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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3년 6월 11일)
제목: "죽음의 신비(神祕)"
말씀: 고린도후서 5: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김은석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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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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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찬양대와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사랑과 온유를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저희가 상암 집회를 한 지 한 주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 상암 집회를 앞에 놓고 저희 교회는 영적으로는 2년 또 실제적으로 1년을 준비해 왔는데 우리가 준비하면서 마음에 확정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번 상암 집회가 남북통일과 특별히 한국교회의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재 부흥의 결정적인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회 마치고 그냥 그걸로 끝나면 안 되고, 우리 교회부터 다시 한 번 재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겁니다.

재 부흥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의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 말씀에 부흥이 일어나면 되는 것이에요. 이제 지난주부터 성경 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꼭 이렇게 하죠. 기억나십니까? 금방 한 것도 잊어버렸어요. 그렇게 하는데 예배에 재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데 저는 지난 40여 년간 목회 생활을 통하여 내가 지금도 예배에 대한 감격과 은혜가 너무 크지만, 제가 정말 순전하고 순결하여 전력투구하며 예배드렸을 때, 나는 그때 어떤 자세였나, 그러면서 제가 한 10여 년 동안 예배를 시작하면서 항상 예배를 위해 드리는 말씀을 글을 따로 썼어요. 그래서 제가 글 쓴 처음 썼던 걸 제가 이번에 다시 한 번 보게 됐어요. 보면서 앞으로 1~2년 동안 우리 사랑의 교회가 온 성도들이 예배의 재 부흥을 위하여 좀 이렇게 정리를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떠세요? 좋습니다.!!! 설교하기 전에 한 1~2분간 꼭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핵심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 여러분 예배는요 예배드리기 전에 결정되는 거예요. 아주 중요한 거예요. 성공적인 예배는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정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결정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반드시 여러분 들어올 때마다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와야 됩니다. 반드시 매주 하나님 거룩한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이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는 줄 주님은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요. 그러면 거룩한 기대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도들을 쭉 보면요. 거룩한 기대감을 갖는 성도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에서 그것이 뭐냐 하면요 이것입니다. 하나님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모인다는 것은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모이는 것이에요.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인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잠시 세상에!~~ 내가 밑에서 보면 옆에서 보면서 기가 막혀요. 너무너무 찬송을 마칠 때, 또 찬송할 때, 찬송을 통하여도 들려주신 말씀이 있을 것이에요. 기도를 통하여, 들려 줄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분의 헌신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을 것이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있을 거에요. 오늘 마치고 나가면서 우리 선교 컨퍼런스에다가 여러 가지 하시는 거, 글로벌 광장 나가시면서도 주님께서 내 개인적으로 주시는 음성이었을 것이에요. 정리합니다.

“예배는 예배 들어오기 전에 결정되는 것이다. 반드시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거룩한 기대감의 핵심은 오늘도 주님이 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것이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헌신과 교제를 통하여 오늘 이것이 이번 주 여러분들의 삶의 여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오늘 좀 중요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31일 날 긴급 재난 경보 받으셨습니까? 아침 여섯시 몇 분쯤 됐는데 저는 그거 할 때 이렇게 상암 집회 종료 모임이 있어서 아침에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서 아침에 차를 타고 나가는 길이었어요. 들고 왔더라고요. 그리고 경보사이렌도 들으셨어요?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죽음과 같은 긴급함 저는 죽음과 같은 긴급함을 몇 번 맞이한 적이 있는데, 진짜 어려워지면요. 우리가 할 게 없어요. 사이렌은 울려도 갈 데도 없다니까 근데 마침 그날 우리가 일찍 출근한 우리 교회 직원들이 그 문자를 보고 우와!! ‘우리가 살려면 안아주심의 본당이 내려가야 되겠다.’ ‘여기를 내려와야 되겠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막 그 마음을 가지고 했대요. 여러분 재난이 있고 위기를 당하면 사람에게 본당에 오면 사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이에요. 그런 게 있었고 또 하나는 제가 빌리그레함 상암 집회 50주년 집회하면서, 이 집회가 우리가 애써서 수고하고 헌신하는데, ‘진리가 선포되는 집회’가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개회사에서 할 때, “진리가 선포되는 이 50주년 기념대회를 허락하신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진리가 뭐냐, 참 진리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이 참 진리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에 관해서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오늘 이 참된 ‘죽음의 신비’에 대한 진리가 여러분들의 것으로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는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다 끝난다, 죽음 이후에는 죽고 난 다음에 다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 무다.
-그런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니까 이 땅에 살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죽으면 수수깨끼다. 누구도 모른다.
죽어 그러니까 죽으면 수수깨끼이니까 염세주의자들처럼 살아가고 수수깨끼 같은 인생을 사는 거예요. 죽음에 대해서 세 가지 자세를 갖고 있어요. 사람들은 첫 번째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다 끝난다. 죽으면 모든 것 끝, 인생은 살아있는 동안이 전부 다 그러니까 뭐 살아있는 동안 내 마음대로 살고 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케스라 세라 왓 에버 윌비(What ever will be). 내 마음대로 사는 거야. 이래 살고 내가 하고 힘들어 살고 그냥 뭐 그냥 허상 하나 부르면서 죽으면 끝이 나니까 막 그냥 알코올이나 탐닉되고 이래 죽으면 끝이니까 그래서 사는 거예요.

세 번째로는 죽음 이후에 반드시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걸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사후 대책을 세우고 기백을 갖고 살게 되는 것이에요. 준비된 사람으로 믿음의 용사처럼 살 수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죽음에 관해서는 확실히 아는 거 있잖아요. 여러분들 제가 100% 아는 게 있어요. 그거 뭐냐면 우리는 100% 다 죽는다는 것이에요. 여기는 예외가 없어요. 우리 하나님은 무시간 대의 개념이 있어요. 우리 하나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개념 그 초월 점 초시간대의 개념 무시간대의 개념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두 100살 살고, 90살 살고, 사람 60살 살고, 다 50살, 이렇게 차이가 30~40년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여튼 여러분과 저는 100% 죽습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그 이후에 죽음에 대한 대책이 뭐냐고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 이후에 대책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대단해도 죽음에 대한 대책이 없는 사람은 대책 없이 매일매일 사는 사람이에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에 대한 대책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 땅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는 공자의 제자 자로가 여러분 잘 아시는 내용이죠? 공자에게 감히 스승님께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공자가 뭐라고 그랬어요? 야 이 땅에 삶도 모르는데, 죽으면 어찌 알겠느냐? 삶도 모르게 죽으면 어떻게 알겠느냐? 뭐 거기엔 또 나름 또 생각이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명확하게 얘기하면 여러분 공자 같이 사서삼경 뭐, 다 대단하지만 그런 거 대학, 춘추 이야기 다 있지만, 베드로는요 놀라운 얘기를 했어요. 저는 이 공자와 비교해서 베드로가 베드로서 1장 19절에 제가 지난 주간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너무 제가 이게 너무 귀한 말씀이 여러분 공자처럼 베드로가 많이 공부한 것도 아니고, 공자처럼 베드로가 무슨 많은 제자를 거느린 것도 아니에요.

그는 초라한 어부 출신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으로 그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생명의 진리에 대한 문을 열고 죽음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난 이 땅에 사람도 모르는데 죽으면 어떻게 알겠느냐는 공자와, 어부로서 살았지만 분명하게 확인된 베드로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시오. 베드로서 1장 19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같이 읽죠.

*베드로후서 1:19,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사람들은 다 깜깜해요. 아주 그냥 아주 그 마음이 죽음 이후에 그것에 대해서 모두가 다 깜깜한 암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빛이 없는 깨달음이 없는 통찰력이 없는 그런 깜깜함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깜깜한 어둠 속에 여러분 등불, 한 빛을 봐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거기에 손전등이라도 비추고 거기에다가 성냥불을 하면 켜 봐요. 환하게 빛나는 것이죠. 그것뿐만 아니라 1장 19절 뒤에 뭐라고 나와 있는가? 이렇게 나와 있어요.

*베드로후서 1:19,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날이 새어 새별이 너희 마음이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랬어요. 죽음 이후의 세계뿐만 아니라 여러 우리 삶의 영적인 어떤 질문들이 있을 때에, 그 모든 어두움의 시간이 지나가고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오느니라.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는데 오늘 죽음 이후 신비도 여러분들이 말씀하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샛별 같은 은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샛별의 청명함과 샛별의 청초함과 새별의 청명함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공자도 뭘? 복을 깨달은 것을 첫 번째,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I. 첫째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고린도후서 5장 1절 10절까지는 죽음이 의 신비에 대해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말씀이에요. 그런데 1절에 이렇게 절 뒤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뭐라고 돼 있어요? 아느니라. 오늘 첫 번째 우리가 주제가 뭐냐 아는 것 우리는 아느니라. 공자도 모르는데 이태백도, 이황, 이율곡도 한국의 철학자들 대단한 사람들 다 모르는데,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아느니라. 말씀에 대한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나온 성도들에게 알게 하시느니라. 뭘 알게 하시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이 왜 어려워요? 사람들의 죽음 얘기가 나오면 다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죽음은 두려움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극복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죽기 되면 죽기 직전 되면, 아무리 대단해도 다 두려워하고 다 힘들어하고, 몸도 육신도 아픈 거 있겠지만 영적으로 길이 없으까? 깜깜한 절벽이니까 꽉 막혀 있으니까 깜깜하니까 다 두려운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느니라 뭘 깨닫게 하시는가? 우리 성경 전체를 통해 아는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 보통 우리 성경이 성경에서 신약에서 말하는 성경은 대부분 구약 성경을 말씀하는 거예요. 구약 성경 전체를 딱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요약을 해가지고 깨닫게 하시는 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의 말씀인데 히브리서 가운데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기가 막힌 말씀이 있어요.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모든 사람의 죽음을 두려워해요.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피해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 이유가 뭘까? 히브리서 2장 14절 이와 같이 나와 있어요. 같이 보겠습니다. 14절만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해 있습니다. 잠깐만요. 우리가 어떤 혈과 육에 속했죠? 우리 다 육신의 몸을 갖고 있죠? 그다음에 또요.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중요합니다. 그가 누굽니까? 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소위 성육신을 입으셨어요.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다.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그 이유는 그다음 중요합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다음 또 15절에 같이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십니다. 너무나 이걸 말씀을 처음 보는 분들은 조금 더 깨달아야 되겠지만, 성경을 아는 분들은 딱 마음에 아까 말씀한 대로 샛별같이 깨닫게 하신 은혜가 있는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이런 뜻이에요. 보십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마귀의 세력을 멸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상처를 주고, 그다음 영원한 형벌을 갖게 하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서 온갖 더러움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표에요. 마귀는 한 생명이라도 더, 더 고통 가운데서 영원한 흑암 가운데로 갖고 가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표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중요하면 마귀의 세력을, 이런 잘못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하여, 고통과 저주와 더러움과 모욕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형벌 속에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오셔가지고 피의 복음을 통하여 용서의 강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세력을 멸(滅)하시기 위하여 그래서 2장 15절 다시 한 번 뭐라고 나와 있냐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히브리서 2:15,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매어 종노릇 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것이에요. 오늘 여러분과 저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된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신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 그 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마다 용서의 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피의 복음을 깨닫는 사람들은 용서의 강, 은혜의 강을 경험하게 되면, 그 우리 뒤를 따라오는 사냥개와 늑대와 마귀 같은 못된 군사들이 우리가 은혜의 강을 지나는 동안에 우리의 냄새를 다 잊어버리고 우리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죄가 용서받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왔고 피의 복음 앞에 주님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해 복음 때문에 용서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들인 거예요. 맞습니까? 이 세상에서 대단한 위인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일 위인이 누굽니까? 뭐 세종대왕이다. 그다음에 이순신장군이다. 그래서 그 광화문에 두 분만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런데 아무리 위인이라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이순신 장군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 적 있습니까? “네, 세종대왕님 나의 모든 허물과 모든 연약함과 모든 죄를 싸그리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이 안 되죠 이 땅에서 오직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열고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 내 죄의 문제는 예수님의 피의 복음 밖에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요” 이걸 믿는 사람들은 마귀의 세력을 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께서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겠다. 그 첫 열매라는 게 오늘 우리들을 위하여 첫 열매가 되신 것이 우리들을 위하여 복음이 되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죽음의 두려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이 땅에 있는 육신의 죽음을 죽이신 것이에요. 죽음을 극복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느니라.”

그 법이 뭐냐 하면 능력으로, 능력으로 해석할 수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오늘 제가 말씀드린 죽음을 돌파하는 마귀의 세례를 면하게 하시는, 정말 우리로 하여 선한 목자 되시는 이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마귀의 죄와 사망의 능력을 압도하였느니라. 극복케 하였느니라. 이걸 깨닫는 사람에게는 모든 성도들의 죽음은 이 땅은 사망이 왕 노릇하지만 성도에게 죽음은, 영광의 궁전에 입성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올라가는 불 병거가 되는 것이고, 독수리의 날개가 되는 것이고, 천국의 한 문에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우수사례와 수많은 참 환난, 근심이 있다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이 땅에 살아가는 또한 남은 인생을 즐거워하느니라. 확실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가 아는 것이다. 두 번째로 아는 것은 본문에 좀 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본문을 통하여 아는 것이 1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여기 보니까 본문에서 장막집이라는 말 텐트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요. 장막집이 무너지면 그다음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짐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러니까 두 가지가 대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은 영어로 텐트인데 이것은 뭐 여러 해석도 있지만, 이거 땅에 있는 장막 집을 우리의 육신의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와 여러분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 그런데 이 육체의 몸의 특징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낡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하고 있어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 절감하고 있어요. 젊을 때 탄탄했던 장막집이 나이가 들수록 장막집의 지붕이 처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요 머리가 빠지는 것입니다. 봐요 말뚝이 느슨해지는 것입니다. 장막 집의 말뚝은 두 다리의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막 집 볼 때 못은 흔들 조금씩 흔들리게 되는 거예요. 갈수록 다시오. 지붕이 처지는 것은 머리가 빠진 것이고, 말뚝은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이고, 못이 흔드는 것은 이빨이 흔들리는 것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이에요.

제가 최근에 10여 년 만에 만난 어떤 분이 있었어요. 그분을 제가 10여 년 보면서 아이고야 왜 이렇게 많이 늙으셨습니까? 라고 말은 하지 아니하고 속으로 만나 그리 얘기했어요. 그냥 깜짝 놀랐어요. 근데 그 순간 제가 아 내가 늙은 걸 네가 모르구나. 어떤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야, 요즘은 거울도 예전 같지 않네. 사실은 거울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진 것이죠. 내가 달라진 것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은 무너지고 낡아지는 것이에요. 이 땅에 지금 의약과 눈부신 진보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있어도요. 우리는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고 다시 사망률 100%예요. 예외가 없어요. 텐트 무너지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 하나님 또 하나 더 우리가 아는 것은 더 중요한 것은 2절 하반 절 뒤에 보면,

*고린도후서 5:2,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 내용은 어떤 장소적인 개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확실히 입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에요.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어요.

