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3월 6일 (788)
1. 다음 중 나랏빚 규모가 과중해지지 않도록 통제하기 위한 규범을 뜻하는 용어는?
①5%룰 ②10%룰
③재정준칙 ④재정승수
2. 다음 중 해운산업의 업황을 파악할 수 있는 지수는?
①BDI ②CPI ③PCE ④DSR
3. 새 아파트를 분양할 때 적용하는 ‘청약가점제’에서 점수 산정에 반영되는 요소가 아닌 것을 고르면?
①무주택 기간
②부양가족 수
③연소득
④청약통장 가입 기간
4. 성장동력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통화 긴축을 자제하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는?
①노 랜딩
②노 타이트닝
③디스인플레이션
④기대인플레이션
5. 다음 중 정부가 저신용자의 자금 융통을 도와주기 위해 운영하는 대출 상품은?
①햇살론
②특례보금자리론
③오버나이트론
④브리지론
6. 우리나라 1원짜리 동전에는 어떤 그림이 새겨져 있을까?
①무궁화 ②거북선
③다보탑 ④이순신 장군
7.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시중은행과 달리 주식, 채권, 인수합병(M&A) 자문 등 기업 금융 서비스 등에 주력하는 은행은?
①상업은행 ②저축은행
③특수은행 ④투자은행
8. 증시에서 결산기를 앞둔 기관이 인위적으로 투자 수익률을 끌어올리는 행위는?
①윈도 드레싱 ②디레버리징
③디커플링 ④쇼트 커버링
---------------------------------------
[커버스토리]
항공사 '마일리지' 제도 공정하게 운영되려면...
대한항공이 마일리지 제도를 바꾸려다 소비자 반발로 보류했습니다. 해외여행을 가려는 사람들에겐 마일리지가 중요합니다. 착실하게 모은 마일리지로 해외여행 갈 때 보너스 항공권을 사거나, 일반석보다 편하고 넓은 좌석으로 승급(업그레이드)하기를 원해서죠.
이번에 대한항공은 마일리지 공제 기준을 ‘지역’에서 ‘운항 거리’로 바꾸려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국제선의 경우 4개 지역별로 소비자가 지불해야 할 마일리지가 달랐습니다. 이것을 운항 거리에 비례해 국제선 10개로 세분화하려 했습니다. 이용 노선의 실제 거리에 따라 공제 수준을 결정하는 게 ‘합리적 기준’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꾸면, 미국이나 유럽 같은 장거리 여행에서 마일리지를 이용하려는 소비자의 부담이 더 커집니다. 예를 들어 ‘인천~뉴욕’ 여행을 위해 프레스티지석(비즈니스석) 보너스 항공권을 구매하려면 편도 6만2500마일이 필요했던 것이 9만 마일로 늘어납니다. 소비자로선 자신이 모은 마일리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죠. 물론 단거리 등 일부 구간의 경우 필요한 마일리지가 줄어들긴 하지만, 이런 구간은 마일리지 활용도가 장거리보다 떨어집니다.
소비자들은 반발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고요. 올해 4월부터 새로운 마일리지 제도를 시행하려던 대한항공은 결국 물러섰습니다. 고객 의견을 수렴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기업이 마일리지 제도를 도입하는 이유를 알아봅시다. 마일리지 제도를 운용하는 기업은 대개 약관에 그 내용을 담고, 그런 약관이 공정한지는 정부 부처에서 심사합니다. 약관이 무엇인지, 정부의 약관 규제는 어떻게 정당성을 확보하는지도 함께 생각해봅시다.
기업은 단골을 만들기 위해 마일리지 제도를 운영해요
기업은 자기 회사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고객이 필요합니다. 어쩌다 한 번 구매하는 고객 말고, 지속적으로 구매하는 단골 고객을 원합니다. 단골을 확보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죠.
마일리지 제도란
마일리지 제도가 대표적입니다. 기업은 상품의 구매 또는 서비스의 이용 실적에 따라 고객에게 마일리지를 지급합니다. 마일리지의 다른 표현은 포인트입니다. 항공사가 소비자에게 주는 것이 마일리지라면, 다른 기업들에선 포인트를 제공합니다. 신용카드사,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등 우리 주변에 포인트를 주는 기업은 매우 많습니다. 짜장면을 집으로 배달시키면 중국집에서 함께 보내주는 쿠폰도 마일리지나 포인트에 해당합니다.
마일리지, 포인트, 쿠폰 모두 기업(혹은 식당)이 소비자에게 단골손님이 돼달라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은 소비자가 즉시 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일정량을 모아야 쓸 수 있습니다. 중국집 쿠폰을 20장 모으면 그것으로 탕수육을 시킬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단골 고객의 다른 말은 ‘상용 고객’입니다. 여기서 상용은 한자 항상 상(常)과 쓸 용(用)을 사용해 ‘일상적으로 늘 쓴다’는 의미입니다. 기업에는 자사 상품이나 서비스를 일상적으로 늘 쓰는 고객이니까 단골 고객이죠. 그래서 마일리지 제도를 ‘상용고객 우대 제도’라고 부릅니다.
항공사가 단골 고객에게 보상을 준 사례로 유명한 것은 1979년 미국 웨스턴 에어라인의 ‘트래블 패스 프로그램’입니다. 이 항공사는 자사 항공기를 다섯 번 이용한 고객에게 50달러짜리 여행권을 줬습니다. 중국집 쿠폰과 비슷하죠.
이후 1981년 역시 미국 항공사인 아메리칸 에어라인이 ‘마일리지 제도’를 처음 도입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대한항공이 1984년 처음 시작했습니다. 초기엔 마일리지를 지급한 항공사에서만 그 마일리지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점차 이용 범위가 확대돼 항공사들이 제휴를 맺은 여러 기업에서 쓸 수 있게 됐습니다.
항공 마일리지의 법적 성질
법적으로 항공사 마일리지는 어떤 것일까요. 적립한 마일리지로 보너스 항공권을 구매할 수 있으니, 재산적 가치가 있습니다. 항공사와 제휴를 맺은 다른 기업에서 현금처럼 쓸 수 있다는 점도 항공 마일리지가 재산권임을 뒷받침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항공 마일리지가 재산권 중 하나인 채권이라고 합니다.
항공 마일리지를 채권으로 인정하면, 그것을 지급한 항공사는 부채를 안게 됩니다. 그래서 국내외 항공사들은 한사코 마일리지가 ‘무상으로 제공한 보너스, 경품, 덤’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마일리지를 재산권으로 인정하면 부채가 생길 뿐만 아니라 마일리지 제도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정하거나 변경하려고 할 때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채권자(마일리지를 가진 소비자)의 요구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항공사들의 바람과 달리 현실에선 마일리지가 부채로 통합니다. 기업의 경영실적을 정리한 재무제표에서 항공 마일리지는 부채로 간주됩니다. 대한항공의 경우 마일리지 부채가 3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격할인 제도와의 비교
기업이 고객을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하는 가격할인 제도와 비교하면 마일리지 제도의 특성이 더 뚜렷해집니다. 경쟁 기업에 비해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가격할인 제도는 소비자를 유인할 강력한 수단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자신을 알리거나, 신규 고객을 확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죠. 유행이 지난 상품이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품을 판매할 때도 유용합니다. 다만, 가격할인이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가격할인에 끌렸던 소비자는 떠나가기 쉽습니다.
마일리지 제도는 소비자가 지불한 가격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소비자를 유인하는 수단입니다. 가격할인 제도와 달리, 일정량을 모아야 쓸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를 단골 고객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가격할인 제도는 구매 시점에 혜택을 받고, 마일리지 제도는 장래의 일정 시점에 혜택을 받는다는 점도 두 제도의 차이입니다.
NIE 포인트
1. 마일리지 제도와 중국집 쿠폰을 비교해보자.
2. 마일리지가 항공사의 부채인 이유를 설명해보자.
3. 마일리지 제도와 가격할인 제도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약관(미리 정한 계약조건)을 규제하는 정부는 '계약자유의 원칙'을 침해하는 것일까요?
마일리지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일까요. 소비자에겐 마일리지를 어떻게 모으고(적립),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기업에도 마찬가지인데요. 고객에게 마일리지를 어떻게 지급하고, 고객이 그 마일리지를 어떻게 쓸 수 있게 할지를 정하는 일이 핵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마일리지 제도에서는 △마일리지 지급 시 계산 방법(예를 들어 비행거리의 1배 혹은 1.2배 등) △마일리지 사용 조건(보너스 항공권 구매에 필요한 마일리지 등) △마일리지 양도 및 상속 가능 여부 △마일리지 사용 가능 기간(소멸시효) 등이 중요합니다.
약관은 계약조건 정해두는 것
항공사는 이런 내용을 미리 정해놓고 여러 소비자에게 동일한 내용을 적용합니다. 소비자에게 항공권을 판매할 때마다 마일리지 제도를 비롯한 계약조건을 협상해서 결정할 수 없으니 미리 계약조건을 정해두는 것이죠. 이를 가리켜 ‘약관’이라고 부릅니다.
사실 우리는 약관을 매우 자주 접합니다. 많은 소비자와 동일한 거래를 하는 기업이라면 으레 약관을 사용하기 때문이죠. PC나 스마트폰으로 물건을 구매할 때는 물론이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약관에 동의하세요’라는 제안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혀 있는 약관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약관의 존재 자체를 신경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비자가 약관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이번 대한항공 사례처럼 약관이 바뀔 때입니다. 요즘은 기업들이 약관을 바꾸려 할 때 기존 고객에게 카카오톡 등으로 약관 개정 사실을 알립니다. 약관이 언제부터 어떻게 바뀌는지 알려주면서, 약관 변경에 동의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 계약 해지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약관 변경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죠.
약관을 바꾸려면 공정위가 심사
그렇다면 기업은 약관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을까요. 원칙적으로 사적 거래의 당사자인 기업과 소비자는 서로 합의해 계약조건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습니다. ‘계약자유의 원칙’ 혹은 ‘사적 자치의 원칙’에 따라서 말이죠. 약관도 사적 거래의 계약조건이니 이런 원칙에 따르면 기업이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기업이 일방적으로 약관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약관을 바꾸려면 정부 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의 약관 심사를 거치게 됩니다. 이번에 대한항공 마일리지 변경이 이슈가 되자, 공정위는 관련 약관을 심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매년 공정위에는 수백 건의 약관 심사 요청이 들어옵니다.
공정위는 약관이 공정한지를 심사합니다. 심사 결과 약관이 불공정하면 해당 약관 조항을 삭제하라고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고, 기업이 행정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징역이나 벌금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약관 규제의 정당성
그런데 정부(공정위)는 사적 거래에 쓰이는 약관이 공정한지를 심사해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정당성을 어떻게 얻었을까요. 정부의 약관 규제는 ‘계약자유의 원칙’ 혹은 ‘사적 자치의 원칙’을 침해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에 대해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습니다.(판결문의 특성상 표현이 딱딱해서 그 취지를 이해하기 쉽게 풀었습니다)
『약관은 기업이 다수의 고객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그런데 고객이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거나 확인할 충분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계약이 이뤄질 수 있다. 따라서 약관이 사적 자치의 영역에 속하더라도 그 내용이 고객의 정당한 이익과 합리적인 기대에 반하면 약관 조항을 무효로 한다고 해서 사적 자치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대법원의 판결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특히 ‘고객이 그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하거나 확인할 충분한 기회를 가지지 못한 채 계약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은 우리 현실을 잘 반영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만, 정부의 사적 자치 영역에 대한 개입(규제)은 언제나 그 정당성이 잘 지켜져야 합니다. 소비자 보호라는 명분은 분명히 중요하지만, 정부의 사적 자치 영역에 대한 무분별한 혹은 과도한 개입은 경계해야겠지요.
NIE 포인트
1. 상거래에서 흔히 쓰이는 약관이 무엇인지 설명해보자.
2. 사적 자치의 원칙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자.
3. 정부 약관 규제의 정당성에 대해 토론해보자.
장경영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
반응형
반응형

