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7월 5일)
제목: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말씀: 이사야 40:1-8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조철민 부목사님
-----------------

* 이사야 40:1-8,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

 
저는 요즘 책을 볼 때 인터넷 플랫폼에 인터넷 플랫폼 도서를 많이 이용해서 책을 봅니다. 인터넷 도서 플랫폼을 이용을 하면요 아무래도 예전처럼 종이를 산책을 집에 쌓아놓지도 않게 되고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저는 검색을 하면서 요즘 신학 책이 아닌 다른 책의 정보를 얻을 때 사용하곤 하는데요. 최근에 과연 어떤 주제의 책들이 많이 나왔을까 검색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소망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검색을 했더니 도서 분야에서 59, 59건 정도의 책을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이렇게 살펴보니까 대부분은 다 기독교 책이더라고요. 그래서 소망이라는 단어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단어가 무엇일까 검색을 해봤더니 희망이라는 단어로 한번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300 27번의 책을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조금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이 아무래도 제일 많은 단어 중에 하나가 여러분 이지요. 여기 계신 분들은 돈에 관심이 없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라면 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 돈을 한번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1175번이나 되는 책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마음속에 그러면 코로나 이후에 위로라는 단어를 많이 우리는 얘기를 하는데 과연 얼마나 될까? 검색을 해보았더니 1157권이나 되는 도서를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어제 검색했던 숫자였는데요. 사람들이 정말로 위로라고 하는 단어를 돈이라고 하는 단어만큼 많이 사용하는구나! 이것은 우리가 믿는 크리스천만의 용어가 아니라 많은 세상 사람들이 위로라는 단어를 관심 가지고 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 도서 플랫폼에서 가장 많이 읽는 책에 이렇게 표시가 되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이름이 뭐냐면요. ‘오늘의 위로가 도착했습니다.’ 라는 책이었습니다. 제가 그래도 한번 살펴보려고 읽었더니 내용은 되게 간단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것이 가장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너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You have to love yourself. 라고 하는 이 단어는요. 사실 우리나라 지금 제일 잘 나가는 보이 밴드 그룹이 많이 외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서 저도 한번 묵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과연 너 자신을 사랑하라. 라는 그 메시지가 정말 성경적인가? 그리고 정말로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를 주는 메시지인가? 라고 하면서 이렇게 성경을 뒤적뒤적 거리다가 제가 그러고 나서 발견했던 본문이 오늘 이사야서 40장 본문입니다.
 
여러분 이사야는요 기원전 우리가 대충 알고 있기로도 여러분들 지금으로부터 8세기 그러니까 500에서 2800년 전의 사람인데 여러분 이사야서의 뜻은 여호와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1장부터 39장까지는 주된 내용이 뭐냐면 심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40장부터 66장까지가 구원과 위로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아 그러면 이사야 40장을 한번 읽으면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 위로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과거 그 시대에 얘기했던 내용이 오늘날에도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변치 않으니까 한번 찾아보자. 라고 하면서 제가 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에 대해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나누려고 하는데요. 먼저 처음 본문 1절과 2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40:1-2,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너희는 누구를 위로하라고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내 백성을 위로하라. 라는 메시지지. 위에 따라오는 얘기가 뭐였냐면 노역의 때가 끝났다. 그리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 라는 것이 위로의 내용입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 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 죄악이 사함받았다. 라는 것은 너희가 과거 포로로 끌려가서 죗값을 이젠 다 치렀기 때문에 이젠 더 이상 종으로 살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살아도 된다.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라는 것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께서 이사에게 주셨던 메시지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위로의 메시지 이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3절부터 5절까지 나와 있는데요.
 
이사야 40:3-5,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그 첫 번째가 뭐냐면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그리고요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라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너희는 뭐라고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라고 돼 있잖아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났으니 이제 사실은 좀 쉬어도 될 것 같은데 너희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 하냐면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예비하라고 하는 단어를 좀 찾아봤더니 원어에서는 클리어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또한 있더라고요. 무슨 말입니까? 너희는 여호와의 길을 깨끗하게 해라 정화시켜라. 그가 오실 기회를 좀 치워라. 그리고 그걸 통하여서 그러면은 우리 스스로가 그러면 깨끗하게 해야 되니까 어떻게 다시 노역이 시작된 겁니까? 라고 질문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내가 올 길에 대해서 너희가 조금 정리를 해야 된다. 이것이 종으로서 삶을 정리하고 자유인으로서 살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사에게 주시면서 광야에서 너희 하나님이 길을 예비하라고 하셨잖아요. 여러분 광야라고 하는 단어는 디바르라고 합니다. 다바르라고 구성이 되어 있는데요. 무슨 얘기냐면요. 모모 로부터라고 하는 m이라고 하는 접두사와 다바르 라고 하는 말씀이라고 하는 우리 명사가 합쳐져 있는 겁니다. 그럼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라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러면 광야에서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곳이 광야라는 사실 그 얘기는 광야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 라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곳 가운데 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시면서 좀 정리하라는 얘기를 이 백성에게 주시는 거죠. 그러고 나서 사막에는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하시면서 그러면 정리하고 그 골짜기를 메우고 평탄케 하면서 무엇을 보여주신다. 라고 하냐면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주겠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좀 정리를 해볼까요?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어떻게?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리고 죄악은 사라졌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좀 정리해라. 이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만을 기준 삼는 곳이다. 그곳에서 그와 같이 정리하고 평탄케 하는 작업을 하면 사막에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준비하기만 하면 어떻게 된다? 바로 이곳에 하나님께서 우리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시겠다. 라는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러면 진정한 위로가 무엇입니까? 우리 모든 이 백성이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 여러분, 진정한 위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악이 사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그 영광을 보이겠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제 가슴 속에서 약간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심장이 뛰었습니다. 세상은 너 자신을 사랑하라.’ 그러는데 사실은 그 메시지 가운데에는 끝나고 나면 공허한 게 되게 많습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의 무엇을 하다 보면 사실은 나만 사랑하라는 얘기로 결국은 귀결되거든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지금 얘기하신 건 뭡니까?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기만 하면은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기만 하면은 내가 너희에게 여호와의 영광을 통하여서 위로를 주겠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면서 이 시대 가운데에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들에게 주시는 참된 위로이고, 그 영광을 볼 수 있다. 라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지 여러분 그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안아주심의 본당에 와서 매 주일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가 고백하는 게 주 영광 여기 임하사 열방향의 그 비추소서. 주의 은혜 구할 때 그 은혜가 이 땅 가운데 있기를 바란다.’ 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실은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뭐냐면 그러면 종에서 벗어난 자들, 자유인들이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라는 얘기를 6절에서 8절을 주십니다.
 
이사야 40:6-8,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실은 그 얘기는 무슨 얘기냐면요. 종에서 벗어난 자유인들은 이제 자기를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 이사를 통해 주신 말씀이 뭐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아멘. 저는 푸른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라는 그 찬양은 많이 불렀어도 이 말씀 가운데 주시는 의미가 이 시대를 향한 위로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사실은 좀 더 이것을 묵상하기 전까지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이 시대를 향하여서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합니까? 주님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나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했을 때 우리 모두의 고백 가운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라고 하는 그 고백이 우리 모든 성도들을 통하여서 흘러나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좀 더 우리가 세부적으로 세 가지 정도로 좀 나눠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첫째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요. 우리가 풀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풀이다라고 하는 사실 여러분 동의가 되십니까? 동의가 안 되면 여기서 지금 저 설교가 나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풀이라고 하는 거는요 마른다. 라고 지금 표현이 되어 있는데 마른다. 라는 것은 건조해진다. 라는 겁니다. 생명력이 없다는 겁니다. 어느 순간에 시들어서 이것은 더 이상 생명의 능력을 갖출 수 없고 죽게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말할 수 있다. 라는 그 사실을 갖다가 내가 인지하면서 사는 자는 내가 결국은 마르는 존재구나라고 살아가지만 사실은 성경을 찾아보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실을 그렇게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 아담이 있었던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가봅시다. 우리 모두는 아담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뭐냐면요.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얻기 위한 배의 유혹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풀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아담은 그것을 먹지 않았을 겁니다. 또 한 번 살펴볼까요? 여러분, 창세기 11장에 보면 바벨론 탑 사건이 나옵니다. 바벨탑 사건, 바벨탑 사건은 왜 일어났습니까? 인간이 모두가 다 높아지고 싶어 하는 그 욕심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 라고 하는 그 사건 그 일 때문에 모두가 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을 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지요. 자신이 풀린 줄 알았다면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장면에서 풀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풀이 마른다. 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거역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그때마다 제 마음속에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할 때 늘 찾아보는 성경이 뭐냐면 전도사입니다. 여러분 전도서 114절 말씀 같이 한번 우리가 읽어보기를 소원하는데요.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전도서 1:14,
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여러분 솔로몬의 이 고백 가운데는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이 땅 해 아래에서 살아가는 동안 모든 일을 보았는데 모두 다 헛되다. 라고 하는 헛됨, 저기 헤벨이라고 하는데 저게 원어로 무슨 뜻이냐면 숨결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숨결 숨 한 번 쉬는 것과 같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됩니까? 그만큼 인생이 뭐 하다는 거죠? 짧다. 라는 겁니다. 근데 그 짧은 인생 동안 우리는 뭐 한다는 겁니까? 바람을 잡는다는 겁니다. 바람을 아무리 잡으려고 해보십시오. 잡힙니까? 우리 인생이 그만큼 짧고 우리 인생은 무엇을 하려고 잡을 수가 없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이 인생 가운데서 무엇을 잡으려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자신이 풀이라는 사실,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풀이다, 언제든지 마른다. 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누구를 인지하냐면요 절대자이신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라는 사실을 내가 늘 인지해야만 언제든지 마르는 존재다 그리고 언제든지 나는 이와 같이 건조해질 수밖에 없고, 내 생명은 한계가 있다. 라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거든요. 저는 이 풀이다.’ 라고 하는 것을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게 우리 성도들과 함께 약할 때 강함 주시네.’ 라는 찬양을 우리 담임 목사님과 우리 성도님들 부를 때의 모습이 참 많이 기억이 났습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신의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는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예수 어린 양 종교 아니라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약하다. 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고백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풀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요 그런 찬양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다 알 수 있는 존재이고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다. 라고 하는 그 존재라면 우리는 절대로 주님 앞에서 예수 어린 양 종기한 이름을 갖다가 마음 담아 부를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진심과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이 고백을 올려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언젠가는 죽게 되고 이 땅 가운데 더 이상 소망이 없고 한계가 있다. 라고 내가 풀이다.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그 찬양이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시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내가 연약하다. 라는 사실을 아는 분에게는 이 찬양이 여러분의 가슴을 때릴 겁니다. 저는 훈련하면서 성도들에게 이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이 찬양 부르실 때만큼은 우리 교회 성도들 아마 가사 다 모르시는 분 없을 텐데 아마 부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경우들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요즘 제 주변에 얼마나 연약한 분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저도 연약한데 너무나 몸이 안 좋고 어렵고 그리고 금방 쓰러질 수밖에 없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때 우리는 누구를 찾아야 합니까? 내가 풀이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한 참된 위로를 받으시길 소원합니다.
 
우리가 풀리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마다 여러분의 약함을 강함으로 채워주시는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이 여러분의 마음과 심령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누구라는 거죠? 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꽃 하면 떠오르는 게 결국은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화사함입니다. 그리고 화려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꽃이 우리가 표현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우리가 취하곤 하는데요. 여러분 운동선수들은 전성기라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도 전성기라는 게 있으셨습니까? 괜히 옆에 있는 분 쳐다보지 마시고 자기만 먹고 보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전성기가 있으셨습니까? 사람들은요 누구나 자신만의 전성기라고 하는 거를 참 회고하고 싶고 그때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아 그 시절이 너무 금방 지나갔구나! 라는 생각을 하실 겁니다. 맞습니까? 여러분은 여전히 전성기를 지금 구가하고 계실 줄 믿습니다. 제가 그러면서 시편에 있는 우리 10315절의 말씀이 생각이 났는데요.
 
시편 103:15,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아멘. 여러분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고 앞서 풀에 대해서 얘기했잖아요. 풀은 마른다. 그런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결국에는 시들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예전에 왕년에는 참 저 잘 나가고 아름다웠습니다. 라고 하는 얘기 많이 하셨을 겁니다. 맞죠? 지금도 옆에 있는 분 괜히 쳐다보실 필요 없습니다. 분명히 그럴 겁니다. 여기 계신 분들 다 아름다우시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너무나 아끼시는 귀한 보배와 같은 것이 우리 성도님들이십니다. 그런데요 그 꽃으로 지낼 수 있는 이 땅 가운데 시기가 금방입니다. 꽃은 화려하긴 하지만 시들 수밖에 없다. 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고 화려하게 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땅을 사는 동안 꽃은 잠깐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보이기는 하지만 씻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풀과 마찬가지로 꽃도 동일하죠. 풀이든 꽃이든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바가 무엇이냐면 우리 인간은 한계가 있다. 라는 겁니다. ‘연약하다. 라는 거죠. 잠깐 뭔가 대단해 보이는 것 같아 보이고 이 땅을 살아가면서 권력을 영원히 누릴 것 같아 보이고 그리고 저 아름다움을 영원히 구할 것 같아 보이지만 꽃은 반드시 시든다. 라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섭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맨날 우리는 이 땅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우리는 왠지 저 아름다움은 계속될 것 같아 보이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것이 예수 믿는 자라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요? 그것이 중요한 부분 세 번째 진짜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하다는 겁니까? ‘영원하다.’ 라는 겁니다.
 
