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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왼손에 새겨진 글자 하나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소설이 있다. 종이에 메모를 하면서 따라 읽어야 무슨 이야기인가 대충 감 잡을 수 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그냥 까닥까닥 엄지발가락을 흔들면서 읽어도 아무 지장 없는 소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러시아 1급 소설들은 전자인데,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주로 ‘스키’나 ‘레프’ ‘세프’로 끝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스키’가 그 ‘스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딴 ‘스키’일 때 느껴지는 허망함(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은 또 왜 그다지도 많단 말인가. ‘스키’들이 떼로 등장할 때의 어리둥절함이란, 말을 말자).

 그러니 어쩌나. 백지 위에 남의 집 가계도를 열심히 그려가면서 소설을 읽어나갈 수밖에.

우리에게 러시아 소설들이 시베리아 잣나무처럼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좋을 존재로 남은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왼손잡이》는 따로 메모가 필요 없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그냥 ‘왼손잡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우리에게 도통 메모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서둘러 넘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즉, 플롯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이란 뜻이다.

사실 ‘왼손잡이’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영국에서 현미경을 통해서야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인공 벼룩(이 벼룩은 열쇠를 넣어 돌리면 펄쩍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한다)을 선물받은 러시아 황제는 자국의 기술이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믿었고, 그래서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장인들에게 이 인조 미생물을 보여주고 뭘 할 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라고 하라.

나는 짐의 사람들이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노라’라고. 그래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사팔뜨기에 왼손잡이인 우리의 주인공이다.

 뺨에 커다란 반점이 있고, 관자놀이 부근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버린 우리의 왼손잡이는 현미경도 없이 2주일 만에 뚝딱 놀라고 까무러칠 만한 장치를 인공 벼룩에 장착하고 만다(아아, 그게 어떤 장치인지는 차마 이 자리에서 밝힐 수가 없다. 그저 깜찍한 어떤 것이라고밖에).

그리고 그 공로로 영국에 가게 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무지막지한 술내기 끝에 병원 복도 바닥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레스코프는 가방끈이 긴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 학교를 중퇴한 후 대부호들의 영지를 조사하는 일을 맡아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닌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의 문학적 자산이 되었고, 그때 만난 많은 민중들이 그의 소설 쓰기 스승이 되었다.

 ‘왼손잡이’ 역시 그가 들은 전설에 기초해 쓰인 작품이었다(후에 그는 그것이 전설이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아마도 전설이 맞을 거 같다.

전설이 아니라고 해야지 독창성이 인정되니까, 어쨌든 작가들이란 그것에 목매는 법이니까).

왼손잡이 이야기가 전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구현해냈는가, 하는 점이다. 멀리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형뻘이자, 가깝게는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속 ‘황만근’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레스코프의 왼손잡이는, 자신의 몸 전체를 소진시키면서까지도 ‘인간다운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레스코프의 의도는 명확한 것이었다. 작품 말미에 그가 사족인 듯 남긴 말처럼 ‘기계 문명’의 발전이 위험한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상상력까지 녹여 더 이상 ‘전설’이 태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데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 속 왼손잡이를 사람이 아닌, ‘전설’ 그 자체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술에 취한 채 허름한 병원 복도 구석에서 숨을 거둔 전설, 지배 계층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전설.

레스코프의 말대로 우리는 이미 전설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말보다 문장이 우선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짓는 주름과 눈빛, 손짓과 잔기침은 모두 문장과 문장 사이로, 강철 같은 인과관계 틈 사이로 녹아들고 말았다.

 설령 새로운 전설이 우리 귀와 귀 사이로 흘러 들어온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다시 140자로, 리트윗으로 처리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까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고 마음을 내주는 까닭은, 우리 모두의 왼손에 적힌 한 글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그 글자가 궁금하면 지금 당장 당신의 왼쪽 손바닥을 가로로 펼치고 거기에 적힌 손금을 읽어보라.
 거기 분명 한 글자가 적혀 있다). 그 글자가 우리에겐 유일한 희망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개인 개인이 전설을 만들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 전설을 들려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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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하게 죽어가는 왼손잡이 대장장이

니콜라이 레스코프는 1831년 러시아 중부 오룔 현 고로호보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방 관청 서기로 근무하며 당시 러시아의 생생한 현실을 접했고, 이때의 경험이 러시아 민중의 삶과 밀착된 작품을 쓸 수 있는 토대가 됐다.

