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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17일)
제목: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다"
말씀: 마가복음 1:7--11절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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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온전함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마음 뺏기지 않겠습니다! 라고 외치시길 바라며, 오늘 본분은 마가복음이다. 오늘은 사순절 25일차 날이다. 사순절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념하고 참회하면서 기다리는 주간이다. 그래서 40일 전부터 사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40일의 시간을 기념하여서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을 가르쳤고, 십자가의 신앙을 가르쳤다. 그렇게 사순절이 지나고 난 후에 그가 정말 예수님을 향한 그 십자가의 고백을 하면 세례를 베푸는 풍습이 사순절에 있었다. 사랑의 교회 우리도 예수님을 사모하면서 4월 4일 오후 4시에 부활절 연합예배를 우리는 이 교회에서 사모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더 온전해지는 그러한 기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마가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하였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전파한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세례 요한이 모든 백성들에게 은혜의 길을 두 가지로 전파했다.

 

l. 하나님은 겸비하여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의 길을 주신다.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자복하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을 향하여 그것을 돌릴 때에 기뻐하신다. 세례 요한의 첫 번째 전파는 자복하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것이다.

 

상상해보면, 세례요한이 엘리야처럼 옷을 입고 광야에서 외친다. 회개하라!, 죄를 자복하라!, 그리고 세례를 받으라고 한다. 세례요한의 모습이 굉장히 영향력이 있고,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것 같다. 요즘 길거리에 확성기를 켜놓고 외친다. 그러나 아무도 그 소리에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당시 확성기도 플랭카드로 어떤 홍보도 없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요단강에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있다. 그 사람들 중에는 갈릴리, 에브라임 산지, 욥바, 가이샤랴 등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광야를 지나서 요단강에 모였다. 이것이 얼마나 엄중하고 무거운 선택인가? 걸어서 왔다. 요한의 외침, 회개하고 자복하고 세례를 받으라는 말 앞에 선택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고 마음의 결정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지 않습니까? 이 물세례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사람 편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결단을 할 수 있는 행위, 그 은혜의 길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우리가 세례하면, 물로 세례를 주신다. 세례는 씻는 예식이다. 이 세례를 뜻하는 말은 베티죠는 완전히 적셔지는 것이다. 완전히 가라앉는 것이다. 완전히 담그는 것이다. 세례하면, 담임목사님이 물을 듬뿍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신다. 세례라는 것은 실제로는 완전히 가라앉는 것, 완전히 적시는 것, 완전히 담그는 것, 식빵을 우유에 완전히 담궈 보았는가? 담궈서 꺼내면 먹을 수 없다. 녹아버린다.

요한의 세례는 죄에 빠진 인생, 그리고 죄에 젖어 사는 인생을 향하여서 나와라, 새 출발해라, 그리고 하나님께 빠지라고 외치는 것이다. 세례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새 출발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왔다라는 것은 어떤 말씀인가?

(양목사님은 낙동강에서 세례를 목사님은 받았다고 한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세례를 묵상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은혜의 길임을 묵상할 때에 이 시간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자복하라고 하면, 아마 제일 먼저 받을 것 같다. 또 잠기고 잠겨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나아가는 은혜가 임할 때까지 받을 것 같다. 이 사순절 가운데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은혜의 길을 걷기를 축복한다.

 

2.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면 새 생명을 얻는다.

세례 요한이 두 번째로 외친 것은 바로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 베푸시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 곁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물세례를 받고 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는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그 분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사람들은 돌아갔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언제 그분이 오셔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베풀어 주실까? 언제 그분이 오셔서 성령으로 푹 담궈 주실까를 기다리면서 그곳을 떠나지 않고 여러 날을 세례요한의 곁에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9절에 보면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 곁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성령이 그들을 잠구실 그 메시아! 그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에 제자들의 무리가 없었다. 예수님은 목수셔서 아마도 멋있는 옷을 입고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늘 마가는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세례 요한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동일한 맥락에서 이사야가 소개하는 예수님, 이사야가 소개하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인지 이사야 53장 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사야 52: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요한복음에는 세례요한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그러니까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세례요한조차도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리고 두 번이나 표현한다. 세례요한도 성려께서 지시한 바가 없었으면, 자기 앞에 오셔서 세례 받으시는 예수님이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 분임을 몰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직접 갈릴리에서 요단으로 내려 오셨다. 아무도 주목하는 사람이 없고, 수많은 사람들과 줄을 서서 세례를 받으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시기에 죄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으시다. 그러니 세례를 받을실 필요가 없으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세례 받는 그 대열에 서 계시고 요한 베푸는 그 세례를 받으셨다. 요한은 그의 신발 끈도 풀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분에게 예수님은 직접 나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같은 대열에서 세례를 받았을까?

 

※어느 성경학자의 설명을 보니,
‘하나님이 사람 되신 자체가 겸손의 표징이다. 궁중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수도가 아니라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우리의 내면은 마구간 같이 매우 지저분하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보여드릴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가난하고 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세례는 이와 같다. 예수님이 요단 강에에 섰을 때에 하늘이 열렸다. 요단강에서 요한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요단 강물은 사람들의 죄로 가득 채 있다. 사람들의 죄로 가득한 요단강 물에 그 죄를 씻은 강물에 예수님이 적셔졌을 떼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목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 세례를 지켜보았고,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나올 때에 하늘에서 하늘의 기쁨을 선언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시며 기뻐하신다. 왜 예수님의 세례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가? 왜 예수님의 세례를 사랑스럽게 보시는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까 세례요한이 외친다. “보라 세상 짐을 지고 가신 어린 양”이라고 외친다.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예수님의 세례는 또 다른 얼굴이다.

