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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4년 04월 13일)
제목: "말세의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 누가복음 18:3-8
찬양인도: 직장인 순장반 찬양팀
대표기도: 권영란 집사님(여제자1반 총무)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말씀읽기: 이송신 형제(청년 5국), 김정현자매(대학4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
 
*누가복음 18:3-8,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ㅡㅡㅡㅡ
 
할렐루야!!! 자, 앞뒤좌우 옆에 “기도의 동지들입니다.” “7,000 기도 용사의 동지들입니다.” 오늘은 칠천기도용사에 기도하고, 또 우리가 같이 나누고 우리가 마음을 집중하고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성경적으로 7,000 기도용사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몇 명이 있다구요?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에게 나만 남았다고 그랬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얘, 너만 남은 거 아니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는 7,000기도 용사가 있다. 7,000이 있다. 그랬을 때 우리가 그런 내용들을 보면서 또 하나는 사랑의 교회가 2003년도, 2004년도 가을 특새를 마치고 난 다음에, 수많은 분들이 모이니까. 이렇게 특새만 모이면 되겠나, 경건의 특수성이 우리 일상성으로 특새가 1새가 되어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7700 기도 용사를 만들고, 700 기도 선봉대가 있어 갖고, 화요일마다 모여서 네 이렇게 해서 오늘까지 내려왔는데 이제 나라 통일 또 세계 선교 마무리 사랑의 교회가 갖고 있는 나라, 국제화 이런 일들을 잘 감당하고 특별히 ‘2033-50비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 7,000 기도 용사의 이 사명이 순명이 되게 알려 주십시오. 사명이 사명을 순종할 때 그것을 일컬어서 순명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집중력을 가지고 될 때에 하나님께서 이민족을 원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이걸 제가 늘 말씀드린 영적 제곱근의 원리, 만 명이 바뀌려면 몇 명이 바뀌어야 됩니까? 다시 만 명이 바뀌려면 몇 명이 바뀌어야 합니까? 100명이 바뀌면 100명이 똘똘 뭉치면 만 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7,000이 똘똘 뭉치면, 몇 명이 바뀐다고요. 4900만 5000만이 바뀌게 되는 것이에요. 또 보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5000만 인구가 이렇게 깨어졌어요. 4000만 500만 인가부터도 깨어졌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하나하나 7,000개를 용사답게 찬양도 하고 뭐 이런 좀 엇박이 많대요. 보니까 그러니까 이게요 ㅋㅋㅋ~ 그냥 되는 게 아니라, 반주자도 본래 반주자가 아니고 다 이게요 다 조화가 돼야 되는 거예요. 그래도 수고 많이 했어요. 이게요 잘 되는데, 잘하는 건 아무리 힘들지 않아요. 이게 쉽지 않은데 잘하는 게 힘든 거예요. 진짜 그러니까 다 잘하는 거 누가 못해. 다 사랑하고 우리는 잘하지 그러나 우리의 힘을 모아서 마음을 모아서 같이 동질적 의식을 가지고 애를 쓴ㄴ 것,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아멘!!! 한국교회가 다 잘할 땐 잘하는 건 누구나 다 잘하죠.
 
80년대, 90년대 초반에, 누구나 잘하는 잘하지, 지금 나 안 된다. 안 된다. 비판주의, 비난주의, 패배주의, 냉소주의 이런 거 있을 때, 우리가 끝까지 잘하는 것은 그게 진짜란 말이에요. 아멘. 그게 진짜란 말이야. 그 내가 지금 막 적어놨어요. 토비새(토요비전새벽기도회)는 여러분, 내 심중 있는 말들이 나가니까 내일은 얘기 내일은 선거에 선자도 이야기 안 할 것이에요. 제가 그렇죠. 제가 어디 중요한 선교회, 선교 집회하고 이런 거 갔다 오면 갔다 오면, 그다음 주는 제가 얘기 안 해요. 다들 갔다 오면 얘기할 것이다. 이런 사람의 사역에서 의표를 찔러야죠.
 
의표를 어떻게 찌르는가? 오늘 1면 좀 보세요. 하나님의 군대,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 맺힌 기도군대, 기도의 용사가 되어 주님의 지상명령 ‘2033 50 비전’을 순명으로, 사명을 뭐로 한다고요. 순명으로 삼고 기도로 승리하는 바로 당신이 하나님의 뭐에 지팡이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힌 이 지팡이 뭐 이게 어딘지 알아요? 이거 그냥 모래사막에 꼽은 것 같애. 여기가 사하라사막이에요. 사라사막인데, 우리가 청년 최예술 자매가 리더인데 지팡이 번호 7,000 기도용사 지팡이로 185번, 빨리 받았네 사하라 사막에서 단기 선교 갔다가 거기서 찍은 거예요. 사하라 사막이에요. 이거 지금, 그러니까 이 옆에 또 발자국, 좋지 발자국 보세요. 이거는 실감이 잘 안 되고 파란 하늘 보이죠. 보입니까? 좀 더 크게 보여줄 수 없다. 사막에는 예수님 발자국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제자의 삶에 의미를 참 마음이 다짐하면서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 갖고 있잖아요. 저쪽에 지팡이 번호가 몇 번이라고 했죠? 이런 자매가 시집을 잘 가야 되는데, 진짜 여러분 사하라 사막에다 기도의 지팡이 들고 가가지고 저기다가 꼽고 기도하고, 이걸 여기다 이거는 참 잘 한 것이에요. 우리가 잘하면 한국 사회가 바뀌는 것이 아시겠어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자들이 7000, 그리고 1차, 2차 특새를 마치고 난 다음에, 경건의 특수성이, 경건의 일상성으로, 특새가 1새로, 특새(특별새벽부흥회)에 주신 은혜가 삶의 현장에서 20여 년 동안 우리가 해 왔는데, 이것이 ‘2033-50 비전’을 우리가 그대로 이 시대에 우리의 우리가 건강할 때 이루기 위하여 나라를 주신 영적 이 용사들, 세상을 바꾸는 군대일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말세 믿음을 보겠느냐?’ 그랬는데 한마디로 얘기하면 이것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하면, 한마디로 얘기하면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세상의 쓰나미에 쓸려간다. 우리 여러분,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세상의 쓰나미에 휩쓸려간다.
-말씀을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날마다 흔들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은 오늘 핵심이 뭐냐 하면, 다시 한 번 크게 시작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세상의 쓰나미에 휩쓸려간다. 히브리스 2장 1절에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 히브리스 2장 1절의 시작
 
*히브리스 2:1,
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그러니까 말씀을 붙잡지 않으면 우리는 휩쓸려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여러분 말씀을 읽었는데 이 말씀이 뭡니까? 오늘 침입 앞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오늘 보니까 그런데 1절에 보니까, 항상 기도하고, 뭐 하지 말아야 한다고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구요. 제가 한 번씩 말씀드리지만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낙심합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낙심합니까? 기도 안 하는 사람도 낙심하지만, 고차원 쪽으로 올라가면요 기도하는 사람이 낙심하는 거예요. 왜 기도하니까, 기도해도 답이 안 이루어지는 거예요. 저는 수많은 중요한 기도 제목들을 놓고 그 시기는 기도 밤을 새워서 기도하고, 가슴 떨리게 기도하고, 그다음에 막 그냥 눈물로 기도하고, 그다음에 밥도 못 먹고 기도하고, 기도였을 때, 그때 그 기도의 응답은 바로 안 이루어진 일들이 많았어요. 막 가슴앓이 하고 밤새워 밤새우고, 그다음에 금식하고, 그다음에 금식하고 그다음에 막 정말 다윗처럼 미치게 기도하고, 그런데 고 순간은 기도 응답이 안 됐어요. 그러나 크게 보면 다 응답된 줄로 믿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런 과정들을 통하는 것이에요. 기도하다 보면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떤 문제를 앞에 놓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오늘 무례한 재판관과 이 낙심하는 과부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런 내용을 말씀하면서 이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말씀 때문에 우리가 휩쓸어 내려가지 말아야 되는데, 말씀 때문에 이 세상의 흐름에 휩쓸어 내려가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18장 앞에 예수님의 종말에 대해서 17장 34절 35절에,

*누가복음 17:34-35,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뭐하고요. 데려가 버리고 하나는 뭐야? 버려두고, 그러니까 말세에, 말세가 되면 그러니까 과거에 이 고대 근동 사회에 시체가 되어 있으면 화장을 안 하고 장례를 치르든지 할 때, 안하고 독수리가 쪼아 먹는 거에요.
 
*누가복음 17:37b,
37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어떤 시체도 그리고 저희 중앙아시아 쪽에는 조장이라고 있잖아요? 그냥 아예 시체를 내놓고 제대로 진짜 먹도록, 시체가 있으면 죽음이 확실하다 그거는 뭐 예외가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인류의 역사는 반드시 그리고 종말이 있음을 우리 역사도, 삶도 똑같다 개인, 개인도 죽음에는 예외가 없다. 우리는 주님 앞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사명에 다하면 반드시 부름 받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부름 받는 건 뭔가? 우리가 개인의 말세도 있고, 역사의 말세도 있고, 그다음 우리 하늘나라의 전체 복음의 역상에도 말세가 있어요. 오늘 18:8절 뒤에,
 
*누가복음 18:8,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토비새에 나와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물어보셨을 때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향한 순절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주님이 내 것인 사명에 대한 순종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뭐로 표현돼요? 오늘 주님께서 이 불의한 재판관 때문에 고통당하는 이 과부가 갖는 이 태도가 이 태도가 너무 중요한데, 이 태도를 통한 교훈을 말세에 제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는가? 말세 믿음이 제일 중요한데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오늘 기도에 관한 내용인데 따지고 오면 기도 말세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있느냐, 이렇게 물어보셨는데 여기에 보니까, 말세 믿음을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 말씀을 붙잡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어 내려가지 않는 이 기도하는 사람의 어떤 믿음을 통하여 나타나는데 믿음이 바로 기도한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믿음 좋다. 하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태도의 자세를 건드리지 않는다. 라는 것이 믿음 좋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되면, 말씀을 붙잡고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가지 않는 것인데,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세상적인 경험과 세상자의 가치관을 갖고 있어요. 세상적인 신념을 갖고 있어요. 그 세상적인 가치관 경험 신념을 갖고 있는데, 내가 갖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과 경험과 신념보다 말씀이 앞서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예수 믿고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에 아주 현저한 특징이에요. 예를 들어, 수학의 부등호, 알죠? 하나님의 말씀이 부등호, 그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부등호, 내 경험과 지식과 이념 모두 앞선다. 이거에요. 누구든지 믿음이 내 경험과 신념과 가치관보다도 앞선다 이거예요.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기도하는 자세와 기도의 집중력이 내 경험과 가치관과 신념보다 앞선다 이거예요. 그래서 사랑의 교회 교우들은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믿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에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법을 우리가 법의 통치를 받아야 되는 것이 법의 통치의 핵심은 뭐냐 말세의 믿음을 보겠느냐? 말세 내 경험과 가치와 신념보다도 부등호로 말씀과 믿음과 기도가 더 앞서고 있겠느냐? 멀리 새벽에 나와서 7,000 기도 용사의 번호를 가지고 또 뭐 사 과정상 오지는 못하지만 공간적으로 오질 못하는 분들이 있을지라도, 오늘 이 오늘 수천 명이 오늘 여긴 그 들어오거든요. 저기 뭐예요? SNS로 들어오거든요. 어쨌든 간에 오늘 이 자리에 들어온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동지들인 줄을 믿습니다. 아시겠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000 기도 용사가 되는 줄을 확신하는 것이에요. 경건의 한 지난 주간에 우리가 받았던 특세 은혜가 많은데 그 특새의 은혜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꾸준하게 유지하려면 7000 기도 용사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가 뭐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아도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이 내용은 어느 재판장에 너무너무 재판장 악질이었어요. 과부가 어떤 사정이 있는데, 뭐 과부의 사정이 뭔지 저는 다 제가 잘 몰라요. 그러나 너무나 억울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요. 재산을 몽땅 누가 가져갔거나,,, 너무나 억울한 거죠. 혼자 사니까 이거는 혼자 해결하기 벅찬 문제였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자식도 식구도 없고, 그러니까 이제 4절에 재판장을 찾았는데 재판장이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막돼먹은 재판장이고 요즘 같으면 이런 못돼먹은 재판장 내가 뭐 그러니까 바꾸겠다. 밤 날마다 부르짖는 것이에요.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어라 뭐라고 돼 있어요. 6, 7절 같이요.
 
*누가복음 18:6-7,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지금 아까 말씀드린 제가요 많은 기도 앞에 있는 중요한 기도 전부들 앞에는 없고 그 모든 문제도 해결될 수 있도록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그다음에 찬양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연구할 사항 없기도 하고 다 기도할 때도 당장 해답이 안 나올 때가 많았어요. 당장 응답은 안 됐어요. 그러나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가 있을 때, 결국은 다 하나님 응답해 주실 것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국가적으로도 그러고 여러분 생각이 좀 당장 응답은 안 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거예요. 이게 결국은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오늘 우리 칠천 기도 용사는 끈질긴 과부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죠. 끈질긴 에이 불의한 재판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불의한 재판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밤낮 부르짖는 자들을 밤낮 부르짖는 것 때문에 응답하거든.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교회 40대 50대 때면 이 땅에는 40대 50대가 정신 차리라고 믿는 거예요. 사랑의 교회 40대 50, 우리 교회는요 30대가 제일 많아 우리가 등록이 10만 명이 됐는데 10만 명 이상 돼요. 30대가 3만 2000명이에요. 30대예요. 뭐 40대가 될 때 정말로 우려가 있잖아요. 정말로 마음속에 간절해요. 결국은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이에요.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뭘 보겠느냐, 종말론적 입장에서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니면 내 인생이 그래도 주님 앞에 곧 얼마 있으면 설 것이라는 확실히 믿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걸 너희들이 믿는다면,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왜 기도하는 사람을 보겠느냐?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왜 인사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고, 기도와 믿음은 같이 가는 줄로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기도가 믿음이라는 말은 불평 대신에 감사하는 것이고, 기도가 믿음이라는 말은 내 한탄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은 이 세상은 너무 짧다 너무 치열합니다. 불신하게 환경들 불신하게 생태계가 너무 많고 원통한 일이 너무 많아요. 그럴 때 유다서 1장 20절에,
 
*유다서 1:20,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자 이런 우리 수많은 생태계 이런 상황 가운데서 거룩한 믿음이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무슨 뜻입니까? 성령으로 지속자인 기도를 하려면 반드시 우리가 믿음 위에 서 있을 때만 가능한 줄 믿으셔야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 위에 세대로 서 있어야 제대로 된 기도를 끝까지 할 수가 있다는 것이에요.. 믿음은 우리의 내적 표현이고 내적 표현의 자연스러운 열매와 결과가 기도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부처럼 억울할 때, 하나 앞에 기도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가 뭘 봤느냐, 무슨 능력을 받느냐, 마음속에 쓴 뿌리와 원한이 있는 사람이 쓴 뿌리와 원한을 갖지 아니하고 그 쓴 뿌리와 원한을 뛰어넘는 것이에요. 사람은요, 원한을 풀지 않으면 쓴 뿌리를 풀지 않으면 그것이 독이 되고 오염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대한민국은 지금 쓴 뿌리하고 원한들이 뭐냐 하면, 독이 되고 오염이 돼 가지고 나라를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절대로 우리는 그걸 뛰어넘어야 할 줄을 믿는 것이에요. 제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 12장 15절에 원어 문을 크게 읽습니다.
 
*히브리서 12:15,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쓴 뿌리가 때문에 사람들을 더럽게 하지 않도록, 쓴 뿌리를 남기지 않도록, 원한을 남기지 않도록 그것을 뛰어넘는 기도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뜻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 나타나는데, 능력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쓴 뿌리와 원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에요. 쓴 뿌리와 원하는 사탄의 놀이터를 만드는 거예요. 우리의 내 마음과 뿌리지 이 시대를 갖다 와요. 사탄의 놀이터를 다른 길이 없어요.
 
