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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3월 19일)
제목: "메마른 땅이 샘물되고"
말씀: 역대상 2:1~27
대표기도: 안바울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 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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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 21:1~27,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2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3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4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5 요압이 백성의 수효를 다윗에게 보고하니 이스라엘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백십만 명이요 유다 중에 칼을 뺄 만한 자가 사십칠만 명이라 .
6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7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9 여호와께서 다윗의 선견자 갓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가서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내어 놓으리니 그 중에서 하나를 네가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11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그에게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 
12 혹 삼년 기근이든지 혹 네가 석 달을 적군에게 패하여 적군의 칼에 쫓길 일이든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전염병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천사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이든지라고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지를 결정하소서 하니. 
13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 

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 곁에 선지라.
16 다윗이 눈을 들어 보매 여호와의 천사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하늘을 향하여 편지라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17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 
18 여호와의 천사가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이르시기를 다윗은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19 이에 갓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른 말씀대로 다윗이 올라가니라. 
20 그 때에 오르난이 밀을 타작하다가 돌이켜 천사를 보고 오르난이 네 명의 아들과 함께 숨었더니. 
21 다윗이 오르난에게 나아가매 오르난이 내다보다가 다윗을 보고 타작 마당에서 나와 얼굴을 땅에 대고 다윗에게 절하매. 
22 다윗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이 타작하는 곳을 내게 넘기라 너는 상당한 값으로 내게 넘기라 내가 여호와를 위하여 여기 한 제단을 쌓으리니 그리하면 전염병이 백성 중에서 그치리라 하니. 
23 오르난이 다윗에게 말하되 왕은 취하소서 내 주 왕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행하소서 보소서 내가 이것들을 드리나이다 소들은 번제물로, 곡식 떠는 기계는 화목으로, 밀은 소제물로 삼으시기 위하여 다 드리나이다 하는지라. 
24 다윗 왕이 오르난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반드시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빼앗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 하니라. 
25 그리하여 다윗은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27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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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와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을 가다가 만나와 생수를 경험했듯이, 오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도 영혼의 만나가 되기를 바란다. 생수가 터지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원한다. 지금 제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 17번째를 한다. 여러분, 부흥이 무슨 뜻인가? 부흥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의 의미가 있는데 오늘은 제 말씀이 아닌 시편기자의 말씀이다. 
 
*시편 107:35,
35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고,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된다고 했다. 좀 깊이 들어가면 우리 인생이 살다보면 메마른 땅이 될 때는 인생이 광야 같고 또 설령, 내 인생이 광야, 사막, 메마른 땅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다윗이 고백한 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임하시면 기적의 현장, 대반전의 역사 때문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샘물이 되게 하신다. 여러분 광야가 무엇인가? 광야는 사람이 살지 못되는 곳이다. 그야말로 메마른 곳이다. 내 인생의 광야라고 했을 때는 그 광야는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불 뱀이 있는 사람이 살지 못하지만 내 인생의 광야는 나를 낙심시키고, 나를 고갈시키고 나를 탈진시키고 나를 지치게 하고 나를 엎어지게 하는 것이 광야이다. 그렇다면 여러분과 나는 내 인생이 광야 같은가? 나를 탈진시키고, 나를 낙심시키고 나를 고갈시키는 것의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역대 상21:1,
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우리 죄악 때문에 우리가 유혹의 영에 넘어가는 것이다. 또 크세 보면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있다. 우리 하나님의 크신 섭리,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더 큰 역사를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인생길을 광야를 걷게 하시는 것이다. 또 우리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인간적인 선택과 이기적인 선택 때문에 삶이 광야와 고통과 메마름이 오는 것이다. 특별히 여러분과 제가 인생에 광야가 오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에게 사탄의 충동질 하고 사탄은 우리에게 그냥 광야에서 엎어지게 하는 것이 전문이다. 여러분, 보라. 하와를 보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지 않은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하고 하나님 같이 되리라. 라고 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똑 같이 보리떡덩이가 되고,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뛰어내리라 한다. 광야의 시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일하게 광야에서 시험당하는 것도 다 똑 같다. 그러니까 광야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충동질 때문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가지고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룰 수 있도록 광야 길을 걷게 하시고 아니면 우리의 실수와 부족함 때문에 우리가 광야를 걷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는 결국은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복음을 깨달으면 되면 이 세 가지는 해결되게 되는 것이다. 참 희한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주께서 “야, 저 사람은 쓰러질 것이다. 저 사람은 이제 끝났다.” 라고 그럴 때, 오늘 하나님 말씀 가운데 
*이사야 32:2b,
2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예수 그리스도는 마른 땅에 샘물 같다는 것이다. 생명의 복음이 우리의 죄 때문이든,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든, 아니면 우리의 실수 때문이든 상관없이 광야길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일한 길이 있다면, 생명의 복음을 통한 대 반이전다. 그러니까 생수를 통한 대 반전이다. 
 
*요한복음10:10,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탄은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의 풍성함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자, 이런 내용 배경을 가지고 오늘 드디어 여러분이 아는 것도 있지만 역대 상을 보면 오늘 
 
*역대상 21:8,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사탄의 충동질을 받았다. 여러분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 비대칭전략의 전문으로 골리앗이 죽이려고 할 때, 물맷돌 하나를 들고 나가서 그 골리앗을 이긴 사람이다. 그런데 다윗도 사람이라, 다윗도 사탄이 충동질을 하니까 그렇다. 우리는 잘 한다고 그러지만 어떨 때는 마귀가 유혹할 때가 있다. 그래서 ※리차드 폭스 같은 사람들은 돈, 섹스, 권력(Money, sex and power).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물질에 대한 유혹과 성적인 유혹과 그 다음에 자기 자부심, 그리고 큰 교만에 떨고는 아니지만 우리가 은근한 자부심, 내 나름대로 죽어도 놓지 않는 내 인생이 프레임이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이걸 가지고 다윗을 충동질 하는 것이다. 뭘 의미하느냐면, 어느 날 다윗오늘 보면 알겠지만 ‘도대체 나에게 전쟁할 수 있는 군인이 몇 명이 되는지 한 번 세어보고 싶다.’고 한다. 여러분, 군인들의 수를 세어보는 것이 뭐 그리 죄악이겠는가? 당시 고대 국가는 전쟁국가여서 군인의 수가 중요했다. 그러니까 왕의 입장에서는 군인의 숫자를 세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거기에 대해서 그러하시는가? 요압의 잘못도 있다. 6절에 보면,
 
*역대 상 21:6,
6 요압이 왕의 명령을 마땅치 않게 여겨 레위와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아니하였더라.
-세어보고 싶다고 그래가지고 시키니까, 유다지파가 사람들이 얼마이고, 전체를 보니 이스라엘 사람 중에 칼을 들 만한 사람들이 110만 명, 유다지파가 47만 명, 총 157만이라는 대단한 대군이었다. 참고로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130만 명, 17만명의 차이가 있다. 거기는 정규군의 숫자만 센 것이고, 역대 상에서는 정규군과 예비군을 다 합친 것이다. 157만이라는 대군, 옛날에는 지팡이 밖에 없던 다윗의 손에는 군인이 어마한 것이다. 이게 왜 잘못인가? 다윗의 마음이 어떻게 보면 내 손에 들인 157만으로 나는 살 수 있다고 자만하는 것이다. 그것을 사탄이 태클을 걸고 충동질 하고 대적을 하는 것이다. 순수한 목동의 막대기가 아니라, 157만의 대군이 있으니 마음이 높아진 것이다. 자, 하나님 앞에 서니까, 하나님은 강력하게 너 잘못이야,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아시고
 
*역대상 21:8,
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 알아듣고 있는가?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지식을 잘 아시리라 본다. 전에는 다윗은 1년 간 모른 척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는 다윗이 성숙해가지고 바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다윗의 잘못에 대해서 자기 157만으로 높아진 다윗에 대해서 사랑의 채찍을 하신다. 그 이유는 다윗을 괴롭히고 상처를 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더 이상 마귀로부터 참소 당하는 일이 없게 하시려고 하신다. 더 이상 낙심하거나 탈진하거나 더 이상 광야 같은 인생을 살지 않게 하시려고 다윗이 참소당하지 않게 하시고, 더 이상 종노릇 하지 않게 하시려고 하신다. 여러분, 강남 사람들 가운데 잘 나가는 사람들 많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돈 많은 사람은 대부분은 세파트가 있다. ㅋㅋㅋ 세컨드!~~그런데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You are my sunshine. 하며 그 사람이 죽을 것 같이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죽을 굴을 파는 것이다. 여러분, 인생은 다 조강지처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알 사람이 없도다. 여러분, 돈이 많아도 잘나가도 그 인생은 광야이다. 이것은 예외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광야는 불 뱀, 물이 나오지 않는 곳이다. 물이 나오지 않는 곳이다. 죽음의 위험이 상주하는 곳이다. 자기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가 아니라, 157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으면 다윗은 죽을 지경일 것이다. 다윗이 불 뱀이 날아다니는 인생, 죽음의 위험 앞에 시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니까 안 되는 것이 없게 하신다. 사랑의 매와 채찍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심하다. 다윗은 우리의 인생의 롤 모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떻게 보면 좀 강하게 다루신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 옵션을 주셨다. 3년 기근과 3개월 적의 침략과 그리고 3일 전염병을 옵션하신다. 
 