※다른 교역자가 나누신 말씀 중에 레위기 16장에 대속제 일에는 검은 염소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린다. 한 제사이다. 두 마리의 염소를 가지고, 한 마리는 아사세일=완전히 제거한다. -아사세일 염소에게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다 지워가지고, 광야로 내어보낸다. 그리고 낭떠러지로 몰아내 죽게 한다. 죽음으로써 백성들의 죄를 소멸하는 제사양식이다. 또 한 마리의 염소는 피와 기름, 고기까지 완전히 태워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다. 대속제일의 이 제사의 고기는 제사장이 먹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무 더러워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만이 그 죄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죄가 너무 더러워서 먹을 수 없고, 하나님만이 백성의 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찔렸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고,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분의 설명이 아픔을 느끼고 왈칵 쏟아지는 눈물이었다. 담임 목사님이 사용하시는 말씀 중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영단번이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백성의 죄를 덮어쓰고 나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기쁨이 거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사건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백성들의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담당할 수 있는 그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로마서 8:4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모두 예수님에게 그 죄를 전가하시고 그 육신과 함께 죄를 멸하실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가 죄를 담당하는 어린양이시기에 그가 지금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다. 그분은 우리 곁에 서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곁에 서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우리를 적셔주신다. 이 저녁에 이 예수님을 우리가 가까이서 만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우리는 온전함을 사모하며,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기억하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면서 예수님은 영단번에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가 받는 회개의 세례를, 우리를 깨끗케 하시려고 그 대열에 서서 함께 그 몸을 담그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제자의 삶을 살도록 은혜를 주시려고 성령으로 우리를 담그기를 원하신다. 그는 항상 우리 가까이 계신다. 이 주님 앞에 우리의 연약함과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길 바란다. 우리의 연약함을 회개하며 슬퍼하고 그분 앞에 주님께 기도하자. 나는 생수가 필요하고 나는 목마름을 고백하자, 내 힘으로 안 되는 그것을 주의 성령에 푹 담구어 주시길 사모해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은 지금도 영단 번에 은혜를 우리에게 채우시고 만나주시고 우리를 성령으로 담구실 줄 믿는다. 우리 그리스도로 정결케 되길 원한다. 이 시간 감사의 겸손의 마음으로 엎드려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복음의 능력을 주시며,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가족, 형제, 이웃들에게 사랑의 선포 자가 되어야 한다.

 

♣요약
겸손히 세례를 받으신 주님을 본받아서 우리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겸손과 섬김을 닮아서 실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완전한 사랑을 날마다 깨달아서 우리의 삶이 새롭게 회복되어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지상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는 믿음의 자녀로서 가족,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자 되어야 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분은 너무도 고귀하다. 그리스도가 너무 숭고하고 위대한 분이셨기에 세례 요한은 스스로 굽혀 그의 신메(신발끈)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7절)고 생각한다.
둘째, 그리스도는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이시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8절)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그리스도는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위대한 약속을 하신다. 즉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은 자기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세례 의식에 순종한 모든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서, 이 방법은 개종자들이 회개와 개혁으로 자신들을 정결히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사하여 거룩하게 만드신다는 징표가 되었다.

 

세례 요한의 성공적인 전도 및 세례를 통해 받아들인 제자들 속에서 복음교회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광야에서 세례를 주었지만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요한의 제자가 되어 그의 규율을 따르게 되었는데 세례 요한은 그들이 죄를 고백했다는 징표로서 그들을 자기 제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후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들이 되었는데 이것이 곧 겨자씨 한 알이 큰 가지로 됨과 같은 것이다. 이 본문은 예수의 세례와 시험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예수가 오랫동안 나사렛에게서 이름 없이 살아오다가 공생애로 들어가게 된 최초의 사건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일이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나온 것을 볼 때, 그가 얼마나 하나님께 겸손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하고 흠 없는 분이지만 자신이 더러워지기나 한 것처럼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자 하나님은 예수께 아주 놀라운 영광을 돌리셨다. 예수께서 하늘이 갈라짐을 보셨다. 이로써 그는 하늘에서 내려 온 주님으로 인정받으셨다. 이 말을 마태는 '하늘이 (그에게)열렸다'(마 3:16)고 했으며 마가는 '하늘이 갈라짐을 보시더니'라고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도 하늘이 열리지만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셨다. 이 말에 대해 초대 교회에선 일반적으로 한 줄기 찬란한 빛이 예수가 있는 곳을 비추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들으신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그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용기를 주려는 뜻이었으므로 본문에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11절) 이라는 예수께 하신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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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3월 14일)
제목: ''마음 지키기''
말씀: 사도행전 13:21~23절
기도: 홍진귀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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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21~23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온전함을 사모합니다~~!!!. 온 사, 다섯 번째 마음 지키기이다.

지금 코로나 이후에 어떤 교회가 살아남나? 어떤 기업, 어떤 학교가 살아남느냐의 관심이 많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살아남는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이방선교사로 파송 받고 안디옥이라는 곳에서 첫 번째 메시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아주 기름 부음이 있는 강력한 성령 충만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 메시지 가운데 다윗에 관한 표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행 13:22절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마음에 맞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주신다고 하신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했기에 우리도 예수님이 구주임을 깨닫는다.

*행 13:22절 -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이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을 통해 구세주가 나시고, 다윗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다윗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다윗으로 인해 예수님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가 있다는 뜻이다.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심정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어야 한다. 다윗을 깊이 깨달았을 때 22절에 다시 한 번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다는 것을 좋아하시며, 하나님이 찾고 찾았는데, 다윗을 만났기에 하나님이 너무 기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안테나, 하나님의 채널에 맞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오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가정 누구누구 할 때에 우리의 이름이 나오길 원한다. 다윗은 문문의 달인이었고, 정말 그가 시를 쓰면 세익스피어와는 비교가 안 되며, 그런 대단한 왕국을 형성한 사람이었다. 다윗은 장군이며 문학예술에 능했다. 다윗도 인간이니까 나약하고 범죄도, 어리석음도, 음부 속에 빠진 적도 있었다. 인간적으로 부족했고, 한없이 배신도 겪었으며, 배신의 골짜기에서 통곡할 때도 많았다. 놀라운 것은 다윗의 생애를 마무리하면서 다윗은 역대상에 이렇게 말씀한다.

*역대상 29:28절에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의 끝이 좋았다는 것이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finish well’이다. 온전함의 시리즈로 말하면, 온 사(穩思) (온전한 사모함)-가면 갈수록 온전해졌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온전해졌다이며, 구약에서는 샬롬이다. 다윗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샬롬의 경지에 올랐다 점점 온전해졌다. 샬롬이라는 말을 BDGA란 사전에 온전함으란, 완전함이 있고, 건강한 몸이 있고, 평화와 고요함이 있고, 만족하고, 전쟁을 다 극복하고, 더 이상 분쟁이 없다는 뜻이고, 조화로움, 올바름, 평화의 독특한 경지에 올라갔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의 생의 마지막의 이 샬롬의 경지, 어떻게 그의 생의 마지막에 온전함과 점점 더 온전해졌는가? 그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의 인생의 문무의 출중함과 예술 감각의 뛰어남 그것 때문도 아니고, 압도적 언변과 카리스마 같은 리더쉽과 모든 정치적 판단과, 모든 지도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아니다. 딱 하나다. 다윗이 마지막 샬롬의 경지에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켰기 때문이다.

