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명목·실질GDP로 물가지수 구하기-

▶ 매경TEST 기출문제 716회

Q. 아래는 K국의 Y15~Y18년 명목GDP와 실질GDP 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이에 대한 올바른 설명으로 가장 거리가 먼 것은?(단, 물가지수는 GDP디플레이터를 뜻하며, 다른 조건은 일정하다.)


① Y18년 실질금리는 상승한다.
② Y15년과 Y17년 물가지수는 같다.
③ Y17년 물가는 Y16에 비해 하락했다.
Y18년보다 Y17년 실질경제성장률이 더 높다.
⑤ Y16년의 경우 채권자로부터 채무자에게로 부의 이전이 발생한다.

▶ 해설

GDP디플레이터를 구하는 산식은 `GDP디플레이터=(명목GDP÷실질GDP)×100`이다. Y18년의 경우 GDP디플레이터가 100보다 작은 값을 가지므로 물가 및 물가상승률이 하락했으며 이에 따라 실질금리는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Y15년과 Y17년 물가지수는 100으로 동일하며, Y16년 GDP디플레이터는 120이므로 Y17년 물가는 Y16년에 비해 하락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Y16년의 경우 물가 상승이 발생했으므로, 채권자로부터 채무자에게로 부의 이전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한편, 실질경제성장률은 Y17년의 경우 (100÷500)×100=20%, 그리고 Y18년의 경우 (200÷600)×100=33.3%이므로 Y18년이 더 높다.

정답은 ④
[최봉제 매경 경제경영연구소 연구원]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비새(주후 2020년 12월 26일)

제목: “축복(祝福) 받은 자의 사명(使命)”

말씀: 누가복음1:67-79절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사회: 박주성 부목사님

--------------------------------------

(누가복음1:67-79절)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74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세 가지의 감사한 것이 있다.

1.우리 은총(恩寵)과 연합(聯合)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지켜주심을 믿고 사명을 감당하는 중직자들이다.

2. 성탄축하예배만큼 들어와 예배했다.

그것이 주일예배처럼 예배해서 감사하다.

반드시 헌신(獻身)과 수고가 헌신됨을 주님은 갚아주실 것이다.

3. 권사회 역할을 잘해서 중직자들과 오랜 기간 교회생활을 감사하다. 이 세 가지가 있다.


I. 중직 자와 권사님의 역할.

첫째-권사님은 -기도의 소통, 모범이 되어야 한다. 코로나 시대 더 에너지를 내어야 한다.

둘째- 축복의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의 후예들이어서 다음 세대를 축복했듯이

중직 자들은 축복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미국에서도 장로 축복기도회가 있었다.

우리도 다음세대를 위해 축복해야 한다.

셋째- 내 인생의 소망을 주님께 드려야 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노아, 시몬 안나와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다. 기도, 소망, 축복의 소통자가 되어야 한다.

▷미혼모인 마리아는 참담한 상황에서 엘리사벳에게 찾아가서 이야기 하니 축복하는 순간 마리아는 평강을 얻었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고 평강주시고, 자연스런 어떤 패턴이 형성된다. 은혜를 받으면 기도의 소망의 축복의 소통 자가 된다. 사명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 어른들을 생각해 보면 교회 어른들은 기도의 소통 자, 소망의 소통 자, 축복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하고 사명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민수기 6:27절, 24-26절에

24 여호와는 네게 을 주시고 너를 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이게 체화가 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복지얼얼’이 되게 하신다. 매일매일 그렇게 되어야 한다. 아침마다, 손자들에게 기도해 주어야 한다. 복지얼얼을 선포해 주어야 한다.

 

민수기 6: 27절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찬송도 축복 송을 불러야 한다. 어른들은 주일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자연스럽게 체화가 되어야 한다.모든 성도들은 사명의 소통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신앙의 모형이 되어야 한다. 자신에게 느즈막에 아들을 주신 것에 대해서 특별히 오실 메시아를 위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서 메시아가 온다고 하신다.