첫 번째, 기근(饑饉)으로 3년 할래?
두 번째, 원수(怨讐)의 공격(攻擊) 앞에 3개월 동안 공격 받을래?
세 번째, 3동안 전염병(傳染病) 맞을래? 
-3일 전염병으로 7만 명 죽음을 주신다. 
*역대상 21:13,
13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빠졌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역대상 21:14,
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더라. 
-장정들만 7만 명이다. 6개 전투 사단이 하루아침에 다 죽은 것이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인 것이다. 
 
*역대상 21:15,
15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멸하러 천사를 보내셨더니 천사가 멸하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보시고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그 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선지라.
-복선이 깔려 있다. 
*역대상 21;17,
17 하나님께 아뢰되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 
-왜 그러한가? 시편에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백성이 잘못이 없다고 아뢴다. 내가 범죄하고 나를 치라고 하신다. 주의 백성을 살려주시라고 한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백성들도 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모세와 같다. 광야는 범죄 때문에 아니면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우리 실수 때문에, 거기서 메마름과 위기와 탈진과 낙심과 고뇌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되니까 하나님께서 복선을 깔아주신다. 여부스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다. 
 
*역대상 21:26~27,
26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27 여호와께서 천사를 명령하시매 그가 칼을 칼집에 꽂았더라.
-다윗의 메마름, 다윗의 광야가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예배가 회복되고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인생이 완전히 낙심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예배가 회복되고 번제와 화목제가 회복되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의 삶의 영역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참된 제자, 참된 예배 자, 다윗은 전쟁의 선봉장이었다. 그런데 다시 회복되어 예배의 선봉장이 되었다. 예배를 회복하게 되니까, 그래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것이다. 
 
언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가? 모세가 아론이 첫 번째 제사장 위임식을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번제 단에 불을 내려주신다. 두 번째는 다윗이 500년이 지난 뒤에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번제를 드리니 불이 내렸다. 그다음은 솔로몬이 성전에서 예배할 때 불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할 때 불이 떨어진다. 우리는 예배할 때, 여러분 불이 떨어지기를 바란다. 하늘의 만나를 경험하기를 원한다. 우리 답답한 인생에 영적생수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주일예배와 생활예배를 주님께 드림으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고 그렇게 해서 회복을 넘어 부흥이란 것은 절망적 상황에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인데, 절망적 상횡에서 우리가 예배를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원한다. 이게 부흥이다. 
 
*부흥이란 절망적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나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이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바란다. 평생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불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일어날 때, 불이 떨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성령의 불의 연대기가 되는 것이다. 오늘 이 시간 하늘의 불이 떨어져서 우리의 아픔과 실수와 상처의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유혹들이 다 치유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다. 
 
첫째, 어떤 경우에도 반전을 기대하고 반전 이후를 믿음으로 설계하라.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복선이라고 했다. 이것은 번제 단, 예루살렘의 성전이다. 대단한 것이다. 역대하 3장 1절을 보면, 
*역대하 3:1,
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그 다윗의 어려움, 전투사단이 다 나가떨어지는 그런 비참을 그 복선으로 다윗의 마음을 아시니까 다윗을 죽이고 다윗을 밟으려고 하는 심정이 아니니까 다윗이 프레쉬 하고 다윗이 거룩함을 갖추고 다윗이 새로운 인생으로 고도의 샬롬으로 누리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이니까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솔로몬에 의하여 예루살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메마른 땅이 샘물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범죄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구했는데 오르 타작마당이 나중에 솔로몬의 건축마당이 되게 하신 것이다. 나중에 성전이 된다. 하나님의 은총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안아주시는 본당에서 하나님의 큰 섭리가 타나나는 줄 믿는다. 얼마 전에 이스라엘 대사가 와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 여호수아 대한 예배를 드리니까 이스라엘 대사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역사라고 말한다.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이유를 연구를 하겠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면 희한할 것이다. 하나님은 징계 가운데서도 대 반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를 준비한 것이다. 설계한 것이다. 광야 가운데서도 생명이 복음을 믿고 생명의 샘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마귀는 요한복음에 도적은 들어와서 우리를 멸망시키고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망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부끄러움과 우리를 대 반전시켜가지고 우리의 타작마당이 예루살렘의 성전 되게 하시는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그걸 깨닫는 것이다. 여부스족 오르난의 입장에서도 땅을 사겠다고 하니 아이고 아닙니다. 그것을 다 드린다고 하니, 그러면 안 된다고 다윗이 금 600세겔을 주고 산다. 평범한 농부로 살다가 가정에 천사가 오고, 다윗이 또 찾아온다. 그리고 오르난 입장에서는 영적부흥과 금 600세겔이 어마하게 큰 것이다. 영적 부흥과 경제 부흥이 동시에 온 것이다. 우리는 주류가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할지라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여부스 사람 오르난처럼 영적부흥과 경제부흥이 동시에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 부흥이다. 메마른 인생 가운데서 말씀을 공부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복음을 전하게 되면 오르난처럼 영적 부흥과 경제 부흥을 주실 것이다. 어려움 가운데서 말씀을 보고 사명에 집중할 때 하나님이 마음을 보시고 오르난의 성전 터가 되는 것처럼 기가 막히는 대 반전을 주시는 것이다. 믿음의 용량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늘의 만나를, 하늘의 생수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말씀 공부와 주님을 사모함으로 영적부흥과 경제부흥으로 인도하신다. 
 
둘째, 어떤 경위에도 결코 좌절하지 말라. 
-다윗의 입장에서는 형벌을 받은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다. 인생의 광야이고 죽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다윗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 다윗의 고백을 보면, 
 
*시편 40:5,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다윗은 풍랑의 바다, 험산준령, 그의 인생을 통해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정말 다윗은 뼈가 상한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풍성한 은혜가 너무 많아서 다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돛단배 깃발을 달았는데 풍성한 하나님 은혜로 좌절하지 않는다고 한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신 기적이 넘 많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어떠한가? “주께서 내게 행하신 기적이 너무 많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이 장소에서 그대로 될 것이다. 다른 말로는 나는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은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만드시는 그 대 반전의 하나님을 믿으면서 좌절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제단을 쌓았다
 
*역대상 21:28-29,
28~29절
28 이 때에 다윗이 여호와께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응답하심을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렸으니.
29 옛적에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여호와의 성막과 번제 단이 그 때에 기브온 산당에 있었으나.
*역대상 22:1,
1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 단이라 하였더라.
-전쟁의 선봉장이 예배의 선봉장이 되었다. *전쟁의 선봉장이 예배의 선봉장으로.
이게 좌절하지 않는 키이다. 예배자로 섬길 때, 그것이 좌절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 극도의 불안한 시대에서 이 메마른 시대가 생명의 복음을 갈망하고 체험하는 멎진 기회가 될 수가 있다. 무한이 기본이다. 인피니티, 문명의 대 전환시대가 왔다. 우리가 잘 만하면 기회가 되는 것이다. 이제 웬만한 건 교회도 한국교회도 뭐가 어떻다 하지만 여러 가지 논쟁이 이런 무한한 시대에 문명의 대 전환시대가 와버려서 우리가 좌절하지 않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홍수가 쓰나미 같이 다 쓸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을 잘 알 것이다. 대단한 기회가 될 것이다.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 시대를 승리할 수 있다. 게임이 안 된다. 21세기의 사람들은 광야의 치열한 시대를 걸어가고 있다 제로섬 시스템을 걷고 있다. 그래서 맨날 지치고 쓰러지고 메마를 수밖에 없다. 회사는 경쟁시스템 때문에 그렇고, 학교 가니까 경쟁시스템 때문에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그러나 교회는 이 메마름을 해결하는 유일한 곳임을 믿는다. 교회가 예배를 통하여 생수를 공급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절대로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내 능력과 내 실력으로 살면 좌절한다. 우리가 예배한다는 것은 우리가 위로부터의 능력, 체험을 하늘의 만나를 먹고 매주 마다 공급 받는 자들이니 매 주일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었다. 광야의 메마른 곳에 봄기운으로 충만하고 녹슨 심장이 녹아서 여러분의 반전인 영혼의 봄 동산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시인 피천득은 봄이 40이 넘은 사람에게 온다고 했다. 녹슨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40인데 지금은 60세가 40세인 것이다. 이 시인의 말처럼 60이 넘고 봄은 기쁨이고 봄은 창조인 것이다. 여러분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녹슨 심장에 뜨거운 피가 솟구치기를 바란다. 
 
CS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를 보면, 땅에 저주가 일어나서 온 땅이 얼어붙었다. 겨울이 끝없이 계속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아슬란이 돌아온 것이다. 아슬란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 순간 땅의 저주가 풀리고 눈이 녹고 얼음이 풀리고, 나무의 풀이 녹았다. 봄과 함께 희망이 샘솟았다. 
 
