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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12월 22일) 제목: "함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예수님은 누구신가?25번째 말씀: 빌립보서 2:5:11 대표기도: 장명철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 빌립보서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귀한 성탄 주일을 허락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어제 새벽에 저희 교회는 성탄 주일 바로 직전 토요 새벽 예배는 토요 새벽송 예배라고 해서 했는데 어제 새벽에 유치부 아이들이 230명이 나가지고 이렇게 합창을 하는데요. 예뻐 죽겠어요. 너무너무 예뻤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성탄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있고 성탄 예배의 따뜻함을 경험한 사람은 은혜의 주류에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우리 아이들도 평생 그 기억을 하면서 살아가는 가운데 이상한 판단 이상한 행동 신앙에 헛발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함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십시다” 라는 제목으로 이제 예수님 시리즈 딱 하나 남았습니다. 다음 줄 마지막 남았는데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모두가 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의 어릴 때 배웠어요.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한 연못~~ 알 사람만 알도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내 마음의 평강이 찾아옴은~~ 정말 주님의 마음, 오늘 이 메시지가 수많은 갈등과 고통을 멈추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의 본문은 빌립소서 2장 5절부터 11절 이 본문을 여러분들 봉독하셨는데 이 말씀은 성경 말씀 가운데 정말 원터풀한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성육신에 대해서 여러 군데가 나오지만 말씀의 봉우리들이 있잖아요. 좀 이렇게 다 말씀이 귀하지만 말씀의 봉우리도 예를 들어서 우면산 정도의 높이가 있다. 혹은 뭐 설악산 정도의 높이가 있다. 그런다면 오늘 이 본문은요, 예수님의 성욕심과 예수님의 겸손과 낮아지심에 대해서 알프스의 연봉이요. 에베레스트의 최고의 고봉중에 하나라고 말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말씀 그래서 장엄한 말씀입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 창조주로서 영존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가지고, 시간을 초월하셔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는지 하나님의 놀라운 마스터플랜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산하이에 조그만 도시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이 짧고도 소박한 이 서신서 속에 빌립보 속에서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아주 그냥 깊고도 영광스러운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조직신학적으로도 놀랍고 또 우리 기동론이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크리스톨라지, 기동론에 관한 최고의 봉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 이 땅에 있는 우리들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걸 살펴볼 때에 그 당대의 현실은 그때 1차 수신자였던 빌립보 교회 오늘 특별히 유오디아와 순도교라는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그 당시에 권사님들이 그 교회 중직 권사님들이 서로 다투고 충돌하고 파당을 짓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그래서 권사님들 스토리예요. 그냥 거기에 대한 답을 주시고자 이 말씀을 오늘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원칙 중에 하나가 하나됨인데, 성령 안에서 하나됨인데 하나됨을 위한 최고의 비밀이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겸손한 것임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도 다양한 어떤 배경을 갖고 있었죠. 빌립보 교회 성도들 가운데 빌리포 간수가 있었고, 예심이 있고 간수로부터 열심히 있고 또 자주장사 루디아라는 여성 사업가도 있었고, 귀신 들린 여종이었다가 귀신 들렸다가 회심해서 이렇게 변화된 그런 성도들도 있었고, 여러 종류의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도 수많은 분들이 예배를 드리시는데 여러분 모두가 다양한 배경을 갖고 있잖아요. 근데 우리가 하나 된다. 이거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 그 일을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오늘 이제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갈등과 다툼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갈등 다툼의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가정적으로도 그렇고 모두가 다 자기의 프라이드, 자기 의, 자기 주장이 있다는 것이 조금 세게 나오면 교만이 있다는 것이에요.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됨을 파괴하는 교만과 자기 의의를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자기주장을 처리하고 해결할 능력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어떻게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갈등과 다툼과 문제가 있었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가느냐 타협을 하는 거예요. 타협 어느 정도 서로 동의하는 수준까지 서로 타협을 하는데 대신 자기주장이나 자기 의의나 자기 프라이드나 자기 교만은 나름대로 유지하면서 타협하는 것입니다. 소위 서로 체면치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근데 세상적인 이 타협이라는 것은 거룩함이라든지, 영적인 깊은 차원 영적인 능력 예수님의 주님 대심 성령의 내조하심과 충만함 이런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나름 해결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냥 겉으로 봉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줄로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분쟁과 어려움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분쟁과 어려움이 생겼을 때 오늘 이 말씀이 잘 적용될 수만 있다면 그 어려움과 분쟁은 오히려 하나 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가 있어요. 