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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3월 31일)
제목: "나의 지팡이에 생명의 싹이 날 수 있는가
(Can My Sprout with Life)?"-(부활절 특별 메시지)
말씀: 민수기 17:1~8, 히브리서 9:4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조이키즈(joy kids),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장명철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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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7:1~8,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 중에서 각 조상의 가문을 따라 지팡이 하나씩을 취하되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대로 그 모든 지휘관에게서 지팡이 열둘을 취하고 그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그 지팡이에 쓰되.
3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라 이는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각 수령이 지팡이 하나씩 있어야 할 것임이니라.
4 그 지팡이를 회 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 궤 앞에 두라.
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6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매 그들의 지휘관들이 각 지파대로 지팡이 하나씩을 그에게 주었으니 그 지팡이가 모두 열둘이라 그 중에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더라.
7 모세가 그 지팡이들을 증거의 장막 안 여호와 앞에 두었더라.
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히브리서 9:4,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 들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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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대가 오랫동안 준비한 귀한 찬송을, ‘그는’ 찬양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 줄로 확신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참 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봄에는 부활절을 주시고, 여름의 문턱에는 성령 강림절을 주시고, 가을에는 뭘 주시죠? 추수감사절을 주시고, 겨울에는 뭘 주시죠? 성탄절 주셔갖고 은혜의 신선도, 신앙의 신선도를 유지하게 하시고, 그리고 영적인 힘을 잃지 않도록 은혜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전 세계가 지금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고, 한국교회 6만여 한국교회가 또 이와 같이 부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모든 한국교회가 다 이렇게 복음을 믿고 삼위일체 하나님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모든 한국교회는 다 지난해 2천년 동안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가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가만히 계실 겁니까?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수없이 증가하는 거야. 수없이 성경과 수없이 수많은 파치먼트, 양피지와 파파일러스, 파피루스를 통한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냥 조금 몇 개 있어요. 근데 부활에 대한 증거는 수 천, 수만 개가 있어요. 아멘 역사적 사실을 믿으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아까 아이들 찬송하는 거 보셨죠? 물론 몇 명은 이라고 불렀지만 내가 좀 걱정되더라고요. 이분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빅토리, 빅토리! 애들이 기쁨이 충만하고 이 기쁨이 있으면 자동적으로 부활의 은혜와 부활의 진리와 능력을 자연스럽게 이웃에게 전하는 사명 자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 또 기쁨 그리고 사명 자가 되는 것이에요. 전 세계 교회가 부활주의를 맞이할 때마다 다시 한 번 확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라는 것은 너무 우리가 다 부족한 인생이지만 이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영적인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가게 되는 것이에요.
 
오늘 제가 말씀의 제목을 “나의 지팡이에 생명의 싹이 날 수 있겠는가? 라고 이렇게 붙이고, 오늘 여러분들이 본문을 읽었습니다마는 오늘 이 지팡이는 증거 궤(證據 櫃) 안에 있는 구약의 언약교회 안에 있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성경 전체로 또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전체 시각을 갖고 볼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 하는 것이에요. 뭘 예표 한다고요?
 
예수님의 신뢰할 만한 우리 성경학자들,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뭔가 읽어보겠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생명으로 꼽힌 예수님의 부활의 모형(Typology)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모든 사람들도 앞으로 부활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또 인생에 있어서도 메마른 막대기, 바싹, 마른 막대기 같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부활의 은총을 입을 것이다. 장래도 그러고 현재도 메마른 인생, 그래서 이 부활에 대한 중요한 하나의 구약의 에스겔 37장에 보면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거 기억나시죠? 마른 뼈도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 것 중에 하나가 오늘 마른 막대기 같은, 마른 막대기도 살아날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리고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지성서 법계 안에 그 언약궤, 증거 궤, 언약궤 그러는데 이 언약궤 안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두 개 하셨어요. 여기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가장 잘 신학적으로 해석한 히브리서에서 오늘 여러분들이 히브리서 본문도 읽었잖아요. 히브리서 9장 14절, 9장 4절에 다시 한 번 또박또박 같이 읽습니다.
 
*히브리서 9:4,
4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 들이 있고.
-잠깐 지성소 안에, 지성소 안에 뭐가 있다고요? 언약계가 있고, 그다음에 그 언약 궤, 아니 그 안에 시작,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 판들이 있다. 그리고 세 가지가 있는 거 언약교회 안에 그 언약궤 안에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뭐냐? 두 돌비가 있다. 두 돌비는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매일매일 삶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영적으로 인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돌비를 가지고 그다음에 거기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가 있다. 이것은 매일매일 우리의 삶은 육신의 현장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먹여주시는 것이다. 특별히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생명의 떡이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뭐가 있는가?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통하여 믿는 사람의 구원이다. 크게 보면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게 이 정통 신학이에요. 세 가지,
 
⓵성부 하나님 두 돌비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언약과 공의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 만나 항아리로 생명의 떡으로 우리를 먹여주시고,
⓷성령 하나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부활시키는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오늘 말씀 가운데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오늘 이 부활을 믿고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이 부활을 믿고 확신할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오늘 요절이에요. 요절 오늘 앞에 요절 8절, 오늘 민수기 17장 8절에 다 같이 보겠습니다.
 
*민수기 17:8,
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첫째 뭐가 뒀고요. 오늘 8절은 거의 말씀 마칠 때는 거의 다 외우고 갈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왜 주셨는가 8절에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뭐냐 하면 오늘 17장인데 민숙이 16장에 보면 참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어요.
 
무슨 사건이 있었냐면 고라, 다단 아비납이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대적을 하여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으로만 말씀하셨는가? 그러니까 소위 원망을 하고 또 그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해서 항의를 하고, 그러니까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고라, 라든지 그런 그 고라도 같이 같은 레위 지파예요. 같은 레위 지파, 그런데 우리 같은 다 레위 지파인데 모세도 레위 지파고 아론도 다 레위 지파인데 자기들만 하냐, 우리는 안 되냐 하나님이 나 한 사람만 뽑았냐,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똑같이 아니 그러면 그 사람들만 일하느냐? 모세 모세와 아론만 일하느냐? 막 이런 식으로 똑같이 했는데 겉으로 볼 때는 별로 이게 리더십이 한 사람만 있나? 다 같이 나누면 괜찮지,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어느 정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본 거예요.
 
그 중심의 바탕에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예요? 모릅니까? 병 이름이 원,불,비라는 병이 있는 거예요. 원불비가 뭐예요? 성이 원씨고, 이름이 불비야? 원망과 불평과 비난(원불비)이 그 속에 이게 잠재되어 있는 걸 보시고, 그 속에 고라, 그다음에 다단, 아비납 그래가지고 그걸 보시고,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겉으로 볼 때는 이들이 뭐 별로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속에 보니까,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도전을 하고 원,불,비에 근성에 있어가지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하세요. 바로 앞에 17장 1절 바로 앞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 반적을 한 주동자들이 고라이제 고라를 중시한 주동자들을 그냥 땅이 갈라져 가지고 삼켜버리시고, 불을 보내셔 가지고 250명을 태워버리셨어요. 어마어마하게 긴장되는 장면이에요. 이거는 우리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지만, 우리의 삶의 형편을 볼 때에 많은 걸 도전받을 수 있는 것이고, 또 상황이 이렇게 되면 일반 백성들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인 모세와 아론을 또 원망하는 거예요. 민수기 16장 바로 앞에, 그래가지고 무슨 일을 있냐면, 하나님께서 이 화중의 회중들의 이 반역, 그러니까 광야 시대부터 나타났던 이 참 잘못된 DNA 이 원,불,비 여기에 대해서 전염병을 주셔가지고, 심판을 내리셨는데 하루아침에 염병(染病)으로 1만 4,700명이 죽어버렸어요. 바로 앞이에요. 그러면, 그러면 이게 끝인가? 하나님께서는 고라 다단 아비납, 이런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인가? 1만 4,700명을 염병(染病)으로 하루아침에 죽이는 것이 하나님 뜻인가? 그게 아닌 거예요. 근본적으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잘못되어 있는 어떤 원망과 불평과 비난이란 뭡니까? 이 병을 좀 고쳐야 되겠는데, 이 병을 어떻게 고치면 좋겠나, 여기에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병을 고쳐야 비상을 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11장 1절 8절 읽었습니다마는 10절이 중요한데 17장 10절을 다 같이 또박또박 같이
 
*민수기 17:10,
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 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을 죽이고 그들을 무덤에 장사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고, 그들이 더 이상 원,불,비(원망 불평 비난)에 이 잘못된 이 병에 걸려 있는 이 불치의 병에 걸린 이들을 고쳐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고치겠는가? 오늘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통하여 그걸 고쳐야 되겠다. 그래서 그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기적을 가지고 그들이 나에 대한 내게 대한 뭘 그치고요. 원망을 거치고, 아론과 모세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람들의 그 중심을 아시니까, 그래서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도록 오늘 이 사건을 가지고 은혜를 주신 것이에요. 아무쪼록 우리 속에 있는 많은 부족한 것들이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마음속에 사람들이 되게 다 어렵잖아요. 다 힘든 부분들이 있어요. 오늘날 우리 이 사회에 만연한 이 사회의 가장 만연한 병이 원,불,비 라면 우리 속에도 그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녀 간에도. 교회 내에서도, 수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으로 이 부활절 날 각자에게 주신 음성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원망을 그치게 한 증거가 뭔가, 그러면 어떻게 원망을 거치게 한 증거를 주시는가? 첫 번째, 레위 지파만 지팡이 이름에다가 아론이라고 이름을 쓰게 했다. 두 번째 뭐라고요? 움이 트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맺혔다.
 
8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⓵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⓶움이 돋고 순이 나고 ⓷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하나님께서 각 지파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게 해가지고 거기다 이름을 다 쓰라고 그랬어요. 유다는 유다 지파 다 쓰게 하고, 레위 지파만 지팡이 이름에다가 아론이라고 이름을 쓰게 했어요. 그 12개 지팡이를, 지팡이를 가져오라고 그러고 그리고 지성서 언약궤 앞에 들어와 밤새도록 언약궤 기 위해서 밤새도록 언약 궤 앞에 있게 했고, 그 지팡이가 보니까 이튿날 보니까 이튿날, 8절에 아까 이튿날 보니까, 첫 번째 뭐가 되고요? 움이 트고 두 번째 뭐라고요? 순이 나고 세 번째 뭐라고요? 꽃이 피어서 그다음 뭐가 됐다고요? 살구 열매가 맺혔다. 이 놀라운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부활절 용어로 말하면 오늘 부활의 기적과 능력이 임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너무 참 기가 막힌 게 왜? 나머지 11지파의 막대기에는 메마른 거 그냥 그대로 두었는데,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났는가? 왜 그랬을까? 오늘 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5절에 답이 있습니다. 함께요.
 
*민수기 17:5,
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자, 이해가 됩니까? 우리 속에 기본적으로 어떤 병이 있다고요? 원불비의 병이 있다. 그 원불비의 병을 거치게 하는 것이 뭐라고요? 택한 자의 지팡이에 싹 난 지팡이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메마르다고 하는 거, 희망이 없다고 하는 거, 이제 끝이라고 하는 거, 거기에 하나님께서 싹이 나게 하셔가지고 근본적인 저와 여러분의 우리의 근본적인 잘못된 속성을 고쳐주시는 것이에요. 이유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아론을 선택하시고, 아론을 통해서 일하신 걸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요즘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 한국교회 부모님들이 자녀들 이름 붙일 때 박아론, 김아론 그다음에 정아론 이름이 있죠. 이런 이름들이 있죠? 그리고 또 이게 하필이면 왜 살구나무인가? 살구나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살구 정도가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몬드 나무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에요. 그러니까 희망과 약속을 상징하는 나무에요. 봄의 전령사예요. 지난주에 갑자기 개나리와 진달래가 핀 거 여러분 보셨죠? 우리나라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봄을 알려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는 아몬드 꽃이 봄이 왔음을 말씀하는 거예요. 죽은 것 같은 겨울에 모든 상황이 봄에 꽃피움으로 부활을 나타내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 살구나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 ‘샤케드’라는 단어는 ‘깨어 있다.’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약속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한다. 희망이 도래 한다. 그런 뜻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희망 없고 힘들고 어렵고 모든 것이 다 어둠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가끔 강력한 희망의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살구나무였어요.
 