*이사야 35:1~2,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 이스라엘 대사가 그러는데 시대가 바뀐 것이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는 자는 새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요약
다윗이 교만한 큰 죄를 회개하니 하나님이 사랑의 매로 위로하신 것처럼 우리의 메마른 인생길에서 생명의 복음을 만나 녹슨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평생이 되기를 소망하고, 위로부터 주시는 성령의 불이 떨어져서 오르난의 축복처럼 기적의 대 반전이 우리 인생에게도 일어나기를 소원하자. 절망가운데서도 무한한 샘물의 은혜를 사모하여 영적부흥과 경제적 부흥을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게 된 동기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켰기 때문이다. 신실한 사람도 자칫 사탄의 꾀임에 넘어갈 수 있으므로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죄는 인구 조사를 죄라고 여기는 까닭은 인구 조사 자체가 죄 된 행동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군대의 수효에 집착하는 다윗의 생각이 죄 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죄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믿고 의지하는 행위는 죄악이다. 징벌의 선택권을 주신 하나님은 인구 조사로 인해 다윗은 삼 년 기근과 다윗이 대적에게 패하여 쫓겨 다니는 신세와 온역이 사흘 동안 번지는 징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의로 다윗을 벌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형벌을 선택케 하셨다. 삼 일간의 온역 징벌은 다윗이 선택한 형벌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형벌을 받는 삼일 간의 온역이었다. 다윗은 기왕에 받아야 할 형벌이라면 인간의 손에 벌을 받기보다는 하나님께 징벌을 당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윗의 간청에 따른 하나님의 지시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잘못은 자기에게 있으니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시지 말 것을 간청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자기가 지려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고 지시하신다. 즉 입으로의 간청이나 고백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보이라는 것이다. 실천 없는 입만의 고백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오르난에게 요청하는 다윗은 오르난에게 타작마당을 자신에게 팔아 온역이 중단되게 하는 제사를 드리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르난이 신하이긴 하지만 다윗은 그에게 겸손하게 요청했다. 나보다 못한 사람 앞에 겸손해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비천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까지 낮아지셨으며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여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복음 전파 사역에 정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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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3월 18일)
제목: "예수님은 왜 어부를 부르셨나?(Why Did Jesus Call Fisherman?)"
말씀: 누가복음 5:1~11
대표기도: 송승현 장로님(주일학교 담당)
찬양인도: 다음세대 연합찬양대
말씀읽기: 남궁이삭(고등 1,2부), 성윤지 학생(다윗 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로이 그래함
산상기도회: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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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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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 그래함-(통역 정상익 부목사님)-"예수님은 왜 어부를 부르셨나?(Why Did Jesus Call Fisherman?)"
-한국말 하나를 배우려고 한 주간 굉장히 애를 썼다. “안녕하세요?”이다. 안녕하세요? 를 제대로 발음할 수 있도록 영어로 써 주셨다. 그 정도로 읽기 힘들었다. 저에 대해서 잘 모를 것 같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는 제 할아버지께서 말씀 전하실 때, 그 자리에 계신 줄로 안다. 50년 전이라니 믿겨지시는가? 그리고 제가 여기에 와서 그때 50년 전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는 분들도 많이 만났다. 그런데 제가 이번 주는 여기 있는 친구들처럼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제가 그분들한테도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 빌리그래함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시는가? 아마 많이 안 계실 것이다. 그리고 프랭클린 그래함에 대해서 아시는 분들도 계시냐고 제가 물었다. 더 모르신다고 했다. 그래서 저에 대해서 진짜 모르실거라고 아마 생각한다. 그래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 좀 소개를 하겠다. 저는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손자이며, 플랭클린 목사님의 아들이다. 저는 세 명의 자녀를 둔 아빠이기도 하다. 제 아내는 제 세 아이와 함께 집에 있다. 저한테 18살 된 딸이 하나 있다. 15살 된 아들이 있고, 그리고 12살인 막내딸이 있는데 본인은 한 22살쯤 되는 줄 알고 있다. 물론 저도 16살일 때가 있었다. 제가 18살 때 제 삶을 예수님께 드렸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대해서 곧 말씀을 드리겠다. 제가 18살 때, 권총으로 쏘면서 한 가지 항의를 했던 적이 있다. 제가 매주 마다 천 발에 달하는 총을 쏘았는데, 저희가 6월 3일과 비슷하게 저희 부모님은 전도 집회로 많이 다니셨다.
 
알레스카에 전도 집회에 가신 적이 있다. 1995년도 일이었다. 아마 여기 있는 분들 중에는 핸드폰으로 보지 않으면 그 해가 어느 해인지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예전에는 그 부모님께 전화를 하려면 호텔을 통해서만 전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화를 해야 될 때, 전화를 직접 들고 해야 되는데 사실 이 전화를 통화하는데 아주 작은 기적과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를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데 그리고 저희 부모님이 상당히 나이가 들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알레스카라는 땅 자체가 미국에서도 상당히 동떨어진 땅인 곳이다. 제가 친구들 집에를 방문을 했었다. 그때가 3월 15일이었다. 1995년도였고, 그런데 친구 집에 잡지 위에 있던 권총이 하나 있는 것을 보았다. 제가 의자에 앉아서 그 옆에 있는 테이블을 탁 치게 되었다. 그리고 권총이 툭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제가 그 권총을 들었고, 제가 그것을 들었을 때 권총을 쏘는 트리거를 잡게 되었다. 그러는 순간에 권총이 발사가 되고 그 친구에 그 형제를 맞추게 되었다. 그래서 제 친구의 바로 밑 부분에 맞았다. 바로 그 친구는 총에 맞자마자 땅바닥에 뒹굴었다. 너무 깜짝 놀라서 뛰어가서 그 친구를 살펴보았다. 제가 CPR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CPR을 했다. 심폐소생술을 하는데 그 친구가 숨을 쉬지 않았다. 그런데 맥박이 뛰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숨을 쉬는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하는데 피를 계속해서 흘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제가 옆으로 움직여서 확인해보니 피가 너무 흘렀다. 도대체 내가 무얼 했는지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 친구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제가 하나님을 마치 119를 부르듯이 구급차를 불렀다. 엠브런스가 실제로 연락을 받게 되고 40분 만에 도착했다. 제 친구를 응급차에 태우고는 병원으로 이송했다. 굉장히 큰 두뇌에 상처가 났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사고에 제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제가 전화를 했지만 부모님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호텔이 있는 분들께 전화를 했다. 제가 전화를 하니까 호텔에서는 당신의 부모님은 40분 전에 떠났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분들을 찾게끔 호텔에서 직원들을 보냈다. 그래서 저의 상황에 대해서 저희 부모님께 이야기가 전달이 되었다. 딱 전도 집회에 설교하러 올라가시기 전에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저희 부모님께 전달된 메시지는 ‘당신의 아들이 권총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알렸고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서 그 전도 집회에 참여하셨던 청중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기도해 달라고 이야기 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서는 전도 집회 중에 엄마를 보내서 시애틀로 빨리 돌아가실 수 있게끔 하셨다. 그래서 저희 어머니께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그 전도 집회에서 매일 같이 기도를 하셨는데, 기도하는 매일 동안에 저의 친구가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뇌에 전혀 손상도 없다는 판정도 받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시력은 잃게 되었지만 완전히 시력은 잃지는 않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뇌를 지켜주셨고 병원에서는 청력도 잃어간다고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청력도 지켜주셔서 완전히 잃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제 친구에게는 결론적으로는 두 개 골의 구멍이 난 정도로만 피해가 남게 되었다. 그 친구가 입원했을 때 제가 병원에 방문했는데, 방문했을 때, 그의 아내와 어머님께서 저를 안아주시면서 크게 위로를 해주셨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다. 저는 하나님께 굉장히 화가 나 있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나요? 왜? 저에게 그렇게 하셨나요?” 그렇게 이야기 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았다. 제 친구의 뇌의 대한 엑스레이 사진이 그 뇌를 가장 잘 보는 의사 선생님께 전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의사분이 제가 함께 하고 있는 빌리그래함 협회의 소속된 분이셨다. 저희 집으로 전화가 한 통이 왔었다. 제가 알레스카로 가려고 막 짐을 싸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 의사가 전화를 주신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로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네가 의시하고 있다고 들었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희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는 일만 한 집안이고 기독교 집안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를 오신 것처럼 저도 교회를 오게 된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만들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가 저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간이 왔다. 저에게 전화 주신 그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중에 직접 찾아뵙게 되었는데 98세가 되셨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쏜 권총의 총알이 정확히 두 개골을 뇌를 향해서 돌진 했는데, 뇌를 향해 가던 그 총알이 방향을 바꾸게 되었더라. 그래서 눈 쪽에 있는 신경 쪽으로 꺾여 내려갔다가 다시 꺾여서 올라갔고 그렇게 해서 다시 두뇌 쪽으로 다시 올라간 것을 내가 발견했다. 그 위에 있는 신경을 지나서 다시 그 시신경 쪽으로 내려온 것을 보았다. 그런데 밑으로 내려오면서 턱 쪽으로 안착되는 것이었단다.”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연필을 들고 그 총알을 밀어 넣는 것조차도 어렵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때가 제가 알레스카를 가겠다고 우리 부모님의 허락을 기다리고 짐을 막 싸던 때이다. 제가 거기 가서 사냥하고 낚시를 하는 일을 하려고 하던 때였다. 그때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성경책을 주셨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 성경책을 읽는다면 내가 보내줄게.”라고 하셨다. 제가 그 알래스카에 가서 55일 동안 성경책을 단 한 번도 펼치지를 않았다. 그런데 제가 있는 그 알래스카에 찾아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제가 아빠와 성경책을 읽는다고 약속을 했는데 빨리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알래스카에 있는 호수 근처에서 제가 알래스카에는 하나님이 없으실 거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말씀을 읽었을 때,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셨다. 그리고 제 마음을 만져주셨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가 제가 예수 그리스도께 제 마음을 드렸던 때이다. 제가 그런 일들을 읽었던 말씀을 연구하게 되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이 말씀을 전했는데 제가 직접 쏘았던 그 친구가 바로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이 젊은이 중에 한 사람이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자기의 삶을 내어놓는 일이 일어났다. 그 친구가 말씀을 듣고 그 당일에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총 맞았던 게 의미가 있었다.”라고 이야기 했다. 한 명의 영혼이라도 주님 앞에 돌아올 수 있다면 의미 있는 일이야 라고 했다. 제가 알래스카에 가서 좀 낚시 가이드를 좀 했다. 저는 낚시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제가 마치 예수님의 제자인 것처럼 정말 좋아한다.
 
