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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소외, 고통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

고통을 묘사하는 어떤 수사(修辭)도 현실의 무수한 개별적 고통들 앞에서는 무력하다. 나는 고통에 대해 다만 멀리서 응시하는 소설이 좋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간다. 멀리서, 라는 표현은 물론 몹시 주관적인 것이다. 그럴 때 내 거리감각의 기준이 되는 작가는 언제나 존 치버다.

치버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막 첫 책이 나왔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계속 소설을 쓰며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방송국에서 단막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고 나에게 새 드라마의 작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 얘기를 하게 되었다. 혹시 존 치버를 읽어보았느냐고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이름은 들었지만 아직 읽어본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백했다. 언젠가는 꼭 「다리의 천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절판되지 않은 치버의 한국어 번역본은 정우사에서 나온 『주홍빛 이삿짐 트럭』뿐이었다. 간신히 한 권을 구했다. 맨 앞에 실린 단편을 읽은 후 나는 어떤 소설은 한 인간의 내부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거기 실린 단편들을 차례로 다 읽은 후에는 책을 덮고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요. 아마도 나는 더듬더듬 말했을 것이다. 드라마를 쓸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과 나눌 시간이 없는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이 쓰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고도, 내가 「다리의 천사」의 세계에 발끝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소설을 통해서였으면 한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건 굳이 다른 이에게 선언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미국 단편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존 치버는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나 1982년 사망했다. 『팔코너』는 1977년, 그러니까 죽기 다섯 해 전에 쓴 작품으로 그의 네 번째 장편소설이다. 평론가들은 치버의 작품 세계를 도시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족의 평온한 삶과 그 이면을 통해 인간 본성의 이중성을 밝히고 생의 기묘한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있다고 요약하곤 한다. 『팔코너』는 그런 일반적인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또 다른 독특한 의미를 품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주 무대는 미국 동부의 교도소 팔코너. (그런 이름의 감옥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른다.) 주인공은 대학교수였던 사내 패러것이다. 그는 구금된 인간이다. 마약중독자로, 형을 살해하고 독방에 수감돼 있다. 감옥 안에서도 그는 여전히 약 중독 상태다. 감옥에 갇힐 때 정신과 전문의들로부터 진단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국가는 패러것에게 매일 몇 알의 약을 지급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패러것의 현실인 감옥 안 세계와 과거 기억인 감옥 밖 세계를 오가며 전개된다. 때론 자유인과 비자유인의 접경지대를 지나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내와 면회장에서 만나는 장면.



(…) 패러것의 얼굴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의 방문을 어쩔 수 없이 수락한 사람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안녕, 여보.” 패러것이 마샤에게 소리쳤다. 마치 기차에서, 배에서, 공항에서, 진입로 입구에서 혹은 여행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 소리치며 인사하듯이 (…) “이혼할 거지?” “지금은 아냐. 현재로선 변호사와 단 한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아.” “이혼은 당신의 특권이야.” “알아.” (…)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어때?” “많이 만나진 못해.” “식사 시간에만 보는데 그때도 대화는 금지돼 있어. 알겠지만 나는 F동에 있어. 그곳은 뭐랄까 일종의 잊힌 장소지. 피라네시의 그림에서처럼 말이야. 그래서 그랬는지 지난주 목요일엔 저녁식사도 주지 않더군.” “독방은 어떻게 생겼어?” “가로 십이, 세로 칠 피트 정도야.”(후략)


그는 다른 모든 죄수들처럼 스스로를 ‘형제를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부당하게 갇힌’ 교도소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마흔여덟 살의 남자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는 하얀 셔츠를 입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평범한 사내이기도 하다. 팔코너는 일상적인 인권 유린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는 폐쇄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몰래 고양이를 키우고 라디오를 만들어 다른 교도소의 폭동 소식을 듣고 타인을 질투하거나 연민한다. 패러것의 실존을 위협하는 것은 사랑과 성욕과 고독이며, 감옥 밖의 생활이라고 해서 더 나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억압받고 소외되고 고통스럽고 우스꽝스럽다. 그럼에도 어쨌거나 오늘을 살아내는 것. 존 치버의 다른 소설 속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나와 당신이 그러하듯이. 이 지점에서 패러것은 한 명의 구금자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가지게 되고, 팔코너는 여간해선 도망갈 데 없는 이 세상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에, 패러것은 죽은 동료 대신 자루에 담겨 탈옥을 시도한다.