사랑의 교회 지금 기도하는 여러분들과 한국 교회 성도들의 기도하는 걸 통하여 우리 민족에게 임한 5000년 동안 안에서 빠글빠글 안에서 그냥 서로 원한 주고, 서로 비교하고, 서로 상처받고, 여러분 지금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한국은 그래도 잘 사는구나! 미국 잘 산다 하지만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 가 보면요. 수많은 사람들이 홈리스예요. 홈리스 되가지고 마약 때문에, 홈리스 되고 뭐 여러 가지 사상으로 홈리스 되고, 일본에 일본의 신주쿠라든지 일본의 뭐야? 도쿄 유명한 우에노 공원 같은 데 가보면 거기에 홈리스들이 텐트를 치고 수많은 사람이 살아요. 내가 작년에 지난 12월 달에 가보니까 홈리스들이 있더라구요. 대한민국 그런 거 물론 서울역 앞에 이런 힘든 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세계 전체적으로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이 상대적으로 비교를 하니까 내가 좀 못한데 여러분 만약에 개인당 25만 원씩 받아갖고 100만 원 가족 받고 다 쓰고 죽어버려요. 후대가 어떻게 살겠어요? 후대가? 20대 야 30대는 어떻게 살겠냐구요!!. 무슨 성장의 동력이 있어야 나라가 희망이 있지요... 내가 한번 얘기했잖아요.. 아프리카 어느 나라 가면 아무도 안 받아줘 그거는 우리 신사임당 갖고 뭐야? 사우스아메리카 남미, 볼리비아 같은 데 가면 아무도 안 받아줘요 그거 진짜 그거 아무것도 아니지 우리는 기축통화가 아니에요. 우리는 유로라든지 엔이라든지. 달러가 아니에요. 우리는 심지어 중국의 위안화도 아니에요. 대한민국 원을 아무것도 이니에요.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지고, 이 경제적인 크레딧이 생겨갖고 국가 부채를 낮추고, 이래갖고 우리가 잘 딴딴하게 기축통화가 될 때까지 스위스 프랑스처럼 잘 돼 가지고 기축통화가 될 때까지는 국가 부채 율을 높이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야 20대 ,10대, 30세대가 우리가 좋은 것을 물려주어야지, 빚을 물려주면 안 되는 것이에요. 정말 그런데 어떤 당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교수라고 하는 인간들이 많이 나와 가지고 엉터리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마음의 원한을 가지면 안 되고, 그것을 우리는 원한을 풀어야 되는데 원한을 풀지 않으면 뭐가 된다고요? 쓴 뿌리가 되는 것이에요. 사탄의 놀이터가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과 제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7,000 기도 용사, 우리만 똘똘 뭉쳐가지고 이거 노사모도 세상을 바꾸는데 대한민국의 사랑의 교회가 7,000 기도 용사가 되어서, 그다음에 수많은 새벽에 기도하는 각 교회도 6만여 교회, 전 세계 토요일 아침에 이와 같이 해야, 새벽 6시에, 6시에 나와 가지고 그래서 기도하는 나라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정신 바짝 차리고, 오늘 보니까 바로하면, 칠천 기도용사가 바로가면 말세 믿음을 보겠느냐? 가 다른 말로 말세에 뭘 보겠느냐, 기도의 능력을 주시는 것이에요. 우리 속에 있는 쓴 뿌리, 우리 속에 있는 원한 모든 것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정화해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에요. 많은 분들을 위로해 드렸어요. 많은 분들을 원희룡 형제에게 제가 위로해 드렸어요. 정신 바닥 차리라고,,, 그리고 또 우리 하여튼 또 여당도 야당도 다 위로해 드렸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모세가 되어라, 모세가 되어라 라고 하도 들어가지고, 모세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가 중의 하나거든요. 여러분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했던 백성들은 정말 순종적이고, 괜찮고, 은혜로운 백성입니까? 아니면 좀 못됐고 정말 있잖아요. 못돼먹었어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못돼먹었어요. 못돼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래도 참고, 참고, 참아서 내가 차라리 내 이름을 제거해 주십시오. 그러나 저들을 살려달라고 못돼 먹은 백성 지도자로 세워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려고, 했듯이 아무쪼록 위정자들, 이 자리에 있는 성도들, 기도하는 모든 분들, 힘들고 어려운 것 많아도 우리가 마음의 쓴 뿌리와 원한이 많아도, 믿음으로 기도를 새롭게 하여, 담대하고, 거룩하고, 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모두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기도하는 자세요. 사명을 순명으로 감당하는 자입니다. 이 시간 찬양을 하겠습니다. 그래서 칠천기도 용사로 되기를 원합니다. 꼭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찬송을 하면서 기도를 올려드립시다. 1초 화살기도, 3초 거룩 기도, 5초 세상을 바꾸는 사명의 기도를 드립시다.
 
토요일 이전 새벽 예배를 15분을 더 늦추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 그러니까 왜냐하면, 다 와서 앉아 있어야 되니까. 그리고 대신 아이 일찍 오셔서 하시는 분들이 6시부터 6시 반까지 오셔서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드리겠어요.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와서는 기도하시고 6시 30부터는 우리가 기백을 가지고 6시 반에는 여기가 꽉 차서 넘쳐 가지고 정말로 이 곳이 미어터질 듯이 해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이 기백이 오늘 이민족 향하여 흘러가리라고 믿는 것이에요. 그래서 7천 기도용사, 4월 27일 날 천 부장, 백 부장, 50 부장, 서임 식을 하고, 그다음에 본격적으로 한국교회 앞에, 또 우리 교회 앞에, 전체적으로 7,000 기도용사 발대식을 5월 18일 날 하겠어요. 5월 18일날 한 달 동안 준비해 가지고, 5월 18일 우리 교회가, 제가 이 발대한다고 그러니까 칠천기도용사, 천 부장 우리 지금 준비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분이 ‘목사님 소 한 마리 내겠습니다.’ 어 잘 됐네요, 그러면 5월 18일 날 7000 기도 용사 발대 시간은 그날은 우리 교회가 헌당식 할 때처럼 은혜를 받게 하여 주시오옵소서. 여러분 헌당식 할 때 어떻게 했는지 아시죠. 2019년도에 그때 소 10 마리인가 잡았거든요. 뭐 하여튼 10 마리까지 못 잡고 소 몇 마리를 잡을 거예요. 잡아 가지고 우리가 진짜 발대식을 하고 온 교우들이 행복한 5월 달, 5월 18일은 너무 좋잖아요. 그죠 그리고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5월 20일부터 5월 23일까지 우리 교회에서 전국 목사 장로 기도회를 합니다. 7천 기도용사 뒷받침해 주면 전국 목사 장로 기도하면, 목회자와 장로님들이 일어나고 바뀌면, 세상이 바뀔 줄로 믿는 것이에요.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물 흐르듯이 모델들이 다 진행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월 27일은 뭐하는 날이라고요. 많은 날이라고 7000, 천 부장, 백 부장, 50 부장, 십 부장, 임명하는 선임하는 날이고, 5월 18일은 잘 준비하면, 발대식입니다. 소 몇 마리 잡는다. 아시겠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정말 예수 믿는 일은 신나고, 기쁘고, 감사하고, 영광스럽고, 재미있는 거예요. 알겠습니까? 5월 20일부터 우리 전국 목사 장로회도 잘 감당하고 영적으로 뒷받침 안 되면 잘 안 되는 것이죠. 그렇게 기도하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다음 오늘 한 시에 1001차, 천 일차, 쥬빌리 기도회 및 한국교회 복음통일의 기도의 날을 우리교회에서 하겠습니다. 오늘 한 시에 여러분 시간 되시는 분들은 한 시에, 많이들 오셔가지고, 같이 기도합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한반도를 녹이는 환희의 기도를 준비하라 복음통일을” 그렇게 해서 오늘 제가 말씀을 낮에 1 시에 40분 전하겠습니다.
 
오늘 새벽에 말씀 전하고 오늘 한 시에 말씀 전하고 내일 일 부부터 사 부까지 하나님이 예배하신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담임 목회자를 위하여 눈물의 기도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다음 4월 수선대후 부모 기도회가 오늘 오전 7시 50분에 우리 영아 부부터 고3 수험생 부모님과 자녀 교사들과 같이 기도하고, 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그리고 2024년 장애인 주간 기념 사랑부 미술 전시회가 오늘부터 5월 1일 수요일까지 사랑 아트 갤러리에 있습니다. 제가 보니까 장애인 우리 사랑부 미술전시회인데 아주 좋은 그림들이 많이 있어요. 감사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 3분 미라클 보고 개인기도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요약
우리 교회 믿음의 4대가 칠천 기도용사가 되어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도 군대로 일어나 2033년에는 50%의 비전을 소망하며 우리교회 훈련생들이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성령의 능력의 권능을 의지하여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 온 세상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고, 역사와 부름 앞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쓰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경쟁과 중독으로 가득 찬 정글 같은 세상을 너끈히 이길 힘을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말세에 믿음을 보시는 주님을 기억하여, 오직 기도이며, 죽음 외에는 예외가 없듯이, 죽음만이 새 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깨달아서 나를 버리고 한 생명 한 생명을 함께 세워가는 칠천기도용사로 거듭나야 한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낙망치 말고 기도하도록 권하기 위함이다. 흔히 우리들은 기도 응답이 없으면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응답이 쉬 나타나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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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4월 10일)

제목: "성령의 열매"
말씀: 갈라디아서 5:22-26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홍진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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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5:22-26,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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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를 통하여서 주님께 소리로 온전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열매로 시작해서 열매로 끝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경에는 많은 열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가장 처음 나오는 책인 창세기에도 창세기 2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에 동산에 많은 각종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중에 또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명령을 주셨습니다. 인류의 가장 중요한 첫 사건이 바로 열매로 시작하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 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의 제일 마지막 요한계시록 2장에 봐도 열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 이 땅에서 많은 고난을 견디고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온 성도들과 교회에게 너희가 끝까지 지키고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서 생명의 열매를 주시겠다. 라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창세기와 그리고 계시록 사이에 있는 서신서 그리고 복음서, 예언서 그리고 역사서에도 수없이 많은 열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또 흔히 듣 흔히 들었던 의의 열매 그리고 마음의 열매, 손의 열매, 회개의 열매, 좋은 열매, 나쁜 열매, 성경에는 많은 열매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고,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성도의 삶에 이 열매라는 거 의미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열매는 풍성함에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열매는 풍성한 열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열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열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열매라는 단어를 읽었을 때, 열매라는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늘 풍성함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갈라디아서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우리가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서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목자의 심정으로 원하시는 풍성한 삶이 경험되고 또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풍성함을 우리만 우리 가슴 가득히 담고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익은 성령의 아마 아홉 가지 열매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 외우시죠? 사,희,화,오,자,양,충,온,절.
 
처음부터 시작 네 그럴 줄 알고 제가 준비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의 자존심을 세워드리려고 한 글자씩만 띄웠습니다. 처음부터 한번 하나씩 떠올려 보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잘하셨습니다. 네, 72구절 암송한 것 같죠 이렇게 아홉 가지 열매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맺기를 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근데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내 삶과 이 아홉 가지 열매를 기억할 때, 열매의 이미지처럼 부요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그러한 뜨거움이 느껴지십니까? 사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아홉 가지의 열매를 볼 때, 또 내 삶을 비교해 볼 때, 내 삶에서 이 아홉 가지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지 못한 내 삶을 보면서, 아 그래 내 삶 가운데 이 아홉까지 열매가 풍성히 맺어져야 되는데, 그래 내가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 뭐 아홉 가지는 아니더라도 반절이라도 좀 맺으면 살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먼저 하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 삶에 있는 아홉 가지 열매를 나에게 내 놓으라 라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신다면 저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내어놓을 만한 열매가 없는 것임을 저도 고백합니다. 내어놓을 수 있는 열매라고는 풍성하지도 않고, 다 자라지도 않고, 시장인 시장에다 내다 팔수도 없는 그런 열매들밖에 우리 속에 있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지 살펴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서 좀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 주제의 흐름을 흐름과 함께 이 본문을 집중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누구의 열매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누가 맺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누구에게 속한 열매냐? 라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분명히 성령의 열매 다른 말로 성령님이 소유하시고 계시는 열매 성령님이 맺으시고 성령님이 주인이신 열매, 라는 의미로 분명하게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원어에도 프뉴마토스 라고 말하고 있는데, 프뉴마, 성령에다가 아토스라는 소유격을 붙여서 성령님께 속한, 성령님이 소유한 열매, 라는 의미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열매를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이 맺는 열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맺는 열매, 혹시 이렇게 성도인 내가 맺는 열매로 혹시 생각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열매 그리고 나의 열매 우리에게 성령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데 있어서 아홉 가지의 이 열매가 우리를 우리 아홉 가지 열매를 우리의 삶에 맺음에 있어서 이 열매를 성령님의 소유로 성령님의 열매라고 우리가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성령님은 도와주시는 분이고, 나의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은혜로 내가 맺는 열매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한번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물론 현상적으로 이 열매는 내 삶 가운데 내 삶의 모든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열매의 주체를 성령께 두느냐, 아니면 이 열매 맺는 사람 열매 맺는 주체를 내가 가지고 있느냐, 에 따라서 아주 다른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 성령의 열매를 예수님께서 유아 모금 15장에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포도나무 비유를 가지고 한 번 더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과 함께 살펴보면 우리가 맺어 우리가 맺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성령의 열매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말씀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1,-5,
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네 아버지는 농부라.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여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라. 아멘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돌보시는 농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열매가 달리는 가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맺고, 이 나무에서 나쁜 좋지 않은 열매가 맺는 중심의 핵심은 바로 가지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가지가 얼마나 열심히 열매를 위해 노력하고 왜 쓰느냐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 비유의 핵심은 가지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고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 있느냐 나무가 나무에 이 가지가 온전히 붙어있느냐, 거기에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의 기준이 있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져갈 일은 무엇입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직 나무에 온전히 붙어있는 것입니다.
 
다시 성령의 열매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맺어지는 아홉 가지의 열매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까? 아니면 내가 열매를 맺을 가지로 우리의 생명나무인신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 가지에 같이 가지인 우리의 초점이 열매 있습니까? 아니면 나무에 붙어 있음에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로마서의 주제와 동일합니다. 너희는 더 이상 율법에 속하지 아니하고 성령에 속하였다. 너희는 더 이상 조 종에 영예 악한 영들의 종에 있지 아니하고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영을 그리고 성령의 종이 되었음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 나무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 나무가 율법이고 세상이고 육체 나무에 붙어 있으면 가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힘을 써도 아무리 자기를 절제해도 그 가지는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러나 갈라디아서 그리고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접붙인 바 되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접붙인 바 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 이후에 이러한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열매 맺는데 누가 그것을 금지할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열매 맺으시는데 누가 그것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우리가 율법 안에 내가 열매 맺으려고 했습니다. 26절 말씀에 보면, 헛된 영광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왔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23,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26,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내가 열매를 맺어서 내가 영광을 얻고 내가 열매 맺어서 내가 열매에 좋음을 먹으며 살려고 하는 그러한 헛된 영광을 구하며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끝은 다툼과 시기와 투기만 남는다. 라고 합니다. 그랬던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 말씀에,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바 되었습니다. 내 영광을 구하며 나 스스로의 나의 힘으로 내 능력으로 영광을 얻어서 열매 맺어서 내가 영광이 내가 스스로 영광 받고자 하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 나가에 못 박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25절 말씀에, 우리는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5,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교회 다닌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신앙이 있으니까 당연히 포도나무 가지에 내가 붙어있다. 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혹시 떨어진 줄도 모르고 열매 맺기에 초점을 맞추고 힘쓴 내 모습은 없습니까? 사도마을은 오늘 이 갈라디아서 말씀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를 이전에 묻고 있던 모든 율법은 다 벗어버리고 너희가 이제 율법이 요구하던 열매들은 다 내려놓고, 너희가 은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붙어 있게 되면 너희의 힘과 너희의 능력과 너희의 노력과 지금까지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던 그러한 모든 노력은 비교도 되지 않는 성령님이 그분이 직접 맺으시는 그분의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성령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내가 붙어 있기만 하다면 성령께서 성령인 주관자 되시고, 성령인 주체가 되셔서 성령이 소유하신 열매를 우리에게 맺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아홉 가지의 석류의 열매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지금까지 율법은 열매를 우리의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고 맺으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열매들을 우리의 힘으로 맺으며 살아오러 살아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애써도 조금의 열매가 맺어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 드리기에는 너무나 부끄러운 열매들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9가지의 열매를 너희가 힘써서 맺으라.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너희가 애써서 맺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성령께서 내가 이 열매를 맺겠다. 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애쓰고 힘써서 얼마나 사랑해야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참고 참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그러한 열매가 되겠습니까?
 
구약에 많은 유대인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고 애를 쓰고 애를 썼습니까? 하지만 모든 열매들은 다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이 열매를 우리에게 맺을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이 성령의 시대에는 성령께서 이 열매를 맺으시겠다. 라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할 일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같이 한번 있도록 하겠습니다.
 
2. 전신전략을 다해 생명나무의 신 예수 글씨도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가진 나를 통해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십니다.
-아멘 우리의 힘과 우리의 능력으로 맺으려고 했었던 율법의 조문처럼 사랑하려고 율법의 명령처럼 참으려고 율법의 명령처럼 인내하려고 애썼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우리의 초점을 우리가 맺으려고 하는 열매에 두지 아니하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나무에 얼마만큼 잘 붙어있는지에 대한 초점을 맞출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열매 맺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으십시오. 성령께서 열매 맺으실 것입니다. 우리 회사에서 사업장에서 다른 것 말고 예수님께 붙어 있으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열매 맺으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다 나빠하고 제자훈련하고 사약훈련하고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 생월에서도 이 훈련을 받아서 내가 어떤 열매를 맺고, 내가 이 봉사를 해서 얼마만큼의 성숙해 가고, 내가 이것을 하여서 어떤 것을 하고, 하고가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붙어있는지에 대하여서 초점을 맞추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생명나무에 붙어 있을 때 성령께서는 가진 저와 여러분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볼 것은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단수형으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인데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 단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인데, 단수형을 쓴 이유는 이 아홉 가지가 결국 모두 하나라는 그러한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열매는 각각이 맺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열매는 내가 열심히 맺어서 이것도 맺고 저것도 맺고 하는 그러한 나의 열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홉 가지의 열매 중에서 아홉 가지 다는 아니어도 적어도 몇 가지만이라도 맺어보자 몇 가지만이라도 맺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보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나는 충성은 잘 안 되는데, 사랑은 좀 되는 거 같애. 나는 화평은 안 되는데 절제는 조금 되는 거 같애. 석류의 열매는 이 아홉 가지의 열매는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은 맺어지고 무엇은 맺어지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분명히 성경의 이 열매는 하나의 열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저와 여러분의 힘으로 이 성령의 열매를 하나의 열매처럼 이 성령의 열매를 하나도 빠짐없이 맺을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열매는 나에게 속한 열매가 아니라, 성령께서 맺으시는 성령의 열매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아홉 가지의 열매는 한 번에 맺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요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기만 하면 그래서 우리는 삶 가운데서 이 열매들을 하나하나 떼어놓고 이것을 어떻게 맺을까?
 
