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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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짧은 시간이지만 말씀을 집중해서 하겠다. 우리가 살다보면 굴곡도 있고 낙심도 되고 어떨 때는 마음에 근심을 가질 때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은혜의 원천이 무엇인가? 여러분과 저는 어디서 부름을 받고 어디서 능력을 받는가? 어디서 힘을 얻는가? 자 오늘 제가 ‘신부된 주님의 교회’는 눈에 보이는 이 교회 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 자신의 삶도 그대로 같이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 그러면 교회 눈에 보이는 유형교회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주님의 걸어가는 교회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는가? 진짜 교회의 사랑의 강도가 내 생애의 방향과 완전히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정말 교회와는 어떤가? 우선 여러분들의 삶의 힘의 근원이 무얼까?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나는 어떻게 사랑하나? 나는 얼마나 교회를 사랑하나? 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는가? 나는 평생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가?
*골로새서 1:27,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세상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영적 비밀을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다. 그것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비밀이다. 오늘 성탄 새벽에 여러 이야기 보다도 성탄절 이후 새벽에 진짜 중요한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우리가 힘의 원천, 삶의 능력, 어떤 불가항력, 그것을 어디서 받을 것인가? 기도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삶의 진짜 비밀과 능력의 원천은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능력의 비밀이라는 것은 공통된 현상이 있다. 그것은 24절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 임재하소서, 그리고 난 다음에 신부된 우리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오니!~~우리에게 여전히 임재하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역사하여 주옵소서. 이런 찬양 가사도 있듯이, 그런 찬양 하는 사람들에게 공통된 현상이 있다.
*골로새서 1;24,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힘의 능력의 원천에는 삶의 수많은 굴곡 가운데서도 한결 같은 시종일관 하는 능력의 비밀은 무엇이냐면 내 속에 계신 예수님가 비밀이다. 그것을 깨닫는 자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현상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괴로움도 기뻐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위하여 기뻐하게 되는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울 수 있는가?, 주님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구원사역의 고난이 남았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사역은 완벽하시다. 그 구원사역은 완벽하시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운데 완벽성을 거처야 할 과정은 주님은 골고다의 고난도 겪으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욕도 당하시고, 어떨 때는 배고프시고, 수많은 짐들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여정 가운데 신부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교회를 위하여 감당할 짐들이 있다는 것이다. 남은 거룩한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고난은 고통당하는 것도 있지만 이게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분 오늘 나름대로 교회에 대해서 기준을 붙잡고 기도를 할 테인데, 여러분, 교회 생활, 여러 해 해왔을 것이다. 저는 우리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생활을 했다. 그러니까 제 나이만큼의 교회 생활을 한 것이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역사가 있다. 여러분 이 교회를 섬기면서 느끼는 것은 너무 힘드니까 그만 둘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우리는 끝까지 우리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는 것이다. 맞는가? 아무도 예외가 없다. 그리고 끝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교회생활을 해야 여러분들의 삶이 보람과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뭐가 잘못되어서 삐걱대어서 교회생활이 제대로 안 되고, 교회를 떠난다든지, 아니면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없다든지, 평생 주님 앞에 설 때까지 교회생활을 힘 있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회생활을 잘 한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여러분들을 알 것이다. 여러분 가정에 부부의 삶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나는 교회가 시끄럽고, 교회 생활이 은혜가 없고, 교회 생활이 축복이 없으면, 부부의 삶이나 가정이 아무리 좋아도 언젠가는 힘들 때가 있다. 그런데 내가 나가는 교회가 항상 은혜스럽고, 거기가면 감격이 있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주님이 함께 하신 것을 알고 기름부음이 충만하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의 삶이 좀 부족함이 있어도 언젠가는 해결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부족해도 교회생활이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으면, 주님의 교회가 축복이 되면, 언젠가는 우리의 삶의 어려움도 해결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주님의 교회는 늘 축복이 있는 줄로 확신한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의 눈을 여는 사람은 이런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은 끝까지 좀 부족해도 눈에 보이는 무형교회 기름부음 축복이 있는 줄 믿는다. 믿음의 능력, 믿음의 용량, 믿음의 기름부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나? 나는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교회는 어느 정도 교회를 사랑하는가? 아니 내 주위의 귀한 신앙의 선배들, 목회하지 않고 일반 교우들이라 할지라도 그분들은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는가? 제가 보니까 우리의 선대 어른들 가운데는 가족들보다도 어떻게 보면 자녀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했다 이게 좋다 나쁘다를 말하지 아니하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부족함이 있지만 ‘저는 저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마음이 항상 들었다. 나는 나보다도 교회를 더 사랑하고 있다. 제가 여러 가지 사역 중에 있지만 사역에 대외적은 데코레이션이고 진짜 중요한 것은 핵심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한 것이다. 나는 나보다도 교회를 사랑한다. 이런 마음이 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떻게 나 자신보다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 채우는가? 우리는 주님의 신부된 교회로서,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로서, 개인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줄 믿는다.
바울은 어느 날, 그가 바울 되기 전에 그가 다메섹에서 꼬꾸라져 가지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하신다. 이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직접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님은 교회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회와 주님은 동일하시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교회 사랑을 하는 사람은 성탄이 좋다. 이 성탄의 계절에 어떤 수많은 일들이 지나가더라도 이 성탄은 기뻐해야 한다. 나보다도 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더 사랑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축복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러분과 저는 평생 교회를 사랑할 교회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은 것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내 마음의 영적 고향인 주님을 평생 사모할 교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해외에서도, 우리가 어딜 가도, 그 교회 하나 하나가 또 시골 교회도, 그 교회 모두가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지금도 부친 교회에 가면 내가 평생 사랑하는 교회가 된다. 내수동 교회도, 미국 남가주사랑의 교회도 그렇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여러분, 섬기는 교회가 평생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평생, 우선은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생을 사랑하는 교회가 있으면 한국교회의 전체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될 줄로 믿는다. 한국교회와 선지자들을 막 뭐라 하고,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주위교회를 함부로 말하지만 우리는 평생 살아가는 교회를 사랑하고 같이 가슴 아파 해야 한다. 그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워야 한다. 그의 몸 된 교회를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도 기도의 제목이 되어서 나의 기도라고 여기고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이 교회를 나의 육체에 채우라고 하시는구나, 로 여기며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가 결단해야 한다. 성탄의 새벽, 주님의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교회를 우리 가정보다, 자신보다도, 이 교회를 더 사랑하는 평생이 되기를 소원한다.