성경은 12제자 중에 일곱 명이 낚시를 했다. 물론 어부들은 현대시대에 쓰고 있는 세제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보다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낚시를 하려면 적어도 새벽 4시는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대부분이 새벽 4시에 오셨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제가 아는 청중이다. 낚시가 어느 정도 어려운지 아시는 분이다. 그런데 바로 낚시를 하려고 뛰어드는 것은 쉽지가 않다. 여러분 이 조류가 어떻게 흐르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물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간대를 알아야 한다. 그게 다 이 물고들이 움직이는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제가 알래스카에 일할 때 매일 16시간씩 일을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너무 좋아서 일로 여기지 않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저희 아버지께서 낚시를 하시기를 원하셨다. 제가 우리 아버지를 어부로 여기지만 제가 아는 아버지는 가장 낚시를 못하시는 분이시다. 저희 아버지는 늘 낚시를 던질 때마다 물고기가 올라오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저와 아버지가 두 보트로 나누어 타고 낚시를 갔는데 제가 한 배에 타고 있었고 친한 친구의 배를 아버지가 타고 가셨다. 제 친구가 저희 아버지께 아들이 낚시를 제일 잘한다고 설득했다. 물론 그런데 그 친구가 낚시를 잘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한 번도 이 강에서 낚시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강에서 낚시를 해보았다. 저희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은 그 친구와 함께 낚시를 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제가 탔던 그 배는 배에 가득 채워서 돌아왔다. 이 알래스카에서 잡을 수 있는 왕 연어들을 잔뜩 잡아왔다. 저희가 그래서 그 다음에 한 번 더 낚시를 하기로 하고 저희 아버지께서 제 배를 타기로 하셨다. 그런데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가 낚시 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그것이다 바로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이 어부의 특성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훨씬 더 좋고 자기가 영위할 수 있는 직업이 많지만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을 선택하셨다. 의사였고 과학자였던 누가도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라면 더 좋은 직업을 가진 자가 필요하지 않을까를 생각할 수 있다. 한 번 예전 예수님 시대에 어부가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아마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들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마 굉장히 냄새가 많이 났을 것이고, 그러나 굉장히 터프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여러분, 이 건물에 환하게 비치는 빛과 같은 조명이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이 현대시대에 제가 한국에 와서 볼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 제가 여기로 차를 타고 오는데 초승달을 보았다. 제가 그 초승달을 보면서 잠깐 생각을 해보았다. 그 달의 모양이 그들의 어느 곳에 위치하고 있는지 유일한 수단 중에 하나를 갖지 않았을까? 어부들이 사용했던 수단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아마 별을 보고 움직였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한국에 와서 한 번도 별을 보지를 못했다. 워낙 불빛이 강해서 그런 것 같다. 환했다. 그런데 갈릴리 바다를 생각해보시면 아마 풍랑이 많았을 것이다. 직접 손으로 만들었던 작은 나무로 된 배를 생각해 보라. 아마 아주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풍랑이 일면 얼마든지 배가 흔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 어부들은 그런 상황에서 낚시를 하러 나간 것이다. 여러분, 이 어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이들은 실제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굉장히 인내심을 가져야 했고 물고기를 많이 잡지 못했다고 해서 낙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일을 했어야 하니까, 여러분,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했는데 그 날에 마지막에 보니까 아무소용이 없는 적이 있지 않은가? 여러분이 하루 동안 열심히 일을 했는데 결과물이 보여줄게 없는 게 있지 않은가? 그런 경험을 늘 어부들이 했기 때문에 늘 어부들이 낙망해서는 안 되었었고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여러분이 조금 전에 저의 이야기를 통해 보신 것처럼 저는 이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 시대에는 이중 언어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 낚아 올린 물고기를 팔려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해야 했다. 여러분이 이야기를 몇 분 전에 들었던 것처럼 이 물고기를 잡자마자 그 그물을 던져놓고 움직이기도 했다. 그렇게 따르라고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이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 “하루 밤 내내 물고기를 잡았는데 아무것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하시니까 저희는 그물을 던져볼게요.” 라고 하며 그래서 물로 다시 나가서 그물을 던졌는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정말 많은 숫자의 물고기를 잡는다. 지금까지 그 이상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물고기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정말 다행스럽게도 한 가지 사실을 그들이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잡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식이나 그들의 스킬로 이 물고기를 잡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성경책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 잠깐만요, 잡은 물고기 좀 팔고 올게요.” 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예수님 잠깐만요. 배 좀 팔고 그물도 좀 팔고 올게요.”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팔고 돈을 가져오면 저희들 몇 달 동안 살아갈 돈이 될 것 같아요.” 라고 하지 않았다. 제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려두었다. 다 버리고 예수님만 찾았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어부를 부르지 않았을까를 저는 생각한다.
 
제가 알래스카에서 지내면서 왜 하나님께서 어부들을 부르셨는지에 대해서 몇 가지를 더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시든, 저 사람을 구원하시든, 저를 구원하시든, 여러 가지 다른 미끼들을 사용하시겠구나! 를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미끼를 사용하셔서 저희를 구원해 주셨다. 여러분의 부모일수 있고, 저에게 있어서 냄새나는 물고기이기도 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들을 사용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제자들인 어부들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냥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기만 했다. 저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면 제 친구의 삶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기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일들인 것 같다. 여러분이 천원을 더 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가서 좋은 차를 구입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셨냐는 것이다. 또 이 제자들에 대해서 하나 묵상한 것은 그들이 소속된 사회에서 맡은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자신들이 소속된 사회에서 먼저 사역을 시작했다. 저는 제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여러분이 모인 줄 안다. 여러분 중에 주일학교 교사도 계시고 내일 특별히 주일에 섬기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은 줄 안다. 제가 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면서 깨달은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도이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이 기도해야 할 그 친구들의 리스트를 한 번 작정해 보기를 바란다.
 
6월 3일 날 여러분이 잘 사용할 수 있는 최신 미끼가 도착한다. 플랭클린 그래함 목사님께서 복음을 명확하게 제시하실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데리고 온 친구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 친구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 주면 좋겠다. 물론 그 친구들이 상암경기장에 오게 하려면 여러 가지 미끼를 사용해야 될 것이다. 저희 전도 집회를 위해서 굉장히 많은 헌금을 한 적이 있다. 제가 그래서 그 지역으로 전도 집회를 가면서 헌금하신 집사님께 전화를 했다. 같이 가서 점심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저는 그날 식사는 어렵고 전도 집회가 끝나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바쁘시냐고 했더니, 밴을 하나 빌려서 알콜 중독자와 약물 중독자를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재활센터를 방문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을 픽업해서 전도 집회를 해야 해서 못 만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분들이 오는 대신에 저녁을 제공하기로 약속을 했다고 했다. 그 분은 본인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도 집회를 위해 보상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을 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올 수 있기를 기도하면 좋겠다. 제가 말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제가 기도를 하겠다. 먼저 빌리그래함과 함께 해주시는 사랑의 교회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저희가 이곳에 찾아오면, 이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집회가 열리게 되는데, 저희가 와서 혼란을 야기 할 수 있지만 그런데 그 혼란 가운데서도 우리 사랑의 교회도 올 수 있는 영혼들이 찾아올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여러분들의 책임이 수반된다. 여러분들이 영혼들을 모시고 와야 한다. 여러분들이 잘 하실 것이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도 제가 여기 올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린다. 기네스북에 오른 가장 큰 언더그라운드에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가장 큰 교회는 중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중국에 많이 가보았으나 그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 저를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요약
주위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는 자가 되어, 기도해 주고, 복음의 선도자가 되어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 집회의 부흥이 우리 교회로부터 다시 시작되어서 부흥의 신대기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6.3 상암 대회에 모두가 참여하여 결사적으로 기도할 때, 나라를 뒤흔드는 부흥의 세컨드 찬스가 임하여 걷잡을 수 없는 거룩한 공진이 일어나게 하시며, 전도네트워크가 구축되어서 빌리그래함 전도 협회와 우리 사랑의 교회가 함께 세계 선교 마무리로 귀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해야 한다. "예수님은 왜 어부를 부르셨나? 를 기억하여 진정한 제자로서의 복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내용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허탕만 치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다. 인생은 이처럼 자신 있는 분야에서조차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가장 귀하고 값진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얄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삶의 심오한 차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배에 가득히 차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만난 죄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베드로의 반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사건들은 초점을 예수의 구속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하셨고, 절망의 인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으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튀르키에와 시리아에 구호금 전달함-사랑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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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15일)

제목: "놀라운 그 사랑"
말씀: 요한일서 4:7~9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문진호 부믁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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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7~9,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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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저는 제 아들들과 치킨을 먹거나 피자를 먹을 때 살많은 닭다리 보다는 날개, 토핑이 얹어있는 것보다는 부실한 조각을 먹는다. 그리고 천천히 먹는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돈은 내가 냈는데 내가 차지하는 무게가 더 적다. 참 비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생각은 합리적이지 못할수록 제 마음에는 기쁨이 더 커진다는 사실이다. 내 몫을 줄이면 아들들의 몫이 커진다는 생각에 기쁘다. 대부분 부모의 마음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다. 부모는 자녀들의 기쁨을 양식으로 삼는 것 같다. 그때 문득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기뻐할 때, 아버지 하나님도 행복해 하시겠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사랑의 본질이 더 궁금해졌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한일서 4:7~9,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라고 할 때, 그분의 본질이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을 알고 싶고 그분 안에 거하고 싶다면 그 사랑을 알아야 한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사랑의 관한 이야기 세 가리를 나타내고자 한다.
 