이것은 좀 부족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혹시 이런 질문도 하시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혹시 당신의 이 성형의 9가지 열매 중에 혹시 부족한 게 있다고 어떤 것이 있는지 혹시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면 이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이 열매는 나는 참 풍성하다 자신 있다. 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은 없나요? 오늘 성경에서 성령의 이 아홉 가지 열매는 단 하나도 떼어 놓지 아니하고 하나의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전능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농부 되어 주시고, 농부 되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나무 되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육신의 율법에 죄악에 젖 붙인 바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의 나무로 접붙인 바 되어 주셔서, 우리의 힘이 우리의 능력이 아닌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열매 맺는 삶을 이제는 성령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의 열매를 동시에 풍성하게 맺어주시는 은혜를 우리 모든 성도인 들이 삶 가운데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떻게 그러면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만남 가운데서도 심지어 우리의 24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경건 생활의 방법으로 주님 앞에 붙을 수 있지만 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한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 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장 실제적이며 확실한 방법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붙잡는 것입니다. 아멘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붙잡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붙잡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읽고 배우고 암송하고 묵상하고 있습니까? 아침에 큐티 할 때, 읽고 중에 말씀 설교 들을 때 읽고, 다락방 할 때 읽고 또 특별히 시간을 내어서 통독할 때 읽고, 또 우리 훈련생들은 훈련 큐티 하고 IBS 하면서 읽고 그것이면 충분합니까? 그 정도면 우리가 24시간 주님과 함께 붙어 있다. 라고 생각할 만큼 충분하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모든 것이 능력이 나온다. 라는 사실을 믿고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음을 보게 됩니다. 방송인 조혜련 씨를 아직 하실 겁니다. 그분이 예전에 했던 간증을 들으면서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예전에 핸드폰이 손에 없으면 불안해서 어찌할 줄을 몰랐는데 지금은 손에 성경이 없으면 불안해서 어찌할 줄 모른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핸드폰을 들고 있는 것과 같이 그분은 일상의 성경을 들고 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시간 동안에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고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합니다. 짬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매년 성경을 6번 읽고, 올해는 8번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그냥 한강 한가한 분입니까? 참 바쁘게 살고 계시더라구요. 저는 감정을 듣는 순간에 어디 숨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실 제 손에 성경은 없어도 되는데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하거든요. 저도 이 한정을 들으면서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나는 나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의 생명의 나무에 얼마나 붙어있는가, 나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내 모든 시간 깨어있는 시간 동안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로 생명나무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겨우 가지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겨우 붙어있는 내 모습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성경을 통독하는 시간에는 순서대로 열심히 읽으십시오. 큐티 하는 시간에도 말씀을 속상하며 읽으십시오. 성경을 배우고 연구할 때는 성경을 깊이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내 손에 잡히는 대로, 시간이 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 읽으시고 말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은혜를 능력을 경험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께 붙어 있을 때,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내 안에 성령께서 그분의 열매를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풍성히 맺어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게 속한 내심으로 맺는 열매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나무에 우리가 온전히 붙어 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축복으로 맺어주시는 열매입니다. 내 힘과 능력의 열매가 아니라, 농부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열매인 줄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맺은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겠습니까? 내 노력으로 맺는 열매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요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내가 어떤 열매를 맺냐, 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붙어 있느냐,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밀접하게 붙어서 성령과 동행하며 그분과 함께 살고 있느냐 이것이 열매 맺는 삶의 능력이고 비밀이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선물인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삶의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붙잡으시고 읽을 수 있으면 읽으시고 읽을 수 없으시면 들으시고 들으실 수 없으면 암송하시고 그리해서 내가 예수군 시도의 생명나무에 늘 붙어 있어서 아버지가 궁금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붙잡아 주시는 능력과 성령이 나와 성도들을 통해서 맺으시는 성령의 아홉 가지의 풍성에 의한 풍성한 열매를 우리 삶 가운데 다 맺고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약
내 힘으로 맺으려던 모든 시도를 내려놓고 성령하나님께 온전히 나를 내어 드려 이제는 결실을 위해 농부이신 성부하나님의 열매 맺으시는 실력과 신실하심을 믿고, 사는 날 동안 참 포도나무이신 성자 예수님께 끝까지 붙어있어야 한다. 우리가 휴대폰을 붙들고 사는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도록 성경을 더욱 더 가까이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는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처럼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 성령의 열매조차 마치 율법을 지키듯이 내가 맺으려고 애쓰며 살아왔던 내 모습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붙어 있으면 내 능력과 내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성령의 풍성한 아홉 가지의 열매를 내 삶 가운데서 온전히 맺게 해 주시는 줄 믿어야 한다. 제는 우리의 초점이 열매에 있지 아니하고, 내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에 붙어있는지에 대한 초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내가 맺는 보잘 것 없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맺으시는 풍성한 아홉가지 열매를 통하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간구하며, 오늘도 우리에게 함께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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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04월 07일)
제목: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의 도피성"

♣주일예배(주후 2024년 04월 07일)
제목: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의 도피성"
(Who is JESUS") ⓼번째
말씀: 여호수아 20:1~9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최민규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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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0:1~9,
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들을 너희를 위해 정하여.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4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
5 피의 보복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였음이라.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7 이에 그들이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과.
8 여리고 동쪽 요단 저쪽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 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구별하였으니.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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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22차 봄 특새에 은혜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2차가 되다 보니까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 아니하고, 물론 힘든 사람 몇 명은 있었지만 힘들지 아니하고 자연스럽게 새벽에 일어나는 것 훈련이 되어 있어 가지고 물 흐르듯이 해서 자연스러웠습니다. 주의 영이 많은 곳에 주시는 자유를 능력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번에 22차 특세니까 22차 총선도 지켜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첫 번째 오늘 생각할 것은 오늘 제목이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 이 시대의 도피성” 이라고 그랬는데 성찬을 앞에 놓고 우리가 아 좀 말씀 앞에서 우리가 좀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먼저 생각할 것은 정글 같은 이 세상입니다. 여러분 3절에 보니까 도피성이 왜 생겼는가 보니까, 어떻게 실수했다고요?
 
I. 첫째, 정글 같은 세상.
 
*여호수아 20:3,
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 자를 피할 곳이니라.
-이게 뭐 이렇게 소위 과실치사죠 그 이유는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 자를 피할 수 있도록, 그리고 9절에서도 오늘 보니까,
 
*여호수아 20:9,
9 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을 위하여 선정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가 회중 앞에 설 때까지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아니하게 하기 위함이라.
-오늘 여러분들 그 구절 그쪽에 좀 뭔가 좀 어리버리 하게 합독을 하시는데 마지막에 뭔가 9절에 제 보니까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망하여 그리고 마지막 구절 뒤에 피의 보복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마지막에, 이 땅의 삶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부지중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시에 예를 들어서 나무 하다가 어떻게 도끼날이 날아가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이웃과 서로 다투다가 어떻게 상대편을 밀쳤는데 벽에 머리를 부딪쳐서 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살인이 되어서 과실치사(過失致死)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앞에는 가나안 전쟁을 7년 동안 수행을 했습니다. 외부적 전쟁이죠.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 근처에도 현실적으로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 전쟁 또 이 북한에 있는 탈북자들, 또 북한에 지금 그 전쟁 같은 삶을 사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겠어요. 갑작스러운 지진이 난 대만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이 세상은 뭐 이것도 어렵지만 아주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이 세상은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탈락하고 이긴 자만 살아남는다는 승자 독식의 논리가 타락한 세상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어떤 철학자는 삶이 너무 무한한 치열한 경쟁과 끊임없는 갈등이 있으니까, 남을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는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언제 뒤처져 낙오될지 모른다는 그 논리에 코뚜레를 꿰어서 끌려가는 그런 삶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참 짐이 있잖아요. 그거는 외부적인 전쟁도 그렇지만, 내면의 전쟁도 만만하지 않죠. 가장 극복하기 힘든 대상이 나 자신이에요.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 젊은이들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나, 내 자신이 정글이고 내 자신이 가장 큰 적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성 중독, 게임 중독, 소위 어딕션(Addiction), 유튜브도 들었는데, 들었다 하면 그냥 1시간 2시간 3시간 쭉 가는 거지. 이것이 일상을 정글같이 옭아매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그리고 우리의 내면 가운데 나도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상처 난 부분들 그리고 부지중에 나는 모르지만 상대방을 말로써 죽이는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죠. 자, 외적으로, 내적으로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서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외부적으로 살인을 했을 때 당시 이스라엘 사회는 특별한 사법 조직이나 경찰 조직이 없었어요. 그래서 피해자 가족들이 살인자를 조사하고 보복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소위 피해 보복의 관계였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피해를 입으면 대체적으로 감정적이 되고 판단력이 흐려져 가지고 같이 망하거나 무고한 사람들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그런 비극이 있었어요. 이런 경우 이 정글 같은 사회 내 외부적으로 이런 경우 그 당시에 이스라엘 사회 무슨 해결 방법이 있었을까? 3절에 보니까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가게 해라.” 그리로 도망가게 해라. 그러니까 그리로 라는 말이 이 도피성에, 도피성을 만드시고 그리로 도망가게 하라. 부지중에서 있던 사람들 무슨 우리 찬송은 피난처에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주 여호와 피난처요. 세상의 날 리을 다시 그치게 하시는 피난처 되시는 여호와의 피난 도피성 피난처가 이 도피성이라는 말이에요. 도피성 피난처라는 말인데 refuge(도피), shelter(대피소), 그래서 오늘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 가운데 이런 삶의 도피성이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고 또 도피성에 가지 못할 만큼 저주 받은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정글 같은 세상을 다 피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정글 속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가 정체성을 잃지 않고 힘 있게 살아갈 비결 중의 하나가 오늘 도피성이라는 사실이에요. 정글의 늪에 빠지지 않고 저와 여러분이 꿋꿋하게 우리의 삶을 걸어갈 수 있는 그 장소가 도피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나중에 깊이 들어가면 이 성찬이 우리의 삶의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배와 성찬이 도피성이 되기 위하여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II. 도피성이라는 해답.
-도피성이라는 해답을 주님이 허락해 주셨는데 구약의 도피성은 아까 말씀한 대로 피해 보복자가 따라와서 죽이려고 하는 순간 그 그걸 이렇게 피할 수 있도록 레퓨지로서 쉘터로서 피난처로서 만들어 놓은 것인데 요단 서편의 3개 요단 동편의 3개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 있든지 하루길이면 뛰어갖고 하루 만 4-50km, 한50km 정도만 48km에서 50km 정도만 뛰어가면 대체적으로 될 수 있도록 그래서 제가 한번 도표를 한번 만들어 드려서요. 한번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지도를 한번 보시겠습니다. 보이십니까? 이스라엘 왼쪽은 지중해고 밑에는 사해고 위에는 요단강이죠? 저기 뭐야 위에 갈릴리 바다죠 사인의 요단강이 있고 요단 서편에, 서편에 보세요. 오늘 성경 보니까 7절 8절에 뭐라고 나와 있냐면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납달리 산지에 갈릴리에 아니 보여줘요 예 갈릴리에 뭐예요? 게데스 갈릴리에 어디에 어 저 위에 저 위에 게데스 보입니까? 그 다음에 에브라임 산지에 3개보입니까?
그 다음에 유다 산지에 헤브론 보입니까? 저 근처에 예루살렘이 있죠? 요단 딱 잘라고 오른쪽에 이제 동쪽 동편에 뭐야 요단강 베셀 보입니까? 밑에 그다음에 길르앗 라못 보입니까? 중간에 저희 므낫세 지파 바산 골란이 보입니까? 제가 이걸 이런 걸 제가 잘 안 보여드리는데 이 보여드리는 거는 어디에 있어도 하룻길이면 갈 수 있도록 그리고 저 도피성은 언덕 위에 산지에 있었어요. 접근이 늘 보일 수 있도록, 사람들의 도피성을 향하여 잘 찾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계곡마다 다리를 놓고 또 안전판이 있었고, 그래서 결과 죽을 목숨이 구원받는 것이 도피성이다. 그리고 6절 그리고 이제 중요한 도피성으로 도망간 사람은 오늘 6절 시작.
 
*여호수아 20:6,
6 그 살인자는 회중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오늘 6절을 여러분, 2절 3절과 함께 잘 기억해야 되고,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도피성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고 그다음 그 살인자가 도피성에 들어갔을 때에, 재판을 받기까지 또는 그 당시 그 당시의 대제사장이 뭐예요?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살인자는 그 성읍 고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을 자기 집으로 돌아갈 지이라 하시니라. 그 성 자기 집으로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도피성에 들어가면 이제 먹을 양식을 주고 거기에 살도록 되어 있는데 그래도 큰 감옥이죠. 감옥 같이 있는데 그 그가 자유의 몸을 받을 수 있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당시에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의 죽음과 도피성에서 편안했던 그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자유와 바꾸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대제사장이 1년 만에 죽을 수 있으면 1년 만에 나오는 거고, 수십 년 동안 제 세상에 죽지 않으면 수십 년 동안, 거기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제사장 오래 살면 도피성 있는 사람이 ‘주여! 대제사장을 빨리 데려가 주옵소서.’ 그건 여러분 쓸데없는 상상이고 복음의 핵심을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자, 지난주에 지난 아론의 싹 난 지파이가 예수님이 뭘 예표 했다고요? 부활을 예표 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서 구약의 대제사장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이에요.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고 그랬고 그래서 여러분 제가 자막을 해 놓으면요 같이 보겠습니다.
 
*구약의 대 제사장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구약의 대 제사장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훌륭합니다. 자막 팀 훌륭합니다. 정말 내가 감사드려요. 이번에 우리 그 특사 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하고 저하고 19년 20년 영상 팀은 나하고 12년 발맞추어 왔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정말 오늘 이 말씀은 말씀도 안 봐도 여러분들 다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에요. 다시요. 아까처럼 잘못된 상상하지 말고요. 대제사장이 죽어야 뭡니까? 도피성에 피한 사람이 자유롭게 된다. 이거 어떤 뜻입니까? 사실 도폐성에 들어간 사람은 과실치사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실수여도 고귀한 생명을 죽인 범죄자예요. 그런데 그가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 나왔다는 말은 그와 대제사장의 목숨과 바꿨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이것은 마치 영적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의 죽을 목숨과 바꾼 거예요. 복음적으로 생각을 해 보면 살인자가 도피에 들어갔다고 해서 살인자의 죄가 다 없어진 것이 아니에요. 모든 죄는 마땅한 형벌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죗값을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대속한 거예요. 대신 바꾼 거예요. 썹스티투션(substitution-치환, 대체) 된 거예요. 여기에 십자가의 깊은 사랑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범죄(犯罪)는 값을 치러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진노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도피성(逃避 城))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다 퍼부어 쏟아 부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지우개로 지운다고 다 지워지는 게 아니고, 우리의 죄를 지우개로 지운다고 다 지워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죄를 내가 지어야 할 죄를 예수님께 다 쏟아 부으셨다. 그 말이에요. 그것이 도피성에 나타난 복음의 진리예요. 사도바울은 이걸 깨닫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신 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했고 로마서 3장 26절에
 
*로마서 3장 26절
26 곧 이때에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뭐냐 하면 누군가가 형벌을 받아야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죗값을 치러야 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도피성 되신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은혜인 줄 믿으셔야 되는 거예요. 이건 참 값비싼 은혜예요. 값비싼 은혜, 한 단계 더 올라가 가지고 구약의 도피성은 우발적으로 살인한 사람들을 정글 같은 세상에서 보호해 주시지만, 오늘 성령 시대에 사는 우리가 믿는 이 참된 복음은 우발적인 살인자뿐만 아니라, 고의 적으로, 고의적으로 죽인 악질(惡質) 죄인까지도 구원(救援)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구약에서는 대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성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만 신약 시대에 지금은 우리가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리고 부활하신 그 은혜의 복음을 우리가 믿고 그분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에 지금 당장 우리의 삶을 의탁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의 몸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이걸 너무 놀라워 가지고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6장 18절부터 20절까지 또박또박 기록하고 있는데 뭐라고 그랬냐면 18절에,
 
*히브리서 6:18-20,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도피성을 찾은 우리에게 뭘 주신다고요? 아니라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았는데, 이것이 도피성이라는 거예요. 도피성을 찾은 우리에게 뭘 주신다고요? 아니라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았는데 이것이 도피성이라는 거예요. 도피성을 찾는 우리에게 큰 용기를 주시는데 그리고 이 도피성 안전한 곳에 누구 때문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다음에 20절 보겠어요. 20절 시작.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아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대대사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보좌,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께서 이런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은혜의 보자 앞에 지금도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무슨 은혜가 있는가, 오늘 히브리서 6장 19절에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무슨 말인가? 이 시대의 정글 같은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시대의 파도에 흔들림이 없이 도피성 되시는 안전한 영혼의 닻을 경험하신 주님께 이 시간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리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주중에는 어떻게 보면 정글과 같은 세상 고통스럽고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주일마다 예배에 이 예배가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와서 우리가 내 삶을 올려드리고 이럴 때, 진짜 이 시간이 여러분들 파도 많은 이 세상 가운데 영혼의 닻을 내린 안식(安息)을 누리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얼마나 이걸 모르고 말이에요. 정글 같은 세상에 날마다 살다가 뭐 겉으로 평안하다. 하지만 뭐가 평안 하겠어요? 정글,,, 그러니 여러분 주중에 정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이와 같이 주일 나와서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이 도피성 되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영혼의 닻을 경험하는 겁니다.
 