이게 신앙의 비밀이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갈등과 충돌도 오늘 이 내용이 잘 접목이 되면 거룩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역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씩 말씀드립니다만, 어려움을 당해 가지고 누군가의 조언을 들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누구의 조언을 들어야 할 것인가? 자기의나 자기주장이나 자기 명예나 이런 어떤 자기 프라이드 자기 똑똑함을 가지고 적당히 타협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안 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깨어지고 은혜받고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부인해 본 사람, 자아가 깨어져 본 사람, 자아를 부인한 사람들의 조언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오늘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들으라 무슨 말인가 하면, I. 첫 번째는,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들어야 한다. -성경에서 대표적으로 똑똑한 분들의 조언이 전혀 도움이 안 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욥의 세 친구들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이 나름 똑똑하게 대단한 어떤 조언을 했지만, 그분들은 죽음을 통과한 경험이 아니었기 때문에 욥의 큰 도움이 안 되고 논쟁만 벌였습니다. 영적으로 깊은 차원의 성령 충만한 조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듣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누군가 멀리 갈 필요가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과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과한 그런 은혜를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마음의 결단하고 이렇게 하면 그것이 큰 축복이 되는 겁니다. 제가 90년대 중반에 사우스 아프리카에 있었던 사우스 아프리카의 체제 전환이 그때 상황에 제가 있었는데, 제가 참 많은 걸 그때 은혜를 받았었어요. 90년대 중반에 사우스 아프리카는 인구가 4천만 조금 넘는데 3300만 정도가 흑인이었고, 500만 정도가 백인이었고, 2300만 정도가 칼라라고 해 가지고 유색 인종들 아시안 인도인 이런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절대 다수가 80% 이상 3300만 400만 500만이 흑인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정부가 백인들 500만 정도 되는 백인들이 모든 정부의 모든 권세를 다 잡고 있었으니 그 레지엄 체제 변화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러니까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백인으로서 당시에 대통령이었던 데끌락이라는 분이 개혁파 교회의 장로님이셨어요. 이분이 은혜를 받은 분이에요. 이분이 그 어려운 상황에서 주님의 음성을 순종했어요. 네가 낮은 자리에 들어가 가지고 네가 예수님의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보라. 그래서 그 마음을 듣고 제가 공부했던 그 학교의 그분이 찬슬러였기 때문에 제가 그 얘기를 잘 알고 있어요. 흑인 정보가 들어섰을 때에 전임 대통령인 이 데글라크 현직 대통령인 댓글라크가 만델라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에 부통령으로 들어갔어요. 이건 있을 수가 없는 그래가지고 피 흘릴 수밖에 없는 혁명적 상황에서 낮아져 가지고 문제의 방향을 틀었고, 동시에 만델라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어요. 감옥에 있어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복수하려는 그런 많은 분위기가 있었는데, 만델라는 억울하게 27년 동안 열악한 감옥에서 고통스럽게 지냈지만 감옥에서 나와서 말한 일성이 뭐냐면 내가 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그러셨다. 진짜 용서는 강한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약한 자의 특징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의 사슬에 메인 죄수가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사우스 아프리카는 거의 피비린내 나지 않고 정권 교체가 일어났던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심정을 전임 대통령 후임 대통령이 깨달아가지고, 서로 주님의 마음을 가졌을 때, 역사적인 평화의 체인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듣기 위하여 본문을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자, 오늘 본문에는 주님의 낮아지심을 말씀하고 있는데, 주님의 낮아지심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가? 6절에서는 이와 같이 나와 있습니다. 그는 뭐라고 말하고 *빌립보서 2:6,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본체라는 말이 중요한데 본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다. 그 뜻이에요. 하나님처럼 영존하시고, 하나님처럼 완벽하시고, 하나님처럼 스스로 계시고, 그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등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런데 6절 뒤에 보니까 뭐라고 나왔냐면, *빌립보서 2:6,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본체신데, 하나님과 뭐에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그 다음에 어떻게 해요.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나와요. 동등한 분인데 동등됨을 취할 것을 당연히 동등함을 취해야 되는데 동등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안 취하시고 그 말이에요. 이 말씀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하면 인간의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데서부터 사람의 대부분의 문제가 출발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인데, 사탄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에요. 이사의 14장에 뭐라고 나와 있느냐 하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과 같아지리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길 원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하나님 같이 되고 싶어서 하나님 같이 되리라. 인간의 바벨탑을 쌓은 것도 하나님처럼 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한 것도 하나님처럼 되려고 지금도 21세기에 우리는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가지고 하나님과 같은 키높이를 맞추고 싶어 하는 것이에요. 