아멘이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요 푸른 마르고 꽃은 시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마르지 않고 시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왜 하나님께서 이사를 통해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여러분 잘 살펴보시면요 출애굽부터 한번 살펴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종에서 자유 함을 얻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신산 언약도 주시면서 그들에게 율법과 성막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정도였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그들 모습이어야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출국 1세대들은 어느 누구도 단 한 명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출애굽 2세대의 삶을 한번 살펴볼까요?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아말렉 족속과 통혼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구별되라고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또한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사사 시대 한번 거슬러 가볼까요? 사사 시대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 시대가 끝나고 그리고 사무엘 이후에 이스라엘 초대 왕인 누구입니까? 사울, 오죽했으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 나왔을까요? 그리고 다윗을 지나 솔로몬 시대 그리고 솔로몬 이후에 남과 북이 나눠지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나눠진 이스라엘 왜 나눠졌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눠졌습니다. 그런 이 백성을 향하여서 하나님께서 오늘 주시는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너희가 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여호와의 말씀만이 영원하다. 라는 사실을 너희가 좀 알았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으로 오늘 이 사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 주고 계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백성에게 소망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지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위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사모하면서 이 말씀만을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되어야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통하여서 참 위로, 여호와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을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사실은 단순히 오늘날 우리에게만 일어나는 사실이 아니라 과거 1904, 1905년에 있었던 제가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 얘기를 잠깐 해드리겠습니다. 19041031일 이반 로보트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서 모리아라고 하는 교회의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회가 일어났습니다. 간증이 일어나고 고백이 나왔습니다. 같이 말씀을 나누면서 뜨겁게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114일 금요일 밤에 그곳에서 요한 계시록 62절과 4절의 말씀이 여호와의 인을 떼자 흰말, 붉은말, 결국 그 탄자들이 어떤 일을 벌어질 것인가에 대한, 이 땅의 종말에 대한 한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회개하면서 반드시 이런 일이 일어나겠구나! 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115일 토요일 에베소서 518절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에베소서 5:18,
18 술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다. 오직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
-그 말씀을 통해 웨이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술집이 문을 닫고 그리고 음란한 것들이 하나하나 정리가 되면서 놀랍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세워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웨일즈 저녁으로 그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확산된 운동은 유럽과 미국과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거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요. 하워드 존스톤이라는 사람이 19069월에 우리나라에 들어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는 1904년에 이미 원산에서 합의에 의해서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요. 부흥 운동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영향을 받은 웰즈와 인도에서 영향을 받은 이 사람의 하워드 존스턴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라는 것들을 알려주자 우리나라에서는 같이 시너지를 받아서 1907년에 평양 대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흥 운동 가운데 가장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볼 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나라 부흥 운동에 있어서 가장 특징은 무엇이냐? ‘사경회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경회가 무엇입니까?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통해서 변화와 회개의 자리가 일어나는 것이 사경회입니다.
 
여러분, 우리 민족은요 선조 때부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우리를 통하여서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 민족이 이 성경 말씀을 사모하고 이 성경의 말씀을 같이 읽어가면서 문맹이 퇴치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호했다는 그 사실에서 우리 민족은 이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으로 품고 나아가는 데 앞장섰던 민족이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요한복음 11절 여러분 잘 아시는 말씀을 함께 제가 좀 나눠드리고자 하는데요. 그 말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1, 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십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분이 이 땅 가운데 육신의 몸을 입고 와 우리를 통하여서 무엇을 하길 원하면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기 위하여 이 땅 가운데 몸소 오셨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신 로마서,
 
로마서 8:1,
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아멘.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 안에는 무엇이 없다고요? 정죄함이 없다. 이 민족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통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묵상함으로 그분만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고 그분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위로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을 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있겠습니까? 저는 그러면서 광야에서 외쳤던 주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 요한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태복음 33절 말씀 같이 한번 우리 읽었으면 좋겠는데요.
 
마태복음 3:3,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곱게 하라 하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레 요한은요. 약대 탈 옷 입고 석천 먹으면서 광야에서 무엇을 했냐면 주님 오실 길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저 말씀대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그리고 세레 요한은 말씀의 성취를 하기 위해서 그곳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성취는 그 시절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우리 모두 사랑의 교회 여기 계신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이어지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말에 저도 우리 사역 반 집사님들과 함께 아웃리치를 다녀왔습니다. 제 마음속에 들었던 딱 하나의 생각은 뭐냐면요. 여러분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준비하면서 어떤 곳을 가서 사약을 준비할 때, 분명한 사실은 그것을 가장 싫어하는 게 누구겠습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너 풀 아니야 너 꽃 아니야 니 힘으로 다 할 수 있어. 라고 얘기하는 그러다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준비하다 보면서 내 힘을 과시하기도 하고 내가 풀이 아닌데 어떻게 나의 이런 부분들을 건드릴 수가 있어. 근데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무엇 하는 자입니까? 주님께서 오실 길을 깨끗하게 하는 자일뿐입니다. 하는 자일뿐입니다. 내가 무엇이라고 외쳐야 되냐면 딱 하나입니다. ‘나 풀입니다.’ ‘주님 당신 필요합니다.’ ‘나 꽃입니다. 내 인생 언젠가 시듭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주님 나는 이 땅 가운데 살아간 말씀이신 그리스도만을 세워 가는데, 내 모든 정성과 진심을 다하겠습니다. 주님 내 인생은 바로 오직 여호와의 말씀이신 그리고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 이것을 세우기 위해 준비된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 고백을 할 때 제일 싫어하는 건 사탄이요 제일 기뻐하시는 거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수많은 역경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좌절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야 될 길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광야에 우리는 그 길을 준비하는 자이며,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우리는 평탄케 하는 자라는 그 사실을 기억 하신다면요. 내가 지금 풀이라서 연약한 게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내가 꽃이라서 연약해서 힘이 없는 게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진짜 부끄러운 게 무엇인 줄 아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못 세우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 이제는 너희가 가서 내 증인이 되라고 했던 그 말씀 기억하신다면 우리의 모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오직 우리 주님의 말씀, 그 말씀만을 세우는 역사가 여러분 삶의 중심 가운데 온전히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무엇을 외쳐야 할까요? 무엇으로 위로받아야 될까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얘기합니다. 영원하신 말씀만 그리고 그 말씀을 세우는 일에 우리 모두가 절벽 투구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오늘도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듯이 오늘 다시금 깨달아서 말씀이신 그리스도만을 세우며 나아가는 남은 인생 되어야 한다. 다시 오실 주님을 예비하는 자가 되고, 주님 오실 길을 곧게 하는 데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는 들풀처럼 금방 말라져버릴 그런 인생들이지만 하나님과 날마다 말씀 안에서 교제하고 그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영원의 시간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확신하며 그런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이방의 포로 생활 가운데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신다
 
 




반응형
반응형

[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6월 26일 (804)

1.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로, 이달 중순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나기도 한 이 사람은?
① 제프 베이조스 ② 빌 게이츠
③ 일론 머스크 ④ 마크 저커버그

2. 마약, 밀수, 비자금 등 정보가 파악되지 않아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제활동을 뜻하는 말은?
① 내부경제 ② 외부경제
③ 지하경제 ④ 공유경제

3. 다음 중 청약가점제에서 점수를 매기는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① 무주택 기간
② 부양가족 수
③ 청약통장 가입 기간
④ 연간 소득

4.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상속세, 증여세 등 납세의무자와 조세부담자가 일치하는 세금을 뜻하는 용어는?
① 직접세 ② 간접세
③ 누진세 ④ 역진세

5. 다음 중 1에서 1000 사이의 값을 갖는 수치는?
① 지니계수
② 기준금리
③ 개인신용점수
④ 기업경기실사지수(BSI)

6. 경기가 급격히 얼어붙어 소비 위축, 주가 폭락, 실업자 급증 등 강한 충격을 주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은?
① 갈라파고스 ② 골디락스
③ 하드랜딩 ④ 소프트랜딩

7. 다음 중 기업이 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은?
① CP ② CB
③ IPO ④ IFRS

8. 외부 요인에 의해 억눌렸던 소비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은?
① 가치소비 ② 보복소비
③ 부의 효과 ④ 베블런 효과

-------------------------------------------------------------------------------------

[커버스토리] 연일 논란 노동개혁…핵심은 무엇일까요

노동개혁 관련 소식이 연일 주요 뉴스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서입니다. 정부는 가장 먼저 ‘근로시간 개편안’을 내놨습니다. 근로자가 임금을 50% 더 받는 초과근무 수행 방식을 바꾸려는 내용입니다. 현재 한 달 4주 일할 때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52·52·52·52시간으로 엄격히 통제된 것을, 69·35·52·52시간 등으로 조절할 수 있게 유연화하려 했죠. 하지만 ‘정부가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에서 주 69시간으로 늘렸다’는 주장에 부딪혀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후 ‘노조회계 투명화 조치’와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사업장 확대 적용’ 등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전자는 조합원 1000명 이상의 노조와 산하 조직은 노조 회계 공시시스템에 결산 결과를 공시하도록 한 조치입니다. 후자는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도 근로기준법에서 정하는 유급휴가, 부당해고 구제 신청, 연장·휴일·야간수당, 법정근로시간(현재 주 52시간) 등의 혜택을 보장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노동개혁안을 둘러싸고 노동계와 정부가 연일 충돌하고 있습니다. 법원도 사안별로 다른 판결을 해 혼선을 가중하고 있습니다.

노동개혁 필요성의 핵심 이유인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이해해봅시다. 또 근로기준법의 영세 사업장 적용과 관련해 최근 몇 년간 이슈가 된 ‘주휴수당’ 문제를 알아봅시다.'주휴수당'처럼 낡은 근로기준법 규정이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원인
근로기준법을 5인 미만 사업장에 확대 적용하는 이번 방안은 아직 추진 중인, 그러니까 확정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근로기준법의 ‘주휴수당’은 근로자 수와 상관없이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규정입니다. 그래서 몇 년째 주휴수당으로 인한 사회적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주휴수당은 이번 방안이 확정돼 시행될 경우 우리 사회가 마주할 혼란을 미리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유급휴일 보장
근로기준법 제55조 제1항은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1주에 평균 1회 이상의 유급휴일을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유급휴일이란 근로자가 근로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통상적인 근로를 한 것처럼 임금이 지급되는 날입니다. 이런 유급휴일에 받는 임금을 ‘주휴수당’이라고 합니다. 주휴수당을 받으려면 1주 동안의 소정근로일(사용자와 근로자가 미리 정한 근로일)을 ‘개근’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근로자가 시간당 임금 1만원, 하루 소정근로시간 8시간, 1주 소정근로일 5일이란 조건으로 일하는 경우, 5일 개근하면 1일 주휴수당으로 8만원(1만원×8시간)을 받게 됩니다. 단, 1주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초단시간근로자)이면 주휴수당을 지급받지 못합니다(근로기준법 제18조 제3항).

임금 더 지급해도 법 위반
주휴수당은 주로 영세 사업장에서 문제가 됩니다. 최저임금 시급이 5580원이었던 2015년의 사례를 살펴볼까요. A사업장은 시급 6000원, 하루 5시간 근로, 주 5일 근로를 조건으로 주휴수당을 지급했습니다. 1주 총임금은 18만원{(6000원×5시간×5일)+유급휴일 1일(6000원×5시간)}이었습니다.

B사업장은 시급 8000원, 하루 5시간 근로, 주 5일 근로 조건이었는데 사용자가 주휴수당 규정을 몰라 주휴수당을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1주 총임금은 20만원(8000원×5시간×5일)이었습니다. 결국 B사업장은 A사업장보다 많은 총임금을 지급했지만 주휴수당 미지급으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했습니다.

법이 규정한 주휴수당을 고려해 임금을 책정하는 것은 사용자의 의무입니다. B사업장 사용자는 기존 총임금에서 일부를 떼어 주휴수당으로 계산했어야 합니다. 이런 의무를 위반했으니, 유사한 다른 사업장보다 많은 임금을 지급한 사용자를 비난하는 것이 당연할까요. 하루하루 힘들게 사업을 운영하는 이가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줄 수 있다면, 주휴수당 같은 규정은 상황에 맞게 손봐야 하지 않을까요.

법 제정 때와 달라진 상황
위 사례에 대해 “1953년 근로기준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절대다수 근로자의 생활이 열악해 그들의 기초생활을 보장하려고 주휴수당을 의무화했지만 최저임금제 등이 시행되고 있는 현재는 주휴수당 규정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휴수당을 폐지하더라도 임금이 감소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근거로 제시됩니다. 사용자가 임금을 책정할 때 임금을 정한 다음 주휴수당을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임금총액을 정한 뒤 그 범위 안에서 임금 구성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즉 임금총액을 정하고 나서 주휴수당을 끼워맞추는 게 현실에서 이뤄지는 임금 결정 방식이라는 것이죠. B사업장도 정부의 시정지시를 받고 나서 근로계약서에 ‘임금에 주휴수당이 포함돼 있다’고 명시했을 뿐 시정지시 전후 임금 수준엔 차이가 없었습니다.

‘쪼개기 알바’ 양산
주휴수당 지급 조건인 ‘개근’ 여부를 놓고 사용자와 근로자 간 갈등이 빚어지는 문제도 있습니다. 영세 사업장의 경우 근로자의 출퇴근을 입증할 기록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죠.