안전한 영혼의 닻을 경험하는 거예요. 안식의 항구에 들어가는 거예요. 피난처(避難處)에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와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그리스도가 도피성인 신약 적 의미를 제가 도표를 만들었어요. 오늘 성찬식이니까 제가 길게 못 하니, 신약의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른쪽에 어떻게 돼 있죠?
 
첫 번째, 남의 피가 아니라, 예수님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도피성이 뭐예요? 되어 주신 거예요.
두 번째, 구약의 도피성은 신약의 도피성 예수 그리스도는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일방적으로 주어진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구약의 도표성은 범죄자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오른쪽에는 뭐예요 여러분 이 복음의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이 오래 기다려 주신다.
네 번째, 구약의 도피성은요. 일회성, 신약의 도피성은요. 영구적
다섯 번째, 구약은 도피성에서 해방 받았다. 하더라도 평생 짓눌림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은 도피성에서 완전히 새 생명의 소유자가 되고, 영적인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고아도 과부도 기댈 것 없는 인생도 과부도 도피성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룻기 2장 12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룻기 2:12,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번에 보아스 우리가 배웠는데 보아스가 룻에게 그 과부에게, 그 정글 속에서 사는 과부의 룻에게 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너에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놀라운 피난처입니다. 시편 61편 1절로 3절에 보니까,
 
*시편 61:3-4,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셀라).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주 날개 이 즐겁도다. 이 세상에 수많은 파도가 있어도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피난처와 견고한 망대와 장막과 과부들과 고아들에게 날개가 되는 줄 이 시대에 도피성 되는 줄 믿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성찬을 앞에 놓고 도피성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냥 거기서 먹고 마시고 그냥 산만 지탱해야 합니까? 소울 바이브 라이프로 살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도피성에 있는 사람들이 잘 되기 위해서 두 가지를 해요.
 
-거기서 무장을 하고 변화를 받아야 돼. 변화만 받으면 안 되고 거기서 세상 앞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사명을 갖고 나와야만 하는 것이에요. 삶의 변화를 거기서 자기의 삶에 대한 재조명과 재정비를 하고, 삶을 점검(點檢)하고, 회개(悔改)하고, 평가(評價)하고, 오늘 우리 교회로 말하면 이 도피성 대신 주일마다 나와 가지고 여러분의 삶을 재정비하고 여러분이 타고 다니는 인생의 자동차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오늘 찬송하면서 말씀 듣고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삶을 재정비하고 재점검하고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가는 그리고 동시에 재정비할 뿐만 아니라, 소명자로 준비되고 사명자로 나와야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역사가 나를 부를 때 시대가 나를 부를 때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도폐성 안에서 회계와 변화를 갖는 것만이 목표가 아니라 사명자로 나아가야 하는 거예요. 사명자로, 우리가 마틴 루터처럼 종교 개혁은 못한다 할지라도, 손양원 목사님처럼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우리가 7천기도 용사를 은혜를 가지고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도 군대가 돼야 하는 것이에요.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구원하겠느냐?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주의 마음을 알아서 사명 자가 되겠는가? 이 시간 우리가 주의 마음을 알아 들이는 하나님의 신신한 남녀종들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누가복음 15장에 돌아온 탕자는 탕자로서 살 때, 그가 저 멀리 가가지고 향락, 사치 방탕하고 허랑 방탕 하고 그럴 때 그것은 정글이었어요. 수많은 중독과 아픔과 결국은 돼지 쥐엄 열매를 먹는 엉망진창의 삶이었어요. 이리 살다가는 내가 죽겠구나! 이리 비참하다가는 인생도 아니구나! 개돼지처럼 살구나! 우리 아버지 집에 가면 우리 아버지 집에 가면 지금보다 낫지. 그 아버지의 품이 돌아온 탕자에게는 도피성이 된 것이 그럼 그걸로 끝인가? 아니에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 품에 들어가 가지고 자기를 돌아봤어요. 내가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면 귀하게 살 수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살았는데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아버님을 더 사랑하고 아버님께 더 영광을 돌려야지, 그 마음을 품는 순간 제대로 도피성에서의 준비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거예요. 그리고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피성을 매년 한 차례씩 보수를 했습니다. 가는 길도 새로 닦았고 뒤에서 피의 보복 자가 따라와도 빨리 뛸 수 있도록 다리도 새로 놓고 잡초도 제거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매년 닦고 수리하고 보수하고 점검했습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하여 이 성찬식 자체도 도피성이 되게 하여 주셔서 닦고 조이고, 기름 치고 다시 사명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준비될 수 있는 그런 축복이 저와 여러분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도피성 근처 가까이 가가지고 그 성 밖에서 천막을 친다고 해서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도피성 안에 완전히 들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 우리 가운데 예수 믿는 아내를 만났다고 해서, 예수 잘 믿는 친구를 뒀다고 해서, 예수 믿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붙든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는 남편들이 식구들을 교회에다 데려다 주고 본인은 안 들어오고 데려다 주고, 본인은 옆에 골프 연습장 가 골프 연습하고 소위 제가 이름을 붙여 성도라고 맴맴 성도, 맴 맴 맴 가운데서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들어와 가지고 이 안에 들어와 가지고 도피성 대신 이 안에 들어와 가지고 말씀을 깨닫고 피해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 순장되는 분들 많이 계세요. 다시요 도피성을 향해 힘차게 달린다고 하더라도, 그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달리기 자체가 당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님은 겉으로 도는 신앙 제가 표현한 말로 맴돌기만 하는 신앙,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신앙 이런 신앙, 은혜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신앙을 달팽이 신앙, 이라고 했어요. 수년 동안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을 출발했는데 여전히 같은 지점에서 뱅 뱅 뱅 뱅 맴도는 신앙이 무슨 신앙이라고요? 달팽이 신해 오늘 성찬을 우리가 참여하면서 은혜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헌신의 수준이 뭔지를 모르는 그런 수준이 되지 말고 오늘 모두가 다 우리가 이 시간 맴 맴 성도 달팽이의 신앙을 처리할 수 있도록 은혜의 문턱을 넘어가는 귀한 성찬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오늘 성찬에 참여해야 되는데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 예수님의 몸과 보혈의 우리의 몸을 피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우리의 삶에 뭐가 된다고요?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되는 그래서 오늘 이 성찬이 최고의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 대신 떡과 보혈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 그리고 도피성에 참여할 때에 오늘 마음의 소원을 하세요. 아까 제가 그 지도를 보여드렸는데 7절 8절에 요단강 서편의 3개, 그다음에 요단 동편의 3개, 그 6개가 그냥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각 이름 하나하나가 지닌 뜻이 있어요. 그래서 그 이름 하나하나 지닌 그 뜻의 도피성을 향하여 온 그 뜻이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이번 성찬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게데스는 어떤 뜻이에요? 거룩한 곳이다. 성소다. 거룩한 곳이다. 여러분의 삶이 오염되었다고 생각한 분들 주여, 내 성찬을 통해 내 삶을 정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번째 뭐가 있어요? 어깨 견고함입니다.
세 번째는 뭐예요? 헤브론 헤브론에 있는 그 뜻이 뭐라고요? 교제라는 뜻이에요. 주님과의 교제가 뭐든지 오늘 성찬을 통해 주님과 더 나은 교재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외롭고 친구가 필요한 분들에게도 교제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 다음에 오른쪽에 뭐예요?
베셀은 요새다 포트리스다. 안전하다.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기를 원하는 것이에요. 오늘 그대로 여러분들이 이걸 그대로 되게 그다음에 골란은 어떤 뜻이에요? 기쁨이라는 그 앞에 라못 이라는 뜻은 높은 곳 보호자라는 뜻이에요. 은혜의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게 하여 주옵소서. 골란은 기쁨을 오늘 성찬식에서의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 참된 기쁨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여기에 대한 어떤 글들에 대한 문턱만 문턱 앞에서 왔다 갔다 합니다. 문턱을 넘어가세요.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요약
우리는 보복이 두렵고 중독으로 가득 찬 정글 같은 세상에서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피하기를 소원하며, 매주일 성전에서 온전한 치유와 안식을 경험해야 한다. 가장 강력한 도피성인 성찬을 통해서 맴맴 신앙, 달팽이 신앙을 재정비하고,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도 군대가 되어서 뚜벅뚜벅 걸어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2033-50 비전’을 이루어 가야 한다. 제22차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우리나라에 좋은 지도자의 복을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자.
-도피성은 극단적인 피의 복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들이 도피할 수 있는 은신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 사랑 속에서도 발견된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행해야 할 많은 일들을 지시해 주었다. 그 중 하나가 우발적으로 살인을 하게 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역을 지정하는 일이었다. 마음에 계획한 바 없이 단지 손으로만 죄를 범한 사람의 피가 그 피의 복수자에 의해서일지라도 흘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 땅을 위해서였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율법이 그들에게 크게 유익이 되는 것임을 상기시켜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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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봄 글로벌 특별부흥호(2024년 4월 06일)-여섯째 날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제목: "포로된 자들을 돌아오게 하소서"
말씀: 시편 126:1-6
설교자: 필립 라이켄 목사님(휘튼 칼리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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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6:1-6,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시내들 같이 돌려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오타나 번역이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Good morning and God bless you. My name is Philip Reichen. I'm the president of Wheaton College. It's so good to be with you this morning, even across video. I love the beloved Sauron Community Church, and I want to send my greetings to Doctor John O as the senior pastor and also my, my friend Sam Koh, who coordinates global missions for sarong. It's been good to worship with you in the past on a number of occasions, including for early morning prayer. And I admire your commitment to God's kingdom, your commitment to Korea, your commitment to the church around the world, your commitment to the gospel of Jesus Christ. God bless you as you gather this morning to pray and to carry forward the work of the kingdom.
-좋은 아침입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필립 라이켄(Philip Reichen)이라고 합니다. 저는 휘튼 칼리지의 총장입니다. 오늘 아침, 화상을 통해서라도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랑의 커뮤니티 교회를 사랑하고, 수석 목사인 존 오(John 오) 박사님과 사랑을 위한 글로벌 선교를 조율하는 저의 친구 샘 코(Sam Koh)에게도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과거에 이른 아침 기도를 포함한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여러분의 헌신, 한국을 향한 여러분의 헌신, 전 세계 교회를 향한 여러분의 헌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한 여러분의 헌신에 감탄합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이 모여서 기도하고 왕국의 일을 진행하는 동안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I have in front of me psalm 126, which is a great psalm of the faith and one of the psalms of ascent that the people of God used to sing as they went up to Jerusalem. And here is what the word of God says. When the Lord restored the fortunes of Zion, we were like those who dream. Then our mouth was filled with laughter and our tongue with shouts of joy. And then they said, among the nation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them.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Restore our fortunes, O Lord.
-저는 126편의 시편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믿음의 위대한 시편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던 등정의 시편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주께서 시온의 은혜를 회복하셨을 때,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혀에는 기쁨의 함성이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여러 나라 가운데서 주께서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해 주셨습니다. 주님, 우리의 은혜를 회복시키십시오.

Like streams in, in the Negev, those who sow in tears shall reap with shouts of joy. He who goes out weeping, bearing seed for the sowing, shall come home with shouts of joy, bringing his sheaves with him. This is the word that God has promised to bless to our minds and to our hearts, and a word I hope will be encouraging to you. As I was preparing to preach from this passage, I came across the story of Petter Yasik. Petter was a minister in communist Czechoslovakia. He had traveled to Sudan, which he knew could be dangerous.
-네게브 강에서 시냇물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단으로 수확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함성으로 집으로 돌아올 것이며, 그의 단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마음에 축복을 약속하신 말씀이며, 여러분에게 힘이 되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설교를 준비하던 중에 페테르 야식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페테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국의 목사였습니다. 그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수단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And while he was there, he was captured by the intelligence service at the airport, and he was put in a small prison cell with five terrorists from Isis. It was a desperate situation. He prayed for God to deliver him. He hoped that there were other christian people that were praying for him. But as time went on and as someone gave him a bible to read, and he was able to read it from COVID to cover, and as he began to witness to his fellow inmates and began to see some of them come to Christ, he stopped praying for God to deliver him from prison. He started to pray that God would just keep him faithful in prison as he continued to carry out the work of the gospel. Then something happened that really sent Petir Yasik into despair. He was given a life sentence for spying against Sudan.
-그리고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공항의 정보국에 붙잡혔고, 다섯 명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작은 감옥 감방에 갇혔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다른 기독교인들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누군가가 그에게 읽을 성경을 주었을 때, 그는 그것을 코로나로부터 읽을 수 있었고, 그가 동료 수감자들을 목격하고 그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께 오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는 감옥에서 그를 인도해달라고 하나님의 기도를 중단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일을 계속 수행하면서 하나님이 그를 감옥에서 충실하게 지켜주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페테르 야식을 절망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수단을 상대로 스파이 활동을 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And he wasn't even sure if he could survive a life sentence. He would never see his family again. It was a deeply discouraging time. But he kept turning to the scriptures for consolation and encouragement. And one day, he was in the little prison courtyard, and he came to psalm 126, and he read these words. When the Lord brought back the captivity from Zion, we were like those who dream. And no sooner had he finished reading psalm 126 than one of the prison guards came up to him and said, today you will be released from prison. He could hardly believe it. It was actually just like the psalm being delivered from captivity and not even being able to believe it. It was like you were dreaming. It was so amazing and so joyful. As he reflected on this experience, Yasik said, that was a moment of joy like no other.
-그리고 그는 자신이 종신형을 받아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족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매우 낙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성경을 찾아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작은 감옥 뜰에 있었고, 시편 126편에 이르러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주께서 시온에서 포로를 다시 데려오셨을 때, 우리는 마치 꿈을 꾸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시편 126편을 다 읽자마자 교도관 중 한 명이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거의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포로에게서 시편이 전달되는 것과 같았고 심지어 믿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놀랍고 너무 기뻤습니다. 이 경험을 되새기면서 야식은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As the other prisoners hugged me and they rejoiced over my release, we were shouting for joy. And he said, although I gave my life to Christ when I was 15 years old, I think it has more meaning now when I say, Lord, the rest of my life is yours. You brought me out of prison. You saved me from a life sentence. The rest of my life is yours. It's in your hands. Here I am. I want to serve you for the rest of my life. Well, hopefully, that's the same commitment that you've made to Jesus, to serve him with the whole rest of your life. And psalm 126 encourages us to follow through on that commitment because it assures us that there is a God who answers prayer and rescues his people. Let me just tell you a little bit about the context for this psalm.
-다른 죄수들이 저를 껴안고 제가 석방된 것을 기뻐할 때 우리는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길, 비록 제가 15살 때 그리스도께 제 생명을 바쳤지만, 이제는 주님, 제 남은 인생은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저를 감옥에서 꺼내주셨습니다. 주님은 저를 종신형에서 구하셨습니다. 제 남은 인생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저는 주님을 평생 섬기고 싶습니다. 주님께서 예수님께 하신 그 약속과 같은 약속이 평생 그를 섬기도록 희망합니다. 그리고 시편 126편은 기도에 응답하고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따르도록 독려합니다. 이 시편의 내용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It references a time of captivity and a return to the city of God, to Zion, to the great city of Jerusalem. And this is from the end part of the psalms, book five that runs from psalm 107 through psalm 150. And these are psalms that, for the most part, were written to celebrate God's work with his people during their years of captivity in Babylon and then their return. If you know your Old Testament history, you know the people of God were held captive for some 70 years in Babylon, and, you know that was not a time of singing. If you look at psalm 137, that famous psalm, just a little bit later in the psalter, the people say, how can we even sing when we're in captivity? We're not at our in in. We're not in the city of God. We're not back home in Jerusalem. We're gonna set aside our instruments. We're not gonna sing any. And even when our enemies say, to us, to mock us, sing us one of the songs of Zion.
-이것은 하나님의 도시로, 시온으로, 위대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포로로 잡힌 시간과 돌아온 시간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것으로, 시편 107편부터 시편 150편까지에 이르는 5권입니다. 이것들은 대부분 바빌론에 갇혀 지내면서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하신 일을 축하하기 위해 쓰여 진 시편들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의 역사를 안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빌론에 70년 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때는 노래할 때가 아니었음을 아실 것입니다. 시편 137편을 보시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포로로 잡혀있을 때,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시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악기들을 따로 보관할 것입니다. 우리는 노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의 적들이 우리에게 조롱하라고 말할 때도, 우리에게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불러줍니다.