패러것은 (…) 버스에서 인도로 발을 디딜 때 추락에 대한 공포가, 또 그와 비슷한 다른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패러것은 머리를 높이 쳐들고 등을 꼿꼿이 편 다음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기뻐하라. (…) 마음껏 기뻐하라.


소설은 거기서 끝난다. 패러것의 탈주는 성공했을까, 그렇지 않았을까. 어떻게 되었더라도, 살아 있는 한 고통은 영원히 그의 곁에 머물 것이다. 그것이 모든 훌륭한 소설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공통의 진실이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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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 팔코너는 어떻게 살인자로 전락했을까

♣'팔코너'줄거리

대학교수이자 마약중독자인 에제키엘 패러것. 그는 형을 살해한 죄로 방금 팔코너 교도소에 수감됐다. 이제는 몰락했지만 부유한 미국 상류계급 가문의 차남이던 그는 어떻게 살인자로 전락했는가.

소설 『팔코너』는 겉으로는 부족할 것 없어 보이지만 비정상적이고 비윤리적인 가족관계-배 속의 아들을 낙태시키려고 했으며 본인 자신도 툭하면 자살 소동을 벌이던 아버지, 불 같은 성격에 생활고로 집 앞에 주유기를 설치해 기름을 팔면서도 드레스를 포기하지 못했던 허영심 강한 어머니, 어려서부터 틈만 나면 동생을 죽이려 들었던 알코올중독자 형, 파탄을 눈앞에 둔 결혼생활속에서 균열하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그려낸 20세기 걸작의 하나이다. 교도소라는 폐쇄된 공간을 무대로 구금이라는 물리적 고통이 낳은 정신적 소외와 그 절망의 심연 속에서도 새로이 잉태되는 희망과 삶에의 긍정이 아름답고 절제된 언어로 구현된 작품이다.

원제: Falconer

저자: John Cheever

발표: 1977년

분야: 미국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팔코너

옮긴이: 박영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1(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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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어린 짐승들의 모험

쓰시마 유코의 『웃는 늑대』는 늑대에 대한 여러 문헌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도도하고 날렵한 짐승의 카리스마를 한껏 서술한 후 본격적인 이야기의 무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살고 있는 묘지로 옮겨간다. 글의 배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일본이다. 묘지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은 배가 고프면 새를 잡아 구워 먹고 밤이 되면 낡은 모포 속에서 잠을 청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아이는 무덤 앞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한 세 남녀를 발견한다. 불륜 관계인 여자와 화가, 그리고 여자의 남편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를 한 덕에 죽기 직전의 여자는 가까스로 구출된다. 이 일로 인해 더이상 묘지에서 살 수 없게 된 두 부자는 다른 곳을 떠돌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객사하고 만다. 세월이 흐른 후 소년이 된 아이는 무덤가에서 죽은 화가의 아내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어린 딸과 마주친다. 그렇게 만난 열일곱 살의 소년과 열두 살의 소녀는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서로를 『정글북』에 나오는 ‘아켈라’와 ‘모글리’라 부르기로 약속한다.


이 무렵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내가 여섯 살쯤 되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 남자아이와 함께 눈이 펑펑 내리는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름이나 얼굴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살이 까무잡잡하고 콧등에 작은 흉터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스름해진 저녁 하늘 아래를 종종걸음 치며 걸었다. 그애는 집에 늦게 들어가서 할머니께 혼날 게 분명하다며 걱정스러워했다. 나는 그애에게 어른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애는 솔깃해했다.

“버스를 타고 한참 가면 어떤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 엄청 넓은 풀밭이 있어. 거긴 항상 따뜻해. 나무마다 복숭아랑 앵두(당시 내가 좋아하던 과일이었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데 배가 고프면 맘대로 따 먹으면 돼. 동물들도 되게 많다.”

