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4월 28일)

제목: "빈 그물도 기적입니다"
말씀: 누가복음 5:1-11
설교자: 이한길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날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개네 사네 호숫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본문에 나오는 개네 사네는 필요한 명칭은 갈릴리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이름은 구약 시대의 호수가 마치 피파처럼 생겼다고 히브리어로 비파라는 단어 김 네레 라고 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 시대의 당시의 음력을 따서 개네 사례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외서 갈릴리라고 부른다. 마태 마가는 이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했고, 요한은 디베랴 바다라고 했으며, 누가는 개네 사례 호수라고 불렀다. 오늘은 혼용해서 부르겠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두 배 중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면서 배를 해안에서 조금 띄우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지형적으로 배가 조금 떨어져 호수를 등지고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기 때문디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강단삼아 앉으셔서 무리들을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일부러 예수님을 피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물만 찢고 있다. 베드로는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집에 찾아 오셔서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님을 고쳐주셨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으니 가장 앞서 예수님의 자리를 마련하고 또 맨 앞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배를 타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빈 그물만 씻고 있다. 왜 그랬을까? 베드로의 지금 형편은 몸도 마음도 지쳐서 피곤하다. 낙심이다. 아무것도 없다. Nothing이다. 베드로의 상태는 빈 그물이다. 베드로는 어젯밤 어부들과 함께 게네 사례 호숫가에서 밤새 수고를 하여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씻어야 하는 빈 그물만 가득 채우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부들은 상업이기에 고기를 많이 잡아야 한다. 베드로는 만선(滿船)으로 돌아와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데 빈 그물뿐이다. 강원도에 가보면, 주문진항 거진항 등 항구들이 많이 있다. 그 항구들을 보면 밤새 잡은 고기를 잡은 배들이 부두로 들어와 경매장에 고l를 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팔짝팔짝 뛰는 고기들을 보노라면 생동감이 있다. 많은 고기들을 내려놓는 어부들도 신이 나고 고기들을 사고파는 사람들도 흥에 겹다.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아야 신이 나고 좋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는 잡히지 않고 해초류와 쓰레기만 가득하다. 얼마나 힘이 빠지고 낙심이 되겠는가? 지금 베드로의 상황이 이렇다. 밤새 수고한 베드로의 배는 고기로 채워져야 하는데 고기는 없고 피곤과 한숨과 실망과 짜증만 가득히 싣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허탈한 심정으로 어부들과 빈 그물을 싣고 있다. 밤새 수고하여 노력했는데 빈 그물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고 계셨다. 그날 예수님의 관심은 많은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무대로 삼아 무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허탈하게 빈 그물을 싣고 있던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신다. 여러분이 베드로라면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목수 베드로는 어부이다.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은 갈릴리 바다 게네 사례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전문가이다. 어떤 시간 어느 지점에 고기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고기를 어떻게 해야 잘 잡을 수 있는지 노하우와 기술이 있는 대단한 어부였다. 적어도 고기 잡는 일이라면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전문 지식과 숙달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 입장에서는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의 명령은 고기 잡는 기본 상식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려면 그물을 씻기 전에 내리라고 하시지 빈 그물을 다 씻어놓고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그물을 다시 내리라고 하신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썩 내키지 않는 변명을 먼저 하기 시작한다.


5절을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시몬이 말했다. 주님, 우리가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지만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상황종료이며 게임 끝이라고 베드로는 이 말을 하면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베드로의 답변이 참 멋있다. 베드로는 순종의 결단을 한다. 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한다. 훗날 베드로가 인생을 돌아볼 때 이 고백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아마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띄웠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들이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 베드로는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한다. 고기를 잡아 두 개의 배에 가득 채웠고 너무 많아 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두 배가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나를 떠나주십시오”라고 그렇게 간청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베드로는 그토록 바라던 고기도, 만선이 된 배도, 모든 경험도, 물질도, 가장 귀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며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기가 막힌 계획을 하셨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어떻게 하시는가? 베드로에게 빈 그물을 주셨다. 갈릴리 바다는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두고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986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기잡이배가 발견되었다. 길이는 8.1미터, 폭 2.3미터, 돛을 포함한 4.1미터에 크기로 어부들이 다섯 명이 승선하고 많은 사람들이 탈 때는 열다섯 명까지 탈 수 있는 그런 배였다. 베드로와 친구들은 이런 배를 타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고기가 많은 갈릴리 바다, 최고의 배, 최고의 기술, 최고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기적인가? 고기를 잡지 않는 것이 기적인가? 고기 잡히는 것인가? 그렇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이 더 기적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아온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기적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자연 만물을 움직이셔서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셨다. 아마 정신 못 차린 물고기가 베드로의 그물 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하나님이 호통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맡기시기 위하여 빈 그물을 베드로에게 만들어 주셔야 했기 때문이다. 빈 그물을 베드로를 향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을 기억하고 있는가? 요셉은 라엘이 넣은 야곱이 낳은 열한 번째 아들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래서인지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던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 요셉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왕자처럼 살았는데 약 17세 정도의 나이, 가장 민감할 때, 노예로 그의 삶이 바뀐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십년 정도의 노예로 살면서 가정총리로까지 오른다. 그런데 미스에스 보디발의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서 바로왕의 술 맡은 자들과 떡 맡은 자들을 만나게 되고 그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어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열일곱 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와 십년의 종살이 3년의 감옥살이였다. 노예생활, 감옥 생활, 요셉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무 소망이 없는 빈 그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이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고, 라고 말씀하신다. 노예인데 무슨 형통인가! 감옥 생활인데 무슨 형통인가! 요셉은 지금 빈 그물이다. 아니 더 이상 무엇을 잡을 수 없는 찢어진 빈 그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그의 가정과 민족을 살리시기 위하여 일하셨다. 종으로 있을 때는 몰랐다. 감옥에 있을 때도 몰랐다. 그러나 요셉의 빈 그물을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그를 불러 내셨다. 요셉의 빈 그물은 요셉을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성도여러분, 때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빈 그물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한 기적이다. 아멘,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가득차고 언제나 잘되고 언제나 만사형통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세우심의 역사 뒤편에는 빈 그물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한다고 죽도록 노력하는데 그렇게 안 될 때가 있다. 안 되도 그렇게 안 된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는데 기적같이 빈 그물만 남는다. 왜 그럴까? 빈 그물 뒤에 가득하게 채워주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다. 그러므로 빈 그물 뒤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기적을 베풀어 주실 지를 기대하기 바란다. 고기를 많이 잡은 것도 기적이지만, 밤새도록 그물질하여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더 큰 기적임을 믿어야 한다. 나를 향한 빈 그물이 있었기에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찬 그물이 더 큰 은혜로 다가온다.