누가복음 1:17절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그냥 자기 자식이 아니라 메시아 오심을 첩경을 예비하신다.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 목자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을 믿어야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성경 믿고도 자기 고집을 꺾지 않는 자가 많다. 보수주의자들이 그래서 잘 싸운다. 성경에 나타난 십자가를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정이다. 아버지의 심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누가복음 1:76절-77절에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한다. 첩경을 예비한다. 주님의 길을 만든 것이다. 기도, 소망, 축복, 사명의 소통자로 예비한 것이다. 영적, 믿음, 구원의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2-3절에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그가 네 길을 준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명 자가 되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마자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게 기도했다. 그것이 바로 축복이다. 인생은 기도, 소망, 축복의 사명의 소통자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다. 축복의 마음을 주고 자녀들을 쓰다듬어주면 그 축복의 말로 인해 더 크고 놀랍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 말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셔서 더욱 지키시고 축복하신다.

축복을 해주면 신앙으로 한결같이 더욱 믿음의 자녀가 되었다. 그런 삶이 가장 중요하다. 대형교회는 인물이 잘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래서 항상 그렇게 축복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해주고 세워주어야 한다. 사람은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자라야 하는데 다 잘 갖추어져서이다. 그러니 특새(특별새벽기도회)를 꼭 하게 해야 한다. 그것을 초등부터 중고등부터 다 개근하면 거룩한 고난이다. 그런 것을 지키다보면 부모의 신앙이 전수되는 것이다. 다음세대에 놀라운 결과이다.

민수기 6:27절--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결론]

누가복음 1:78-79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축복은 78절 79절에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셨다. 세상은 쉽지 않지만 이런 기도와 소망 소통으로 어두움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심을 찬양한다. 축복의 송가는 구원받은 자의 노래가 되기에

이사야 35:10절에 -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속량함을 받은 자들은 슬픔과 탄식이 다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제 의사회에서 통계가 나왔다. 종교기관에서 나온 것이 4.2%밖에 안 된다. 정부는 교회에서 다 나온 것처럼 말한다. 특별히 예배드리다가 확진 된 케이스는 없다. 무슨 교회가 난리 난 것처럼 그런다. 이것은 훈장이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이것은 기록해 놓아야 한다.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축복의 유통자들이다. 세상의 슬픔도 다 사라지며 주의 나라는 왕성 한다는 것이며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시편 107:8절-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우리 모두의 일생을 축복의 송가로 가득 채워주시길 기도한다. 그리고 축복의 송가를 기도의 제목으로 바꾸길 바란다. 1:79절을 특별히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이사야 9:2절을 말한다. 찬양이 찬양을 낳고, 찬양이 축복을 낳고, 축복이 축복을 낳고, 축복이 충만을 낳고, 충만은 다음세대를 영적으로 사모하게 만든다. 축복의 송가는 축복을 재생산하고 충만도 재생산한다.

정리하면,
마리아의 축복의 송가는 마리아의 송가는 사가랴의 베네딕투스를 낳았고, 누가복음 2장의 천사들의 영광송을 낳았다. 나중에 누가 복음 2장 시몬의 헌신의 찬양의 영광송을 낳았다. 이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패턴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권사님들은 기도, 소망, 祝福의 疏通자로 살고, 온 성도들은 사명자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위리 모든 성도들은 이 4가지 소통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뚜벅뚜벅 걷기를 소원한다. 모든 어두움과 슬픔이 사라지길 소원한다. 축복의 채널로 바꾸어 가자. 이 코로나시대에 우리가 전력투구했음을 여기고, 교회와 다음세대를 지켜 주시길 기도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기도 소망 축복 사명의 소통 자가 되게 기도해야 한다. 목자의 심정을 깨달아 평생 사명자로 살아야 한다.

 

 

 

 

 

 


[사랑의교회 3분 미라클] "천하의 왕의 귀환"(The Return of Our Cosmic King)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선물 투자때 마진콜 발동 막으려면-

▶ 매경TEST 기출문제 715회
Q. 선물에 투자한 A의 증거금 수준이 아래와 같을 때, 계좌 잔액이 1500만원이 될 경우 A가 취해야 하는 올바른 조치는?
개시증거금 : 3000만원
유지증거금 : 2000만원

① 포지션이 강제적으로 청산된다.
② 신규주문을 통해 증거금을 높인다.
③ 현금 2천만원을 추가로 입금한다.
④ 계좌잔액을 2천만원으로 회복시킨다.
계좌잔액을 3천만원으로 회복시킨다.

