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동물적 본성만 남은 인간···신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할까

'순교자'는 유령처럼 떠도는 소설이었습니다.

그런 것 있지요, 명성만 있고 실체는 찾을 수 없어서 소설이 가진 진정한 의미보다 필요 이상 확대되거나, 혹은 절하되어 소문으로만 떠도는 책 말입니다.

제겐 '순교자'가 그러했는데요, 이번이 그 실존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책을 펴든 내내 독서하면서 잊고 있던 설렘 같은 것도 다시 찾을 수 있었고요.

이 책에서 가장 먼저 흥미를 느낀 점은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재미작가의 작품이라는 것, 그러니까 1964년에 출판되어 미국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책도 이력이란 걸 갖게 되면 독자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 책에 운명 지어진 수식어보다도 그 본문의 텍스트만으로 생명력이 없다면 작품은 존재하기 힘든 법입니다. 자, 이제 왜 '순교자'가 순교한 것인지, 천천히 책장을 넘겨봅니다.

저는 이 책을 여행하면서 읽었습니다.

최근에 몽골로 열흘간 여행을 다녀왔는데요.

책이라곤 '순교자' 한 권만 들고 갔습니다.

다짐은 열흘 동안 꼼꼼하게 읽기, 두 번도 좋고, 가능하면 세 번 읽어도 좋겠다, 했었지요.

그러나 다짐과는 달리 비행기의 이륙과 동시에 시작한 독서는 여행 내내 더디기만 했습니다.

내용이 재미없어서가 아닙니다. 문장이 어려워서도 아니었습니다. 읽었던 페이지를 이상하게도 반복해서 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물이 쏟아내는 대사와 화자의 서술문 안에 깃든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곱씹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작가 김은국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주제에 대해 곰곰히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읽는 내내 기이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조금 쉽게 감상을 풀자면, 책을 읽으며 뒷이야기가 궁금해 죽겠어서 후다닥 빨리 읽어버리고 싶은데, 바로 눈앞에 펼쳐진 문장은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에서 더욱더 특별한 점은 소설의 흡입력이 굉장하다는 것인데요, 소설 속 사건을 풀어가는 추리적인 기법, 빠른 전개와 반전, 그리고 가독성을 높이는 단문의 문체-옮긴이 도정일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건조한 문체 뒤에 깊게 숨겨진 폭발적 열정-는 이 소설이 가진 대단한 위력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천천히, 느릿느릿 '순교자'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 위에서 고통의 근원에 대해 골똘해졌습니다. 처연한 생각으로 한국이 있는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61년 전 발발한 나라의 비극적 상황과 전쟁에 휩쓸려 함몰된 인간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고통당하는 인간으로 내버려 두는 신과, 그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광과 선선한 바람이 책을 읽는 내내 겹쳐졌습니다. 자연 위에 남은 인간을 바라보았습니다.

이성이 거세된 동물적 본성만 남은 인간이 전쟁의 대지 위에 서 있습니다.

모티프로 작동하는 6 · 25전쟁, 공간과 시간 위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은 처절합니다.

소설의 주요 줄거리는 6 · 25전쟁 직전 평양에서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된 열네 명의 목사들 가운데 어째서 두 명의 목사만이 살아남았는가 하는 진실을 육군본부 정보처 이 대위와 장 대령이 추적하는 것인데요, 결국 정치적 선전을 위해 모든 진실은 위선으로 지켜집니다.

순교자를 만들어야만 하는 난처한 진실은 숨겨져야 하는 진실성을 내파(內波)하는 듯 보입니다.

빠르게 문장을 쫓는 눈이 한곳에 유난히 오래 멈춰 섭니다. 읽은 부분을 반복해서 또 읽고, 읽게 만드는 참주제가 보이는 253~256쪽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인데요, 조금 길지만 옮겨봅니다.

"목사님의 신이건 그 어떤 신이건 세상의 모든 신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인간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 많은 전쟁, 그리고 그 밖의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중략) 거짓말에 거짓말의 연속 아닙니까? 열두 명의 목사들은 모두 이유 없이 도륙당했습니다.