 

둘째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는가?
고기를 배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주셨다. 그런데 전제가 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이다. 베드로는 이른 새벽 피곤한 상실감, 낙심함으로 빈 그물을 싣고 있다. 베드로는 이미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피하는 듯 하였지만 빈 그물을 씻고 있으면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나를 들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그물이 오히려 그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더 열렸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아마 베드로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부로서 경험과 자존심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자존심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베드로의 생각과 경험에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명령이지만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한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니 두 배에 가득차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실제가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믿음으로 승전할 때,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6절에 보면,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 하나님이 갈릴리의 고기를 모아서 그 그물 안에 다 모아주셨다. 아마 갈릴리에 고기들이 정신없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베드로의 그물을 피해 다녔는데 이른 아침에는 베드로의 그물에 모두 다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경험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방법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에 기적을 준비하신다. 우리의 순종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고 계신다.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일하고 계신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의 제자 중에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안타까운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 나의 남편이 죽었는데 채주가 와서 빚을 갚지 않으면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마음이 안타까워 여인에게 묻는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다. 여인의 한 병의 기름만 있다고 한다. 모든 이웃들에게 가서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한다. 여인은 할 수 있는 대로 빈 그릇을 빌려온다. 엘리사는 여인과 두 아들에게 방에 들어가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한다. 여인과 두 아들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병에 기름을 붓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기름이 흘러나왔다. 빈 그릇이 하나 둘 셋 넷 ... 계속해서 빈 그릇이 찼다.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차자 기름이 흘러나오는 것이 그쳤다. 엘리사 제자의 아내의 형편은 빈 그물이다. 종으로 팔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 가운데 엘리사의 제안은 말도 안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여인과 아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기름을 붓기 시작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기름을 부으니 하나님이 가득가득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어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면 된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빈 그릇을 빌려오면 된다. 그 다음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빈 그릇에 기름이 넘치도록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이다. 기적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시다. 자신의 한계에 매여 있으면 빈 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신다. 빈 그릇에 채워질까 의심하면 계속 빈 그릇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빈 그릇을 채워 넘치게 하실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 내 자존심,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우리의 지식으로 다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은 이해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이다. 그래서 말씀이라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그때에 하나님의 기적을 베드로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말씀을 현실에서 경험하는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빈 그물의 기적을 주셨고, 말씀에 순종하는 채움의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이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어떻게 되었는가?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다. 그런데 빈 그물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그런데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력으로 옛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예수님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래서 깨지고 낮아지고 부서진다. 예수님 없으면 우리의 인생은 빈 그물이다. 그런데 빈 그물을 인생을 우리 주님이 다시 찾아오신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어느 날 갈릴리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신다.
그날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빈 그물이다. 허탄하게 해안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그물을 씻기 전에 그물을 베드로는 내린다. 그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불을 피워주셨고 숯불고기를 해주셨다. 예수님을 다 만난 베드로가 어땠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식사를 하면서 아마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이 되었을 것이다.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해 놓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기도 했다. 이런 베드로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저 같으면, “베드로야, 네가 인간이냐? 너 같은 것을 믿고 3년이나 훈련시켜 놓은 것이 후회스럽다. 이제 끝이다.”라고 아마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따뜻하게 식사를 준비해 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질문을 하실까를 예상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생각한 전혀 다른 예상 질문을 하신다. 그런 질문을 생각도 못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또 질문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트라우마가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계속 질문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 이상 더 귀한 거시 있다. 상처 나고 깨어진 베드로, 빈 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뜨거은 사랑고백이시다. 베드로가 빵점이라는 것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저주(咀呪)하고 부인한 것도 너무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베드로의 연약함, 베드로와 실수와 허물, 베드로의 빈 그물을 모두 덮어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상처투성이로 빈 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치유(治癒)와 회복(回復)을 허락하여 주셨다. 그리고 다시 사명(使命)을 맡기셨다.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모습이 어찌하다할지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요한 일서 4장 19절을 보자.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 우리가 빵점이고 마이너스 백점이라는 것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사랑하고 용납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고 용납하시고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셨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회복이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빈 그물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에 에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모든 어려움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친히 찾아오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베드로를 위해 이미 기적을 이루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옛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손 내밀어 주셨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여전히 기적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도 낙심과 상처로 절망의 빈 그물을 싣고 있을 때가 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주님께서 절망과 실패의 빈 그물을 싣고 있는 우리에게도 친히 다시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품으셔서 주의 일들을 맡기신다. 그러므로 낙심과 절망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형편이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예수님은 기적이 일상이시다.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의 실제가 되어 지는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사랑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감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기쁨,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가 주인이 되어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밤새 수고 하지만 하나님의 참 사랑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빈 그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다시 부르시고 따스하게 안아주시는 주님을 이제 의지하여 어리석게 살아가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말씀을 순종하여 말씀이 현실이 되고, 날마다 은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경험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방법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에 기적을 준비하심을 믿고, 우리의 순종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고 계시니,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심을 믿어야 한다. 빈 그릇에 채워질까 의심하면 계속 빈 그릇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빈 그릇을 채워 넘치게 하실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삶이어야 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내용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허탕만 치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다. 인생은 이처럼 자신 있는 분야에서조차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가장 귀하고 값진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얄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삶의 심오한 차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물고기가 배에 가득히 차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만난 죄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베드로의 반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사건들은 초점을 예수의 구속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하셨고, 절망의 인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으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반응형
반응형