주휴수당 지급의 번거로움을 피하려고 주 15시간 미만 근로자를 선호하는 영세 사업자가 늘고 있습니다. 지난해 전체 취업자의 5.6%에 달하는 157만7000명이 주 15시간 미만 근로자(일명 쪼개기 알바)였습니다. 주휴수당은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낡은 근로기준법 규정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NIE 포인트
1. 주휴수당의 내용을 설명해보자.

2. 기사의 B사업장이 비난받아야 하는지 토론해보자.
3. 주휴수당 폐지 시 예상되는 영향을 정리해보자.

노동개혁의 대상인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망가뜨려요
윤석열 정부는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집권 기간 가장 중점을 두고 추진하는 개혁은 국민의 현재와 미래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 개혁의 필요성에 많은 국민이 공감해 정권을 잡은 만큼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는 개혁 완수를 위해 필요한 법과 제도의 정비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죠.


이번에 추진하는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사업장 확대 적용은 3대 개혁 중 노동개혁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동개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개혁하려는 걸까요.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가장 대표적인 개혁 대상입니다.

경쟁에서 보호받는 근로자 생겨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말 그대로 노동시장이 단일한 시장이 아니라, 서로 단절된 별개의 여러 시장으로 이뤄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제학에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합니다. 이중노동시장이론은 노동시장이 ‘고임금과 고용안정이 특징인 1차 노동시장’과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2차 노동시장’으로 구분된다고 설명합니다. 분단노동시장이론은 노동시장을 하나의 시장으로 보기 어려우며,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근로자들이 상호 이동이 거의 단절된 상태로 임금과 근로조건에서 차이를 경험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는 시장 경쟁으로부터 보호받는, 1차 노동시장에 포함된 근로자가 생겨납니다. 이런 근로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시장임금(노동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는 임금) 이상의 임금을 유지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시장임금으로 일하려는 다른 근로자, 즉 1차 노동시장에 포함되지 근로자는 실업상태가 됩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노동시장에서의 근로자 간 불평등과 불공정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보다 혁신적인 생산 시스템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다는 점에서 개혁해야 할 대상입니다.

대기업·유노조·정규직은 7.5% 불과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어떤 상황일까요. 이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뤄졌는데 특히 2015년 발표된 연구가 눈길을 끕니다. 이 연구는 기업 규모(대기업·중소기업)와 노조 유무, 고용 형태(정규직·비정규직) 등 세 가지 변수로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설명했습니다.

먼저 대기업이면서 노조가 있고 정규직 근로자로 이뤄진 ‘핵심부’가 있고, 중소기업이면서 노조가 없고 비정규직 근로자로 구성된 ‘주변부’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체 노동시장에서 핵심부와 주변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중간부)이 있습니다. 중간부는 ‘대기업, 유노조, 정규직의 합집합(대기업∪유노조∪정규직)’에서 ‘세 변수의 교집합(대기업∩유노조∩정규직)’, 즉 핵심부를 뺀 부분입니다. 결국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좀 더 엄밀하게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 중층구조인 것이죠.

이 연구에 사용된 자료(2014년 3월 기준)가 다소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세 부분의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기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선 핵심부에 속한 근로자는 전체 근로자의 7.4%이고, 중간부 66.2%, 주변부 26.4%입니다. 월평균 임금은 핵심부 근로자의 임금 수준이 100일 때, 중간부는 61.2, 주변부는 34.3입니다.

주변부에서 핵심부로 이동 어려워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특징은 구분된 시장에 속한 근로자가 다른 시장으로 이동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주변부에서 중간부로, 중간부에서 핵심부로 이동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관련 연구에 따르면,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이동하는 비율이 전자는 3%, 후자는 17% 수준입니다. 특히 이 수치가 2000년대 이후 줄곧 하락하고 있어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임금을 받는 상황을 초래합니다. 핵심부 근로자들이 강력한 노동조합의 보호 아래 시장임금보다 높은 임금을 받고 다른 근로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깨뜨리는 거죠. 김병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직무대행이 최근 한국경제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귀족노조에 의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무너지고 있다”고 개탄한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NIE 포인트
1.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개념을 정리해보자.

2.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폐해를 설명해보자.
3.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대해 토론해보자.
장경영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longrun@hankyung.com

 

반응형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3년 7월 2일)
제목: "역사적 신앙관"
말씀: 에베소서 1:3~6
대표기도: 유종성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설교자: 박영선 목사님-초빙(노포교회 원로)
ㅡㅡㅡㅡㅡ
 
*에베소서 1:3~6,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
 
▶이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계획, 의지, 목적 같은 것을 어 증언하고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 목적이라는 것의 중요성은 우리들이 다 같이 경험한 것 같이 예수를 믿으면 중생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복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가장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런 우리가 아는 확인보다 더 큰 의미를 그 문장이 갖고 있다. 이 문장은 이 목적이 하나님의 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느냐? 어떻게 해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 우리가 기독교인이라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것에서 자부심과 확신을 갖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시면 모든 종교란 신이 있어야 되고, 그 신의 정체성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자들이 그 의도와 방법을 이해하고 쫓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 종교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느냐 하면 내가 진심을 가지고 간절히 빌면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보통 종교가 성립된다. 그래서 무속 신앙이라는 것은 신에 대한 설명이 없고, 신 자체가 없고, 그 갈급한 인간과 인생에서의 비는, 그 고함지르는 것들이 중요한 내용이 된다.
 
그러나 기록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주요, 부활의 주인이시며 심판자라고 얘기하는 것이 순서를 가지며 시간과 과정을 가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쉽게 기독교 신앙을 확인할 때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어? 그럼 난 구원의 확신이 있어. 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주를 만났어. 그리고 여기에 다음 질문은 모든 걸 건너뛰어서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걸 믿어. 이렇게 끝장으로 가서 그 간격이 없어졌다. 예수를 믿는 게 본인에게 확실하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게 확실한데. 오늘은 그 지갑 되는 거다. 믿고 감격했으면 데려가야 되는데 현실에 다 내버려둬서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할 때. 아무런 혜택이 없고 미 싸운 일을 아무리 외워도 곤란하고 지랄 같은 현실을 아무도 면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하시자는 건가? 라고 다시 돌아와서 왜 성경이 구약이 있는지, 신약이 있는지 우리가 왜 예수를 믿고 나서도 현실에 갇혀 있어야 되는지, 예수를 믿으면 우리 보통 승리주의라고 표현하는 것 같이 우리가 자리를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의를 베풀고 복을 베풀고 하는 자리에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이,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권력으로, 폭력으로 증언하시지 않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고 해놓고 우리에게 특권을 주시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실존적 신앙관에 역사적 신앙관을 보태야 된다. 실존적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은 규칙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신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아는 것 이것이 실천적 신앙이다. 난 예수가 누군지 알아. 나는 예수를 믿어. 예수님도 나를 알아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어. 이건 다 실존적 신앙입니다. 교훈이 아니며 어떤 구호가 아니며, 내가 알고, 내가 붙잡힌 어떤, 어떤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될 것이 구원론적인 신앙 고백이다. 구원론 적이라는 것은 예수를 모르다가 예수를 알게 되어 구원받은 소위 말하는 중생 그리고 천국이라는 소망 속에 있는 것이 다 구원론이고 하나님은 구원론을 벗어나 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해서 잘 외우시는 요한복음 3장 16장 같이,
 
*요한복음 3: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구조를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러면 안 믿는 것들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 예의를 다해서 안 믿는 님 들은 어떻게 되나요? 놈이 되나? 남이 되나? 우리의 신앙을 확인할 때마다 여러분이 쓰시는 방법은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어. 라는 이분법이란 말이다. 근데 성경은 훨씬 크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범위를 창조 세계 전체를 끌어안고 계시단 말이다. 믿었느냐 안 믿었냐는 중요한 구별이지만, 하나님은 여기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쪽에도 하나님이시더라 말이다. 우리가 아직 믿었는데도 천국을 못 갔듯이 이들도 안 믿었는데 아직 지옥에 안 가고 살아남아 있고 둘이 합작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되는 인생을, 역사를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나는 믿어 난 천국 갈 거야’ 라고 얘기하는 것으로는 일상을 살 수가 없다. 안 믿는 사람들하고 살아야 되고, 믿음으로 분명치 않은 형편을 현실을 살아야 되고, 가서 직장생활을 해야 되고, 동료가 있고, 상관과 부하가 있고,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그리고 그 나라의 형편이 있고 사회의 정신이 있고, 하나님 속에서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고백에 단순한 분명함같이 인도하시지 않고 이렇게 알 수 없는 자리에 우리를 두시는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현실적인 질문이 돼야 된다. 이 모든 질문들을 이 이분법으로 나누어서 나는 믿었어. 착하게 살면 돼. 착하다는 거는 답이 없어서 만든 말이다. 착하다는 말에 반대는 뭔가요? 악하게 사는 거 아니요, 우린 악하게 살지 않는데, 착하게 살아도 아무 보상이 없다. 착하게 산다는 걸로는 예수님이 오셔야 될 필요는 없다. 착하게 사는 것은 맹자와 공자면 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일을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썼는가? 이건 훨씬 큰 문제다. 하는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착하다는 건 우리가 아는 도덕법이다. 윤리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거죠. 잘 아시는 욥기는 구약 성경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욥기 1장에서 그는 의인이다. 라고 소개된다. 그래서 나중에 그가 고난을 받고 어려움에 처하자 친구들이 와서 너 회개해라. 하는 것은 말이 안 맞는 거래이다. 왜냐하면 설정이 욥은 의인이다. 그런데 고난을 당한다. 재산도 뺏기고 자식도 다 죽고 자기까지 병에 붙잡혀 있는데 그는 의인이라 한다. 친구들은 와서 그들이 아는 신앙은 잘하면 복 받고 잘못하면 벌 받는다. 라는 잣대밖에 없으니까 빨리 회개해라 그러니까 여기, 난 회개할 거 없다. 여러분한테 뭐라 그러겠어요? 우리도 다 하는 거야 너 교만해 니가 잘못한 적이 한 번도 없단 말이야? 라는 식의 판정밖에 내릴 수 없듯이, 친구들도 그랬다. 야, 너 말 그따구로 하는 것만 봐도 니가 잘못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잘못했단 말이냐? 이렇게 됐죠? 그러니까 욕이 그게 내가 환장하겠는 거다. 내가 잘못하지 않는데 왜 이 꼴이냐 니들하곤 얘기가 안 되는데 하나님께 직접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뭘 하냐 하면 창조 세계를 보이신다. 또 악어를 봐라 또 우박 창고를 봤냐 이거 누가 만들었느냐 왜 만들었느냐 이게 무슨 뜻이야? 이 있는 것들이 자기에게 조건이 있고 원인이 있어서 그 결과물이냐 아무 조건도 없는데 내가 만들었다 창조주시잖아요? 하나님이 욥에게 하는 대답은 이건가요? 욥의 질문은 “하나님 난 억울합니다.” “넌 뭐가 억울하냐?” 하나님, 왜 일을 이 땅으로 하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너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당당하다 이거지 그렇죠? 난 잘못한 게 없잖아요? 야 그럼 애들은 잘해서 생겨났냐? 이건 하나님의 기쁘신 뜻, 하나님의 권능의 결과물들이다. 너희는 이런 세상의 창조물들과 훨씬 다른 내 상속자야. 내 후손이야. 내가 너를 잘잘못에 따라서 보상하는 정도에 불과하단 말이야?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데 너 잘못만 안 하면 돼. 매일 집 안에서 나오지 마, 그러는 부모 봤어 너 해봐, 해봐 자식이 뭐라 그래요. 저 공부 안 하고 나가서 장사할게요. 공부는 해서 뭐해요. 나 공부하기 싫어요.
 
그러면 부모가 뭐라 그래요? 내가 언제 너보고 돈 벌어 오라 그랬어. 이 새끼야! 이 니가 커야지 뭐 훌륭해줘야 될 거 아니야! 자식이 부모만 못하다. 라고 얘기하면 평생 원수가 되는 거다. 누구가 미우면 그러세요. 왜 본인은 훌륭하신데, 자식은 그 말 못하세요 그러면 그날로 이제 안 보는 것이다. 자식을 칭찬하면 아이 부모님도 훌륭하지만, 어우! 그 아드님은 바르세요. 그러면 그날부터 만날 때마다 뭐 먹고 싶으냐고 물어보고 한다. 성경이 그러는 거예요. 야곱이 그 하나님과 씨름을 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이 고집을 꺾지 않자, 환도 뼈를 꺾는다. 집어 간다. 못 간다. 축복해 주셔야 됩니다. 왜 축복을 해달라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물어본 거예요. “그 축복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뭐냐? 그렇지 너는 야곱이지. ‘야곱입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고, 약탈자라는 뜻이다.
 
