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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21일)
제목:“들으시는 하나님”
말씀: 민수기 11:1-3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오우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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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1:1-3,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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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먼저 광야에서라는 민수기의 제목을 가지고 개론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고 좀 본문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민수기의 원 제목은 히브리어로 ‘배 미드바르’ 라고 합니다. 즉 ‘광야에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원어 성경에서 모세의 오경은 그 제목을 보통은 첫 단어를 제목으로 삼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민수기는 그 전통을 따르지 않고 다섯 번째 단어를 따르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민수기에는 출애굽 한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 일어난 사건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I. 첫째, 광야에서.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광야는 고통(苦痛), 연단(鍊鍛), 시련(試鍊) 등으로 이해되곤 하는데요. 하지만 사실 광야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광야(廣野)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데요. 구약에서는 가난한 땅으로 가르켜지고 신약의 관점으로 볼 때는 우리가 가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광야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증명(證明)해내곤 하는데요. 어떤 이는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하고요. 어떤 이는 연약(軟弱)한 사람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믿음이 견고(堅固)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광야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을 갖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현재적으로 임재 하는 분이시고,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니, 광야는 그분을 경험하는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서 신자는 단순히 고통이나 시련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하여 증명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경험하며 약속의 땅을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민수기는 바로 이에 대한 기록이고요. 광야에서 만난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사,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가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라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11장 1절에서 3절의 본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우리는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II. 둘째, 백성들의 악한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
-여기서부터 좀 무서운 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제가 좀 밝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지, 긴장(緊張)하며 이야기를 했는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심판(審判)의 말을 말하다 보니 편안히 얘기하면 안 될 것 같고 또 너무 진지하게 얘기하면 굳을 것 같아서 그냥 적당하게 하려고 하니까 여러분들도 그냥 잘 이해하시면서 말씀을 좀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3절에 보면 다베라라고 불리게 된 이 곳에서 1절을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요.

*민수기 11:3,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다고 기록이 돼 있습니다.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악으로 원망하는 백성들이 되었다. 이 정도의 문장이 될 것입니다. 악으로 원망한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하나님 앞에서 했는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가 않습니다. 악으로 원망했다는 표현으로 보아 악이 먼저는 마음속에 있었고, 그 마음 안에 담겨 있던 악이 입술로 발화가 되어서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는 실제적인 어떤 표현이 만들어진 상황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직접적이고 노골적(露骨的)인 거친 표현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다소 절제된 표현이었지만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하나님을 조롱하거나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공격적이고 불순한 표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이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였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기록된 백성들의 일반적인 문제와 동일한 문제였을 거라고 추측을 합니다. 또한 오늘 민수기의 본문과 구조상 짝을 이루는 출애굽기 15장의 말씀을 보면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였는데, 이들이 모세를 원망했던 이유는 사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물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에 사건도 직접적으로는 물과 같이 중중요한 자원이 결핍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 백성들도 이런 결핍(缺乏)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전염병(傳染病)처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사람의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악한 말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조금 전에도 말했던 출애굽기 15장에서 마라에서 백성들이 했던 말을 들어보면은요. 백성들은 모세와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무엇을 마실까, 우리는 무엇을 마셔야 하나?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서 이후 신 광야에서 원망하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차라리 죽여 버리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렇게 이야기 하고 했던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떡을 배불리 먹었을 때, 내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행복했을 텐데 하나님을 이렇게 악한 말로 조롱(嘲弄)한 것이죠. 그런데 오늘 1절에 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1:1,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네 여기까지만 읽겠습니다. 네 여기 보니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악한 말로 원망함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마음속에 가득 차 있던 악이 입을 통해 소리로 발화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악한 말을 들으셨고, 진노(震怒)하셨고,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 그들을 불사르게 하셨습니다. 심판의 불이 백성들의 진영에 떨어진 것입니다. 2절을 보니,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2절을 보니 불로 심판받는 이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부르짖습니다. 얼마나 그 불이 강렬(强烈)하게 타올랐는지 백성들은 큰 재앙(災殃)을 당하여 절규(絶叫)에 가까 가까운 부르짖음으로 긴급(緊急)하게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모세를 찾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듣고 이같이 강렬한 불로 심판을 하셨을까요?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의 말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곤 하는데요. 잠언 4장 24절은 말하기를,

*잠언 4:24,
24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라고 경고 하였구요. 야고보서 1장 26절은,

*야고보서 1:26,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성경이 이렇게 사람의 말에 대해 경고하는 것은 그 말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관계를 깨뜨리고 분열(分列)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파괴적(破壞的)인 영향력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강조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런 말들이 악한 말이 되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될 때는 이 문제는 다른 차원(次元),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민수기 14장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원망하는 자들에 대해서 경고를 하셨는데요. 민수기 14장 29절에서 30절을 보면,

*민수기 14:29-30,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그 약속하신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서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0절에 말하기를,

*고린도전서 10:10,
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원망하다가 멸망하였다고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특징에 대해서는 주의 형제 형제였던 야고보와 같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셨던 유다가 유다서에서 어 성경의 구절들을 보면 이들이 과연 누구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한번 볼까요? 유다서 1장 5절입니다.

*유다서 1:5,
5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않은 자들을 멸하셨으며.
-출애굽한 백성들 중 멸망당한 자를 가리켜 유다는 말하기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였습니다. 또 유다서 1장 10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유다서 1:10,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영적인 지식이 전혀 없고 단지 이성은 짐승처럼 자기 자신의 현재적인 피로를 본능적으로 느끼고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한 짐승 같은 자들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유다서 1장 15절을 한번 같이 해볼까요?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서 1:15,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 또 짐승 같이 살아가는 이 사람들이 줄을 거슬러 모든 완악한 말로 하나님 앞에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끝으로 우리가 유다서 1장 16절, 18절-19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16절입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다서 1:16,18,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8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그러니 유다는 이들을 말하기를 정욕대로 행하는 자세, 자신의 정욕대로 하나님 앞에 행하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차라리 애굽에서 내가 죽임을 당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 그 사람들은 심지어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과적으로 지금 하나님 앞에서 단순히 말해 실수하는 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서 파손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는 소경이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고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경건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경은 그들을 성경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하니, 얼마나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자들을 마음껏 해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인내하셨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했는데요. 문법적으로 원망했다는 말은 단회 적으로 한 번 내뱉고 끝난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해 하나님을 심판받고, 멸망 받는 그 시점에까지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이란 걸 보여줍니다. 더욱이 진영 끝에서 그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소통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주의하여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인생의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겁니다. 자원의 결핍이나 그 밖의 문제로 인해 많은 인내를 요구하는 때를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표현들은 우리의 존재와는 비교할 수 없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된 말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만홀(漫忽)이 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말과 혀로 모욕(侮辱)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높으신 그분을 찬양하는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경건을 무너뜨리지 않고 단정하고 고요하며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가득히 안고 언제나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입술에 재갈을 물리고 그리고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서 우리의 말과 혀를 다스릴 때 우리의 영혼은 참된 경건을 이루고 영원의 온전함을 이루어 가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이 말하는 성경의 교훈을 이 시간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잠언 1:20,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오늘 두 번째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2절을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우리 1번 더 같이 읽어볼까요? 같이 한번 큰소리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III. 셋째,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민수기 11:2,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한번 집중해서 본문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어떻게 됐습니까? 불이 꺼졌더라.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여러분 여기에 바로 우리의 위로(慰勞)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怨望)하는 소리만을 듣는다면 얼마나 이것이 우리에게 비극적(悲劇的)인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감사(感謝)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편 5장 3절에,

*시편 5:3,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요한일서 5장에서도 이렇게 고백하는데요.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을 안즉, 성경은 이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기도에는 놀라운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 개인의 어떤 간구(懇求)를 들으시는 차원(次元)이 아니라, 죄를 사(赦)하는 기도, 죄에 대한 심판(審判)에서 생명(生命)을 구원(救援)하는 기도(祈禱)였던 것입니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심판의 불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 소멸(消滅)되었습니다. 심판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怨望)과 불평(不平)만을 들으시는 분이 아니었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하시고 심판을 소멸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은 피와 땀을 흘리며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눈이 심히 피곤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조차 기도하는 것을 어려워해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그 순간 졸고 말았던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감겨진 우리의 눈 안에서 산만(散漫)해진 정신이 하나님께 우리가 집중(集中)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을 경험(經驗)합니다. 육체는 피곤(疲困)하고 일상적인 일부터 맡고 있는 교회 사역에 이르기까지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이 우리 자신의 머릿속에 오가서 내가 기도를 하고 있는 건지, 상상을 하고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어지럽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상적인 생각으로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서 생각 없이 쏟아내는 단어의 반복이나 차라리 의미는 알지 못해도 소리는 계속 낼 수 있으니 차라리 방언으로 기도하자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방언(放言)으로 기도하는 때도 있습니다. 더욱이 어떠한 때는 불안(不安)과 염려(念慮)가 마음을 붙들고 놓지 않아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흐리게 하여 기도에 더욱 어려움을 주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모든 기도의 수고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며 심지어는 나의 기도를 통해 영혼의 죄를 사하시고 공동체(共同體)를 구원한다는 이 놀라운 사실 앞에서는 모두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조금 전 우리가 읽었던 요한의 서신에서 우리는 무엇이든지 구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을 안다는 사도의 말을 읽었죠?

*요일 5:15,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바로 다음 구절에 사도는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요일 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죄범 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야고보서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야고보서 5:14-15,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고, 죄로 인해 고통 받을 때 그 영혼을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기도가 들으시는 하나님의 강권적(强權的)인 역사를 통해 한 영혼을 구원해내고 마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위대(偉大)한 힘은 심판대(審判臺) 위에 서있는 죄인을 이끌어내어 생명(生命)의 길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기도도 이와 같은 역사 안에 힘이 있었는데, 만약 우리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죄(罪)를 범(犯)하여 고통(苦痛) 중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부터 저는 11년 전 한 교회에서 고등부를 맡아 사역(事役)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맡았던 고등부는 대략 240명의 아이들이었는데요. 240명 아이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했던 그해 여름 수련회에서 집단적(集團的)으로 이 아이들이 거듭나고 변화(變化)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씀이 시작된 때부터 무언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요. 설교가 끝나고 기도회가 시작되자 아이들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자신들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위해 살려주시기를 눈물을 흘리며 간절(懇切)히 기도하였습니다.

부모님들의 성화에 밀려서 겨우 저녁 집회만 참석하기 위해 학원 끝나고 가방 하나 떨렁 메고 들어왔던 아이들이 집회(集會)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차를 타다가 내가 이 수련회(修練會)에 참석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後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서 우르르 차에서 내려 다시 집회실로 들어와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련회에 가기 전에는 아니 수련회가 시작하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단 5분도 기도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첫째 날, 저녁부터 말씀을 듣고 기도하기 시작하는데 새벽 1시가 돼도 기도가 멈추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다음 날 일정(日程)을 진행하기 위해서 저는 억지로 기도회를 마무리하고 아이들을 재웠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아이들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데 전날과 똑같이 기도가 멈춰지지 않고 또 다음 날 일정을 위해 억지로 새벽 1시의 기도회를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신기(神奇)한 것은 은혜 받는 것은 똑같지만 고등학생과 장년들은 좀 다릅니다. 장년들은 기도에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기도하잖아요. 고등학생들은 간식을 먹고 들어와서 기도합니다. 수련회가 끝나고 주일이 돼서 아이들이 다시 주일에 모였습니다. 예배 시간 말씀을 전하는데 이 아이들이 말씀을 들으며 눈물을 멈추지 않는 겁니다.

부모님들은 수련회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리 아이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되어 돌아왔다고 저를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등부 아이들이 얼마나 변화(變化)가 어려운지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저도 고등부를 맡고 나서 얼마나 아이들과 씨름을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부터 11년 전이었으니까 아주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저도 그때는 지금보다 혈기왕성(血氣旺盛)하고 아주 특심이 있는 열혈 사역자였습니다. 지금은 좀 많이 착해졌거든요. 저는 고등학생들이 허투(虛套)로 예배(禮拜)하는 게 너무 싫었습니다. 선생님들은 다 아이들을 달래주지만 누군가 하나는 악역을 맡아야지 하며 사냥 시간에 아이들의 핸드폰을 보면 저는 그 아이 손을 잡고 기도해주는 대신 끌고 나가 제발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말씀 시간에 졸면 내가 너희들 부모님을 설득해 줄 테니까. 제발 말씀시간에 안 오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했습니다. 한번은 설교를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설교를 듣지 않는 거예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하진 않겠지만, 설교가 시작되고 나서 3분 정도 지난 후에 저는 성경책을 덮고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또 부탁했습니다. 제발 너네 교회를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교회를 나오지 말라고 설득을 하는데, 다음 주에 또 나와서 앉아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달래고 윽박지르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이 전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겨울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려고 준비를 하는데 너무 복통이 일어나는 거예요. 힘이 들어서 병원에 가보니 식중독(食中毒)이었습니다. 원래 수련회 전에 제가 교사를 데리고 기도회를 인도해야 하는데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어서 부장 선생님께 전화를 했습니다. 당시 부장 선생님이 참 신실하신 분이셨는데요. 이분이 제 전화를 받고 정신이 퍼뜩 든 겁니다. 원래 겨울 수련회는 보통 교회에서 진행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별로 신경 쓸 게 없습니다.

끝나고 아이들 돌아갈 때 손에 쥐어주는 간식 정도만 맛있게 준비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근데 갑자기 설교자가 식중독에 걸리고 교사들도 함께 교사들과 함께 기도회를 못 나오겠다고 하니 위기감(危機感)을 느낀 이 부장 선생님이 선생님들에게 긴급 문자를 남기고 저녁에 모든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겨울 수련회 때 제가 맡았던 고등부의 영적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그 수련회에서 아이들이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고, 기도했던 교사들이 이내 아이들의 뚜렷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당시에 밤새 구토하고 오전에 겨우 일어나 설교를 마무리하고 설교 전에 죽 한 그릇 먹고 나와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설교하고 다시 집에 들어가 구토하고 준비하고 죽 한 그릇 먹고 설교했는데 하나님께서 선생님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들의 영혼을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해 여름이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여름 수련회였죠. 선생님이 선생님들이 수련회 전부터 이번에는 아예 저한테 기도에 오지 말라고 말하더라구요. 말씀을 집중해서 준비하라고 하면서 수련회 전부터 교사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회장에 도착해 보니, 선생님들이 말씀을 준비하는 저를 위해 마련해 놓은 원룸의 저를 감금시켜 놓고, 본인들은 밖에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회 전에 제가 그 장소에 도착을 해보니 모든 선생님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님께서 이 밤의 역사하사 아이들의 영혼을 위해 일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름 수련회 저는 매일 저녁마다 3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설교했고, 설교를 마무리하며 누가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겠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성령께서는 아이들의 온 영혼에 큰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할까요? 왜 우리가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며 왜 우리는 모일 때마다 지도하는 일에 힘써야 할까요? 왜? 우리는 토요일 새벽마다 모여서 우리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영적인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할까요? 단 한사람의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판으로 타오르던 불길을 꺼뜨리는 힘이 있는데, 7천 명이라는 기도의 사람들이 매주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위해, 교회를 위해, 국가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우리 주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고 오히려 다른 영혼(靈魂)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광야(廣野)를 지나는 가운데 불편하고 인내해야 되는 상황(狀況)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맡겨드리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수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데, 영혼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나의 간구를 들으시고 영혼을 죄에서 건져내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뿐인 인생인데, 어려운 형편을 푸념이나 하면서, 원망 가운데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영혼을 구원하시는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여 지도의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인지를 우리는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부모님 혹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오랜 시간 기다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있으시다면 낙심(落心)하지 마시고 다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의인의 기도는 간구(懇求)하는 힘이 있고 영혼(靈魂)을 죄에서 구원(救援)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참여(參與)하지 않는다면 그런 인생에 어떤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바로 그 일에 있어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지금은 우리가 한마음이 되어서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의 죄(罪)를 사(赦)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계십니다.