주일예배(주후2021년 4월25일)-1부 예배
제목: ''그대는 숨질 때 되도록 부를 찬송이 있는가?''
말씀: 창세기 28:10~22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기도: 강대인 부목사님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
--------------------------------------------

(창세기 28:10~22절)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
20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요즘 청년들의 고민을 듣다보면, 보통일이 아니다. 취업을 해도 언제 구조조정의 불안감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생들이 많아졌다. 최종시험 합격자는 2퍼센트인데, 나머지 98퍼센트는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한다. 요새 젊은 청년들의 마음 고심이 참으로 심하다. 청년들이 목사님을 찾아와서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도 알바자리도 짤렸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질문한다고 한다. 작년에 젊은이들을 조사에 의하면 결혼을 반드시 할 필요가 없다고 61퍼센트라고 한다. 아이를 갖을 필요가 없다고 60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결혼과 출산이 극감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청년만이 아니다. 질병으로, 직장으로, 가족의 우환으로, 자녀들의 대학입시로, 앞길이 막막하다고 슬퍼하는 장년들도 많다. 불경기에 코로나 사태가 겹치면서 수입이 시원치 않고, 아이들은 크는데 집 장만할 가능성을 사라졌고, 투자해서 떼돈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이럴 때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해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돌을 베고 잤던 야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야곱이 지팡이 하나로 요단을 건너 외삼촌 집으로 가다가, 20년 동안 종노릇했던 야곱의 파란만장의 삶은 우리에게 위로와 도전을 준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부유했는데, 왜 야곱이 빈손으로 갔는지 이해가 안 된다. 창세기 29장 13절에도 라반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나온다.

 

*창세기 29:13
13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외삼촌 라반은 딸 두 명을 팔고 조카인 야곱에게 팔고,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했던 이기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이렇게 이기적인 라반이 안고, 입 맞추며, 환대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라반은 조카가 재물을 많이 가지고 왔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라반은 야곱을 할 말만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형을 피해 도망을 가야하니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떠났던 것이다. 피신하는 야곱의 모습은 때론 아무것도 없이 세상 들판에 내 던져진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일부 해석 가들은 형과 아버지를 속였기에 이런 고생을 한다고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이 도피하게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태에서부터 싸웠지만 출생에서 패배로 형의 장자 권을 끝내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곱이 물리적으로 강제적으로 빼앗은 것은 아니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 권을 팔았으며, 아버지를 속인 것도 어머니가 그런 것이다. 야곱이 부친을 속인 것도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저주를 받겠다고 했다. 야곱을 축복했기 때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에서를 달랬다. 어쩌면 에서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해서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자, 차라리 잘 된 것이라 이삭이 생각한 느낌마저 든다. 어찌되었던 외삼촌 라반의 딸을 아래로 선택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민족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아브라함에게 준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리라고 축복하셔서 보냈다. 도망자 신세가 된 야곱에게 이 축복이 어떻게 들렸을까? 도망자 신세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아버지 약속처럼, 나의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약속의 상속자라면, 왜 약속의 땅에서 도피를 해야 할까? 이국땅에서 과연 아내를 만날 수 있을까?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를 염려하게 되었을 것이다. 도피 길에 오른 야곱의 발걸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다음날 야곱의 발걸음은 현저히 가벼웠다.

 

창세기 29:1,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
야곱이 그의 발을 들었다는 것은 발걸음이 가볍게 앞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야곱이 발을 들어 유랑 길에 가벼운 것은 초월적인 궁극적의 힘의 비결이 등장한다. 따라서 이 주일에 우리의 남은 생애에 초월적인 힘의 비결을 발견하는 신앙이 되길 소원한다.

비결은 성경기자는 어쩌다 맞닥뜨리는 것이다. 갑자기 해가 지면서 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야곱은 그곳에 돌을 가져다가 베개를 삼았다고 한다. 머리맡에 두었다는 것이며, 잠을 잘 때 머리맡에 보호도구이다.

한번이라도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 보았는가? 성경기자는 감정이입을 통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모습을 원한 것 같다. 형의 장자 권을 차지하고 눈먼 아버지를 속였지만, 실제론 칠 흙 같은 어두움에서 돌을 베고 잠을 자는 도망자 야곱을 상상해 보라. 야곱의 돌베개를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진다. 고1때, 산에 무허가 집이 헐리게 되어 신월동에 이주한 기억이 있다. 그때, 이사를 간 것이다. 강제 이주였다. 천막으로 간 것이다. 공동 화장실만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그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살던 집에서 가져온 몇 개의 가재도구와 커다란 돌 몇 개가 눈에 띄었다. 가져올 게 없어 돌을 가져왔냐고 화를 냈다. 속이 들면서 이해를 했다. 그 이후 야곱의 마음을 조금 도 이해도 하게 되었다. 돌베개를 자고 난 야곱이 꿈을 꾸었다. 도망자의 꿈이 아닌 황홀한 꿈이었다.

 

12절에 보면,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사닥다리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 위에 여호와께서 계셨다. 야곱 곁에 여호와께서 서 계셨다. 야곱 곁에 서 계신다. 여호와는 사닥다리이다.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과 연결된 것을 알지 못한다. 하늘과 땅이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닥다리를 타고 내려오셔서 자신의 옆에 서 계심을 생생하게 서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는 전부인가? 내가 가진 학벌, 재산, 지위, 권력, 인간관계로 이게 내가 가진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인 우리는 야곱의 사닥다리와 비교도 안 되는 놀라운 꿈을 보았다. 예수님께서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의 필요를 날마다 천사들을 보내 공급해 주시고 계신다.

친히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것을 믿는 순간 우리도 야곱의 꿈보다 더 큰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14절을 보면,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 약속을 주신 곳이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반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약속을 주신 곳이 다 벧엘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간과 공간의 축을 따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의 약속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을 거쳐 아들 야곱에게로 영원히 흘러 내려오며, 사망과 구속사를 써내려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멀티미디어로 인해 정신을 팔고 있기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과 손자에게로 증손자까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을 공유하며 함께 써 내려가는 구속사를 알 길이 없다. 44년간 4대가 모여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가는 성전이 여기가 아닌가?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대대로 이어가며, 놀라운 구속사의 역사를 써 내려 가야 한다.