예레미야 시대 때는 눈물의 통곡하는 시대이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정말 그 상황 자체가 어려운 시대인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뭐라고 하면, 다 안 된다고 그래 예레미야 1장 11절 12절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예레미야 1:11-12,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야, 슬프냐, 힘드냐, 희망이 없냐? 내가 너에게 증거를 하나 보여주겠다. 그것이 살구나무니라. 그리고 살고 나무를 볼 때마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이 1만 4,700명이 하루아침에 염병으로 죽고 250명이 불타 나가 죽지만, 더 이상 죽지 않도록, 더 이상 원불비에 전염이 돼가지고,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지 않도록, 살구나무의 씨를 가지고 살구, 살구나무의 싹을 가지고, 살구나무의 꽃을 가지고 살구나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리라.
 
그리고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성소에 있는 등대, 항상 불이 어두워 있어요. 항상 어둡죠. 밤에는 깜깜 어둡죠. 어둠을 밝히는 등대, 그 유일한 등대, 어둠을 밝히는 등대를 무슨 꽃 모양으로 만들라 살구꽃 모양으로 만들라. 살구나무는 어려운 시대에 희망이 없던 시대 가운데서 살구나무 그리고 살구나무 열매와 꽃을 가지고 부활의 소망을 주시려고 하는 주님의 목자의 심장이 담겨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살구나무 지팡이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습니까? 올바른 생명의 씨는 살고 열매를 맺히게 하는 줄로 확신합니다.
 
왜? 다른 지팡이 열한 지팡이 지팡이에는 싹이 전혀 나지 아니하고, 생명도 없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데 왜 아론의 지팡이에는 하룻밤 사이에, 밤새 하룻밤 사이에, 다시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가? 거기에는 하나님이 위로부터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차이가 뭐냐 면요. 생명이 있고, 없고 차이인 줄로 확신하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론의 지팡이에는 아론이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셔가지고 위로부터 온 생명의 역사가 그 지팡이에 임하게 된 것이에요.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에게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생명의 씨에 대해서 눈이 열리도록 만들어주신 하나님이신 것을 이 부활 주일날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현장은 메마른 막대기예요. 우리의 삶의 현장은 원망과 불평도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의 지팡이에 생명의 씨가 있으면, 반드시 우미 돋고 순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자라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생명이 있으면 자라게 돼 있는 것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약화시키지 말아야만 하는 것이에요. 다시요. 따라가서 생명이 있으면 생명의 씨가 있으면 꽃이 핀다. 열매가 맺힌다. 아멘 생명의 씨가 있으면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움이 돋고 그다음에 자라게 되어 있는 거예요. 생명이 있으면 자라게 되어 있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포인트는 이겁니다.
 
삶의 현장에 메마름이 있고, 수많은 원망이 있고, 수많은 아픔이 있고,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염병이 있고 다 있다 할지라도 오늘 신약시대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통한 말씀의 씨와 생명의 씨가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이에요. 우리 주위에 지금 당장은 메마르고, 당장은 어렵고, 당장은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부활의 능력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 속에 강력한 생명의 씨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에요.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그렇습니다. 주님!! 하고 소망도 없고 빛도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고 구하고 하나님께 손을 들면 그 잠재력이 확대되어 가지고 움이 돋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되어 있는 것이에요. 이게 너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나 혼자만이 아니라, 이사야 27장 6절에 보니까 뭐라고 나와 있는가 너무나 중요한 다 같이 함께요.
 
*이사야 27:6,
6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우리로다.
-오늘 이사야에서 말하는 자 27장에 말하는 이스라엘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믿고 따르고 확신하고 이 말씀을 이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지면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움이 돋고 꽃이 피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가 적용하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의 삶의 지팡이가 생명의 지팡이가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지팡이가 내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의 시작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어디서 왔냐? 이게요. 모세의 지팡이였다는 거예요. 모세의 지팡이를 아론이 가져가고 거기에다 갖다 놓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무리한 해석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모세의 지팡이가 어떻게 생명의 지팡이가 되고, 어떻게 아론에서 싹 난 지팡이로 변할 수가 있었습니까? 본래 모세는 자기 생업에 지팡이가 있었어요. 자기가 양치는 지팡이가 있는 거예요. 그 양치는 지팡이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 지팡이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라. 여러분들 이해가 되십니까? 그랬을 때 모세의 지팡이가 단순히 모세의 지팡이, 본래 모세는 그 지팡이 양치고 생업을 유지하고 그런 지팡이였어요. 그 지팡이가 출애굽기 4장 20절에 보니까 뭐라고 나와 있는가 이렇게 나와 있어요. 같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4:20,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할렐루야! 자기가 모세가 양치는 지팡이였어요. 그 지팡이가 무슨 지팡이로 변화되었다고요 하나님의 지팡이로요. Key는 이거예요. 살구나무의 싹이 나고, 원불비를 그치게 하는 생명의 싹이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믿고, 부활의 이 귀한 축복을 가지고 고백하고 확신하고 찬양하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일상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는 것이에요. 내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해 주시는 거예요. 내 삶이 아니라 주님이 내 삶을 이끌어가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이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지팡이, 공부의 지팡이도 있고, 직업의 지팡이도 있고, 가정의 지팡이도 있고, 내 삶에 수많은 지팡이들이 있어요. 그것을 내 것으로만 끝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할 것인가? 모세의 손에 들렸던 그 단순한 지팡이가 아론의 손을 거쳐서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됐는데, 기적의 지팡이가 됐는데, 일상의 지팡이가 기적의 지팡이가 되고, 일상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고, 일상의 지팡이가 생명의 지팡이가 되고, 기가 막힌 일들이 벌어진 거에요.
 
내 공부가 내 몸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내 사업이 내 사업으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내 가정에 내 가정으로만 끝나지 아니하고, 이 가정이 하나님의 가정의 지팡이가 되게 하시고, 내 사업이 하나님의 사업의 지팡이가 되게 하시고, 내 공부가 내 공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에, 하나님의 공부에 지팡이가 되게 하시고, 그럴 때 가슴이 뛰는 것이에요. 남들보다 더 큰 지혜를 주시는 것이고, 여러분의 손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손에 든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주 “네 손에 든 게 뭐냐?” 너의 일, 너의 공부, 너의 사역, 너의 가정,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너는 사명의 지팡이를 가진 거야. 너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신약 적 해석은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五甁)二魚)의 사건을 통하여,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초라한 어린아이 도시락 하나,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지만, 이게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하면 그것이 오병이어(五甁)二魚)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에요ㅣ 축복의 근원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에요.
 
제가 우리 교우들 작년부터 ‘2033-50 비전’을 얘기하면 어떤 분들은 아이고야! 아이고야! 이래 할지 모르지만,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우리 속에 잠재되어 있는 생명의 씨앗이 이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통하여 기적이 일어날 때, ‘2033-50 비전’을 통하여, 여러분도 살고 우리 교회도 살고 한국교회도 사는 것이에요. 세상에 10년 내로 대한민국의 50%가 예수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강력한 하나님의 지팡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과 꿈에 대한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주보 안에 여러분들 태신자 카드가 들어있어요. 나는요, 깜짝 놀랐어요. 어저께 저한테 우리 교회 권사님들이 이제 부활 주일을 위하여 준비하는 권사님 팀이 있는데요. 뭐 했어요? 그러니까 목사님 부활절 계란 만들었어요. 그럼 몇 개를 만들었어요? 5천 개? 아니에요. 목사님, 몇 개 만 개 아니에요 몇 개? 아니에요 몇 개를 만들었는데요? 3만 개요. 내 속으로 ‘간도 크다.’ 그렇지만 산더미처럼 있잖아요. 저 밖에서 스쳐 지나려면 지나가세요. 그러나 주님 저 태신자를 향한 저 달걀을 가지고, 뭡니까? 달걀을 가지고(전도용으로 판매함) 우리의 메마른 지팡이가 생명의 지팡이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시대를 가르는 지팡이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그래서 여러분의 삶의 지팡이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여러분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때 여러분의 직업도, 주님이 주인 되어 주시고 가정에도, 주님이 되어 주님 되어 주시고, 우리의 수많은 삶의 어려운 환경들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국에 좀 큰 사업을 하시는 어떤 장로님을 만났어요. 이분이 저한테 이제 간증을 하셨는데, 20몇 년 전에, 20여 년 전에 하루는 그 장로님 그 공장에 불이 났어요. 불이 나가지고요. 완전히 다 타버렸대요. 공장이 근데 이분은 본래 치밀하고 눈빛도 강하시고 철저한 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좋은 장로님이셨지만 불나기 전까지는요. 눈에 불이 번쩍번쩍 나고 말이 좀 이상하네요. 불나기 전까지는 눈에 불이 번쩍번쩍 나고 그래갖고 직원들이 벌벌벌 떨고 그랬대요. 그리고 눈물을 거의 흘려본 적이 없대요. 그런데 불이 나가지고 완전히 공장이 다 무너지고 완전히 망해놓으니까 이분이 이제 경비실 밖, 경비실 옆에 망한 공장 앞에 있는 경비실 옆에서 어떤 그 옆에 그 벽에서요. 이 장로님이 사장인데 오는데 눈물을, 눈물을 처음으로 처음 울었다는 거야. 그래서 경비원이 ‘아이고 우리 사장님 울 때가 다 있으시네요.’ 그러면서 사장님 하면서 위로했다는 거에요. 경비원이. 근데 이제 이 장로님이 그런 생각이 들었대요. 나는 예수님 잘 믿고, 열심히 하려고 그러는데,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가? 그런데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가?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갑자기 하나님께서 딱 깨닫게 하시는 건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쁜 일이 있겠는가?’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기는 그런 원불비죠? 그렇죠.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하신 일에 나쁜 일이 있겠는가? 그건 지금 그분의 속에 잠재된 생명의 씨앗이 움트는 것이 맞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나쁜 일 있게 다 하니까 갑자기 막 얼굴이 굳어지고 막 눈물이 나고 그런 상황이 갑자기 얼굴이 평안해지더래요. 얼굴이 막 밝아지더래. 얼굴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은행에 외국인 행장이 그 얼굴을 보면서 장로님이 바뀐 얼굴을 보고 돈을 빌려줬대요. 그래갖고요. 딱 8개월 만에 딱 8개월 만에 완전히 망한 공장을, 8개월 만에 완전히 새롭게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지울 수 있냐 그러니까, 불이 나도 터는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불이나 터는 그대로 있으니까, 기초는 바로 돼 있으니까 그냥 세우기만 하면 된다는 거에요. 매섭고 철저한 성격이 바뀌어 가지고, 밝은 얼굴 가지고 이 풍랑~~ 더 빨리 갑니다. 라고 찬송하고 그리고 본인만 바뀐 게 아니라, 회사 직원들도 바뀌었대요. 그러고 난 다음 8개월 만에 불난 곳을 다시 완전히 다 지어가지고, 그다음부터 사업이 불처럼 일어났대요. 불처럼요. 큰 사업을 해 다시 그분이 그래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에는 절대로 나쁜 것이 없다’. 그럴 때 얼굴이 바뀌고 삶의 환경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불이 나서 완전히 망했지만, 하나님께 전적 위탁하니까 그 생명의 씨앗이 불처럼 일어난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바뀐 게 뭐냐 하면, 이전에는요 다 똑똑하시니까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항상 비판을 했대요. 뭔가 항상 비판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사건 이후에 20년이 넘도록 설교 시간에 졸은 적이 없대요. 설교 시간 모든 설교가 은혜가 된 거에요. 그리고 이분의 목표가 인생이 바뀌었대요. 목표가 단순함을 주고, 심플, 그래서 그 회사의 모토가 심플 이에요. 심플, 어떤 회사들은 정직, 근면, 성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 사업하자, 이런 거 다 있는데 이번은 단순하게 ‘우리 회사는 단순함을 추구한다.’ 단순한 뭐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창조 질서의 은사가 있으면, 그 창조 질서의 은사대로 나는 봉사하면 된다. 누군지 궁금하시죠? 나중에 주님께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완전히 망한 지팡이가 부활의 지팡이가 된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하나의 사업을 설명을 드렸는데요. 내일부터 특새가 시작됩니다. 이번 특새의 주제가 뭐죠? 어디 안 써놨습니까? 엘리베이터고, 뭐고 가는 곳마다 써놨는데, “사는 날 동안에 능력이 있으리로다.” 사는 날 동안 어떻게 능력 같습니까? 여러분과 저는 우리 근본적으로 원불비의 인생이에요. 자녀는 자녀들대로, 부모 원망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요놈의 자식들을 죽도록 키워놨더니, 요따위로 행하고, 성도는 성도대로 한국교회의 이 가나안 성도들, 왜 가나안 성도라는 말이 되냐고? 가나안 성도들, 나는 교회가 이러이러니까 나는 안 나가 안 나가, 거꾸로가 가나안 아닙니까? 여러분 그거 어떻게 이 병을 어떻게 고칩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셔가지고, 더 이상 안 죽도록, 더 이상 전염병 안 들도록, 더 이상 땅이 갈라져 죽지 않도록, 아론에서 싹 난 지팡이를 통하여 우리의 지팡이가 생명의 지팡이, 부활의 지팡이, 역사의 지팡이 되도록 만들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오늘 찬송가 각사 가운데 삼위 일체 하나님 찬양할 때, 소망 없고 빛도 없는 어두운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사 우리에게 오셨고, 예언하신 약속대로 말씀이 오신데, 그리고 2절이 중요해 부활하신 그 아침 밭의 문이 열리고,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죽음을 이기셨네. 생명의 길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오는 자 모두 회복되리. 모두 부활되리.
 