♣요약
우리는 많은 인내가 필요한 광야 같은 인생길에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과 간구로 날마다 승리하여 매일의 찬송과 감사가 하늘에 사무치게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생명을 구해야 하며, 사랑하는 가족, 친척, 친구, 이웃에게 영혼의 죄를 사하며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큰 구원 역사를 속히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절규하며 기도해야 하며, 7천 기도용사를 필두로 사랑의 교회 모두 영 가족들이 ‘2033-50 비전’으로 맹렬히 기도할 때, 대한민국 영적 재건과 세계선교를 마무리 하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승리를 경험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우리는 말씀을 들은 대로 반응할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영혼의 죄를 씻기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심과 기도할 때마다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심을 확신하여, 힘든 역경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더욱 열심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을 기도의 자리에서 건져내는 놀라운 역사들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마다 주님의 자녀들로 기쁨으로 차고 넘쳐나길 소망한다.

*민수기 11:1-3, 요약.
-이스라엘 백성의 죄는 그들이 여호와를 원망했다는 것이다. 율법(律法)이 죄(罪)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없애지는 못한다. 율법이 죄를 저지하기는 하지만 이기지는 못한다. 그들은 불평하였다. 그들이 감사할만한 것을 그렇게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할 만한 어떤 꼬투리를 발견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죄로 인해 받으신 모욕(侮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진노(震怒)하셨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이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懲罰)하심으로써 심판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그들은 모세를 찾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그들의 친구를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그들을 위한 모세의 중재 기도는 응답되었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므로 진노의 불이 꺼졌다. 불평하는 백성의 수치(羞恥)를 영원히 알리기 위해 그곳을 새로운 이름으로 칭하였다. 그곳은 다른 사람들이 듣고 두려워하며 경고(警告)를 받아 그들처럼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베라` 곧 `불사름` 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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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8월 18일)
제목: "시대정신이 아니라 신앙정신입니다"
말씀: 다니엘 3:13-18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외, 영광찬양대 외.
대표기도: 전승현 부목사님 외.
사회: 임병영(1부), 문진호(2부), 이기호(3부) 임상규(4부)부목사님.
설교자: 류응렬 목사님-초빙(와싱톤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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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3:13-18,
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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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 말 중에 Zeitgeist라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시대정신’이라는 단어입니다 시대정신 어느 시대이든지 그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 철학, 생각을 지배하는 주도하고 있는 것을 두고 시대정신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시대정신에 휩쓸려서 그들의 삶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되는 것이 우리의 이성과 맞지 아니하고 우리의 판단에 옳지 않다 하더라도 대항하기보다는 시대정신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시대정신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정신, 하나님 말씀에 뿌리내리는 신앙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님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는 일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과감하게 시대 물결을 거슬러서 신앙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오스기니스가 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잘 보여주는 책으로 ‘선지자적 반시대성’(prophetic untimeliness) 타임리니스, 시대에 맞도록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untimeliness-언타임리니스, 반시대적으로 살아가는 순지자적 사고를 가지고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청중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향해서 살아가는 기독교가 아니라, 메시지가 주권을 쥐고 있는 교회다. -오스기니스-
-이 시대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되는 것은 사람들의 목소리, 시대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교회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에드비 토저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강력한 책으로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충돌하라. 부제목이 이러합니다. 세상과 동행하는가? 성령과 동행하는가? 적당히 타협하며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그 편안한 길을 철저히 반대하신다. 세상과 분노하라. 겁먹지 말고 당당히 맞서라. 그리스도인들이여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지 말라 세상과 충돌하라.
-에드비 토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내용은 보시겠습니까? 사람들은 가능하면 세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야 되지 않은가? 세상도 하나님이 주신 세상인데 가능하다면 기독교인이라고 등을 지면서 살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을 흉내 내지 말라. 때로는 세상과 분노하고 충돌할 각오로 싸워가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시대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진리, 주의 뜻을 따르는 성경정신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파리올림픽을 보면서 너무 가슴 아픈 일이 하나 있었죠? 드레킨 사건,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여장을 한 남자가 배우로 나오고 트랜스젠더들이 나와서 함께 공연하고 있는 모습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하고 조롱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만일 불교였다면, 이슬람교였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이런 일을 기독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이렇게 기독교가 조롱을 당하고 있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인가? 그냥 예술의 한 행위니까 문화의 한 행사이니까 그냥 보고 넘겨야 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인은 세상 이미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은 그러하니까 세상은 멀리하고 우리는 따로 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잘못된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신앙에 근거해서 과감하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무엇인지 목소리를 내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최근에 이 상황을 보면서 참 감사한 것은 미국의 CS 파이어라는 한 커뮤니케이션 회사에서 올림픽에 광고하기로 한 것을 취소를 한 일입니다. 엄청나게 그 광고비를 들여야 되고, 올림픽과 월드컵은 가장 광고하기에 좋은 시기인데 기업이 이윤을 감소하고서라도 이윤을 포기하고서라도 광고를 내린 이유를 CS 파이어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들 우리는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However, 그럼에도 불구하고, We will not be part of the, 우리는 절대로 이 사람들의 offensive, 너무나 공격적이고 unacceptable, 우리가 허용할 수 없는 mockery of the Last Supper, 예수 그리스의 최후의 만찬을 조롱하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광고를 내립니다.”
-미국의 CS 파이어라는 한 커뮤니케이션 회사-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것인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기업의 정신인데 저렇게 기업의 이미지를 먹칠을 하고 이윤을 포기하면서 저렇게까지 해야 할 것인가? 이 본사가 미시시피에 있는데, 미시시피의 가문을 주지사 테이트 리브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논평을 내었습니다.
 
“I’m proud of, 나 너무나 이 사람들이 자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조롱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God will not be mocked.” -미시시피의 가문을 주지사 테이트 리브스-
-하나님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그 때문에 우리는 광고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런 시대에 이윤을 무시하고 때로는 자신 얼굴에 먹칠을 당하면서까지 이렇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지금 이 시대는 너무나 거센 세속의 물결이 우리를 잠식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성애자들 그리고 인테 기독교 세력들 너무나 교회를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침잠하고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이런 시대, 이런 잘못된 시대정신이 우리 자녀들 가슴 속에 마치 DNA처럼 먹물처럼 파고 들어오는 이 시대 아닙니까? 안방에까지 침투하고 있는 잘못된 이런 사상들, 이런 시대정신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는 이런 상황에 우리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설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시대를 이해할 것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지 한 번 인생을 어떻게 살아내어서 이 시대의 물길을 거스르고 하나님 앞에 살아갈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말씀을 통해서 그 옛날 시대정신을 거부하고 오직 신앙으로 살아낸 하나님의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부터 약 2천 600년 전에 바벨론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벨론이 인도의 북부, 에티오피아 그리고 중동 전체 지방 또 동양의 인도까지 점령했던 대제국이었습니다. 이 대제국을 완성한 왕이 느브갓네살 왕입니다. 하나님 나라 유다까지 침공을 해서 세 번에 걸쳐서 포로로 잡아갑니다. bc 605년에 먼저 친국에서 무너뜨리고 그때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갈 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도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신세였지만 그들의 삶은 평탄했어요. 왕이 그들에게 궁중 교육을 다 시켰고 관리로 삼아서 평탄한 삶을 살게 했습니다. 평탄하게 살았던 이들의 삶의 어느 날 고난의 바람이 불기를 시작을 합니다. 3장 말씀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어느 날 거대한 신상 우상을 세웁니다. 높이가 30m나 되고 높이가 3M나 되는 거대한 우상 왜 왕이 갑자기 이렇게 우상을 세웠을까요? 2장 말씀을 보면 잘 이해가 됩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어느 날 귀한 꿈을 꿉니다.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을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이 나아가서 꿈 풀이를 해줍니다. ‘왕이여, 지금 왕의 왕권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져 가고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 세상의 왕권은 다 사라질 날이 오고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왕은 듣고 너무나 귀하게 여겼습니다. 다니엘과 새 친구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었습니다.왕이 그 꿈을 꾼 지는 왕 직에 있은 지 2년째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이후로 16년 지난 이후에 왕 직에서 인제 18년째 였습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왕권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권이 더 강성해져 갔습니다. 왕의 마음도 점점 더 교만해져 간 겁니다. 왕은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상 우상을 세우고 바벨론의 도를 다스리는 수천 명의 관리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수천 명의 관리들이 줄을 서 있고, 궁중에 음악을 켜는 수백 명의 악사들을 다 불러 모읍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엎드려서 금 신상 앞에 절하라. 절하지 아니하면 저기 맹렬(猛烈)이 타는 풀무 불에 집어던져 죽이리라.’ 사람들 앞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천지를 울리는 음악 소리, 수천 명의 관리들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금 신상 앞에 우상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8절에 보면, 그 때에 라고 말을 해요.
 
*다니엘 3:8,
8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그때에 천하 모든 사람들이 다 무릎을 꿇고 우상 앞에 절하는 그 때에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했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있었어요.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겠노라고 오직 유일한 죽은 대신은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겠다. 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면 찾아오는 것이 핍박이죠. 사람들이 사람들을 참사하기 시작합니다. 12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다니엘 3:12,
12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왕은 분노했습니다. 포로 잡혀온 주제에 높은 관직을 주어서 평탄한 삶을 살게 했는데,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은 것은 마치 왕권에게 도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왕은 평소 때 이 세 사람의 충정을 잘 아는 왕이었습니다. 왕이 그들을 불러 모읍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정말 절하지 아니했느냐?’ 기회를 줘요 이제라도 준비했다가 음악이 울리거든 절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내 손에서 너희들 구해줄 신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놓인 세 사람, 왕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답은 짧고도 즉각적이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절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대정신을 따라서 거대한 물결을 따라 휩쓸려 걸어갈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신앙 정신에 비추어서 아니오! 하고 꿋꿋하게 무릎을 펴고 서 있는 세 사람,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택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시대 물결이 우리를 휩쓸려오고, 우리 자녀들 가슴 속에 세속화의 바람을 DNA처럼 심어놓고 이런 시대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이런 시대를 거스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며, 인생 그리고 세상에서도 승리할 수 있는 길일까요? 우리 부모님들이 어떻게 살아내는 것이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리고 한 번 사는 세상에 하나님께 가장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길일까요?
 
오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삶을 통해서 두 가지의 승리의 비결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입니다. 시대정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Q. 시대정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I. 첫째, 하나님 앞에 타협 없는 자세로 서라.
 
-타협 없는 자세로 서라. 시대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겸손하지만 당당하게 써라. 오늘 세 친구들은 왕의 명령을 들어야 될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포로 잡혀온 사람들입니다. 왕이 높은 관직을 주어서 평등한 삶을 약속한 왕 아닙니까? 이 정도 되면 왕에게 한 번 정도 절해야 될 사람 아니겠어요? 왕의 명령은 고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왕이 세 사람에게 지금이라도, 지금이라도 준비했다가 어찌하든지 살려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왕 아닙니까? 이 정도 되면 한 번 정도 우상 앞에 저라는 것이 왕에 대한 예의요. 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길이요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납득할 만한 이런 타협 앞에 그들은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왕이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절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살아야 됩니까? 이 세상도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인데 한 번 정도 절한다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몰라주실 것도 아니고 굳이 그렇게 해서 그 젊은 날 청년 시의 삶을 들여야 한단 말입니까? 이 타입이라는 컴프로마이즈("컴프로마이즈(compromise) 타입"은 한국어 보안 용어로, 시스템이나 네트워크가 보안 위협에 의해 손상되거나 침해된 상태를 의미함))라는 이 타입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안전한 기독교를 만들어내어요.
 
여러분, 기독교가 비난을 당하는 조롱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누구신가? 라고 후 이즈 지어스, 라고 했는데 The only way to salvation,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 온리(Only) 라는 단어를 빼버리면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이웃을 사랑하라. 사람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고, 타인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얼마나 좋은 종교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기독교가 될 수 있는데 왜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요.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죠
 
Who is JESUS? 누가 예수인가? The only way to GOD! 유일한 하나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주님이라는 것 Only 라는 이 단어 하나 때문에 모든 문제가 일어나는 것 아니겠어요? 기억을 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 천국에 이르는 길은 Only JESUS! 분일 줄 믿습니다. 불교도 이슬람교도 착하게 살아도 다 구원의 길이 있다면 싸울 이유 하나도 없죠. 기독교는 최고의 종교가 될 것이에요.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피 묻은 십자가 부활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살려내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최근에 엘버트 몰로 총장님이 쓰던 베스트 총장님이 쓴 책이 한 권이 있습니다.


“세속화의 폭풍우가 몰려온다.”(The Gathering Storm), -엘버트 몰로 총장-
-폭풍우가 몰려서 우리를 잠식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거대한 시대정신으로 광풍처럼 몰려오는 세속화가 어떤 것인지, 우리를 잠식해 들어가고 젊은이들 가슴 속에 잘못된 사고를 심어주고 있는 이런 사상들,
 
여러분 세속화라는 것이 결국에 어떤 것입니까? 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의 기쁨, 나의 행복, 나의 만족 ,자기 성취 모든 자기 행복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세속화의 물결, 이 물결 속에서 몰로 총장은 강력하게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 물결에 대항하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담대하게 당당하게 세속화에 맞서야 합니다. 지금 세속화가 중에서 가장 우리를 잠식해 들어오는 것 중의 하나가 동성애 문제 아니겠어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비판하면 차갑게 여기고 그렇게 동성애 이 시대 동성애를 가지고 사람들이 소리를 높이고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변개치 말아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어요.
⓵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성경의 진리의 말씀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⓶다른 하나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고결한 사람이에요.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어진 그걸 무너뜨리면 하나님이 마지막 무너뜨리는 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소리를 내고 있는 이런 시대가 되고 있는 겁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라는 단어 유동하는 오늘 내일 따라서 달라지는 성이라고 오늘은 내가 남자가 되었다가, 내일은 원하면 여자가 되기도 하고 모래는 원한다면 고양이가 되기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 성을 자기가 선택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뉴욕에서는 공식적으로 31가지 성을 인정을 하고 있어요. 지금 캘리포니아 같은 경우에는 우리 어린 자녀들이 성 정체성을 겪으면서 내가 성 전환 수술을 해야 되는가, 바꿔야 되는가를 고민할 때 부모님들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부모님들이 조언하고 권면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드는 법을 통과를 시켰어요.
 