 1863년 첫 단편 《사향소》를 발표했고, 1872년 대표작으로 꼽히는 《성직자들》의 출간과 함께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작가가 됐다.

 그가 구사했던 언어와 특이하고 실험적인 장르 파격은 문단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으며 체호프와 고리키 등 20세기 초반 문학 양식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95년 눈을 감기까지 문단의 호평과 독자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은 작가 레스코프는 오늘날까지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 불리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왼손잡이》는 러시아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자 러시아적 정서의 원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꼽힌다.

 천재 장인으로 대접받을 만한 대장장이 왼손잡이가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초라하게 죽어가는 이야기를 통해 러시아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온갖 은어와 충청도 사투리까지 동원해 레스코프 특유의 언어를 전달하고자 한 번역가의 노력이 더해져 원문의 생생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왼손잡이’에는 농노제의 부조리와 농노들의 한(恨)을 비극적으로 형상화한 《분장예술가》, 러시아의 종교와 예술에 대한 작가의 풍부한 지식과 애정이 문학적으로 승화된 《봉인된 천사》 두 편도 함께 실려 있다.



원제: Левша·Тупейный художник·Запечатлений ангел

저자: 니콜라이 레스코프(1831~1895)

발표: 1881~1873

분야: 러시아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왼손잡이

옮긴이: 이상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2(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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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더블린 사람들

 


어떤 도시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낳기도 하지만 어떤 문학작품은 도시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없었다면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쓸 수 없었겠지만 더블린에 사는 인간 군상을 그린 ‘더블린 사람들’이 세상에 나온 뒤로 더블린은 더 이상 그 이전의 더블린일 수 없게 되었다.

‘더블린 사람들’ 이전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한 도시였지만 ‘더블린 사람들’ 이후 더블린은 ‘더블린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더블린이라는 도시에 살아서 더블린 사람들인 것이 아니라 더블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서 더블린인 것이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뉴요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뉴요커들이 사는 곳이 뉴욕인 것처럼, 파리에 사는 사람들이 파리지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파리지앵이 사는 곳이 파리인 것처럼.

대개는 도시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규정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의 특징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뉴요커라고 부를 때, 파리지앵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의 물리적 특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뉴요커라고 부를 때, 파리지앵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것들은 특정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성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욕망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더블린 사람들’이야말로 더블린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머지 더블린이라는 도시와 거의 무관해 보일 정도다.

 그러니까 ‘더블린 사람들’이란 더블린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본원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인 것이다.

친구의 누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허세를 부리는 소년도, 새로운 인생을 도모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가족이라는 굴레 때문에 망설이는 처녀도, 자신보다 떨어진다고 여기는 친구의 성공에 자극받아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꿈꿔보는 소심한 사내도, 신기루 같은 환상으로 남루한 현실의 쓸쓸함을 달래는 노처녀도, 댄스파티의 흥취에 들떠 있다가 아내로부터 죽은 연인에 대한 고백을 듣는 사내도, 딸의 입신양명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도, 밖에서 수모를 겪고 집으로 돌아와 어린 아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주정뱅이도 모두모두 우리 안의 우리들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가 너무 많아서 저마다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이블린, 챈들러, 마리아, 게이브리얼, 커니 부인, 패링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리 안의 우리들이 사는 우리 안의 마을이 바로 더블린이다.

더블린은 우리 안의 수많은 우리가 좌절하고 소리 지르고 술 마시고 번민하고 주저하고 질투하고 자책하는 우리 마음 깊은 곳을 부르는 지명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아프다고 말할 때 우리는 더블린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고 마음이 무겁다고 말할 때 우리는 더블린이 무겁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블린은 우리 자신에게도 수수께끼이자 미스터리인 우리의 마음이고 내면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반들반들하게 닦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볼 기회를 주기 위해 ‘더블린 사람들’을 썼노라고 조이스는 말했다.