♪예수님 임재하소서!♬
♣요약
성탄의 기쁨이 온 만방에 전해져서 주님의 빛으로 어둡고 후미진 곳에 비추어 주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우리는 걸어다니는 교회로서 주님의 자녀로서 헌신하고 봉사하며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첨예한 갈등은 사라지고 평화와 새 날이 그곳에 예수님의 사랑과 빛이 환하게 비추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모두의 교회의 전체가 사랑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사랑하면 믿음의 용량을 결정짓는다. 늘 교회와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제목: "나의 거처를 어떻게 예비해야 할까?" 말씀: 요한복음 14:1~4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안승훈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요한복음 14:1~4,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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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승훈 부목사님 -은혜를 사모하면 믿음 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한다. 여러분들께서 이 시간을 통하여서 회복을 넘어 부흥의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렇게 인사를 해보도록 하라. “집사님, 당신의 거처는 예비 되셨는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라. “당신의 거처는 예비 되었는가?” 자신 있는 분은 “예”라고 대답하시고, “아직 준비 중 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분도 계신다. 의식주(衣食住)의 3대 문제 가운데 우리가 의(衣)와 식(食)은 여러분들이 해결하고 오셨을 것이다. 옷 입고 식사하고 오셨을 것이다. 그런데 주의 문제는 주는 우리가 오늘도 해결되었다고 담대히 말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에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실제로 작년 말에 이런 결과가 발표되었다. 우리나라 중산층이 중간 가격에 서울에서 구매하려고 한다면, 20년을 꼬박 일하고 다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아야 가능하다. 라는 통계가 나왔다. 그 말인 즉슨 우리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입지 않고 20년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30년, 어쩌면 40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할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의 봉급을 집을 위해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 써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들이 “거처가 준비되셨습니까?” 하면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예”라고 대답하신 분들 가운데 “내 거처는 예비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내 자녀의 거처를 이제 예비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고민 중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예비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합니다.” 라고 하시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 거처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환영할 일이 없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말씀을 들어보겠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신 거처는 어떤 것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거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I.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시는 거처는 ‘아버지의 집’이다. a)우리를 위해 예비 되는 거처는 ‘아버지의 집’이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인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나면 새로운 거처를 준비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미 내 아버지 집을 나에게 집을 다시 주신다고 하신다. 제 명의의 별도의 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시는 그 집에서 살라고? 실망스러워 하는 성도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내 명의 다른 집을 주시겠다고 오늘 말씀하시는 것은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혹여 이것이 실망스럽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들어보라.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집’은 건물로 생각되는 그런 집이 아니다. 이스라엘에서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할 때,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한다. 아버지를 믿는 자들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내가 거처를 예비했다.”라고 말씀하실 떼, 첫 번째 특징은 우리가 거처하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공동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거하는 그 가족을 위하여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땅의 어떤 물리적인 땅과 집을 원하시는 분들께는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의미로 실제적인 건물로서 아버지의 집을 언급하실 때가 있었다. 그것이 언제였냐면, 바로 성전의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을 청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이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전 뜰에 가득했던 짐승들을 몰아내셨다. 그리고 이때, 예수님께서 예비하셨던 이 집이 바로 성전 독 체, 가운데 있는 성소뿐만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회랑들과 그의 딸린 많은 방들과 그리고 뜰들이 붙어있는 물리적인 집이었다. 이 집을 예수님께서 청결하게 하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만인에게 돌려주셨다. 이것은 모든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전에 예비 되어 있던 이방인의 뜰이라는 공간을 다른 이방인들이 볼 수 있도록 그곳을 점거하던 모든 것들을 치우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시는 거처 두 번째 특징이 나타난다. b) 우리를 위해 예비되는 거처는 ‘이미’ 마련되어 있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많도다. 이 ‘많도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집의 공간이 많다. 많으니까 그곳에 와서 한 곳을 점거하면서 살아라, 는 그저 많다는 수량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가 손에 쥐고 있던 과자를 떨어뜨렸을 때, 아앙! 울 때, ~ 그 아이를 달랠 때, “아주 많아”, 많아~~ 그 아이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어른으로서 많이 있어, 많다고 자랑하려고 수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너를 위해서 충분히 예비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위로의 말이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의 집이 예비 되어 있고, 이 많은 사람들이 예비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은혜를 이미 아시는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설교의 비밀을 다 아시는 분들이시겠지만 아직 나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여 좀 더 들어보고자 하시는 분들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필요를 하는 그것을 이미 충분히 예비하였다.’ 라는 음성을 들으시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만약에 이것이 충분하지 않으면 나는 솔직하게 말할 사람이야. 내가 너희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너희를 위로 하려고 많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너희를 위한 거처가 이미 많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많은 공동체가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고, 많은 방들이 주님의 거처가 이미 거할 곳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다면, 대체 왜? 그곳을 예비하러 가시는가? “내가 그것을 예비하러 가노라.” 라고 주님께서 선포하시는데, 예비하러 가시는 것은 사실은 준비되지 아니다. 우리가 이렇게 질문 드릴 수 있다. 그저 많은 사람이 다가오니까, 그 중에 한 명, 나 한 사람이니까, 오늘 주님께 와사 혹시 저를 위한 곳은 없나요? 이렇게 기도하면 “네가 누구더라, 이름을 좀 찾아보자.” “어 많이 있어 많이...너를 위한 공간이 많이 있어.” 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랴부랴 돌아가셔서 그 장소를 혹시 준비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가? 주님께서 그 장소를 예비 하러 가시는 곳에 이 장소가 이미 예비 되어 있다. 라는 반증이 드러난다. 제가 어린 자녀를 키울 때, 그 자녀가 스스로 정리 정돈을 잘 하지 못할 때, 아이들의 침실은 이미 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밤에 잠들 공간은 이미 있다. 그런데 이 아이를 편히 그곳에 재우기 위해서는 저는 이 아이에게 먼저 젖병을 쥐어주던지, 장난감을 잠시 쥐어 주든지, 잠시 아이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먼저 앞서 그 장소에 들어가서 이불에 있는 장난감들을 다 치우고 아이를 눕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를 위하여 이미 침실이 예비 되어 있더라도 그곳에서 뒤척이다가 아이는 깨어나기 마련이다. 이미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거처를 태초부터 예비해 주셨지만 그 거처가 어느 샌가 오염되었다. 아까 말씀드린 성전에 실제로 물리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공간에 주님께서 그곳을 치우셔야만 만인이 와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를 위하여 주님이 이미 예비하신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가서 치우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따가 말씀 드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다고 하고는 우리와 잠깐 떨어져 계시지만, 우리에게 잠시 침묵하시는 그 시간이 사실은 우리에게 어찌나 복된 시간인지,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우리 있을 곳을 예비 하시는 것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시간인지 다시 말씀드리겠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거처의 세 번째 특징은 우리를 위하여서 공간을, 공동체를 예비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갈 구체적인 삶을 주님께서 예비하시는 것이다. c) 우리의 공간 뿐 아니라 우리의 삶도 함께 예비하신다.