그들의 신의 영광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들의 죽음에 대해 당신의 신은 그렇게 무관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판국에 당신께선 신을 찬미하다니요!(중략) 계속 괴로워해야겠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

신에 대한 문제 제기는 스스로 절망을 품는 것으로 답을 맺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비이성적 산물인 전쟁. 전쟁은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고, 실존은 신의 존재와 맞물립니다.

신의 존재 유무는 인간이 겪는 절망과 고통에 대한 고뇌가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의 근원'을 신이 우리 인간에게 준 첫 번째 의무라고 읽는다면 오독하는 걸까요.

갈등하고 불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고통과 절망이 인간이 지닌 최고의 진실성이라고 읽었다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일까요.

인간이 겪는 절망은 인간의 동물적 본성, 생존에 대한 맹렬함만을 남깁니다.

그리하여 '실존하는 고통'이 신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백가흠 소설

--------------------------------------------------------

신앙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 목사

▶'순교자' 줄거리

'순교자'는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의 대표작이다. 6 · 25전쟁 당시 평양을 무대로 한 이 소설은, 이념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의 진실을 밝혀나가며 그 과정에서 겪는 신앙과 양심의 갈등을 그려낸 작품이다.

6 · 25전쟁 발발 직전 열네 명의 목사가 공산군 비밀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중 열두 명은 총살당하고 살아남은 자는 두 명뿐이다. 1950년 11월 국군의 평양 입성 후, 육군본부 정보처 평양 파견대의 장대령은 '나(이 대위)'와 함께 열두 명의 '순교자'들에 관한 사건을 수사한다.

그들의 임무는 생존자 중 한 명인 신 목사에게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는 것이지만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신 목사는 끝끝내 침묵한다.

하지만 장 대령은 진실과 상관없이 북한 괴뢰정권에 목사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만을 선전용으로 이용하려 한다.

결국 장 대령은 열두 목사를 영웅적이고 성스러운 '순교자'로 규정하고 추도예배까지 계획한다.

하지만 순교자들에 관한 진실과 목자로서의 사명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신 목사는 마침내 굳게 닫았던 입을 여는데….

1964년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대지'의 작가 펄 벅은 "신앙을 갈망하는 데서 비롯되는 의혹과 고뇌를 다루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LA타임스는 "'순교자'를 위대한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20세기 작품군에 포함될 만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세계 10여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에서는 1965년 고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원제:The Martyred

저자:Richard E Kim(1932~2009)

발표:1964년

분야:미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순교자

옮긴이:도정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1(2010년)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자살처럼,우리에게 다가오는···

카프카를 생각하면 늘 오후 두 시가 떠오른다.

'산업재해보험공단'에서 십사 년 동안 근무했던 그는 오후 두 시에 퇴근을 했다지.

한동안 나는 오후 두 시에 출근을 했던 적이 있다.

오후 두 시 사무실로 향하면서 나는 종종 카프카를 떠올리곤 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는지 모르겠다. 퇴근길의 카프카가 방금 나를 지나쳐간 것 같은 착각에 휩싸여.

오후 두 시는 틀림없는 낮인데도 불구하고, 그로 인해 어스름과 차가운 안개의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내가 카프카의 「소송」을 기다리던 시간도 오후 두 시쯤이었다.

 나는 「소송」을 무척이나 기다렸는데, 내가 꼭 「소송」을 읽어야만 한다는 그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 소설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알려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깐 엉뚱한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거의 날마다 먹는 소와 돼지와 닭들이 어떻게 키워지고 도살되는지 그 과정을 취재한 방송을 나는 얼마전에 본 적이 있다.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번식되고 살찌워지는 가축들의 공포에 사로잡힌 눈.

그 눈에 비친 인간은 절대의 권위를 부여받은 심판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가축은 자신들이 왜 도살되는지 모르는 채, 심지어 곧 도살되리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도살장에 끌려가고 처형당한다.

