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국가주석 시진핑의 독재정치와 폭력적인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반대하는 시위입니다. 이란에서도 “자유를 달라”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어요. 여성들이 앞장서 히잡을 쓰지 않을 자유를 요구하고 있답니다.
자유. 우리는 너무도 당연시하는 이것이 중국과 이란에선 ‘사치재’처럼 귀한 모양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인류 보편적 가치로 받듭니다만, 지구촌에는 아직도 자유의 숨결이 필요한 나라가 많습니다. 미국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패트릭 헨리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로 외친 때가 18세기였는데 말이죠.
인류 문명은 자유를 확장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희박한 자유에서 풍성한 자유로. 고대 애굽에서 유대인이 엑소더스를 했을 때도, 스탈린과 히틀러 치하에서도, 독재 권력 아래에서도 자유는 북극성이 되어 길을 인도했습니다.
자유가 흔한 나라에선 오남용되기도 했습니다. 자기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방종이 자유의 가치를 훼손하는 겁니다. 자기 자유와 타인의 자유를 같은 저울대에 올려놓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죠. 자유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책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책임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인문학의 영원한 주제 ‘자유와 책임’의 세계로 들어가봅시다.
자유는 개인이 선택·행동할 수 있게 돕지만 무제한적 자유는 남을 해치는 방종이 되죠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에서 고강도 코로나19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와 우루무치시 화재 사건 희생자들을 위한 집회가 함께 진행되면서 시위자들이 거리를 따라 행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국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는 뉴스가 많이 나옵니다. 대학생들은 “자유를 달라”고 외친다고 합니다. 중국 당국의 과도한 코로나19 방역조치가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소식인데요. 중국 방역당국의 강경 조치는 악명이 높습니다. 거대도시 상하이를 장기간 완전봉쇄했고 마스크를 안 쓴 시민을 구타하기도 했습니다.
시위의 원인이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독재와 통제, 감시를 그 어느 때보다 강화한 ‘시진핑 정치’가 시위를 촉발했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경제 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를 넘어선 것도 자유를 찾는 원인이라는군요. “먹고사는 게 삶의 전부였을 때 아무것도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게 문제가 된다”는 말이 있답니다.
우리도 저런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를 천부의 권리, 인류 보편적 가치로 당연시하지만 30~40년 전 “자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자유를 쟁취하는 데도 이처럼 시차가 존재하는 듯합니다.
자유는 무엇일까요? 자유는 ‘강제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강제는 권력의 강제를 말합니다. 내 신체와 내 정신, 내 재산이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을 권리가 바로 자유입니다. 왜 이런 자유가 보장돼야 할까요? 개인들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압니다.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어떤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압니다. 이런 개인들이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무엇인가를 성취하려 할 때 꼭 필요한 게 ‘강제가 없는 자유의 상태’입니다. 계획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지만 말이죠. “자유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가장 많은 곳, 지식의 경계, 즉 어느 누구도 한발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모르는 곳에서 가장 필요하다”(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말이 와닿는 이유입니다. 자유가 제한된다고 생각해 볼까요? 예를 들어 어떤 개인이 강제적인 규제 때문에 미리 습득해둔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플랫폼 사업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유는 적극적 자유와 소극적 자유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적극적 자유는 ‘무엇을 요구할’ 자유를 말합니다. 정부에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정치적 자유가 대개 여기에 속합니다. 국가가 책임지는 복지정책을 요구할 자유, 경쟁을 제한하도록 요구할 자유, 국방과 안전, 교육을 요구할 자유가 여기에 속합니다. 정치적 기본권은 대개 적극적 자유에 들어갑니다.
소극적 자유는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입니다. 내 행복은 내가 책임질 테니 정부는 빠져달라고 요구하는 자유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국민건강보험에 강제로 가입하지 않을 자유, 주사를 강제로 맞지 않을 자유,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 시위로 인해 출근을 방해받지 않을 자유 같은 것입니다. 적극적 자유는 권력의 개입을, 소극적 자유는 권력의 불개입을 선호하는 자유라고 말할 수 있어요.
