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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1월 9일) 제목: "사람을 살리는 능력의 기도" 말씀: 열왕기상 17:17-24 찬양인도: 쉐키나() 설교자: 김은석 부목사님 ----------------- *열왕기상 17:17-24,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 18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22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23 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 24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세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첫째로-가장 큰 기적은 구원의 기적이다. 둘째로- 주님은 이 가장 큰 기적을 행하실 능력의 주님이시다. 셋째로- 주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가 이 구원의 주님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오늘 본문에 엘리야와 사르밧 여인은 앞 선 두 자기 기적을 경험했다. 우리를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러나 가장 극적으로 이들이 만난 하나님은 다름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시는, 영혼을 살려내시는 하나님, 그 참 기적을 맛보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오늘 똑 같다고 생각한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기대하고, 가장 사모하는 게 무엇일까?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있지만, 여러분 저는 구원의 하나님을 가장 기대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가장 감사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우리만 영생의 기적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가족, 우리의 동료,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이웃들까지 이 영생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놓고 우리가 함께 기도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경험하겠는가? 어떻게 해야 구원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가? 본문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그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엘리야의 기도를 살펴볼 것이다. 그의 기도가 어떠한 면이 있길래, 도대체 그의 기도가 어떤 기도이기에 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가를 우리 함께 엘리야의 기도를 함께 상고해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I. 엘리야-의 기도는 여인의 기도를 끌어안은 기도. -그는 여인의 고통을 끌어안은 기도를 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열왕기상 17:17, 17 이 일 후에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진지라 . -엘리야로 인해 삶의 한 줄기 희망을 찾으려던 이 여인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그 여인이 아들을 잃은 것이다.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 아들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 헤아릴 수 없는 슬픔,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지금 이 여인을 짓누르고 있다. 이 여인은 엘리야에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당신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내게로 오셨습니까?”라고 하면서 엘리야에게 그런 어떤 분노를 퍼 붓는다. 여러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사실 엘리야는 이 아들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아들이 죽은 것은 성경에 기록대로 병 때문이지, 엘리야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엘리야는 이 여인과 아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었던 굉장히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엘리야에게 다 쏟아내어 버린다. 여러분, 불 끄는 소방호스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자. 소방관이 호스를 들고 맹렬하게 물을 내뿜지 않는가? 그런데 불을 끄다가 호스를 놓아버린 것이다. 그럼 그 호스가 어떻게 되겠는가? 난리가 날 것이다. 막 춤을 추지 않겠는가? 그런 것처럼 어찌할 수 없는 분노를 엘리야를 향하여 쏟아내고 있다. 이 여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어떤 논리, 어떤 인격도, 예의도, 상식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19절을 보면, *열왕기상 17:19,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본에 눈을 씻고 봐도 엘리야가 어떤 말을 했다는 내용이 없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저 죽은 아들을 내게 달라고만 한다. 여러분 엘리야가 “왜 그 말을 내게 합니까? 왜 나한테 화를 내세요?”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엘리야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심지어 엘리야는 이 사르밧 땅을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사르밧 땅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이 여인을 만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그냥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사르밧 땅에 간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여인을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것이다. 엘리야가 참 억울할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치밀어 오를 것 같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지점에서 한 번 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왜 엘리야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성경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묵상을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 그렇구나! 엘리야가 이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 준 것이구나!’ 저는 엘리야가 이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고 생각을 한다. 