 

좋고 나쁜, 인생의 골짜기에서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켰기에 샬롬이 이유가 되었다. 마음을 지켜서 살아남았다. 오늘 우리 코로나 시대에 마귀의 작전 중에 하나가 우리 마음을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우리의 마음을 못 지키게 하고 있다. 마음을 지키기 보다는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이 요즘 더 많다. 내 고집, 프라이드 내 신념을 지키라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마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목자의 심정, 하나님이 주시는 그 마음을 지키라는 것이다. 마음과 중심이라는 말씀이 870번이나 성경에 나온다. 성경에 나타나는 마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선택과 결정을 좌우하는 인격의 중심이다. 요새는 이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잘 안 드러나니까 어른들을 잘 섬기었다. 그러나 다락방에도 순장님에게 마음대로 자기 고집을 내세운다. 요즘 코로나 이후에 건강을 지키려는 마음이 많아졌다. 부동산, 주식 광풍 등으로 재산 기키기에 난리이다. 그런데 재산, 건강지키기의 상황 가운데서 마음 지키는 것이 백배나 중요하다.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화장실을 내 힘으로 죽을 때까지 스스로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마음을 빼앗기면 다 빼앗긴다. 다윗의 특별함은 모세는 홍해, 광야의 기적 등으로 엄청난 기적이 많았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여호수아 태양을 멈추고 머무르게 하는 기적들이 많았다. 엘리야도 기도하니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기적이 있었다.

다윗의 생애에 물맷돌 외에는 기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는 마음을 지킨 게 기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66권의 성경의 장수를 할애를 했다. 그 이유는 특별한 기적이 없었어도, 다윗에게는 수많은 우역곡절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지켰기 때문이다. 마음 지키는 것이 소중한 것이다. 21세판 기적은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온 성도들이 주님 앞에 서는 순간 다윗처럼 샬롬의 경지를 누리길 소망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before와 after이 잘 정리되길 바란다.

 

다윗은 어떻게 마음을 지킬 수 있었는가?

첫 번 째: 다윗은 형들에 비해 외로움과 고독이 있었다.

다윗은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는 훈련을 시켰다.
사무엘이 아들을 고를 때 무 존재로 무시당한자로 들에서 양을 치며 고독을 견디었다. 광야의 냉기와 더위를 참으로 이겨냈다. 사자 ㆍ곰의 위협을 지키기 위해 철저한 견고한 고독을 이겨냈다. 황량하고 쓸쓸하고 억센 고독이었다. 그곳에서 다윗은 목자의 심정을 깨닫고 사자와 곰들에게서 지켜냈고, 목자의 심정을 평생 거기서 배우고 마음을 지킬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고독의 문제는 무엇인가? 방을 함께 써도 고독할 수 있다. 직장도, 이곳에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잘 만 다루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 마음을 훈련하고 마음을 지키는 데에 참으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고독의 문제에서 표현을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에 부엉이와 참새와 같다고 했다. 고독의 대명사이다. 그 고독을 통해 훈련을 하니 시편 62:5절을 말하고 있다.

 

*시편 62:5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그 고독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게 되고 깨닫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의 시각을 깨닫고, 마음이 청결해진다. 고독하면 마음이 청결해진다. 온갖 오염으로 마음을 온통 더럽게 하지만, 왜곡을 시키고 우리의 마음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지만, 하나님께 눈이 열리면, 우리의 흐려진 마음을 청소해 준다. 깨끗한 창문을 통해 깨끗해지면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마음을 지키는 데는, 주님이 주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이 주인이 되시면 마음의 질서가 잡힌다. 그 혼돈된 마음이 정리된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 지는 곳은 고독현장에서 청결해진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에게 철저한 고독을 준다. 엘리야는 나만 남았다고 한다.

바울은 삼 년 동안 외로운 고독을 마치고 왔는데 사람들이 바울에게 네가 무슨 사도이냐고 했다. 그런 식으로 바울을 힐난했다. 바울의 고독도 엄청났다.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고독은 내적인 공허와 우울증(憂鬱症)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신앙인의 고독은 하나님에 대한 눈이 열리게 된다. 주님의 심정을 깨닫게 된다. 주님을 바란다는 것은 마음의 주인은 주님 밖에 없다고 고백하며, 내 마음의 질서가 잡힌다.

 

*마가복음7:21~23 -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의 마음이 오염될 수밖에 없듯이, 철저하게 고독 훈련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고 내 마음의 질서를 잡게 된다. 하나님과 이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질서가 올바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정리가 된다. 다윗은 고독한 시간에 물맷돌 던지는 훈련을 하고, 고독한 시간에 하프와 음악으로 시를 쓰고, 양들을 키우면서 목자의 심정을 키웠다. 결정적인 순간에 싸울 날을 위해 예비한 것이다.

 

*잠언 21:31절 -31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통해 배워서 솔로몬이 기록한 것이다. 고독의 순간에 마병을 다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마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시대는 우리 마음 지키는 힘든 시기가 되었다. 이 코로나 시대에 수많은 고독들을 잘 감당하고, 마음을 지켜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번째는
*사무엘상 16:13-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이 날은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은 날이다. 다윗이 왕으로서 사명을 받은 날이다. 다윗의 생애에 가장
Divine momentum(신성한 추진력)이며, 다윗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었다. 저 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명 받은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임을 뜻한다.

-기름붇고(17세) 대관식(37세)까지 20년이 흐른 뒤에 정식 대관식이 된 것이다.
-사명을 깨닫고 집중한 것이 마음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과 왕의 소명

사명의식이 마음지키기
-사명의식 임재의식
- 사명이 목숨보다 중요하다.
Devine momentum

전체 12지파 왕이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이미 사무엘상 16장에서는 사명 받았다. (allreay) 이미 대관식을 받았지만, 왕 될 것은 아직 Not yet이었다. 그 기간 사이에 그 마음을 어떻게 지켰겠는가?