문학작품은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어서 우리가 문학작품에서 찾아내야 할 것은 작가의 메시지나 교훈이나 상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조이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을 위한 거울을 빚었지만 그 거울은 아일랜드 사람들만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반질반질하다.

 조이스는 동시대의 아일랜드 사람들을 위한 거울을 만들었지만 그가 만든 거울은 시대와 국가를 초월해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 되었다.

 보편성 속의 특수성, 특수성 속의 보편성.

 하나이면서 모두이며 모두이면서 하나인 것.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작품의 운명이라고 부른다.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거울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거나 무시하고 싶거나 부정하고 싶은 우리 마음속의 그늘을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알 수 없는 게 뭐니?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거울 속에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리하여 ‘더블린 사람들’을 읽을 때 우리는 모두 더블린 사람들이다. 아니, 더블린 사람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스무 살에 읽으면 스무 살의 우리 자신을, 마흔 살에 읽으면 마흔 살의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더블린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반질반질한 거울이니까. 누가 앞에 서든 마음 깊은 골짜기까지 비추는 절대거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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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에 사는 중산층 사람들의 이야기


20세기 문학사의 흐름을 바꾼 천재 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첫 작품 《더블린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문학 기법을 추구하며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문학 세계를 창출해냈다.

 당시의 문학 전통에 반기를 든 이 소설은 출판사와 마찰을 빚으며 번번이 출간에 실패하다가 탈고한 지 10년 만인 1914년에 출간되었다.

조이스의 문학은 T. S. 엘리엇, 헤밍웨이, 보르헤스, 나보코프를 비롯해, 근래에 와서는 움베르토 에코, 토니 모리슨, 살만 루슈디 등 수많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더블린 사람들’은 더블린에 살았던 중산층의 삶을 통해 더블린 전역에 퍼져 있는 정신적, 문화적, 사회적 병폐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총 15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그 내용에 따라 소년 시절, 청춘 시절, 성인 시절을 다룬 단편 각 3편과 사회생활을 다룬 3편, 그 밖에 조이스가 마지막에 덧붙인 3편으로 나눌 수 있다.

생애 처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하는 소년의 심리를 다룬 단편 《자매》, 사회적으로 성공한 옛 친구를 만나 열등감을 느끼는 주인공의 이야기인 《작은 구름》, 남자친구와 더블린을 떠나 새 삶을 찾기로 약속하지만 떠나는 날 끝내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좌절하는 한 처녀의 고뇌를 그린 《이블린》 등 당시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치열한 탐구를 바탕으로 인류 보편의 문제를 조명한 걸작이다.

원제: Dubliners

저자: James Joyce

발표: 1914년

분야: 영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더블린 사람들

옮긴이: 진선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3(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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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워지 않는 얼룩

초등학교 6년 내내 교복을 입어야 하는 학교에 다닌 나는 유독 교복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다.

그때는 하복도 동복도 달랑 한 벌뿐이었고 동복 상의에 부착하는 흰 깃만 두 개였다.

 5학년 여름,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몸이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한 K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

그런데 그날 내가 점심을 먹으며 흘린 반찬 국물이 교복 상의의 왼쪽 가슴께에 묻어 있어 계속 신경이 쓰였다.

 K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소파에 누워 있었고 K의 엄마가 과일을 가지고 나와 앉아 찬찬히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같은 동네라 부모가 뭘 하고 사는지 정도는 다 아는 사이였고 친구의 엄마는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키가 크구나. 그런데 교복에 뭘 묻히고 다니니 여자애가.”

K와 나는 그 후로 더 친해지지 못했고 남녀 학교로 갈라져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날 수돗가에 가 얼룩을 지워보려고 그토록 애썼지만 얼룩은 남아 있었고 K와 친해지지 못한 이유가 그 얼룩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인생의 얼룩에 관한 소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얼룩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소설의 제목처럼 ‘오점’(stain)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필립 로스는 8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이고 영미권의 평론가들이 ‘현대 미국을 충실히 기록한 거장’이라고 평가하는 작가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미국 남성 잡지 ‘플레이보이’에 연재되었던 작품들을 모은 앤솔러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에 실린 ‘이웃집 남자’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이웃집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 한 위태로운 중년 남자의 이야기로 쾌활하면서도 진지했다.