내게 그 과정은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다 못해 그릇된 심판의 한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소송」의 K가 겪는 소송과 심판의 과정이 가축들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그 과정과 어쩐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송」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주인공 요제프 K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은행 간부인 K는 도덕적이거나 선량한 인간이 결코 아니다.

소심하고 우울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냉소적이면서,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침묵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에 그는 달변가다.

 때때로 변덕이 죽 끓듯 해 모순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의 전형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가 카프카로 혼돈되면서) K에게 사랑에 가까운 감정마저 느꼈는데(일상에서는 선량함을 타고난 사람에게 매혹되지만), K가 결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 감정이 가능했을 것이다.

K는 때때로 어이없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 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 그러므로 K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누가 무엇 때문에 고소했는지조차 모르는 소송을 별일 아닌 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K는 일 년 뒤 사형에 처해진다. 줄거리로만 이해하자면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소송」을 펼치는 순간 미로 속으로 발을 내딛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소송을 대하는 '피고인' K의 입장과, 소송 과정에서 K가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의 관계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것들은 미로처럼 얽혀 부조리하고 엉뚱한 상황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K에게 법원은 신성한 권위의 장소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타락한 장소다.

 '다락방에 앉아 있는' 예심판사는 법원 정리의 아내를 농락하려는 부도덕한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이 과연 K를 심판한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가?

소송은 일 년에 걸쳐 지루하게 계속되지만 끝내 그의 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소송은 K에게 '아무런 가르침'도 반성도 주지 못하고 사형이라는 극단적이고 황당한 결론에 도달한다.

서른한 번째 생일날 K가 사형에 처해지는 순간, 법원이란 것이,그리고 법이란 것이 과연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K는 사형에 처해지는 '종말'의 순간에도, 사형을 집행하는 낯설고 '여위어 보이는 어떤 사람' 에 대한 의문에 혼란스러워한다.

'누굴까? 친구일까? 좋은 사람일까? 관련된 사람일까? 도와주려는 사람일까? 한 사람일까? 아니면 전체일까? 아직 도움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내지 못한 반대 변론이라도 있는 걸까?'

「소송」은 내게 구원의 문제를 다룬 소설로도 읽힌다. 괴물이 되어버린 법과 질서, 권력 앞에서 한 인간이 스스로를 변론하고 구원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죽어가는 K를 지켜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은 K일까? 아니면 K의 소송과 관련된 사람일까? K의 친구일까? K를 도와주려는 사람일까? 아니면 일 년 전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K에게 알리러 온 감시인들 중 한 명일까?

나는 어쩐지 「소송」에 대해 이야기하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 기분이 든다.

생전에 카프카는 책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는 행복해지기 위해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해주는 불행처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라고 했다. "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만 한다"고.

바로 그러한 책이 「소송」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을 사랑하고 싶은 독자로서, 나약하고 모순적인 한 인간으로서 「소송」을 이제라도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김 숨 소설

---------------------------------------------------------


서른번째 생일날 아침 갑자기 체포 되는데···

⊙ ‘소송’줄거리

프란츠 카프카는 1883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 사회에서 성장했다.

대학 시절 단편소설을 집필할 만큼 문학에 대한 열의가 컸지만 가족에 대한 의무감으로 대학 공부를 그만두지는 못했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법원에서 일하다 결국 법조계 생활을 접고 노동자산재보험공사로 직장을 옮겼다.

카프카는 낮에는 직장에 다니면서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을 계속했고, 1917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후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발병 7년 만인 1924년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남기고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소송」은 20세기 최고의 문제 작가 카프카의 대표작이다.

은행의 부장으로 있는 요제프 K는 서른 번째 생일날 아침 하숙집에서 두 명의 감시인에게 갑자기 체포된다.

그 후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고,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어떤 죄로 인해 소송에 휘말려 지내다가 결국 서른한 번째 생일날 밤에 처형당한다.

그가 정해진 종말과의 헛된 싸움을 벌여나가는 그 1년 동안, 소설 속에서는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대거 등장한다. 법정은 가정집과 연결되어 있고, 법원과 관계된 인물들은 하나같이 부패했다.