그애는 정말이냐며 두 눈을 반짝였다. 나는 그애를 더 즐겁게 해주기 위해 덧붙였다.

“그 숲 속에는 너보다 큰 로봇도 있어. 말도 할 줄 안다.”

그애는 로봇을 만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내게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나서 입김을 토해내던 그애가 갑자기 조금 시무룩해졌다. 넌 여자애라 로봇을 별로 안 좋아할 것 아니냐며, 자기도 뭔가 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난 로봇보단 인형이 좋아.”

우리는 다음 날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그날 저녁 나는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선생님이 방문을 두드리더니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학원 입구에는 머리 위에 눈이 하얗게 쌓인 그애와, 그애의 할머니가 서 있었다. 그애는 내게 네모난 상자를 내밀었다. 원피스를 입은 마론 인형이 담겨 있었다. 그애의 어깨 너머로 깜깜한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따뜻한 슬리퍼 안의 발가락을 오므렸다. 아까 그애와 했던 약속은 이미 까맣게 잊고 있던 중이었다. 그애는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다음 날 그애에게 여행을 갈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대신, 풀밭에 대한 이야기를 더 지어내서 들려주었다. 그애는 내가 안 가면 나중에 혼자서라도 가겠다며 기대에 차 있었다. 이사를 떠나온 후에도 종종 나는 그애를 떠올렸다. 그애는 정말 혼자 여행을 떠났을까?

누구나 어릴 적에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한번쯤 모험을 꿈꿔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선뜻 그 꿈을 실행하지 못했던 건 아마 어린 마음에도 현실은 소설과 다르리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웃는 늑대』 속 ‘아켈라’와 ‘모글리’의 여행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들의 모험은 애초에 ‘풀밭의 낙원’을 꿈꾸며 시작된 것도 아니다. 기차 안에서 원숭이처럼 바글거리는 사람들 속에 끼어 간신히 쪽잠을 자고, 빗물에 젖기도 하며, 극심한 설사와 복통에 시달린다. 여행 도중 그들은 『정글북』에서 이별이 예정되어 있는 ‘아켈라’와 ‘모글리’의 관계를 버리고 ‘카피’와 ‘레미’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바꾸어 부르기로 한다. 지치고 험난한 여행의 끝에 소년은 소녀의 납치범으로 몰려 경찰에 체포된다. 이토록 비극적 결말과 지독하게 고생스러운 여행 과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읽는 내내 순수한 어린 짐승들의 유대와 모험을 동경했다. 빗물에 젖은 몸에서 피어오르는 오래된 목욕탕 냄새도, 화장실 앞에서 어린 소녀의 젖은 옷을 꼭 짜주는 소년의 손길도 참 애틋하고 낭만적이었다.

패전 후 일본 사회의 단상과 그외 인간 군상은 이 소설에서 스쳐가는 배경 이상의 인상은 주지 못했다. 다른 설정에 눈을 돌리기에는 ‘아켈라’와 ‘모글리’의 모습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영롱한 비눗방울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순수보다는, 넘어져 까진 무르팍에서 배어 나오는 붉은 핏방울.

그 비릿한 순수함을 대면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어쩌면 책을 덮고 난 뒤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켈라’와 ‘모글리’는 대체 왜 여행을 시작했던 것일까?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도 있으니까.

전아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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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유괴사건이 시작되는데…

♣'웃는 늑대'줄거리

등단 44년을 맞은 일본의 대표 작가 쓰시마 유코의 『웃는 늑대』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적자생존의 논리만이 적용되는 정글 같은 일본을 그린 소설이다.

일본을 횡단하는 두 소년소녀의 눈을 통해 쓰시마 유코는 전후 일본 사회의 피폐한 풍경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제는 멸종된 ‘늑대’로 형상화되는 근대 일본이 잃어버린 고고한 무엇에 대한 증언을 시도하고 있다.

