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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9월 8일)
제목: "진흙에서 소금으로"-예수님은 누구신가? 시리즈⑱
말씀: 마태복음 5:1-2,13-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정상익 부목사님(1부)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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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5:1-2,13-1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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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찬양대가 ‘예수님 이름 높이세!‘ 하는데 주님이 높임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일주일이 여러분 몇 시간인지 아십니까? 어렵습니까? 일주일이 168 시간이죠? 168 시간 가운데 저는 이 주일 아침 이 예배가 저와 여러분의 영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또 육신적으로 핑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나머지 6일 동안 승리를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주 우리 교회 은혜 게시판에 나온 어떤 형제의 글을 읽고 마음이 진했어요.
 
어떤 형제가 지금 내 현실에 큰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천국 잔치인 주일 예배를 드리므로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주일 현장 예배에 사 오르는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는 참된 기쁨이다. 이 힘을 가지고 나머지 6일을 최선을 다하여 살아낸다. 그 그대로 있는 삶의 간증이에요. 오늘 예배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지금 예수님은 누구신가 시리즈를 하고 있는 오늘 18 번째, 오늘은 위대한 산상수훈을 통하여 천국 시민의 헌장을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아멘. 그리고 부제 오늘 제목은 제가 그래서 ‘진흙에서 소금으로’ 진흙에서 소금으로, 주님은 이 땅에 오셔가지고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1절에 보니까, 산에 올라서 제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 마태복음 5:1,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나올 때에 앞에 4장 23절에 예수님 세 가지를 하셨어요.
 
*마태복음 4:23,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다니사 그들에게 해당해서 첫째 뭐예요? 가르치시고, 두 번째는 복음을 전파하시고, 세 번째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예수님은 티칭, 가르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프레칭, 복음을 전파하시고, 예수님 힐링 고치시는 분, 그래서 오늘은 가르치시는 예수님, 뭘 가르치셨는가? 지난 주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름 받은 제자로서 일을 하려면 천국에 대한 개념이 확실해야 한다.
 
그래 천국은 에세나파나 사두계파나 또 바르세파 같은 그런 경직되고 하여튼 경도된 그런 천국에 대한 개념이 아니고, 천국은 마치 혼인 잔치 집과 같다. 그런 혼인 잔치과 같은 그런 은혜를 받았다면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소위 십계명처럼 천국 시민으로서 매일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에 대해서 주님이 오늘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오늘 말씀하시는가? 오늘 여러분들 1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이 뭐예요 속음이다.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 라는 것은 소금이 왜 필요합니까? 부패하고 또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래서 세상이 부패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비기독교적입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교회를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도록 공격(攻擊)하고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미혹(迷惑)하는 것입니다. 소위 그래서 이 세상은 미혹케 하는 마귀의 영향을 받는 시대의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트렌드가 그리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가지고 절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되어가는 것 시대의 흐름을 보니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고 어떨 때는 마음이 가슴이 아프기도 해서 참 마음에 큰 짐을 지고 기도가 되는 거예요. 제가 말씀을 다 안 드려도 이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이 신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정말 문제가 커 가지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혼미(昏迷)하고 비기독교적이 되었을까요? 다시오. 그 이유는 사탄이 미혹의 영으로 우리로 하여금 정신을 못차리냐는 겁니다. 요즘 마음 지키기가 참 힘들어요. 마음,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되어 버렸어요. 그걸 좀 전문적인 용어로 복잡계라고 그러는데 복잡한 세계가 되어 버렸어요. 특별히 SNS를 통해 가지고 여러분 몰라도 되는 걸 너무 많이 알게 됐어요. 안 알아도 되는 걸 너무 많이 알게 됐어요. 어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요. 그리고 알고리즘을 가지고 막 융단 폭격처럼 우리에게 다가오고 밀려오고 그래서 요새는요. 이 정신이 마음을 못 지켜가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요. AI나 알고리즘의 내용 가운데 또 뭐냐 하면 가짜가 또 너무 많아요. 그걸 뭐라고 그런다고요 딥페이크(Deepfake)라고 그럽니다. 깊은 가짜, 아니 뭐 지 이런 조커도 못 알아들으면 제가 여러분 못 살아요. 깊은 가짜, deep 페이크, 페이크 가짜라고 deep이라고 깊다 말이죠. 깊은 가짜. 그래서 우리는 이 깊은 가짜 가운데 우리는 가짜의 이 시대가 우리는 딥솔트(deepsolt), 진짜 소금이 돼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람들은 혼미해져 가지고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마음을 지키지 못해 갖고 사람들이 엉뚱한 짓을 하는 거예요. 내면세계의 질서가 엉망이 돼 버렸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사야가 말한 대로 병들었어요.
 
우리 내면세계가, 그리고 우리 국가까지도 이 사회나 국가까지도 복합 중증이 걸려버렸어요. 저 북한 때문에 우리 사우스 코리아, 한국 남한에 사는 사람들은 머리에는 북한 때문에 핵무기를 이고 있고, 등에는 가계 빚 또 이렇게 수천 조의 빚을 지고 있고, 허리에는 지금 0 5%, 후손이 끊어지고 있어요. 지난 주간에 우리 어떤 장로님 청문회를 하는데, 세상에 창조론을 믿는다고 그렇게 아니 창조론을 믿는다고 그걸 그렇게 모욕을 하고 조롱을 하고 정신이 나갔어요. 정말 대한민국을 존경받아야 할 분들이 존경받아야 하는 세상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고, 실제로는 이게 다 영적인 문제들이에요. 영적으로 궁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의 공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나 여러분이나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마음을 못 지키고 우리의 생각을 조정 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는 이 말씀을 가지고 왜냐하면 그 시대에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이 짙은 안개와 어둠 가운데서 암흑에 사로잡혀 가지고 그 시대에 그 당시에도 부패, 붕괴 뭐 온갖 불화, 온갖 약탈, 이런 것들이 다 많았어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저나 여러분이나 한 번 새 마음 새 영, 또 우리가 얼마나 뉴 크리에이션, 우리가 어떤 새 창조물이 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확인하고 감사하고 우리가 딱 무장하는 그런 시간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미혹케 하는 영이 트렌드에 가 있는 이 시대 가운데, 마음 지키기가 힘든 시대 가운데, 우리가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복잡계, 혼미한 세계 혼미계의 어려움을 딱 두 가지로 두 가지로 하나는 소금으로, 하나는 빛으로, 여러분 소금이 먼저 나왔어요? 빛이 먼저 나왔어요. 13절에 보니까 소금이 먼저 나왔어요. 그다음에 14절에 보니까 그다음 뭐예요? 빛이 나왔어요. 소금이 먼저 나왔어요. 두 가지로 딱 두 가지로 여러분 제가 저나 여러분이 오늘 소금과 빛의 이것만 확실해 가지고 이걸 가지고 우리 기도 제목으로 삼고 집중하면, 이 혼미한 세상에서 마음 지키기 힘든 세상에서 내면세계의 질서가 뒤죽박죽이 된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것을 정리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먼저 빛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다시 뭘 먼저 말씀하셨다고요? 소금을, 그런데 이 소금의 문제는 이 제자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실제적으로 깊이 와 닿았어요. 그 당시에도 로마의 어떤 제국의 김나지움, 로마 제국의 교육 시스템이 있었어요. 그 교육 시스템에 대해서 그 소위 ‘김나지움 교육’이라고 그 그걸 전혀 받지 않는 이게 그냥 어부들이었어요. 그냥 대단하지 않은 어부들이었어요. 근데 그 어부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베드로야 너는 세상의 소금이야. 안드레야 너는 세상의 소금이야. 요한아, 너는 세상의 소금이야. 이게 뭔지 이 사람들은 바로 눈치를 탁 쳐버렸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어부였고, 당시에는 냉장고가 없으니까 당시에는 뭐 지금처럼 어묵을 만들고 그런 게 없으니까, 이 잡은 생선을 잡은 고기를 오래 보존하려면 소금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획(漁獲)한 물고기가 부패(腐敗)되지 아니하고, 장기간 보존되는 데는 소금이 절대적이었어요. 이거 없으면 다 썩어버리는 거야.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소금은 부패하지 않는 역할을 합니다. 당시 소금의 용도는 음식의 맛을 내고, 희생 제물 제사 드릴 때 희생 제물을 부패하지 않게 하고, 갓 출생한 영어를 깨끗하게 하고 음식을 보존했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그러고 난 다음, 그다음 13절 14절에,
 
*마태복음 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이 소금과 빛을 선포하시는데 여기에 이제 제가 한 번씩 강조했지만, 너는 너희는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너는 소금이다. 너는 빛이다. 일방적인 선포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소금도 아니고, 빛도 아니고 소금의 자격도 없고, 빛의 자격도 없는데 소금으로 살지도 못하고, 빛으로 살지도 못하는데 주님은 일방적으로 너희는 소금이다. 그리고 여기는 너희라는 이 말은 한 사람이 아니라 복수예요 복수,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모두들 오늘 우리 시간 면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예수 믿는 모든 분들 저와 여러분들, 주님은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소금이 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좀 잘 해 가지고 수고하고 애써서 고생하고 도 닦고 세상들에게 사람들에게 좀 어떻게 윤리적으로 성숙해 가지고 어떻게 잘 되어 보라. 그렇게 먼저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일방적으로 이유를 모르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소금이다. 하면 너희는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권세가나 로마 지식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 보통 사람들이 나와요.
 
너희는 세상에 어부, 그냥 일반 어부들이 나와요.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 말을 할 때 당시에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주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역사적인 기록을 볼 때 당시에 세상의 빚, 라잇 어브 월드-right of the world. 세상의 빛이라는 호칭은 신분이 높은 유대교 선생이나 랍비들에게만 수여한 명예 명예로운 선포였어요. 그런데 오늘 빛이라고 호칭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구리빛 얼굴에 껍질이 벗겨진 손을 가진 시골뜨기 어부들, 평범한 사람들 그들을 향하여 그들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안드레나, 나다니엘이나 이런 사람들은 랍비도 아니고 율법학자도 아니고 산헤드린 공회 존경만의 회원도 아니었어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격 없는 무지 랭이 들어 있어요.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은 이들을 3년 동안 훈련시키시고 제자들을 훈련시키셔가지고 어느 정도 성숙한 수준에 올라갔을 때, 성숙한 다음에 야 너희들은 이제 훈련 받았으니까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야 빛이야, 이렇게 말씀한 게 아니고 이제 갓 시작도 제대로 안 했는데, 제자로서 이제 함께한 시간이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 초보자들, 어린아이처럼 갓 예수님을 따른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주님이 믿어주신 선포에요. 그러니까 정체성과 기능성이 있는데 우리가 기능이라는 말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잘하면 주님이 너 빛이야 소금이야. 그렇게 할 게 아니고 정체성부터 먼저 선포하는 것이에요. 너희는 소금이야. 너희는 빛이야. 이렇게 하니까 우리가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그런 역할과 기능들이 따라가도록 만들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정체성이 먼저예요? 기능이 먼저예요? 정체성이 제자로서 선포되었기 때문에 제자의 삶을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의 삶을 잘 살기 때문에 기능적으로 잘 하기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이 아니에요. 이거는 신구약 성경 전체에 나타난 복음이에요. 전후가 바뀌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일방적으로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주는 것이에요. 이게 하나님 나라의 천국 시민 헌장의 독특성이에요. 우리의 실력을 보고, 여러분들과 저의 자격을 보고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너희는 소금이야. 너희는 빛이야. 라고 선포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중의 복음 가운데 돌아온 탕자 생각해 보세요. 돌아온 탕자는 둘째 아들은 소금이 아니었어요. 밑이 아니었어요. 허랑방탕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다 날려버린 인간이에요.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히게 하고, 아버지의 가슴에 날마다 눈물샘을 고이게 하는 인간이에요.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돌아와 가지고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 내가 소금이라 내가 빛이라 칭함을 받지를 내가 못합니다.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이미 소금이고, 너는 이미 빛이야. 그러니까 아들이야. 내가 왜 소금인가? 내가 부끄러운 내가 무슨 내가 빛인가? 그러면서 각성하고, 고민하고, 그 자격이 없고 없는 부족한 나를 믿음으로 소금으로, 빛으로 불러주신 그 아버지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 가지고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이 오니까, 아! 나도 그러면 아버지의 자녀답게 나도 소금답게, 나도 빚답게, 살아봐야지.
 
오늘 예배 참석하신 차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확고한 믿음의 방향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의 일방적인 선포고, 두 번째로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가 세상에 소금이라는 이 정체성에는요. 우리가 진흙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어요. 여러분과 저는 소금이지 진흙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 진흙으로 지어진 존재예요. 창세기 아담을 지을 때 진흙을 가지고 지으셨어요. 하지만 제2의 아담 되시는 예수님의 피로 새로 거듭난 복음의 생목의 생명의 역사에 접목된 저와 여러분들은 이제 진흙이 아니라 소금이 된 줄로 확신합니다. 아담 시대의 진흙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통하여 이 시대의 소금이 된 것입니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진흙이 간에 소금이 진흙이 아니라 소금이 되게 우리의 속성을 바꾸시는 거예요. 에베소서 4장 23절에 보니까,
 
*에베소서 4:22~23,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가 소금 되게 하시고, 오직 너의 심령이 새롭게 소금 되게 해가지고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로운 소금이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존재인 것이다.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남보다 멋있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 이 생명과 피의 복음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이 진흙에서 소금으로 바뀐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어떤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능력과 공부를 많이 해서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학교를 나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부족할 수 있지만, 우리가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의 주름이 잡혀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트라우마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유는 다 모르지만 주님의 일방적인 선포, 너희는 진흙이 아니라 나는 소금이야. 어떻게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맹렬하고도 강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 어떻게 보면 이 절실하고도 맹렬한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소금으로 받아들여진 존재가 된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걸 베드로가 받아들인 거예요.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평생 이 말씀을 이렇게 그는 본래 진흙 같은 사람이었어요. 건축자의 버려진 돌과 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통하여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그에게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어요. 그런 버린 돌 같은 그런 행위도 있었지만 그 시대의 산돌이 되게 하시고, 모퉁이 돌 코너 스톤이 되게 하셨습니다. 베드가 베드로나 가롯 유다는 문제가 많았어요. 그런데 가롯 유다는 그냥 그 잘못하다 예수님 팔아먹고 난 다음에 그 끝이었지만 베드로와의 차이가 있다면 베드로는 마음속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야 빛이라는 이 각성과 감격의 정도가 가롯유다와 달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는 소금이야.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아 나는 진흙 같지만 하나님이 나를 소금으로 만드셨으니, 거칠고 황폐하고 의미 없던, 별 의미 없던 돌이 하나님 나라의 산돌이 된 줄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소금이 되기를 힘쓰라가 아니라, 소금이라는 이 말씀에 대한 여러분 감격과 센스와 느낌의 정도가 여러분들의 남은 생일을 결정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명으로 하나님께서 무장시켜 주실 것이에요. 이걸 깨닫는 순간 흙먼지가 진흙이 소금된 이 감격 된 이것이 있는 순간 에베소서 2장 10절에,
 
*에베소서 2:10,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 받은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거룩한 목표를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 다 너무 중요하니까 우리는 진흙이 아니라 소금인 줄로 믿습니다. 너무 중요하니까 오늘 저는 잘 안 하지만 오늘은 한번 하십시다. 우리 두 명 이상, 늘 우리는 진흙이 아니라, 소금입니다. 크게 한번 합시다. 우리는 진흙이 아니라 소금입니다. 크게 합시다. 우리는 진흙이 아멘!! 예배 세상이 다 놀라 들릴 정도 크게 우리는 진흙이 아니라 소금입니다. 크게 한 번 해칩시다. 시작 우리는 진흙이 아니라, 번 더 할까요? 여러분, 이게 평생 남을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자꾸 시작 우리는 진흙이 아니라 소금입니다.
 