주인공은 모든 여인과 성적 관계로 연결되고, 변호사는 의뢰인을 노예처럼 다룬다.

끊임없는 구속과 억압, 관료주의가 지휘하는 부조리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겪는 무력감을 담아낸 소설 「소송」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소설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으며, 카프카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원제:Der Prozess

저자:Franz Kafka

발표:1925년

분야: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소송

옮긴이:권혁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3(2010년)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문학과 선동···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당신이 평생 한 권의 책만을 읽어야겠다면 '이솝우화'를 권한다.

이제껏 수천년 동안 살아남은 명작이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읽어라.

앞으로 수천년 동안 살아남을 이야기다.

그 후에는 무엇을 읽어야 할지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우화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니까.

상징마저 진부해진 요즘 감각으로 볼 때, 칠십 가까이 먹은 이 고령의 알레고리 소설은 어쩐지 표적이 빤하게 드러난 느낌이다.

게다가 공산주의 혁명 전후의 러시아 상황을 거의 일대일로 우의하고 있지 않은가.

문학예술과 선동구호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듯한, 거칠고 도식적인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찬찬히 들여다본다면, 이 소설이 풍자하는 바가 단지 러시아의 근현대사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본성 자체라는 걸 알게 된다. 아니,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겠다.

사회가 악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과정은 매번 이토록 도식적이라고, 악당들이 우리를 착취하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놀라우리만치 진부하며 창의성이 없다고.

그런데도 왜 우리는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걸까? 바로 그게 문제다.

제아무리 얄팍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일지라도 십중팔구 먹혀들어 간다.

왜냐하면 반짇고리를 차고 다니며 우리의 성난 입술을 꿰매는 범인이 바로 우리 중에 있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게도,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양'인 것이다.

지배계층은 결코 홀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에게는 피지배계급 중에서도 '양'이 꼭 필요하다.

저희들을 경호하는 한 줌의 '개'들보다 훨씬 필요하다.

의심과 분노가 터져 나오는 순간마다 주인님이 가르쳐준 노래를 합창하여 소음을 일으키는 '양'들이 있어야 비로소 지배의 권위는 단단하게 유지된다.

그럼 양을 싹 다 없애버리면 되겠네?

아니, 그럴 수 없다.

'양'이란 저기서 떼로 어슬렁대는 저능아인 동시에 실은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일부이기도 한 까닭이다.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말단 착취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 스스로가 아시아의 민중을 수탈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양'의 계급장을 떼어 던져버렸다.

이어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가, 현실과 괴리를 보이는 이상에 절망하여 그마저 떠났다.

 이러한 자발적이고 헌신적인 체험을 통해 휴머니즘을 도외시하는 어떠한 이념도 결국은 삶을 지옥으로 내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 없는 이데올로기란 찬란한 수사로 직조해낸 가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동물농장의 행간마다 어찌할 수 없는 혐오와 분노의 감정이 배어 있는 이유는, 온갖 이념과 이상이 소용돌이치던 근대의 격동기를 살아오며 그 얄팍한 속임수에 마음을 너무 많이 다친 탓이리라.

이 걸출한 이야기가 고발하는 악의 구조는 시공을 초월하여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지금 이곳 역시 마찬가지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고 칠십 여 년, 이 땅엔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대규모 자본이 윤리와 교육의 가치마저 집어삼키고, 귀족과 천민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오늘의 지배계급은 지난날 일제가 수행했던 작업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뻔뻔하건 교활하건 간에 그들이 동원하는 모든 논리의 목적은 언제나 일정한 방향, 그러니까 '더 많은 착취'로 수렴된다.

도처에서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입을 맞춘 듯 시장논리와 경쟁을 떠들썩하게 옹호한다.

누구도 우대하지 말고, 누구도 억압하지 말고 다함께 무한경쟁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격려한다.

듣기엔 참 구수한 얘기다.

하지만 출발 라인이 다르게 설정된 후보들 간의 뜀박질 속도 평등이 도대체 어떻게 평등이란 말인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보여주는 가장 진지한 통찰은 '왜곡된 평등'을 겨냥하고 있다.

