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2월 14일) 제목: "예배는 새 생명의 특권입니다" 말씀: 에베소서 2:4-6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 ------
*에베소서 2:4-6, 4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저는 예배 아카데미이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한 번 주어진 인생을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항상 부족한 가운데 거하는 데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다윗의 고백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며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능력과 공급을 선포하고 취하고 그리고 누리며 살아가는 인생이 있다. 감옥에서도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의 권면은 바울의 삶과 똑 같은 것이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흘러넘치는 삶의 비결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이루시고 완성하신 그 안에서만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고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는자들에게는 이 예배는 더이상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특권이요,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고백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한다. 무화과 나무의 열매가 없고, 논밭에 식물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는데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라.' 바로 예배자들의 고백인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의 그 찬양이 오늘 저녁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래서 그런 비밀을 아는 자들이 수요예배 대면 예배에 나오신 줄 믿는다. 6절에 보면,
*에베소서 2:6,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안에서 하늘에 이미 앉히셨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거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이 육체라고 하는 집 안에 잠시 살아간다. 살아가면서 온갖 시험과 유혹 가운데서도 언제든지 예배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 임재 앞에 나갈 수 있는 놀라운 그 특권을 부여 받았는데 이 특권은 오직 새 생명을 가진 사람, 거듭난 사람, 바로 예배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인 것이다. 비록 우리의 삶이 연약하고 허물이 여전히 있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 안으로 계속적으로 들어가는 삶, 바로 그것이 예배의 삶이요, 새 생명의 특권인 것이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그 입술에 이런 고백을 한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 같이 빛나네.해 같이 빛나네!~~♩
-이 시인의 삶은 인생의 폭풍이 와도 여전히 빛나고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그 예수님,그분의 일점일획의 변화가 없으신 한결 같으신 그분, 어떤 때는 열을 받아서 실수를 했을 때도 여전히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그 주님을 또 다시 붙드는 바로 그런 삶이 바로 예배자의 삶이다. 그런 삶이기에 계속해서 그의 입술에서,
♩~지극히 놓은 위엄과 한 없는 자비를 뭇 천사 소리 합하여 늘 찬송드리네.늘 찬송드리네...배할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영광은 .푸레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우리의 육체는 나이가 들면서 시들지만 우리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 이렇게 고백한다.
*고린도전서 4장 16-18절 16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우리는 오늘 저녁에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를 보이신 크신 역사, 완전한 구원 안에 거하고 있음을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배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같은 영혼이 채워질 줄 믿는다. ㅁ바로 그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인줄 믿는다.
♣요약 우리가 예배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새 생명을 허락하셨으니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의 참된 가치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음과 우리의 삶을 예배자로 부르셔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보좌에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선포하며 붙들기를 간구해야 한다. 또한 부르신 그곳에서 예배자로 서야 한다.
한국 수출액이 일본을 추월하기 직전입니다. 지난 1월부터 9월 말까지 한국의 수출액은 5247억달러를 기록했습니다. 일본은 5585억달러입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338억달러 적습니다. 수출 격차가 역사상 가장 많이 좁혀졌습니다. 일본을 넘어설 절호의 기회가 왔다는 말이 나옵니다.
한·일 수출액 역전이 실현되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나올 반응은 극과 극일 겁니다. 수출 규모에서 우리가 일본을 넘어선 적은 없습니다.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약 40년 전인 1980년대 수출 실적을 보면 두 나라의 격차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수출액이 일본의 13.4%에 불과했으니까요. 일본이 세계 시장에서 날아다닐 때 우리는 걸음마 단계에 있었던 거죠.
2022년이 끝나기 전에 역전할 수 있다는 예측이 있습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 통상연구원에 따르면, 우리의 총수출액은 690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추세가 나쁘지 않습니다. 지난 9개월간 우리의 수출 증가율은 2021년 같은 기간에 비해 12.3% 증가했지만, 일본은 오히려 감소했습니다. 연말까지 우리는 늘고 일본은 줄어든다면 338억달러 차이는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9개월 실적으로 따지면 한국은 세계 6위입니다. 일본이 5위죠. 5, 6위가 바뀔까요? ‘월드컵 16강 진출’만큼 흥미진진합니다. 한국 무역(수출+수입) 스토리를 공부해봅시다.
올해 한국 수출총액 6900억달러 예상…일본을 추월한다면 세계가 놀랄 뉴스죠
수출은 많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라 안에서 많이 생산해서 나라 밖에서 많이 내다 판다는 뜻이니까요. 100만원어치보다 1억원, 10억원, 100억원어치를 파는 것이 훨씬 낫죠. 일자리를 얻고 소득을 올릴 기회가 늘어나고, 팔아서 남긴 이익으로 더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기계를 사고, 더 좋은 기술을 습득할 수 있으니까요.
땅에서 기름이 펑펑 솟아오르고 땅만 파면 광물자원이 쏟아져 나오는 나라라면, 기름과 광물을 팔아 필요한 것을 사면 되겠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산유국처럼 말이죠. 이런 것이 없는 우리나라는 무엇이든 만들어서 팔아야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부터 수출보국(輸出報國·수출로 국가에 충성한다)에 나섰죠.
그 결과 한국은 지난 9월 말 현재 수출액에서 세계 6위에 올랐습니다. 월드컵 16강 진출보다 훨씬 어려운 일을 이룬 겁니다. 만들어 팔 만한 것도, 능력도 없던 나라가 세계 6위에 올랐으니 말이죠.
1960년대 초 한국은 아프리카 케냐보다 못살았습니다. 연간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3만달러가 훌쩍 넘습니다.
출발은 참으로 미미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국가적 목표를 세우고 정부와 기업, 국민이 나섰습니다. 정부는 매달 수출 확대 회의를 열었고, 품목별로 나라별로 수출 실적을 점검했습니다. 1948년 1900만달러였던 수출액은 1964년 드디어 1억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당시엔 경이로운 성과였습니다.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했습니다. 13년 만에 100배 성장했습니다. 탄력을 받은 우리는 1995년 드디어 1000억달러를 넘어섰습니다. 2011년 처음으로 5000억달러를 뚫었습니다. 그해 우리는 수출과 수입을 합쳐 1조달러가 넘는 무역대국 반열에 올랐습니다. 6000억달러 고비는 2018년에 넘었습니다. 6000억달러 돌파는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네덜란드 프랑스에 이어 일곱 번째라고 합니다. 올해 말이면 6900억달러에 달할 전망입니다. 1948년에 비하면 도대체 몇 배나 커진 겁니까!
지난 2년간 세계 경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만 한국은 선방했습니다. 2020년 5125억달러로 2019년의 5422억달러보다 다소 내려갔지만 2021년 6444억달러로 훌쩍 뛰었습니다. 올해 추정치가 6900억달러라니 고무적입니다.
추정치가 실현된다면 우리는 중국 미국 독일 네덜란드에 이어 5위로 올라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지난 1~9월 수출액 순위는 중국이 1위(2조7004억달러), 미국이 2위(1조5446억달러), 독일이 3위(1조2405억달러), 네덜란드가 4위(7154억달러), 일본이 5위(5585억달러)입니다. 한국은 5247억달러로 일본 바로 뒤입니다. 연말까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이처럼 수출 실적이 좋은데, 문제는 수입입니다. 수출에서 수입을 뺀 무역수지가 중요한데요. 이게 흑자여야 좋습니다. 그런데 올해 400억달러 안팎의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내다 판 것보다 사온 것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적자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에너지 품목이었습니다. 3대 에너지인 석유, 가스, 석탄의 가격이 많이 오른 게 적자의 주원인입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가격 상승을 주도했습니다. 석유에서 895억달러, 천연가스에서 396억달러, 석탄에서 239억달러의 적자가 발생했습니다. 에너지 무역수지는 702억 달러 적자입니다. 그나마 수출이 잘 안되었다면 무역적자 폭은 더 커졌을 겁니다.