피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진흙이 아니라 소금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걸 깨닫는 이게 이제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진흙에서 속으로 변한 우리들의 존재 방식과 사고방식을 이해를 못합니다. 소금으로서 갖는 감격을 세상 사람들이 이해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대의 소금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진흙이었지만 75세에 부름 받아 가지고 사명을 갖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그런 소금의 은혜를 받은 거예요. 다윗도 소금 왕이었어요. 다윗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에요. 그냥 그런 가장 강력한 정복 왕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 안하고, 하나님이 나의 왕이라고 생각 왕이신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그의 소금 고백을 하는 거예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이것이 다윗의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이에요. 할렐루야!! 바울도 소금이었어요. 소금 사도였어요. 뭐라고? 내 겉 사람은 후퇴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너무 막 안 죽으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다 막 그냥 막 그 주름 안 지려고 너무 그러지 말고 우리 그 사람은 후퇴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리고 바울은 또 이 예수님께서는 또 뭐라고 빛이 있다. 라고 말씀하시고 아니시고 뭐라고 그랬어요? 빛이다. 본래 우리는 어둠이었어요. 볼래? 우리는 어둠에 익숙하고 어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제 얘기가 아니고 에베소서 5장 8절에 보니까,
 
*에베소서 5:8,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주님 모르는 우리 다 어둠이고 다 그랬는데 이제는 주 안에서 뭐해요? 빛이 돼 빛이에요. 주님이 우리가 빛이라고 선포하니 우리는 어둠 자체는 어둠의 일을 좋아하고 마음 새기기 힘든 사람들이고, 그럼 우리를 너희는 빛이라.
 
♬빛의 사자들이요.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빛의 사자들이여 빛의 사자들이요. 그다음 가사가 뭡니까? 복음의 빛이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치는 빛의 사자들이여....
 
진흙에서 소금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바뀌는 존재가 정체성이 바뀌니까, 그렇게 우리의 역할 이런 것들이 이제 테크놀로지는 따라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럼 우리는 소금으로 빛으로 어떻게 합니까? 16절에,
*마태복음 5:16,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구태여 나눈다면 소금은 내면적인 거예요. 소금은 녹아져서 소금이 역할 하는 것이에요. 빛은 등대처럼 비추는 거예요. 빛은 외면적인 거예요. 하나는 내면적인 것이고, 하나는 외부적인 것이에요. 하나는 소극적인 거죠. 하나는 적극적인 역할이에요. 소금의 내면이 무장이 되면 자연스럽게 빛으로써 행동이 발하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과 제가 소금과 빛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수많은 진흙을 소금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에요. 수많은 어두움을 빛으로 밝게 하면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어두운 부엌에 바퀴벌레가 왔다 갔다 하는데, 라이트를 딱 켜는 순간 바퀴벌레가 할렐루야!~~ 이 오겠습니까? 타 도망가 빛이 오면 물러가게 돼 있고, 수많은 지능을 소금으로 바꾸면 되는 것이에요. 그러려면 우리는 이 땅의 삶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소금과 빛의 정체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역할 모델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을 주시하고 있어요. 기독교를 욕도 많이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안 보는 것 같이 우리의 삶을 다 보고 있어요. 오늘 이 자리에는 한국 사회의 리더의 역할을 하는 분들도 많이 계세요. 직장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계에서 책임을 지고 위치에 있는 분들이 많이 계세요.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들이요 제가 용어를 만들었어요. ‘굉장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현장을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할 때 정직하고, 순전하고, 투명하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에요. 빛으로서, 이 조심스러운 얘기인데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 이메일 주소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는 제 이메일 주소가 JHOHOH에 뜨거운 메일 닷컴, 또 외워놨다가 또 너무 막에 보내지 마세요. 아니면 또 패스터 오@,,, 에 사랑 닷컴 골베이 닷컴, 여러분 김씨는 만약에 바이블 킴@, 여러분 그런 이름 붙이면 어떻게 될까요? 얼마나 조심스럽고 얼마나 애를 많이 쓰겠어요. 여러분들의 이메일 주소에다가 바이블을 한번 넣어보세요.
 
제가 연관된 분이 있기 때문에 더 말을 말씀을 안 드리겠어요.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그래서 산다는 게 힘든 거예요. 미국 같은 데는 자동차 뒤에다가 익투스, 물고기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물고기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동안에 주차 위반도 못 하고, 속도위반도 못하고, 그래서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의 스티커를 앞에 창문에 붙이고 있습니다. 앞 유리의 부착하라고 했어요. 리더들이 가져야 할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을 주목해야 됩니다.
 
또 우리가 직원으로서, 손 위 사람을 섬겨야 할 입장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소금으로 섬기는 사람, 빛으로 섬기는 사람,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고, 일하는 회사나 정부 기관이나 학교나 일터에서 불평하거나, 부정적하거나 그렇게 하면 안 되겠죠 신뢰감을 줘야 되겠죠. 자 이제 제가 좀 정리를 하겠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제가 다 읽지 않았습니다. 5장 20절에,,
 
*마태복음 5:20,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뭐라고 나와 있죠? 이렇게 나와 있어요. 시작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르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이 빛으로 소금으로, 소금으로 빛으로 이 선포, 저녁에 소금으로 이 은혜는 우리를 더 의로 더 큰 의로움으로 불러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서기관과 바르새인 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기가 막혀요. 다시오.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르세인보다 더 낫지만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거는 대단한 도전 아닙니까? 왜냐하면 그 시대에 가장 의로운 사람들이 서기학과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보다 더 의로워져야 된다.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나를 빛으로 나를 소금으로 선포해 주신 내가 지을게 아니라, 소금이라고 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며 그들이 가지는 의로움과 다르게 그들은 자기 의죠? 우리는 자기 의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의가 우리는 자기 부인을 통해야 자아 시련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통하여 바리세인과 서기관이 가진 의가 아니라 그럼 우리가 어떻게 자아 시련이 아니라 자기 부인을 할 수 있습니까?
 
돌아온 탕자처럼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주님이 나를 빛으로 소금으로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그 은혜에 너무 감격하여 날마다 눈물 콧물 흘리며 그렇게 해야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에요. 복음적 삶의 태도가 기능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또 하나 주님은 우리를 이 소금으로 빛으로, 이걸 말씀하시는 우리를 더 넓은 사랑으로 부르시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본문 뒤를 보면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에 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 그 안에 원수도 포함된다고 그 진리를 선한 사마리아의 교회 비유를 설명하셨어요.
 
서한 사마리아의 비유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는 정도 그건 누구나 다 하는 겁니다. 유대인의 꿈도 꿔보지 못했던 아주 그냥 생각들을 확 집어넣는 사마리아 사람, 사마리아 그 인들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와주는 일종의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서는 충격을 준 그런 삶, 그러니까 우리가 소금으로 빛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런 생각을 뛰어넘는 더 큰 하나님의 의의, 더 넓은 사랑을 붙잡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결론 내리겠습니다. 13절 뒷부분에,
 
*마태복음 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과 제가 이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하고 숨기고 살면, 우리는 밟혀 사는 거에요. 숨기고 살면 결국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 짓밟히고 사는 거에요. 하나님이 소금이라고 부르시고, 빛이라고 선포하셨는데 이 사명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고 살면 숨기고 살면 결국 저와 여러분은 세상에 짓밟히고 살 거예요. 네 가만히 계십니까?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결국은 우리가 짓밟히고 사는 거예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오늘 우리는 기도하는 게 있습니다. 소음과 빛도 타이밍이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저 러시아가 옛날에 소비에트 연방이, 발트 3국 중에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를 다시 점령해 가지고 그 러시아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그랬을 때,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부활절을 즈음해 가지고 한 달 동안 광장에 20만 명이 모여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찬양 그걸 ‘싱 레볼루션’이라고 그랬어요.
 
우리는 그래서 그 나라를 건졌어요. 찬양하면서 제가 오래 전부터 이 말씀을 드렸고, 그런데 우리 이 시대에도 소금과 빛으로서 밟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소금과 빛으로 사명을 다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는 것 같아요. 프랑스의 지금 저 돌레랑스를 통한 지금 차별 금지법, 동성애, 이 소수 인권법이라는 미명하에 이제 성경의 가치를 다 부정하고, 가정의 가치를 다 무너뜨리고, 성경의 절대 권위를 믿지 아니하고, 잘못된 딥 페이크를 가지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고 어떻게 창조론을 믿는다고 그렇게 조롱을 하고, 그리고 어제 저 말씀 청주 지역의 영동지원에서는 그냥 성전환 수술도 안 했는데 사람 이제 우리 성별을 바꿔주고, 대법원에서는 이 피보험자 이것도 말이죠. 동성끼리 사는 사람들은 보험을 하고 이게 이제 동성의 차별법, 그다음에 이거 이제 통과는 이제 지름길이 이제 길이 열린 거예요.
 
우리가 지금 빛으로 소금으로 사명을 감당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가는 형제자매 여러분들이요,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과 한국 교회 성도들은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감당하십시다. 타이밍 맞게 일어나 우리가 함께 일어나서 길가로 가가지고 제가 적어놨습니다. 오라 우리가 길갈로 올라가서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우리는 10월 27일 날, 종교 개혁 주일날, 한국 교회 성도들 성경 사랑하는 사람은 다 모여라. 가정을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다 모여라. 소금으로 빛으로, 소금으로 밟히지 정체성 숨기지 않을 사람들은 다 모여라. 마지막 마지노선인데 이거 지켜야 우리 다음 세대가 지켜지는 것이에요. 3만 5천 불 이상, 5천만 이상 되는 나라치고 이것 통과 안 된 나라가 우리가 유일한데, 마지막 이 선을 지키게 하여 주십시오.
 
오라! 우리가 빛으로 소금으로 모여 가지고 기적의 나라를 만드는 그런 일에 저와 여러분이 쓰임 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수천 조의 빚을 지고, 후손이 끊어지는 이런 답답한 시대 가운데, 주님 우리를 빛으로, 소금으로 한국교회가 10월 27일 저 경복궁 광화문 시청 앞 서울역까지 저 오프라인으로 100만 명이 모여요. 온라인으로 천만 가운데 이 300만 명이 함께 마음을 모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 민족을 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되겠나? 말고,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으니까 우리가 그걸 믿음으로 받아들여 가지고 헌신할 때 우리는 물도 떠 온 하인처럼, 이 시대를 키는 하나님의 귀한 선봉장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마음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에게 주신 이 사명을 가지고 그래서 소금과 빛은 사명이 될 때 우리는 세상 앞에 빛의 사명을 다 감당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요약
자격 없고 진흙 같은 나에게 ‘너는 세상의 소금이야!’ 일방적으로 믿어주고 선포해 주실 때, 날마다 눈물 젖은 감사와 확신에 찬 소금 고백으로 살아가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현정에서 주님의 정직과 투명함과 순전함으로 살아내서 주님을 빛나게 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소금과 빛으로 천국시민의 사명을 감당할 때,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기적의 나라를 만들어 가게 해달라고 온전한 믿음과 확신으로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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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9월 7일)
제목: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말씀: 사사기 5:1-5
찬양인도: 청소년주일학교연합찬양팀,(이동선 부목사님),
대표기도: 김병진 집사님(남제자1반총무)
말씀봉독: 정영찬형제(대학6부), 최예솔자매(청년1국)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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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5:1-5,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 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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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리는 말씀이 우리 토비새에 나은 기도의 동지들도, 또 우리 모든 성도들 평생의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주일은 제가 뭘 말씀을 드렸냐면 철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은혜를 주신다고요. 불 병거의 은혜를 주신다. 크게 한번 크게 한번 합독합시다.

●철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은혜를 주신다고요. 불 병거의 은혜를 주신다.
네, 그리고 오늘은 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면 땅이 진동하고 은혜 단비가 내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오늘은 구호가 오늘 마음의 이제 좀 생각을 했어요. 오늘은 구호가 뭐냐 하면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응답의 단비가 부어지게 하옵소서. 크게 합시다. 땅이 진동하고 은행 아멘!

우리 모든 기도하시는 분들, 또 토비새의 믿음에 4대가 나오셨는데 같이 우리 성도들, 우리 또 교회 모든 중직 자들, 이렇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I. 첫 번째, 철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불 병거의 은혜를 주신다.
-다시 한번 철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은혜를 주신다고요? 불 병거의 은혜를 주신다. 이게요 제가요. 저는 지금까지 쭉 제가 사역에 오고 40년이 넘는 동안 섬기면서 가만히 하나님의 이루어진 걸 일이 이루어진 걸 가보면, 하나님이 반드시 먼저 말씀을 먼저 주세요. 그리고 말씀을 가지고 아주 집중해서 기도하면 그대로 응답해주세요. 철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은혜를 주신다고요. 불 병거의 은혜를 주신다.

II. 두 번째, 땅이 진동하고 은혜 단비가 부어지게 하소서.
-은혜 이 폭우가 쏟아지게 해달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오늘 이 제가 본문 말씀을 좀 다루기 전에 제 심중에 있는 얘기를 조금 하고 어 그다음에 아 본문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저는 제가 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저자로 세우는 사역의 우선순위로 두고 이걸 제 사명으로 알고, 이걸 순종하여 이 사명을 순명으로 하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이제 목표지만 제 마음에 정말 간절히 갖는 소원이 하나 뭘까요? 뭘까요? 모르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제가 갖고 있는 소원이에요. 어떤 부모가 자식이 고통스럽게 사는 걸 기뻐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설령 자식의 고통을 겪고 힘이 좀 들더라도 그 과정을 통하여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가고 인생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에요. 그래서 인생의 행복을 누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도 맛을 봐야 되고, 지난주를 제가 어느 한 가정에 할아버지가 계시고, 할머니가 계시고, 또 아빠 엄마가 있고, 그다음에 손자들이 있고, 이렇게 해 가지고 같이 예배를 드릴 때에 그 예배가 예배를 통하여 아, 이게 정말로 인생의 행복이구나!~ 아멘. 그런 거 알고 가족에서 가족들이 같이 예배드릴 때 그게 인생의 행복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는 우리 교우들이 행복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제 삶에 참 사역의 중요한 저의 어떤 방향인데, 그럼 어떻게 우리 성도들이 행복하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그중의 하나가 이 토요 비전 새벽 예배가 여러분들의 신앙에 행복을 가져다주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1군단부터-7군단 또 토비새에 나오신 여러분들 군단 나오라 해서 나옵니까? 빨리 대답해 봐요. 예? 군단 나오래서 나오는 겁니까? 좀 수준 좀 올립시다. 군단 나오래서 또 뭐, 뭐 또 이렇게 나오셨는지, 안 나오신 점검도 있을 거고, 이런 건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사실 저와 여러분은 이 토비새에 행복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토비새의 주제가 ‘토비새에 오면 뭐야? 행복이라오.’믿음의 눈 가지고 소망하는 우리 꿈 ‘2033-50 비전’ 품고 걷는 길 그다음에 출신 삼형 붙들고 달려가는 우리들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고 그다음 뭘 토비새에 오면 행복이라오. 세상에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 토비새에 나오면 행복이라오. 칠천기도 용사와 기도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누가 가사를 썼는지 모르지만 정말 잘했어요. 행복이란 찬양도 있는데 한 번 불러보겠습니다.
행복이란, 우리 찬송 있는데, 시작.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믿음의 눈가지고 소망하는 우리꿈
2033-50 비전 들고 가는 삶
주신 찬양~~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3층 동의하십니까? 3층은 꽉 찼네요. 2층 동의하십니까?아멘!! 1층 동의하십니까?아멘!! 여러분, 오늘 이런 생각을 좀 해보세요. 제가 오늘 드리는 말씀을 듣고 여러분 마음속에 아 이것이 내게 와 닿았다. 이걸 내가 우리 가족들하고도 좀 나눠봐야 되겠다. 하는 그것이 여러분의 오늘 딱 잡히시길 바랍니다. 아시겠죠?