We can't even do it because we're weeping so much with despair over the suffering that we're going through. And maybe you felt at times that your life is like that, and maybe you're going through times of difficulty right now, shedding tears for your children or grandchildren, really in despair over your situation at work. Maybe deeply concerned about the spiritual struggle that Korea is in today or concerned about the world situation for the church. There are many tears of lament that we could shed for the challenges that we face in this fallen world. But psalm 126 is about deliverance and about the joy comes when God releases you from captivity, when you're delivered from bondage to sin, perhaps first come to faith in Jesus Christ, or when you see the Holy Spirit work in your life in a powerful way to break some form of bondage, or when you see God working that way in somebody else's life. This is the kind of rejoicing that you would give.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에 절망하며 너무 많이 울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그런 것이라고 때때로 느꼈을 수도 있고, 아마도 여러분은 지금 자녀들이나 손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정말로 직장에서의 상황에 절망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한국이 겪고 있는 영적인 투쟁에 대해 깊이 우려하거나 교회의 세계 상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을 위해 흘릴 수 있다는 한탄의 눈물이 많습니다. 하지만 시편 126편은 인도에 관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금에서 풀어주실 때, 여러분이 속박에서 죄로 인도받으실 때,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먼저 오셨을 때, 혹은 성령께서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속박을 끊어내기 위해 힘 있게 일하는 것을 볼 때, 혹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삶에서 그렇게 일하는 것을 볼 때 그 기쁨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줄 기쁨의 종류입니다.

And it was like this for the children of Israel when they received the news that they would be freed from Babylon and be able to travel back to their home in Jerusalem. These were words to sing and not just to say, not just to read. And we can add our testimony to the testimony of the people of God. In Old Testament times. The Lord has done great things for us. To God be the glory. Maybe you know this famous hymn to God be the glory, great things he has done. It's really an echo of psalm 126 and as many reasons as the children of Israel had to give God the praise, we have even more reasons. Because of our salvation in Jesus Christ. We have an eternal salvation. We have a home in heaven. We've been delivered fully from the bondage of sin. Praise God for the great things that he has done in our lives and specifically the things that he has done through Jesus Christ.
-이스라엘 자손이 바빌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가 이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노래하기 위한 말이었고 단순히 말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증언에 우리의 증언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 큰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이 되게 하소서. 어쩌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이 유명한 찬송가가 영광이 되시기를, 또 큰 일이 되시기를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정말로 시편 126편의 메아리이며,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했던 것만큼이나 많은 이유로 우리는 더욱 많은 이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에 집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하신 위대한 일들과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들을 찬양합니다.

Now I want you to notice in this psalm that the first half of the psalm is all about praise and rejoicing. It's answered prayer and the joy that comes when you see God work. But you'll notice when you turn to verse four, the second half of the psalm, there's a change in perspective and perhaps a change in situation because the psalmist says, restore our fortunes, Lord. So now this is a time of difficulty and discouragement. And the psalmist is saying, Lord, you answered our prayers in the past and it brought us great joy. We're in a tough situation again, and we are asking you now to restore us, to do again what you've done before, and that should be a great encouragement as you gather for early morning prayer in the great city of Seoul this morning.
-이제 여러분은 이 시편에서 시편의 전반부가 모두 찬양과 기쁨에 관한 것임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볼 때 오는 것이 응답된 기도이며 기쁨입니다. 하지만 시편의 후반부인 4절로 넘어가면 관점의 변화와 어쩌면 시편가가 말하기를 우리의 운세를 회복시키십시오. 그래서 지금은 어려움과 낙담의 시기입니다. 시편가가 말하기를, 주님, 과거에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그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며, 지금 여러분에게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이전에 하신 일을 다시 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며, 그것은 오늘 아침 서울의 큰 도시에서 새벽 기도를 위해 모일 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You've seen God answer many prayers in your life for the people you love, also for the ministry of Sauron Community Church. But there's a need for God to answer those prayers again. Think of the great things that God has done in Korea in past years. I think of the Pyongyang revival. I think of the way that welsh and then later english and american missionaries brought the gospel to Seoul. Seasons of revival, people that gave their lives for the gospel, the outpouring of the Holy Spirit. When Billy Graham came to Seoul for his famous crusades. Billy Graham, Wheaton College alum who studied right in Blanchard hall, the building you see behind me, these are some of the things that God has done in Korea and the tremendous global work of missions that has come through korean churches, and that work is going on all over the world today. And maybe there's a part of you that looks at the past and says, Lord, we need you to do it again.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면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또한 사랑의 교회 사역을 위해 많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다시 응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위대한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저는 평양 부흥기를 생각합니다. 웨일스와 그 후 영미 선교사들이 서울에 복음을 전했던 방식을 생각합니다. 부흥기의 계절,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 성령의 분출물들. 빌리 그레이엄이 유명한 십자군 전쟁을 위해 서울에 왔을 때입니다. 제 뒤에 보이는 건물인 블랜차드 홀에서 바로 공부한 휘튼 칼리지 졸업생 빌리 그레이엄은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에서 하신 일들과 한국교회를 통해 들어온 선교의 엄청난 세계적인 일들이며,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여러분 중에 과거를 바라보며 주님, 우리는 당신이 다시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Restore our fortunes, do again a work of grace, of revival, of sending out missionaries. Start with me with the work that you need to do in my life. Psalm 126 is a prayer of celebrating answered prayer. And it's a psalm of coming back to God again in prayer to ask him to do the same kinds of things that he's done in the past. As the psalmist describes his situation, you get a sense it's a time of great difficulty. He mentions the Negev, which is the very dry part of Israel in the south. It runs from the runs all the way down to the Red Sea. It's effectively a desert. It's a very dry place. The water doesn't run there except when there are occasional rains. And that's what the psalmist is imagining. He's in a desert place spiritually.
-우리의 재산을 회복하고, 은혜와 부활의 일을 다시 행하라, 선교사들을 보내는 일을 내게 하소서. 당신이 내 삶에서 해야 할 일부터 시작하라. 시편 126편은 응답된 기도를 축하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와 과거에 하신 것과 같은 종류의 일들을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편입니다. 시편가가 그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듯이, 당신은 그것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시기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네게브 강에 대해 언급합니다. 네게브 강은 남쪽에 있는 이스라엘의 매우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사막입니다. 그곳은 매우 건조한 곳입니다. 가끔 비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물이 그곳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편가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는 영적으로 사막의 장소에 있습니다.

But when you're in the desert, there are places where you can see a dry riverbed. There's no water in it, but you can tell there's been water there before. And if the rains fall, perhaps in the mountains, the water will rush down again and it will again fill the desert and the flowers will bloom and there will be a place for the birds to get the sustenance that they need. The waters do sometimes come to the desert places, and that's what the psalmist is asking for. Lord, come to this dry place, fill it with water and help things flourish again. And he also uses this analogy of sowing and reaping a farmer planting seed in the ground and then waiting for God to bring the harvest. Maybe it's a little surprising for you to see this farmer weeping as he plants the seed. But maybe you can imagine a family that has exhausted almost all of its food resources has almost nothing left.
-하지만 사막에 가면 마른 강바닥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물은 없지만, 전에도 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비가 내린다면, 아마도 산에서, 다시 물이 쏟아져 내려올 것이고, 사막을 다시 채우고 꽃이 피고 새들이 필요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생길 것입니다. 사막의 장소에 가끔 물이 오기도 하는데, 그것이 시편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 건조한 곳으로 오셔서, 물을 채우고 다시 번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또한 그는 농부가 땅에 씨앗을 심고, 하나님이 수확을 가져다주시기를 기다리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어쩌면 이 농부가 씨앗을 심으면서 우는 것을 보는 것은 여러분에게 조금 놀라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마도 여러분은 식량 자원을 거의 다 소진한 가정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All it has left are the seeds that are left from the harvest from the year before. And they're going to have to plant those seeds in the ground. They're not going to be able to eat those seeds. They need to plant them so that again, something will grow and God will be able to sustain them. That's the picture here at the end of the psalm. And there are times in life when we're doing God's kingdom work, and there are a lot of tears that go with it because it's hard and because we don't seem to see any fruitful results. So we have to keep laboring in the hope of a coming harvest. And this psalm gives us such great assurance that if we're faithful to God's work and if we persevere in that work, our labor is not in vain, and one day there will be a harvest. I read a marvelous story that illustrates this psalm from a swedish missionary couple that traveled from Sweden to Belgian Congo.
-이제 남은 것은 1년 전에 수확한 씨앗뿐입니다. 이제 그 씨앗들은 땅에 심어야 합니다. 그 씨앗들은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씨앗들을 심어야 다시 무언가가 자라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사진입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 일을 할 때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힘들기도 하고 결실을 볼 수 없는 것 같기도 해서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수확이 오기를 바라며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큰 확신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충실하고 그 일을 인내한다면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는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스웨덴에서 벨기에 콩고로 여행한 스웨덴 선교사 부부의 놀라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And when they arrived at the place where they wanted to proclaim the gospel, the king of the local tribe said, you can't live here. We don't want anything to do with any other gods. You're going to have to live outside the community. There was only one person that they had an opportunity to contact. It was a little boy from the village who would go out every day to sell them eggs and perhaps from time to time, a chicken. And the missionary wife, whose name was Faia Flood, proclaimed the gospel to that little boy every day. Well, sadly, in a time of childbirth,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a daughter, and then died just a few weeks later. Her husband was in despair. He was angry with God that his wife had been taken away from him. He gave up on the mission field. He gave his daughter to another missionary family. He went back home to Sweden. He didn't want to have anything to do with God again.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싶은 장소에 도착했을 때, 지역 부족의 왕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신들과도 관계가 없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공동체 밖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접촉할 기회를 가진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매일 밖에 나가서 계란과 아마도 가끔 닭을 팔곤 했던 것은 마을의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교사 부인의 이름이 파이아 플러드였는데, 그는 매일 그 어린 소년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자, 슬프게도, 그녀는 출산의 시기에 첫 아이인 딸을 낳았고, 그리고 나서 불과 몇 주 후에 죽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절망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가 자신으로부터 빼앗긴 것에 대해 하나님께 화가 났습니다. 그는 선교장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을 다른 선교사 가정에 맡겼습니다. 그는 스웨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다시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기를 원했습니다.

Amazingly, when that little girl grew up in the United States, one day she saw a magazine and she saw a picture of her mother's tomb. It said Zvey Flood, and it showed the place where she was buried. And she was amazed to discover that through the gospel efforts of her mother, that community had come to Christ. That little boy that sold them the eggs became the minister and she went to Sweden, told her father about it. He gave his life back to Christ. She went back to Belgian Congo. She knelt at the grave of her mother and the pastor, that little boy that had sold the eggs and had come to faith in Jesus Christ. He opened his Bible to psalm 126 to read this psalm over her as a psalm of blessing. Those who sow in tears, they're going to come back. They're going to come back home to God. They're going to come reaping the harvest of redemption.
-놀랍게도, 그 어린 소녀가 미국에서 자랐을 때, 어느 날 그녀는 잡지를 보았고, 그녀는 어머니의 무덤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즈비 플러드 라고 쓰여 있었고, 그것은 그녀가 묻힌 장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의 복음적인 노력으로 그 공동체가 그리스도께 온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그 알들을 팔았던 그 어린 소년이 목사가 되었고, 그녀는 스웨덴으로 가서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그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벨기에 콩고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목사의 무덤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소년은 축복의 시편으로 그녀에게 이 시편을 읽어주기 위해 126편의 시편에 성경을 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파종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수확을 거두러 올 것입니다.

This is a promise for us to believe as we turn together. God in prayer. God bless you. Sarang community church.
-이것은 우리가 함께 돌면서 믿는 약속입니다. 기도하는 하나님. 여러분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공동체 여러분...

♣요약








♣제22차 봄 글로벌 특별부흥호(2024년 4월 06일)-여섯째 날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제목: "
말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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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4년 4월 05일)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제목: "세상을 압도하는 거룩한 백성"(오스 기니스 교수님)
말씀: 출애굽기 19:6

설교자: 오스 기니스 교수님( 소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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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9:6,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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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오정현 담임목사님.
-할렐루야!!! 금요일 새벽입니다. 땡큐 God, 이스 프라이데이!!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금요일 아침 우리 오늘 모두가 다 새로워지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무장되는 영광스러운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맞춤형 은혜를 주시는데 이번 특새에 보니까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너무 많이 와요. 그러니까 내가 보니까 이 젊은이들이 한국교회 미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런 말이 있어요. 젊음은 현존하는 미래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미래는 이 특세에 나온 젊은이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저는 이 청년 시절에 대학 가가지고 첫 채플에 찬양을 하는데 그때 찬송을 하는데, ‘가슴마다 파도친다. 우리들의 젊은이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들과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새벽이니까. 말도 잘 안 나오는데 다시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들과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어떻습니까? 젊은이들은 이 말 들으면 가슴이 막 뛰어대요 그러니까 그게 그리고 또 ‘십자가를 높이 들고 노래하며 나가자. 하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들은 죄의 자녀 부름 받은 형제니 몸과 마음 다 바쳐서 주 뜻대로 살리라.’ 어제 제가 우리 찬양 팀 리더 목사님께 물어봤어요. 이 찬송 안 하니까 몰라요. 그러는 거예요. 그러나 세상이 마이 달라졌구나? 다시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 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아마 이런 마음들이 모아져서 이번에 우리나라를 위한 기도도 또 총선을 위한 기도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맞습니까? 이 강단 위에는 지금 젊은이들 우리 자녀들이 올라와 있어요. 이야 이 젊은이들이 복음의 영광 어제 내가 우리가 유튜브 저기 뭐야? 특새 유통으로 내가 배꼽을 잡았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대한일 중등부 애들은 물어봤어요. 1904년도에 러시아어하고 저기 뭐야? 우리나라에서 러시아하고 우리나라하고 전쟁이 있었는데, ,무슨 전쟁이냐 물으니까, 한일전? 러일전쟁, 그다음 또 1894년도에 세워진 평양의 장로교회(장대현 교회), 이름이 뭐냐 1894년이니까, 사랑의 교회?,,, 그 말도 안 되는 말도 안 되는데도 그걸 보면서 내가 참 마음이 기쁘더라고요. 왜냐하면, 사실 답은 틀렸지만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 내가 일부러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할 일 많은 이 나라에 우리 태어났으니 복음 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게 일하자‘ 이 새벽에 이 자체가 기도의 제목이 되게 하셔서 여러분들의 가슴이 뛰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찬송을 가슴이 뛰어야 젊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이런 찬송을 하면 가슴에 뛰면 그것이 젊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이 화석화된 어떤 딱딱한 신앙이 있다면, 오늘 기도를 통하여 찬양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 오늘 은혜의 새살이 돕는 시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있는 시간되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오늘 새벽 세 시부터 와가지고 서너 시간을 이렇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드린 거 이거 자체가 은혜요 기적이요. 여기가 부문 현장이 되는 거예요. 아 뿜어져 나가야 되는 것이에요. 누가 시켜서 해도 하겠습니까? 우리가 자발적으로 사모하며 나온 것 하나님이 기뻐하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은혜 주신 자에게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며 생수의 강이라고 했을 때 강이 단수가 아니고 플로를 복수예요. 생수의 강들 위 월스, 강 들이 흘러다가요 들이라 그러니까 얼마나 충만한 가면 낙동강 영산강 압록강 두만강 미시피강 뭐 인더스강 그다음에 뭐 또 없어요. 나일강 모든 것들 쌓아놓은 고등 훨씬 더 큰 영광스러운 생수의 강이 터진다는 거지요. 4월 10일 총선 그것도 그냥 우리 속 안에 다 들어오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어떻게 할 고민하는 거 있어 우리 속에 다 들어와야 되는 거예요. 알겠죠. 우리 속에 들어오면 역사를 7000명이 역사하면 4900만이 만 명이 역사하면 1억이 바뀌게 되는 것이 아시겠죠. 이대로 될 줄로 확신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막 어떤 문제 밑에서 막 신음해 갖고는 해결이 안 돼요. 헬리콥터 타고 올라가고 전체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오늘 주님의 강이 나팔 불 때, 그다음에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우리들은 주의 자녀 정말 복음 들고 앞장서서 충성되기 일하자 할 만한 이 나라에 우리가 태어났으니 이런 찬송을 하는 순간에 위에 올라가 전체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 그래서 우리나라의 장례도 주님이 그렇게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오스 기니스 박사님과 그다음에 우리 최병락 목사님, 우리가 사랑하는 최 목사님 말씀도 들을 텐데 오늘 이 자리가 정말 은혜의 진원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아시겠죠?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교회에도, 한국 교회도 이번 총선에도, 이게 압도적인 기도가 되어서 모든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아멘. 또한 생수의 강이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조금 이따 말씀을 전할 오스 기네스 박사는 지금 현존하는 전 세계 최고의 석학 중의 하나예요. 최고의 크리스천 스칼라이자 옥스퍼드 박사이시고 소명에 대한 책뿐만 아니라 놀라운 인사이트가 있는 분이에요. 그리고 조금 어려워요 어려운데 여기 젊은이들이 많이 계시니까 젊음의 특징은 학습 능력이에요.이 새벽에 오스기니스 박사가 우리 교회 우리 교회 우리 동재의 동지 나이는 많으시지만 저한테 하는 얘기가 이제 한국 교회는 전 세계 교회 리더십을 한국 교회와 같이 나누어져야 한다고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치성과 그다음에 4명과 그다음에 하나님이 준 통찰력으로 무장이 돼야 되는 것이 이 시간 오스 기니스 박사의 월드클래스의 지적인 강의를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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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오스 기니스 박사님(영국 소명 저자)
-Good. Very, very early morning. My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we welcome all of you to Sarang's Chuch special down revival worship. I'm so glad that you are joining us live from all around the world. This week is going to be an amazing week of God's blessing. He will provide his strengths equal our days. Thank you, God. It's Friday.
-좋아요. 아주, 아주 이른 아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사랑이의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사랑의 교회의 특별한 다운 부활 예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세계에서 생방송으로 우리와 함께 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번 주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놀라운 한 주가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날들을 자신의 장점들을 제공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금요일입니다.