그리고 2000년대 후반, 죽은 사람이 화자로 등장하여 나이듦의 상실감과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회고하는 ‘에브리맨’, 한국전쟁 와중에 유대인 가정 출신의 촉망받던 한 대학생의 억눌린 학교 생활과 젊은 시절의 방황과 혼란을 다룬 ‘울분’ 등이 계속 번역 출판됐다.

작가에게 문장이란 혈액이나 유전자처럼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매력적인 문장은 작가에게 문장 하나씩 낱낱이 해체해 읽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독자들에게는 시대를 초월해 큰 감동을 준다.

필립 로스의 문장은 아름답다거나 완벽하다고 평가되지 않는다.

드라이한 설명체의 문장과 탐미적인 문장을 함께 쓰며, 문장의 길이와 어조가 다양해 독자로 하여금 활발한 지성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평가된다.

그만큼 그의 문장이 난해하고 복잡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욕망, 악과 선 사이를 속사포처럼 오가는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언어로 축조한 예술의 형식미란 이런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휴먼 스테인》의 주인공은 고전문학을 강의하는 유태인 노교수다. 그는 어느 날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두 학생을 향해 ‘스푸크’(spook)라고 말한다.

스푸크는 ‘유령’이라는 뜻이지만 흑인을 비하하는 뜻도 담긴 단어였다.

하필이면 그 두 학생이 흑인이었고 주인공 콜먼은 이 일로 대학 내에서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그는 자신에게 씌워진 오명을 벗고자 노력하지만 주위에서는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 소설은 주인공 콜먼이 추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중성, 잔인함, 고독, 복수 등을 적나라하게 비추며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의 강도가 거세지는 가운데, 그는 피부는 희지만 흑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백인이었고 지금껏 유태인으로 위장해 살아왔음이 밝혀진다. 대학교수였지만 흑인의 후예임을 당당히 밝히고 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콜먼이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 편견에 대항할 힘이 없는 나약한 한 인간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전 남편에게 시달리며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온 대학 청소부 포니아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콜먼과 포니아가 타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기까지 그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콜먼과 포니아의 마지막 나날들을 따라가다보면 콜먼 인생의 오점이 오히려 그를 사랑으로 이르게 하고, 비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움을 가지게 해주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뿌리가 흑인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콜먼의 오점은 과연 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다인종 다문화의 집결지인 듯한 미국 사회에서조차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사실은 사회의 오점, 국가의 오점인지도 모른다.

《휴먼 스테인》은 결국 인간이 가장 위험한 존재이며 또 가장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묵직한 울림으로 전해주는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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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숨겨온 콜먼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휴먼 스테인’ 줄거리

1998년 한 스캔들이 미국을 뒤흔든다. 빌 클린턴 대통령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

 대통령의 거짓말과 진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정쟁과 이전투구 앞에서 미국인들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휴먼 스테인》은 이 시기의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을 무대로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적ㆍ계급적 차별, 체면과 도덕성 이면의 위선과 편견을 가차 없이 보여준다.

유능한 교수이자 대학 행정가였던 콜먼.

강의 중 던진 한마디 때문에 그의 화려했던 경력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리고, 이 와중에 그의 인생 동지였던 아내마저 죽는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콜먼은 글로 자신의 억울함과 진실을 밝혀달라며 인근에 은둔해 사는 작가 주커먼을 찾아온다.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콜먼은 주커먼에게 지금까지의 삶의 궤적 그리고 자신이 포니아라는 여성과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사회적 신분과 삼십여 년의 나이차로 인해 따가운 눈총을 받던 두 사람은 결국 의심스러운 사고로 죽고, 이후 주커먼은 콜먼이 평생을 숨겨온 비밀을 알게 된다.

피부만 흰색이었을 뿐 그는 흑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흑인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기 위해 자신의 가족과도 절연했고, 평생 아내와 자식까지 속인 채 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과연 무엇이 총명하고 지적인 한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부인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조작하게 내몰았는가?

‘오점 없는’ 인간의 ‘오점 없는 삶’이란 어떠한 것인가? 진정 그런 삶은 가능한 것인가?