15절에,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겠다는 3가지 약속이 있다.
첫째 –어디로 가든지-보고의 약속.
둘째 - 너를 이끌어 이 땅에 돌아오게 한다. - 무사구환의 약속.
셋째 – 내가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한다. - 무한 도중의 약속

상식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도망자 야곱에게 축복의 약속을 부어주시는 장면을 이해할 수 없다. 에서를 위로하셔야지 왜 야곱의 편에 서 계시는지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은혜로만 축복을 받는 것이다. 야곱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아무것도 없었다. 야곱은 축복 받을 만한 게 없지만 그러나 야곱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눈물 난 아름다운 꿈을 주신다. 왜 야곱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는가? 이미 태중에 야곱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서와 야곱이 이미 여호와께서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만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여호와께서는 사랑을 야곱에게 베푸시고 이런 사랑을 근거로 야곱에게 온전한 사랑을 요구하신다. 무조건 사랑이 온전한 사랑으로 바뀐다. 이를 근거로 거룩한 복음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야곱이 경험한 후에 잠에서 깨어나서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이 야곱이 온전하게 변화되는 모습이다.

 

16절 이하를 보면,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야곱이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자기가 누웠던 곳에 옆에 함께 서 계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야곱은 자기의 죄를 깊게 느꼈기에 자신이 누운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시리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야곱이 하나님을 생각하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을 때, 누구도 에서를 탓하지 않았다. 어머니 리브가는 내가 저주를 받겠다고 한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축복을 하신다. 이 야곱은 온전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에게 복음이다. 우리의 약점으로 오히려 위로와 격려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퍼하고 낙망하고 주저하고 있다면, 그러나 그곳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난다면, 좌절과 쓰러져 있다면, 사닥다리로 내려오신 우리의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하늘의 위로이다. 진정한 사닥다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깊이 깨닫는다면 이곳이 벧엘이다. 우리를 구원해 주실 사닥다리를 통해 야곱은 돌을 기둥으로 삼아 예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자신을 더 가까이 나아가며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20절이하
21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렇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로 기도문을 세우는 자되고 예배하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마음이라면,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해야 한다. 야곱이 움켜지는 것에서 주는 자로 바뀐다. 도망자 야곱에게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야곱은 이제 기꺼이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자로 바뀐다. 우리도 주님 앞에 서원했다면 약속을 지켜가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이다.

 

♣요약
성도의 온전함을 위하여 우리는 숨질 때 되도록 부를 수 있는 찬송이 필요하다.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대대로 이어가야 하며, 놀라운 구속사의 역사를 써 내려 가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의 노력과 공로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은혜로만 축복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과 자신을 더 가까이 나아가며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 야곱처럼 우리도 주님 앞으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 숨질 때 되도록 하나님을 찬양 해야 한다.


 

 

 

 

반응형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4월 24일) - (새벽 6시20분)
제목: “다시 웃다”
말씀: 창세기 18:10-15
기도: 박창준 안수집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권호 협동목사님.
-----------------------------------------------
암송 확인: 오정현 담임 목사님.

 

창세기 18:10-15,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토비새-권호 목사님.

-이 귀한 자리에 말씀을 전할 수 있음에 우리 오정현 목사님과 당회 그리고 성도님들께 감사드린다. 오늘 우리에게 크신 은혜 주시길 축복한다. 오늘 본문에 사라가 어떠한가요? 사라는 웃고 있다. 소리내서 대놓고 웃는 것이 아닌 속웃음이다. 그런데 아주 묘한 느낌을 준다. 왜 사라의 웃음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가? 내년 이맘때, 아들이 있겠다고 천사가 와서 사라에게 1년 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려 24년 동안 기다렸던 아들의 출생 소식이다. 사라는 이 놀라운 소식을 천사들과 아브라함의 뒤 즉 장막 문에서 듣고 있었다.

 

*창 18:9-10절에 보면,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문제는 사라가 이 축복의 소식을 차가운 웃음으로 반응한다.

12절에,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전하신다. 그런 사라는 속으로 웃고 있다. 이런 사라의 모습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사라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러분, 익숙한 모습이지만 사라를 너무 쉽게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사라가 이런 차가운 미소를 지었던 이유가 있었다. 먼저 사라는 오랜 기다림이 마음이 지쳐있다.

 

24년 동안 아들을 기다렸다. 약속을 믿고 24년이나 기다렸다. 이렇게 누가 좋은 것을 준다고 해서 오랜 세월을 기다려 본적이 있는가? 5년, 10년, 15년, 계속되는 기다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어도 그래도 너무 기다리다 보면 마음이 지친다. 한 때 지금도 쓰이고 있지만 아주 유용했던 말이 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다. 취업할 수 있어, 결혼할 수 있어, 내집 마련할 수 있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이렇게 믿고 한정없이 기다리다가 어떤 수간 지치고, 마음이 확 깨지고 만다. 그저 더 큰 절망을 맛본다. 사라가 어쩌면 사라가 이런 희망 고문을 받은 심정은 아닌가 생각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 계시는가? 또한 사라의 현재 몸 상태가 이 약속을 이룰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11절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가 많다. 75세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은 현재 99세이다.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10세 아래인 89세이다. 사라는 출산이 가능하다는 신체적인 표시인 생리가 이미 다 끊어진 상태이다. 여인으로서 출산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라는 12절에서 자신을 '노쇠했다'~라고 표현한다. 노쇠는 문자적으로 낡았다. 너덜너덜하게 옷이 해어졌다. 이런 뜻이다. wear out!~완전 낡아빠져서 해어진 것이다. 낡아서 해어 빠진 사라, 전혀 출산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의 몸 상태는 어떠한가?
아프고 나이가 드신 분들은 사라의 현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사라의 어려움이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지친 마음, 늙어서 직면한 육체적 한계,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외에 사라의 마음과 삶 속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의 경험도 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86세까지 10여년을 기다려도 도대체 임신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라는 자기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아브라함은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게 남자이다. 분위기 ㅎㅎㅎ~