이게 지금 상상이 안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캘리포니아 그리고 미국뿐이겠습니까? 한국에도 들어와서 언제 우리 앞에 펼쳐질지 모를, 눈앞에 펼쳐질 미래를 내일이 그날이 올 수 있는 겁니다. 왜 우리는 이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소리를 쳐야 될까요?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아닌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하나님 우리를 소중하게 만드시고 고결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인간에게도 가장 행복한 길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 삶 속에 이런 타입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없습니까? 우리 사랑의 교회 모토가 무엇입니까? 제자 훈련 잘 해서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부름 받은 제자들일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 보내 받은 제자라고, 우리는 그렇게 외치고 있지만 여러분 세상에 보내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변화시키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너무나 멋진 훈련의 모터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쁠 말이에요. 우리는 멀쩡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들이 누구 길래 나를 변화시키냐고, 왜 그들이 변화가 필요하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삶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를 향해서 나아가는데 세상의 목소리에 잠식되어서 우리의 사명을 잃어버린다면 그보다 더 큰 컴프로마이즈는 타입은 없게 될 것입니다.
 
※두 주 전에 저희 교회를 설립하셨던 우리 1대 목사님께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셨어요. 95년 동안 참 멋진 생에 너무너무 아름다운 인생을 마치고 주님 품 안에 안 계셨는데, 제가 하루 전날 뉴저지로 찾아뵙고 인사를 나누는데 하루 전날 돌아가시기 전에도 얼마나 왕성한 목소리로 또록또록하게 말씀을 나누시는지 그렇게 한 시간을 목사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 유언을 하세요. ‘내가 주님께 가더라도 슬퍼하지 마십시오. 내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군천사와 함께 두 손을 들고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박수로 찬송으로 나를 보내 주십시오.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야 이 멋진 유언을 남기고 가시는 목사님 그리고 목사님께서 예배를 제가 말씀을 인도하고 마지막 축도를 할 때, 목사님께서 계속 손에 들고 계셨던 십자가가 하나 있어요. 평생을 간직하셨던 저 십자가 저 십자가를 헤어질 때 저의 손에 맡기시면서 하셨던 부탁입니다. “류 목사, 내가 평생 간직한 십자가 안에 이제 자네에게 맡긴다네.” 정말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저 조그만 나무 십자가가 거대한 바위 덩어리처럼 제 어깨에 부담으로 책임으로 내려왔습니다. ‘세상이 변한다 하더라도 자네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게나. 그 목소리 아니겠습니까? 온 세상이 바뀐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외에 수많은 길이 있다고 동 종교 다원주의자들이 그렇게 외칠 때, 자네는 강단에 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주님이라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그것 외치게나.’
 
그 음성 아니겠습니까? 목사님께서 저희 교회를 개척하시게 된 그 스토리를 듣고 너무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50년 전에 교회를 세우셨는데 한 교회를 같이 몇 목사님이 섬기셨던 때입니다. 주일에 당시 한인 사회 한인 회장 투표하는 날인데, 그 교회 집사님이 회장 후보가 되신 거예요. 그러니 목사님께서 우리 모두 빨리 예배를 마치고 투표하러 같이 갑시다. 우리 집사님 되시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주일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예배자로 나아가야 될 그 날에, 이렇게 관광하는 목사님을 보고는 도저히 같이 참게 할 수 없다고 나오셔서 세운 교회가 저희 교회였습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되겠냐고 묻겠죠. 그러나 주일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날이기에 거룩하게 주님 앞에 영광을 위해서 드린 날이기에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살아내신 겁니다. 그 믿음의 선조들로 말미암아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앞에 서 있는 거예요.
 
우리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휴가철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님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참 감격적으로 예배하는 것 주님이 바라보시고 너무나 기뻐하신 일인 줄 믿습니다. 오늘 한 분이라도 영상으로 예배하고 있는 우리 성도님 계십니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렇게라도 한다면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병약해서 일어나지 못하시거나 연로하셔서 마음이 원하지만 차마 일어날 수 없는 상황, 이슬람 국가에서 때로 예배할 수 없는 상황, 아마 다양한 상황이 있겠죠. 주님도 이해하실 수 있는 상황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 우리 성도님들 온라인으로 하시는 분들 중에 지금 일어나 걸으실 수 있다면 정말 온라인 예배가 누구를 위한 예배인지 한번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내 편의를 위해서 내 자신을 위해서 지금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가장 하나님께 욕망이 되는 일이라고 그렇게 예배를 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세요. 목사님 요즘은 하이브리드 시대입니다. 집에서 재택근무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예배를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사람의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신약이라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개인적으로 주님을 믿음으로 얻는 것이 구원이에요. 신앙은 목사의 부모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예배는 달라요. 예배라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영적인 모든 가족이 한 몸이 되어서 주님 앞에 드리는 게 이게 예배예요. 우리가 언젠가 천국에 이르게 되면 그날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고 주님의 모든 몸 된 지체된, 오고 가는 모든 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영적인 가족을 이루어서 주님을 예배할 날이 다가올 것입니다. 그 날을 미리 맛보는 것이 지상의 예배예요. 예배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만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이 예배인 줄 믿습니다.
 
오늘 예배 예배를 댁에서 예배하시는 분들 중에 일어나실 수 있는 분들이 계신다면 여러분 나오셔야 될 예배는 3부 예배예요.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꼭 미리 준비하셔서 현장 예배 오셔서 함께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예배 자리에 함께 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은 이런 부모님의 예배를 통해서 어려운 시기에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예배하는 부모님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을 격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대정신이 아니라, 성경 정신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일어설 수 있었던 두 번째 이유가 무엇일까요? 타협하지 아니하고 일어날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이 무엇일까요?
 
Q. 시대정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II. 둘째,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서라.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을 믿대 확실하게 믿는 믿음, 사랑의 여러분, 제가 한번 묻고 싶어요. 우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시장을 믿으십니까?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피를 쏟으시고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라는 것을 정말 믿으십니까? 정말 그것을 믿고 있다면 이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머릿속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손과 발을 움직이고 내 삶을 움직이는 거 그것도 우리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풀무뿌리에 집어던지겠다고 말하는 왕에게 이들이 하는 말씀이 뭐죠? 우리 17절 말씀 한번 보시겠습니까?
 
*다니엘 3:17,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 시리이다.
-아멘. 우리 하나님이 계신다면 우리를 능이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실 것입니다. 하나님이라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왕은 천하를 재패 도망입니다. 풀무불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피어오르고 있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지만 그들의 믿음은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삶을 움직이는 그들의 생각을 움직이고, 가치관을 움직이고, 죽음 앞에서 기꺼이 죽음을 결단하게 만든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어요.
 
사랑의 여러분한테 한번 다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정말 그분이 나의 죽은 유일하신 내 하나님이시라면 그 하나님께 집중하고, 몰입하고 내 모든 삶을 살아내고 있나요? 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직장의 문을 열 때 자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 터가 되는 겁니다. 자녀들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요. 내 꿈을 성취해 줄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청지기로서 자녀들을 말씀으로 훈련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게 달라지게 되는 거예요. 물질간이 달라지고 인생의 행복관이 달라지는 겁니다. 남들보다 비교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그런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소 지을 때 그것이 최고의 행복인 줄 믿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섬길 때 주로 섬겼던 지역이 두만강 상류부터 하류까지 많은 곳에 다니면서 지하교회를 숨겼던 청년 시절이었습니다. 주로 섬겼던 지역이 남평 그리고 왕청, 도문 이런 지역이었어요. 제가 한 도문에서 우리 지하교회 청년들을 섬기러 갔을 때였습니다. 연길에 며칠간 머물다가 가는데 그 집 주인이 저에게 그렇게 말씀을 해요. ‘목사님, 그 도문에 가면 그 지하교회 리더가 여성입니다. 우리 교회에 사흘 동안 머물다가 갔는데 우리 집에서 사흘 동안 머물다가 갔는데 21살짜리 그 앳된 처녀가 시골로 간다고 하니까 걱정이 돼서 물었어요. 너 정말 가려고 하느냐? 갑니다. 겁나지 않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두렵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사실 신앙에서 그렇게 깊은 성도님들이 아니셨어요.그런데 이 말이 너무나 그들 가슴 속에 새겨진 겁니다. 4시간, 5시간 가까이 걸려서 그 도문으로 갔어요. 두만강 하류입니다. 바로 저 넘어 북한 초소가 여기저기 보이는 곳이에요. 제가 갔을 때는 그 자매가 온 지 1년 지났을 때고, 이미 7명의 청년들이 모여서 예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5시부터 8시까지 예배하고 말씀 나누고, 식사 후에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경제 활동을 위해서 술을 놓고 그리고 다시 예배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몇 명 아이들은 강 건너에 넘어온 북한 청년들이었고, 함께 이렇게 교회를 이루고 있었어요. 그 자매가 들려준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역사도 행하시나 싶었어요. 처음에 그 마을에 왔을 때 젊은 처녀가 시골 마을로 들어오니까, 모든 마을 사람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경계하면서 말 한마디 걸지 않더래요. 여러분 중국에도 요즘 젊은이들 시골이 없죠? 다 도회지(都會地)로 떠나갑니다. 그 멀쩡한 처녀가 시골에 왔으니 혹시 북한에서 보낸 스파이는 아닌가, 통무다는 아닌가, 그렇게 했다가 1년 동안 이 자매가 아무 말 하지 아니하고 그 어르신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한 정성으로 숨겼어요. 1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마을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감동해서 우리 마음에 우리에게 저 천사를 보내줬다고, 그때부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하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줬어요. 제가 얼마 후에 그 자매를 그 시골에 보낸 선교사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선교사님 지금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을에 가서 교회를 세우라는 마음을 주셔서 누가 가겠냐고 했더니 자매가 자원을 했어요. 제가 한 달 생활비와 종이 한 장을 쥐어서 보내었습니다. 주소가 나와 있는 종이 한 장, 아무것 없이 그 시골 마을이 쓰여 져 있는 주소 한 장 들고 들어가는 한 자매, 두렵지 않는가?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사랑의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 절대적으로 믿는 그 하나님 그 믿음이 우리를 움직이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3명의 친구들, 그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들을 움직였던 유일한 한 가지는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절대적인 믿음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줄 믿었지만 세 친구는 하나님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지를 않았습니다. 뭐라고 말하죠?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왕이여,’ 설령 하나님이 우리를 저 풀무 불에 집어던져 그냥 쉽게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겠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왕이여.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줄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 아니하신다 할지라도 왕이요 우리는 우상 앞에 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소중한 것을 들이기 마련이에요. 그리 아니 하신다 하더라도,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들이려는 사람들 우리가 어떻게 타협하지 아니하고 시대의 정신을 거슬러 성경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내 생명이라도 드릴 수 있는, 정말 주님을 위해서 내 시간 물질 내 모든 것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 라는 이 마음 하나 있으면 그때 가능한 겁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헌신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내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에는 다 내 자신 아니겠어요? 내 생명, 내 미래, 내 계획, 내 가정, 내 자녀들 우리가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그 33살의 그 젊은이가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 당신의 피를 쏟으시고 당신의 온몸에 물을 다 쏟으시고 하신 그 일이 뭐죠? 주님은 조롱 받으시고 채찍질 맞으실 때,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라고 조롱을 당하면서 우리 예수님 묵묵하게 하신 기도를 기억합니까?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주님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었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 그 33살의 젊은이 앞에 우리가 아낄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단 말입니까?
 
제 생에 너무나 부끄러운 고백이 하나 있어요. 제가 대학교 1학년 들어가서 저는 예수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해서 심장이 뛰었던 그 대학교 1학년 때, 저희 대학교에 여러분 통일교 교주가 누구죠? 문선명죠. 문선명의 오른팔이 누군지 아시나요? 박보희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분이 학교를 찾아오는데 대통령 만나는 사진 또 수상 만나는 사진 온 학교가 도배를 했어요. 아 제가 그때 예수님을 위해서 심장이 뛰었던 그 20대 어떻게 사탄의 종교, 거짓 종교 사이비 종교의 괴수가 우리 학교를 오는지 제가 맨 앞자리에 가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주님 제가 오늘 강의를 듣는 중에 영의 문을 열어 주십시오. 내가 오늘 통일교회의 허를 찌르리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데 아 그 박보희 씨 제가 그 강연을 듣고 너무 은혜를 받아버린 거예요. 뛰어나가서 사인을 받았어요. 그분의 한 마디가 정말 제 심장을 찔렀습니다.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문선명 선생은 이 진리를 위해서 일곱 번이나 감옥을 다녀왔습니다. 나는 내 스승을 위해서 아직까지 한 번도 감옥을 다녀오지 못한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여러분, 그 거짓 종교의 우두머리도 거짓 진리를 위해서 감옥 한 번 다녀오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정말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이 맞으십니까? 정말 그분이 유일하신 우리의 주님이 맞으십니까? 정말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그 청년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쏟으시고, 당신이 하나밖에 없는 심장을 죽어 있는 내 심장을 위해서 대신 주시고, 내 심장의 피가 그분을 통해서 뛰고 있다면, 33살보다 더 살아가는 날에 주님 앞에 죄송함을 여러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나를 위해서 피를 다 쏟으신 그 주님 앞에 내가 주를 위해서 피 한 방울 흘려보지 않은 것을 부끄럽게 여겨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랑의 여러분, 이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그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내 삶을 움직이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대정신을 압도하는 신앙 정신으로 겸손하지만 당당하게 써서 시대 앞에 서는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세 사람의 고백 앞에 느브갓네살 왕은 분노했습니다. 풀무 불을 당장 일곱 배나 뜨겁게 달구었어요. 당장 세 사람을 풀무 불에 집어 던졌습니다. 얼마나 풀무불이 뜨거웠던지 이 세 사람을 던지는 그 군인들을 불태워 죽였어요.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오직 한 분 죽은 대신 한 분을 위해서 그들의 삶을 불꽃처럼 던진 세 사람의 마지막 최후 순간을 보고 있습니다. 연기처럼 바람처럼 한 줌의 죄로 사라져야 될 세 사람, 느브갓네살이 풀무 불을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어요. 세 사람과 함께 또 한 사람이 그 안에서 걸어가고 있어요. 그 모습이 신의 아들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믿음으로 살아낸 세 사람을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해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 느브갓네살이 세 사람을 불러냅니다. 불탄 냄새 하나 없이 머리틀 거슬린 것 하나 없이 살아서 걸어 나왔어요. 느브갓네살이 내 사랑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천지를 호령했던 왕, 우상을 세우고 무릎 꿇고 절하라고 했던 그 왕의 입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 천사를 보내어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와 이방 왕에서 나오는 높임을 받으신 우리 하나님, 우리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서서 믿음으로 써서 나갈 세상 왕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할 줄 믿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지막 30절에,
 