-내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로 바뀌니, 오늘 이 부활의 능력을 저와 여러분이 다 체험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굉장히 신비하게 들려질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것이 모세의 지팡이가 그렇게 변화되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는 무리함이 없는 깨달음과 은혜를 받게 되는 겁니다. 그 지팡이는 홍해를 가르게 되었습니다. 반석에서 샘을 터뜨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지팡이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메마른 여러분들과 저의 삶의 지팡이에 생명의 씨앗이 잠재된 것을 믿으시고, 오늘 이 말씀 그대로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의 모든 원불비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오늘 이런 마음에 아멘만 하면 안 되고, 오늘 3만 개 우리가 달걀을 우리가 앞에 놓고 또 태신자 작정을 하고, 아까 말씀한 대로, 움이 트고,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이것이 나 혼자만 있으면 안 되고, 같이 역사를 해야 되는 것이에요. 같이 역사를 해달라고 그래서 주보 안에 태신자 작정 카드가 있죠? 보시고, 하나님 아버지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에 꼭 이분도 인생에 메마른 막대기가 싹이 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생에 메마른 그 삶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태진 작정 카드 기도하시고 쓰고, 그다음에 우리 헌금할 때, 같이 내고 오늘 부활절 헌금도 소중합니다마는 그 이상으로 새 생명 축제 태신자 작정까지도 오늘 부활절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 되게 될 것입니다.
 
♣요약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원망과 불평과 비난의 병을 치료받는 자들이 다 되어, 나의 지팡이의 생명의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나의 삶의 지팡이에 이제 메마른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지금은 바싹 마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 안에 생명의 씨의 거룩한 잠재력이 사명의 지팡이로 꽃이 피어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구하고, 특별히 나의 인생, 나의 직업, 나의 공부의 지팡이, 나의 모든 삶의 지팡이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게 특새에서 간구해야 한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글로벌 봄 특별 부흥회를 통하여 ‘사는 날 동안 이 능력을 체험’하는 자가 되어서, 다시 한 번 나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수 있도록 충만한 은혜를 소망하며, 복음의 씨앗을 심는 특새가 되고, 우리의 사명인 지상명령을 순명하는 자가 되어 주님의 기뻐하시는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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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03월 30일)
제목: "고난(苦難)의 잔(盞)을 날 위해 다 받으셨나이다"
말씀: 요한복음 18:1~7
찬양인도: 부목사님들, 여순장반 연합찬양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대표기도: 김혜진 권사님(여순장장)
말씀읽기: 최준영 어린이(유년부), 유은우 어린이(유년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ㅡㅡㅡㅡㅡ


*요한복음 18:1~7,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오정현 담임목사님.
-이제 다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함께 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8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아마 저 유년부 성경 봉독한 아이들은 평생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요한복음 18장에 예수님이 당하신 이 고난에 대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얼마나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말씀에 이 은혜가 저들에게 말씀의 씨가 뿌려져가지고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소년부도 450명이 오늘 참석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6학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평생 붙잡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의 선한 목자예요.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 이름이 정창식 선생님이었는데 나를 오라고 그러더니 현이 너 이리 와 그러더니 나 “너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야.” 그러더라고요. 물론 나에게만 얘기하지 않았겠지요. 내가 지금 생각하면 그렇지만, 나는 그걸 무슨 선생님이 나한테 정말 주시는 좋은 말씀을 받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5학년 6학년들, 다시 한 번 나는 정창석 선생님보다도 더 저기 뭐야 강력한 마음으로 오늘 우리 아이들 통일 시대의 위대한 인물이 될 거예요. 아시겠어요? 통일 시대에 위대한 인물들이 될 것입니다. 아멘! ♬우리 소년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주의 뜻대로 항상 살리라.!~~

그다음에 우리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영적 군사들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오늘은 성토비새입니다. 우리가 성 금요일 예배를 많은 교회들이 드리는데, 우리는 토요일 전 새벽 예배가 있기 때문에 성 금요일 예배를 성 토비새로 이렇게 바꿔서 드리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어젯밤에도 보니까, 어떤 교회들은 전에 우리 제가 사역할 때는 전에 세족식도 하고, 또 성도들을 주 성찬식도 하고 그랬는데, 오늘 이 토비새가 세족식도 성찬식도 또 다 포함한 십자가의 깊은 신비와 능력이 여러분들과 서로 체험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제가 말씀을 짧게 마치고 나면, 우리 교회 교육자들 공영 1팀부터 9팀까지 했는데 목양 4팀만 빼고, 1팀, 2팀, 3팀, 5팀, 6팀, 7팀, 8팀 해가지고 가상칠언, 우리 가상칠언(架上七言)에 대한 말씀을 팀장들이 팀 프리칭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오늘 이 성토비새의 새벽 평생 기억되는 시간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제가 지난 주일날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는 우리를 위하여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예수님의 영적 고통은, 영적 고통은 단순히 무슨 욕신의 고통 그 정도가 아니라, 지극한 영적 분리의 고통, 하나님과 분리의 고통을 가지셨다. 그런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좀 더 구체적으로 한두 가지 주님이 맡으신 고난의 잔이 어떤 잔이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좀 끝까지 제가 정리를 하도록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잔을 두 세 가지를 가지고 기도를 할 터인데 이렇게 하겠습니다.

이게 복음의 신비인데요.
첫째 주님은 우리가 어떤 고난을 받으셨는가? 오늘 주님께서 이제 기드온 시냇가를 걸어가시고, 그다음에 감람산에 올라가서 생긴 사건인데, 이 사건의 배경은 요한복음 18장의 배경은 역사가 조세푸스가 그런 얘기를 해요. 1년에 한 번씩 유월절에,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가지고 소위 대속 죄를 하면서 ‘유월절을 하면서, 수많은 양들을 땅들이나 짐승의 피를 드리는데, 적어도 그 당시에 한 20만 마리를 바쳤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말을 많이 해서 못하는 20마리가 아니고 이십만, 마리를 바친 것입니다. 이제 오늘 감람산에 올라가시는데 맞은편 감란산은 또 이렇게 성지 읽어보시면 아십니다마는 첫 번째는 주님의 고난의 잔은 오늘 보니까 오늘 3절을 보세요.

*요한복음 18:3,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유다가 현대와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해서 이게 배경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리고 4절 4절도 다시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8:4,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다 아시고 당한 고난의 자리셨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당하신 고난의 잔은 다 아시고 당한 고난의 잔이셨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기꺼이, 우리가 고난의 시몬은 십자가를 질 때에 억지로 졌다는 거죠. 근데 주님은 기꺼이 나가시는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고 5절에,
*요한복음 18:5,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그러니까 주님은 목숨을 빼앗기신 것이 아니에요. 주님은 목숨을 바치신 것이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이신 것이에요. 기꺼이,,, 그러니까 우리가 이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많은 어려움도 있고 고난도 있지만 그러면 금방 오늘 새벽에 나오시면서 억지로 나오셨어요? 기꺼이 나오셨어요? 기꺼이요...

오늘 아침에 우리 육신에 한계가 있고 힘든 거 있지만, 그래도 아침에 나오는데 나는 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조용한데 다 잠자고 있는데, 우리 기꺼이,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봉사가 되는 것이에요. 어리버리한 천 명보다도 기꺼이 나오는 70명이 더 낫다는 이 말이에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기꺼이, 이거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인간이 당하는 이 고난의 전을 깊이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한국 민족과 한국을 교회를 향하여 우리 교인을 하나님 뜻에 대해서 눈도 열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내가 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가상칠언이 있으니까 우리가 지금 복음을 얘기하고 좀 세계가 포스트 코로나 이후에 이런 행사 이런 거 많이 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중요한 세계적인 행사를 할 때, 그걸 하지 말고 막 복잡하게 막 수많은 이런 걸 하지 말고 딱 하나 오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거예요. 진짜 복음의 능력이 뭐냐? 여러분 복음의 신비에 눈을 뜨고 나면 기꺼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열릴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가 그 사랑의 감동인데요. 그 사랑에 참 감동이 되어가지고 기꺼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토비새 나오는 모든 일들도 이 새벽에는 주님 여러분이 주님 십자가의 은혜 중에 계실 줄 믿습니다. 기꺼이 고난의 능력이 여러분의 것으로 체험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만 더 할까요? 12절에 보니까 12절에 보니까 군대와 12장 12절 보세요.

*요한복음 18:11-13,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기꺼이 당하신 고난이었고, 고난의 잔을 주인 홀로 당하셨으니 우리 아버지
우리 찬송가 가운데,,,

◆감란산 깊은 밤중에 ♪
1. 감람산 깊은 밤중에 별빛은 희미하여라.
주 예수 고민하시며 외로이 기도하시네.
2. 주 홀로 깊은 밤중에 고민에 싸여 계시나
그 사랑받던 제자도 스승의 고민 모르네.
3. 한밤중 피 땀 흘리며 인간의 죄를 지신 주
무릎 끓고 애 쓸때 성부는 힘을 주시네.
4. 한밤중 하늘로 부터 천사의 노래 들리니
인간은 듣지 못하나 주 예수 위로 받도다.

-그래서 여러분이 홀로 당하신 고난, 7가지, 가상칠언에 주님 홀로 당하시는 고난, 영적 파괴를 경험한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고백을 내 삶의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이제 가상칠언을 듣고 그다음 나라와 민족과 시대를 여러분 자신도 마찬가지고, 이 은혜가 있을 때 우리는 복음, 민족 역사라는 세 단어가 우리의 삶을 그대로 내려와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복음의 역사, 민족 앞에서, 우리가 감사와 은혜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

◆팀 프리칭.