근데 주님은 하나님과 키 재기를 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하나님과의 동등한 특권 그거 원치 않으시고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지위와 권세와 특권 모든 것들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포기하셨다. 오늘 21세기에 오늘 이 시대에도 극단적인 ai 인공지능 시대, 그 다음에 어떤 유전자 조작, 이런 거 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려고 하는 데서 파생된 어려움들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지 하시고 동등됨을 포기하셨는가, 오늘 말씀 본문을 보니까 성육신하셨어요. 하늘의 황태자가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내려오시되 모든 고난과 동등됨을 포기하는 가장 취약한 곳으로 오셨어요. 바로 여인의 태에 여인의 태가 얼마나 연약합니까? 그 여인의 태에 자궁 속으로 오셨어요. 또한 태어나신 곳이 남들이 생각할 때 메시아가 올 때, 왕궁에 오실 것이 아니냐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처음에는 헤로도 왕궁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거기를 거기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마굿간에서, 가축이 사는 여관 정도가 아니라,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어요. 악한 폭군 해롯왕 치하의 땅에서 태어나셨어요.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특권과 권세를 쓰지 않으셔요. 오히려 작위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그야말로 종, 숨 쉬는 짐승, 노예, 둘로 쓰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7절에 보니까, *빌립보서 2:7,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동등됨을 취한 걸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오셔가지고, 사람같이 되셨다고 7절이 이와 같이 성육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같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처럼 보인다는 말이 아니라, 진짜 인간 진짜 사람이 되셨다는 거예요. 같이 되셨다는 말씀은 인간의 감정 수치 고통 절망 인간의 분노 인간의 부끄러움 이 모든 것을 다 당하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지위와 특권도 없이 주님께서는 완전히 종이 되셨습니다. 이 종대심의 극체가 뭐냐 8절에 뭐라고 나왔냐면, *빌립보서 2:8,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낮추시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죽기까지 뭡니까? 복종하셨다 완전히 낮추시고 그래서 이 스토리는 낮아진 스토리요. 어떻게 보면 망한 스토리 믿지 않는 분들이 볼 때는 뭔가, 우리 오늘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잘 되고 성한 스토리를 좋아하죠. 한국 사람이 미국 이민 가가지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또 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 와가지고 코리안 드림을 이루었다. 아니면 최소한 개용남 아십니까? 개천에서 용이 났다. 이런 스토리를 우리가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반대에요. 유명에서 무명으로, 부자에서 가난한 자로, 하늘의 황태자 존귀한 자가 종이 되신 것입니다. 이런 스토리가 이 세상에서는 별로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독립적이고 자수성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에게 부모님들이 겸손을 가르치고 낮아지는 것을 가르치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더더구나 예수님처럼 그 겸손이 고통과 치욕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면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목표로 해서 한 건 아니었는데 그 결과가 뭐냐 오늘 뒤에 보니까 구절에 보니까, *빌립보서 2:9,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줄로 확신합니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그냥 극적으로 낮아지셨는데 극적으로 높아지신 것이에요. 신학적으로는 자기비하, 자기 비움과 자기 비하를 하셨는데 하나님은 극적으로 승귀 예수님을 승(昇)귀(貴)시키셨다. 성귀라는 말이 어려운 말인데 높이시고 높을 승자에다가 귀자는 귀할 귀자 성귀시키셨다 고통스러운 죽음과 굴욕적인 자기비하를 하셨는데 예수님을 높이시고, 하나님 오른편에 우편에 앉게 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자 여러분 한번 물어보십시다. 이 땅에서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진짜 순종하고 진짜 낮아지고 이런 걸 하면요. 처음에는 몰라줘도 나중에는 이 마음이 진지하게 통하면 진짜 순종하고 진짜 낮아지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알 사람만 알도다. 예 무슨 말인가 어떤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왔는데 자기 할 말하고 똑부러진 며느리가 들어왔어요. 그 자기 할 말하고 똑부러진 며느리가 영향이 더 있겠습니까? 아니면 처음에는 좀 억울한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참고 순종하고 겸손한 그 며느리가 더 영향이 있을까요? 겸손한 며느리로 쭉 가면요 결국은 시어머니도 시아버지도 뭐 시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그 순종자라는 겸손한 그 며느리의 눈치만 슬슬 살피게 돼가지고 진짜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아멘도 조금만 하시잖아요. 이런 말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취급한다. 이런 말이 있어요. 이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우리가 오늘 이 주님의 깊은 진리와 신비를 깨달아가지고, 주님의 겸손과 주님의 거룩한 자기비하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승기시켜 주시는가 이걸 제대로 깨닫게 되면 우리가 이걸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이걸 잘하면서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는 것이에요.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고 야고보 사도나 베드로 사도가 야고보 사도가, 4장 10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어요. 크게 우리 합독하겠습니다. *야고보 4:10, 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 주 앞에서 낮추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 이런 게 아니에요. 