아들을 잃은 아픔,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헤아려주고 그 고통을 끌어안아 준 것이다. ※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이란 시가 있다.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겨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여러분 배고플 시간이다. 이것을 보면 애들이 쓴 동시 같다. 그런데 이 시는 모성애 색채가 짙게 드러나 있다. 그 게장을 담글 때 보면, 게를 통에 넣고 간장을 이렇게 붓지 않는가? 간장게장 좋아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저도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암컷이 맛이 있다. 알을 품고 있는 것이기에. 간장을 부으면 어떻게 되는가? 게가 버둥거린다. 저는 그것을 보면 맛있다는 생각밖에 안 들 것 같은데 시인을 보면 남다른 것 같다. 이 미물에 이 발버둥을 보면서 모성애를 생각을 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이 알을 지키려고 간장이 부어지니까 깜깜해 지니까, ‘괜찮아, 잠잘 시간이야’ 이렇게 알을 지키려고 하는 어미 게의 모습을 표현했다. 한낱 미물도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형상인 이 인간의 모정이라는 게 굉장히 특별하다. 하나님이 어머니에게만 주셨다는 독특한 감정이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넘치는 사랑이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는 그 누구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다. 열 명의 자녀는 한 명의 어머니를 모시지 못해도 한 명의 어머니는 열 명의 자녀를 기른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퍼내고, 아무리 퍼내도,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퍼내고 퍼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그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라. 아들을 잃은 엄마가 예의가 어디 있고, 인격이 어디 있고, 상식이 어디 있겠는가? 남편을 잃은 채 어차피 떵떵거리며 사는 것은 꿈꿀 수조차 없어서, 그저 아들과 하루하루 사는 것을 자신의 운명이라 여기며 살던 이 여인, 모든 삶의 무거운 짐을 그저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버텨온 이 여인, 엘리야는 이 여인의 고통을 본 것이고 그 고통을 헤아려 준 것이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엘리야는 이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는 영적인 거장이고 하나님은 그 시대 가운데 특별하게 사용하시는 선지자이다. 부패한 이스라엘을 향해 3년 반의 흉년을 예언 했던 사람이었고, 또한 엘리사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리었던 사람, 정말 하나님이 특별하게 사용하셨던 분이 바로 엘리야이다. 그는 얼마나 큰 능력의 사람인지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가 가진 어떠한 능력보다 가장 큰 능력인 사랑의 능력으로 이 여인을 품어준 것이다. 결혼 1년차는 남편이 소리를 치면 아내가 듣고, 2년차 때는 아내가 소리를 지르면 남편이 듣는데, 남편과 아내가 소리를 지르면, 옆집 사람이 듣는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의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 말하는 사람은 참 많지만 그런데 들어주는 사람이 너무 귀한 때이다. 여러분의 주위에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에 관여하는 세상에 살면서 곳곳에 신음하고 고통 하는 소리가 차고 넘치는 시대이다. 여러분 이 때에 과연 누가 가장 강력한 기도, 가장 놀라운 기적의 기도를 주님께 드릴 수 있는가? 누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가 있을까? 저는 엘리야가 여인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것은 그가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기도 가운데 어떤 하나님을 만났는가? 지난 산상기도회를 통해 여러분을 만나주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는가? 지난 특새간 그 새벽을 깨우며 그 주위에 아랑곳 하지 않고 안아주시는 이 본당에 나와 하나님, 나의 하나님을 부를 때에 여러분의 영혼가운데 찾아오신 그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셨는가? 우리도 때때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좋은 모습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때로는 하나님 앞에 원망도 한다.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시는가요?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때로는 너무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예의도 없이, 상식도 없이 그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토로할 때가 역시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어떠셨는가? 그런 우리의 신음과 고통을 외면 하셨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두 팔 벌려 안아주시지 안아주셨지 않은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신음과 고통을 귀 기울여 주시지 않았는가? 저는 엘리야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 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줄 믿는다. 여기 모인 모든 동역 자 분에게 도전한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라.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상처를, 누군가의 슬픔을 여러분이 끌어안고 여러분이 기도해 주라. 그렇게 될 때, 저와 여러분을 통해 영혼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 믿는다. II. 엘리야의 기도는 믿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도였다. *열왕기상 17:19-21, 19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 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여러분, 엘리야는 지금 큰 문제 앞에 서 있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문제 앞에 서게 되었다. 선지자로서 3년 만에 대 흉년을 선포했던 엘리야, 그릿 시냇가에 있을 때, 하나님이 까마귀를 보내셔서 엘리야를 먹여주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기도함을 통해서 사르밧 과부의 그 집에 곧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는 이 모든 경험들이 과히 평범한 경험들이 아니다. 비범한 경험들이었고, 그렇게 능력 있는 엘리야이지만, 그래도 여러분, 죽은 자를 끌어안는다는 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엘리야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도저히 할 수가 없는 큰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 문제를 끌어안는다. 