2000년 『신초(新潮)』에 연재된 후 출간된 『웃는 늑대』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쓰시마 유코가 아버지 다자이 오사무가 사망한 패전 직후와 자신이 소녀 시절을 보낸 1960년께, 이렇게 일본의 두 시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당시 사건들로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칭과 화자, 사실과 환상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과감한 서술로 겹겹이 쌓인 죽음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웃는 늑대』는 전대미문의 주제와 방법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아사히 신문 주최 오사라기 지로 상을 수상했다.

열일곱 살 미쓰오는 아버지와 묘지에서 노숙하던 어린 시절, 치정 문제로 얽힌 세 남녀의 동반 자살을 목격한다. 소년은 자라서 세 사람 중 하나인 유명 화가의 집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열두 살 소녀 유키코를 만난다. 유키코는 밤기차를 타러 떠난다는 미쓰오를 그길로 따라 나서고, 이것은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유괴 사건의 시작이 된다……

원제: 笑いオオカミ

저자: 津島佑子(1947~)

발표: 2000년

분야: 일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웃는 늑대

옮긴이: 김훈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0(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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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광대의 독백…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하인리히 뵐과 나의 첫 만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대학에 다니며 시를 쓰던 문학청년 시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나는 자주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하인리히 뵐의 책을 처음 만난 것도 헌책방에서였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희귀한 책들의 설렘이란 어떤 다른 종류의 감응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경이에 가득 찬 경험이었고, 누렇고 빛바랜 페이지의 갈피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기록이나 낙서들, 메모들, 때로는 어떤 편지 비슷한 쪽지들이나 영수증 따위의 목록은 헌책방에서만 발견되어지는 진귀한 보물들이다. 하인리히 뵐의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다』라는 책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하던 순간의 경이에 대해 나는 자주 후배들이나 대학의 강단에서 이야기하곤 한다. 사실 지금은 절판이 되어버린 이 책을 틈날 때마다 소개하는 이유는 책 속에 담긴 한 문장 때문이다. “작가는 대충 임신할 수 없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의 상상력은 이미 너희 안에서 완전히 임신되어 있다고. 그것을 꺼내는 일이 문학이 아니라, 그것을 먼저 응시하는 일이 인간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시간이 흘러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를 읽고 나서 조금 더 농밀하게 작가의 뜻에 교감하게 되었다.

전후 독일의 폐허문학 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가에게 상상력이란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한 자가 바라보는 새로운 과제였고, 그에게 문학이란 그 폐허 위에서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이었다. 노벨문학상으로 그에게 영예를 안겨준 귀한 명분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당대의 어떤 작가보다 문학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의 생명성은 인간의 현실성과 그 한계에서 오는 다양한 징후들을 관찰하는 일이다. 문학이 비루해진다면 문학이 가지고 있는 생명성이 비루해진 것이 아니라, 문학 안에서 인간의 생명성을 찾는 행위가 나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안에서 언제나 인간은 허약하다.

하인리히 뵐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사람다운 언어’란 인간이 자신의 허약함을 진실되게 서술할 때 가장 사람다워진다는 진정에 답한다. 하인리히 뵐에게 진정한 자유란 인간이 수치심으로부터 자신을 극복하는 순간에 태어난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고 인간을 사회화 속에서 규명하기 위해 언급하는 중요한 본질적인 세 요소가 수치심과 허영심 그리고 죄의식에 있다면 인류의 문학은 고대에서 지금까지 이 수치심과 허영심 그리고 죄의식으로부터 거의 모든 자원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인리히 뵐은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로부터 그러한 인간의 내적 질서들을 서술이 아닌 고백으로 만들어나간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는 한스 슈니어라는 주인공의 25장의 독백이다. 어떤 벽 앞에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기 힘든 춤을 추는 듯한 이 광대의 독백은 당대의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하인리히 뵐의 냉정한 성찰이며 견해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 주인공인 한스 슈니어를 광대라고 부르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오로지 한스 슈니어만이 자신을 광대라고 부른다. 끝끝내 어딘가로 건너갈지 알 수 없으나, 어딘가로 분명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자의 독백은 우리가 살고 있는 광대의 현실과 상상일지 모른다.