히브리의 표현으로는 날강도다. 날강도, 날강도란 강도짓이 도덕적으로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라 저는 제 필요를 누구에게서 뺏어 와야 되는 자다. 제 필요를 채워줄 자가 없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너 다시는 그 이름을 쓰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이다.” 인간이 무슨 하나님과 싸워서 얻을 게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이거예요. 너는 남의 것을 뺏어 와야 되는 보호자가 없는 넌 고아가 아니야. 넌 강도짓을 할 필요 없어. 내가 네 부모야. 자식이기는 부모봤어? 이게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희가 나를 위해 존재하라 그러지 않고, 너희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라. 라고 얘기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인데 예수가 오신 이후고 결과물인데 그걸 역사로 보인다. 야곱에게서도 그 유명한 창세기 28장 벧엘 사건이 그렇지 않은가? 돌베개하고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축복하신다. “너 누운 땅 동서남북을 다 너와 내 자손에게 줄 것이다.” 그래서 그 약속을 주시면서 그때 “니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함께하고 너를 이리로 데려올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 그게 20년이 걸린다. 근데 가서 개고생하고 말이 자꾸 험해지는 이유가 뭐야 분위기에 자신이 생겼나 보죠. 다 우리 편 내 자식이라는 느낌이 들어와서 그렇다. 20십 년을 왜 놔두는가? 거기서 악착 같이 번 것을 여기 와서 다 잃어버리잖아요? 형한테 다 내주고 혈혈단신으로 남았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거의 다 되고 너는 이스라엘이다. 그럼 그 나라 이름이 돼요. 이 역사들이 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신대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은 경우예요. 경황, 도전, 시험, 경력 이라는 속에서 우리를 만들어 간대요. 왜 왜 결론을 꼭 짚지 않고 이런 과정을 나보고 그래요. 나보고 그래요. 철이 들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 맞는 자가 되래요.
 
오늘 본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래서 찬송을 하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영배하고 무릎 꿇는 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그가 사랑하시는 이 자녀들의 광으로 같이 화음을 이루겠다. 그런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는 목숨도 건다. 그게 십자가이다. 그걸 만들려면 뭘 해야 되냐면 시간과 경호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을 나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두 단어이다. 사랑과 믿음, 이 두 단어는 상대가 없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사랑도 상대화해야 되고, 믿음도 상대화해야 되는데 우리는 계속 하나님 앞에 죽으라면 죽겠어요. 뒹굴라면 뒹굴겠어요. 지 까짓 게요 뭐.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윤리 도덕적으로 금욕적이고 자기 비하로서 증명할 줄만 알았지. 커바 커바 아버지가 너한테 뭘 원하는지 따라와 봐라. 는 데는 못 가고 있어요. 겁을 내요. 겁을 낸다고요. 사랑이란 믿음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걸 몰라요. 그러니까 그런 사랑과 믿음이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건 무슨 말이냐 하면 한쪽이 다른 쪽에 조작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각각 자발성을 가져야 된다. 각각이 그래야 사랑이 믿음이 성립이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저 아담에서부터 이제까지 전 역사에 걸쳐서 이 자발성을 기른다. 철이 들게 하며, 하나님이 누군가를 뼛속 깊이 그리고 자신의 이해와 인생이라는 경험 속에서 이 자리에 오게 만든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 제일 많이 하시는 게, 한국교회에서 제일 많이 하는 게 회개(悔改)이다. 회개의 약점은 뭐냐 하면 잘못한 것을 지우고 있지 더 나아가는 데가 없다. 윤리와 도덕과 양심은 결코 훌륭한 대로 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잘못한 것을 꾸짖을 뿐이다. 기독교가 착하게 살면이 아니라, 커야 되는 문제라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교회에 올 때는 보통 뇌를 안 갖고 오더라고요. 그래서 뭐 얘기가 되는 얘기를 하면 어쩔 줄을 몰라요. 그러시면 안 돼요. 다음엔 꼭 갖고 오세요. 냉장고에 넣어놓고 온대요. 이제 상할까 봐 그러니까 생각해 보세요. 자식을 길러보면 다섯 살 때까지가 제일 예뻐요. 그다음부터는 완전히 원수예요. 그런데 자식에게 이 병이 생기면 큰일이에요. 이게 뭐냐면 안 크는 거 애가 안 크면 큰일이에요. 그죠? 애가 다섯 살로 영원무궁이 산다. 그렇게 끔찍한 것도 없어요. 밤낮 도리도리 작곡만 하고 그럼 큰일이라고요 이가 커야 돼요. 크는 증거가 뭐죠? 키가 크죠. 체중이 늘죠. 그리고 말을 안 듣는다. 이건 잘못이 아니에요. 이건 크는 거다. 싫어가 나온다. 싫어, 난 이러고 싶어. 반발이 나온다. 우리는 이게 절정에 이 절정에 다 달았을 때를 사춘기라고 한다. 사춘기는 자기 주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납득을 해야 하겠어 난 이해가 안돼. 난 이렇게 해보고 싶어. 이걸 다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게 없으면 안 된다. 왜? 부모님이 그렇게 이렇게 하라. 그랬는가? 왜 부모님이 공부는 꼭 해야 된다. 그랬는가? 여러분 다락방 방장(순장) 정할 때도 학력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공부는 맞선 볼 때도 나오고, 성가대 대원들도 아마 학력은 봤을 걸로 생각이 든다. 학력은 학력에 등급이 있는 게 아니라 훌륭해지는 인류가 발명한 최후의 방법이다. 공부는 지름길이 없다 노력해야 된다. 하고 또 해야 된다. 포기하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을 공부해서 배우는 것이고, 인생 자체에서 배우면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로 인해서 이제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선택을 할 수 있게 되고,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는 그 아들을 보내서 출발시켜서 만들어가고 싶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 에베소서 4장 30절식으로 얘기하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라.” 라는 성경이 말하는 성숙과 신앙의 어떤 지점인 것이다. 왜 그러면 이걸 좋은 말로 하시고, 좋은 분위기에서 하시지 않고, 이렇게 못살게 구시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는데 성육신에서 그게 나타난다. 성육신이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러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 예수님께서 마지막 밤에 요한복음 17장을 유언같이 기도문으로 남기는데 거기 이런 약속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어.” 여기서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다. “우리 안에 있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게 하시리라.” 아버지가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부르신다. 이게 기독교이다. 로마서 8장에서도 “우리는 다시 두려워하는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이런 성경의 얘기들이 이렇게 복종하는 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만드는 싸움이고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분별과 판단에 절정에 올라와 하나님과 사랑과 믿음의 연합을 할 수 있게 우리를 만드시는 일을 역사 내내, 모든 인생 내내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보내신 것,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교훈한 것을 가르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배워 지키게 하라.” 라는 명령을 준다. 땅 끝까지, 땅 끝까지는 선교적 표현에서는 이방 나라들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땅 끝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에서 우리만큼 온 나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땅 끝이고 여러분이 거기 태어나셔서 기독교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한 과거 유교와 불교의 유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우리로 하여금 내가 있는 거기가 내가 너를 보낸 자리다. 라고 얘기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가지셨던 별명,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예수가 우리에게 오신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데 그 메시아가 인류 속에 들어오시므로 인류는 구원의 대상이 되었고, 그 복이 되었다. 를 나에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고 너희가 땅 끝까지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 제자가 되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니라.” 에 있는 것이다. 거기가 여러분들이 매일 일을 가는 그지 같은 현실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예수님이 볼 때 우리가 거지같은 현실이었을 것이다. 안 그런가? 죄인들 속에 오는데. 하고 아 모욕하고 드디어 죽인다. 거기에 예수님이 오시는 방식으로 우리가 보냄을 받고 있고, 우리는 그 부활을 본 자이고, 요한복음 14장식으로 얘기해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든지 내가 이루리라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 에 들어 있다.
 
예수님은 자기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기적을 도입하여 책임을 면하지 않는다. 죽는 길을 가신다. 죽는다는 걸, 여러분 최악의 진심, 최악이라 그러면 안 되고, 극단의 진심이라고 보시지 말고, 그 영광과 진리를 이해받지 못하는 데까지 가야 된다. 그들이 다 믿어야만 여러분의 사명이 완성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자리에도 가라. 끝까지 몰라도 된다. 그러나 너는 내 책임을 해라. 이렇게 보냄을 받는 것이다. 로마서 12장식으로 얘기를 하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마라. 저주하지 말고 도리어 축복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이게 세상을 살아야 되는 신자들에게 준 명령이다. 악에게 지지 말고 손으로 악을 이기라는 우리가 윤리 도덕적 정성에 묻혀 있던 신앙의 수준에서는 악을 감동시키는 선, 상상하곤 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악당이 악당 노릇하는 것 같이 너는 네 자리 지켜라. 지지 말아라. 그를 이겨야 된다. 가 아니라, 니가 흔들리지 마라. 이런 얘기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형통하게 살기는 글러 먹은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의 문을 열고 있다 누구에게나 손을 내밀고 있다. 라는 걸 알고 살아야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복음적이고 선교 적이라는 것은 말투나 어떤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는 게 아니라, 인간성에 있어야 된다. 세상이 만든 인간과 하나님이 만든 인간은 뭐가 다른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다려 줄 수 있다. 정죄하지 않는다. 보복하지 않는다. 여러분을 아주 완연하게 다르게 만든다. 그러나 얼른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누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너는 좀 이상해 뭐가 아니? 하여튼 이상해. 왜 너는 화낼 때서 화를 안 내 그리고 화 안 낼 때서 화를 내 판단 기준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길이 다른 것이다.
 
이 길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신다는 것은 여러분을 그 아들을 보내셔서 만드신 구원 메시아에게도 이렇게 선언한 것 같이 히브리서 5장 8절같이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권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 왜 순종과 온전함이 등장한가? 신인데 뭐가 부족하단 말이죠? 죄로 말미암은 사망의 자리를 경험하시는 것이다. 그가 육신으로 오신 것은 히브리서 식으로 사망을 맞보러 오신다. 사망으로 사망을 물리치러 오신다. 사망에도 들어오신다. 그러니 여러분, 어느 누구도 내가 살아있는 한,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운명이 끝났다고 저주하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현실에서 여러분이 제일 어려운 것은 나는 잘하고 싶은데, 내 옆에 동료들이 자라지 않더라. 말이죠. 악착하고 거짓말을 떡 먹듯 하고, 떡을 1년에 한 번 먹나? 이 속에서 몸부림을 치면서 왜 여기다 넣으셨어요? 그걸 모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구라이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는 순교시대도 지났고 부흥시대도 경험했다. 이것은 하나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과정이다. 목숨을 걸 수 있다. 그리고 너무나 풍성하다 감동적이다 이상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다음에 어디로 가야 돼요? 철이 들어야 되는 거야. 철이 들면 가장 중요하게 뭐가 있냐? 세상 짐을 같이 쳐야 된다. 이웃의 짐을 져야 된다. 저들은 모른다.
 
아버지와 저들을 사하소서! 는 멋있는 대사가 아니라, 실제로 죽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다는 걸 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사실, 예수님 세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 제일 억울해. 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예수가 걸으신 길과 그 존재를 잊고 있다. 예수님을 아무도 못 알아봤듯이 세상은 우리를 못 알아본다. 예수는 왜 믿어? 그딴 소리나 하죠.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세요. 넌 몰라도 돼. 그 말할 때가 제일 좋다. 그러면 여러분이 신앙생활이 현실에 이어진다. 현실에 왜 이 지지고 볶는 걸 반복해야 되나?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환경과 조건을 요구하시는가? 해서 여러분이 거기에서 변한다. 어떻게 변하는가? 알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데서 아는 것이 한 걸음이라면 그 아는 것을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된다. 실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훈련을 해야 된다. 하고 싶은데 안 된다. 물어본 적 있는가? 왜? 나는 안 돼요? 내 정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실력이 모자라니 내일 다시 하자 다시 하자!! 다시 하자 언제쯤 처리되나요? 제 경험엔 환갑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좌절과 수많은 자책감에 사로잡히는 날들을 지나가야 처리된다. 안목이 생기며 분별이 생기며 선택할 수 있으며 책임질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더 가자 그러신다. 그 영광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종말, 천국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모든 인류를 예수를 보내서 구원한 것 같이 우리를 보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기르시며, 우리를 통하여 영혼들을 부르시며, 천국에 백성들을 만들어내신다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역사와 인생의 주인의 동반자가 된다. 이를 기억하여 여러분의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실을 살아내는 그 아무것도 아닌 습관 같은, 개념 같은 그 나날들이 여러분을 만든다는 것 여러분의 그 분노와 원망과 그 절망들이 그게 우리에게는 한 단계씩 높아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뜻깊은 그 아들을 보내신 사람이 여러분들의 생애에서 다시 꽃피는 귀한 증거들을 기적들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란다.
 
♣요약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 일하고 계시듯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녀들은 저희임을 알아서 복되고 명예롭고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기적과 은혜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통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실패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영광의 찬송이 되고 세상이 상상하지 못하는 자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인류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증거가 되는 인생으로 성실하고 신실하고 충성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역사적 신앙관을 가져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성부는 태초에 인간에 대한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성도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끝없는 사랑의 아버지로서 우리들을 향한 변함없는 도우심과 인치 심을 인하여 찬양하고 있다.