그는 만약에 그가 이 문제를 외면했더라면, 그가 이 문제를 회피했더라면, 그 문제는 하나님이 행하실 이 두 기적을 체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엘리야를 이 문제를 그대로 안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자신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나의 문제를 하나님께 옮겨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 내가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면, 그 문제는 내 것이 되지만, 내가 그 문제를 안고 기도하면 그 문제는 하나님의 것이 되는 줄 믿는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다. 그러나 기도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 줄 믿는다. 엘리야에게는 이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도하면 이것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기도하면 이것은 반드시 응답될 응답의 보증 수표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엘리야에게 있었을 것이다. 제가 수영을 처음 배울 때 일이다. 저를 가르쳐주신 수영선생님의 이름이 정석 선생이셨다. 이름만 봐도 얼마나 FM대로 가르쳐 주셨을지 상상이 되지 않은가? 수영을 배우고 얼마 되지 않아 자세가 어느 정도 나오니까 이 선생님이 계속 수영을 시키신다. 오면 또 가라고 하고, 오면 또 가라고 한다. 배워보신 분은 알겠지만 일단 멈출 수가 없다. 속도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뒤 사람의 팔이 닿아서 치기 때문에 일단 출발을 하면 가야 된다. 그래서 너무 힘든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께 저 도저히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심장이 터져 나갈 것 같다고 했다. 좀 안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정석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괜찮아요. 제가 살려드릴게요. 쓰러지면 제가 살려줄게요. 힘들어도 지금 한 번 더 나가야 폐할량이 늘어납니다.” 라고 하셨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여러분, 그런데 그 때 한 발 더 나아가고 한 번 더 손을 내 저어야 제가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의 한계, 내 기도의 한계를 맞았을 때, 거기서 멈추면 어떠한 성장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한계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걸음을 내 딛을 때에 우리들의 기도, 우리들의 믿음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엘리야도 마찬가지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엘리야는 사르밧 땅에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영적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사르밧 땅에 잠시 머물 때, 알지 못했던 그 갈멜 산상의 기도가 그 영적 전투가 기다리고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이 사르밧 여인과의 사건을 통해서 엘리야의 기도가 더욱 더 성장하기를 바라시고 그 믿음이 더욱더 연단되고 훈련되기를 바라신다. 만약 엘리야가 믿음의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 경험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 문제를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기 때문에 이 놀라운 경험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돌아가 갈멜 산상의 기도에서 믿음의 승리를 하게 된 것 이다. 우리 함께 20절과 21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다. *열왕기상 17:20-21, 20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 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 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간절히 부르짖는 이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사르밧 여인의 아들을 살리셨을 뿐만이 아니라, 사르밧 여인도 살려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문제 앞에 서 있는가? 어떤 문제가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가? 이제까지 신앙적인 경험으로는 난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난 도저히 결단할 수 없다, 나는 기도할 수 없다. 두려워하고 떨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여러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기도의 끈을 붙잡기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으시고, 나는 연악하나, 하나님은 강하시다고 여기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 한계를 뛰어넘어 더 큰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 심령, 우리 가정, 우리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III. 엘리야의 기도는 형식을 뛰어넘는 기도였다. *레위기 21:11, 11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그의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하지 말며. -이게 무슨 말이냐면, 구약의 율법 가운데 제사장들에게 주신 규례이다. 꼭 제사장에게 주는 규례만이 아니더라도 레위기와 민수기에 보면 많은 구절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시체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율법이 명시되어 있고, 만약에 불가피하게 가까이 하게 되면 반드시 정결의식을 거하라고 엄숙하게 명령을 한다. 그런데 본문에 엘리야를 보면, 엘리야는 선지자이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죽은 여인의 아들을 끌어안는다. 하나님의 대언하는 선지자는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체를 가까이 하면 안 되는 게 율법이다. 그런데 엘리야는 웬일인지 그 시체를 끌어안고 그 시체 위에 세 번 몸을 구부려 얹는다. 여러분 사실 형식대로라면 이 엘리야의 기도는 잘못된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기도의 응답하시지 않은가? 그러면 이 기도는 잘못된 기도가 아니라, 바른 기도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여러분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기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자칫 형식에 함몰되다 보면, 너무 형식하고 우리 익숙한 것들에 우리가 젖어들다 보면 마치 형식이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다. 