원제: The Human Stain

저자: Philip Roth(1933~ )

발표: 2000년

분야: 미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휴먼 스테인

옮긴이: 박범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9~020(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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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들

세상에는 수많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 제가 접한 것만 해도 몇 가지는 떠올릴 수 있겠군요.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과묵한 종말론적 여행기입니다.

‘한낮의 시선’을 포함한 이승우의 소설은 아버지=신에 대한 기나긴 애증서사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김애란의 근작 ‘두근두근 내 인생’은 먼저 늙어가는 자식과 어린 부모에 대한 속 깊은 청춘소설입니다.

황정은의 ‘모자’는 아버지가 조용하고 침울한 모자가 되어버리는 매력적인 이야기였죠.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들들’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어떤 아버지와 어떤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세대로서의 ‘아버지들’과 신세대로서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소설 속의 아버지들은 귀족의 정신과 로맨틱한 몽상, 그리고 예술에 대한 숭배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19세기 초중반 수십년을 풍미한 게 이른바 낭만주의였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런 낭만적 ‘아버지들’에 대한 ‘아들들’의 반항이 시작됩니다.

 예술적 ‘교양’이 넘쳤던 ‘아버지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들들은 거칠고 완강한 유물론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술과 영혼의 단련보다 개구리 해부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을 매료시킨 것은 고상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유물론적인 사고였습니다. 물론 아직 성숙한 ‘이념’에는 이르지 못해서 ‘속류적’ 유물론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이 신세대들을 ‘허무주의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니힐리즘이라는 말 자체가 이 무렵 만들어졌다고 해요.

그때는 우리가 지금 쓰는 것처럼 ‘인생이 허무하다’는 식의 수동적이고 퇴행적인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죠.

1860, 1870년대의 소위 ‘니힐리스트들’은 당대를 지배하던 가치들을 ‘무(nihil)’로 돌리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귀족적이고 교양 있는 아버지들과 달리 일부러 행색을 헝클어뜨리고, 일부러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반항아들이기도 했습니다.

 주류에 대한 적의야말로 ‘아들들’의 에너지였겠지요.

나중에 사상가이자 소설가였던 체르니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 니힐리즘을 혁명의 동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반대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이나 ‘죄와 벌’ 등에서 이 급진적 니힐리즘을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선배’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바자로프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지 19세기의 산물인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모든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들어 있습니다.

그 긴장과 갈등을 넘어서는 애증의 드라마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사랑과 인정을 원하면서 동시에 서로를 밀어냅니다.

그 애증의 드라마들은 인간의 시간을 앞으로 이끌어가는 힘이기도 합니다. 역사란 그렇게 절뚝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만으로는, 반대로 증오만으로는, 걸어갈 수 없는 한 사람처럼 말이죠.

아버지들과 아들들(‘어머니들’과 ‘딸들’까지 포함하는 말로 이해해주시기를)은 단지 ‘세대차’ 때문에 싸우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는 어떻게든 다른 세계를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져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 때문에 슬프고, 때로는 그 때문에 기쁠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세계를 살아가면서, 아들들은 이윽고 아버지들이 됩니다. 사라진 아버지들도 다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라진 아버지들은 또 후대에 먼 아들들의 정신 속에 환생할 테니까요.

그것이 시간이라는 것인지도, 또는 역사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 폼페이의 폐허에서도 “요새 젊은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글귀가 발견되었다고 하지요.

생각해보면 어쩐지 정감이 가는 말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 늙으신 아버지와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최근 들어 부쩍 죽음과 친해진 표정입니다. 그것은 이미 나이듦에 대한 하소연 같은 것은 아닙니다.

아들을 앞에 두고도, 영혼의 한쪽은 이미 먼 곳에 가 계신 느낌입니다. 삶의 저편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역사에도 그런 시간이 올까?

말하자면 역사가 죽음에 가까이 가서,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갈등이 희미하고 아련해지는 시간이?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와 역사가 존속되는 한, 아버지들과 아들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거라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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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감정이라 여겼던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아들’줄거리

《아버지와 아들》은 19세기 러시아의 사실주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대표작이다. 투르게네프는 당시의 시대상과 인간상을 서정적 필치로 묘사하며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연대기 작가’로 불렸다.