*요한복음 14:2b, 2b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것이 2절 말씀 세 번째 부분에 말씀이다. 2절 말씀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세 가지 표현이 각기 다른 거처로 등장하는 것이다. 첫 번째 표현이 아버지 집, 보이코스 라고 표현되는 실제적인 한 집과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였고, 두 번째 표현이 그 집에 대비되는 전체의 커다란 공동체, 혹은 성전과도 같은 하나의 단지가 아니라 여러 개 있는 큰 단지를 예비하는 그 집뿐만이 아니라, 그와 대비 되는 우리 개인의 그 안에 주어진 공간, 즉 방을 의미하는 모네라는 단어로 거처이다. 우리가 거할 곳은 바로 모네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집에 큰 집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었고, 그 안에 우리를 위한 개별 공간도 충분히 준비되었는데 왜 또 거처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시는가?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 거처는 바로 토포스 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광의의 place, 어떤 곳을 의미한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냐면 이것은 한 주어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이 팬이 이곳에 놓이면 강대상이 된다. 이 팬이 이 주머니에 꽂히는 이곳은 주머니가 된다. 이 주어를 중심으로 그것이 위치하는 모든 것, 그 주변 환경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중심으로 한 내가 영위하는 모든 삶을 주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 토포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만을 의미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지위로 번역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처한 환경을 뜻하게 되기도 한다. 여러분들께서 침대에 누우신다면, 그곳이 바로 여러분의 거할 곳이 되고,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순장으로 사역을 하신다면 그 직책도 여러분이 거할 곳이 되신다. 여러분의 주님께서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부르신다면 그 새로운 기회도 여러분의 거할 곳이다. 내가 다리를 뻗을 곳, 내가 생활의 방식, 바로 나의 삶이 주님께서 나를 예비하시는 거처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큰 공동체와 그 안에 나의 몫을 준비해 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살아갈 지위와 삶의 형태, 그 기회들을 모두 예비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해 주시는 이런 거처는 구체적이고 섬세해서 내가 있어야 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것을 철저히 준비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우리가 당연히 취하고 누려야 한다. 어떻게 우리가 그러면 취하고 누릴 수 있는가? 2절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께서 위하시는 거처할 세 가지 특징을 살폈다면, 앞선 1절과 뒤 따르는 3절-4절에서 이 거처를 누릴 구체적인 세 가지 방법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먼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거처를 예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시기 전에 앞서서 그 전제로 말씀을 하신다. 1절을 보면, II. 하나님께서 예비하실 거처를 누리는 방법. *요한복음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은 거처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주시기 이전에 먼저 당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당시 제자들도 사실은 거처 때문에 고심하고 있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거처를 너희를 위해서 예비하겠다는 놀라운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사실 거처를 예비하신다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많은 포상을 주는, 거처를 나누어 주는 좋은 분위기를 앞서서 예상하기 쉬운데, 거처를 주기 전에 제자들은 근심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명절을 새는 저녁이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민족 명절, 가장 큰 명절은 유월절이었다. 대부분 명절에 삼삼오오 음식을 준비해서 자기 집에서, 또 마련한 모임장소에서 식사를 한다. 명절이기 때문에 이 분위기가 나빠지기 보다는 좋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근심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할 정도가 되었다. 이 말씀 직전, 그러니까 14장 1절 바로 직전 13장 후반부를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장에서 어떤 사람은 뛰쳐나가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따져 묻고, 어떤 사람은 “대체 이 일이 무슨 일입니까?”라고 소리지르는 그런 일이 발생했다. 13장 30절을 보겠다. *요한복음 13:30,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밖은 밤이다. 한밤중에 식사를 하다가 한 사람이 뛰쳐나갈 정도이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같이 식사를 하시다가 “너는 나를 배신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명절에 왜 갑자기 “너는 나를 배신할 거야? 하는 말씀을 하시는가? 어안이 멍멍한 제자들엑 예수님께서 바로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33,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명절에 너희와 식사하다가, 이제 너희가 올 수 없는 곳으로 간다.’ 분위가 더 기묘하다. 사실 그저 명절 식사 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다가 예수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분위기가 엉망이 그런 상황이 아니라, 그 앞에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어갈 맥락이 있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만에 고생 고생 생 고생을 마치고 드디어 왕국의 중심부 예루살렘에 온 백성의 환영을 받으면서 입성했다. 개선한 직후이다. 그런데 마냥 좋은 상황만은 아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따라올 때는 ‘나를 따라오라.’ 하는 말씀하시는 것은 자신이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내려놓고, 자신의 가족과 생계를 내려놓고, 그저 주님을 따랐고, 주님을 따른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기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머리 둘 곳은 없고 따라다니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하기도 하고,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하고,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서 길가다가 밭에 있는 이삭을 주어다가 비벼서 생쌀을 씹으면서 다니다 보니 점점 고대어만 갔다. 어디든 따르기만 하면 기뻤던 제자들이었는데, 이제는 고생을 하다 보니 이 고생 끝에 어떤 거처를 주시나? 어떤 자리를 주시나? 내게 어떤 삶을 주시나? 내가 어떤 이득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들이 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이 수도로 오기 전에 제자들은 계속해서 싸움이 일어난다. ‘누가 더 큰 자리를 얻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제자들은 처음과는 달리 지쳐서 이 수도에 도달했는데, 그나마 감사하게도 백성들은 열렬히 환영한다. 호산나, 호산나, 왕처럼 이들을 환영하는 것을 볼 때, 들쳤던 제자들의 마음 한켠에는 조금은 위안이 되고 ‘그래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구나!’ 하며 생각했는데, 우리를 지도자들이 잡아 죽이려고 달려들 때에 우리는 두려워하기만 했는데, 수도에 와보니 우리를 환영하는 이 인파들을 보니 여기서 예수님이 조금만 잘 하시면 우리가 바라는 그 자리, 그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명절 당일 날 거하게 식사를 차려 함께 나누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제자들이 깨달은 것은 “자, 이제 결심이 섰다. 우리가 이 땅의 정권을 뒤 엎고,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자.”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떠나겠다.” 라는 말씀이다. 긴장된 상황에서 자칫하면 우리가 조금만 긴장을 놓치면 이 땅의 세력에 다 먹혀서 가진 것도 다 잃을 것 같은 지쳐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수장이 정신을 바짝 차리시고 우리를 이끌어주셔야 하는데 “떠나겠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아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은 모두 묻고 싶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고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디로 가신다는 겁니까?” 수제자 베드로가 나선다. *요한복음 13:36a,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오늘 이 장면에서는 주님을 따라 순교하겠노라고 말하는 뉘앙스가 다르다. 주님이 세우신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모를 때에 아직 이 땅의 거처를 사모하고 그것을 바라는 제자로서 “주님, 자꾸 죽는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정말 죽으시려고 하는 것은 아니시죠? 대체 저희가 고생하는 게 몇 년이 지났습니까? 예수님 한 분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설마 진짜 죽으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도대체 어디 가신다는 것인가요?” 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 더 강조하신다.
*요한복음 13:36b,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낙담한다. 지금 못 따라오는데 나중에 따라올 것이다. 우리 스승님께서 드디어 포기하셨구나. ‘저 바리새인들과 함께 일전을 치러야 하는데 로마제국과 일전을 치러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싸워서 저것들을 얻어내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으니 이 싸움에서 내가 죽게 될 것 같다.’고 이해하고 “아닙니다. 주님, 주님만 죽게 하실 수 없습니다. 저도 따라가서 죽겠습니다.” 라고 충성된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수제자의 이 충성스러운 반응도 찬물을 끼얹으신다. “아니다. 너도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충성된 반응조차 대차게 내치신다. 그랬다면 이 상황에 분위기가 어떠하겠는가?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술렁술렁하다. 동요한다. 그것이 오늘 1절에 말하는 근신이다. 이것은 영어로는 마음을 휘저어 버리다(stir up). 스털 업이다. 물이 가득 있는데 무엇을 넣어 휘젓는 것이다. 혹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큰 돌덩이를 제자들의 마음속에 풍덩 빠뜨려서 파도가 일어, 일렁일렁 동요하는 그 모습이다. 그런데 직접 하시고서 동요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거처를 주시기 전에 동일한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을 처음 따라 나설 때에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리고도 같이 계속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제자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를 지치게 하는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머리 둘 곳이 없는구나, 배가 주리는구나, 사람들이 우리를 비방하는구나,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감내할 수 있다. 우리를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것, 우리를 가장 동요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힘들 때에, 이런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갑자기 떠나신다고 말씀하듯이 우리 문제를 중요히 생각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실 때이다. 그래도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힘든 일을 했으니 그에 대해서 반응과 보상을 해주시리라 생각을 했는데, 다 지쳐서 낙담하기까지 응답이 없으시다. 심지어 어떨 때는 베드로처럼 용기를 내서 “생명까지 바치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오히려 주님은 우리의 기세를 꺾으시려는 듯 아니 “더 어려운 순간이 네게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을 따라가시다가 그저 이 땅의 좋은 재물, 거처를 준비하겠다는 그런 큰 목표를 말하기 이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주님을 따라 산다는 것 어떤 것인지 제가 도저히 모르겠나이다.’ 말한 그런 지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없는가? 설교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평생 벌어도 내 집 마련을 못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이미 지쳐서 나자빠져 있는데 주님은 나를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신 것 같아. 주님 일은 주님 일이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시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가는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하지?’ 부랴부랴 이 세상의 방법들을 찾아가려고 발버둥치지만 이미 늦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주님이 일관되게 말씀하신다. “나를 믿으라.”라고 하신다. 제자들의 상황은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들의 상황도 근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거처를 마련하려고 근심하면서 주님께 따져 묻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근심 하지 말라. 나는 이 땅의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더 근본적인 거처, 온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시간의 처음과 나중을 지으신 분이 계신 그곳에 가서 그것에 너희가 있을 곳을 예비하러 간다. 그리고 그것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직접 예비하겠다.” 주님께서 직접 예비하신다는 사실을 못 믿으신다면 주님께서 “내가 직접 너희를 위한 영원한 터를 예비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을 못 믿으신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보다 내 집을 잘 준비한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 땅에 집을 준비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땅의 집을 잘 준비하신 여러분, 혹은 조금만 더 준비하면 그것을 손에 가질 것처럼 생각되시는 여러분, 그곳이 정말 여러분들께서 영원히 거할 거처인가? 