때로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익숙함 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이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려는 우리를 옭아 맬 수도 있다. 가장 우리는 본질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기도가 무엇일까?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기도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일까?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는 것일까? 이런 고민을 하다보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우리가 기도해야 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형식을 뛰어넘는 모습은 우리 주님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누가복음 7:13-14, 마가복음 5:41절에 보면 *누가복음 7:13-14, 마가복음 5:41,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마가복음 5:41,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나인성에 죽은 그 여인의 아들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오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모습이 또 나온다. 여러분, 나인성의 과부가 그 아들의 관을 메고 나올 때 예수님이 그 관에 무엇을 하시는가? 손을 대신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말씀으로만 하지 않으시고 그 아이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시며, “달리다굼”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율법의 폐기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을 우리에게 왜 주셨는가? 구약의 율법을 그냥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더 사랑하라고 주신 게 율법의 정신이다. 율법의 수많은 조항들이 있지만 결국은 사랑이 율법의 본질이다. 주님께서 왜 그 가련한 자들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관에 손을 대시고 그 죽은 아이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셨는가? 엘리야가 그 죽은 아들의 시체에 왜 몸을 세 번이나 구푸려 얹고 기도를 했는가? 그 예수님과 엘리야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그 사랑하시는 마음을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모습을 우리가 본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될지 그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혹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도의 고정관념들은 없는가? 우리가 늘 익숙하게 기도하는 모습들은 없는가? 여러분, 그것들이 우리를 옭아 맬 수도 있다.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깊은 기도의 세계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16세기 스코트랜드에서 기독교를 박해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백만 명의 군대가 기도하는 한 사람, 존 독스가 더 두렵다.”-메리 스튜어트-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믿는가? 기도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는 가정, 기도하는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 기도하는 민족을 사랑하시고 그 민족을 사용하신 줄 믿는다. 주님은 그리고 기도의 응답하시고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주님이시다. 여러분 기도는 사람을 살리고,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이제 부족한 말씀을 맺으려고 한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 주변의 아파하고 고통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아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진실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던 기도, 우리가 할 수 있던 믿음의 결단을 넘어서서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도의 비밀을 알고 기도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겼던 기도의 모든 고정관념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세밀한 음성과 힘을 의지하여, 나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님과 함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이제 곧 있으면 새 생명 축제가 시작된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사명인줄 믿는다. 여러분, 주변을 돌아보라. 예수님이 없어서 주림과 목마름에 허덕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말 우리의 이러한 기도들을 통하여 그들의 영혼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우리 함께 기도하자. ♣요약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삶의 무게와 고통으로 신음하는 많은 지체들에게 아픔을 끌어안고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치유의 공동체가 되고, 믿음의 한계 앞에서도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을 사모하고 앙망하여 내 지혜와 내 능력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익숙한 형식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오직 성령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고 새 일을 행하심을 기대함으로 기적을 체험하여야 한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했다. 이는 죽은 아이의 소생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즉,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르밧 과부의 아픈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계시를 깨닫고 성숙한 신앙으로 전진할 수 있다. 기적이나 이적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적을 체험함으로써만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되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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