그걸 위하여 내가 제가 토비새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토비세가 왜 행복한지, 저는 토요일 아침에 할아버지로부터 손주에 이르기까지, 아니면 할아버지 세대 장년세대 우리 청년 대학부, 청년대학부 세대, 그다음 주일 학교 어린아이들 세대 이 4대가 믿음의 사대가 토비새 할 때에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행복을 갖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돼서 토비새에 오면 서 여러분의 믿음의 용량이 커지는 거예요. 뭐가 커진다구요?

그래서 앞으로도 제가 그리 할 거고, 토시새에 오면 정말 한국 교회나 또 세계 교회 가운데 어떤 일과를 이룬 분들, 믿음의 용량이 커지기 위하여 삶의 역할 모델이 있어야 되니까. 그런 분들을 저와 함께 모시고 토비새에 정말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할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손자들까지, 또 믿음의 4세대가 믿음의 용량이 커지는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아니 그렇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토비새에 오면 저의 목회철학, 여러분 어차피 저와 같이 일단 제가 여러분 교회를 담임목사로 섬기니까, 이왕 섬기는 거, 저하고 똘똘 뭉쳐서 같은 목회철학을 같이 하면 좋지 않겠어요. 꼭 저하고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삐딱 선을 타시면 더 좋겠어요? 가능하면 저는 정말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사랑의 교회에 주시는 목표와 비전을 가지고 영적으로 똘똘 뭉쳐가지고 저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주의 종들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토요비전새벽예배에 같이 나와 기도하면, 믿음의 4대가 통하게 되는 것이에요. 함께 공동적인 찬성을 하고, 함께 암송을 하고, 오늘도 암송 성령까지죠? 에 성실, 능력, 성령, 하나님의 의뢰함, 또박또박 같이 어른들부터 똑같이 주 말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의 빛이요. 를 같이 찬송하고, 같이 암송을 하고, 같이 말씀을 같이 듣고, 기도하고, 그럴 때에 믿음의 어떤 제너레이션 갭, 세대 차이가 이런 말씀과, 비전과, 사명과, 찬양으로 극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런 은혜가 있을 때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토비새에 받은 그 은혜를 가지고 삶의 여정 가운데 인생을 살다 보면 반드시 돌부리 채이기도 하고, 인생을 살다 보면 반드시 골짜기도 있고, 왜냐하면, 골짜기나 그 다음에 돌부리가 없이 그냥 인생 평범하게 모두 평탄하게 잘 되면요. 거기에서는 참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어요. 고난 가운데, 그 어려움 가운데, 성숙해 가지고 남들이 볼 때는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성숙하면 아 더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런 마음의 깊이가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을 깨닫고 주님을 더 깊이 이야기할 때 거기에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성숙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인생의 돌부리에 채일 때 우리 아이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 토비새를 기억하게 되는 것이에요. 토비새에 받은 은혜, 암송, 찬양, 말씀, 오늘 같은 경우도 철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늘에 불 병거를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주실 때 뭐라고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서 물이 쏟아진다. 그런데 이 소낙비가 쏟아진다. 할렐루야!!!이런 것들을 평생 기억하면 우리 아이들도 쉽게 나가떨어지지 아니하고, 쉽게 절망하지 않고 인생의 길을 꾸준히 달려갈 수 있겠다. 확신한 것입니다.

오늘 새벽 한 4시쯤 일어났는데 어젯밤에 제가 너무 쌩쌩한 꿈을 꿨어요. 저는 꿈 얘기를 잘 안 합니다 왜 꿈 얘기가 꿈이 그게 맞는 것도 아니고, 다 그것도 아니고 그리고 우리는 말세에는 환상과 꿈 대신에 우리에게는 말세에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모든 사명과 계획, 하나님께 주시는 거 다 담긴 것이 성경이기 때문에, 이게 마지막 계시기 때문에 이 말씀이에요. 다른 거 얘기하는 것 자체가 다른 것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꿈 얘기는 거의 안하는데, 어젯밤에 꾼 꿈에 대해서는 내가 아! 이거는 오늘 좀 나눠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보통 꿈꾸고 잊어버리잖아요. 어젯밤 꿈꾼 거 기억나는 분 손 들어보세요. 일어나자마자는 기억하셨겠지만, 지금 다 까먹었을 거예요. 그렇죠? 아니, 아니 다시 어젯밤에 꿈꾸면 지금 선명한 분 있으면요. 제가 지금 얘기할 정도로 여러분들 선명한 분은 한 번 손 들어보세요. 혹시 손드는 분 있으면 그게 천연기념물이에요. 그리고 꿈꾸는데 칼라로 꿈꾸는 분, 손 들어보세요.

정신이 좀,,, 근데 제가 어젯밤에 칼라로 꿈을 꿨어요. 저는 칼라로 가끔 꿈을 꿔요. 너무나 쌩쌩한 꿈이었어요. 이 얘기는 내가 일어나고 우리 집사람 한테도 안했어요. 지금 할려고,,, 자 오늘 제가 토비새의 신앙의 행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너무나 그러니까 이제 제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꿈이 맞다. 안 맞다. 라기보다는 평소에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아니면 평소에 마음이 집중하고 이런 것들이 주로 꿈에 많이 나오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뭐 저는 어떨 때 보면요. 시험 문제지가 내 앞에 쫙 다 나와요. 어릴 때 왜냐하면, 시험문제도 안 나오는데 고대로는 아니지, 그렇죠? 근데 마음의 생각을 많이 하니까 시험문제지가 나오는 거죠. 나오는데, 어젯밤에 무슨 꿈을 꿨나면, 제가 시골에 저희 어머님이 처녀시절, 우리 외갓집이 있던 그 교회가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달제, 라고 하는 데 있는데, 달재교회가 딱 눈에 그 교회 내가 있는 거예요. 예 거기서 한 6키로 정도 떨어진 데에 의성군 삼분교회는 우리 아버지 청, 총각대회 교회고, 그 달제라는 교회가 한 6km 정도 떨어졌는데 총각, 우리 아버지하고 처녀 우리 어머니하고, 한 6키로 떨어졌는데 그래서 결혼을 한 거예요. 예 그랬는데 저의 달제교회를 울어도 괜찮아 괜찮아요. 나이 지금 제가 여유 만만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자 그 달제교회에 내가 있는데, 왜 내가 거기 있었냐 하면 그 달제 교회가 쉽게 말하면 리모델링을 하고, 교회를 새로 꾸미고 마루를 새로 하고, 다 그래갖고 헌당식은 아니지만, 리모델링 교회를 완전히 새로 새 단장을 해 가지고 축하 예배를 드려요. 내가 보니까 거기에 합동통합 2교단이 다 같이 모였어요. 왜냐하면, 그 교회가 옛날에 59년도에 합동통합 분열될 때의 나눠진 교회거든. 근데 했는데 내가 그날 설교야... 설교인데 그 달제 교회라는 교회는 내가 어릴 때, 5학년 때 내가 가서 거기서 여름 선경학교 때, 서동걸 그 당시에 조사님이란 분의 설교를 듣고, 전도사님이죠. 설교를 듣고, 초등학교 5학년 때 깨어지고 십자가 피의 복음이란 설교를 듣고, 아! 내가 예수 그로서의 ‘보혈의 피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 용서가 필요한 인생의 인간이구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그걸 깨닫고 회개하고, 그때 제가 회심했어요. 제가 거기서 그 장소에서 그 마룻바닥에서 엉엉 울었어요. 그런데 그 광경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같이 모이고, 교단이 같이 모이고, 그 다음에 같이 예배를 드리는 데, 찬송을 뭐였을까요? 찬송을 하는데, 내가 너무 마음이 기쁜 거야. 행복한 거예요. 무슨 찬송을 해도 다 같이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하는데 다들 덩실 덩실로 기뻐하면서, 감사하면서 그렇게 막 찬송을 하고 그래요. 우리 어머님 옆에 앉아 계셨고요. 저는 아마 지난주에 어머니 추모 예배를 드려서 아마 교육이 됐던 것 같고, 그래서 하는데 다들 너무 기뻐하는 거예요. 기뻐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보니까 교회가 어린아이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 모였어요. 잔치하고 기뻐하고,, 주의 발자취를 따르니 하는데, 한번 할까요?

♬주의 발자취를 따르니 어찌 즐거운 일 아닌가? 마음에 맑은 하늘 열리고 밝은 빛이 비친다. 발자치를 따라가자 기쁜 마음으로, 발자치를 따라 가자 찬송하며 즐겁게...~~♪

그 찬송을 마치고 난 다음에, 이제 그 찬성을 하는데, 우리 그 설교자도 새롭게 신축하고 새롭게 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위원이 있을 거 아니에요. 제가 설교를 하고, 사회를 하고, 기도하고, 이런 분들이 여러분 한 5~6분 목사님이 같이 계시는데, 오늘 설교하실 목사님이 기도하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하거든요. 준비위원들이 이제 뒤에 기다리면서 예배 시작하기 전에, 나보고 기도하라는 거예요. 제가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주여,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모두가 다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이 시대를 향한 선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오늘은 예배당과 성도들과 다음 세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 기도를 하는 거에요. 제가...

제가 설교할 때 딱 설교 첫 마디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절망을 모르는 유일한 곳이 있다면 교회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오면 은혜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다른 어떤 단체도 교회가 하는 일 구제도 하고, 교육도 하고, 다 하지만 1가지는 안 됩니다. 교회 오면 은혜를 줄 수가 있습니다. 교회 교회만의 은혜를 생산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 어떤 것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인생에 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와 같이 새롭게 신축하고 새롭게 해 가지고 하는 이 자리가 너무 행복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마치고 난 다음에요. 소를 잡았어요. 소를 잡았어. 마치고 난 다음에 교회마당에 있잖아요. 그냥 소작 걸고 잔치를 하는데 너무 행복해요. 그러다가 깨버렸어요. 자, 제가 이 꿈 얘기는 이거는 이 말씀이 저 이 말씀이 뭡니까? 우리 성경의 정경성이 모든 걸 다 말씀하기 때문에 뭐 꿈일 걸 필요가 없어요. 사실은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데, 마음의 소원과 간절함을 집중이 꿈에 나타나니까요. 여러분, 제가 기도하는 것은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삶에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어도 행복하셔야 되는 거예요. 난 여러분의 행복 안 하면 나는 못살아!!~ 저는 못살아요. 또 담임 목사도 행복해야 될 것 아닙니까? 여러분의 행복하면 제가 행복하고, 제가 행복하면 여러분들이 행복하고, 이게 은혜의 선순환이에요. 저희가 대형교회기 때문에 이런 따뜻한 시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교회 자체가 크기 때문에, 근데 개척교회 같애 100명, 200명 모이면, 이런 얘기를 내가 맨날 할 거예요. 맨날요. 자, 그래서 어쨌든 간에 토요비전 새벽예배에 나오신 여러분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그리고 SNS로 들어오신 많은 분들도 이제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있잖아요. 더 다음 주를 21일 날, 또 우리 다음 세대 칠천 기도 용사가 발족이 됩니다. 그럴 때 우리 성인 칠천기도용사, 다음 세대 우리 자녀세대 칠천기도 용사,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 민족의 방향을 새롭게 해주시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비새의 부흥은 성도가 살고, 교회가 살고, 목회자가 사는 길이요. 성도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원천이 될 수가 있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말씀으로, 기도로, 은혜로 단장을 하는 사람들이 추위를 맞이할 때, 오늘 토비새와 고 기도로, 말씀으로, 기대함으로, 사명으로, 우리가 준비하고 주일을 맞이할 때, 그때의 기대와 영적인 설레임은 주일을 그냥 토요일 아침에 한국 교회는 되게 금요철야 하니까, 토요일 아침 되게 자거든요. 뭐 그것도 나쁜 건 아닌데요. 토요일 아침에 추일 예배를 기대하는 설레임은 난 오늘도 아침 마치면 영상도 해야 되고, 할 거 아침 많아요. 내일 주일예배를 위하여 준비하는 그 설레임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에요.

내일 우리가 찬송을 해도 그냥 주일 예배 나와 찬송하는 분하고, 토비새에 나와 가지고 설레이고, 기도하고, 기대하고, 준비해 갖고 내일 주일 예배 때 찬송하는 사람하고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에요. 지난주는 제가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내일은 ‘내 영혼의 햇빛 비치니’ 찬양할 거에요.. 그 찬송할 때 펄쩍펄쩍 뛰어야 되는 거예요. 아멘!!! 그러므로, 토비새가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행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이제 제가 15분 정도만 더 오늘 본부 말씀을 더 강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여러분들의 오늘 말씀을 좀 정리를 하시면서 들으시고 지난 주일날 제가 사사기 앞에 있는 부분을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북쪽 지역에 있는 가나안 왕이 가난 왕 이름이 직위 자체가 ‘야빈’이라고 그랬죠? 예 야빈이 철병거, 시스라를 보내 가지고 시스라 하고 철 병거 몇 대요? 900대를 가지고 내려왔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폭우를 내리셔가지고, 그 무시무시한 철 병거가 무용지물이 되게 했어요. 그리고 이제 그리고 이런 내용을 오늘 5장에서, 5장에서 이제 뭐라고 하냐면, 5장 1절,

*사사기 5:1,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바락이 같이 팀을 지난주에 팀을 이루었다 그랬죠? 그 승리를 노래하며 이르되 오늘 찬송가 노래의 내용이 마치 출애굽기 15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고 난 다음에 너무 감사해 가지고 미리암과 백성들이 춤추며 소고를 치고 춤추며 이렇게 노래했던 것처럼, 오늘 이 가나안의 900 철 병거를 승리하게 하신 그 은혜를 너무 감사해갖고, 드보라와 바락이 같이 부른 그런 노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찬송과 승리의 찬송과 노래는 아주 박력이 있어요. 오늘도 시작할 때 지금 제가 주의 발자취를 따르면, 찬송은 이것이 행복 행복이오. 라고 감사하고 또 우리 옛날에 어릴 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이런 거 찬송하게 기억나시죠? 요런 것들이 노래가 돼 있으면 성경을 외우기 정말 쉬운 것이고, 그다음에 또 어떤 찬송들이 있습니까? 베았냐요 빌바 도마야 다시이가가 이것은 12제자, 첫 머리 글자이니 베안야요? 빌바 도마야다 시가 순서대로 하나도 안 틀리고 해볼까요?

베안야요 빌바 도마야다 시가 이것은 열두 제자, 첫 머리 글자이니, 베안야요 빌바 도마야다시가. 우리 저는 어릴 때 이게 체화가 됐어요. 그리고 나중에 우리 신학교 가갖고 헬라를 배우는데, 헬라의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관사 붙이는 거에요. 호 헤이 타,,, 뭐 이렇게 간섭 어려운데 그게요. 한국 사람들 천재야 호 헤이토 호이 하이타이 투 테스트 톤 톤 톤 토 데토테르 이게 한국 사람들의 천재야~~ 미국 애들은 교육을 이 음악을 다 같이 받지를 않아요. 동료 그런 거 같이 배우질 않아요. 그러니까 음악에 너무너무 무식하고 철학이 너무너무 무식하고 그래서 제일 미치게 공부를 어 제일 미치는 교육이 뭐냐 미국에서 중고등학교 나오고 한국에서 대학 나오는 거예요.

그게 왜냐하면, 한국 대학들은 요즘은 다르지만, 옛날에 그래요. 옛날에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좋은 찬양은 평생 기억해야 하는 것이에요. 아니겠습니까? 눈물 나고 어렵고 서러울 때 있잖아요. 서러울 때 토비새에서 배웠던 찬양이 기억나 가지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나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걸 모르고 자란다면 난 너무 가슴이 아플 거예요. 주일에 학교 우리 담당자들은 오늘 대오각성하고, 베안야요 빌바 도마야다 시가, 안 가르쳤던 것을 가르치세요. 그렇게 하세요. 그러니까 이렇게 노래를 불렀어요. 이렇게 노래를 부를 때, 찬양을 할 때, 신앙공동체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1절에 들어가니까, 다시요.