*고린도전서 15:51,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마지막 나팔이 불리는 그 시간에, 순식간에 우리 모두가 다 호연히 변화되리니 여기에 이제 뭐 이렇게 다른 신학적인 여러 내용들은 제가 다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재림의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아는 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이 뭔가 이렇게 확실히 피의 복음과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시고 장막 집과 영원한 집에 대한 한 주님의 몸을 입는 것을 깨닫고, 아는 사람이 나타에게 모든 분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 어떤 것인가? 6절이에요.

II. 우리가 담대하여.

*고린도후서 5:6,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6절에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우리가 항상 뭐 때문에 어떻게 됐어요? 담대하여, 그러니까 앞으로 오늘 이후로 사라에게 모든 성도들은 담대해야 돼요. 제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는 담대히 살아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깨닫고 난 다음에 우리의 마음속에 간절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바울이 고백한 대로 담대하게 살아야 한다. 이 담대함이 우리 사랑의 교회의 특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이 담대함이 앞으로 한국 교회 성도들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의 특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담대한 용서가 되는 것이 담대한 주님의 용서가 되는 것이에요. 제가 이 담대함을 얘기할 때에 담대함은 용기를 냅시다. 그리고 입술을 꽉 다물고 파이팅 이게 아니고, 이 정도가 아니고, 영적 기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내면 속에서 명맥이 흐르고, 어떤 경우에도 상록수 신앙을 유지하면서 한결 같은 시종일관(始終一貫)을 갖는 것이 영적인 담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거예요. 담대함을 가지고, 죽음 이후를 예비하고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를 사모하게 되면, 이 땅에 있는 것들도 우선순위(優先順位)와 더 중요한 걸 딱!! 과감하게 정리할 수 있는 안목(眼目)도 생기는 것이고, 담대함, 저는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다윗도 실수가 많았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다윗도 부족함도 많고 그러는데 왜 그랬을까?

나는 다윗이 가진 놀라운 통찰력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나는 왕궁에 삽니다. 나는 나름대로 궁에 삽니다. 나는 나름대로 대단한 거 다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지상에 정복 왕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얘기냐 합니까? “내가 왕국에서 거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건 다윗의 대단한 고백이.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의 첫날보다도 천국에서의 한 날이 더 낫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죽음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들은요. 제가 좀 이런 용어를 써서 죄송한데 앞으로 문지기 신학이라고 그럴 거예요.

문지기 신학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야 이 땅에서 왕국에 사는 것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로 있는 게 더 낫다. 어떤 장소적 개념을 뛰어넘어가지고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땅의 삶에 담대함과 역동성,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서 그래서 이런 담대함이 있으면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너무 자고우면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용사가 되어가지고 거룩한 홀로 서기가 가능하다 이 말이에요. 좀 누가 상처 주고 좀 이렇고 어렵고 이런 게 있어도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 신앙을 가진 줄로 믿사오니, 이걸 통해서 거룩한 용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걸 통해서 주님 내 사람들에게도 영향 받지 않고 사건이 되면 영향 받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뭘 걱정합니까? 하나님 내가 믿음에 홀로서기 있게 하여 주시고 일마다 때마다 믿음 보고 하게 하여 주십시오. 믿음 보고 1점0, 믿음 보고 2점0, 믿음 보고 3.0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떠나고, 가족도 떠나고, 육신의 장막도 약해지고 그럴 때마다 우리가 환경에 얽매여서 우울하고 힘들어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다윗처럼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용기 있는 홀로서기를 하면서 내 능력과 내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갖고 빛을 받고 샛별을 경험하고 벌떡벌떡 일어서야 될 줄로 믿는 것이에요. 이걸 5절에서 보니까 성령으로 보증을 받았다.

*고린도후서 5:5,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에게 보증서를 다 쓰여 주니, 여기에 대해 성령께서 보증서를 쓰시고 도장을 찍어주시고.

*고린도후서 5:7,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그리고 7절에 보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소위 믿음 보고 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장막 집이 무너지고 영원한 집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눈을 뜬 사람들은 순식간에 주님 오실 때, 우리가 홀연히 주님의 옷을 입기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담대함을 평생 유지할 줄로 믿습니다. 담대함의 표현이 다윗처럼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서 수많은 하늘나라에 차루가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이리 생각하고 그렇게 살 때 매일매일 삶이 하나님 앞에 믿음에 보고를 하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8절에 담대함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5:8,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주님과 보냄 갈 것을 확신하고 현재는 육체의 몸을 떠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담대함을 가지고 문지기 신학을 가지고 홀로 서기를 갖고 주님의 주님 앞에서를 우리가 기억하면서 이제 중요하면서 9절에,

*고린도후서 5:9,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주님을 기쁘시게, 믿음의 용사로,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어제 우리 설교 컨퍼런스를 하면서 어제 그런 말씀 나눴잖아요? 남김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담담함을 가진 사람의 나타난 특징은 9절에,
*고린도후서 5:9,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죽음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들은 죽음을 해결하는 사람은 어떡하든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 현장으로 나온 것이 10절이에요.

III. 담대함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늘 준비하는 삶을 산다.

*고린도후서 5:10,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섰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이라는 것은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대하고, 그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선악 간에 우리가 상급을 받을 것이다. 심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심판을 우리가 끝난 사람들이에요. 피의 복음을 통하여 정리가 된 사람들이 줄을 믿습니다. 아까 우리가 용서해달라고 어떤 위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게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분 받은 자에게 우리가 말씀한 거예요. 우리가 기도한 것이 그래서 그 문제로 해결된 거예요. 이제 나타난 것이 우리에게는 뭐가 있냐, 상급 심판이 심판대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받은 공적을 따라서, 선악 간에. 이거는 무슨 누가 이 땅에서 뭐 잘하면 축복받고 못하면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이거는 이거 완전히 다른 차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우리 우리의 삶을 쭉 이렇게 사는 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상급 심판을 받는 것이에요.

이걸 왜 이렇게 제가 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과거에 16세기에 캐톨릭이 너무나 그 당시에 캐톨릭이 너무나 부패를 하고 그다음에 이 소위 사람의 구원을 가지고 장난을 쳤어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원은 예수님 피로 받는 것이에요. 맞습니까? 그런데 그 구원을 공로 주의로, 공로 주의로 우리가 행한 바에 따라서 구원을 받는다고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해가지고 한 것을 마르틴루터가 너무 열 받아가지고 그건 아니다. 그러면서 그 캐돌릭의 공로주의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없는 성경에 연옥도 막 만들고, 그다음에 또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막 이런 것도 만들고 막 그렇게 했어요. 그것이 싫어가지고 우리가 물을 버릴 때 그냥 와장창 버렸는데, 버린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선악 간에 심판받는다는 이 상급 심판에 대한 걸 버려버린 것이에요. 구원받은 자는 상급 심판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은혜로 준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에요. 이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급은 은혜 받은 자에게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시험 준비를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이렇게 한 사람은, 시험 볼 날이 두려워요?. 시험 볼 날을 막 기대해요? 저는 그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그런 분도 있을지 모르는데 정말 시험 준비를 최선을 다해서 잘하고 막 그렇게 하면 시험 볼 날을 기대하면서 막, 막 기대가 돼요. 그래요.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면 그날이 와도 두렵지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상급 심판, 이런 것들이 좀 늘 마음속에 다짐이 되고 확고하게 좀 뭔가 와 닿을 수 있는 뭐가 없을까? 그런 좀 현장을 보고 좀 도전 받고 그런 게 없을까? 그게 바로 양화진이에요. 아멘. 양과자 선교 사람들 묘에 가면 거기가 상급 심판과 살아온 삶의 선교 사람들의 히스토리가 다 들어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올해도, 천오백 몇 십 명이 선교 나가잖아요? 국내 선교 750명, 단기 선교가 700명, 그 거의 1500명이나 해외 선교 700 넘게 나가는데, 그 나가기 전에 단기 선교 팀도 나가기 전에 야마지 묘소에 가가지고 서 있기 해도 좀 각오가 되는 것이에요. 나를 좀 추슬러지고, 나를 문지기 신앙으로, 나를 그리스도의 용사로, 믿음에 홀로 서기를 감당할 수 있도록 다짐하게 하는 곳이 양화진 묘역이에요. 거기 가면, 몇 분들 제가 좀 골라봤는데 거기에


“하나님께 영광”(Give God Glory)
- 이렇게 해가지고 윌리엄 베어드 2세 묘지에요.
-숭실 대학을 만들었던 윌리엄 베어드 선교 사람의 자녀들이 죽어갖고 계세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he buried in Korea the in Westminster Abbey.(헐버트)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조선에 다 바치리라.”(If had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루비 캔드릭-Kendrick, Ruby R)

“뜻이 이루어지이다”(Thy Will be Done).(에이커 홈)
-저런 내용들을 보면 우리가 마음에 숙연해지잖아요. 근데 양화진에 가서 양화진에만 봐야 되나 저 무슨 길이 없나? 근데 우리가 몇 년 동안 준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동산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사랑의 동사를 위하여 기도 저희 메모얼 파크인데 양평에 아주 참 괜찮은 지역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어요. 제가 그걸 이거 도대체 하나를 우리에게 왜 주시나? 오목사, 앞으로 양평 사랑의 동산(사랑 메모리얼 파크)는 제2의 양화진 묘가 돼야 하는 것이에요. 양화진은 풀타임 선교사들이 거기 가서 살았다면 여기에 양평에 있는 사랑의 동산은 사랑의 교회, 제자 훈련 목회 철학을 가지고 한 3년 동안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평생에 달려갈 길을 달리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돼야만 하는 것이야, 에요. 라틴어로 히스토리아 미션 히스토리, ‘선교 적 삶을 살았던 곳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야.’ 그런 깨달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양평 ‘사랑의 동산’에 대해서 ★사랑의 동산은 죽은 자의 고귀한 삶을 통하여 산 자의 영혼을 깨우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런 깨달으셨어요. 죽은 자의 고귀한 삶을 통하여 산자의 영혼을 깨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걸 하면서 제가 깨달은 몇 가지 진리가 있는데 여러분과 저는 태어난 곳은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지방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서울 태어나고, 도서 팔도에 태어나고, 심지어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북한에서 태어난 우리 북사선 식구들이 있어요. 북한 사랑의 선교회 어떤 사람은 또 해외에서 태어난 분들도 있어요. 태어난 고향은 다 달라요. 그런데 돌아갈 본향은 같아요. 그래서 제가 태어난 고향은 다를지 모르지만 돌아갈 보향은 같다. 나와야 되는데 시작.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향은 다르지만 본향은 동일하다.”

그래서 성경은 참 재미있어요. 태어난 생일보다도 장례식을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어요. 오죽하면장례식 가는 자가 더 지혜로운 자다. 돌아갈 본향에 대해서 깨달음이 있으니까. 성경의 생일은 창세기 4장의 바로의 생일과 또 복음서에 보면 헤롯의 생일 잠깐 언급하고, 나머지는 다 장례식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묻히는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태어난 고향보다도 죽고 묻히는 장례 장소가 중요한 것이에요. 제 얘기가 아니고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면서 후손들에게 꼭 필요한 유산을 남겨 레가스를 남겼어요. 그 물질적인 것이 영적 유산의 표현으로서 뭘 남겨냐 하면 막벨라굴을 사가지고, 거기에 자기도 묻히고, 아내도 묻히고, 이삭도 묻히고, 야곱도 묻히게 했어요. 3대가 다 같이 묻혔어요. 여기는 너무 성령이 주신 음성이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나 제가 다시 한 번 태어난 고향은 달라도 돌아갈 본향은 같아야 되는 것이야. 그 3-4대가 같이 묻힐 때 더 은혜가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동산’이 돌아갈 본향의 하나의 예표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선대들의 믿음의 순례를 보고 후대들이 이 땅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리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먼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랑의 동산을 볼 때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걸 결심하고 도전받는 그런 장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아픔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떠날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믿음에 홀로서기를 하고 상급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죽음조차도 담담하게, 대담하게,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선교 적 삶이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어 피차사로 격려하고 서로 축복하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약
주님은 죽음조차 극복하시고 마귀의 세력을 멸하여 주시려고, 우리 모두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니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몸이 약해지고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시점에,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궁전에 들어가는 영광의 문인 줄로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함으로 승리해야 한다. 문지기의 신앙을 가지고,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용사가 되어서 이 시대에 믿음 보고를 하고, 기쁨으로 심판대 앞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예비하여 주신 ‘사랑의 동산’이 영혼 구원의 플랫폼이 되기를 간구하며, 제2의 양화진 묘지가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바울의 주된 관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신령한 옷을 간절히 사모하고, 육체 가운데 사는 현재의 삶보다, 죽어서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더 소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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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3년 6월 7일)
제목: "부흥(復興)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말씀: 여호수아 14:6-12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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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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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 3 상암 대회에서 부어주신 은혜와 성령의 선한 인도하심에 힘입어 오늘 부흥(復興) 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와 응답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서 14장 6절로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 14장 6절-12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340면, 우리 한 절씩 한 절씩 교독하신 후에 12절은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서 14장 6-12절 말씀을 통하여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갈렙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갈렙의 이 이름의 의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당시 개는 종, 서번트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또 수탉의 울음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백성들에게 외치는 갈렙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은 갈, 전부라는 뜻과 렙, 하트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합하면 ‘마음의 전부를 드리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이며, 언약을 외치는 자이며,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인생은 망한 것 같아요.” 한 50대 중년의 남자 집사님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젊은 날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합니다. 교회 오빠, 교회 누나, 이런 거죠. 신앙생활만 잘한 것이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잘해가지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좋은 학교에 좋은 대학교에 갔고 또 그 당시에 쉽지 않았던 유학도 다녀와서 좋은 회사에 잘 취직해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좋은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서 이제 회사에서 그를 명퇴의 대상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참 버림받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조차도 사춘기가 깊어가는 딸아이의 태도를 바라볼 때, 이 아빠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더라는 겁니다. 더 이상 아빠를 존경하지 않는 말투로 내뱉는 아들을 바라볼 때, 가정에서조차, 내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 중년 남성 이 남자 집사님의 마음은 참 어땠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특히 자녀 여러분 여기 자녀가 없네요. 안타깝다. 아빠들도 많이 옵니다. 다만 자녀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숨기는 것뿐이에요. 얼마나 서럽고 억울하고 당황스러웠으면 그러셨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남자도요 다치면 아파요. 남자는 무슨 우리도 아파요. 아내 분들 잘 들으세요. 남편도 마음이 상하고 삐져요. 남편도 아내 분들처럼 마음을 다칠 수 있고 상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제 인생은 쓰레기장 같습니다. 남아 있는 것들은 쓰레기밖에 안 보이는 인생입니다. 누구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저를 찾지 않아요. 저는 버려진 걸까요? 저는 낙오자일까요?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날의 많은 아버지들에게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과거 젊은 날, 우리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었습니다. 하지만 30~40년이 지나고 어느 중년의 모습을 한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마치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살아가는 것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이지만 잊혀져가는 세대로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가치와 품격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 분들이 단지 이 시대의 중년의 남자 분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이러한 현상은 여성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분들, 남성분들, 중년의 문제이기만 할까요? 아니요 여전히 가정의 불화 가운데서 내가 이 가정의 불화의 원인 같이 여겨지는 우리 자녀 세대도 동일하게 나는 무가치하고 나 내 인생은 잊혀져가는 그런 느낌을 다 받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이런 잊혀져가는 사람들, 이런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가치를 말씀으로 발견하며 다시금 열정과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45년 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출애굽 하여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12명의 정탐꾼 이야기와 이어져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이제 하나님의 땅으로 나아가기 전 그들은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40일 후에 돌아와서 보고대회를 엽니다. 그런데 12명 가운데 10명이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그 가난한 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거인 족들과 그들이 가져 가지고 있는 무기를 살펴볼 때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말하며 패배주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패배주의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홍해 사건과 놀란 기적 사건들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통곡하며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전가하고 모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오늘 주인공 갈렙이 옷을 찢으며 등장하며 외칩니다. 민수기 14장 8절과 구절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민수기 14:8-9,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들려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라.
-라고 갈렙이 지금 멋들어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갈래의 연설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래에 이런 믿음 보고를 보고 해 손을 번쩍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던 모든 동족들을 침묵해 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그의 모습은 끝이 났습니다. 그는 그 이후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민수기에서 몇 번 그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의 행적이나 업적에 대해서는 무안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그는 잊혀 진 존재, 마치 낙오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는 잊혀 진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45년이 흐른 겁니다. 45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출애굽 1세들은 다 죽었습니다. 광야 40년이 지나고 드디어 이스라엘에 약속한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5년의 전쟁의 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이렇게 45년이 지나고 이제 갈렙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우리가 잊고 있던 갈렙이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나타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헤브론을 요청합니다. 헤브론은 어떤 땅입니까? 창세기 13장 8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구했던 성음이었고, 창세기 15장 5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왕정시대,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 받게 될 땅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어떻게 45년 동안 잊혀진 존재에서 헤브론 땅, 바로 앞에서 유다 족속의 대표로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다시금 등장하여 그의 인생의 최고의 시간, 최고의 전성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제 한물 간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죄송해요. 한물 간 이런 다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요. 저도 이걸 쓰면서 제 제가 떠오르는 거예요. 제가 내 모습이 산물 같다는 단어를 너무 쓰고 싶지 않아요. 격하게 쓰고 싶지 않아요. 근데 어떻게? 환물 간 것 같은데요... 최고의 전성기를 하나님 앞에서 다 들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두 가지 정도를 우리가 함께 살펴볼 텐데요.