무역적자가 많아지면 좋지 않습니다. 들어오는 달러보다 나가는 달러가 더 많으면 달러 보유액이 줄어들게 되죠. 이것은 국제 금융시장에 좋지 않은 신호를 줍니다. 수출을 수입보다 더 많이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국내 생산과 소비만으로는 경제성장 못해…정부·기업 합심해서 세계시장 개척해야죠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과 무역해야 경제 성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투자와 소비가 국내에서 이뤄지는 내수(內需)경제만으로는 더 나은 나라가 되기 어렵습니다. 세계를 무대로 자동차, 반도체, 휴대폰, 철강, 배, 기계, 석유화학·섬유·전자제품 등을 많이 팔아야 합니다.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것들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생산하긴 어려우니까요.
무역을 잘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첫째, 좋은 기업과 훌륭한 기업가가 많아야 합니다. 세계 시장에서는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자기 제품을 들고나옵니다. 이것을 사는 측은 가능한 한 좋은 제품을 최대한 싸게 사려 하죠. 이런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기업은 세계무대에서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수출을 많이 하고 잘한다는 것은 이런 기업이 많다는 겁니다. 무역 강국을 보면 이 점은 분명해집니다. 미국, 중국,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은 말 그대로 한가락 하는 국가들이죠. 혁신적인 기업가도 많을수록 좋습니다. 척박한 한국에서 자동차산업을 일으키고, 반도체산업을 키우고, 철강과 조선(造船) 사업을 만든 사람들은 모두 혁신적인 기업가였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기업가 한 사람이 한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업가의 존재는 중요합니다.
둘째, 기업과 기업가들이 자유롭게 경제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이 중요합니다. 우리 정부나 압력단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기업과 기업가의 경제적 자유를 제한하거나 규제한다면, 그런 규제나 제한이 없는 다른 나라의 기업, 기업가와 경쟁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납덩어리를 달고 뛰는데, 다른 나라 기업들은 그렇지 않다면 경쟁의 결과는 뻔합니다. 지금 많은 나라가 좋은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세금을 깎아주거나, 토지를 장기간 무상으로 사용하게 도와줍니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가 미국에 공장을 짓는 이유입니다. 미국이 큰 소비시장인 것도 물론 그 배경이지만요.
셋째, 법과 제도도 중요한 변수입니다. 법이 갑자기 바뀌거나, 없던 제도가 느닷없이 생긴다면, 기업은 계획을 세우기 어렵습니다. 갑작스럽게 세금을 올리거나, 법정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최저임금을 크게 올리는 법과 제도의 도입은 기업의 생산비용을 높입니다. 이것은 생산과 무역 활동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합니다. 특정 산업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거나, 그동안 해온 사업을 못 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넷째, 정치적 안정과 평화로운 노사 관계도 핵심 요소입니다. 한 나라에 정치적 격변이 잦으면 무역을 안정적으로 하기 쉽지 않습니다. 쿠데타가 나고, 내전이 나고, 권력투쟁이 폭력으로 치닫는 나라의 기업과 무역 계약하지 않을 테니까요. 파업이 잦은 나라의 기업과도 거래하기 어렵습니다. 파업으로 납품 기한이 늦어지면 상대방은 손실을 봅니다. 공장을 자주 멈추는 회사는 생산을 잘할 가능성이 낮죠.
다섯째, 정부가 시장경제 친화적이어야 합니다. 정부가 기업에 적대적이거나, 노동자는 늘 약자라는 관점에서 노동자 편만 드는 정책을 편다면,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신나게 뛰기 어렵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정말 기업하기 힘들어진다면 아예 나라 밖으로 기업 자체를 옮기려 할 테죠.
정부는 대신 많은 나라를 대상으로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기업에 시장이 열리도록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야 합니다. 한때 적대적 관계였던 베트남과 2015년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두 나라 교역액은 지난 10월 말 현재 745억달러에 이릅니다. 한국과 교역하는 수많은 나라 중 베트남이 우리에게 가장 많은 무역흑자를 안기고 있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외국 속담이 있습니다. 경제가 잘되려면 정부, 기업, 국민이 합심해서 잘해야 합니다.
*사무엘상 17:45~47,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ㅡㅡㅡㅡㅡ
▶김정우 목사님(한국신학정보연구원장,전 총신대학원 교수님)-초빙 -할렐루야!!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대림절은 ‘어드벤트’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어드벤트(Advent)란 ‘오신, 출현’ 이란 뜻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사람의 옷을 입고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고 사모하고 준비하는 영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절기이다. 우리는 지난 만 3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참으로 대 환난을 겪은 것 같았는데 그래도 오늘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로 주시고, 평화 주시고, 기쁨 주시고, 사랑주시길 간절히 사모한다. 옛날 옛적에 동방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는 그 별이 이번 성탄 기간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다시 뜨고, 베들레헴의 목자들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평화로다.” 하는 그 찬양 소리가 우리에게 다시 들리는 예배가 되기를 축원 드린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스토리이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에 보면, 주일학교 선생님께서 톰에게 “톰, 예수님의 첫 두 제자의 이름이 무엇이지요?”라고 물었는데 톰은 그 때에 성경구절을 2천개를 외운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답을 쉽게 할 줄 알았는데 톰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다윗과 골리앗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윗과 골리앗은 성경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성경에서 다윗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등장하고 있다. 다윗은 목동이고, 효자이고, 시인이고, 수금을 잘 타는 자이고, 음악 치료사이고, 용사이고 왕자의 절친이고, 공주와 애인이고, 무엇보다도 남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을 통합하고, 동일한, 경건한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실 백 가지 얼굴을 가지고 사람이고, 성경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 가운데서 한 사람이다. 그래서 정말 다윗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가를 알기 쉽지가 않은데, 그럼 다윗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어떤 사람일까? 다윗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하나님과 뜻이 같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사무엘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고 사도 바울도 다윗이 하나님 마음과 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네가 바로 그다. 나는 중심을 보는데, 이 아들이 바로 그다.” 라고 하나님께서도 친히 증거 해주셨다. 원래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고 깊어서 잘 볼 수가 없는데,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다윗이 네 마음에 맞는 사람이다. 나는 다윗과 함께 갈 수 있다. 다윗과 나는 너무 잘 통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바로 이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큰 스토리인데 여기서 다윗의 네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I. 다윗에게는 거룩한 동기(motivation)가 있었다. *사무엘상 17:23, 23 그들과 함께 말할 때에 마침 블레셋 사람의 싸움 돋우는 가드 사람 골리앗이라 하는 자가 그 전열에서 나와서 전과 같은 말을 하매 다윗이 들으니라. -다윗이 이새의 심부름을 전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서 엘라 골짜기를 따라서 내려왔을 때, 그때에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참 모습이다. 여기에서 들었다는 말은 그냥 흘러들었다는 말이 아니고, 제가 아내 말을 들을 때, 그냥 흘러 들은 것이 아니고, 고도로 집주해서 듣고 몰입하여 들었다는 말이다. 다른 군인들은 이미 타성에 빠져가지고 골리앗의 말을 그냥 흘러갔는데 다윗은 유심히 들었다. 다윗은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들었다. 다윗이 무슨 말을 들었는가? 골리앗의 말을 들었다. 골리앗이 많은 말들을 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말을 했는데, 골리앗의 말은 바로 이스라엘을 모욕(侮辱)하는 말이었다. 10절에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상 17:9-10, 9 그가 나와 싸워서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길 것이니라. 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골리앗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이스라엘을 모욕했다. 모욕을 듣는 것은 참 어렵다. 모욕이라는 것은 사람을 놀리는 것이고, 골리는 것이고, 내 약점을 후벼 파는 것이고, 결국은 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고, 모욕은 한 대 쥐어 막는 것보다 훨씬 감당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모욕(侮辱)을 들으면 내 인격이 파괴(破壞)되고, 지속적으로 모욕을 들으면 학교도 가기 싫어지고, 일도 하기 싫어지고, 무기력해지고, 그냥 죽고 싶고, 너무나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리고 이 모욕의 상처는 평생 가는 것이고, 아물지가 않는다. 골리앗이 계속해서 모욕을 하는데, 사울도 들었다. 사울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늘 25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25, 25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그들은 계속해서 모욕을 들었다. 모욕을 느끼고 있지만 얼어붙어 있고 무섭다고만 말을 하고 있다. 마치 너무나 두렵고 무서워서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타조처럼 이스라엘 군대들이 무력해졌다. 우리말로 말하면 다 봉이 되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사무엘상 17:26,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26절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첫 번째 말이다. 다윗의 첫 번째 말은 “이 오랑캐 같은 자식이 어떻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군대가 계속해서 모욕을 들으면서도 이놈만 잡으면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 수 있는데, 거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데, 다윗의 관점은 어떻게 살아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에 있었다. ‘살아있는 하나님이 군대’라는 이 표현도 다윗이 처음 하는 말이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셨다. 사울과 그의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이론적으로 살아계시고, 교리적으로 살아계셨는데, 다윗에게는 생생하게 살아계신다. 그의 몸속에, 뼈 속에, 삶속에, 인생 속에 체득되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의 산 경험이었다. 어떻게? 그래서 다윗의 말이 너무나 진지하고 권위가 있는 것 같고 힘이 있어서 드디어 다윗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 왕에게로 데려 갔더니, 다윗이 사울 와 앞에 가서도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36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36,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에게는 날마다 그냥 유대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지만 그 양을 키우는 현장 속에서 무게를 연습하지도 않았고, 바디빌딩도 안 했지만 살아있는 그 현장 속에서 하나님이 체험되었다. 다윗의 동기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는 모욕을 받을 수가 없다. 다윗은 양을 치면서도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 45절에 보니까, *사무엘상 17:45,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의 마지막 말이 되겠다. 결전을 앞두고 말하고 있다. 다윗 믿음의 핵심적 고백이 되겠다. 모욕(侮辱)과 수치(羞恥)를 당하고 있는 바로 그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왜 다윗인가? 다윗은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고 있다.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에게 뛰어나갈 수 있었겠는가? 목숨을 던지지 않고는 어떻게 골리앗하고 싸울 수 있겠는가? 골리앗 앞에 나아간 이유는 그에게 동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능력이 많고 출중해도 동기가 없으면, 자신을 발휘할 수가 없다.