당시 고대 관습이었지만, 여인으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하갈이 덜컥 임신하자 사라를 멸시(蔑視)하기 시작한다. 사라는 당시의 상황을 창세기 16장 5절에서 ‘모욕(侮辱)을 받았다.’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면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다. 지난 24년 동안 마음은 지쳐있고, 육체는 너덜너덜 시들어 있고, 상처는 깊은데, 이제 와서 1년 후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사라에게는 이상하게만 들기는 것이다. 마치 딱딱한 검은 아스팔트 위에 바짝 마른 씨를 쫙 뿌리고, 일년 뒤에 싹이 난다, 열매가 열린다, 라는 격이다. 그래서 사라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자포자기의 웃음, 불신의 웃음을 지었다. 지친 마음, 육체의 한계, 과거의 상처 때문에,,,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불신의 웃음을 짓고 계시는가? 이 시간 정직하게 그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라의 불신의 웃음, 그 얼굴이 우리의 웃음, 우리의 얼굴이 아닌가를 바라보기 바란다. ‘하나님!!, 안되거든요?? 제가요? 우리 가정이요? 아이구 우리 다락방이요? 안 되거든요?’ 여러분, 사라의 처지를 보면, 사라의 불신의 웃음이 이해가 된다. 큰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사라가 결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진짜 사라의 문제이다. 사라가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라는 하나님을 잊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를 잊지 않으셨다.

 

*창세기 15장 17절을 보면,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찾아오셔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그러기 때문에 남편을 통해 사라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으로 사라를 직접 찾아 오셨다. 본문 9절에서 천사는 아브라함이 아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녀의 이름이 사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천사는 그 이름을 이미 알고 사라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이름까지 알았던 천사가 몰라서 물었을 것은 아니다. 방문의 목적이 사라에게 약속을 주려는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여자라는 신분 때문에 장막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대화를 통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라가 분명하게 깨닫고 들을 수 있도록 직접 축복의 약속을 전해 주러 온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사라야, 이제 내가 너를 찾아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라는 찾아오시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왜? 자신의 한계, 깨진 마음, 시든 육체, 과거의 상처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가운 웃음을 쏟아낸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라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사라에게 찾아오신다. 찾아오셔서 이루어주시는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신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13절에서 지금까지 이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자신의 존재가 여호와임을 드러내신다. 드디어 천사의 모습에서 여호와의 모습으로 드러내시는 것이다.

 

*창 18:13,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천사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여호와이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사라가 잊고 있는 사실,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질문을 통해 강조하신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약속 앞에 내 깨진 마음 때문에, 이 육체적 한계 때문에, 과거의 상처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된 웃음을 지었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불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사실 목회자들도 많이 한다.

 

※어렸을 때,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보살이셨고, 아버님은 장손이시고, 저만 예수님을 믿었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갈 때, 정말 뜨겁게 주님을 만났다. 그 때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다. 어떤 꿈이냐면, ‘내가 너의 모든 삶을 헌신해서 너처럼 방황하는 청소년, 젊은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라.’라는 말씀의 종이 되라는 꿈을 주셨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대학 다닐 때 학비가 없었다. 새벽기도회에 기도를 하면 알겠지만, 하나님은 처음에는 잘 주시는 것 같아도 잘 안주신다. 한 학기 때 마다 꼭 간절히 기도하면, 학기 시작하기 이주 전에 주시고, 정말 간절히 기도하면 한 주 전에 주신다. 그렇게 8번을 가야되는데, 그렇게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한 번은 아무리 금식을 해도 안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학교에서 경고장을 준다. 언제까지 마지막으로 내지 않으면 이번 학기는 무효라고 해서 마음이 슬펐다. 이제 가을 명절인데, 아버지를 도우려고 갔다. 아버지가 그때에 과일 장사를 하셨다. 공항동에서 과일 장사를 하시는데, 그때에 가판을 피고 사과를 팔려고 준 비했다. 공부가 너무 좋은데, 시간이 없으나 아버지를 도와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를 더해서 유학도 가고 정말 공부를 해서 필요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지속적으로 열심히 했다. 공항동이니까, 비행기가 확 높이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한 번은 사과를 다 팔려면 사과를 잘 닦아야 한다. 그러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멋지게 와서 사과의 값을 묻는다. 만원에 8개라고 했더니 한 개 더 달라고 했다. 두 개 더 주었다. 사과 위에 영어책을 보더니 학생이냐고 묻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가버렸다. 그 때에 비행기가 또 확 올라가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원망했다. 꿈이나 주시지 말지라고 비웃었다.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싸늘한 웃음으로 이 사라의 모습이 어쩌면, 믿음 없는 저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렇게 사라는 웃음을 짓는데, 하나님은 이런 사라를 잊지 않으시고 찾아오신다. 그리고 본문에서 약속을 이루어가라는 그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결국 사라는 현실과 부족한 자신을 쳐다보면서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서 떨며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라의 대화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쉽다.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갑작스럽게 마무리되는 것 같다. 본문에서 뭔가 냉한 기분까지 느껴진다. 이게 다 사라의 잘못된 웃음 때문인 것 같다. 이제 사라는 어떻게 되는가? 사라의 자포자기, 불신의 웃음으로 한 해가 지났다. 정확히 1년 ‘뒤에 사건이 창세기 1장에 나온다. 창세기 21장에서 신기하게 사라는 다시 웃고 있다. 제목이 ‘다시 웃다’이다. 사라가 다시 웃는다. 그런데 이번 웃음은 18장에 싸늘한 웃음과 다른 느낌을 준다. 사라는 이상하게 환하게 웃고 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다. 차가운 웃음이 아니다. 따뜻한 웃음이다. 더 이상 속웃음이 아닌 모두가 웃는 웃음이며, 함께 웃는 웃음이다. 계속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도 ‘웃는다’는 뜻인 ‘이삭’이다. 이삭이라고 짓는다.