♣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3월 11일)

제목: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 II.
말씀: 마태복음 27:27-36
대표기도: 권오정 집사님(남 사역훈련)
찬양인도: 제자, 사역훈련생 찬양대
말씀읽기: 김하임 어린이(초등부), 김승현 어린이(유년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 마태복음 27:27-36,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
 
▶오정현 담임목사님
 
-이 새벽에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한결 같은 은혜이다. 우리 아이들, 승현이와 하임이! 둘 다 저 위 성경읽기에 올라갔기에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오늘 계속해서 지난주에 이어서 ‘십자가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도록 하겠다. 여러분들은 순서 지를 보기를 바란다. 1면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우주 최대의 러브스토리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예수님이 한 손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은 부족한 인생인 우리를 붙잡으시고, 또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며 나를 향한 사랑의 고백을 하다가 사랑의 심장인 터지는 것이다. 이게 무언지 깨달은 은혜주심을 알고 오늘은 한 절 한 절 강의를 하지 않겠다. 뭉뚱그려서 십자가의 각성, 십자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십자가의 은혜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를 바라며~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제 저녁에 생각한 찬양이,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우리가 십 년 전에 부른 곡이다.
십자가에 대한 각성은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각성이다. 또 나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나 각성이다. 그러니까 이 지팡이가 그냥 물건이긴 하지만 여기에 마음을 담아서 “주님, 십자가에 대한 깊은 통찰과 깨달음과 각성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단순히 기도지팡이를 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든다고 생각해야 한다. 오늘은 기도지팡이와 무엇을 든다고 했는가? ‘주님의 십자가를 든다.’라고 생각하라.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놀라운 은혜가 내게 임했네.~~~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 이 아침 내 심장을 덮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능력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도 그냥 돌아가지 않게 하시길 소원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27장 본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세 가지이다. 하나는 정신적인 수치, 육체의 고통, 영적인 큰 짐을 지신 것이다.
 
1)정신적인 수치
2)육체적인 큰 고통
3)영적인 큰 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주님은 너무나도 수치스럽고 아주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의 과정을 거쳤다. 아무리 잘못된 죄인이라도 심지어 총살을 시키는 죄인이라도 얼굴은 가려주고 몸은 가려서 형벌은 가하는데, 예수님은 벌거벗겨져 가지고 아무도 예수님을 막아주는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는 그런 일이 없는 수치를 당하셨다. 그러니까 최악의 모욕과 수치를 당하신 것이다. 헨델은 이것을 가지고 그 주님의 모욕과 수치를 당한 이사야 53장을 연결시켜서 메시아를 주님의 고난과 수치를 담은 곡을 만든 것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만든 곳이다. 예수님의 수치와 멸시를 느끼고 그것을 보는 친구가 주님의 모욕과 육체적인 고통과 영적인 큰 짐은 이것을 준비하면서 사순절의 기간 동안에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각인이 된다.
 
그 이유의 핵심은 내가 받아야 하고, 내가 감당해야 하고, 내가 모욕을 당해야 할 것을 그 주님이 대신 가 주신 것이다. 내가 받아야 할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가 주신 것이다. 복음과 십자가의 은혜는 항상, 그러니까 나 무슨 말로 주께,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나를 위하여 수치와 멸시와 조롱을 당했다는 것이, 주님이 대신 받았다는 그것을 우리가 열 번 듣고, 백번 듣고, 수백 번 듣고 심지어 천 번을 들었더라도 이게 형식으로 지나가면 안 되고 여기에 늘 마음이 와 닿아야 한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가 지금 여러분에게 기름부음이 체험되기를 바란다. 그럴러면 그것이 내게 와 닿아야 되는 것이고, 내 것으로 고백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핵심은 내가 서야할, 내가 받아야 할, 내가 담당해야 할, 그 모욕과 그 수치의 자리에 주님이 대신 거기에 서셨다는 것이다. 주님이 거기 계셨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다.
 
그 당대에 1세기에 그레꼬로망, 고대근동 로마시대에 그때 이 사람들의 세계관, 일반 사람들의 이 정신적 세계관, 내세관은 뭐냐면, 일단 사람은 죽으면 편안하게 그냥 고통이 다 없어지고 죽으면 편안해진다고 여기고 죽으면 안식하고 편안하게 쉰다는 하는 것이다. 그 로마 고대근동 사회에 정신세계에 내세관이었다. 그러니까 로마의 위정자들은 아주 극악한 죄수들이나 극악한 흉악범들을 처리할 때에 갑자기 죽어버리면 바로 편안한 쉼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해자가지고 죽기는 죽되, 오랫동안 치욕스럽고, ‘오랫동안 최고의 고통과 수치스러움을 겪으면서 죽을 수 있는 형벌이 무얼까?’ 를 고안하다가 고안해 낸 것이 십자가의 형벌이었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은 십자가를 맞으면 그냥 죽을 수 있지만,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양발과 양손에 못이 박혀가지고 매달려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일주일씩 심지어 최장, 십일씩 대롱대롱 매달려서 목숨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죽이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형벌로 고통을 오랫동안 하도록, 바로 죽으면 그냥 편안한 세계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 아심을 믿고,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갈보리 산에 주님을 바라 볼 때’ 할 때, 우리가 이 지팡이를 들면서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는데,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이었는지, 어떤 그리스도인이 써 놓은 것을 읽어본다.
 
‘참으로 끝없는 참으로 고통의 시간이었다. 뒤틀리는 고통, 관절을 꺾는 고통, 간헐적으로 찾아 든 질식 상태, 몸을 위 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그 거친 통나무에 찢겨진 그 등이 마찰되면서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셨다. 그것만이 끝이 아니었다. 심하게 혈장이 점점 차오르며 심장을 압박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찾아왔다. 예수님의 생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살 속에 수액이 빠져나가면서 심장은 걸쭉하고 진한 피를 핏줄로 보내기 위해 펌프질을 해댔다. 고통스런 폐도 최후에 노력을 하고 있었다. 탈수 상태에 놓인 세포조직들은 모든 자극과 고통으로...’
 