나는 사명 받은 자라고 한다. 성령의 능력이 임했고, 우리도 주님 만나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모두가 사명 받은 자가 된 것이다. 성령 받아서 하나님과 구세주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세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신 것이다. 영혼을 위해 살라고 한다. 신비한 존재이니 이 땅에 것을 바라지 말고 영혼을 위하여 투자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마다 말씀과 찬양과 사명, 성령의 영감을 통해 매주일 영적인 대관식(coronation)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다윗은 수많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다윗은 마음을 지켰다. 사명의식, 청소년 시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사명)을 받은 것이 평생의 결정타이다. 말씀을 가지고 영혼을 섬기면, 온전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임재의식
-다윗이 가장 두려웠던 것..하나님이 떠나는 것이었기에...
사명의식 + 임재의식 -> 예배자로.. 믿음의 용량이 커지는 것이다. 영적 대관식, 사명자로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지킬 것인가?

오직 한 번뿐인 인생 속히 지나가리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길만이 영원하리라.-The only once life will pass quickly.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면, 내가 무엇을 못할 것인가? 그 사명감이 영적으로 어떤 계기(Divine Moment)가 된 것이다. 그 때 영적인 계기가 나에게 탄력이 된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마음을 지키게 하심을 우리는 감사하다. 영원한 것을 지키는 것이 영적 대관식이다. 외로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싸울 날을 위해 마병을 예비해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사명의식이 강해지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식도 강해진다. 사명의식이 없으면 왠만한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자녀들과 주위 사람들이 우리 부모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고 말을 듣기를 바란다. 이렇게 반응할 은혜 주시길 원한다. 다윗은 마음을 지켜 회개하고 회복했다. 여디디야 솔로몬을 주셨다. 인구조사로 다윗은 고통이 와서 징벌이 되었지만 마음 지키어 회개하여 여디디야가 되었다. 우리도 문제가 있어도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 다윗의 영원한 모험 개척을 하게 하셨다. 믿음의 용량이 커지면 무엇을 해도 이루게 하신다. 한번이라도 창조적 모험 사명을 시도해 보았는가??

세상은 마음먹기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지켜서 끝까지 주님을 따라 나를 평가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로 일컬음 받아야한다.

*사도행전 13:36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 당시에는 그 때만이 아닌 다윗은 한 평생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따르다가 잠들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지키고, 잘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다가 마지막 샬롬의 경지를 누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은혜가 우리 성도들에게 흘러 넘쳐서 우리가 주님이 붙잡아 주시길 원한다.

 

♣요약

다윗처럼 영적으로 마음을 지키는 자 되어서 기적을 체험하고 날마다 주님 안에서 은혜를 구하며, 사명으로 무장되어서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나와 가정 교회를 온전히 섬기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샬롬의 경지에 이르도록 실천하고 주님 마음을 알아가야 한다. 고독 현장에서 창조적 모험의 바다에 담대하게 뛰어 들어갈 용량을 키우고, 주님 앞에 마음을 지키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예수님이 아들이시고 날 위해 죽었다면... 나는 어떻게 마음을 지킬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저들의 왕으로 세우사 그와 그의 후손들과 더불어 충성의 언약을 맺으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증거를 인용하고 있다. 바울이 인용한 증거 중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은 거룩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내가 다윗을 찾았다고 말씀하셨다. 찾는다는 것은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의도에 적합한 인물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을 샅샅이 뒤지셨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

두 번째 증거는 다윗이 하나님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를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22절).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자라는 의미이자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이란 의미이다. 세 번째로는 그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를 바라고 노력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행할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권 교체는 그 국가가 완전하지 못함을 시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정권은 메시야의 영적인 왕국으로 반드시 이양되어야 하며, 이제 그 왕국이 비로소 수립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에 대해 전혀 시기할 필요가 없었다.

바울은 우리 주 예수에 관하여 그들에게 충분히 설명했으며 바로 이 예수가 다윗의 약속된 후손임을 증거 한다(23절). 이 사람의 씨에서 즉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부터 그의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을 위해 구세주를 세우셨으니 그가 곧 예수이시다. 예수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대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야 주신다.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선택된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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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97 회 경제상식퀴즈


1. 국민이 정부에 납부하는 국세와 지방세를 합산한 금액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 ① 한계세율
  2. ② 사회보장부담률
  3. ③ 국민부담률
  4. ④ 조세부담률

2. 회수할 수 없는 비용을 뜻하는 경제학 용어다. 이미 지급을 마쳤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하든 피할 수 없는 비용인 이것은?

  1. ① 고정비용
  2. ② 한계비용
  3. ③ 매몰비용
  4. ④ 금융비용

3. 한국은행이 지난달 25일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현재 한국의 기준금리는 연 몇%일까?

  1. ① 0.25%
  2. ② 0.50%
  3. ③ 0.75%
  4. ④ 1.00%

4. 중앙은행이 공급한 화폐가 시중에서 몇 배의 통화를 창출했는지를 말한다. 수치가 높을수록 돈이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뜻인 이것은?

  1. ① 통화승수
  2. ② 통합재정수지
  3. ③ 엥겔지수
  4. ④ 지급준비율

5. 시장 평균을 초과하는 수익률을 목표로 잡고 펀드매니저가 적극적으로 운용에 참여하는 펀드를 의미하는 말은?

  1. ① 액티브펀드
  2. ② 패시브펀드
  3. ③ 적립식펀드
  4. ④ 거치식펀드

6. 뚜렷한 지지정당이나 정치인이 없고, 선거마다 정치적 이슈에 따라 투표하는 경향이 있는 ‘무당파 부동층’을 뜻하는 말은?

  1. ① 비둘기파
  2. ② 매파
  3. ③ 캐스팅 보터
  4. ④ 스윙 보터

7. ‘비교우위론’을 만든 영국의 경제학자다. 1772년 런던에서 태어나 고전경제학의 이론체계를 완성하는 데 기여한 이 사람은?

  1. ① 데이비드 리카도
  2. ② 애덤 스미스
  3. ③ 카를 마르크스
  4. ④ 존 스튜어트 밀

8. 경영학에는 효율적인 마케팅을 위한 네 가지 핵심요소인 ‘4P’라는 개념이 있다. 4P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1. ① Product
  2. ② Price
  3. ③ Premium
  4. ④ Promotion

    -----------------------------------------------------

    ◎Cover Story

    돈을 사용하는 비용, 금리가 궁금해


    우리는 남의 것을 쓸 때 비용을 지불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진 않습니다만, 남의 재화와 서비스를 유료로 사용합니다. 돈을 빌릴 때는 어떨까요? 친구끼리 푼돈 거래를 한다면 공짜일 겁니다. 상대가 완전히 남이고 제법 큰 돈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요즘 다른 사람과 직접 돈거래를 잘 하지 않습니다. 은행이라는 매개를 주로 이용합니다. 은행을 통해 우리는 돈을 저축하기도 하고 빌리기도 합니다. 예금과 대출 때 우리는 이자를 받거나 이자를 냅니다. 우리는 일견 딱딱해 보이는 은행과 이자를 통해 안면이 전혀 없는 사람들과 거래를 합니다.

