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24일) 제목: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예배 합니다" 말씀: 출애굽기 3:12, 로마서 12:1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성경읽기: 김명원 안수집사님, 손재선 집사님 설교자: 남동우 부목사님 ----- *출애굽기 3:12, 로마서 12:1,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 남동우 부목사님 이번 장애인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글로벌 광장에서 큰 행사를 준비하고 또 우리 수요 찬양예배를 통해서 우리 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끼와 그 은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보이려고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서는데 기대와 격려와 박수 한번 하겠습니다. 좀 전에 우리 사랑부 예배 현장 영상을 보셨는데 우리 성도들이 예배를 사모하고 정말 간절함이 있는 것을 느끼지 않나? 라는 생각이 되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고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예배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지 않나, 또 형식적으로 의무감을 갖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어느 순간인가 예배를 잊어버리고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민족이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여서 그들을 선민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이렇게 기록됐습니다. *신명기 7:7.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너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기 때문에 아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적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음에서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문화에 익숙해져서 동화되어지고 마치 그들이 애굽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정말 행복하고, 그들의 삶이 정말 즐거웠나요? 오늘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할 대제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의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첫 번째, I.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의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애고의 문화에 매몰되어져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기억도 하지 않고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고, 하나님 앞에 재배하지 않는 인생으로 낙오되어져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 백성이 아닌 노예의 삶으로 완전히 전략되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노예 생활은 어떤 삶입니까? 자기 생명도 없고, 주권도 없고, 물건처럼 사고파는 존재입니다. 우리도 어쩌면은 세상의 노예가 되면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나 애굽의 삶이나 별반 차이 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찾으시고 하나님을 찾는 자를 돌보시고 하나님이 복 주신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풍조와 문화는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어떻게 돼집니까 길은 멸망 사망의 길이요. 사망의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혹시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배를 잃어버리고,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간 다시 한 번 예배를 회복하는 귀한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두 번째, II.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없는 노예 생활에 안경도로 그대로 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참 예배자로 세우신다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출애굽기 3장 12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출애굽기 3:12,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셔서 바로 왕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우리 나름대로 이 애굽 왕 바로는 강파가 있어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출애굽기 5장 2절에, *출애굽기 5:2, 2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는데 바로 왕 입장에서는 이들을 자신의 많은 수익을 얻는 데 써야 되는데 이들을 당장 풀어주게 되면 많은 유익을 포기해야 되기 때문에 결코 버려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바로 왕에 가서 여러 가지 재앙(災殃)을 내립니다. 그들을 내어보내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이 바로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8장 25에, *출애굽기 8:25,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멀리 가지 말고 이 땅에서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애국 사람 앞에서 예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거절되어지죠. 다시 모세가 가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 달라고 말합니다. 그때 바로 왕은 출애굽기 10장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0:11, 11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 나니라. -너희 어른들만 가서 섬기고 어린아이들은 두고 가라. 이 말은 뭐예요? 이들이 예배하러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바로 왕에게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보내 달라.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10장 2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출애굽기 10:24, 24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어른들과 어린아이 가는데 소와 양은 데리고 가지 말라는 거죠. 이 말은 뭐예요? 구약 시대에 제사는 최고 제물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소와 양이 제물을 가져가야 하나님 앞에 제사할 수 있는데, 이 제물을 가지고 가지 말고, 결국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결국 출입기 12장에서 마지막 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처음 난 모든 장자의 어린아이로부터 동물들까지 첨 난 모든 자들이 죽게 되던 사건 앞에서 이 바로 왕은 두 손을 들고 항복하게 되어 집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 31절과 32절 말씀인데,
*출애굽기 12:31-32,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왕이 지배해서 430년 만에 애굽에 노예서 완전히 해방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에베소서 2:8, 8 너희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어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우리 구원에는 죄와 허물로 놓치고 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성장되어져서 하나님의 자는 저한테는 권세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러면 어떤 공로나 우리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진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우리의 심(心)비(碑)에 새겨야 됩니다. 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우리가 애굽 문화에 동화되어서 예비를 잃어버리게 되어 지는 것입니다. 오늘 그러면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은 오늘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되는가? 오늘 로마서 우리의 12장 1절 말씀 읽었는데 한 번 더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로마서 12:1,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이 시대에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될 예배는 모릅니까? 오늘 영적인 예배입니다. ▷세 번째, III.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있고 또 예배를 마치며 흩어져서 드리는 삶의 예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주의 즐거운 노래로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상에서 일터에서 예배하지 않는 내가 드린 추일 예배가 참 예배가 될까요? 우리 입술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고백하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삶의 현장에서 참 예배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가 드리는 입술에 이 진정한 예배도 참 예배가 되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부를, 우리의 삶에 전체를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온전한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요.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이번 2024년 장애인 주간 주제가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좀 이상하게 느껴집니까? 이 말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온전한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그것은 공식적인 공적인 예배를 넘어서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몸을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몸을 사용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직장에서 우리의 몸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드릴 우리의 산제물의 영적인 예배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흩어진 삶의 현장에서 자신만을 위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이것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스 13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 들어보십시오. *히브리서 13:16, 16 오직 선을 행하면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이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오직 선을 행하면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이 이 같은 제사를 뭐하신다고요? 기뻐하시니라. 오늘 본문에 선행과 구제가 예배란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어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혹시 여러분들 구제하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해보셨어요? 선행하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해 보셨어요? 오늘 이번에서 13장 16절은 예배라고 제사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요. 오늘 우리 주위를 돌아보시면 우리의 손길이 필요로 한 곳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몸을 들여서 봉사하고, 섬기고 나눔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될 산제물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이 시간 우리의 마음에 새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 하나님께 예배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어요.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을 주셨다니까요?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가운데 있다. 라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인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그들에게 긍휼과 사랑으로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아멘!!! 인정해야 돼요. 여러분 인정 안 해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마음에다 묶어 놓지 말고, 내 마음에다 딱 차곡차곡 쌓지 말고 부자처럼 창고를 짓는 자기를 위해서 부자가 창고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마음을 심어놓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이웃들에게 표현하고 실천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기를 소원합니다. ※조지 휫 필드는 그의 일기 중에서 이런 말을 기록했습니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나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서 없어지기를 원하노라. –조지 휫 필드- 여러분, 우리에게 주시는 이 육체 건강한 육체를 자신만을 위해서 잘 보관했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이제 왔습니다. 하며 하나님 싫어하신다. 우리의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이 육체가 자라서 없을 지을 정도로 우리가 주님 앞에 충성스럽게,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살아가는 주님의 말씀처럼, 내 몸을 필요로로 하는 곳이 있다면, 어느 부서든 어느 기관이든 어느 곳에 가던 사업의 현장에 가서 정말 녹슬지 아니하고 몸이 아스러질 정도로 일을 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 직장에서 그렇게 하십니까? “아이, 나는 사장도 아닌데 내가 뭐 그렇게 할 필요가 뭐 있어?” 여러분 우리의 고용주는 그분의 사장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고용주이심을 믿습니다. 여름을 직장에 여러분들이 선택해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거 이걸 믿으면 그 사람이 주위 사람들이 어떠하든 사장이 어떠하든, 나를 힘들게 하든, 관계없이 우리의 몸을 온전히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 6장 20절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6:20,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 구속해 주셨어요. 아까 우리의 심비의 새기라고 했는데, 이 구속의 은혜를 심비에 새기면 여러분들의 몸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 되어졌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맛이나 먹든지 무엇이라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셔야 된다. 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우리 교회에서, 봉사하고 계십니까?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 예배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귀하게 사용해 주셔서 우리에게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올해 우리 장애인 선교회의 큰 주제가 ‘온전한 예배자’입니다. 그래서 그 예배에 맞춰서 이번에 주제도 정해졌습니다. 오늘 장애인 주간 기념 수요 찬양이므로 영 가족 여러분들이 온전한 예배의 기쁨이 회복되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 ‘조지 휫 필드’처럼 정말 몸이 아스라 질 정도로 주님의 영광을 해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교회 선신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물 떠온 그 하인의 기쁨이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이 이 시대에 받으시는 온전한 예배자로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속의 은혜를 망각하거나 저버리지 않고 심비에 새겨서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온전한 예배 자가 되고, 이 시대의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적예배를 드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온전히 올려드리는 자가 되고, 장애인 선교부 모든 영 가족과 가정을 사명의 문 빚 장과 단단한 강철 신발로 보호해 주시며 풀무 불 같은 세상에서 지치고 낙심할 환경 가운데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매일 하나님의 산 기적을 경험하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실천하는 자로 나아가 아직도 믿지 않는 자녀와 가족, 형제에게 복음이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신 이 구속의 은혜를 심비에 새겨서 평생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몸을 산 재물로 들여서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한다.
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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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대 찬송 감사합니다. 명실공이 우리가 지금 봄의 한가운데 꽃 대궐 속에 충만한 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우리 성도들도 예외 없이 영원의 봄 동산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근데 오늘 여러분 찬송가를 부르는데 이 찬송가가 보니까 좀 맥아리가 없어요.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찬양대도 잘 모르시는 것 같고, 근데 이 찬송은 제가 한27년 전쯤 브라질의 상파울로에서 한인 교민들 집회를 하는데, 마지막 시간에 청소년들 한 십여 명이 나오더니, 특 송을 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우리 교우들은 잘 모르고 있는데, 27년 전에 브라질 상파울로의 한인 교회 청소년들이 이 찬송을 하는 거예요. 특 송으로, 저는 어릴 때부터 이 찬송을 잘 알았어요. 근데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이 말씀 전할 때, 내 마음이 기쁘고, 말씀을 할수록 새 기쁨 넘치네, 우리에게는 새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에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 들은 사람 또 듣기 원하고, 목말라 사모하니 말씀 진리라. 가사가 안 나오죠? 나라 영광중에 나부를 새 노래 옛 부터 좋아하더니, 이 말씀 다시 3절에, 이 말씀 들은 사람 또 듣기 원하고 목말라 사모하니 말씀 진리라.” ♪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목마른 말씀이 되기를 바라고,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들 탁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옛 부터 좋아하더니, 말씀 뭐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못합니다마는 이 찬송을 집에 가서도 함 불러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지금 주신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브라질에 있는 청소년들을 이상으로 찬송이 돼서 영의 눈이 떠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다 그래도 주님 잘 섬겨요. 아무것도 없어도 해외 디아스포로로 흩어져 가지고 뭐 보장되는 거 없어도 이런 찬송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깨달으면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저는 예수님 누구신가?(Who is Jesus?-더블유제이 시리즈) 번째 “용광로 풀무불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여수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스토리는 여러분들이 익숙하게 하는 내용이고, 처음 오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사드락과 매삭과 아벳느고라는 다니엘의 구약에 다니엘의 세 친구인데, 구약에 출중한 인물인 다니엘의 세 친구인 이들이 풀무불 속에, 용광도 속에서 구원받는 내용입니다. 이 저는 여기서 어떻게 예수님을 발견하고 여기서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로마서 15장 4절에 이런 말씀해 주세요.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로마서 15:4,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구약의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뭐냐, 특별 오늘 이런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뭐냐면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 교과서 알죠“ 교과서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교과서가 될 것이다. 오늘 3장에는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생애와 여러분들의 생애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교과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란 1차 포로 때에 잡혀갔어요. 이 차 3차 포로 뒤에 잡혀가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이 말씀이 위로가 됐을지 몰라요. 그리고 후대에 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달리고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이 말씀이 시대에 한 민족의 민족이 면함을 당할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과서가 된 것이에요. 오늘 우리의 상황 우리의 주위의 상황이 녹록치 않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여러분과 저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에 교과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생각할 것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겨도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I.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겨도 풀무 불에 던짐 당할 수 있다.