정신적인 수치, 모멸감, 육체적 큰 고통, 영적인 고통의 큰 짐을 다 거기에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제대로 깨달으면 왜? 기독교가 우리가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별을 상징하고, 불교 같은 것은 만자, 저 만자를 상징하는데 그 다음에 이슬람 사람들은 초승달을 상징하지만, 우리는 왜 십자가를 기독교의 십자가를 상징하는가?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은 이미 그때 예수님께서 함께 참여하신 것이다. 성부,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벽한 교제와 완벽한 팔로우 십이 있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지 않더라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더라도 삼위 하나님이 완벽한 교제 때문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실 텐데, 왜 우리를 돌보시고, 왜 우리를 보호하시는가? 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는가? 왜? 죄 없으신 주님께서 이런 처절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는가? 왜 그러한가? 오늘 주님께서 이 커다란 십자가의 고통과 그 고난을 당하신 핵심이 무얼까? 하나님은 그만큼 우리가 서야할 자리에 주님이 서셨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죄의 무겁다는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앞으로 수많은 부족함의 다 우리가 총량을 재어보면, 우리의 죄의 무게가 이 십자가의 고통이 이렇게 가져올 정도로 무겁다는 것이다. 왜 주님은 왜 그러셨을까? 그래서 왜 죄의 무게가 무겁고 우리가 각성을 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주의 크신 사랑이 갈보리 십자가!!~` 이런 찬송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통해서 오늘 이 토요비전새벽예배에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우리의 죄의 무게가 무거워서 주님께서 돌아가셨음에 우리가 각성을 해야 되는데, 두 가지 각성을 해야 한다.
 
첫째는, 인생의 짐 고통 가운데, 나를 헤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주님께서 당하신 그 고통의 무게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도전을 주냐면 여러분이나 저나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짐을 지고 온갖 고통을 당하는데 많은 경우는 여러분 헤칠 사람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여러분 자신, 나 자신 밖에 헤칠 사람이 없다. 남들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내가 나를 헤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상처주고 내가 나를 나가떨어지고 내가 스스로 좌절하고, 내가 그 트라우마 가운데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우리의 죄의 각성과 고통과 무게가 그만큼 큰데, 주님이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위해 당하신 고통이 너무 큰데,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스스로 상처받고 내가 스스로 어려워하고 그럴 때에 저는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의 무게를 다 희석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를 상처 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예수님의 깊은 십자가 복음이 들어가면 내가 나를 상처준 것으로부터 내가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환경적으로 어려운 것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환경이 나를 상처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나를 파괴시킬 사람은 나 자신이며 나를 파괴시키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깊은 각성을 하면 내가 나를 상처 주는 자리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파괴하는 자리에서 내가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다시 한 번 믿음의 부요함과 회복을 통하여 내가 나를 상처 주던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다시 한 번 회복의 능력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것을 들을 때마다 마음의 각성을 하는 것이다. 갈보리 십자가를 주님을 바라볼 때에 여러분,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수많은 짐을 지고,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일들이 지나지만 그러나 한 가지 우리의 마음속에 다짐해야한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가 나를 스스로 크라우마를 갖고 좌절하고 상처받고 내가 나를 어렵게 하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받는 그런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새벽은 아주 영광스런 자리이다. 여러분, 여기서 치유가 일어나고, 여기서 자유가 일어나고, 여기서 힐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들을 때마다, “주님, 내가 나에게 스스로 어려워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하겠습니다.” 내가 서야할 그 고통과 수치와 부끄러움의 그 자리에 주님이 대신 서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내가 나를 상처 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둘째는, 이 십자가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면 십자가의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늘 우리가 고백하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그 일이 너무 고마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수록 내가 상처의 자리에서 뛰어나갈 뿐만이 아니라 주님을 더 고백을 하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주님은 그렇게 고난의 십자가에 달리실 분이 아니셨다. 그렇게 죽어서도 안 되시는 분이셨다. 그런 비참한 일이 일어나도 안 되는 분이셨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런 죽음의 저주를 당해야 하는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러니까 십자가의 깊은 은혜를 깨달을수록 제가 복음을 이야기 할 때마다 누가 돌아가셨는지, 창조주 하나님이 돌아가셨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왜 돌아가셨나? 죄인인 나를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죄인인 나 같은 사람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있어서는 안 되는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닫는 순간 주님의 사랑을 절제하지 않는다. 성령의 아홉 가지 가운데 첫 번째가 사랑이다. 마지막이 절제인데 주님의 사랑만큼은 절제하지 말고 주님의 대한 사랑을 우리가 온통 내 마음과 내 평생을 드려도 이것은 답이 없다. 그러니까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이 사랑이 이 동기가 되고 이 사랑이 여러분에게 고백이 될 때, 저와 여러분이 얼굴이 달라지는 것이다. 늘 말씀하지만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떠나서 예수님을 이 십자가를 받고 나에 대한 상처를 극복하고 예수님을 진실로 다른 것 못해도 주님 사랑을 절제하지 아니하고 살다보면 얼굴이 달라지고 품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오늘 ‘말할 수 없는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임했네.’ 이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은 내가 나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위한 사랑만이 절제가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오늘 주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성경 읽기를 통하여 나에 대한 모든 연약함을 회개하면서 그 모든 내가 서야할 그 수치와 모욕과 육신적 고통과 정신적인 수치와 영적인 큰 짐을 주님이 내 대신 짊어지셨다는 그 사실 앞에 다시 한 번 각성하고 주님을 향한 사랑의 영역과 방향이 나에게 와 닿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마태복음 27장을 조용히 듣고 주님이 터치에 주시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가 흑암에 갇힌 세상을 합심하여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전진할 때, 순전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을 밝히시는 만군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승리함을 믿고, 제자, 사역훈련생들이 자기 부인을 통해 회색지대가 없는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 무장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이 시대의 거룩한 비밀병기가 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진정한 회개와 각성을 통해 믿음으로 이 나라와 민족을 세워가는 부흥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나를 헤칠 사람은 나밖에 없고, 십자가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면 십자가의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십자가에 못 박는 죄에서 돌이켜 온전한 기도로 나아가 안아주심의 본당이 온가족과 함께 갈보리 십자가를 모두가 바라보는 미스바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
-본문에선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 나타난다.
 















 

반응형
반응형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3월 8일)
제목: "시련이 크면 은혜도 크다"
말씀: 창세기 39:19-23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천동원 부목사님
------------------