*사사기 5:1,
1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이 날은 무슨 날입니까? 이날은 어떤 날입니까? 시스라의 철 병거 900대를 전멸시칸 승리의 날입니다. 또 이날은 무슨 날입니까? 지난 20년간 이스라엘을 억압하던 하솔왕, 가나안 왕 야빈으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건기예요. 건기,, 건기 건기는 비가 오지 않는 시기에요. 바삭바삭 말라 있어요. 그냥 바삭바삭 말라 있으니까 철병가가 쫙 아스팔트처럼 그래 가지고 들어와 갖고 침략해 가지고 완전히 박살을 내는 거죠. 어마어마한 공포의 무기가 되는 거죠. 건기에 비가 온다. 이건 기적이 아니면 안 되는 거예요. 이날은 기적을 경험한 날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왜? 이런 기적과 은혜가 축복이 됐냐 하면 6절 여러분들 보시면 희한한 말씀이 있어요.

*사사기 5:6,
6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이날에 오기 전에는 해방의 날, 승리의 날, 철병가 승리의 날이 오기 전에, 무슨 일을 벌어졌냐면, 대로가 뭐예요?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제 얘기 아니고 말씀에 나와 있죠. 보통 상인들은 상거래와 무역을 하기 위하여 큰 길을 이용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 큰 길을 가지고 마차를 움직여야 되는데 큰 길에는 약탈자들이 있으니 가나안의 약탈자들이 질비하게 했으니까, 그 길을 못 다녔고 오솔길로 다녔다. 요즘 말로 하면 ‘법질서 파괴’ 경제도 핍절, 한마디로 엉망진창, 그 사람들이 다 숨어갔고, 마음이 숨어, 마음이 그냥 마음이 그냥 완전히 오솔길, 마음이 오솔길보다도 오솔길이 너무 좋은 이름 같고, 마음이 꼬불꼬불 길이야, 마음이 그냥 졸여져요. 그다음 7절에 보니까,

*사사기 5:7,
7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다. 여러분 작은 마을은 성벽이 없어 가지고 보호를 못 받으니까 사람들이 작은 마을 시골을 버려두고 성벽 있는 섬이나 큰 도시로 가버립니다. 당시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사람들이 작은 마을을 떠나버리니까, 작은 마을 시골은 사실상 폐허처럼 변해버렸고, 텅 빈 마을로 황무해져 버렸어요. 이렇게 대로를 다니지 못하고, 꼬불꼬불 길, 마을은 다 황폐해지고 한 이유가 뭡니까? 20년간 고생고생한 이유가 뭐예요? 팔절에 나와 있죠?

*사사기 5:8,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무리가 새 신들을 택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고 엉터리 신들을 택했기 때문에, 그러나 20년 동안 너무 고통을 받으니까, 마침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회개하고 부르짖었어요. 그래 하나님께서 드라와 바락을 쓰셔서, 사사 드보라를 쓰셔 가지고, 하늘에서 뭘 내리셨다고요? 폭우를 홍수처럼 내려갖고, 그 건기에,,, 백성들을 억눌렀던 철 병거를 단 한방에 처리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승려의 날이 있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넋놓고 앉아서 그냥 하늘에서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린 그것이 아니고, 두 가지를 정리하면, 첫째, 2절에 보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 사사기 5:2,
2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기에 이스라엘의 어떤 사람들이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했다. 그래 줄임말 찬양했다. 이 영솔자란 말은 리더, 지도자란 말인데, 이 영솔하였다는 이 뜻이 히브리어의 뜻이 뭐냐 하면 머리를 풀다. 머리를 풀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구약에서 나실인들은 자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했는데, 지금 지도자들이, 영솔자들이 그 머리카락을 풀어헤쳤다는 말은 나라의 위기 가운데 지도자들이 마치 나실인들처럼 하나님 앞에 서운하고 민족을 구원하려고 앞장서서 헌신하고 지휘했다. 그 뜻이에요. 나라의 지도자들이 나라의 위기 앞에서 마치 나실인들처럼 머리를 풀어 딱 해 가지고 각오하고, 전설을 따라 삼천리, 여자들이 머리를 풀면 으스스하지만, 지도자들이 머리를 풀면 위기를 구원하는 것이에요. 어떤 일이든지 저는 그냥 되는 거 없다고 그랬죠? 영적으로 깨어난 소수의 사람들이 앞장서서 영솔자가 되어 가지고, 목숨 걸고 부르짖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도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를 사명으로 헌신해야 하나님이 응답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지도자들에게 이렇게 하니까, 2절 중간에 백성들도 즐거이 헌신했다. 즐거이 헌신했다는 것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여했다. 이 백성들의 이 헌신이 귀한 이유는 정말 귀한 이유는 뭐냐 하면, 자발적으로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구백승의 병거가 철병거가 내려왔을 때, 다 죽는 거고, 그 가면 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거예요. 자살 특공대가 되는 것이에요. 자기의 어떤 이익이나 다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하여, 남들이 볼 때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처럼 턱도 없는 걸 위하여, 즐거이 헌신한 것이에요. 이건 제 말이 아니고, 본문 뒤 8절에 보니까,

*사사기 5:8,
8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이스라엘의 4만 명 중에서, 이스라엘 군대 4만 명 중에서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무슨 뜻입니까? 오늘 이렇게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이 총 4만 명이에요. 지난주 말씀한 대로 사사기 4장 10절에서는 바락 장군이 전쟁을 소집했을 때, 그 가나안 하솔왕, 가나안 하솔나라에 근접했던 곳 가운데, 이스라엘 북쪽의 두 지파, 납달리 스블론에서 먼저 만 명이 올라갔고, 그 외 다른 네 지파, 에브라임, 베냐민, 무낫세, 잇사갈 중에서 3만 명이 참석했어요. 총 4만 명이 즐거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는데, 놀라운 것은 그들에게 제대로 된 무기조차 없었어요. 그것이 바로 8절에 이스라엘의 4만 명 중에 방패와 창해 보였던가? 방패와 창도 없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내일도 필요한 말씀을 할지 모르지만 저는 이번에 안창호 인권위원장 청문회 하는 거 보고 난 뒤집어 지는 줄 알았어요. 어떻게 진화론을 안 믿고 창조를 믿는다. 하는 분을 기독교 탈레반이라고? 여러분 탈레반은요, 사람을 때려죽이고 그거는 폭력을 행사하는 아주 극악한 사람들이에요. 안창호 장로께서 폭력을 행사했습니까? 나라의 인권을 지키려고 죽을 동, 살동 고생하는 분인데, 안 장노님 그 전용태 장로님하고 두 분이 대한민국의 법조계에서는 신실하게 주를 사랑하고 섬기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의 좋은 평신도 지도자들이에요. 그걸 놓고 기독교 탈레반으로 그렇게 몰아붙이고, 그렇게 몰아붙이는 거 청문회란,,,, 그거는 토비새 안 나와서 그런 인간이 된 거야. 내가 분통이 터져갖고 있잖아요. 발이 기울어졌어요.

지금 여러분 주보에 나왔죠? 오늘 법에서 왜 뉴스레이터에 나왔죠? 몇 달 전에, 청주지방법원에 영동 지원에서 성전환 수술이 없어도 법적 성별 증정 허가를 했어요. 그동안 법원은 성전환 수술을 받지 않은 경우 성별 전환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현행 대법원의 예규가 대법원의 예규가 성전환 수술을 받아 외부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이 반대 성으로 바뀌었음 인정되거나 이미 생성 능력을 상실하고, 종전의 성으로 재 전환할 개연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만을 성별 정정할 기록사 합니다. 무분별한 성별 정정을 해준 거예요. 사회적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성별 제도의 혼란을 가져와 가족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그것은 물론 병역 기피 수단, 이게 말도 안 되는 벌어지는 거죠. 여러분, 이거 잘못하면 큰일 나는 거죠. 오늘 우리 손에는 무슨 강력한 철병거도 없어요. 오늘 여기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방패와 창도 제대로 없어요.

그런데 자발적으로 이런 일들에 대해서 기도하고, 헌신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늘에서 건기에도 폭우를 쏟아지게 해 주실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와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를 공격하는 문화막시즘, 거대한 세력 광풍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 당연히 재간이 없습니다. 이 900승 907병거를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지금 이제 한국 교회 내에서도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동성애 합법화는 결국 붕괴될 것이고, 결국 통과될 것이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약자입니다. 오늘 영 가족 여러분, 토비새의 기도에 동력자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이여, 이 거대한 철병거 앞에 어떻게 맞설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 이 동성애 소수 인권 주장하는 레인보우, 극단적 환경론자들 그다음에 돈 많은 저 미디어들, 다 해 가지고 다 짜가지고 이게 이 구조 자체가 넘어가게 돼 있어요. 지금,,, 그래서 올해 10월 27일 날 200만 명 연합 기도하고, 연합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게 마지막 몸부림이에요. 이번에 안 하면 끝이에요. 다시 이번에 안 하면 끝이에요. 이번에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돼요. 우리 같은 장로님은 그래요. 성형수술도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이 하나님 일이라도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된다.

오늘 본문의 백성들처럼, 영솔자들은 나실인처럼 하나님을 구별하고, 목숨 걸고, 일반 성도들은 즐거이 헌신하고 결단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세계 복음주의 교회가 한국 교회를 통하여 무너진 재단을 수축하는 것이며, 세계 모든 정서의 흐름들이 동성애 합법화와 종교 다원주의에 이 흐름으로 다가는 거, 이게 어쩔 수 없는 길인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원하시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아니 또 우리 사랑의 교회 남은 자들 소수에 깨어있는 자들이 손에 든 거는 방패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도 오늘 기도의 방패, 기도에 참을 들고 하늘의 불 병거를 경험하고, 우리가 마음을 다할 때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 참고로, 우리가 오늘 총 출정을 몇 명이 했다구요? 4만 명, 몇 지파가 했다고요? 여섯 지파가 했어요. 그러면 나머지 6지파는 뭐했는가? 오늘 15절 17절을 보니까, 이 전쟁에 참전을 요청받았음도 불구하고, 핑계를 대며 나오지 않은 6지파를 낱낱이 밝혔어요. 15절 17절까지,

*사사기 5:15-17,
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 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루우벤 지파는 참전 여부를 두고 자기들끼리 열심히 토론만 하다가 결국 전쟁에 참여하진 않았어요. 자기 목장에 나가서 자, 편안하게 하다 말만 먼저 이르게 했고, 갓 지파, 단 지파, 아셀 지파는 생업을 핑계를 대고, 배를 타고 다니며 상거래를 하고, 무역을 하면서 국가적인 위기 앞에 동참하지 않았어요. 사실 참전 이유를 참전할 수 없는 이유를 대라면 누구든지 여러 이유를 많이 댈 것입니다. 참전한 6지파, 참전하지 않은 6지파, 후대들이 본다면 얼마나 참전하지 않은 지파에서는 후대가 부끄럽겠어요. 제가 말씀드렸던 74년도 엑스플로 대회 할 때, 김중곤 목사님 대회를 총책임지셨는데 여의도에 모이지 못할, 그 당시 여의도에 100만 명 모이지 못할 이유가 100가지나 된다고 그랬습니다. 화장실을 어떻게 하나, 밥은 어떻게 먹나, 북한에서 미사일 쏘면 어떻게 하나, 그 모든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민족이 복음화 되는 꿈 그거 하나, 그래서 그때 여의도 73, 74년이 대한민국의 성장과 부흥의 터닝 포인트가 된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번 10/27일, 한국교회 연합예배, 그 앞에 10/21일, 한국교회 섬김의 날, 7000 기도용사들과 함께 했을 때, 이걸 통하여 우리 민족 다음 세대를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2의 기적의 나라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다음 세대를 지키고, 성경적 가치를 지키겠다는 이 골든타임을 놓치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4절 5절 요절인데 그렇게 할 때, 4절 5절 시작.

*사사기 5:4-5,
4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크게요!`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아멘, 잠깐만요 그냥 하늘이 비 정도가 아니에요. 그냥 하늘이 홍수처럼 막 쏟아져 가지고 건기에 그 골짜기가 물로 채워져 가지고 철병거가 꼼짝도 못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개인의 삶에도, 그대로 접목되게 하여주셔서 나는 힘들다. 안 된다. 끝났다. 이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이 하늘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에 폭우가 내려져 가지고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 10월 27일 날, 한국 교회 대연합예배와 그 다음 큰 기도회에 사랑의 교회 성도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참여하여, 시대를 바꾸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슨 정치하는 사람들 앞에 나설 거고, 목회 열심히 하는 분들이 최선을 다해서 일할 것입니다. 뒤에 서울의 젊은이들이 앞장서게 될 것이고. 사랑의 교회를 얼마나 참석해야 돼요. 오늘 말씀 받았어요. 얼마 4만 명, 우리 교회 속한 3만 명, 출석하는 사람들과 함께 4만 명이, 아이들까지 다 같이 나가 가지고 중요한 부분의 하나 위치를 지키고, 또 남들이 볼 때 또 보통 부분에도 서로 잘 나눠 가지고, 사랑의 교회는 몇 만 명 목표예요? 4만 명, 우리 때문에 여러분들이 또 주위에도 같이 가자. 그래갖고 온라인 100만 명, 오프라인 100만 명, 남들이 볼 때는 안 됩니다. 전 세계에 이런 집중력과 이렇게 할 수 있는 나라는 이제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미국도 못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 아시죠? 팀 켈러, 존 파이퍼, 이런 분들이 복음의 연합에 가스플 콜리션, 콜리시나마 연대란 말이이에요. 복음의 연대, 해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좀 모일 수도 있어요. 이제는 그 힘들이 다 사라졌어요. 전 세계 한국 교회, 오늘 여러분들과 저에게 주신 소명으로 알고 이렇게 할 때에 7천의기도 용사를 통하여 대한민국 4900만이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다 일어나 길갈로 가가지고 다 일어나가지고, 다 일어나 가지고 새 나라를 건설하고, 새로운 기적의 나라를 만들고, 다시 한 번 전 세계 5천만 이상, 3만 5천 불 이상 되는 나라치고 차별금지법 통과 안 된 나라, 우리 밖에 없는데, 마지막까지 지키는 그런 은혜의 보루가 될 수 있도록, 영솔자들이 나실인처럼 머리를 풀고 4만 명의 백성들은 기꺼이 헌신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남녀종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약
철 병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불 병거의 은혜를 주시니, 우리는 주님 앞에 온전히 서서 토비새의 현장에 믿음의 4세대가 합심하여 나아와 주님을 경외하고 헌신하면, 땅이 진동하고 은혜 단비가 충만하게 부어질 것이니, 우리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만 하면 된다. 내게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이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 선물임을 확신하고, 7천 기도용사가 기도하면 4천9백 만이 바뀐다는 사명으로 10월 27일에 우리는 전심으로 모여서 광화문에 나아가 연합예배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동성애법 막아내 주실 줄 믿고,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당겨주실 것도 믿기에, 우리는 주님의 선하신 일이 역사하실 것을 확신하고, 혼신을 다해 간절히 기도하며, 믿음의 4세대가 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 은혜 받고 행복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자. 주님은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폭우처럼 내려 주셔서 우리의 철 병거들을 불 병거로 만들어 주시고 모든 역경을 이기게 하셔서 은혜의 단비로 역사해 실 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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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9월 4일)
제목:“어느 산 위에 계십니까?”
말씀: 오바댜 1:8,17,21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설교자: 안 승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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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댜 1:8,17,21,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21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80~90년대쯤에 잠깐 유행했던 개그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다가 한 봉우리에 힘겹게 올랐는데 잠깐 주춤하면서 살펴보더니, 이 산이 아닌 가벼? 하니까 50만 명이 기가 차서 죽었고, 그리고 그 옆 봉우리로 남은 50만 명을 이끌고 힘겹게, 힘겹게 올랐다가 다시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말하기를 아까 거긴 가벼!! 하니까 그 나머지 50만명도 힘들어 죽었다. 라는 이야깁니다. 당연히 사실은 아니죠. 하지만 나폴레옹이라는 강한 통솔력을 가지고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 여러 악수를 두면서 그 군대를 모두 소진하고, 결국 몰락하게 되었던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상징적으로 그려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보았던 한 국군 예비역, 장군의 글에서도 이 비슷한 상황을 우려하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이것은 이런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미군과 국군이 같이 합동 훈련을 하는데, 작전을 다 한 뒤에 미군이 한국군을 평가를 하면서 한국군이 장비도 잘 갖추고 전투도 잘하는데 의외의 한 부분에서 큰 약을 보았다. 한국군이 작전을 잘하고 총과 같은 좋은 화기도 갖추었는데, 이상하게도 방향을 알게 하는 나침반을 소대별로 한 2개 정도밖에 구비하지 않았더라. 그래서 전장에서 훈련장에서 이리저리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모습을 자주 이것은 실전에서 매우 치명적(致命的)이다라고 평가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충분한 역량을 결정적인 순간에 다른 산에 올라가 있게 되면 모든 일을 그르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도 잘못된 산에 올라서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되었던 한민족을 읽었습니다. 그 민족이 오늘 읽은 오바댜는 사실 1장짜리 아주 짧은 성경이죠. 평소에 자주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주 내용은 이 에돔 족속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돔은 우리가 평소에 자주 언급하는 일반 민족도 잘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조금만 바꾸어 보면 여러분이 에돔은 ‘붉은’ 이라는 뜻인데요. 성경에는 이 이름의 뜻을 가진 한 사람이 나오죠. 바로 에서입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에서가 누구죠? 바로 열국의 아버지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께 직접 받았다. 쌍둥이 형 친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오바댜서가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의 쌍둥이 형제의 후손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은 바로 하느님 백성의 친형제 쌍둥이 형제와 같은 아주 가까운 이들에게도 심판이 임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에서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죠.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직계손자입니다.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야 하갈의 아들이어서 어쩌면 그 계통에 들지 못하고 쫓겨나서 이슬람의 조상이 되었구나, 저희가 이렇게 인식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의 정실인 사라의 아들 이삭이 오랜 시간 기도하여서 얻은 리브가와 그가 바로 혈통적으로 야곱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쌍둥이에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아브라함의 차수이 이삭의 아들이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친형제 애서가 우리에게 이름도 익숙치 않은 이방 민족처럼 여겨지고 심지어 성경에는 그들의 심판이 기록되게 된 것일까요?
 