-오늘 18절에 보니까 단연히 세 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 제가 배경을 다 뭐 자세히 말씀 다 못 드립니다마는 느부갓네살 왕이 당대 최고의 황제였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고 무소불이(無所不爲)를 행사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신상을 세웠어요. 그것도 평지에다가 높이 세워갖고 더 두드러지게 보이라고 세워 가지고 이제 절하라고 그랬어요. 근데 절 못한다고 다 이들 질투하던 사람들이 이들이 관리로서 잘 하니까 옆에는 항상 그래요. 누가 잘하면 대한민국 사람하고 똑 같에요. 누가 잘하면 봐주지를 못하는 거야. 질투하고 같이 박수치고 같이 해가지고 같이 잘하면 같이 성공하는데 물어뜯고 집어 뜯고, 잡아 뜯고, 지난주에 제가 원,불,비라고 그랬죠? 물어뜯고 집어 뜯고 잡아 뜯고 물,집,잡이에요. 그래갖고 이 세 친구를 갖다가 얼거 매 가지고, 이제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시에 느부갓네살 왕이라는 이 황제가 왕이 무소불이 왕이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고 그래서 이제 풀무 불에 집어 던져지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어떨 때는 결단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면 늘 사람들이 격려하고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어요. 오히려 미워하고 박해할 수 있는 것이에요. 요한복음 15장 20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15:20,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니 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전에 우리 개혁 판에는 사람들이 나를 핍박했으니까, 너희도 핍박(逼迫)할 것이다. 주님을 핍박 하니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핍박한다.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디모데후서 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핍박을 받으리라. 여기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경건하게 개인적인 경건도 있습니다마는 복음을 위해서 전도를 하고, 기독교 신앙 가치관을 가지고 한번 나라를 한번 제대로 세워보고자 애를 쓰고,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어제도 여기 우리가 복음 통일을 위하여 어제도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오후 한 시에 주님 이 나라가 피 흘림 없이 복음적으로 통일되게 해 달라고 막 그렇게 할 때에, 사람들이 박해를 하는 겁니다. 숨어서 경건하게 살면 누가 박해를 하겠어요? 그런데 기독교 정신을 선포하고, 이 나라가 사회주의가 되면 안 되고 이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라고 외칠 때 박해가 있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은 세속의 우상들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삶들에 대해서 저들 나름대로 뜨거운 용광로(鎔鑛爐)를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에요. 용광로는 빈정거림과 무시와 따돌림의 화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대로 섬기고 기독교 신앙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가 지금 차별금지법 ,동성애, 이런 거 반대하면 얼마나 무시라 미국 같은 데 가면요 완전히 왕따 시키고 있잖아요. 동부의 아이비리그 잘난 데는 전부 다 교술 다 동성애자들이 많고 얼마나 풀무 불을 많이 준비했는지 몰라요.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가지고,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가지고 풀무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세 사람을 끌어다가 풀무 불에 던져 넣기 위하여 아주 더 힘이 센 사람들이 세 사람을 묶어 가지고 풀무불 속으로 왔어요. 저 이게 풀무 불이 제 제철 용광로인데, 내가 자세히 위에 있을 때, 뭐 자세 설마 큰 거 있어요. 그리고 밑에는 사람들이 막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있잖아요. 위에서만 갖다 놓고 이제 네 그런 게 있어요. 제가 설명을 다 못하고 21절과 22절을 보니까,
*다니엘 3:121-22,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힘센 사람들이 단열의 세 친구를 뭐예요? 결박해서 풀무 불에 던졌는데 그들을 풀무 불에 던진 사람들이 먼저 불에 타서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정도의 화력이니까. 이 세 친구는 이제 끝난 것 같았어요. 느부갓네살 왕도 좀 정신이 없는 게 진짜 고통스럽게 벌을 주려면 불을 7배나 강하게 하면 고통이 오겠습니까? 예 보통 풀무 불이 1000도가 넘는데, 7배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불도 적당히 뜨거워요 고통스러운데 너무나 뜨거우면 뭐 고통 느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이 감정이 복받치고, 생각이 잘못되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판단 능력이 마비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 주위에도 예상외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하고, 비하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노마 저것들이 느부갓네살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고 결단했는데도 실상은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삶의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다니엘이 세 친구가 옷을 입은 채로 던져줬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풀무 불에 던져져서 끝인 줄 알았는데, 24절에 보니까,
*다니엘 3:24,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그런데 이제 그다음에 더 놀라운 기적을 본 게 25절에 25절이요.
II.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
*다니엘 3:25,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네 번째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 그러니까 풀무불이 하늘이 뭐야? 여기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➀‘하나는 불에 타지 않고 건재한 기적’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앞에 보니까 뭐라고 돼 있어요? 그들을 포박한 줄만 탔어요. 포승줄만 탄 거예요. 두 번째 기적은 뭐냐 하면 ➁‘네 번째 사람, 신들의 아들과 같은 네 번째 사람 그들이 함께 한 것’ 이 두 가지 기적이에요. 여러분 풀무불이에요. 닭갈비집에 가면 어떻게 돼요. 그리고 저기 뭡니까? 뭐 이런 구이 집에 가면 온몸에 냄새가 나는데, 뒤에 나옵니다. 냄새 하러 나지 아니하고 포승(捕繩)줄만 결박이 없어지고 네 번째 사람이 함께한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이 네 번째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뭐 다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신들의 아들, 신의 아들 그러니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신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신약의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소위 크리스토파니, 구역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지난번에 우리 여호수아 5장의 군대 장관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여러분, 그렇게 그냥 그렇게 해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큰 무리가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거의 뜨거운 용광로 풀무불 속이 아니라 네 사람이 마치 한가한 정원을 거닐 듯이 마치 왕궁을 거니는 것처럼 풀무 불은 그들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걸 보면서 제가 이사야 43장 2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구나.
*이사야 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할렐루야 이 약속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어요. 문자적으로,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이 풀무불의 핍박이 왔을 때에, 그것을 피했습니까? 안 피했습니까? 피하지 않았습니다. 풀무 불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풀무 불 한가운데서 뜨거운 용광로 한가운데서 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맞닥뜨리는 것 하나님을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목숨을 건 선언을 한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요?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풀무 불에 여기서 보면, 풀무 불에서 건잠 받는 기적은, 풀무불 속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고 아니 실제로 풀무불 속에 들어가야 건짐을 받는 것이에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래서 제가 썼어요. 풀무 불에 안 들어가니까 풀무불 속에서 건짐 받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안 일어나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풀무 불에 속에 들어가지 않으니, 풀무 불에 건짐 받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그렇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왜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왜 내 신앙생활이 지루합니까? 왜 내 신앙생활에 물을 물 탄 듯 매가리가 없고, 물에 물 탄 듯 뭐가 없습니까? 왜 그럴까 왜 강직함이 없을까? 오늘 여기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해석하는 것은 풀무 불에 들어가는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킨 결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7절에 보니까,
*다니엘 3:27,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그다음에 제일 감동받는 것이 뭐예요?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 삼겹살만 구워 먹어도 난린데 냄새가 온통 다 난린데, 세 친구는 불타는 냄새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을 결박했던 포승줄 불만 포승줄만 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오늘 리빙 미라클!, 산 기적이 되었어요. 살아있는 기적이 어디였어요. 할렐루야!!!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 저도 저의 남은 생애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은 산 기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살아있는 기적이 돼요. 리빙 미라클!, 우리가 먼저 풀무 불에 들어가야 할 경험이 필요하고, ‘2033-50 비전’을 왜 합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잖아요. 핍박도 없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영적으로 성공하고, 축복의 근원이 되고, 정말로 세계 복음주의 쇠퇴를 막고, 남북의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우리가 뭔가를 하면, 핍박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에 은혜를 베푸셔갖고 모든 포승줄을 풀어주시고, 우리가 결단을 할 때, 우리가 리빙 미라클이 될 수 있도록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목숨을 건 선언이 필요하고, 풀무불의 형벌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무 불의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날 내 삶에 왜 기적이 없는가? 내 삶의 신선한 감격과 주름을 섬기는 열정은 왜 없는가? 왜 내 신앙생활에 이렇게 생활이 지루하고 물에 물 타듯하고 뭔가가 없는가? 중요할 때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분명한 헌신의 자세, 중요할 때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값을 치르는 대가,
-저는 어릴 때 태어나서 가만히 제가 보니까 어릴 때, 60명 가운데 나 혼자 예수 믿었어요. 학교만 가면 이제 예수쟁이라고 있잖아요. 뭐 예수를 믿냐? 내 주먹이나 믿어라. 이러면서 모욕당하고 교회 간다고 모욕당하고, 또 교회가 뭐 너무 초라하니까 모욕당하고, 주일 성수한다고 모욕당하고, 제가 한 번 얘기했죠? 우리 아버지 교 밑에 공병기지창 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내가 어릴 때 여름 성경학과 찬송하고 내려가면요 군인들이 이리 와 이리 와라 자식들 말이야. 어디 감히 이 앞에 노래를 부르고 다녀, 이리 와! 저놈 여기 누나 있나? 누나 없습니다. 내가 장남이니까. 어디 이러면서 노래하나 불러, ♪환난과 핍박 중에도~~이 신앙 생각할 때 기쁨이 충만하도다.~~♬ 말이 그렇지요. 수많은 핍박과 난제에요. 학교에 들어가서도 가난하고 그러니까, 예수 믿으니까, 있잖아요. 얼마나 근데 지금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요. 예수쟁이기 때문에 찬송한다고, 전도한다고, 교회 간다고, 주일 성수한다고, 모욕당한 모든 것들이 저희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이 기적의 시작점이었어요. 수많은 기적들, 수많은 기적의 만남들이 수많은 인생의 수많은 과정과 열매들, 때론 예수님들을 모욕당하고 여기 예수님의 아내들 집안에 혼자 예수 믿는 분들을 주님들을 모욕당하고, 그래도 꿋꿋이 주님 사랑하고 그럴 때, 지나놓고 여러분 그러면, 자식이 기적을 일으킬 것이에요!!. 살아있는 미라클, 리빙 미라클(living Miracle), 여러분께 여러분들 회사 내에서 한 10년, 20년, 30년을 꿋꿋하게 신앙 지킨다고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리빙 미라클로 삼아주시는 것이에요.
III. 풀무불(鎔鑛爐)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번 더 제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토파니를 정리하겠습니다.
◎크리스토파니(Cristophany)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1세기에 초림으로 성육신하시기 전에 구약에 예표로 나타나신 것이다.
*다니엘 3:25,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The Son of God!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인 줄로 믿습니다. 풀무 불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사람에게 그 신앙이 지키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가 되시고, 그들을 보호하는 호위자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시고, 그래서 가장 강력한 호위와 가장 강력한 구원은 뜨거운 용광로 불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세요.