▶ 해설

선물계약 당시 지불해야 하는 증거금을 개시증거금이라고 하며, 일일정산 과정에서 손익을 정산한 후 포지션을 유지하기 위해 요구되는 증거금을 유지증거금이라고 한다.
평가손익이 발생해 계좌 잔액이 유지증거금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마진콜이 발동하고, 포지션 유지를 위해 추가로 증거금을 납부해야 한다. 이때 투자자는 계좌 잔액을 개시증거금 수준으로 회복시켜야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으며, 청산주문이라 할지라도 증거금을 증가시키는 신규주문은 제한된다. 만약 마진콜에 즉시 대응하지 못할 경우 거래소는 반대매매를 통해 투자자의 포지션을 청산하게 된다.

정답은 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0년 12월 25일)
제목: 성탄 축복 송가
말씀: 누가복음 1:67-79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

0.1 성경에 예수님의 ‘초림’에 대해 456회, ‘재림’에 대해 1,518회 기록되어 있다.  3배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약속대로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이, 약속대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기대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 본문해석 ]
1. 본문은 사가랴의 축복 송가, 베네딕투스(Benedictus)이다.
라틴어 ‘베네딕투스(Benedictus)’에서 ‘축도’를 의미하는 영어 ‘Benediction’이 유래했다.
-세례 요한은 아버지가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 여기서 축복이라는 원어가 유래한 것이다.

Ⅰ. 축복의 송가를 부르면 다시 살아난다
1. 고통스런 삶의 여정 가운데서도 축복하면 살아난다.
1) 마리아의 축복 송가 (눅 1:46~55)
-누가복음 1장이 축도의 개념의 내용이다.

2) 마리아가 엘리사벳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순간(눅 1:42) 그녀의 영혼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눅 1:46).
여기서 그 유명한 ‘마그니피카트(Magnificat)’가 나왔다.
• 누가복음 1:46, 47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2.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을 찾아가 축복을 선포할 때 수많은 영혼들이 치유받게 된다.
1) 힘든 상황에서도 축복을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3. 욥은 친구를 축복함으로 축복의 수혜자가 되었다.
• 욥기 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4. 축복 선포의 말씀이 체질화되어야
• 민수기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 누가복음 10:6,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 다른 사람을 위해 축복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항상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Ⅱ. 축복을 하기 위해서는 충만해야 한다
1. 9개월 동안 사가랴의 입술이 닫혀 있었지만, 대신 ‘찬양 충만’, ‘성령충만’으로 ‘마음의 입’이 열렸다.

• 로마서 15: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2. 67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간구함,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신다. 평강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신다.

민수기 6:27절에 복을 준다고 하신다. 어려운 사람들, 안통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누가복음 10'6절에도 평안을 구해주고 내 마음에 안든 사람일지라고 축복해 주어야 한다.

직장을 위해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힘든 상황에서도
축복해 주길 바란다. 자녀들에게도 그들의 영혼에도 골수에 새겨지도록 축복하고 기도하라. 살아나고 기적이 일어남을 확신하여야 한다. 전제 조건은 충만함이다. 본문에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잉태를 주신다. 가브리엘 천사가 사가랴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의 간구함을 들린다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때에 따라 응답하신다. 하지만 늙었는데 무슨 아기냐고 한다.

그렇지만 9개월을 기다리라고 하신다. 엘리사벳이 잉태하지만 믿음이 충만하도록 하신다. 사가랴가 벙어리로 하나님은 만드신다. 그것은 내 말을 믿지 않으신다고 하나님께서 믿음의 용량이 찰 때까지 기다림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주 안믿어도 응답하신다. 그러나 믿음의 용량이 차도록 인내하신다. 이제 9개월 뒤에 요한이 태어나게 하신다. 엘리사벳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아빠 사가랴가 입이 열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데,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서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백성을 속량하시고 구원을 주신 것이다. 남들을 축복하려면 믿음이 충만해져야 한다. 믿음과 성령이다. 사가랴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자였다. 그에게 다만 성령이 충만하지 않았다. 우리 성도들도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분들도 있다. 믿음이 약하고 성령 충만이 약하면 모두가 부족하니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사가랴와 엘리사벳과 세례 요한도 성령 충만이 된 것처럼, 믿음 충만, 성령충만 기쁨 충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
나의 영을 나의 자손에게 나의 복을 모두에게 충만한 은혜가 넘치도록 축복하기를 바란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충만을 받도록 해야 한다.