What a privilege to be with you, my sisters and brothers in Korea. It's a real joy. My hope, speaking from the west, is to try and bring you encouragement, but also a warning not to do what we in the west have done, because we have let the Lord down so often. It's often said that the western church is weak because it's worldly. The idea that the western church created the modern world, but it has become captive to the world it helped to create. And so it's become its own gravedigger. Now why is that? Many people think that the western church has given in to secularism.
-한국에 계신 제 형제자매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정말 기쁜 일입니다. 서방세계로부터 말씀드리는 제 희망은 여러분에게 격려와 동시에, 우리가 주님을 너무 자주 실망시켰기 때문에 서방세계가 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흔히 서방세계는 세속적이기 때문에 약하다고 말합니다. 서방세계가 현대세계를 창조했지만 그것이 창조하는 데 도움을 준 세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방세계는 스스로의 중력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왜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서방세계가 세속주의에 굴복했다고 생각합니다.

Secularism is a philosophy, the idea there's no God or gods or the supernatural, but its a philosophy put forward by atheists. But whats done us in is not so much secularism, the philosophy, but secularization, which is a process. A process through which faith becomes more marginal and less meaningful. So that many people think they can just live without God. They can do very well. Thank you. Without God. And of course, behind that are the brilliant contributions and developments and advances, of science and technology and modernization. What's the biblical answer to that? I think the answer is the biblical notion of holiness.
-세속주의는 신이나 초자연적인 존재는 없다는 철학이지만 무신론자들이 제시한 철학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행해진 것은 세속주의가 아니라 세속화, 즉 과정입니다. 믿음이 점점 더 주변적이 되고 덜 의미 있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주 잘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말이죠. 물론 그 이면에는 과학기술과 현대화의 눈부신 공헌과 발전, 발전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답은 무엇일까요? 저는 거룩함에 대한 성경적 개념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In the west, holiness has a bad reputation, as if it's a kind of super virtue or a higher form of being goody, goody, something off putting and impossible. But what is described in the Bible as holy? In the Old Testament, in the hebrew scriptures, three things are described as holy. The first is a day, Shabbat, the Sabbath, or Sunday. As we learn from Genesis, creation takes seven days, and yet the entire universe, time and space only take six days. And the 7th day is a day of rest.
-서양에서 거룩함은 마치 일종의 미덕(super virtuy)이나 선함의 상위 형태인 것처럼, 뒤로 미루고 불가능한 것처럼 나쁜 평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거룩함으로 묘사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약성경에서는 세 가지를 거룩함으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는 하루, 안식일, 혹은 일요일입니다. 창세기에서 배운 것처럼, 창조에는 7일이 걸리지만, 우주 전체와 공간은 6일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7일은 휴식의 날입니다.

But not a day of rest because of exhaustion, but a day for us human beings of stopping, of cessation, so that we're free to create and to work hard in those six days. But on the 7th to remember that we are only creatures and the Lord is the creator, so we remember him and remember our small place on earth. So Sunday, Shabbat Sunday for christians is like a window in time that allows us to remember the Lord and to remember his place as primary our life. So the first thing in the Bible that's holy is a day.
-그러나 지쳐서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멈춰 서는 날, 멈춰서는 날, 멈춰서는 날, 그래서 우리는 그 6일 동안 자유롭게 창조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7일에는 우리가 오직 피조물이고 주님은 창조주임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지구상의 우리의 작은 자리를 기억합니다. 그래서 일요일, 기독교인들에게 안식일 일요일은 우리가 주님을 기억하고 그의 자리를 우리의 삶의 일차적인 자리로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의 창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장 먼저 거룩한 것은 하루입니다.

And that comes from Genesis, exaggerated even more so in Exodus, and then right through the scripture. The second thing is not a day, but a place, the tabernacle. And if Shabbat is a window in times the tabernacle or later the temple. And for us, the church is a window in space, where we make room for the Lord and give time for the Lord to remind ourselves that we are creatures, we are only creatures, and he is the creator and master of it all. But what's the third one? The third one is the hard one. A day, a place and a nation.
-그리고 그것은 제네시스, 과장된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로, 출애굽기에서 더욱 과장되게 표현되고, 그 다음에 경전을 통해서 바로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번째는 하루가 아니라 장소, 곧 성막입니다. 그리고 샤브밧이 성막이나 그 이후의 성전에서 창이라면 말입니다. 우리에게 교회는 공간을 만들어 주는 창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공간을 만들어 주시고, 주님께서 우리가 피조물이고, 우리는 피조물일 뿐이며, 그는 이 모든 것을 창조하고 주인임을 상기시킬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 번째는 무엇일까요? 세 번째는 어려운 것입니다. 하루, 장소와 국가입니다.

Israel in Exodus 19 is called to be a holy nation, the people of God. Now the Lord cares for humanity. Take, say the covenant with Noah after the flood. The Lord cares for individuals and for families. Take the stories in Genesis of the call of Abraham and of Isaac and Jacob and their wives and their many children. But in Exodus, the Lord calls a people a nation. And the hebrew word is related to the word for body, so that as a people a nation, we are like limbs in a body, and all dependent and independent on each other. Now, what is it that we are called to recognize as a holy nation?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주님은 인류를 돌보십니다. 홍수 이후에 나오는 노아와의 언약을 들어보세요. 주님은 개인과 가족을 돌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들의 아내와 많은 자녀들의 소명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들어보세요.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주님은 한 민족을 민족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히브리어는 육체를 뜻하는 말과 연관이 있어서 한 민족으로서 우리는 한 민족의 팔다리와 같고,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고 독립합니다. 이제 우리를 거룩한 민족으로 인정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는 것은 무엇일까요?

The day Sunday is a window in time. The tabernacle, the church, the temple is a window in space. And I think a holy nation is a window in authority. All other human beings have their kings and their rulers and their emperors Xi Jinping in China and King Jong un in North Korea. And nations have their leaders and presidents and bosses and celebrities, but no, we have no God but God. And we are under his authority under God. And so we become a holy nation.
--일요일은 시간의 창입니다. 성막, 교회, 성전은 공간의 창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 번째, 거룩한 국가는 권위의 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은 그들의 왕과 통치자, 그리고 중국에는 그들의 황제 시진핑과 북한에는 김정은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는 그들의 지도자와 대통령, 그리고 상사와 유명인사가 있지만, 아니, 우리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아래 그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국가가 됩니다.

Now, without these three things of holiness, the day, the place and the people, life would be overrun by human self assertion. And as we know from the scripture, that never ends well. It ends in disaster. And we can know that the modern world, with its brilliant communication, its brilliant transport, its brilliant everything, can pretend to be a world that has no need of the Lord at all. We can do it all ourselves now with modern technology, science. But if that's the case, we know that it won't end well. So in the midst of that, we are the holy people who keep alive a witness to the Lord.
-이제 거룩함, 낮과 장소와 백성의 이 세 가지가 없다면, 삶은 인간의 자기주장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가 경전에서 알고 있듯이, 그것은 결코 좋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재앙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현대 세상이, 그것의 찬란한 소통과, 그것의 찬란한 운송, 그것의 모든 것이, 주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세계인 척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현대 기술과 과학으로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이 잘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와중에서, 우리는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있는 거룩한 백성입니다.

And the Lord says, beginning with Isaiah, you are my witnesses. Now, it's easy to see with worship on Sunday that you're keeping alive a window to eternity. It's easy to see that with your wonderful rallies for revival and prayer, you're keeping a window open to the supernatural. But the really hard part, and especially in our modern world, is that in our ordinary day to day lives, our lifestyle, our behavior, we are a holy nation, a people of God.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사야를 시작으로 여러분이 나의 증인이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여러분이 영원을 향한 창을 살려두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부활과 기도를 위한 멋진 집회와 함께, 여러분이 초자연적인 것을 향한 창을 열어두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히 현대 세계에서 정말 어려운 부분은, 우리가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행동, 우리는 거룩한 국가이며, 하나님의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We are opening a window, pointing beyond ourselves so that the way we live by the supernatural power of the Holy Spirit cannot be explained by purely human reason and by purely human causation. I love the fact that again and again when the early church demonstrated the way of Jesus, as followers of Jesus, we read that the pagans cried out, great is the God of the Christians. Their love went beyond explanation. Their giving to the poor and the sick and the needy and others went beyond human explanation. And that's our challenge.
-성령의 초자연적인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순수한 인간의 이성과 순수한 인간의 인과로 설명될 수 없도록 우리 자신 너머로 창문을 열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방식을 보여주었을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이교도들이 부르짖고 위대하신 것이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읽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마음에 듭니다. 그들의 사랑은 설명을 넘어섰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과 가난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베푸는 것이 인간의 설명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도전입니다.

The modern world can do so much, so well and so wonderfully, but it all falls short and we are witnesses to something higher. May it be said that you wonderful korean sisters and brothers so pray. Yes, so worship, yes, but also so live that the rest of the people around you in Korea and Asia, and I hope eventually in the west too, will say, great is the God of the korean Christians. They are a holy nation who point beyond themselves to something that witnesses to our lord. God be with you, and the Lord bless you. Thank you for the privilege of being with you.
-현대 세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고 훌륭하며 경이롭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고 우리는 더 높은 것의 증인입니다. 여러분의 멋진 한국 자매들과 형제들이 기도해 달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요, 예배해 주세요, 그래요, 하지만 여러분 주변에 있는 한국과 아시아 사람들이 위대한 것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을 증인으로 삼는 것을 스스로를 넘어서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길 바라며,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는 특권에 감사드립니다. Amen.

♣요약
서양 교회의 세속화와 성경적 거룩함
• 서양 교회는 세속화에 빠졌다.
• 세속화는 믿음을 사라지게 만든다.
• 성경적 거룩함이 해답이다.
거룩성을 유지하는 세 가지 요소
• 시간의 창, 안식일
• 공간의 창, 교회
• 권한의 창, 성민족
한국 크리스천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
• 주일 예배로 영원에 대한 창을 유지한다
• 현대 세상에서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건 어렵다
• 한국 크리스천들이 자신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





 


♣제22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주후 2024년 4월 05일)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다섯 번째)
제목: "산을 평지처럼 걸어라"
말씀: 하박국 3:17, 스가랴 4:6-7
 
설교자: 최병락 목사님-초빙(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
 
* 하박국 3:17,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스가랴 4:6-7,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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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병락 목사님-초빙(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할렐루야!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 큰 바위 얼굴 두 분이 계셨는데, 남가주 그때 사랑의 교회에 목회하시던 오정현 목사님, 그리고 새생명비전교회 강준민 목사님, 두 분이 목회하는 저에게는 참 이미 목회해서 큰 바라봄과 또 모델이 되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제가 미국에 잠시 있을 때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최 목사 어디야 미국에 잠시 들어와 있습니다. 4월 5일 빨리 칼랠드 한번 열어봐! 아침 시간 비어있나? “저희 교회 새벽기도가 있기는 한데 비어있습니다.” “우리 특새인데 와야 돼! 목사님 제가 여러 번 갔었는데요. 그러니까 그러면 시간 있으니까, 끊어!” 하고 끊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이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박수... 예 우리 오정현 목사님은 저보다 위에 세대신데, 목사님 여기 특새 와서 보거나 목사님 가까이서 뵐 때마다 느끼는 마음은 저한테 기도가 자꾸 생겨요 목사님을 뵈면 제가 훨씬 젊거든요. 근데 이런 기도가 나와요. “주여, 저 젊음을 주시옵소서.” 주여 저 젊음을 제게 주시옵소서. 오늘도 아침에 기도가 그냥 나오는 거예요. 어 4시 20분부터 올라오셔 찬양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그렇지 못하고 있는데, ‘주여, 저 젊음을 주시옵소서.’ 정말 젊게 목회하시는 모습에 참 다시 한 번 도전을 받고요. 또 제가 너무나도 감사한 분이 또 강준민 목사님이십니다.
 
미국에 목회할 때 저를 살뜰하게 챙겨주시고, 멘토링을 해주신 분이신데, 어제와 그저께 오셔서 또 말씀을 전했던 영적 거인 뒤를 이어 가지고 오늘 말씀을 전한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인데, 저는 세 번째 지금 특세를 초청받아서 오게 되었구요. 강준민 목사님 작년과 이번에 오시면서 어제 그저께 아침에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잠원 25장 17절 “너는 이웃 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일단 자주 와서 죄송하고 또 자주 불러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도로 준비한 말씀 여러분하고 전하겠습니다. 전화는 전화 받는 여러분 모두 조안에 큰 은혜 있기를 축복합니다.
 
“산을 평지처럼 걸어라.” 에서 오늘 산 이야기를 많이 할 거고요. 산은 눈에 보이는 산이 아니라, 우리가 살다가 만나는 고난의 산, 역경의 산, 문제의 산, 재정이고 우리의 건강이고, 가정의 문제고, 앞이 보이지 않아 그런 여러 열악한 환경들이 바로 우리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오늘 혹시나 이 특새 기간에 정말 산을 만나서 어쩔 수 없이 이 특세기간에 산을 평지로 만들고 또는 산을 넘어가야 할 분이 있다면 이 중에 한 분이라도 그런 분이 있다면 이 설교는 그분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금요일 이제 1주일 동안 쌓아온 특색 가운데 오늘과 내일 가운데 응답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을 우리는 에베레스트산이라고 그럽니다. 애버(ever)레스트입니다. 영원히 존재한다고 그래서 에버레스트라 그랬고, 신이 인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울타리를 쳐놓은 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8,849 메타 호흡이 가빠 올라갈 수도 없는 그곳에, 최초로 등장한 사람은 1953년 5월 29일 영국의 원정대인 에드만드 힐러리(Edmund Persival Hillary)와 셀파로 함께 참여했던 텐징 노르과이(Tenzing Norgay)가 온 세상을 경악시킬 첫 번째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1953년 그가 등정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 그로부터 이 년 전 그는 한번 등정에 거의 성공하다가 실패를 하게 됩니다. 실패를 하고 낙심하여 에베레스트를 눈앞에 두고 뒤를 돌아서다가 이 에드먼트 힐러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에베레스트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른 외침을 외칩니다.
 
‘산아! 내가 반드시 다시 와서 너를 정복하리라. 왠 줄 아니? 산인 너는 그대로이지만 나는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을 했고 2년 뒤에 그는 더 자란 모습으로 와서 세상을 놀래키는 에베레스트 등장에 성공합니다. 아무튼 ‘I will come back and conquer you!-내가 다시 와서 너를 정복하리라.’ 산아, 왠 줄 아느냐? 산으로서 너는 잘할 수 없지만, 1cm도 잘할 수 없지만, 에서 휴맨 아이킹 그로우 사람으로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As a mountain, do you know why? Because as a mountain, you cannot do well, but you cannot do well even 1cm, but you are growing up as a human eyeing grower in).
 
여러분 우리 앞에를 가로막고 있는 산들이 많지만 산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도 계속 말씀하신 것처럼 하이 프레이즈(High phrase!)! 헬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여러분 맨하탄 꼭대기에서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면 어느 게 100층짜리인지 1층짜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다 평지일 뿐인 겁니다. 문제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내 믿음의 크기가 커지면 문제는 평지처럼 보여 지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특사에 나오신 이유도 그겁니다. 문제 앞에서 문제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게 보이는 내 믿음을 키우기 위해 나왔던 것이고. 여러분도 모르는 사이에 월요일부터 예배드리는 시간 여러분의 믿음의 그릇은 커져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나와야 되는 거고, 그래서 기도해야 되는 거고, 그래야 찬양하는 거고,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내게 보이지 않는 믿음의 그릇이 점점 커지게 되면 그렇게 커 보이던 문제도 믿음의 사이즈가 커지고 나면 우스워집니다. 내가 저것 가지고 떨었던가, 저것 가지고 염려했던가, 저거 가지고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던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희 아내도 목회를 하면서 같이 동력을 저와 동력해 주는데 아내가 기도해 다행히도 감사하게도 기도의 사람입니다.
 