I. 첫 번째로 하나님께 전심이어야 합니다.
-오늘 갈렙의 외침처럼 하나님께 전심으로 외쳐야 우리의 최고의 전성기를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외칠 때 우리는 다시 영적 최고의 전성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45년의 공백을 모두 깨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금 이풍당당하게 등장합니다. 잘 들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그의 외침은 글자로 적혀 있는데 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의 소리 가운데 힘과 자신감이 넘쳐나는 것을 특별히 까랑까랑한 그의 육성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오늘 자세하게 확신 있게 적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민수기 4장 2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심이 뭐야?’ 라고 생각하는데요. 민수기 14장 24절 함께 볼까요?

*민수기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쓴 즉 그가 갖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드리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이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갈렙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그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기억하고, 아니 마치 세밀한 시나리오처럼 그를 등장시키고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는데 갈렙을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을 기억하시고 그를 다시 오늘 헤브론 땅, 약속의 땅, 왕의 땅 앞에서 위대하게 등판시키시는 이유는 바로 그의 마음이 갈렙의 마음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히브리어로 ‘누아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영(靈)을 의미하는데 그러니까 그의 영적 상태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는 거예요. 갈렙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의 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 갈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하나님 나에게 전심을 드리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런 그의 전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을 다시 한 번 잘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서 14장 7절입니다.

*여호수아서 14:7,
내 나이 40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 하였고.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성실한 마음은 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말로 직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믿음의 인테그리티(Integrity)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복음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언약을 온전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에게 진심이며 전심인 사람이 바로 갈렙 이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하나님께 전심인 사람들이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 성경을 다시 한 번 좀 살펴볼 텐데요.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 앉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6장을 한 절 더 보겠습니다.
*신명기 6:4,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두 구절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들으리라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씀에 대해서 들으라는 것과 신약에서 복음을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히어링 또한 리스닝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들으라. 라는 듣고 반응하는 걸 말합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쉐마는 쉐마에서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듣고 멈추라는 게 아니에요. 확장되어져서 듣고 반응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듣고 반응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 여러분들이 지금 상상한 단어 바로 그것 순종입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고 반응함 행함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심을 인정해 주세요. 바로 갈렙이 이런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헌신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종의 헌신의 사람을 우리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잊어도 모든 가족들이 나를 다 잊어도 우리 하나님은 이 순종하는 사람을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인생의 사명의 타이밍에 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갈랩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외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갈레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으로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외치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로 갈렙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잊혀져가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갈레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우리 오늘 성경 본문 12절 말씀을 같이 볼까요?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우리가 믿음으로 온전히 설 때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그때를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갈렙은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45년을 버텼습니다. 갈렙은 45년을 기다리면서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을까요?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한 번도 마음에 의심이 없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갈래에 그런 실망하거나 의심하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 시편의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44편 23절, 24절 가운데 :

*시편 44편 23-24,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악재를 잊으시나이까.
-혹시 우리 마음이 이 시편의 내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참 다행입니다. 저는 이 시편의 기자의 마음에 100% 동의합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라서 말입니다. 분명 젊은 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생을 우리의 전 생애를 드리며. “주여 제발 나를 저를 우리를 사용해 달라.”고 부르짖었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그곳이 ‘아골 골짝 빈들일지라도 주여 저를 보내소서.’ 하며 우리가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안 했습니다. 저는 젊은 날부터 신학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다녔어요. 1학년 때부터 1학기 때부터 채플 시간을 채플을 매일매일 하거든요. 근데 이 찬송가를 맨날 부르는 거예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떻게 간다고요? 왜요? 자신이 없어서요. 저는 못 가겠습니다. 저는 안 가겠습니다. 저는 빼시고 옆에 있는 이분을 보내주옵소서. 저는 사실 지금도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요. 내가 갈 곳이 아골 골짝 빈들 일까봐서요... 이거 말하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해버렸네. 그렇게 우리가 강력하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맡겨주셨던 소명과 사명에 의하여서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쌓아온 우리의 인생 앞에서 잊혀지니라. 그 어떤 고난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인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된 기다림을 잊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찾습니다. 나의 존재를 잊지 마시라고 다시 나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과수원집 손자입니다. 갑자기 네 저를 자꾸 불쌍하게 보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래 뵈도 저희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서는 우리 동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과일을 사 먹어본 적이 없어요. 왜요? 과수원이 우리 할아버지 건데, 복숭아도 먹고, 포도도 먹고, 수박도 먹고 저는 왜 과일을 사 먹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럼 과수원만 우리 할아버지 땅일까요? 아니요. 지금 정확한 제가 명칭은 말할 수 없습니다만 충북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 445번지 그 일대가 저희 본적인데요. 다 우리 할아버지 땅이 논도 우리 할아버지 땅, 밭도 우리 할아버지 땅 모두 모두 우리 땅 근데 망했어요. 망하는데 너무너무 억울해요. 왜 억울한지 아세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 땅에서 온천이 터진 거예요. 그때 그 시세로 하면 여러분이 강남의 빌딩을 살 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었습니다. 근데 망했어요. 왜 망했습니까? 모르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근데 제가 예상키로는 제가 삼형제인데요. 제가 차남입니다. 저와 제 동생이 목회자예요. 그래서 망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지 않고 물질을 받습니다. 신학교 시절 돈이 없어서 매끼마다 굶었던 이야기가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 번도 등록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자보가 활성 되었는데요. 등록금을 안 내면요. 대자보에 그 이름이 붙습니다. 저는 항상 한 학기 가운데 한 한두 달이 지나면 대자보의 자리에 붙어요. 등록금 안 낸 사람 신학과 금동훈, 제 이름이 메뉴에 있어요. 왜요? 금씨라서요. 왜 1번부터 8번까지는 다 그렇게 등록금을 냈을까요? 그렇게 제가 네 학기를 등록금을 제대로 못 냈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한두 달 동안 대자보에 제 이름이 떡 하니 붙어 있어요. 그럴 때에 제가 부끄러워했을까? 아니요 저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언제 대자보에 제 이름이 저렇게 떡하니 붙어 있었겠어요.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요. 그리고 하나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사실은 신학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등록금 안 주시면 그만두면 되지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참 신기하게 대자보 그러니까 잘리기 바로 직전에 등록금을 주세요. 그렇게 네 학기를 지냈어요. 그럼 여러분 등록금 대자부가 떨어지면 뭐 붙일까요? 학생회비 안 낸 사람 또 재학이 그렇게 새 학기를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었겠습니까? 목사님 지금 풍채가 좋으신데요? 아니에요. 굶어서 부은 거예요. 이렇게 망했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겠어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무슨 무슨 뭐가 있었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는 어땠을까요? 예수님 믿고 집안은 망하고 남편은 술로 그냥 술로 사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을까요? 근데 그 우리 어머니는 그때부터 맨날 밤만 되면 저녁만 되면 저녁 껏 드시고 교회 가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1년 2년 저는요. 그 2년의 시간 동안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 저 볼 때마다 기도하고 갔다 오셔서 저 학교 갈 때 항상 하시는 말씀 있으세요. 동훈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 주셔서 우리 집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거야 우리 집안을 사용하실 거야 할렐루야, 아멘! 뭘 아멘이에요. 그때 이제 서울에 살다가 돈이 없어서 쫓겨나가지고 의정부에 살았는데 의정부에서 학교 가려면 차비가 600원, 1200원이 들어요. 그 돈이 없는데요. 학교 갈 돈이 어떻게 어떻게 1300원을 구해요. 그럼 가는 데 600원 쓰고 오는 데 600원 쓰고 100원이나 남네요. 그럼 이거 어떻게 쓸 것 같아요? 돈 모아서 밥 사 먹었을까요? 아니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꼴에 신학생이라고 그때 신문이 300원이었던 거 기억해요 그거 돈 모아서 신문 사봤어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때 어떻게 우리 어머니는 견딜 수 있었을까요? 한 달도 아니고 두 달 동안이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그 길어진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이게 저희 어머니만의 이야기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 그 기나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디신 겁니까? 찬양으로요? 기도로요? 말씀으로요? 말은 좋죠. 한번 해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귀한 믿음의 선배님들 그 견딤의 시간이 쉽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짧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즐겁던가요? 여유가 넘치던가요? 제가 확신해요. 절대 잡지 않고 절대 즐겁지 않고 절대 여유롭지 않았어요.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소망합니다.