 

*창세기 21:1-2, 6절,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아래 6절을 보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실 사라가 환한 웃음, 단번에 웃음을 웃는 것은 단순이 아들을 25년을 기다려서 낳은 아들 때문이 아닌 큰 기쁨의 이유, 진짜 이루어주신 하나님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말씀을 이루어주셨다. 1,2절은 이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렇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라가 웃고, 아브라함이 웃고, 듣는 사람이 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웃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웃음이다. 생각해보면 창 18장에 나타난 사라의 첫 웃음은 사라가 스스로 웃었다. 사라가 웃었다이다. 그러나 창세기 21장 6절에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웃음이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만드신 것이다. 진짜 기쁨의 웃음은, 진짜 축복의 웃음은, 내가 스스로 웃는게 아니다. 웃는 척 하는 것은 더 아니다. 진짜 축복의 웃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고, 약속을 이루어 주시므로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웃음임을 믿는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웃음이 진짜 웃음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다. 이들이 세상을 살면서 많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 스스로 웃는 척을 하게 된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도 기도하면, 새벽기도를 하면, 그 모습대로 그 차가운 현실을 기도하면,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그러면서 말씀을 영혼을 깨우려면 이 어려운 현실을 말씀으로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이 훈련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아이들이 함께 갈 길이다. 사라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하나님은 찾아오실 것이다. 그 약속을 주시기에 붙들고 아멘 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냉소했던 사라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다. 찾아오셨다.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 사라가 진짜 웃게 하셨다.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믿는다. 우리와 함께 계신다. 지금 힘들어도 그러나 인생은 결정적으로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하는 자이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환한 웃음을 바란다면, 지금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내 마음의 찌꺼기를 내려놓고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한다. 뜨거운 감사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내시는 환한 웃음이 우리에게 필 것을 믿는다.

 

♣요약
믿지 않는 가정의 자녀가, 스스로 기도하는 청년이, 기도하는 것은 외롭다. 부모가 기도해 주시는 자는 행복한 것이다. 자녀가 방황하고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비웃음이 얼굴에 있더라도 기도하는 부모가 있다면 자녀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진짜 믿음이 있기를 이 자리에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우리의 부모가 새벽에 눈물로 기도했듯이 믿음의 4대가 함께 기도하여 돌아오는 기적이 있기를 원한다. 모든 기도가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되어 온 땅을 적시는 은혜의 시간이 되고 삶이 되고, 우리 민족, 우리 자녀가 주님을 깨닫기를 기도해야 한다. 사라의 웃음처럼 다시 웃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 되고, 주님으로 웃는 자 되고, 주시는 참 만족을 주시는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녀가 아들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반복되고 확증되었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인 섭리에 의해서 받는 그러한 축복도 믿는 자들은 약속에 의해서 받게 되며 이 약속이 그 축복을 매우 기쁜 것으로 만들고 확실하게 보증한다.
2)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은 약속에 의해 그들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모든 것을 소유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벧전 1:23).

-사라는 이 소식이 너무나 기쁜 것이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직까지 그것을 마음으로 믿지 못하였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12절). 이 웃음은 의심과 불신의 웃음이었고 사라가 극복할 수 없었던 중요한 반대 이유는 그녀의 나이였다. '나는 노쇠하였으므로 당연히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인간의 불가능성은 종종 하나님의 약속과 대치가 된다. 제2원인들, 곧 자연적인 순리로 불가능할 때 제1원인만을 의지하고 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의 무례한 불신의 표현을 책망하였다(13,14절). 하나님은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을 통해 사라에게 이 책망을 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라가 왜 웃느냐?' 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불신앙과 불신은 하늘의 하나님께 커다란 죄가 된다. 누가복음 1:18에서와 같이 지각을 내세워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를 제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 사라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애썼다(15절).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녀는 '두려워서'이렇게 거짓말을 하였다. 이때 사라는 자신의 불신을 철회하는 듯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모든 상황을 살펴볼 때 그 약속이 자신에 관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깨닫고서 그것을 의심하는 모든 불신의 생각들을 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라는 자신의 죄를 거짓말로 감추려는 죄악적인 시도를 하였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더 큰 수치이다.


 

 

                                                             ★찬양- 이상은, 피아노-변혜린 자매 ★

 

 

                                                                ★ 말씀읽기-강다은, 한혜성 학생 ★

 


                                                                 

반응형
반응형

[르포]年20만톤 CO2 잡는 화학공장…롯데케미칼 ‘ESG’ 첨병 나선다

이데일리 원문 l 입력 2021.04.21 17:00 | 더보여zu

 

롯데케미칼 여수 NC1공장에 CCU 실증설비 도입
기체분리막 통해 배가스내 CO2 포집·활용 골자
中企와 협업 추진, 국내 화학업계 중 최초 시도
탄소배출권 등 환경 급변, 롯켐 친환경에 ‘액셀’

[여수(전남)=이데일리 김정유 기자] 롯데케미칼(011170) 여수공장의 ‘심장’으로 불리는 납사분해(NC) 1공장. ‘석유화학의 쌀’ 에틸렌을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설비인 NC공장 한 가운데에 높이 2m, 길이 2~3m 규모의 ‘독특한’ 컨테이너 박스들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외관만 봐도 어떤 역할을 할지 가늠키 어려운 이 컨테이너 박스는 최근 롯데케미칼이 방점을 두고 있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상징이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 집결된 16개의 기체분리막 모듈들이 화학 원료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CO2)를 포집해준다. 롯데케미칼이 지난달 야심차게 도입한 실증설비다.

이상중 롯데케미칼 이노베이션센터 책임연구원이 여수 NC1공장에 설치된 기체분리막 설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진=롯데케미칼)


16개 기체분리막 모듈로 최대 95%까지 CO2 분리

21일 롯데케미칼 여수공장에서 만난 이상중 이노베이션센터 책임연구원은 “CO2 같은 기체들을 파이버(섬유)로 된 분리막으로 걸러내는 기술”이라며 “여수 NC공장 내에 기체분리막이 설치된 5개 컨테이너동을 설치해 전처리 및 분리막 공정을 거쳐 최대 95% 수준까지 CO2를 분리·포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케미칼이 실증 설비를 운영하고 있는 기체분리막 활용 탄소 포집·활용(CCU·Carbon Capture Utilization) 기술은 NC공장 굴뚝에 배관을 연결, 원료 생산 중에 나오는 배가스를 수집하고 먼지, 황산화물(SOx), 질소산화물(NOx), 수분 등을 없애 CO2를 포집하는 것이 골자다. 배가스 내 먼지, 황산화물 등을 처리하는 전처리 공정과 전처리를 거친 배가스에서 CO2를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분리막 공정으로 나뉜다. 그간 국내 타 업종에서 기체분리막 활용 CCU 실증 작업을 진행한 적 있지만, 운송과 판매 등 사업성 부족으로 실제 상업화까지 이어지진 못했다.