여러분들의 생애 가장 강력한 호위는 돈도 아니고, 가장 강력한 호위는 권력도 아니고, 가장 강력한 호위는 정치적으로 여러분들을 같이 하는 그런 흐름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호위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세요. 불 속에서도 그분이 나와 함께하면 여유롭게 걸릴 수가 있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있다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풀무불 속에서도 어려움의 시간들을 말씀과 기쁨과 찬양으로 기도로 통과할 수 있도록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떨 때는 말씀으로,
어떨 때는 특새의 은혜로,
어떨 때는 성도의 교제로,
어떨 때는 찬양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의 호위자로,
구원자로 보호자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의 순간 혼자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기적이라 이 말이죠. 신앙 때문에 직장에서 왕따 당할 때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살리는 가장 큰 은혜의 원천이 뭡니까? 가장 큰 구원의 원천이 뭡니까? 한마디로 임마누엘인데, 지금 나와 함께 다시는 예수님이 나의 삶에 가장 큰 보호와 가장 큰 구원의 원천이 되는 것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이걸 여러분들이 그냥 적당히 생각하시면 안 돼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인생의 풀무 불을 당한 고통을 당하는 분들, 지금 내가 암이 하나 두 개 한두 개 있어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암 때문에 고통도 하는 그런 분들, 어떻게 보면 인생의 풀무불인데 가운데서 고생하는 분들 그분들에게 제일 큰 능력과 제일 큰 치유가 뭐냐, 지금 그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뜨거운 용광로 가운데 고생하는 분들의 고백 속에 지금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셔, 나는 그분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여러분 참 희한한 게요 어려울수록 이게 더 실감이 가는 것이에요.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이 은혜는 세상에 잘 나가고 모든 것이 평탄할 때 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고통도 어렵고 눈물 날 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더 잘 느껴진다니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제 하나의 용어를 말씀드리는데 플러스 원(+1)이라는 거예요. 나 플러스 원(+1) 예수 그리스도, 나와 함께 계시는 플러스 원(+1)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오늘 용광로 속에서 함께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오늘 사실 설교 제목을 제가 ‘플러스 원(+1)되시는 예수님’ 이라고 하고 싶었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 그래서 다른 하나의 우리의 삶의 형태가 사실 팩트 리포트(fact report) 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시각을 가지고 페이스 리포트(Faith Report), 보고만 하는 사람이 있고, 팩트리 볼트 바른 사람이 있고 믿음 보고만 하는 사람이 있다. 믿음보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페이스트 리포트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보고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도 눈이 있으니까 사실보고를 하지만 우리는 신앙 때문에 믿음보고의 보고자가 돼야 할 줄로 있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면 오늘 이 여기 말씀과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 매일매일 삶의 현장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진짜 어려울 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그것이 뭐냐면 여러분 플러스 원(+1)이 되는 것이에요. 나 혼자가 아니라 플러스 원(+1)에 보고를 해야 돼 세 명 플러스 원(+1)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플러스 원(+1) 사실보고가 아니라, 사실보고는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 그것이라면, 믿음보고는 내 인생의 플러스 원(+1)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풀무불의 임재 공식은 플러스 원(+1)이에요. 다시요. 사실보고가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면, 믿음보고는 내 인생의 플러스 원(+1) 되어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일 앞에 서는 그날까지, 플러스 원(+1)의 인생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보면 마이너스 인생도 있어요. 마이너스 역할도 하는 사람도 있고 뺄셈만 하는 그런 환경도 있어요. 그런 사람 그런 환경을 만나면 우리가 에너지가 뺏겨요. 우리 주위 환경을 보면 에너지를 뺏는 환경들과 사건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자세히 말씀을 안 드려도 여러분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수많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마이너스 인생이 되면 안 돼요.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풀무불 속에서도 플러스 원(+1)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신 줄로 믿는 것이에요.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갈 때는 그냥 세 사람 플러스 제로(3사람+0)였지만 오늘 풀무불 속에 함께 계신 예수님 때문에 뚜리 플러스 원(+1)이 된 것이에요. 부모들에게는 이 플러스 원(+1)이 돼야 할 것이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는 원 플러스 원(1+1)이 돼야 할 것이에요. 사람의 교회 이런 정신을 가지고 7천기도 용사를 하는데, 7천기도 용사를 하는데 7천기도 용사 7천 플러스 원(7000+1)이 돼야 할 것이에요. 요셉은 구덩이라는 풀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요셉 혼자서 울었던 게 아니라, 거기에 요셉 플러스 원(요셉+1)이 되었어요. 요셉 플러스 원(요셉+1)이 되니까, 창세기 39장에 보면,
*창세기 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풀무 불 상황 속에서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예요? 아니 풀무 불 전에도 다니는 세 친구와 주님은 동행하셨어요. 다니엘서 1장에 보면 3년 동안 훈련받을 때도 주님 함께 하셨고, 다니엘서 2장에 보면 세 친구가 각도에 흩어져 가지고 공직을 수행할 때도 함께 계셨어요. 평소에 함께하셨던 주님께서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에, 예수님이 크리스토파니(Cristophany)로 나타나셔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결정적 기적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에요. 세 친구와 이미 동행하고 계셨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강력함으로 나타난 것이에요. 그래서 용어를 제가 하나 만들었는데,
▷평상시 크로노스의 플러스 One(Plus One)의 임재가 결정적인 시기에 믿음으로 풀무 불에 들어가는 순간 카이로스의 플러스 원(Plus One)의 임재가 되어 주신다.
예수님은 평상시에 크로노스의 플러스 원(+1)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그런데 결정적으로 우리가 결정적인 시간에 이걸 깨닫고 헌신하고 풀무 에 들어갈 때에 카이로스 플러스 원(+1)을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평상시 크로노스의 플러스 원 크로노스란 말은 그냥 연대기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삶의 주님이 우리의 임재가 결정적인 시기에 믿음으로 풀무불에 들어가는 순간 카이로스 플러스 원(+1)이 되어 가지고 기적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기적 공식이에요. 오늘 이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 가정 지키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도 지키시길 바라고, 교회도 지키고, 이민족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뭐 뻑 하면 힘들면 이민 간다고 그러는데,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시고, 여러분 그런 거 말씀하지 마시고, 하나님 어려울 때도 하나님 이 가운데 플러스 원 되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플러스 원(+1)의 인생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플러스 원(+1)이 되는 인생이 되고, 역사와 민족 앞에 플러스 원(+1)이 되는 인생이 될 줄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북 스토어를 사랑 플러스로 지어놨어요. 그래서 앞으로 북스토어 간판을 사랑 플러스 원(+1)으로 바꿀 거예요. 사랑 플러스 원(+1), 전 세계 성도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를 대라 그러면, 많은 분들이 “여호와는 나의 목 자신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23편 1절도 좋지만 4절이 더 좋아요.
4절 내가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이 나에게 사망이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주님이 나에게 플러스 원(+1)이 되어 주시는 것이에요. 혼자, 이 세상 사람들은 잘나고 뭐 있고, 권력하고 모든 것, 지혜 이런 거 지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최고의 관심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 실감을 한다니까요? 어려울 때일수록 여러분 어려울 때 저는 보면요 어려울 때, 주님의 이거 더 실감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막 그냥 창자가 꼬이도록 어려운 기도 제목들이 많잖아요. 창자가 꼬이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순간 자체는 나에게 해답이 없었어요. 당장은 해답이 없었어요.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이 다 해답해 주셨어요.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가장 큰 가장 큰 해답은 뭐냐, 정말 어려울 때 창자가 꼴 정도로 기도의 제목이 심각했을 때, 주님의 임재를 끼면서 강하게 기도하고, 매달렸을 때 그리고 저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모든 해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는 것이에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리고 모든 해답은 뭐냐면 어려울 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여호사밧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려울수록 플러스 원(+1)을 느끼고, 기도할 때 지나놓고 보니까 당장 답은 없었지만 어려울수록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간절하게 매어 달리는 기도한 자체가 최고의 응답이 된 것이에요. 아멘! 자 어려울수록 주님의 임자를 느끼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자체가 기도에 응답이 되는 것이에요.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도 하나님의 플러스 원(+1)의 임재의 은혜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그냥 맹숭맹숭 적당히 산다면 그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고. 심지어 좀 세게 말해 저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예수 믿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지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평탄해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과 하나 선생님이 함께하심을 정말로 사모하고, 매어달리지 아니하고 적당히 해서 다 잘 된다면 여러분 좋은 거 아니에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막 그냥 뭐 압박을 당한다든지 막 칼로 찌를 정도로 그렇게 하지는 않잖아요? 나라를 위해 있기도 하고 통일을 위해 있기도 하고 경회를 위해 있기도 하다 보면 가스 마려할 일들이 많이 생긴다고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느껴가지고 더 영광을 사모하고, 더 찬양하면, 그것 자체가 기적이 된다는 거예요. 자체가,,, 그것 자체가, 결론은 풀무 불에서 구원받으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이에요.
IV 풀무 불에서 구원받으면 세상이 뒤집어진다.
풀무 불 가운데서 네 번째 사람이 거리는 걸 보고 느부갓네살 왕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26절에 풀무 불 아기 그게 밑에 통이 컸어요. 밑에서 사람이 그리는 걸 보면 밑에서 본 거예요.
*다니엘 3:26,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저는 진짜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결단하는 자리에는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는 사람이 풀물 불을 결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에요. 좀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날이 우리 교회와 개인과 이민족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고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임재 자체가 응답이라고 믿고, 진짜 하나님을 기대하고 찬양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에요. 거꾸로,
함께하셔서 결단하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이런 대반전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제대로 풀무 불을 결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29절에,
*다니엘 3:29,
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그 당시에 황제의 조서는 지금 우리 시대로 보면 SNS가 퍼지는 것이에요. 앞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질투하는 모든 인간들, 한 번 더 해봐라 ‘그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 터로 삼을지니.’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법적 조치가 필요 없어요. 인간에게 이런 법적 조치 받을 필요도 없어요. 그 당시 최고의 무소불이에요. 황제가 권력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누가 찬양하라고 해달라고 했나? 찬양하라고 여기에 보니까 시대의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라고 했어요. 아벨론의 신 정도가 아니라 천하 만고의 신들을 KO시키는 결과가 나왔어요. 세 친구들이 풀무 불에 들어가겠다고 순교조인 결단하고 난 다음에 당시 정치 세계에도 글로벌하게 영향을 끼치게 된 거예요. 왕의 조서가 최고의 SNS가 되어 가지고 각 언어로 각 나라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보면 뭐 여러 나라가 다 주님 잘 섬기지만 한국 교회가 희망이에요. 사랑의 교회 사역이 한국 교회 사역이 올해는 ‘10.23’, 한국 교회 섬김의 날 사역이, 오늘 왕의 조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전 세계 드디어 30절에,
*다니엘3:30,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초라한 아주 연약한 유대 민족이었고 초라한 포로였지만 그가 섬기는 하나님 때문에 제국의 모든 신들과 모든 권위들이 하루아침에 KO당했어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원도 홍천의 무명축구팀이 지금 프리미어 리그의 멘시티와 아스날을 10대 빵(10:0)으로 이긴 거예요. 저 강원도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기 짝이 없다. 원통 골엔 인제에 있는 축구팀이 파리의 샹제르망을 15:0으로 이긴 거예요. 별로 반응도 안 하시고,,, 사무엘상 30절 다 같이 우리 크게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30,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게 오늘 우리 시대가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주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물론 주님을 열심히 섬겨도 세상 왕국에서는 높임 받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계산은 정확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반드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알다 보면 풀부 불을 경험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 목사님이라고 계시는데 그분 목사님 사모님이 계은덕 사모님이세요. 사별함을 이렇게 했어요. 이번에 최근에 책을 하나 썼는데,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사모님은 자녀가 없으시고 미국의 USC라는 좋은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셨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암이 두 암이 왔어요. 두 암이 와가지고 지금 뼈만 남았어요. 근데 책을 쓰시고 저한테 추천사를 부탁했어요. 추천사를 써드렸어요. ‘수많은 사람들을 키운 좋은 사모님 교수님이기 전에 목사님 사모님, 몸에 두 암이 두 가지 암이 와가지고 완전히 뼈가 남아았어요. 그 다니시는 교회에서 막 특송을 하시는데, 특송한 내용을 써놓았어요.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마지막 특송이에요.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뼈만 남은 풀무불이에요. 여러분 저의 삶에 최고의 플러스 원은(+1)요, 주님이 날 붙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요약