    이자도 일종의 물건(돈)값이기 때문에 오르내립니다. 돈을 빌리는 경우, 개인과 기업들의 신용도와 평판에 따라서, 국내외 경제 상황에 따라서, 화폐량에 따라서, 정치 상황에 따라서 이자율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신용도(credit)가 높으면 위험 정도가 낮기 때문에 낮은 이자율을 적용받습니다. 반면 낭비가 심한 개인이나 실적이 나쁜 기업은 돈을 빌리기 어렵거나, 높은 이자를 내야 합니다. 이자율을 보면 개인과 기업의 진면목이 보이는 것이지요.

    돈이 많이 발행되어서 시중에 풀려있다면 돈은 흔해질 것입니다. 흔한 것은 쌉니다. 이자율이 낮아지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에서 이자율이 낮으면 개인과 기업들은 돈을 빌려 쓰려 합니다. 개인들은 돈을 빌려서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려고 할 것이고,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려 할 겁니다.

    반대로 이자율이 높으면 경제 주체들이 돈을 빌려 쓰길 꺼립니다. 이자율은 결국 돈을 원하는 수요와 돈을 내놓으려는 공급 간의 관계에 따라 정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자율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정하는 기준금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거 아시죠? 요즘 금리나 이자율과 관련한 핫 이슈는 ‘마이너스 금리’라는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알아 두세요.

    현대인은 이자를 당연히 합니다만, 인류 역사를 통해 보면 이자를 죄악시 했던 시절과 철학자, 문인, 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은 이자를 받도록 허용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와 셰익스피어는 이자와 고리대금업을 사악한 행위라고 했습니다. 아리스토렐레스는 돈이 돈을 낳을 수 없다고 했지요.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악마로 그렸습니다. 그 이론과 논쟁을 4,5면에서 더 다뤄 봅시다.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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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주후 2021년 3월 13일)
제목: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
말씀: 요한복음 5:24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기도: 박요한 부목사님.
----------------------------------

(요한복음 5:24절)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영생에 대해서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
*사람이 절대로 인간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세 가지의 벽이 있다.

첫째는 죄의 문제, -그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죄 문제를 놓고 이야기 해본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다. 한때는 우리 인간들이 다 잘 나간다고 하지만, 다 같다. 그 에덴동산의 아담의 조상들은 다 죄를 지었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 그럼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우리가 심지어 자녀가 없고, 남편, 아내가 없어도 죄 문제만은 해결해야 하는데,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중요하다. 구원은 쟁취해서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선물로 얻는 것이다. 그럼 선물로 받았다면 왜 그리 싸우고, 상처주고, 왜 그렇게 힘드나?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도 주시는데 나머지 부분도 다 주신다. 왜 그런데 믿음을 갖지 않는 것인가?? 믿음을 갖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5:24절에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죄를 지은 영원한 형벌을, 죄 지은 형벌을 다 면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죽음의 문제, - 나이 80, 90을 자랑할 수 없고, 50이 넘으면 미모의 평준, 60이 넘으면 지성의 평준화, 70이 건강의 평준화, 80, 90이 넘으면 반은 밖에 나와 있으며, 반은 공동묘지에 있다. 80, 90이면 잘 자는 것이 일이다.

-죄를 통해서 얻는 것이 또 하나가 죽음이다.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이 있는데, 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평생에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에서 복음이 여승흔 목사님의 말씀이 있다. 최근에 복음을 전하면서 예를 들었는데 감동이 왔다. 교회와 중직자, 헌신 자들이, 모두가 포스트 코로나로 걱정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 이 복음으로 무장한다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 여승흔 목사님은 하이킹을 하면서 젊은 미국인 부부가 심호흡을 하고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운동으로 온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가까이 살고 있고 남편과 자녀가 있다고 했다. 질문에 그 자매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 자매님이 오늘 밤이라도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냐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들어가는지를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고 한다. 그럼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냐고 물으니, 자매님은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매에게 성경은 영생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있냐고 질문하지 자매님은 영혼한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성경은 영생의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명해 주고 강조하고, 이어서 선물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했다고 한다. 만약 그 자매님이 나에게 어떤 선물을 준다면, 그 선물을 주고 나서 돈을 받겠는가? 아니면 선물로 주겠으며, 값없이 주겠냐고 질문을 하니 대답으로 선물은 값없이 주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데, 자매님은 착한 일을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어떻게 되냐고 하니, 그 자매님을 잘못되었다고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 목사님은 성경은 죄에 대하여 정의하는 부분에 대해 설명해 주셨고, 죄에 대한 설명은

첫 번째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죄이다. 성경은 수많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두 번째로 성경은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죄이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도 많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고 설명했다.

-아버지가 아버지인 것을 모른다다는 것이 죄이다. 부모를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부족해도 한결 같이 무언가 사로잡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혜의 기름이 부어지고, 하나님은 나의 관계 때문에 그래야 한다. 죄라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도 죄고 하라는 것을 안 하는 것도 죄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죄이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자매님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냐고 질문하니 본인이 죄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확실히 하기 위해 재차 물으니, 분명한 의미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죄는 반드시 죄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죄인은 스스로 절대로 지불할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매님의 죄를 지불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 은혜를 그 자매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믿음의 결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매님을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렇게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영생의 선물로 받게 됨을 전해주고 나서,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은 자매님에게 영생을 선물을 주시길 원하시는데, 자매님은 하나님의 주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생명, 영생을 선물로 받으시겠냐고 하니, 상기된 표정으로 기꺼이 받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확실히 받아들이겠다고 했기에 자매님에게 결신기도를 해주었다고 한다. 아주 기뻐하는 모습과 표정이었고, 차후 약속도 했다고 한다. 성경구절과 차후에 양육 훈련도 받으라고 안내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고 한다. 이것을 메일로 보내 준 예를 들어보았다. 한국 교회가 목회자를 뽑을 때에도 복음 제시를 잘 하는 능력을 가진 자를 뽑아야 하고, 교회 중직 자를 선출할 때도 이 복음이 분명한가를 놓고 뽑아야 한다. 복음제시를 꼭 하고 뽑기를 바란다. 이것이 아니면 한국 교회가 살길이 없다.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이 다시 한 번 일렁일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이 선물을 우리 모두가 받았는데 선물 받은 자의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를 바란다. 복음 제시의 가장 강력한 핵심이 그리스도를 전파함의 B파트, 모든 사람이 죄를 받음, 죄의 형벌, 그리스도가 혈벌을 받음, 선행으로 구원받지 못함, 그리스도를 모셔야 함, 구원의 확신,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 교회는 이 복음이 영력히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길 바라며, 이번 훈련생들이 이런 마음으로 복음의 역사와 능력을 가지고 끝까지 잘 훈련을 하여야 한다. 영적 에너지를 통해 즐겁고, 사명감으로 감당하기를 바란다.

