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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봄 글로볼 특별새벽부흥회(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주후 2023년 4월 11일)-둘째 날(화)
제목: "에즈버리 부흥을 묵상하며"
말씀: 마태복음 5:6
설교자: 케빈 브라운 박사님(애즈버리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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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의 신음”
말씀: 에베소서 6:18
설교자: 김한요 목사님(LA 베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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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에베소서 6:18,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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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브라운 박사님(애즈버리대총장)-"에즈버리 부흥을 묵상하며“
*마태복음 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애즈버리 대학교에서 인사드립니다. 저는 미국 켄터키주 월모어에 있는 애즈버리 대학교 18대 총장인 케빈 브라운이다. 저는 미국 켄터키 주 월모어에 있는 애즈버리 대학 총장이다. 39개 주의 280개 이상의 대학교에서 방문객들이 찾아왔다. 사랑의 교회 글로벌 특새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린다. 지난 2월에 애즈버리 대학교 캠퍼스에서 며칠 동안 이어진 집회에 대해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 인간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지난 2월에 16일 동안 제가 경험한 일은 평생 보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의 말로는 그 16일 동안 보고 느낀 점을 온전히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욥기서에 보면,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신다. 욥기 42장에서 욥은 이렇게 말한다.

*욥기 42:3,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의 문맥과 다르지만 저도 비슷한 입장에 있는 것 같다. 제가 확실히 못하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애즈버리 대학교에서 일어난 일이 너무 놀라워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애즈버리 대학교에는 일주일에 세 번 채플이 있다. 이것은 애즈버리 대학교가 설립된 이래로 계속 이어진 전통이 앞으로도 계속 일주일에 세 번 예배를 드릴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2월 8일에 있었던 채플은 어느 예배와 다를 바 없던 예배였다. 수요일 아침. 저는 제 사무실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다. 설교 후 찬송을 부르고 예배는 끝난 상황이었다. 저는 제 책상에서 일어나 예정된 회의에 들어갔다. 이후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아내가 저에게 학생들이 아직도 채플에서 찬양하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늦은 오후 즈음에 뭔가 특별하고 이전과는 다른, 게획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시간 동안 직접보고 느끼고 경험한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16일 동안 이어진 집회에서 5만 명이 다녀갔다. 수백만 명이 ‘애즈버리 부흥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을 찾아봤다. 39개 주의 280개 이상의 대학에서 방문객들이 찾아왔다. 미국과 해외 전역에서 목마르고 절박한 영혼들이 휴즈 강당으로 왔다. 말 그래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이었다. 멀리서 함께 참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다른 장소들과 혐력해서 밤새도록 현장을 생중계할 수 있었다. 저는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구하고 회개하는 절박한 영혼들이 모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간증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따뜻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선의를 베푸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당시 분위기는 정말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를 두고 ’성령님의 조용한 임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는 겸손, 긍휼, 하나님의 사랑, 적나라한 고백, 회개, 풀어진 속박, 무너진 견고한 진, 축성,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 진실한 기도, 삶을 바꾸는 헌신을 봤다.

저는 우리 대학 학생들이 최선을 다하는 멋진 모습을 봤다. 모두가 자기 할 일은 뒤로 한 채, 재정비하며 지치지 않고 일했다. 때로는 밤낮으로 일하며 질서 정연하고 방문객을 환영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애썼다. 점점 지역으로 몰려드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자 리더들은 빠르게 대응하고 협력해야만 했다. 질서가 세워졌는데, 그것은 사람의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잘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일부러 만들어 내거나 조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그저 받아들였다. 상황을 보고 대처하는 이 모든 일에 ‘신뢰’가 이었다. 변화로 인해 신뢰의 단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상황을 대처하는 이 모든 일에 ‘신뢰’가 이었다. 변화로 인해 신뢰의 단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 역사적인 애즈버리 부흥집회를 위해 애쓴 사람들 속에는 깊은 신뢰가 자리 잡았다. 이 기간 동안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뉴스와 SNS가 쏟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가 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이 일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다. 부흥인가, 아니면 갱신인가? 성령의 부으심인가? 대각성인가? 대체 이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모두가 목도하는 이 시ㅏ건에 가장 맞는 신학적 용어는 무엇일까? 애즈버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해석을 보면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시각 장애인이 때문인가? 그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가? 예수님이 이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후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어서 이 사람을 불렀다. 바리새인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죄인인지를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대답을 했다.

*요한복음 9:25,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사람들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궁금해 한다. 또는 이 현상이 부흥인지 아닌지 묻는다.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모른다’이다. 그 시각 장애인처럼 저도 ‘제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답할 뿐이다. 5만 명의 목마른 영혼들이 이 예수님을 찾으려고 한 자리에 모였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마름에 응답하시는 것을 봤다. 우리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달콤하고 부드럽고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이 짓눌려 있던 삶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생각지도, 만들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나타 나셨다는 것도 안다. 우리가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안다. 제가 아는 건 이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인간의 노력이나 재주 때문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안다. 애즈버리 대학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다. 미리 계획한 일이나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전문 찬양 팀이나 유명한 설교자로부터 비롯한 일도 아니다. 돈을 많이 쓴 마케팅이나 광고 캠페인의 산물도 아니다. 제가 본 것은 더 깊고, 더 진실하고, 더 충만한 것을 바라는 절실함과 영혼의 목마름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에 응답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들과 화목하고 싶은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를 추구하는 자는 배부를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제일 우선인 이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을 알게 되었다. 이 현상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모습인 것 같다. 우리는 연합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인간의 담론으로 여기거나 바람직한 조직 같은 희망사항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에서 연합은 희망사항이 아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서 연학은 요구이다.

*사도행전 4:32,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0장은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0:17,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갈라디아서 3:28,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서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5절에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 즉, 우리 자아와 죄를 죽임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말을 했다.

*로마서 6:5,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요한복음 17장에는 연합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은 획일성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는 것과 같은 연합을 찬양하셨다. 예수님은 한 번만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다섯 번이라 기도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라는 이 분명하고도 구별된 부르심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연합은 제자와 공동체룰 향한 요구이다. 오랫동안 저는 기독교 내의 분열이 심화되는 모습에 무거운 마음의 짐을 느껴왔다. 우리 중에 분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연합에 대해, 특히 어떻게 하면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연합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은 많을 것이다. 저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저는 겸손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엎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모습을 ‘십자가를 본받는 삶’이라고 말한다. 저는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가득 찬 삶’이라고 말한다. 이런 삶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말하는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열왕기하 10:15,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본문으로 한 존 웨슬리의 유명한 설교가 있다.
※“네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존 웨슬리-
-네 마음이 옳고, 내 마음이 옳고, 우리 마음이 옳으면 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애즈버리 대학교 캠퍼스에서 목도한 놀라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그리스도의 응답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세상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살펴보자. 정치 양극화, 사회불안, 인종차별, 전쟁, 경제 불확실성과 더불어 코로나 펜데믹을 겪어야만 했다. 교회를 보자. 교회에 좋은 점이 많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언 사역을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교회가 너무 시장화 되어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교회의 타락을 보심 알 것이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보자. 주일과 월요일의 삶이 너무 다르다. 제자도의 잘못 된 개념도 보자. 제자도는 단순히 믿음을 확인하거나 전반적인 삶이 변하지 않고 교회 콘텐츠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나날이 떨어지는 교회 신뢰도를 보자. 사회 속에서 교회가 차지하던 중요도가 사라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불안, 우울, 중독, 자살 충동이 심하다. 우리 안에 만연한 외로움도 보자. 21세기에 들어서 절망사가 점점 크기 늘어가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이러한 불안정한 현상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되어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SNS로 인해 이념적 성향이 점점 고착화 되고 있다. 이런 모든 현상을 보고 새롭고 신선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많은 이들이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