첫 번째, 그 사랑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사랑이다.
 
*요한 1서 4:9-10,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어지는 10절도, 내용을 상세히 설명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지기 위해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시는 사랑이었다. 우리의 죄인 됨은 가치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무가치한 것을 살리기 위해서 무한한 가치를 내어주시는 비합리적인 거래를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 놀라운 하나님의 그 사랑이다. 무가치한 나를 용납해 주신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진노의 자녀, 사랑밖에는 도저히 발견할 수조차 없는 죄인 되었을 때, 보여주신 하나님 사랑의 완결판이다. 무가치한 우리를 용납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다음에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탕자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브래너 매니게 이야기를 조금 더 우리 식으로 바꾸어 보았다. 약간 길지만 한 번 들어보자.
 
*여러분의 막내아들을 미국의 아이브 리그 대학교에 유학을 보내 학교를 마치도록 여러분이 돈을 댔다고 하자. 기숙사비, 등록금, 용돈, 집에 오가는 항공료, 교통비가 4년간 3억 원이 넘는다. 아들이 졸업한다. 여러분은 아들 친구들과 그분의 친구들을 200명을 불러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성대한 철갑상어 요리, 피자와 리플 포도주, 각종 디저트가 나온다. 익명의 아이유 등, 유명 가수들이 공수되어 음악을 선사한다. 축제는 새벽에 끝났다. 당신은, 여러분은 아들과 함께 벽난로에 앉아 아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보냈냐고 묻는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한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지요. 저는 이제 아버지도, 아버지의 가치관도, 아버지의 얼굴도, 지긋지긋 합니다. 내일이 제 보험금 만기일이니 독립하겠습니다. 대학 졸업장도 땄으니 그것을 가지고 성공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지만 그것 가지고 말릴 수도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만 3년 동안 당신은 아들의 생사조차 모른다. 전화 한통, 엽서 한 장도 없다. 경찰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그러던 어느ㅍ날 월요일 새벽 3시 초인종이 울린다. 몽롱한 상태로 현관에 나와서 당신은 충격에 빠진다. 아들이 단정치 못한 이제 옷차림으로 립스틱 자국을 묻힌 채, 술기운을 풍기며 문간에 서 있다. 여러분이 그 아버지라면 돌아온 탕자에게 어떻게 하겠는가? 그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과 입맞춤을 퍼부으며 불이라는 불을 다 켜고서, 방 안에 자고 있는 아내를 소리쳐 부른다. “여보, 아껴두었던 샴페인을 터트리고 헨델의 메시아를 틀구렴, 진호가 돌아왔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소.” 사실 심각한 이야기이다. 웃으면 안 되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이런 분이시다.
 
여러분이 아버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것보다 여러분이 그 집에 오기를 아버지께서 더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실패해도, 넘어져도, 아니면 실망하고, 힘이 빠졌던지 간에 언제든지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두 팔로 안으시고 환영해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가 계신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납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되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신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가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 앉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언제라도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는 우리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요나단 때문에 다윗왕의 식탁에는 므비보셋의 자리가 있었다. 평생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왕의 손자, 원수의 손자, 므비보셋이다. 다리를 저는 불구자였다. 다윗을 위해 전쟁에 나가 힘이 되어줄 수 없는 이런 외적인 것을 조그만 보면 무가치한 존재, 므비보셋이다. 그러나 다윗을 사랑했던 요나단으로 인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왕의 식탁에 앉았다. 무가치한 존재인 우리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왕이신 하나님의 식탁에는 우리의 자리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식탁으로 나오시기 바란다. 그분의 공급을 받으시기를 바란다. 항상 예비 되어 있다. 아침과 저녁으로 큐티와 기도로, 함께 드린 공적인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시기 바란다. 우리를 위해 예비 된 식탁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왕의 식탁에 앉아야 산다. 왕의 식탁에 앉아야 살 수 있다.
 
두 번째, 그 사랑은 서로 사랑할 때 알게 되는 사랑이다.
*요한일서 4:7~8,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은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경험으로 아는 지식을 통해 닦게 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 ‘왜 공동체여야만 할까?’ 그런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사랑을 성경을 통해 그냥 감동하면 안 되는 것일까? 혼자 온라인으로 예배하고 혼자 은혜 받고, 혼자 성경보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글쎄,,,, 요한은 힘주어 강조한다.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경험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 사랑을 온전히 깨닫는 통로는 공동체이다. 서로 사랑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이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자요, 스승처럼 따라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가 우리에게 본으로 보여주는 겸손과 평범 성을 저는 한 번 적어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손에 홀을 쥐고 백마를 타고 승리한 군주로 오시지 않았다. 그는 오해 받기에 딱 좋을 만큼 처녀의 몸으로 오셨고, 짐승들의 먹이통에 누우셨다. 머리 둘 곳이 없으셨으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의 아픔과 고난을 느끼시려 팔을 쭉 뻗으시면서 죽으셨다.
 
어느 신학자는 ‘긍휼의 아들이신 그분은 자기 형제자매들의 죄책과 거부당하는 것과 실패를 흡입하려 하셨다. 십자가에서 두 팔을 벌린 것이 자기 형제자매들의 죄책과 거부당하는 것과 실패를 흡입하는 행위였다. 라고 평했다. 마냥 예수님의 모습이 다음과 같았다면 엄청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영광의 압도적인 위력과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모습과 일체의 흩트려짐이 없는 전혀 두려움이 없고 요지부동이며 누구도 필요치 않은 자의 모습이었다면 늘 자신감이 넘쳐 승승장구 하는 모습이라면 그의 앞에 서는 게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안기고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으, 수많은 죄인과 소원을 가진 이들이 부르짖으며 주님을 만나고자 할 때에, 주님은 자신의 자리를 쉽게 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을 만지시고 안아주셨다. 누구라도 그분의 설 수 있도록 예수님은 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그분은 우리에게 사랑할 기회를 주시면서 내게도 그분에게 드릴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 주셨다.’ 라고 그 신학자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예수님은 약한 모습으로 오신 그 이유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라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를 사랑할 기회이다. 세상은 서로를 연약함을 배척할 기회로 삼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서로를 섬기를 기회로 삼는다. 그 섬길 기회를 포착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서로의 약점을 적절히 내 보이는 공동체가 되어서 서로 발을 씻어주고, 서로의 약점을 두 팔로 안아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공동체가 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본보기이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의 약함을 통해 나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약한 자와 실패한 자, 무기력한 자와 무가치한자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삶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며 다시 사랑 받는 존재로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가 줄 수 있는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할 그 때가 서로 사랑을 통해서 이점이 너무나 중요하다. 서로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될 절호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4절에서 보면,
 
*고린도후서 13:4,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우리는 서로 우리의 약함을 안아주고 싸매어주고 감싸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영광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힘없고 연약하고 겉보기에는 실패한 모습이셨던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자신을 따르게 하셨고 제자들은 그 스승의 길을 따라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서로를 사랑하는 긍휼의 삶을 삶으려 말미암아 그분의 수난을 재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힘없고 연약한 모습으로 다가가 형제자매들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는 분이시다. 그곳에 저와 여러분처럼 그분의 종, 그분의 제자들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다. 무관심이다. 타경철은 무관심이 만들어 낸 불행, 동시에 사랑이 만들어 낸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한다. ‘인생에서 불행은 내가 우울할 때, 남은 웃는 것이고, 인생에서 더 큰 불행은 남이 울 때 나는 웃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은 웃지고 울지도 않는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은 내가 울 때 남도 우는 것이며, 인생에서 더 큰 행복은 남이 울 때 나도 우는 것이며 인생에서 큰 행복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옆에 울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함께 울어주어라. 옆에 웃고 계신 분이 계신다면 좀 자존심을 내려놓고 함께 웃어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 아니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의 약함을 채워주라고 공동체로 불러주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더욱 알게 하시려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바라옵기는 그 기회를 꼭 잡기를 바란다.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어지는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세 번째, 그 사랑이 주는 유익이 있다.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해준다.