*팀 프리칭-1
홍진기 부목사님.
1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유대인들은 험한 말로 예수님을 정죄했고, 관원들은 비웃었으며, 옆에 같이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 중 한 명은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우리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셨던 옷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재미를 뽑았습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을 변호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무엇인지 모르고 하기 때문에 용서해 주시기를 아버지께 고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이 사실을 또 그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해서,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죄인이라고 잠시 오판했다고 해서 그들의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영적무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아버지께 아버지의 은혜로 용서하시고, 구원해 달라고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사실 은혜 받고 예수를 알기 전에는 우리도 저들과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있다면 내 앞에 나오라고 그래. 하나님이 밥 먹여 주냐? 넌 아직도 교회 다니니? 나름 나도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으니까 하나님은 없어.’ 이렇게 우리가 고백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 고백했던 이런 모든 것들은 영적인 무지에서 온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상황에 있음에도 다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안에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용서의 기도와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는 영적 무지에서 그리고 또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광명을 넘어 또 오고,,,,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나의 주셨다는 사실, 그 일로 인하여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하고 짓던 죄를 철저하게 버려야 될 줄 믿습니다. 영적인 무지의 상태 때, 짓던 죄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제자인 예수님의 제자로서 영적 무지 가운데 여전히 있는 그들을 예수님과 같은 목자의 진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하며 저들이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오늘 기도하며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내일 부활절이 되시자 작정을 하며 주님 이 영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영혼들의 영적 눈을 밝혀 주시 사, 자기가 하는 것을 알게 하시고 주님 품 안에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작정하는 내일 부활절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팀 프리칭-2
전승현 부목사님
2언,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예수님께서 하신 가상 체험 가운데 두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이 온 인류를 향한 용서의 선언이었다면 이 두 번째 말씀은 한 개인을 향한 용서의 선언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좌우 양편에 강도 두 사람이 한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며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욕을 하며 조롱하며 희롱합니다. 이때 양 옆에 있었던 강도 두 사람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욕을 합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에서 정확히 말씀하고 있지는 않지만 한 편의 강도가 회심을 하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가 다른 무엇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국 복음을 들은 것도 아니었고, 어떠한 이적이나 기적을 본 것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 그리고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욕을 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예수님의 기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강구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운데는 바로 이 회심한 강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강도 입장에서는 아마 일평생 누군가 자기를 위하여 기도한 처음을 경험하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 사건 가운데 그 일 가운데, 너무나도 굳건히 굳어져 있었던 이 강도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리고 여전히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는 반대편에 그 강도를 책망하며 이 회심한 강도가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차마 그렇게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너무나도 보잘 것 없고, 너무나도 초라해 보이는 고백이었는데, 이 고백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하시지 않으셨던 확고한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 나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 나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나를 기억해 주신다면 그것으로 나는 족합니다.’ 감동의 마음은 거기까지였으나 예수님은 그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결코 당신의 사역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서도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내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 앞에 감도의 그 모습들은 낱낱이 다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결코 구원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 죄인도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무릎 꿇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그것이 바로 이 십자가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팀 프리칭-3
강대인 부목사님
3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보라 내 어머니라.” 십자가의 극한 고통에서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제자 요한에게 세 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친 마리아는 심판받고 처형당하여 죽는 순간까지 아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고통은 어땠을까요? 또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인간으로 견디기 힘든 극심한 고통 중에도 예수님은 사사로운 인정에 이끌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차원의 창조적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모친 마리아를 향하여 놀라운 말씀을 하시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

여기에서 아들은 자신이 아닌 바로 그 옆에 있는 제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옆에 있는 요한이 당신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육신의 동생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한에게 이 부탁은 대단한 결단이 요구되는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제자 요한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친어머니처럼 여기며 자신의 집으로 오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의 극한 고통 중에도 영적 가족을 낳기 위하여 거대한 산통을 겪으시며 마리아와 요한을 어머니와 아들로 묶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혈연을 중시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로 영적가족, 영원한 가족인 영 가족으로 묶어주셨습니다. 지금 옆에 앉아 계신 성도님이 여러분의 가족으로 보이시나요? 피로 나눈 가족은 어려우면 마음을 모아 서로 돕습니다. 우리는 피보다 더 진한 영적 사귐을 갖는 영 가족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의 교회, 영 가족으로 마음을 모아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교회에 허락하신 ‘2033-50 비전’을 붙들고 토비새의 7천기도 용사로 나아갈 때,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영 가족이 될 줄 믿습니다.

*팀 프리칭-4
장명철 부목사님
4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네 번째 말씀은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불러주신 고백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다윗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부재 상황을 괴로워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물으시며 괴로워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태초부터 함께하셨던 분, 완전한 사랑과 교제를 이루셨던 성부 하나님이 마치 자신을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저주(詛呪)는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즉 죄로 인한 영적인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컸던 것은 단지 육체적 아픔이 커서도 아니고, 심리적 부끄러움의 문제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버림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부터 예수님은 그것을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절대적인 저주와 고통을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엘리 엘릴라마 사박다니.” 이 절규는 사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부르짖은 절규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고통 가운데 질러야 하는 비명을 주님이 대신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으로부터 단절을 당하셨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자녀로 서서 화목해 하는 말씀으로 화목케 하는 사명을 감당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팀 프리칭-5
금동훈 부목사님
5언,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내가 목마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신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내가 목마르다.” 십자가의 죽음 앞에 서신 예수님의 입술에서 나온 다섯 번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사랑하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언급한 유일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는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로마 병사들에게 얼굴을 맞으시고 날카로운 채찍에 온몸을 찍히신 가시로 얼근 면류관이라 불리는 것으로 머리에 심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혔으니 수많은 군중들의 온갖 모욕(侮辱)과 조롱(嘲弄)이 우리 주님의 귀를 덮고 마음을 찔렀습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피부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또 한낮의 태양 아래에서 입술은 타들어가고, 메마른 입술은 타는 듯한 갈증으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만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고통 중에 왜 하필 목마름이었을까? 왜 “내가 목마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완전하신 인간이신 예수께서 사명을 이루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목마름과 간절함보다 더 강렬한 목마름 바로 십자가 위에서 반드시 이루시기 간절히 원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교회, 그 십자가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죽음의 고통 중에서도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위하여 자신에게 목마름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바로 시편 62편 2편 2절 말씀을 응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성취는 우리의 죄 대속과 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예수님께서 대신 맞아주셔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징계를 예수께서 대신 당하셔서 우리가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타는 목마름을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셔서 우리가 신령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약속하신 것처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 대신하여 고통당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목마르다.” 이제 목마른 우리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께 나아감으로 모든 죽음의 목마름이 다 해결된 줄 믿습니다. 이제부터 갈하고 메말랐던 나와 우리의 인생에서, 타는 목마름은 사라지고, 우리 주님으로 인하여 생수의 생명의 강이 우리 삶 가운데 넘치고 넘칠 줄 믿습니다.

*팀 프리칭-6
구성찬 부목사님
6언,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이후에 마치 소리를 지르듯 외치며 여섯 번째로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라는 의미의 “테테레스타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하라고 명하신 모든 일을 완수하셨고,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로서 감당하셔야 할 모든 일을 마침내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따라 기꺼이 고난의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양피지 영수증에 쓰인 “테테레스타이” 라는 예수님의 외침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완전히 지불되었음’입니다. 이 관점에서 예수님의 선포를 본다면 십자가에서 가쁜 숨을 몰아내시면서도 우리를 향해 우리의 죄의 빚이 완전히 청산되어 말소되었음을 외치듯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외침은 누구를 위해 하신 것입니까? 자신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이 마침내 완성되었음을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 속에서 외치신 것은 누구를 위해 하신 것입니까? 바로 이 자리에 계신 한 분 한 분을 위해 하신 것입니다. 죄에 눌려 오늘도 힘들게 살고 있는 자녀를 향해, ‘내가 네 죗값을 다 청산하였단다.’ 또 현실의 무게와 아픔에 자꾸만 무너지는 자녀들을 향해서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었단다.’ 또 오늘도 홀로 고통 가운데서 외로워하는 자녀들에게 ‘내가 너를 끝까지 사랑하였단다.’ 오늘 성토비새를 맞아,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를 위해 외쳐주십니다. “테테레스타이, 다 이루었다.” 이 외침을 들은 우리는 지난주의 설교 말씀을 통해 마음에 새긴 시편 22편 31절 “주께서 일을 행하셨다.” 처럼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로서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삶의 일들마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테테레스타이’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팀 프리칭-7
강경식 부목사님
7언,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이 말씀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두 손에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두 가지 의미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복음을 통한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모든 해야 할 일을 다 마무리하신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으십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인생의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 우리 인생 가운데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 할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한 스데반이 마지막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고난 중에 죽어갔던 초대교회 순교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한 후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할 수 있는 이 마지막 기도를 올려드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는 이 말씀은 우리가 삶의 마무리를 할 때,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이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마지막으로 외치는 내용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생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이시기에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고, 고난을 견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은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의 끝에 죽음이 있습니다. 그때 마지막을 함께하며 자신의 영혼을 맡길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신뢰하며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이 부탁하나이다. 라는 말씀은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정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가 끝까지 붙들고 신뢰하며 함께 동행 해야 할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주님께서 붙드셨던 그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도 우리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꼭 붙들고 오지 않는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정현 담임목사님.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엘리엘리 나바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오늘 귀한 토비새에 나오신 여러 우리 형제자매들과 사랑의 교회 목양 1팀부터 목양 9팀까지 모든 우리 교회 영 가족들, 가상칠언의 이 복음의 능력이 한 분, 한 분 이유 없이 다 풍성하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아이들 자녀들도 동일한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리 찬송가 154장 생명의 주요 면류관, 여러분 특별히 4절에 ‘고난의 잔을 날 위해 다 마셨나이다’.


7천 기도의 역사가 합심해서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말씀한 대로 주님 우리 살아가는 동안 평생 십자가의 은혜가 온 교회와 가정과 생애와 역사를 덮어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왕 지는 십자가 우리 기꺼이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지고 가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하나님 아버지, 이 민족의 역사가 임하게 하시고 무엇보다도 4월 10일 총선을 주님이 지켜주옵소서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좋은 지도자의 복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4월 총선의 진리의 빛이 비춰지게 하여 주시옵시고, 어둠의 세력은 물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거짓의 영이 물러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와 복음과 십자가의 능력이 충만한 사월의 총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가 이 민족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선봉장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칠천기도의 용사들을 가지고 주여 십자가의 은혜를 주옵소서. 주여 십자가의 능력을 주옵소서. 열매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전쟁의 고통 속에 있는 라 전하는 사랑 주리 오코라이라 우리 요원 전달식을 갖겠습니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이사장으로 섬기고 계신 한국교회 봉사단을 중심으로 바로 이 자리에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가졌습니다. 그 여러 정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25억원에 달하는 의료 물품을 우크라이나에 보낼 수 있게 해주셨고, 오늘 그 전달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먼저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영상으로 보시겠습니다. 70년 전 한반도에서 발발한 전쟁으로 수많은 보안 생명이 희생당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산 기도와 새벽 제단에서 눈물로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7년 만에 유럽에서 발발한 가장 큰 그레이나 전쟁으로 국내외에서 1450만 명이 집을 잃고 더군다 또는 시민이 되었습니다.

2024년 1월 29일부터 2월 3일까지 미국 워싱턴dc의 바이블 뮤지엄에서는 한국과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미국의 크리스천 리더 600여 명이 모여 우크라이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우크라이나 위크가 진행되었습니다. 오정현 담임 목사는 조찬 기도의 자료를 통해 영적으로 보면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자유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하는 우크라이나에게 평화와 번영을 주실 것이다. 라고 강조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을 믿고 기도하는 자들이다. 라고 격려했습니다.

2024년 3월 유엔 소속의 국제공개발인지로서 사랑광주리에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생존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으로 무너진 병원에 29억원 상당의 부상자 치료를 위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직접 지원하며 젤렌스키 연구 인사 등을 통해 사랑의 교회 사람들의 기도와 사랑을 전달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많은 지도자는 교회를 제공하고 제자를 키워 우크라이나 땅에 왜곡을 넘어 종전이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돕는 생명 사역은 전체주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사역입니다. 한반도에 다시 일어나면 안 될 정치 변화가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이루는 사회입니다. 감사합니다. 전쟁의 고통 속에 있는 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위한 헌신 총 총 29억 상당의 무료 물품을 후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패를 수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먼저 주식회사 뉴메딕스 김용석 대표 나오셔서 감사패를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뉴메딕스 제약에서 22억원에 달하는 것을 기부해 주셨습니다. 감사에 주식회사 뉴메딕스 김용석 대표 귀하께서는 전쟁으로 고통 중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회복을 위해 사랑의 섬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온전한 자유와 부흥이 이루어지는 통일된 한반도의 마중물이 될 생명 사역에 동참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이해를 됩니다. 주 2024년 3월 31일 사랑의 교회 담임 목사, 사랑광주리 이사장 오정현 감사합니다.