최근 몇 주 동안 이들이 자유로워지고 치유 받고 화해하고 고백하고 죄와 짐과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견고한 짐이 무너졌다고 간증했다. 누군가가 이를 두고 우리에게 영적인 눈이 있다면 풀린 쇠사슬로 덮인 제단을 볼 것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많은 이들이 갈등의 부재를 넘어선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평화를 경험했다. 또한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함을 경험했다. 이로 인해 새 생명을 느꼈다. 실제적이고 진실한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는 그저 만족이나 화력하고 비싸고 최첨단이고 즐거운 것이 아니다. 실제적이고 선하고 올바르고 진실한 것을 바랐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말하는 연합을 경험했다.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난 이 역사적인 부흥집회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집회로 하나가 되었다. 이 집회로 겸손해졌다. 이 집회로 회개(悔改)했다. 이 집회로 자유로워졌다. 이 집회로 새 삶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간증이다. 제가 본 것은 이것이다. 이 말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났던 역사의 궤도는 더 뻗어 나갈 것이다. 불을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불은 가장 높게 치솟을 때 가장 밝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캠퍼스에서 엄청나게 커서 잊혀 질 수 없는 큰 영적 모닥불을 경험한 것이다. 불은 가장 높게 치솟을 때가 가장 밝다. 그러나 불길이 잦아들고 있을 때 가장 뜨겁다. 일어난 일이 잠잠해지거나 끝나 보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가 바라는 것은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난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다. 저는 이 불길이 앞으로 계속 활활 타올라 번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불을 다시 비유로 들겠다. 전 세계의 다른 학교와 교회 사역 단체들이 이 불길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세상의 빛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과 소망을 전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긍휼한 마음으로 연약한 공동체를 섬기고 돕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구별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겸손해지고 이웃과 공동체를 도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빈곤과 비천한 상태에 대한 계속적인 예로 이해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만약 그들이 선한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이러한 곤란들을 겪는다면 그들은 복이 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자. 심한 압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지를 변호해 주시도록 조용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은 때가 이르면 만족하게 될 것이다. 만족하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실 때 보여 주실 지혜와 자비를 보고 크게 만족할 것이다. 의가 여기에서는 모든 영적 축복들을 가져오는 근거로서 제시된다. 모든 영적 축복들이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새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에 관심을 갖는 것, 이것들이 곧 '의'이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의를 갈망해야 한다. 영적인 복들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진지하고 끈질겨야 한다. 구해야 한다. 배고픔과 갈증은 자주 발생하는 욕구로서 새로운 만족을 요구한다. 소생한 영혼은 끊임없는 의의 양식을 요구하며 매일 매일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은혜의 양식을 필요로 한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애써 일할 것이다. 그처럼 우리도 영적인 복들을 바라야 할 뿐만 아니라 정해진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 복들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 이처럼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은 그와 같은 복들로 배부를 것이다. 첫째, 그와 같이 갈망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은혜를 바라는 모든 욕구가 다 은혜는 아니지만(가장되고 희미한 욕구는 은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은혜이다. 그것은 좋은 어떤 것의 증거이며 보다 나은 어떤 것의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시는 욕구이다. 둘째, 그들은 그와 같은 복들로 배부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며, 그의 은혜와 은총만이 영혼이 정당한 욕구에 적합하다. 하나님은 주린 자들을 배불리시되, 차고 넘칠 정도로 풍족히 주시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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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의 신음”
말씀: 에베소서 6:18
설교자: 김한요 목사님(LA 베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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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8,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풋볼에서 쿼터백은 사령탑의 지시를 받는다. 지상 현장에서는 전반적인 상황을 보는 시야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위에서 보면 다 보인다. 모든 일을 영적으로 결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와 악한 영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영적 전시 상황에 있다. 잠을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깨어 기도하라, 깨어 구하라는 말은 전시에 불침번 서듯이 그 연통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I. 깨어 구하라
-‘기도’란 전시상황의 워키토키와 같다. 인생이 전쟁임을 믿기 전 까지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기도는 전시에 사명 완수를 위한 것이다’ - 존 파이퍼 - 기도를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집의 초인종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II.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 기도의 폭은 인격의 폭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최대 궁극적인 신분은 우리의 기도 생활로 그 인격이 측정된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성경에 지식보다 저 중요한 것은 딱 하나이다. 그것은 기도이다. 나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나의 기도하는 양에 절대적으로 비례하기 때문이다.’-마틴 로이드 존스 -

2) 기도는 나의 정체성
-기도는 인격을 넘어 정체성이다. 기도를 듣고있다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의사였지만 뒤늦게 사명을 받고 목회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말씀에 대한 집중력과 강해 력이 탁월하시다. 그렇게 지적으로 말씀을 깊게 탐구하시는 분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력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라고 말씀한 것이다. 들어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엄마의 기도, 남편의 기도, 순장의 기도, 담임목사의 기도가 있다. 정체성을 기도로 드러내기를 바란다.

3)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주님과 친밀하라.
※-‘제가 다시 강조하는 사실은 크리스천의 삶은 기도드리는 시간의 양으로 궁극적으로 검증된다. 그러나, 저의 말은 오해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의무라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맞다 기도는 의무이다. 그러나, 의무 그 이상이다. 기도는 기쁨이며, 크리스쳔의 삶의 가장 궁극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이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장땡이라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기도는 인격의 폭, 됨됨이 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도의 양은 그 이상을 말해준다. 3분이면 기도가 금방 끝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산 한 성도가 간만에 재회한 부모님과 30년 동안 못 만났다가 만나니까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할 말이 없다고 하면, 그간 떨어져 지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관계이자 교제라 할 수 있다. 기도의 양은 친밀성이자 관계의 밀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기도를 들어보면 그가 예수님과 친한지 알 수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는 아래 구절과 상통한다.

*빌립보서 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모든 형태의)와 간구(간절한 특별요청)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의 능력은 화려한 문장에 있지 않다. 기도의 생명력은 간절함에 있다. ‘주여!’는 ‘당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라는 뜻이다.

※마치 막내딸이 아빠에게 선물을 구하고 받는 과정처럼 간절히 아뢰는 것이 중요하다. 막내딸의 요청이 해외에 나가면 아른거린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이 아른거리시지 않을까? 그런 기도와 응답이 있기를 바란다.

III. 성령 안에서 기도
-기도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적절한 범위가 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무엇일까?

*로마서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희망찬 것은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할지라도 그에 대해 주께서 원하시는 최선을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알아들으신다. 또박또박 멋있게 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절박함으로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외칠 때 성령께서 중보 하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응답의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중보기도 해주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축복이다. 성령께서 탄신하며 신음하며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음!!~~ 라고 해도 다 아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초심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특새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소원한다.

♣요약
연약하기 짝이 없고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 있기에 성령 안에 있음을 믿고 성령의 도고와 중보를 기도해야 한다. 주님 앞에 외치는 기도가 간절하게 상달되어서 모든 기도가 응답되기를 소원하며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가정이 영적 계보를 이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해 주심을 믿고 늘 주관자이신 주님 앞에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영적 전쟁의 수행 방법으로써 바울은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되 함께 은혜를 나누는 주위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때로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여 권력에 복종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힘을 다해 이웃을 격려하고 그들이 믿음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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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봄 글로볼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3년 4월 10일)-첫째 날(월).
제목: “주님의 마지막 부탁”
말씀: 요한복음 13:34-35
설교자: 릭 워렌 목사님(새들백교회)

제목: “세상을 흔드는 기도”
말씀: 사도행전 4:23-31
설교자: 김한요 목사님(LA 베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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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도행전 4:23-31,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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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릭 워렌 목사님(새들백교회)-주님의 마지막 부탁(요한복음 13:34-35)
*요한복음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께 문안 인사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를 너무 사랑합니다. 이 귀한 특별새벽부흥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에 캘리포니아주 애나하임에 있는 남가주 사랑의교회 특새에서 말씀을 전한 기억이 난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오전현 목사님과 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이다. 저는 오정현 목사님을 형제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의 교회의 모든 분들을 사랑한다. 저는 새들백교회의 원로목사이자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이다. 그리고 ‘Finishing the Task’라는 글로벌 연합체의 대표이기도 하다. 저희는 예수님이 주신 대 위임명령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교회, 교단, 선교단체, 복음주의 기관들과 함께 2023년까지 ‘Finishing the Task’에 동역할 예정이다. 사랑의 교회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연합체인 ‘Finishing the Task’와 동역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있다. 저는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사랑의 교회가 귀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자, 요한복음 13-17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향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과 기도가 나온다. 목회자, 또는 교회 지도자라면 마지막 말, 유언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실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은 중요하다. 요한복음 13장부터 17장에서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겟세마네서의 기도가 나온다. 여기서 말씀하신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언급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셨는가?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는가? 요한복음 13-17장까지 예수님이 가장 많이 말씀하신 두 가지 주제는 사랑과 연합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성도간의 ‘사랑과 연합’에 대해 가장 많이 말씀하셨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사랑과 연합’을 21번이나 언급하셨다. 여러분에게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요한복음 15장 9절에

*요한복음 15:9,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장 12-13절에서도 또 나온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이어서 사랑을 측정하는 방법이 나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장 17절을 보면
*요한복음 15:17,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사역 적 전략, 계획, 목표, 도구, 협력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기도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나누셨다. 그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고별 기도를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에 이 기도를 들었고 이 장면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온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대 위임명령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에게 하나가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네, 다섯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다. 이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비전이다. 요한복음 17장 1-2절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시작이다
*요한복음 17:1-2,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장 1-8절은 지난 삼 년 동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사역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일종의 보고이다. 9절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7:1-9,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5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7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사도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체포되시기 직전까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 이후에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다. 요한복음 17:9-1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이다.

*요한복음 17:9-11,
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0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들은 바로 여러분과 저를 가리킨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잘 들어보라.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첫 번째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예수님이 기도하시면서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처음 언급한 부분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분비하시면서 하나 됨을 여러 번 언급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향하시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주제는 바로 예수님의 가족, 그리스도의 몸이자 신부인 교회가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20-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 됨을 더 언급하셨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셨다.

*요한복음 17:20-21,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이 사람들은 21명이 아니라, 실제로는 11명이다. 여기서 ‘그들의 말과 기도로 믿는 사람’은 여러분과 저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 역시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에서 하나 됨의 주제를 볼 수 있다.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되고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된다. 잘 보라. 전도의 연합의 결과물이다. 이게 바로 전도이다. 우리가 하나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믿게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바로 직전까지도 제자들이 사랑 안에서 하나 되는 것에 크게 관심을 두셨다. 이는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비전이었다. 예수님의 기도제목임과 동시에 소망이기도 했다. 이미 다른 게 더 중요했다면 예수님은 그것을 언급하셨을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이자, 몸인 교회의 연합이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가 되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나오는데 그중에서 다서 가지만 살펴보겠다. 이번 특별새벽부흥회 기간 동안 우리가 할 일, 즉 예수님의 대 위임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서 할 일이다. 우선 여러분에게 서 너 가지 정도 그 이유들을 말씀드리겠다.

첫째, 다른 성도들과의 연합은 스스로 경험하는 구원받았다는 증거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시기 전 요한복음 13:34-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는 체에 붙어 다니는 범퍼 스티커나 기독교 상징물, 십자가 목걸이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제자라는 증거는 바로 다른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다.