-로마서 15:29-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바울은 이야기 한다. 이 성탄에 성령충만을 받아서 가족과 형제 지인에게 나누기를 바란다.
사가랴의 베네딕투스를 재생산이 되었다.  형제 자매들이 아브라함의 축복을 믿고 그렇게 축복하고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 요약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 ( 1:67-79 )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은 잘나고 권세 있는 자, 교만한 자를 결코 긍휼히 여기지 않으으신다. 오히려 비천하고 못난 자, 겸손한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그래서 사가랴는 그 백성을 속량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구원하신 사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신앙의 부모는 자녀들이 주님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Ⅲ. 축복을 받은 자의 사명
내일 새벽에 나누어야 한다. 오늘 너무나 코로나 상황중에 소중하기에 충만한 말씀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6시15분 나누기를 바란다.

1.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

• 누가복음 1: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2. 참된 성탄의 은혜는 주님의 재림의 그날을 사모하고, 깨어서 기다리며,
기도하면서 준비하는 마음을 각성하는 데 있다.

3. 당신의 자녀를 축복함으로 주의 재림을 예비하라. (민 6:27)

[ 결 론 ]
1. 축복은 저주를 물러가게 하고 우리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

• 누가복음 1:78, 79 “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 이사야 35: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 시편 107: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 2000여 년 전의 ‘첫 노엘’이 2000년 후의 코로나 시대의 ‘뜻 깊은 노엘’로 재현되기를



                       ★ 주일예배(주후 2020년 12월 25일)"성탄 축복 송가"(오정현 목사님)-사랑의교회 ☆















 

 



        ★ [사랑의교회] 나는 찬양하리라/참 반가운 성도여/예수 우리들의 밝은 빛/내 구주 예수님/기쁘다 구주 오셨네 ★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수요예배(주후 2020년 12월 23일)

제목: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
말씀: (레위기 10:1-7절)
설교자: 전승현 부목사님. 
--------------------------------

성경 말씀을 읽다보면 성경에는 참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볼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이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또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가르치시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에 때로는 은혜보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은혜보다 마음에 큰 부담감이 있을 때가 있다. 말씀을 읽었는데 말씀 가운데 편치 않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큰 찔림이 있다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오늘 본문 레위기 10장 1-7절은 개인에게는 은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음에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담감과 불편함이 있다. 오늘 말씀에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나답과 아비후이다. 나답과 아비후라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나답과 아비후가 이스라엘  열 두 지파 중에 그냥 평범한 히브리인이 아니었다. 그 12지파 가운데에 13개이지요. 12지파에 속하지 않고 따고 구별되어 있던 레이지파에 속했던 사람이고 또 이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님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즉사를 당한다. 그 자리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죽게 한다. 너무나도 끔직한 사건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3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씀은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사장인데 성막에서 거하면서 주의 일을 감당했던 자들이다. 하나님과 가까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타깝고 비참한 현실인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으며, 도대체 나답과 아비후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말을 듣고 죽임을 당하게 될까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코로나로 말미암아서 성전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우리 말씀을 통해서 반면교사 삼고 은혜 나누는 이시간 되기를 바란다.

첫번째-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분별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오늘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듣지 않았기
때문이며 잘못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절에 ~~
- 짧은 한 절의 말씀인데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한 3가지가 
살펴볼 수 있다.

1. 나답과 아비후가 분양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주의 일을 감당했던 제사장은 맞지만 제사장이 감당해야 할 일과 감당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분양단에 분양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제사장에게
맡기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맡기셨냐면 바로 아버지인 아론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대제사장이 할 일인 일을 월권을 하여서 하였다는 것이다.

2.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향로ㄴ를 옮기는 것은 정금으로 만든 그릇인 향로가 따로 있었다.
. 그런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무런 그릇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져다가 이 불을 
옮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잘못된 모습이다.