새 봄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우리 성도님들을 주 안에서 축복한다. 우리에게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예기치 못한 일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 인생의 고난이 참 많다. 사람들은 고난을 가리켜서 위장된 축복이라 표현하지만 정작 고난 속에 처한 사람에게 그런 표현은 설득력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누구나 내가 겪은 고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채 제3자가 그런 말을 위로하려고 할 때, 위로는 고사하고 불편한 마음마저 들게 된다는 것이다. 되게 찾아오는 고난이 내 과실로 일 수 있다. 보증을 잘못 섰거나, 혹은 지나친 욕심과 과욕을 가진 결과로 그러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내 의지나 혹은 내 잘못과 상관없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 당장 드는 생각은 우리 성도들의 경우는 내가 하나님 앞에 혹여 범죄 하지나 않았는지? 이 불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죄 악 됨이나, 혹은 과실이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았던 생각이 더 앞서게 될 때, “하나님, 왜 제가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하필 저입니까? 아니 내가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왔는데, 어떻게 주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같은 탄식과 원망이 불쑥 나타나기도 한다.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보이지 않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충성 되이 섬긴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부요와 만사형통이 임할 것임을 기대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요셉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인물이다. 요셉을 수식하는 여러 표현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형통한 자, 요셉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형통이 임했다는 것이다. 성경은 요셉을 가리켜 형통한 자라고 표현하지만 실상 요셉의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 우리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은 하나님께로부터 꿈을 꾸게 되면서부터 그 인생의 시련이 시작된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해 미래를 보여주시고 요셉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다. 이 꿈을 꾸고 요셉은 형들과 아버지에게 자랑도 하며 그리고 어린 마음에 기분이 좋았을지 모르나, 사실 요셉이 이 꿈을 본 날로부터 요셉이 시련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이 꿈을 꾼 나이가 17세였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나이는 30세이다. 그는 꿈을 이루기까지 13년 동안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순종하여 형들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기 위해서 먼 여정 길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했다. 형들이 자신의 옷을 찢고 구덩이에 내 던졌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20에 팔아버렸다. 꽃다운 17세 소년에게 일어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시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고, 또 그곳에서 인정받아 또 가정총무가 되었을 때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다가 그만 강간범일라는 그 누명을 얻고 감옥에 던져졌다. 요셉의 불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정치범으로 갇혀있던 술 맡은 관원 장, 그리고 떡 굽는 관원 장을 만나 그 꿈을 해석했을 때, 관직에 복직 되었던 술 맡은 관원 장을 통해 요셉의 그 억울함이 호소가 되고 그로인해 자유의 몸을 기대했지만 그만 이 술 맡은 관원 장은 요셉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일 일을 기약할 수 없는 그 칠흑 같은 감옥 속에서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과 같은 2년의 기나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요셉은 하나님께 꿈을 받은 이후로 점점 더 악화되고 점점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형통을 생각할 때, 수식어로 만사를 떠올리게 된다. 만사형통, 모든 일들이 뜻대로 잘 풀린다는 뜻이다. 요셉이 성경에 우리에게 말씀한 대로 정녕 형통한 자라면 요셉은 사실상 매사에 일사천리로 잘 풀려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요셉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기준대로라면 사실 요셉은 형통한 인물이 아니었다. 매사가 뒤틀렸다. 혈육의 형들에게 버림받았다. 총애 받던 보디발에게 거절을 당했다. 관원 장에게 외면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같은 우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비웃고 있듯이 요셉의 생애 가운데 형통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표현하며 요셉을 가리켜 그는 형통한 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형통이라는 표현의 시점을 살펴보면 참 흥미롭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지식, 요셉을 가만히 떠올려 보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요셉의 인생 중 가장 형통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대 다수의 성도님들은 총리가 된 요셉의 시절이 가장 형통할 때라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어린 시절 그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채색 옷을 입었던 때를 요셉의 형통한 시절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아이러니 하게도 요셉의 어린 시절, 혹은 요셉이 총리가 되었던 천하를 호령했던 그 시절에 형통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 않다. 형통이라는 그 단어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냐면, 요셉이 보디발에게 팔려갔을 때,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로 감옥에 처에 있을 때, 이 형통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라 반복하여 우리에게 표현하고 있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이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네가 힘든 종이 된 주제에, 네가 죄수 된 주제에 무엇이 형통이냐?’ 라고 그렇게 반문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처한 상황과 환경, 혹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결과에 상관하지 않고 요셉을 가리켜 ‘형통’이라는 단어를 세 번 씩이나 반복하며 우리에게 요셉의 삶을 주목하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 같은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경은 형통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창세기 39:2,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의 정의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곧 형통이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요셉이 종이 되었고 사람들이 혐오하는 죄수가 되어, 마치 그 인생에 실패자처럼 느껴지고 또한 그 마음 가운데 불편한 심정마저 들지라도 성경은 형통의 기준을 무엇이 되었느냐?, 그가 무엇을 되었느냐, 그것으로 기준을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그 기준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비록 지금은 비참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주 안에서 형통한 자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사람들이 혐오하고 손가락질 하는 죄수라 할지라도 주 안에서 형통한 자라는 것이다. 오늘 본문도 동일한 입장에서 증거하고 있다. 2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창세기 39:23,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은 요셉이 범사에 형통했던 이유에 대해서 요셉이 정직했다. 요셉이 성실했다. 요셉은 비범한 은사와 능력, 재능이 많았다. 라고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어쩌면 성경은 그 같은 표현을 하지 않을지라도 요셉은 성실하고 또 실제 정직하며, 은사와 능력과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은 형통의 이유에 대해 요셉 개인에게 그 관심과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요셉 개인의 탁월함에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도 단순하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곧 형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원인이었고, 결과 범사에 형통하게 되었음을 증거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은 굉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을 중요하게 여긴다. 당장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소원하는바 명예와 지혜를 얻게 되면 또 지휘를 얻게 되면 그는 형통한 삶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역으로 병들고 가난하고 하는 일마다 실패하게 되면 형통과 무관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과 시련 앞에 낙심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외면하시거나 혹 나를 떠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좌절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같은 관점에서 형통을 평가하게 되면 성경에 서게 된 대다수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불행한 자들이요, 실패자들의 불과하지 않다. 오늘 보문에 소개된 요셉이 그러하다. 그는 형들의 미움을 받고 17세 꽃다운 나이에 종으로 팔려가 기구한 삶을 살게 되었다. 또한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그 같은 거짓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다. 여러분 이런 요셉을 보고 누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이알고 하며 누가 이 사람을 가리켜서 형통한 자라고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겪는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와 현상만을 바라보고 판단한다면 내가 겪는 시련은 마치 저주요, 불행 그 자체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시련 때문에 낙심하는 인생이 아니요, 오히려 시련 속에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을 발견하게 될 줄을 믿는다. 요셉은 하나님께 꿈을 받은 이후로 점점 더 열악하고 점점 더 비참한 상황으로 몰렸다. 시련이 끊일 날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요셉의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더 커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들에게 허락하시는 세 가지 은혜의 사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I. 첫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피할 길.


*고린도전서 10:31,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자에게 시련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하신다. 피할 길을 통해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 피할 길을 내시는 이 같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요셉의 생애를 다시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요셉의 삶을 재해석 하게 된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 세겜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형들을 찾을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도단에 이르게 되어 드디어 그곳에서 형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곳에서 형들에게 사로잡혀 그 채색 옷이 찢겨지고 그리고 구덩이에 내 던져지는데, 요셉의 형제들이 그 마음에 결심하기를 이 요셉을 목숨을 앗아가겠다. 요셉을 죽이겠다는 이 같은 작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절대 절명의 우기 속에 우리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피할 길을 허락하시는데 그 장남 루우벤을 통하여 형제들의 손에 피를 흘리지 않게 하셨고, 또한 유다를 통해 미디안 상인 사람에게 은 20에 팔게 하셨다. 여러분, 앞서 이야기 했지만 형제들의 원래 계획은 요셉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해주님으로 말미암아 요셉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총애를 받았을 때,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요셉을 찾아가서 동침하기를 청했다. 요셉이 그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 곁에도 얼씬도 하지 않으려 하니, 이 여주인이 어느 날 한 날에 요셉 외에는 집에 아무도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다. 독대하여 요셉에게 집요하게 유혹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에 의하면 그 요셉이 옷을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요셉이 자기 옷을 붙드는 그 여주인을 뿌리치고 그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에 분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는데 소리소리를 친다. 우리 집 종 요셉이 나를 겁탈하려고 했다면서 그 증거물로 요셉의 옷을 보이며 이 요셉을 마치 강간범처럼 거짓 증언을 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보디발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는가? 심히 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요셉에게 극단의 처방을 하는데 여러분 이 본문에 보면 신기하다. 그 종 요셉을 극형 사형에 처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 급박한 상황 속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데 우리 하나님이 요셉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 요셉을 죽음으로 몰지 아니하고 당시 정치범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요셉을 보내주시면서 그 생명을 지켜 주셨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시대적인 정황을 살펴보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종이 여주인을 겁탈하려고 했는데 주인이 그 종을 죽이지 않았다? 여러분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에 대한 분분한 해석이 있다. 이 아내의 증언에 보디발이 의심을 품었다는 것과, 또한 요셉이 평상시에 주인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이 가능했다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은 분명하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피할 길을 허락하셔서 요셉을 보호하셨다는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 장과 떡 굽는 이 관원 장의 꿈 해몽하고, 해몽대로 술 맡은 이 관원장이 복직하게 되면서 요셉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유의 몸을 기대했지만 그 뜻이 성사되지 않는다. 술 맡은 관원 장이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2년 동안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요셉은 보내게 된다. 그러나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후, 우리 하나님이 요셉에게 허락하신 피할 길이었다. 하나님은 정확한 때에 바로가 꿈을 꾸고 번민하는 때에 이 술 맡은 관원 장에게 요셉을 기억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요셉을 불러들여 그 왕의 꿈을 해몽(解夢)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애굽의 총리가 되는 마치 놀라운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며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피할 길을 허락하셔서 그 인생을 이끄셨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난 경험하고 겪었던 시련의 때를 한 번 떠올려 보라. 당시에는 끝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피할 길을 허락해 주셨음을 모두가 선뜻 떠올리며 동일한 마음의 고백을 올려드릴 줄 믿는다. 그 순간에는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라고 때로는 하나님께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고 원망했던 시간들이 그 시간이 지나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허락하시니, 어느 순간 그 시련을 달게 이겨내게 되었고 또한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음을 목도하며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크면 클수록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심을 믿기를 바란다. 우리가 어떤 시련 가운데 처할지라도 낙심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그 은혜의 사인으로 피할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혹 시련 속에 있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심을 믿고 이 길은 하나님의 사인이요,,궁극적으로 나를 형통하게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심을 믿기를 바란다. 시련이 더할수록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두 번째 사인은


II. 둘째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신다.


-가는 곳곳마디 이 같은 은혜를 허락하신다.


*창세기 39:4,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창세기 39:21,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요셉은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다. 보디발의 종으로 팔려갔을 때는 보디발에게 은혜를 입는다. 그로인해 가정총무로 세워지고 보디발은 그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탁을 하게 된다. 감옥에 처해있을 때는 간수장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 간수장은 옥중 죄수를 요셉의 손에 다 맡기고 심지어는 제반 사무조차도 요셉의 손에 다 처리하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요셉이 바로 앞에 서서 꿈을 해몽하게 되었을 때 바로에게 은혜를 덧입게 된다. 바로는 요셉에게 애굽을 다스리게 한다. 창세기 41장 40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창세기 41:40,
40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요셉은 이 같이 바로의 명에 따라 애굽의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워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셔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신다. 여러분, 시련의 때마다 나를 돕는 손길들이 있는가? 내가 어려운 순간마다 고비 고비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서 기도의 중보자가 있는가? 때로는 고달픈데 삶을 위로하는 따스한 손길로, 때로는 떡과 고기로 물어다 주는 까마귀 같은 돕는 손길로 주위 사람들을 통해 시마다 때마다 나를 돕는 그 같은 은혜가 목도된다면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은혜의 사인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형통으로 이끄시는 인도하심을 믿기를 바란다. 우리가 시련의 순간순간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덧입게 된다면 이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베푸시는 분명한 은혜의 사인이 된다. 그 은혜의 손길을 통해 힘을 얻고 또 주 안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세 번째로 시련이 더할수록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인은 더 큰 시련이다.