오늘 우리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통하여 교과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플러스 원은(+1)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니, 우리의 삶에 풀무 불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도 주눅 들지도 말고, 기독교 정신을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의 횃불을 들고 영적 기백을 가지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이 시대를 승리해야 한다. 질병의 용광로 속에서, 경제적인 용광로 속에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플러스 원 되시는 예수님이 가장 귀한 자본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풀무 불에 던져질지라도, 정면 돌파하게 해서 풀무 불을 회피하지 말고 승리하는 온전한 제자로 살아내어 주님께서 결코 너희를 버려두지 아니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04월 20일) 제목: "용광로 속에서 +1" 말씀: 골로새서 2:1-5 찬양인도: 권사회 팀 대표기도: 한준희 권사님(1권사회 회장) 말씀읽기: 임주현 자매(청년1국), 김민준 형제(대학6부) 설교자: 이원준 목사님(렝케스터 바이블 칼리지 교수님) ㅡㅡㅡㅡㅡ *골로새서 2:1-5,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 ▶이원준 목사님(렝케스터 바이블 칼리지 교수님) -우리 주 예스 수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비천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던 죄인들을 건져내 주셔서 하늘과 땅에 주인 되신 분의 자녀로 총애(寵愛)와 호의(好意)를 입게 살아가게 하시는 우리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讚揚)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한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인 줄 믿습니다. 하늘 문을 여시고 부으시는 신령한 복들과 기름 부으심이 사랑하는 사랑의 교회 영(靈)가족 모두에게 지금 이 시간 강력하게 임하기를 간절(懇切)히 소망합니다. 저는 이번 멧 레드멘 집회와 여러 가지 동역을 위해서 그리고 사랑글로벌 아카데미, 예배 아카데미에 예배학 교수님으로 전 세계적인 영향을 끼치고 계신 콘스텐트 최위 교수님의 강의와 함께 동역을 위해서 에 한국은 방문하게 되었는데요. 이 시간들이 참 기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 이렇게 토비새(토요비전새벽기도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예배하고 또 주일 예배를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귀한 강단 초대해 주신 사랑하는 오정의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참 잊을 만 했는데 또 나타난 저를 따뜻하고 사랑으로 받아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참 소중하고 또 저에게도 여러분의 기도를 향한 열정 토비새에서 우리가 함께 기도의 지팡이를 드는 모든 마음의 결단들, 함께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 모든 마음의 움직임들이 얼마나 도전이 되고 또 전 세계적으로 참 모범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의 만남 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 시간을 향한 애틋하고 소중한 마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 마음 한편으로는 동시에 안타깝고 절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우리 대학생들은 캠퍼스에서, 청년들은 일터에서, 장년들은 사회와 가정 그리고 나아가서는 문화와 미디어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의 모습들을 조롱(嘲弄)하고 조소(嘲笑)하고 이상하게 여겨낸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것이 매우 무모(無謀)하고 맹목적(盲目的)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祈禱)하는 이 모든 시간들이 과연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차지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자신들만의 평가를 내립니다. 신앙이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지, 전부가 되어서 안 된다. 라는 주장을 합니다. 종교는 어떤 면에서 인간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 종교가 삶의 전부(全部)이거나 종교가 삶의 모든 부분들을 이끌어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評價)합니다. 이런 사회에 또 이런 세상의 평가 앞에 우리는 이 평가에 대한 우리의 소신(所信), 우리의 신념(信念) 그리고 기도지팡이를 다시 들 수 있는 믿음의 결단이 없다면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만의 자리로 후퇴(後退)하든지 아니면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수용해서 마치 우리의 신앙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일부가 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종교 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사도바울의 이 골로새서를 향한 편지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한 돌파(突破)를 찾을 수 있는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우리가 함께 붙잡게 될 때에 우리의 토비새의 기도 제목, 우리의 인생의 가도 제목, 그리고 이 땅 가운데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새로운 동력(動力)이 생겨나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골로새서를 향한 사도바울의 편지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聖靈)의 음성(音聲)을 함께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골로새서 2장 1절의 말씀을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1,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사도바울은 너희와 골로새 교회에 있는 자들이죠.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 라오디게아는 이 당시에 번영(繁榮)과 무역(貿易)과 학문(學文)과 여러 가지 풍성(豊盛)한 문화의 결실로 유명한 대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무려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 그러니까 이 도시 밖에 있지만 복음을 받은 자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절 말씀 우리 계속해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2:2, 2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자, 사두바울이 이 절부터 3절 그리고 4절에 이르기까지 원하고 원한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방금 우리가 본 것처럼 우리가 이해와 지식, 지혜와 아는 것에 모든 풍성함 속에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요. 3절 말씀 제가 얘기했습니다.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 안에는 지혜와 자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고요. 4절 말씀 보겠습니다.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마음 속에는요. 여러분과 저와 같은 라오디게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사도바울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복음의 소식을 듣고 주니 앞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寶貨)이신 ➀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인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하나와 ➁교묘한 말로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묘한 말로 속지 않고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이것, 이것이 우리의 삶의 기도 제목이고, 우리 토비새의 용광로(鎔鑛爐)와 같은 기도의 원동력(原動力)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교묘한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고린도에 편지한 사도바울의 글들 또 이외에 다른 서신들을 통해서 이 당시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이 교묘한 말들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데요. 헬라인들에게는 이 교묘(巧妙)한 말로 사람들을 십자가보다 철학이 더 고등(高等)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律法)이 십자가보다 더 고등하다..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헬라인-철학, -유대인-율법. 십자가보다 더 높은 것이 헬라인들은 철학이라고 여겼고 유대인들은 율법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세상이 십자가보다 더 고등하고, 십자가보다 더 높은 위치를 가지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이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십자가보다 높아서 종교를 평가하는 최고 권위(權威)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나의 판단 인간의 이성이라고 하는 이 주장이 이 견해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와 문화와 심지어 가정과 관계와 캠퍼스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 뜰의 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이성이 십자가보다 높다. 라고 하는 이 견해는 틀렸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과 이 세상의 평가 기준이 최고의 권위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왜 그러한지 여러분과 함께 잠깐 나누고자 하는데요. 여러분 저와 함께 사도 바울이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좀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종교적인 지식의 최고 권위가 아니구요. 지혜와 지식까지도 최고 권위가 되신다는 겁니다. 자 이것을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이성의 영역이라고 얘기해 주는 과학과 수학을 좀 잠깐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와 함께 생각해보시면 좋겠어요. 제가 여러분께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과학과 수학이 발명일까요? 발견일까요? 발견입니다. 네, 역시 수준이 있으십니다.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니고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진공 상태에서 빛이 29억 7297만 4458미터를 1초에 움직인다. 라고 하는 사실은 누가 만들어낸 사실이 아니구요. 찾아낸 사실입니다. 수소 둘, 산소 하나, H2O가 합쳐지면 물이 된다는 사실은 여러분이만 들지도 않았고 제가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이 발명한 것이 아니고 발견한 것입니다. ※에이 삼각형이 있을 때 하나만 더 얘기 할게요 삼각형이 있는데, 직각삼각형의 한 면 곱하기 한 면 제곱은 다른 면의 제곱과 동일하다 A 스퀘어 비 스퀘어는 씨 스퀘어다라고 피타고라스의 정의가 있지요.(예: 직각 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a, b라 하고, 빗변의 길이를 c라 하면 a2+b2=c2이 성립한다). -새벽부터 머리가 갑자기 어질어질 하실 수도 있겠는데, 자 이 피타고라스의 정의는 발명한 것이 아니고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 모든 것은 논리적인 법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서(秩序)라고 하는 것이에요. 근데 이 질서가 인간의 발명의 결과가 아니었고 잘 들어보세요. 인간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보편적(普遍的)으로, 우주적(宇宙的)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것이 어디에서 만나는 겁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인간의 초월한 지적 존재가 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 이상의 지적 움직임이 모든 논리를 가능케 하고 이것이 지적(知的)의 산물(産物)이라고 한다면, 우연의 결과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화(進化)의 결과일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분 이 새벽에 한국말을 듣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이것이 무슨 얘기인가 헷갈리실 수 있는 분들이 계실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마는 제가 여러분에게 결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온 우주를 만드시고 질서를 허락하신 그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어떤 논리(論理)나 자연(自然) 법칙(法則)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설명되기까지는 인간을 초 란 그분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믿겠다. 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이성이 아니구요. 신앙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안 믿겠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는 있을 리가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러분과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신앙은 무모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사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던질 수 있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실이기 때문에 믿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그냥 근거 없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가 분명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否認)하는 어떠한 노력도 인류의 역사 가운데 성공적인 적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기까지는 엄청난 크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전제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을 기본 값이고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생각이 얼마나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비이성적인지를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모든 기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어깨를 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의 일터에서 고개를 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아름답고 온전하며 옳고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부 여러분, 어떠한 핍박(逼迫)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선함과 온유(溫柔)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는 세상은 그 어떠한 힘도 어떠한 바탕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그래도 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宗敎)의 영역(領域)이 아닙니까? 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묘한 말로 우리가 종교 생활로 제한되는 것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아무리 그렇게 사실에 근거하여도 결국은 종교일 뿐이라고 하는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교묘(巧妙)한 말이 과연 주장대로 사실에 의거한 것인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가 만들어내는 신(神)은 결국은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➀종교는 결국 내가 하는 만큼 나에게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그 신을 만들어 내거나 아니면 ➁내가 하는 모든 것을 무한대로 받아주고 수용하는 그런 자비의 신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은 그냥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만 들어낸 신은 내가 하는 대로 상을 주기 때문에 공의로울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자비를 베풀지는 않습니다. 나에게 언제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종교의 대상은 자비로울지 모르지만 공의롭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 폭탄을 어깨에 지고 테러를 일으키는 이유가 내가 하는 만큼 상을 주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나에게 벌을 주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도 교회, 목회자, 성직, 또 결혼이라고 하는 이 고귀한 가치들을 동성(同姓)애(愛)와 전 부쳐서 모든 라이프 스타일을 수용하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만 들어낸 종교의 신, 역시 공의(公義) 없는 자비(慈悲)의 신(神) 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의만 있고 자비가 없는 신은 우리의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사랑의 대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이 대상이 언제나 우리를 두렵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 자신 역시 완벽(完璧)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신적 존재 앞에 늘 공포에 휩싸여 입니다. 반대로 이 자비만 있고 공의만 없는 이 신의 존재는 경배(敬拜)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도 받아주는 만큼 사람도 받아주고 우리의 어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정도의 신은 나에게 잠시 동안의 위안이 될 진 모르지만 경배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종교가 도저히 할 수 없는 큰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펼쳐지기 시작하는데요.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비밀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저 자비 없는 공의의 하나님도 아니고 공이 없는 자비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공의로우면서 자비로우신 완벽하게 공해로우시기 때문에 모든 죄를 완벽하게 처벌하시지만 처벌이 죄인들이 아닌 그의 백성에게 떨어진 것이 아닌 그의 아들에게 옮겨지는 자비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祕密)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교가 가지고 있는 이 근원적인 문제가 단순히 이 신의 모습을 뒤틀린 채로, 거짓된 채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채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종교의 결과는 결국은 내 자신을 바꾸어 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그리고 이 종교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어거스틴의 심국론 또 더 쓰리 오브 갓(The Three of God-하나님의 도성)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 매우 큰 통찰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성 그리고 인간의 도성은 평행선을 이루면서 이 땅에 존재하는데,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하나님의 도성은 참 예배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 세상의 방법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의 도성은 결국은 종교라는 것입니다. 돈을 숭배하고, 권력을 숭배하고, 쾌락을 숭배하고, 내 삶의 안락과 안전을 숭배하고, 나아가 모든 것 중심 속에 지독한 자기 사랑의 발견이 끊임없는 자기 사랑의 발현이 결국은 이 인간의 도성, 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로 뒤덮인 이 세상, 그리고 이렇게 종교로 기독교를 제안해 내려고 하는 이 모든 움직임의 결과는 자명합니다. 계속되는 자기 사랑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을 경멸(輕蔑)하게 되고 언젠가는 그토록 자신의 경멸하는 하나님과 완벽하게 분리되는 그런 날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역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에 교묘한 말로 인해서, 우리 신앙이 마치 부분 정도면 괜찮은 것처럼. 마치 이것은 종교생활로 제안해야 하는 것처럼. 심각한 그 모든 것들을 저항하는 가운데 스스로 분리되어서 나도 모르는 지독한 자기 사랑에 빠져있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에게는 이 자기 사랑으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거나 건져낼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이 구원자가 어떻게 우리를 이 자기 사랑과 종교성에서 건져내시는지 보여주시는데요. 우리와 함께 골로새서 1장 26절과 27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1:26-27,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할렐루야! 사랑한 여러분, 이 세상이 생각할 수 있는 신의 모습은 자비 없는 공의, 없는 자비이지만 공의와 자비가 십자가에서 만나는 그분만이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알 수 없고 상상할 수 없고 고안할 수 없는 비밀이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기 시작하는데요. 