실제로 그렇지 않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고, 그렇게 가치를 부여하고 싶더라도, 아무리 이 땅의 거처를 완비하고 싶더라도 아니 이미 완비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 채울 것들, 그 안에 함께 할 사람들, 그 안에서 살아갈 건강을, 시간이 지날수록, 갈수록 우리는 일어난다. 어쩌면 돈을 어떻게 많이 벌어서 그 거처에 채울 물건과 나의 라이프 스타일은 확보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데 이게 주어진 시간이 내 손 사이로 빠져 나가는 것은 내가 그곳에서 함께 거할 가족이 떠나간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거처는 물리적인 공간만이 아니라, 그곳을 함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고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할지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 거처를 예수님보다 더 잘 준비할 자신이 있는가? 정말 그러한가? 이 천지 만물을 지으신 주님보다, 내 모든 죄를 사하시고 나를 죽음에서 건지신 그분보다, 나와 함께 살아갈 더 자질을 더 잘 살릴 확신이 있는가? 그런 확신이 없으시다면 부디 이 땅의 거처를 위한 근심을 내려놓으시기 바란다. 혹여 이 땅의 거처가 다 준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내 집에서 거하는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무엇이 더 중요하겠는가? 주님께서 예비하신 우리의 거처를 가장 잘 누리는 전제는 바로 우리가 이 땅 거처를 내가 예비한다는 이 근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왜? 주님께서 반드시 친히, 나를 위한 영원한 것을 예비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예비하시는 거처를 누리는 방법은 두 번째 방법은 더욱 놀라운 방법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처를 맞이하라. 하신다. *요한복음 14:3,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그 거처를 예비하시기 위해 잠시 떠나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그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제자들은 그것이 죽음으로 된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내가 다시 찾아와서 너희를 영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찾아오시는 것이 거처가 아니라, “예수님 아니십니까?” 우리가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면 14장 23절을 보겠다. *요한복음 14:23,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저 멀리 있는 천국, 천로역정을 다 거치고 고생 고생을 하여 하늘에 임하여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직접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신다. 거처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신다. 이 거처는 움직이는 거처이다. 이제 이 거처가 어디인지는 더욱 중요하지 않다. 이 땅에 거처와 다른 점이다. 이 땅의 거처는 어디 있는지가 중요하고 어디 역, 어디 단지가 중요하지만, 그래서 그것으로 가치가 결정되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평생을 그를 위해 소모하게 만들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평생의 수고를 이를 위해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임재하시는 거처가 되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거처를 맞이하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예비 된 거처를 맞이하는 방법은 23절에 읽은 대로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우리가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동하는 주님의 맞이하는 방법, 거처를 우리가 누리게 하는 방법은 바로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내 삶에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매일 읽는 큐티를 결코 얕보지 말아야 한다. 오늘 내가 한 절의 말씀을 펼쳐 들어 주님을 사모할 때에 그 사모함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하늘의 거처를 하나님의 집을 지금 이곳으로 임하게 하실 것이다. 오늘 하나님의 거처가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이 거처를 누릴 세 번째 방법은 바로 이 거처와 함께 다니는 것이다. *요한복음 14:4,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 거처를 어떻게 예비할까? 그 길을 몰라서 평생을 고민해 왔고 오늘도 이 자리에 나아와 무릎 꿇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아갈 길은 잘 보이지 않다. 창세시대를 살아갔던 신앙인물, 욥기도 그러했다. 창조시대, 창세 시대, 족장으로서 아직 이후에 주어질 다른 많은 복음이 주어지지 않아 주님께 의문만 가득하고 주님을 온전히 다 알고 어려웠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고난을 겪고, 자녀들이 다 죽고, 같이 거할 거처가 될 공동체가 사라지고, 자신의 재물들이 사라지고, 자신이 살아갈 터전이 사라지고, 건강이 사라져서 물리적인 거처마저 이 땅의 육신의 장막마저 없어져 버린 그때에 그는 여전히 고백한다. 욥기를 23장 8-10절을 보면, *욥기 23:8-10, 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주님은 이 모든 고난을 당하게 하고도 내게 안 보이신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주님을 신뢰하여 이렇게 고백한다고 말한다. 욥은 엄청난 믿음이 사람이었다. 고통 중에 보이지 않아도 주님을 여전히 신뢰한다고 믿음을 선포한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온 인류가 평생 경험한 이 문제,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주신다. 욥만큼 엄청난 믿음으로 고난 중에, 우리가 낙담하는 중에 어디로 갈지 몰라도 내가 주님을 신뢰합니다. 그런 믿음까지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이제는 너희에게 보여주겠다고 하신다. 영문 모를 고통을 겪는 욥은 감히 주님의 길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아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거하신 후에 이제 우리는 그 거처에 “내가 있는 곳에 주님 임하여 주시옵소서! 이곳에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갈 수 있다. 이것은 움직이는 거처에 우리가 탑승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이는 노년이 되어서 퇴직금을 다 투자해서 캠핑카로 다니시는 분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잘 없지만 더 잘 사는 미국에 가면 그 넓은 나라를 벤츠 리무진 버스를 개조해서 어떤 집보다 호화롭고 좋게 만들어서 전국을 다니는 분들이 있다. 평생을 집을 마련하기 위해 수고했는데 그 수고를 드려서 내가 살아보지 삶을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아서 이렇게라도 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만 임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는 이 집이 움직일 때에 함께 가자.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함께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우리의 삶에 우리의 거처로 예비하셨다. 그전에 여러분이 얼마나 낙담했는지, 그전에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정리정돈 되지 않았는지는 상관이 없다. 엘리사가 사환을 위해 기도하여 사환이 타락한 사마리아 땅 한 가운데 한 도단 성에서 눈을 뜰 때에 그곳에 불 말과 불 병거가 둘러선 것을 보았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셔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임재하여 주실 때, 우리에게 거처를 가져와 주실 때에 우리는 그곳에 탑승하여 그곳이 어디로 가시는지 이제는 명확히 보고 함께 따라가는 놀라운 모험이 시작되게 될 것이다. 주님이 시작하시는 이 놀라운 스펙타클한 역사에 우리가 함께 동행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이제는 근심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사모하며 내 삶에 주님의 거처를 환영하고 맞이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른 이들을 향하여 찾아가시는 그 사역에 내가 따라가 그곳에 함께 거하겠습니다.” 결단하셔도 이 문을 나가 한파를 뚫고 나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다 보면 이내 우리의 삶은 지쳐서 다시 낙담하는 경험을 한다. 다시 낙담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 때에 이제 우리는 그 순간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거처를 위하여서 고심하는 낙담하는 외로운 순간을 사용하셔서 나의 거처를 주셨다. 우리가 지금 성탄을 대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바로 그렇게 거처 없이 외롭게 사역을 시작하셨다. *누가복음 2:7,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예수님께는 태어나면서 맞아주는 이가, 이 땅의 거처가 없었다. 장성하여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가복음 9장 18절을 보면, *누가복음 9:58,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이 땅에서 아픈 자들을, 슬픈 자들을 위로하시면서 두루 다니며 열심히 사역하시던 때에도 예수님은 머리 둘 곳 하나 없었다. 이것만 해도 엄청난 헌신인데 이것을 마치고 십자가를 향해서 걸어가실 때에도 오늘 제자들처럼 대체 어디가십니까? 타박하는 말들만 쏘아붙여 왔다. 심지어 우리를 위하여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에도 예수님께서는 거하실 무덤하나 없었다. *마태복음 27::59-60,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명의의 무덤이 아니라, 다른 이가 산 다른 이의 명의로 된 빌린 무덤에 묻히셨다. 그런데도 이 땅에서 거할 거처의 우리로 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약속하신 이 거처들을 예비하시기 위하여 다시 그 길을 떠나셨다. 순수히 우리를 위하여서 다시 오셔서 맞이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저희가 이곳을 나가서 느낄 수 있는 쓸쓸함은 예수님께서 이미 앞서서 다 지고 가셨다. 혹여 지금 당장 내 앞에 견딜 수 없는 쓸쓸함이 거처가 예비 되지 않은 외로움이 임한다고 생각되실 때에, 질문해 보라. 주님이 말씀하신다. 근심하지 말라. 동요하지 말라. 너희 거처가 이미 예비 되었다. 내 거처가 너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다니든지 너는 그 길을 알고 나와 함께 다니게 될 것이다. 이 믿음의 약속을 붙잡고 함께 나아가는 우리가 제자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거처를 우리가 조금만 눈을 감으면 세상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면 잊어버린 채, 이곳에 세상의 거처를 힘쓰고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다시 낙담하고 싶을 때, 주님이 그때에 우리의 마음이 바뀌게 하실 것을 믿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먼저 사용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신 주님을 온전히 알아야 한다. 주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무엇을 위하여 가셨는지 우리를 예비 된 처소가 어떤 것인지 온전히 알고 그 처소를 온전히 누리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정글북>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은 “법이 없는 종족은 열등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복잡다단한 세상에 법이 없다고 생각해보면 키플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도 되고, 타인의 신체를 해쳐도 되고, 허락 없이 주거지를 침입해도 되는 사회는 틀림없이 열등할 겁니다. 법의 보호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평화롭게 생산하고 소비할 수 없을 터이니 문명은 퇴보를 면치 못할 겁니다.
우리는 키플링의 말에서 아쉬운 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는 왜 “법은 있지만 지키지 않는 종족은 열등하다”고 덧붙여 놓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키플링은 오늘날처럼 법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해질지 몰랐을 겁니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자들, 목적을 위해 불법·편법·떼법에 기대는 사람들, 자기는 언제나 예외여야 한다는 압력단체들, 목적이 숭고하면 수단은 상관없다는 투쟁가들을 그가 목격했다면 틀림없이 ‘법의 위기’를 말했을 겁니다.
실은 법이 만능인 것도 문제입니다. 무엇이든 법으로 뚝딱 정해 그때그때 사용하는 ‘입법 만능주의’는 법을 풀빵이나 소시지처럼 하찮게 대하도록 만듭니다. 국회가 너무 많은 법을 만든다면 누가 법을 존중하겠습니까?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19대 국회에서 1만6000여 개, 20대 국회에서 2만3000여 개의 법이 발의됐다고 합니다. 키플링이 살아 있다면 “법을 너무 많이 만드는 나라도 열등국가”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법이 흔들리는 현장과 법철학 속으로 가봅시다.