반응형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28일)
제목: "십자기의 길 위에 놓인 낙원의 길"
말씀: 누가복음 23:32~43절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유현수 부목사님
ㅡㅡㅡㅡㅡㅡ
 
*누가복음 23:32~43,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오늘 보문 33절에 해골이라 하는 곳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여정의 마지막 장소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서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길 여정이 오늘 해골이라 하는 장소 다른 말로, 골고다라고 하는 이 사형장에서 끝이 났다. 예수님의 모든 길 여정은 바로 이 해골이라 하는 이 장소로 향해 왔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하필 사형장을 그 최종 목적지로 설정하시고 길 여정을 걸어오셨을까? 그것은 바로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문제인데, 주님은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이면서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은 해골이라고 하는 단어로 시작해서 마지막 43절에 낙원이라고 하는 단어로 끝이 난다. 해골의 장소에서 낙원이라고 하는 공간을 한 행악 자가 약속받고 말씀이 마무리가 되는데. 낙원이라고 하는 이 공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온전한 인재가 있는 가장 높은 하늘 영역을 가리키는 곳이었다. 이곳은 고린도후서 12장에 사도 바울이 올라갔던 셋째 하늘을 낙원이라고 하기도 했고, 부활 때까지 의인들이 죽은 후에 누리는 지옥의 공간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단 세 번 나오는 이 낙원이라고 하는 단어가 헬라어로는 파라데이소스이다. 구약 성경에는 약 28번이 나오는데, 그중에 19번이 이 낙원은 에덴동산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렇다면 해골이라고 하는 이 단어와 낙원이라고 하는 이 단어, 낙원은 에덴동산을 만약 가리키는 단어라고 한다면, 이것은 창세기의 시작과 끝과 매우 관련된 장소라고 할 수가 있다. 창세기는 2장, 3장에서 낙원 이야기, 에덴동산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낙원에 두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과 축복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에 거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셨는데, 이 영생의 축복이 창세기 마지막 장인 50장에 가면 상실되어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이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 50장 25절에서 26절을 한번 제가 읽어드리겠다.
 
*창세기 50:25,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110세의 죽음에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낙원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된 인간이 창세기 마지막 장에 이르러 죽음을 겪고 있고, 해고를 언급하고, 창세기가 종결되고 있다. 이것은 축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심각한 문제 상황을 창세기가 그 줄거리 상에서 제시하고, 창세기가 종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다시 낙원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편 입구에 두루 도는 화염검과 그룹 천사들을 두어서, 생명나무 입구에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장애물을 설치해 놓으셨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 에덴동산 낙원의 임재 가운데 다시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가? 그 태초에 지음 받았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누렸던 그 지복의 상태에 다시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바로 창세기 3장 이후에 모든 성경의 구원 역사에 줄거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창세기는 낙원에서 시작해서 해골을 언급하면서 끝났는데, 오늘 본문은 해골이라고 하는 장소에서 시작되었으나,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낙원을 허락하시면서 본문이 끝난다.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바로 예수님께서는 지금 왜 골고다라고 하는 장소에 오셨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우리가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낙원을 잃어버리고 해골이 될 수밖에 없는 저주를 받은 인간의 그 운명을 역전시켜서, 이제 해골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다시 인간을 하나님의 축복과 생명이 넘치는 낙원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여시기 위해 지금 십자가에 못 받게 계신다고 하는 것을 오늘 이 짧은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해 주신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지금 진행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오직 단 한 명의 행악자만 예수님께 간청하여 낙원을 약속받는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왜 지고 계시는지를 먼저 알아보셔야 할 것이다.
 
I. 용서와 사랑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그것은 예수님의 첫 번째 음성 속에 드러나 있다.
 
*누가복음 23:34,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의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끔찍한 십자가형의 고난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첫 일성이 저들을 사하여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하는 말씀도 중요하지만,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군인들과, 관리들과, 백성들과 이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하는 데에 있어서는 분명한 고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시는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은 이들이 모르고 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살해하는 살인, 범죄를 저지른 상황 속에서 이 사람들은 알고서 죄를 지은 사람들일까? 아니면 알지 못한 채 죄를 지은 사람들일까? 굉장히 애매한 상황이다. 민수기 15장에 따를 때, 알지 못하고 죄지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고, 회개하여 다시 용서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고의로 죄 지은 자는 영원히 이스라엘 진영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민수기 15장 24절 말씀을 읽어드리겠다.
 
*민수기 15:24,
24 회중이 부재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재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제제로 드릴 것이라.
-그런데 고의 범죄자에 대하여 민숙이가 하시는 말씀은 매우 엄격하다.
 
*민수기 15:30,
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 끊어질 것이라.
-고의로 범죄를 저지른 자는 속제의 절차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죽이는 이 자들이 만약 예수님을 고의로 알고서 죽이는 자들이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시면, 이 사람들은 도무지 용서받을 길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한 미니이다.” 선언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예수님을 죽이는 그 죄인들을 향하여 민숙의 15장에 따를 때 그들을 과실 범죄자로 만들어주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일종의 율법의 해석을 하고 계시는데,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나님, 지금 저들이 알고서 저렇게 죄 짓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순간, 예수님 죽인 자들은 용서받을 길이 없어진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이 알고서 죄지은 것인지 모르고서 죄지은 것인지 지금 애매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저들은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로 주님께서 보아주시라고 예수님이 해석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 된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율법의 해석은 최종적이며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라고 말씀하신 순간, 그들은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가 된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죽이고 있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이 무리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총합, 즉 범죄한 인류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을 알지 못하고 죄지은 자로 규정해 주시면서, 민수기 15장 율법에 따를 때 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또한 예수님 죽인 자요,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 반역한 유대인들과 이방인인 우리도,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알지 못하고 죄 지은 자로 보아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던 첫 번째 음성 속에 나타난 매우 중요한 메시지인데,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서, 십자가 고난의 그 한복판에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던 첫 번째 말씀이 율법의 해석을 통해서라도 그 죄인들을 구원할 길을 만들어내시고 지금 있으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십자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불타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겠다. 저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께 제안을 드리고 싶다.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는 기독교적 상징을 바라볼 때, 십자가는 고난의 아주 중요한 상징으로 우리가 그동안 인식해 왔다. 그러나 십자가가 물론 고난의 상징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난보다도 더 강렬하게 불타고, 고난보다도 더 강렬하게 빛을 발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께서 앞으로 모든 기독교적 상징과 신앙생활 가운데 십자가를 언급하실 때, 그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사랑의 십자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주시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 역시도 십자가를 질 때 우리가 힘들고 고난당하는 십자가만을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내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도 사랑이 없으면 어떤 고상한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십자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 우리 예수님께서 하셨던 이 첫 번째 일성을 통하여 우리 주님이 주셨던 십자가가 얼마나 큰 사랑의 십자가인지를 우리 성도님들께서 다시 한 번 마음속에 깊이 되새기시는 시간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수님을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면 바로 우리들이 그 예수님 주변에 서 있는 무리들은 그 사랑에 십자가를 지고 계신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들이 문제가 있다.
 
II. 예수님을 죽이는 무리들.
 
-지금 본문 35절, 36절, 39절에 보면 백성들은 십자가를 구경하고 있고, 관리들은 비웃고 있고 군인들은 희롱하고 있고 행악자 중 한 명은 비방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경하고 비웃고 희롱하고 비방하는 이들이 누구일까? 오늘날로 치면 예수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일까?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오늘 이 군인들과 관리들과 행악 자들 그리고 백성들의 대사를 살펴보면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디선가 들었다.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라든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아주 중요한 구약성경의 직분을 그들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들은 구약시대 하나님의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디선가 배웠고 섬겨왔던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오늘날 우리 현실을 생각해 보자면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기독교적인 많은 메시지들에 노출되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이들이 왜 그리스도를 비웃고 비방하고 희롱할까요? 이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말들 속에 이런 말들을 한다.
 
*누가복음 23:36,37,39,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에게 요청을 한다. 그런데 이 요청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당신” 당신이 내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 보라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영역과 영예와 유익과 영광을 스스로 취해보고 당신의 모든 고난에서 헤어 고난에서 벗어나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하고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남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 이 사람들의 대사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이들은 지금 성경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와 다른 그리스도를 원하고 있다. 이들이 원하고 있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구원하는 그리스도, 즉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또한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그리스도이다. 한마디로 이 사람들은 이제 십자가 상해서 자신들이 그동안 생각해왔던 그리스도와 진짜 그리스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가? 그러면 자신들이 그동안 우상처럼 만들어왔던 그리스도를 버려야 하는데 진짜 그리스도를 살해한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오류가 기독교 세계 안에 굉장히 많이 있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돈과 명예와 욕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돈과 명예와 욕망을 주는 그리스도를 선전한다. 이데올로기를 복음보다 더 사랑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자 그리스도, 혁명과 그리스도, 그리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그리스도, 청빈한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데, 이것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은 것은 다 우상이다. 문제는 예수님 주변에 있는 이 무리들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욱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의 현장에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지금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세 번째 가장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III.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자,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유명한 고백을 한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주님이 하셨던 말씀이 이와 같다. 제가 누가복음 9장 22절, 23절, 그리고 26절, 27절을 한번 읽어드리겠다.
 
*누가복음 9:22,23,26,27,
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으어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이것은 아마 문맥상에서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는 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이라고 하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하신다고 하시는지 보자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지금 누가복음 9장에서 “주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하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나시자마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인데,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라고 하신 말씀은 인자가 죽는 그 자리까지 직접 따라오라고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베드로, 너가 내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진술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바로 이 십자가 현장에서 확인하겠다. 라고 하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던 그 말씀을 너희들이 만약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 너희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인자가 오시는 그 사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그 사건은 죽기 전에 볼 자도 있느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죽은 후에 볼 자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과 함께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그 사건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 영광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느냐? 했을 때,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3장 42절에서 행악 자가 구원받은 행악 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가복음 23:42,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지금 당신의 나라는 주 예수님의 나라이고, 이것은 누가복음 9장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를 지금 이 사람이 알고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행악 자가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알게 되었고, 행악 자가 참으로 회개했는지 안 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행악 자가 어떻게 하여 이 복음을 알게 되고 주님 앞에 회개했는지는 본문에 따를 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다. 지금 이 본문은 행악 자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이 고백됨을 통하여 누가복음 9장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참된 제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라고 말씀하셨던 그 예수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제자들을 향하여 누가복음 23장이 지금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어디 갔냐는 것이다. 지금 세베대의 두 아들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이 영광중에 임하실 때 나를 좌우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를 지시는 그때가 영광 받는 때라고 예수님 말씀하셨는데, 십자가에서 지금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따를 때, 영광 받고 계시는 그때에, 영광중에 주님의 좌우편을 요구했던 세베대의 두 아들들은 어디에 갔을까? 그리고 누가복음 22장 33절에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오게도 죽는 데에도 각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라고 말했던 베드로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장 28절에서 30절에,
 
*누가복음 22:28,30,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 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 제자들에게 비록 고난에 기르지만 십자가를 지고 인자가 고난당하고 죽는 그 자리까지 함께 따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고생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시험 중에도 주님과 함께 있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바로 그 목적 주님이 그 제자들을 너무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제자들과 함께 고난의 현장에도 같이 가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시고 영광중에 임하셨을 때 그 제자들이 주님과 더불어 세상을 통치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주시려고, 주님은 그 제자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나와 함께 걸어가자 말씀하여 주셨는데, 지금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상황에서 한 명도 보이지가 않는다. 지금 구원받은 행악 자가 예수“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라고 이 이름 없는 행악 자는 어디에서 들었는지 몰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거라고 하셨던 그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 지금 예수님 앞에 고백하고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관청하고 있는데, 예수님과 매일 함께 자고, 먹고 마시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열두 제자는 주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 예수님 면전에서 들었으며, 또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으로부터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누가복음 23장에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어야 하냐고 또한 23장이 질문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그 예수님의 도망가 버린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질문일까? 아니다. 누가 복음의 독자들, 초대교회 성도들과 2천년 세계 교회, 모든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이 저녁에 누가복음 23장을 읽고 있는 바로 저희에게 누가 복음서가 말씀하고 계신다.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당신들은 오늘 만약 누가복음 23장에 그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이 이 땅에 펼쳐지는 그 시대에 있다면 어디에 있으셔야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이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결국 제자들을 향하여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그 원수들을 향해서 그냥 가만히 주님이 있으셔도 된다. 주님이 너무 화가 나셔서 아버지, 저 고의범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구원받을 가능성도 없어질 텐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마지막 한마디라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다. “아버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죄 짓는 자들이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 십자가에서 불타는 사랑 인류의 역사의 하나님께서 가진 속성이 무엇인지를 가장 역사의 한복판에서 십자가에서 지금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여주셨는데, 제자들에게도 주와 함께 그 십자가를 지고 사랑과 용서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걸어가라고 지금 누가복음 23장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죽이는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총합의 구원의 길을 내시며 그들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듯이, 해골에서 낙원으로 갈 길을 구축해 놓으셨듯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도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감으로써, 우리 아닌 다른 이들과 세상을 향하여 생명과 구원의 길을 주님과 함께 그 길을 닦아놓으라고 오늘 누가복음 23장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고난당하는 예수님의 현장에 잘 따라갈 것 같았다. “주님, 다른 사람은 다 부인하더라도 저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말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마태, 마가, 누가, 공관, 복음서에 다 기록이 되어 있다. 제자들도 아마 그때는 진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십자가가 진정으로 펼쳐지자 다 도망가 버린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고 조롱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된 내 자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를 오늘 저녁 한번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지를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그리고 낙원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가 우리 인간의 육신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그럴까? 바로 낙원 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 위에 놓여 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십자가의 길 위에 놓인 낙원 가는 길’이다.
 