교회 앞에 자녀 문제 여러 가지로 목회를 저를 23년 동안 지금 도와오면서 큰 문제를 교회 문제를 닥칠 때도 저희 아내는 습관이 있어요. 큰 문제가 우리가 넘을 수 없잖아요. 미국에는 조그만 한 집이라도 클라짓(Clasit) 옷장이 공간이 좀 있게 만든 워킹 클라짓입니다. 항상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가지고 클라짓으로 들어갑니다. 두 시간 세 시간 길게는 네 시간 동안 나오지를 않아요. 안에서 간절하게 기도 소리가 집안 전체를 울립니다. 그리고는 나오는 시간이 언제 나오냐면 꼭 이럴 때 나옵니다. 그렇게 컸던 문제가 한 시간 기도하면 요만큼 작아지고 두 시간 기도하면 요만큼 작아지고 세 시간 기도하면 손에 딱 잡힐 만큼 크기가 되면은 응답된 줄 알고 나오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곧 응답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크기와 믿음의 영 권을 가지고 계속 우리의 믿음이 커지면 아무리 커졌던 문제가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믿음이 커지면 문제가 작아 보이는 것이고. 문제가 손에 들어오고 작아지면 응답되는 줄 믿습니다. 어릴 적에 여러분이 뛰어놀던 초등학교 운동장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넓었던 운동장을 어른이 되어서 여러분이 방문해 봤을 때 깜짝 놀라게 만들지 않습니까? 야 운동장이 이렇게 좁았어. 이렇게 작았어. 근데 왜 어릴 적은 그렇게 넓어 보였지 그리고 놀이터로 가보지요. 철봉에 내 이마가 퉁 하고 닿는 걸 보고 야 어릴 적은 까치발로 뛰어도 닿지 않던 철봉이 이렇게 낮았던 거야. 뛰놀던 동네 앞산을 바라보면서, 아니 왜 이러지 그때는 그렇게 높아 보이던 앞산이 동산이었던 거야! 동산도 그대로고 철봉의 높이도 그대로고 운동장의 넓이도 그대로이지만 여러분의 나이와 키가 컸기 때문에 어른이 되고 보니 높은 것도 없고, 넓은 것도 없고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를 위협하면서 마치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나를 다 오늘 끝장낼 것처럼 무서운 발톱을 하고 파도처럼 우리를 스치고 습격(襲擊)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믿음이 커지고 믿음의 담력(膽力)이 커지고 믿음에 정말 여러분의 그릇이 커지면 그 모든 것들이 야 이렇게 작은 문제였던 거야. 이런 문제 가지고 내가 떨었던 거야. 여러분의 문제가 작아 보이기 시작하고 이길 만한 담력이 생기면 하나님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다 높아 보일 뿐이지,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습니다. 믿음을 키우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 특새 정말 잘 나오셨어요. 믿음을 키우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무한대로 키워주시길 축원합니다. 10편 121편에 보면은 시편 기자가 큰 문제가 있었던지 도움이 필요했던지 높은 산을 바라보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쉽니다.
 
*시편 121편 1-2,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그 산을 보면서 한숨을 쉬지요 도대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저 산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데, 산이 날 도와줄까 내 힘으로 산을 어떻게 이길까 태산 같은 문제 앞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어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한숨을 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방긋 웃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이렇게 연이어 고백을 하지요 내가 산을 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다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산 뒤의 산보다 크게 서 있는 하나님에게 시선이 고정되자 한숨이 찬송으로 바뀌고 한숨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면서 나의 도움은 산보다 높은 여호와에게 서로다 오늘 하나님이 보이며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산이 보이면 절망하지만 하나님이 보이면 소망이 되는 것이고, 산이 보이면 눈물이지만 하나님이 보이면 찬송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도 눈이 있어요. 우리 육신에만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도 눈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는 산이 보이지만 믿음의 눈을 들고 보면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 새벽에 나오신 이유는 육신의 눈을 시력을 더 좋게 하기 위해 라식 수술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늘 여러분이 어두워져 버린 영적인 눈을 다시 라식 수술하고 마땅히 봐야 할 하나님을 보는 시간되길 축원합니다. 믿음에도 눈이 있어서 믿음의 눈은 물어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거기에 계시는 거예요. 모든 게 끝난 것 같아도 자신감이 생기지요. 소망이 생기지요 이 또 또한 지나가리라 믿음의 눈이 안 열렸을 때는 오늘이 끝인 것처럼 내가 한숨을 쉬었는데 믿음에 눈 들어 주를 보니 아 괜찮다 조금만 견디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나님이 새 나라를 주시리라. 더 좋은 것을 주시리라. 산이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 준비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한 산을 넘어도 다른 산 살아보셔서 아시잖아요. 사실만큼 살았잖아요. 한 산 넘으니까 끝납니까? 첩첩산중이 인생 아닙니까? 자녀 키워놓으면 건강의 문제 건강을 해결되고 나면은 부부간의 문제 부부가 좀 살만하면 이제 주님 오라 그러시고 뭐 여러 가지 우리의 산이 산 넘다가 끝나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어마어마한 산을 만났던 한 사람을 소개할까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명한 고 강영우 박사님 그분이 경기도 양평 문오리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매에 둘째로, 태어났고요. 14살 되던 날 축구를 하다가 날아오는 공에 눈을 맞았는데, 한쪽이 실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한쪽도 실명이 되고 맙니다. 14살 소년이, 후천성 시각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엄청난 산을 만난 거지요 한 인생으로서 앞을 못 본다는 것 그러나 강영우 박사는 일이 있기 2년 전에 자기의 든든한 산이었던 자기의 빽 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가정의 가장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만 해도 12살 당시로 나이로 참 큰 산을 만난 것인데 14살에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니, 또 하나의 넘기 힘든 산을 만난 거죠. 아들이 앞을 못 보게 되었다는 소식을 의사에게 듣자마자 충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됩니다. 14살 때 천혜의 고아가 되지요 바로 위에 있었던 한 명의 누나가 세 명의 동생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누나도 어린데 동생을 어떻게 키웁니까? 이 일 일하면서 동생들을 키우려고 하다가 고마운 누나도 과로사로 죽게 됩니다. 이제 밑으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 남동생은 철공서로 그리고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흩어지고 이 앞을 못 보는 강영우 학생은 맹인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중학교 입학해서 맹인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모두 직업학교 가라고 직업 훈련을 시킵니다. 왠지 모르게 직업훈련도 해야 되지만 누구보다도 점자 연습을 열심히 해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그분의 당시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이 준비된 학교가 없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직업을 잡아야지 대학 갈 수 없다는 이야기만 했지만, 왠지 모르게 꺾이지 않는 꿈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했고, 당시 이화여대에서 여학생들이 내려와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많이 도와줬습니다. 그중에 한 명이 석은옥이라고 하는 여대생이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지요. 고등학교 3학년 마치고 난 뒤에 대학에 입학 원서를 넣지만 시각장애인을 받아줄 수 있는 학교는 대한민국에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고 또 시도한 끝에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졸업을 할 때는 보통 사람도 하지 못했던 전체 차석으로 졸업을 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최초 시각장애인으로 외국 유학을 가게 되고, 거기에서 공부를 하여 피시버그대학교의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최초의 한국인 시각장애인 박사가 됩니다.
 
그러고 난 뒤에 바로 죠지부시 대통령시절에 국무분과 국가장애위원 정책분과위원장 지금으로 말하면 차관보 자리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이민자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신 분입니다. 장애인의 인권을 담당하면서 한 멋진 크리스천으로, 워싱턴 중앙 장로교의 성도로, 교회와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섬기다가 지금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분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분이 만난 많은 산들 중에 우리가 하나만 만나도 넘기 힘들었을 텐데, 그분은 모든 산들을 다 넘고 넘어 보통 사람도 할 수 없는 위기한 일을 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기 전에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의 자서전 하나를 쓰게 됩니다. 그분이 쓴 자서전의 책 제목이 뭐냐면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그 많은 산들이 없었던 게 아니라, 하나하나 넘기 쉬웠던 산 하나도 없었지만 다 지나고 보니 우리가 넘지 못할 산은 없었다고 그분은 이야기합니다. 그분이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써두었습니다.
‘어느 날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다 하나님이 부르신 거지요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가까이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셨다. 나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너무나도 두려웠던 절벽에 하나님 나 좀 살려달라고 외쳤는데, 살려주기는커녕 하나님 야속하게도 날 절벽으로 밀어버리셔서 도대체 하나님 왜 이렇게 나에게 잔인하시냐고 외치려고 했더니, 절벽에서 떨어지고야 비로소 내 몸에 날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은 두려움의 절벽이 아닌 어디든지 날아다닐 수 있는 창공이 되었다고 그분이 얘기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날개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고 아까 목사님 말씀처럼 우리가 헬리콥터를 타고 하이프레이즈로 위에 올라가서 창공을 날아다니면 넘지 못할 산이 어딨겠습니까? 나 혼자 힘으로야 넘을 수 없겠지만, 하나님이 나의 날개가 되어 주시면 넘지 못할 산이 없는 줄 믿습니다. 여기 성지순례 다녀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성지순례 가서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내려갔다가 사해를 구경하고 난 뒤에, 차를 타고 최후의 로마의 항전 지 마사다 지역으로 내려가다 보면 엔게디 광야를 지나게 됩니다.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엔게디 광야 좌우에는 풀 한 폭이 나지 않는 광야고 흰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깊은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높은 산인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찾기 힘듭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성지순례하는 사람이 뭘 발견했는지 한 사람이 소리를 지릅니다. 어머, 저것 봐! 그럼 사람들이 창문에 붙어가지고 야 신기하다. 야 신기하다. 외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앤게디 광양이 펼쳐지는 사람을 놀래는 장면은 뭘까요? 그 깎아지른 듯한 돌산에 사람이 서 있으면 한 발만 움직여도 떼구르르 굴러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절벽인데, 거기에 평안한 모습으로 서서 있는 산양들을 보기 때문에 ‘개디’가 ‘산양’이라는 뜻입니다. 개디의 땅이라고 해서 앤게디 게디의 샘물이라고 해서 앤 게디라고 부르는데, 사람은 거기 한 발도 걸을 수 없는데 그 양은 그곳에서 힘줄 때문에 비탈에 서도 평지처럼 서서 우리를 비웃듯이 보다가 식 한 번 웃고는 훌쩍 풀척 풀쩍 뛰어서 다른 산으로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걸 보면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읽었던 하박국 선지자는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던 시대지만 내적으로는 영적인 부 폐가 하늘을 찌를 듯한 내적 부패의 상황이었고, 국제 정세는 아수르가 멸망하게 되고 바벨론의 말발굽에 멸망하게 되었는데 이 예언자 하박국은 이미 바벨론이 남 유다로 쳐들어 내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놀라게 됩니다. 야, 이제 영적으로 부패했으나, 나라가 부강하니까 부패한 줄도 모르는 이 100성을 하나님이 바벨론의 말발굽으로 우리를 심판하시겠구나! 너무 놀랍니다. 이제 그들이 와서 모든 것을 짓밟을 것이고. 우리의 무화과나무를 다 열매를 떼 갈 것이고, 포도나 부모의 소추를 훔쳐갈 것이고. 우리마다 털어서 양도 소도 다 훔쳐갈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이 하박국 선지자 하박국서의 내용입니다.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질 것 같고, 우리에게 다칠 어마어마한 고난의 산이 이스라엘 이 남 유다에게 닥쳐올 때에, 하박국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나님이요. 바벨론을 하나님 물리쳐 주시고 우리에게 얼씬도 못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할까, 아니면 그러한 일이 맞춰도 우리 한 사람 믿음 포기하지 않고 바벨론의 말발굽보다도 더 힘센 믿음을 가지게 해달라고 이 하박국은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기도했던 내용이 하박국 오늘 읽었던 3장 마지막 절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나님이여, 바벨론이 쳐들어와 우리에게 모든 악행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하나님이여 비탈에 서 있는 산양 게디의 발목의 힘줄처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나님 어떠한 고난과 어떤 문제가 우리를 엄습해 오고 우리를 쳐들어와도 하나님은 그것을 밟고 넘어갈 수 있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오. 저 사슴에 힘줄을 주옵소서.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발을 오늘 사슴의 발과 같이 하사 비탈도 비탈인 줄 모르고 산도 산인 줄 모르고, 평지도 평지인 줄 알아 평지도 평지처럼 산도 평지처럼 비탈도 평지처럼 달리는 사슴에 발을 주옵소서. 오늘 이 아침에 이 사슬의 사슴의 발에 힘줄을 취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는 나의 힘이시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에 힘줄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산이 와도 남들은 힘줄이 없으니까 높은 산이라고 울고 있지만 내게는 주 여호와가 나의 힘줄이 되어 주신이 산을 평지처럼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새벽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없애는 기도도 해야 되지만, 문제가 문제로 안 보이는 믿음을 달라는 것, 그래서 앞으로 한산을 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산이 우리를 엄습해 올 때에 이제는 떠는 것이 아니라, 비웃을 수 있는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내 눈에 평지도 평지로 보이고, 선보 평지로 보이는 눈 사슴에 힘줄을 가진 주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삼는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고백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평지만 찾아서 달리기 해달라고 하박국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산을 평지처럼 달리는 힘줄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산을 피해 다니는 믿음이 되지 마시구요. 산을 뛰어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사슴의 다리를 가진 믿음의 사람들을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에 잠시 방문을 해서 한국에 계신 목사님들과 한 20여 분의 목사님들하고 남도에 증도도 다녀오고 요양원도 다녀오고 하는 방문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코스 중의 하나가 소록도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소록도는 나병 환자 한센 병 환자들의 집성촌이었죠. 거기에 가면 소록도 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소록도 중앙교회 20여 명의 목사님들이 앉으니까 그 당시에 돋보기안경을 두껍게 낀 경상도 70대 중반 되시는 남자 전도사님이 교회 전체를 관리하고 계시더라구요. 그분도 눈썹도 없고 입술도 없는 그건 나병 한센스병 환자셨습니다. 그분이 소록도 중학교에 대한 역사를 알려주시는데 너무 감동이 되더라고요. 그분이 경상도 짙은 사투리로 우리 20명의 목사님들에게 이야기하셨는데 제가 한번 흉내를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들 오늘 여기 잘 오셨습니다. 이 소록도는 그분의 표현이니까. 그냥 문둥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제가 옮기겠습니다. 여기는 문디 들이 오는 데입니다. 문등 병 참 고약하지요 집에서 암 환자 한 명만 생겨도 전부 직장까지 그만두고 좋은 의사 찾아 댕기면서 어쨌든 낫게 할려고 그러는데, 이 문동 병은 지랄병이라서 한 명만 걸려도 부모도 자식을 버리는 게 문둥병입니다. 우리 교회 여기 여 집사님은 처녀 때 20살 때 몸에 문둥병이 생겨가지고 저 경상도 아가씨인데 눈물, 눈물 방에서 울고 있는데,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부엌으로 나가봤더니, 아버지가 딸 죽인다고 칼 가는 소리입니다. 놀라가지고 뒤 산으로 도망을 갔는데 쌀 한 대박을 보자기에 싸서 엄마가 와서 딸 품에 안겨주고는 엄마도 하는 말이 ’멀리 가레이. 멀리멀리 가레이. 아버지 눈에 안 띄는 대로 가레이‘ 엄마한테도 버림받고, 아버지한테도 버림받아 울며 찾아온 게 이 전라도 소록도까지 온 거 아닙니까? 여기 인생 막장들 오는 데입니다. 막장들이 오는데 소록도 왔다가 요 소록도 옆에 섬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섬만 갔다 오면 다 변하는 거라요. 소록도 중앙교회가 일단 문디 들이 지은 건데 이거 아십니까? 이거 지을 때에 대한민국의 영락교회 본당 다음으로, 큰 본당입니다. 이건 문디 들이 남자들은 산에 올라가 가지고 나무를 베는데 손이 어디 있습니까? 손에다 손이 없으니까 손에다가 톱을 꺼내 묶어 가지고 그렇게 잘라 가지고 몸으로 굴려서 내린 거 아닙니까? 여자들은 백사장에서 모래를 퍼오는데 손이 없어가지고 손목에다 숟가락을 끈으로 담아가지고, 그래 퍼가지고 그때 소록도 앞바다가 피로 낭자했다. 그랬습니다. 문디들이 와가지고 이걸 지어 가지고,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이렇게 하나님 섬기는지 희한하지요? 소록도 와서 울다가 고 옆에 있는 섬만 갔다 오면 다 웃고 오는 거라 그 섬이 참 ’찌라도‘ 라는 섬인데 요상한 섬입니다. ’찌라도‘만 갔다 오면 안 변하는 사람이 없어요. 목사님들도 어렵게 왔으니까 오늘 찌라도 한번 주소 알려드릴 테니까. 다녀 오실랍니까? 그럼 주소 받아 적으소! 하고 꺼내서 받아 적는데 잘 적으이소? 하박국 가 봐! 3장, 3장 17절, 17절 거기 찌라도 나옵니다. 3장 17절 한번 찌라도 나오는지 한번 봅시다 같이 읽읍니다.
 