*아이작 뉴튼이 한 말이다. -우리가 가져올 변화는 우리 속에 있는 동기의 힘에 정비례한다.- 나는 왜 공부를 못 했을까? 동기가 없어서, 동기만 있었으면, 한국 사람만큼 아이큐가 좋은 사람이 없는데 왜? 공부를 못했는가? 동기가 있다면 우리는 산도 넘고, 바다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동기가 무엇인가? 깊은 내 속에서 늘 끓어오르는 동기가 무엇인가? 다윗은 “주님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고 한다. 주님은 살아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너무나 영광스런 이름을 가지고 계셔서, 그 이름이 모욕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고 여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빌려 표현을 한다면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우리 주기도문의 첫 번째 문장이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고 영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우리의 강력한 동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가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어떻게 이 연약하고 작은 나를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 영광을 받을 수 있는가? “내 직장에서, 내 직업에서, 내 은사 속에서, 내게 주신 생명의 날 동안,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이것이 다윗의 동기였다. II. 다윗에게는 미션(mission)이 있었다.
*사무엘상 17:29, 29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 앞에 강력한 강적이 나타났다. 바로 그이 형님인 엘리압이었다. 엘리압은 그 집에서 제일 큰 자였다. 다윗은 가장 작은 자였다. 엘리압은 다윗을 보고 갑자기 화를 내었다. 그리고 꾸짖었다. “야 꼬맹아, 들에 있는 양들은 누구에게 맡기고 여기에 와서 전쟁을 구경하려고 하느냐?” 라고 한다. 마치 양떼 같은 이 꼬맹이 다윗을 조롱(嘲弄)하고 있다. 형님이... “너의 완악함을 안다. 너는 늘 무모한 자식이야. 건방진 자식이야, 뻔뻔스러워, 왜 이렇게 자꾸만 주제 넘는 짓을 하려고 해, 그리고 늘 충동을 잘 당해, 전쟁은 어른들이 하는 것이니, 빨리 집에 가서 아버지 양이나 키워. 어디 양 냄새나는 것이 이 거룩한 전쟁터에 나타났니? 너는 막내지, 키도 작지, 군사학이나 공부한 적도 없지., 학력도 없지, 너는 주님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된 놈이야.”라고 형님이 이야기 한다. 형님이 골리앗보다 더 힘들다. 이런 형님과는 싸울 수가 없어서, 다윗이 농담을 한다. 아주 짧게... “형님,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이유라는 것이 일이다. 말도 못하겠습니까?”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라고 이유가 없겠냐고 한다. 이것이 이 중요한 일이 아니겠냐고 한다. 미션으로 번역으로 하면, “이것이 미션이 아닙니까?” 다윗은 늘 미션을 가지고 살았다. 아버지가 맡긴 양떼들을 너무나 잘 돌보고 아버지의 말씀과 아버지의 심부름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하는 그리고 아버지가 증표까지 받아오라는 것까지 확실하게 한다. 요즘 이런 친구를 찾아볼 수 있을까? 이런 책임감이 다윗에게 있었다. 다윗은 자발적이고, 즉각적이고, 부지런했고, 책임감이 투철하고, 다윗의 마음속에는 ‘내가 무슨 일을 하던지 온전하게 해야지.’ 마치 온전 론으로 살고 있는 다윗을 본다. 다윗에게는 목장과 전장이 구별되지 않았다. 목장이 전쟁터이고 목장이 전쟁터였다. 장소는 달라도 늘 미션은 동일했다. 사랑의 교회 식으로 말하면 다윗은 ‘일터선교사’이다. 일터도, 미션도 분리가 되지 않는다. 엘리압은 일터는 일터이고, 미션은 미션이지, 라고 한다. 다윗은 그렇지 않다. 늘 미션이 있었다. III. 다윗은 목자의 심정(Shepherd's heart)을 갖고 있었다.
*사무엘상 17:33. 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무엘상 17:36,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이제는 목자의 마음이 사울 왕 앞에서 진술되고 있었다. 다윗의 말에는 신중함과 예의와 확신과 위엄과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드디어 사울 왕 앞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려면, 사울왕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사울 왕이 다윗을 내어 보내려고 하면, 사울 왕이 다윗에게 설복(設伏)이 되어야 한다. 왕의 마음은 마치 깊은 보의 물과 같다고 해서 왕의 마음을 우리가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럼 다윗이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해야 될까? 사울은 다윗을 보자마자, “너는 할 수 없어.” 엘리압과 똑 같은 말을 한다. “너는 어리고 골리앗은 어린 시절부터 용사야, 전쟁의 용사야, 골리앗은 철저하게 훈련되었어.” 맞는 말이다. 사실이다. 사울의 프레임과 엘리압의 프레임과 같다. 둘 다 사실을 잘 보는데, 믿음의 프레임이 없다. 그러자 다윗이 무어라고 대답을 하는가? “우리의 밥입니다.” 성경은 인용하지 않았다. 그때 다윗은 사실에 대해서 사실로 대답을 했다.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자 않고 분석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이 아버지 양을 지키고 있을 때, 목양을 하고 있을 때, 현장 속에 있을 때를 말하고 있는데, 그 때 나는 사자와 짐승과 곰과 붙은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사자하고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이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야수들과 싸웠는데 대표적으로 싸운 것이 사자이고, 그리고 곰이다. 야수들과 싸울 때마다 다르게 싸워야 했을 것이다. 이 야수들, 강한 짐승들, 맹렬한 짐승들, 자기 새끼를 위해서 먹을 것을 꼭 챙겨야 되는 굶주린 이 야수들, 야수들도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덤비고, 인정사정없이 먹으려고 덤볐을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다윗은 여러 목자들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홀로 싸웠다. 짐승을 잡을 때 수염(鬚髥)도 잡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운 짐승들과 싸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새끼 한 마리를 위해서 싸웠다고 한다. 한 마리... 다윗은 자기 양도 아니고, 아버지의 양이다. 아버지 것이다. 아버지의 먕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웠다. 그 때 아버지 양의 한 마리이지만 내가 건져 냈다고 한다. 그래서 일어나서 으르렁 거릴 때, 사투를 벌일 때, 내가 따라가서 건져내고 잡아서 쳐 죽였다고 한다. 다윗이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적용 골리앗도 이 짐승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간증에 있어서 사실은 생생한 체험보다 더 중요하고 더 놀라운 것은 37절이다. *사무엘상 17:37,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싸운 것 같지만 다윗도 죽을 고비를 수없이 당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내었다. 정말 다윗도 죽을힘을 다해 수없이 다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건져냈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양이다. 주님의 나의 목자이시다. 내가 양 한 마리를 위해 애썼는데 이 양 한 마리조차 내가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렇게 목숨 걸고 싸웠는데 사실은 나도 수없이 나도 죽을 뻔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건져내셨다. 내가을 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건지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양이다. 주님이 나의 목자이시다. 내가 양을 건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건지신 것,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내 실력과, 내 용기와, 내 기백과, 내 지식과, 내 기백과 내 기술로서 이 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 나를 건져내셨다. 시편 23편 4절에 보면, *시편 23:4, 4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다윗이 살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하고 무언가 다윗이 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뭉클한, 또 다윗 마음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진짜로 함께 계시구나. 늘 함께 계시구나, 이놈과 싸울 때도, 저 원수와도 싸울 때도, 계시구나.” 이게 쌓인 것이다. 믿음은 이런 체험들이 주님을 위해서 싸울 때, 쌓여가는 것이다. IV. 다윗은 비전(vision)이 있었다.