십자가의 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낙원 가는 길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위에 낙원 가는 길이 놓여 져 있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으면 낙원 가는 길을 걸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눈물과 수고와 섬김과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극대화하는 인간의 본성적 육신의 눈으로는 그 십자가의 길을 보고 아연실색하여 도망가기가 우리의 본성에 굉장히 합치되기 때문에,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참으로 십자가와 그리고 낙원 가는 길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이 없을까? 예수님을 십자가 현장에서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린 제자들과 군인들과 누리들과 백성들, 그들의 그 알지 못하는 눈을, 그 가리워진 눈을 치료할 치유책은 없을까? 너무나 감사하게도 누가 복음이 그 마지막 장에서 그 치유책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 그 해결책은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열어주셔야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복음 24:30-32,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이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1)첫 번째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이 말씀을 묵상해 보겠다. ‘밝아졌다’ 라고 하는 이 단어는 동사 ‘디에 노이크세산’ 이라고 하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인데. 이 디에 노이크세산은 수동태 동사이다. 문법적인 용어를 써서 정말 죄송한데, 이것을 신적 수동태라고 한다. 그들이 눈이 밝아진 것은 스스로 눈을 밝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월적인 개입이 있었다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밝혀주셨을 때,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아보았다. 그전에는 누가복음 23장에 나와 있는 구원받지 못했던 사람들과 똑같은 상태였다. 이 눈이 밝아진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용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가 없다. 이 눈이 밝아지는 이 위대한 사건은 특별히 열왕기하 6장에 나와 있는 내용을 생각하게 하는데, 아람 왕이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도단 성으로 수많은 병거와 군대를 보냈다. 그러자 엘리사의 사환이 그 수많은 적국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엘리사에게 와서 떨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렇게 말한다. “대답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그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데 저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심에 그가 보니 불만과 불변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기 전에는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들과 함께한 자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떨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엘리사가 기도하여 하나님께서 그 사원의 문을 열어주시자, 불변고와 불 말이 엘리사를 지키고 있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보호하고 있는 성곽이 되어 주고 계시는 것을 그가 보았을 때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주실 때, 우리가 두려움과 낙심과 고난과 여러 가지 힘듦을 극복하고, 십자가의 길, 그 이면에 놓인 하나님이 예비하신 낙원의 축복과 생명을 우리가 밝게 보고, 기쁨과 감사함과 확신 가운데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문을 열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열 수가 없지만, 또한 이 본문에서는 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언제 나타났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떼어주실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고대 사회에서는 함께 한 집에서 식사하고 먹고 마시는 것은 가장 뜨거운 친교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함께 식사하며 친교하고 있을 때, 그들의 눈이 열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우리 스스로가 내 자신과 누군가의 눈을 영적으로 밝히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전도 대상자들과 자녀들과 우리의 이웃들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의 자리로 나올 수 있도록 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부탁드린다. 예수님과의 이 친교는 언제인가? 주일 예배이다. 모든 교회의 공식 예배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자리요, 찬양하는 자리요, 다락방에서 모여서 말씀과 기도와 사랑과 섬김의 교제를 나누는 그 자리, 바로 예수님과의 친교의 자리이다. 그래서 참으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주님과 함께 친교 할 수 있도록 우리 주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 눈이 열려서 주님을 온전히 따라갔던 사람, 존경하는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이 계신다. 주기철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 참배에 온몸으로 맞서다 해방 1년을 앞두고 순교하셨다. 주기철 목사님께서 평양 형무소에서 마지막 연회를 하면서 아내 오정모 사모님에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 “여보,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이 먹고 싶소.”라고 하는 말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모님의 믿음이 더 놀랍다. 자녀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정 형편도 극도로 궁핍했지만, 사모님께서는 약한 말씀 대신에 감옥에 있는 주기철 목사님을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의 입관 예배에서도 조용히 일어나서 비장한 얼굴로 조문객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제 아내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ㅋㅋㅋ 이런 놀라운 신앙 승리의 비결이 무엇일까? 저는 그것이 주기철 목사님께서 작사하신 찬송과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사절 가사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사절 가사를 한번 읽어드리겠다.
 
※아픈 다리에 싸매주고 저는 다리 고쳐주사 보지 못한 눈을 열어 영생기를 보여주니 7전8기 할지라도 제 십자가 바로 지고 골고다의 높은 곡에 나도 가게 하옵소서.
 
누가복음 23장에 엠마오로 가는 그 두 제자의 눈을 열어주셨던 예수님의 역사가 2천 년의 시간과 극동아시아와 근동아시아의 그 엄청난 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역사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을 주기철 목사님의 고백과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주기철 목사님만 그 눈이 열려지셨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듣게 되면 우리에게는 유익이 없다. 오늘 저녁 저와 여러분 모두 주기철 목사님이 보았던 것처럼 영생의 길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더욱 밝히 허락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두 번째 묵상을 하시고 마치겠다.
 
2)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는 주님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있다. 여기서 ‘풀어주실 때’라고 하는 단어가 ‘눈을 열어주실 때’라고 하는 단어와 사실 동사가 똑같다. 이 동사는 ‘디아 디아노이고’ 라고 하는데요 이 동사는 ‘해설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또한 있다. 무엇인가를 열다, 보다 그리고 해설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3장에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셨는데, 지금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상세히 설명해 주셨을 때 가리켜 성경을 풀어주셨을 때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세와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시니라. 할 때 이 상세히 설명하시니라라고 하는 이 단어 역시도 해석하다, 번역하다, 설명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 어떤 말씀일까요? 성경을 풀어주신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자세하게 능력 있게, 해석해 주신다. 라고 하는 의미이다. 바로 성경을 하나님께서 해석해 주실 때 그리고 그 해석된 성경 말씀을 성도가 이해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성도란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자가 성도이다.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 장로교회를 창시하셨던 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했었던 언급을 한 번만 읽고 마치도록 하겠다. 기독교 강요. 제6장에서 칼빈은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참된 신앙이 우리에게 빛을 바라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의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올바르고 건전한 교리를 조금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순전하게 바라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이 똑바른 길을 따라 전진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게로 나아와야 한다. - 존 칼빈-
-이와 같이 주님께서 성경을 해석해 주실 때, 그리고 그 성경을 우리에게 이해시켜 주실 때, 그리고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 안에 있는 낙원 가는 길을 볼 수가 있다. 십자가의 눈물과 고난과 인내의 점철된 그 고난으로 덮여진 그 안에 있는 천국 가는 보화와 하나님의 영광과 낙원의 길을, 우리는 주님이 성경을 풀어주시고 우리의 눈을 밝혀주실 때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 마을로 가는 그 제자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풀어주셨던 예수님의 역사는 장차 부활하시고, 오순절 날 성령님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신 다음에 교회를 통하여 하실 예수님의 사역의 전조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누가 복음 23장에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불어주셨던 그 일을 하게 하시려고 교회를 설립하셨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불러주셨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오늘 안아주심의 본당 이 자리에도 와 계신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4장은 그 옛날 예수님을 만났던 2천 년 전에 그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경험케 하시고, 또한 경험한 이 은혜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주님을 비방하고, 희롱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군인들과 관리들과 백성들과 같은 자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살아계신 주님 앞으로 인도할 사명을 주시려고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부르신 것이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 주님과 더욱 깊은 친교를 가지시고,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시므로, 눈이 밝아져 더욱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며 고난도 함께 받으실 뿐만 아니라 낙원의 영광도 확실히 약속받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요약
누가 복음서를 통하여 가장 처참한 죽음의 장소에 찾아가셔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주님의 은혜를 조명하여 주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베푸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우리가 깊이 누리도록 해주신 것과 또한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눈을 밝게 열어주시는 주님의 역사를 경험케 하셨으니 하나님 말씀을 통해 더욱 뜨거운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소망한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어로 붙었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을 경멸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쓴 것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며,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셨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이 하늘의 영광이 된 것이다. 행악 자는 예수님을 비방했으나 다른 행악 자는 회개와 함께 예수님께 은총을 구했다. 악한 행악 자는 자신의 처형이 억울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행악 자는 자신의 악행을 자인하며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다.






반응형
반응형

♣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3년 7월 1일)
제목: "자유와 연대"
말씀: 마태복음 12:46~50
대표기도: 이윤기 부목사님
찬양인도: 다음세대 연합찬양대
말씀읽기: 천혜진 학생(고등 1,2부), 봉하민 학생(다윗중등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박명수 목사님-총빙(서울 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ㅡㅡㅡㅡㅡ

*마태복음 12:46~50,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ㅡㅡㅡㅡㅡ

박명수 목사님-총빙(서울 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항상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가운데 어느 민족 누구 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어느 편에 설 건가 때때로 우리는 어느 편에 설 건가, 라고 하는 결단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 민족이 어느 편에 설 건가 하는 것을 결정해야 되는 중요한 결단의 시간이었습니다. 한쪽에서는 지금까지 1948년 자유 대한민국으로 세워진 이 나라를 자유세계와 연대해서 계속 발전해 나가야 된다고 하는 세력이 있었고, 또 한쪽에서는 중국이 지금 부상하고 있으니까, 옛날 우리는 중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으니까, 중국과 연대해서 동아시아의 한 나라로 나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두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고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유세계와 연대해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명령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셔서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세계와 연대를 강조하는 윤석열 씨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저는요 이런 2022년에 우리 한국 민족의 결단은 매우 중요한 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어느 방향으로 나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결단하는 것은 경제가 조금 나아지고 사회가 조금 안정적이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내가 누구며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될 것인가? 라고 하는 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지난 427일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행한 연설은 매우 큰 의미가 있는 연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우리 한국이 어떤 나라고 앞으로 어떻게 나가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얘기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유에 대한 확신, 동맹에 대한 신뢰,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하는 결의 우리 다 같이 한번 따라서 해볼까요? 자유에 대한 확신 동맹에 대한 신뢰 새로운 미래를 위한 결단 이 세 단어는 매우 중요한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자유세계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손잡고 나가야 되겠습니까?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와 손잡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나가야 되겠습니까? 아직 지금 자유를 무시하고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세력과 맞서서 자유 세력과 연대해서 세상을 보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나라로, 나라로 만들어야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미래입니다. 여러분들 문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대한민국의 자유가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말했어요. 대한민국의 헌법의 기초가 된 자유와 연대의 가치는, 19세기 말 미국 선교사의 노력에 의해서 우리에게 널리 소개되었습니다. 문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헌법의 기초는 자유와 연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연대야말로 대한민국의 기초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로 이것은 우리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땅에 들어왔고, 발전되었고 그래서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역사학자로서 수많은 우리나라의 대통령 가운데 이 기독교가 한국의 역사 가운데 미친 영향력을 이렇게 분명하게 국제사회에서 선포한 대통령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까지도 이런 얘기를 미국 사회 가서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기독교로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은 문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 이것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동양사회에는 자유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자는 딱 한 사람입니다. 중국의 천자 그 사람은 자유입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괜찮아요. 한 사람은 자유고 모든 사람들은 자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체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가 다 포함해서 하나님의 영상을 따라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한 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입니다. 미국 독립선언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천부적인 권리를 주었는데 그것은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쳤고 그것을 구체화한 나라가 바로 미국인 것입니다. 그 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자유를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성경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억압해서 자유로 만드는 자유의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이 땅에 자유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정치적인 자유가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임금님은 주인이고 모든 백성은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주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서 만든 새로운 나라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고 정치가 하는 것을 도 없는 나라입니다. 민주국가입니다. 경제적인 자유가 생겼습니다. 과거에는 가난에 매여 있습니다. 가난이 우리를 엄습하면은 우리는 가난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세계에서 몇 번째 간 두 다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는 거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자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부자 동네에 살고 있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가난에서 해방되었어요. 경제적인 자유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임금님이 정해주는 대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유교다. 그럼 무조건 유교를 믿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온 여러분들 누구 강요에 의해서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자발적인 의사에서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다.’ 그리고 믿음을 고백하고 여기에 나왔습니다. 동남아시아에 많은 나라가 있습니다마는 우리 대한민국만큼 종교의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나라도 없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정치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종교적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합니다. 이 자유 너무 귀한 거예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 자유에 귀한 것을 몰라요. 다른 것에 대해서는 다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를 통해서 이런 자유를 주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자연은 너무 귀한 보물입니다. 이 보물은 뺏어가고 파괴시켜버리려고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혼자 자유를 지킬 수 없는 거예요. 한번 눈을 들어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어떤 나라입니까? 중국이 우리가 자유로운 삶을 수 있도록 우리를 보호해 주고 지켜줄 나라니까? 옛날에 중국은 자유라고 하는 개념을 몰랐어요. 그런데 개방하면서 자유를 약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아 중국이 자유로운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옛날 중화주의 자유가 없는 그런 세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두만강 건너에 소련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어요. 공산지에서 해방되어서 한때 개방을 했습니다마는 다시 소련의 통치자 푸틴 짜르 황제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는 백성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연결되어 있는 가장 큰 나라 중국과 소련이 자유를 모르고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우리 옆에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런 나라가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도 과거에는 자유를 몰랐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한테 패배를 하고 우린 자유 국가가 되겠다. 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자유 국가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한반도가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주변의 나라와 연대해야 되는데, 지금 어떤 나라와 연대해야 우리가 이 자유를 지켜갈 수가 있을까요? 중국이겠습니까? 소련이겠습니까? 일본이겠습니까? 저는 그것을 제 말로 크게 말하고 싶진 않아요. 여러분들이 지금 대답을 했어요. 그런데 일본의 자유가 의심스러워요. 지금 자유로운 세계로 왔다고 하지만은 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천왕을 섬기고 있고 신도이즘을 섬기고 있고 위험합니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지만은 일본이 우리를 지켜줄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마는 동양에는 근본적으로 자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를 지키려면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와 손을 잡지 않고서는 자유를 지켜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연대가 필요한 거예요. 자유와 연대가 필요 것입니다. 이것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이 누구인 줄 압니까? 1880년에 미국 해군 제독 슈펠트라고 하는 사람이 일본 나카사키에 왔습니다. 원래는 우리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려고 왔지만은 고종이 문을 열지 않기 때문에 일본 나카사키에서 조선을 살펴본 다음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잘 기억하세요.
한반도는 운명적으로, 운명적으로 주변의 세 나라와 싸울 수밖에 없는 나라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틈바구니에서 싸움터가 될 수밖에 없는 나라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 세 나라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는 자유의 세계와 손을 잡는 길밖에 없다.” -미국 제독 슈펠트-
 