우리 다음은 우리 주식회사 대명실업 김경란 대표님 나오셔서 감사패를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패 주식회사 대명 실업 김경란 대표 아래 내용은 동일합니다. 감사합니다. 해명 실업에서는 4억에 달하는 의료 기기를 보내주셨습니다.

다음은 한국의약품 대표 조성현 실장님 나오셔서 감사패를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패 안국약품 아래 내용은 동일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곳에서는 2억 2500만 원에 달하는 약품을 주셨습니다. 우리 다 같이 올라오셔서 우리 기념사진을 좀 찍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전달식 사진을 기념 사진을 좀 찍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정말 저 29억의 의료 지원이 잘 돼가지고 2천억 3천원의 효과를 입을 줄로 믿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 한번 전쟁이라는 500여 명의 사상자들이 전쟁 매일 하는 건 아니니까. 하여튼 500여 명의 사상자들 왔는데 재활병원이 필요하고, 국제병원이 필요하고 또 국제의과장이 필요하고, 또 국제 교회가 필요하게 될 걸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하실 줄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 다 일어나셔가지고 죽거나 사나 우리가 암송을 해야 되겠죠.

♣요약
-우리 믿음의 4대와 7천기도 용사가 십자가의 완벽한 고통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사 영적 제곱근의 은혜로 말미암아 ‘2033-50 비전’을 이루어 가야한다. 가상 칠언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이 나를 위한 죽음이심을 깊이 깨닫고 부활을 감사하며 시대적 사명과 책임을 순명으로 여기는 영적 기백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나라와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견인하는 21세기 글로벌 리더들이 양성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라는 주제로 드리는 제22차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를 통해 모든 영가족들이 굴곡의 인생을 평탄케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적 실체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부활주일 가운데 선포되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사랑의 교회 영 가족들이 부활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며 태신 자를 작정하여 주님께서 품게 하신 한 영혼을 목자의 심정으로 결신하도록 간구해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마침내 체포당해 먼저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셨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용기를 볼 수 있다. 유월절은 보름이라 밤도 낮처럼 밝은데 원수들은 등과 홰를 들고 왔다. 아마도 그들은 숨어 있는 예수님을 숲속에서 찾아내야 할 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숨으시기는커녕 그들이 나타났을 때 ‘내로라’ 하시며 당당히 나가셨다. 그리고 절대 순종하심을 본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하시며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또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진 사건은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낸 것이다.













◆팀 프리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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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3월 27일)
제목: "서사란 원래 불친절한 법"
말씀: 마가복음 15:21-25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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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21-25,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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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繁華街)에 가면 항상 우리의 안부를 물어보시는 분이 계세요. “안녕하세요. 또는 실례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불쑥 말을 건네면서 우리 손에 슬며시 이렇게 전단지를 이렇게 밀어주시는 분이 항상 번화가이라면 항상 있습니다. 그분들은 늘 우리의 건강을 걱정 피부를 걱정하고 끼니를 때우기에 뭘 먹으면 좋은지 항상 기꺼이 추천해 주십니다.

저는 이제 주말이 교회와 함께 궤적을 이렇게 같이 가다 보니까 번화가에 나갈 일이 많지 않은데 그래도 주로 점심에 여기 대로를 이렇게 한번 건너가 보면 교회 길 건너요 이분들하고 마주치는데요. 신기한 건 꼭 저에게 둘 중 하나를 주세요. 피트니스 운동이든지, 점심부패든지, 둘 다 필요해서 주는 것이라고 적극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만 분명한 거는 주실 때마다 한 0.1초 정도 고민합니다. 받을까? 말까? 여러분도 그런 경우 있으시죠. 그래서 가끔은 냉정하게 좀 지나칠 때도 있는데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걸 받을까? 말까? 고민을 했어도 한참을 했어야 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가볍게 가벼운 전단지 한 장 받는 것도 잠깐 고민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치셨다고 로마 병사들이 판단을 했던지 마침 이제 가시는 그 지점부터가 아마 학자들은 오르막길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그게 오르막길이어서 그랬을지, 어쨌든 아무튼 갑작스러운 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시몬은 지금 대신 짊어지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 이게 얼마나 불친절한 전개인지 모릅니다. 길 가던 사람 복잡하다가 또는 성경 표현대로 보면 억지로 십자가 찐 거는 둘째 치고, 그거는 둘째 치고요. 그러면 앞뒤 좌우 분량이라도 좀 이렇게 넉넉히 줘야 되는데 꼴랑 한 줄입니다.

*마가복음 15:21,
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읽는 우리가 우리도 이렇게 보면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아주 짧게 다루는 것이 우리가 읽는 면에 있어서도 불친절한데, 만약에 제가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면 이 기록만 봐서는 너무너무 불친절하다고 느낄 것 같아요. 시몬의 등장해서 이렇게 역사적인 등장해서 이 분량이나 또 이렇게 살 살펴주는 내용을 보면 상당히 불친절하다고 밖에 그래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이 불친절하다는 서사를 어떻게 만드냐면 개연성을 여기다 갖다 붙여요. 어떻게 붙이냐면 이 사람이 여기 등장했어야 될 이유, 꼭 등장해야 될 이유를 찾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냐면 방금 읽으신 21절 상반부에 보면 전반부에 보면 이렇게 돼 있죠.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레네 사람 시몬을 누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까? 알렉산더와 루퍼의 아버지라고 기록을 합니다. 말은 마가복음을 읽고 있는 이 원독 자가 당시 알렉산더 루퍼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다는 뜻이겠죠. 실제로 로마서에서도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고요.

우리 찾지는 않겠지만, 이들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한 또는 알만한 인물이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익숙한 결론에 도달하는 거예요. 어떤 결론이냐면 억지로 십자가를 치게 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복을 받았다.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후손의 복을 받았다. 믿는 사람들이 당시에 믿는 사람들이 알렉산드 어떤 루퍼 이렇게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로 그의 자녀의 때에 축복을 받았다. 이렇게 이어가 개연성을 거기다 이제 넣는 거죠. 이 불친절한 서사를 여러분 맞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실제로 그렇다고 마가복음이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거니까, 그것도 맞습니다. 특별히 마가복음이 쓰여 질 당시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박해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 억지로지는 것 같은 이 고난과 고통이 박해를 이 억지로지는 십자가이지만, 길 가운데 하나님이 반드시 값을 쳐주신다. 보상해 주신다. 라는 개념으로서도 큰 위로와 응원을 실제적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면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라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시몬의 십자가가 오늘 이렇게 지고 난 다음에 자녀들에 대해 결실을 거둔다. 라면 이 시간이 상당히 있었을 것이거든요. 대략 못 잡아도 20년, 30년 이렇게 사이에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이 30년이라는 이 시간차의 등고선을 시몬으로부터 자녀들까지 빨리 이어버리는 바람에 어디가 비냐면, 사이에 계속되었을 현재가 비입니다. 거의 다 틈이 생긴다.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시몬의 십자가와 자녀의 일은 거리가 너무 멀어요. 시간차가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이 다 지나지 않는 한 매일을 살아가게 될 그 중간 중간에 현재는 계속 불친절한 서사로밖에 안 남는 거죠. 그때 왜 나한테 그걸 지게 만들었나?

최근 한 청년에게 제가 들은 다소 이어지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이렇게 얘기했어요. 저한테 “하나님 저한테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자기가 마주한 이 신앙의 현재가 자기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는 포로였는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 모두 구원받았죠? 이 세상 시름은 그래서 순간이고, 하나님 나라의 영혼과 영생을 약속받은 것이 우리지요? 그렇죠. 그럼에도 왜 우리는 늘 현재에서 고전합니까? 오늘이라고 하는 이 서사의 불친절한 이 지점들을 너무 내일로 몰아붙여서 그렇습니다. 서사의 등고선을요 지금 구원받은 인생과 나중에 천국 갈 영원한 입성에 너무 빨리 이어버려서 속결로 이어버려서 서사의 중반부이자 중요한 연결고리인 현재를 사는 힘이 약화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불친절한 서사를 너무 알렉산드와 루퍼 이야기로 빨리 가져다 붙이지 말고, 오늘 이야기를 조금 다시 살펴보자. 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우리의 서사를 좀 힘 있게 써내려갈 그런 응원을 받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21절부터 제가 다시 한 번 출발을 해볼게요. 읽진 않겠습니다. 21절 눈으로 한번 따라 읽으시면서 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시몬의 이야기에서 자녀 이야기는 일단 빼겠습니다. 그럼 21절에서 알렉산드와 루프 이야기는 빠지겠죠? 빼버렸으니까 사실 21절에서는 억지로지고 간다는 것 말고는 별로 건질 게 없어요. 그러면 이야기에 이렇게 주목되어 있는 21절에 한정돼 있는 시설을 앞뒤로 좀 확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21절이 이 자체로도 참 불친절한 서사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이냐면 시몬이 그냥 가다가 갑자기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됐잖아요? 굉장히 불친절한 서사를 그의 인생에 순간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구레네 사람 시몬만 불친절한 서사를 경험하는 게 아니고 21절 자체가 마가복음 이 전반 맥락에서 보면 불친절한 서사예요. 즉 어울리지 않는 서사입니다. 갑자기 끼어드는 서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려볼게요. 우리가 1절부터 25절까지 본문을 읽었는데 사이 지금 처음 읽은 21절을 그냥 여러분 삭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삭제한다 그러면 위에 있는 20절 밑에 있는 22절이 남는 건데 20절 22절을 그대로 한번 읽어보면 전혀 문제가 없어요. 여러분 한번 화면 보시면서 같이 한번 그게 어떤 건지 읽어보세요. 20절 22절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5:20,22,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오히려 없는 게 더 나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구절이 즉 21절이 왜 삽입됐는가? 맥락에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갑자기 한 절만 딸랑 튀어나오는 이 구절이 마가의 입장에서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이 맥락상 정황상 굳이 들어갈 이유가 없겠죠. 그럼 인제 의도가 뭐냐 이걸 우리가 살펴봐야 되는데 이왕 본문이 마가복음으로 이렇게 여기 21절에 끼어 들어갔으니까, 어디로 끼어 들어갔는지 살펴보면 여러분 21절, 22절, 23절 이렇게 눈으로 훑어가 보시면 21절은 이제 구레네 사람 시몬 얘기니까 빼고요. 22절에 보면 거기에 주요 인물은 예수님이에요. 그죠? 그리고 23절에 보면 거기도 예수님인 것 같은데, 사실 22절 23절에 등장은 안 하지만 실존하는 인물인데 그게 뭐냐면 22절에 예수님을 끌고 가는 존재고 23절에 봐도 몰 약을 탄 포도주를 주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24절에서 무슨 일을 벌이죠. 십자가에 못 받고 예수님의 옷을 나누 제비 뽑아 나눕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알렉산드와 루퍼라고 얘기하면 큰일 납니다. 누굴까요? 로마의 병사들입니다. 이 병사들을 주목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24절 기준으로 보면 이들이 뭘 하고 있죠. 제비 뽑아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했나요?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좀 정리하면 지금 이들은 예수님의 것을 자발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다시요. 로마 병사들은 뭐하고 있다고요? 예수님의 것을 자발적 능동적으로 취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몫으로 되어있는 것을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취해가고 있습니다. 가져오고 있습니다. 이 병사들과 대비된 존재가 지금 우리가 갑자기 삽입시켰던 21절에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시몬은 억지로 자발적이 아니구요. 억지로 예수님의 것을 떠맡습니다. 병사들은 어떻게 한다고요.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가져옵니다. 이 대비를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의 장면 즉 시몬이 등장하는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게 삽입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앞에서 시몬을 너무 자녀 이야기 몰고 가지 말자고 너무 먼 지점 가지 말고 여기 안에서 해결해 보자는 건데 마가는 결국 이 두 존재 즉 시몬과로 병사들을 대비시키면서 마가복음 종반부에 걸 맞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중요한 질문은 뭐냐면 자 로마의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가졌다. 누가요? 로마의 병사 로마의 군사들이 자발적으로 예수님의 것을 나누어 가졌다 자 그러면 주님의 군사는 어딨나? 치욕을 주고 싶어서 주님의 옷을 다 벗기고, 그의 것을 앗아가고, 가져가는 병사들 대신에 주님의 치욕을 함께 하고 싶어서 주님의 수고를 덜어드리고 싶어서 로마 군사들 못지않게 자발적으로 주님의 것을 좀 나에게 주십시오. 나에게 덜어주십시오. 의욕적으로 말하고 있는 말에 써야 될 존재들은 지금 어디가 있는가? 시몬을 봐라, 얘 억지로 지금지고 간다. 왜 지고 가는지도 잘 모르겠고, 억지로지고 간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를 나눠질 거라면 예수님의 몫으로 이렇게 짊어진 이 십자가를 나눠줄 거라면 이렇게 억지로 질 게 아니지? 뭣도 모르는 애 갑자기 잡아다가 아무나 잡아다가 이렇게 짊어질 게 아니고, 십자가를 지라고 당부했던 예수님의 명령을 가까이에서 들었던 누군가가 정말 없는 건가 예수님 곁을 지금 지키고 이건 내가 지겠노라고 응당 손을 들어야 될 사람이 지금 없는 건가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거 여러분이 숱한 질문 속에 반복된 질문 속에 등장해야 될 사람이 누군지 아시죠. 누굴까요? 제자들이에요. 제자들 지금 마가는 그래서 시모온의 불친절한 서사를 통해서 원래 자리에 있었어야 될 제자들 그런데 공석인 제자들을 지금 등판시키고 있는 겁니다. 시몬의 억울함에 이렇게 집중하느라 놓쳐버렸던 이 불친절한 예수님께 이 서사에 너무나 불친절한 제자들이 지금 발각되는 장면이라는 곳입니다. 시몬이 여기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마가복은 8장 3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볼까요?