우리가 이 비밀이라고 읽은 이 단어가 영어 성경에서는 시크릿 이라고 변역 번역되지 않습니다. 미쓰트리(Mistry)라고 번역이 돼요. 왜 그러냐면 감추어진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숨겨놓은 것이 아니고요. 경이로움 때문에 이것이 놀랍 다. 고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담임 목사님께서 자주 사용하시는 표현 중에 신비라고 하는 단어가 너무 이 대목에 맞는 단어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신(信)비(秘)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秘密)이 이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신은 너무나도 절대적이지만 인격적이지 않아서 인간의 삶에 제 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지 않는 존재이거나 제우스처럼 너무나도 인격적이지만 절대적이지 않아서 어떠한 힘도 어떠한 영향력도 없는 그런 신 일지 언데,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은 너무나도 절대적이시면서 너무나도 인격적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높으신 거룩함 가운데에서도 너무나도 가까운 인물 임마누엘의 대 하나님이 하나님의 신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인간이 치러야 되는 대가를 인간 되신 분이 치르셨는데 인간이 그저 인간이 아니고, 참 신이기도 하셔서 인간이 도저히 고안(考案)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완벽한 공의(公義)와 자비(慈悲)를 이뤄내시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을 죽이려 했습니다. 니체도 말했고 마르크스도 말했습니다. 종교성을 가지고 제안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신을 이렇게 박스 안에 가둬두고자 합니다. 사탄도 마치 마찬가지였습니다. 참신과 참 인간된 그분을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의 신들은 이것이니, 죽음이 그를 죽음 안에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자기 사랑이 아닌 크라이스트 인 유(Crist In You!)-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 가운데 주시는 분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 자기 사랑밖에 모르던 종교인들을 그가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건져내 주셔서 이제 자기 사랑을 벗어던지고, 그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크라이스트 인 유(Crist In You!), The Mistry of God! is Crist In You.의 하나님의 비밀은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안에 있는, 너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이니라. 할렐루야!!! 사랑은 여러분 이 하나님의 비밀은 종교가 아니 모든 과학을, 모든 지식과 지혜를 가능케 하는 진리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깨닫게 되는 계시(啓示)인 줄 믿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계시인 줄 믿습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고 죄인들을 의인 만들고 고아(孤兒)들을 자녀 삼고 자기 사랑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되어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기쁨으로 사랑하며 사랑받을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의 지팡이를 드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 가운데서 이제 자유 함으로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할 수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가슴에 담으면서 세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우리 하나님이 모든 지식과 지혜의 전제가 되시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둘러보았을 때에 이 세상을 더듬어 보았을 때 가장 이성적인 결론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교만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암송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의서 10장 5절입니다. 잠시 뒤에 하시겠지만,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가 우리의 적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조금이라도 높아진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하나님을 그저 내 삶의 전부가 아닌 일부 하나님이 여기까지만 다스리시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라고 하는 마음의 모든 높아짐 있었다면 지금 이 시간 다 회개(悔改)하고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아침 그리고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팔짱 끼고 내가 말씀을 평가하겠다고 하는 마음의 결단이 있었던 분들은 이제 팔을 주님 앞에 들어서 말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이 우리를 평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자유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인데, 크라이스트 인 유(Crist In You!), 내가 아니라서 내가 아니라서 그리스도 예수라서 너무나도 담대할 수 있지만 이게 내가 아니라서 그리스도라서 너무나도 겸손할 수 있는 놀라운 자유 포함과 은혜가 우리 모두의 그리고 토비새에 신앙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말씀을 적용합니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할렐루야 사랑한 여러분, 오늘 저녁 5시에 우리는 이 말씀을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사랑글로벌 아카데미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의 일꾼을 세우고 섬기는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토요일 날 오전 10시 내일 저녁 7시에는 멧 레드맨과 제가 함께 아 강의가 있고요. 월요일 날까지 예배학으로 전 세계적 영향을 끼치고 계시는 콘센스 체외 교수님의 특강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이 예배하고 신령한 노래를 함께 부르는 이 기쁨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이 교묘한 말로 인해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캠퍼스에서, 일터에서, 사회에서, 우리 학교에서 학원에서, 마음이 무너지고 위축되었던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 이 시간 온 우주의 진리 되시고 모든 물리상수 자연법칙 수학의 공식 하나하나까지도 그 힘을 기동케 하시는 그분이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모든 그 속박에서 벗어나서 이 자유 함을 누리며 주님 붙잡고 승리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내 안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비밀이었던 것처럼, 나의 승리, 나의 신앙 고백, 그리고 나의 담대함의 비밀은 예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이 세상의 모든 교묘한 말은 떨쳐내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한 약속 위해서 근거 앞에서 너무나도 확실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함께 기도의 지팡이를 들게 될 줄 믿습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요약 지혜와 지식의 보화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진리를 드러내 주시기에 이제 우리는 주님을 알고 깨달아, 이 모든 놀라운 신비를 감사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높아진 모든 것을 그리고 이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생각과 결단을 다 사로잡아 그리스도 예수께 복종해야 한다. 오직 주님 말씀이 가장 으뜸이며, 주님이 전부가 되신다. 우리 주님이 최고의 권위가 되심을 알고 우리는 그 주님 앞에 항복하여야 한다. 자유 함 가운데 우리를 부인하는 자유 함 가운데, 놀라운 기쁨과 회복을 누리는 자가 되고, 우리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시와 찬미로 주님을 경배하는 그 예배의 움직임이 끊임없는 우리 사랑의 교회가 되고, 이 세상의 어떠한 공격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온유함과 사랑으로 그들의 교묘한 말을 벗겨낼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가 되어, 용광로 속에서도 플러스 원이 되는 복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자.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7일) 제목: "일어나 걸어라" 말씀: 사도행전 3: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고영민 부목사님 ----- * 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 ▶오늘 말씀을 보면 나면서부터 걷게 된 이가 등장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라 할지라도 장애인이 장애인(障礙人)에 대한 생각과 예우를 사회적 측면에서 배려한다고 해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쉽지 않은 세상임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당시 유대 사회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아예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라고 하면, 더욱 어려운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2절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의 일상이 등장을 합니다. * 사도행전 3:2,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 사람을 사람들이 메고 성전 문 앞에 놓아주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성전 문 앞에 앉아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일상이었을 거예요. 사람들에게 아침에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성전 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해질 때쯤에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 말입니다. 특별하게 무엇을 할 수 없었던 그에게는 이러한 삶이 매일매일 반복했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먹고 살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았을 그를 보고자 하면 마음 한 켠에 무겁고 먹먹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만약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한평생 살아가야 한다. 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삶은 너무나도 수동적입니다 구걸조차도 사람들에게 매어 나와야만 할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만들어 가기는커녕 구걸로 인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돈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는 그의 삶에는 능동적인 부분이 없습니다. 당시 사회상으로 봤을 때에는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녀를 기르는 기쁨도 아마 상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재산을 모으는 기쁨 어떤 일을 성취해서 얻는 기쁨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채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주어졌던 삶을 살아갔던 큰 이변이 없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했던 한 사람이 오늘 등장하게 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됐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무엇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태어났을 때부터 걷지 못했던 그의 장애였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것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 아름답게 살아갔을 바로 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원흉(元兇)이죠. 그렇게 이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다 포기하고 지금까지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인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도 생명에 관한 것 영원에 속한 것을 전혀 꿈꾸지 못한 채 뭘 얻을 것 없을까? 뭘 더 얻을까? 하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만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남은 것은 그날그날 살아가야 할 현실의 문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이 사람과는 우리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행동과 결정을 가지고 살아간다. 라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그러지고, 어디서부터 어디서부턴가 무너져 있고, 어디서부턴가 잘못되어도 대부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처럼 말이죠. 이러한 삶이 맞는 것일까? 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본질적인 질문들을 다 잃어버리고는 굉장히 수동적으로 오늘 아침을 시작하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하루에 살아갈 현실의 문제만을 떠안은 채, 다른 사람 의해서 조직에 의해서 시스템에 의해서 혹은 여러 가지 상황에 떠밀려서 수동적으로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지 않습니까? 오직 오늘 하루의 삶에 문제만 매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풀린 눈으로 회사에 출근하고 아무 생각 없이 주어졌던 일들을 해왔고, 그렇게 지금 죄송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라면 수동적으로 말이죠. 이뿐입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하자 무엇을 얻을까? 하여 그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들의 마음이 혹시 이 세상 가운데 어떻게 하면 무엇을 더 얻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이 상황에 마음이 다 뺏겨있지는 않습니까? 시기를 또 차야 되고요. 지금은 이런 것들을 해야 된대 유행을 따라서 혹은 상황을 따라서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움직여서 이렇게 운영해야 된다더라. 하는 세상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현실의 문제 그러나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는 이가 어느 날 구걸을 구걸이 너무 잘 돼서 그날은 풍족하게 보냈다고 해도 그에게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우리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변하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처럼 모든 것은 다 접어두고 세상사는 일에 함몰(陷沒)되어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청년부를 담당할 때 아이들을 심방(尋訪)에 보면 어떤 친구는 성공해야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정말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성공해야 하고, 돈을 많이 버는 취급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대화가 가득할 때 여러분 교육자로서 어떤 마음이 드시는지 아십니까? 막 숨이 막혀옵니다. 어떤 말을 해줘야 하지? 온통 친구의 머릿속에는 성공과 좋은 직장과 어떻게 하면 현실의 문제를 타개할 수 있을까? 이 아이의 기본적인 태도(態度)가 바로 누구를 보아도 어떤 일을 마주쳐도 어떤 것을 더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더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시선만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완전히 여기에 함몰된 것이죠. 인생이 그게 전부가 아니고 더 가치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라고 막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현실에 함몰되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배와 예배에 와 계셔도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오늘 근심과 염려로 주저앉아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래서 현실이 신앙을 뒤덮어버려서 깊은 수렁에 빠지신 분이 계십니까? 이 깊은 수령에서 건져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이 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말씀을 좀 더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더 살펴보면 성전에 들어가려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여서 ‘우리를 보라’ 이렇게 말합니다. 드디어 베드로와 요한이 말하기 시작하니까 안심이 되죠. 구걸하던 그에게 베드로가 군더더기 없이 선포를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버려라 베드로와 요한은 그가 재물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했겠죠. 그러나 그가 정말 필요한 것을 바로 말합니다. 그가 이제는 포기했던 것, 그가 이제는 단념했던 것,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이 메고 올 수밖에 없었으나 사실은 메어 오면서도 마음속으로 진짜 간절히 원했던 것 어떤 말이요. ‘일어나 걸으라.’예요. 이제 어떻게 됩니까? 7절을 보니까, *사도행전 3:7,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손목을 잡고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다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아 이런 본문 보면 너무 마음이 좋죠. 네 여러분 혹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방글라데시에서 잠깐 사역을 했을 때 중간에 선교사님 사역을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뒀던 마을에 태어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체는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냥 다를 게 없었어요. 그러나 다리가 정말로 앙상한 거 있죠. 정말 뼈에 가죽만 살짝 붙어있는 앙상한 다리만 진짜 다리가 발가락도 뼈가 보 1만큼 앙상하게 보입니다. 어찌 보면 다리가 덜 자란 것처럼 짧아 보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이런 모습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말하자마자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다. 로 말합니다. 선포하자마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전 사실 그때 방글라데시에서 봤던 나면서부터 못 걸었다는 그분의 다리와 외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생각하노라면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뼈만 앙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걸었다는 말은 지금 걸을 수 있을 만큼 말씀 선포되자마자 근육이 붙어나가고 있고, 근육 가운데 걸을 수 있을 만큼 일반인만큼 여러분의 허벅지 만큼이요. 