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적 본성만 남은 인간···신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할까
'순교자'는 유령처럼 떠도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런 것 있지요, 명성만 있고 실체는 찾을 수 없어서 소설이 가진 진정한 의미보다 필요 이상 확대되거나, 혹은 절하되어 소문으로만 떠도는 책 말입니다.
제겐 '순교자'가 그러했는데요, 이번이 그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책을 펴든 내내 독서하면서 잊고 있던 설렘 같은 것도 다시 찾을 수 있었고요.
이 책에서 가장 먼저 흥미를 느낀 점은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재미작가의 작품이라는 것, 그러니까 1964년에 출판되어 미국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책도 이력이란 걸 갖게 되면 독자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책에 운명 지어진 수식어보다도 그 본문의 텍스트만으로 생명력이 없다면 작품은 존재하기 힘든 법입니다. 자, 이제 왜 '순교자'가 순교한 것인지, 천천히 책장을 넘겨봅니다.
저는 이 책을 여행하면서 읽었습니다.
최근에 몽골로 열흘간 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책이라곤 '순교자' 한 권만 들고 갔습니다.
다짐은 열흘 동안 꼼꼼하게 읽기, 두 번도 좋고, 가능하면 세 번 읽어도 좋겠다, 했었지요.
그러나 다짐과는 달리 비행기의 이륙과 동시에 시작한 독서는 여행 내내 더디기만 했습니다.
내용이 재미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장이 어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읽었던 페이지를 이상하게도 반복해서 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물이 쏟아내는 대사와 화자의 서술문 안에 깃든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곱씹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가 김은국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주제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읽는 내내 기이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조금 쉽게 감상을 풀자면, 책을 읽으며 뒷이야기가 궁금해 죽겠어서 후다닥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데, 바로 눈앞에 펼쳐진 문장은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에서 더욱더 특별한 점은 소설의 흡입력이 굉장하다는 것인데요, 소설 속 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적인 기법, 빠른 전개와 반전, 그리고 가독성을 높이는 단문의 문체-옮긴이 도정일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조한 문체 뒤에 깊게 숨겨진 폭발적 열정-는 이 소설이 가진 대단한 위력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천천히, 느릿느릿 '순교자'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 위에서 고통의 근원에 대해 골똘해졌습니다. 처연한 생각으로 한국이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61년 전 발발한 나라의 비극적 상황과 전쟁에 휩쓸려 함몰된 인간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고통당하는 인간으로 내버려 두는 신과, 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광과 선선한 바람이 책을 읽는 내내 겹쳐졌습니다. 자연 위에 남은 인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성이 거세된 동물적 본성만 남은 인간이 전쟁의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모티프로 작동하는 6 · 25전쟁, 공간과 시간 위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처절합니다.
소설의 주요 줄거리는 6 · 25전쟁 직전 평양에서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된 열네 명의 목사들 가운데 어째서 두 명의 목사만이 살아남았는가 하는 진실을 육군본부 정보처 이 대위와 장 대령이 추적하는 것인데요, 결국 정치적 선전을 위해 모든 진실은 위선으로 지켜집니다.
순교자를 만들어야만 하는 난처한 진실은 숨겨져야 하는 진실성을 내파(內波)하는 듯 보입니다.
빠르게 문장을 쫓는 눈이 한곳에 유난히 오래 멈춰 섭니다. 읽은 부분을 반복해서 또 읽고, 읽게 만드는 참주제가 보이는 253~256쪽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인데요, 조금 길지만 옮겨봅니다.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중략) 거짓말에 거짓말의 연속 아닙니까? 열두 명의 목사들은 모두 이유 없이 도륙당했습니다.
그들의 신의 영광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 당신의 신은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판국에 당신께선 신을 찬미하다니요!(중략)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
신에 대한 문제 제기는 스스로 절망을 품는 것으로 답을 맺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비이성적 산물인 전쟁. 전쟁은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고, 실존은 신의 존재와 맞물립니다.
신의 존재 유무는 인간이 겪는 절망과 고통에 대한 고뇌가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의 근원'을 신이 우리 인간에게 준 첫 번째 의무라고 읽는다면 오독하는 걸까요.
갈등하고 불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고통과 절망이 인간이 지닌 최고의 진실성이라고 읽었다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일까요.
인간이 겪는 절망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 생존에 대한 맹렬함만을 남깁니다.
그리하여 '실존하는 고통'이 신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백가흠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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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 목사
▶'순교자' 줄거리
'순교자'는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의 대표작이다. 6 · 25전쟁 당시 평양을 무대로 한 이 소설은, 이념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나가며 그 과정에서 겪는 신앙과 양심의 갈등을 그려낸 작품이다.
6 · 25전쟁 발발 직전 열네 명의 목사가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중 열두 명은 총살당하고 살아남은 자는 두 명뿐이다. 1950년 11월 국군의 평양 입성 후, 육군본부 정보처 평양 파견대의 장대령은 '나(이 대위)'와 함께 열두 명의 '순교자'들에 관한 사건을 수사한다.
그들의 임무는 생존자 중 한 명인 신 목사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지만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신 목사는 끝끝내 침묵한다.
하지만 장 대령은 진실과 상관없이 북한 괴뢰정권에 목사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을 선전용으로 이용하려 한다.
결국 장 대령은 열두 목사를 영웅적이고 성스러운 '순교자'로 규정하고 추도예배까지 계획한다.
하지만 순교자들에 관한 진실과 목자로서의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신 목사는 마침내 굳게 닫았던 입을 여는데….
1964년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대지'의 작가 펄 벅은 "신앙을 갈망하는 데서 비롯되는 의혹과 고뇌를 다루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LA타임스는 "'순교자'를 위대한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20세기 작품군에 포함될 만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세계 1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 고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원제:The Martyred
저자:Richard E Kim(1932~2009)
발표:1964년
분야:미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순교자
옮긴이:도정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1(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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