3.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분향단에 분양을 할때에 번제단에 불을 향로에 담아다 성소에 들어가 그 분향 단으로 분향을 해야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 번제단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기 집에서 그냥 쉽게 볼 수 있는 불 종류를 하나님 앞에 분향을 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불이 나와 그들을 불사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왜 나답과 아비후가 왜  이러한 실수를 했을까요??? 늘 본문에 10장에 보면 8장 9장 10장이 이어져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일을 하찮게 여긴 것이다. 어찌보면 책무를 담당해야 하는데 거기에 메너리즘에 빠져서 지금 실수를 했을까요? 그렇지 않다. 8장에서 아론의 아들들이 위임식을 제사장들의 위임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제사장직을 받았을 때, 그들이 그 에봇옷을 입은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 저역시 10여년 전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서 머리에 안수를 받고 목사 가운을 받았을 때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무엇이관대 
목사로 나를 세우셨느지요? 했다. 주의 일을 감당을 하게 하심을 목숨을 다해서 하겠다고 결단했다. 나답과아비후는 잉크도 마르지 않았던 순수한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메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실수로 이렇게 됐을지를 9장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성막도 짓고 여러 성물들도 만들고 세사장 위임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나서 레위기 9장에서 첫 제사를 드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첫 제사를 드리는데 그 감격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어떤 제사보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던 제사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종살이 후 출애굽하여 처음으로 드렸던 제사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서 십의 광야에 있을 때에 아픔이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특죄하게 된다.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다.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시게 된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속에 그러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우상을 만들었는데 행여나 하나님께서 이 광야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까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들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혈육들이 죽어갔던 슬픔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 두려움과 슬픔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9장 하반절 23-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제사를 드렸던 그 제사를 흠향하시는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기뻐한다. 두려웠던 것 그리고 슬펐던 그 모든 것들이 이제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순간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베풀었겠는가? 아마도 축제를 벌렸을 것이다. 그리고 축제를 하면 빠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아마도 술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술을 많이 마셨던 것 같다. 10장 이후를 보면 아론과 아들들에게 주시는 주례이다. 9절에 -이 나답과 아비후 외에 동생들도 같이 술에 취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는 것에 열심은 있었던 것 같다. 그들 나름대로 아버지가 해야 될 일들을 그들이 대신하였고, 그리고 향로를 하나님 앞에 드릴 성물 향로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불을 가지고 분향을 해야 되는데 그들 나름대로 열심을 있었으나 분별을 못했다. 술취함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대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특죄를 하게 되고 하나님이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10절에 말씀하신다. - 나답과 아비후는 술취함으로 거룩함을 분별하지 못했다. 그 거룩함을 분별하지 못했기에 결국은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라고 말씀 하신다. 우리는 거룩하고 속된 것이 서로 반대의 개념, 상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과연 속된 것이 무엇인가? 거룩함을 알기 이전에 우리가 속된 것을 살펴보면, 히브리어 원어를 보게 되면, 이 속된 것으 하울이라고 말한다. NIV 영어 성경에는 이 속된 것을 무엇이라고 하냐면 COMMON이라고 표현한다. 바로 일반적인 것이다. 흔한 것, 평범한 것이다. 그 거룩이란 말씀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그 거룩의 반대의 개념은 추하고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 속된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아니한 그 불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분향했다. 그들이 가져간 번제단에 있는 불과 그들이 가져간 불이 화학적, 물리적으로 차이 있었겠나? 우리가 보기에는 같은 불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래요. 우리의 삶도 그렇다.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어떠한가?