한스 슈니어는 “나는 늘 상상을 이기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자신 안에 존재하는 광대에게 회상을 들려주기도 하고 아버지와 기나긴 대화를 하기도 하며 어떤 사건과 사건의 연속성이 아닌 통화 도중 갑자기 상대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세상으로 전화 통화를 하듯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다. 내밀성으로부터 인간은 어떤 순간을 모은다고 수화기 너머로 광대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어릿광대야. 그리고 순간을 모으고 있지.”

흔히들 그의 소설엔 출구가 없어 보이는 미로적인 요소가 많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소설이 특별히 전위적이거나 드라마틱한 사건의 계기가 있지 않음에도 이러한 언급이 출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설 속에서 연속적이며 내적인 사건과 독백이 만나며 생기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진실된 관계 같은 것에 작가의 양심과 상상력이 동원되고 있고 그 감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스토리텔링)가 중요시되는 소설에서 독백은 언제나 급진적이거나 이단적이므로, 그게 아니면 독백은 진부하거나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끼어서는 안 되는 아웃사이더의 서술 같은 것에 가까울 것이므로.

한스 슈니어는 매번 새로운 장을 통해 새로운 사건들로 가는 통로를 만들며 그곳에 자신의 독백을 ‘종전이 임박한 상황’처럼 다룬다. 가령 광대는 “깨달음은 타격이었다. 마리는 이미 떠나갔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인간살이 중에 인간성을 버리면 소문뿐이다”라는 은유를 남기기도 한다. 작가의 어떤 독백들로부터 탈출할 수 없도록 독자는 작가가 만들어가는 사회에 참여한다.

소설의 결말은 한스 슈니어의 몰락이다. 인간들이 세운 다양한 폭력과 구조의 벽 앞에서 한 광대의 일탈과 파괴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다. 이 소설의 구축에서 독백이 하나의 일탈이라면 그건 이야기가 독백을 파괴하려는 심사를 막아보자는 한 작가의 꾸준한 인간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얼굴은 떠나고 없는데 진동면도기만 혼자 덜덜 떨고 움직이고 있는 이 사회 같은. 그래서 독백은 더 애써야 한다.

김경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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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아픔 안고 귀향한 어릿광대는…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줄거리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국가의 양심’이라는 칭송을 받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하인리히 뵐의 역작. 전후 폐허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창작활동을 시작한 뵐은 나치 치하에서 말살된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 일을 자신의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열차는 정확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9시 반의 당구』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등을 발표해 비평가와 독자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작가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는 사회의 벽에 부딪혀 몰락해가는 한 어릿광대의 회상을 통해 독일 사회를 비판한 소설이다. 나치 시대 유대인 박해에 침묵을 지켰던 독일 천주교와 보수 정치를 비판해 보수 세력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설가 장 파울에게 “독일 작가 중 유일하게 유머가 있다”는 평을 받은 그는 이 소설에서도 도발적이고 풍자적인 유머를 선보이며 작가로서의 독창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어릿광대 한스 슈니어는 순회공연 도중 다리를 다쳐 공연을 중단하고 고향 본으로 돌아온다. 갈탄 재벌가의 아들인 그는 6년 전 어릿광대가 되려고 대학입학시험을 포기하고 천주교인인 마리와 동거를 시작한다. 그 때문에 부모에게 외면당하지만 마리와 함께한 6년 동안 어릿광대로 성공한다. 그러나 마리는 동거생활에서 오는 죄의식 때문에 결국 그를 떠나 ‘진보적 천주교인들의 모임’의 고위 간부와 결혼한다. 마리가 떠난 후 수중에 단돈 1마르크를 지닌 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몰락의 길로 치닫는데…….

원제: Ansichten eines Clowns

저자: Heinrich Bll(1917~1985)

발표: 1963년

분야: 독일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옮긴이: 신동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59(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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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통증 같은 불가해함

쓰레기를 태우다가 비닐농이 손가락 끝에 떨어져 물집이 잡혔다. 팥알보다도 작은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잡아 뜯었는데 의외로 피부 깊이 뜯겨 나왔다. 금방 피가 쏟아지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팥알처럼 붉은 화상이 된 것이었다.