-이것이 1880년에 슈펠트가 미 국무성에 보고한 보고의 내용입니다. 여러분들, 여기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것이 무엇인 줄 압니까? 1882년에 맺어진 조미수호통상조약입니다. 미국과 우리 조선이 조약을 맺은 거예요. 그 조약 제 1조에 뭐가 되어 있는 줄 압니까? 거중조정이라고 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조선이 다른 나라에 의해서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미국이 와서 도와준다고 하는 거예요. 영어로 굿 오피스, 좋은 역할을 감당한다고 하는 것이 고종은 이 말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했습니다. 미국이 도와주겠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미국이 도와주겠지. 그래서 미국이 이제나 저제나 도와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가만히 보니까 한반도가 그 싸움터예요. 중국과 소련과 일본의 싸움터예요. 여기에 잘못 발을 내딛으면은 자기도 원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서 전쟁에 말려들게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초대 공사로 왔던 푸트 공사한테 훈령을 내렸습니다. 당신 한국의 조선에 가면은 다른 행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라. 고종이 와서 뭐라고 해도 그냥 듣기만 해라. 이렇게 훈령을 내렸어요. 그래요. 고정이 아무리 도와달라고 얘기해도 그냥 듣기만 하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 미소 잘 짓잖아요. 웃는 낯으로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좋은 사인이 있겠지 아무 사인이 없는 거예요. 바로 이때 누가 등장한 줄 압니까? 일본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메클레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게 1884년의 일이에요. 종이 수호조약이 1882년에 맺어졌고 2년 뒤인 1884년에 일본에 있는 메클레이의 선교사가 와서 우리가 조선을 도와주면 안 되겠느냐고 정작 도움을 기대했던 미국 정부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는데, 일본에서 선교사가 와서 우리가 도와주면 안 되겠냐고, 우리가 학교 사업이랄지 병원 사업이랄지 하면 안 되겠냐고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고종의 귀가 번쩍 뛰었죠. 그리고 몇 달 뒤에 알린이라고 하는 선교사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제중원이라고 하는 병원을 만들었어요. 이 병원이 오늘의 세브란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민영익을 살려냈어요.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다니 서양 문명이라고 하는 대단하구나. 그리고 곧바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이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올 것을 기대했던 미국의 도움은 오지 아니하고,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와서 우리가 도와주면 되겠냐고, 우리 학교 세워주면 안 되겠냐고 우리가 병원 세워주면 안 되겠냐고, 우리가 한국 사람들을 사랑해서 같이 일하고 싶다고 고종은 너무 고마웠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길 바래요. 미국이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닙니다. 미국이 한반도를 그리 사랑하는 나라도 아니에요. 미국이 한반도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한국을 사랑했습니다. 여러분들, 오늘 제가 얘기하려고 하는 얘기는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과 한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한국 근현대사를 이끌어가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역사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1894년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 줄 압니까?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어요. 우리 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을 했습니다. 청일전쟁이 청나라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 일어난 것도 아니에요. 우리 한반도에서 일어났어요. 고종은 청나라도 싫고 일본도 싫었습니다. 미국 선교사와 손을 잡고 대한민국이 미국과 연대해서 나가기를 원했어요. 선교사들이 도왔습니다. 고종이 일본의 그 입제에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음식을 제공한 사람도 선교사들이고, 이 고종을 보호해줬던 사람들도 선교사예요. 그러나 정작 미국 정부는 그런 일 하지 말라. 잘못해가지고 한반도에 발을 내디뎌가지고 수렁에 빠지면 나올 길이 없다. 똑같은 일이 1904년에도 벌어졌습니다. 그때는 너일 전쟁입니다.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했어요. 고종은 이 승만을 미국에 보냈습니다.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이 승만을 도와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런데 정작 누지벨트가 한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 칼을 흔들지 않는 사람에게 미국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느냐? 일단 나라를 지키려면 임금이 먼저 나서서 싸워야지 임금은 뒤에 있고, 다른 사람 보내가지고 도와 달라. 이건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고종은 그래도 거중조정 도와준다는 그 말만 믿은 거예요. 그런데 그 조항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 1919년 삼일운동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가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독립 만세 일본 사람들이라고 독립 만세 부른 것이 아닙니다. 미국 들으라고 독립 만세 부른 거예요. 그래서 미국 대통령한테 우리 독립을 원한다. 당신 애들이 민족 자결 주의에서 모든 나라는 독립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렇게 주장했으니 그 주장대로 우리를 도와 달라. 여기 앞장 선 사람이 누군 줄 압니까?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고 선교사들인 거예요.
 
여러분들, 대한 독립만을 품은 것은 한국 사람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국제사회에 전달하려고 한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전달한 줄 아세요? 우리 선교사들이 전달한 거예요. 선교사들이 한국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을 국제사회에 알려준 거예요. 이승만 박사와 그 앞장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목이 매 라고 독립만세를 불렀지만은, 국제사회에 들으라고 독립만세를 불렀지만은 국제사회는 그것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는 공산주의로 넘어가기 시작했어요. 그전에 도았던 기독교인들이 이제 미국이 도와주지 아니하니까 공산주의로 넘어간 사람들 많습니다. 그중에 유명한 여운용도 그때 공산주의로 넘어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요, 우리 한국 사람들의 기도를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1941년에 벌어졌습니다. 그때 미국에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호소했어요. 당신네들이 약속한 거중조정그 약속에 따라서 우리를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어 달라. 이렇게 요청했어요. 194241년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고, 42년에 미국에서 첫 번째 3.1절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다 모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정부에 호소했어요. 그리고 43년에 카이로 선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카이로 선언의 내용이 뭔 줄 압니까? 미국은 국제사회와 더불어서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어줄 것이다.
 
저는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첫 번째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유와 독립을 외쳤는데 많은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어요. 그런데 1943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카이로 선언을 통해서 응답을 주셨어요. 이 카이로 선언이 기미 독립 선언서 못지아니하게 중요한 것입니다. 국제사회가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거예요. 그리고 이 약속에 따라서 1945815일 우리는 일본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을 물리치고 우리는 일본에서 해방시킨 거예요. 이때 내가 맥아더 원수가 포구 령을 내렸습니다. 포구 령 전문에 뭐라고 되어 있는 줄 압니까? 우리는 1943년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기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역사 교과서에 이거 빼놓고, 미군이 와서 이거 하지 말라. 저거 하지 말라 그러니까 점령군이다 이 말만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 공부를 좀 제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할 때 남이 알려주는 것만 잊지 마시고, 전체를 다 보시기 바랍니다. 남이 알려주는 거 공부하면 안 돼요. 스스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는 그런 능력이 있어요. 저기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있어요. 우리가 새롭게 역사를 볼 줄 아는 그런 안목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대한민국의 해방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유세계와 연대하기를 원했고 자유세계를 약속을 했고 그것을 그 약속을 이룬 것이 1945년 일본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됐으니까 다 됐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적이 나타난 거예요. 일본이라고 하는 적이 물러가니까 또 다른 세력이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소련인 거예요. 이승만 박사가 미국 가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일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더니 우리를 소련에게 팔아먹으려고 그러느냐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이승만 박사가 이 목소리를 쳤을 때 미국이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19471114,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유엔이 결의를 했습니다. 앞으로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로 만들 것이다. 투표를 통해서 한국 사람들 전체가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서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이렇게 결의했습니다. 그 유엔 총회의 결의에 의해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진 것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국제사회에 자유세계에 참여하겠다고 요청을 했고, 국제사회가 그것을 응답을 했고, 유엔이 이것을 결의했고 그 결의에 따라서 대한민국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1945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때 맥아더 장군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맥아더 장군에게 기념사를 부탁을 했어요. 그때 맥아더 장군이 뭐라고 말한 줄 압니까? “우리는 1882년에 조선에게 우리가 당신 애들을 돕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오랫동안 우리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 그 약속을 지키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 이것이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건국 직전에서 맥아더 장군이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지키기가 쉬운 것이 아니에요. 이 자유로운 나라를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싫어했습니다. 이 공산주의자들은 어떻게든지 자유로운 나라를 없애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공산체제를 남한에도 확대시키려고 했던 거예요. 소위 국토 안정론, 북한의 민주기지, 여러분들 공산주의자들이 민주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은 공산주의를 뜻한다고 하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북한의 민주 기지, 다시 말한다면 공산주의 기지를 만들었으니까 이제 그 힘을 가지고 국토 완정 론 한반도 전체를 완전히 정복해서 공산국가로 만들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은 19489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기념대회 때 이 국토 완정 론이라고 하는 것을 여러 차례 여러 차례 얘기를 한 거예요. 이제 북조선의 민주 기지를 완성했으니까 남한까지 완정해서 남한까지 가서 국토를 완전히 공산주의로 정복하겠다. 그런데 이 소련과 북한 스탈린과 김일성이 잘못 판단한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소련과 북한이 힘을 합하고 중국이 연합해서 전쟁을 일으켜도 아마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선례가 있습니다. 1948년에 49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압니까? 중국에서 장개석 총통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군이 철수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장개석이 질 수밖에 없었어요. 미국이 중국도 포기하는데 미국이 중국도 포기하는데 한반도 그것을 위해서 미국 젊은이들을 죽게 만들겠는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북한이 남침을 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6.25 전쟁의 전제는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전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제가 틀렸어요. 스탈린과 김일성이 모르는 비밀 병기가 있었습니다. 그 비밀 병기를 아직도 우리 한국 정부도 몰라요. 그 비밀 병기가 뭔 줄 압니까? 한국 기독교와 미국 기독교의 자유 연대라고 하는 거예요. 좀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1950625일 약 일주일 전에 미국 특사 돌레스가 왔습니다. 여러분들 미국 워싱턴에 가면은 돌레스 공항을 통해서 워싱턴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그 워싱턴 공항 돌레스 공항에 돌레스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입니다. 이분이 특사로 우리나라에 왔어요. 이분은 기독교 장로입니다. 아버지 계열이 다 선교사회 목사입니다. 어머니 계열이 미국의 유명한 외교관 계열입니다. 철저한 기독교 신앙으로 자랐습니다. 자유세계를 지켜야 된다고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이 돌레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선교사들이 돌레스를 영락교회로 안내했습니다. 당신 장로니까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고 가라. 영락교회에 갔더니 그날따라 북한에서 내려온 우리 피난민들이 기독교인들이 거기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하나님 살려주세요. 북한에서 자유와 믿음을 찾아서 월남했는데 지금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이 자유와 믿음을 매석하려고 합니다. 이 남한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됩니까? 하나님 살려주세요! 라고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모습을 이 돌레스 장로가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돌레스가 국회에 가서 연설했어요. 연설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한국이 자유세계에 분명하게 서 있는 한국은 혼자가 아니다. 코리아 이즈 낫 얼론, ‘한국은 혼자가 아니다.’ 미국이 도와줄 것이다. 라고 하는 약속이 있죠. 그리고 며칠 후에 6.25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돌레스는 맥아더 장군과 같이 일본에 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맥아더 장군에게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는 얘기를 했을 때, 바로 그 옆에 있었던 사람이
이 돌레스였던 거예요. 덜레스는 즉각 미국 대통령에게 정보를 줬습니다. 오늘 저녁 당장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라. 그래서 유엔을 통해서 한국을 지켜야 된다. 한국을 버리면 안 된다.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전쟁이 625일날 새벽 4시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안전보장이사회가 같은 날 저녁 저녁에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렸습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 압니까? 원래 625일 모여가지고 안전 보장이 사회가 이렇게 결정했어요.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나라 유엔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만들어진 나라를 불법적으로 침략하는 것은 불법이니까 즉각 철수해라 요청했어요.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틀 후에 627, 북한이 우리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국제 질서를 무시하고, 우리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유엔 회원국들은 다 군대를 모아가지고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남한을 막아야 된다. 67일의 결입니다. 71일 오늘이 71일이죠? 오늘 무슨 일이 결정된 줄 압니까? 미국 대통령이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여러분들 놀라지 마세요. 1차 세계대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2차 세계전 때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는데 이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6.25 때 미국이 한국에 한국전에 참여하는데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돌레스가 미국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가 한국에 가서 영락교회에 가서 한국 신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봤는데 자기는 지금까지 세계에 수많은 나라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나라들의 신자들을 보았고 그 사람들의 정치의식을 보았는데 한국 사람들만큼 한국 기독교인들만큼 자유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라가 없다. 하나님께서 왜 미국을 세우셨느냐 민주주의를 지키고 기독교를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미국을 세워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서 저렇게 애타게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한국 사람들을 미국이 못 본 채 한다면, 하나님께서 미국에게 주신 사명을 미국은 무시하는 것이다. 미국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 미국을 더 이상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연설한 거예요. 그래서 미국이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정말로 6.25 전쟁 때 닷새 만에 닷새 만에 미국이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몰라요. 맥아더 인천 상륙 작전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그 빠른 시일 내에 한국에 전 한국전에 참전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우리의 비밀 병기,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과 미국 기독교인들이 연대해서 자유의 연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대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자유와 연대가 이루어졌습니다마는 이 연대가 분명한 것이 아니에요. 어떤 때는 미국이 도와줄 것 같다가 어떤 때는 포기할 것 같다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바로 이때 만들어낸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미국을 믿지 마라. 조선아 조심하라. 여러분들 미국이 찬성의 나라가 아닙니다. 미국도 자기의 국가적인 이익에 의해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의 국가의 이익에 합당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미국도 한반도를 버릴 수 있어요. 미국이 뭐 때문에 한반도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가면서 싸우겠습니까? 자기한테는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 이걸 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자유 연대가 동맹으로 바꿔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동맹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피를 같이 나누면서 싸우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이 이루어진 것이 1953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러분들 올해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뭡니까? 정전 70주년 727일이 정전 70주년이 되는 날이고, 101일이 한미동맹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러니까 정전이라고 하는 것하고 한미동맹이라고 하는 것하고 이것이 올해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70주년이 되는 그런 해입니다. 여러분들 이 한미 동맹이 맺어진 다음부터 우리나라는 달라지게 되었어요. 여러분들 한미 중 동맹이 맺어지기 이전에는 10년 단위로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일일이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청일 전쟁 노일 전쟁 대동아 전쟁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1953년 한미 동맹이 맺어진 다음부터는 칠십년 동안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여기에 주한미군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한미군이 있었기 때문에 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는 것은 세계 최고 강국인 미국과 전쟁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한미군은 평화 유지군이 되는 것입니다. 힘을 통해서 평화가 유지되는 거예요. 막연하게 그냥 잘 살아보세요. 같이 잘해봅시다. 이렇게 해가지고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국제정치학 교과서에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상에 빠지지 말아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이런 한미 동맹이 맺어지게 되었을까요? 여러분들 잘 알아야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렸죠? 미국은 믿기 어려운 나라다. 왜 그런 줄 압니까? 미국은 4년마다 한 번씩 대통령 선거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1950년 두 많은 한국전쟁에 참여했지만 이제 다음에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는 무엇을 공약으로 내세운 줄 압니까? 빨리 전쟁을 끝내겠다. 이것이 아이젠하워의 공약이었어요. 그러니 아이젠하워는 이게 어떤 수단을 다 써서라도 전쟁을 끝내야 되는 거예요. 미국은 전쟁을 끝내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는 생각이 달랐어요. 한반도의 가장 큰 비극은 분단입니다. 그래서 둘로 나눠져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으니 이런 기회에 한반도를 통일해야 되겠다.
그래서 19507월 달에 이승만 박사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금 38선은 무력화 되었다. 왜냐하면 북한이 이것을 침범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38선을 넘어서 통일하는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6.25라고 하는 전쟁을 계기로 해서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은 전쟁을 끝내기로 했고 이승환 박사는 동의를 하기를 원했습니다. 서로 의견이 안 맞는 거예요. 여러분들 미국은 세계 최강국입니다. 한국은 그 당시에 세계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갑과 을이 바뀌어졌어요. 이승만 박사는 우린 죽어도 전쟁 끝낼 수 없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전쟁 끝낼 수 없다. 그러니까 미국이 이제 아쉬운 거예요. 이승만 박사한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무슨 조건을 들어주면 무슨 조건을 들어주면, 전쟁을 끝내는 것을 동의해 줄 수 있겠느냐? 이승만 박사 이때 넌짓 하게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주한미군을 우리나라에 보내서 우리나라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침략해올 때 막아 달라. 지금 북한에 중공군들이 현재에 있는데 언제 내려오는지 모르는데 미군이 여기에 있어야 그래야 우리나라가 안전을 보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러분들 한미동맹은 미국이 원해서 맺은 동맹이 아닙니다.
 