*다니엘 3:30,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왕이 그들을 바벨론 도에서 높이 들어 사용을 했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앞에서도 존귀 받았던 사람, 그리아니 하실지라도 감사하지만 우리 하나님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올해가 2024년 파리 올림픽 있는 날이죠 있었죠. 100년 전에 1924년에도 역시 파리 올림픽이 있었어요. 그때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한 사람의 이름 기억납니까? 에릭 리들, 100미터에 세계 최고 금메달 유망주였습니다. 체레토 파이어, ‘불의 전차’라는 그 이름으로 잘 알려진 한 사람입니다. 영국을 대표해서 100미터를 뛰는데 100미터 하는 날이 주일이었어요. 기도하고 고민하다가 ‘나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거절했습니다. 본래 월요일이 뛰는 날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기념일 때문에 주일로 바뀐 겁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뛰어야 되지 않냐고, 옹졸한 기독교 내라고 조롱할 때, 나는 주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뛰지 않았습니다. 다니 그의 친구 에이브람이 뛰어서 영국에 금메달을 선사했어요. 200m에 에릭 리들이 나갔습니다. 주 종목이 아니었습니다. 동메달을 땄습니다. 400m는 전혀 주 종목이 아니었어요. 그의 친구 앤드로 린지가 그를 위해서 양보를 했습니다. 뛰었고 예선전에서 꼴찌로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제일 안 좋은 맨 가장 자리에 배정을 받았어요. 그리고 결승전 총성과 함께 뛰었고 47 06초로 세계 신기록을 세웠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불의 전차로 달려간 사람, 기자가 물었습니다. 주 종목이 아닌데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뛸 수 있었습니까? ‘200m터는 최선을 다해 뛰었습니다. 나머지 200m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뛰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명예, 모든 부위를 다 내려놓고 다음 해 중국의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순교사로 20년 동안 있다가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고, 외시앙 수용소에 잡혀 있다가 결국에는 그곳에서 순교를 당했어요. 그의 나이 44살에 젊은이었습니다. 400m를 뛸 때 믿으면 좋았던 그의 코치가 그의 손에 종이 한 장을 지어 주었습니다. 사무엘 말씀이었어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
 
*사무엘상 2:30b,
30b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 사람 인생입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인생, 여러분 무엇을 위해서 살다가 누구를 위해서 살다가 주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다 지나갈 일들입니다. 세속화가 우리를 엄습해 오고, 시대 물결이 우리를 엄습해 오는 이런 순간에 그냥 그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신앙 양심에 근거해서, 아니요. 라고 말하면서 겸손하지만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우선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습니다. 당당하게 살아갈 때 우리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도 주님을 알 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 그렇게 살아갔어요. 이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므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 시대를 거슬러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하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약
시대정신을 거부하고 신앙정신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살아야 한다. 우리들의 말, 행동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 살아계신 하나님 영광을 받으셔야 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셔야 하며, 우리 모두 시대정신이 아니라 신앙정신으로 살기를 소망하고, 시대정신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기억하여 하나님 앞에 타협 없는 자세로 서며,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서야 한다.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우상에게 절을 하면 이제라도 살려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풀무 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말로 시작한 느부갓네살은 그들이 계속적으로 우상 숭배를 거절하자 태도를 바꾸어 생명을 담보로 협박했다. 그렇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는 끝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육체만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분께만 순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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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8월 17일)
제목: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말씀: 열왕기상 13:11-18, 31-32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유성택 목사님(정윤교회)-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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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3:11-18, 31-32,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12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어느 길로 가더냐 하니 그의 아들들이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의 간 길을 보았음이라.
13 그가 그의 아들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나귀에 안장을 지우라 그들이 나귀에 안장을 지우니 그가 타고.
14 하나님의 사람을 뒤따라가서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은 것을 보고 이르되 그대가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냐 대답하되 그러하다.
15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와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으라.
16 대답하되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 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리니.
17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이르시기를 네가 거기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또 네가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로다.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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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 우리가 같이 나눌 말씀은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입니다. 신앙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절반은 신앙의 절반은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죠. 한국 교회가 왜 힘을 잃었는가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경계선에서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바닷물을 짜게 하는 것은 3프로의 염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자 오늘 설교는 나는 그 3프로이냐? 이거를 묻는 문제 제기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배경은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 시대입니다. 여로보암은 정치적인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 종교적인 희생을 했어요. 그 당시에 경계선에 있는 신앙인들을 많이 양산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어 신앙적이지 못했던 왕들에 대한 평가로 붙었던 불혹이 여로보암의 길을 갔더라 아니겠습니까? 그가 대표적으로 했던 신앙의 회유 정책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자막을 보시면, 열왕기상 12장 31절로 33절입니다.
 
*열왕기상 12:31-33,
31 그 사람을 장사한 후에 그가 그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하나님의 사람을 장사한 묘실에 나를 장사하되 내 뼈를 그의 뼈 곁에 두라.
32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제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
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의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으므로.
-몇 가지 말씀들이 나와요. 산당을 지었다라고 기록이 돼있습니다. 두 번째는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는 거예요. 또 32절에 보시면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였다. 라는 것이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당을 지었다는 것은요, 왜 그렇게 했느냐 라면 나라가 북과 남으로 갈리고 난 다음에, 경건한 성도들이 남쪽으로 자꾸 내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북쪽에 대표적으로 밷엘과 단에 산당을 지었죠. 또 경건한 제사장들이 남쪽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제사장의 숫자가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자격이 없던 무자격 제사장들을 세웠던 것이죠. 종교가 약해지겠죠. 또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했다.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초막절 가을절기가 되면 추수의 때와 장막절에 그 1주일의 절기가 겹칩니다. 생업으로 한참 추수를 해야 되는 때에 갑자기 1주일 절기를 지키기 위해 쉬어야 하니, 신앙이 약한 사람들의 원성이 있었죠.
 
여로보암은 이걸 파고들어서 절기의 날짜를 바꾼 거예요. 송아지 제사도 이때 드렸습니다. 자 이렇게 되다 보니 경건했던 성도들은 모두 북이스라엘을 떠나, 남유다 예루살렘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불신왕의 사건이 벧엘 사건인데요. 벧엘에 송아지 제사를 드리게 되었고, 그곳에 왕이 같이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죠.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은 이제 편의상 젊은 선지자로 호칭 하겠습니다.
 
젊은 선지자가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제단아, 제단아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내 위에 분양하는 산당 제사장을 내 위의 제물로 봤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 제사 드리는 제사장들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審判)할 거라는 거죠. 왕이 한편에 있어요. 그런데 젊은 선지자가 와서는 이와 같이 왕이 집전하고 있는 제사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거죠. 하나님의 뜻이죠. 그리고 또 징조(徵兆)를 말씀합니다. 징조로 여기 있는 제단이 갈라지게 될 거다 그리고 여기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게 될 것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왕이 기분이 나쁩니다.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더니, 손을 뻗어서 저놈을 잡아라. 한 거죠. 이때 왕의 손이 굳어버려 움직이질 않는 거죠.
 
너무 깜짝 놀라죠. 그리고 나자 곧 예언대로 제단이 갈라져 쏟아지게 됩니다. 아! 이건 하나님의 뜻이구나! 그리고 선지자에게 부탁합니다. 선지자 내 팔을 낫게 해주시오. 그리고 선지자는 그의 팔을 낫게 합니다. 자, 이제 여로보암 왕 때 있었던 대표적 불신왕의 사건 가운데 하나입니다. 젊은 선지자가 고마워서 왕은 집의 절반을 당신에게 줄 터이니, 우리 집에 와서 왕궁에 와서 쉬다 가시오. 그러나 선지자는 그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돌아가지 말아라. 네가 왔던 곳으로 곧장 와라. 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 이 시대가 바로 여로보암 왕 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늙은 선지자예요. 성경 상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호칭을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건과는 조금은 연계성이 없어 보이는 인물인 늙은 선지자, 자 성경본문을 보죠. 열왕기상 13장 11절인데요.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열왕기상 13장 11절,
11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 그의 아들들이 와서 이 날에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행한 모든 일을 그에게 말하고 또 그가 왕에게 드린 말씀도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말한지라.
-자 여기 색깔로 표시가 되어 있는데요. 몇 가지 정보가 나옵니다. 정보를 보시면서 자 오늘 이 늙은 선지자가 어떤 사람인지 한번 짐작하면서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요. 자 일단은 정보가 몇 가지 나오는데 첫째, 거주하는 곳이 벧엘입니다. 배달은 조금 전에 왕이 산당을 지었던 마을 가운데 하나입니다. 벧엘, 단, 자 이곳에 살고 있었고, 나이가 꽤 있습니다. 늙었다라고 되어있으니까요? 그의 아들들이 있습니다. 아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아들들, 우리 시대도 자녀 키우면 여러 명 있으면 돈 많이 들죠. 그죠 어 아들들 키우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을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이 조금 전 이야기 나눴던 베델에서의 산당제사, 왕이 있었던 그 자리 젊은 선지자가 벌였던 이 일들, 그 사건의 현장에 있었어요. 그걸 보고 아버지께 돌아와서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이런, 이런 일이 조금 전에 있었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랍니다. ‘그래 도대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그 사람은 어디로 갔어?’ 묻게 되죠. 그리고 그 사람이 간 장소를 듣게 되자 나귀에 안장을 지워서 젊은 선지자를 따라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사건이 벌어진 그 일 현장에 벌어졌던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 영적 열망이 그 얘기 있었다는 거예요. 늙은 선지자, 자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여러분 한번 짐작해보라고 했죠. 자 어떤 사람일까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는 거죠. 자 그리고 쫓아가서 상수리나무에서 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우리 집에 와서 떡을 먹고 쉬다 가십시오. 저와 대화를 합시다. 당신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였는지, 왕 앞에 어떻게 그렇게 용기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 한번 저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라고 그에게 권하게 되는 것이죠. 자 그리고 드디어 3장 13장 18절 이 구절에 다다라서요.
 
*열왕기상 13:18,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자 여러분, 이 사람의 정체 아시겠습니까? 좋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단적으로 말하기는 좀 어렵겠지만, 노란 글씨 그죠? 노란 글씨를 보니 아 이 사람은 선지자긴 하는데 거짓말하는 선지자구나! 라는 걸 우리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몰랐어요. 선지자인가부다 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 젊은 선지자가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하니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고 그 사람을 따라가서 그에게 맞은 것도 좀 주고 싶고 이런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18절을 보니 그는요 선지자이긴 하지만 거짓말하는 선지자였다는 거예요.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지만 그는요 나쁜 일을 했어요. 그리고 젊은 선지자를 도우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돕기는커녕 뒤로 이어가보면 이 일로 인해서 젊은 선지자는 죽게 돼요. 그의 정체가 애매모호했다는 거죠. 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좀 하겠습니다.
 
※제 이름은요, 유성택입니다. 버들 류(柳)에, 거룩할 성(聖)에, 택할 택(擇)입니다. 거룩하게 택함 받았다. 이름 괜찮지 않습니까? 네 괜찮죠. 저희 이제 형제자매가 7명입니다. 위로는 이제 누나가 6, 예 제 아들은 네 저 하나입니다. 귀하게 자란 것 같습니까? 아버지가 이북분이신데, 어머님은 경남 분이시고요. 예 네 피난 내려오셔서 만나고 결혼하셨고, 자녀를 낳았는데 딸만 낳다 보니까 이제 여섯째를 낳고 난 다음엔 포기할 법한데요.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제 서원 기도를 하시게 됐습니다. 아들 낳으면 목사 시키겠다. 그리고 이제 제가 곧 태어나게 됐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너는 목사가 돼야 된다.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제 꿈도 어릴 때부터 목사였어요. 그래서 신학을 하게 되었고, 2007년도 어 12월 달에요. 사랑의 교회 부름을 받아서 여기서 이제 부목사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시키는 찬양 팀, 아까 찬양 너무 은혜롭게 잘 들었는데요. 또 부르기도 했고요. 1대 인도자입니다.
 
제가 그리고 예배 팀을 섬기고 목양을 섬기고 제자 훈련하고 특새를 섬기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섬겼어요. 예배팀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주일 예배 6부, 그 당시에 드렸는데요. 그때 어 예배를 마치고 나면 우리 오정현 목사님께 주일 예배 보고를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많이 성도들이 오기도 하지만 어떤 땐 적게 오는 날도 있잖아요. 주일 보고를 드리면, 여러 보고 가운데 인원보고도 드리는데요. 적게 온 날에는 목사님이 물어보십니다. 유목사, 오늘은 성도들이 다 어디 갔냐? 이렇게 저한테 이제 물어보세요. 그럼 뭐라도 대답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가 이렇게 대답해 목사님 오늘은 비가 많이 와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근데 비가 안 오고 날씨가 좋은 날도 적게 올 때가 있어요. 유목사 어디 갔냐? 그러면 제가 또 대답합니다. 목사님 오늘은 날이 너무 좋아서 다 나들이 갔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 그때는 답변하기가 급급했어요. 근데 이제 지금 담임 목사 나온 지 10년 차인데요. 담임 목사의 마음을 그 당시에 되고 보니, 우리 오정현 목사님의 마음을 이해 하겠더라구요. 한 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소중하며 또 한 사람 한 사람이 예배를 드리지 않고 신앙에서 떠나가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참 이해되더라는 거죠. 지금은 이제 하남에 있는 미사 지구에 있는 정윤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데, 제가 목회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다수가 제가 사랑의 교회에서 배웠던 것들이에요. 예배 그리고 제자훈련, 찬양과 기도 이 모든 것들이 여기에서 배웠던 것들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한번 그런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목회자로서 많은 걸 배우게 한 우리 오정현 목사님 또 우리 사랑의교회 교우 여러분들, 머리 숙여서 감사의 인사를 1번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자 여러분들 제가 저의 소개를 하니 조금은 저에 대해서 좀 알게 되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늙은 선지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러나 선지자 그가 그렇게 모를 수밖에 없었던 건 선지자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죠. 젊은 늙은 선지자가요 그러니 모르죠. 선지자답게 살지도 않아요. 어떤 때는 선지자라고 하지만 어떤 때는 진리가 아닌 거짓을 말하는 변절자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요. 아마 동네사람도 그가 선지자라고는 하지만 진짜 선지자 맞나? 그의 아들들도 우리 아버지가 선지자라고 하는데 선지자가 맞나? 자신도 혼돈스러웠을 거에요. 젊은 날에는 내가 선지자였지만 내가 너무 오랫동안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어요. 자신도 몰라서 혼돈스러웠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느냐,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렇죠.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 자신이 선지자라고 말하지 않고 선지자답게 살지 않기 때문에 그는요 결국 경계선에 서게 된 거예요. 이름은 분명히 선지자이지만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많아서 젊은 선지자를 따라가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그는 선지자답게 살지 못해요. 그는 경계선에 서 있어요. 성경에 이런 인물들 많습니다. 롯,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약속해 땅을 고향 땅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갔지만 그는 몇 십 년이 흘러 소동과 고모라의 경계선에 서게 되죠.
 