지하철 운행 방해 시위, 확성기 소음 집회…스스로 예외가 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에서 지하철 탑승 시위 도중 사다리 반입 시도로 경찰과 갈등을 빚고 있다. 뉴스1
퇴임 뒤 경남 양산에서 생활하고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그제 “확성기 소음과 욕설이 함께하는 반(反)지성이 시골 마을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략) 주민들이 여러 차례 신고했으나 소음 기준을 위반하지 않는 수준이어서 경찰은 야간 확성기 제한만 통고했다. 용산 대통령실 주변도 연일 시위와 확성기 소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략) 어제는 한 장애인 단체가 출근 시간대 차도를 점거해 시위를 벌이면서 극심한 교통혼잡까지 빚었다. 앞으로 용산은 ‘떼법 시위’의 천국이 될 판이라는 주민들의 하소연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물론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법과 상식의 범위 내여야 한다. 집회·시위가 다른 주민들의 기본권을 해칠 경우 자제하는 게 마땅하다. 관련 법에서 ‘재산 피해나 사생활 평온을 해칠 우려가 뚜렷한 경우’ 집회나 시위를 제한할 수 있다고 한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막무가내식 떼법이 고질화한 지 오래다. 툭하면 시위대가 대기업 본사 앞을 점거해 확성기에 장송곡까지 틀어 직원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청와대 부근 주민들은 지난 5년 내내 집회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이 시위대에 무단 점령당하기 일쑤였고, 도심 곳곳은 귀청을 찢을 듯한 확성기 소음과 구호, 현수막으로 어지럽다. (중략) 소수에 의해 다수 시민의 일상과 법치가 짓밟히는 일이 있어선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하략)
-한국경제신문 사설-
윗글은 우리나라 법질서가 몹시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헌법이 보장한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상업할 자유가 불법·편법·떼법으로 인해 퇴색되고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사설은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첫째 사례가 확성기를 이용한 시위입니다. 주말 광화문이나 용산에 가보면 정말 시끄럽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원래 시끄럽고(noisy) 혼탁하고(messy) 복잡한(complicated) 것이지만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위 전용차와 크레인, 대형 스피커를 이용하는 시위는 고막을 찢을 듯하죠. 요구 사항을 적은 피케팅(picketing) 시위는 너무 점잖아서 집회 밈(meme)에서 도태돼버린 지경입니다.
대로(大路)를 점령하는 시위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도로 점거 집회는 원래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차량과 운전자의 자유가 침해되기 때문입니다. 시위 참여자가 늘어나면 도로에 인파가 넘칠 수밖에 없다는 측면이 있지만, 요즘 시위는 처음부터 도로 점거로 시작합니다. 제3자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출퇴근 시간대라도 피해서 집회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운전자와 시위자 사이의 실랑이는 다반사(茶飯事)가 되었습니다.
최근엔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도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는 시위는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위 장소를 지하철로 잡는 것은 다수의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식이면 법질서는 설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출퇴근 시간대에 맞춰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 미흡하다면, 시위대는 국회나 정부 부처 앞에서 집회를 하는 게 합당합니다. 지하철 문 위에 드러눕는 시위는 동정·동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불법·편법·떼법 행위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합니다. 이런 행위에 굴복하면 “너는 법을 지켜라. 나는 어겨서라도 목적을 성취하겠다”는 풍조가 생겨납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했습니다. 이 최소한조차 지키지 않는 공동체의 미래는 어떨까요? “가장 나쁜 사람은 스스로 예외가 되려는 사람이다”란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NIE포인트
1. 집회결사,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2. 목적이 좋으면 수단은 상관없다는 주장을 비판해보자.
3.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의 의미를 토론해보자. ---------------------------------------------------------------------------
칸트·하이에크·몽테스키외·애덤 스미스…'공동체를 위한 법'을 고민한 철학자들
이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몽테스키외, 알렉산더 해밀턴,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정치·경제·도덕 철학자들은 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수많은 사람이엉켜서 사는 사회에서 법이 맡은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들의 중심 사상을 엿보면서 답을 찾아봅시다.
○이마누엘 칸트
“어떤 행위가 법적인 행위인가”라는 물음에 이 독일 도덕철학자는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게 법적 행위라는 것이죠. 자기 권리를 위해 남의 자유를 경시한다면 그것은 도덕심에 반한다는 얘기입니다. 조용한 휴식을 즐기는 주택가나 평화로운 거리로 분주한 상가에서 시위하는 것은 타인의 존엄을 무시하는 행위여서 제한돼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법은 이런 행위를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그는 정언명령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너에게 해주기를 네가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도 행하라”는 겁니다. 내가 불법적인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듯, 너도 그런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요즘 주변에는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법, 입법 그리고 자유>에서 법이 법답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을 자주 경시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법다운 법에 의한 통치를 법의 지배(rule of law), 법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저 절차적으로 통과된 법으로 통치하는 것을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구분했습니다. 법의 지배를 법치주의, 법에 의한 지배를 법실증주의라고 했습니다.
법치주의의 법은 일반성, 추상성, 확실성을 띠고 있지만, 법실증주의의 법은 그런 성격이 없습니다. 특정 집단에 유리한 법, 이해관계를 고려한 법, 애매모호한 내용을 가진 법은 법다운 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조가 불법 파업해도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하는 법, 150여 가지의 계산법을 가진 종합부동산세법은 일반성, 추상성, 확실성을 갖지 못한 법이므로 하이에크가 말하는 법다운 법, ‘법치주의 법’이 아닙니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을 쓴 이 프랑스 사상가는 권력자들이 다수의 지지를 앞세워 법을 타락시킨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이라는 원리에 따라 투표를 통해 다수표를 얻는 자가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의 원천이 유권자, 즉 국민에게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다수를 획득한 권력자는 제한 없는 권력을 행사해서 법을 자기 뜻대로 마구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독재자들이 흔히 이렇습니다.그는 법의 타락을 막기 위해 권력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입법, 사법, 행정 3권분립입니다. 문제는 입법부가 법을 함부로, 너무 많이 만들어서 ‘입법 독재’라는 말이 나오는 데 있습니다. 다수를 차지한 입법권력이 독재를 행사한다는 겁니다. 그는 “모든 권력자는 끝까지 간다”고 책에 썼습니다. 법의 위기는 권력에서 온다고 봤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 최초의 성문헌법이라는 미국 헌법 제정을 주도한 그도 입법부의 독재성을 간파했습니다. 전국에서 선거로 뽑힌 이들은 국민을 대표한다는 이유로 과도한 열정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국회 모습을 우려한 겁니다.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인데도 급히 법을 만들어 통제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입법부를 상원과 하원으로 나눴습니다. 입법부 내에서도 상하원이 서로 견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애덤 스미스와 밀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국가와 사회가 잘 굴러가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제3의 공평한 관찰자’에 비춰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 관찰자는 극한으로 치닫는 이기심을 억제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상호이타주의가 작동하게 해준다고 봤습니다. 밀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쌓아야 호들갑 떨지 않는 민주주의, 즉 숙의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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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창수 목사님(남가주 사랑의교회)