내가 쓸데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지요. 내가 쓰레기장이 아니라고요. 내가 정말 필요한 존재라고요. 지금 이런 오랜 기다림에서 지쳐 잊혀져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요. 우리가 한 소절 한 소절 버티며 살아온 이 인생에 대반전이 준비되어져 있다고요. 이 말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마음이 그동안 나 자신도 나를 의심했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마음의 한으로 서러워지는 그 나날들이 봄날 햇볕에 눈이 녹듯 다 누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자녀의 희귀한 질병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마음을 압니다. 부모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셀 수 없는 항암 치료와 수술, 끝이 날 수 없는 치료의 질식대로 지쳐버린 아픈 가족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조금은 다 다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압니다. 소망 없는 상태로 좌절과 패배감에 휩싸여 있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너무나도 더디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야 합니다. 우리의 재 등판의 최고의 시기는 무기력하고 절망적으로, 비관으로 점철(點綴)되어져만 합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거룩한 인내의 몸을 삶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신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
3 너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익숙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인내와 연단을 요청합니다. 불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13절 말씀은 이렇게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늘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3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랑받는 거룩한 성도도 고난과 시련을 견뎌야 된다는 것을 겪어야 된다는 것을 내가 받는 고난이 시련이 이 기다림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합니다. 이 고난이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이 나라를 살릴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께서 죽음, 어둠 가운데 던져진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타이밍에 우리의 타이밍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에 대하여 인내하고 마지막까지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 우리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하박국 2:4,
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의는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
-여기서 믿음은 바로 히브리어로 애 문화라는 단어입니다. 이 애 문화는 버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의는 마지막까지 말씀 언약 약속으로 버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갈렙이 그렇게 사실 45년을 버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45년을 버팀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가장 최고의 타이밍에 도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갈렙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 안에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한강에는 난지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꽃이 피어 섬이라고 하여 중추도라고 기록하고 있는 난지도(蘭芝島)는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1973년 서울의 모든 쓰레기를 이 섬에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로 만들어진 작은 산 2개가 생기기 시작하여 8,090년대에는 이 섬에 쓰레기 섬이 쌓여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약 1만 톤으로 이루어진 높이 100mm, 8만 평의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성들이 만들어졌습니다. 1973년 5월 30일, 빌리그레함 목사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 가득 메운 청준들 앞에서 설교하던 그 시절, 여의도에서 지척이었던 난지도에서는 꽃과 함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땅이 되었고, 우거진 갈대와 꽃들이 피어 산새와 들새가 지적이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난지도는 잊혀져버렸습니다. 대신에 쓰여 쌓여진 쓰레기 성은 침전수와 악취, 그리고 파리 떼가 들끓는 아골 골짜기 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조차 싫어하는 절망만이 드나드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구도 그곳에서 꿈을 꾸거나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거대한 쓰레기 섬에 누군가가 꽃을 심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리고 거대한 경기장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는 공원과 경기장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경기장, 공원 이름이 하늘을 닮아서 하늘공원, 노을공원이라는 공원이 생겼고, 그리고 그 옆에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2002년 한일 월드컵과 함께 모든 사람들과 산새와 들새, 이들에게 문이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쓰레기로 버려진 죽음의 땅에 꽃을 심고, 피어 생명의 공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10대 경기장을 지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월드컵 경기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50년이 지난, 지난 6월 3일, 1973년 여의도에서 나타났던 부흥의 역사가 50년 만에 상암 경기장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시금 나타난 부흥의 빵바레와 복음의 선포의 생명력은 우리 담임 목사님의 개회사의 외침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의 요청 앞에 비좁아서 앉을 수도 없는 그곳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 부흥의 자리, 응답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부흥의 초대를 옮겨가지 마시옵소서.” 그렇게 외치고 젊은 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결정하고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며 외쳤던 저의 젊은 날의 서원이 기억났습니다. 서 있지도 못하고 앉아있지도 못하고 어디, 꿇을 한 평의 공간조차 없는 곳에 무릎을 구겨놓고, 머리를 땅에 박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나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다시 한 번 부흥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이 땅에 하나님의 부의 물결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 부흥에 중심에 저와 같은 이 시대와 갈렙들이 수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그곳이 바로 부흥의 중심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능력이 이 자리까지 임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갈렙처럼 마음의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며,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기억하여 주옵시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고백함으로 다시 한 번 부흥의, 열정의,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우리 귀한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오늘 주님의 놀라운 말씀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에 갈렙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심이 되어, 우리가 믿음의 중심에 서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가 21세기의 갈렙이 되어 고난도 기쁨으로 인내하고, 믿음으로 견디어 내서 수많은 영혼들이 갈렙처럼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갈렙이 45년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에 인내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아야 하는 그 시간들 가운데 그의 영혼이 가난함과 그의 영혼이 메마름과 주의 의와 주의 응답의 역사를 사모하는 그 심령으로, 버티고 버텼던 시간이 45년이다. 이 쓰레기통 같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면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어야 한다. 갈렙은 끝까지 버티고 끝까지 남았기 때문에 승리했고, 땅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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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3년 6월 4일)
제목: "기쁨의 부흥을 갈망함"
말씀: 느혜미야 8:9~12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강건우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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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혜미야 8:9~12,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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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교우들 섬겨주신 분들 하늘에 참 놀라운 은혜가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70프로는 준비하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십시오. 했다. 제 마음에 오늘의 기도가 향후 10년의 한국교회의 부흥과 기름부음을 주실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영광과 기쁨의 촛대를 옮기지 말아주십시오. 우리가 다 무릎 꿇고 기도하니까 간절한 마음이 들었다.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환경부장관 등 한국 정치지도자들도 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니 참으로 축복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 민족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번 6.3 상암 집회 이후에 여러분 개인의 가정과 삶에도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를 경험하기를 소망합니다. 강단이 바귀었습니다. 청소년들 만 명 이상 모여서 3시간을 여기서 방방 뛰었으며 이것이 실체입니다. 회복을 넘어 부흥 시리즈 절정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이 기쁨이나 부흥을 체험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삶의 변화의 센스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별 변화가 없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는데,
첫 번째-Informed Christian.
-이 그리스도인은 많이 아는 그리스도인, 모태신아이며,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이에요. 성경의 신구약은 1189장이고, 성경에 제일 길게 된 책이 어디냐고 물으면 시편 119편이고, 그리고 성경에서 제일 비참하게 죽은 자가 누구냐? 압살롬, 성경의 백인들만 사는 동네는? 흰 놈의 골짜기, 성경에서 제일 빨리 왕 된 사람이 누구냐? 바로 왕, 이런 것은 잘 알면서 교회에 어릴 때부터 많이 알아요. 그런데 삶의 변화는 없는 것이에요. 30년 40년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만 보통일이 아니에요. 만약에 낚시를 30년 쯤 했다면 고수가 될까요? 안 될까요? 여기 낚시 10년만 해도 고수가 됩니다. 벌써 밑밥이 다르고 낚시 하는 게 달라요. 테니스 30년을 해도 변화가 되는데 예배 30년을 드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에요. 이건 아니잖아요? 뭔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 안타까운 일이죠.
 
두 번째는 conformed Christian.
-소위 동화된 그리스도인이다. 동화적 그리스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은 교회의 어떤 문화 교회 전통 교단 이런 거, 우리 우리는 대한예수교 장교의 동서 우리가 보수주의 교회 신앙과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개혁주의 적 사상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마음이며 귀한 것이에요. 그런데 교회 교인들에게 안 믿는 분들을 전도하려고 그러면 벌벌 떠는 것이에요. 많아요. 뭔가 없어요. 진짜는 뭐냐면 변화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어떤 교단에 동화된 것도 필요할지 모르지만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12:2,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세 번째는 tranformed Christian.
-변화를 받는 것이에요.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쁨과 생명의 능력으로 제대로 변화된 것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뭐가 진짜 변화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의 큰 변화가 무엇인가? 변화의 실체중에 하나가 바로 12절에 나오니 다 같이 보겠습니다.
*느헤미야 8:12,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너무 귀해가지고 그 말씀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변화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보니까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그 당시 포로가 되어 돌아왔을 때에 이 사람들이 아람어를 많이 쓰고 있었는데 그게 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 있으니까 물론 비슷한 점은 많기는 하지만, 에스라가 이것을 히브리어로 잘 풀어주니까 백성들이 너무 말씀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기쁨이 있기도 하고 감사도 있지만 말씀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달아졌습니다. 책을 펼때에 벌떡 일어났어요.
 
*느헤미야 8:5,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느헤미야 8:6,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하반 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세에요. 3절에 보면
*느헤미야 8:3,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새벽부터 정오까지 여섯 시간 동안 줄기차게 말씀을 들었어요. 만약 우리 한국교회가 아침 여섯 시부터 12시까지 말씀을 계속하면 다 졸았을 것이에요. 엎어질 것입니다. 아니면 나갔을 것이에요. 저는 6.3 상암 집회 이후에 우리교회가 앞으로 말씀을 더 높이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일주일 하루 목요일 저녁 같을 때, 시간이 되면 우리 대한민국 교회 안에 정말 말씀에 은사를 받은 분들 가운데 말씀 자체만 그대로 깊이 있게 해석하고 강의 하는 그런 시간을 사랑의 교회가 목요일에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 날이 오지 않겠나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잘 풀어나가는 과정을 말입니다. 이것은 어느 종교에도 없으며 이것은 영광스런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기쁨이 있는데 기쁨이 있기 전에 전제하는 것이 있어요. 먼저 오는 것은 말씀을 통하여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8절에 보니까,
 
*느헤미야 8:8,
8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느헤미야 8:9,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왜 우는가?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말씀은 만물 앞에서 우리를 벌거벗긴다고 했어요. 말씀은 살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기쁨이 전에 먼저 눈물이 나고,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니까 눈물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에요. 나의 어떤 연약함과 나의 부족함 더더구나 우리의 마음이 맑을수록 눈물이 나는 것이에요.
 
*히브리서 4:12~13,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 앞에 서면 회개의 눈물이 나오고 회개의 눈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고 그것이 부정적인 눈물이 아니라, 어떤 눈물이냐면 이것은 내가 부족해도 하나님이 오늘까지 내 삶을 인도하셨구나!!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 앞에서 내 삶이 완전히 드러나기 때문에 늘 죄송하고 풍성한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함으로 나의 연약함을 돌아볼 때에 어떻게 보면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죄악이 가슴에 다가와 가지고, 죄송함과 회개 안으로 눈물이 나는 것이 그 눈물을 기초로 해가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와 그 눈물 앞에 감격해가지고 감사의 눈물로 따라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이 두 가지가 울음은 울음인데 하나는 정말 죄송함과 참 회개의 눈물이고 또 하나는 감사의 눈물이에요. 모든 일들이 그래요.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므로 회개의 눈물이 나고 그럼에도 우리를 붙잡으시고 인도하시는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뜨거운 눈물이 나오는 것이에요. 소위 말씀 앞에서 자시느이 주제파악이 되는 것이에요. 자신의 어떤 실존을 정확하게 알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다실 말씀합니다. 다 같이 보겠습니다.
 
*에스라 10:1,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모든 남녀노소가 다 우는 것이에요. 여러분 에스라 10장 1절에 보면 비슷한 이 배경인데 에스라 10장 1절에 보면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며 죄를 잡아갈 때 그 다음 주 많은 백성이 크게 어디겠습니까? 말씀 앞에서 통곡한 것이 우리는 남에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이 들어오면 되는 것이고 남의 들보를 보는 것이 아니에요. 은혜 받으면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런데 은혜가 없으면 은혜 받지 못하면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를 들어보고 동의를 하는데 은혜를 못 받은 자는 맨날 남에게 하는 거예요. 남들이 어떻다 남의 교회가 어떻다 뭐 어떻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심판으로 삼았어요. 말씀에 진정한 거룩함이 있으면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동시에 감사의 눈물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데 지난 2주간 동안에 도전 받고 찔림 받고 아이구야, 내가 잘못했구나!! 뭔가 나에게 말씀이 나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에요.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가 하나님 말씀 안에서 깊이 나를 돌아보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그런 축복된 시간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거룩한 눈물이며 이것이 전제에요. 그런데 그 눈물이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면,
 
*느헤미야 8:9-11,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성일이니, 이 말씀이 나오는데 오늘은 상암 집회 끝나고 난 다음에 영광스런 귀한 날인줄 믿습니다. 오늘은 이 귀한 주일예배가 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은 거룩한 성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자녀들과 부모님과 마음에 소원을 하고 함께 예배에 와서 말씀을 듣는 특별한 날인 줄 믿습니다. 그럴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느헤미야 8:10,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이 축복된 말씀을 깨달아가지고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어떤 간절하고도 통한을 하고 감사의 눈물이 있는 거기에 더러운 것이 다 닦여지는 기쁨의 빛이 환하게 들어올 줄로 믿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신 기쁨이에요. 오늘 이 은혜가 이 성도님들에게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여기 뭐라고요? 축복된 말씀의 창을 통하여 자신을 돌아보고 눈물을 통하여 더러운 것이 닦여질 때 나도 모르게 기쁨과 감격의 빛이 들어오는 것이 통해하고 죄책감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적셔주신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35장 10절에 보니까
 
 
*이사야 35:10,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구원의 감격이 있고 속량을 받은 내 문제가 해결된 그 순간, 우리의 머리에 희락의 관이 씌워지는 것이에요.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되는 것이며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는 것이에요. 이 용서의 기쁨을 통한 희락을 우리가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정말 성령님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이 진정한 속제의 기쁨이 있기 때문에 희락이 필요하게 되고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는 축복을 주실 줄 확신합니다.
 
*이사야 11:3,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진짜 찐 기쁨을 누리는 것이에요. 진정한 기쁨, 확고하고 정중한 기쁨을 수많은 어려운 환경과 고난 가운데서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키는 내 환경과 내 주위에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들어오는 자마다 우리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의 증표로 기쁨의 깃발을 그의 가정과 그의 삶에 대해서 다 올리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진짜 은혜는 뭐냐면요? 내가 은혜 받으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구요. 기뻐하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 내가 은혜 받으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뻐하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차원을 올라가서 여러분의 마음과 소원과 비전과 우리의 어떤 마음의 간절함이 있어요. 여러분 소원이 먼저입니까? 기쁨이 먼저입니까? 자, 이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시편 37편 4절을 보겠습니다.
 
*시편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기쁨이 먼저인가요? 소원이 먼저인가요? 소원이 먼저가 아니라, 기쁨이 먼저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이 먼저이고 소원은 자연스런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기쁨이 뿌리이고 소원은 열매가 되는 것이에요.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힘이 되는 것이니라. 하십니다.
*느헤미야 8:10,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기뻐하고 그것이 힘이라고 했는데 뭐냐면, 힘이라는 단어를 보면 히브리어로 마오즈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오늘 구약에 37번 나온다. 오늘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고 했는데 힘이라고 할 때, 힘이라고 한 번, 성곽이라고 번역된 것이 14번, 피난처라고 번역된 것이 7번, 요새로 번역된 것이 7번, 보호로 번역 된 것이 3번, 심지어 투구로 번역된 것이 헬멧, 이라고 합니다. ‘마오즈’ 라고 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했을 때, 이것이 투구, 헬멧, 요새, 보호, 피난처, 성곽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짐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앞으로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런 연약함이 다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만 분명하면 되느 것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을 기뻐하면 그 기쁨이 여러분들의 성곽이 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기뻐하면 여러분의 요새요, 안식처요. 보호막이 되는 것이에요.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줄까? 돈이 나를 보호하나? 아니면 어떤 세상의 권력이 우리를 보호하나? 우리의 그것이 성곽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에요. 여기 20년을 있으면서 수많은 권력자들, 수많은 힘 있는 자라고 하는 사람들 다 보았는데, 다 지나가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성곽이 되는 것이에요. 보호자자 되는 것입니다. 요새가 되고 전쟁터에서 헬멧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우리가 투구, 헬멧, 요새, 보호, 피난처, 성곽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에서부터 찾으면 됩니다.
 
이번 상암경기장 전도집회에서 많은 것들을 느꼈지만 성령 안에서 기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생애와 한국교회에 앞으로 10년 이상을 부흥으로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제 제가 부탁하는 것은, 육신적으로나 또 삶에 있어서 여러 가지 짐들도 있고 기도의 적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던져두고 오늘 기쁨의 성공 안으로 들어오세요. 기쁨의 집 안으로 들어오시기 밖에서 왔다 갔다 하지 말고, 기쁨의 요새 안으로 들어오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기쁨의 피난처가 되시고, 성곽이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헬멧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뭔가 아프기도 하고 어떨 때는 우리의 욕심의 연약함도 생기고 다 그래요. 그러면 연세 드신 분들은 물리적으로 육신적으로 휴식하기 젊은 분들과 비교해서 게임이 안 되는데 여러분들의 힘과 능력은 뭘로 대체할 것인가?
바울이 말씀합니다. 겉 사람은 후퇴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불로초를 먹은 것도 아닙니다. 이게 아닙니다. 속사람이 기쁨을 유지하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기쁨이 여러분들의 것으로 확인되어져야 합니다. 기쁨을 얻는 지혜가 필요하고, 기쁨을 위하여 마음도 쓰고, 건강을 지키고, 기쁨의 보약과 기쁨의 약을 드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더욱 배가 시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육신이 약해도 기쁨의 보호막을 통하여 강건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육체적으로 좀 힘든 건 있지만, 그럴지 모르지만 제 마음이 메마르지 않도록 주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제가 힘들고 어렵고 헤매고 그런 거 보셨어요? 저도 약할 때가 있고, 저도 육신적으로 부족할 때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제가 한 가지 좋아하는 건 뭐냐면 내가 젊은 젊은이들보다도 욕심 적으로나 이런 면에서 내가 다 이렇게 부족하게 많이 있지만, 한 마디에 대해 분명합니다. 그게 뭐냐면, 기쁨의 능력과 기쁨의 실체와 기쁨의 의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육신의 힘, 자연의 힘 정도만 갖고 살면 안 되고, 영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참된 힘을 얻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되도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렇게 하게 될 때에 연세 되신 분들은 진정한 영적 보호막과 방패를 받는 줄로 믿습니다. 기쁨주의자, 크리스찬 헤도니스트, 제가 한 가지 말씀 안 했는데 사실은 제 마음속에 근본적인 기쁨을 놓치지 않도록 은혜 주신 것이 사역의 비밀입니다. 기쁨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로 항상 예배에 그 기쁨의 신학을 가지고 늘 기쁨의 부활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일 날 모두가 다 예배드리고 나서 기쁨의 대관식을 하는 것입니다. 나가실 때 기쁨의 면류관을 하나씩 쓰고 나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매 주일이 은혜의 잔치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매일매일 삶에도 이 영적 대관식, 작은 부활절, 기쁨의 잔치가 스며들게 되는 것이에요. 또한 바울은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교인들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로마서 5장 3절에 바울이 뭐라고 했어요?
 