마침 그것이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이어서 여러 날 동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서랍 속의 이런저런 연고를 바르며

며칠이 지나자 점차 아픔은 간지러움 비슷한 느낌으로 변하고 이어서 뻐근한 느낌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그것을 만질 때만이 그랬다.



그 작은 흉터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이 소설 「고야산 스님」의 감상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처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만지면 뻐근하게 전해오는 무엇이 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나 그 초점에서는

아련히 타는 감정이 고인다.

이렇게 시작한다.

“참모본부가 편찬한 지도를 또다시 펼쳐볼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워낙 길이 험난하다보니 손대기만 해도

후텁지근한 여행용 법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표지 달린 접책을 끄집어냈다네. 히다(飛)에서 신슈(信州)로

넘어오는 깊은 산속에 뚫린 샛길은 잠시 쉬어갈 만한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지.”

‘저쪽’에 참모본부가 있는 시대다. 그러나 여기는 원시림 속이며 주인공은 ‘법의’를 입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길 위에 있다.

길 가는 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도인(道人) 혹은 스님이다. 길을 내는 자라 해도 되겠고 길을 닦는 자라 해도 되겠다.

이 소설은 그 길 위에서 만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암시적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당시 일본 전통 사회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출가한 중이 하는 말이라고 해서 항상 가르침이나 훈계나 설법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 ‘젊은 양반, 들어보시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종파에서는 꽤 고명한 설법가로, 리쿠민사(六明寺)의 슈초(宗朝)라는

덕망 높은 스님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스님은 묵던 주막에서 약장수를 만난다.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자다. 약장수는 술상을 앞에 두고

스님을 야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님은 모른 체한다. 스님이 다시 길을 떠나 험한 산길에 이르렀을 때 약장수가 따라와 길을 앞지르더니

갈림길의 한쪽을 택하여 간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농부를 만나 약장수가 선택한 길은

아주 위험한 길이어서 얼마 전에는 동네 사람 여럿이 길을 잘못 든 이를 구출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스님은

제 길을 가려다가 주저한다.

결국 그 길 잘못 든 약장수를 찾겠다고 나섰다가 무시무시한 뱀들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심지어는 몸뚱이가

잘린 놈을 넘어야 할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다가 관절을 다쳐 계속 걷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길의 상황이야말로 그 길, 그러니까 약장수 삶의 내부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 헤매는 도정에서

다시 참모본부의 그 지도를 꺼내보지만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다. 최악의 상황이 계속될 뿐이다. 하긴 지도는

관념일 뿐 체험적 상황이 반영될 리 없으니까. 이 모두가 산의 영이니 어차피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판단한

스님은 땅에 엎드려 빌기 시작한다.

“참으로 죄송합니다만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낮잠을 주무시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지나가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지팡이도 버렸습니다.”

이렇게 빌어 뱀을 지나자 이어 거대한 거머리들이 달려드는 길이 나타났다.

“잡아서 떼어내니 툭 하는 소리를 내며 겨우 떨어지는”

거머리들이 공중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몸에 달라붙는 끔찍한 도정이다.

한편 화사한 꽃 속 같은 도정도 있다.

“자, 그렇게 해서 어느 틈엔가 비몽사몽 간에 그렇게, 그 이상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따스한 꽃 속에

살포시 감싸여 있었는데, 점점 발, 허리, 손, 어깨, 목덜미를 거쳐 머리까지 죄다 덮어오는지라 깜짝 놀랐다네.

나는 돌에 엉덩방아를 찧고 다리를 물속에 내던졌지. 빠졌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여자의 손이 어깨 너머로 가슴을 붙잡았어. 그래, 그 손을 꼭 잡고 매달렸지.”