*요한일서 4:17,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심판 날에 담대함은 이것이다. 구원받을 것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여러분 구원 받았는가? 마지막 날에도 완성되어 그 자리에 계실 줄로 믿는가? 아멘! 어떤 훈련생이 저에게 질문을 했다.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받고 어차피 죽을 때까지 성화를 이룰 수 없다면, 그 죽을 때까지 성화를 이루는데 참 어려운데 과연 성화를 이룰 수 있는가요?” 그런 질문이었다. 그런 질문을 충분히 짐작했다. 죽을 때까지 이룰 수 없는 성화를 왜 이루려고 그토록 애를 써야 합니까? 성화되려고 하는 훈련, 꼭 받아야 됩니까? 한 번 묻고 싶었다. 이 자리에 오셨다. 아마도 아내에게 끌려서 왔습니다. 라고 하실 수 있다. 어떻게 왔던지, 제가 대답했다. “그렇죠. 우리 중에 한두 분은 죽을 때, 성화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은 저를 포함해서 성화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그런데 왜 훈련을 받으며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애쓰지요?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인생의 졸업식 날에도 내 힘으로 이루지 못한 성화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루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갖는 담대함이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아니 설령 성화의 삶을 완성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를 버리지 않고 나를 주의 집에 영원토록 거하게 하실 것이라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갖는 평안이 그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의 구원이 거룩해지려고 애썼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인가? 여전히 인생 졸업식에 성화를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줄 믿는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완성도 은혜로써 이루어질 것임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그러면 성화를 이루는 삶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성화에 관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여러분, 자녀가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모의 완전한 사랑, 온전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녀에게 완벽하게 보이는 것이다. 자녀가 완벽해서도 아니고 완벽하라고 날마다 결심하기 때문도 아니다. 부모는 자녀를 온전히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는 부모에게 완벽한 존재인 것이다. 부모의 사랑의 핵심이다. 자녀가 부모 앞에 완벽해지려 애쓰는 모습이 어떤 면에서는 참 안타까울 때가 있다. 착한 아이가 되려고 노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면 “그러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다. 우리가 완벽하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그런데 참 행복한 진리가 여기에 있다.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자란 아이가 사랑이 많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난 우리가 더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여러분, 성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으면 받을수록 온전해지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완벽해질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라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사랑하고 더 온전해지고 싶어지는 것, 여러분, 이것이 성화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부러울 것도 부족할 것도 없이 홀로 완전하게 만족함을 살고 있는 중년 남자, 잭 니콜슨이 등장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삶에 끼어들어와 사랑하게 된 헬렌 헌트에게 건네는 유명한 대가가 있다. You make me one of batter man(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었소).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녀가 부모의 온전한 사랑을 받을수록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욕구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눈물을 먹고 산다고 한다.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한 그 제목들은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는 줄로 믿는다. 좀 더 들어가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받아들여질까, 안 받아들여질까, 고민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그 사랑을 나누고 누릴수록 담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더 원하고 원하게 되는 것,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만족 주소서.” 주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그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겨나는 거룩한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해 더 완벽해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미 완벽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 완벽한 사랑을 받게 되면 더 온전해지고 싶은 욕구가 발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게 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이 성숙되는 원리인 것이다. 최고의 단계는 주님 자체를 원하는 것이다. 전에는 내가 원했던 것을 원하게 주님을 찾았다면, 이제는 주님 자체가 너무 좋은 것이다. 여전히 내가 실수투성이 약점 투성이 일지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에 관해서 깨닫게 되면 그 앞에 두려움 없이 설 수 있게 되는 줄로 믿는다. 그 사랑이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이 있다면 응답의 확신이다.
 
*요한일서 5:14,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실까? 안 주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설령 우리가 구하는 것을 안 주신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에게 안 좋은 것이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안 주신다고 우리가 손해 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 계속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구할 것을 다 받을 줄 확신하는 가운데 우리가 구할 것을 무엇이든지 들으실 줄 알면서 구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아니 이미 얻은 것인 줄을 확신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한 자가 얻는 담대함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2절에서 보면,
 
*로마서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를 위해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뭐가 아까워서 아니, 뭔들 줄 수 없어서 안 주시는 것인가? 안 주신다면 우리에게 해가 되거나, 당장 안 주신다면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줄로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주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우리의 필요를 원하시는 좋은 주기를 원하시면 알아서 좋은 것 주시면 되는데, 왜?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시는가? 그런 의문이 들지 않는가?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에게 유익이 있어서이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지 선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가 되게 해주시는 것이다.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성공과 실패, 구함과 응답의 이분법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나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에 우리는 구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참 많다.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가 말하는 일화가 있다. 자기 동료 사역자 한 명이 수업시간에 상자 하나를 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그것을 부수라고 했다고 한다. 학생들은 구멍을 내고 구기고 발고 차고 박살을 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자를 책상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놓는다. 전등을 가져다가 그 상자 안에 넣고 전원을 켰다. 학생들을 그 상황이 주는 역설을 깨달았다. 예수의 빛이 우리의 상처를 통해 더 잘 미친다는 역설이다. 때로는 응답이 너무 늦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상처받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가 있다. 여러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부서진 상자의 역설이다. 우리의 연약함이 크면 클수록 그 구멍이 크고 깨어진 부분이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가 가장 빛나는 곳이 된다는 역설이다.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우리의 약함이 클수록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를 통해 더 밝게 비춰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은 우리가 가장 약할 때 온전해 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바울이 고백한다.
 
*고린도후서 12:9,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약함을 통해서 세상의 그분의 사랑의 빛으로 비추기로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종들인 우리의 약함과 실패, 그 약함을 보듬는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어두운 세상의 빛을 비추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이다. 이 진리를 붙들고 함께 부르짖으며,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며 서로 약함을 싸매어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세상 가운데, 어두운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밝은 빛을 비추어내는 아름다운 생명의 공동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그 은혜를 세상 가운데 널리 전파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다락방과 우리 훈련반과 또 우리가 가정이 그렇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요약
무가치한 나를 위해서 생명 주신 예수님을 인해 감격하여 하나님의 식탁위에 날마다 앉는 자가 되어 약한 모습으로 찾아오시는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함으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부서진 상자 같은 우리를 통해 더 밝은 주님의 빛을 세상에 비추게 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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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3월 13일 (789)
1. 기업 경영 트렌드인 ‘ESG’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E와 가장 밀접한 것을 고르면?
① 순이익 ② 환경
③ 인권 ④ 지배구조
2. 기업과 기업 사이에 이뤄지는 거래를 뜻하는 용어다. 공사 자재, 부품, 재료 등의 거래가 대표적 사례인 이것은?
① B2B ② B2C ③ O2O ④ P2P
3. 자국 기업의 수출 지원 등을 목적으로 정부가 인위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국가를 가리키는 말은?
① 조세피난처 ② 환율조작국
③ 중진국 ④ 기축통화국
4. 다음 중 유럽연합(EU) 회원국이지만 유로화(€)가 아닌 자국 화폐를 공식 통화로 쓰고 있는 나라는?
① 스위스 ② 독일
③ 스페인 ④ 프랑스
5. 주식·채권 등 전통적 투자처를 벗어나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 것을 ‘OO투자’, 특정 재화와 같은 효용을 주는 재화를 ‘OO재’라고 한다. OO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은?
① 한계 ② 경쟁 ③ 위탁 ④ 대체
6. 현재 한국은행 기준금리는 얼마일까?
① 연 3.0% ② 연 3.5%
③ 연 4.0% ④ 연 4.5%
7. 기업이 좋은 실적을 냈을 때 직원들에게 보상으로 지급하는 돈은?
① 충당금 ② 가지급금
③ 배당금 ④ 상여금
8. 점포를 거래할 때 기존 점주가 쌓은 영업 노하우와 단골 등을 이어받는 명목으로 지급하는 돈은?
① 권리금 ② 잔금
③ 중도금 ④ 미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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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41년 머뭇거린 이유
 