*로마서 5:3,
3 내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적어도 환난 중에서도 적어도 내게 주어진 것이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획득하니까 내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 뭐냐면, 다 십자가에요. 그러니까 어려움을 당해도,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고 나니까, 나도 모르게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기쁨이 내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기쁨의 생수가 가득 채워지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깊은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그러니까 오늘도 힘들어도 내가 십자가의 깊은 신비를 깨닫게 되니까 내 마음에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희락의 생수가 흐르는 것이에요. 십자가 십대를 깨달으니까 십자가 뒤에 따라오는 부활의 영광을 우리가 이 땅에서 영생으로 맛보게 되는 것이죠. 할렐루야!!!~
Love one another!!!! Rejoys in the LORD!!! 주님 안에서 기뻐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강수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서로 사랑합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쁨이 비전보다도 우선한다. 이게 여러분이 와 닿으려면 제가 질문 하나입니다. 여러분 기쁨이 먼저입니까? 소원이 먼저입니까? 세상은 소원이 기쁨보다 앞서지만 성경은 기쁨이 소원보다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소원이 기쁨보다 앞선다는 것입니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니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내가 합격하니까 내가 기뻐하고 내가 승진하니까 기뻐하고 잘 되니까 기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님 안에서의 순전한 기쁨이 소원을 결정한다는 것이 그래서 제가 자막을 만들었습니다. 시작.
 
내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기뻐하느냐가 내 소원이 얼마나 이루어지느냐를 결정한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기뻐하느냐가 내 소원이 얼마나 이루어지느냐를 결정한다. 여러분 오늘 이 평생 여러분들의 영적인 슬로건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기뻐하는 수준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어떻습니까? 2년 만에 하는 것 같은데 그렇죠? 진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 오늘이 기쁨에 관한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이 말씀 때문에, 오늘 예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오늘 이 시간 어떻습니까? ---기쁘고 좋습니다!!!~~.
 
♣요약
30년 묵은 신앙을 말씀을 통해서 통곡의 눈물로 회개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힘을 가지고 걱정과 근심과 환난에서도 기쁨의 요새를 든든히 마음에 세워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평생이 되어서, 기쁨으로 주님을 전하고 기쁨으로 가정과 이웃을 섬기는 자가 되고 희락과 부흥이 넘치는 은혜를 누려야 한다. 항상 기쁨이 선제되어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자가되고 주님을 기쁘게 하는 헌신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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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31일)
제목: "싫음과의 싸움"
말씀: 출애굽기 4:10-17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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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4:10-17,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오주여, 오늘 모세의 이 짤막한 발언을 따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 10절인데요. 제가 읽어드릴게요.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뒤에 좀 넘어가면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두 번째 부분은 어디서 오 주여가 등장하죠? 13절에 등장합니다. 여기도 한번 제가 읽어드리면

13 모세가 이르되 오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두 번 다 모세는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두 번이 아니에요. 이 본문 앞에 무려 세 번의 거절이 더 있습니다. 본문의 길이 상 오늘 읽진 않았지만, 오늘 자막으로 추리기 3장 10절 11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 텐데요.

*출애굽기 3:10-11,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렇죠 여러분, 여기서도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하면서 분명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거절은 우리가 잃지 않은 두 번의 거절과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의 두 번의 거절을 더해서 총 다섯 번입니다. 다섯 번이나 거절해요. 왜 그럴까? 왜 모세는 이토록 반복해서 좀 거절을 할까? 어쩌면 하나님과 모세도 삼요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닐까 여러분 삼요 아세요? 잘 모르시죠? 3요는 이걸요?
제가요? 왜요? 라는 질문입니다.

신세대들이 자주 한다고 그래서 기업의 임원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질문으로 어느 tv 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질문인데요. 저도 그러고 보니까 모세가 참 신세대 같아요. 왜냐하면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요셉까지의 그 족장 시대를 다 지나고, 무려 400년 만이라고 하는 긴 시간이 지난 다음에 출연한 인물이잖아요. 아주 참 신세대 아닙니까? 그래서 이 신세대의 느낌으로다가 이 걸요? 제가요? 왜요? 라고 묻는 것은 아닐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겠죠? 여러분,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요. 모세가 다섯 번 거절할 동안 지금 지시하시는 그 일에 대한 명확한 그림, 목적, 심지어는 필요한 능력에 대해서 아주 소상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러면 왜 모세는 다섯 번이나 주저하고 거절하는가? 그 질문에 좀 답을 하기 위해서 오늘 네 번째, 다섯 번째 거절 단락을 지금 여러분하고 같이 읽은 것인데요. 왜 제가 네 번째 다섯 번째를 좀 설정했냐면 뒤로 갈수록 속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모세의 속마음이 뭐냐, 네 번째 다섯 번째 줄 어디를 읽으면 속마음이 더 진하게 담겨 있을까요? 제가 아까 뒤로 갈수록 속마음이 드러난다고 했으니까 어디일까요? 다섯 번째겠죠 다섯 번째 거절 단락은 13절이었습니다. 여기 한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13절 같이 읽겠습니다.

13 모세가 이르되 오주여 보낼 만 한 자를 보내소서.
-여러분 모세의 속마음은 무엇이냐면요. 그냥 가기 싫은 거예요. 다른 사람 보내라 다른 사람 써 달라 이겁니다. 왜 이렇게 모세에게 하나님이 맡기시려는 이 일이 좀 싫은 일이 무조건 싫은 거, 그냥 무작정 거절하고 싶은 일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네 번째 거절 단락에서 힌트를 좀 얻을 수 있는데요.
10절을 한번 보시면 여기 제가 읽어드릴게요.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렇게 돼 있죠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주요 나는 뭘 못하는 사람입니까?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이 부분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모세가 실제로 말이 어눌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명기라고 하는 모세의 장편 설교 3개나 되는 그 장편 설교를 성경으로 갖고 있습니다. 말을 과연 잘 못했을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어디서 성장을 했냐면 당대 최고의 권력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절대 군주의 딸의 양아들로 자란 사람인데 그런 그에게 왕궁이 어떤 교육을 시켰을까요? 왕궁은 여러분 최고를 키우는 곳이죠? 최고가 아니라면 최고가 되게끔 하는 곳입니다. 근데 어찌 모세가 입이 둔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가진 이 배움이나 어휘력이나 어떤 필력이 모자랐다면 ‘토라’라고 부르는 이 모세 오경이 집필되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저는 그래서 좀 더 나아가서 그가 왕궁에 있었기 때문에, 또 높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언어도 접했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냥 단순히 하나의 언어, 말 못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여러 나라의 언어도 접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입이 둔하다.’ 라는 모세의 발언은 납득하기 어려운 거절 사유죠 그럼에도 불쑥 모세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뭐냐면 그가 가진 철 천지 한(恨) 때문이에요 철 천지 한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 15절인데요. 여기 화면에도 한번 띄워주실 텐데 여러분 출애굽기 2장 11절부터 15절도 한번 천천히 교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2:11-15,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여러분이 익히 잘 아시는 이 본문은요 모세가 왕궁에서 자란 이후로 처음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그 장면입니다. 처음으로 어떤 액션을 취했다는 것에서도 주목할 만하지만 13절만 보시면 2장 13절만 보시면 처음으로 성경에서 모세가 입을 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 앞에 안 나와요 입을 떼요. 성경에서 등장하는 모세의 첫 발언이라는 건 뭐냐면 히브리 사람이 싸울 때 가서 왜 동포끼리 그러냐? 라고 하는 그 중재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무엇이었냐면 누가 너를 재판관 삼았냐? 니가 뭐라고 이렇게 하냐? 라고 하는 핀잔이었고 언어적 폭력이었고 정서적 몰매였어요. 그로 인해 신변의 위협이 왔고 너무 좋게 지내던 자신의 처소에서 박차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 할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오늘 여기서 이 시점에서의 모세라면 이런 자들에게 돌아가서 그 입을 다시 떼서 너희들이 나의 동포라고 말하고 ‘너희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라고 말하고 너희들에게 언약을 지키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라고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처음 입을 뗐는데 그런 반응과 이런 타격이 왔는데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이런 발언을 하러 갈 수가 있겠어요?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어쩌면 그 마음이 툭 입이 사용돼야 되는 문제에서 입이 툭 나가서 나는 입이 분한자입니다. 사실은 속내는 ‘뭐야 난 말하기가 싫어.’ 모세의 속마음 어디선가 나는 그들과 말도 섞기 싫어요. 괜히 가서 또 입 댔다가 무슨 봉변을 내가 당하려고 무슨 억하심정의 상황에 처하려고 나는 싫어요. ‘아론 붙여준다 그래도 나는 싫어요.’ 이거 이럴 줄 알고 아론을 다 준비시켜서 지금 오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날 도와주신다고 해도 나는 싫어요. 상관없어요. 이게 모세의 속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분 무척 신기한 건 뭐냐면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무려 이렇게 다섯 번이나 거절하고 있는 이 모세를 하나님은 계속 붙들고 설득하고 물론 이제 나중에 화를 좀 내시면서 강하게 밀어붙이시긴 합니다만 모세가 말 잘 못한다고 하니까 야 아론도 준비해 놨다. 이렇게 말하는 그 하나님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오늘 이 장면에서 저는 하나님에 대한 작은 단상 두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게 뭐냐면?

첫 번째는 하나님은 모든 걸 아세요.
-모든 걸 아세요. 아론이 14절에서 오늘 보면 14절에 보면,
출애굽기 4:14,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아론이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그 말은 시차 상 모세가 나 말 잘 못하겠어요. 나는 말이 있어서는 둔합니다. 라고 핑계 댈 때 야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면 누구를 골라서 이제 도와주러 가게 만들어야 되지? 누구를 그럼 어떻게 해야 되지? 이렇게 전략을 그때 짜는 게 아니라 모세가 이런 핑계를 다 될 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야 인마 벌써 준비해서 오고 있어 그런 핑계에 될 필요가 없어. 이걸 보여주세요. 그래서 생각되는 하나님의 단상 하나님에 대한 단상.

두 번째가 뭐냐면 이런 질문이에요. 아론을 준비시키실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모세여야 했을까?
-왜냐하면 모세는 지금 아론은 지금 움직이고 있고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고 모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요. 모세의 말을 구지 그대로 믿어보자면 아론은 말을 잘하는 거고 모세는 안 해요 못해요. 여러분 누구를 택해야 정상적입니까? 아론을 택해야 사실 정상적이죠.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가 이렇게 거절을 하고 심사가 뒤틀리는 반응을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끝없이 설득하고 타이르고 굳이 일을 맡기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요? 오늘 이 중요한 질문에 본문 속에 이게 가장 제가 드리고 싶은 핵심 질문인데, 이 핵심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중요한 분리가 일어나야 돼요. 어떤 분리냐면 싫어하는 걸 말하는 것과 원하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의 분리입니다.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것과 원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분리해야 돼요. 왜 이걸 분리하자고 말씀드리냐면, 보통은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내가 원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두 개가 같은 거라고 여깁니다.