둘째, 성삼위일체가 우리의 연합을 위한 예가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하나 됨의 모델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요한복음 17장 11절에서 이렇게 설명하신다.
*요한복음 17:11,
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다른 성경 번역본에서는 “그들의 연합이 마치 우리의 연합과 같게 하옵소서.”라고 번역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하나이신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연합의 모델이다.
셋째,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우리가 하나 되어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1,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앞에서는 세상이 알게 된다고 했고 여기서는 세상이 믿게 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께로 오는 사람들, 믿음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구원으로 오는 사람들, 하나님의 가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신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을 성도들의 연합체로 묶으신다. ‘메시지 성경’은 21절을 이해하기쉽 게 번역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 이것이 내 기도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참으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해주십시오.”라고 번역한 메시지 성경의 이 구절이 참 마음에 든다. 이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비전이자 목적이다. 여러분의 배경에서, 여러분의 영역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와 그리스도 몸의 일부로서 특별새벽부흥회 기간 동안 한마음 한뜻이 되자고 요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기도 중 다음 구절은 하나 됨의 네 번째 이유이다. 바로 22절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2,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 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임재이다. 하나님의 권능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내 성품, 임재, 권능을 그들에게 주리라.” ‘내가 그들에게 영광을 주었으니 하나님의 임재가 너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하리라. 더 가혹한 자세가 아니라, 더 독선적이고 고집부리는 태도가 아니라, 더 비판적인 태도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이 충만한 그런 성품,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 되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신다.

형제자매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여러분 삶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길 원하시는가? 물론 원할 것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느끼길 바라시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길 소망하시는가? 예수님은 서로 다른 이들을 포옹하고, 서로 다른 이들과 하나 되기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대 위임명령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one) 되지 않으면 세상을 얻지(won) 못한다
-성도가 하나 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리가 주님의 사람인 것에 대한 가장 큰 증거가 된다.
*요한복음 17:23,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이렇게 기도하셨다. 23절에 두 번째로 성도들의 연합으로 세상을 얻는 것 즉, 대 위임명령을 성취하는 것을 연결하셨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one) 되지 않으면 세상을 얻지(won)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제 방식으로 표현해 보겠다. 믿지 않는 사람들 입장에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이 그들에게 좋아 보인다면 그들은 우리가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를 사랑과 하나 됨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이 세상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신 사랑과 연합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번역본은 23절을 이렇게 번역했다. “그들이 성숙함으로 하나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게 된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나 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음을 여러분께 말씀드렸다. 일곱 가지 이상 더 말씀드릴 수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며 이 말을 하고 싶다.

‘분열은 비전을 죽인다. 이 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필기 하시면 좋겠다. ‘분열은 비전을 죽인다(Fragmentation kills vision).’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면,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세계 복음화를 이룰 수 없다. 아프리카 속담 중에 ‘물 한 방울로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비 한 방울로는 못 하지만 많은 빗방울은 사막을 정원으로 만들 수 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대 위임명령을 이룰 수 없다. 여러분 힘으로는 가능한가? 여러분도 혼자 힘으로는 하지 못한다. 심지어 여러분의 교단과 기관 혼자만으로 못 한다. 우리는 절대 혼자서는 못한다. 우리 모두가 하나 될 때만 가능하다. ‘분열은 비전을 파괴시킨다(Division destroys vision).’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함께 할 때, 힘이 생긴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가 예수님의 기도 응답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번 특새 기간 동안 일어날 역사들이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 기도의 응답이 시작되는 시점이 될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서로 다른 배경과 믿음의 전통을 가진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시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나와 대 위임명령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해 주시길 소원한다.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요약
주님이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기억하여 다른 성도들과의 연합하고 스스로 경험하는 구원받았다는 증거로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시는 목적이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임을 깨달아서 늘 서로 한 뜻으로 나누고 세워가며, 우리가 하나(one) 되지 않으면 세상을 얻지(won) 못한다고 하셨음을 알아 더욱 하나로 뭉쳐서 주님의 자녀로서 본이 되고 주님을 전하는 아름다움을 갖추어 가야한다.

-첫째,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다. 너무도 믿음이 약한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릴 것을 염려하여 마음과 뜻과 목적이 하나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셨던 것이다.
둘째,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세상에 남아 있을 것이므로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셨던 것이다.
셋째, 전도를 위해 기도하셨다. 즉 제자들이 그분의 도구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말씀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며 살기를 기도하셨다.
넷째,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one) 되지 않으면 세상을 얻지(won) 못 한다.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아니 하시고, ‘영광을 얻었다’고하셨다. 즉 십자가는 형벌이 아니요 곧 영광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 영광이다. 인간은 자기 뜻대로 행해서는 영광을 얻을 수 없다. 영광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순종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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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요 목사님(LA 베델교회)-세상을 흔드는 기도.(사도행전 4:23-31,
 
*사도행전 4:23-31,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한 상황이다. 팬데믹 때, 예배 금지령을 받았을 때 큰 충격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기를 지난 후 성도들이 어깨 붙이고 앉지 않는 분위기로 바뀐 것을 본다. 사도행전은 성령 강림 이후 불같은 열정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자, 교회의 성장을 억제하려는 반대와 핍박에 봉착하게 된다.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나면서 걷지 못한 장애우를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했던 기적이 일어났다. 상대적으로 무능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사도들의 권세를 시기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구금하여 박해했다.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사탄은 가장 싫어한다. 만사를 악한 영, 사탄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악한 영의 움직임을 완전 무시하는 태도는 더 위험하다.

베드로와 요한의 구금 소리를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무릎을 꿇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고난당하는 교회는 기도로 응전했다.

1. 하나님의 속성, 성품을 기억하면서 기도했다.
대 주재여!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온 우주 만물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전능자이심을 기억하고 기도하라.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중에 루터는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비판을 에라스무스를 향하여 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어느 정도의 스케일을 지닌 분이신가? 대 주재이신 하나님이시다.

2. 25절,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시편 2편을 읽으면서 기도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령님을 묵상하며, 그 말씀의 예언대로 이루어짐을 확신하며 믿음보고하면서 기도했다. 누가 주인공인가? 기도하는 자가 주인공이다. 교회가 흔들리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오로지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땅이 진동하는 역사로 응답하셨다. 세상을 흔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세상을 흔드는 하나님을 경험할 것이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오 목사님께서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40일 특새를 하실 때에 남가주에는 특새 바람이 불었다. 도전을 받고 벧엘교회도 40일 특새를 했는데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다. 250명 들어오는 본당에 300명 이상이 회집하여 미국 신문에도 기사화되기도 했다. 웨일즈 부흥기록을 보면서 발견한 사실이 있다. 교회는 항상 먼저 무릎으로 가야 한다. 계획보다 기도가 앞서야 한다. “주님, 교회를 무릎 꿇게 하소서(Lord, bring the church to its knees!).”라는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교회를 꺾으시고, 교만한 무릎을 꺾어 무릎을 꿀리소서! 뻣뻣한 교회의 무릎을 꿀리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공급 받는 교회의 우리의 무릎을 꿇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그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그리하여 세상이 교회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통해 우리 하나님께서 세상을 흔드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한다.

♣요약
은혜 가운데 이 시대의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 형편이 기도를 막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를 통해 기도의 진보가 나타나는 역사가 되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나타나고,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에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교회를 흔드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물리쳐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께서 막아주실 줄 믿고 세상을 흔드는 기도가 되고 우리가 구하는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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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담임 목사님
-목사님 통해 또박또박 주셨는데 어느 것 하나라도 여러분 것으로 확인 될 줄 믿는다. 우리의 시추에시션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니 복음의 진보가 되게 해 주시길 기도한다.
첫째 날(월), 공동 기도제목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역대상 4:10)=“God Granted What Was Requested”-1 Chronicles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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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4월 9일)
제목: "기품(氣品) 있는 인생"
말씀: 요한계시록 1:9~18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박삼열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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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1:9~18,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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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 많이 한 사람들 중에 하나가 일 년 중에 가장 은혜 가장 많이 받는 날이 부활절이다. 매주일이 작은 부활절이 아닌 큰 부활절이 되는 영적인 피크인 이 날에 주님을 찬양한다. 오늘 생각만 해도 존귀함과 품위가 생기는 말이다. 모두가 품위 있는 인생, 거품이 있는 인생이 아니라, 기품(氣品)이 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보니 강단에 ‘카라’라는 꽃을 보니 좋다. 영적인 영광의 대관식이다. 오늘 그야말로 큰 부활절이다. 기품이란,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기품을 유지하고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고, 하나님나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 남에게 영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며 어두움을 밝히는 인생이고 믿음 보고 하는 인생이며,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기품이 있으면 영적인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는 자이다. 여성으로 말하면, 에스더 같이 현숙한 여인이며, 룻과 같은 여성이 기품 있는 자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품이 있는가?
 
*에베소서 4:24,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주님의 형상을 따라가고 우리는 완벽하지 않지만, 주님은 완벽하시니 완벽한 진리, 완벽한 거룩이 있을 때, 이것을 사모하고 우리도 되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분적이라도 기품을 주실 줄 믿는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듣고 부활주일 날, 오늘 이 자리에 들어올 때와 나갈 때가 여러분의 삶의 기준이 달라지기를 바란다. 첫 번째 –어떻게 기품이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인가?
 