이르면 2026년 우리는 설악산 오색약수터 근처에서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1430m 고지인 끝청까지 올라가면서 설악의 절경을 즐길 수 있을 듯합니다.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설치를 놓고 무려 41년 동안 이어져온 찬반 논란이 지난 2월 27일 최종적으로 정리됐기 때문입니다. 환경부는 강원도 양양군이 작년 12월 제출한 ‘설악산 국립공원 오색케이블카 설치 사업’에 대해 몇 가지 조건을 붙여 승인했습니다. 강원도와 양양군은 “강원 지역의 숙원 사업이 드디어 해결됐다”며 “올해 안에 착공하겠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설악산에 케이블카가 있습니다. 설악 소공원과 권금성을 오가는 1.1㎞ 길이의 케이블카가 운행 중이죠. 새로 설치될 케이블카는 이것보다 훨씬 길어 3.3㎞나 됩니다. 몸이 불편해 설악을 오르지 못했던, 설악의 아름다운 사계를 볼 수 없었던 사람들도 이제 마음만 먹으면 쉽게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설악 케이블카 설치는 환경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첨예하게 부딪혔던 상징적인 사업이었습니다. 케이블카가 자연환경을 해친다는 시각과 케이블카가 오히려 동식물을 잘 보호한다는 시각이 대립했습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이 달라진 탓에 41년이 흘렀던 겁니다. 오색케이블카가 어떻게 설치될지, 환경을 둘러싼 논쟁점은 어떤 게 있는지 사례를 통해 더 알아봅시다.
우리는 오색케이블카 허가하는 데 41년
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는 수천 개 운영
설악산은 강원도 양양군, 속초시, 인제군, 고성군에 둘러싸여 있는 큰 산입니다. 제일 높은 봉우리는 대청봉입니다. 높이가 해발 1708m나 됩니다. 우리나라에선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죠. 대청봉 옆에 나란히 있는 봉우리가 끝청봉, 중청봉입니다.
오색케이블카는 양양군 쪽 ‘오색약수터~끝청’을 오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습을 바꾸는 설악의 모습을 3.3㎞짜리 케이블카를 타고 감상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군요. 오색케이블카 사업은 41년간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양양군과 강원도는 1982년 설치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케이블카가 명산인 설악산의 생태계와 자연을 해친다는 환경단체의 반대로 사업은 첫 30년 동안 물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양양군은 2012년과 2013년 다시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사업계획은 대청봉 경관 훼손 등의 이유로 다시 좌절됐습니다. 2년 뒤인 2015년 재차 도전해 국립공원위원회로부터 조건부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019년 원주지방환경청이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해 ‘조건부 승인’을 뒤집었습니다. 2020년 양양군은 행정심판으로 맞섰습니다.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환경영향평가를 다시 한 것은 위법하다”며 양양군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021년 원주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산양 개체수 조사 등 10개 보완요구 사항을 덧붙여 다시 반대했습니다. 환경단체들도 원주청의 편에 섰습니다. 2022년 11월 국민권익위원회 조정안에 따라 양양군은 환경영향평가 보완 절차를 진행했고 마침내 지난 2월 27일 자연보호종 서식지 조사 등 몇 가지 조건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승인받았습니다.
강원도와 양양군은 늦어진 만큼 사업에 속도를 내기로 했습니다. 케이블카 설치에 필요한 행정 절차를 신속하게 밟아 올해 안에 첫 삽을 뜨겠다는 겁니다. 설치 공사가 순조롭게 이뤄지면 케이블카는 2026년 첫 손님을 태울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양양군이 마련한 계획을 보면, 케이블카는 8인승 53대로 편성됩니다. 시간당 최대 825명을 태울 수 있는 규모입니다. 하부 정거장에서 상부 정거장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으로 깁니다. 강원도와 양양군은 공사비로 1000억원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합니다. 연간 이용객은 170만 명 정도라는군요.
오색케이블카가 설악산 첫 케이블카는 아닙니다. 이미 속초시 설악 소공원에서 권금성까지 올라가는 1.1㎞짜리 설악케이블카가 있답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설악케이블카는 연간 60만 명가량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속초시에 이어 양양군이 숙원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됨에 따라서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의 유사 사업도 추진될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먼저 인제군과 고성군이 가만히 있지 않을 분위기입니다. 인제군은 3.8㎞짜리 백담사 케이블카 사업을, 고성군은 1.4㎞짜리 신선대 케이블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겠다고 벼르고 있습니다. 한라산, 지리산, 가야산, 월악산 등을 끼고 있는 지자체들은 물론이고 부산도 해운대와 이기대를 잇는 4.2㎞짜리 케이블카 사업을 밀어붙이려 합니다. 지역 경제 살리기에 도움이 된다면 뭐라도 할 태세입니다. 케이블카 외에 둘레길, 오름길, 출렁다리, 집라인 개발 경쟁도 뜨겁습니다.
이런 경쟁은 국가 간에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은 세계 최장 케이블카 자리를 놓고 경쟁 중입니다. 중국 장자제 톈먼산에는 7.4㎞짜리 케이블카가 설치돼 있습니다. 무려 35분이 걸리는 긴 케이블카입니다. 베트남 푸꾸옥 케이블카 길이도 7.8㎞에 달한다고 합니다. 프랑스 샤모니몽블랑 케이블카는 해발 3842m까지 올라갑니다. 스위스에는 450개, 오스트리아에는 2600개, 알프스를 끼고 있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는 600개의 케이블카가 운행합니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케이블카 사업은 국내총생산(GDP)의 6%를 차지할 정도로 높은 경제효과를 거두고 있답니다.
NIE 포인트
1. 설악산 오색케이블카가 어디에 설치되는지 찾아보자.
2. 케이블카가 우리나라 육상, 해상에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자.
3. 오색케이블카가 허가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늦어진 이유를 토론해보자.
생태근본주의 "현대문명이 자연 파괴"
부국환경론 "경제발전이 환경을 보호"
“설악산에 오색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지방자치단체의 사업이 41년 동안 미해결 상태로 머물렀던 이유에는 환경 이슈가 있습니다. “케이블카가 자연환경을 해친다”는 시각과 “케이블카가 오히려 자연을 보호한다”는 시각이 대립했던 겁니다.
환경을 최우선시하는 것을 우리는 생태근본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다시 심층생태주의(Deep Ecology)와 생태중심주의(Ecocentrism)로 나뉩니다. 심층생태주의는 “모든 유기체는 전체 자연을 구성하는 평등한 구성원이므로 동일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생태중심주의도 비슷한데, 모든 생물종 같은 집합적 자연과 생태계 같은 전체 자연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주의를 말합니다. 인간을 중심으로 생태계를 보지 않고 자연 자체를 최고의 가치로 보는 환경론입니다.
생태근본주의는 20세기 중반 선진국을 중심으로 태동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르네 네스(1912~2009)입니다. 그는 네 가지를 주장했습니다. ①자연은 인간을 위한 자원이 아니다. ②모든 생명체는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③자연계의 절대적 존재는 없다. ④지구 수용능력에 한계가 있고 인구가 감소해야 한다. 생태근본주의자들은 생태계의 평화를 위해 근대산업주의를 해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온 게 바로 녹색당, 환경당 같은 조직이랍니다. 크리스토퍼 메인스와 토머스 베리 같은 보다 강경한 생태주의자들은 “현대 문명을 파괴하고 유목 생활과 수렵채집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거나 ”인간은 세상에 고통을 주고 있다. 인간이야말로 자연에 암적 존재다”라고 합니다.
반면, 환경개발론자들은 “인간의 경제 성장과 번영 탓에 자연과 생태계가 망가졌다고 보는 것은 허위”라고 맞섭니다. 인간이 80억 명을 자랑하는 지구 지배종(種)으로 번성하긴 했지만,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기보다 오히려 보호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들은 “찰스 디킨스(1812~1870)가 산업혁명이 뱉어내는 산업폐기물과 매연, 썩은 물을 보고 기겁한 것은 이해하지만, 그런 시대는 가고 환경에 투자하고 환경을 관리하는 시대가 됐다”며 “더 많은 사람이 먹을 식량을 더 작은 땅에서 생산하는 기술이 발전했고, 도시에는 더 많은 사람이 살면서도 주변의 산은 더욱 푸르고 강물은 더 맑다”고 반박합니다. 이들은 부국환경론을 앞세웁니다. 경제 성장으로 가난을 타파하는 게 생태계를 보존하는 가장 과학적인 접근법이라는 겁니다. 세계 10대 숲 파괴 국가 중 라오스와 중앙아프리카 국가 같은 가난한 나라가 대거 포함된 점을 강조합니다. 이들은 “자연을 숭배하고 1만 년 전 유목 생활로 돌아가자고 말하면 대화가 안 된다”며 “부국환경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라고 말합니다.
환경경제학은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영역입니다. 환경자원을 어떻게 개발하고 관리하는 게 합리적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잠깐!!! 환경 쿠즈네츠 곡선
미국 경제학자 진 그로스먼(Gene Grossman)과 앨런 크루거(Alan Krueger)는 경제 성장과 환경오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둘의 상관관계를 표현한 게 ‘환경 쿠즈네츠 곡선’입니다. 이 곡선은 국민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성장 초기 단계에선 환경오염이 심해지지만, 일정한 소득 수준을 넘어서면 환경오염이 다시 감소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소득이 증가할수록 사람들은 삶의 질과 환경에 관심을 더 갖게 되고, 결국 환경 투자를 늘려 오염 가능성을 줄인다는 겁니다. 쿠즈네츠 곡선은 원래 경제 성장과 불평등 관계를 연구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쿠즈네츠가 만든 겁니다.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발전하면 소득 불평등이 오히려 개선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환경과의 상관관계에서도 거의 동일한 그래프 모양이 나타났기 때문에 ‘환경 쿠즈네츠 곡선’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NIE 포인트
1. 생태근본주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2. 부국환경론은 어떤 주장을 하는지 찾아보자.
3. 경제 발전과 환경의 상관관계를 주제로 토론해보자.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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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예배는 영상이 나오는 2부 예배의 내용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일예배(주후 2023년 3월 12일)
제목: "부흥의 실체를 경험한 사람"
말씀: 역대상 4:9~10
대표기도: 유주은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역대상 4:9~10,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 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 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ㅡㅡㅡㅡㅡㅡ
 
▶오늘 회중 찬송을 했는데,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그 보좌 앞에 둘러서 그 보좌 앞에 둘러서
큰 영광 돌리세 큰 영광 돌리세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
그 보좌 앞에 둘러서 그 보좌 앞에 둘러서
큰 영광 돌리세 큰 영광 돌리세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찬송하며 올라가세
내 눈물 다 씻고 늘 찬송 부르리.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나 영광 누리리 나 영광 누리리.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주의 찬란한 성에
주의 찬란한 성에
주의 찬란한 성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임마누엘 주 앞에
저 밝고도 묘한 시온 성 향하여 가세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


-제가 찬송을 준비하면서 많은 기도를 했다. 우리 성도들 오늘 이 예배당에 들어왔을 때에, 성전 뜰만 밟고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예배하게 하여 주시길 원한다. 모두가 다 지성소를 경험하게 되길 소망한다. 생수 강을 모두가 다 체험하기를 바란다. 
 
저는 지금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를 하는데, 국가적인 거대담론, 사회의 이런 내용들도 좀 제가 기드온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말씀을 했다. 오늘은 거대담론보다는 우리 개인적으로 필요함을 생각해서 역대상 4장에 야베스에 관한 말씀이다. 제가 볼 때에 그 사업이나 가정에 개업 할 때, 심방할 때 보면 액자가 거의 집안에 있는 말씀이다. 이 ‘야베스의 기도’의 액자는 말씀으로 것이 있는 것과 직접 체험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무리 산해진미가 있어도 먹어보아야 맛을 안다. 최고의 음식이라도 그림으로 있어보아야 잘 모른다. 내 것으로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 것으로 와 닿아야 한다. 지금 신구약 모든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확신해야 한다. 흔히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를 이야기 하는데 이 야베스가 누구인가? 많은 분들이 야베스를 말할 때, 무슨 아브라함이나, 족장들이나 부잣집으로 생각하는데, 야베스는 그런 아들이 아니었다. 야베스는 오늘 본문을 보면 야베스는 앞에 3장은 찬란한 유다지파의 후손은 다윗이었다. 다윗의 계보가 나오다가 4장은 유다지파 가운데 비주류이다. 이름들을 나열하다가 갑자기 9절과 10절에 와서 어떤 인물 하나를 일방적으로 줌인 하고 클로즈 업 하듯이 그냥 이 야베스가 대단한 집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야베스를 클로즈업을 시킨 것이다. 야베스의 배경을 살펴보았더니 야베스가 오늘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부흥의 실체를 경험하는 데에 야베스가 그의 배경이 부흥의 실체를 이루는 배경은 아니었다. 야베스는 어머니가 야베스란 이름을 지을 때에 그의 이름을 수고로이 낳았다고 해서 ‘고통과 슬픔’으로 의미를 주었다. 그러니까 대단한 배경이 아니었다. 고통과 슬픔이다. 유대인은 이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했다. 그 이름의 뜻이 얼마나 소중한데 아무렇게나 이름을 짓지 않는다. 야베스가 고통이다. 슬픔이다. 이렇게 지을 정도로 그가 평탄한 인생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환한 인생이 아니었고 그의 인생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 본문 9절을 보면, 
 