*사무엘상 17:45,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골리앗과 싸우는데 골리앗이 다윗을 저주하면서 나왔다. 없인 여겼다. 이 신들을 저주하며 없이 여긴다. 골리앗은 완벽한 방어체계를 갖고 있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머리에는 놋 투구와 가슴에는 어린 갑을 다리에는 놋 경갑을, 그리고 그 앞에는 큰 골리앗은 거구였다. 골리앗의 전신을 커버하는 모습으로 나왔다. 마치 아이언도구로 자신을 완전히 방어한 모습이다. 그리고 칼과 창과 단창을 공격무기로 가지고 나아왔다. 이런 골리앗에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나아간다. 고 한다. 이 표현도 성경에서는 처음 나오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는 사무엘에서 처음 나오지만 ‘내가 만군의 여호와 이름’이라는 이 말은 골리앗에게 처음 만군의 하나님이었다. 천군을 의미한다. 천상에 있는 군대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두 군단이나 더 되는 내가 군대를 못 부를 줄 알았느냐? 로마의 군단은 5860명 되고 모든 것들이 다 있는데,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내가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늘 사는 것처럼,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에게 늘 하나님은 실존의 하나님이시고, 그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우습게 보여도 주님의 지상 군대이다. 이것을 사울과 그의 군대는 몰랐다. 다윗은 알고 있었다. 다윗은 이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비전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사무엘상 17:46,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사울의 전투에서 이루어지는 엘라 골짜기에서 이루어지는 조그만 싸움이었지만, 다윗은 이 싸움이 온 세상이 듣게 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장차 중요한 영적 교훈을,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다윗은 글로벌 시각을 가지고 있다. 주님의 명성이 온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적용을 한다면, 열국들이 우리를 볼 때, 와! 대한민국은 복음으로 복 받은 나라구나. 한국에는 아직도 교회가 살아있구나. 예내가 살아있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미션이 있구나, 비전이 있구나. 온 세상이 알게 되리라고 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이 무리는 바로 우리 공동체, 싸우고 있는 우리 공동체이다. 우리 로칼 처치,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주님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 우리가 주님의 싸움을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내 칼도 내 창도, 우리에게 힘은 언제 생기는가? 나를 부인할 때, 주님을 긍정할 때, 우리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긍정으로 전쟁의 승패는 주님께 속했다. 이게 바로 요나단의 고백이었다. 요나단도 블레셋을 쳐서 이길 때, 여호와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한다. 믿음이 없는 군대는 사울의 군대처럼 수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늘 생생하게 살아 있는 믿음이 있으면, 다윗에게는 네 가지 동기가 있었고, 미션이 있었고, 목자의 마음이 있었고, 그리고 비전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윗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가?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서 골리앗이 죽었는가? 49절을 보면, *사무엘상 17:49,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그런데 어떻게 돌이 이마에 박혔을까? 골리앗은 완전한 놋 투구를 눈만 보이는 놋투구를 쓰고 나왔는데 어떻게 돌이 이마에 박혔을까? 이마에는 뼈인데 어떻게 박혔을까? 골리앗이 뒤로 쓰러지지 않고 앞으로 엎어졌다고고 한다. 이마와 정강이 바지와 발음이 같다. 다윗은 그 당시 물맷돌로 골리앗의 정강이 바지 사이로 쏘았을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엎어지자 골리앗의 칼을 뽑아서 죽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재미있겠다. ㅋㅋㅋ 그렇다면 우리의 골리앗은 누구인가? 골리앗은 유아독존이고 신성모독이고 바벨탑을 쌓은 자이고 인간의 교만과 오만한 자이고, 골리앗은 완전무장을 한 군국주위이고 전체주의이다. 우리 모두를 가난하게 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으려고 하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하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오늘 우리가 적용을 할 때는 우리에게도 골리앗의 모습이 있다. 오만하고 교만하고 나하고 다르고 나보다 약한 자들을 골려먹고, 모욕하는 내가 오만한 인간이 아닌가? 깨어지지 않는 인간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가운데 카르바조가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다윗의 손에 들린 골리앗의 머리는 바로 카라바조 자신의 그림이었다. 무기를 믿고 살고, 내 실력으로 자만하고 내 광기를 따라 살고, 하나님 없이도 내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고 하면, 우리가 골리앗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다윗처럼 되기를, 하나님의 마음을 합한 다윗처럼 되기를 사모한다.
다윗과 골리앗. [카라바조], 바로 내 얼굴 왜 다윗인가? 다윗의 동기와 미션과 목자의 마음과 비전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분명한 것 같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다. 다윗은 예수님 모형이고, 예표이고, 그림자이고, 예수님은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주가 되심으로서 진정한 다윗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둘 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둘 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그래서 우리도 늘 성령의 기름부음 받기를 사모해야 할 것이다. 둘 다 거룩한 동기가 있었다. 우리 주님의 이름이 내 실수 때문에, 나의 부족함 때문에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기도도,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늘 우리는 세속적인 동기, 자기중심적 동기를 이제는 좀 벗어버리고, 더 영적이고, 더 공적이고, 더 하나님 중심적인 동기가 우리 속에서 불탔으면 좋겠다. 이 동기가 날마다 새롭게 생산적이고 열매 맺으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둘 다 목자의 마음을 가졌다. 다윗은 목자로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웠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참 목자였다. 종말론적으로 장차 다윗이 오리라고 할 때,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이 표현들이, 다윗이 모델이 된 것이다. 예수님도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양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내가 목숨을 바칠만한 코즈가 우리 마음 속에 있기를 원한다. 우리도 목자의 마음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착한 양떼들, 식구들, 나보다 연약한 학우들, 사회의 연약한 자들, 교회의 성도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창조만물들, 목자의 마음으로 돌볼 수 있기를 축원한다. 둘 다 거룩한 용사로 싸웠다. 둘 다 적장의 머리를 베었다.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을 죽였다. 예수님은 사단의 무기인 죽음으로서 죄와 사망 권세를 폐하셨다. 우리의 날마다 우리의 은사를 연습해서 우리 생활전선에서 책임을 온전히 다하고 우리의 기술과 실력과 지식과 덕을 날마다 향상해서 오늘도 주님 편에 잘 살았구나! 하는 그래서 기뻐하는 거룩한 용사로서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란다. 둘다 미션과 비전이 있었다. 다윗에게 온 땅을 향한 비전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는 그런 비전을 가지셨다. 날마다 주님 닮아가자. 그리고 주님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한다. 우리 믿음의 실력을 쌓고 선행의 용량을 키우고, 더 선명한 높은 비전으로 주님과 교회를 세울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요약 우리도 다윗처럼 주님의 친구가 되고 용사가 되어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이 생생하시고 말씀하시고 운행하셔서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하며 우리의 마음을 다 씻어서 정화되어서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 다윗의 거룩한 동기(motivation)와 다윗의 미션(mission)과 다윗의 목자의 심정(Shepherd's heart)과 그리고 다윗의 비전(vision)을 닮아서 우리가 담대히 주님의 삶을 닮아가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란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와 민족에게만 국한된 하나의 지역 신이 아니라 온 우주의 통치자시며 만군의 주재자이심을 강조하는 하나님을 뜻한다. 만군의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이 무한하사 온 세계에 악한 자들을 징계하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대적들과 전쟁하신다. 다윗은 전쟁의 목적을 살아서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이 선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하고, 모든 일의 승패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좌우되며 전쟁을 통해서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창세기 22:1~5,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북한 교회에 있는 이름의 깃발이다. 준비해 주심에 감사하다. 우리의 소망과 열망을 담은 표현이다. 오늘 어디서 많이 듣고 보신 것들을 보신 것 같다 ‘통인헌신은 진심으로 영혼 섬김은 전심으로’ 이야기이다. 설교 제목이 “실망시지 않은 적 없으신 하나님”, 이것도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찬양의 가사를 좀 땄다. 사실 우리가 찬양을 할 때, 그 멜로디도 좋아하고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기도로 찬양을 하겠지만 가사가 이렇게 고백이 될 때, 찬양이 더 은혜로 다가온다. 아마 2000년 초반쯤 나오게 된 찬양이며 많이 불렀고 아마 이 찬양 부르면서 믿음의 고백을 담았을 때, 눈물 없이 부를 수 없는 그런 찬양 고백이 있었을 것이다. 