이승만 박사가 한미동맹을 안 내주면 종전선언에 전 이 협정에 동의할 수 없고 종전협정에 동의할 수 없으면 미국은 계속 전쟁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해라. 여러분들 꼴찌가 아니고 1등을 움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국제정치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꼬리가 머리를 흔든다고. 이승만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꼬리가 미국으로 움직인 거예요. 그래서 미국 역사상 가장 큰 미국에게 부담이 되는 조약을 맺은 것이 한미 상호 방위조약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고 이승만 박사는 끝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통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미국이 미국은 이승만 박사의 조건을 안 들어주면 안 되게 돼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한미 조약 1953101일에 맺어진 한미 조약의 핵심이 된 것입니다. 이 한미 조약이 맺어졌을 때 이승만 박사는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여러분들 이 한미 조약이야말로 한미 동맹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 그렇게 기다리던 것이다. 세계의 최강국을 우리의 군대로 만들어가지고 우리를 지키는 경비대로 만들어 사용한 거예요. 여러분들 생각해보세요. 기막힌 것입니다. 여러분들 1948년에 나라가 세워졌습니다마는 이 나라는 울타리가 없는 나라예요. 그런데 주변에는 어떤 나라가 있습니까? 큰 나라가 있어요. 중국도 있고 러시아도 있고 일본도 있고 큰 나라가 있습니다. 울타리가 없으면, 이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런데 1953101일 맺어진 한미 동맹이라고 하는 것은 울타리, 그것도 말 장성보다 더 충실한 울타리를 만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이렇게 얘기했어요. 여러분들 우리 조선의 백성들이여,. 이제 염려하지 마세요. 이제 우리는 3-4대 동안, 3-4대 동안 어떤 면에서는 더 길게도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1953101일 맺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바지가랑이를 잡고 이거 들어주지 아니하면, 야곱이 얍복강 나룻터에서 씨름했듯이 그렇게 씨름하면서 만든 동맹이 한미동맹인 거예요. 이 한미동맹이 없으면은 단 아무것도 들 수가 없는 거예요. 한미동맹이 가리다 준 축복이 뭔 줄 압니까?
 
첫 번째로 자유민주주의를 만들었어요.
-여러분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너희들 잘 다스려라.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임금님 노릇해본 경험밖에 없기 때문에 임금님 되려고 했어요. 이승만 박사도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임금님 노릇 하려고 했을지 몰라요. 박정희 대통령도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다른 나라에 독재자처럼 해볼 이런 마음이 있었는지 몰라요. 이승만, 박정희 다 존경합니다마는 다 인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미국은 두 가지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반도에는 절대로 공산주의가 되면 안 된다.
 
두 번째는 한반도에는 전체주의적인 파시트 독재자만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자유민주주의가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장 경제를 통해서 경제가 발전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여러분들 6.25 후에 휴전선이 그어졌죠? 휴전선이 커지게 되니까 이제 대륙과는 더 이상 왕래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나가야 됩니까? 바다를 통해서 나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우리는 축복입니다. 여러분들 대륙과 교류 안에 가지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소련의 공산주의 중국의 봉건주의 이것밖에 얻을 것이 없어요. 그러나 바다를 통해서 미국을 가고 영국을 가고 유럽을 가면은 자유를 배우게 되고, 과학을 배우게 되고, 신앙을 배우게 되는 거예요. 바로 그래서 이 자유를 통해서 경제적인 발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이만한 경제적인 발전을 얻게 된 것이 자유세계를 통해서 자유 통상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에요. 우리 기독교가 1950년에서부터 1990년까지 어마어마하게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공산주의도 기독교를 위협할 수 없어요. 유교도 더욱 내 기독교를 위협할 수 없습니다. 오직 길은 미국을 통해서 들어오는 서구운명이에요. 그것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는 우리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서운명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5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 한국 기독교는 경쟁 상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이에요. 오늘의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는 것은 곧 한미 동맹이 그 일부분 도와주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얘기 드렸지만은 한미관계는 불변의 관계가 아닙니다.
 
미국은 4년마다 한 번 선거를 하고, 선거할 때마다 미국의 정책이 언제든지 바꿔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1969년에 일어났습니다. 닉슨이 새롭게 대통령이 됐어요. 월남전 때문에 곧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닉슨이 왜 아시아 문제를 우리가 가지고 하면 하냐? 지금 우리 미국 문제만 가지고 고민하기 너무 말라. 그래서 아시아 문제는 중국과 잘 타협을 해서 중국한테 맡기고 우리는 발을 빼자 이렇게 됐습니다. 지금까지는 미국과 연대하기는 미국이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줄 알았는데, 미국이 아시아에서 발을 빼고 이제 아시아의 맹주로서 중국과 손을 잡겠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그냥 깜짝 놀란 거예요. 여러분들 1970년대에 유신이 나오게 된 배경이 바로 이것입니다. 월남은 패망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북한의 김일성은 1967년도부터 김신조를 보내가지고 한반도를 넘어뜨리려고 가진 계획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시아에서 손을 뗀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6.25 직전에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매달려서 기도했던 것처럼, 1973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모여서 기도한 빌리그레함 전도 집회가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여러분들, 잘 기억하시기를 바래요. 빌리그레함 전도 집회의 1차적인 목표는 불신자들을 구원해서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73년도는 아시아의 판도가 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중국의 공산주의와 싸웠던 우리, 우리가 이제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겠다. 핑퐁 외교한다고 그래서 닉슨과 대통령이 만나고 있고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걱정이 된 거예요. 정말로 닉슨은 주한미군을 철수한다고 그랬어요. 실질적으로 일기의 사단을 철수를 했습니다. 정말로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때 한경직 목사님이랑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나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이 닉슨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초청하자. 바로 그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빌리그레함이에요. 빌리그레함이 닉슨과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것입니다. 한국에 오면서도 닉슨과 전화하고 한국에서 가서도 닉슨과 전화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안 된다 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나라다. 그래서 주한미군 철수가 거기에서 스톱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저는요 이 사랑의 교회가 오종현 목사님이 중심이 되어서 빌리그레함 전도대회 기념 대회를 여는 것은 매우 매우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1973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모였던 이 자유연대 자유세계와 더불어서 대한민국을 지켜야 되겠다고 하는 자유 연대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만든 또 하나의 중요한 모멘텀입니다. 많은 한국 교회들이 이런 것들을 기억하지를 못했어요. 그런데 사랑교 오정현 목사님이 이것을 기억하고, 다시 한 번 이 일을 계승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저는 마음속으로 한국 교회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니라.” 누가 우리와 연대해야 될 사람입니까? 혈통이 같다고 그래서 우리의 현대가 됩니까? 우리와 가장 혈통이 같은 북한은 우리에게 핵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와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자유를 지키게 해줄 연대가 됩니까?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미국이 서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있는 거예요. 이 세계와 연대해야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억하세요. 자유가 그냥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세요. 중국에 한때 자유가 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러시아의 자유가 올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 자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지금 전 세계의 많은 정치학자들이 얘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후퇴입니다. 민주주의를 향해서 점점점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 독재주의가 점점점점 등장하는 거예요. 저는 한반도에도 그런 나라가 그런 일들이 올까 걱정인 거예요. 그런 일들을 막으려면 자유세계와 연대해서 자유의 귀한 가치를 알고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우리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입니다. 고비 고비마다 이 나라를 위해서 우리는 기도했고, 싸웠고 대한민국 건설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누가 우리의 형제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하나로 뭉쳐야 됩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와 연대해야 됩니다. 자유세계와 연대해야 됩니다. 이것을 결정한 것이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에 꼭 그래서 좋은 지도자를 선출했고 그 지도자가 지금 그런 방향을 향해서 나가려고 합니다. 제가 안타까워 한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국민들이 없는 거예요. 언론도 여기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사랑하기 위해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이 자유의 연대의 귀함을 알고 여러분들이 자유의 연대의 핵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기도 통해서 여러분들의 노력을 통해서 자유 대한민국이 지켜지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만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잘 위로를 잃고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많은 나라들에게 우리나라가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을 지켜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온 세계에 전해서 우리도 자유를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우리의 자유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도 싸울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을 기뻐해 주셨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우리 한국 기독교는 우리가 세계에 선택된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 일에 앞장서는 우리 사랑하기 위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 귀한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는 이 자유의 귀함을 모르고 살고 있듯이, 이 자유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자유세계와 연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점점 굳건하게 만들어서 우리만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세계를 자유롭게 만드는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항상 우리가, 우리교회가 이 일에, 사랑의 교회가 앞장설 수 있기를 소망하며, 우리 안에 자유 함을 주신 주님께서 이 나라, 이 민족, 보이는 나라, 보이는 민족 뒤에 거룩한 나라의 연대, 거룩한 나라의 동맹, 영 가족끼리 합심하여 올려드리는 그 마음과 기도에 역사하여 주실 줄로 확신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 다음 세대가 바른 역사 인식을 통하여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져서, 비 진리를 막아서는 시대의 거룩한 방파 자가 되어야 한다. 주일 학교 여름 성경 캠프와 대학 청년부 여름 수양회를 비롯한 다음 세대 여름 사역을 통해 인격적으로 만나주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여, 온전한 수선대후의 역사가 일어나고, 아웃리치에 참여하는 모든 훈련생들과 단기 선교사들이 지역과 민족 열망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나아갈 때, 밟는 땅 끝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원한다. 아울러 이번 여름 코로나 이후에 코로나의 넓은 강을 건너서 아웃리치에 1510여 명 이상의 우리 많은 영 가족들께서 국내외로 오고 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고, 우리가 나아갈 때에 오직 그리스도의 향기만 남는, 우리의 공로가 아닌 주님의 사랑만이 남게 되기를 기대하며, 우리의 고집과 생각은 내려놓고, 한마음으로 우리 안에서도 은혜만 남는 헌신이 되어야 한다.
.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