우리의 모습도 세상 사람들고 별반 다르지 않다. 똑같이 먹고 자고 또 일하고, 학생들은 똑같이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룩함을 나타내야 될 거룩한 모습은 무엇이고, 우리가 분별해야 할 거룩함이 무엇인가? 우리는 때로 그 거룩함에 대해서 그 거룩함을 너무 작은 의미로 축소하기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생활이라 알면 우리는 하루 24시간 가운데 그렇게 기도하고 말씀보고 찬양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체 10%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머지 그 90%는 그저 세상에 속해 있는 우리의 모습인가이다. 아니다. 우리가 분별해야 될 거룩함의 모습은 바로 그 가운데 우리의 삶의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무슨의미이냐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모습은 같지만, 그러나 삶의 방향과 목적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같이 먹고 마신다 할지라도 그 건강을 위해서도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이 식물을 통해서 건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모습, 그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이라는 사실이다. 거룩이란 것이 고귀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주어진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려가는 모습이 바로 거룩함이다. 바로 분별하는 모습이며,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모습이다.  교구에 안수집사님과 권사님은 사랑부를 섬기시는 분이 계시다. 그 두 분을 심방하면서 여쭈어 본 기억이 있다. 그때 두분은 대답하신다. 목사님, 그 사랑부를 통해서 더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새 힘을 얻는다고 대답하셨다. 몸에 육신에 연약함을 가진 자들의 지체들을 돌보는 것이 힘들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분은 말씀하신다. 최소한 사랑부 지체들이 육신의 장애는 있을지 모르리만 예배 드리는 순간 만큼은 그들이 비장애인이고 내가 장애인임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한다.  사랑부 지체들이 찬양을 할 때에 하나도 맞지 않지만, 화음이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부부는 목청껏 찬양하게 된다. 하나님을 부르짖는 그 지체들을 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외치는 것을 너무 간절히 느끼게 되었다. 거룩이 그렇다. 어떤 것으로 좋은 것으로 꾸민 것이 아니다. 부족해도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바로 거룩함을 분별한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그것을 분별하지 못했다. 물론 술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기 못했고, 하나님을 결국 가까이 하지 못했음으로 말미암아 그 앞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둘쩨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그것은 하나님의 나에게 맡기신 관유를 수행할 수 있는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7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 즉~~ 획막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
모세와 아론과 그의 두 아들은 죽었고, 세 번째, 네 번째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주는 말씀이다. 너희에게 관유가 있은즉 회막에 머물라고 명령하시고 있다. -바로 관유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리브 기름에 향유와 몰약 계피를 섞어 만든 기름이다. 그리고 이 관유는 성막에 성물에 바를 때,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세울 때에 사용한다. 머리에 부은 것이 관유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었지만 성경에서는 이 관유를 함부로 만들면 죽임을 당한다고 말씀한다. 관유는 오직 제사장들만 만들고 관리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모세를 통해서 아론과 두 아들들에게 그러니까 조카들에게 말하고 있다. 명령한다. '관유가 있은즉' 사랑하는 아들, 사랑하는 형이 두명이나 죽임을 당했다. 슬펐을 것이다. 본문에 6절에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에게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한다.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을 못하게 하신다. 슬픔을 이기라고 한다. 그 이유는 관유가 너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각자의 관유가 있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말씀으로 그 관유가 섬김의 자리이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책이 될 수도 있다. 또한 훈련생들에게는 훈련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관유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이나, 여건으로 말미암아서 그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것, 내 목숨을 다해서 감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나아가는 제자되고 자녀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기어해야 한다. 슬픔조차도 이기라고 말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셋째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어떤 자인가?
-앞에 두 말씀을 뒤집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어린 자녀들을 보면, 엄마 아빠 곁을 떠나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아빠엄마 껌딱지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 아이가 엄마아빠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아빠가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언제나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당연히 믿지요. 때론 우리가 삶 가운데 의심을 할 때가 참 많다. 우리가 이틀 뒤면 성탄절을 보내게 된다.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가?, 독생자 예수, 성자 하나님이 그 육신을 이끌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성탄이다.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하신다. 하ㅏ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그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성자되신 성육신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역하셨던 모습을 보라. 예수님이 먼저 제자들을 찾아가시고 예수님이 먼저 죄인들을 찾아가시고, 예수님이 먼저 병든자와 약한 자를 찾아가셨다. 가까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삭개를 봐도, 수가성 여인을 봐도 알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성경을 통해서 다 살펴볼 수 있지만 요한 복음 21장에게 나와있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사건이 하나님이 예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계신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그 사건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을 베드로가 모른다고 했는데도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사랑하냐고 하신다. 세번의 질문을 하시고 계신다. 뒤끝 장렬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 예수님은 인격적이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1장 15절에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하시는데 조반 먹은 후의 시간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침을 차려주시고 말씀하신다. 그 질문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이 질문을 식사전에나 식사 중간에 했다면 베드로가 어떠겠는가?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혼낼때는 혼내시더라도 먹이고서 혼내심을 본다. 인격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 우리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 번을 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해서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듣고 기록해 놓았는데,,, 그저 아람어에서 헬라어로 옮긴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서로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아가페와 필레오로 쓰고 있다. 아마도 다른 단어를 쓴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 대화했던 의미와 의도가 달랐음을 보여주고자 다른 단어를 썼다고 여겨진다.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세번의 질문을 하는데 그 질문은 동일하지 않다.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냐고 하신 것이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이 비교 선상에 올려놓고 한 말이 아니다. 바로 베드로를 올려 놓고 있다. 베드로에게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많이 따라왔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바로 너인 베드로라고 질문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냐고 하신다. 그때 아가페라는 말을 쓰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다. 결국에는 이 질문이 "베드로야 그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는 자는 바로 너이겠지?"라고 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하냐고 질문하신다. 베드로는 대답에 필레오로 하고 있다. 친구를 사랑하듯이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신다고 말하고 있다. 두번째도 앞에 나온 조건이 빠지고 아가페로 하신다.