*마가복은 8:34,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시몬이 지고 있는 십자가는 진작부터 예수님이 진작부터 누가 지라고 말해줬습니까? 제자들이 지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가 제자들은 지금 혼비백산(魂飛魄散) 다 사라지고 어찌된 일로 이 길을 예수님 혼자 그것도 생판 그동안 없어서 안 보였던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사람에게 지워줘야 할 정도로 예수님은 지금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서 홀로 길을 오르고 계시는데, 여기 보이세요. 오늘 마가복음 8장 34절에 이 명령의 가장 첫 번째 실행 팀이 됐었어야 할 이 제자들이 지금 어디가고 어디 가고 없습니까? 그 현재적 질문이요. 그러니까 시몬을 자녀의 이야기로 멀리 떨어뜨리기 전에 지금 이 장면에서 물었어야 될 현재적 질문은 어디로 가버리고, 우리가 자꾸 시몬 이야기를 더 먼 쪽으로 자꾸 붙이냐 이러는 것입니다. 그게 틀렸다는 얘기가 아니구요. 그도 그렇게 여러분 시몬이 알렉산드와 루포의 아주 좋은 성장 스토리에 이르려면 오늘 여기서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 십자가 한 번졌다고 그게 그냥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내일의 구레네 사람 시몬의 내일의 현재에서 그가 자기 십자가를 치는 제자 도에 들어서지를 않았다면 제자의 삶을 살아내는 치열함이 없었다면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열심이 없었다면, 그날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시몬은요, 지금 제자들의 자리에 대신 위치하고 있고, 이건 그냥 재미삼아 들으시면 제자들의 수장이었다고 하는 시몬 베드로와 묘하게도 이름이 같으면서, 그렇게 제자들의 공석을 채우고 있고, 공석인 제자들의 현주소를 고발하는 데 쓰임 받고 있습니다. 도망가서 지금 흔적도 보이지 않고, 이 중요한 순간에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제자들을 발각시키는 한 사람으로 오늘 여기 서술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정도는 되어야 좀 끼어들 만하지 않겠습니까? 이 불친절한 서사가 좀 그러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더복음에 맥락 없이 이렇게 이 장면이 한 칸으로 쫙 끼어드는 것이구나!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서사 가운데 계시는지는 잘 모릅니다. 늘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 항상 가장 힘든 게 청중이 어떤 마음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이렇게 또 그런 것인데, 여러분 그러나 서사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또는 여러분들의 서사가 어떻게 불친절한 것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해석되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불친절한 이 서사를 해석할 힘을 갖추고 있느냐, 그게 관건이지 불친절한 서사 자체가 문제가 될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시공간(視空間)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고 사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오히려 시공간을 창조하신 분 아닙니까? 그런데 이 시공간 안에 살아가면서 아등바등 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알리는 접점을 마련한다고 하면 입장에서는 그게 항상 불친절한 서사일 수밖에 없어요. 성경 전반을 걸쳐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아주 대표적인 예로 예수님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받았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죠? 이 저 출산 시대에 뭐 이런 거 아니잖아요. 굉장히 불친절한 서사가 갑자기 다가오는 거예요. 성경 전반에 걸쳐서 항상 하나님이 그의 어떤 인생에 뛰어들어 개입하실 때는 사람이 자기 이 서사가 굉장히 불친절하고 여깁니다. 자기의 이 세계관 안에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그걸 수용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수용하는 과정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맥락에 그러나 항상 우리는 불친절해 보이지만 맥락에 항상 나 같은 이 피조 세계 안에 갇혀있는 존재를 굳이 만나려고 하시는, 나를 통해 일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것이 맥락 안에 항상 담겨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의 불친절한 서사들을 살펴보면 거기에 항상 나와 나의 사명과 그리고 내가 거한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과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그래서 불친절한 여러분들의 각자의 서사 속에서 오늘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나에게 좀 어떤 이야기와 어떤 무기를 들려주고 싶은 건지, 나는 어떤 역할이고 사명인지를 좀 알고자 찾고자 기도하러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하나 오늘 기도 가운데에 또는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에 말씀하여 주시고, 내가 감사히 지고 갈 십자가가 또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고난 주간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구원, 뭐 우리를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을 많이 우리가 머릿속에 벌써 연상될 텐데 그러나 그것만 묵상한다면, 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힘이 약화된다고 생각해요. 방금 나열한 것들은 사실 예수님의 수준에서 예수님이 치르시는 일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구원 우리 어떤 죄, 삶 충분히 지금 묵상하고, 또 우리 안에서 이걸 붙들고 씨름해야 되겠지만, 사실은요, 그렇게 너무 아까 알렉산드 루퍼처럼 멀리 이어버리면, 사이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제가 오늘 뭐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늘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불친절한 서사로 너무 많이 느껴집니다.

오늘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그렇다면 구원사역을 단번에 다 이루어놓고도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했을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라고 했을까?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희생과 구속이었죠. 이전의 율법으로 옮겨보자면 그것은 하나의 제사였고, 제사가 들여지는 공간은 성막이고 성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자신이 완벽한 제물이면서 자기 자신이요.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너희들의 십자가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뭔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철저한 제약을 깨닫고 날마다 회심하라는 그런 면모도 있지만 더 넘어서는 니가 거한 그곳에서 그런 제사를 드리는 그런 제물을 올려드리는 그런 성막 삼고 성전 삼는 그래서 이 온 우주가 나에게 예배하는 온 전 우주적 예배 처소 삼아주는 꿈이 나한테 있는데, 내가 시작한 일을 너도 너의 지경 안에서 너의 영역 안에서 잘 감당해 주라. 하나님 오늘 그렇게 우리에게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의 십자가도 지지만 자신의 십자가도 지고 다 끝냈지만 우리에게도 여전히 십자가를 맡겨서 그 맥락 있는 부탁을 하고 계시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로마를 힘으로 못 눌러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오히려 로마를 힘으로 누르는 것, 당시 모든 정부를 자신이 갖고 있는 권세로 누르는 것이 더 친절한 서사고 있는 이들에게는요. 맥락 있는 역사가 맞습니다. 그렇게 안 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군사력으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이 임재 하셔야 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어떻게 되느냐? 죄가 없는 땅에 임재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께 예배하는 땅에 임재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기뻐 올려드리는 제사의 향기를 맡으시면서 흠향(歆饗)하시면서 공간에 거하시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셔서 성전성막의 영역을 다 찢으시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그 거룩한 땅으로 바꾸시면서 죄악 된 땅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길 원하셔서 자기 자신이 희생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을 받아 가진 우리들에게도 너희들도 너희들의 공간의 하나님의 인재를 초청하는 귀한 축복의 통로 생명의 통로가 되라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힘써 줘주라. 라고 말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단순히 늘 우리의 죄악에 이렇게 내향적으로 눌려가지고 늘 우리는 죽일 죄인이지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물론 그것도 생각하지만 오늘 그곳에서 하나님 제가 제물 되어서 누군가를 하나님 만나게 하는 귀한 성전과 성막 담임 목사님 말씀대로 제사장 나라 역할을 하는 내가 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바로 사명의 일환인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따지면 시몬이 억지로 지고 가던 자리가 원래 누가 있어야 된다구요? 제자들이 있어야 될 자린데, 너는 지금 너는 지금 이야기를 읽고 알고 있는 너는 지금,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억지로 쥐고 가는 사람이냐? 아니면 이 모든 맥락에 관심이 있어서 이야기가 더 이상 불친절한 서사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는 내가 준 사명에 아주 맥락 있는 서사로 받아 가지는 사람이냐 알렉산더와 루퍼처럼 30년 후에 이루어질 그냥 보상으로 이 오늘 십자가를 치부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오늘 기꺼이 지고 가는 전심으로 자발적으로 주님 곁에서 십자가를 좀 치고 싶은 바로 제자더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도리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영 가족 여러분 원래 서사란, 오늘 제가 제목 정한 대로 서사란 원래 불친절한 법입니다. 중요한 것은 서사로 깊이 파고들었느냐, 그래서 그게 내 길이길이 남길 이야기가 되었느냐, 예수님과의 진한 스토리가 되었느냐,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 친 한 번으로 불친절한 서사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 뒤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듯이, 오늘 여러분들의 불친절한 서사 곳곳에, 뭐 여러분의 미래나 자녀의 문제나 풀리지 않는 기도의 제목이나 하여튼 장벽이고, 허들 같은 여러분 모든 서사의 불친절한 지점에 불친절한 서사 그대로 두지 마시고, 오늘 거기서 하나님께서 나와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시는 건지, 나를 통해 세상에 무슨 질문을 던지고 나를 통해 교회에 믿는 이들에게 믿지 않는 일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어 하는가? 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생애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올려드리시는 귀한 십자가 지고 가는 제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여러분 그래야 우리의 사는 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살다가 능력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날 어떻게 능력이 있습니까? 현재를 해석하는 힘, 현재에 주시는 십자가를 기꺼이 칠 수 있는 마음, 고난 주간을 지나 부활절도 특새로 이어지는 이 좋은 기도하기 좋은 이 시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여러 불친절한 서사들을 각자의 불친절한 서사들을 기도 가운데에 해석할 힘주시고, 그래서 단 한 분도 억지로지는 십자가 없게 하시고, 나 모를, 너도 나도 이거 왜 지는지 모르겠다. 나도 일단지고 나가자, 가다 보면 뭐 있겠지, 너무 아쉬워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러라고 주신 생명의 고귀한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뻐 받으시고 특별히 그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내가 십자가 지는 것이 자발적으로 주님, 남의 몫을 이렇게 감당하는 것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그렇게 신앙의 새로운 부흥기를 마련하시는 귀한 여러분 되시기를 이 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현재를 해석하기가 너무 어려운 우리 가운데에 여전히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고, 진척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답답함이 있고, 열심히 부딪쳐도 넘어설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답답한 마음도 있고, 분투하고 애써 보지만 명확하지 않은 현재 때문에 너무나 괴로운 인생들을 사는 우리가 현재로 마음 무거운 경우가 너무 많을 때, 오늘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그래서 우리가 앞뒤 좌우도 모르고 억지로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인생이 되지 않고, 분명히 세우고자 하는 자리가 있을 것임을 믿고, 나를 통해 물으시고자 하는 것이 있어서 하나님 나를 사용하시고 계시는 줄 확신해야 한다. 순전히 하나님께 붙들려서 하나님 마음껏 나를 사용해 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 좋은 이정표가 되며 작지만 하나님 나라에 좋은 모퉁이 돌이 될 수 있도록, 귀퉁이가 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매어 달리며 나아가는 이 귀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내용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장소, 그곳은 골고다라 하는 곳으로 번역하면 해골의 곳을 뜻한다. 이곳은 평범한 처형장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점에서 죄인들과 다를 바 없이 취급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못 박히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그 시각은 제 삼시였다. 유대인들의 계산 방법에 따르면 제 삼시는 곧 아침 아홉 시경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좀 늦은 시각이었다. 그들은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받았던 모욕, 사형당하기로 된 죄수에게는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줄 포도주에 몰 약을 탔으므로 포도주의 맛은 썼다.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맛보시긴 했어도 그것을 마시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 그는 그 포도주의 쓴 맛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마심으로써 그 효과를 얻으려 하시지는 않으셨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들의 옷들은 사형을 집행한 사람들에게 사례로 주어졌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려고 제비를 뽑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을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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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3월 25일 (838)