이리하여 ‘어느 틈엔가 기모노를 벗고 보드라운 명주 같은 전신을 다 드러낸’ 성숙한 여성의 유혹이 이어지나

그 유혹 속으로 완전히 침몰하지는 않고 그 인연의 실타래 끝으로 마음의 길을 잡아가는 스님은 그 모든 것이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삶과 자연, 통에 관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고야산 스님’, 즉 고야성(高野聖)이란 와카야마 현 동북부에 위치한 진언종의

영지 고야산(高野山)에서 승려가 되어 각 지방을 떠돌며 행각을 하던 자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작가 이즈미 교카는 이 행각 스님들의 체험을 빌려 근대 이전의 일본 전통 세계의 신화와

전설의 아름다움, 풍경과 그 속에 녹아든 인간들의 불가사의를 문학으로 기록한,

가장 일본적인 소설 세계를 창조했다.

나는 그의 짧은 소설 속에서 내가 어린 시절 듣던 이야기들을 상기하게 된다.

그 불가해함은 내 문학적 삶에서 어떤 통증과 같은 것이다.

이 소설의 환기력은 그 통증을 불러오는 것이다.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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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이 산속에서 겪은 기괴한 이야기

♣'고야산 스님'줄거리

「고야산 스님」은 일본을 대표하는 환상문학의 대가 이즈미 교카의 걸작 단편 중 하나이다.

자연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 문학계에서 이즈미 교카는 요괴나 민담 등

잊혀가던 일본의 전통 문화를 추구하며 후대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등 유명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73년에는 이즈미 교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즈미 교카상’이 제정됐고 요시모토 바나나, 유미리 등 많은 유명 작가에게 수여됐다.

1900년에 발표한 「고야산 스님」은 19세기 말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요괴나 마녀 등의 환상세계와

일본 문화의 원풍경을 그리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승과 여관에서 함께 묵으면서, 고승이 행각승 시절에 산속에서

겪었던 일을 듣게 된다. 젊은 시절 스님은 어느 약장수를 구하려다가 뱀과 거머리가 우글거리는

숲을 헤치고 가까스로 닿은 외딴 오두막집에서 미모의 여인을 만난다.

이 여인은 온화한 모습 뒤로 욕정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바꿔버리는 마력을 숨기고 있었다.

미모의 여인으로 그려지는 마녀의 모습에는 작가가 어릴 때 여읜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고승이 옛길로 들어서는 행위나 깊은 산속에서 펼쳐지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세계,

외딴 오두막집과 그곳에 사는 마녀의 존재 등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

터전을 빼앗긴 전 근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에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초롱불 노래」도 함께 실려 있다.

 


원제: 高野聖歌行燈

저자: 泉鏡花(1873~1939)

발표: 1900년

분야: 일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옮긴이: 임태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53(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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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달려간 토끼는 어디에 있나

지금 나이의 절반쯤 되었을 때 내게는 ‘미국 3부작’처럼 여겨졌던 세 편의 소설이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호밀밭의 파수꾼』『달려라, 토끼』였다. 어째서 내가 이런 3부작을 구성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때까지 이름이라도 들어본 미국 작가들이 많지 않아서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쨌거나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다. 나는 대전의 헌책방들을 뒤졌고, PC통신의 중고책 장터를 눈여겨보았다. 아마 몇 군데의 도서관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어디에도 없었다. 토끼는 이미 항상 어디론가 달려가고 없었던 것이리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 때, 카투사로 복무하던 대학선배의 미군 주소지로 이 책의 원서를 배달받았다. 총 4부작인 토끼 시리즈가 한 권으로 묶여 있는 책이었다. 한데 그 책은 단 두 쪽만을 읽었을 뿐이다(그 책은 아직도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드릴 의향이 있으니 알려 달라. 목침으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우니 이 점 염두에 두시고).