-코로나 시대에 와서 인사법이 바뀌었다. 코로나 펜데믹에서의 인사는 한 손을 들면 악수이며, 두 손을 들면 허그(hug)이다. 누구에게든지 인생살이는 순탄하지 않다. 사는 것이 정말 버겁고 힘들다.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아니하던 삶에는 수많은 굴곡이 있고 아픔이 있고 또한 고난이 있다. 우수한 중견 간부로 행복하게 살았던 한 분이 있다. 그러나 빚보증을 섰던 남동생의 사업이 부도가 나자 그가 평생 땀 흘리며 모았던 재산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부모님의 재산도 날렸다. 봉급도 압류당했다. 그가 목사님께 이렇게 하소연 한다. “목사님, 저희 집안은 5대째 기독교 집안입니다. 아버지가 장로이시고 어머니가 권사님이시고, 저는 어렸을 때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런 집안에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심판을 내릴 수 있습니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신의 삶에 임한 풍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했을까? 험한 세상을 살다보면 풍랑을 만난다. 예상치 않은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난다. 크리스천들도 풍랑을 만난다. 제자들도 풍랑을 만난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도 풍랑을 만난다. 제자들이 요나처럼 불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난 것도 아니다. 저편을 건너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났다. 그것도 오병(五甁)이(二)어(魚)의 기적(奇蹟),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 후에 풍랑을 만났다. 성경에 보니까 밤 4경까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제자들은 적어도 6시간 내지 8시간 동안 풍랑을 만났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다고 벌벌 떨고 있다. 바로 이때 저쪽에서 희미한 물체가 물 위를 걸어온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두려워 떨고 있었던 그 희미한 물체를 보고 “귀신이다.” “유령이다.” 라고 소리를 질렀다. 여러분이 아시듯이 서양귀신과 동양귀신이 좀 다르다. 서양귀신이 주로 남자이고, 동양귀신은 주로 여자이다. 서양귀신은 주로 검정색 옷을 입고 동양귀신은 주로 하얀색 옷을 입는다. 서양귀신은 머리에 기름을 발라서 올백을 하고, 동양귀신은 주로 머리를 앞으로 내린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 ㅋㅋ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이지만 검은 옷 대신해 흰옷을 입고 머리 기름을 발라 올백을 한 것이 아니라, 머리를 길게 풀고 계셨다. 예수님께 자신을 보고 귀신이다. 소리를 지르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에 대해서 마가복음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또 다른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가지를 요청한다. 마태복음 14장 28절이다. 보면, *마태복음14:28,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역시 베드로다운 요청이다. 엉뚱한 요청, 어처구니 없는 요청이다. 지금 베드로는 물위를 걷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사실 그는 물 위를 걷데 해달라는 요청보다 살려달라고 요청을 했어야 한다. 어찌 되었든지 예수님께서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그가 물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다시 물에 빠졌다. *마태복음14:30,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풍랑 속에서 두려웠던 베드로가 왜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는가? 그 이유가 있다. 마가복음을 보면, *마가복음 6:48,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베드로는 제자들이 탄 배를 지나가려고 하는 예수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을 놓치면 죽을 것 같았다. 표준 번역을 보면 이렇게 번역을 했다. “나로 물위로 걸어서 주님께 오라 명하소서.” 그날 베드로의 목적은 물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었다. 예수님께 가면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즉시 배에서 뛰어 내려 물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가려고 했다.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다시 물에 빠졌다. 배에 타고 있는 이 11명의 제자들이 이 베드로의 어처구니 행동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 번 상상력을 동원해 보기 바란다. 아마 제자들이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다. “저 베드로, 또 사고 쳤네.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해주실 텐데, 저렇게 나서니까 잘난 척 하니까 또 물에 빠지지, 저애는 항상 그게 문제야! 말보다 행동이 앞서. 가만히 있으면 주께서 알아서 해 주실 텐데 왜 저렇게 나서는지 몰라. 챙피해 죽겠어.” 했다. 맞다 베드로는 다혈질이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변화 산에서 기도할 때, 베드로가 “주를 위해서, 모세를 위해서, 엘리야를 위해서 텐트를 짓겠습니다.” 라고 자원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혔을 때, 흥분한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 다시 나타나자, 베드로가 고기를 잡다 말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께로 간다. 베드로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다르다. 베드로가 무작정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마태복음 14:28~29,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가 다혈질인 베드로가 그날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나로 물위로 오게 하소서. 예수님이 오라 명하니.” 그 말씀에 순종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물위를 걸어갔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편으로 건너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다 풍랑을 만났다. 베드로가 오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다시 물에 빠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가? 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나고, 순종하다가 물에 빠지는 것이 복이다. 왜냐하면 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나면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다. 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나면 물위를 걷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 순종하다가 풍랑을 만나면 내 인생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초점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기적이 아니라, 풍랑이 잠잠하게 되는 기적도 아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될 점은 바로 풍랑 중에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이시다. 풍랑 중에 있는 베드로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이다. 베드로가 만난 예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저와 여러분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세 가지로 스케치를 하고 있다. I.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시다. *마가복음 6:48,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배에 태워서 저편 벳세다로 건너가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셨다.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칠 흙 같이 어두운 밤에 풍랑으로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는 제자들을 보았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찾아오신다. 물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찾아오셨다. 그런데 이 48절에 지나가려고 하시매, 라는 표현이 나온다.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왜 풍랑 중에 있는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했는가? 이 지나가려고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가? 제자들이 풍랑 중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 풍랑을 어떻게 대처하는지, 잠시 보고 지나가려고 하셨는가? 이 지나가려고 하는 말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현현’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에게 나타내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간청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나를 보면 죽는다.”라고 말씀하시고 모세를 반석 틈에 세우시고, 하나님이 지나가시면서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셨다. 그날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영적싸움에서 대승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영적으로 탈진해서 죽고 싶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그리고 주님께서 세미한 음성을 들려 주셨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풍랑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지나가시면서 주님의 영광을 그들에게 드러내고 계신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뜻밖에 풍랑을 만났는가? 이 성탄 시즌을 맞이하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이 성탄 시즌을 맞이하는데도, 삶에 크고 작은 풍랑으로 인해서 낙담하는 분들이 계시는가? 우리 주님은 풍랑 중에 있는 여러분을 보고 계신다. 외면하지 않으신다. 찾아오신다. 그리고 그분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으시는가? II.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분이시다. -그날 물에 빠졌던 베드로가 어떻게 나왔을까? 첫째, 물에 빠진 베드로가 기도했더니 물이 얼어서 걸어서 나왔다. 둘째, 물에 빠진 베드로가 기도했더니 몸이 부웅 떠서 날라서 나왔다. 셋째, 물에 빠진 베드로가 기도했더니 예수님의 손잡고 나왔다. 셋째, 틀렸다. 마태복음 14:31절을 보면 *마태복음 14:31,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베드로가 예수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신 것이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예수님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베드로의 손을 예수님이 잡아주셨다. 그것도 즉시 손을 내밀어 잡아주셨다. 일류 역사상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씩이나 물위를 걸었던 사람이 있다. 성이 베씨요, 이름이 드로이다. 베드로이다. 첫 번째는 혼자 물위를 걸어보았고, 두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물위를 걸었다. 첫 번째는 혼자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졌다. 두 번째는 물에 빠져 “나를 구원하소서!” 외치는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신 예수님과 함께 물위를 걸었다. 누가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날 배 바깥으로 나오는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께 드린 최고의 선물이고, 물위를 걷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기준, 예수님의 최고의 선물이다. 예수님이 물에 빠진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여러분의 손을 붙잡아 주신다. 우리의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신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힘들면 붙잡았던 주님의 손을 놓고 싶다. 교회 생활도 다 그만두고 싶고, 다락방도 그만 다니고 싶고, 제자훈련, 사역훈련도 순장사역도 그만 하고 싶고, 만사가 귀찮고 힘들고 고통이 내 삶에 엄습(掩襲)해 오면 내가 붙잡았던 주님의 손을 놓고 싶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軟弱)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때마다 기도하기 바란다. 내가 주님의 손을 놓아도 주님은 여전히 내 손을 붙잡고 계신다. 그리고 그 손을 절대 놓지 않으신다. III.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우리를 끝까지 동행하는 분이시다.