우리는 동일한 심신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다.

매너농장의 여러 동물들처럼 각기 가진 달란트가 다르고, 배경과 환경과 목표와 성향이 다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났다. 프로크루스테스가 하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평등을 논하려면, 개개인의 태생적이며 구조적인 차이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타인을 인식하는 행위는 있는 그대로의 차이를 납득하고 수용하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다.

반면에 전체주의의 속임수는 동일성만을 강조하면서 그로 인해 터져 나오는 비명과 호소를 반동의 이기심으로 호도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힘이 센 자와 약한 자의 다툼이 있을 때 양쪽에 똑같은 잣대를 적용하는 행위야말로 불공평한 처사다.

눈을 가린 채 어디 쪽이 무거운지 천칭으로 가늠하는 법(法)의 여신은 그냥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다.

장님 시늉이 당장엔 근사해 보일지 몰라도, 조금 지나면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며 불멸의 헛소리를 읊게 된다.

게다가 그녀의 오른손에는 시퍼런 칼까지 들려 있지 않은가.

보고 듣는 권능을 포기한 교조주의자에게 무기마저 쥐어주면 거기에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런 식으로 법은 순한 '양'이 되어 돼지들의 만찬에 초대받고, 강자와 약자의 양분 구도는 돌이킬 수 없이 고착된다. 살 냄새가 풍기지 않는 모든 이상은 결국 피 냄새를 풍기게 된다.

동물들이 득실거려 어쩐지 즐겁고 귀엽고 뒤뚱뒤뚱 신이 날 것 같은 이야기에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건 그 때문이다.

끔찍한 소설이다.

박형서 소설

---------------------------------------------------------

러시아 혁명 풍자한 20세기 최고의 정치우화

‘동물농장’ 줄거리

조지 오웰은 인도 벵골에서 식민지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또한 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령 버마(지금의 미얀마)에서 왕실경찰로 근무했다.

그러나 식민체제와 제국주의 경찰로서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 후 5년 동안 런던과 파리를 떠돌며 하층민의 생활을 경험하고,이를 바탕으로 처녀작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발표한다.

도시의 빈민 문제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파헤친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는 평생을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집필 활동을 했으며,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이데올로기와 사회를 비판하며 펜으로써 그에 맞서 싸웠다.

[동물농장]은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독재를 풍자한 20세기 최고의 정치 우화다.

어느 날 밤 늙은 돼지 메이저(마르크스)는 매너농장의 모든 동물들을 소집한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착취를 견디지 말 것을 연설하고, 농장의 동물들은 평등한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다.

인간 주인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며 혁명의 기쁨을 누리지만, 어느 순간부터 동물들의 지도자격이었던 돼지들만이 특권을 누리고 있다.

돼지들 간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스탈린)이 독재 권력을 쥐게 되면서 그는 '개'들을 앞세워 공포정치를, 우매한 '양'들을 이용해 선전을 시작한다.

동물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착취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혁명의 이념은 점차 타락해간다.

1945년 영국에서 발표된 이 작품은 그로부터 3년 만인 1948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것으로 그 이유는 반공소설이라는 오해 때문이었다.

 

원제: Animal Farm

저자: George Orwell(1903~1950)

발표: 1945년

분야: 영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동물농장 ·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옮긴이: 김기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7(2010년)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945년 겨울,누군가와 '사랑'을 나눈 죄로 러시아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추방된 남자가 있습니다.

독일계 루마니아인이고 아직 앳된 청년이에요.

앞으로 우리에게 '숨그네'라 불리는 다소 낯선 조합의 단어에 엮인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청년의 얼굴을 잘 기억해두도록 하세요. 그가 떠날 때 본 세상과 돌아온 뒤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 돼 있을 테니까요.

이 소설의 첫 대목에는 이송 열차에 관한 일화가 나옵니다.

물론 모든 이야기는 저 루마니아 청년의 눈을 통해 그려지고요.

청년 말에 따르면 그날 밤 그는 군인들의 총구를 뒤로 한 채 바지를 내리고 사람들과 나란히 똥오줌을 눴다고 해요.