니고데모, 예수님에 대한 감명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자신의 동료들이 내가 예수를 따르는 제자라는 걸 드러내기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언제 찾아가요 예수님을 밤에 찾아가잖아요. 내가 제자다움을 내가 선지자 다움을, 내가 성도다움을 드러내지 않을 때, 그 맛을 내지 못할 때 소금 빛 그럴 때 우리는 어디에 거하게 돼요. 경계선에 거하게 되는 거예요. 오늘 늙은 선지자가 왜 그렇게 됐을까? 한번 묵상해 봤습니다. 어쩌면 시기를 놓쳤을 수 있어요. 다른 동료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으로 남하해서 난 신앙을 지키겠어. 마치 청교도 성도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때를 놓쳤던 거죠. 아 내년에 갈게 2년 후에 갈게, 5년 후에 갈게, 그러다가 시간을 놓친 거일 수 있어요. 자녀 교육이 문제일 수도 있어요. 우리는 아들들이 많잖아.
 
아들 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하고 난 다음에 갈게, 이랬을 수 있다는 거죠.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어요. 다시 말하면 여러분, 그에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거죠. 그랬기 때문에 결국 그는요. 선지자이긴 하지만 선지자답지 못하게 살아갔다는 거죠. 여러분, 그렇다면 세상 속의 성도는 모두 다 경계선에 서서 이처럼 갈팡질팡하는 것에 눈감아 줘야 될까요? 아니에요. 아브라함, 노아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 사람들이 그의 믿음을 흔들려고 했지만, 아브라함, 노아 결코 경계선에 서지 않았다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우리 이야기를 한번 해 봅시다. 특별히 우리는 사랑의 교회 토비새 그리고 칠천 기도 용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교회 아닙니까? 맞습니까? 아멘, 맞아요.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기도의 용사다워야죠. 사랑의 교회다워야죠. 부르짖어 기도하고, 기도의 자리를 지켜내야죠. 경계선의 성도가 아니라 하늘의 성도로 우리가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내 자녀를 믿음으로 키워내고, 글로벌 영적 인재를 길러 내야 돼요. 그리고 한국 교회를 그리고 세계교회를 살려내는 제사장적 책임을 다 감당해 내야 되는 것이죠. ‘2033-50 비전’ 이뤄내야죠 여러분 제가 지난주에 사랑의 교육 검색을 했어요. 검색을 했더니, 청계산에 여러분들 기도하셨더라고요. 제가 참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하루 종일 예배드리고 저녁에 올라가서 그 산에서 부르짖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 그래 이게 사랑의 교회지. 라는 생각을 했어요.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면서 복음의 깃발을 분명히 들고 나는 경계선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성도야. 이걸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읽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15,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복음으로 냉철해지고, 차가워져야죠.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 보면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인생의 중반과 후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경계선에 서서 내 인생을 허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땅의 일이 아닌 저 하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돼야 될 줄로 믿습니다. 골로새서 3장1절로 2절, 1번 더,
 
*골로새서 3: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할렐루야 여러분,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하늘에 속한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경계선에서 벗어나 사랑의 교회 믿음의 깃발을 흔듭시다.’ 확실하게 흔드는 믿음의 깃발을 흔드는 저와 여러분들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이야기를 했으니 본문으로 다시 한 번 잠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자 늙은 선지자 이야기를 했는데요. 이 선지자가 젊은 선지자를 만나게 되죠. 그리고 그에게 거짓말을 해서 집으로 초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집으로 오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어디에도 들리지 말라 이야기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에 우리 집에 와도 된다. 라고 했기 때문에 믿고 그의 집에 들어가게 되죠. 그리고 그의 집에 돌아왔을 때, 상 앞에 앉아 떡을 먹으려고 하는 순간,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그게 열왕기상 13장 22절 말씀인데요. 중간에 보면 내 시체가 내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죽게 되겠다는 거죠.
 
*열왕기상 13장 22,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얼마나 두려운 예언의 말씀입니까? 너무 두려워서 떡을 먹다가 떡 먹던 일을 중재합니다. 그리고 젊은 선지자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할 수 있소. 이야기 했겠죠. 그리고 그 집을 떠나 자기가 가야할 길로 되돌아가고 있던 중, 예언대로 죽게 됩니다. 사자, 사자가 와서 그를 잡아먹게 되죠. 아 죽이게 되죠. 그런데 신기한 장면이 나타나는 게 사자가 사람이나 아니면 동물을 해할 때, 먹잇감으로 삼기 위해 먹지 않습니까? 죽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먹지를 않아요. 그냥 죽게만 숨만 끊어놓고 떠나가지도 않고 사자가 그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곁을 지나가요 너무 신기한 장면이죠. 이게 메타포죠. 뭔가 상징적인 사건이니까요? 이 메타포를 보고서 몰래서 소문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늙은 선지자의 귀에까지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리고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곧장 그 자리로 출발하게 됩니다.
 
여전히 사자가 그 옆에 있어요. 무섭죠. 나도 잡아먹을 수 있으니,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에요. 옛날에는 나의 신앙 때문에 혹여 내가 해를 받을까 싶어 경계선에 살았는데요. 이제는 아랑곳하지 않아요. 내가 죽든 말든 사자한테 잡아먹히든 말든 상관치 않고, 그에게 다가가 그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옵니다. 13장 29절로 30절의 말씀을 보시면,
 
*열왕기상 13장 29-30절,
29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와 자기 성읍으로 들어가서 슬피 울며 장사하되.
30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들어 나귀를 나귀에 실어 가지고 돌아옵니다. 자기 성읍으로 돌아와서 슬피 울고 장사를 지냅니다. 정말 진심으로 애곡해요. 그리고 곧 그의 시체를 자기 묘실에 두고 부르짖습니다. ‘오호라 내 형제여.’ ‘오호라 내 형제여’ 다시 말하면 죽은 그를 향해 부르기를 나의 아버지여, 나의 어머니여, 나의 가족이여, 그렇게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부르면서 슬피 울며 진심으로 장례(葬禮)를 치르더라는 거예요. 자 여러분 설교 초대에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드렸죠. 이 사람의 정체는 뭐냐구요. 아까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나쁜 선지자라고 우리가 했죠. 자 여기서 한 번 더 묻겠습니다. 나쁩니까? 좋습니까? 그렇죠. 조금 혼란이 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조금 전까지 그는 분명히 엉터리 거짓말의 선지자였어요. 그리고 그 사람 때문에 젊은 선지자까지 죽게 됐죠. 그니까 나쁜 사람이 맞아요. 그런데 지금은 보니 진짜 진심으로 울고 있어요.
 
그리고 부르짖기를 ‘오호라 내 형제여,’ 라고 부르면서 슬퍼하고 있어요. 변했어요. 변했어요. 그죠? 경계선에 서 있던 그가 지금은 변했어요. 바뀌었어요. 왜 바뀌었을까요? 메타포, 사자가 그 곁에 서 있고 하나님이 보여준 그 싸인을 본 거예요. 싸인을, 열왕기상 11장부터 14장의 말씀 이 11장 14장 한번 집으로 가서 보십시오. 보면 여로보암 왕 시대 일들이 나오는데요. 그 시대에 여로보암 왕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범죄 했는가를 보여줘요.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런 신앙적 불신앙적인 왕 밑에 있던 평범한 백성들의 불신앙, 불신앙을 보여주는 단면에 사건이 오늘이 늙은 선지자의 사건이에요.
 
근데 그 늙은 선지자는 여로보암은 변하지 않았지만 늙은 선지자는 지금 바뀌었어요. 변했어요. 왜 변했는가? 그는 경고의 사인을 보았기 때문이에요.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싸인을 보지 못 했어요. 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싸인을 보고 바뀌었다는 거예요. 엉터리요, 거짓말쟁이지만 늙은 선지자에게서 우리가 배울 점 한 가지 그것은 죄에서 돌이켰다는 사실이요. 지난날의 잘못된 삶에서 그가 바뀌었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 가롯유다와 사도바울이 있는데요. 분명히 다른 인물이죠. 그러나 그 둘을 똑같이 하나님 앞에 큰 죄인들입니다. 가론유다 예수님을 팔아넘겼죠. 사도바울 예수님의 사람들을 핍박했던 인물이에요. 근데 그 둘의 차이점은 뭐예요? 가롯 유다는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죠. 자살하고 끝냈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켰다는 사실이에요. 죄는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넌 너무 늦었어. 돌이키기가 너무 늦었어. 이게 죄가 우리 귀에 하는 이야기예요. 하지만 여러분 지금이 돌이키기의 가장 빠른 때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이에요. 지금 이 늙은 선지자가 그때를 잡은 거예요. 하나님의 싸인을 보고 그래. 이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싸인이구나! 내가 비록 나이 많고 늙었지만 지금이 가장 빠른 때야! 라고 돌이켰다는 사실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우리들도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세상과 신앙 사이예요. 주일날 그리고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말씀드리면, 말씀의 세상에 속해요. 하지만 세상으로 나가면 세상이 우리를 가만둡니까? 아니죠. 세상이 우리를 막 흔들어 제끼지 않습니까? 믿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마구 흔들지 않습니까? 사단은요, 우리를 경계선에 서도록 내몰아요. 어릴 때부터 한국사회가 그렇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입시에 살아남기 위해서 그래 고3만 지나면 내가 예배 나갈게 이러잖아요. 그죠? 우리 자녀들 교육시킬 때도 그럴 때 있잖아요. 그래 고3만 지나면 이런 생각할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도 모르게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부터 믿음의 경계선에 서는 연습을 한다는 거예요. 직장에 나가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 적응하기 위해서 경계선으로, 우리를 사단에 내몰죠. 가정을 이루고 나면 경제와 자녀와 건강의 문제로 사단은 우리를 자꾸 신앙의 구석과 경계선으로 몰아넣는다는 거예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요 제가 다니던 청년부입니다. 청년부의 형님들이 있었는데, 형님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이제 직장에 가요. 그러면 청년부 모임에 오지 않습니까? 오면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제 주위에서 성경 공부 하구요.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 내가 힘들게 입사했는데, 입사하면 여러분 그거 하잖아요. 그 회식이요. 회식하잖아요. 요즘은 아니지만, 옛날에는 막 술을 권했잖아요. 그죠? 어 회식에 나가요 그러면 선배님들 이야기한 다음에 술 한 잔 마셔. 그럼 이야기하는 거죠. ‘아휴 선배님, 저는 크리스찬이라서 술 안마십니다.’ 그렇게 얘길 하면, 선배님들이 꼭 이렇게 얘기한다. 괜찮아 마셔. 마셔. 마셔. 저기. 저기 김 부장님 있지 저분도 장로님이야. 저기 박 부장님이지 저기 안수 집사님 이렇게 얘기한다는 거예요.
 
그니까 여러분들 학창시절 대학시절 그리고 직장생활 우리 가정생활 속에 사단이 우리를 얼마나 흔들어 놓냐는 거죠. 그리고 우리를 자꾸 경계선으로 밀어 넣는다는 거예요. 늙은 선지자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그에게도 돌이키기를 원하셨죠. 젊은 날을 허비했어요. 그러나 그는 나이 먹어서라도 하나님의 사인을 보고 돌이켰어요. 사단은요, 가롯 유다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를 향해서 이야기 해요. 너무 늦었어. 이제 그만해 뭘 신앙대로 이제서 할려고 그래 이렇게 한다는 거죠. 그러나 아니에요. 내게 싸인이 보인다는 것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며, 여전히 내가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바라기는요. 지금 돌이키기에 가장 빠른 시간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경계선을 벗어나서 하늘의 일을 생각하는, 하늘의 사람,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산정원교회 주기철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아실 거예요. 주목사님, 1938년부터 44년까지 5차례나 일본에 압제하여서 투옥 당하셨습니다. 몽둥이찜질을 당하구요. 채찍질 말구요. 온갖 고초를 당하셨죠. 경계선에 설 법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고 이렇게까지 어려워져야 돼? 생각들 법 하잖아요. 경계선에 그러나 서지 않았어요. 확고하게 하늘의 사람으로 살았어요. 다섯 번째 마지막 구속될 때입니다. 산정원 교우를 모았어요. 가족들을 모아서 한 20여 명 된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 모여 있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주님 나를 위해서 십자가 고초 당하셨는데 내가 어찌 무섭다고 피하겠습니까? 경계선에 서겠습니까? 오직 일사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주 멋있는 말을 하셨는데요. 이런 말을 하셨어요.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런 빛을 간직하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이 말을 하고 감옥에 돌아가셨고 그리고 마지막 생을 마감했어요. 소나무 그렇잖아요. 죽고 난 다음에 찍으면 허얘요. 그냥 생기가 없구요. 그러나 죽기 전에 도끼로 찍으면 그 한 가운데가 시퍼런 빛이 살아 있잖아요. 청청하게요. 내가 파도 그렇잖아요.
 
여러분들 주고 난 다음에 이거 떨어지면 냄새 안 나요? 그러나 살아있을 때 털어지면 그 향기가 주변을 향기롭게 하죠. 주기철 목사님 ‘내가 그럴지라도 나는 경계선에 서지 않겠어.’ 신사참배가 행해졌지만 경계선에 서지 않았던 목사님, 오늘 본문 보면서요. 저는 제 마음에 확 남은 한 구절이 있어요. 13장 18절, 우리가 아까 한번 읽기도 했던 본문인데 보십시오. 어느 구절이 제 마음에 남았을까요? 어느 구절일까요?
 
*열왕기상 13:18,
18 그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게 하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충분한 힌트를 드렸는데, 노란 글씨, 노란 글씨, 네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사실 이 구절은 거짓말하려고 한 말 아닙니까? 그죠? 나쁜 선지자, 그죠? 거짓말 근데요. 이건 단순한 거짓말은 아니에요. 실제로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가 되고 싶었소. 라고 하는 회한이에요. 회한 13장 30절을 보면,
 
*열왕기상 13:30,
30 곧 그의 시체를 자기의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여 하며 그를 위하여 슬피우니라.
-저의 해석이 증명이 됩니다. 곧 그의 시체를 자기 묘실에 두고 오호라 내 형제요, 호칭이죠. 형제 내 형제 아까는 그대와 같은 선지자 나와 당신은 가족이고, 나와 당신은 같은 선지자야, 이 말은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었소. 라는 거예요. 이 젊은 선지자는 왕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이야기했죠. 그죠? 하나님의 징조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왕이 나에게 어떤 일을 벌일지라도 나는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하면서요. 그 모습과 그 젊음과 패기를 본 거예요. 신앙의 패기 그리고 늙은 선지자는 그를 향해서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가 되고 싶었소. 말하는 거죠. 당신처럼 하나님을 더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라는 거죠. 무얼 러브 모어 러브(more love)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운데 찬송가 314장이 있습니다. 가사가 너무 좋아요.
 