III. 셋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인은 더 큰 시련이다.


-아니 더 큰 축복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큰 시련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의 사인이 될 수 있느냐고, 아마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시련의 강도만큼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귀히 쓰시고 사용하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요셉은 꿈을 이루기까지 무려 13년 동안 혹독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요셉뿐만이 아니다. 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그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축복도 컸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날부터 인생의 시련기에 들어가게 된다. 사울 왕으로부터 얼마나 괴롭힘과 박해를 받았는지 모른다. 다윗은 결코 시련 없이 왕이 되지 않았다. 우리 하나님은 특별히 크게 쓰시고자 하는 자에게 이 같은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연단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요셉처럼 우리 인생도 이와 반문할 때가 많다. 이제는 무언가 일을 풀릴 듯하고 하나님께 뭔가 형통의 길을 인도해 주실 듯 했는데 그만 생각지도 못한 더 큰 시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면 더 큰 문제가 붉어지면서 하루하루를 마치 살얼음을 걷는 듯한 그 위기의 순간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시련이 더 큰 것이다. 하나님은 크게 쓰시려고 하는 자에게 반드시 큰 시련을 겪게 하신다. 그 시련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정금 같은 믿음으로 연단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신다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혹독한 시련들은 그 신앙과 인격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깨닫게 한다. 요셉을 보면 이렇게 혹독한 과정을 통해 그 신앙의 인격이 얼마나 온전해 졌는지 자신을 그 꽃다운 17세 나이에 은 20에 팔았던 형제들을 모두 용서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대하심과 계획을 깨닫게 된다. 창세기 45장 5절에서 보면,


*창세기 45:5,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그 많은 시련을 이겨나가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셉뿐만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겪은 시련의 마지막은 마치 목숨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큰 시련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큰 시련을 이겨낼 때, 하늘로부터 임하는 영광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겪은 마지막 시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이었다. 이삭은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다.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자요, 언약의 자손이었다.


누군가 그런 말씀을 했다. 이 세상에 지옥을 경험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의 죽음이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존재이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도 버릴 수가 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그 인생의 최대의 시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 큰 시련으로 감당하니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시는데, 이삭 대신에 제물로 바칠 숫양을 예비해 주시고, 하나님이 이 시련을 겪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계보의 영광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너무나 큰 시련을 당하고 계시는가? 곧 끝날 것이다. 다시 한 번 말씀하면 곧 끝날 것이다. 시련의 정점에 이르기 때문에 그만큼 그 시련이 더 큰 것이다. 이것은 곧 끝이 보이고 있다는 하나님의 마지막 사인이요,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실 형통의 계획이심을 믿음으로 선포하기를 바란다.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다. 우리는 그 터널 너머에 희미한 불빛을 통해 터널의 끝을 직감하게 되듯, 더 큰 시련은 끝이 이르렀다는 하나님의 사인이요, 하나님의 형통이 기다리고 있는 분명한 은총의 표징(表徵)임을 믿기를 바란다. 주일 강단에서 담임 목사님께서 기도했는데도 더 큰 어려움이 있다면, 이것은 더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고 말씀하셨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남을 믿고 끝까지 인내로써 마지막 시련을 감당하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바란다. 말씀을 맺겠다. 요셉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통한 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성경은 그 형통이 시련과 무관하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시련을 피해갈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약에 이르면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배에 광풍이 치는 것과 같다. 주님이 함께 하심은 늘 순풍에 돛단배가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 광풍을 고요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들을 그 어떤 광풍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시련이 커도 하나님이 그 시련보다 더 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련이 크면 하나님의 은혜도 크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클수록 피할 길을 허락해 주신다. 우리 하나님은 시련이 클수록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도록 인도해 주신다. 무엇보다 마지막 시련일수록 그 시련은 더 크지만 이는 곧 끝을 이르렀음을 보여주시며 우리를 정리하시며 마지막 그 도달점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 마지막 시련을 이겨낼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신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을 믿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가난을 경험할 때 비로소 돈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질병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건강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시련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형통을 깨닫게 되는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었을 때, 요셉을 애굽으로 이끄시는 시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결단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다. 요셉이 그 시련으로 인해 애굽의 종으로, 애굽의 죄수로, 바로 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꿈이 성취가 되었던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의 환경과 상황을 가지고 자신의 처지를 속단하지 말라. 우리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하시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시련이 크면 하나님의 은혜도 크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지혜와 사랑이 나를 선히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형통이라는 이 진리의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이 밤에 주님의 말씀이 평생의 축복이 되어 어떤 시련이라도 이겨내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형통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과 환경을 만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형통임을 알고 위축되지 않는 믿음의 기지를 가지고, 시련이 있어도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시며 시련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은혜를 받게 하심의 손길이 있다면 우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분명한 은혜의 사인인줄 알고 함께 하시는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셉은 누명을 쓰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혔다. 요셉은 의를 위하여 옥에 갇혔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현실적 조건에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충성할 뿐이었다. 그 결과 요셉은 전옥의 신임을 얻어 옥의 사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그는 성도들의 일상생활의 모범을 보여준다. 또한 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반응형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3년 3월 5일)

제목: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말씀: 사무엘상 7:2~14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정상익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사무엘상 7:2~14,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

▶3월 첫 주이다. 이 한 달 동안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님의 보혈로 덮어주시길 바란다. 보혈의 찬송했는데 어제 우리 토요비전새벽예배에서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우리도 베드로의 배신자 같은 자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다. 그래서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의 그 보혈의 공로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찬양을 했는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그 은혜를 주시는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제목을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에벤에셀 이라고 하는데,. 에벤에셀이 무언지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이고, 오늘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실 터이니 이 뜻이 무언지 모르실 것이니 뜻은 알아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나를 도우셨다.’ 라고 여길 수 있으나, 그것도 그렇지만 아직도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는데, 내 힘과 내 능력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을 안 읽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아도 내 힘으로 자신 있게 잘 살고 있다고 이런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으로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에번: 도울 바(히브리어), 에젤: 돕는다(히브리어). 도움의 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이다. 시편에 보면 나온다.


*시편 54:4,
4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때, 그 도와주는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도우시는지, 시편 121편에 있다.
*시편 121:2,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리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분들은 역대 하에서도 불 수 있을 것이다.
*역대하 14:11,
11 아사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힘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 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왜냐하면 사람은 제대로 도울 힘이 없다. 그래서 나중에 이 하나님의 도움을 제대로 받은 것을 사도행전에 나오고 있다.


*사도행전 26:21~22,
21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바울의 사역의 뿌리와 원천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에벤에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의 속성 가운데 빚 받을 것은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한다. 도움 받은 것은 속히 잊고 산다. 이게 우리의 죄 성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시는지 우리가 잘 모른 부분이 있다면 오늘 이 속성을 다 정리하고 우리 모두가 다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를 기억하고 앞으로 미래에 대해서도 도우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무엘상 7:2,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블레셋에서 아꼈던 언약궤가 이 십년 동안 있었다. 작은 시골 한 구석인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가 홀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사 가운데 마지막 사사이다. 이스라엘 사사는 왕권과 제사장을 겸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사무엘 상 7:3,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상 7:4,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거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바알림, 바알들을 아세라 다 복수형이다. 이스라엘 전체를 말한다. 모듀 우상 숭배가 가득하고 여기 저기가 온 이스라엘 땅에 바알과 우상들로 우글거렸다는 것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수가 보혈의 십자가의 은혜가 더 강하기 때문에 좀 덜 하지만, 구약은 하나님은 그들이 행하신대로 징계하시고 노하신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징계의 패턴이 어떻게 되는지 보면, 우상 섬기면 어떻게 징계하시는지를 보아야 한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진노하시는 방식으로 그의 자녀를 징계하시는 패턴이 있다. 우상을 섬기고 그러할 때, 어떻게 징계를 하시는지를 보자. 대표적으로 야곱이 에서와 아버지를 속였더니 야곱은 라반에게 몇 배나 속는 것이다. 우상 섬기기는 것 때문에 하는 이야기이다. 요셉을 팔아 두려움에 떤 형들은 창세기 50장에 보면,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두려움에 떠는 값을 치렀다. 사사기 9장기에 보면 이 아비멜렉이 이복형제 칠십 명을 한 번에 쳐 죽였다. 나중에 그가 하는 대로 한 여인이 맷돌의 위짝을 들어서 아비멜렉에게 머리위에 던져서 머리가 바스러졌다. 기가 막힌 것이다.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이방 사람 아말렉 사람을 다 죽이라고 하셨는데, 자기에게 순종하니까 안 죽였더니 결국은 나중에 길보아 산에서 사울왕은 아말렉 사람의 칼에 죽는다. 섬뜩하다. 열왕기상에 21장에 이세벨이 나봇을 돌로 쳐 죽이게 하는데 나중에 이세벨을 예후가 쳐 죽여서 개들이 그녀를 핥게 하는 것이다. 너무 놀라운 일이다. 신약시대는 대신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서 그 주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있는 줄로 믿는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할 수 있을까?
오늘 미스바의 도움이 이야기가 나온다. 3절 하반 절을 보면,
*사무엘상7:3,
3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상 7:5~6,
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우리 식으로 말하면 미스바는 70-80년대 여의도 광장 같은 것이다. 2000년대에 상암경기장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제 영적 각성을 위해 모인 것이다. 자 그리고 모여서 무엇을 했는가? 이방 신들을 섬긴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는 그 방식이 독특하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어, 또한
그날 종일 금식하고 하나님이 도우셔서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도우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척결하는데 있어 만연한 바알림을 척결하는데 행위 중에 하나가 물을 긷고, 금식하는 것이다. 물을 긷는 이유는 그 상황과 환경이 너무나 아프고 절망적이기 때문에 당시 물은 생명연장의 가장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생명 연장의 가장 핵심 요소인 이 물을 마시는 것을 통해 절제하고 영적부도위기와 파산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은 내 자신을 드려서 물을 부어서 하나님 앞에 절제를 선언하는 것이며 생명의 핵심이 되는 물을 부어서 나를 절제하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겠다는 것이며, 좀 더 들어가면 물은 회개의 상징이고 혼자서는 아니고 민족 공동체가 나와서 회개하는 것이었다. 골방에서 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모여서 회개하는 것이 부흥의 전초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금식이다. 금식도 같은 개념이다. 먹는 것을 박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는 직무를 받아야 마땅한 자라고 고백하면서 ‘내가 살고 죽는 것이 이제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나는 살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다. 육신의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니라, 영혼과 마음이 갈급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 하면 물을 붓고 금식을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라고 하면 그렇다고 응답하시면 좋은데 6절 뒤에 보면,