근육이 막 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작았거나 뒤틀린 뼈가 자라기 시작하고 바르게 맞춰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뿐입니까? 갑자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던 그래서 균형(均衡) 감각(感覺)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 다리로 걸었을 뿐 아니라 뭐까지 한다고요. 네 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지금 등장하는 사건은 대단함이고 놀라움 자체예요. 눈앞에서 이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해보세요. 무릎 수술만 해도 재활하고 다시 뛰는데 몇 달이 걸리는 거 아시죠? 네, 이걸 생각하면 이것은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하지도 않고도 갑자기 균형 감각을 얻은 것과 동일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回復)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상을 해 보십시오. “일어나 걸으라.” 선포했지, 내가 일어나 뛰라고 하지 않았다라고 말해서 뛰지는 못하고 이렇게 막 엉거주춤 이렇게 해왔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막 넘어질 것 같고, 그래도 이분은 진짜로 감사했을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봤잖아요. 처음으로 한 발을 떼 봤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지금 그런 상황 지금 상황보다 좀 더 나아진 회복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회복은 완전한 회복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회복인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은혜 아닙니까? 지금 저희 교회에도 사랑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신혼 때 화곡동에서 시작했습니다. 좋은 동네예요. 화곡동에는 사랑부로 유명한 교회가 있는데, 꼭 제가 주일에 사역하는 시간에 아마 교회 사랑부 예배 시간이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출근을 하고자 하면은 이제 거의 매주 교회 앞을 지나갈 때마다 부모님이랑 사랑부 친구들이 여러 명이 교회에 이렇게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당시 이제 주일에 교회를 가는 사랑부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보,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친구들도 완전히 회복되겠지?” 저는 깜짝 놀랐어요. 내 아내가 어 제 아내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좀 놀랬어요. 그래서 제가 ‘물론이지’ 그랬더니, 아내가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아마 저기 함께 가는 부모님은 누구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걸 기다릴 거야.’ 저는 매일같이 길을 매주 길을 지날 때마다 늘 동일하게 봤는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어요. 그날에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에 저분들도 창조 때에 기뻐하셨던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이 일어나겠구나! 하면서 막 그날이 너무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그 교회 사랑부 부모님들이 그렇게 소망하고 기다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할 하나님 나라에서나 누릴 완전한 회복을 지금 여기 있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그에게 무슨 치유 받을 조건이 있었습니까? 그가 보여준 특별한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뭘 얻을 게 없을까? 하여서 그들을 갈구하는 눈길만 바라보았던 사람 아닙니까? 현실에만 매어 있던 그의 삶에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폭탄(爆彈)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삶을 완벽하게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그의 삶이 어그러졌던 근본적인 지점부터 완전하게 회복하고 계십니다. 단순하게 돈 몇 푼을 더 받아서 잠시나마 편하게 사는 것인 그런 임시적인 회복이 아니라, 그가 이렇게 이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근본적인 지점 나면에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지점을 완전하게 회복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에 근본적인 부분부터 완전하게 회복시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어떨 때에는 우리가 이 부분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들이라서 그게 남편이 될 수도 있죠. 그게 아이들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아이들만큼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저희 아버지만큼은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부분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상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다가오셔서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한 가지도 성령의 강한 능력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현실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어서 뭘 보아도 무엇을 얻을까? 로만 보이고 어떻게 더 벌어볼까? 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이 팍팍하게 살고 있는 우리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구석구석 모든 부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할 수 있는 그가 들어간 곳이 어디입니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동안 성전(聖殿)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는 미(美)문(門) 앞에서 아이러니하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수년을 보냈을 그가 말이죠. 장애인으로서 성전에 들어가는 멀쩡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불허했을 그가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전을 뛰어 들어가면서 그가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사도행전 3:8,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하나님을 찬성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누구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죠. 맞아요. 나사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를 찬성하고 있죠. 하나님을 찬성하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했을 때 이러한 일이 너무나 능력이 넘쳐서 너무나 완전해서 하나님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성했던 것 아닙니까 특히 누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겠습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선포한 이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로 메시아였구나! 그리스도였구나! 그래서 그분이 참 구원자 맞구나! 하나님이 보내신 자구나! 거부할 수가 있었겠어요? 예수란 그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구원자이시구나! 라는 걸 깨달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뒤에 서서 걸으며 뛰어 서서 걸으며 어떻게 들어갔다고 말하죠. 네, 성전에 아까 말했듯이 성전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지금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1절부터, 베드로가 이 일이 너희가 죽인 예수로 인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證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회복은 우리의 삶에 영역(領域)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완전한 우리의 삶에 영역만 회복할 회복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영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십니다. 성령의 능력의 폭탄이 그의 인생 가운데 떨어질 때 현실에만 얽매여 있던 저주(詛呪)의 끈이 끊어지고 삶이 완전하게 회복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 여기에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무엇을 얻을까? 머릿속에 온통 그것만 있었던 사람 아닙니까?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되나,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해결하지?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기에 관심도 없었던 것 필요도 없었던 것이 이제 눈이 뜨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 더 값어치 있는 것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영원한 것에 심령의 눈이 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말씀을 묵상할 때 지금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면서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그의 인생에 처음일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원망(怨望)과 무기력(無氣力)함으로 살아왔던 그의 인생에서 말이죠. 육체적인 완전한 회복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靈的)으로도 완전하게 회복되어서 하나님을 바로 온전하게 찬양할 수 있는 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회복시키실 때, 여러분들의 삶의 문제들만 회복시키는 것에 끝나지 않고, 여러분들이 다시 온 전(穩全 한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온전한 예배(禮拜)와 경배(敬拜)를 드릴 수 있도록 여러분들의 심령(心靈)도 완전히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세상의 욕심(慾心)들로 가려져 있던 여러분들의 눈을 다시 생명에 관한 것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와 은혜(恩惠)의 은혜를 바라보는 여러분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이 밤에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의 삶의 영역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완전한 회복을 경험(經驗)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남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과 같이 그날의 얻어진 재물(財物)로 기쁨을 누리며 그것으로 만족(滿足)하며 살아갔을 자들 아닙니까? 여러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일을 다행히도 메어다가 줄 사람이 등장하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 비참(悲慘)한 인생들끼리 아무리 자기네들끼리 돕고 살아도 비참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도와줘도 평생 데리고 나와서 성전 문 앞에 내어준다. 할지라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에게 진정(眞定)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의 도움도 아니오. 하루를 살아갈 재물도 아니오. 바로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하고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의 도움도 아니고 재물도 아닙니다.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완전한 회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영적인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상처들이 곪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잃어버리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부터 잘못된 것인지 몰라서 그저 눈물로만 기도하고 계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능력 있게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망가지고 무너진 여러분들의 삶을 좀 더 나은 정도의 회복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려고 했던 완전한 축복으로 회복시키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밤에 이런 완전한 회복이 회복을 주실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회복뿐 아니라 여러분들을 영적인 깊은 수렁에서 건지셔서 더 다시 우리를 반석위에 세우시고, 기쁨을 회복시키시며 우리의 입술에 찬송을 담아주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되었던 이가 경험했던 완전한 회복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 이름으로 여러분과 여러분들의 가정 가운데 임할 줄 믿습니다. ♣요약 인생의 한계 앞에서 우리의 능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진정한 기도로 올려드리면, 현실의 난제를 초월한 새 차원의 인생으로 비상하게 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한 생명에게 ‘일어나 걸어라’라고 선포하셔서 당장의 기적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의 능력으로 삶을 살아가면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이다. 우리 인생 가운데 능력으로 찾아와 주시는 주님께서 인생의 한계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있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을 소망하고, 완전한 회복과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의 심령이 회복되게 하심을 소원하며, 언제나 기쁨과 찬송이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일어나 걸어가면 주님은 항상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도우실 것이다.
19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얼굴빛을 바꾸고 명령하여 이르되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20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23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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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대 찬송 감사합니다. 명실공이 우리가 지금 봄의 한가운데 꽃 대궐 속에 충만한 봄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우리 성도들도 예외 없이 영원의 봄 동산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근데 오늘 여러분 찬송가를 부르는데 이 찬송가가 보니까 좀 맥아리가 없어요.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찬양대도 잘 모르시는 것 같고, 근데 이 찬송은 제가 한27년 전쯤 브라질의 상파울로에서 한인 교민들 집회를 하는데, 마지막 시간에 청소년들 한 십여 명이 나오더니, 특 송을 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우리 교우들은 잘 모르고 있는데, 27년 전에 브라질 상파울로의 한인 교회 청소년들이 이 찬송을 하는 거예요. 특 송으로, 저는 어릴 때부터 이 찬송을 잘 알았어요. 근데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거예요.
♬“이 말씀 전할 때, 내 마음이 기쁘고, 말씀을 할수록 새 기쁨 넘치네, 우리에게는 새 기쁨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에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 들은 사람 또 듣기 원하고, 목말라 사모하니 말씀 진리라. 가사가 안 나오죠? 나라 영광중에 나부를 새 노래 옛 부터 좋아하더니, 이 말씀 다시 3절에, 이 말씀 들은 사람 또 듣기 원하고 목말라 사모하니 말씀 진리라.” ♪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목마른 말씀이 되기를 바라고,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들 탁 정리되기를 바랍니다. 옛 부터 좋아하더니, 말씀 뭐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요. 못합니다마는 이 찬송을 집에 가서도 함 불러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지금 주신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브라질에 있는 청소년들을 이상으로 찬송이 돼서 영의 눈이 떠지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다 그래도 주님 잘 섬겨요. 아무것도 없어도 해외 디아스포로로 흩어져 가지고 뭐 보장되는 거 없어도 이런 찬송을 통하여 주님의 임재를 깨달으면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저는 예수님 누구신가?(Who is Jesus?-더블유제이 시리즈) 번째 “용광로 풀무불 속에서도 함께하시는 여수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스토리는 여러분들이 익숙하게 하는 내용이고, 처음 오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사드락과 매삭과 아벳느고라는 다니엘의 구약에 다니엘의 세 친구인데, 구약에 출중한 인물인 다니엘의 세 친구인 이들이 풀무불 속에, 용광도 속에서 구원받는 내용입니다. 이 저는 여기서 어떻게 예수님을 발견하고 여기서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분 로마서 15장 4절에 이런 말씀해 주세요.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로마서 15:4,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구약의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뭐냐, 특별 오늘 이런 말씀을 기록한 이유가 뭐냐면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여러분 교과서 알죠“ 교과서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교과서가 될 것이다. 오늘 3장에는 이 본문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생애와 여러분들의 생애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교과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다니엘과 다니엘의 세 친구란 1차 포로 때에 잡혀갔어요. 이 차 3차 포로 뒤에 잡혀가는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이 말씀이 위로가 됐을지 몰라요. 그리고 후대에 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매달리고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이 말씀이 시대에 한 민족의 민족이 면함을 당할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과서가 된 것이에요. 오늘 우리의 상황 우리의 주위의 상황이 녹록치 않고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여러분과 저의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삶에 교과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생각할 것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겨도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I.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겨도 풀무 불에 던짐 당할 수 있다.