어두운 설원 위론 지린내 나는 김이 무럭 올라오고…… 그 와중에도 '자신들을 버려두고 열차가 떠날까봐 미칠 듯이 두려워'하는 사람들 틈에서 수치와 공포를 느꼈다고 하고요.

당시의 풍경은 '그 밤의 세계가 얼마나 인정머리 없고 고요하던지'라는 문장으로 정리돼 있네요.

그런데 그 사이 누군가가 외칩니다. -이것들 보라고,살고들 싶지.

황량한 겨울밤,누군가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웁니다.

열흘 넘게 갇혀 있던 기차 안에서도 노래하고,농담하고,이성의 몸을 더듬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말이에요.

더욱이 저 얘기를 한 사람은 러시아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저들과 같이 용변을 보던 또 한 명의 추방자였지요.

그런데 저 사내,그렇게 말해놓고 자기도 웁니다.

대체 말(言)이 뭐기에,사람 맘을 이리도 송두리째 흔들고 그것도 모자라 무너지게 하는 걸까요.

어쨌든 작가는 저 사내로 하여금 빈정대다 바로 훌쩍이게 만든 뒤,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려 한 것 같아요.

-인간은 참 이상해…… 그렇지?

뒤로 갈수록 이상한 사람들은 계속 늡니다.

정신이 살짝 나간 탓에 모두의 사랑을 받는 경비원 카티라든가,죽어가는 아내의 수프를 빼앗아 먹는 파울과 다른 이의 목숨보다는 자신의 스카프에 관심이 많은 프리쿨리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보다 이상한 건,그 이상함이 건드리는 몇몇 통점이 가장 보통의 우리,혹은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과 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물에 닿아 꺾이고 휘는 빛처럼 말에 닿아 반사된 진실의 풍경처럼 말이에요.

그러니 이쯤에서 미리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어쩌면 이 소설은 사건보다 사람에게 더 몸을 기울인 작품일지도 모르겠다고…… 헤르타 뮐러는 실로 이 이야기 안에서 각 인물들의 혈관을 섬세하게 만지고 있습니다.

작가가 그걸 어떻게 해냈느냐고요?

음,당장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네요.

-단어들로.

말은 사치이고,관념이며,기만일 수 있던 시대에,말에 매달려 말로 버티는 인물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도 강제수용소라는 장소에서.

소설 속 청년이 자기가 한 비밀스러운 연애,즉 '랑데부'를 일컬어 표현한 것처럼,그렇게 '특별하고,더럽고,수치스럽고,아름다운' 단어들로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게 왜 시가 아니고 소설이 됐는지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육체와 정신을 집요하게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누군가 하도 만져 닳고 너절해진 낱말들이,아름답되 먹지 못하는 열대어처럼 잔인하게 빛나고 꼬리치며 달아나는 모습 또한 보시게 될 거고요.

말에 매달려,말과 싸우며,말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얼마나 간단치 않은지,그 또한 말을 빌려 온 힘으로 설명하고 있는 청년의 목소리가 먹먹합니다.

그리고 문득,여기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이 가까스로 잡고 있는 나뭇가지 한 개…… 말.언어.혹은 문학.그래서 그게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그럼 다시 이 소설의 첫머리로 돌아가 볼까요. 거기 이런 말이 나와요.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살면서 우린 많은 일을 겪게 되겠지요?

그중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테고요.

지저귀듯 노래하며 시를 읊을 시절도,기도하듯 무릎 꿇고 말을 줍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숨그네]는 한 인간이 처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허기와 고통의 시간에 대해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거기서 사람이 만든 말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또는 어떤 일을 돕고 있는지 목격하는 건 이제 여러분의 몫이겠지요? 네? 저요? 이걸 이미 읽은 당신은 그럼 뭘 할 거냐고요?

무얼 하기는요,저도 이야기를 지어야죠.

다시,여기서.

---------------------------------------------------------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17살 소년의 삶

'숨그네' 줄거리

헤르타 뮐러는 1953년 루마니아 니츠키도르프에서 태어나 독일계 소수민족 가정에서 성장했다.