쌍둥이 형제로서 하나님 백성과 정말 가깝다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인데 가까이 있다고 생각해 너무나 안타깝게 이 간발의 차이로 구원의 백성이 아니라, 심판받는 백성이 되고 만 것일까요? 그 이유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혹시나 우리도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과 정말 가까이 있고, 생활권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 심판받는 백성이 되어버리지는 않는지, 우리가 천천히 말씀을 통해서 돌이켜 보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이 에돔이 왜 심판받는 백성이 되었는가, 오바댜서에서는 그 이유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장팔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8,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들이 멸절된다고 말합니다. 에서의 산이란 세일 산을 뜻합니다. 창세기 36장 그래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세일 산에 산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이 에서 족속의 멸절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세일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산에 거주하는 에돔 족속이 갖게 된 마음 때문입니다. 이 세일 산은 교만하게 했습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이 심판 받는 이유를 3가지로 알려줍니다. 오바디아 1장 3절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I. 첫 번째, 교만(驕慢)입니다.
 
*오바댜 1:3,
3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하나님께서는 이 바위틈에 거주하고 높은 곳에 살면서 그 지형을 의지하여 교만해진 에돔을 심판 하신다고 합니다. 에돔 땅은 산지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올라가려면 매우 비좁은 길을 지나가야 됐습니다. 이 길은 몇 명의 군사만 배치해도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저희가 익숙한 삼국지의 촉나라가 험준한 지형 때문에 훨씬 더 세력이 큰 위나라와 오나라와 자웅을 겨루면서 삼국시대를 열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에돔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어찌 저 구석에서 산지에 있었다면 그냥 그곳에 사는 자들이고 이렇게까지 교만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은 마침 왕의 대로라 불리는 고대 근동의 가장 큰 두 문명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교역로(交易路), 요충지(要衝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서 당시에는 아니지만, 후대의 이 지역에는 우리가 지금도 볼 수 있는 ‘페트라’-(요르단 서남쪽 고대도시 유적-붉은 장밋빛이 나는 부조건물-세계유산) 라는 바위 속에 요새 도시가 건설되었고요.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지금도 유명한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주요 교역로에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要塞)까지 들어차고 앉았으니까 에돔은 누가 나를 끌어내랴.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다음 절 1장 4절에 말씀하십니다.
 
*오바댜 1:4,
4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바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좀 더 잘 아는 선지자 예레미야도 똑같이 말합니다. 우리 예레미야 49장 16절의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 49:16,
16 바위 틈에 살며 산꼭대기를 점령한 자여 스스로 두려운 자인 줄로 여김과 네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 같이 보금자리를 높은 데에 지었을지라도 내가 그리로 부터 너를 끌어내리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지요. 근데 하나님이 왜? 이런 교만한 태도를 싫어하실까요? 왜 이런 태도를 심판하실까요? 그저 하나님 보시기에 꼴사납다, 보기 싫다, 이 정도여서 그러실까요? 왜냐하면, 이 교만이 근원이 되어서 에돔이 심판받게 되는 두 번째, 세 번째 이유가 알 감자가 따라 나오듯이 줄줄이 따라 나옵니다. 이 교만 때문에 유발된 에돔이 심판 받은 두 번째 이유는 7절에 나오는 ‘지각이 없음’입니다. 우리가 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II. 두 번째, 지각(知覺)이 없음입니다.
 
*오바댜 1:7,
7 너와 약조한 모든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여 이기며 네 먹을 것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에 함정을 파니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지각이 없다. 라는 말을 영어 성경, NASB에서는 데일즈 노 언더스탠딩 인 힘(There is no understanding in him)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잘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이죠. 오바댜 선지자는 이 지각이 없는 무언가를 지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에돔이 그 안에 있던 지혜 자들조차도 또 없어져서 더욱더 지혜가 없게 될 것이라고 이 지각없음이 심화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흥미로운 것은 이 에돔은 원래 고대 성경에서 지혜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대표적으로 족장 시대 저희가 창세기부터 출입국 직전까지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대에 아주 대표적인 인물 성경 인물 바로 욥이 에돔 지역 출신입니다. 욥기 1장 1절에서는 요에 출신 지역을 ‘우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우스가 바로 에돔 지역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그 옆을 위로하러 와서 욥기 그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세 친구의 참 여러 가지 권면,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기에는 참 지혜로운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지혜 자들 중 하나 세 친구 중 하나 엘리바스가 대만이라고 하는 에돔 북쪽의 도시 출신이라고 성경은 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에돔에는 지혜 자들이 원래 많았을 뿐만 아니라, 에서가 선택했던 것처럼 이 에돔이라는 지역에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참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요충지에 그리고 주요 교역로를 선택한 것은 자신의 안전(安全)과 부(富)를 보장(保障)하는 일이었죠.
 
에서는 이 세일 산을 택해서 요새처럼 튼튼함에 왕의 대로를 선택해서 그 부유함에 아! 나, 참 지혜롭게 선택을 잘 했다. 투자를 잘했다. 그랬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참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지혜로운 선택을 하면서 포기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땅을 떠났죠. 에서는 세일을 선택하면서 가나안을 떠났고, 반면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에게 주신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창세기 36장과 37장이 이 둘의 선택을 대비해서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36장 6절에서 8절을 우리 같이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창세기 36:6-8,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그런데 37장 바로 다음 장 첫 절 1절에서는 야곱은 다른 선택을 알려줍니다. 37장 1절 보겠습니다.
 
창세기 37:1,
1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에서는 이렇게 세일 산을 선택하기 전에도 사실은 이미 한 번 더 지각없는 선택을 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잘 아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장자 권을 죽 한 그릇에 팔았던 사건이죠. 히브리서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그가 자기 눈에 보이지만 영원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영광의 소망을 저버렸다라고 평가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17절 말씀 같이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2:16-37,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는 보기에 좋은 부와 안전을 택하면서 보이지 않으나 더 중요한 하나님 백성의 장작 권을 가벼이 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에돔이 조상 때로부터 나타난 교만의 상징이요. 심판받게 되는 두 번째 이유인 것이죠. 어쩌면 에서 스스로 보기에는 자신이 유목 사회에서 남자답고, 사냥을 잘하는 그의 능력을 더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판 장자권이 서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야곱과 단둘이 구두로 말을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게 내가 판다. 라고 말해서 팔려가는 것이라 생각도 안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의 지각없는 모습을 보셨던 것이죠. 심지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이 사건 이후에도 여전히 에서를 신뢰해서 그에게 축복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대가를 에서가 톡톡히 치렀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놀랍게도 저는 이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이도 많은 불을 스스로 일구었고, 그 부을 의지하여서 아, 내가 이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구나! 라고 세일 산을 택하여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이 권한의 중요성을 지각하지 못하고 자기의 실력과 안목만을 믿고 이 땅의 능력과 부유함만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의 후손들 역시, 자신들의 부와 안전을 믿고 하나님께 대하여 교만했습니다. 이들의 교만이 하나님께 대하여 이 지각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이 교만은 형제에 대하여는 이 교만이 또 다른 에돔이 심판받는 이유, 세 번째 이유, 바로 형제에 대한 포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10절 말씀 보겠습니다.
 
III. 세 번째, 형제에 대한 포악(暴惡)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바댜 1:10,
10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에돔의 후손들은 형제 민족인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립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이스라엘이 제국의 침입을 받자, 그들은 환난(患難)을 방관(傍觀)하고 조롱(嘲弄)하고 심지어 그 침입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스라엘을 때리는 제국 앞에서 에돔은 너무나 밉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에돔이 왜 이렇게 행동을 했을까요? 인간적으로는 에돔이 이 형제의 대하여 포학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조상에서도 야곱에게 속임수를 크게 당한 바가 있고요.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덤 족속은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오랜 원한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우리 표를 하나 잠시 보겠습니다. 족장 시대에 처음 말씀드렸던 에서와 야곱은 야곱의 속임수로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뺏겼죠. 창세기 27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출애굽 시기가 되자, 이번에는 에돔 족속의 반격이 이어집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이 이 땅을 지나가려고 하자, 에돔 족속은 거절하고 이들이 광야로 더 크게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더 세월이 흘러서, 이제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에 접어들자, 그 유명한 다윗 왕이 에돔을 쳐서 그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무엘하 8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아들 솔로몬 시기에 또 에돔이 반기를 들어서 소요 사태를 일으키죠.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은 그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여호사밧이 왕이 되었을 때에 여호사밧 왕이 다시 에돔을 정벌(征伐)하러 가서 재정복했고요. 그것이 역대하 이 역사서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고, 그 여호사밧의 아들 때가 되자, 또 에돔이 반기(反旗)를 일으켜서 독립(獨立)을 합니다. 계속해서 이들은 마치 우리 치고 받고 싸우는 형제의 라이벌 관계처럼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결국에는 외세 열강(列强)의 침입(侵入)을 받게 되는데, 그때 에돔이 이 이스라엘에 대한 오랜 원한(怨恨)으로 열강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오바댜서, 오늘 이 기록된 말씀은 그 때를 염두에 두고 훨씬 더 전에 예언(豫言)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推定)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오바댜서 1장 11절에서 14절까지는 이 에돔 족속이 형제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患難)에 대해서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11절에, 그리고 12절에는 형제의 몰락(沒落)을, 기뻐하는 모습을, 13절에는 이 형제가 어려워 고난을 받을 때 오히려 거기서 이득(利得)을 취(取)하고, 14절에는 그 형제가 환난을 피(避)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그들을 잡고 섰던 그 포악(暴惡)한 모습을 그리며 책망(責望)합니다.
 
그런데 이 포악이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결국 같은 적들에 의해서 똑같이 멸망(滅亡)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미워하는 이웃의 집에 불난 걸 구경하다가 자기 집도 불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에돔의 멸망은 유다가 주전 586년에 멸망하고, 30년도 지나지 않아 주전 553년에 일어납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이 두 왕국이 멸망을 했다가 일시적으로 잠깐 회복(回復)된 시기도 비슷합니다.
 
그들을 지배하던 제국이 바뀌고 또 바뀌어 가다가 주전 152년이 되니까 이스라엘에서 레위 지파가 주도해서 마카비 왕조라는 독립 왕국을 이룹니다. 그리고 이들이 또 그들 주변에 살고 있던 에돔 족속, 당신은 이두메인이라고 불리던 이들을 또 가서 정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개종시킵니다. 유대교로 개종시킵니다. 그리고 이 왕조가 어떻게 몰락 하냐면, 그 이두메인의 가문 가운데 힘을 잡았던 헤롯이라는 가문이 등장해서 로마와 손을 잡고 유다 마카비 왕조를 멸망시킵니다. 또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이죠. 그나마 이 헤롯의 통치에 대하여서 성경에서 반발이 적었던 이유는 그가 명목상으로 유대교로 개종을 했고, 또 이 유대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성전을 증축(增築)하는 일들을 보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헤롯도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에, 내 왕권이 흔들릴까 두려워 많은 유대인들을 또 학살(虐殺)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유대인 지도자들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할까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서 버리고 맙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까 이 형제가 어느덧 같은 통속, 그놈이 그 놈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다의 멸망을 또 한 번 예언하신 성전이 무너지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陷落)이 될 때에 이두메인들도 역사의 뒤안길로 같이 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겨우 이 30년간 짧은 시간차를 두고 멸망했던 이 두 문족이 이제 같은 시기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같이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점을 시사(示唆)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가장 가까웠던 이 에돔에 대한 경고(警告)는 사실 하나님의 백성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오늘 오바댜서가 일견 에돔의 심판(審判)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반부 15절에 가면 갑자기 이 경고가, 이 심판이 열국, 만국을 향해서 확대됩니다. 우리가 1장 1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15,
15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내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내가 행한 것이 내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에돔에게 적용되는 이 기준은 만국(萬國), 즉 모든 나라, 모든 족속에게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어서 이들이 동시에 멸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했으니까 그들만 멸망시키겠다고, 에돔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악도 행하지 말고 그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행하는 악을 다 당하고 있으라고 결코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애굽에서 출 애굽하여 큰 민족을 이루며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에 에돔을 건들지 말라고 분명히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들의 영토를 지킬 것, 그리고 그들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먼저 영토 명령의 보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신명기 2장 1절에서 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1-5,
1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비록 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다가 자신의 어리석음과 교만(驕慢)으로 인해서 가나안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400년이 지나도 그들을 치지 말라 그들의 땅을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명기 후반부에 그들의 신분에 대한 보호(保護)의 명령(命令)으로서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신명기 23장 7절에서 8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신명기 23:7-8,
7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8 그들의 삼 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형제 에돔을 보호하고 사랑하여 결국 애돔이 떠나갔다가도 다시 하나님의 총회(總會)에 들어오기를 바라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전에 쭉 말씀드렸다시피 그들은 서로 싸웠고 손잡고 멸망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자녀로서 선한 싸움을 싸울 좋은 경기를 가지고도 내가 지금 어느 산에 올라와 있는지를 잠시 파악을 못해서 이 엉뚱한 에서의 산에 오르면, 우리가 받은 그 좋은 약속이, 그 자원(資源)들이 다 소용이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런 멸망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불화가 일어나고 성도가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은 결코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까 보았던 것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지금 우리가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경제적인 안정과 지위의 유혹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에돔도 그것에 빠졌고 결국 이스라엘도 빠진 유혹입니다. 에돔도 그것에 빠졌고 결국 이스라엘도 빠진 유혹입니다. 우리는 그런 교만의 유혹에 지각 없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이 에서의 산에 올라서는 안 됩니다. 오바댜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산에 오르라고 말합니다. 에서의 산은 멸절될 것이나 시온 산에 피할 자가 있으리라고 선포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오바댜 1:17,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오바댜서에서는 이 산이 야곱 족속만 구원받는 것처럼 쓰였지만, 우리는 그 이후의 성경을 다 알고 있죠. 그 이후에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산에는 이제는 야곱 족속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만국 백성을, 우리를 포함한 이들을 다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산에 오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미가서 4장 2절입니다.
 