『달려라, 토끼』를 읽게 된 것은 지금 나이의 절반이었을 때보다 꼭 그만큼 더 나이를 먹고 난 뒤였다. 한마디로 최근이라는 말이다. 그사이 나는 많은 미국 소설들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 부캐넌이 저택의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레코드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만이 내가 생각했던 전형적인 미국의 장면들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사실 미국은 어디에나 있었다. 미국의 이미지는 내가 자라난 대전에서도, 성년이 된 뒤 살게 된 서울에서도 넘쳐났다. 나의 ‘미국 3부작’은 다른 것들로 끊임없이 대체될 수 있었고, 3부작이라는 낱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읽게 된 『달려라, 토끼』는 각별했다. 예상대로였다. 내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와 베트남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미국을 관통했던 시대에 대한 관심이 있는데, 대공황도 지나갔고 전쟁도 끝났으며 현대적인 산업사회가 제시하는 끝없는 풍요의 비전을 목도했던 이 시기의 미국인들이 여전히 어떤 공포가, 어떤 비참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감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그리고 물론 이런 예감은 오늘의 한국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한때는 누구나 감탄하는 농구선수였던 래빗 앵스트롬은 어느 날 임신 중인 아내를 떠난다. 그는 장인이 억지로 사게 한 자동차로 몇 시간을 달려간다. 그리고 돌아간다. 그러나 아내에게가 아니다. 그는 다른 여성의 아파트에서 삶을 이어간다. 임신 중이었던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 딸이다. 래빗은 드디어 아내에게로 돌아간다. 언젠가 그가 골대를 향해 공을 던졌을 때, 그물을 조금도 흔들지 않고 공이 바닥으로 떨어져,

공이 들어간 것인지 아닌 것인지를 알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그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공의 궤적을 분명히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다시 집을 나간다. 알코올 중독이던 아내는 갓난아이를 익사시킨다. 실수였지만 늘 그렇듯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한때 래빗을 받아들였던 여성은 래빗의 아이를 임신 중이다. 그러나 희망은 없다. 래빗은 달리기 시작한다.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은 부질없다. 줄거리가 함축할 수 있는 것은 줄거리뿐이다. 위의 줄거리를 자세히 읽어보라.

어디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를 벗어날 수 있는 까닭은

래빗의 무책임한 불안이, 무책임한 탈주가 우리의 연민과 짜증, 그리고 불안과 공포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이런 불안을 ‘미국적인 불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이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처럼,

이런 불안 또한 어디에나 존재한다. 모든 평온은 잠정적이며, 대개 사소한 것들이, 찰나의 순간들이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평화와 안락함을 불시에 제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래빗의 무책임한 도피를 쉽게 비난할 수 없다.

이는 무수히 많은 소설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중 하나다.

달리기 시작한 래빗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행방은 아직 내가 읽지 않은 (혹은 읽지 못한)

책 속에서 확인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돌아온 토끼』나 『토끼는 부자다』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언제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때로는 나와 닮은 모습으로. 혹은 당신과 닮은 모습으로.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상황에서, 그러나 미세한 혈관처럼 뒤엉킨 이야기의 세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존 업다이크는 아름다운 문장들로 래빗 앵스트롬의 불안을

그려냈다(자꾸만 내가 불안을 들먹이는 까닭은 Angst가 독일어로 불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독일어가 나의 영혼을 잠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불안은 아마 아름다운 문장들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비참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비참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아니니까.

다행스럽게도.

한유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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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적응 못하고 도주하는 래빗

♣'달려라, 토끼'줄거리
 

『달려라, 토끼』는 ‘20세기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업다이크가 1960년 발표한 작품으로,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다.

전미도서상과 퓰리처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업다이크는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미국의 소도시에 사는 신교도 중간 계급’을 다룬 소설로 독서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강렬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달려라, 토끼』는 그런 그의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고교 시절 유명한 농구선수였지만 졸업 후

평범한 세일즈맨이 된 해리 앵스트롬(래빗)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견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지만 지난날의 화려한 명성을 잊지 못하는 래빗은 결국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아내와 자식을 버려둔 채 도주한다. 정신적 공허감을 견디지 못하고 가정을 버리는 래빗은

소시민들의 정신적 고독과 방황을 대변한다.

업다이크는 『달려라, 토끼』 이후 『돌아온 토끼』『토끼는 부자다』『토끼 잠들다』로 이어지는

 ‘토끼 4부작’을 10년 단위로 발표하며 주인공 래빗의 20대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려냈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형제이자 친한 친구’로 칭한 래빗과 평생을 함께했다.

원제:Rabbit, Run

저자:John Updike(1932~2009)

발표:1960년

분야:미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달려라, 토끼

옮긴이:정영목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7(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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