당시의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을 ‘아버지 세대’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을 ‘아들 세대’로 대표해 그 갈등과 대립을 세밀하게 그린 이 작품은 세대 간, 계급 간의 갈등뿐 아니라 자식을 향한 부모의 변함없는 애정을 아름답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아름다운 러시아의 자연 등 시·공간을 초월한 소재를 조화롭게 녹여내며 소설가 나보코프에게 “투르게네프의 최고 걸작일 뿐 아니라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소설”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한 아르카디와 바자로프가 아르카디의 고향 마리노 마을에 도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친구 아르카디의 저택에 잠시 머무르게 된 바자로프는 귀족주의에 젖어 아무 생산 활동도 하지 않은 채 탁상공론만 일삼는 아르카디의 큰아버지 파벨과 정치·사상·문화·예술 등 모든 방면에서 대립한다.

진보적이며 급진적 성향을 띤 바자로프는 스스로를 니힐리스트라 칭하며 세상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심지어 인간의 사랑까지 부정한다.

그러면서 아르카디의 아버지 니콜라이가 아들에게 보이는 애정까지 전부 쓸모없는 로맨티시즘으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파티에서 만난 오딘초바 부인에게 열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평소 자신이 주장했던 것과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고 바자로프는 고뇌에 빠지는데…….

원제: Отцы и дети

저자: 이반 투르게네프 (1818~1883)

발표: 1861년

분야: 러시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아버지와 아들

옮긴이: 이항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5(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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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불행, 더 많은 환란을!

중독은 대개 아무 의미도 갖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술이나 문장에 중독되는 건 문장에 심취해서도 술을 사랑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사랑하고 취하려 애쓰는 척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경향에 불과하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은 타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중독엔 딱 꼬집어 말할 만한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 있다면 그건 중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의 속도와 관련될 뿐, 어떤 일관된 내용과 지향점을 갖지 않는다.

그저 빠지기 위해 빠져들 뿐이다. 《몰락하는 자》는 내뱉기에 중독된 자의 처절한 자기고백으로 읽힌다.

“글렌과 냉혹성, 글렌과 고독, 글렌과 바흐, 글렌과 골트베르크 변주곡, 난 생각했다.

글렌과 산림 스튜디오, 인간에 대한 글렌의 증오, 음악에 대한 증오, 음악인에 대한 증오, 난 생각했다.

글렌과 간결함, 식당을 둘러보면서 난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아야 해, 난 생각했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옐리네크 등과 더불어 20세기 독일어권 문학계의 이단아로 통한다.

셋은 공히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했으나 모국에 대한 분노와 인간과 예술에 대한 환멸을 독자적인 방식의 언어 살해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종종 같은 범주로 묶인다.

하지만 문학사의 특정 경향은 한약방의 약재 상자처럼 일목요연하게 분류될 수 없는 법이다. 문학은 결국, 어떤 개인의 지독한 체취에 불과할 수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 안의 요설들을 가감 없이 토해내는 방식으로 기존 소설의 서사구조를 뒤틀어놓는다. 그렇게 그는 오스트리아 문학계의 ‘악한’ 또는 ‘내부의 적’이 됐다.

《몰락하는 자》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화자인 ‘나’와 친구 베르트하이머는 28년 전 레오폴츠크론 지역에서 호로비츠로부터 피아노를 사사했다. 그때 그들은 살아 있는 피아노의 신화 글렌 굴드를 만났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천재성에 절망을 느낀 나머지 피아노를 포기하고 정신과학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끝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밑도 끝도 없는 장광설을 풀어놓는다.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자신의 불행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 자살한 것이라 결론짓는다.

그러나 여기서 잘 알려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연상하는 건 문제의 핵심에서 많이 벗어난다.

이 작품은 인간관계의 어떤 정식이나 애증의 복합구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베른하르트는 예술과 자연, 사랑과 집착, 그리고 질투에 대한 뿌리 깊은 천착을 통해 언뜻 뒤집어진 채 매장돼 있는 숨은 진실들을 파헤친다.