자,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이 풍랑이 언제 그쳤을까요?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올 때 풍랑이 그쳤는가? 아니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걸어갈 때 풍랑이 그쳤는가? 이 풍랑이 언제 그쳤는가? 마태복음 14장 32절을 보면, *마태복음 14:32,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셔도 풍랑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내 손을 붙잡고 계셔도 여전히 풍랑이 내 삶에 엄습해 온다. 예수님 믿으면 만사형통?, 무병장수? 그것 거짓 복음이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이 악해서 크고 작은 어려움을 당한다. 풍랑이 있다.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서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셔서 저 영원한 아버지의 집에 갈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는데 그 영원한 아버지 집에 갈 때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풍랑을 언제든지 만난다. ※제가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 부임(赴任)한 지 얼마 안 된다. 개인적으로 큰 풍랑을 만났다. 저희 아버님이 고혈압, 당뇨, 간, 신장, 전립선 등으로 무지 고생하셨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도 하셨다. 일 년 반 동안 고생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저희 어머님은 길을 걸어가시다가 자동차에 치이셨다. 갈비뼈가 금이 가고 그 사고로 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셨다. 지금도 자동차 사고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계신다. 저희 장모님은 갑자기 간암 판정을 받으셨다. 위 70%를 잘라냈다. 저희 장인어른은 지금 노환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인생의 풍랑이 찾아온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 어떤 풍랑이 있는가? 흘러간 세월만큼 풍랑이, 크고 작은 풍랑이 많이 있지 않은가? 엊그제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그 자녀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와서 군대 가고 또 시집 장가가서 아들 딸 낳고 엊그제 직장생활 한 것 같은데 2-30년 훌딱 지나가고, 그 세월이 흘러간 만큼 여러분의 삶에 크고 작은 풍랑이 얼마나 많았는가? 아마 책으로 쓴다면 몇 권은 나올 것이다. 저희 교회는 성도들이 딱 둘로 갈라졌다. 아주 오래전에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이민 온 김포공항 파, 그리고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들어온 인천공항 파, 그런데 얼마 전에 새로 등록한 분이 1950년대에 미국에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배 파도 있다. 인천공항 파, 김포공항 파, 배 파이다. 엊그제 미국 온 것 같은데 몇 십 년이 후딱 지나갔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간 것만큼 인생의 풍랑도 참 많았다. 그런데 제가 감히 여러분에게 한 가지 예언하려고 한다. 여러분의 인생이 얼마 남았든지 죄송하지만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베드로처럼 예수님께로 나아와야 한다. 그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찾아오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삶을 붙잡아주시는 분이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저 영원한 아버지 집에 갈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여러분과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Take courage It is I Don't be afraid. -여기서 나야 나, 노창수야, 엄마야, 나야 아빠야가 아니다. 여기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나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다. 나다. 자연의 섭리를 다스리시고 귀신세계를 다스리시고, 질병을 다스리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나다.” 그러니 안심하라. 믿는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늘 풍랑을 만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들지? 이 성탄 시즌을 맞이해서 많은 사람들은 기뻐하는데 속으로는 너무나 낙담이 되어서 사는 게 버겁지?” “나만 겪는 것 같아서 속상하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불공평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그래도 잊지 말라, 나다. 나야, 전능하신 하나님이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를 붙잡고 있다. 나와 동행 할 것이다. 나는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역시 성탄 아닌가? 높고 구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성탄의 기쁜 소식이다. 그분이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계신다. 여러분과 동행하고 계신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제가 요한계시록 읽다가 한 단어가 제 마음이 각인이 되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3:5,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 21:27, 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 결코 지우지 아니한다.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간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저희 어머님은 연로하시다. 곧 90이 되신다. 그런데 종합병원이다. 그런데 저희 어머님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따로 있다. 저희 어머님이 두려워하는 질병은 치매이다. “목사님, 저에게 치매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부탁한다. 참 치매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매에 걸리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모른다. 치매에 걸리면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한다. 심한 경우는 집을 나갔다가 길을 잃어버린다. 더 심한 경우는 가족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미국 연방 대법원 최초의 여성 판사였던 센드라 옥한은 남편과 54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아내는 알아보지 못하고 요양병원에 있는 한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치매가 무서운 질병이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치매에 걸리셨는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평생 예수님을 섬기고 평생 복음을 전한 분, 목사님이 치매에 걸리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우리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가? “네가 나를 잊어버려도 나는 절대 너를 잊지 아니한다. 내 생명책에 기록된다. 네가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설령 나를 망각하고 잊어버려도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주께서 영원히 기억한다.”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믿는가? “네가 연약해서 주님을 망각해도 생명책에 기록된 자녀들, 주님이 붙잡아 주시고 기억하신다.” 라고 말씀하신다.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힘들지? 사는 게 버겁지? 가진 것 남부럽지 않게 많고 손에 쥔 것 많은데도 여전히 마음에 공허함이 있지, 내게로 돌아와라, 내가 너를 위해서 왔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주님이 주신 찬양이 있다. 우리 같이 부르고 기도하면 좋겠다.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를 부르자.♬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 1.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2. 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 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요약 주님이 우리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 주신 주님을 바라보오니,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주님의 손을 놓고 싶을 때에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의 손들 붙잡고 계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이 땅에서 풍랑 중에도 우리와 동행하실 줄 믿고 바라보며 살기를 원해야 한다. 삶이 버겁고 주님의 손을 놓고 싶을 때도 아버지 집에 갈 때까지 주님은 우리를 붙잡고 계심을 굳게 믿고 위로하시는 예수님께로 달려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전파 외에 각색 병자들을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병자, 여기서는 죄인을 고치는 의사로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8~20,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박신욱 목사님(SEED선교회 국제대표) 지팡이를 들으시며 “이게 하나 있는데 이것을 들고 설교하고 싶습니다.” 하신다. -오정현 목사님께서 일주일 전에 전화를 주셔서 토비새에 준비를 잘 하냐고 하셨다. 느낌에 이 토비새가 중요한데 “박목사, 할 수 있겠나?” 하시는 그런 걱정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일주일동안 밤잠을 안자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1시에 일어났는데 시차도 있고 해서 준비한 것이 아니 것 같았다. 마음에 성령님께서 허락을 안 하시는 것 같았다. 큰일 났다는 생각을 했다. 불과 몇 시간이 남았는데 그래서 한 달간 묵상한 말씀인데, 어쨌든 바꾸었다. 포인트 세 개를 두 개로 줄였다. 그리고 내용도 포인트가 바뀌어졌는데, 오늘 제가 죽을 쓰면 성령님의 책임인줄 믿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무조건 오늘 은혜 받으시기를 축복한다. 우리가 성탄절이 되면 예수님의 탄생스토리를 묵상한다. 저도 해마다 여러 스토리 가운데서 은혜 받는 부분들이 있다. 올해는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의 전해주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 동네로 달려가서 예수님 나신 소식을 전해 준 이야기, 오늘 본문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았다. 예수님의 이 탄생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등장하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그 네이티브 스토리, 그러니까 성탄이야기의 목적의 핵심이 무엇이겠는가? 왜 그 모든 등장인물들은 있고, 사건들이 있는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그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증명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들이 있는 것이다. 사가랴 제사장부터 시작해서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잉태하고, 그 천사의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부터, 또 아기가 예수님이 난 지 팔일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했던 시므온, 안나 선지자, 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이다. 마리아도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도 그렇고, 요셉에게 나타난 꿈에 천사의 이야기도 그렇고, 모두 다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방박사 이야기까지 한 가지의 목적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 그런데 누가복음에 목자들의 이야기가 만일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는? 이 목자들의 이야기가 꼭 필요했는가? 필요했다면 왜 필요한가?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 태어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데 있어서 누구를 위해서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 천사를 보내어서 이 목자들을 사용하셨는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날, 그 밤에, 아마 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가장 잘 절실하게 체험하면서 확신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마리아이다. 열 달간 품고 있을 때부터 그는 실제로 탄생했을 때 태어났을 때, 마리아는 아마 나 같은 부족한 종을 쓰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격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겸손히 엎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어떠했는가? 물론 요셉은 가브리엘 천사가 꿈에 나타났다. 마리아에게는 방에 있는데 들어와서 나타나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요셉은 꿈에 천사가 나타났다. 마리에게 하는 말은 “두려워 말라, 이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다.” 라고 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그 꿈을 믿고 마리아를 데려왔다. 원래는 가만히 끊고자 했다. 마리아도 믿었겠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의 이야기도 당시는 믿었기 때문에 마리아를 데리고 올 수 있었다. 가만히 끊지 않았다. 그리고 열 달이 지났다. 예수님이 마침내 탄생하셨다. 그 시각에, 혹시 이미 충분한 증거가 있지만 본인도 나타난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말 처녀가 아기를 낳을 수 있는가? 정말 이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정말 성령으로 잉태하였는가?’ 하는 그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시간에 목자들이 달여 온 것이다. 그리고 천사의 말을 전해주는데,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표적이라.” 했다. 그 천사의 말을 와서 요셉에게, 마리아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 구유에 강보에 싸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누가 눕혔는가? 요셉일 것이다. 요셉이 강보에 아기를 싸서 둘 곳이 없어서 거기 두면 안 되는 장소이지만, 너무나 비천한 장소이지만, 짐승의 먹이를 담는 곳이지만, 그 구유에 아기를 누여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담아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그 구유에 놓았다. 그런데 목자들이 한 사람도 아니고 적어도 두 사람이 이상, 목자들이 와서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는데, 천사가 한 사람이 그에 서고 온 동네에 큰 미칠, 그의 소식을 전하는데, 그들은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고 외친다. 메시아가 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표적을 주는데 ‘그 아기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을 것이다.’ 라는 것이다. 마치 천사가 요셉이 아기를 누일 곳이 없어서 구유에 누이던 장면을 마치 천사가 보았던 것처럼 목자들이 와서 그렇게 전해줄 때에 요셉이 심령 속에 있던 마음에 두려웠던 어두운 그림자가 깨끗하게 사라졌을 것이다. 목자들은 요셉에게 특별히 요셉에게, 마리아가 천사의 이야기를 목자들의 소식을,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요셉에게 가장 큰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2천 년의 일어난 이야기이다. 우리는 어쩌면 21세기에 살고 있는 목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증인들이기 때문에 2천 년 전에 목자들이, 만일에 2천전의 목자들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강보에 싸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거 하는 증인이었다면 우리는 그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 천국 복음을, 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 하는 증인인 줄로 믿는다. 오늘 저는 아침에 2천전의 목자들의 그 증거 하는 일을 보면서 오늘 21세기의 목자들과 한 번 비교해 보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우리가 이 증인의 삶을 예수님을, 다시 오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2천 년 목자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천사의 보냄을 받았다. 첫 번째 차이점은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베들레헴에 보냄을 받았다.