♬ 1절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모아 러브(more love),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절 이 세상 떠날 때 늙은 선지자 이제 내가 언젠간 떠나겠지. 생각했겠죠.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무엇인가?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한 번 새벽이지만 한 번 찬양 하겠습니다.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3절로 한번 찬양합시다. 이 세상 떠날 때!~~~♪
 
할렐루야! 성도 여러분, 폭풍 같은 유혹과 시험이 우리의 신앙을 흔들고 경계선에 내모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의 방주, 교회당의 방주 속에 살지만 세상으로 나가면, 사사건건 늙은 선지자가 넘어진 것처럼,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사단을 시험하겠죠. 그렇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사인을 보고 돌이킨 늙은 선지자처럼, 그 믿음의 결단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주기철목사님 소나무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른빛이 난다고 백합화 떨어져야 향기가 난다고 한 것처럼 저 여러분들도 향기를 내며 살아갑시다. 네 그럽시다. 여러분 저는요. 대쪽같이 신앙의 대쪽같이, 여러분이 살면 좋겠어요. 흔들리지 말고 변함없이 믿음을 지켜내는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면 좋겠어요.
 
내가 뭘 누군지 모르는 세상을 향해 나는 사랑의 교회야! 나는 칠천기도 용사야, 이렇게 말하면서 믿음을 보여줘야죠. 오늘 이번 1주가 앞으로의 여러분의 인생이 우리 친정집 사랑의 교회가 그런 향기로운 백합화, 시퍼런 빛을 가진 소나무 성도들로 가득 찬 사랑의 교회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멘
 
♣요약
사단은 우리를 향해 ‘너는 너무 늦었어.’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인을 보여주시며 지금도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우리 모든 성도들은 칠천 기도 용사로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과 소명을 붙들면서 이 땅 가운데 소나무로, 향기로운 백합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계선이 아닌 하늘에 속한 성도들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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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8월 14일)
제목: "빈 손 인생:그래도 하나님은..."
말씀: 욥기 1:20-22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시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윤주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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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20-22,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여전히 이 시간 이 자리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치유와 회복을 소망하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제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사오니, 귀를 열어 듣게 하시고, 눈을 열어 포기하시며 마음을 열어 감화시켜 주옵소서. 전하는 자 듣는 자 모두에게 맞춤형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권고하여 주옵소서. 이 모든 간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산 소망과 참 기쁨이 샘솟는 수요 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권고해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치유와 회복을 얻는 복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 욥기 1장 20절부터 22절까지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762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씩 교독하고 마지막 절은 합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해 주시는 삶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형통함과 풍성함 안전함과 만족, 그것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과연 현실이 그러던가요? 오히려 우리의 삶은 그 약속대로 풀리지 않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막힘과 부족함 불만과 위태로움을 마주합니다. 때로는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상실감(喪失感)마저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무언가를 잃는 경험은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이나 관계 문제가 될 수 있고, 또는 재산을 잃었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때가 그럴 때가 있습니다.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직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기대했던 일이 무산되거나 또는 계획에 어긋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상실감으로 다가오는 것들입니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는 한 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상실의 짐에 짓눌려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삶의 현실이 뒤죽박죽 되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마치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아픔 맥없이 밀려오는 낙담과 좌절, 허무함 당황스러움과 같은 상실의 강을 건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 여정에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욥의 삶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욥은 족장 시대의 인물입니다. 에돔 지방의 우수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남자였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한 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자. 라고 그 기도에 제목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구약 모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욥기 1장 1절에 묘사된 욥에 신앙평가를 보면,

*욥기 1:1,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번역들을 참조해 보니까, 흠이 없었고, 정직했고, 하나님을 경외했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욥이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어서 2절과 3절을 보면.

*욥기 2:3,
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은 아내와 수많은 자녀들을 두었고, 그가 살던 지역에서 으뜸가는 부자였습니다. 개혁개정의 표현에 따르면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종합적으로 욥은 물질로도 부자였고, 신앙으로도 부자였습니다. 여러분 여기까지만 보면 참 부럽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욥이 참 부럽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러움을 산 욥이 당한 일을 주목해보면 부럽다. 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그것이 얼마나 경솔한 것인지 모릅니다. 13절부터 19절까지 기록된 내용을 제가 요약해 드리면, 욥은 아내만 제외하고 재산과 자녀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피부병(皮膚病)까지 앓게 되고 그것 때문에 고생을 합니다. 그는 한두 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1~2명의 자녀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10명의 자녀가 있었고, 그의 재산은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4차례에 걸쳐서 하루아침에 잃고 만 겁니다. 욥의 반응이 그런데 놀랍습니다. 오늘 저희가 살펴볼 것인데 그 전에 어떻게 욥은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 한번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4절과 5절의 힌트가 숨어있습니다.

*욥기 1:4-5,
4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에는 경건한 성품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녀들의 생일잔치가 끝날 때마다 했던 일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 자녀들을 불르고 불러서 정결하게 하고 번제(燔祭)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번 그랬던 게 아니라, 항상 그렇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 하면, 혹시라도 자녀들이 잔치 중에 생일잔치 중에 하나님께 죄를 짓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그들의 죄를 씻으려고 그렇게 한 겁니다.

욥은 꾸준한 영적 습관이 그의 삶에 뿌리 박혀 있었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통해서 그 삶에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恒常)이 무서운 겁니다. 평소(平素)가 중요한 겁니다. 그게 실력(實力)입니다.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는 교재를 통해서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야 합니다. 여러분 경건한 성품이 다져지는 만큼 우리가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건널만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영적 습관이 중요한 줄 알고 오늘 이 자리에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수요 저녁 기도에 나오신 여러분들 참 잘 하신 겁니다. 영적 습관을 지키려고 나오신 거죠. 견고한 믿음의 토대를 세우시려고 나오신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들이 삶 가운데에 건너는 상실의 강을 이런 것들을 통해서 건널만한 힘을 챙겨 가시는 겁니다. 여러분, 평소에도 하나님과 지속적이고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의 삶에 견건한 믿음의 토대를 세워 가시기를 바라며 또한 경건한 성품을 소유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욥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상실의 강을 건널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핵심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3가지를 볼 건데 첫 번째 그것은 뭐냐하면,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I. 첫 번째,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切感)하는 것입니다.
-21절 상반 절입니다.

*욥기 1:21a,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 인생을 ‘빈손인생’ 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욥기는 전체 42장 1070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지는 않았고 찾아봤습니다. 그중에 고작 8개 절로 욥은 모든 걸 잃고 맙니다. 그 중에서도 7개절은 가족과 재산을 잃게 됩니다. 욥이 훌륭하다. 라고 평가를 받았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일순간에 사라져버린 이 욥,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줄 모릅니다. 건강이 남아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2장 7절에 보면 건강도 잃어버립니다.

*욥기 2:7,
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그야말로 빈손 인생이 된 거죠. 성경은 인생의 본질이 빈손이라는 사실을 여러 군데서 알려주는데 2가지를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⓵야곱입니다.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뼈저리게 이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야곱 여러분, 아시는 대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이나 섬겼지만 빈손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재산을 얻고 떠났습니다. 그런 야곱의의 고백이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바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라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⓶다윗 역시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은혜가 없이는 자칫 빈손 인생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야곱과 다윗의 고백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알몸으로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라고 말한 욥의 고백과 맞닿아 있는 교훈입니다. 이 두개의 본문은 욥의 고백을 야곱과 다윗의 삶을 통해서 각각 다르게 표현한 버전인 셈입니다. 이솝우화에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벌거숭이로 이 세상에 왔으니, 벌거숭이로 이 세상을 떠나리라. 어딘가에서 이런 표현도 한번 보았습니다. 아기의 첫 옷 호주머니가 없다. 먼 훗날 아기가 입게 될 마지막 옷도 호주머니는 없다. 그냥 왔다 그냥 간다. 제가 이 두 개의 메시지를 1문장으로 합쳐 봤습니다. 우리는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 없는 벌거숭이로 간다. 누구의 이야기죠“ 욥의 이야기이고, 야곱과 다윗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저야 여러분의 이야기가 바로 이러한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왔다가 호주머니가 없는 벌거숭이로 가는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잊는 것이 인생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없이 태어나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욥이 우리의 인생에 별명을 하나 지어줬습니다. 뭐죠? 빈손 인생입니다.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 보겠습니다.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속안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는 나의 삶은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고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욥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황에서 두 가지 행동을 보입니다. 하나는 ⓵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것이었고, ⓶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경배(敬拜)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 그리고 깊은 절망 속에서 비통한 심정을 온몸을 드러내면서 보여준 행위였습니다. 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 두 번째 그 뒤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가 보인 행동이 뭐였냐면 땅에 엎드려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욥기 1:20,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그러자 또는 종이 전한 말해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고려해서 읽어보면 욥이 종에게 비보를 듣자마자, 보인 첫 번째 반응 비통함을 표현함과 더불어서 땅에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굉장히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겁니다. 욥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신앙의 제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이번 일에 최고 책임자이시자, 최종 결정권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경배했습니다. 욥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것이 그의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면, 그가 땅에 엎드려서 경배한 것은 하나님께 겸손(謙遜)히 복종(服從)하겠다는 결의(決意)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처럼 욕은 겸손이 하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그것도 비보를 듣자마자, 상실감에 사로잡힐 시간도 없이 주저함 없이 곧장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의 행위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욥은 입술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상황을 찬양으로 승화시키는데, 여러분 21절 하반 절에 보시면,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서 잃어버린 것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한 찬송가의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찬송가 370장 2절입니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내 노래 되었네. 전날에 한숨 변하여 무엇이 되었어요. 내 노래되었네. 그날 욥이 부른 찬성 듣지는 않았지만 그 가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결국 20절과 21절에 나타난 욕의 행위는 자기 삶이 하나님 소간임을 확인한 행위였습니다. 용은 이번 일이 하나님 소간(所幹) 임을 알았던 겁니다. 이번 일을 주관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유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두 번 세 번 생각하지 않고, 몇 날 며칠 망설이지 않고, 곧장 하나님께 나간 겁니다. 나아가서 따지든 드러눕든 울부짖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아갔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세가 귀한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잘 하신 겁니다. 여러분 상황이 어떠신지 간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잘하는 겁니다. 나아가셔서 아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찬송도 안 해도 되고, 기도도 안 해도 되고 하나님 원망 안 해도 되고, 찬송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나아가는 거, 그게 귀한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욥의 삶에 관건(關鍵)은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것이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처럼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이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녀 문제가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수많은 회사 일도 그의 관건이 아니었고, 사람들과 만남에서 오는 감정적(感情的)인 소모(消耗)도 그에게는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뭐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런 매출 이런 것도 관건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서 그런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지만 그에게 삶의 관건은 오로지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의 기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시편을 여러분들이 곱씹어 보시면 시편은 결국 삶의 관건이 하나님인 사람들의 기도입니다. 그들의 관건은 그들 자신이었거나 그들이 당한 상황이었거나 그들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라는 책을 보다가 욥에 관한 한 문장을 발견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재산 혹은 자녀 하물며 건강에 대해서는 큰 미련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의 유일한 관심사는 바로 신학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해 치열하게 묻고 따지는 유일한 물음은 신학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신학이 가리키는 것이 뭔지 아시겠죠? 하나님입니다.

한때 욥의 삶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재산, 자녀 그 모든 것들이 사라졌습니다. 당시 농경사회에서 가축이나 자녀는 큰 자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욥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완전히 잃어버렸다라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욥은 재산을 통해서 부자로 인정받았고, 자녀들을 통해서 존경받는 아버지로 인정받았고,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던 그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때도 욥의 삶의 관건은 무엇이었어요?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도 욥처럼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삶의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욥에게는 왜 삶의 관건이 하나님이었을까요? 다시 돌아와서 욥에게는, 욥은 자기 삶이 하나님의 소관(所管)임을 알았던 겁니다. 욥은 평소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믿음의 기초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신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 삶은 우리 소관(所管)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所管)입니다.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고, 따지고 들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확신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이 무엇이 되었든지 모두 하나님 소관(所管)임을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리면, 그걸로 된 겁니다. 이렇게 살기를 바라는 분들에게 기도 제목 하나를 제가 팁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4세기 교부 어거스틴을 다 아실 텐데, 이 어거스틴이 ‘사랑에도 질서가 있다.’라는 사랑의 질서 개념을 강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더 사랑해야 할 것은 더 사랑하고, 덜 사랑해야 할 것은 덜 사랑하고, 최고로 사랑해야 할 것은 최고로 사랑하는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로 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질서를 잡아주셔서 부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소관임을 의심 없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영 가족 여러분,
우리가 든든하게 우리를 든든하게 해주던 삶의 울타리들이 무너졌을 때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기를 소망합니다. 끝으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신앙의 핵심 중 핵심 하나만 더 봅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21절을 보십시오.

*욥기 1:21,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욥은 빈손 인생에 이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둔 이 시도 여호와시오니 헤아리기 힘든 일을 겪고서 비통해하며 하나님께 나아간 욥은 하나님의 고유하신 이름을 부릅니다. 여러 가지 이름이 많잖아요.

근데 여호와 하나님, 그 이름을 부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욥은 모든 것을 잃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남아 계시다. 라는 사실을 붙들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1장의 흐름이나 욥의 친구들이 욥에 찾아오기 전까지에 내용을 다루었던 그 2장까지의 전개를 살펴보면, 욥에 일어나는 사건들은 모두 갑자기 발생한 이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갑자기라고 제가 표현을 한 것은 욥이 겪게 된 일은 이유 없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발생했다. 라는 건 그에 따른 원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그런데 욥에 삶에는 원인 모를 일들이 예고 없이 벌어졌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배후에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이나 욥의 안에 또는 종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당시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일하심, 원인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욥에 삶에 개입했던 결과인 겁니다. 욥은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자기 삶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주신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시라. 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이러한 고백입니다. 나는 비록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가 소중하게 여겨온 것이든,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든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내게 중요한 것이었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든 혹 내게 그것이 필요한 것이었든, 필요하지 않는 것이었든 나는 지금 전부를 잃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사실 욥은 더는 잃을 것이 없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욥기 13장 15절을 보면,

*욥기 13:15,
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셔도 자신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수중에 있던 재산이나 곁에 살던 자녀 그런 게 아니라, 불변하셔서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고 내 삶의 좌정(坐定)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그러한 것들에 잠시라도 마음을 빼앗겼던 것들이 아니라 그것이 아니라 처음과 끝이 한결같으시고 그런 하나님께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쳤던 겁니다. 여러분, 욥기 3장 이후를 보면 욥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 그 3명의 친구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위로는 욥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죄(定罪)하면서 회개(悔改)를 촉구(促求)합니다. 하지만 욥은 결백을 주장하면서 친구들의 비난에 맞섰습니다. 그때 이런 말을 합니다. 욥기 19장 25절,

*욥기 19:25,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우리가 볼 때 욥은 작은 것들을 잃은 게 아니었어요. 여러분 10자녀, 모든 전 재산, 그게 작은 겁니까? 작은 게 아니에요. 대체할 수 없을 만한 것들을 잃었습니다. 욥은 이러고서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지, 싶을 심정을 느낄 정도로 모든 걸 잃었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깊은 상실감을 느꼈죠 하지만 욕은 확신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압니다. 내가 전부를 잃은 이 순간 하나님만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나를 돌보시는 날이 반드시 오고야 낼 것을 나는 압니다. 욥의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왜인지 모르게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래도 여전히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내가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삶에 자정하고 계시고,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새겨지는 진실 된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럼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안개 낀 길을 만납니다. 그럴 때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조금 더 열심히 집중해서 운전을 해야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 그제야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하나씩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안개가 걷히면 비로소 누가 보이기 시작할까요?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다보면 하나님을 잘 보이지 않게 만드는 여러 가지 안개가 우리 삶에 드리워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재물(財物)과 가족이 될 수도 있고, 건강과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성공과 욕망이 될 수도 있고, 걱정과 두려움이 될 수도 있고, 과거의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의나 인정 같은 것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안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서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다가 상실의 때를 지나면서 삶에 안개가 걷히고 그제야 항상 그 자리에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핵심은 무엇이죠?