그때 베드로는 필레오라는 것을 대답하며 친구를 사랑하듯이 말한다. 세번째는 아가페로 질문하시지 않는다. 이제는 필레오로 질문하신다. 네가 친구처럼 정말 사랑하냐고 하신다. 그때 베드로가 다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신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엇을 질문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하고자 질문을 하셨는가? 깨닫게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해보면 어떤가? 내가 사랑한 만큼 그렇게 해주길 원한다. 그것은 대단히 개인주의적이다.  사람이 하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사랑 중에서 절대적 사랑은 바로 부모의 사랑일 것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할 때 자녀들이 사랑을 하지 않아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생명도 바칠 수 있다. 자녀가 나를 위해서 생명을 위해 바치는 자는 없다. 자녀에게 내가 그 만큼 사랑한다고 알아주라고는 할 지는 모르지만 동일하게 사랑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질문이 너도 목숨도 아끼면서 나를 사랑하라고 강요하시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3번의 질문을 하신 것인가? 목사님의 딸이 4살인데 아빠가 나를 좋아하냐고 한다. 너무 자주하면 장난이 치게 된다. 아니 안 좋아 한다고 했더니 다시 말해 보라고 한다. 결국은 대답은 좋아하는데 조금 좋아한다고 대답했더니 나는 아빠를많이 좋아한다고 대답한다고 한다. 다시 요한 복음을 묵상하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질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것인가? 지금 갈릴리 바다에서 그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는가? 세번이나 부정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고 할때, 예수님은 사랑하냐고 질문을 하신다.

그 질문이 아닌 예수님은 모두의 질문이 아닌 고백이다. '베드로야 나는 너의 친구란다' 하시는 것으로 묵상되었다. 너를 가장 사랑한다고 하신다고 하신 말씀으로 여겨졌다. 그 이후에 모습을 보면 베드로가 에수님께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아오셔서 만져주시고 만나 주시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멀리 계신다고 느껴져도 주님을 만나겠다고 하면 돌아서는 그 순간 주님이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심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것을 믿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이다.

요약
-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 즉 제단에서 사르는 불이 아닌 다른 불로 분향을 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들은 직무를 다하려는 열심이 있었지만 잘못된 신앙관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봉사도 나 자신의 판단이나 경험에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과, 명령에 따라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불이 삼킴으로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 이처럼 영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제사를 소홀히 한 죄는 중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아론은 두 아들의 죽음 앞에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현재 벌어진 사건을 묵묵히 인정했다. 우리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닥칠 때에도 그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의 손길을 인정하며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 믿음이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코로나로 인해 부활절, 성탄절을 모두 현장예배를 못드리고 있다. 하나님 전에 나아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을 사랑했는지를 생각해 보고 낙망하지 말고, 그러한 삶가운데 주님은 함께 하심을 말씀하시고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상황을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도록,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살아계신 한 분만을 붙잡는 자 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감사하며, 많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무리 되어지는 이 시간들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나아갔는지 회개하게 된다. 그 가운데 주님 앞에 부족하지만 이 말씀으로 기억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자 되기를 사모하며 주님이 항상 먼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찬송하며 예배하기를 기도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거룩하게 살아야 하고, 이 어려운 코로나 시기에도 주님과 늘 가까이 하여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해 내어야 한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