*역대상 4:9,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형제들도 특별히 내 세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하고 대단한 이름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수고로이 낳았다. ‘고통, 슬픔’, 그리고 유대 나라는 웬만하면 자기 조상이 언급되는데 심지어는 아간도 언급될 정도인데, 오늘 야베스는 아버지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성경학자들은 이 야베스의 아버지 이름 없는 것을 보니 적어도 9-10절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데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아버지가 자랑스럽지가 않고 자식에게 무언가 물려줄 수도 없는 것 같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버지가 무책임한 아버지였다. 물려줄 땅도 없고 유대인들은 흉년이 되면 기업의 유산이 남에게 빼앗긴 뒤에 50년이 지나면 다시 찾아오게 되는데 그런 땅도 없을 정도로 였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아버지가 이름이 없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족들에게 치욕을 앗겨줄 사람인 듯하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오죽하면 자식의 이름을 너는 이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야베스’라고 지었겠는가!!
 
*역대상 4:10,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것을 보면 –땅도 없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형제들도 존귀하지 않고 아버지 이름도 없고 오죽하면 야베스가 기도할 때,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했다. 환난이나 근심이라는 말이 야베스 이름에 슬픔과 고통과 다름이 없다. 그러니까 안팎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환난과 근심이 있는데 이것을 주님께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야베스라고 할 때, 보아스라고 하는 창세기 족장들처럼 그런 부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앞에 3장에는 다윗의 영광스런 족보이고, 4장은 비주류의 족보이고, 유대인은 족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지 계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을 정리하면 야베스는 모든 상황이 좋지 못한 조건을 가진 청년이다. 재산을 다 잃어버린 무책임한 아버지, 형제들도 대단하지 않고, 명예도 없고, 자신은 슬프다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 가운데 야베스와 동질감을 느낀 성도님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분은 어릴 때 자식을 버린 집안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 환경도 있을 수 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진짜 억울하게도 빚을 물려받는 자녀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야베스와 같은 동질감의 성도가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음성이 있으리라 믿는다. 여기에서 이런 내용을 가진 야베스가 이 기도를 통하여 반전이 되는데, 아주 드라마틱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고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반전하게 해 주심을 믿어야 한다. 패자 부활전이 가능하게 하신다. 
 
I. 야베스의 배경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에게 미친것처럼 그렇게 어머니가 야베스에게도 기도의 대한 인식을 시켜준 것 같다. 그러니까 10절을 보면, 
 
*역대상 4:10a,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아뢰어 이르되~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히브리어로 찾아보면 적당한 기도의 뜻이 아니다. 아주 절절하게 부르짖음이다. 결사적으로 내가 부르짖음이고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결사적으로 외친다는 것이다. 전력투구 해서 기도한다는 그런 내용이다. 그래서 이 기도가 자기의 운명을 반전시킨 기도이다. 그의 결사적이고 절절기도이다. 그 핵심은 오늘 이 말씀을 다 외워야 한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아무도 어려운 분이 계시면 안 된다. 이렇게 결사적으로 기도하면 인생이 반전이 되는 것이다. 이게 믿음이고 기도의 능력이다. 
 
저는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강조하지만 기도지팡이를 어떤 분은 반대도 있지만 우리는 기도의 지팡이에 절실함이 있다. 사라의 교회 지팡이는 기도할 때, 이 지팡이로 마음의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절절하게 기도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⓵ 내게 복에 복을 더하여 주옵소서.
-개혁 개정판에서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이렇게 나와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이 복은 초자연적인 복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주시는 참된 복이다.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다. 나 좀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게 해달라는 것이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복에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은혜의 복이라는 것을 말한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기적과 같은 은혜이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것이다. 좀 더 들어가면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자각하게 해 달라. 는 것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깨닫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복이다. 나머지는 우수마발이다.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것이 복에 복을 더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나의 창조주이심을 깨닫게 되어야 한다. 
 
⓶내 지경을 넓혀 달라.-세컨 찬스 구한다. 
-이것은 야베스 같은 경우는 부모로부터 어떤 좋은 환경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 명예가 실추가 되고 우리를 속박하는 것들을 돌파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주님 다 역사하여 주시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컨 찬스가 쉽지 않은 나라이다.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를 말하면 지금 세컨 찬스를 얻은 것이다. 지금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옵소서. 했다. 결사적으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소서!’ 이것이 회복을 넘어 부흥인 것이다.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주여 저에게 세컨 찬스를 주시옵소서.” 하라.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⓷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주님의 손은 능력과 권능의 손, 여러분, 주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시다. 능력의 손이시다. 주의 손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은 네비게이션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내 인생에 네비게이션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다. 
 
⓸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고 내 인생을 향도하시고 내 인생의 가이드가 되어 주시면 그 이후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된다. 아마 야베스가 가정적 상황이나 배경적으로 좋지 아니었지만, 사람마다 연약하고 근심이 있는데 주님이 이 가운데 우리에게 샬롬의 평강을 주시기를 소망한다. 계속해서 절실하게 읽고 기도하여야 한다. 여러분, 우리는 토요일마다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나와서 기도하지 않은가? 절실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 하면 내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민족적, 개인적으로 이렇게 해야 살 수가 있다. 많은 기도제목을 가지고 와서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하니까 응답이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야베스는 기도를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붙잡고 절박하게 외친 것이다. 
 
II. 야베스는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기도했다. 
 
*역대상 4:10,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 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들을 허락하셨더라.’라고 하셨다. 저는 이게 너무 좋다. 고난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아니면 기대하지 않았는데 땅의 회복을 주셨는지도 모르겠다. 또 사람들에게 명예가 회복되어서 존경을 받았는지도 모르겠고, 여하간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그리고 앞에 순서가 왔다 갔다 하지만 앞에 2장 55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3장
*역대상 2:55,-야베스의 회복. 
55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곧 디랏 종족과 시므앗 종족과 수갓 종족이니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더라.
-야베스가 땅의 회복을 받아서 이름을 야베스라고 이름을 붙인다. 마치 충무로, 이순신 장군, 세종로, 등으로 그런식으로 야베스의 이름이 회복된 것이다. 이렇게 성경학자들은 대게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기도를 앞에 놓고 나도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고 외치고 부르짖어 보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듣고 응답하실 것이다. 남들이 무어라 함은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 성경에 로또가 나온다. 롯,,, 하나님 없이 로또 맞으면 끝이 좋지 않다. 영적인 대 반전이 되어야 한다. 
 
*창세기 39:2,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남들이 뭐라하는 거 필요없고 하나님이 뭐라 하시는지를 잘 보아야 한다. 신약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와 같다. 죄의 횡포가 기승부리지 않도록 도우소서. 믿음보고 2.0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여러분이나 야베스의 참된 복을 구하자!!~ 아무리 세상 적으로 좋아도 하나님의 복을 달라고 해야 한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야베스보다 더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이 십자가를 깨달았으니 피의 복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에 나온다. 
*로마서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진짜 복을 허락해 주실 것을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일이 안 풀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도전하라. 야베스처럼 절실한 기도를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이 못 박힌 기도의 손에서 나온 복이며 창에 찔리신 구세주의 옆구리로부터 나온 복이다.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으로부터 나온 복.
‘갈보리의 피 묻은 나무로부터 나온 복
‘창에 찔리신 구세주의 옆구리로 부터나온 복. 
-우리는 차원이 다르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평강과 희락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영적인 분별력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성도와 연합해서 놀라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놀라운 복을 주시는 것이다. 생수의 은혜의 강을 체험해야 한다. 여러분들의 삶에 영적인 반전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말씀을 듣고 좋게 인식이 아닌 진짜 미치도록 구하는 것과 다르다. 오목사님은 복을 받은 분이시다. 우리 교회 장로님도, 권사님들도 다 복을 받은 분들이다. 모든 성도들도 복을 받은 분들이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신 결과로 나오는 모든 것이 진정한 복이다. 
 
*“대부분 성도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 -찰스 피니-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이 찬송은 노이 마르크라는 독일사람이 먼 길 떠나는데 강도를 만나 무일푼 거지가 되었다. 그 가운데 어떤 목사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법학을 전공했고 하나님을 의지하니 이 찬양 곡을 마음에 주셔서 작사, 작곡 했다고 한다..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요약 
우리가 인생이 힘든 자리에서도 절절하고 결사적인 기도로 부르짖으면 야베스의 패자부활처럼 은혜의 축복을 주시며,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나에게 새로운 기회로 지경을 넓혀주시고 환난과 근심을 벗어나게 하시고 영적 대반전이 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십자가의 피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역대서 기자는 그를 유다 가문의 신앙과 경건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시킨다. 그의 이름은 슬픔과 수고를 뜻한다. 하지만 그는 기도를 통해 축복된 삶을 얻게 되었다. 기도와 믿음을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은 역대 상에 타나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야베스는 그 같은 축복을 보여 준 산 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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