-베들레헴에 보냄을 받았다. 21세기의 목자들은 모든 민족으로 세상으로 가라고, 열방으로 가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다. 또 마태복음 24장 2144절에 *마태복음 24:14,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우리는 베들레헴으로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동네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일가친척에게만 보냄 받은 것이 아니라, 물론 우리가 우리 주위에 복음을 전해야 되겠지만 우리는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든 민족에게 열방에게 온 세상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누가 가야 하는가? 누가 중요한 것인가? 청년들이 일어나서 가야 한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셨다. 유대인들은 당시 2천 년 전의 문화가 20대에 준비해서 모든 직업도 결정하고 준비해서 30세부터 일을 시작했다. 예수님이 갑자기 30세에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30세에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적어도 20대에 누가복음을 보면 사실 예수님은 12살부터 하나님의 뜻을 아셨다. 성경을 아셨다. 적어도 예수님은 17세 이후에 20대에 사역을 준비하신 것이다. 그리고 30대에 청년 때에 아직 청년 때에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한가? 모든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천국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 기초가 되는 제자들을 훈련하시는데, 그 제자들은 누구인가?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이 부르실 때, 그들이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들의 성경의 기록에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아직도 싱글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30세에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면 제자들은 심지어 결혼했던 베드로를 포함해서 다 20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달력에 나오는 그 숲이 있는 달려있는 그 청장년 제자들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청년들이었다. 그들이 새 영을 받을 때, 성령을 받고, 그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교회를 사도들이 지었을 때, 그들은 청년들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로 보내야 한다. 2천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중세의 수도사들과 그리고 종교개혁자들과 그리고 근대와 현대의 선교사들이 서구의 모든 선교사들이, 20대에 준비해서 20대 후반에 선교지로 간 것이다. 언더우드가 20세에, 그 아펜셀러가 27세에, 토마스 선교사가 27세에 다 이 땅에 온 것이다. 죤 캘빈이 기독교 강연을 설 때가 27세였다. 2천년 교회 역사는 예수님 때부터 예수님께서 그렇게 디자인 하셨기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20대에서 준비해서 20대 30대 청년들이 교회의 리더가 되고, 교회의 기초가 되고, 교회를 움직이는 그런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오정현 목사님도 마찬가지이시다. 20대에 헌신하셔서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모든 민족에게 보냄 받음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청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일으켜야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래서 우리 사랑의 교회는 그래도 다른 교회보다 청년들이 많다. 왜냐면 주보를 보면 결혼식이 많다. 청년이 교회에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예수님의 제자로, 교회의 일꾼들로, 하나님 나라의 추수의 일꾼들로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한다. 두 번째로 2천 년 전 베들레헴 목자들은 천사의 보냄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 21세기의 제자들은, 목자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는다. 목자들이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천사들이 보냄을 받아 베들레헴에 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베들레헴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천사의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증인의 사명을 감당했던 것은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증인이 되어 주셨던 것은 그들이 천사의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2천 년 전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청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지상 명령을 주신 이후에는 다시 오실 십자가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 하려면, 증거인이 될 수 있으려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면, 성령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아니하면,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우리가 아는 대로 기도로 사역을 시작하셔서 기도로 마쳤다. 왜 그런가? 왜 무리에게서 올라오셔서 기도하셨는가? 겸손하게 기도하셨는가? 왜 빈 들 광야로 나아가셔서 기도하셨는가? 왜 새벽 미명에 한 적한 곳으로 나아가 기도하셨는가? 왜 때로는 산으로 올라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는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는가? 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겟세마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이 기도하셨는가?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예수님이 받으셔야 했기 때문이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모든 능력은 성령으로부터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하셨다. 그리고 21세기 목자들은 성령의 보냄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우리 21세기의 목자들은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 길 밖에 없는 것이다.
※ 제가 아르헨티나 선교지에서 오래전 이야기이다. 돌아올 때이다. 그리고 안식년을 가지고 6개월 만에 아르헨티나로 혼자 돌아갔다. 가족을 캐나다에 두고 갔다. 교회를 개척하고 1년 만에 안식년을 가진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교회에 제가 현지인 전도사님을 목사안수를 주기 위해서 갔다. 공항에 내렸는데 그 전도사님이 저를 데리러 왔다. 교회로 가는데 운전을 하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6개월 선교지인 교회에 큰 시련이 온 것이다. 교회가 없어질 상황이었다. 1년 밖에 되지 않은 곳이다. 그 교회를 두고 제가 떠나야만 했다. 6개월 만에 돌아오니까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전도사님에게 나는 일주일 동안 교회에 있을 테니 나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은 이번에 심방을 못하니까 교회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 평소에 기도하던 강대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를 시작하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르헴티나에 있는 동안 내게 얼마나 남았느냐?” 하셨다. 처음에는 이렇게 물으셨다. “너는 아르헴티나에 있는 동안 얼마나 희생했느냐?” 하셨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 가족을 데리고 와서 아이가 아프기까지 희생했는데, 아르헴티나, 중국을 다니면서 목회자 세미나를 다니고 4년 동안 고생한 것 주님은 아십니까? 하면서 속으로 억울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셨다. ‘너의 가족은 너의 아내도 너희 성도들도 희생하고 다 희생했는데, 미국에 있는 교회도 다 희생했는데, 선교비도 보내주고 기도로 준비해 주었는데, 너는 희생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는 것이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제가 희생한 것이 없었다. 제가 다니면서 강의만 하고 그랬다. 선교사라고 하지만 너무 부끄러웠다. ‘다 희생했는데 나만 희생이 적었구나!’ 했다. 의자들, 커튼, 에어컨, 등등 모든 것이 성도들의 물질로 된 것이다. 방석도 선교선물로 아내가 다 만든 것이었다. 모든 것이 그러는데, 너는 희생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제게 물어보시는 것이 “너는 아르헨티나 있는 동안 얼마나 나에게 나아왔느냐?” 하셨다. 기도를 많이 했다. 새벽마다 기도했지만 그것은 사역을 위한 기도였다. 일을 위한 기도였다. 또한 현지인 성도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위해서 함께 기도했다. 주님께서 물어보신 것은 “네가 내게 얼마나 나아왔느냐?” 의 말씀인 것이다. 시간이 생명인데, 제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 없었다.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주님 다시 제가 돌아오게 해주세요. 아이가 아파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형편도 안 되지만 주님께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기도했다. 다시 시작해 달라고 얼마나 통곡하고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성령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성도들이 찾아오고 저녁에는 성경공부를 했는데 제가 1년 동안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한 것보다 그 일주일이 시간이 성도들이 더 풍성한 양식을 공급 받을 수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씀을 주신 것이다. 6개월 동안 스페인어를 안 했는데도 스페인어가 정확하게 나왔다. 생각하지 않는 말씀들이 제 입을 통해서 그런 예화들까지 나왔다. 저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전에는 그 성경공부와 설교들을 깊이 있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깊이 있게 할 수 있는 그런 말씀들을 주님께서 주셨다. 성령께서 오시니까, 성령께서 임하시니까, 성령의 권능을 주시니,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가 있게 하셨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일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 이슬람의 영을, 저 견고한 힌두교, 불교, 무신론의 영을 어떻게 우리 힘으로 파괴할 수 있고, 예수님의 천국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할 수가 없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이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된다. 우리 청년들이 빈들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도 없는 것으로 한 적한 곳으로 가야 된다. 주님만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100% 성려의 지배를 받고 성령이 임하셔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을 위해서 21세기 목자들이 되기를 특별히 우리 청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담임 목사님 마무리 말씀. 사랑 PRS란-Public Reading of Scription. 그래서 사랑의 교회 공동체 성경읽기이다. 우리가 기준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임을 확신하여 우리 교회는 암송과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선포해야 한다.
*요한계시록1:3,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예언의 말씀을 보면 오늘 시내 산에서 우리가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올라온 것으로 생각하고출애굽기 19장을 읽어보자 듣고 읽자. 19:20절까지 듣고 합독한다. -공동체 성경읽기-
♣요약 우리 사랑의 교회의 청년과 청소년들 그리고 우리 어린이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올려드리고 자녀들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청년들과 청소년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주셔서 기도하는 자가 되고 주님의 음성을 받아서 성령 충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세처럼 우리 믿음의 4대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사모하며, 매주 부흥헌신 토비새로 달려 나와 시대의 사명자로 비상하며,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믿음을 보고하고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가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메시야 탄생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은 양치는 목자들이었다. 목자라는 직업은 당시 가장 천한 직업에 속하였는데, 본문을 통해 본서는 복음이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들에게 맨 처음으로 전해졌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는 강하고 능력 있는 자보다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때로 외양을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이는 양인 우리들을 영적으로 돌보시는 목자로서의 예수님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다. 본문은 목자들이 천사들의 이야기와 체험한 바를 전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즉시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찾아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들이 구유에 누인 아기가 메시야인지 여부를 율법적으로 따지거나 의논하지 않고 소박한 믿음으로 달려가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점에서, 믿음은 학식이나 이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즉시 실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