※제가 첫 사역지에서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공동체를 섬겼던 적이 있어요. 여러분 신혼 3개월 차에 결혼 10년 차 되었고 아이들도 막 키우고 있는 사람들한테 가서 뭘 말합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토요일 오후에 아내랑 주일 모임이었기 때문에 해당 부서 실에 가서 토요일 오후에 청소하고 그 애들 때문에 장판이 깔린 공간이었거든요. 바닥 다 걸레질하고 장난감 이렇게 청소해 놓고 둘이 손꼭 붙잡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어요. 살려달라고. 근데 그때 하나님 불쌍히 여기셔서 깨닫게 하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면 첫 번째는 ‘이게 경험으로 목회하는 게 아니구나 말씀으로 목회하는 것이구나! 말씀이라는 본질로 쓰임 받는 것이구나!’이것을 경험하기도 했고요. 또 하나는 거기에 있는 부부들을 이제 케어하고 목양하다 보니까 부부도 살아나지만 저희 가정도 막 활기가 넘쳤어요. 왜냐하면 왜 부부가 다투는지 알았고, 왜 세상 적으로 신앙적으로 고비에 처하는지를 알고 나니 저희는 그 선을 안 넘으려고 하고 저희는 거기서 미리 서로를 보호하고 사랑하니까 저희 부부가 더 좋아지더라고요. 그리고 또 하나 앞서 말씀드린 분리가 안 되는 선택을 할 때가 참 많구나! 이 사실도 많이 깨달았어요. 한 사람이요, 여러분 성장의 과정에서 겪은 중요한 어떤 사건들이 있으면 그것이 기억에 깊이 남고 존재의 깊이 새겨집니다. 그런데 그게 배우자를 고를 때 필연적으로 제거돼야 할 요소, 아주 중요한 요소 그래서 정작 고려했어야 할 여러 아주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요소들을 소홀히 여기고 가벼이 여겨서 놓치고 가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걸 제가 거기서 봤어요. 이 사실은 그 그룹을 제가 설명 드리면 개인정보 보호에 위반될 수도 있으니까 개인정보 보호에 위반되지 않는 저희 어머니를 예로 들어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어머님은 외할아버지가 아버지시죠. 술 마시는 것이 그렇게 싫어서 술 안 마시는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것이 저희 아버님입니다. 근데 여러분은 아시잖아요. 인생은 그것만 보면 안 된다는 거. 두 분이 부부로 지내시는 동안 수없이 그 외에도 고려할 상황이 참 많았구나! 라는 것을 깨닫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왜 어머님이 그런 선택을 주저 없이 나는 술 안 마시기만 하면 된다. 그런 남자면 된다. 다른 거 다 안 보고 그거 하나만 볼 거다. 라고 주저 없이 결정을 하셨을까요? 왜 기꺼이 그 선택으로 뛰어드셨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게 자기가 원하는 거라고 착각하고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모세도 그래요. 모세도 지금 그냥 싫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거 그냥 싫어요.
그 일 너무 싫어요. 심지어 오늘 이 장면이 추리기 4장이니까 3장에서 이어지는 장면이거든요. 3장이 무슨 장면이냐면 떨기나무에 하나님 불을 붙이셔서 놀라운 광경 임재를 목격하게 하신 그 이야기에 붙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확실한 증표가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오늘 모세가 분명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여기 신을 벗어라 여기서는 그 압도적인 장면을 지금 모세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거절의 핑계를 무려 몇 번이요? 5번 장수 돌 침대도 아니고, 다섯 번!!, 여러분 왜요? 가기 싫은 거예요? 다시 가기가 싫은 거예요. 말이 어눌한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말을 섞기가 너무 싫은 겁니다. 나를 억울하게 보았던 나를 억눌렀던 그래서 인생을 완전히 꼬아버린 그 민족에게는 그 못돼먹은 민족에게는 다시는 가기 싫은 거죠. 더 고생해야지 내가 뭘로 거기 가서 그들을 구출합니까? 이 상황 자체가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그 싫은 일을 하지 않기를 원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붙드세요. 그리고 설득하세요. 그리고 여러 번 권하세요. 왜인지 아세요? 이것이야말로 모세의 영혼이 갈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싫어하는 일을 안 하는 게, 지금 자기가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철저히 믿고 있는 오늘 모세에게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너의 영혼이 그토록 원하던 일이 이거야 이스라엘을 데리고 나오는 것, 이스라엘을 리더가 되는 것 구출하는 것 이게 니 영혼이 원하던 일이야. 지금은 부정하고 있지만 지난 실패로 인해서 너무 두렵고 지금 실증도 나고 그러겠지만 아니야 이게 니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일이야. 그래서 너도 일어났었잖아. 동포를 치던 애굽 사람을 죽일 정도로 사납게 매섭게 한 번 일어났었잖아. 히브리 동포의 싸움에 개입해서 들여다보려고 했었잖아. 그러니까 이건 너의 영원히 갈증하던 갈망하던 바로 그 목말라 하던 일이야. 그래서 내가 이토록 너를 붙들고 설득하는 거야. 아론을 시켜도 되지만 굳이 너를 붙들고 설득하는 거야. 그러니까 싫어하는 걸 안 하는 걸 니가 원하는 일이라고 착각하지 마. 오히려 그 일을 통해 믿음의 발걸음을 떼면 내가 사람을 붙이든, 능력을 허락하든 너를 도와 너의 그 깊은 영혼의 갈망을 이루어 줄게’ 라고 하는 그 씨름을 지금 하나님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혼동할까요? 왜 심지어 같은 것이라고 여길까요? 예레미야 17장 9절이 그 해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17:9,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 부패한 심령이 여러분 뭘 알 수 있겠습니까? 싫은 것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 모세의 행동과 우리의 평소 경향이 다를 리 없는 이유입니다. 부패하였기 때 선악과를 떠올려보십시오. 인류는 하나님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이 싫었어요. 뱀은 그걸 싫어하도록 만들었고 싫어하는 그것에 더욱 집중하도록 만들었어요. 씨름과의 씨름에 매달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선악과를 원하게 만들었죠. 그러면서 자신이 그 아담과 하와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지금 놓쳐버렸어요. 선악과를 원하느냐고?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원했어야 하는 건 에덴에서의 하나님과 깊이 있는 영혼의 교제였어야 합니까? 아니면 선악과 실고 하나 먹는 겁니까? 왜 씨름과의 씨름을 세상에 걸어오는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씨름과의 씨름이 어디서 오는지 그걸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분리하고 분별해야 할 이유가 지금 여기에 있다.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죄가 시작되었고 인류가 넘어졌습니까? 싫은 것이 생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그걸 붙들고 씨름을 해도 다룰 줄을 몰랐기 때문에 엎어진 것이 저 또한 그래서 이 질문에서 결코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사람이란 모름 직이 기호라는 게 존재해요. 좋고 싫은 게 항상 존재합니다. 그 사이에서 선택하느냐고 인생을 시간을 여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 고민하고 또 그것과 그냥 씨름하느냐고 분주하다고 느끼는 것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럴수록 내가 진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 영혼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 데서 바라고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그걸 안다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모세의 진정한 원함을 알고 그래서 그를 설득하고 그를 꾸짖으시던 그 하나님께 나의 이 씨름에 씨름을 맡기고 구하고 엎드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씨름과의 씨름을 하느냐 정작 원해야 하는 것을 여러분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요 십자가에 매달리시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얼마만한 고통이 있는지 모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입으로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걸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간구할 정도였어요. 그러니까 분명 싫은 것이었죠. 피하고 싶고 거부하고 싶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건 분명한 것이었어요. 싫어할 이유도 명백했습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할 이유도 명백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아버지의 뜻 때문에? 세상을 구원해야 되는 그 아버지의 뜻 때문에, 싫어하는 것을 하는 방향으로 정면 돌파하는 방향으로 그의 인생을 몰아가셔서 제가 오늘 이 순간 그 말씀을 드리면서 단순히 여러분 하나님 뜻이니까, 그냥 무조건 꺾여라. 그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요. 예수님이 자신의 시름과 싸움하면서 씨름하면서 오히려 그걸 통과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뭐냐면 그 시름보다 더 강력한 원함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려는 그 자신, 예수님 자신의 갈망에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름이 고통을 향한 시름이, 고난을 향한 시름이 원함을 가리고 덮으려 할 때가 있었지만 기도하며 그 시름과의 씨름 속에서 끝끝내 자기 영원히 원하는 거, 자기 존재가 원하는 거, 그 진정 원하는 것의 성취를 이루어 가시려고 뚜벅뚜벅 걸어가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시는 휘한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무언가 싫은 것이 막 다가 오세요? 무엇이 싫은 것으로 내 존재와 인생 앞에 떡하니 여러분 버티고 서 계세요? 무시하면 될 일일 수도 있고 거부해도 될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원함이 오히려 거부되고 있고, 여러분 영혼의 진정한 원함이 지금 무엇이 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씨름과의 씨름 속에서, 이걸 이길 강력한 그 강렬한 원함이 무엇인지 내 영혼의 속내를 들추어보시길 바랍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우리의 심령 저를 포함하였어요. 그걸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한 힘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요청하시며 나아가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장하세요. 왜냐하면 싫은 것을 하는 것은 우리를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올 초에 제천에 가서 기도하다가 연 초 계획을 저 나름대로 이것저것 세우다가, 하나님이 저에게 강하게 주신 마음이 뭐였냐면 이 세상 누구나에게 다 성장 욕구가 있다. 라는 것이었어요. 저는 없는 줄 알았거든요. 이미 커서 더 이상 성장하면 안 되고 욕구 부리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너의 영혼도 겸손하다는 이유로, 낮아진다는 이유로 성장하는 것에 대해선 관심 없다는 듯 살지 말고 너희 안에도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다 있다. 그 마음을 주셨어요. 그렇잖아요? 여러분 성경을 일도 하고 싶고 기도의 진중함에 빠지고 싶은 건 우리 모든 이들의 영원이 연 초마다 또는 월 초마다 어떤 분위기가 바뀔 때마다 늘 바라고 원하는 거잖아요? 왜요? 성장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면 당연히 성장하고 자라나고 싶잖아요. 아닌 게 더 이상하잖아요. 근데 여러분 성장하려면 뭐가 필요하냐면 싫은 것을 할 줄 아는 훈육 훈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것만 해서는 좋은 것만 해서는 도통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첫째가요 키도 크고 발도 큽니다. 저를 닮아 덩치는 않고서 하나님 크신 은혜를 우리 가정에 주셨다고 생각하는데, 근데 여러분, 가끔 그 녀석이 발이 아프다고 할 때가 있어요. 그게 언제냐면, 신발을 살 때예요. 새 신발 살 때 워낙 이제 좀 쿨하고 좀 무던한 녀석이라서 그런지 가타부타 말이 별로 없어요. 그러다가 신발이 좀 낡아서 뭔가 이제 신발을 교체하게 될 때가 오면 신발 고르는 장소에 가서 새 신발 신고 얘기해요. ‘그동안 발이 아팠다.’ 부모 마음에서 여러분 마음이 무너지죠. 일찍 얘기하지 일찍 얘기하지, 발이 아팠다고 왜 이제 얘기 하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아프면 뭘로 참고 있어? 왜 그 씨름과 씨름을 하고 있어?

-여러분 근데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씨름과의 씨름은요 뭔가 성장할 시기가 왔다는 분명한 사인이에요. 그럼에도 새신 더 큰 신을 맞춰서 바꾸어 신기보다 나의 용량을 넓히시려는 용적을 넓히시려는 걸 하나님께 붙들려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보다는 여전히 좁아터진 그 신발 안에서 꾸역꾸역 그 씨름과 씨름만 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고 불쌍한 인생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보실 때, 혹시 여기 지금 씨름과의 씨름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 가운데에 성장시키실 줄 믿으십시오. 싫은 것을 말하는 게 답이 아니라, 그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길을 지나 내가 진짜로 원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 깨닫게 해 주십시오. 그것을 이루어 좀 주십시오. 그리고 그에 맞게 나를 성장시켜 주십시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그렇게 이 씨름을 견뎌내고 이기실 수 있는 귀한 인생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이번 주 내 금요일 또 토요일 여러 귀한 시간이 여러분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저는 이번 일을 앞두고 하나님이 저한테 이렇게 많이 물으세요. ‘야, 너의 영혼은 갈망하지 않냐? 한 사람이 더 전도되는 걸 갈망하지 않냐? 하나의 교회라도 더 세워지는 걸 갈망하지 않냐? 너희의 영혼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거 너 그래서 목회하는 거 아니냐? 너 그래서 예수 믿고 나 따라오고 있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많이 물어보시면 여러분은 우리 앞에 놓인 이 일을 놓고 어떻게 바라보고 또 생각하고 기도하고 계십니까?

※아내랑 결혼을 고민할 때 너무 가난한 나머지 아내가 저한테 시집오는 게 너무 미안해서 결혼의 단계로 넘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게 너무 고민일 때가 있었어요. 그때 저의 멘토 중에 한 분이 제 고민을 막 듣다가 음악 듣다가 이렇게 짧게 얘기했는데, 그게 저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만들었어요. 그게 뭐였냐면 그게 됐고 제가 뭘 많이 얘기했거든 뭐 이래서 이건 고민이고 이러면 어렵고 이건 어떻게 할까 이렇게 했더니 한참 됐다. “이거 됐고, 됐고, 이 사랑하냐? 고 되게 묵직한 한 방이잖아요. 됐고, 됐고 우리가 알았으니까 다 됐고 사랑하냐?” 고 거기서부터 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일으키시려는 오늘의 그 어떤 일 속에 영원히 기적, 영원히 살아나는 어떤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여러분 사모하십니까? 누군가를 이끌어주는 일 또는 그 때문에 헌신하고 고난 받아야 된다면 오늘 이제 모세의 앞길이죠. 두렵고 떨리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그 안에 그 속에 내가 진짜 원하는 그 일이 담겨 있으니까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잖아요. 그게 담겨 있으니까 주여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씨름과의 씨름에서 고전하는 나를 좀 건져내셔서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고 하나의 교회라도 더 세워지는 그 일에 나를 좀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집회에도 누군가 은혜를 받아서 오늘 모세와 같이 이 민족을 이 교회를 새 땅으로 이끄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들이 좀 발탁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게 나이길 원하고 우리 교회이기를 원하고 내가 모르지만 거기 참석한 아무개이기를 원하고 주여, 그 일을 위해서 우리를 필요하다면 꾸짖어주시고 설득해 주셔서 우리의 진정 원하는 그 일, 우리가 진정 바라는 그 일로 우리를 좀 이끌어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 가운데에 나아가시고 마음 모아주시고 또 기도해 주시는 귀한 우리 사나의 교회, 우리 귀한 연 가족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약
내 영혼에 어떤 질문이 긁히고 체 이는지, 나는 무엇을 갈망하며 살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피하느냐 정신이 없는지, 나를 성장시키시려 씨름하시고, 오늘도 내게 수백 번, 수천 번 권하시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 온전히 순전히 붙들려서, 나의 인생 씨름과 씨름하는 이 나의 인생 성장하기를 원하면서도 좋은 것만 해내려는 내 기호에 맞는 것만 하려는, 이 연약한 나의 영혼에 하나님께서 꾸짖음과 하나님이 밀어붙이심과 만져주심을 받아서, 나를 통해 이루고 싶은 그 일, 구원받은 내가 너무나 원했던 그 일, 내 평생 내 면류관이 될 그 일, 그 일을 위하여 힘껏 나아가는 헌신된 인생을 간구하며 살아가야 한다.
-모세가 자신은 말에 능치 못하며 적당한 사람이 아니니 보낼 만 한 자를 보내라고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하여 부족함을 채우겠다고 위로하시며 그를 권면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다만 그 힘을 의지하는 순종이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내와 자비로써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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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5월 28일)
제목: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말씀: 요한복음 6:36, 7:37-38
대표기도: 하상범 부목사님(1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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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36,
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요한복음 7:37-38,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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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귀한 성령강림주일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랑의 교회는 이 성령강림주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여 주시옵시고, 또 그걸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이 본문을 6장 35절에 뒤에 보니까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또 너희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게 그냥 어떤 이론으로 끝나는 것인가 아니면 실체가 있는 것인가?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도 요한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심지, 예수님의 심정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께 기대어서 주님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깨달은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굉장히 신비한 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의 오늘 이 귀한 말씀이 어떻게 실체적으로 확인되었는가? 뒤에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주님께서 벌벌 떨면서 비겁하게 문을 다 닫아놓고 한쪽 구석에서 답답해하고 힘들어하는 그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셔가지고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요한복음 20:21,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어마어마한 말씀하셨어요. 다시요 그 두려움에 떨면서 십자가 사건 이후에 한 방 한쪽 구석에서 문을 닫아걸고 비겁하게 떨고 있던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갖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랑의 교회는 제자훈련 하는 교회에요. 사랑의 교회는 사명 받은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아니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다 그렇게 돼야 되는 것이에요. 지난달에 CAL세미나를 제가 두 번 하면서 더 절실하게 제 마음을 느낀 거예요. ‘우리 교회는 끝까지 이 주님이 말씀하신 이 사명을 완수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십시오. 이걸 좀 어려운 말로, 사도직은 계승되지 않지만 사도 성은 계승돼야 한다. 오늘 더 이상 사도는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도에게 명한 그 사명은 너희들이 이루어야 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예수님 보내신 것은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구원의 진리예요. 이 구원의 진리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소위 생명의 떡을 먹은 것이에요. 이렇게 생명의 떡을 먹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하나님께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의존과 순종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분을 우리의 생명의 떡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분들에게는 예외 없이, 다시 의존과 그다음 뭐예요 순종의 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어떤 자원에 무한하신 자오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걸 일컬어서 오늘 “너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그랬어요. 이게 여러분들에게 저와 여러분 이게 과연 실체가 되고 있는지, 의존은 우리의 여러분 하나님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까 부담입니까? 특권이죠. 어마어마한 특권이죠.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다. 놀라운 말씀이 나 같이 생각한 인생에 주님 의지하여 늘 강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이 하나님 의존할 때, 우리 아담이 불순종해가지고 아담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원한 멸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불순종이 예수님의 순종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김 불순종이 박 순종이 된 것이에요. 그리고 이 불순종이 이 권사가 된 것이에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것뿐만 아니라,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존을 통하여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나 주님의 보좌 있는데 천한 몸에 이르러 그 영광 몸속에 올 때 내 뭐가 넘친다고요? 기쁨이 넘친다. ♩~~