*사무엘 상 7:6,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이렇게 하는데도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면, 7절에 보자.

*사무엘상 7:7,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들이 듣고 그들의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듣고 블레셋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이게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사무엘에게 요청하고 정리하고 물과 금식을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현실은 블레셋 사람들이 철기문화인데 가지고 쳐들어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불어 닥쳤다. 어두움이 밀려가고 서광이 비출 것 같은데 오히려 이전보다 더 극심한 어려움이 생기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붓고 금식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때,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 사람들이 치러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스바의 광장에서 하나님이 도우심을 구한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도 6.3 상암 경기장에서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 그리고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하면 오히려 우리를 더 공격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줄로 믿는다. 아멘. 그런데 이제 물과 금식으로 더 회개를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과 달랐다. 이전에는 어려움이 생기면은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적당히 언약궤 매고 나갔다고 오는 것에 불과 했는데 자기 힘으로 으쌰 으쌰가 아니고 8절에 보면,

*사무엘사 7:8,
8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블레셋에서 두려워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전심으로 물을 붓고 금식하고 회개하니까 영적의 안목이 열려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며, 그것을 믿고 사무엘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이다. 마치 영적 전투 앞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이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사무엘에게 요청을 한 것이다. 사무엘이 기도가 얼마나 강력했으면 그렇게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무엘이 어떻게 반응을 했는지를 보자.

*사무엘상 7:9,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한 절 한절이 연결이 되면서 이것이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젖먹는 어린 양을 드리고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래서 응답하신 것이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병거와 철제 무기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쳐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부르짖었더니 우리 식으로 말하면 어려움이 닥칠 때,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주일 예배와 우리의 온전한 예배를 주님 앞에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토비새나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와 주여!! 하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님의 피 밖에 없네. ~~~브르짖고 나는 믿노라, 보혈의 공로를~~~ 찬양해야 한다.
-그렇게 하니까 10절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무엘 7:10,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늘에서 우레 소리와 천둥번개가 되고 그래서 타작 마당에서 겨들이 날린 것처럼 블레셋 사람들을 덮어버리셨다. 그 능력이 하늘로부터 임한 줄로 믿는다. 놀라운 결과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인격적으로 에벤에셀 참 하나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것을 영적세계에서 하늘의 세계에서 좀 이렇게 상징적으로 이해가 되기 위하여 설명한 것이다. 사무엘이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니까 온전한 번제를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브리엘아, 저 밑을 내려다보아라. 네 종 사무엘에 물을 붓고, 금식을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성들과 함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도움을 구하니까, 가브리엘에게 불말과 불 전차를 가져오라고 하신다. 불 전차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저 무지한 블레셋을 부수고 하늘에서 큰 불을 내려서 네 백성을 도울 것이라고 하신다. 번제와 부르짖는 기도를 잊지 않고 그리하여 싸울 것이라고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가지고 내가 싸울 것이다. 라고 하신다. 우레와 천둥소리를 발하시고, 적들을 혼란 속에 빠지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여러분 오늘 부흥의 뜻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배가 회복되고 이 예배는 공적예배 생활예배가 다 포함된다. 우리의 온전한 예배가 회복되고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가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하나님이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주시는데 이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한나가 기도할 때 나온다.


*사무엘상 2:10,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한나의 기도가 아들 사무엘에게 연결된 것이다. 과거의 한나 엄마의 기도가 현재 사무엘에게 능력을 보여주신다. 한나의 과거의 기도가 현재의 사무엘의 기도가 만나서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심을 집필하는 것이다. 과거 한나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현재 아들의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을 찬양한다. 엄마의 기도가 자녀의 기도로 적용될 것을 믿어야 한다. 부모가 드린 기도는 죽지 않는다. 제가 그래서 토비새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토비새에 나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온전히 하면 그것을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한나의 기도로 오늘 사무엘이 그대로 경험하게 된 것을 믿어야 한다. 부모가 죽어도 기도는 죽지 않는다. 예수님이 피의 근거한 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 그 기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미래에 응답하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우리의 미래도 결정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한나의 사무엘의 기도가 현실이 되게 하실 것이다. 아멘, 우리가 살다가 보면 쫄보가 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가지고 영적 안목이 흐려져 가지고 헤매고 있을 수 있지만 역사의 상선에서는 하나님의 기도가 사무엘에게 그대로 응답되는 것이다. 그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께 돌아와서 영적인 각성을 하게 되는데, 7절처럼 더 어려운 상황에 만나게 되면 앞으로 하나님의
더 큰 역사를 이루시려는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더 큰 역사를 이루어주시려는 것이다. 우리가 에벤에셀을 믿을 때에 여러분이 임계점에서 낙심하지 말고, 간구하라. 그럴 때, 역사의 상선에서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예배하고 계실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철기와 철제문화가 없었기에 블레셋의 철제무기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블레셋 입장에서는 토끼 사냥과 같았을 것이다. 칼이나 창이나 막대기를 가지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식 탱크와 같은 것과는 상대가 안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서 불을 붓고 금식하여 회개하고 온전하게 간절하게 부르짖으니 하늘의 불 말과 불 병거와 불 전차를 하나님이 도우신 것이다.

*사무엘상 7:11-12,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완전 대승한 것이다.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와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물과 금식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사무엘상 7:13,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하나님의 도우심이 민족적으로 도우시는 것이다. 사무엘을 통한 개인의 회복이 민족적 회복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잘 기도하면 하나님은 저 휴전선도 지켜 주실 것이다. 늘 기도하니까 북한을 막아주시는 것이다. 북한에서 미사일을 쏘면 쑥밭이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해 막아 주신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불 병거와 불 말과 불 전차를 통하여 막아주시는 것이다.


*예레미아애가 2:19,
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지난 주 3.1운동이 있었다. 104주년이었다. 아마도 3.1운동이 없었으면 민족적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랑거리인 것이 무리가 아니다. 33인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프로테스탄트이다. 여기에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된다. 지금까지도 3.1운동을 기념하듯이 당시 그리스도인은 2%가 안 되었던 시절이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40일 만에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상해임시정부 선언문이 있는데 깜짝 놀랄 것이다. 다시 보면,

*‘우리는 조국 조선의 정치적 민족적 자주독립만이 아니라 신국(神國)을 건설하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 선언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60년대 초반까지는 애국가가 ‘하나님’이 보우하사였는데, 어느 사이 하느님을 가사가 바뀌었다. 여러분 50-60년데 대한뉴스를 들어보면 애국가에 하나님으로 되어있다. City of God!! Nation of God!!!이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이 낮아져서 이 자리가 예배하고 부흥의 미스바의 각성이 되어야 한다. 양동이에 물을 하나님이 붓는 것처럼 “주여, 내 마음을 물 쏟듯 하나님 앞에 내 마음이 낮아지게 하소서.”