*하박국 3:17,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찌라도 여기에 찌라도! 여기에 섭이 나오더라고요. 이분들이 소록도에 와서 울며 우리 아버지 왜 날 버렸나, 우리 엄마 왜 난 안 찾아오나, 나는 언제 우리 집에 한번 성한 몸으로 가나 울다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난 거예요. 그러다가 예수님 만나고 보니 야 내가 여기까지 안 왔으면 예수님 못 만날 텐데 이 세상에는 이렇게 살아도 영원한 천국 가게 되니 얼마나 좋은지 그때 이렇게 고백하는 거예요. 내 사는 날 동안 하나님 내 병 안 고쳐 주실지라도, 내 눈 뜬 날 동안 우리 엄마 얼굴 다시 못 볼지라도, 나 다시는 우리 고향 근처에도 못 갈지라도,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여기 와서 주님 만났으니 괜찮다. 찌라도, 믿음이 들어오니까 환경이 중요한 게 아니더라고요. 환경을 이겨버리는 믿음을 가지는 거예요. 지금도 소록도 중학교에는 지라도가 아니고 ‘찌라도’라는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불 만들어 가지고 믿음 없이 어떻게 그분이 삽니까? 오늘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언제까지 평지를 주실 때만 찬양하고 산이 생기면 원망하겠습니까?
 
평지에서도 찬양하고 산을 만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산을 넘게 하실 것이니 믿음 가지고 또 찬양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길가에 장미꽃도 감사해야 되지만, 어머 장미꽃하고 다가갔다가 톡하고 찌르는 가시를 보고 원망할 게 아니라, 장미꽃에 돋아난 가시도 감사, 지나온 그날 밀어주셨던 순풍도 감사, 가는 길에 역풍도 하나님 뜻이 있어 감사, 문제 닫히면은요, 사람이 두 종류로 나뉘더라고요. 예수 잘 믿다가도 문제를 다치니까 대본의 믿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요? 예수 믿는데 왜 이런 문제를 만났어. 하나님 원망부터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문제를 만나니까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런 큰 문제 만났는데 하나님 안 계셨더라면 어떡할 뻔했어. 똑같은 문제 앞에서도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원망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시고 믿음의 눈으로 문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은 육신의 눈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래! 라고 하겠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사람을 극렬하게 보고 예수를 믿으니까 그래도 저나마 사는 거야.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세상이 왜 썩어서라고 말하겠지만, 믿으면 사람들은 교회가 이렇게 많으니까, 이 세상이 이나마 이렇게 있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예수 믿는데 내가 왜 요 모양 요 꼴로 사냐고 말하겠지만, 믿음에 눈이 있으면 예수 믿으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거야.!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 은혜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말 있어요. 여러분 호수의 깊이는 홍수 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뭄 때 하는 것이라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되고, 기도 안 해도 자녀가 잘 되고, 손대는 것마다 사업이 잘 되는데 누가 예수 잘 안 믿어요. 누가 하나님 찬양 안 해요. 그렇게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풍성한데 누가 찬양을 안 해요. 진짜 믿으면 무화과 나머지 소출이 많을 때 찬양하다가 어느 날 소출이 하나도 없을 때도 추던 춤을 멈추지 않는 게 여러분 사실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를 때 정말 이 찬양 슬픈 찬양이거든요.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근데 우리 부를 때 어떻게 불러요 무화과나무 잎이 정신 나간 찬양이거든요.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 소출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 없고 이거 없고 망했다는 찬양인데 우리는 춤추면서 찬양해요. 무화과나무 잎이 마 왜 그래요. 그거는 세상 사람은 못 불러요 믿음의 사람만 부르는 겁니다. 알고 보면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가사가 가사지만 우리는 찌라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야 사탄아 너는 나를 어떻게 봤냐, 무화과나무가 열매가 주렁주렁할 때만 찬양하는 사람으로 나를 오해했냐 무화과나무 열매를 다 가져가 봐라 나는 추던 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삶에 막 구워지는 홍수의 호수 깊이를 몰라요. 호수가 물이 가득 찼는데 얼마나 깊은지 어떻게 알아요. 가뭄이 오고 가뭄이 오고, 가뭄이 오고 가뭄이 오고, 물이 빠졌는데도 저렇게 깊었어, 저렇게 깊었어, 고난이 오고 정말 힘든 삶이 와도 정도면 하나님 떠날 거야,. 정도면 사람 하나님 원망할 거야. 그렇게 요 뱀 믿음이 충만한 것 같아서 축복 주니까 그러죠. 라고 해서 하나님이 그럼 한번 시험해보라고 다 가져가니까 다 가져가니까 마귀도 원망할 것 같았는데 요배 입에서 나오는 고백이 뭡니까?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이도 여호와시니, 내가 부모에게 나올 때에 적신으로 나왔으니 내가 가진 것이 원래 없었는데, 무엇이 아깝단 말이냐 난 오직 여우와의 이름만이 찬송 받으리로다. 그는 바로 ‘찌라도’ 의 믿음을 가진 거예요.
 
어떤 산도 평지로 보는 눈을 가졌다 이 말이지요. 하박국은 왜 그렇게 자기 인생을 걸어가지고 키워 놓았던 무화과의 열매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그렇게 모아두었던 모든 양과 소가 없을 때에 너무나도 당황했을 텐데, 조금은 당황했겠죠. 조금 당황하다가 금방 정신 차리면서 ‘찌라도’ 라고 말할 수 있었던 한 가지는 그다음 구절 때문에 그래요. 1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전히 찬양할 수 있는 이유 한 가지는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에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 순간에 하박국은 선택을 한 거예요. 없어진 것을 볼 것이냐, 여전히 내게 있는 것을 볼 것이냐, 무화과는 없어졌으나 당황하다가 괜찮아 내게 하나님 이어졌네. 어디 계시구나.
 
*하박국 3:18,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없어진 것을 바라보면 절망이 나오고 한숨이 나오지만 상황에도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 믿음의 눈으로 있는 것을 봐야 되는데 있는 것을 볼 때에 언제나 절대로 죽을 때까지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되는 겁니다. 아 무화가 열매가 없지 내 인생 다 드렸던 것이 실패로 돌아갔구나, 하고 절망하려다가 아참 잠시 뭐가 있나 보자 하나님 계시네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시네! 여러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이 나에게 계시면 하나도 안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상 것 다 가지느라 하나님 잃어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계셔야 다 가진 것이고., 하나님 없이 세상 다 가져도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인하여 구원의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는 것 때문에 사실 하나만 분명하다면 오늘 힘든 상황 가운데 나오신 여러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좋을 때만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려면 어려울 때 찬양해 보세요. 좋을 때 찬양은 하나님이 기쁨으로 받지만 어려울 때 찬양을 멈추지 않으면 감동으로 받으십니다. 하 너는 어떻게 어려운데도 찬양을 멈추지 않느냐, 내가 어찌 너 어려울 때 눈물의 찬양을 내가 외면하겠네. 하나님 눈물의 기도 눈물 속에 드리는 찬양 받으시고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전천우의 믿음이 돼야 됩니다. 바울도 산을 평지처럼 걷는 믿음을 가졌으니까 끝까지 승리했는데 그가 빌립보서 4장 11절에 13절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4:11-13,
11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13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여러분 일체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있을 때도 찬양하고 없을 때도 찬양하고 잘 될 때도 찬양하고 잘 안 될 때도 찬양하고 뜻이 있어 그러시겠지. 하나님이 잠시 쉬어라고 하는 쉼표를 내 인생 마지막 최종 점수처럼 마침표로 착각하지 말자. 중간고사를 기말고사 점수라고 착각하지 말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니까 나는 하나님 지금 일어난 이 상황 때문에 하나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빈부에 처할 때도 풍부에 처할 때도 하나님의 일을 멈추지 않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 형편과 상관없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이지요. 하나님이 아시는 줄 믿습니다.
 
이번에 주제가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주제가 너무 멋있어요. “사는 날 동안 능력이 있으리로다.” 오늘 압도하는 우리 오스기니스 목사님의 압도하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혼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낮은 산만 찾아다니지 말고, 어떤 산도 넘는 사람이 되어야지요. 제가 좋아하는 찬양가사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가 나로 바다 위 걷게 하리라.’ 처음에는 바다 갈라지게 해달라고 기도 해야지요 이 문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해야지요. 이 문제 산성 같은 문제 하나님 평지가 되게 해달라 기도 해야죠 넘실거리는 바다를 갈라달라고 기도해야죠. 아무리 기도했는데 응답 안 해 주시면은 응답 안 해줬다고 원망하지 말고 감 잡아야죠. 아 요단강처럼 발 디디라는 것이구나. 내 앞에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추가 이 바다 위를 걷게 하시는 것이구나! 담력으로 가다 보면 산이 평지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는 바다가 갈라지는 것만 기적이라고 하는데, 바다 위를 걷는 건 더 큰 기적인 것입니다.
 
-스가랴편,
-오늘 두 번째 본문으로 가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스루바벨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하박국이 봤던 바벨론의 말발굽에 짓밟혀서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 당시에 부모의 손을 잡고 갔던 10살 소년들은 70년이 지나자 80세 노인이 되고, 대부분 70년 포로 기간 동안에 바벨론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바벨론 2세 ,3세들입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스룹바벨입니다. 아주 능했고 뭐 히브리 정신과 이 바벨론 정신 모든 것을 가진 국제적 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라의 바벨론에 그 인정을 받던 관료였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고 메데바사 지역을 지나서 페르시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첫 번째 왕이 고레스 왕입니다. 대제국을 이루었던 페르시아 왕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첫 번째 대통령 취임 연설과 같은 곳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마디를 하지요 얼마나 제국을 다스려야 되는데 할 일이 많겠습니까? 그러나 70년 전에 페르시아 제국에 비하면 새끼손가락 손톱만큼도 안 되는 한 나라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부터 70년 전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민족은 다 일어나 고토로 돌아가라.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라’는 말을 합니다. 고레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섭리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난 뒤에 그들에게 필요한 은금을 주워 보내오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바벨론에서 태어나고, 자란 바벨론 이 스루바벨을 총독으로 세워 너는 일어나 백성들을 모아 모이는 사람마다 다 데리고 가라고 그럽니다. 자,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을 데리고 1500킬로미터를 걸어가야 됩니다. 몇 명이 나설지도 몰라요. 태어나서 자랐으니 그곳이 자기들의 고향인데 진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어릴 적 10살 때, 왔던 10살짜리 소년이었으나 지금은 80 노인이 된 사람들일 테고 90세, 백 세 된 사람은 내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묻히고 싶은 사람들 대부분이에요. 길을 따라 나서지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젊은 사람들이 따라 나설 일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스룹바벨이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 앞에 이야기합니다.
 
‘1500킬로미터의 거리를 내가 깃발을 들어도 나이 많은 사람들 어릴 적 예루살렘을 본 사람들만 갈 텐데 내가 그들을 데리고 가서 그분들과 함께 어떻게 성제를 세웁니까? 못합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스룹바벨을 바라보고 스룹바벨의 귀를 붙잡고 얘기합니다. ‘스룹바벨 잘 들어라. 잘 들어라 귀를 흔들면 잘 들으라고 예수님 그리고 하신 말씀이 6절입니다.
 
*스가랴 4:6,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네 능력으로 안 된다. 야, 내가 니 힘보고 부른 줄 아냐? 니 능보고 부른 줄 아냐? 이런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내가 너에게 한다고 내가 너에게 능력 준다고, 내가 성령 부어서 한다고, 너는 니 앞에 가로막고 있는 수백 개에서 한 수십 개 강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니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한다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합니다. 그러고 난 하나님이 너 잠시 있어봐. 하고는 스루바벨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수백 개의 산을 향해 하나님이 외치십니다.
 
*스가랴 4:7,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면서 스룹바벨의 깃발을 들었을 때, 5만 명이 따라 나섭니다. 은금을 가지고 간다는 소식 때문에 처처의 바위 뒤에 산 뒤에 그걸 뺏는 도적 떼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넘어야 할 산은 수백 개고 건너열강은 수십 개지만 스룹바벨은 그때부터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걸어가고 계신다는 거 하나님은 약속대로 산들을 꾸짖어서 산을 평지로 만들어 강을 메꾸어 산도 평지로 강도 평지로 건너게 되었고, 하나님은 숨어 있는 화살들을 다 꺾어 5만 명은 무사히 예루살렘에 기적처럼 도착했고 성전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이 3분 남아서 이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여러분이 산을 넘는 방법 한 가지만 소개할게요. 큰 산이 평지가 된다고 이 설교를 듣고 탁 여러분 산을 가보세요. 평지가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반드시 들으셔야 돼요. 되는구나! 하고 갔는데 산 중턱에서 여러분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생각보다 산이 높아 산에 고립될 때도 있습니다. 길을 잃어버릴 때도 있고, 이제 산을 넘어갈 수도 없고 왔던 길 돌아갈 수도 없어서 갈 길 몰라 헤맬 때, 기도해도 안 되던데요. 이거 걸었는데 산이 평지가 안 되던데요. 그분들 산을 벗어나는 방법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대학교 때 저는 지리산을 혼자 많이 올랐습니다. 처음에 올랐던 때를 기억합니다. 울적하던 어늘 어느 대학교 신학교 이 학년 때에 갑자기 기숙사에 있는 가방 하나를 메고 청바지에 운동화 신고 뱀사골 산장으로 해서 지리산 종주를 했습니다.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장터목산장이라고 지리산 천왕봉 밑에 장터목산장, 마지막 산장에 거의 죽을 것처럼 살아가지고, 도착을 하니까 산장지기가 저에게 이야기합니다. 야 이 젊은 사람 죽으려고 여기 이렇게 왔냐고 이 소지품 다 꺼내보라고 꺼내보니 아무것도 없어요. 책 두 권밖에 없었어요. 사는 게 기적이라고 하면서, 지리산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래요. 지리산에서 어떤 곳에서 고립이 되어도,,,
 
두 가지 첫째, 어떤 일이 있어도 올라올 때 꼭 초코파이를 가지고 와야 된다. 허기가 지면 죽는 거다 그래서 초콜렛 초코파이를 꼭 소지해야 된다. 아무것도 없구만 둘째, 꼭 호루라기를 가지고 다녀야 된다. 지리산은 어디에서 고립이 되었던지 내리막 방향으로 8시간만 걸어가면 인가가 나오기 때문에 초코파이 하나 먹고 걸어가면 산다. 두 번째 힘이 없거들랑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앉아서 호루라기를 불어라. 그러면은 호루라기가 꼭 산장, 산장마다 들리게 되어 반드시 기다리면 구조대가 온다. 얘기를 하더라고요. 여러분 우리 인생의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갈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러분, 여러분에게 걸어갈 힘이 되는 분은 누굽니까? 믿음의 주요 원정 기하신 예수만 바라보고 가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무리 산이 고립되어도 믿음 버리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 방향으로만 걸어가면 언제 살아도 살게 될 줄 몰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 오 예수, 초코파이 같은 게 있지만 이건 저기 지리산 오를 때지만 인생의 산을 넘어갈 때는 오 예수! 가지고 안 되고 오 오 예수! 목사님 제가 특별히 만들어 왔습니다. 오 예수, 오 예수!! 목사님께 드리겠습니다. 오 예수만 바라보고 가시면 됩니다. 그래도 힘없거들랑 호루라기를 불어라 그랬지요? 호루라기 불면 구조대가 반드시 온다. 우리의 호루라기가 뭡니까? 기도의 호루라기죠 하나네 대만 아님 주를 불어라. 주를 불어라. 산의 한가운데 어둠의 한가운데 잃어버린 곳에 주를 부르라, 주를 부르라. 이 호루라기 소리를 기억하십시오. 살다가 지쳐 힘들어 한 걸음도 못 가겠거든. 내 힘으로 못 갈 때, 가려고 하지 말고 자리에 추를 부르십시오. 기도의 호루라기로 나 좀 살려달라고 주여, 나를 살려달라고 반드시 주님 오셔서 여러분 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 앞에 나왔습니다.
 
♣요약
우리 앞에 산이 가로막고 있다고 이제 한숨 쉴 것이 아니라, 산보다 큰 믿음을 가져서. 평지도 평지처럼 산도 평지처럼 넘어갈 믿음을 주실 것을 확신하며, 산양의 힘줄을 가진 주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삼는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자로, 믿음의 크기와 담력에 대한 생각을 기도와 찬양으로 키우고 채워서 커진 문제에 봉착했을 찌라도, 변화를 받아, 주님을 바라보면 그 문제를 작아 보이게 만들어 주시니, 잠겨 있던 믿음의 눈이 열리고 앞 서 행하시는 주님께서 산을 꾸짖어 평지로 만드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면, 길 잃어버렸을 때, 우리의 영적인 호루라기를, 소리를 높일 때, 하나님 반드시 오셔서 역사하시고 응답하실 줄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인생길을 잃어버렸을 때 예수님만 바라보자. 그래서 산을 평지처럼 걸어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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