이를테면, 더 악해지거나 죽기 위해 사는 열망도 존재한다는 사실.

자연이든 예술이든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인간을 옥죄는 우주의 사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사실.

삶을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상은 은밀한 파멸충동에 대항한 소심한 분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이 모든 ‘어두운 진실’들은 어쩌면 예술이 진정으로 탐구하고 제시해야 하는 ‘진짜 문제’들일 수 있다.

 베른하르트는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듯하다.

예술이 위대한가. 아니다. 삶을 초과하는 모든 것은 삶을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마치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마을의 빛을 잠식해버리는 것처럼.

늘 그렇듯, 베른하르트는 이야기를 지어내기 위해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는 “산문의 언덕 너머로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고 말할 정도다.

그는 그저 스스로를 끝닿는 데까지 몰아가는 정념과 분노, 그리하여 소진되는 세계에 대한 비전과 자아의 궤멸 양상만을 적나라한 말의 범람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허영과 위선, 가식과 환멸로 지탱되는 세계의 위장막 앞에서 그는 벌거벗고 소리친다.

그 외침은 그러나 자신을 더 커다란 고독의 상자 속에 가두는 울타리가 된다.

고독의 농도가 짙은 만큼, 울타리 속의 공기는 더 팽팽하고 첨예하다.

 내밀한 소리로 응결된 음표들이 그 안에 잔뜩 부유한다.

공허가 딴딴하게 뭉쳐지면 칼날이 되고, 분노가 안으로 삭으면 섬려한 가시가 된다.

 베른하르트는 날카로운 언어의 가시와 사유의 칼날로 스스로 부풀어 오른 고독의 맨살들을 발라낸다.

 어떤 짐승의 본능에 가까운 몸부림과 애잔함, 폭발 직전의 광기와 세계와 결별하기로 작정한 자의 통 큰 회의가 그 안에 가득하다.

대신, 모든 감정이 중화된다.

슬픔이 넘쳐 눈물은 돌멩이가 되고 냉소와 위트가 소스라치게 곤두서 되레 말라붙은 사막이 펼쳐진다.

쓰리고 침침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중독이 그러하듯, 한번 몸을 담그면 쉬이 빠져나올 수 없다.

만인의 이해가 미덕인 양 권장되는 건 예술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다.

글렌 굴드는 그게 싫어 중증 결벽증 환자로 살다 갔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굴드는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굴드일까.

혹시 그는 베른하르트가 암살하고 싶어 했던 또 다른 인생의 적, 그 자신의 숭고한 자아가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대중의 환희는 예술에 대한 경망스러운 모독에 지나지 않는다.

파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사는 삶도 있는 법이다, 세상에는. 그 앞에서 섣불리 울지도 웃지도 말라. 정말 그의 옷섶엔 번쩍번쩍 살기가 도는 총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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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목을 매 자살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 '몰락하는 자' 줄거리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잉게보르크 바흐만, 페터 한트케와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생전에는 카프카와 자주 비견되었고, 동시대에 활동했던 사뮈엘 베케트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과 전쟁의 경험으로 죽음, 절망, 파멸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어느 수상 소감에서 직접 “죽음은 나의 영원한 테마”라고 밝혔듯 베른하르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한 인물이 죽기까지의 정서적 혼란이 독설과 냉소에 찬 어조로 서술된다.

《몰락하는 자》 또한 우연히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서서히 파멸을 맞는 인물을 통해, 이상적 예술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1인칭 화자의 회상과 성찰을 중심으로 단락의 구분 없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서술했으며, 실존 인물인 글렌 굴드를 등장시켜 출간 당시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어느 날, 화자인 ‘나’는 28년 전 잘츠부르크의 음악 대학에서 함께 피아노 수업을 들었던 친구 베르트하이머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는다. 장례식에 참석한 ‘나’는 친구가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베르트하이머가 자살한 이유가 ‘금세기 최고의 피아노 연주자’이며 그들의 대학 동창이기도 했던 글렌 굴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깨닫는데……

원제: Der Untergeher

저자: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

발표: 1983

분야: 오스트리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몰락하는 자

옮긴이: 박인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8(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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