-우리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찬양을 제대로 합시다.


셋째는 허무의 문제이다. - 그 어떤 인생도 허무를 피해 갈 수 없다.


♣요약
*사람이 절대로 인간은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세 가지의 벽이 있다.
첫째는 죄의 문제,
첫째는 죄의 문제,
셋째는 허무의 문제이다
.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온전함을 닮기 위해 훈련 기간 동안 사고, 감정, 의지, 관계, 행실의 온전함을 내면과 외면 모두 단련되고, 훈련 기간동안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기름부음이 충만히 있어서 가정과 일터에서 주님의 불성곽을 깨달아 훈련의 은혜가 넘치며 자신을 회복하고 나와 가정, 이웃에게 복음의 핵심을 제시해야 한다. 제자훈련 46기와 사역훈련 33기 사역훈련생들은 주님의 제자로서 은혜의 빚진자이니 값을 치르는 과정에 담대하게 주를 위해 선물로 주신 구원의 핵심을 갖고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감사하며, 누리기를 소망한다.

-영생은 믿는 순간부터 주어진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미 영생에 들어간 상태로 부활의 날에 누리게 될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다. 구원의 보장은 죽을 때 또는 미래 심판 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상태이다. 영생은 오직 믿음으로만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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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3월 10일
제목: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 로마서 8:32~37절
설교자: 문진호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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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32~37절)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중앙선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아마 운전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중앙선 침범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운전자가 범하는 십대 중과실 중의 하나의 들어간다. 우리가 지켜야 될 것을 우리가 지키게 되면 지킨 그것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많다. 운동 습관을 지키면 건강을 지켜준다. 시간을 지키면 약속 상대로부터 신뢰를 지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중앙선을 지키면 그 중앙선 반대편의 차로부터 나를 지켜주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실 내가 메고, 그 십자가에 메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가 나를 지켜주는 줄 믿는다. 십자가를 붙드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질문하나가 떠올랐다. 온전함의 고봉의 올라가려는 자기 성도가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가 과연 우리를 어떻게 지켜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어떻게 그 십자가 은혜 가운데 우리의 삶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앞 문맥에 해당하는 말씀을 보면, 29-30절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다.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정해 놓으셨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아주 원초적으로 부르심 받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천국 갈 자격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너무 은혜가 되는 말이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죽어 마땅한 죄인을 구원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의인의 옷을 입혀 주셨으니 이 복음의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의롭게 된 사람은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 주시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의롭게 하신다는 뜻이다. 신앙이 딱 여기까지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주시고 기도하는대로 다 응답해 주시고 응석을 부려도 다 받아 주시는 그 하나님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신앙이 이것이 전부라면 실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실족할 일도 많고 내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라고 하는 이 공동체 안에 참 많이 있다는 사실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본다. 대부분 어릴 때 대체로 3-4세 이전에는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 처음 걸음마를 하게 되면 뒤뚱뒤뚱 걷게 되듯, 잘 걷는다고 칭찬한다. 마을 처음 배울 때에 옹아리를 한다. 어쨌든 소리를 내어서 말을 하면 또 칭찬한다. 그리고 기쁨을 표현한다. 나이가 30이 넘어서 그러면 똑바로 못한다고 말하게 된다. 옹아리를 한다면 그것은 부모에게 큰 근심이 아닐 수 없다. 신앙은 자라야 한다. 사랑받는 자녀는 성장해야 한다. 나이에 맞게 신앙의 연줄에 걸맞도록 성장하고 더 온전해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들의 형상을 보다 닮아가는 것, 그것이 의롭게 하셔서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일 것이다. 그래서 30절에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에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기까지 신학적으로는 영화롭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한 존재, 영화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니까 의롭다 하시는 것과 영화롭게 하시는 그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시간과 공간 속에 빚어내는 성화라고 하는 지나난 과정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의롭다 하심의 단계에서 영화의 단계로 점프 하는 법은 없다. 날개 없는 동물이 점프하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난다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추락이라고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마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좋은 것만을 얻어 내려하고 어린아이 시절에 신앙의 연수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받아주시고 다 들어주시고, 다 안아주시고 보듬어주셨던 그때를 생각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 성화를 이루어 내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에배소서는 이런 기준을 제시하신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과정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지나난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중도에 어떤 사람은 포기도하고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는 것을 주적하는 경우도 자주 보게 된다. 등산을 하게 되면 올라가고 나서 내려올 때 식당에 가야 그것이 보람이 있지, 아래에서 그냥 먹고 마시고 여기에 있겠다면, 등산로 입구에 머울러 있는 그 모습이야말로 제대로 등산을 경험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고자 성도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표현 것이 우리가 읽은 표현이다.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 본문을 쓰면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그냥 추상적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쓴 이 편지에 옮겨 놓았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고린도후서 11:26-27절에 보면,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이 목록을 우리가 읽기에도 숨이 찬다. 그 정도로 사도 바울이 사명을 받아 그가 이방인의 사도에 삶을 감당함에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던 것인가 하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을 가장 괴롭힌 것은 물리적인 환경의 어려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는 끝까지 그의 사명완수를 위해서 뚜벅뚜벅 그의 그 사명 인생을 걸어갔기 때문에 그렇다. 마지막 목 베임을 당할 때까지...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종일 주를 위하여 당하게 되고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부분에 있어 날마다 날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 고난과 어려움을 격고 있다고 고백을 하지만, 사실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마지막 위험이나 칼이라고 이야기하는 그 부분에 칼로 목 베임을 당하는 마지막 그 순교의 사명을 제외하고는 직접 경험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진짜 힘든 것이 무엇인가? 환경의 어려움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가장 힘든 것은 이런 표현이다.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이다. 이런 환경의 어려움이 찾아오면서 동시에 어떤 느낌을 받느냐면 바로 고립감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를 생각한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마치 그 긴 터널을 지나가는 것처럼, 아무 그런 응답과 음성이 들리지 않는 그런 상태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어려움이 있다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나를 향하여 어떤 평가를 내릴 때, 그것이 정죄이든 조롱이든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난으로 시편 42편의 말씀처럼 –내 하나님이 과연 어디계신가? 그렇게 우리를 조롱하고 핍박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있는 그 소리들이 들린다라는 것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라고 하는 그 느낌,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조롱과 정죄를 당하고 있는 느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은 이 어려움들, 시편 42편에 보면 이 내적 갈등과 외부의 조롱, 외적인 어려움이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편 4편 2-3절에 보면,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그런 마음의 상태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면의 이 고립감, 사람들의 조롱 소리 이것이 뒤섞이면서 주야로 눈물을 삼키고 있다고 시인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에 참 놀라운 고백을 보여준다. 자신의 영혼을 향해 놀라운 선포를 한다.