안개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세상의 사물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단지 보지 못했을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여러 가지 안개가 끼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살 뿐이지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우리 삶에 자리잡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잃으셨습니까? 어떤 일로 마음이 슬프고, 아프며 낙담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어떤 이유로 억울하고 혼란스럽고 허무하고 당황스러우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에게 도전합니다. 그 상황이 오히려 복된 일임을 고백하십시다. 모든 것을 잃었더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은 모든 것이 사실은 안개였고,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삶의 안개를 걷어 주옵소서. 우리 삶에 잔뜩 낀 안개를 말끔히 걷어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들의 진실 된 기도 제목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한 가지 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고백해 볼까요? 주신이도 여호와이시요. 거두는 이도 여호와시라. 바라기는 상실의 강을 건널 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영에 선포하시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빈손 인생임을 잊고 살면서, 손에 쥐 것을 세기에 바쁘고, 손에 쥐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바쁜 줄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거센 폭풍을 맞아서 손에 쥐는 것마저도 휩쓸려 가며, 텅 빈 손을 바라보면서 당황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께 상처받기도 하고 하나님께 삐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인생 질문들이 생겨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진면목은 최고의 순간에 최악의 순간에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로 따지면 그리스도인은 상실의 지님이 짓눌렸을 때 그때에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로 인해서든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을 사로잡힐 때,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 깨닫고 나니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빈손 인생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만 손으로 우리 빈손 인생을 쥐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이 위대한 약속을 붙들며 사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만유해주이신 예수 글 속에서 언젠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가 저 천국에 갈 때에 그때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모든 것보다도 더 값지고 영원한 것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잃었던 그 모든 것을 잊게 될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지금껏 나누지 않은 본문 22절의 새 번역을 보시면,

*욥기 1:22,
22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이 사건의 결론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와 같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욥처럼 모든 일에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아니 아니며,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만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그 믿음의 반석 위에 날마다 넉넉히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간절히 진실로 소망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십니다.

♣요약
말씀을 통해 상실의 강을 건너는 우리 삶에 믿음을 돌아보아 감사해야 한다. 우리 삶의 현실은 기대와 달리 상실로 가득하듯이, 우리는 예고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상실의 강을 건너야 한다. 우리 모두 인생의 본질이 빈손 인생임을 깨달아, 없이 태어나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가 결국 없어지는 것이 인생임을 고백하고, 나의 삶이 빈손 인생임을 절감하게 해야 한다. 삶에서 마주하는 이런저런 일에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나의 삶이 관건이 오로지 하나님이 되어서, 나의 삶은 하나님 소관임을 확인하고,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가야 한다. 삶의 안개를 걷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계신다, 세상을 향해 선포하며 나의 삶에 자리 잡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에 사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간구(懇求)를 그날에 더 값지고 영원한 모든 것을 얻게 하실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욥처럼 나아가야 한다.

-영원하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세상이 권하는 잠시의 모든 약속은 다 거짓임을 깨닫고, 없고 없다가도 있는 이 빈손 인생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그 크고 의로운 손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삶으로 마주하는 이런저런 모든 일의 관건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나의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아래 있음을 확신하고 흐트러진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 의심 없이 하나님을 따라가야 한다. 불투명한 내일로 인해 우리 모두의 믿음이 흔들리려 할 때,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나를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의 존재를 선포하면서 하늘에 사무치는 찬송과 감사로 승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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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8월 11일)
제목: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Do You Realy to Be Healed?)
말씀: 요한복음 5:9, 14-15
대표기도: 백승준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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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5:9, 14-15,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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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광복 79주년인데 오늘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 한 분도 예외 없이 신앙의 경이로움 그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수의 강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광복 79년 주년인데 어제 우리 토요 새벽예배 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79가 뭐냐? 칠천 기도 용사가 구국기도 하는 거다. 이게 꼭 좀 감이 와 닿는지 모르겠어요. 예 칠천기도용사뿐만 아니라, 오늘 이 앱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모두의 마음속에 오늘 정말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찬송할 때 우리가 이런 광복절을 할 때, 자주 부르는 찬송 중의 하나가 ‘시온의 영광에 빛나는 아침’ 찬송하셨죠잉? 하는데 그게 뭔가 마음이 확 와 닿는 게 뭐냐면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시온의 영광에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묶이고, 매이고 억업 당하고 상처받은 수많은 종들이 자유 함을 얻는다는 것이에요. 저 북한의 포로 된 상황을 저 묶인 자유 함을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독문 할 때도 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 우리가 마치 꿈꾸는 것 같아 포로들이 돌아올 때에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같았도다. 마치 꿈꾸는 것 같이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 저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시리즈 열여섯 번째를 하면서, “정말, 네낳고자 하느냐?” 오늘 본당, 별관 또 방송으로 들어오는 분들, 또 모든 분들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간절함이 있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38년 된 병자가 이제는 해도 안 된다. 그야말로 패배주의 이제는 비관주의 완전히 낙심하고 이제는 끝났다. 그 마음속에 주님이 불을 지르시는 거예요.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오늘 시작할 때부터 마음속에 “정말 내가 낫고자 하느냐?” 오늘 그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오늘 15절을 보니까, 아 예수님은 나를 고치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 5:15,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38년대 병자는 아주 고침 받고 난 다음에 추림이 나를 고쳐 주셨구나! 주님은 마이 힐러, 주님은 나를 고쳐주셨구나! 주님은 우리 민족을 고치시고, 또 오늘 이 사회를 고치시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을 고치시는 분이세요. 이걸 위하여 본문을 좀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5:1-2,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명절에서 올라가시는데 왜 올라가시는가, 2절에 보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쉽게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타, 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행각이 다섯이 있는 거 보니까, 좀 큰 못이었어요. 그 이름이 뭐라고요? 베데스다, 뜻은 왜냐 벧이란 말은 ‘집’이라는 뜻이고, ‘에스다’ 이렇게 이게 본래 해세드, 이렇게 여러분 헤세드가 뭔지 아시죠? 자비롭다, 은혜다. 이래 하셨던데 그러니까 ‘자비의 집이다.’ 그런 뜻이에요. 거기에 이제 다섯이 있는데, 거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3절에 보니까. 뭐라고 나와있냐면,
 
*요한복음 5:9, 14-15,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왜 기다렸는가? 4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5:9, 14-15,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물이 동할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이 동하고 먼저 들어가는 자가 어떤 병에 걸리지 낫는다. 이런 것 때문에 3절을 다시 한 번 보면,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어떤 사람이 많은 병자 그다음에 맹인, 앞을 못 보는 자, 다리 저런 사람, 혈기 많은 사람, 중풍 쇼크 받아가지고 온몸의 정상 가동이 안 돼, 이런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 누워 있는 거예요.
 
오늘 저는 이 본문을 통하여 병에 대한 ⓵증상을 말씀할 거고, 그다음에 ⓶그 병을 진단하는 거 말씀할 거고, ⓷세 번째 치유와 그다음 ⓸처방 이 4가지가 오늘 본문 속에 일어나는데, 어쨌든 간에 오늘 여러분들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민족적으로 우리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있는 수많은 38년 된 수많은 난제의 병들이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그걸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자, 그런데 이 병자들이 인제 누워 있는데, 이게 마치 뭐냐 하면요. 겉으로 볼 때는 멀리 행각이 다섯이 있고, 베데스다의 아름다운 물이 태양빛의 물결이 반짝이고, 겉으로 볼 때는 멋있어 보이지만 속, 그 안에 들어가면 수많은 아픈 사람들이 질병에서 누워있는 거예요. 누가 그런 이야기 했죠. 인생은 겉으로 보면 희극 같지만 그 속에 들어간 비극이다. 아 증상들이에요. 그래서 그 아파 있고, 누워 있고, 눈 못보고, 다리 절고, 혈기 마른 자들을 주님이 오늘 심방 오신 것이에요. 앞에 4장에 보면, 수가 성 우물가의 여인을 주님이 심방(尋訪) 가셨잖아요? 거기서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남편 데리고 오라‘’, 아주 정곡을 찔렀는데 오늘 5장에서는 주님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심방(尋訪) 오신 주님께서 우리 교회는 좀 이렇게 교회가 큰 규모가 돼 가지고 제가 여러분들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신방을 못한다. 할지라도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을 신방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만져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자, 우리가 겉으로 볼 때 육신족의 이런 아픈 병도 많이 있지만 사실 오늘 이 사회를 보세요. 수많은 마음의 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서로 경쟁(競爭), 시기(猜忌), 질투(嫉妬), 고통(苦痛), 수많은 증상(症狀)들, 여러분 지금 많은 분들이 지금은 이 스마트폰 AI 알고리즘에 빠져가지고, 계속 여러분들 얘기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SNS에 여러분들 필요한 거 올리고, 그랬는데 사실 따져보면요. SNS에 집착하는 분일수록 연구 자료에 의하면 불안과 소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고, 소셜 미디어의 사용 빈도가 많을수록 사회적 불안과 외로움의 증상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에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괴로움과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증상들이 있어요. 다 나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이 베드스타에도 모든 것이 다 나쁘진 않아요. 나름 거기에도 나름 인도주의가 있고 서로 좀 도우려는 마음도 있고 그다음 또 뭐 쫌 이렇게 배려도 좀 하고 어 이렇게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낫느냐, 안 났느냐, 하는 그 치열한 어떤 그 어떤 순간이 오면, 모멘트 순간이 오면요. 사람들이 인도주의 서로 배려하고 서로 관심 좀 있는 것 같고,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치열한 아귀다툼의 현장이 되는 것이에요. 치열하게, 소위 물이 동하는 그 순간만은 투쟁의 역사가 시작되는 거예요. 먼저 뛰어 들어 갈려고, 먼저 나으려고, 서로 밀고 당기면서 싸우는 것이에요. 우리 인간이 가만히 있을 때는 나름대로 배려하고 인도주의적인 면이 있기도 하지만,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에는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 가지고, 민낯이 드러나 가지고, 서로 살려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이 극심한 갈등들 마찬가지로 베데스타 비극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시고, 심방(尋訪)하시고 그리고 이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시고 난 다음에 명실상부하게 이름 그대로 베데스타 은혜의 집이 된 줄로 믿습니다.
 
I. 인생 비극의 축소판 베데스다(3-4):증상(症狀).
 
-제가 오늘 우리 가운데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상처를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그런 성향이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주의 음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 첫 번째 제가 이제 증상(症狀) 문제를 말씀드렸고, 이제 주님께서 진단하시는 것입니다. 6절에 뭐라고 지금 말씀을 하냐면, 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5:6,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러시되 네가 뭐예요? 낫고자 하느냐? 제가 오늘 “정말 내가 낫고자 하느냐? 제목을 붙인 이유가 여기에서 나와 있습니다.
 
II.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6절):진단(診斷).
 
-네가 정말 낳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이라고 그러셨는데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여러분, 이 질문은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질문입니다. 어떤 인간이 네가 낫고자 하는데, 내가 고쳐주는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예수님은 자연계를 장악(掌握)하시고, 예수님은 질병 계를 장악하시고 예수님은 영계를 참가하셨어요. 예수님은 질병 계. 수많은 기적같이 수많은 아픈 사람들, 수많은 나병 환자들,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주님이 고쳐 질병계를 장악하시고, 이 누구이길래 이런 기적 같은 병을 치유(治癒)하시는가? 폭풍 이는 바다를 주님이 잠잠케 하실 때, 이 누구에게 이 폭풍이라는 바닷가를 잠잠케 하시는가, 소위 자연계를 주님께서는 통제하시고, 그다음에 악한사탄 마귀 귀신들을 쫓아내는 주님의 영계(靈界)를 장각하시고, 그러니까 이 소위 신성을 지니신 질병계를 장악하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이에요.
 
오늘 여러분들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그냥 주일 강단에서 설교 얘기하는 정도 들리는 말씀을 듣지 말고, 오늘 주님께서 한 분, 한 분, 심방 오셔가지고,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이 민족의 갈등이 치유되기를 원하느냐?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가지고, 참으로 마음속에 간절함을 갖고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적당히 원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일사각오로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오후에 청계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거기에 올라가 가지고 뭐 바위에서도 기도할 것이고, 간절하게 시간 되면 미리 올라와서 기도를 하시는데, 여러분, 거기서 한번 결사적인 각오로 주님께서 주신 음성인 네가 오늘 정말 낫기를 원하느냐?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 마음이 주님 앞에 마음이 열려 가지고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원함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그냥 결단하는 축복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치유 자 되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질문인 줄로 믿습니다. 치유 자 되시는 주님께서 이 질문하실 때, 거기에는 내가 너를 고쳐주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목자의 심정이 있는 것을 기억하셔야 되는 거예요.
 
오늘 이 자리에는 교회라고는 처음 오신 분도 있을지 몰라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육신적으로 아프고 이런 것도 있지만 정신적으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서 살다 보면 수많은 문제가 치유되지 않아 가지고 큰 짐을 주고 있을 때에, 오늘 처음교회 오신 분들 가운데 주님을 잘 몰라도 오늘 마음의 소원을 하세요. ‘주여 내가 낫기를 원하나이다.’ 낫길 원하나이다. 그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들을 길을 주시고 마음이 열리기를 바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 병자에게 이 말씀을 하셨느냐면 이 병자의 반응을 좀 들어보니까 이 병자의 마음속에 상처가 있고, 병자가 아 이제는 나도 끝났다. 하는 비관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래요. 심방 오신 이유가 7절을 보세요. 뭐라고 나왔냐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6절에 물으니까 같이 보죠.
 