롯데케미칼 CCU 실증 설비는 컨테이너 내부에 장착된 총 16개 기체분리막 모듈이 핵심이다. 이날 확인한 기체분리막들은 4개씩 총 3단으로 설치돼 있었다. 1단에 설치된 분리막은 직경 6인치, 길이 60인치이며 2단은 직경 4인치, 길이 40인치 크기다. 내부에는 고분자 기체분리막 원천기술을 보유한 국내 강소기업 에어레인이 생산하는 폴리설폰 중공사막이 촘촘히 들어 있었다. 마치 가느다란 국수 가락 같은 섬유들이 뭉쳐 배가스내 CO2를 분리해주는 역할을 한다. 3단막과 더불어 나머지 4개 분리막 모듈은 따로 직렬 방식으로 설치돼 설비 효율을 높여준다.

이 책임연구원은 “향후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면 기체분리막의 크기도 직경 8인치 정도로 키워 효율성을 키울 계획”이라며 “현재 실증 설비로는 1시간에 300Nm3(온도 0도, 1기업 조건에서 1입방미터의 기체량)의 배가스를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CCU 제어동에선 실제 배가스내 CO2 농도 변화도 확인할 수 있었다. NC공장에서 방금 나온 배기가스내 CO2 농도는 11.6%였지만 전처리 및 분리막 공정을 거친 뒤 90.0%까지 확대됐다. 배기가스내 CO2 농도를 농축시킨 것으로 그만큼 CO2가 많이 분리됐다는 의미다. 현재 실증 설비를 통해선 연간 650t 규모의 CO2를 포집할 수 있다. 롯데케미칼은 오는 2023년까지 CCU 설비를 상용화한다는 계획이다.

상용화까지 여러 숙제가 남아 있다. CCU 공정 중 하나인 압축기(배가스 압력 최적화 공정)의 경우 전력이 많이 소용되는 만큼 이를 최대한 효율화 시켜야 한다. 또한 현재 6~10년 수준인 기체분리막 수명도 대폭 늘려야 하는 과제도 있다. 이 책임연구원은 “현재는 서울 이노베이션센터(연구소)에서 CCU 실증 설비를 원격 제어하며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2023년 상용화 시엔 연간 20만t 규모의 CO2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CCU 실증설비 제어실(왼쪽)과 전처리, 분리실증설비(오른쪽). (사진=롯데케미칼)


급변하는 환경 트렌드…롯데케미칼 친환경 사업 드라이브


롯데케미칼이 이처럼 도전적으로 CCU 실증 설비를 도입한 것은 최근 급변하고 있는 환경 문제 때문이다. 국내 유화업계는 원료 생산과정에서 나오는 CO2 처리를 위해 신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을 늘리고 추가로 탄소배출권을 구매하고 있다. 업체들이 탄소배출권을 구매하는 연간 비용도 최소 수십억원에서 최대 수백억원에 이르며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유화업계를 강타하고 있는 ESG 경영 트렌드 확대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유화업체들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낙인을 벗어나고자 생산 현장에서도 친환경 공정을 적극 개발하거나 도입하고 있는 상황이다.

롯데케미칼은 이 같은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생산 현장에서의 ESG 경영 강화에 나섰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2월 오는 2030년까지 친환경 사업 매출 6조원 달성, 탄소중립성장 추진 등을 골자로 한 ‘그린 프로미스 2030’ 이니셔티브를 도입하며 친환경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이번 여수공장내 CCU 실증 설비 도입도 이의 일환이다. 더불어 국내 강소기업과 협업해 국산 기술력 확보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도 ESG 경영 강화의 한 부분이다.

박수성 롯데케미칼 생산본부장은 “현재 CCU 설비는 강소기업 에어레인과 협업해 원활히 실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최근 ESG 트렌드가 거센 만큼 생산 현장에서 환경 부문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들을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남상아 롯데케미칼 이노베이션센터 연구원이 실증 중인 기체분리막 미니 모듈을 들고 있다. (사진=롯데케미칼)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데일리 주요뉴스

해당 언론사로 연결됩니다. 이데일리 원문 l 입력 2021.04.21 17:00 

 

반응형
반응형


♣수요저녁예배(주후 2021년 4월 21일)

제목: "사랑의 나눔은  성도의 본질입니다"
말씀: 마태복음 22:34-40
설교자: 남동우 부목사님
--------------------------------------------


(마태복음 22:34-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장애인 주간
여러분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1월에 있었던 일이다. 사진을 보면, 어느 한 분이 서울역에 노숙자가 너무 추워서 지나가던 남성분이 노숙자에게 커피를 한 잔 사주고, 자신이 입고 있던 잠바와 장갑과 5만원의 돈을 이 노숙자에게 주고 있는 모습을 '백소아'라는 기자가 지나가다가 찍은 것 같다. 1월 19일의 모 일간지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장면을 보면서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정말 살만한 곳이라고 느껴졌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보았다. 개인적으로 혼자 생각하기에 우리 성도들도 동일하게 이 남성처럼 자신의 옷과 필요한 것을 전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되어 진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바로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을 사랑이시라”라는 말씀이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 안에 그 사랑을 심어주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읽어보자.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여기 나오는 소금은 짜게 되어있다. 그 본질이 변하여 그 맛을 잃으면 쓸모가 없고 밖에 버려진다는 말씀이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주의 나라와 또 이웃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셨다. 오늘 본문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마 22: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어느 율법사가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37절-40절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읏 사랑의 계명의 근본정신을 말씀하신다. 사실 그 당시 랍비들은 율법 조항에 613가지 조항을 만들어서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논쟁하는 모양이다. 그런 차원에서 질문을 하고 있지만, 또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오늘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때 이렇게 대답하신다.