저도 눈물을 흐르면서 부른 적이 있다. 혹시 지금 힘들고 어렵고 답답할 때, 이 찬양의 가사를 좀 상황 상 찬양은 하지 않고, 좀 가사를 띄어드리겠다. 기쁨으로 찬양 334장이다. 가사를 같이 읽어보자,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을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혹시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 실망하시고 아예 가사가 마음에 닿지 않는 분들은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신하고 그런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의 여정을 전체를 보겠다.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친 순종의 대표적인 성경의 사례인데, 그래서 세부적인 해석은 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의 인생의 전체를 다루고 싶은데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란에서 출발할 때가 75세이다. 제가 성경에 확인된 나이만 설명을 드리겠다. 우리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은 신앙생활 처음 시작한 것이 75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죽은 나이가 175세이다. 아브라함은 모태신앙이 아니다. 이삭은 모태신앙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지만 1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 받고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이삭이다.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시점이 오늘 본문인데 아브라함이 100여년 걸친 신앙 속에서 오늘이 언제쯤 될까를 생각해보면 아마 막연하게 예전에 설교 들었을 때, 이때 이삭의 나이가 17세이다. 라고 기억할 것이다. 여러 가지 유추가 있는데 해석은 하지 않겠다. 보통은 객관적으로 볼 때 15-37세이다. 어머니 사라가 죽기 전에 그 사이라고 여겨진다. 저는 대략 잡아서 이삭이 15-35세 중간인 25세 정도로 추측을 하고 말씀을 진행하겠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면 75세에 부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모든 여정을 거쳐서 한 40-50년 지난 다음인 오늘 시점이다. 아주 중요한 포인트이다. 기억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대략 한 50년 살다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처음 출발부터 오 신실하신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다고 그렇게 고백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 대부분도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고 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다고 고백하면서 신앙을 시작하시는 분은 거의 없다. 저도 그랬다. 오늘 아브라함을 통해서 한 번 보자. ※아브라함 부르신 나이 75세 생 마감 175세, 백 년 동안 신앙생활, (이삭 나이 평균 25세), *창세기 22:1,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셨다고 말씀하신다. 시험 받을 만한 기간이 지났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50여년이 지났다. 이제 아브라함을 한 번 테스트 할 때가 됐다. 이 시험하다를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 것이다. 이것은 유혹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결정적으로 점검해 본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는 한 단계 앞서서 설명을 드리고 싶다. 이 테스트는 기회를 준 것이다. 여러분과 제가 이미 이 기회가 주어져 있고 그 기회를 통과하고, 오늘 아침 이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너의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하라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주님,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데 이 테스트가 무엇인지를 성경이 설명해 주고 있는데 12절을 보겠다. *창세기 22:12,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하나님의 평가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가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께서 지난 50여 년 동안 그렇게 인도하셨다. 크게 두 가지로 정리를 하겠다. 하나는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땅의 약속 받고 갔다. 또 하나는 자손의 약속을 받고 간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은 실망은 기대감에서 출발한다. 내 기대감이 채워지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어 있다. 이 찬양의 고백처럼 설교의 제목처럼 실망시키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기대감을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기대감을 주셨는가? 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본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대감은 약속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주시면서 인도하셨다.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고,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땅을 준다고 하셨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기근이 생겨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 설명하지 않겠다. 그리고 부자가 되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기대감으로 왔다가 다시 실망으로 온 것 같았는데 다시 기대감을 가지고 가나안에 돌아오게 된 아브라함, 아들도 마찬가지다. 후손을 약속하셨는데 처음에 기대감이 있었다. ‘그래 나에게 후손이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면서 종이라도 아들로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안 되니까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이라도 후손으로 삼아야 하겠다고 하니 그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아들을 주시는 것이 이삭이다.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했다가 실망을 했던 아브라함이지만, 이제는 그 기대감보다 더 큰 은혜를 통해서 돌려주시고 기대감을 주시고 실망시키지 아니한 체험을 한 아브라함, 그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따라갈 수 있는 그 믿음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길 소망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는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I. 하나, 기대 이상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하실 줄로 믿는다. 아브라함의 50년의 신앙생활이 그 증명하고 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 증명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지 않으셨는가? 아브라함이 두 가지 약속을 받았던 것, 나에게는 어떤 약속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예수 처음 믿기 시작할 때, 잘 될 줄 알았다. 형통하다고 약속 받았다. 그래서 예수 믿기 시작하고 교회 다니기 시작했는데, 형통한 분도 계시지만, 일이 잘 안 되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래서 실망하셨을 것이다. 그 실망을, 그 기대감을 채워주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이제 고백할 수 있지 않은가? 세상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세상의 형통(亨通)함을, 예수 믿으면 그런 것이 나에게 자동으로 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런 것보다 더 소중한 하늘의 소망과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제는 세상 것은 좀 부족해도 하나님 앞에 실망하지 아니하고 결코 나의 기대감 그 이상으로 넘치는 은혜와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 주님을 높여드리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셨다. 할렐루야!!~`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 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 후회가 되는가? 처음에는 내가 제대로 가는 길인가를 혼돈하기도 했겠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세월을 지내보니까, 신앙생활 하고 보니까 아!! 새로운 삶이 이런 것이구나,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아래서 더 감사하게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결코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데, 혹시 아직도 하나님 앞에 실망스럽고, 낙심되고, 원망 섞인 고백이 나온다면 조금만 더 기다려 보기를 바란다. 조금 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가시는 그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이 50년 동안 하나님 앞에 훈련 받았던, 그 하나님이 열심히 아브라함을 이끌어 가시고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경험케 하셨던 그 하나님의 손에서 빚어갔던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조금만 더 성장하면 이 찬양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적 없으셨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안 주실 때도 있으셨다.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 응답이 안 되는 적도 있었지만 조금 지나놓고 보니까 그게 유익이었다. 그 때는 실망스러운 것 같았는데, 조금 지나보니까, 내 기대가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기대감으로 함께 하셨던 하나님, 응답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결국에 가서는 찬양하게 되고 눈물로 실망시킨 적 없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시간이, 그 날이 속히 임하게 될 줄 믿는다.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실망시킨 적 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발걸음이 되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또 있다. 