1. 다음 중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에 포함되지 않는 기업을 고르면?
① 삼성전자 ② 인텔
③ 마이크론 ④ TSMC
2. 미국 중앙은행(Fed)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개최하는 경제정책 회의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의 약어는?
① FOMC ② ECB ③ TPP ④ APEC
3. 기업이 문화예술 분야 지원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뜻하는 말은?
① 거버넌스 ② 그린워싱
③ 메세나 ④ 리쇼어링
4. 가계나 기업 등 경제주체들은 활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해 경제 상황 변화를 예측한다는 주장을 담은 경제이론은?
① 롱테일 법칙
② 합리적 기대이론
③ 수요공급의 법칙
④ 현금성자산
5. 기업이 보유한 자산 중 현금, 수표, 통화대용증권, 보통예금, 만기 3개월 이내 금융상품 등이 해당한다. 높은 환금성이 특징인 이것은?
① 재고자산 ② 고정자산
③ 투자자산 ④ 기회비용의 원칙
6. 특정 제품의 수요가 10억 원어치 생겨날 때 직간접적으로 늘어나는 취업자 수로, 고용 창출 효과를 보여주는 지표는?
① 실업률 ② 고용률
③ 취업유발계수 ④ 지니계수
7. 한 가지 자산에 몰아서 투자하지 않고 여러 자산에 ‘분산투자’하는 것의 가장 주된 목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① 복리 효과 ② 절세 효과
③ 위험 추구 ④ 위험 회피
8. 한 주당 가격이 아주 비싼 ‘초우량 주식’에 붙는 별명은?
① 실권주 ② 우선주
③ 황제주 ④ 공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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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호모 프롬프트' 시대…질문이 힘이다

생글생글 841호


그래픽=이은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생성형 AI(인공지능)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 여겨지던 소설, 그림의 창작에 이어 동영상까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초지능 AI의 ‘일자리 습격’이 코앞에 다가온 게 아닌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AI는 프롬프트만큼만 똑똑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어 흥미를 끕니다.
프롬프트란 사용자의 명령어를 받아들이는 체계를 말하는데요, 컴퓨터나 프로그램이 어떤 동작을 수행할 준비가 됐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구글 AI 제미나이의 질문창을 보면 ‘프롬프트 입력’이란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AI는 프롬프트만큼만 똑똑하다’는 말은 AI가 내놓는 답변의 품질, 나아가 AI의 능력은 사람이 어떤 명령, 어떤 질문을 하느냐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AI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활용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질문하는 사람’, 즉 ‘호모 프롬프트(Homo Prompt)’라는 거죠.
재미있는 점은 생성형 AI도 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AI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필요한 인간의 능력은?”이란 물음에 제미나이는 “AI는 인간과 협력해 최상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 AI와 명확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AI와의 의사소통이란 다름 아닌 질문과 답변의 연속적 과정입니다. 호모 프롬프트가 회자될 정도로 질문이 얼마나 중요해졌고, 근원적·창의적 질문은 어떻게 인류 역사를 바꿔왔는지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인공지능과 채팅하는 '호모 프롬프트'
검색에 밀렸던 사색·대화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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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가리키는 말은 18세기 칼 폰 린네가 고안한 호모 사피엔스(지혜 있는 사람) 이후 다양하게 등장했습니다. 기술 진보를 특징으로 하는 인류 역사를 설명해주는 호모 하빌리스(손재주 있는 인간)와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가 있는가 하면, 호모 루덴스(유희적 인간), 호모 데우스(신이 된 인간) 같은 용어도 많이 알려졌지요. 그런데 AI 시대에 접어들며 호모 크레아투라(창의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문화적 인간), 호모 엠파티쿠스(공감하는 인간)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작업을 직접 수행하던 인간이 이제는 AI에게 명령을 내리게 되면서 좀 더 종합적·창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질이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호모 프롬프트’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신조어입니다.
AI 답변에도 오류 있다
AI는 스스로 인정하듯 주어진 데이터만 가지고 알고리즘과 패턴을 발견한 뒤, 이에 의존해 작업을 합니다. 처음에 입력한 데이터 값에만 묶이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것이죠. 그렇다면 만약 AI가 자신이 학습한 데이터에 없는 정보를 요구받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쉽더라도 쿨하게 “잘 모르겠다” 또는 “판단할 수 없다”고 답하면 됩니다. 그런데 AI가 잘못된 정보나 오류를 그럴듯하게 포장해 답을 내놓을 수도 있어요. 이 경우 사람이 AI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로 검증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죠. AI의 이런 답변 특성을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환각이나 환청)’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할루시네이션의 폐해가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질문을 던지는 프롬프트 단계에서 많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AI 인디시전(indicision, 망설임)’이란 용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AI가 만든 결과물을 질문을 던진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 그 결과를 사용할 수 있을지 망설이는 사람의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사람은 AI의 답변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대로 인용하는 단계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AI를 잘 다루려면 프로그래밍 언어, 머신러닝 등 지식에 머물지 않고 역사학·철학·법학·언어학 등에서 풍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그래서 나옵니다. 이와 같은 문해력까지 갖춰야 AI가 내놓는 결과물을 잘 보완하고 자신의 머리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AI가 쏟아내는 답변에서 파생될 여러 문제에 대처할 주체는 바로 호모 프롬프트밖에 없습니다.
좋은 답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면 ‘사색’, 두 사람이 묻고 답하면 ‘대화’, 여러 명이 모여 질문하고 대답하면 ‘토론’이라고 합니다. 묻고 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구분법입니다. 인류 문명도 이렇게 ‘질문-대답’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검색 만능’ 시대를 맞아 사색이 힘을 잃고 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과연 생각하기를 멈춘 인간이 급속히 발전하는 AI를 활용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요?
긍정적으로 봅시다. AI는 인간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구입니다. 이를테면 사람의 ‘두 번째 뇌’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에게 쉬운 것은 컴퓨터에게 어렵고, 인간에게 어려운 것은 컴퓨터에게 쉽다는 이른바 ‘모라벡의 역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설적 상황을 거꾸로 활용해 인간과 AI가 서로 돕는다면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그동안은 사람이 혼자 사색하고 연구해 만유인력의 법칙 같은 것을 발견했다면, 이제는 ‘제2의 뇌’이자 분신과도 같은 AI에게 묻고 답을 듣고 또다시 묻는, 즉 AI와 대화하는 과정이 사색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좋은 답변은 좋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유대인은 대답을 평가하지 않고 질문을 평가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빅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시대라고 해도 좋은 질문이 없으면 좋은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질문을 잘하려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 문제가 무엇인지 꿰뚫어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도 본인이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도록 AI에게 적합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을 부단히 개발해야겠지요?
NIE 포인트
1.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AI의 오류, 그 태생적(근본적) 한계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2. 문해력이 AI 시대에 왜 중요한지 생각해보자.
3. 질문에 익숙지 않은 한국 사회와 한국 교육의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자.
질문하는 자가 인류역사 만들어왔다
통념에 갇히지 않는 근원적 물음 중요

Getty Images Bank
질문은 여러 방향으로 가지를 치는 생각을 정리해주고, 새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하며, 변화를 시도하는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질문은 그런 점에서 변화와 성장의 촉매제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정답일 수 없습니다. 통념과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는 말랑말랑한 머리로 질문하고 정답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답식 교육서 발전한 그리스 문명
질문과 대답, 즉 문답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고 후대를 교육한 것은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문답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리스의 자연철학이 여기서 태동했습니다. 예를 들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 대부분인데, 변함없이 존재하고 실재하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죠. 엠페도클레스의 경우 ‘공기·물·불·흙’이라고 답합니다. 그는 만물이 이 4대 물질의 작용으로 생겨나고 나중에 이 상태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소 사변적이지만, 생각의 전개 과정은 흥미롭습니다. 세상 만물이 이 네 가지 요소로 이뤄진다면, 어떻게 다른 형태의 물질이 나타나는가란 질문을 또 할 수 있습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질들의 결합 방식과 배합 비율 때문에 그렇다고 답하죠. 이게 화학이란 학문, 화학적 사고의 출발이 됩니다. 진화론도 이렇게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질문은 잠든 생각을 깨운다’는 그리스인들의 생각이 인류 문명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하나의 질문에 집중하면 큰 보상
근원적 질문은 항상 세상을 바꿔왔습니다. “왜 사과는 수직으로 낙하하나”(아이작 뉴턴), “왜 딸은 상속자가 될 수 없나”(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이 많은 생물 모두를 신이 창조했다고?”(찰스 다윈)와 같은 질문이죠. 당연시되는 현상에 대한 물음이어서 이런 질문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찍은 사진을 왜 바로 볼 수 없나”라는 아이의 질문이 즉석카메라 폴라로이드의 발명을 이끌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질문하는 자가 인류를 만들어왔다고 볼 수 있죠?
하나의 질문에 천착해 성공한 사례도 있습니다. 벤저민 하디가 쓴 <최고의 변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면 1912년 이후 올림픽 금메달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실력의 영국 조정 팀 스토리가 나옵니다. 이 팀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며 단 하나의 질문에 집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속도가 빨라질까’ ‘도넛을 먹으면?’이라고 묻고, 답이 만약 ‘아니오’라고 나오면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집중한 결과, 영국 조정 팀은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당대 지성들도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문제 해결에 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55분을 제대로 된 질문을 찾는 데 쓰겠다”고 말했습니다. 55분을 고민해 좋은 질문을 마련하면 답은 5분 만에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답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 질문이란 얘기죠. 로마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것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습관을 들여라. 그리고 이 질문을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하라”고 했습니다.
학문 중에선 경영학이 특별히 질문을 강조합니다. 경영학의 구루, 피터 드러커는 “나는 경영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 “과거의 리더는 말하는 리더, 미래의 리더는 질문하는 리더가 될 것”이라고 했죠. 또 경영자는 ‘우리의 사업은 과연 무엇인가?’ ‘고객은 누구인가?’ ‘고객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항상 던져야 한다고 했어요. 기업 경영의 성패는 혁신이 좌우하는데, 이런 근본적 질문에서 답을 찾지 못하면 혁신이 어렵다는 거죠. 역시 경영학의 구루인 톰 피터스가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그는 “대부분의 경영 서적은 답을 보여준다. 반면 대부분의 소설은 위대한 질문을 던진다”라고 자신이 소설을 읽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NIE 포인트
1. 그리스의 문답식 교육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2. ‘퍼스트 무버’에게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자.
3. 자신의 인생을 좌우할 근원적 질문이 무엇인지 떠올려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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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금융 상식 퀴즈 O X] 3월 11일 (836)

1. 증시에서 ‘텐배거’의 정의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수익률이 매우 높다
② 주가가 극심한 저평가 상태다
③ 비상장 종목이다
④ 상장폐지 가능성이 높다
2. 글로벌 금융회사와 다국적기업이 밀집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금융산업이 발달한 지역을 뜻하는 말은?
① 레몬마켓 ② 역외시장
③ 갈라파고스 ④ 금융허브
3. 투기 자본이 경영권이 취약한 기업의 지분을 매집한 다음 자기 지분을 높은 가격에 되사갈 것을 요구하는 행위는?
① 그린택소노미 ② 그린워싱
③ 그린메일 ④ 그린벨트
4. 본사나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긴 자국 기업에 각종 혜택을 제공해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은?
① 디커플링 ② 리쇼어링
③ 리파이낸싱 ④ 아웃소싱
5. 다음 중 미국의 3대 주가지수가 아닌 것은?
① 다우지수
② S&P500지수
③ 나스닥지수
④ 닛케이225지수
6. 산업 현장에서 많이 쓰는 비철금속의 하나로, 가격이 실물 경기를 잘 반영한다고 해서 ‘닥터 코퍼’라는 별명이 붙은 이것은?
① 구리 ② 니켈
③ 아연 ④ 알루미늄
7. 중앙은행이 향후 통화정책 방향을 시장 참가자들에게 사전 안내하는 것을 무엇이라 할까?
① 밸류에이션
② 테이퍼링
③ 포워드 가이던스
④ 베이지북
8. ‘달러인덱스’ 산출과 전혀 관계가 없는 통화를 하나 고르면?
① 유로 ② 엔 ③ 크로나 ④ 위안
▶정답 : 1 ① 2 ④ 3 ③ 4 ② 5 ④ 6 ① 7 ③ 8 ④


[커버스토리] 질주하던 미래차…주춤하는 이유는? 