지금 부흥운동을 하는 에즈버리에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헝투 레오’라는 말레이시아 출신 교수님이 2015년에 그때 하나님께서 ‘너 교수직을 내려놓고 에즈버리를 위해서 기도하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보수주의 신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신비한 비전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서 많은 생각을 거쳐서 나중에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알고 2019년에 이주을 하고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에즈버리에서 유명인사가 될 정도로 애썼다고 한다. 그래서 부흥이 일어나니까 방송사들이 인터뷰를 요청했는데도 인터뷰를 거부한 것이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 부인도 남편을 따르는 길이 주님을 따르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러분 이 자리에서 기도하고 물을 붓고 금식하고 온전히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우리의 겸손한 자세가 되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도우실 것이다.

우리의 힘과 죄와 연약함을 모두 내려놓고 회개하면 좀 더 깊은 각성이 있게 된다. 우리의 물과 우리의 금식, 우리의 온전한 번제는 신약의 복음이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참고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회개하고 가슴아파할 때에 우리 마음속에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을 슬프게 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의 죄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 지금도 계속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 지금도 상처를 입힌다는 가책을 느끼면서 회개할 때에 단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드리게 된 것이고 우리가 잘못하고 범죄 한 것은 지금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는다는 생각만으로 안 되고 나의 죄를 씻기 위하여 주님의 보혈을 흘린다는 것은 지금도 예수님의 몸에 상처가 나고 그 상처의 피가 흐른다는 것이다. 저는 부족함이 있을 때마다 고민이 된다. 내 연약함으로 주님께 지금도 상처와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래서 ‘나의 죄를 씻기는 것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네.’ 라는 찬양을 할 때마다, 쉽게 말하면 내 죄가 지금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이다. 아멘... 오늘 이런 내용은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내용을 여러분들 것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진실로 구할 때에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생애에 기도가 체험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뿐만이 아니라 현재 미래까지도 포한된다. 한나의 과거의 기도가 현재의 사무엘의 기도를 만드는 것처럼, 한나의 과거의 기도가 현재의 사무엘의 기도가 만나서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심을 집필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앞에 놓고 어떤 이는 불도 체험하고 어떤 이는 홍수도 지나가고, 노아와 광야에서, 어떤 이는 파도도 지나가게 하시고, 어떤 이는 피의 전쟁을 지나가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다윗처럼 시편을 보면,

*시편 94:17,
17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주님의 도우심을 믿고 우리의 약한 부족함으로 주님의 보혈의 피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요약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아들의 심장이 터지도록 나를 도우셨음을 깨달아 매일 내가 주님께 상처를 입히는 죄를 범하지 말고, 회개하여 하늘의 불을 경험하며 금식하고 엎드려야 한다. 어떨 때는 예기하지 못하는 큰일을 만났을 때, 사무엘처럼 쉬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온전한 예배와 온전한 번제를 드리는 쉬지 않는 기도의 물을 붓고 금식하여 응답의 도우심을 바라야 한다. 우리는 참된 미스바의 장소에 모여서 함께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두가 낙심의 임계점을 돌파해야 한다.

​-이스라엘 가운데 가나안의 농경 여신인 아스다롯을 비롯한 이방 신들을 제거한 후 온전히 마음을 여호와께로만 향해야 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겨야 했다. 이렇게 할 때 이스라엘은 압제받던 블레셋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미스바는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사무엘은 백성들이 비교적 모이기 용이한 이스라엘의 중앙부로 백성들을 모이게 했다. 이렇게 소집된 미스바 성회는 범민족적 회개 운동을 위한 최초의 성회로서, 사무엘의 주도하에 백성들이 금식과 회개로 동참한 민족의 성회였다. 미스바 성회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함으로 도래케 되는 평화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얻어지는 축복을 교훈한다. 하나님과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어그러진 언약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종교 개혁 운동이고, 사무엘의 신본주의 적 통치 기반을 세우기 위한 민족적 단일화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자 할 때일수록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쳐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과 악의 세력들이 우리를 대적한다 해도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면 그것을 넉넉히 이긴다는 것이 이 전투의 핵심이자 교훈이다. 사무엘이 강력하게 단행했던 종교 개혁은 우상을 제거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합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의 은혜 안에 거하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욕심과 죄악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실천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반응형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2023년 3월 4일)-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
제목: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마태복음 26:31-35
대표기도: 오시연 권사님(목양7팀 여직장인대교구장)
찬양인도: 목양 7팀
말씀읽기: 손현영 자매(청년 N국), 나경제 형제(대학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ㅡㅡ
*마태복음 26:31-35,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
 
▶변함없이 토비새에 불러주심을 찬양한다. 지금 우리 깃발도 들었고 지금 말씀 읽은 형제가 나 경제이다. 음성이 아나운서 해도 되겠다. 참 감사하다. 자, 토비새에 나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다 뉴스레터를 보고 읽어보자. 토비새에 나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자.
 
▷평범한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됩니다.
버린 돌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모퉁이 돌 인생이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총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혜의 저수지, 사역의 병참기지가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고도의 순간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떤 선생님이 “야, 너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라고 선생님이 이야기 했다. 이 선생님이 다른 사람도 이렇게 똑 같이 생각하겠지? 라고 생각하고 그 말을 스쳐지나가는 말로 안 믿고 선생님이 ‘나에게 꼭 필요한 귀한 인물이 되는가! 나도 그런 귀한 인물이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하고 그걸 그렇게 받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좀 되바라져가지고 알 걸 다 알아가지고 그게 되겠나? 라고 의문을 표시하면 그건 안 되는 것이고 그러나 그걸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아, 그렇구나!’ 하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가슴에 담고 그걸 하면 그렇게 하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참 신비한 것이다.
 
토비새에 나오면 평범한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비범한 인생이 되는 줄 믿는다. 버린 돌 인생이 신적개입을 통해 모퉁이 돌 인생이 됩니다.!!! 이게 토비새 구호가 아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그냥 순수하게 받으면 어린애 되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할 때, 오늘 십자가에 대해서 설교할 터인데 갈보리 산상기도회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그럼 똑 같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어떤 사람은 그냥 십자가 그렇구나! 이렇게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내 마음에 받아가지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자, 토비새에 나오면 이것을 받아서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

*토비새가 나오면,,,,
토비새에 나오면 세대차이가 없습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총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집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은혜의 저수지, 사역의 병참기지가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고도의 순간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새벽에 나오니까 평소에 매지 않는 넥타이를 잡고 나왔다. 나도 평소 매지 않는 것이지만 나도 얼굴이 달라져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 내가 마음으로 은혜를 받고 싶어서이다. 아침에 쉽지 않다.
 
토비새에 나오면 얼굴이 달라져야 하고 밝아야 한다. 토비새 나오면 은혜를 받아서 수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자기의 있는 것 반 이상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여러분, 진짜 부자가 되고 싶으면 자기의 있는 것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60-80%를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진짜 부자가 될 것이다. 사람을 알면서도 실천을 못한다. 젊어서부터 그렇게 나누어주는 것이 습관이 되면 그 사람은 거부가 되는 것이다. 잠을 4시간 5시간 자더라도 집중력 있게 자고, 고도의 순간 안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이가 들면 입을 열고 자는 분들도 있다. 코도 울고 그 조신한 여자 분들도 60-70이 넘으면 코를 곤다. 그런데 입이 마른다. 요즘은 붙이는 테이프가 나왔다고 한다. 산소가 코로 공급이 되어야 하듯이 코로 공급되어야 뇌가 맑아지는 것이고 퀄러티가 있는 잠을 잘 수 있다. 생각을 해보라. 토요일 날 새벽에 나와야 되니까, 잠을 잘 자야 한다. 낮에는 일상의 삶을 유지해야 하니까 훨씬 더 질적으로 수준이 높은 잠을 자야한다. 아침에 입이 마르지 않아야 한다. 입안이 촉촉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나이가 들어보면 알 것이다. 그 다음에 ‘토비새에 나오면 성경 암송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이 지배받게 됩니다.’ ‘토비새에 나오면 한국교회 강점을 배우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성경자본 헌신 자본, 기도자본, 찬양 자본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토비새에 나오면 거룩한 습관과 환경이 조성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다. 환경에 너무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환경에 죄 짓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은혜 받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은혜 받는 환경이 있으면 그대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토비새에 나오면 균형감각을 갖춰 시대적 영향력이 생깁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내 것으로 삼기를 바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 이 마음을 가지고 오늘 ‘갈보리 산상기도회에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여러분, 찬송가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 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 주시네,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 눈보다~~~우리 새 찬송가 바꾼 지 몇 년 되었는데 가사가 좀 바뀌었다. 바뀌고 나니까 장수가 좀 바뀌었다. 오늘 십자가의 은혜가 믿음으로 받기를 바란다.
 
*그 참혹한 십자가에.
1.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샘물같이 늘 흘러서 죄 씻어주시네.
(통. 늘 흐르니 죄 많은 형제여)
값없어도 다 나와서 내 죄를 고하면
흰 눈보다 더 희도록 참 성결 얻으리.
 
2. 저 흉악한 한 강도는 제 죄를 깨달아
죄 없으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었네.
내 지은 죄 흉악하나 주 예수 믿으면
용서받은 강도 같이
곧 구원받으리.(통. 용서받으리)
 
3. 온 백성의 죄사하신 하나님 어린양
그 십자가 지심으로 온 인류 구했네.
저 영원한 새 나라에 다 같이 모여서
금 거문고 한 곡조로 새 노래 부르리.
 