두 번째이다. II. 둘,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실체를 경험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기적의 사람이었다. 3절을 보면, *창세기 22:3,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바로 순종을 한다. 그 귀한 아들을 독자를 제물로 잡으려고 한다. 그런 결단을 하게 된 이유를 창세기에서 설명은 안 하지만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 11:19a,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판단에는 이삭을 제물로 잡아 죽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분명히 이삭을 살릴 거야.’ 하는 믿음이 있었다. 우리로 표현하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어디서 나왔을까? 우리는 아브라함과 비교하면서 나 같은 신앙, 기가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아브라함을 칭찬하는 핵심 표현인데, 왜 이런 결단을 할 수 있고, 이런 순종이 가능했을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기적을 체험케 하시는 이런 결단, 이런 순종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저는 이것이 아브라함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우리가 생각하는 부활을 믿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해석이다. 이삭의 제물 사건, 순종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보혈 십자가를 예표 한다는 해석이 충분하지만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계시로라도 받았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이다. 이미 십자가를 통해서 경험한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고, 아브라함은 그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적어도 이삭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 아들이 살아날 것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을 주시도록 인생 여정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그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아브라함이 그런 경험을 통해 없던 데서 낳은 아들, 도저히 애굽에서 살아날 것 같지 않은 그런 상황 속에서 애굽에서 피신했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그 여정, 애굽으로 가긴 갔지만 오죽하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살아나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한 그 절망 속에서 오히려 부자가 되어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과,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해도 도저히 안 되었던 후손을 자기 몸으로 직접 낳을 수 있도록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이제 독자 이삭을 바칠만한 넉넉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갔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이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짧은 인생일지라도 많은 경험은 아닐지라도, 작은 기적의 연속 속에서 저는 기적을 일상으로 표현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우리 담임 목사님도 가끔 그런 표현을 하신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 기적은 한 번 만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적은 자주 일어나는 것이 기적이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할렐루야!! 왜 기적을 잊어야 되는가? 하나님을 잊어버려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고 그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테스트 하시고 기회를 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기회를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내 것을 포기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늘 아브라함의 모습이다. 물질을 붙잡고 있었다면 물질을 포기해 보아라. 되돌려 주시는 물질의 하나님의 법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로 저는 확신한다. 인생의 노후대책을 붙잡고 계셨다면 하나님의 노후대책의 기적을 한 번 맛보시도록 그것을 내려놓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자녀를 붙잡고 계시다면 그것을 내려놓음으로 말미암아 이 자리에 나와 있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기적을 경험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맛볼 줄로 믿는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내가 만든 우상들이 내려놓는 그 순간 하나님의 기적으로 바뀌어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아브라함처럼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는 순종하는 아브라함처럼 저와 여러분들 그렇게 바꿀 줄로 믿는다. 붙잡고 있는 건 내려놓는 은혜가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사실 오늘이 중요한 결론이다. 한 가지 더 대 제목을 보겠다. 화면을 참조해주길 바란다. III.셋, 약속(기도) 응답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게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응답의 때를 기다리는 게 믿음이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실 지금까지는 서론인데 짧게 결론을 내도록 하겠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제가 아브라함 인생 100년을 잠깐 말씀드렸다. 오늘 사건을 중심에 50년쯤으로 본다면, 앞으로 아브라함은 50년을 더 산다. 창세기에 기록을 놓고 보면 12장에서 시작한 아브라함의 사건이 오늘 22장에서 정점을 찍고 그 다음에 이삭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잠깐 아브라함에게 언급한 두 구절 정도가 있고 나머지는 이삭의 사건으로 진행이 된다. 아니 전반부 50년은 크게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하고 기적을 경험한 아브라함이 가장 정점을 이루고 순종한 그 테스트를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여러 가지 풍성한 은혜의 사건이 주어지지 않고, 그냥 침묵하다가 인생을 마감한다. 그가 기진하여 술을 다 하고 175세에 죽었다가 이후의 삶이다. 그러나 단 하나 이런 구절이 표현되어 있다. 창세기 24장 1절이다. *창세기 24:1, 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다. 근데 그 복이 범사에 복이다. 설명이 필요 없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이끌어 가신 하나님 마지막 기적을 스스로 경험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이 그 테스트를 통과한 이후의 삶은 그냥 한 구절이면 끝나는 것이다. 한 표현이면 된다.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이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의 인생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복이 범사에 임하였음을 간증하고 고백하고 그렇게 묵묵히 기다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한다. 보통 말씀을 묵상하면 이 정도 되면 아브라함이 이제 테스트를 통과하고 난 다음에 이삭이 막 자녀를 낳아야 된다. 가나안 땅에서 거부가 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여전히 후손의 약속은 없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 야곱이 몇 살이냐 하면 성경에 근거한 나이이다. 정확한 나이이다. 야곱이 15세 때 아브라함이 죽는다. 그러면 독자 이삭을 바쳐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 예비하신 은혜와 복을 경험했던 수풀에 걸려있는 그 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했던 아브라함이 이제 이 약속, 이 테스트를 통과한 다음에 이삭이 계속 자녀를 낳아야 되지 않는가. 우리 상식으로는 야곱이 열두 아들 낳았는데 사실은 이삭이 열 두 아들을 지금부터 낳아야 정상인데 50년 동안 이삭은 겨우 결혼해서 쌍둥이 야곱을 낳고, 그것도 서로 싸우면서 태어난 이상한 아들 그 야곱이 15살 될 때 세상을 마감한다. 그리고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단 한 표현 그에게 아브라함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다가 오늘 사건 이후에 50년의 핵심이다. 여러분 이 말씀을 각자에게 적용하고 기다리게 하시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내가 원하는 기대감과 다른 하나님의 때가 하나님의 역사가 이제는 아브라함이 초조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를 봐도 다급한 아브라함의 모습 실수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냥 묵묵히 저는 그렇게 거룩한 상상을 한다. 50년 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묵묵히 바라보았던 아브라함, 상황에 따라 일희일비하지 아니하고 이해가 안 되는 자녀의 축복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리지 아니하고, 15살 된 야곱을 보면서 인생을 마감한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 아브라함의 마지막 모습을 히브리서 11장 9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같이 보겠다. *히브리서 11:9,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살았다. 저는 이 히브리서 11장 9절 말씀을 보면서 오늘 말씀의 결과를 찾았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를 저는 이 말씀에서 찾았다. 아브라함의 이후에 50년의 인생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나그네 인생을 가나안 땅에서 잘 마무리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들을 체험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속에서 신앙생활 속에서,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약속과 저 멀리 보이는 기도의 응답들을 놓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또 다른 손길을 초월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묵묵히 인생길을 마무리하고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란다. 