어떨 때는 그런 찬송은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같이 미천하고 부족한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 의존을 통하여 주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그다음에 하나님 무안하신 자원에 참여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하신 자원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

“생수가 흘러넘치리라.” 요한이 이 얘기를 하고 요한복음 20장의 마지막에 그 뒷부분에 이렇게 다시 두려움에 떨고, 방한 쪽 구석에서 비겁하게 그냥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그들에게 주님 나타나셔가지고 도저히 희망 없는 자들에게 “너희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 같아.
나도 너희를 보내니까 너희들은 사명 받은 자로서 사도 성을 계승하라.“ 사랑의 교회로 말하면 사도 성을 계승하라. 그러면 어떻게? 복잡한 거 다 두고 딱 하나만, 21절 그 사명을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20장 22절에 딱 하나 뭐라고 말씀하는가?
*요한복음 20:22,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딱 하나의 성령을 받으라. 우리가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지금 쳇 gpt 시대에, AI 인공지능 시대에, 그리고 정치적인 흐름이나 우리 주위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우리의 마음이 버겁고 우리의 마음이 침을 지고 어떻게 요동할 때도 있고 수많은 압박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런 분들에게 딱 하나 주님이 오늘 말씀하신다면 “성령을 받으라.” 그거요. 성령을 받으라. 요한이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요한이 신비한 복음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 오늘 예배 마치고 말씀 마치고 저와 같이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 충만하게 받게 하여 주시옵시고, 매 마르기 짝이 없는 인생들에게는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이걸 위하여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사건처럼 좀 정리를 하겠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6장 35절에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요한복음 6:35,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 그 말씀이 생명의 떡 먹은 사람에게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7장에서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뭐라고 말씀해요?

*요한복음 7:37,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초막절이죠? 초막절은 일주일 내내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이렇게 실체적으로 이것이 자기들의 가족들이나 자녀들에게 확인될 수 있도록 그 초막절을 기념하는데, 일주일 7일 동안 하는데, 뭘 하느냐? 광야 길 가운데서 의복이 낡아지지 않게 하시고, 광야길 가운데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광야 길 가운데서 만나를 주셔서 주리지 않게 하시고, 특별히 중요한 것이 광야 길은 사막이고, 광야에는 물이 없는 곳이에요. 물이 없는 곳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물인데, 반석에서 생수를 터뜨려가지고, 그 반석에서 생수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먹을 수 있도록 그래서 이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제 그런 걸 말씀하시면서 그걸 이제 기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벽에 이제 초막절 기간 동안 매일 아침마다 저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와가지고 예루살렘 성전 제단에다가 물을 붓는 의식을 하는 거예요. 바위 있는 데 붓기도 하고 붙는 의식을 갖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의식의 마지막 날, 마지막 날에는 수많은 제사장들과 그다음에 레위인들 심지어 많을 때는 3천여 명의 레위인 들이 와가지고 같이 그 의식을 하면서 마지막 그 물을 붓는 의식을 통하여 장엄하게 하나님을 할렐루야! 를 찬양하는 순간 정말로 영광스러운 것이 “하나님은 우리의 생수의 근원이시구나.” ‘광야 길 가운데서 우리가 의지할 보는 주님밖에 없게 하셨구나! 광야 길 가운데 우리의 수많은 목마름과 그다음에 어려움과 문제들을 주님이 해결해 주셨구나!’ 이걸 이제 이걸 기념하는 거예요. 초막절이에요. 그리고 초막절 제 8일째 오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7:37,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오늘 아침 이 귀한 성령 강림 주일, 저나 여러분이나 이 사도적 사명을 계승하고, 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우리에게 허락하신 수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되기 위하여,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음성을 듣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가서 마시라.” 그 첫 번째 전제조건이 하나 있어요.

I. 목말라야 된다.
-목말라야 돼요. 목이 말라야 거룩한 목마름이 필요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에게 너희 지성적으로 똑똑해라. 그다음 뭐 교회 생활 많은 것들 잘해라. 이거 다 그거 다 귀중하지만, 진짜 중요한 거 너희들에게 오늘 성령 강림 주일날 담임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주님 우리에게는 거룩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타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생수의 강을 경험하고 사도 성을 계승하고, 내가 삶을 엮어가는 데 수많은 짐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주님이 내게 허락하시는 가장 중요한 그 사명을 위한 간절한 목마름이 내게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 세상 적으로는 되게 똑똑한데 영적으로는 허당이에요. 세상 적으로는 되게 잘 나가는데, 영적으로는 다 눈 먼 자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여러분,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목마름이 있죠?

돌고래는 바다에서 멋지게 헤엄치면 그걸로 목마르잖아요. 그걸로 그냥 만족이에요. 땅에 뒹구는 개들은 태양빛 아래서 그냥 맛있는 거 먹고 그냥 평안하게 뛰어놀면 그걸로 만족해요. 목마르지 않아요. 새들은 저 하늘에서 아름답게 지적이고 그렇게 하면 그걸로 끝이지 목마르지 않아요. 근데 모든 인간들은 목마르게 돼 있어요. 인간들은 다 목마르죠. 아무리, 아무리 대단하게 채워줘도 목마르죠. 인간들은 다 이 목마름을 해결할 방도가 없어요. 육체적으로 뭐 이렇게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 목마르게 돼 있어요. 어떤 사람은 성적으로 더 목마르게 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지위에 대해서 더 목마른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목마른 사람들이 많아요. 지식을 지식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데, 목말라 하면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어요. 더 큰 아드레날린 분비를 요청하고 새로운 걸 더 추구하고, 계속 더 거칠고 자극적인 것을 찾아 헤매는 목마름이 육체의 갈망, 인간들에게 있어요. 세상에도 이런 갈증 이거 해결이 안 돼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원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사도 성 계승과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름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영원히 모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그 영혼에 대한 목마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에요.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너희가 대단한 수준으로 올라가라.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으로 올라가라 대단한 지성이나 위치를 올라가라. 그런 말씀하는 거 아니에요. 오늘 이 예배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우리 순전하게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가 다 주님을 향한 거룩한 목마름으로 다시 한 번 불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이 귀한 성령 강림 주일 같은 데에, 우리는 거룩한 목마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되는 거에요. 요한복음 6장 35절 뒤에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37,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라. 그 다음에 7장 37절에
*요한복음 7:37,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래서 제가 볼 때, 하나님께서는 한 번씩 말이죠. 저와 여러분의 상황을, 우리의 삶의 여정을, 강력하게 목마르도록 만드실 때가 있어요. 이해가 되십니까?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강력하게 목마르게 하실 때가 있어요. 우리가 사명자로 살도록, 사도 성 계승을 잘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의 용량을 키우기 위하여, 주님이 어떨 때는 목마르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 대한 타는 목마름을 갖도록 만드시는 거예요. 우리를 그쪽으로 몰아가실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갈증 나게 하시고, 어떨 때는 힘들게도 하시고, 거룩한 목마름을 제대로 이해하고 생수를 경험하도록 하나님 우리에게 고난도 주시고, 짐도 지게 하시고, 우리 앞에 놓인 온갖 시련들을 사용하기도 하시고, 찌르는 죄들과 상한 감정과 상처와 아픔들, 오래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제목들을 사용하셔가지고 계속 우리를 하나님 앞에 목마르게 하시고, 진짜 중요한 것을 추구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할렐루야!! 아멘... 어쩌면 이런 말씀을 드리면 이해가 안 되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영적 세계는 빈익빈, 부익부에요. 주님은 우리에게 타는 목마름과 거룩한 갈증을 주셔가지고 생수의 강을 사모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생의 마지막 오늘 이 말씀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마지막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 부분에

*요한계시록 22:17,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너희 목마른 자도 올 것이오. 진짜 목마름과 갈증이 있는 자 이것이 오늘 생수의 강을 경험하는 전제 조건인 줄로 믿습니다. 타오르는 목마름을 꺼뜨리지 말고, 타오르는 목마름에 불을 붙이고 그런 점화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 저와 여러분 마음속에 주님 오늘이 성령 강주일 날 다른 어떤 것보다도 생수의 강에 목마릅니다.

이 생수 강의 목마름, 우리는 거룩한 목마름, 세상은 바닷물처럼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 갈증 때문에 목마르지만, 우리는 거룩한 목마름에 대해서 우리의 눈빛이 달라져야 되는 것이에요. 목마른 자의 눈빛을 회복해야 되는 것이고, 목마른 자의 마음으로 귀를 열어야 되는 것이고, 새로운 말씀이 깨달아지고 새로운 은혜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오늘 이 자리에 혹시 교회에 처음 오신 분이 계시다면,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아무리 해도 채워지는 이 갈증을 생수에 가한 경험함으로 말미암아 해결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제조건이 목마른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목마름을 해결하는가? 생수의 강을 마시라고 그랬어요. 목마르거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뭐 해요 마시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다시 다 같이 시작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이건 물리적으로 물리적으로 뭘 마신다 혹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그 정도가 아니고 내 마음의 결단과 내 마음의 행동과 내 마음의 방향이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내 마음의 방향과 내 마음의 행동과 내 마음의 집중력을 회복하라 이 말이죠. 마시라고 하셨는데 이걸 마시라는 말씀을 듣기만 하거나 해석하거나 평가만 하면 안 되고 마시면 시원하겠다. 그래 생각만 하면 안 되고 “지금 마시라.” 그 말해요. 지금 해갈을 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에요. 이 ‘마시라.’ 는 말의 마시라는 헬라의 문법은 현재 능동 명령형이에요. 죄송합니다. 프레젠트 액티브 임페라티브(Present active imperative)라고 그래서 현재 능동 명령이에요. 지금 마셔야 되는 거예요. 지금 지금 타는 목마름에 불을 붙여야 되는 것이에요. 지금 강렬한 갈증을 일으켜야 되는 것이에요. 현재 과거에 주시는 대로 아니 뿐만 아니라, 현재 능동 우리가 적극적으로 주님 앞에 찬송한다 하더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님 기름 부어주옵소서. 그러면 진짜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님 생수 강 부어오소서. 그러면 진짜 그렇게 가만히 이렇게 있지 말고 지금 능동적으로 그리고 명령형이에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이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명령이에요.

지금 우리의 목마름을 고백하고 지금 마시는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럴 때 나를 믿는 자는 이제 중요한데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마시는 자는,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마시는 자는 생수하게 흘러나리라. 무슨 말입니까? 믿는다는 말은, 마신다는 말이고 마신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이에요. 여러분들 우리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줄로 확신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성령님에 대한 것을 사모하면서 마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마시는 것과 믿는 것이 똑같다는 것이에요. 마시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이 마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6장 35절과 7장 37절, 38절에 연결할 때에 요한복음 전체를 볼 때, 믿는 것이 마시는 것이고 마시는 것이 믿는 것이고, 예수를 믿고 마실 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줄로 확신합니다.
성경의 이름과 같이 스가라에서 말씀하신, 에스겔에서 말씀하신, 그 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 요강을 경험한다는 거에요.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나는 왜 이렇게 목마를까?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왜 나는 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나? 오늘 이제 중요한 순간으로 들어갑니다.
 
사랑의 교회 어떤 분들은 흘러넘치는 것 같고 능력 있는 것 같고, 어떤 분들은 특별히 신앙생활을 어벤다운이 한결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매 마르고 나는 왜 이렇게 어벤다운이 많을까? 오늘 이 귀한 주일날 사랑의 교회가 이 45주년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어떤 사람은 믿는데 왜 목마르고 왜 왜 그럴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라는 말씀을 내 것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에요. 다시요 믿는데 왜 자꾸 목이 마를까? 거기에 대한 답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 흘러넘친다는 것은 희한하게도 흘러넘친다는 것은 이 생수의 강의 문제는 나만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결코 생수의 강이 아니에요. 생수의 강은 나 혼자만 만족되는 것이 생수의 강이 아니에요. 생수의 강은 흘러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흘러넘친다는 말 말하면 생수의 강의 독특한 성격은 나만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생수의 강을 흘러넘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내게 흘러넘치는 것이 남들을 만족하게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나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해갈되는 것이에요. 내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근원이 터지면 다른 사람을 해갈시키고, 우리가 축복의 근원으로서 생수의 근원이 되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흔히들 제가 자주 말씀드린 대로 나만의 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수의 강이 흘러넘칠 때 이것은 남들에게도 만족이 되게 되는 것이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 물댄 동산 같은 인생이 되는 줄로 확신합니다. 물이 끊어지지 않는 내 샘같이 되게 만들어 주신 줄 믿습니다. 이걸 깨닫고 나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날마다 솟는 “너는 지금까지 이 우물을 먹으면 목마르리라.” 주님의 앞에 4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우물과 연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그 탈의 목마름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어요. “지금 있는 남편도 니 남편이 아니리라.” 남자 여섯을 갈아치워도 해결이 안 되는 그 갈증을, 오늘 주님께서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생수의 강을 경험하고 난 다음 너무 중요한 얘기 자기 몸 하나도 가누지 못하고 삶의 어떤 그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가지고 혼자서 조용히 정오의 땡볕에 나와서 물을 딛는 그 여인이, 이 생수의 가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자기만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동이를 버려두고 들어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자기만의 만족으로 자기만의 메시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소개하는 영광스러운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포인트는 뭐냐? 예수 믿으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래 믿고 다 하지만, 생수의 강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뭐냐? 흘러넘치는 사역이 돼서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 나만 만족해 희한하게도 생수가 흘러넘치면, 믿는 자는 목마르지 아니하니라. 목마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걸 깨닫게 되면 흘러넘치는 사이 돼서 문이 열리게 되면, 나만으로 만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까지 만족시키는 그 자리까지 도달할 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뱃속에서 흘러가죠. 희한하게도 내 속에서의 풍성한 만족을 통해 넘치게 되면, 메마른 사람들에게 연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적당한 정도가 아니라 물댄 동산처럼 흘러넘치는 것이에요. 우리 교회 용어로 말하면 은혜의 저수지가 되는 것이에요.
 