I. 영광에 압도되어.. 죽은 자 같이 되매.
 
*요한계시록 1:17b,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하나님의 영광, 그의 영광이 너무 압도되어서 바짝 엎드렸다. 오늘 이게 무슨 말씀인지, 일 년의 영적인 피크 이 시간에 내가 하나님 앞에 죽은 자 같이 되는 것은 어떤 뜻인가?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요한계시록 1:9~18,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너무나 강렬한 표현이다. 특별히 말씀 중에 내가 죽은 자 같이 되었다. 것은 호스네크로스(Horsenecros)이다. 와 같이 죽음 같이 라는 뜻이다. 생명이 없는 것 같이 죽음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 앞에 죽은 자, 세상의 왕 앞에 죽은 자가 아니고 영광스런 주님 앞에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못 구하고 그 앞에 죽은 자 같이 되면 기품이 있는 인생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요한은 주님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찬란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되었다. 너무나 큰 소리 맑은 물소리 같은 우렁찬 소리를 듣고 귀가 멀어져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식을 잃고 죽을 때처럼 되었다. 주님의 임재와 영광의 무게에 눌려서 숨이 끊어지는 것 같이 되었다. 죽은 자 같이 된 것이다. 저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떤 거룩한 충격을 받았다. 요한의 입장이 되면, 우리 모두가 다 이 시간 좀 더 마음이 와 닿는 것이다. 잘 아시는 대로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듯이 사도요한 주님의 심장에 몸을 기대어서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주님의 따뜻한 심장소리를 듣고, 주님의 뜻을 제일 잘 아는 자이며, 너무 가까운 사람이고 오죽하면 주님이 사랑하는 자라고 했고, 오죽하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마지막 남은 인생을 요한에게 부탁할 정도로 예수님과 가까웠다. 아주 가까웠다. 그리고 부활하신 빈 무덤에 제일 먼저 베드로와 함께 달려간 사람이 요한이었다. 아주 한 식구 같이 친밀한 관계였다. 오늘은 이렇게 요한이 고백한다. 그 친밀함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면 요한계시록 1장 17절을 다시 보면,
 
요한계시록 1:17a,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호스네크로스, 부활하신 주님을 요한이 처음 볼 때, 너무나 기뻐하고 황홀해가지고 초자연적인 느낌을 받았다.
 
*누가복음 24:41,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런 기쁨이 있다. 요한이 주님을 만났을 때, 이런 기쁨과 놀라움과 황홀함이 있었는데, 오늘 이 상황에서는 너무나 거룩함이 커서 완전히 죽은 자처럼 엎어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그 신성과 영광이 놀라웠다. 예수님의 모습에 얼마나 놀라웠는지 그의 얼굴이 해가 비추는 것처럼 찬란하게 빛이 났다. 그의 얼굴은 불꽃으로 이글이글거렸다. 풀무 불에 단련한 주석 같고, 목소리는 맑은 물소리처럼 강력하고 우렁차셨다. 예수님의 드러난 신성, 너무나 찬란한 영광을 목도하고 다시, 요한이 그의 앞에서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한다. 요한은 본래 웬만한 것 가지고 끄떡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요한은 그 새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때도 그거 봤다고 죽은 자처럼 엎드리지 않았다. 일곱 영과 일곱 군대를 보고도 보좌의 타는 불을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요한은 두려워 떨었다는 말이 없다. 세일 산에 무지개를 바라보고, 수정 같은 파도와 타는 불을 보아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했다. 요한계시록에서 수많은 특별한 계시와 다와 엎드렸다는 말은 없다. 그 정도로 엎드리지 않았다. 요한계시록에 수많은 계시와 지옥으로 가는 문을 보았어도 겁먹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밤모섬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고 부활하신 주님 앞에 죽은 자 같이 된 것이다. 여러분 죽은 자 같이 된 것은 거룩한 엎드림인 줄로 확신한다. 거룩한 엎드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할 때, 기품 있는 인생이 된 것이다.
 
제가 말하는 이 기품이라는 것은 세상 적으로 무슨 자기 혼자 열심히 노력해서 혼자 지키고자 하는 어떤 체면이나 윤리나 도덕 정도가 아니라, 영광스런 주님을 대면함으로 죽을듯한 거룩한 긴장감에서 형성된 영적인 기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目睹)하고, 반사하고, 체험한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흔적(痕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거룩한 흔적, 여러분, 죽은 자 같이 된 것이, 어떤 게 죽은 자 같이 된 것인가?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우리는 죄로 가득한 인간이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이 온통 죄 밖에 없는데 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이 완전히 순전하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의식을 잃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오죽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무슨 말을 하는가?
 
*이사야 6:5,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여러분,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납작 엎드릴 때, 죽은 듯이 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품이 되고 체화되고 우리의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당에 들어오기 전에 세상의 거품을 뒤집어쓰고 지친 얼굴로 들어오면 이 영광스런 부활주일 날,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목도하고 그 앞에 마음을 납작 엎드려서 마치 죽은 자처럼 되어서, 호스네크로스, 그럴 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기품이 인생이 될 줄 믿는다.
 
주일 날 아침에 7시에 교역자들과 모여서 기도한다. 이 예배를 위해서 ‘만군의 여호와’를 찬양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시도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 고귀함이 그 말씀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시도다. ♬~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살아갈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자. 아멘, 구할 때마다, 예배들 드릴 때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 우리의 뻣뻣함 모든 것들이 마치 죽은 자 같이 이런 고백을 드릴 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목도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II. 오른손을 내밀며 두려워하지 말라​.
 
*요한계시록 1:17b,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영광스런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이 부활하신 신성이 있지만 이 땅에 신성을 감추시고 주님의 겸손하시고도 말씀처럼 오른 손을 내밀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셨다. 마음이 상처 받고 병든 자들에게 손을 내밀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만나서 말씀의 손을 내밀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 예수님은 너무나 찬란한 영광의 주님이신 동시에 오늘 오른손을 내밀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심을 믿는다. 아멘. 주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오른 손을 내 미셨는가? 그 오른 손을 내 미실 때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손을 내미니까 어린 아이들이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저는 주님께서 아주 드라마틱하게 오른 손을 내 미신 그런 내용을 잘 알고 있다.
 
*마태복음 8:3,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당시에는 나병환자가 주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얼굴을 감싸고 덮어야 했고, 길을 갈 때도 나는 부정하다고 소리쳐야 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피할 수 있도록 나병환자를 경계할 수 있도록 율법은 그렇게 정했다. 스스로 자신이 부정한 자라고 외치며 일생을 저주 받은 자로 살아야 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너무나 놀랍다. 이 나병환자가 처음으로 따스함을 느껴보는 것이다. 그 동정의 눈빛과 눈물 콧물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오늘 이 요한에게도 내가 영원히 사모할 그 주님의 이 따뜻한 손길, 오른 손의 손길을 내밀어 주셔서 납작 엎드려 죽은 자 같이 된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오늘 이 자리에 나병환자처럼 그냥 얼굴을 가리운 자, 기가 막힌 환경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지금 손을 내밀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한다. 이럴 때에 여러분 얼마나 강력한 양면성인가? 일곱별을 잡으신 예수님의 능력의 거룩한 그 영광의, 영광의 영광의 손이 있고, 또 주님이 갈보리에서 못 박히신 사랑의 손이 불꽃러럼 타오르는 예수님의 손이 있고, 동시에 나사로의 무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눈이 있으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철저한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시는 강력한 그 음성이 있고 동시에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이다. 이 양면성을 주님은 가지고 계신다. 이것만 우리가 깨달아도 기품이 있는 인생이 될 수가 있다.
 
*마태복음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한 없이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신 그 주님을 생각만 해도 얼마나 좋은가? 강력한 기품이 있고 강력한 영광이 있는 주님께서 오늘도 오른 손을 내밀어 주셨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마다 매 순간, 평생 우리 가운데,,, 우리는 인생이 무장될 수가 있다. 주님은 뭐라고 또 말씀하시는가?
 
 
III. 주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고 세세토록 살아있는 분​.
 
*요한계시록 1:17-18,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오늘 본문에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내가 전에 죽었지만 살아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마치 죽은 자 같이 되어 주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또 주님의 그 오른손을 통하여 따뜻함을 느낀 것이다. 세세토록 살아계신 것으로 믿는다. 요한복음 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처음과 마지막이신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평생 거하심을 찬양한다.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 무슨 뜻인가? 세상의 왕들이 사라지고 세상의 권력자들이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가 쇠하여 없어진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라는 것이다. 땅이 없어지고 지구 전체가 사라진다 해도 모두가 사라진다 해도 온갖 전염병과 지진과 쓰나미가 덮친다 하더라도 주님은 영원히 계시고 처음과 마지막이요, 세세토록 살아계신 줄로 믿는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히브리서 1:10,
10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땅에 기초가 무너지고 이 세상이 없어진다고 잊혀진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신다. 이것을 생각만 해도 거룩한 기품이 생기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계신다고 했는가? 모든 시대를 통 털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항상(恒常)에서 항상까지 살아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하신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세토록 살아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그분이 지금 이 시간 살아계심을 깨달으면 우리의 삶에 온전하게 영적 기품이 되는 것이다. 세세토록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의 삶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우리 가운데 계심을 믿는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영원히 주님이 동행하시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다. 무슨 뜻인가? 2천 년 전 유대 땅을 걸으셨던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신다. 아멘. 이천 년 전 이 마을에서 저 마을에 다니시면서 가난한 사람, 병자, 거지 애통하는 자를 만나주신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낮과 밤에도 함께 계시며 그분과 함께 걷는 자에게 세심하게 귀 기울여 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시는 것이다. 때로는 벅찬 영혼을 가지시지만 우리에게 참으로 관대하신 주님이시다. 이천 년 전에 가난한 사람, 병자, 거지 애통하는 자를 만나주신 그분이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신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세세토록 함께 하시는 증거가 무엇인가? 오늘 이 예배가 증거이다. 지난 이천 년 동안 한 결 같이 한 주일도 빠지지 아니하고 전 세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면 이것은 헛것이다. 이런 이천 년 동안 하시는 예배가 가짜인가? 엉터리인가? 모조인가? 주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신다. 우리가 이 예배에 참석하고 감사하고 감격하고 한 결 같이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지난주일 날 어떤 분이 LA에서 왔는데 자기 생애에서 이런 큰 예배당에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예배하는 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크든 작든 상관없이 2천 년을 한 결 같이 예배하는 것이 이것은 주님이 살아계시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것이다. 살아계신 주님을 예배할 때 이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주님의 은혜가 임할 때, 지금도 아픈 자를 고치시고 마음 상한 자를 만져주시고 오늘도 고통 가운데 있는 주님의 자녀들에게 눈물을 닦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을 선포하시는 그 주님이 살아 계시는 것이다. 나만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 주일은 우리가 태신자 작정 카드를 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일 년의 한 번이라도 살아계신 주님을 여러분들이 체험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치유하신다.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지금도 구원하신다. 수많은 사람들을, 저 그 때에 마상에서 떨어뜨린 그 주님께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을 구원하시고, 어거스틴을 그 더러운 삶을 깨끗하게 하시고, 요한켈빈과 요한에슬리, 무디와 스펄전 손양원 목사님 등등,,, 모두를 살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는 것이다. 한 결 같이 오늘도 역사하시고 통치하고 계신다.
 