나치의 몰락과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를 침묵으로 지켜보았던 시골 마을의 강압적인 분위기는 어린 뮐러에게 정체 모를 공포와 불안을 심어주었다.

당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탓에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1987년 독일로 망명했다.

망명지 베를린에서 전후 전체주의의 공포를 생생히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였고,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숨그네]는 2차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소년의 삶을 강렬한 시어로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에 살던 독일계 소수민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소련은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하기 위해 그들을 강제로 징집한다.

"순찰대가 나를 데리러 온 건 1945년 1월15일 새벽 세시였다.

영하 15도,추위는 점점 심해졌다.

" 열일곱 살의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노동 수용소에서의 5년 동안 기본적인 욕구만 남은 고통스러운 일상과 단조롭고 끝없는 고독을 경험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린다.

고향으로 돌아와 대도시로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숨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네처럼 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상징하는 [숨그네]는 철저히 비인간화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삶의 한 현장을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게 포착해낸다.

 

원제; Atemschaukel

저자; Herta Muller

발표; 2009년

분야; 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숨그네

옮긴이; 박경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1(2010년)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완성하지 못할 퍼즐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

그래,난 공부 못한다.

여집합,교집합,공집합.아름다운 미인들을 집합으로 표시하세요.

아름다운 미인의 집합이라.집합으로 묶을 기준을 찾을 수가 없어요.

제 눈에는 모두 아름다워 보이는데요.

그래? 그렇다면 얘야,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저는 미대에 가고 싶어요.

친구 세정인 소방관이 되고 싶어 하고요.

얘야,미대에 가려고 해도 수학은 해야 한단다.

소방공무원이 되려고 해도 영어,한국사,국어 하다못해 물리학개론 · 화학개론,건축학이나 형사소송법 중 두 과목 이상은 시험을 쳐야 한단다.

에이,설마요. 불 끄고 사람 구하는데,그런 게 왜 필요해요?

얘야,미대는 왜 가려고 하니?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고전주의,낭만주의,초현실주의를 뛰어넘는 화법을 찾고 싶어요.

후후,얘야,아니란다. 미대에 가려면 너는 두 가지 중 하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단다.

사람들에게 상품을 더 많이 팔 수 있는 디자인을 공부하든,아니면 소더비 경매에 나갈 만큼 값이 뛰어난 그림을 그리든.

고흐나 고갱도 수학을 잘했나요?

글쎄.사람들에게 왜 물건을 많이 팔아야 하죠?

얘야,그렇게 해야만 너도 네 자식을 과외시킬 수 있지 않겠니?

사춘기 시절,세상은 무거웠고 고민은 많았다. 그 무렵 나를 구원해준 책 중 하나가 바로 「이인」이었다.

살인을 왜 저질렀느냐는 물음에 "태양 때문"이라는 유명한 대답을 한 이인(異人)이자 이방인인 뫼르소.

내가 이 작품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해답이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겪었을 테지만 학창시절의 대부분은 정답 찾기로 보낸다.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님의 침묵]에서 '님'이 의미하는 것은?

삼각형 내각의 합은?

그러나 「이인」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음으로 해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며칠간 머릿속에서 생각들이 떠나질 않았다.

누구의 말이 정답인가?

 뫼르소를 취조하던 검사의 말이 정답인가,신부의 말이 정답인가,그것도 아니면 뫼르소의 생각이 정답인가.

뿐만 아니었다.

뫼르소의 살인 동기인 '태양'은 무얼 의미하는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뫼르소의 행동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좋은 교육은 정답 찾기가 아니라 생각해서 해석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로댕의 유명한 조각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 조각을 보면서 처음엔 섬세하게 조각된 외양에 놀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생각하는 사람>은 턱을 괴고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가.

그리고 그 조각이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직 관찰력과 상상력으로 스스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예술이 필요한 까닭은 이 때문이다. 스스로 끊임없이 생각해 해석을 찾아내기.