 

시편 42편 5절-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소망을 둘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이 나타나 나를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영혼을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라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어떻게 도우시길래 그 고난의 이중고, 내면의 고립감, 외부의 조롱으로부터 그가 그것을 극복하고 자기의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사도 바울은 고난을 이기는 이 비밀에 관하여 다음가 같이 증언을 하는 것이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시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줄 믿는다. 이겨도 넉넉히 이긴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그 사랑, 그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지금도 우리를 함께 동역함으로 영화로운 존재가 되기까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빚어내는 지나난 성화의 과정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삼위일체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하게 이기게 될 줄로 믿는다. 우리가 이렇게 선언을 담대해 하고 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질문 하나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고난 대신에 꽃길만 걷게 하심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실까? 고난 자체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게 할 능력이 주님께 없어서 이기 때문일까? 또 주님이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 고난의 상황 가운데 내가 힘겨워 하는 것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실 것이다. 그러면 고난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면 고난의 과정 속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를 생각한다.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해야지만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꽃길로만 인도하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신 데는 뭔가 비밀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비밀은 사도 바울이 또다른 고백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는 본문 하나를 찾아보자.

 

*고후 12:9-10.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왜 그럴까? 내가 약해져야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강함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는 것에 약해지는 것보다 내가 약해지므로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에 더욱 강해지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능력이 나는 약해졌지만 주님만 의지하는 가운데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 부어지는 것인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임재와 능력 안에서 머물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붇듯 부어지게 되는 것을 믿는다. 있는 척, 가진 척, 부족함이 없는 척, 그런 것은 주님의 능력이 오다가도 떠나버린다. 이것이 고난 중에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 이 고난의 신비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죄는 중력처럼 우리를 이 땅에 묶어놓는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하는데 고난은 비극적이긴 하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환상의 풍선을 터트리는 바늘과 같다. 그래서 죽음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붙잡고 긴급히 열정적으로 씨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죽어가는 세상에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고약한 속박을 깨뜨려야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크고 가장 멋진 상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안길 수 있는 상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매어있고 붙들려 있고, 또 내가 끄트머리를 살며시 붙잡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 세상의 욕심과 정욕이라고 하는 그것이 사실은 내가 좋아 붙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붙들려 진 그것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인기를 얻고, 힘을 얻고, 뭔가 내가 할 수 있겠다라고 하는 자기 효능감을 느끼면서 그런데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머물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우리는 약해지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고난이 가진 신비이다.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을 보면, 고난을 통해 세상에 매인 것들을 완전히 박살냄과 단절의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 단절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함을 법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쓰셨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요셉, 모세, 다윗, 이외에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고난을 통해서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가족, 명예, 지위, 세상에서 자랑할 만한 것들을 무장해제 당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려고 볼 때,

-구약에서 요셉은 노예, 성 범죄자, 모세는 살인자 도망자, 다윗은 국가반란 전력을 가지고 수배중인 사람,
-신약에서 사도 바울은 살인자, 당신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이단 창시자,

 

이들은 뭐하나 객관적으로, 외부적으로 쓸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께 받은 소명 때문에 복음 때문에 세상에서는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을 들어다 쓰기 시작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고난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사랑의 주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다루어 가시는 이 방식을 우리가 신뢰하고 이 고난의 신비를 붙들며 나도 고난 자체는 싫지만, 그런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신다고 한다면 순종하기를 원한다. 한결같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의 그 자리에 설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베토벤에게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곡들 중에 청력을 잃어버린 뒤에 지은 곡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5번 운명 교향곡, 6번 전원 교향곡, 이런 곡들이 1800년대 초반에, 당시에는 나폴레옹이 그 군대를 밀고 들어와서 오스트리아를 다 점령해버렸다. 세상은 난리가 나고 청력은 상실하고 가장 절망적이라고 말하는 그 때에 가장 위대한 음악이 탄생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베토벤에 있어서 그 고난의 그 순간에 그로 하여금 가장 위대한 곡을 작곡할 수 있었던 힘은 그것의 추측의 단서가 있다. 청력을 거의 상실할 때쯤에 했던 고백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 합니다“라고 여기에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청력을 잃고 음악가, 작곡가로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사망선고와 같은 상황에서 세상과 단절 된 채로 숲속에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언어로 말하는 것들을 들을 수 있는 그 새로운 차원의 귀가 열린 것이다.

 

어떤 목사님의 칼럼을 보니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류가 영어로 휴먼레이스(Human race)이다. 남이 쉴 때 하나 더 해야 성공한다. 튀어야 홍보가 된다. 소유한 만큼 평안한 노후를 보장한다. 열심히 저축하라 축적하라, 투자하라. 열심히 일한 당신 쉬어라,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사회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이다. 이런 구호를 갖고 뛰는 것이 인간의 경주 휴먼레이스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뛰는 레이스가 있다. 그것은 갓 레이스(God race- 줄여서 Grace)이다.