우리가 완전한 영적인 진정한 참된 기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여러분 세대에 이 부활절이 최고의 행복한 부활절이 되어야 한다. 참 된 부활절이 되려면 영적인 기품이 있어야 한다. 이 기품이 있을 때, 알파와 오메가로 세세토록 살아계신 그 주님과 동행한다고 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라. 아브라함이 평안할 때에 그의 생의 기품이 있었다. 아브라함이 고귀함이 남 달랐다. 든든한 성벽에 있는 것처럼 평온했다. 적절한 삶을 유지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서툴거나 서두르거나 게으르거나 그러한 적이 없었다. 항상 기품을 유지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살아계신 안에서 거룩한 기품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다고 했다. 무슨 말씀인가?
 
*요한계시록 1:12,
12 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지금도 일곱 금 촛대인 교회를 보고 계시며 하나님의 교회와 공동체에 임재 하셔서 살펴주신다. 오늘도 예배하는 이 자리에 계신다. 우리가 찬양할 때 하나님은 받아주신다. 성령의 갑절을 느끼게 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기품을 회복할 수가 있다. 이 교회에 교역자와 중직 자와 모든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존귀한 기품이 닮아서 넘치는 기품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주 찬양은 어린양의 피로이다. 주보에 있다. 늘 찬양하는 생활이 되기를 바란다.
I entered holy of holies​.
I enter through the blood of the Lamb
!!~~~
우리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과 주님의 오른손으로 만져주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놀라운 주님의 임재를 느끼기를 바란다. 활절에 어린 양의 피로를 원수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의 기품이 있어야 한다. 예수 믿는 자들이 기품이 있어야 한다. 한 결 같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다윗도 한 결 같이 아임 리턴 했다.
 
​♧요약
찬란한 주님의 영광 앞에 죽은 자와 같이 납작 엎드릴 때, 성령에 감동되어 거룩한 영적 기품을 가진 자로 변화되어야 하며, 예수님이 따뜻한 손을 내밀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심을 깊이 깨달아서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주님과 동행하여 흔들림 없는 삶 가운데, 세상 가운데 영적 기품을 유지해야 한다. 주위에 믿지 않는 자를 태신 자로 작정하여서 주님의 나라를 진정으로 함께 들어가는 자가 되어 주님의 자녀로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이 환상을 허락받은 요한의 현재 형편과 상태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랐기 때문에 핍박당하고 추방되어 아마도 수감되었을 것이다. 그는 사도였지만 이들의 '형제'였다. 그는 환란에 이들과 동참하는 자였다. 핍박을 받는 하나님의 종들은 혼자 당하지 않았다. 그가 이들과 인내에 동참했다. 여러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은혜를 입는 데서도 이들과 함께한 것이다. 이런 말로써 그는 이들과 공감하고 이들에게 조언과 위로를 주도록 애쓰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가 이 환상을 허락받을 때 있던 곳: 그는 밧모섬에 있었다. 이러한 감금 상태 하에서도 이 사도에게 위안이 된 것은, 자기가 악행자로서가 아니라 예수를 증거 한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고통을 감수할 만한 명분이었다. 그리고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이 핍박받는 사도에게 임해 있었다. 그가 이 환상을 받은 날과 시간: 그때는 주의 날이었다. 그는 성령에 감동되어 있었다. 그는 환상을 받을 때 뿐 아니라 받기 전에도 그러한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성령의 조생력으로써, 흔치 않은 자기 현현을 위해 그 백성들의 영혼을 평소에 준비시키신다. 그가 들은 것은 마치 나팔 소리가 나듯이 경종을 들었다. 그것은 이제 그에게 계시될 것들을 써서 즉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사도에게 명령하시는, 처음이요 나중 되신 그리스도의 음성이었다. 그가 본 것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가 몸을 돌이켜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자, 놀라운 환상의 한 장면이 그에게 전개되었다. 그는 교회가 일곱 금 촛대라는 상징으로 표현된 것을 보았다. 교회가 촛대에 비유되는 것은 그것이 복음의 빛을 훌륭히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금 촛대 사이에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인 모습을 보았다. 그는 전에 그처럼 그리스도와 친숙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찬란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시자 그 위대함에 압도되어 버렸다. 주님은 그를 일으켜 세우셨으며 그에게 힘을 불어 넣으시고 친절한 말씀을 해 주셨다. 곧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특히 이렇게 그에게 나타난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셨다.
 
첫째,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거룩한 본성을 알려 주신다. 처음이요 나중이니.
둘째, 전에 받은 고난을 알려 주신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셋째, 자신의 부활과 살아있음을 알려 주신다. 나는 산 자라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을 이겼고 끝없는 삶을 누리는 자다.
넷째, 자신의 직무와 권위를 알려 주신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즉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스리는 주권을 가졌노니.
다섯째, 자신의 뜻과 바라는 바를 알려 주신다.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여섯째, 일곱별과 일곱 촛대의 의미를 알려 주신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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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기도회(주후 2023년 4월 8일)-성토요일부흥헌신
제목: "가상칠언(架上七言)"
말씀: 누가복음 24:34, 요한복음 19:30
찬양인도: 제자ㆍ사역훈련 찬양대
대표기도: 강해신 집사님(여제자 6반 총무)
말씀읽기: 고은서 어린이(소년부), 최혁 어린이(초등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

*누가복음 24: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요한복음 19:30.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

▶오정현 담임목사님
토비새에 이렇게 나와서 은혜 받을 수 있도록 건강주시고, 환경주시고, 믿음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저는 관심 있는 것 하나가 ‘한결 같은 은혜’를 어떻게 유지하는가? 이다. 시종일관하는 은혜와 능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왔다갔다 하지 아니하고 꾸준하게 은혜를 받을 것인가? 토요비전새벽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한결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신앙은 가끔 이야기하지만 성전 뜰 신앙이 있고, 성소신앙이 있고, 지성소신앙이 있다. 오늘 토비새 나온 성도는 성전 뜰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않는가?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종교인 비슷하게, 한국교회도 140년이 되었으니까 기독교적인 문화가 있고, 또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은 것도 있지만 안 오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지성소 신앙에 비하면 그런 아무것도 아니다. 지성소 신앙은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정말 주님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가? 그게 지성소신앙이다. 오늘 토비새 나오고 오늘 방송으로 보는 여러분은 지성소신앙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말씀은 가상칠언을 하게 되는데 우리 목사님들이 나오셔서 말씀하실 것이다. 오를 100문 1답도 하게 될 것이다. 하여튼 오늘 이 토비새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가 한결 같은 은혜를 유지하는 기도의 용사가 되기를 소망한다. 교회가 지금 내일 부활주일 예배이고 월요일부터 특새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력한 은혜를 준비하고 계신다. 여러분 강력한 은혜를 준비하고 있는 것, 그만큼 우리가 영적으로 똘똘 뭉쳐야 되고 항상 주의하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교회의 저나 우리 교역자들이나 우리 교회 모든 중직 자와 모든 순장님들, 이곳에 나오신 모든 분들 영적으로 똘똘 뭉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다 한 결같이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고 모두가 다 지성소 신앙이 되기를 소원한다.

2023년 부활의 계절에 사랑의 교회가 모두가 한 결 같은 은혜를 유지하기 위하여 특별히 지성소 신앙을 위하여 창립 45주년 기념의 감사의 찬양을 ‘어린 양의 흘리신 피로’를 하게 될 것이다. 토요비전새벽예배 때문에 요즘 그 성금요일 저녁 예배를 토요일 아침으로 대신 드리는데 오늘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흘리신 피로’ 사랑의 교회는 한 주일을 결석하면 잘 모른다. 한 주일 안 나오면 모르는데 어린양의 흘리신 피로를 부르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한 결 같은 은혜를 유지하게 하심으로 2023년의 부활 주일의 영광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는 지성소신앙의 깊은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찬양 가사를 읽어보고 찬양하자.