예술이 아닌 대부분의 것들은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롤플레잉게임을 하여 경험치를 쌓고 높은 단계의 괴수를 무찔렀다고 하자.

무엇을 해석할 것인가?

설령 해석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수준은 운전면허 필기시험의 상식 수준인 것이다.

「이인」을 번역한 이기언 교수는 작품해설에서 이를 훌륭하게 말하고 있다.

"「이인」은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고난도의 퍼즐과도 같다. …독자들도 퍼즐 맞추기에 도전해보기를.

물론 절대로 완성될 수 없는 퍼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

현대사회에서 노예는 노예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마냥 따라갈 때 노예는 탄생한다.

그러나 「이인」은 빼어난 예술작품이 그러하듯이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자발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이인」이 고전으로 남는 이유는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이다.

내가 두 번째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뫼르소라는 인물 때문이다.

그의 낯선 세계관 때문이다.

전통적인 기독교 사회에 살면서 그는 기독교를 부정한다.

상식을 오히려 이해하지 않는다.

상식은 절대 진리인가? 천동설은 한때 상식이었다.

인도에선 소를 숭배한다.

일본에선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한다. 상식,체제,시스템,사회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늘 변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의 상식은 어떠한가.

시간을 아끼고 돈을 모으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마치 진리처럼 군림한다.

우리가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팽창과 기술혁신을 끝없이 욕망하는 체제의 욕망이다.

우리의 자발적인 욕망이 아니다. 생산을 위한 효율성은 체제를 위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신기술은 끊임없이 체제의 욕망을 욕망하게끔 만든다. 지금 당장 인터넷과 휴대폰을 던져보라.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가.

뫼르소의 기이한 행동과 생각들은 윤리와 도덕을 떠나서 세상을 주의깊게 관찰하게 만든다.

뫼르소의 행동은 엄청난 용기이다.

 이슬람 사회에서 이슬람을 거부한다는 것,파시즘 사회에서 파시즘을 거부한다는 것,모두 하나가 되어 한 가지만을 가리킬 때 그것을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이다.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용기를 지닐 순 없겠지만 적어도 동전에 뒷면이 있다는 사실만은 생각하게끔 만든다.

다시 말해 뫼르소의 기이한 생각을 통해 우리들은 북극이 있다면 열대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말한다.

그래,난 공부를 못했어.

하지만 「이인」을 읽고 누구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지,라고.문제 풀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박성원 소설

---------------------------------------------------------

살인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뫼르소'

▶ '異人' 줄거리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7일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포도주 제조공인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이듬해 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했고,문맹에 귀머거리였던 어머니가 날품팔이를 하며 남은 가족들을 부양했다.

궁핍한 환경에서 자라난 카뮈는 그의 재능을 알아봐준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는데,이후 언론사에서 일하며 많은 저서와 사설을 통해 당대 프랑스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57년에는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이때의 수상연설문을 초등학교 시절 자신을 이끌어준 선생님에게 바쳤다.

「이인」은 카뮈가 1942년 발표한 소설로,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서만 매년 약 20만명의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내며 전 세계 101개 언어로 번역된 프랑스 현대문학의 신화적인 작품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양로원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는 담담해 보이는 모습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음 날 여자친구를 만나 희극영화를 보고 이웃에 사는 건달 레이몽과 친구가 된다.

며칠 후 뫼르소는 그들과 함께 해변으로 해수욕을 가고,그곳에서 레이몽의 주위를 맴돌던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재판에 회부된 뫼르소에게 검사는 왜 총을 쏘았느냐고 질문하지만,그는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고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지 않는다며 그를 사회에서 추방시켜야 할 존재라고 몰아세운다.

결국 사형을 언도받은 뫼르소는 회개하라는 신부 앞에서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리고 혼자가 된 감방에서 드디어 뫼르소는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행복을 느끼며 처형의 날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줄 구경꾼들을 떠올린다.

원제; L'Etranger

저자; Albert Camus(1913~1960)

발표; 1942년

분야; 프랑스 문학

한글 번역본

제목; 이인

옮긴이; 이기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6(2011년)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