개인의 발견은 자유의 근원입니다. 개인이 발견되기 이전,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왕, 황제, 교황 등에 소유된 신민이었을 뿐 자유인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몸도 자기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재산도 자기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권력과 싸워야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루터는 성직자를 통하지 않고 종교생활을 할 수 있다며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영국 사람들은 왕을 꺾고 명예혁명을 이뤘으며, 미국인들은 왕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임을 선포하는 독립혁명을 쟁취했습니다.
자유가 과하면 문제도 발생합니다. 바로 무제한적 자유라는 타락입니다. 자유가 무제한적일 때 자유의 유사품인 방종이 난무하게 됩니다. 내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는 희생돼도 괜찮다는 거죠. 자유가 흔한 나머지 자유를 오남용하는 나라와 자유가 부족해 “자유를 달라”는 나라가 공존한다는 사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프리덤(freedom)과 리버티(liberty)의 차이를 알아보는 건 숙제입니다.
책임은 자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책임이 부과돼야 자유 남용하지 않죠
자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글자가 있습니다. 바로 책임입니다. 개인이 자유롭다는 뜻은 그 개인이 스스로 기회를 발견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뜻합니다. 개인이 자유 상태에 있다면, 개인은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 말은 개인은 자신이 처한 상태를 싫든 좋든 정당하다고 믿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정보를 총동원했는데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고, 시대를 잘 만나 운이 좋게도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자유의 상태에서 행해졌다면 주어진 지위는 어쩔 수 없습니다. 사회 구성원이 이런 수많은 지위를 당연한 몫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정당하다고 믿지 않는다면, 자유 사회는 제대로 기능하기도, 유지되기도 어려울지 모릅니다.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지위는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비판이 있습니다. 부자 부모를 만난 아이는 가난한 부모를 만난 아이보다 타고난 지위가 높다거나, 교육을 잘 받을 환경과 그렇지 못한 환경도 지위의 차별을 만들어낸다는 시각이 예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유 사회와 반자유 사회, 어느 쪽이 지위를 변경할 기회와 선택 수단을 더 많이 제공하느냐입니다. 자유 사회는 반자유 사회보다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부자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 확률이 높습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책임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이것을 <자유로부터의 도피>라고 했습니다. 선택을 보장하는 자유는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닙니다.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이 자유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타나 결국 도피해버린다는 겁니다. 선택보다 차라리 국가가 정해서 내려주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 자기보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이 지시해주기를 바라는 경우 책임 부담은 덜 수 있죠.
책임은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다시는 틀린 길을 가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지식과 정보에 따라 추구한 목표가 실패한 경우, 책임감은 행동 주체자에게 다시는 그 길로 가지 말라고 경고해줍니다. 실패의 쓰라림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행동에 대한 책임은 결국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와 다른 내가 될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얘기입니다. 책임을 통해 우리는 지식을 변경하고, 수단을 수정하고, 다른 목표를 세우게 된다는 거죠.
자유의 책임을 지지 않고 그 불만족의 원인을 남 탓, 사회 탓으로 돌리면 자유가 요구하는 자기 절제의 도덕심은 희박해지고 맙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유 사회는 법에 의한 강제보다 책임감에 의해 인도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유 사회가 반자유 사회보다 훨씬 수준 높은 사회죠.
책임은 사람들이 경험에서 배우고 얻은 지식을 이용해 행동할 능력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합리적 행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책임의 부담을 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유아, 미성년자, 정신분열을 겪는 사람, 사이코패스, 통제 불능인 사람, 알코올 중독자들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책임은 삶에 질서를 부여합니다. 자유의 이면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책임이 엄중하게 부담되지 않는 사회는 어떤 모습을 할까요? 무질서하고 부도덕한 사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언론자유를 핑계로 가짜뉴스를 만들고, 집회의 자유를 이유로 도로와 지하철을 막무가내로 막고, 표현의 자유를 이용해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는 자유 사회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스캇 펙이 <거짓의 사람들>에서 “악이 자행되는 가장 잦은 이유는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데 있다”고 했어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도 곱씹어봐야 합니다. 그것은 종종 “아무의 책임도 아니다”는 말과 같으니까요. 자유가 앞바퀴라면 책임은 뒷바퀴입니다. 주먹을 휘두르되 남의 코앞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극장에서 거짓으로 “불이야”라고 소리친 사람은 혼나야 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