▷사랑브라더스 찬양(부목사님들 찬양)
-어린 양의 흘리신 피로(For(because) your name is Holy)-

♩!!~~
어린양의 흘리신 피로 그 거룩한 곳에 들어가-I enter the Holy of Holies
전능하신 여호와 앞에 나 엎드려 경배하네.-I enter through the blood of the Lamb.
오직 주만 경배하며 –I enter to worship You only.
스스로 계신 주 높이리-I enter to honer I am.
후렴:
경배합니다 나의 주님-Lord I worship You, I worship You.
경배합니다 나의 주님-Lord I worship You, I worship You.
거룩하신 이름 높이리-For Your name is Holy Lord.
거룩하신 이름 높이리-For Your name is Holy Lord. ♬~

-자 그래서 오늘 지난 화요일 순장 반에서 이 찬송을 하면서 에즈버리의 부흥운동 이상으로 이 사랑의 교회의 특새는 에즈버리의 부흥을 이미 주신 줄 믿는다. 다음 주에 굉장한 은혜가 있을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우리 교회가 지성소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거룩한 은혜, 영적 깊이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오늘 내 것으로 깨닫고 치유가 일어나고 은사가 일어나고 우리가 감당할 거룩한 지성소가 될 것이다. 모두가 다 우리 생이 다할 때까지 우리가 끝까지 은혜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경배하고 찬양하고 사모하면 하늘 문을 열어주시고 물 붓듯 은혜를 주시리라 확신한다. 성전 뜰이 아닌 지성소 은혜를 가져서 모두가 다 치유를 받아야 한다.

▶7명의 목사님을 모셨다. 나오셔서 가상칠언(架上七言)을 나누겠다. 우리가 예배하고 경배하고 사모하고 주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목사님들 나오셔서 말씀하겠다.

1. 김도훈 부목사님-제 일언(一言).
*누가복음 24: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 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많은 유대인들은 소리치며 구경했다. 대 제상들과 바리새인들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구경을 했고, 관원들은 비웃었다. 군인들은 희롱했고,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다. 십자가 밑에 있는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제비를 뽑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赦)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며 또 직접 못 박는 자를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사실 이 땅에서 누군가가 한 나라의 왕의 자녀를, 그가 왕의 자녀인지 모른다는 이유로 죽였다고 해서 그의 죄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을 성육신하신 하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얼마나 큰 죄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위해 오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주님께서 당한 그 죽음의 고통으로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신 것이다. 이 예수님의 기도는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과 관원들과 군인들만 위한 기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위해 부활을 죽음에까지 내몬 다윗왕의 기도이다.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수제자 베드로를 위한 기도이다.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옷을 맡고 있었던 그것을 당연히 여겼던 또 바울을 위한 기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도는 또한 우리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중보의 기도로, 다 감당하신 중보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었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도 지금 중보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날마다 새 날을 살 수 있는 은혜를 받고 있다. 주님이 이 기도의 우리의 마음을 합할 수 있기를 소원하며 이 은혜를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제 2언의 말씀을 살펴보시겠다.

2. 문진호 부목사님-제 이언(二)言).
*누가복음 23:43.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의 두 번째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죄수 중 하나가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죄수와 나누신 이 대화는 사실은 매우 극한의 육체적 고통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죄수에게는 현재 느끼고 있는 십자가 고통보다도 더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이후에 주어진 심판(審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靈魂)구원(救援)을 예수님께 요청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양손에 못이 박히고 양발에 못이 박힌 상태로 십자가에 달려계신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고통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느끼기 어렵고, 생각하기도 어려운 상황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고통의 극심한 상황에서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죄수에게는 죽음 이후에 관한 이 사건이 십자가 고통보다 더 크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유이다. 무엇보다 이 죄수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을 때, 우리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더 깊이 알게 된다. 우리 역시 영적으로는 예수님 옆에 매달린 죄수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다함없는 은혜의 선물은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복된 구원의 자리에 우리를 초청해 주셨다. 이와 같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3언(三言)의 말씀을 살펴보시겠다.

3. 천동원 부목사님-제 삼언(三言).
*요한복음 19:26-27,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극한 고통 속에서 하신 세 번째 하신 말씀은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기신 일이다. 이날 이후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신의 집에 모시며 평생을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마리아를 섬긴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니 마리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부터 시련의 인생을 걸어왔다. 머물 처소가 없어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누이셨고 해산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해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을 해야만 했다. 아기 예수님의 정결 예식이 있는 날에는 예루살렘의 시므온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받았지만, 더불어 “칼이 내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는 예언을 들었고 결국 눈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마주하며 그 고통을 혹독하게 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칼을 찌르는 듯한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다. 예수님이 이 같은 세밀하게 돌보시는 우리 모두에게 베푸시는 은밀한 사랑의 손길이다.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하늘의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요 달리 표현하면 영적 가족, 영원한 가족, 영광과 고난을 함께 하는 예수님의 영 가족이기에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한 가족이 되었고, 주님의 몸 된 교회이자, 지체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사요,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이다. 이 영가족의 은혜의 말씀 안에서 제4언의 의 말씀을 살펴보시겠다.

4. 이민형 부목사님-제 사언(四言).
*마태복음 27:46,
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네 번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셨다고는 믿을 수가 없는 말씀이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하시는 그 순간 우리 예수님은 완전한 저주 아래 놓여있었다. 최초부터 함께 하셨던 분, 영원토록 함께 하신 성부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다고 느껴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처음으로 아버지와의 단절과 부재가 무엇인지를 깊이 경험해야만 했다. 이런 예수님께서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가 되셨기 때문이다. 모든 저주 중 가장 큰 저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하나님께 버림 받으셨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모든 저주(咀呪)를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모든 인간의 고통, 그것을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이 절규는 사실 우리를 대신하여 부르짖음 외침인 것이다. 우리가 버림을 받아 질러야 하는 비명을 주님이 대신 지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끊어짐이 아닌 이어짐, 징계(懲戒)가 아닌 사랑, 멸망(滅亡)이 아닌 생명(生命)을 경험하는 장이 된 것이다. 이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며 제5언의 말씀을 살펴보시겠다.

5. 이윤기 부목사님-제 오언(五言).
*요한복음 19:28.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인 일곱 마디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그 중 다섯 번째, “내가 목마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여러 시간 동안 당하신 그 모든 고통을 “내가 목마르다.” 이 짧은 한 마디에 담아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 인생에 근본적인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목마름은 죄로 인해 우리가 겪는 고통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법으로 이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지만 결코 해갈(解渴)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남편은 다섯 차례라 바꾸며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했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무엇을 주시겠다고 하시는가? 바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신다고 하신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죄로 인하여서 언제나 목마름 상태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목마름을 대신 감당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어떤 물도 결국에는 다시 갈증을 일으키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우리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주님이 주시는 그 생수로 인하여서만이 영원한 갈증을 해소할 수가 있다. 우리의 죄의 문제,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수가 되심을 기억하며 십자가상에서 여섯 번째 말씀을 살펴보시겠다.

6. 이기호 부목사님-제 육언(六言).
*누가복음 23:46,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으셨다. 그리고 큰 하나님을 부르신 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록하셨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의 눈을 열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혼을 맡기신 그 주님께서 이제 오늘 우리 안에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도 그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있음을 우리 모두는 확신할 수가 있다. 이렇게 영원한 나라와 이렇게 하나님 향한 눈을 열 때에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 모두가 참된 복을 바라보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라는 그 최종 목적지가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손에 붙들리어 그 여정을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이다.이 여정의 삶을 기억하면서 제 7언의 말씀을 살펴보시겠다.

7. 주연종 부목사님-제 칠언(七言).
*요한복음 19:30,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이다. 우리가 다 아시는 대로 ‘다 이루었다.’ 라는 말에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tetelestai)’이다. 금전 관계에서 빚을 진 사람이 ‘빚을 다 갚아 주었다.’ 는 의미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의미는 죄의 빚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빚을 대신하여 다 갚아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스스로가 유월절 어린양의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께 바쳐졌다. 그리고 우리를 지성소로 이끄셨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죄로 인해 막혔던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고,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하면 그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관계를 회복해주셨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죄는 다 용서 받았고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제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신다. 영적 고아였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일을 오늘 이루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제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을 찬양한다. 김도훈 목사님께서 100문 1답으로 다음을 진행해 주시겠다.

▷김도훈 부목사님.-100분 1답.
-가상칠언의 예배와 메시지를 다 잘 들으셨을 줄 안다. 지금 이 사간은 예수님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에 기도응답의 소원을 담아 100문 1답으로 점화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다. 믿음의 4대 각 대표자들은 점화를 위해 등단해 주시기 바란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촛대는 교회를 상징한다. 교회는 어두워진 시대와 세상을 밝히는 빛의 사명으로 부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대망하는 성토요일에 대한민국의 영적기상도를 이끄는 사랑의 교회가 거룩한 빛을 다음 세대와 온 세계를 향해 비추기를 대망한다. 제가 질문을 드리면 참석하신 모든 영 가족 분들께서는 한 가지 답 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답이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의 답을 해주시면 점화 자가 그 의미를 담아서 점화하는 자가 되겠다. 일곱 번째 촛불을 점화할 때는 가지고 계신 휴대폰 점등을 해주시면 더 내일의 부활 주일을 앞두고 빛을 대망하는 작은 소원이 발현 될 것이라

1점화(사회자)-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영원토록 승리하신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는 누구십니까?
-(회중)예수 그리스도.

2점화(사회자)-사랑의 교회의 머리이시며 지난 45년 동안 사랑의 교회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계와 열방을 섬길 수 있는 탁월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세우신 분은 누구십니까?
-(회중)예수 그리스도.

3점화(사회자)-민족상잔의 역사를 종식하고, 한국교회와 이 민족 위에 복음의 능력으로 임재를 허락하셔서 분단된 상흔을 치유하고 복음의 능력으로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의 거룩한 대업을 완수하실 분은 누구이십니까?
-(회중)예수 그리스도.