*미가 4:2,
2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돌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원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사하게도 오바댜서의 마지막 부분은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세 가지로 알려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여러분들께 우리가 어떻게 시온산에 오른 자의 태도로써 살아갈지 세 가지를 간단하게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IV. 네 번째,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삶의 태도를 우리에게 세 가지로 알려줍니다.
 
-⓵여호와의 산에 올라가는 방법-첫 번째로, 우리는 이 산에 오를 때에 심판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16절 말씀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오바댜 1:16,
16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 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선지 서에서 등장하는 이 마시는 잔(盞)은 바로 심판(審判)의 잔(盞)을 의미합니다. 만국 인이 마신다는 이 16절의 말씀은 천하 만민이 하나님 앞 시온 산에서 공정(公正)히 심판받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심판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면서, 내가 에서의 산에 올라 자신의 권세나 안전한 위치를 이용해서 남을 정죄(定罪)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드메인 헤롯은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행실 도덕적 우의를 근거로 예수님을 비난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이 몰락했죠.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반드시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 속에서 SNS나 댓글과 같은 익명의 안전성 뒤에, 그런 산성 뒤에 숨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에 휩쓸려서도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형제 사이에 너무나 자주 일어납니다.
 
특히 오래 보았던 우리 동력 자들 사이에도 많이 일어납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고요. 이 자리에 많이 와 계신 우리 훈련생들, 예전 우리 순장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여 훈련을 받고 이 수요예배에 나와 앉아 있지만 혹여 내가 여전히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남을 정죄하고,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지고 남에게 포악해도 된다고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지금 에서의 산에 올라와 있지 않은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⓶여호와의 산에 올라 살아가는 방법 두 번째는 우리가 피할 곳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니요, 하나님 것밖에 없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17절 말씀 읽겠습니다.
 
*오바댜 1:17,
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이것은 이미 앞서 묵상한 에서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반면(半面)교사(敎師)를 얻는 것입니다. 내가 이 땅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곁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장소가 아닌, 다른 든든한 요새와 대로에 의지해서 나의 안전과 나의 소망을 의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⓷여호와의 산에 올라 살아가는 방법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나라가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오바댜 1:21,
21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에서가 야곱을 떠나서 세일에 자리 잡은 뒤에 그의 후손들은 아주 금방 왕조를 세웠습니다. 창세기에서는 그들이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일찍 왕을 가졌다라고 말합니다. 36장, 창세기 36장 31절에,
 
*창세기 36:31,
31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라고 그 목록을 나열하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이 땅에 와 보니 이 주변 민족이 왕을 가진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왕정을 세우고 난 이후에 자신들의 왕, 다윗을 통하여 에돔 땅을 침공(侵攻)하고 형제의 싸움이 격화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왕이심을 망각(妄覺)하고 우리 자신 가운데 왕의 모습을 더욱 더 드러낼 때에 이 왕들의 싸움이 이 땅 가운데 만연(漫然)하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내가 왕인 채 살아가는 이 땅의 모습, 그것이 교만하고 지각없는 형제에 대한 포악한 모습의 절정(絶頂)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산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철저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모습, ⓵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⓶나의 피난처는 주님 앞밖에 없다. ⓷주님이 왕 되신다. 라는 모습을 통합하신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찬양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교만할 이유를 다 가지고 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지각 없이 다른 곳에 의지할 이유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형제에 대하여 그들이 이렇게, 이렇게 역사 속에 나의 삶 속에 행했습니다. 라고 그들에게 우리가 마땅히 포악해도 될 만한 이유조차도 다 가져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무릎 꿇을 때에, 이성산에 오를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애서의 산에 올라, 이산이 아닌 가벼!!! 하고 멸망당하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누리게 하시는 백성의 복락(福樂)을 다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 주님의 그 날을 기대하며 나의 마음을 지켜서 왕 되신 주님의 통치를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하며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주님께서 왕 되심을 믿고, 내가 남에 대하여 포악할 그 어떤 이유도 이 세상 어떤 것도 의지할 이유도 없도록 내게 충분한 은혜를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그 성산에 늘 거하는 주의 백성으로서 모두가 교만(驕慢)하지 말고, 지각(知覺)이 없이 행동하지 말며, 형제에 대한 포악(暴惡)은 생각에 조차 없어야 한다. 시온 산에 오른 자의 우리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억하여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과 이 나라가 하나님 것임을 기억하여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고 무릎 꿇어서 우리가 어느 산에 있는지를 기억해야 하여 올바른 산에 올라서 진정한 복락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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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8월 26일 (858)


1. 발생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그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다가 위기를 맞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은?
① 블랙스완 ② 어닝쇼크
③ 회색코뿔소 ④ 산타랠리


2.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를 구입하는 데 관심 있다면 꼭 가입해야 하는 금융상품이다. 미성년자도 개설 가능한 이것은?
① 주택청약종합저축
② 보금자리론
③ 주택저당증권
④ 종합자산관리계좌


3. ‘D1’ ‘D2’ ‘D3’는 무엇과 관련된 경제지표일까?
① 가계빚 ② 나랏빚
③ 환율 ④ 금값


4. ‘M1’ ‘M2’ ‘Lf’는 무엇과 관련된 경제지표일까?
① 통화량 ② 출산율
③ 수출 ④ 수입


5.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을 때 기존 기업들의 경쟁력이 오히려 강해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는?
① 풍선효과 ② 기저효과
③ 메기효과 ④ 낙수효과


6. 어떤 산업이 장기 호황을 맞거나 어떤 자산 가격이 대세 상승장을 맞았을 때 쓰는 표현은?
① 퍼펙트 스톰
② 캐리트레이드
③ 승자의 저주
④ 슈퍼 사이클


7. 재무 건전성이 떨어지고 지속가능성과 자생력이 낮아 ‘좀비’에 비유되는 기업을 비유하는 말은?
① 한계기업 ② 지주회사
③ 유한회사 ④ 데카콘


8. 다음 중 기준금리를 한 번에 0.5%포인트 인하하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은?
① 베이비스텝 ② 팻핑거
③ 빅컷 ④ 패스트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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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치명적인 'V<바이러스>의 진화'…포비아인가 실존 위협인가


Cover Story


그래픽=전희성 한국경제신문 기자

요즘 코로나19 감염자가 다시 급증하고 원숭이두창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엠폭스(MPOX) 바이러스가 재창궐하고 있어요. 역대급 폭염에다 때아닌 감염병 공포로 인해 개학을 맞은 학교 분위기도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코로나의 확산세는 지난 2월 겨울철 정점을 찍을 당시 유행 속도를 훨씬 웃돕니다. 지난달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코로나 입원 환자 수는 이달 둘째 주 1366명을 기록하며 2월의 875명을 뛰어넘었습니다. 전체 감염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에 정부는 병원과 요양병원 등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감염 증상을 보인 학생은 등교를 자제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는 아프리카에서 엠폭스가 확산하자, 지난 14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선언했습니다. PHEIC는 WHO의 최고 수준 경보 단계인데요, 스웨덴에서 변종 엠폭스에 감염된 여행자가 나오면서 발령됐습니다. 지난 21일엔 태국에서도 의심 환자가 발생했어요.

작년 5월 코로나19의 PHEIC가 해제된 이후에도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으로 이어질 바이러스의 공격이 계속될 것이란 우려가 많았습니다. 누리엘 루비니 등 많은 저명 학자들도 세계를 불황에 빠뜨릴 충격 중 하나로 치명적 팬데믹을 꼽았습니다. 팬데믹의 일상화는 인류 최대의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교훈과 감염병 일상화 시대의 사회경제적 의미에 대해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잊어선 안 될 코로나19 팬데믹의 교훈
'상시 유행 <엔데믹>감염병'도 안심할 수 없죠

게티이미지뱅크

작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비상사태를 해제할 때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 터널을 빠져나온 듯 기뻐했습니다. 이후 회복된 안전한 일상은 그 무엇보다 달콤했죠. 그런데 다시 코로나19가 유행한다고 하니 그저 말문이 막힐 따름입니다. 또 다른 팬데믹이 계속 출현할 수 있다는 경고가 빈말이 아니었나 봅니다.

코로나19 치료제 모자란 현실

코로나19의 재확산은 오미크론의 후속이라 볼 수 있는 새로운 변이 ‘KP.3’가 등장하고, 지난 겨울 백신 접종률이 낮았던 게 계기가 됐습니다. 여기에 여름철 폭염을 맞아 사람들의 실내 활동이 늘고 에어컨 사용으로 환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 환경, 즉 ‘3밀(밀집·밀접·밀폐)’ 환경이 불을 붙였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달 말까지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35만 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봅니다.

이번 변이는 과거에 비해 전파력은 강하고 치명률은 낮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이젠 독감과 같은 ‘상시 유행 감염병’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풍토병’이란 뜻의 엔데믹이 되기도 했죠. 그렇더라도 팍스로비드(화이자), 라게브리오(머크) 등 먹는 코로나19 치료제를 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노약자나 만성질환자들이 약 재고가 없어 처방해주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신종플루나 독감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공급과 유통은 민간이 맡고 있는 데 반해 코로나19 치료제는 건강보험에 등재되지 못해 정부가 직접 약을 구매해 공급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6월 넷째 주 1272명분이던 코로나19 치료제 사용량이 7월 다섯째 주 4만2000명분 이상으로 크게 늘어나면서 수급에 미스매치가 생긴 거죠.

하지만 격리, 사회적 거리 두기, 의료진의 사투 등 코로나19 사태 당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약이 없다고 하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감염병 위기에는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대응하지 않으면 손쓸 수 없는 지경에 몰린다는 사실을 국민은 많이 경험했습니다. 이런 코로나19 팬데믹의 교훈을 벌써 잊어버렸나 싶어 걱정입니다.

2020년 1월 30일부터 3년 4개월간 이어진 코로나19 비상사태(WHO 발령 기준)는 사회·경제·문화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국민 삶의 질도 많이 변화시켰죠. 예를 들어, 국내 우울증 환자가 2019년 대비 2021년에 약 15% 증가했고, 외부 활동이 제한되면서 비만율은 2019년 33.8%에서 2020년 38.3%로 높아졌어요. 아플 때 집안일 부탁할 사람이 없다거나 힘들 때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인 사회적 고립도(통계청 조사)도 2019년 27.7%에서 2년 뒤 34.1%로 크게 올랐습니다.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고교 2년생의 수학·영어 기초학력 미달 비율도 2019년 대비 2021년 각각 5.2%포인트, 6.2%포인트 높아졌습니다. 국민 삶을 피폐하게 한 팬데믹이 자꾸 생겨나지 않도록, 그래도 발발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하는 위기 대응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엠폭스, 다른 대륙 번질까

WHO의 엠폭스 비상사태 선언은 엔데믹이 팬데믹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여서 주목됩니다. 이 감염병은 원래 2022년에 처음 발병한 아프리카 풍토병이었습니다. 이후 116개국으로 확산하며 세계적으로 약 10만 명의 감염자, 200명가량의 사망자를 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22년 6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총 165명의 엠폭스 환자가 발생했죠. 그런데 이번에 변이가 생겼고 다른 대륙으로 확산할 위험성에 WHO가 경고하고 나선 겁니다.

엠폭스는 올 들어 아프리카에서 1만8700명 이상 확진자, 500명 넘는 사망자를 발생시켰습니다. 다행히 백신과 치료약이 이미 존재하고, 사람과 직접 접촉하거나 감염자의 옷, 침대보 등을 통해 전염되는 특성이 있어 코로나19보다는 감염성이 덜하고 확산 속도도 느립니다. 또 수포성 발진이 생겨 환자를 쉽게 구별할 수 있죠. 하지만 세계가 밀접하게 가까워지고 교류가 빈번한 초연결 시대라는 게 문제입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유럽과 미국이 엠폭스에 뚫리게 되면 우리나라도 안전지대라 할 수 없습니다.

NIE 포인트
1. 엔데믹과 팬데믹의 차이를 알아보자.

2. 우리 정부가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응하며 얻은 성과와 문제점에 대해 살펴보자.
3.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며 각자 얻은 교훈을 친구들과 공유해보자.

세계경제에 가장 큰 위협은 팬데믹
초연결 시대에 '파편 사회' 만들어져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시련을 3년 4개월간 경험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해야 했던 여러분도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앞으로 일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인데요, 팬데믹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팬데믹이 바꾼 경제법칙

먼저 세계경제의 가장 큰 위협은 탐욕이 만들어내는 금융위기도, 신흥국의 과도한 거품경제도 아닌, 바로 팬데믹이 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뒤인 2009년 세계경제는 마이너스 성장(-1.3%)을 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한 2020년 세계경제 성장률은 -3.1%로 더 가파른 내리막을 걸었습니다. 2020년 한 해만 놓고 보면 주요 선진국의 경제는 1920~1930년대 대공황 수준으로 곤두박질쳤죠. 영국(-11.0%), 이탈리아(-9.0%), 프랑스(-7.8%)는 물론, 우리나라도 외환위기 이후 처음 역성장(-0.7%)을 했습니다. 우려를 키우는 것은 팬데믹이 세계화의 퇴조를 가져오고 각국의 보호주의 장벽이 높아져 장기간 세계경제를 침체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음으로 팬데믹은 고금리·고부채·고물가로 대표되는 ‘3고(高) 시대’를 몰고 왔습니다. 대략 1990년대부터 팬데믹 이전까지 세계경제는 ‘대안정기(Great Moderation)’로 특징지어집니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세계화 가속으로 세계경제는 저물가·저금리 속 호경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이젠 미국이 기준금리를 공격적으로 높여도 물가가 기대만큼 떨어지지 않고 노동시장의 뜨거운 열기도 쉽게 식지 않습니다. 이런 이상 현상이 새로운 표준이 된 뉴노멀(New Normal)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만들어졌어요.

팬데믹 상황은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에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지출을 자극했습니다. 즉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현금 지원 등을 대대적으로 늘린 거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로선 정부의 코로나19 지원금을 받으며 ‘그냥 쉬는’ 선택을 많이 했습니다. 근로자들이 이렇게 일터로 돌아오지 않는 현상을 ‘대퇴직(Great Resignation)’이라고 합니다. 이게 기업의 구인난을 초래하고, 임금수준을 높게 유지하는 동시에 물가가 떨어지지 않는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또 정확한 수치상으로 입증되진 않았지만 팬데믹이 소상공인·자영업자·취약계층에 더 큰 피해를 준 것만은 사실입니다.

감염병에 잘 대처하는 나라가 세계경제를 앞장서 이끈다는 점도 목격됐습니다. 대만이 대표적인 나라죠. 제조업 기반의 중요성도 재발견하게 됐습니다. 이런 기반이 있어야 그나마 방역 마스크나 진단 키트를 신속하게 만들고 팬데믹에도 경제가 굴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산업적으로는 음식 배달 등 온라인 비즈니스의 급성장, 무인 카페·주문 키오스크 등 무인화 바람, 감염병 치료제·백신 제조와 원격진료 등 바이오 헬스케어 분야의 경쟁 가열을 몰고 왔습니다.