-오늘 18절에 보니까 단연히 세 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 제가 배경을 다 뭐 자세히 말씀 다 못 드립니다마는 느부갓네살 왕이 당대 최고의 황제였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고 무소불이(無所不爲)를 행사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신상을 세웠어요. 그것도 평지에다가 높이 세워갖고 더 두드러지게 보이라고 세워 가지고 이제 절하라고 그랬어요. 근데 절 못한다고 다 이들 질투하던 사람들이 이들이 관리로서 잘 하니까 옆에는 항상 그래요. 누가 잘하면 대한민국 사람하고 똑 같에요. 누가 잘하면 봐주지를 못하는 거야. 질투하고 같이 박수치고 같이 해가지고 같이 잘하면 같이 성공하는데 물어뜯고 집어 뜯고, 잡아 뜯고, 지난주에 제가 원,불,비라고 그랬죠? 물어뜯고 집어 뜯고 잡아 뜯고 물,집,잡이에요. 그래갖고 이 세 친구를 갖다가 얼거 매 가지고, 이제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당시에 느부갓네살 왕이라는 이 황제가 왕이 무소불이 왕이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고 그래서 이제 풀무 불에 집어 던져지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어떨 때는 결단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면 늘 사람들이 격려하고 인정해 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어요. 오히려 미워하고 박해할 수 있는 것이에요. 요한복음 15장 20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15:20,
20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니 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다. 전에 우리 개혁 판에는 사람들이 나를 핍박했으니까, 너희도 핍박(逼迫)할 것이다. 주님을 핍박 하니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핍박한다. 오죽하면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디모데후서 3:12,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핍박을 받으리라. 여기서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경건하게 개인적인 경건도 있습니다마는 복음을 위해서 전도를 하고, 기독교 신앙 가치관을 가지고 한번 나라를 한번 제대로 세워보고자 애를 쓰고, 전도와 선교를 위하여 어제도 여기 우리가 복음 통일을 위하여 어제도 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오후 한 시에 주님 이 나라가 피 흘림 없이 복음적으로 통일되게 해 달라고 막 그렇게 할 때에, 사람들이 박해를 하는 겁니다. 숨어서 경건하게 살면 누가 박해를 하겠어요? 그런데 기독교 정신을 선포하고, 이 나라가 사회주의가 되면 안 되고 이 나라가 공산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라고 외칠 때 박해가 있다는 것이에요. 이 세상은 세속의 우상들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는 삶들에 대해서 저들 나름대로 뜨거운 용광로(鎔鑛爐)를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에요. 용광로는 빈정거림과 무시와 따돌림의 화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대로 섬기고 기독교 신앙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가 지금 차별금지법 ,동성애, 이런 거 반대하면 얼마나 무시라 미국 같은 데 가면요 완전히 왕따 시키고 있잖아요. 동부의 아이비리그 잘난 데는 전부 다 교술 다 동성애자들이 많고 얼마나 풀무 불을 많이 준비했는지 몰라요.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가지고, 느부갓네살 왕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가지고 풀무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세 사람을 끌어다가 풀무 불에 던져 넣기 위하여 아주 더 힘이 센 사람들이 세 사람을 묶어 가지고 풀무불 속으로 왔어요. 저 이게 풀무 불이 제 제철 용광로인데, 내가 자세히 위에 있을 때, 뭐 자세 설마 큰 거 있어요. 그리고 밑에는 사람들이 막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있잖아요. 위에서만 갖다 놓고 이제 네 그런 게 있어요. 제가 설명을 다 못하고 21절과 22절을 보니까,
*다니엘 3:121-22,
21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22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불이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힘센 사람들이 단열의 세 친구를 뭐예요? 결박해서 풀무 불에 던졌는데 그들을 풀무 불에 던진 사람들이 먼저 불에 타서 죽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정도의 화력이니까. 이 세 친구는 이제 끝난 것 같았어요. 느부갓네살 왕도 좀 정신이 없는 게 진짜 고통스럽게 벌을 주려면 불을 7배나 강하게 하면 고통이 오겠습니까? 예 보통 풀무 불이 1000도가 넘는데, 7배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불도 적당히 뜨거워요 고통스러운데 너무나 뜨거우면 뭐 고통 느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이 감정이 복받치고, 생각이 잘못되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도 판단 능력이 마비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 주위에도 예상외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하고, 비하하고, 조롱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노마 저것들이 느부갓네살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고 결단했는데도 실상은 풀무 불에 던짐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삶의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다니엘이 세 친구가 옷을 입은 채로 던져줬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풀무 불에 던져져서 끝인 줄 알았는데, 24절에 보니까,
*다니엘 3:24,
24 그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물어 이르되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그런데 이제 그다음에 더 놀라운 기적을 본 게 25절에 25절이요.
II.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
*다니엘 3:25,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네 번째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 그러니까 풀무불이 하늘이 뭐야? 여기 두 가지 기적이 일어났는데, 하나는 기적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➀‘하나는 불에 타지 않고 건재한 기적’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앞에 보니까 뭐라고 돼 있어요? 그들을 포박한 줄만 탔어요. 포승줄만 탄 거예요. 두 번째 기적은 뭐냐 하면 ➁‘네 번째 사람, 신들의 아들과 같은 네 번째 사람 그들이 함께 한 것’ 이 두 가지 기적이에요. 여러분 풀무불이에요. 닭갈비집에 가면 어떻게 돼요. 그리고 저기 뭡니까? 뭐 이런 구이 집에 가면 온몸에 냄새가 나는데, 뒤에 나옵니다. 냄새 하러 나지 아니하고 포승(捕繩)줄만 결박이 없어지고 네 번째 사람이 함께한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이 네 번째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뭐 다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신들의 아들, 신의 아들 그러니까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이 신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신약의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소위 크리스토파니, 구역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지난번에 우리 여호수아 5장의 군대 장관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다. 여러분, 그렇게 그냥 그렇게 해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 큰 무리가 없어요.
그리고 그들은 거의 뜨거운 용광로 풀무불 속이 아니라 네 사람이 마치 한가한 정원을 거닐 듯이 마치 왕궁을 거니는 것처럼 풀무 불은 그들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걸 보면서 제가 이사야 43장 2절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구나.
*이사야 43:2,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할렐루야 이 약속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어요. 문자적으로,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이 풀무불의 핍박이 왔을 때에, 그것을 피했습니까? 안 피했습니까? 피하지 않았습니다. 풀무 불을 정면으로 맞닥뜨렸습니다. 그리고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풀무 불 한가운데서 뜨거운 용광로 한가운데서 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맞닥뜨리는 것 하나님을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목숨을 건 선언을 한 것입니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요?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단 풀무 불에 여기서 보면, 풀무 불에서 건잠 받는 기적은, 풀무불 속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고 아니 실제로 풀무불 속에 들어가야 건짐을 받는 것이에요. 아무것도 안 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그래서 제가 썼어요. 풀무 불에 안 들어가니까 풀무불 속에서 건짐 받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에요. 안 일어나는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풀무 불에 속에 들어가지 않으니, 풀무 불에 건짐 받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어쨌든 간에 그렇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왜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왜 내 신앙생활이 지루합니까? 왜 내 신앙생활에 물을 물 탄 듯 매가리가 없고, 물에 물 탄 듯 뭐가 없습니까? 왜 그럴까 왜 강직함이 없을까? 오늘 여기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해석하는 것은 풀무 불에 들어가는 경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킨 결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7절에 보니까,
*다니엘 3:27,
27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그다음에 제일 감동받는 것이 뭐예요?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 삼겹살만 구워 먹어도 난린데 냄새가 온통 다 난린데, 세 친구는 불타는 냄새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을 결박했던 포승줄 불만 포승줄만 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오늘 리빙 미라클!, 산 기적이 되었어요. 살아있는 기적이 어디였어요. 할렐루야!!! 사랑의 교회 모든 성도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 저도 저의 남은 생애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은 산 기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살아있는 기적이 돼요. 리빙 미라클!, 우리가 먼저 풀무 불에 들어가야 할 경험이 필요하고, ‘2033-50 비전’을 왜 합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잖아요. 핍박도 없어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영적으로 성공하고, 축복의 근원이 되고, 정말로 세계 복음주의 쇠퇴를 막고, 남북의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 통일을 우리가 뭔가를 하면, 핍박이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에 은혜를 베푸셔갖고 모든 포승줄을 풀어주시고, 우리가 결단을 할 때, 우리가 리빙 미라클이 될 수 있도록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목숨을 건 선언이 필요하고, 풀무불의 형벌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풀무 불의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오늘날 내 삶에 왜 기적이 없는가? 내 삶의 신선한 감격과 주름을 섬기는 열정은 왜 없는가? 왜 내 신앙생활에 이렇게 생활이 지루하고 물에 물 타듯하고 뭔가가 없는가? 중요할 때에 주님을 향한 우리의 분명한 헌신의 자세, 중요할 때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값을 치르는 대가,
-저는 어릴 때 태어나서 가만히 제가 보니까 어릴 때, 60명 가운데 나 혼자 예수 믿었어요. 학교만 가면 이제 예수쟁이라고 있잖아요. 뭐 예수를 믿냐? 내 주먹이나 믿어라. 이러면서 모욕당하고 교회 간다고 모욕당하고, 또 교회가 뭐 너무 초라하니까 모욕당하고, 주일 성수한다고 모욕당하고, 제가 한 번 얘기했죠? 우리 아버지 교 밑에 공병기지창 이라고 있는데, 거기에 내가 어릴 때 여름 성경학과 찬송하고 내려가면요 군인들이 이리 와 이리 와라 자식들 말이야. 어디 감히 이 앞에 노래를 부르고 다녀, 이리 와! 저놈 여기 누나 있나? 누나 없습니다. 내가 장남이니까. 어디 이러면서 노래하나 불러, ♪환난과 핍박 중에도~~이 신앙 생각할 때 기쁨이 충만하도다.~~♬ 말이 그렇지요. 수많은 핍박과 난제에요. 학교에 들어가서도 가난하고 그러니까, 예수 믿으니까, 있잖아요. 얼마나 근데 지금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요. 예수쟁이기 때문에 찬송한다고, 전도한다고, 교회 간다고, 주일 성수한다고, 모욕당한 모든 것들이 저희 생애를 돌아보면 그것이 기적의 시작점이었어요. 수많은 기적들, 수많은 기적의 만남들이 수많은 인생의 수많은 과정과 열매들, 때론 예수님들을 모욕당하고 여기 예수님의 아내들 집안에 혼자 예수 믿는 분들을 주님들을 모욕당하고, 그래도 꿋꿋이 주님 사랑하고 그럴 때, 지나놓고 여러분 그러면, 자식이 기적을 일으킬 것이에요!!. 살아있는 미라클, 리빙 미라클(living Miracle), 여러분께 여러분들 회사 내에서 한 10년, 20년, 30년을 꿋꿋하게 신앙 지킨다고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리빙 미라클로 삼아주시는 것이에요.
III. 풀무불(鎔鑛爐)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번 더 제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크리스토파니를 정리하겠습니다.
◎크리스토파니(Cristophany)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1세기에 초림으로 성육신하시기 전에 구약에 예표로 나타나신 것이다.
*다니엘 3:25,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The Son of God!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인 줄로 믿습니다. 풀무 불 가운데 신앙을 지키는 사람에게 그 신앙이 지키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가 되시고, 그들을 보호하는 호위자 보호자가 되어 주시고, 그들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시고, 그래서 가장 강력한 호위와 가장 강력한 구원은 뜨거운 용광로 불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세요.