자, 이제 중요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깊은 갈망과 목마름은 예수님을 믿고 마셔서 생수를 체험하면 해결되는데, 생수를 마시면 해결되는데, 문제는 이것은 나 혼자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 혼자만으로 멈추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목마름까지 해결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생수로 나만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생수가 흘러넘쳐 함께 참 만족을 누리는 삶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과 저의 타는 목마름과 거룩한 갈증은 나 혼자 해결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흘러넘쳐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갈 때에 비로소 내 영혼의 깊은 갈망과 갈증이 멈추고 처리되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갈증이 있어요. 예수를 믿어도 해결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그런 모든 부분들은 어떻게 해결되는가? 나 혼자만 생수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 흘러넘치는 생수의 강을 통하여 다른 영혼들이 만족할 때, 비로소 내 영혼의 그 타는 목마름이 해결된다는 것이에요. 같이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깊은 갈망은 자기 혼자 생수를 마심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서 생수가 흘러넘쳐 나와 다른 영혼에게 생수를 같이 나눌 때, 비로소 내 영혼의 깊은 갈망의 문제가 멈춰지고 참 만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는 6.3 상암 대회를 앞에 놓고 지난, 사실은 지난 2년 동안 준비를 해오고 우리가 본격적으로 지난 1년 6개월 이상을 준비해왔어요. 왜 상암 대회냐? 요새 뭐 그거 필요하냐? 심지어 뭐 기도의 지팡이 된다고 그러는데, 네버!! 여러분들 진짜 이번 이 기회에 남들이 생수의 강을 경험하도록 여러분들이 역할을 하면, 여러분들의 영혼의 깊은 갈망과 해결되지 못하는 것들이 정리된다니까요.
‘목사님, 평소에 일부답지 않게 오늘 왜 저렇게 정말 전력투구 하나?’ 제가 1부부터 오늘 전력투구하는지 여러분들의 마음에 참 진리 여기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하나의 상암대회는 하나의 영적인 글로벌 플랫폼이에요. 여러분들이 이걸 실제로 아마 우리 교회 교인들이 아마 그 자리에 만 명 이상 갈 거예요. 뭐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다 뭐 모든 순서는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아, 내 영혼에 주시는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가지고 다른 영혼들을 만족케 하면, 그것이 내 인생에 이 목마름을 진실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향이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 이 생수의 강은 누가 한 명이 이렇게 얻는다고 줄어주고 그런 것이 아니에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에요. “나를 믿는 자는 그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 그랬어요. 그런데 제가 원어를 보니까, 바로 이래서 그렇구나! 나를 믿는 자는 거배에서 생수의 각인데 그냥 강이 아니에요. 생수의 강들이 흘러넘치리라. 영어에도 더 리벌스 어브 리빙 워터(The rivers of living water)를 그래서 오늘 영어 제목도 리버 한 강이 아니라 리벌 스예요. 복수예요. 그냥 낙동강, 한강, 영산강, 대동강 이 정도가 아니에요. 미시시피강, 장강, 양자강 또 무슨 강 있어요? 아마존 강, 나일강, 그 정도가 아니에요. 빅토리아 폭포, 나이가라 폭포, 이과수폭포 그 정도가 아니에요. 그 모든 것들을 대동강, 한강 모든 것들을 합친 것보다도 아마존강, 나일강, 양자강을 합친 그 황하를 합친 모든 것보다도, 빅토리아 이과스, 나이아가라를 합친 그것보다도 훨씬 더 놀랍고 고갈되지 않는 수많은 풍성한 강들을 허락해 주시리라. 이걸 진짜 깨닫고 이 은혜의 어느 조그마한 한 부분이라도 경험하게 된 사람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말도 안 되게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부족해도 남들에 비해서 레즈매가 스펙이 약해도 다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여기에 대한 목마름 가지고 영적인 눈 열어가지고 하나님 아버지 생수의 강들이 내게서 흘러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The rivers of living water!!~.
 
모든 강물을, 모든 폭포를, 모든 세계의 흐름들을 다 모은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것에 영광스러운 그 생수의 강이 내 속에서 흘러넘치게 되리라.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말씀의 파도가 되고, 확실히 파도가 될 때,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수많은 담들과 벽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폭포수가 될 것입니다. 이 강들이 엄청나고 대단하기 때문에, 이 강물이 엄청나고 대단하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여기는 부족한 자도 범죄자도, 연약한 사람도, 부끄러운 사람도, 대단한 사람들도, 지식인도, 모든 빈부(貧富)귀천(貴賤) 막론(莫論)하고 누구든지 이 생수의 강들이 다 눈이 열려가지고 나오기만 하면, 여러분 평생에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갈등들이 해결되고 나만이 아니라, 똑같이 연결될 때에 저는 그거 하나 여러분 자신이 거룩한 강들을 위한 생수의 플랫폼이 될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고, 상상도 못하던 차원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구약에서부터 예표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어느날 모세에게, 모세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고 난 다음에 70인 장로들을 이렇게 같이 연결해가지고, 이제 모세 모세의 시종 여호수아와 함께 엘닷과 메다시라는 두 장로는 저 진영에 머물고 있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가 다 장막에다가 성막에 다 둘러 세웠는데, 그 어떤 두 장로가 안 왔어요. 엘닥과 메다시라는 장로가 안 왔어요. 그런데 그 안 온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가지고, 영임해가지고 막 예언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여호수아가 뭐라고 하냐면 그들 말려달라고, 저 안 왔는데 그 임하면 되겠냐고 우리가 가치 없는데 하면 되겠냐고 그러니까 모세가 놀라운 말씀 민수기 11장 29절에 보면,
 
*민수기 11:29,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오늘 누구든지 의 구약의 예표에요 부족해도 다 선지자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노라. 누구든지 성령체험의 보편성을 담보하는 위대한 기도를 드리게 된 거예요. 그 이후에 요엘 선지자가 뭐라고 해요?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라. 누구에게 부어준다고요? 만민의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 성령을 모든 백성에게 부어주세요! 라는 이 이 모세의 꿈같은 기도가 요엘을 통하여 확인되고 요엘을 통하여 오순절 성령 강님 오늘 성령 강림 주일 날 이것이 현실이 된 거예요. 베드로가 요엘서에 말씀하신 말세 내가 내 영으로 말세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 그랬어요. 모든 육체 남녀 성별에 상관없이, 사회의 위치에 상관없이, 직분에 상관없이, 나이에 상관없이, 인종과 국가에 상관없이, 시대에 상관없이, 형편과 처지에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든지 만민에게 모든 사람들이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사도행전 2장 38절 39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사도행전 2:38-39,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성령의 선물 성령의 선물 이 약속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니라.
-오늘 이 자리에는 얼마든지 부르신 하나님 백성들이 다 모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오늘 이 아침 일부터 정말 진심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수의 강을 얼마든지 부어주시는 그분 앞에 목마른 거룩한 목마름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이 갈망은 이 끊임없는 갈망은 생수의 강의 나만이 아니라, 폭포수 같은 그 강렬한 강물이 나를 통하여 주의 복을 받게 하면 내 갈증이 참된 갈증이 해결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걸 깨닫는 것이 그럼 이 시간에 기도를 해야 되겠다.
 
두 가지 기도 제목을 드리고요. 이 두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은 예외 없이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는 생수의 강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폭포수와 같은 생수의 강이 나를 완전히 지배하여 주십시오. 흘러넘치는 생수의 강으로 나를 온통 지배하여 주십시오. 70-80%가 아니라 심지어 90% 아니라 100% 지배하게 하여 주십시오.
어떤 젊은이는 좀 결혼하고 난 다음에 지배하여 주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난 다음에 지배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마치 하나님이 내 즐거움과 내 어떤 인생의 좋은 걸 빼앗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NO!! 성령이 나를 지배해서 받는 그 즐거움과 기쁨은 이 세상의 즐거움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에요. 찬송한다 하더라도 기가 막힌 것이, 여러분 이 땅에 모든 갈증은 아무리 채워도 절대로 해결이 안돼요. 성령께서 생수의 강으로 지배하시면, 내 삶의 영원한 갈증이 치유가 되는 것이에요. 완전히 지배하여 주십시오. 넘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십시오. 흘러넘쳐다 비축의 은혜가 아니라 넘치는 은혜, 축적의 은혜가 아니라 넘치는 것이 그럴 때, 사막의 광야의 샘이 터지고, 사막 같은 인생이 이 생수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흘러넘치는 사람에게 가는 놀라운 지배 흘러넘치는 지배를 받는 사람이 나타나는 놀라운 기도 제목 하나는 뭐냐면,
 
두 번째 이거 뭐냐 하면 주님, 나를 제한 없이 사용하여 주십시오. 나는 나를 볼 때는 너무 부끄러워. 내가 나를 볼 때는 너무 부족해. 내가 나를 볼 때는 그냥 저 구석에서 벌벌 떨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 받으라고 그러고 난 다음에 이런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는 나를 제한 없이 새용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고 제 생일로 돌아보았어요.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성령께서 나를 붙잡아주시고 생수의 강을 경험하게 하실 때, 조심스럽지만 어떨 때는 한계가 없는 사역의 은혜를 받은 그 축복이 얼마나 큰지 여러분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제한 없이 사용해 주시는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에요. 교회 안에도 일반적으로 우리 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이 다 들어와 있어요. 세상에 잘난 분들이 교회도 잘 나고, 세상에 잘 나가는 분들이 교회도 잘 나가고 이런 거 다 있어요. 그러나 진짜 은혜를 받으면 생수의 강에 대해서 눈이 열리는 사람은 빈복귀천 남녀노소 상관이 없이 주님이 나를 제한 없이 사용하게 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언제까지 수많은 부부 간의 갈등을 갖고 계실 거예요? 언제까지 처리되지 않는 어려움으로 여러분이 힘들어하실 거예요? 언제까지 내 자아 내 프라이드 문제가 해결이 안 돼가지고 깨어지지 않아가지고 언제까지 힘들어 하실 거예요? 생수의 강의 지배를 받고 나를 제한 없이 사용해주시는 은혜 가지고, 그걸 가지고 더 이상의 갈등을 하지 말고, 갈증이 해결될 수 있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배당 안에는 수많은 분들이 모였을 때는 희한하게도 이 안에 생수의 강이 넘치는 분이 반드시 계세요. 그리고 제한 없이 하나님께 사용해달라고 기도 통해서 은혜 받을 분이 반드시 있어요. 그래서 이런 자리에 올 때, 공동체에 임하는 성령의 역사와 생수의 강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 제4의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토비새에도 했지만 웨일즈의 부흥이 평양 부흥으로 왔어요. 그게 제1 부흥이에요. 제2 부흥은 한국이 건국될 때, 여러분 지금 43 사건이나 그 모든 것들이 48년도 4월 3일 우리나라가 건국되기 전에 48년도 8월 15일 그거 보면, 거기 이 남한에 있는 공산당들, 남로당, 그 당시에 남로당 뭐 이런 박헌영 김달산 이런 사람들이 여러분 보통 사람들은요 힘도 없어요. 공산당들은 선전 선동에 놓여가지고 강력합니다. 10프로만 공산화가 일어나면요 세상 뒤집어집니다.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8월 15일 이전까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는 결국 공사도 되게 다 돼 있었어요. 그래서 제주에도 어려움이 생기고 여수 순천에도 어려움이 생기고, 우리나라가 그냥 끝나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쨌든 그리스도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지혜를 주셔서 나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우리나라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다. 이걸 알고 48년도에 건국을 할 때, 제헌을 국회를 할 때 하나님이 이 민족을 성령으로 인 쳐달라고 했잖아요. 전 세계의 어떤 역사가나 어떤 경제학자도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해소 못합니다. 한국 교회와 함께한 축복인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제2 건국이에요. 제2부흥에요. 제3부흥은 73년도 50년 전에 빌리그레함 집회를 통하여 73년을 기점으로 해서 73년도 엑스플로, 80년대 복음만 대상에 어마어마한 부흥이 일어난 거에요. 이제 6월 3일 상암 집회,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제4 부흥의 시작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요. 이번 6월 3일 상암집회는 전 세계 교회가, 전 세계 우리 78억 가운데, 한 18억 20억의 복음주의 교회 이 18억 20억 가운데서, 코로나 이후에 처음 있는 가장 강력한 집회에요. 그리고 앞으로 한국 사회는 10년 내로는 이런 집회에 다시 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니까 앞으로 10년 더 하면 좋겠지만 실제로 쉽지가 않아요. 우리 어른들 세대에 많은 사람들이 73년도 74년도, 내 마음에 그때 그때 가이스 저는 74년도 참석해 봤고 그다음에 80년대 복음만 대에 참석해 봤는데, 수만 내 친구들 오면 나도 그때 갔으면 좋았을걸...그런 분들이 많아요. 앞으로 10년 20년 뒤에 한국 교회의 6 삼 사암 집회에 간 것이 이 생수의 강이 터지고 부흥의 플랫폼이 되는 어떤 그런 기관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 축복을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이 은혜가 나만이 만족이 아니라, 이렇게 넘치게 될 때에 여러분 개인의 문제도 만족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이 생수의 강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 나라의 이 부흥을 위한 프론트 라인에서 영적인 선봉장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오늘 아침에 제가 기도를 하는데, 다윗의 군대를 성경에서 쭉 말씀할 때 다윗의 군대가 나중에 하나님의 군대라고 그랬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돼야 되는 것이에요. 불의의 변기가 아니라 의의 변기로 사용돼야 되는 것이에요. 그걸 위하여 우리가 생수의 강이 흘러넘쳐야 되는 것이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제한 없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이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말해 잊지 않고, 실체 있는 것을 체험하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약
이 순간 마음의 진실함을 가지고 ‘The rivers of living water!!’의 주님을 깨달아서, 폭포수보다 더 놀라운 것을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심을 믿고, 내 마음에 있는 소음과 기도의 제목을 다 올려드리고 사명자로 제한 없이 사용되어야 한다. 폭포수 같은 생수의 강이 우리 앞에 놀랍게 펼쳐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6,3 상암 집회에 우리 한국교회와 아시아 부흥의 그리고 남북 통일의 결정적인 날이 되기를 간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생수의 강의 근원 되신 주님 안에서 거룩한 갈증과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는 참 만족의 은혜를 받아서 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해갈케 하는 물댄 동산 같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은 흘러넘치는 서로의 은혜를 갖기를 소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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