‘파편 사회’ … 협력 더욱 중요

팬데믹은 초연결 시대에 서로 끌어당기기만 하는 힘을 거꾸로 약하게 합니다. 연결된 사회에선 위험도 공유되기 때문에 비대면 경제활동은 이제 일상이 됐습니다. 기업이 재택근무를 적극 활용하고, 화상회의·메신저 앱이 보편화하며,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거리를 두는 이른바 ‘파편 사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가 강조한 ‘위험사회’(위험이 중심이 된 사회)의 반작용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팬데믹과 같은 위기를 혼자 끙끙 앓는다고 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설적이게도 협력은 더 필요합니다. 작년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의 주제도 ‘파편화된 세계에서의 협력’이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또 다른 질병이 인류를 계속 위협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습니다. 과도한 항생제 사용 등으로 생태 균형을 무너뜨린 인간에게 자연이 감염병으로 보복해온다는 겁니다. 환경 파괴로 동물 서식지가 줄고 바이러스를 보유한 동물이 인간과 자주 접촉한 결과, 감염병이 새로 출현한다는 경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재유행, 엠폭스 경고는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NIE 포인트
1. 20세기 이후 세계경제에 나타난 위기의 역사를 훑어보자.
2. 대안정기, 뉴노멀 등 경제 용어를 경제사 속에서 공부해보자.
3. 파편화된 사회에서 협력 수준을 높이는 방안을 놓고 친구들과 토론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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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9월 1일)
제목: "물 떠온 하인들과 제자들은 알더라“-예수님은 누구신가?⑰-2
말씀: 요한복음 25:11
대표기도: 윤주은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1부), 문진호(2부), 이기호(3부), 임상규(4부)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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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5-11,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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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첫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대로 목요일까지는 힘들어도 제3일의 기적을 저희들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금토일 3일째 앞으로 1절에 있는 것처럼 제3일의 카이로스의 기적을 주신 것처럼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민족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한 달 동안 우리 민족을 불쌍히 해주시고 여러분들 가정 가정마다 이 한 이 1달 동안 매일매일 감사와 은혜로 충만을 채워주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드리고 이 1달 동안 앞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표정을 1명도 예외 없이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이 지금 누구신가에 대해서 쭉 말씀을 하고 있는데, 변화의 능력자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 물 떠온 하인들도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더라. 제자들도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도 모르고 그냥 선생님 정도 생각했는데, 오늘 이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과 기적을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오늘 메시아로 깨닫게 되었더라. 영안을 열게 되었더라. 오늘 다 우리 육신의 비닐이 다 이렇게 벗겨지고 하늘나라를 향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에 대한 영안이 열리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 오늘 2장 11일절 요절 같이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2:11,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자, 오늘 이런 말씀은 교회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어릴 때부터 가나 혼인 잔치에 뭐 표정 많이 들었잖아요. 그래서 예수 믿는 분들 가운데서 술 먹는 분들의 근거가 이거에요. 그 예수님이 이거 했다고 말이지, 근데 그건 오해한 것이고, 아주 중요한 건데 첫 표적이라 해서 표적(表迹) 여러분 표적이란 말이 본래 이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은 근본적인 변화고, 화학적인 변화고, 일반적인 자연 질서를 위반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에요. 예술이면 창조주기 때문에 법칙을 만든 분은 법칙을 초월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이것도 가능한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들 이게 정말 가능할까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나 하는 그런 관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왜? 주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을까? 지난주일은 제가 그 종말론적인 혼인 잔치 집에 대한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왜 실제로 이게 왜 이렇게 하셨을까? 그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이 가졌던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엉망진창이고 정말 천국 같은 기쁨이 아니라, 어떤 마음이 답답하고 지옥 같은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뭐다. 진짜 하나님 나라가 뭐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이 땅 오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천국이 가까웠다고 그랬는데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시키려고 제자들을 뽑은 거예요. 그리고 제자들을 뽑고 오늘 하인들을 사용하신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뭐다. 라고 제대로 깨달아야 되겠는데 제자들 하나님 나라 일꾼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떤 개념과 컨셉이 분명해야 되는데, 그것이 엉터리니까 그 엉터리를 새롭게 해주고 고쳐주고 그러니까 그걸 고쳐주고 난 다음에 너무너무 놀라가지고 이 첫 표적, 아 표적을 보니 비로소 예수님을 믿었다. 할렐루야!~~ 그래서 표적이란 말이 아 그리스어로 세베이온 이라고 그러는데 이 표적은 겉으로 드러난 이적 기적보다 더 중요한 거 그 속에 담긴 배경, 의미, 숨겨진 영적인 중요한 법칙 이런 것들을 깨달아야 된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왔지만 오늘 이 가운데서 정말 이 시대 21세기 오늘 이 초 연결 사회에 AI와 CHAT GPT가 난무하는 이 시대 가운데서, 요즘 뭐 딥페이크 해가지고 난리잖아요? 이런 시대 가운데 이 말씀 오늘 얘기는 어떻게 접목되어야 할 것인가?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는데, 구약과 신약의 차이는 우리 성경은 한 장 차이예요. 한 장 차이 그런데 실제로는 한 400년 동안에 중간기가 있었어요. 그 400년 중간기 기간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변질이 된 것이 어떻게 변질이 됐는가? 제가 한 번씩 강조했지만, 크게 3가지 그 당시의 종교적 흐름을 통하여 변질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 제자들도 당연히 그 변질된 흐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하나님 나라 건설 정말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우리가 주님 앞에서 그리스의 보혈의 피로 구원받고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의 능력을 체험해야 되는데, 그럴려면 생각과 컨셉이 발라야 되는데 그 당시에 잘못된 억눌린 이 하나님 나라와 신앙의 흐름에 대해서 잘못된 거에 대해서 주님께서 오늘 이걸 정리를 해주세요. 첫 번째, 그 당시에 로반뉴 월 넘버원에 뭐라고 돼 있냐면 참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방해하는 3가지 몇 가지 흐름이라고요. 3가지를 그 400년 침묵 기를 지나면서 첫 번째가 뭐냐 하면,
 
I. 참된 하나님의 의미를 방해하는 세 가지 흐름.
 
-바레세파가 있었어요. 이 바리세파는 회당 중심에서 이 성경을 해석하고 그다음 율법을 해석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주로 중산층 중심이었는데요. 근데 이 사람들은 율법을 해석하다가 그 율법(律法)을 자기 사유화를 시켜 가지고 그 율법에다가 멍에를 얹어놓고 율법에다 법칙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정죄하고,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돌아봐야 되는데 그 율법의 어떤 기준을 가지고 남들을 판단할 도구가 된 것이에요. 그니까 남들을 판단하니까 그 마음에 천국이에요, 지옥이에요? 남들이 보면 자기는 의로운 같지만 나중에 지나놓고 보면 그 마음이 남 비판하는 사람의 그 마음이 뭐가 좋겠어요.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요 그래서 호텔에 가면 안식일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요. 왜냐하면, 안식일에는요. 유대인들은 버튼을 눌르면 안 돼요. 몇 번 못 알아들었는데요. 요 몇 층간을 눌리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거는 죄인들 이방인들만 눌리고, 자기들은 안식일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요.
 
그러니까 시간 3분이면 3분, 4분, 1분이면 1번씩,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놓고 자기들은 나는 버튼 안 눌렀어요. 이렇게 스스로 위안을 삼고 그러니까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 율법이라 율법이란 것이 그게 여러분 생각 시내 산의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율법이 율법주의가 되면 맹물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 맹물을 줄이면 오늘 성령의 폭발력이나 포도주로 바꿔주신 것이 시내 산의 율법을 갈보리 산에 보혈의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 새로운 능력 향기로운 삶을 바꿔주시는 것이에요. 오늘날도 똑같아요. 오늘 우리가 이 세대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요. 그 율법을 가지고 자기 거울을 만들어 자기를 돌아보게 해야 되는데, 그걸 가지고 나 홀로 표현한 게, 그러니까 기독교의 정신과 기독교 복음도 사유화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기만 거룩하고 자기만 맞다. 이래 가지고 맨날 난 비판 하는 거예요. 그리고 비판하면서 유체(有體)이탈(離脫) 화법으로 비판하면서,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를 믿는다든지 그 사람을 통하여 교회가 부흥을 한다든지 그 사람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 그런 일은 거의 없어요. 그냥 율법을 사유화하는 것이에요. 복음의 능력에 들어가지 못한 게 오늘 이런 바리세파적인 흐름이 우리 속에도 있을 수 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아주 정통 보수 신앙의 아버님을 목사님 모시고 살아왔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부터 굉장히 어떤 율법적인 어떤 딱 이거. 이것에게는 이게 저에게는 참 신앙생활에 좀 옥죄이는 그런 것이 있었어요. 저는 어릴 때 매3주5, 매실주 이름이 아닙니다. 에 매삼, 주오, 매일 3장, 주일 5장, 그걸 안 하면 나는 너무 마음의 부담이 많은 거예요.
 
그리고 주일 성수, 그러니까 물론 그 자체는 너무 귀한 것인데, 나에게는 틴에이저 시절의 내 신앙이 좀 잿빛이었어요. 저는 지금도 월요일 날 저기 뭐야? 우산 뭐 월요일 날 이렇게 어느 날 제가 지금도 우산을 잘 안 들고 다녔는데, 내가 우산을 안 드는 이유가 뭐냐면 어느 날 월요일 날짜 그 당시에는 우산이 귀했는데 우산 들고 다녔는데 잊어버려 잃어버렸어요. 왜 잃어버렸나, 속으로 아 내가 어제 주일 성술을 제대로 못 해갖고, 하나님이 나를 오늘 징벌을 하시는구나! 그러니까 이 징벌 신앙 늘 얽매여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잿빛 어둠, 중3 때 얼굴 보면요. 고뇌와 그 고등학교 입학 수험표인데요. 보면 완전히 30대 중 늙은이? 아주, 아주 그래서 내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이런 내용을 통하여 제가 영창이나 어떤 브렉트로 이거 없었으면 오늘날의 제 사역은 없었을 거예요. 혹시나 우리에게 있는 바리세파적인 기질, 비판하고, 신앙의 본질보다도 형식에 말씀의 의미보다도 말씀의 외피에 집중해 가지고, 자신의 존재와 의의를 드러내는 사람들, 오늘 이런 잘못들이 우리에게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흐름은 사도개파였어요. 아까 이 바레세파는 회당 중심이었고, 이 사도개 파들은 성전 중심이었어요. 사도개 파는 사독이라고 그 유명한 제사장, 대제사장 가문을 이어받는 이런 흐름이었는데요. 이 사두개파는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들은 최상류층이었어요. 바리세파가 중산층이었다면 최상류층, 이들은 아주 그저 귀족층이었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어떤 대단한 어떤 위치 잘 나가는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득권층이 돼 가지고 현실에 축복이 있으니까 현실의 그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하여 타협하고, 세속화되고 그리고 성경의 초월성과 영적인 능력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 마태복음 22상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가 부활도 안 믿는도다. 네가 하나님의 능력도 믿지 않는 도다. 라고 비판한 대상이 뭐냐 하면 사두개파였어요. 이 사람들은 회당의 아이들 보내지도 않고 당시에 로마 제국에서 키운 교육기관인 김나지움, 거기에 아이들 보내 가지고 그러니까 로마 권력하고 이래 서로 연결이 돼 가지고 자기 소위 세속화되어 있고 영적 가치를 부정하고 성전 제사를 집례 하는 것 같지만 타협주의자들, 혼합주의자들, 세속주의자들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 이 본문 바로 뒤에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 성전을 청결케 하신 그 타겟이 뭐냐면 사두교인들이었어요. 마지막 하나 남은 흐름이 있었는데, 그 흐름이 에스네파가 있었어요. 이 에스네파는 아주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들이었어요.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헌신하는 데 있어서 어떤 그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 이래 이분들은 임박한 종말론에 대해서 눈을 열어 가지고, 아! 주님 오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수많은 오염되고 타락한 것들과 함께 우리 같이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따로 나갔어요. 이렇게 나와 가지고 따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주님 오시는 것만 기다렸어요. 주님 오시는 거 기다린 것 자체는 귀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실 세계 부정, 자 우리는 지금 밥도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아이들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시장도 가야합니다. 우리는 직장생활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부정하면서 위험한 종말론에 빠져가지고, 가정을 망가뜨리고 일상생활을 거부하는 그런 스타일이 있어요.
 
그래서 에스네파, 그래갖고 이제 아주 강력한 금욕주의자들이 돼갖고 세레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영향을 약간 받아서 예수님의 저자들 보고 뭐라 그랬죠? 너희들 왜 금식도 안 하느냐? 고 그런 식으로 엇박을 질렀습니다. 정리하면 3가지 첫 번째 어떤 흐름이었어요. 바리세파, 두 번째는 뭐예요? 사두개파 세 번째는 뭐예요? 에세네파 그러니까 또 어떻게 보면 우리 마음의 마음속에도 이런 속성이 조금씩 다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바울이 고백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의와 희락이라.’ 샬롬이 있어야 되고, 희락, ‘카라’ 라는 이 희락, 이 살롬의 평강과 아 희락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에이레네와 카라가 정말로 기쁨과 정말 평강과 희락이 있어야 되는데, 희락이 있기는커녕 마음이 지옥인 거예요. 그러니까 가장 이것을 깨닫게 하고 잘못된 개념을 고쳐줄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 뭐냐면 잔칫집인 거예요. 잔칫집은 기쁘고 감사하고 그다음에 서로 격려하고 축하하고 그것이 잔칫집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첫 표적을, 그 이면에 끝으로 드러난 이적보다도 물이 어떻게 포도주가 될지, 그 기적도 너무 소중하지만 그 기적에 담긴 표적 의미 진리를 오늘 저와 여러분의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속에 있는 바리스아적인 것, 그다음 사두개적인 것, 에세네적인 것을 정리하면서 균형 잡힌 샬롬과 기쁨과 희락의 신앙생활 할 수 있겠는가? 지난주에는 제가 모자람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된다고 그랬어요. 기억나십니까? 모자랄 때, 그 모자란 것을 주님께 들고 가니까 주님께서 표적과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에요.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에 수많은 메마름이 있어요.
 
우리의 인생의 강에 바닥이 말라버리는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제3의 기적을 제 사흘 날에 카이로스의 기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근데 오늘은 이런 상황 가운데 이런 배경 가운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 오늘 1~2가지를 말씀을 드릴게요. 첫 번째 저와 여러분들의 이 제대로 된 하나님 나라 건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시키기 위해 부르셨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첫 번째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뭐냐 참된 하나님 나라 건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있다.
 
II. 참된 하나님 나라 순종에 달려있다.
 
-이거지 순종한 이 얘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알 수 있지만 오늘 여기 좀 진지하게 한번 우리가 이 말씀 앞에 우리가 자신을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이 하늘의 나라 건설은 다시요. 뭘 순종한다. 말씀을 순종한다. 근데 오늘 순종할 때, 오늘 대상으로 나온 분이 사람들이 뭐냐 연회장은 이 잔치에 연회장은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들, 이 모든 걸 다 몰랐으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그랬어요. 근데 그 물돈 하인들이 알게 된 배경이 뭡니까? 그리고 연회장이나 신랑신부도 몰랐지만 첩봤다로 죄송합니다. 제일 첫 번째로, 누가 알았느냐, 하인이 알았는데 하인이 알았던 배경은 뭐예요? 5절에, 이렇게 나와 있죠.
 