 

37절에 보면,
*마태복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여기에 나오는 마음과 목숨의 뜻은 인간 전 존재에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전 삶을 드려야 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율법사는 가장 큰 계명 하나를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본문에 율법사에게 이웃사랑의 계명에 하나를 더 추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이웃사랑 계명이 하나님의 사랑 계명과 동일하다고 중요하다고 예수님은 답변하고 계신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둘째 계명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을 향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 되어져야 됨을 말씀해 주고 있다.

 

*마태복음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있는 말씀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망하지 말며 내 이웃 사랑을 내 자신 같이 하라 나는 요한이라.”
-우리가 하나님 사랑은 실천하는 것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아픔이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읽어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 일서 4장 20절-21절을 보면,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이 사랑이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신명기 15장 11절에,
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데에, 다 건강하고 부유한 자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이 땅은 늘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곤란하고 궁핍한 자에게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펴라고 말씀하신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주시는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음 받은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을 향해서 우리가 지고 있는 세상을 향해서 이웃을 향해서 손을 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또 예수님처럼 살아가도록 연약한 자, 도움이 필요한 자를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어렵고 힘든 이웃을 위해서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이 성도의 본질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역을 하면서 장애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어떻게 장애인들을 도와야 하느냐고, 섬기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사랑의교회가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사랑 실천을 위해서 25년 전부터 이 사랑브라더가 많은 지체를 통해 우리 교회가 사랑의 복지재단을 세워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명령 앞에서 수종될 수 있도록 지금까지 사역을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하고 있다. 복지재단은 영상을 통해서 알겠지만 크고 작은 기관이 14개 기관이 함께 모여서 예수를 믿든 믿지 않던 그들이 도움을 원하든 원하지 않던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모양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질 때에 어떤 분도 그 사랑을 싫어하거나 거절하신 분을 없었다.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교회가 이 재단을 통해서 다양한 사역으로 도움을 주니 대신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듯이 저희들에게 아무 조건이 없이 우리가 받은 이 사랑을 나누도록 요청하고 계신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 정말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이웃들이 있다는 것을 오늘 장애인 주간의 기념 수요찬양저녁예배를 드리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주위를 살펴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크게 뜨길 바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냐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다.

 

*마태복음 5장 44절에 보면,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정말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다. 나를 아프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나에게 힘들게 하는 원수까지 주님은 사랑하라고 하신다. 또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4장 1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세리들도 이렇게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좋아해주고 이해해 주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도 다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미워하고 세상의 사람도 그렇게 하지만 그런 사람 조차도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것처럼 우리 모두도 그 사랑을 베풀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다. 지금까지도 이웃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 왔지만, 더 많은 사랑을 가지고 품성이 이웃과 지역을 떠나서 열방까지 이 사랑을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돌보고 실천해야 할 대상들이 누구인지 성경은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에게 항상 강도 만난 이웃을 붙여주고 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이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다. 주님이 주시는 그 힘으로 감당해 가는 것이다.

 

*로마서 5:5절에 보면,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음 바 되어져 가지고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거하는 그 순간에 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대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성령이 내 마음에 거하시면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을 순종할 때에 하늘에서 이룬 사랑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역사(役事)가 믿음의 성도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누어지면 좋겠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의 착한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한다.

 

※제가 읽은 책 중에 ‘크레이크 힐’이란 분이 쓴 책이다. 내용 중에 ‘96%의 사람이 모르는 5가지의 성공비결’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여기 보면 96%의 사람은 한 항아리를 준비한다고 한다. 그런데 성공한 4%의 사람은 다섯 개의 항아리를 준비한다고 한다.  이 항아리에....-
첫 번째는 십일조,
두 번째는 구제헌금,
세 번째는 저축,
네 번째는 투자,
다섯 번째는 내가 쓰고 싶은 것을 그 항아리에 넣는다는 한다.

96%의 사람들은 한 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쓰고 싶은 것을 다 쓰고 남는 것을 가지고 십일조하고 구제하고 저축하고 투자하고 하니까 항상 돈이 부족하다고 한다. 우리가 많은 돈을 벌어 와도 부족한 것이다.

그런데 다섯 개의 이 항아리를 가진 사람은 언제나 먼저 다서 항아리에 물질을 채워넣는 것이다. 십일조, 구제, 저축, 투자, 쓰고 싶은 것을 채운다. 그러니 항상 돈이 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도 내 자신을 위해 다 사용하고 남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구제하면, 백날 가도 구제하고 섬길 수 없다. 그런데 이 ‘크레이크 힐’과 같은 이 항아리를 준비하면, 백날가도 섬길 수 있고, 계속해서 그 항아리에 채워져 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것을 실천하는 다섯 가지를 실천하면 좋겠다. 유대인들도 기본적으로 세 가지를 강조한다. 아이들에게 교육할 때에, 첫째 십일조, 두 번째 구제, 세 번째는 저축이다. 이것을 어릴 적부터 가르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밤에 오신 사랑하는 성도들도 많이 베풀고 섬기고 하는 일들을 많이 하겠지만, 다시 한 번 우리의 항아리를 준비해서 먼저 들어오는 물질이 있으면, 나에게 먼저 들어온 사랑이 있으면 십일조와 구제를 먼저하고 저축하고 투자를 하고 나머지를 쓰면 평생 우리 주님처럼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다. 서울역의 남성처럼, 더 나누고 더 사랑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평생에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주제가 ‘성도의 삶은 사랑을 나누는 것이 본질이다’라고 했다. 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바깥에 버려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했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주님이 주시는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지금까지도 잘해 왔지만 남은 시간도 평생 이 삶으로 살아가는 자 되길 간절하게 소망한다.

 

요약
장애인 주간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고 나누는 일들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며, 간증과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우리 성도 모두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십일조, 구제, 저축, 투자, 남은 것을 사용하는 자 되어야 한다. 늘 주님의 은혜 가운데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가장 큰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