일터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우리가 만나는 휴먼레이스는 인간의 경주는 우리로 끊임없이 경쟁하게 하고 남들보다 올라서야 하고 잘나야 하고 축적해야 하고, 그래야 잘 살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다 보니 다치고 다리에 힘 빠지고 상처 받아서 주저앉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그것이 그럴 때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무너지고 엎어진 그때가 하나님과 함께 뛰는 경주, 그레이스를 경험하는 때인 줄 믿는다. 세상에서 경쟁적으로 뛰다가 지치고 힘들고 고난을 만나고 또 하나님의 경주, 하나님의 레이스, 그 그레이스라고 하는 그것으로 옳겨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그 과정 속에서 겸손을 배우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힘들 때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더욱 전심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고난 중에 홀로 동굴로 들어가지 말고, 믿음의 동역 자들과 함께 하는 예배, 다락방의 말씀, 권면과 나눔과 함께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그런 합심 기도와 주님의 말씀을 통한 그 음성에 함께 귀 기울이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이기고 또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뛰는 경주, 그레이스의 승리의 주인공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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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의 그 과정 속에서 겸손을 배우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힘들 때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의 하나님을 더욱 전심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고난 중에 홀로 동굴로 들어가지 말고, 믿음의 동역 자들과 함께 하는 예배, 다락방의 말씀, 권면과 나눔과 함께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그런 합심 기도와 주님의 말씀을 통한 그 음성에 함께 귀 기울이는 그런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하실 줄 믿는다. 이기고 또 이기고 하나님과 함께 뛰는 경주, 그레이스의 승리의 주인공이 되길 소망한다. 

[1]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32절).
아끼지 아니하시고…내어 주신 이가. 우리에게 샘이 있는 한 누가 우리의 물줄기를 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생각해보자.

(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우리의 소망을 둔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는 그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에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보다 못한 것으로는 사람을 구할 수 없고 사람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를 내어놓으시겠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우리의 유익을 위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화목 제물이 되도록 그를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 그는 우리를 아끼시기 위하여 자기를 섬기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2)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해 주실 것이다. 그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실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실 것이라는 말에 모두 함축된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수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모든 선한 것을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주실 것이다. 그것도 은사로 즉 주저함 없이 그리고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실 것이다. 어찌…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원수로 있을 때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주신 이가 그의 친구요 자녀가 된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거절하시겠는가?
우리를 위해 면류관과 왕국을 마련하신 분이 또한 틀림없이 거기에 이르는 길목에서 충분히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2] 우리에게는 모든 비난에 대한 답변이 마련돼 있고 모든 정죄를 물리칠 수 있는 보증이 있다(33,34절).
"누가 무엇을 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다는 이 사실만 있으면 족하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다면 이것이 모든 비난을 막아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난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들의 비난을 늘어놓아 보라고 도전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 곧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사실이 모든 비난을 무너뜨릴 것이다. 누가 정죄하리요.

비록 그들이 그 고소에 성공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은 곧 정죄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번복될 수 없는 항변이 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우리가 이처럼 안전을 보장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고 우리가 그와 연합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에 관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1) 그의 죽으심: 죽으실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죽으심의 공로로 우리의 빚을 갚으셨다.

(2) 그의 부활: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 사실은 우리에게 훨씬 더 큰 격려가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 사실을 '그 뿐 아니라'라는 말과 함께 언급한다. 만일 그가 죽고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에 있던 상태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3) 그가 하나님우편에 앉으심: 그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사실은 모든 고소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가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법정에서 그런 친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친구는 바로 재판관 자신이다.

(4) 그가 거기에서 드리는 대언 기도: 그는 거기에서 우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거나 잊어버리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에게 풍성한 위로를 주는 내용이 아닌가?
아직도 의심하고 불안해 할 여지가 남아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송사와 정죄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사람들로부터 겪는 것으로 이해한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사악한 죄목들을 뒤집어썼었다. 권력자들이 그러한 죄목들로 그들을 정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정에서 옳다고 인정받는 한 우리가 사람의 법정에서 어떻게 판결 받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3]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 복된 상태 속에서 있을 수 있다는 충분한 보증이 있다(35-39절). 혹시 그리스도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성도들의 두려움은 종종 그들을 매우 낙담케하며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여기에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 있으니 곧 아무 것도 그들을 떼어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것이다.

1)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으려고 하는 모든 적들에 대한 성도들의 담대한 도전: 누가…끊으리요(35절).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주심으로 자기의 사랑을 우리에게 확증하셨는데 다른 어떤 것이 그 사랑을 다른 데로 돌리거나 해체시킬 수 있겠는가?

①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겪게 되는 재난들이 헤아려지고 있다. 그들은 환난을 겪고 곤고에 처하며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언제나 미워하는 악의가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핍박에 쫓기고 기근으로 쇠약해지며 적신으로 굶주리고 극심한 위험과 그들을 대적하여 뽑아든 관원의 칼에 노출되어있다. 이보다 더 암담하고 무서운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시편44:22에서 인용된 구절이 그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며(36절).

즉 계속해서 치명적인 타격에 노출되고 그것을 예상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사람들은 양을 도살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살해한다.

②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들 사이에 있는 사랑과 우정의 끈을 끊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 때문에 그만큼 우리를 덜 사랑하시거나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사랑을 감소시키는 원인도 증거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다른 친구들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는 있다. 바울이 네로 앞으로 불려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지만 그때에도 주님은 그 곁에 계셨다(딤후 4:16,17). 핍박하는 원수들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발악을 할지라도 참된 신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둘째, 우리는 이러한 것 때문에 그를 그만큼 덜 사랑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그만큼 덜 사랑하신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라도 결코 그를 덜 사랑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결코 그를 나쁘게 생각지도 않는다.

③ 이러한 일에 있어서 신자들의 승리: 그러나 이 모든 일에…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절).

첫째, 우리는 이긴다. 묘한 방법으로이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법이다. 그것은 불과 검보다는 믿음과 인내로 이기는 좀더 확실하고 고귀한 방법이다. 때때로 원수들은 자기들이 순교자들의 꺾을 수 없는 용기와 지조에 의해서 당황하고 압도되었다는 고백을 하였다.

둘째, 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성도들은 정복자보다 더 나은 승리자이다. 먼저, 그들에게는 손실이 적다. 많은 경우에 정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치뤄진다. 그러나 고난받는 성도들이 잃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그들도 잃는다. 그러나 그들은 금이 용광로에서 잃어버리는 찌끼 같은 것밖에 잃어버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그들은 많은 이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명예, 평안, 그리고 시들지 않는 의의 면류관 등 전리품이 매우 풍성하다. 이러한 점에서 고난받는 성도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난이 많을수록 위로는 더욱 풍성하다(고후 1:5). 웃음을 머금고 화형틀로 가며 불꽃 속에서도 노래하던 이들이야말로 넉넉히 이긴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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