그래픽=추덕영 한국경제신문 기자
근래에 크게 유행한 단어 중 하나가 ‘모빌리티(mobility, 이동성)’입니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교통수단에 빅데이터·인공지능(AI) 등 정보통신기술(ICT)을 적용함으로써 ‘이동의 미래’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밖으로는 전기자동차와 자율주행차에 대한 기대와 기술개발 투자로 나타났죠.
그런데 질주하던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에 급제동이 걸리고 있습니다. 세계 자동차 제조 기업들이 속속 전기차 생산 속도를 늦추고, 자율주행차 기술개발과 투자를 중단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지난달 말에는 애플이 10년간 공들여온 자율주행차 ‘애플카’ 개발의 전면 중단을 선언해 업계와 투자자들은 물론, 관심 있게 지켜본 소비자에게 큰 충격을 안겼습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개발이 잠시 주춤하는 건지, 이대로 시동이 꺼지고 마는 건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생글생글은 지난호 커버스토리에서 AI 기술 발전이 충분한 전력공급 여하에 달렸다고 전했습니다. 급증하는 전기 수요의 또 다른 한 축은 바로 모빌리티 기술입니다. 생글생글이 ‘애플카 개발 전면 중단’이란 뉴스에 주목하며 첨단 기술의 미래를 파고드는 커버스토리를 연속으로 준비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왜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개발에 브레이크가 걸리고 있는지, 기술 발전에서 시장의 필요(needs)와 수요 기반이 얼마나 중요한지 등을 4·5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애플카 중단 충격…자율주행 기술은 꿈일까
자동차 회사들 '전기차 올인' 전략 급브레이크

애플카 콘셉트 이미지
자율주행 전기차인 애플카 프로젝트의 중단은 사실상 폐기나 다름없습니다. 문제는 운전자 개입 없이 완전히 차량 스스로가 자율주행하는 ‘꿈’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전기차는 언젠가 가장 보편적인 이동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과연 자율주행이 가능할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습니다.
자율주행차·전기차 모두 ‘일단 멈춤’
애플은 개발 중인 애플카에 대해 “모든 인공지능(AI) 프로젝트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습니다. 자율주행차가 곧 AI라는 얘기죠. 핸들도 없고, 가속페달과 브레이크페달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한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려 꿈꿨는데, 아쉽게도 10년간 쏟아부은 수십억 달러만 날린 셈입니다. “빅테크 기업 역사상 가장 큰 실패”라는 평가가 나올 만하죠.
애플만이 아닙니다. 미국 포드와 독일 폭스바겐의 자율주행 합작사 아르고AI는 포드의 투자 중단으로 2022년 말 아예 회사 문을 닫았습니다. 포드는 운전자 보조시스템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죠.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자율주행 자회사 크루즈에 대한 올해 투자금을 10억 달러(약 1조3400억 원) 삭감하기로 했고, 현대차와 자율주행 합작사인 모셔널을 세운 미국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앱티브는 모셔널에 대한 추가 투자(유상증자)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주요 자동차 회사들은 전기차 생산 목표를 줄이고, 요즘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하이브리드 차(내연기관과 전기차 양쪽 기능을 모두 가진 차)의 차종을 늘리고 생산량도 확대하는 추세입니다. 예를 들어, 벤츠는 2025년까지 전기차 판매 비중을 50% 이상 늘린다는 목표를 5년 뒤로 미루고, 생산 품목을 하이브리드 등으로 채우기로 했지요. 포드도 향후 5년간 하이브리드 차 생산을 4배 늘린다는 방침입니다. 모두들 ‘전기차 올인 전략’을 수정하는 건데요, 우리나라 현대차는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합니다.
더딘 기술개발, 수요 부진이 문제
 
자율주행차의 ‘일단 멈춤’에는 더딘 기술개발 속도가 화근이 됐어요. ‘과연 완전한 자율주행 기술의 구현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커진 겁니다. 애플은 당초 2025년 애플카 출시를 기대했지만 2026년으로 한 차례 미뤘습니다. 성능도 레벨5에서 레벨4로, 다시 레벨2플러스로 하향 수정했다고 합니다. 자율주행차가 미국 내에서 한 해 수십 건의 교통사고를 내고 사람을 다치게 한 것도 부정적 인식을 키웠죠.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은 구글의 웨이모 자율주행차에 불을 질러 차량이 전소된 적도 있어요.
자율주행차는 AI 딥러닝(deep-learning)을 통해 여러 교통 상황을 학습한다지만, 이는 ‘암기’하는 수준일 뿐이란 지적도 많습니다. 실제 도로에서 벌어질 경우의 수와 상황은 무한대에 가까워 이론적으로 안전한 완전자율주행이 불가능하고, 운전자의 통제 없이 차량 시스템이 완전히 운전을 도맡는 레벨4 기술의 구현은 어렵다는 회의론이 나옵니다. 이러니 자율주행차 개발에 쏟아져 들어오던 투자 돈줄도 점점 말라가고 있지요.
전기차 시대가 주춤하는 데엔 시장 성장세 둔화,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전기차 판매량은 2022년 67% 증가했는데요, 작년 1~3분기엔 증가율이 39%로 크게 낮아졌습니다. 전기차 1위 기업인 미국 테슬라의 작년 4분기 영업이익도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47% 감소하며 실적이 나빠졌죠. 이렇게 전기차 수요가 식고 있는 건 비싼 전기차 가격과 높은 유지비 때문입니다. 보조금을 빼면 전기차 가격은 휘발유 등을 쓰는 내연기관차에 비해 약 20% 비쌉니다. ‘전기차 시장의 큰손’인 미국 렌터카 업체 1위 허츠가 보유 전기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대를 처분하고 내연기관차를 구매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전기차 가격이 차츰 낮아져 몇 년 뒤에는 내연기관차와 비슷해질 수 있다고 해도 당장은 전기차 산업생태계를 크게 위축시키고 있죠. 전기차 전환에 따른 일자리 감소 우려 때문에 올 연말 미국 대선을 앞둔 바이든 민주당 정부마저 전기차 전환 속도와 목표를 늦출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기술만 강조해선 혁신이 성공할 확률 낮아
시장·수요 끌어내는 점진적 과정 중요하죠

게티이미지뱅크
전기차와 자율주행차의 밝은 미래가 갑자기 어두컴컴한 심연으로 빠져든 느낌입니다. 기술의 미래를 너무 낙관한 결과일까요. ‘기술은 시장을 앞서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미래 차의 감속은 잡스 일화의 재연?
이쯤에서 시장을 앞선 신기술과 제품으로 승부한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의 모습이 데자뷔처럼 그려지네요. 그는 미래 기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죠. 잡스는 사람들이 집에서 개인용컴퓨터(PC)를 이용하고, 미국 전역의 거대한 네트워크(인터넷)와 연결하기 위해 이 PC를 사용할 것을 예견했습니다. 또 마우스의 중요성, 인공지능·클라우드 서비스의 출현, 인터넷쇼핑의 유행도 짚었습니다. 잡스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경구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미래를 예측했다기보다 자신이 창조하고픈 기술의 미래를 얘기했고, 실제로 일궈낸 겁니다.
하지만 잡스는 기술과 제품에 대한 과도한 완벽주의 기질 때문에 1985년 자신이 설립한 애플에서 쫓겨나는 홍역을 치르기도 합니다. 잡스는 1980년대 초 최초의 매킨토시 PC를 디자인할 때 ‘유별날 정도로 훌륭한 제품’을 만들 것을 주문했습니다. 명령어 입력 없이 아이콘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실행할 수 있는 직관적인 사용자 환경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문제는 이런 기능들로 인해 대당 7만 달러까지 높아진 가격입니다. 결국 경영진과 갈등을 빚은 잡스는 퇴출되고 말았는데요, 지금의 전기차가 혹시 시장을 너무 앞서간 잡스의 좌절을 재연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네요.
비슷한 사례는 또 있습니다. <아바타> 같은 3차원 영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개발된 3D TV입니다. 그러나 집에서 특수 안경을 끼고 TV를 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1인용 운송수단인 세그웨이도 혁신적 제품이었지만, 인도에선 너무 빠르고 차도에선 너무 느린 단점을 극복하지 못했죠. 1000만 원이 넘는 가격임에도 한 번 충전에 39km밖에 주행하지 못하는 단점이 기술혁신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점진적 혁신의 징검다리 필요
그러면 시장과 ‘동행’해야 하는 게 기술의 운명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이를 혁신이론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기술혁신(innovation)이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개념부터 세계적 경영학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파괴적 혁신’에 이르기까지 많은 경제·경영학자들은 ‘급진적 혁신’을 강조했습니다. 신규 제품과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려는 시도이지요. 하지만 동시에 점진적 혁신, 즉 기존 기술과 시스템, 제품의 개선과 보완에 집중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급진적 혁신이 기술 주도(technology push) 혁신이라면, 점진적 혁신은 시장 견인(market pull) 혁신이죠. 기술과 시장에 각각 주목하는 이 두 가지 혁신은 현실에선 동시에 나타나고, 둘 다 의의가 있습니다. 전기차가 현재 기술에서 급진적 혁신이라면, 하이브리드 차는 점진적 혁신의 본보기라고 볼 수 있어요. 혁신적 신제품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려면 기술 발전의 논리만 강조해선 힘듭니다. 시장과 수요의 성장, 잠재력 등이 발명과 혁신의 속도, 그리고 방향을 결정한다는 주장이 일리가 있습니다.
유튜브의 부활… 미래는 모른다
현재로선 자율주행 기술을 구현하기 어렵더라도 향후 기술 발전의 속도가 어떨지 가늠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09년에 선정한 ‘지난 10년간 기술적으로 실패한 10대 제품’ 가운데 유튜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유튜브는 대중의 이용이 많은 뉴미디어였지만, 대용량 동영상을 제공하는 웹사이트 운영으로 비용 지출이 너무 커 고전하고 있다고 <타임>은 분석했어요. 그런데 유튜브는 이런 문제를 감당할 만큼의 시장을 만들었고, 결국 문제를 풀었습니다. 자율주행 전기차는 너무 자신만만하던 미래에서 한발 물러선 것은 아닐까요? 일종의 속도 조절을 하고, 다시 전열을 정비해 쾌속 질주하길 기대해봅니다.
NIE 포인트
1. 기술 집착이 혁신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한 또 다른 사례를 찾아보자.
2. 슘페터부터 크리스텐슨에 이르는 혁신 이론이 현대 경제에서 중요한 이유를 알아보자.
3. 완전한 의미의 자율주행 전기차가 개발될 수 있을지 토론해보자.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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