를 우리에게도 내려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수확을 거둔 이후에도 약탈을 위해서 부지불식간에 침략해 들어오던 그 블레셋처럼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문제가 생기고 갈들이 생겨서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일하다 보면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내가 보지 못하고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은 누가 지켜 주셔야 하겠는가? 하나님 밖에 지켜주실 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수고한대로 먹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의 삶을 수고하는 자의 손에 영역에 미치는 않는 모든 영역에서도 지켜주신다. 라고 오늘 말씀에 다 포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삶 가운데 이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자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허락되는 복의 첫 번째로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하시는가? 먹는 것을 가장 먼저 이야기 하셨는가?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우리의 필요로 채워주시는 연결되는 말씀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겠다.
 
*마태복음 6:33,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도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보면 어떠한가? 초반에는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한 이후에 이어서 중간에 뭐가 나오는가? 우리에게 무얼 달라고 하는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를 하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첫 번째 복이 수고한대로 먹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계신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첫 번째로 허락하시는 약속과 복이 다른 것도 아니라, 먹을 것을 채워주시는 것이 먼저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사는 게 삶에 자꾸 먹는 것,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과 연결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모든 만물가운데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경외 받으시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아있는 눈에 보이는 자녀들의 영혼 가운데 함께 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나타내 사 높임을 받으시고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작정하신 방법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만물 가운데 영광 받으시고 그분의 일을 행하시며 경외함을 받으시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은 무엇이냐면, 바로 그분의 자녀들의 생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선택한 자들의 생존은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히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알고 우리의 필요를 구하고 양식을 구해야 한다. 그냥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했으니까 그 상으로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은 그런 기복적인 의미가 절대 아니다.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채우셔서 살아 있는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로, 하나님께서 또 일하시기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목적으로 일용할 약식을 위한 수고를 감당해야 되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한대로 수고한 대로 결실을 맺으며 또 그 생명과 힘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가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시편 128:3,
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복의 그 다음은 가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내 아내는 결실한 포도(葡萄)나무 같으며, 자식들은 어린 감람(橄欖)나무 같다고 약속을 하신다. 여기에 아내와 자녀들을 비유하는 이 포도나무, 감람나무, 다른 말로 하면 올리브 나무인데 이 감람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하는 열매를 맺는 유실수이다.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기분을 좋게 하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섬기는 마음으로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방의 내면을 아프게 하고 악하고 공격적인 말이 아니라 서로를 건강하게 하고 세워주는 사랑과 격려의 마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를 기쁘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유실수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정의 복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또한 앞으로 하나님이 주실 약속이 될 수도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설령 내 배우자와 내 자녀가 결실한 포도나무요, 어린 감람나무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그 과정 안에 있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가족 구성원,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오늘 3절의 말씀이 장차 반드시 이루어져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 배우자가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믿는 자 역할을 하지 않아 기도 제목이 될 수가 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그 배우자의 변화를 위해서 믿는 남편, 혹은 아내로서 감당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하고, 아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서 남편의 권위에 순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나의 그 노력과 섬김의 배우자가 막 감동 받고 곧바로 반응이 오면 좋겠는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마음의 상처를 더 주는 말을 하기도 한다. 또한 사단이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데 쓰는 중요한 전략이 하나 있다. 약을 올리는 것이다. ‘네가 이래도 잘하나 보자.’ 하면서 평소에 마시던 술을 일부러 두 배로 더 마시게 하고,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도 하게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떠한가? 인간적으로 다 집어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네 마음대로 살아라.’ 할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 오래 인내하기 힘들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다스리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지만 오로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전적으로 그분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주관하셔서 우리에게 인내할 힘을 주신다. 상대방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셔서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끝까지 믿음의 배우자로서의 본분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까지 인내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인내하실 때에, 그 마음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품게 하시는 것이다. 그럴 때 어느 순간 상대방의 완고한 마음은 점점 꺾이게 되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인내와 수고가 다리 역할이 되어서 그가 주님 앞에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자식들이 감람나무, 즉 올리브나무와 같은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될 것이라고 우리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꾸짖으시는 한 가지 좀 충격적인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다. 약간의 충격적인 말씀인데, 에스겔 16장 20절을 보자.
 
에스겔 16:20-21,
20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21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여러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중에 어떤 범죄가 있었냐면 자신의 자녀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었다. 자녀를, 이것은 당시 실재로 모압 족속의 신인 몰록에게 자녀를 불로 태워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니 왜 이렇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어처구니 일들을 이 시대에 자행했던 것인가? 그것은 바로 신 앞에 인간이 나타낼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아끼는 자녀까지도 당신한테 바치니 우리 공동체 큰 번영과 영화를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제물로 희생된 자녀는 신을 통하여서 좋은 곳에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런 인신제사가 충격적이지 않는가?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오고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 앞에 자녀를 드리는 인신 제사가 오늘날 정말 우리에게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올해 저희 자녀가 고3인데, 자녀가 수험생이 되면 ‘너 올해는 공부에 전념해야 되니 대학생이 되면 예배 나가고 교회활동을 자제하라.’고 권면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다. 이것이 세상의 성공이라는 우상 앞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영혼을 불사르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적인 욕망과 욕심이라는 우상 앞에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돌봄을 받아야 할 자녀의 정서가 메마르고 자존감은 밑바닥까지 내려앉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심어놓으신 은사 소명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영적으로 본다면 현대판 인신제사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식들이 감람나무와 같을 것이고 자신의 영혼과 삶이 풍요로울 것이며 오늘 감람나무, 이 유실 수 같은 이 존재로 그의 가정과 장차 자녀들이 속할 공동체를 유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세상만 바라보며 세상에 파묻혀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는 자가 되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가장 가치 있게 쓰임 받게 될 것이라. 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시편 기자는 3절 이후의 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
 