*요한복음 2:5,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하인들이 말씀을 순종하여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라는 이거는 어릴 때부터 일반 상식으로 다 알고 있는 거예요. 자 그런데 6절을 보니까 거기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요한복음 2:6,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돌 항아리가 6개가 있습니다. 정결 예식을 위하여 유대인들은 들어갈 때에 그 집에 입장할 때에 그 당시에 무슨 아스팔트 도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주요 환경이 깨끗한 것도 아니고, 먼지가 풀썩이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더러우니까 손발이 더러워지니까, 그 손발을 깨끗이 손을 깨끗이 정결하게 닦는 그 물통이에요. 그 6인데 물통 하나가 한 100리터 정도 들어가는, 그러니까 100리터라면 여러분 그 뭡니까? 500cc 500씨씨 우리 큰 이 물병 몇 개입니까? 이 산수도 안 됩니까? 가만있어 2개 2개가 1리터니까 200개네요. 200개 맞죠. 2부가 1부보다 수학 실력이 좀 더 없는 것 같아요. 자 이 100리터면 큰 그러니까 그 당시에 고대 근동사회 또 광야 그 해양성 그 이스라엘 캘포니아와 비슷한 날씨인데 물이 없는 물이 잘 없어요. 물이 귀한 곳인데 그게 100리터씩 큰 항아리 6개를 채우는 게 그 쉬운 일이겠어요.
 
그게 그리고 또 이론적으로 맞아야죠. 아니 정결예식 행하기 전에 잔치 시작하기 전에 1주일 동안 시작되는 잔치는 1주일 동안 하는 잔치인데 시작되기 전에 그게 가득 채우라면 그건 이해가 가지만 이미 다 입장 완료인데, 바보 같은 짓이고 그다음에 이 그걸 이제 물을 떠서 갖다 주라고 했는데, 만약에 맹물이 변해 가지고 그게 포도주가 안 되고 맹물 갖다 주면 뺨이라도 맞을 수 있는 그런 상황인데 근데 뭐라고 말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그랬어요. 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우리 제자훈련하면서 우리 말씀을 순종하는 거 우리에게 익숙한 거예요. 근데 오늘 이 익숙한 본문에서 우리가 보화를 캐내야 하는데,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대로 하라 하느라 그게 뭐예요?
 
말씀을 순종하는 것인데, 오늘 이 예배를 통해서 아니면 여러분들이 QT를 통해서든 아니면 제자훈련을 통해서든 아니면 성경을 통해서 하는 가운데서 어떤 경우에서든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뭐 하루에 한번이 아니면 최소한 1주일에 한번씩이라도 이상은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어요. 만약에 여러분 2달이 2주가 가고, 한 달이 갔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 그러고 신앙이라고 그러면서도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도전받아보고 여러분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한 달이 가도 하나도 없다면 여러분들은 그 순간, 비상(非常)상황(狀況)이에요. 버린 자식, 아니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필요하면 하루에 한 번 아니면 1주일에 한 번, 2주일에 한 번이라도 꼭 하나님 말씀을 통한 여러분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에요. 지난 2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도전받아본 적이 하나도 없다. 순종을 요구할 하나도 없다. 그거 굉장히 비상사태(非常事態)예요. 지금 그리고 내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할 때, 뭘 어떻게 순종해야 되느냐 어려운 거 없어요. 이 말씀을 볼 때에 문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군사적으로, 리트러리, 그래머티컬리, 히스토리컬리, 셀베이션 히스토리, 구원의 구원사적으로 이걸 보게 되면 우리가 많이 가르쳤잖아요. 이거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여러분들 마음속에 1주일에 한번, 아니면 2주일에 한번이라도 반드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요구하는 말씀이 있을 것이에요.
 
그걸 순종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 자 신앙의 본질은 뭐예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에 관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노우 어바우트(know about)가 아니라, 노잉가드- Knowing God! 에요. 하나님 자체를 아는 거예요. 하나님 자체를 어떻게 아는 거예요. 말씀을 순종하기 때문에 말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왜 하나님을 모를까요? 순종을 안 하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거예요. 야고보서 1장을 보면 너희가 순종을 안 하니까, 기만하고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었다. 그러는 거예요. 다시요. 순종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순종 안하고 남들에게만 순종을 요구한다면, 이거는 이건 안 되는 거예요. 순종 안 하니까 영안히 닫히고 판단 능력이 마비가 되는 것이에요. 불순종하니까 잘못된 악순환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을 통하여, 우리는 순종에 대한 눈이 열려야 되는데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표가 뭐냐면, 성공을 추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엄격히 들어가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목표는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도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성공이 아니라, 말씀 순종이 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승리가 아니라 말씀의 순종이 돼야 하는 것이에요. 그 제가 한 번씩 한 주간 동안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내용을 말씀할 때마다 그 속에는 사실은 말씀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승리를 위한 보이지 않는 순종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의 예를 들어서 무슨 차별 금지법, 성소수자 인권 확대, 성소수자나 차별 금지법 동성애 다 우리 다 참 인격이 다 귀한 분들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홍길동을 말하면 말하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홍길동은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말 못 했잖아요. 우리가 지금 앞으로요. 이 차별 금지 통과되면 제가 오늘 이 설교 못 합니다. 제가 이런 설교하면요 저한테 법적으로 고소가 들어옵니다. 그럼 저는 이게 그 법적인 걸 처리 할려고 제가 아마 검찰이나 경찰이 왔다 갔다 해야 될 겁니다. 미국이 지금 그렇게 돼 있다구요. 어제도 제가 아침에 얘기했지만, 이제는 유니버설, 우리 저기 모든 사람이 같이 쓰는 화장실을 멀쩡한 남녀화장실 다 두드려 부수고 여자화장실, 남자화장실을 다 통합시켜 버렸어요. 그럼 이거는 참 이게요 이건 말씀을 순종하면 되는 건데, 이상한 소리 하고 이상한 해석을 해 가지고,,, 오늘 사랑의 교회는 한국교회는 말씀을 순종하는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성공이 아니라 순종이 돼야 하는 것이에요. 따라서 제가 자주자주 말씀드리는 건데 이 세상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주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제일 지혜로운 것은 주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고, 제일 어리석은 것은 주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교만이라는 것은 거드름 피우는 게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순종하지 않는 것이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만이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는 자만이 참으로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얘기할 때 주님께서 어느 날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얘기하시면서 마태복음 7장에서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잔데 그 사람은 반석 위에 세워진 사람과 같고, 집을 어리석은 자는 말씀을 듣기는 하는데, 순종을 안 할 때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사상누각). 그랬어요.
 
둘 다 똑같이 말씀을 들었어요. 오늘도 여러분 저와 같이 말씀을 같이 듣는 거예요. 저도 듣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오늘 1주일, 2주일 혹은 오늘 2주일 예배를 통하여 주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순종을 요구하실 말씀이 있는 것이에요. 그걸 제대로 깨닫고, 그 지키는 자가 우리가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자가 될 수가 있는 것이죠. 저는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할 때마다 자주 하는 얘기가 우리의 인생에 최선은 아직 오지 않았다. The best is yet to come.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이 우리의 인생을 피크가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10절에 실제로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렇게 나와 있죠.
 
*요한복음 2:10,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점점 더 좋은 걸 나중에 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과 순종의 은혜가 있을 때는 우리 인생은 가면 갈수록 더 좋은 포도주가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가면 갈수록 점포 도주가 되는가 우리의 인생에 최선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우리가 앞에 하나 뭔가 조건을 붙인다면 뭐라고 붙일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최선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한 문장을 더 둔다면 우리의 순종을 우리가 순종할 때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최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에게나 최선을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이 최선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이 계단이 결정이 될 때에 그 사람에게는 최선이 오게 되는 것이에요. 자, 저는 지금 모자람에 대한 통찰력 얘기하고⓵, 오늘 지금 제가 오늘은 제가 좀 순종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⓶.
 
그러면 이 순종을 얘기할 때 오늘 하인들이 이걸 순종했는데 이 하인들이 원어에 보니까 보통 우리가 하인 그러면 종(從), 그랬을 때 신약의 서신서에 쓴 둘로스 그러니까 아주 종이에요. 그냥, 그냥 자기 자기 의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꼼짝 못하는 거에요. 살아 숨 쉬는 짐승 같은 그런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얘기할 때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고 그랬을 때 서서에서 다 둘로스 라고 우린 주님이 주인이고 우리는 꼼짝 못하는 거예요. 근데 오늘 여기 하인들은 어떤 하인들인가 보니까 원문이 둘로서가 아니라 디아크노스 그래 가지고 이 하인들이 뭐냐면 정직의 집사 비슷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1주일 동안 잔치를 하게 되니까. 품앗이로 이웃에 있는 사람들이 가서 자발적으로 하인 노릇을 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순종 안 해도 돼요. 근데 왜 순종(順從)하는가?
 
오늘 제가 이래 순종을 얘기하고 말씀을 순종을 얘기하면 일반 교인들뿐만 아니라 좀 성숙한 분들도 약간의 프레셔를 느껴요 그런데 주님은 무턱대고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은 너무나도 좋은 최선 너무나도 귀한 것을 남겨두시고 그걸 위하여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것이에요. 주님은 무슨 앵벌이가 아니에요. 무슨 자식들 못살게 구는 그런 부모가 아니에요. 여러분과 제가 제일 잘 되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심정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리 손해 보는 거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지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내가 용어를 써서 주님은 우리를 뽉아먹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앵벌이가 아니에요. 주님은 우리의 순종을 통하여 뭘 준비하시는가? 오늘 2장 11절에 너무 중요한 말 다시 한 번,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 가라 생각해 그다음 뭐야?
 
*요한복음 2:11,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그의 영광을 나타내심에 제자들이 모여 그를 믿으니라.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신 것이 그러니까 오늘 이 시간 오늘 저와 오늘 여러분들은 저는 참 이 율법의 굴레에서 아니면 이 어떤 한국 교회의 어떤 성리학적인 어떤 유교적인 이런 것들이 있어 갖고, 악재는 이런 어려움들이 있었는데, 제가 이걸 오늘 깨닫고 지금부터 드리는 시작 한 10분 정도 드리는 말씀을 깨닫고, 이것 때문에 저는 사역의 수많은 껍질과 어떤 압박을 꿰뚫고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믿어주셔야 되는 거예요. 자 다시요.
 
순종이라는 말을 할 때 우리가 압박을 당한다든지 급박을 당한다든지, 순종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린 무슨 내가 막 그냥 힘들어 이게 아니고, 더 높은 수준의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상당히 자발적으로 이 순종에 대해서 눈이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이 은혜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나타내신 줄로 믿습니다. 진짜 영광 찐 영광이 돼서 눈이 열리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가면 갈수록 더 나온 향기로운 포도주가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 남은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믿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너무나 신묘막측한 것입니다. 청춘의 시각이 청춘의 그 시대가 인생의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시기라고 말합니다. 이 청춘과 젊음은 흥미와 보람과 모험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물이 포도주가 되는 이런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깨닫게 되면 청춘이 아니더라도 남들이 볼 때 풍요롭고 그런 것이 없다 하더라도 인생의 수많은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 하나님의 영광에 눈이 열려가지고 여러분과 제가 앞으로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이 첫 표적의 의미는 1장 14절에,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놀라운 말씀이 잘하는 말씀인데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그 아심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분하다. 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최고의 영광은 주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에요. 그 주님 우리 가운데 거하셔갖고 오늘 혼인 잔칫집에 주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도 어느 정도 맛보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을 사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 찬란한 영광을 모든 다락방마다, 모든 교구마다, 모든 제자훈련반마다, 모든 식구들마다 경험하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주님의 임재를 통해 경험해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이 첫 영광을 나타내시는 거에요. 저는 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통한 영광을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하셔야 되니까.
 
아, 신앙생활의 본질이 뭔가 주님을 다 알아가는 것이라 그랬는데 주님을 더 알아간다는 건 어떤 뜻인가 하나님의 영광에 눈이 열린다는 것인데, 그래서 여러분 이 믿음 생활이라는 것이 우리의 의지의 결단에만 달려 있다면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고 막 이렇게 한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좀 왔다 갔다 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믿음 생활에 깊이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반응하는 것이 본질이라면 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눈이 열려 가지고 그 영광에 반응하는 것이 목표라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늘 변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거예요. 늘 변함이 없어 그러니까 그 찬란한 영감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이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확고한 방향을 베풀어주시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이렇게 말할 수 같이 보겠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의지 결심이라면 믿음이 우리의 의지에 좌우되겠지만, 믿음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반응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영광은 변함이 없기에 그리스도의 영광에 집중하는 한 우리의 믿음은 지속될 수가 있다.
 
할렐루야! 다시요. 믿음은 그리스도의 뭐예요? 영광에 반응하는 것이 이성적 논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위엄과 영광과 경이로움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돼서 눈이 열리는 만큼 여러분들의 믿음의 수준이 올라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로스를 구세주를 주님으로 모시고 피의 복음을 믿는 수 예수를 믿지만 우리의 신앙에 수많은 요동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요동 가운데서도 변함이 없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눈이 열려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영광의 눈이 열릴 때에, 고난과 평안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어떤 고난이 와도 하나님의 영광에 접목이 되었으면 그 고난을 고난으로 끝내지 않는 것이에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가 있는 것이에요. 이 영광의 문이 열려있지 않는 한 무슨 일이야, 세상에 살아가고 강남에 살아가고 아무리 잘 되어도 하나님의 영광과 접목돼 있지 않으면 그 신앙은 제대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좋아하는 것이,
 
*고린도후서 4:17,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참 환난이 혼란 받습니다. 어려움 겪습니다. 고통 겪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영광의 중요한 것 영광의 무게, 영광의 찬란한 것과 비교하면 우리가 받는 이 환란을 경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 정도의 수준이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여러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하면 기도하면 물질도 주세요. 필요한 그러면 우리에게 필요하면 뭐 장수도 주세요. 필요하면 우리에게 복도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함부로 안 주는 거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하나님은 함부로 우리가 우리에게 안 주시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고난 가운데서도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 말씀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주목하고 관심을 갖고 이 영광에 대해서 눈이 열리기를 원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영광을 체험하면요. 세상 사람들과 좀 달라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영광을 체험하면 남들이 볼 적 미쳤구나, 남들이 볼 때 저거 돌았구나, 그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거예요. 바울을 보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사람한테 니가 미쳤도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목도하니까 바울은 뭐예요? ‘나는 죄인의 괴수라’ 고 바울이 무슨 죄인의 괴수예요.
 
바울은 진짜 똑똑한 사람이고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고 아무도 바울을 뭐라고 할 도덕적 흠을 잡을 만한 사람이 없어 그런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 눈이 열리니까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심지어 예수님 보고도 사람들이 미처 도다 그랬어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주님과 나만이 아는 은밀한 감탄사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영광의 눈이 열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물론 포도전에 사건을 가지고, 저는 이 하나님 영광의 눈이 열리고 난 다음에 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반응하는 평생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걸 통하여 품격 있고 주님이 주시는 신실함과 높은 은혜의 수준의 고봉에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시고,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보옵나니 찬란한 영광 그 영광 내 것일세 장례식에만 부를 게 아니고,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영광일세, 영광일세, 그 찬양 통하여 여러분과 제가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적인 것, 사도교적인 것, 에세네적인 것, 다 처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실한 일꾼으로 물 떠온 하인처럼 영안의 눈이 열리는 주의 종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인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이 고통 많고 우수사려, 간난신고의 이 시대 가운데서도 찬란한 하나님 영광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도 고난이 아닌 것입니다. 환란에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한 것을 비유하면서 비교하면서, 맹물 같은 인생이 성령의 폭발력 있는 포도주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겁니다.
 
♣요약

질그릇 같은 내 마음이 율법주의 세속주의 금욕주의가 옥죄이는 지옥이 될 때, 하나님의 영광에 반응하는 강력한 믿음으로 천국을 건설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게 맡겨주신 항아리에 물을 떠다 드리는 순종을 올려 드릴 때, 가면 갈수록 더 향기롭고 풍요로운 하나님의 최선을 누리게 됨을 확신해야 한다. 사랑의 교회와 사랑글로벌아카데미(SaGA)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눈이 열릴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변화하는 영광스러운 가을 사역이 되기를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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