우리는 너무 급하지 않는가. 인생을 살면 살수록 신앙생활에 경험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 신실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묵묵히 기다리고 인내하며 나아가는 그런 신앙인의 발걸음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의 분단 역사가 이제 휴전선으로 말미암아 분단된 것이 내년이면 벌써 70년이다. 그 동안에 북한 선교다, 통일 선교다, 또 이제 최근에는 통일 대신에 이제는 평화를 써야 된다. 그래서 평화통일 단어 많이 쓴다. 시대에 따라서 개념들은 많이 바뀌고 상황에 따라서 강조점들은 달라지지만 교회는 우리 교회 늘 쓰는 기도의 제목이 있다.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 이것이 이 시대에 주님이 주시는 약속이고 모리아 산에서 순종했던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에 약속으로 임하게 되는 것을 저는 확신한다. 인내하고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소망한다. 사랑광주리가 8주년이 지나갔다. 오늘 감사의 예배이다. 관여하신 분들 기피하시는 분들 계시고, 피상적으로 들으신 분들도 계실 터인데, 세상의 환경은 늘 바뀌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고 순종하는 자들 기회를 주셨을 때, 그 기회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결단하고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이 지금도 지속되는 줄로 믿는다. 여러분, 문단의 아픔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지 않는가. 좀 넉넉히 가지고 있는 분들은 나누고 싶다. 그래도 나눌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 옆에 사는 사람 불쌍하고 어렵고 힘들면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마음이 있어도 도울 수가 없다. 여러분 따뜻한 밥 먹으면서, 맛있는 고기 먹으면서, 밥을 못 먹는 사람 고기 먹고 싶어 하는 사람 나눠줄 수 있다. 나눠주고 또 그렇게 살지 않는가! 혹시 내 자녀가 지금 먹을 것이 없어서 엄마 나 먹을 것 좀 주면 좋겠어요.. 할 때 그 마음이 어떤지, 우린 내가 못 먹어도 자녀에게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않는가. 그리고 줄 수 있다. 지구촌 어딘들 못 쫓아가겠는가. 필요하다면 달려간다. 어떤 분의 간증이 있다. 자기 아이가 선교지에서 힘들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 즉시 비행기 타고 날아갔다고 한다. 그 아이 위로해 주려고... 그게 부모의 마음이고 가족의 마음인데 실제로 얼마 전에 자기 딸이 두 살짜리 손자와 함께 그 것도 아픈 아이 먹을 것이 없어서 도와달라고 울면서 전화하는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찢어져 있는 엄마의 마음, 위해서 내려오신 분이다. 이유가 있을까? 주고 싶고, 줘야지. 그분의 탄식이 그러하다. 아니 얼마나 됐든 줘야 되는 거 아닌가. 내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굶어가고 있는데, 배고프다고 하는데 보내야 하는 거 아닌가? 보낼 방법이 없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지금도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고 침묵하시는 것 같지만 지금도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을 통해서 일하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가 못하는 것을 지금 사랑광주리가 하고 있다. 후에 보시면 소개가 나올 텐데 좀 마음을 모아 주시기 바란다. 아브라함이 자손이 번성하는 것 보지도 못하고 15살짜리 손자들이 서로 싸우는 것 보다가 인생을 마감해도 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믿음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의 고백을 드리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순종하고 결단한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유유히 흘러가고 약속이 흘러가는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보게 될 줄로 믿는다.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우리 인생을 포기해 보셨는가? 한 번 하나님 앞에 멋지게 헌신해 보셨는가? 모든 목회자들이 할 수 있는 표현 하나 저도 목사니깐 말씀드리겠다. 제가 80년에 1980년에 신학을 결정했는데, 그 때 정말 다 포기했다. 저는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제가 해 봤다. 내가 꿈꿨던 젊은 시절에 하고 싶은 것 다 내려놓고, ‘저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고백을 했다. 수십 년 전이니까 제가 얘기한다. 여러분 그렇게 한 번 해보시지 않겠는가. 목사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가 되라는 것도 아닌데 한 번쯤은 “내 인생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것 필요하다. 남은 인생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한 번도 자신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면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드리고 포기하겠습니다.” “주님 주권 속에 주님의 기적 속에 살아가겠습니다.”라고 한 번 외치고, 그렇게 고백하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인생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멋진 결단의 계기가 되기를 부탁을 드린다. 자녀를 한 번도 포기해 본 적이 없는가? “한 번 쯤은 내 자녀 아닙니다. 하나님 자녀니깐 제 주권도 제 사랑도 제 안타까운 애정도 다 내려놓겠습니다. 하나님 자유롭게 하세요.” 그렇게 내 아이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려드리고 포기할 때,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될 줄로 믿는다. 지난 주 주일 예배 마지막 우리 담임 목사님 찬양하면서 인도하실 때 좀 부끄럽지만 눈물 많이 흘렸다. 혼자 뒤에서. 마스크가 그래서 좋다. 그냥 누구도 모르는 것 같다. 혼자 눈물을 주르륵 흘렀는데 이런 가사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여러분, 우리 십자가의 길 걸어 보았는가? 순교자의 삶을 사는 자에게 순교자가 무언인지 아는가? 육신의 순교는 어렵지만 믿음의 순교는 가능하다. 조롱하는 소리 세상의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이 고백 한 번 해 보셨는가? 우리 다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악한 세상에서 더러운 세상에서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서 한 번 인생 단 1분이라도 단 1초라도 한 번 그렇게 살다가 ‘주님 만나고 싶습니다.’ 고백하고 내 생명, 내 헌신, 내 믿음, 내 사랑 주님께 드리리.~ 고백하면서 기도하고 새롭게 우리 인생을 출발하는 결단하는 이아침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이악한 세상에서 주님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길을 걷고 싶고 선교자의 삶을 살아보고 싶은 우리의 간절함,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놓치지 아니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거, 모든 것 주님 것이라 고백하고, 주님 원하시는 것 마음껏 내어드리고, 나를 포기하고, 주님의 초월적인 기적의 역사에 함께 올라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믿음의 4대가 피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의 비전을 가지고 벅찬 감격으로 나아가 통일시대를 향한 믿음보고를 통해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고 사랑광주리 사역을 위한 1만 성도의 기도가 헌신이, 속죄 제물로 자신을 드렸던 모세처럼 통일을 앞당기는 거룩한 제물로 사용되기를 소원하며 복음 안에서 하나 되고 통일의 마중물이 되기를 소원하며 모두가 평화통일과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 받기를 간구하자. -아브라함의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 브엘세바에서는 약 80Km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가혹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하나의 시험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장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이처럼 상상도 못할 어려운 시련 뒤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이 시련을 믿음으로 잘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기원 부목사님(사랑광주리 상임이사)
-‘사랑광주리’의 8주년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기도와 함께 후원해 주신 여러분께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통일은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순종으로 시작되고 여호와의 은혜로 마무리 될 것이다. 이민족이 통일을 이루고 북녘 땅에도 속히 배고픔과 병으로 인해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영혼들이 없는 날, 그리고 믿음을 지키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지하 교회의 성도님들이 자유를 찾아,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오늘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찬양을 하면서 두 개의 깃발을 흔들어 주었다. 하나는 로얄, 왕권을 상징하는 보라색, 그 색깔 바탕에 우리 사랑의교회 로고인 붉은 피, 보혈과 섬김의 심벌을 담았으면 또 다른 깃발에는 재건되어야 할 북한 교회의 이름들을 담았다. 만세를 외치며 왕 되신 하나님께, 왕 되신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영권이 한반도 구석구석에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깃발을 흔들며 찬양을 올려드렸다. 오늘 시간이 많이 없는 관계로 사랑광주리 사역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여러분 주보에 보면 사랑광주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내용을 담아서 넣었으니 무엇보다 기도해 주시고, 기도하며 후원해 주신 모든 영 가족들에게 감사드린다. 코로나 기간동안 잠깐 후원을 잊으신 분들은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시는 것을 대 환영한다. 많이 기도해 주면 좋겠다. 선물을 하나 씩 줄 것이다. 올리브 오일 발사믹이다. 왜 이 선물을 준비했느냐면 말씀을 아직은 못 드린다. 사랑광주리 후원자로 오시면 알게 될 것이다. 그 상황을 이행하시고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린다. 모리아 산으로 향하는 산상 기도회이다. 통일과 북녘 땅을 위해서 기도하며 마음을 담아 외치면 세 가지 기도 제목으로 기도하겠다.