여러분들의 생애 가장 강력한 호위는 돈도 아니고, 가장 강력한 호위는 권력도 아니고, 가장 강력한 호위는 정치적으로 여러분들을 같이 하는 그런 흐름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호위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세요. 불 속에서도 그분이 나와 함께하면 여유롭게 걸릴 수가 있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고 있다고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풀무불 속에서도 어려움의 시간들을 말씀과 기쁨과 찬양으로 기도로 통과할 수 있도록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떨 때는 말씀으로,
어떨 때는 특새의 은혜로,
어떨 때는 성도의 교제로,
어떨 때는 찬양의 능력으로,
여러분들의 호위자로,
구원자로 보호자로,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의 순간 혼자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기적이라 이 말이죠. 신앙 때문에 직장에서 왕따 당할 때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사역과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살리는 가장 큰 은혜의 원천이 뭡니까? 가장 큰 구원의 원천이 뭡니까? 한마디로 임마누엘인데, 지금 나와 함께 다시는 예수님이 나의 삶에 가장 큰 보호와 가장 큰 구원의 원천이 되는 것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이걸 여러분들이 그냥 적당히 생각하시면 안 돼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내는 인생의 풀무 불을 당한 고통을 당하는 분들, 지금 내가 암이 하나 두 개 한두 개 있어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암 때문에 고통도 하는 그런 분들, 어떻게 보면 인생의 풀무불인데 가운데서 고생하는 분들 그분들에게 제일 큰 능력과 제일 큰 치유가 뭐냐, 지금 그분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뜨거운 용광로 가운데 고생하는 분들의 고백 속에 지금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셔, 나는 그분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여러분 참 희한한 게요 어려울수록 이게 더 실감이 가는 것이에요.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이 은혜는 세상에 잘 나가고 모든 것이 평탄할 때 더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고통도 어렵고 눈물 날 때,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더 잘 느껴진다니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제 하나의 용어를 말씀드리는데 플러스 원(+1)이라는 거예요. 나 플러스 원(+1) 예수 그리스도, 나와 함께 계시는 플러스 원(+1)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오늘 용광로 속에서 함께하신 예수님에 대해서, 오늘 사실 설교 제목을 제가 ‘플러스 원(+1)되시는 예수님’ 이라고 하고 싶었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달라야 한다. 그래서 다른 하나의 우리의 삶의 형태가 사실 팩트 리포트(fact report) 하는 사람이 있고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시각을 가지고 페이스 리포트(Faith Report), 보고만 하는 사람이 있고, 팩트리 볼트 바른 사람이 있고 믿음 보고만 하는 사람이 있다. 믿음보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페이스트 리포트라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보고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도 눈이 있으니까 사실보고를 하지만 우리는 신앙 때문에 믿음보고의 보고자가 돼야 할 줄로 있습니다. 이거예요. 그러면 오늘 이 여기 말씀과 견주어 볼 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 매일매일 삶의 현장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진짜 어려울 때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그것이 뭐냐면 여러분 플러스 원(+1)이 되는 것이에요. 나 혼자가 아니라 플러스 원(+1)에 보고를 해야 돼 세 명 플러스 원(+1)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플러스 원(+1) 사실보고가 아니라, 사실보고는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 그것이라면, 믿음보고는 내 인생의 플러스 원(+1)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풀무불의 임재 공식은 플러스 원(+1)이에요. 다시요. 사실보고가 나 혼자 감당하는 것이라면, 믿음보고는 내 인생의 플러스 원(+1) 되어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주일 앞에 서는 그날까지, 플러스 원(+1)의 인생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보면 마이너스 인생도 있어요. 마이너스 역할도 하는 사람도 있고 뺄셈만 하는 그런 환경도 있어요. 그런 사람 그런 환경을 만나면 우리가 에너지가 뺏겨요. 우리 주위 환경을 보면 에너지를 뺏는 환경들과 사건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자세히 말씀을 안 드려도 여러분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수많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요!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마이너스 인생이 되면 안 돼요.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풀무불 속에서도 플러스 원(+1)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신 줄로 믿는 것이에요. 오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들어갈 때는 그냥 세 사람 플러스 제로(3사람+0)였지만 오늘 풀무불 속에 함께 계신 예수님 때문에 뚜리 플러스 원(+1)이 된 것이에요. 부모들에게는 이 플러스 원(+1)이 돼야 할 것이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는 원 플러스 원(1+1)이 돼야 할 것이에요. 사람의 교회 이런 정신을 가지고 7천기도 용사를 하는데, 7천기도 용사를 하는데 7천기도 용사 7천 플러스 원(7000+1)이 돼야 할 것이에요. 요셉은 구덩이라는 풀무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요셉 혼자서 울었던 게 아니라, 거기에 요셉 플러스 원(요셉+1)이 되었어요. 요셉 플러스 원(요셉+1)이 되니까, 창세기 39장에 보면,
*창세기 39:2~3,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러분 풀무 불 상황 속에서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거예요? 아니 풀무 불 전에도 다니는 세 친구와 주님은 동행하셨어요. 다니엘서 1장에 보면 3년 동안 훈련받을 때도 주님 함께 하셨고, 다니엘서 2장에 보면 세 친구가 각도에 흩어져 가지고 공직을 수행할 때도 함께 계셨어요. 평소에 함께하셨던 주님께서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에, 예수님이 크리스토파니(Cristophany)로 나타나셔 가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결정적 기적의 시간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에요. 세 친구와 이미 동행하고 계셨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강력함으로 나타난 것이에요. 그래서 용어를 제가 하나 만들었는데,
▷평상시 크로노스의 플러스 One(Plus One)의 임재가 결정적인 시기에 믿음으로 풀무 불에 들어가는 순간 카이로스의 플러스 원(Plus One)의 임재가 되어 주신다.
예수님은 평상시에 크로노스의 플러스 원(+1)을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그런데 결정적으로 우리가 결정적인 시간에 이걸 깨닫고 헌신하고 풀무 에 들어갈 때에 카이로스 플러스 원(+1)을 만들어주시는 거예요. 평상시 크로노스의 플러스 원 크로노스란 말은 그냥 연대기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삶의 주님이 우리의 임재가 결정적인 시기에 믿음으로 풀무불에 들어가는 순간 카이로스 플러스 원(+1)이 되어 가지고 기적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기적 공식이에요. 오늘 이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 가정 지키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도 지키시길 바라고, 교회도 지키고, 이민족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뭐 뻑 하면 힘들면 이민 간다고 그러는데, 그런 이야기 하지 마시고, 여러분 그런 거 말씀하지 마시고, 하나님 어려울 때도 하나님 이 가운데 플러스 원 되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플러스 원(+1)의 인생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플러스 원(+1)이 되는 인생이 되고, 역사와 민족 앞에 플러스 원(+1)이 되는 인생이 될 줄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북 스토어를 사랑 플러스로 지어놨어요. 그래서 앞으로 북스토어 간판을 사랑 플러스 원(+1)으로 바꿀 거예요. 사랑 플러스 원(+1), 전 세계 성도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를 대라 그러면, 많은 분들이 “여호와는 나의 목 자신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 23편 1절도 좋지만 4절이 더 좋아요.
4절 내가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골짜기에서 주님이 나에게 사망이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주님이 나에게 플러스 원(+1)이 되어 주시는 것이에요. 혼자, 이 세상 사람들은 잘나고 뭐 있고, 권력하고 모든 것, 지혜 이런 거 지식에 대해서 관심이 많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의 최고의 관심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 실감을 한다니까요? 어려울 때일수록 여러분 어려울 때 저는 보면요 어려울 때, 주님의 이거 더 실감하면서 간절히 기도하고, 막 그냥 창자가 꼬이도록 어려운 기도 제목들이 많잖아요. 창자가 꼬이도록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순간 자체는 나에게 해답이 없었어요. 당장은 해답이 없었어요. 지나고 나니까 하나님이 다 해답해 주셨어요.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런데 지나고 나니까 가장 큰 가장 큰 해답은 뭐냐, 정말 어려울 때 창자가 꼴 정도로 기도의 제목이 심각했을 때, 주님의 임재를 끼면서 강하게 기도하고, 매달렸을 때 그리고 저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모든 해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방향을 잡는 것이에요.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리고 모든 해답은 뭐냐면 어려울 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여호사밧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어려울수록 플러스 원(+1)을 느끼고, 기도할 때 지나놓고 보니까 당장 답은 없었지만 어려울수록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간절하게 매어 달리는 기도한 자체가 최고의 응답이 된 것이에요. 아멘! 자 어려울수록 주님의 임자를 느끼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 자체가 기도에 응답이 되는 것이에요.
따라서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도 하나님의 플러스 원(+1)의 임재의 은혜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그냥 맹숭맹숭 적당히 산다면 그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고. 심지어 좀 세게 말해 저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예수 믿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지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평탄해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기름 부으심과 하나 선생님이 함께하심을 정말로 사모하고, 매어달리지 아니하고 적당히 해서 다 잘 된다면 여러분 좋은 거 아니에요.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막 그냥 뭐 압박을 당한다든지 막 칼로 찌를 정도로 그렇게 하지는 않잖아요? 나라를 위해 있기도 하고 통일을 위해 있기도 하고 경회를 위해 있기도 하다 보면 가스 마려할 일들이 많이 생긴다고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느껴가지고 더 영광을 사모하고, 더 찬양하면, 그것 자체가 기적이 된다는 거예요. 자체가,,, 그것 자체가, 결론은 풀무 불에서 구원받으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이에요.
IV 풀무 불에서 구원받으면 세상이 뒤집어진다.
풀무 불 가운데서 네 번째 사람이 거리는 걸 보고 느부갓네살 왕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26절에 풀무 불 아기 그게 밑에 통이 컸어요. 밑에서 사람이 그리는 걸 보면 밑에서 본 거예요.
*다니엘 3:26,
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저는 진짜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결단하는 자리에는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는 사람이 풀물 불을 결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에요. 좀더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날이 우리 교회와 개인과 이민족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고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임재 자체가 응답이라고 믿고, 진짜 하나님을 기대하고 찬양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에요. 하나님 앞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에요. 거꾸로,
함께하셔서 결단하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이런 대반전의 역사를 이루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우리가 제대로 풀무 불을 결단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29절에,
*다니엘 3:29,
29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를 말하는 자가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을 거름터로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더라.
그 당시에 황제의 조서는 지금 우리 시대로 보면 SNS가 퍼지는 것이에요. 앞으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질투하는 모든 인간들, 한 번 더 해봐라 ‘그 몸을 쪼개고 집을 거름 터로 삼을지니.’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법적 조치가 필요 없어요. 인간에게 이런 법적 조치 받을 필요도 없어요. 그 당시 최고의 무소불이에요. 황제가 권력자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예요. 누가 찬양하라고 해달라고 했나? 찬양하라고 여기에 보니까 시대의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언어라고 했어요. 아벨론의 신 정도가 아니라 천하 만고의 신들을 KO시키는 결과가 나왔어요. 세 친구들이 풀무 불에 들어가겠다고 순교조인 결단하고 난 다음에 당시 정치 세계에도 글로벌하게 영향을 끼치게 된 거예요. 왕의 조서가 최고의 SNS가 되어 가지고 각 언어로 각 나라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전 세계를 다녀보면 뭐 여러 나라가 다 주님 잘 섬기지만 한국 교회가 희망이에요. 사랑의 교회 사역이 한국 교회 사역이 올해는 ‘10.23’, 한국 교회 섬김의 날 사역이, 오늘 왕의 조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전 세계 드디어 30절에,
*다니엘3:30,
30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초라한 아주 연약한 유대 민족이었고 초라한 포로였지만 그가 섬기는 하나님 때문에 제국의 모든 신들과 모든 권위들이 하루아침에 KO당했어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강원도 홍천의 무명축구팀이 지금 프리미어 리그의 멘시티와 아스날을 10대 빵(10:0)으로 이긴 거예요. 저 강원도에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하기 짝이 없다. 원통 골엔 인제에 있는 축구팀이 파리의 샹제르망을 15:0으로 이긴 거예요. 별로 반응도 안 하시고,,, 사무엘상 30절 다 같이 우리 크게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30,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게 오늘 우리 시대가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주님의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물론 주님을 열심히 섬겨도 세상 왕국에서는 높임 받지 못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계산은 정확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높여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반드시 높여 주실 것입니다. 알다 보면 풀부 불을 경험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 목사님이라고 계시는데 그분 목사님 사모님이 계은덕 사모님이세요. 사별함을 이렇게 했어요. 이번에 최근에 책을 하나 썼는데,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사모님은 자녀가 없으시고 미국의 USC라는 좋은 대학의 의과대학 교수셨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암이 두 암이 왔어요. 두 암이 와가지고 지금 뼈만 남았어요. 근데 책을 쓰시고 저한테 추천사를 부탁했어요. 추천사를 써드렸어요. ‘수많은 사람들을 키운 좋은 사모님 교수님이기 전에 목사님 사모님, 몸에 두 암이 두 가지 암이 와가지고 완전히 뼈가 남아았어요. 그 다니시는 교회에서 막 특송을 하시는데, 특송한 내용을 써놓았어요.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마지막 특송이에요.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뼈만 남은 풀무불이에요. 여러분 저의 삶에 최고의 플러스 원은(+1)요, 주님이 날 붙들어 주시는 것이에요.
♣요약
오늘 우리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통하여 교과서를 주신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플러스 원은(+1)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니, 우리의 삶에 풀무 불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의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도 주눅 들지도 말고, 기독교 정신을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의 횃불을 들고 영적 기백을 가지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이 시대를 승리해야 한다. 질병의 용광로 속에서, 경제적인 용광로 속에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플러스 원 되시는 예수님이 가장 귀한 자본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풀무 불에 던져질지라도, 정면 돌파하게 해서 풀무 불을 회피하지 말고 승리하는 온전한 제자로 살아내어 주님께서 결코 너희를 버려두지 아니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