후렴 : 나 믿노라 나 믿노라
그 보혈 공로를(통.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한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다. 십자가의 은혜를 감격한다. 십자가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한없는 하나님의 보물창고이다. 여기에 묵상이 제대로 되고 내 것으로 삼고,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흠 없어도 피 흘리사 날 구원하셨네. 그 보혈의 십자가를 체험할 때 이것이 한없는 보물창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고가 되신 줄로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적게 체험하면 적은 은혜가 되고, 십자가의 은혜를 얇게 묵상하면 얕은 은혜의 물가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문을 열고 그 안에 하나님의 보화를 캐내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얇게 묵상하면 얕은 은혜를 받는 것이고, 깊이 묵상하면 깊은 은혜의 문을 열게 됩니다.”아멘, 그래서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안목과 어떤 수준이 개인마다 다르다. 십자가가 갖는 넓이와 깊이가 너무나 크고 깊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보는 각도에 따라서 주어지는 그 실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마태복음은 마태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이며, .
*마가복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고난의 증인 예수님”을 표현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통하여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저는 청년시절에는 김중권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 ‘예수칼럼’이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였다. 요즘은 많이 이렇게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예수칼럼’은 그분이 깨달은 십자가는 얇게 깨달으면 얕은 은혜라고 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우주 최대의 러브스토리이다. 십자가는 사랑의 예수님이 한 손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와 같은 부족한 인생인 우리를 붙잡으시고, 또 한 손으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며 나를 행한 사랑의 고백을 하다가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김중권 목사님-
 -사랑의 심장이 터진 것이 십자가이다. 너무나 놀랍다. 오늘 베드로가 세 번 배반하는 갈보리 산상기도회를 시작하면서 베드로 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앞으로 여러분과 제가 실수를 하면 받아준다는 것이 아니고, 여기 나이 든 사람들은 실수하면 안 된다. 좋은 말 할 때, 더 이상 실수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은혜를 기대하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같이 실수하면 앞으로는 더 온전케 하셔가지고 우리 앞으로 실수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 기대하자. 아멘. 한 번 더 읽어보자. 김중권 목사님이 쓴 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장파열 사건이다. 심장이 터지신 것이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심장파열 사건이다. 심장이 터지신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그 심장파열 사건을 기억하면서 ‘나 믿노라 나 믿노라.’ 찬양을 다시 부르면 강도가 다르게 될 것이다. 은혜의 강도가 다르다. 성경도 얕게 묵상하면 얕은 것이고, 깊이 묵상하면 깊이 있는 은혜가 나오는 십자가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 26장 후반에 보면, 두 인 물이 등장한다. 한 인물은 가롯 유다이고, 한 인물은 베드로이다. 사실 잘못의 경중을 따진다면 베드로나 가롯유다는 별 차이가 없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나,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이나 거의 같다. 그런데 누구는 베드로가 되고 누구는 가롯유다가 되는가? 이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베드로만 슬퍼한 것이 아니다. 가롯유다도 슬퍼했다. 자기의 잘못을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슬픔으로 끝나고 후회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베드로를 생각해 보면, 그는 제자들의 대표였다. 그는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했다. 제자대표가 스승을 예수님을 세 번이나 강력하게 부인하는 것은 당시에 신앙 스캔들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는 회복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가진 축복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깊이 각성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한 그의 삶과 헌신을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비슷하다. 베드로나 가롯유다나, 십자가의 각성이 얼마나 크냐? 유다는 그것을 포기한 것이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각성(覺性)한 것이다. 인간의 슬픔과 괴로움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가지고 다시 은혜를 회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오늘 갈보리 산상기도회에 이 놀라운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나온 이 자리에 사순절 기간에, 부활절이 되기 전까지 갈보리 산상기도회를 통하여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깊은 은혜가 여러분의 것으로 체화되기를 바란다.
 
‘나 믿노라 나 믿노라.’ 다시 부르면 차원이 다를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깊은 묵상으로 우리 모두를 깨닫게 하시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십자가에 대한 각성을 하고 회복하고 돌아왔을 때, 심지어 천국 열쇠를 받도록 하나님이 축복하셨다. 베드로의 그 회복의 중심에는 십자가 앞에서 깨어지고 그 회복의 회개가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알아주시고 쓰신 것이다. 오늘 35절에 보니까,
 
*마태복음 26:31-35,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만 그러한가? 모든 제자도 그와 같았다. 다 함께 그러하겠다고 한다. 세 번이라 부인했지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유대지도자들이 다 도망갔다. 심지어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숨어버리고,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는데 도망가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예수님께서 부인할거라고 해도 안 그렇다고 했지만 그런데 나중에는 배신하고, 도망가고, 보잘 것 없고, 볼품이 없고, 의심 많고, 평범하고, 경박하고, 배신자가 된 것이다. 이 배신자들이 십자가를 통하여 각성이 일어나고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일류역사상 회복시켜서 가장 유명한 자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도록 그들을 무장하고 세워주신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각성, 묵상이다. 십자가에 대한 은혜인줄 믿는다.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도 똑 같다. 우리도 나이 들어서 더 이상 실수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지 않으면 날마다 실수하고 어린아이 같고 우리도 보잘 것 없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이제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천국열쇠를 가지고 베드로처럼 그 초대교회 역사를 황금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려면 그 원천은 십자가의 깊은 각성과 은혜에 대한 각성이다.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각성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마음이 어떠한가?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너무나 고마워라! 라고 진정한 각성이 되는가?
 
지난 주일날 설교에 기드온이라는 설교를 했다. 그 말씀을 듣고 몇 분들을 만나니까, 그 설교를 들었을 때, 그 기드온을 듣고 울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말씀에 대해서 오늘 내게 본인의 것으로 체화가 되어야 눈물이 난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났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제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기드온은 큰 담대하고 그냥 강력한 용사라고 생각했는데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쫄보였다는 말씀에 연약하고 비겁하고 그런 기드온이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큰 용사하고 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주의 영이 함께 하시니 하나님이 그를 붙잡으셔서 큰 용사를 쓰게 하신 것이 와 닿았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본인의 삶과 똑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아리와 같은 깨지기 쉬운 곳에 그 안에 불을 넣어서 혁신을 통한 일을 한 것도 놀랍다고 했다. 나이가 70이 다 되신 분의 이야기이다. 그냥 지날 수도 있다. 그런데 내 것으로 체화하니까, 내 것으로 들리니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 이 십자가를 향하여 갈보리 산에 시작이다. 몇 주가 더 설교를 될 것이다. 각성을 가지고 우리가 이 기도의 지팡이를 들 때에 십자가를 통한 각성의 기도의 지팡이가 되어 십자가의 큰 능력이 우리에게 체험될 줄 믿는다. 그러니까 은혜이다. 할 때는 이 은혜는 십자가와 떨어져는 생각할 수가 없다. 한 번 예전에 말씀을 했다.
 
※어릴 때, 성악가 여자 가수인 마리안 엔더슨이란 사람이다. 컨츄럴 앨토이다.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노래한 성악가이다. 어릴 때 가난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보고 교회 성도들이 후원하여 고차원 성악교육을 받게 했다. 미국에서 일등 가는 교수에서 사사를 받았다. 그 마리안 앤더스의 창법이 톡특하다. 첫 독창회를 하고 나서 혹평을 받았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마리안 엔더슨은 마음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마리안 네가 깨달아야 한다. 민감하게 그러지 말아야 한다. 그 혹평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혹평보다 크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의 재능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네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 다음에 그래서 마리안 앤더슨은 평생을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영혼의 울림의 노래를 부른다. 음악의 두께가 깊은 바다와 같다. 그녀는 가는 곳 마다 찬송을 통해 십자가를 더욱 깨달았다.

-우리의 실력, 우리의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고 경박하고 실수 많이 하고 배신 잘하는 베드로와 같은 우리를 유다 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천국 열쇠를 받는 은혜를 십자가를 통한 놀라운 은혜의 저장창고의 문을 여는 자, 그래서 날마다 지치지 않고 시종일관으로 주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오늘 십자가의 능력이 갈보리 십자가에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오늘 지치고 힘든 여러분들도 환경보다 더 중요함을 깨달아서 여러분들의 재능보다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나 믿노라 !!!~~ 찬양을 한 번 더 하자.
 
지금 미국의 캔터키의 에즈버리 라는 곳에 리바이벌로 계속했는데 미국에 은혜를 깨닫고 하는 찬양을 하는 것을 우리가 다 벌써 그 이상으로 하고 있다. 십자가의 깊이가 연결되면 되는 것이다.
 
♣요약
그 주님의 보혈의 십자가를 체험할 때 이것이 한없는 보물창고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고가 되어서 얕은 묵상이 아니라 깊은 주님을 묵상을 하여서 갈보리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때, 천국열쇠를 가지고 베드로처럼 그 초대교회 역사를 황금같이 빛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깊은 각성과 은혜에 대한 각성으로 우리의 실력, 우리의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를 바란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