*디모데후서 4:1~5,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ㅡㅡㅡㅡㅡㅡ
▶▶사랑의 교회가 일 년에 아름다운 날이 많이 있지만 오늘 저녁이 바로 그날이다. 오늘 저녁이 축복된 날이다. 오늘 저녁에 꽃다발이 가장 많이 오는 날이다. 안 가지고 온 분들은 가서 사오라. ㅋㅋㅋ!!!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길 원한다. 오늘 들어올 때, 오늘 화면에 에베레스트 산이 심상치 않았다. 독수리가 굉장하다. 어떠한가? 여러분은 하나로 보이지만 저는 세 개로 보인다. 오늘 우리가 21세기의 47기 제자 반, 44기 사역 반, 69기, 70기 전도폭발반이 다 이 시대의 독수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저 영상에 에베르스트 산이 나오는데, 제자 반 훈련, 사역 반, 전폭의 수료예배이다. 졸업이 아니다. 제자의 삶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가는 수료는 이 정서를 갖고 계속 평생 주님을 닮아가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는 이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함께 하고 이렇게 수료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잘되고 우리 교회가 잘 되어서 영적으로 균형 잡힌 하나님의 종들은 항상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나라 사랑이 같이 가는 것이다. 자 질문을 하나 하겠다. 설교를 많이 하지 않겠다. 인터뷰를 하겠다. 여러분, 무얼 받을 때 은혜가 많은가? 헌신할 때 은혜가 많은가? 헌신할 때이다. 어디에요? 전폭에서 헌신할 때 은혜가 많다고 말한다. 헌신할 때이다. 이게 올바른 답이다. 오늘 날 대속하신 예수, 날 자유케 하셨으니 내 몸과 마음을 주님 위해 평생 쓰게 하여 주옵소서.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다. 찬송 ‘성자의 귀한 몸’ ♬▷성자의 귀한 몸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버리신 그 사랑 고마워라. 내 머리 주 앞에서 조아려 하는 말 나 무엇 주님께 바치리까. 지금도 날 위해 간구하심 이 여튼 믿음이 아옵나니 주님의 참사랑 고맙고 놀라 와 찬송과 기도를 쉬지 않네. 주님의 십자가 나도지고 신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과 친절한 위로를 뉘게나 베풀고 하옵소서.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아멘♪~~ - 오늘 진짜 은혜는 헌신할 때 받는다. 그럼 어떤 헌신을 해야 하는가? 제자반 사역반 마치고 말씀으로 다른 영혼들을 섬길 때, 은혜를 받는다. 참으로 소중하다. 우리교회의 신앙적, 사역적 토대가 된다. 진짜 은혜는 말씀으로 다른 분들을 섬길 때, 은혜이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그러한 것이다. 찬송하자. !!~~토비새에 다 모이는데 칠천이든 몇 명이 모이든 은혜이다. 75년부터 제자훈련이 체화화 되었다. 편안하게 은혜이다. 이 시간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서 우리 삶을 같이 나누고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하고 머리만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을 겨냥해서 삶의 변화되는 축복이 있어야 한다. 진짜 축복은 헌신할 때이다. 우리에게 만 가지 은혜를 주심에 찬양하라. 신앙의 본질이 무언가? 신앙의 본질은 주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다 읽고 다 훈련을 받았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심정을 깨닫는 것 중에서 가장 절실하고, 가장 절박하고, 가장 간절하게, 가장 처절하게 깨닫는 성경이 오늘 디모데후서 4장이다. 디모데후서 4장은 바울의 마지막 유언 같은 장이며, 바울이 1차 수감되고,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좀 자유 함이 있었다. 2차 감옥에서는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곧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울은 지금 몸은 그렇지만 영은 맑고 청명하고 강력했기 때문에 오늘 디모데후서 4장 같은 이런 강력한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선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자. *디모데후서 4:1~2, 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예수 그리스도는 장차 오실 예수시며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 강력하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강력함이 선포되는 구절이다. 그다음 2절에는 너무나 명확한 말씀이다.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다. 물론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계시의 역사와 구원사적 전체 언약의 신학적인 바탕에서 나온 구절이다. 결국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말씀이다.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신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신구약 전체를 통해서. 여러분 구약 있는 내용들을 잘 해석을 하는 성경이 히브리서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누구인가? 미상이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라고도 하고, 요즘 현대신학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닌가? 한다. 또 바울의 제자인 아볼로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결사적으로 바울처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아볼로처럼, 이것을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목회자는 목회자대로, 다 적용될 수 있느 것이다. 사랑의 교회 44년의 역사를 말씀을 드리면 우리 교회에 모든 성도들과 제자 반, 사역반 모두가 목회자와 함께 말씀 사역을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는 대열에 끼어들어야 한다. 늘 말씀을 항상 힘쓰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주의 신실한 훈련 자들이 목회자와 함께 말씀 사역을 공유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순장님을 통해 다락방을 섬기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들은 신학교를 7년 9년을 다니고, 신학을 10년 12년을 해도 성경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의 교회는 1년 2년 훈련을 마치고 그것을 가지고 말씀을 인도 하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그럴 때 저는 “목사님, 우리 교회는 신학적으로 성경 마니아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 관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말씀을 가지고 말씀 사역의 고귀하고 존귀한 그 사명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훈련된 성도들을 통하여 많이 알고 똑똑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단 인생에 삶의 앞으로의 여정 가운데, 말씀을 통하여 참된 변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한다. 말씀을 통해 변화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며 그리고 내가 받는 변화의 은혜가 감사해서, 또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섬기고 또 말씀으로 섬김으로 말미암아 변화와 축복의 근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 많이 아는 게 목표가 아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삼천 여개의 다락방에서 영혼을 섬기는 이 일이야 말로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목표인줄 믿는다. 우리는 신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닌 말씀으로 영혼을 섬기는 사역을 하는 것이 소중하다. 이것이 캐돌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차이이다. 우리가 오리지널 기독교이다. 우리가 오리지널 크리스천이 되어야 한다. 카돌릭은 이 말씀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누가 해석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절대적인 라틴어라든지, 신학적은 바탕이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 요한 캘빈이 영국 교회들이 변화 받아서 은혜를 받아서 이 말씀을 가지고 다른 영혼들을 섬길 수 있다고 보통 언어로 번역을 한 것이다. 수많은 번역가들과 같이 은혜를 나누고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 자체가 능력인 줄 믿는다. 강단 위에서 다 귀하지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로서 우리의 어떤 역할이 있고 영적 사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가지고 영혼을 섬기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전문성을 가진 것이 아닌 기도와 말씀을 가지고 영혼을 섬길 수 있는 이런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깨닫고 너무나도 절박하게 처절하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러면 어떻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기는가? 세 가지이다. *디모데후서 4:2,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⓵경책하며 ⓶경계하며 ⓷권하라. 첫째는 경책하라(Convince). - 경책은 영어로 컨빈스이다. 기독교 변증, 신앙적 의문사항 내용들을 차근차근 대답해야 한다. 주님이 왜 대강절에 주님은 왜 성육신해야 하나? 예수님이 몸을 입고 오시지 않으면 피를 흘릴 수가 없다. 몸을 입고 와야지만 피를 흘리실 수 있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에 그렇다. 피가 흘러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인간으로 오셔야 피 흘리기 위해서 무죄한 자로 인간의 몸이어야 한다. 인터뷰는 굉장히 즐거운 시간이다. 구약의 어두운 것들을 잘 설명한 것이 히브리서이다. 히브리서를 읽으면 구약 전체가 눈에 확 들어올 것이다. 그것을 다 읽으면 오늘 21세기의 정말 컨빈스이다. 경책(警責)이다. 둘째는 경계하라(Rebuke). -이 말은 어리버리 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의 습관이 덕지덕지 남아서 오염되어서 살지 말고, 육체이 소욕대로 살지 말고, 한 발은 육신의 소욕에, 한 발은 성령의 소욕에 왔다갔다 허우적거리지 말고, 해매이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중심잡고 살아라. 라고고 하시면서 엄히 경책한다고 하신다. 그래서 강하게 질책을 하신다. 아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아볼로 같은 바울 같은, 경책하는 은사가 제일 많은 사람은 나단 선지자이다. 죄를 지적하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우리는 좋은 의미에서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경계(儆戒)할 수 있는 축복을 주시길 바란다. 셋째는 권하다(?).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를 싸매어 주고 소위 바나바의 은사를 받은 자가 되어 위로를 해야 한다. 제가 이런 내용들은 왜 하는가? 왜 믿음의 모험과 믿음 보고를 하라고 하는가? 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어제 좋았다가 내일 안 좋고 오늘 안 좋다가 내일 좋을 수도 있는 것처럼 삶 전체가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것을 잘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경계하고 경책하고 권하는 것을 완벽하게 잘 하는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 이 수료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며 점점 높은 고봉을 향하여 달려가며 모든 사람들에게 권(勸)하고 훈련자 모두 한 분 한분 성령님이 인도하셔서 새롭게 하시고 능력을 물 붓듯 하시기를 소원한다. ♣요약 우리는 말씀을 전파하는 자 되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전도자는 항상 긴장 가운데 말씀 전파에 힘써야 하며 모든 일에 인내와 근신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또한 때로는 부드러운 권면으로, 때로는 강한 책망으로 귀가 어두워진 자들을 깨우쳐야 한다. 이러한 전도자로서의 사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는 말씀으로 영혼을 섬겨야 한다. 올 한 해 우리 교회에 평신도훈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한 해 동안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처럼 살기로 결단한 모든 훈련생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소원한다. 47기 제자반, 44기 사역반, 전도폭발 60,70기 모든 수료생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신 목사님들도 수고가 많으셨다. 모두가 영가족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