*요한복음 5:7,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 무슨 말입니까? 이 대답에는 그의 자기 연민(憐愍)과 불만(不滿)이 담겨 있어요. 나는 누워있기 때문에 움직임이 빠르지 못하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 나를 들어서 물에 넣어줘야 하는데 아무도 나를 넣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그냥 널브러져서 누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니까 그의 마음에 이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부정적인 생각과 상처받은 마음이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뭐라고 해요. 다시요. 아무도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이 말에는 자기 불만과 연민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불평하면 자기연민에 빠지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 속에 주님이 허락하셨던 기쁨 자원이 고갈이 되고, 소망자본 희망자본이 다 없어지고, 나중에는 냉소주의, 부정적 의심만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는 이 질문 안에는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단지 육체적인 치유에 관한 질문 정도가 아니라, 이 말씀 이 질문에는 그 병자(病者)를 전인적인 치유로 초대하시는 질문이 될 수가 있는 것이 그리고 이 질문에는 종합적으로 은혜의 자리로 부르시는 초대장(招待狀)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제대로 은혜를 받고 치유가 되면 몸도 따라오고 몸도 치유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자,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38년도 병자를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가 처음 병들어서 5년 10년 될 때까지는 사람들이 와서 너 낳을 수도 있어, 그래 나도 나을 수가 있을 거야. 그리고 너 낫기를 원한다고 이런 마음의 소원이 계속 나름대로 자리 잡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병이 만성이 돼 가지고 5년이 되고, 10년이 되고, 20년이 되고, 30년이 되고, 35년이 지나니까 자기도 모르게 오랜 병에 익숙해져 가지고 병에서 나을 것 같다고 생각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병자는 38년이니까. 예를 들어서 20살의 병자가 되었으면 58세가 된 겁니다. 거의 회갑 수준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사회의 평균 나이 평균 수명을 다 초과(超過)해버렸습니다. 그래갖고 뭐 이제 내 인생 끝났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는 그 베데스타 전각에 수많은 병자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 혈기 마른 사람들, 이 사람들을 다 이래 지나셔 가지고 다, 다리 저는 사람도 지나고, 혈기 마른 사람도 지나시고, 맹인도 지나가지고, 이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와 가지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낫고자 하느냐?” 부드럽고 따뜻하게 질문하실 때, 갑자기 그 병자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되고 떨린 거예요.
 
오늘 우리 가운데 오랜 시간 병으로, 오랜 시간 큰 상처로, 마음이 굳어버린 채 자기 자신도 포기(抛棄)해 버린 어떤 고통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주님은 지금 맹인들, 다리 저는 자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서 이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오신 것처럼, 오늘 이 시간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 예배시간을 통하여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주님이 여러분들을 다가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셔서 질문하십니다.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은밀한 죄들 좋지 못한 고질적인 습관 등이 있다고 해 보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끊기를 원하겠지요? 은밀한 죄나 고질적인 습관들 근데 실상은 38년 된 병자처럼, 만성적으로 반응해 가지고 그 죄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원하기는 원하는데 만성적인 죄의 습성이 주는 즐거움에서 진심으로 벗어날 의지가 없는 거예요. 그저 그랬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잠시 죄악의 낙이 있기 때문에 잠시 죄의 즐거움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정말 낫고자 하느냐? 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 질문이 내게 능력으로 다가오지를 않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냥 원하는 거 하고 정말 간절히 원하는 것은 다른 거예요.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이 희망과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일사각오의 결단을 하는 것은 다른 것이에요.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시편 145편 18절 제가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편 145:18,
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아멘 진실로 원하는 축복을 이 시간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혼자 있을 때보다도 공동체가 같이 기도하고, 같이 찬양하고, 같이 준 앞에 목 놓아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할 때, 하나님이 이 자리에 기름 부음이 있게 되는 것이 소위 은혜의 불이 떨어지게 돼있는 것이에요.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남북문제 지난 79년 동안, 옛날에 어릴 때 저희들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그렇게 하면 뭔 가슴이 좀 찡한 게 있어요. 근데 지금 2030 시대 세대 또 4050 40대 50대도 보면 실질적으로 저희들 세대만큼 통일을 그만큼 원하는가?

 
작년에 서울대학교 통일연구소에서 평화통일 연구소에서 통계가 나왔는데 지금 20대 30대에 있는 젊은이들은 별로 통일이 필요하지 않다. 통일을 별로 원하지 않는다. 이런 분들이 76프로예요. 40대 50대도 뭐 57프로 이상, 그러니까 원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이게 지금 일반적인 생각이에요. 이제 만성이 돼버린 거예요. 정말 원하지를 않는 정말 그런 이게 그만큼 어떤 긴박성이 약해진 거예요. 절박성이 약해진 거예요. 그러니까 물어보십시다. 통일을 정말로 원하느냐의 차원을 뛰어넘어 가지고 여러분 북한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을 때 중국이 장악해야 되겠습니까? 다시요. 중국이 장악해야 되겠습니까? 누가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해야죠. 북한이 무너질 때 러시아가 장악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그거는 90프로 이상 우리가 다 공감할 것이에요. 오늘의 이 마음속에 하나님 남북문제에서도 우리가 38년 된 병자와 같이 그냥 만성이 돼 가지고 적당히 원하는 거였다면 스님 정말로 원하는 것으로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북한의 문제는 예배의 문제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북한이 김일성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사상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여 북한이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여 주십시오.
 
여기에 대해서 아 그렇지, 하고 적당히 겨우겨우 요나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처럼 다 희망이 없고, 다 마른 뼈가 되고, 다 희망이 없는데 마른 뼈가 살겠느냐? 그랬을 때의 에스겔의 마음속에 뿔이 붙어 가지고 수여 영이 마시면 마른 뼈가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 대언이에요. 대언! 그리고 이 MZ 세대 젊은 세대는 이제는 해도 안 된다. 우리 선배 시대는 뭐 열심히 하면 집도 사고 다 아는데 이제는 우리 희망이 없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MZ세대는 그래도 세계로 나갈 수가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음성을 듣고, 네가 정말 제대로 살기를 원하느냐? 물었을 때 우리 젊은 세대도 그렇습니다. 하고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로 임하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자, 이제 저는 증상 파악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진단을 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치유가 있습니다. 세 번째 이제 팔절을 보니까 뭐라고 나와있는가,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다 같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5:8,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III.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치유(治癒).
 
-치유입니다. 38년 된 병자와 같이 불평할 가능성이 많은 우리 속성을 보시고 치유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일어나 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담대한 믿음의 강철 신발을 신고 일어나라. 이것이 바로 권세 있는 능력의 말씀인 줄로 확신합니다. 능력의 말씀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 병자의 입장에서는 몸 가누기도 힘들고, 앉기도 힘들고, 서는 것은 더 불가능한데 주님께서 갑자기 일어나 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거예요.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살아있고 능력 있는 주님의 음성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성령을 새바람이 불어야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명령하시니까, 기적(奇蹟)이 일어난 게 된 거예요. 마치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까 그 무에서 빛이 유가 창조되고 나사로야 일어나라, 그러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시니까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레마의 말씀이 돼 가지고 일어나 걸어가라. 그랬을 때 ‘주님 그렇습니다.’ 하고 내 삶에 불평의, 어떤 내 삶의 불신에 모든 돗자리를 번쩍 들고 걸으라. 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38년 된 병자가 뭉그적거리고 누워 있던 그런 것들을 그걸 들고 일어나는 거, 그것은 영적 자립심을 키워주시고 거룩한 홀로서기를 하라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오늘의 말씀이 우리 민족과 통일에 관해서도, 패배주의와 부정적 운명주의의 돗자리에 누워 있는 우리 민족을 일깨우는 주님의 천둥소리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권세 있는 능력의 말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이겁니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들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진짜 원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제 지난 몇 주간에 이렇게 말씀 옥상도 하고 이렇게 있는 동안에 우리가 흔히 아는 말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의 모여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알려고 얼마나 애를 씁니까? 점쟁이 앞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 관심 그거 비교가 안 되게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기를 얼마나 애를 씁니까? 근데 그 하나님이 뜻 멀리 찾을 것이 아니에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자 이 말씀 여러분들에게 능력의 말씀이 돼야 되는데 여러분은 물어보십시다. 항상 기뻐하는 게 힘들어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게 힘들어요. 범사에 감사하는 게 힘들어요. 모든 사람들은 다 힘듭니다. 그래도 그 셋 중에 항상 기뻐하고, 고거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거, 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거, 어느 게 제일 힘들어요. 뻔합니다. 게으르고 저기 뭡니까? 좀 부지런함이 약한 사람은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게 약하고 그 다음에 또 완벽주의자들 우울증에 있는 사람들은 뭡니까? 항상 기뻐하는 게 힘들고, 너무 똑똑한 사람들은 또 범사에 감사하는 게 힘들고, 그런데 이게 권세 있는 주님의 능력의 말씀이거든요. 이게 오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을 때,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항상 기뻐하고 시집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되는데,,, 저는 제가 뭐가 제일 약할까요? 말씀 안 드려요 예 다 우리 약점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한다는 이게 사실 어떻게 불가능인데 이거 어떻게 가능하게 될까? 제가 늘 암송하고 제가 좋아하는 구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 구원의 하나님을 찬성할지로다.’ 주님이 날마다 우리 짐을 져준다고 생각하면, 그게 치유 음성 되게 하셔서 그래도 감사할 수 있고, 그래도 기도 할 수 있고, 그래도 기뻐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니까 오늘 네가 정말 낫길 원하느냐 주여 정말 그 말씀 가운데 기쁨과 감사와 기도가 우리의 것으로 자리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마지막 이제 처방전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제가 ⓵증상(症狀)을 말씀드렸고, 그다음에 ⓶진단(診斷)을 말씀을 드렸고, 제가 이제 ⓷치유(治癒)를 말씀드리는데, 권세는 주님의 말씀인데, 자 이것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나타난 2가지 현상이 있는데, 그게 처방(處方)이에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에 권세가 말씀의 능력이 실제적으로 내게 와 닿으면요. 뭘 느끼는가 하면, 1)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주님의 인재가 그렇게 리얼해져요. 그러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 하는 것이 그렇게 실체화가 된다는 것이네요.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내 삶의 환경 내 삶의 모든 처지를 2)주님이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그걸 느끼게 되는 것이죠.
 
오늘 여러분의 여러분과 저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변개할 수 없는 최고의 확신이 뭐냐 하면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에요. 그거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정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질문하시는 거예요. 물어보겠습니다. 내일 아침 해 뜹니까? 안 뜹니까? 자 다시요. 자리를 들고 일어나기 위해 걸어가기 위해 필요한 건 처방전인데 다시오.
 
IV. 자리를 들고 걸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14-15):처방(處方)전.
 
-내일 아침 해 뜹니까? 안 뜹니까? 이거는 변경할 수 없는 자연의 놀라운 법칙이에요. 내일 아침 해가 나 뜰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에요. 생명이 없으니까 모르는 거죠.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있었어요. 내일 아침에 해가 뜨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이 나를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거예요. 예 놀라운 진리에요.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 노후대책(老後對策)이란 걸 합니다. 노후대책 1순위 건강이다. 2순위 돈이다. 3순위 또 뭐 있나요? 친구다. 이런 거 있지만 여러분, 노후대책의 최고의 노후대책이 뭐냐면요. 주님인 나와 함께하시는 이 놀라운 사실을 여러분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실체 있게 경험하는 것이에요.
 
오늘날 우리나라에 고독사(孤獨死)가 너무 많아요. 홀로 있다 보니까 너무 외로운 거예요. 근데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요. 고독사가 있을 수가 없어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너가 정말 낳고자 하느냐’ 질문하시는 그 주님 때문에, 나를 신망 오시는 그분 때문에, 내 삶을 처방하시고, 진단하시고, 보여주시는 그분 때문에 우리엔 고독사가 없는 것이에요. 맞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노후대책 0순위가 주님이 나와 함께 임재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이에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고독사가 없다는 것을 믿으십시다. 따라 하겠습니다. 신앙인에게는 고독사가 없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한 우리에게는 고독사가 없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에요. 손 내밀어 줄을 만져라. 주 지나가신다. 이런 마음의 손을 들면 주님이 남께 인지하시고 동행하는 것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최고의 그리스도인의 확실한 노후 대책이 뭐냐, 정말 너가 낫고자 하느냐고 질문하시고, 심방하시는 예수님의 임재인 줄 믿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니까 그러니까 우리 우리 교회는요. 고독사가 없는 공동체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유일한 이 시대의 사회적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깨닫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어제 새벽에 제가 많이 강조했는데 인생은요, 2종류의 남에게 에너지를 빼앗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주님이 너가 정말 낫고 자느냐, 이런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요, 반드시 그 사람 만나면 용기가 얻어지는 거예요. 그 사람 만나면 영감을 받는 것이에요. 그 사람을 만나면 다시 한 번 기백(氣魄)을 갖게 되는 것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주신 이 은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영감과 용기와 기백을 주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거죠.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노후 대책이 되는지 몰라요. 그리고 또 하나 처방전 14절을 다시 한 번 크게 읽겠습니다.

*요한복음 5:14,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아멘 다시는 뭐예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사람이 왜 38년 된 병자가 되어 가지고 38년 동안 그 병 때문에 신음(呻吟)하고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을까? 여러 해석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 아마 이 사람들 약점이 있고, 죄(罪)도 범(犯)하고 그래갖고 어려움이 있었을지 몰라요. 근데 주님께서는 이제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 다시는 그러지 말라. 예수님이 좋은 의미에서 거룩한 경고를 하시는 거에요. 이제 팔다리가 건강해져서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게 됐으니 그거 갖고 옛날처럼 또 잘못된 버릇 가지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 팔다리 가지고 건강을 가지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라.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 하나님 많은 치유를 주시고, 축복을 하시고, 선진국에 진입하게 하시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대한민국이 세상에 수많은 나라에 영감을 주고, 용기를 주고, 길을를 보여주고, 세계 선교를 마무리하고 그래서 오늘 79년 된 광복절을 맞이하여 모든 묶인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신실한 남녀 종들, 성도들 주님의 심방을 받아 그렇습니다. 간절히 원해갖고 주님과 여러분만이 아는 놀라운 치유의 현장을 일마다 때마다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송가 가운데 우리 시대 때 페스트 가스펠 송에 있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손 내밀어 줄을 만져라.’
 
♬나의 등 뒤에서~~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 길 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 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지난 79년 동안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 고통의 상황이긴 하지만 만약에 피 흘림 없이 복음적으로 평화 통일만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이 고통의 과정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정신 차리고 이것도 내 마음대로 살지 아니하고, 이것 때문에 주님 앞에 더 긴장해서 더 하나님을 집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다면 이 과정도 나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저 북한은 주님 불쌍히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약
주님은 질병계, 자연계, 영계의 주권자이시니,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와 같은 나를 심방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실 때, “네 주님, 낫기를 원합니다.” 일사각오로 대답하여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권세 있는 능력의 말씀을 들려주실 때, 오래 묶여 있던 나의 자기연민과 불평과 패배주의에서 일어나 믿음의 강철 신발을 신고 걸어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 사랑의 교회의 7천 기도용사가 청계산 산상 기도회에서 ‘2033-50 비전’을 위해 구국 기도를 드릴 때, 대한민국이 79년 된 분단의 자리를 들고 일어나 ‘평양에서 특새 하는 그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 교회와 나라가 승리하는 체험을 기대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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