4점화(사회자)-사랑의 교회를 땅 끝까지, 이 세상 끝 날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삼아 세계 복음주의 교회의 거룩한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세계선교의 마무리를 이끄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회중)예수 그리스도.
5점화(사회자)-사랑글로벌 아카데미를 하나님 나라의 영적 집현전으로 귀하게 사용하셔서 시대와 민족과 열방을 섬기는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회중)예수 그리스도.

6점화(사회자)-부활의 찬란한 영광과 함께 시작하는 제21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를 통해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로 새벽마다 기도 응답의 부흥을 체험하게 하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회중)예수 그리스도.

7점화(사회자)-6.3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50주년 기념대회를 통해 전도의 새 불씨, 연합의 능력, 신아의 세대 계승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의 마중물로 삼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회중)예수 그리스도.

♣요약
믿음의 4세대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해답으로 삼아 복음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서 주를 더욱 사랑하고 죄와 헤어지고 모두가 지성소 은혜를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성전에 나아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기도를 간절히 드리고 십자가의 사랑을 허락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라는 주제로 열리는 제 21차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 가운데 어린양의 흘리신 피로 인해 주어진 거룩한 대 반전의 응답을 통하여 부흥의 실체를 경험하며 한 영혼이라도 구원을 위해 목자의 심정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태신 자를 작정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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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3년 4월 5일)
제목: "사랑으로 덮어주다"
말씀: 마가복음 14:66~7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구성찬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마가복음 14:66~72,
66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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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주간에 이렇게 부흥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주님이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고난주간에 비를 뚫고 오신 만큼 예배의 특별한 은혜를 한 분 한분에게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다. 고난주간이어서 십자가를 더 애쓰다보니까 평소 일상이 그냥 지나치던 것도 또 다른 시각으로 이렇게 바라보는 것 같다. 지난 월요일에 이렇게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신호를 대기 중이었는데 앞에 횡단보도에 예쁜 안전모를 착용하고 보호 장구를 착용한 아이가 킥보드를 타고 쌩하고 지나갔다. 엄청 신나보였다. 그런데 그 뒤로 그 아이의 것으로 99% 추정되는 가방을 들고 느낌상으로 세수를 하지 않아서 모자를 꾹 눌러쓰고 그 아이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쫓아가는 엄마로 보이는 한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확 들었냐면 ‘혹시 내가 하는 신앙생활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나는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보호하심 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내 인생에서 더 즐겁고 누리면서 살지?’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 라고 생각에 킥보드를 타고 나가는데, 뒤에는 내가져야 될 십자가를 대신 지신 예수님이 힘겹게 내 뒤를 쫓아오고 있는 모습, 그것이 나의 신앙생활이 아닐까? 고난주간 이다보니까 킥보드를 보고 별 생각을 다한다. 그 아이를 정죄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상황을 장악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세상살이가 너무 피곤하고 힘드니까, 내 신앙 수준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내 신앙의 연수는 그만큼은 안 되었으니까 라고 이야기 하면서 나 자신의 어려움에만 집중하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외면하는 삶을 어떻게 보면 너무나 이기적인 삶을 내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난 며칠 동안 그 생각과 고민을 해보았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제가 태신 자로 품고 있는 친구에게 이야기를 꺼냈다면 그 친구의 반응은 100% 이것일 것이다. “너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인생 다 즐기면서 사는 것인데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사냐?”고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왠지 우리는 세상을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지내셨을 텐데, 비도 오고 찌뿌등 하면 집에 가서 좀 쉬시지 굳이 이 안아주심의 본당까지 비를 뚫고 오셔가지고 예배드리려고 앉아계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참 세상 피곤하게 사십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에게 “세상 참 피곤하게 사십니다.”라고 인사는 안 하겠다. 굳이 피곤한데 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저는 이 피곤이 너무 좋다. 세상 사람들은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고민하고, 피곤하기까지 한 이 생활이 너무나 좋다. 물론 자꾸 이런 자꾸 고민을 하다보면 다크써클은 자꾸만 짙어지고 커지고 눈은 퉁퉁 붓고 어깨부터 시작해서 근육통은 한두 군데는 다 알고 있고, 굳이 안 가져도 되는 죄책감을 스스로 느끼면서 왠지 내 자존감까지 살짝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러한 삶,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행복할 수 있는가? 왜일까? 이 피곤을 넘어서서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이 짊어지시고 이 걸음을 걸어가시는 그분이 계시기에 나의 연약함과 나의 죄책감과 나의 허물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좌절하고 쓰러질까봐 그 짐을 대신 져 주시며 이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시기에 때로는 피곤하고 굳이 ‘그렇게까지 사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너무 행복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이 행복을 알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 고백을 함께 읽도록 하겠다. 베드로의 고백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게 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다.

-우리처럼 고민하고 피곤했던 베드로의 고백이다.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확신에 차 있지 않은가? 정말로 예수님이 주신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베드로는 영 가족들을 권면하면서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을 담아서 이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가 처음부터 이러했는가? 고백을 했는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더 느꼈겠지만 그는 실패한 제자이다. 폭 망한 제자이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오리지널 제자훈련을 받았고 그리고 우리의 제자 사역보다 훨씬 더 밀도 있는 훈련을 받았으며 3년 동안 예수님과 먹고 마시면서 정말 하나님과 함께 했던 그 임재를 누리며 함께 했는데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열정적인 순간에 그는 실패했다. 회복불가, 재생 불가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베드로전서를 이렇게 기록하면서 확신에 찬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인가? 오늘 말씀에 통해 예수님께서 실패자 베드로를 초대 교회 반석과 같은 사도 베드로가 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덮어주신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동시에 지금 이 시간 우리를 사랑으로 덮어주고 계신 그 예수님을 만나는 이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첫 번째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대제사장의 관저에 예수님이 끌려가 심문 받는 장면으로부터 이어진다. 아예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정해놓고 거짓 증인을 동원해가지고 이 야밤에 진행하는 불법 심문 그 현장에 이 베드로가 따라왔다.
 
*마가복음 14:54,
5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
-베드로가 어떤 제자였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제자였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세상의 강력한 권력 앞에 무기력하고 그 힘을 잃고 따라가시니까 가까이 있지 않고 멀찍이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간다. 사실 우리도 평소에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이렇게 늘 가까이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하지만 우리는 바람과는 달리 때로는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멀찍이 따라갈 때가 있는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된 환경에 압도되고 일상에 자잘한 그러한 유혹에서 결국에 넘어지고 마는 제 자신을 볼 때가 참 많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훈련 받고 살면 무언가 막 일어나고 영적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이 내 앞에 어떤 역사가 확 일어나게 해 주실 것 같은데 현실은 그래인 것이다. 그 현실 속에서 자꾸 무기력해지고 내게 다가온 그러한 저항들을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너무 강력한 벽처럼 느껴진다. 정말 성경에 다윗처럼 그 벽을 뛰어 넘는 그러한 제자로 살고 싶은데 그냥 그 벽에 낙서 밖에 못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세상 속에서 능력을 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가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우리 약함 속에 하나님의 강함이 숨겨져 있는데, 이 베드로처럼 우리도 눈에 보이는 강함은 강함이고, 강함이고, 약함이 그 강함 앞에 무기력하다. 그것을 느끼면서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같다. 이런 베드로를 보며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이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앞에 30절에서 보면,
 
※제자로서 자기 선생의 뒤를 따르는 것은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범한 실수를 경고 받고 있었던 터이므로 죄짓는 자 장에 뛰어들지 말고 어느 구석에 숨어 있어야 했다. -존 칼빈-
 
*마가복음 14:30,
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미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앞에 30절에서 이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3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기 때문에 이런 주석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오늘 감히 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의 주석과 반대되는 해석을 하고자 한다. 베드로는 그 자리에 가서 그 상황을 직면해야 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져야만 했다. 왜인지 오늘 현장으로 가서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본문 66절을 보자.
 
*마가복음 14:66,
66 베드로는 아래 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예수님이 심문 당하는 곳에까지 와서 그곳 분위기를 살펴보고자 아래 뜰까지 왔다. 그런 그에게 무언가 긴장감 느껴지는 그에게 군인이나 조사관이 와서 보고한 것이 아니라, 여종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베드로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마가복음 14:67,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왜 불을 쬐고 있었는가? 추워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 와서 혼자 뻘쭘하게 따로 서 있는 것이 눈에 띄니까 그 속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것처럼, 그 사람들 사이에서 불을 쬐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을 못했다. 불 앞에 있으니까 얼굴이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여종이 거기서 봤다. 너 혼자 있다. 너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평상시라면 이런 여종의 말에 웃기지 마, 화가 들 건데 그날따라 두려움이 그를 장악했는지, 이렇게 반응한다. 68절에 보면
 
*마가복음 14:68,
68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 새.
-베드로는 여종의 말을 부인한다. 부인한다는 것은 부정하다, 거부하다, 인정하지 않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더 이야기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웠던 제자가 그러는 것이다. 왜냐면, 이 정도 강도로 이야기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한 것이다.
 
*마가복음 14:69,
69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그 집요한 여종이 끝내지 않는다. 이제는 여종이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이 사람 그 사람이 도당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한가?
 
*마가복음 14:70,
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섬찟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봤냐면 학자들은 당시 이 갈릴리 억양이 독특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경상도 억양이 독특한 것처럼 이야기 하면 알아듣는 것이다. 아무리 베드로가 완벽하게 억양을 바꾸어 본다고 해도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는 모르겠어.” 라고 아무리 서울말을 이렇게 써도 표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까 어디까지 가냐면 71절에 보면,
 
*마가복음 14:71,
71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이 사람으로 지칭하고 부인한다. 이 표현을 봤을 때, 뭔가 가까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급의 부인을 한 것이다. 완전히 그 예수님의 사랑을 부인한 것이다. 여기 보면 부인의 강도가 강해진다. 처음에는 작던 죄가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커지듯이 “몰라, 나 이사람 몰라” 하던 것이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기 합리화가 갈수록 강도가 더해지는 것과 같은 특징이다. 이때 결정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72절을 함께 보자.
 