*시편 128:4,
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이것은 분명하다고 단정 지으며 말씀한다. 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개인과 가정이 놀라운 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은 내 개인, 내 가정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내 자식의 자식이 보게 될 것이다. 5절 6절을 보면,
 
*시편 128:5-6,
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이 번영하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영토를 빼앗기 위한 국가 간의 전쟁이 꽤 많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명예이기 앞서서 생존이 직결되는 문제였다. 고대 근동의 어떤 지역의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어떤 집단이, 살았던 집단이 그 지역의 인구가 늘어나는데 비해서 농사지을 땅은 부족해지고 가축을 먹일 목초지가 부족해지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옆에 힘이 약한 근접한 도시 국가를 공격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은 매우 맹렬하고 잔인하게 이루어져서 심지어는 임산부와 어린아이까지 목숨을 앗아가게 했다.
 
대표적으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앗수르가 그러한 일들을 많이 행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했는가? 그게 무언가하면 원래 민족이 민족성이 원래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 상대방이 그 침략을 받는 나라가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면 다시 보복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것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 위해서 임산부 애들까지 다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한 번 나라가 힘이 약해져 침략(侵略)을 당하게 되면 그 나라는 번영(繁榮)이 아니라 쇠퇴(衰退)를 넘어서 침몰(沈沒)을 하게 되고 자식의 자식을 보는 게 아니라 그 당대에서 대가 끊겨버리게 되는 너무나 비극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당시에 이 번영이라는 이스라엘의 번영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번영이라는 말을 사실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나라였다. 군사력이 그리 강하지도 않고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애굽이나 앗수르처럼 나라 안에 큰 강이 있어서 먹을 것이 풍요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변방에는 하나님의 작은 초라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보잘 것 없고 악조건만 있는 이 민족에게 무얼 말씀 하냐면 한 번도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번영을 이야기 하시고 내 자식의 자식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감히 다른 나라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평강을 허락하겠노라고 약속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기가 많아서인가? 아니면 인구가 많아서인가? 하나님은 단 한 가지만을 말씀 하신다. 너희가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의 길을 걸으면 자식의 자식을 볼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가 힘과 방패가 되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공급자가 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다른 말씀을 보면 이방민족들이 이스라엘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는 여호와를 두려워 떨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러하시는가?
 
첫째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제사장 나라를 이스라엘을 삼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저와 성도님들 각자 한 사람이 기도의 사람이 되는 것은 비단 나와 가정뿐만이 아니라, 한 지역과 나라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믿는다. 우리가 언론과 뉴스를 통해서 매 정치적, 사회적으로 여러 뉴스와 사건들이 들려온다. 또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이고 실제적으로 자원도 거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담임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인구도 적고, 땅도 작지만, 그리고 자원도 없지만 어떤 자원이 있는 나라인가? 기도자본이 있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로 자리를 지키는 의인 열 명을 주목하시고 그들로 인하여서 이 나라를 지키시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번영하게 하시고 대한민국의 자식의 자식을 보게 하시고 대한민국의 평강을 주실 것을 믿는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저와 여러분의 기도에 달려 있는 줄 믿는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누리게 되는 복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왜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요구하시는가?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와의 관계를 하나님이 회복하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또 앞으로도 짓게 될 미래의 죄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다 담당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믿음도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완악한 처지에 있으니까, 은혜로 믿고 받아들이게 하셨다. 구원의 방식도 하나님이 마련하시고 그것을 믿는 것도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하신 것이다. 다 하나님이 하셨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함께 하는 관계로 우리를 하나로 묶어놓으셨다. 이처럼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무얼 원하시냐면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오늘 시편 말씀과 같은 이 네 가지의 그 큰 구한 네 가지의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 것도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냐면, ‘네가 나와 교제를 하고 사랑을 하는데, 다른 무엇 때문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나머지는 내가 다 책임져 줄게’ 나머지는 여기에 담겨있음을 생각을 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결국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단 하나,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를 너무나 존귀하게 여기신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은 자, 즉, 그 자, 그 한 사람, 우리를 원하시며, 그 외 그렇게 걸으면 그 외 다른 것들은 그것 때문에 네가 정신이 생각이 분산되고, 나를 위한 집중이 어려움이 없도록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 지키시고, 채우시고, 해결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되는 것이다. 올 한해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오늘 시편 말씀의 약속을 경험하며 복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에게 먼저 무한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삶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시니 항상 주님을 경외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 위해 우리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정과 민족과 나라까지 복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깨달아서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을 누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영적 파수꾼의 역할을 신실히 감당하여야 한다.
- 개인과 가정과 나라를 안락하게 할 수 있는 복의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말씀을 복종하는 것이다. 신앙과 경건은 번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며 진리에 대한 굳건한 신념과 믿음으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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