*마가복음 14:72,
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 닭이 두 번째 운다. 베드로는 이 닭이 두 번째 우는 순간 기억했다. 무엇을 기억했는가? 제자들이 같이 둘러앉아서 치킨을 먹고 있는 모습을 기억했는가? 닭이 우니까,,, 아니면 열병을 나았던 닭 도리 탕이 생각났을까? 비가 와서 다를 다운되어 있을 것 같아서 이야기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어떤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말씀이 기억되니 그 일을 그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닭 울음소리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 우리는 실수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를 할 때, 우리가 양심의 찔린 정도로 넘어가면 금방 쉽게 그 일을 저지르고 만다. 아주 쉽게 만성이 되어서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말씀으로 인해 내 마음과 자아가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런 회개를 하면 물론 다시 반복해서 실수는 할 수 있겠지만 이전처럼 쉽게 넘어지지는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에는 그런 능력이 있다. 베드로에게는 자신의 잘못이 말씀에 비추어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는 완전한 회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만약에 이 일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어땠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에, 그나마 칼을 빼서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베었던 사람이 베드로 아닌가? 제자가 다 모여 봐도 다 같이 도망간 처지에 ‘그나마 칼을 빼어서 귀를 베었던 사람은 손 들어봐!! 그래 내가 그래도 제자 맞지.’ 베드로의 혈기가 쉽게 죽었을 것 같지가 않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씀에 완전히 자기 자신을 비추어 자아가 산산이 깨어지고 부서진 베드로는 회개의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낮아지려고 해도 그 혈기 때문에 그 낮아지지 않았던 그 베드로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간다.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그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 요한복음 20장에서 부활하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였다. 예수님께서 못 박힌 손과 창에 찍힌 옆구리까지 직접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스승이 부활하셔서 돌아오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 것이다. 그 모습을 봤다면 베드로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사람들아 보아라, 로마군병도 어쩔 수 없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이게 베드로가 보여주어야 할 반응이 아닌가? 요한복음 21장 3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21:3,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음에도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철저한 낮아짐을 통해 지금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베드로의 이 실수는 예수님의 그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베드로가 부인했을 때, 예수님은 “아니 네가 어떻게 네가?”라는 논란이 아니라, “네가 그런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너의 허물을 나의 사랑으로 덮어주겠다.” 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예견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31-32절을 함께 보겠다.
 
*누가복음 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날에 마지막 만찬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에 저 이야기를 하신 것이다. 사탄이 가만 두지 않고 계속해서 이 제자의 길을, 이 제자 도를 포기하도록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지만 누가 기도했는가? 예수님이시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부터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리고 사탄이 그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하는 순간 베드로와 사탄을 막아서셔서 “내가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라.” 라고 하시는 그 예수님, 이 예수님의 계획 속에서, 사랑 속에서, 예수님은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참으로 돌이키게 하는 것을 이미 예고 하셨다. 지금도 사탄과 우리 사이를 막아서셔서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 그 예수님을 이 저녁에도 의지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기도와 당부만 하신 것은 아니다. 이 기도와 당부에도 완전히 바닥을 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어진 베드로를 찾아가신다. 그리고 또 물고기를 못 잡고 있는 그에게 처음 만난 축복처럼 만선의 축복을 주신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주신 것을 알고 예수님께 헤엄쳐 왔을 때, 그에게 떡과 생선을 구워주신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 예수님이 생선을 굽고 계신 것이 아니라, 통닭을 굽고 계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도 잘 안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 하실 것이다. ‘베드로야, 이리 와라, 이놈이 그 두 번째 울었던 그 닭이다.’ ㅋㅋㅋ!!! ‘특별히 이 목살은 네가 먹어라. 이 목살을 먹고 죄책감에서 놓여나고 치유함을 받아라.’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는데 다들 비슷한 것 같다. 예수님은 저처럼 수준이 낮지 않으셨다. 다시 한 번 만선의 축복을 통해서 처음 그를 찾아왔던 것을 생각나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불가에 앉아서 헤엄쳐 왔으니 얼마나 춥겠는가? 몸을 녹이고 있는 그 베드로,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것을 생각했던 동시에 한 가지가 더 생각났을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할 때, 불을 쬐고 있었다. 그 불이라는 단어와 그리고 예수님이 그 생선을 굽고 있는 불과 같은 의도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나를 부르셨던 그곳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던 그 기억에 불에다가 생선을 구워서 베드로를 먹이고 계신다. 아픔의 불이 그에게 있어서 자꾸만 그걸 보는 순간 트라우마가 생각나는 그 불이 처음 그를 찾아오셨던 그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굶주림, 자신의 허기짐,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그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따뜻한 사랑의 도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르신다. “내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은 다른 것을 묻지 않으셨다. 저 질문만 세 번을 물으셨다. 그 질문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냐면 “베드로야 나는 네가 세 번 부인 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 나한테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지금도 사랑하느냐?”고 묻고 있다. 제자의 자격은 “네가 어떠한 일을 해내고 너에게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가 아니라 거기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또 실패할 수 있다. 네 제자라도 나를 부인할 수 있다. 무너질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네가 나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나?” “너 정말 지금도 나를 사랑하니?”
 
베드로에게 사랑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묻고 계신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십자가를 묵상하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십자가의 복음을 얼마나 많이 원하시는지, 밖에 나가서 전도를 몇 명 했는지, 너의 성화의 단계는 어느 단계까지 갔는지, 이러한 질문을 하시기 전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계신다.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이 자리에 저녁 ‘수요기도회’를 드리는 지체들보다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니? 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훈련, 사역훈련의 완성된 최종상태가 어떠한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완벽한 훈련 큐티와 완벽한 IBS, 완벽한 로마서 8장 암송? 아니다. 저는 이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 저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제일 사랑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처럼 순간순간 내 삶을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나의 삶의 부족하고 훈련의 마무리를 하면서도 나의 허물과 부족함이 여전히 나를 찔러 오지만 그래도 부족하지만 나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저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합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고하리라. 큰 은혜를 주신 예수 되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지난주일 설교 중에 담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세 가지 적용 중에 두 번째가 바로 이 내용이 아닌가? 주님을 더욱 사랑할 결심, 이 고백과 사랑의 결심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기 전에 내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예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우리 모두의 죄와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셨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마의 모든 부족함과 허물을 덮어주셨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증언하고 계신다. 나는 너의 처절하고 실패한 그 신앙생활, ‘네가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그 자꾸만 넘어지는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단다.’ 예수님은 아셨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에도,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순간에도 제자훈련 받고, 사역훈련 받고, 순장사역을 하고, 목사로 설교하는 이 순간에도 내 삶의 여정에서는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죄의 문제들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허물과 치욕까지도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베드로가 고백했던 것처럼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이 있는 줄 믿는다. 이 사랑으로 덮어주심이 우리를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베드로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에 예수님을 부인할 때와 동일한 곳인, 동일한 바로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그 예수님을 증거 한다. 진짜 사람 낚는 어부, 진짜 증인이 된 것이다. 우리 베드로의 사도행전 2장 설교에 마지막 구절을 함께 읽겠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 저는 이 사실을 읽을 때 전율이 일어난다. 세상 권력이 너무나 두려워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이 저 앞에 있는데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맹세하고, 거부하고, 부인하던 그 베드로가 그 세상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너희는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전에 부인의 상처가 저는 이때 완벽하게 치유되었음을 믿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그 죄와 허물, 신앙생활에서 자꾸만 넘어지는 그 처절한 실패와 무너진 삶을 이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사랑으로 덮어주고 계신다. 다시 그렇게 신앙생활 못한다고? 다시 이전처럼 뜨겁게 전도를 못한다고? 다시 이전처럼 뜨겁게 기도를 못한다고? 다시 그 예전처럼 사랑으로 못 섬긴다고? 이것은 사탄의 밀 까부르듯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도 사탄이 자꾸 그런 마음을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내가 왕년에 이렇게 신앙생활 잘했어, 내가 그때는 말이야 전도를 100명씩 했어.’ 예수님은 왕년에만 예수님이신가? 지금 우리 예수님이 아니신가? 나를 무너뜨리는 그 분만 바라보지 말고,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다시 바라보시기 바란다. 지금도 나를 사랑으로 덮어주셔서 다시 일어나도록 이 말씀을 통해 산 소망을 주고 계신 우리 주 예수님을 이 저녁에 더 깊이 바라보시기 바란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자리에서 누가는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고 닭이 울었을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라고 증거 한다. 왜 보셨는가? 세 번 부인했다고? 아니다. 다시 살리시려고, 다시 살리시려고 그가 이제 나가서 울고 쓰러지고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질 것을 그분은 아셨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살리겠다.’고 바라보셨다고 저는 확신한다. 오늘도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로 살려고 애쓰다가 쓰러진 여러분을 그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동일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고난주간 가운데서 나를 사랑으로 덮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마침내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하는 이 저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요약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내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삶으로 응답하는 자로 매일의 일상이 되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 주님을 얼마나 부인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부인하던 자리에 있던 부족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며 영 가족과 이웃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로 살아야 한다. 세밀하게 아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살아가 지금 이 시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삶으로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가족과 지체들을 그리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으로 덮어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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