주님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우리를 낮추면 남들이 가만히 취급하든 말든 상관이 없이 주님이 우리를 높여 주시리라. 성경적으로 겸손한 자가 강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여주시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에요. 창조주 하나님이 높여 주신다면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한 번씩 우리 다 알자는 사자성어로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 앞에서 겸손하면 우리는 겸자무적이 되는 것입니다. 겸자무적이라는 말이 어디 있나, 지금 만든 겁니다. 겸자무적이에요. 그래서 우리 첫 번째는 우리가 죽음을 통과한 분의 조언을 들어보라. 두 번째로는 진짜 겸손한 자에게는 적이 없고 참 평안히 오는 것이다. II. 두 번째는 진짜 겸손한 자에게는 적이 없고 참 평안히 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이 시대의 시류는 이 시대의 흐름은 겸손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오늘 말씀한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의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걸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됨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에요. 예수님은 신성을 갖고 계셨어요. 물 위를 걸으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바다와 자연도 잔잔케 하시고 그 신성을 갖고 계셨어요. 신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마치 우리가 우리 인간이 몸을 잃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연약한 존재 아닙니까? 우리가 인성을 포기할 수 없듯이 주님은 주님의 신성을 포기할 수 없어요. 그런데 뭘 포기했는가, 신성을 갖고 있는 분이 가질 수 있는 권리를 포기했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 되심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하나님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셨다 이 말이에요. 스스로 신성의 위엄과 영광을 포기하신 것이 자기부인 하신 거예요. 자기부인 예수님은 모욕과 수치를 받으실 필요가 없고 죽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셨는데, 불평불만 없이 죽임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수치를 당하시고, 오죽하면 8절 뒤에 보니까 *빌립보서 2:8,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뭐에 됐다고요?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주님은 신성을 가지셨지만 신성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셨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배척받으시고, 오해받으시고, 친구들에게는 버림받으시고, 제자들에게는 배신당하시고, 침 뱉음과 조롱과 끔찍한 로마군사의 채찍을 받으시고 나중에는 처참하게 벌거벗기심 당하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뿌림받으신 것처럼 돼가지고 권리를 포기하셨어요. 자 이 말씀을 왜? 오늘 여기에 쓰셨을까? 갈등하고 권사님들끼리 힘들어하고 서로 어려워하고 서로 싸우는 것 때문에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는 것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여러분들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 가족들 간의 서로 주장이 서로 강해서 가족들 간에 서로 싸우는 상황 때문에, 화가 난 나머지 어떤 사람들은 에이 집 나갈 거야. 그리고 어떤 아이들은 에이 교회 안 나가 왜 갑자기 교회까지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는 난 다락방 안 나가, 그런 유혹에 빠졌다면 오늘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가족들한테 힘든 분들,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요. 이 말씀을 들어야 할 분은 이 자리에 없어요. 그게 참 시험이에요. 그런데 이 말씀을 안 들어도 될 뿐더러, 또 듣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늘 말씀하시잖아요. 있는 자는 더 부화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고 했어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꺼이 상처를 받고, 모욕을 참고, 자기주장 자기 일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데, 동등한 권리를 포기하셨다는 데서 시작이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깜짝 놀랄 만한 각성을 가진 진리를 깨달아야 되는데 그것이 뭐냐? 예수님이 취하신 그 자리 동등한 권리를 행사해야 할 그 자리를 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낮아주시고, 수욕을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당하신 그 자리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수많은 갈등과 어려움과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자리에서 출발해요. 이건 너무나 중요한 것이에요. 저는 지난 40여 년이 넘는 목회 가운데서 수많은 아픔과 수많은 좌절들이 있을 수가 있었어요.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의 해결 방법은 내 주장과 내 의의가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신 그 모욕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 예수님이 당하신 그 어려움의 자리 그 자리가 문제가 타협이 아니라, 진짜 문제가 해결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말이에요. 신앙생활의 모든 갈등과 충돌의 최선의 출발점은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수채의 자리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시요 어렵고 힘들 때마다 주님이 당하신 그 수채의 자리가 우리가 출발해야 할 출발점이라니까요? 여러분, 이것만 생각하면 이 세상의 타협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깊은 은혜의 충만한 기적 같은 해결 방법을 취해 신앙이여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신비한 비밀의 영역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우리가 그걸 목표로 한 건 아닌데 극적으로 우리가 낮아질 때에 주님이 극적으로 높여주시는 것입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시작, *빌립보서 2:9-11,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썰번트 둘로스가 되니까. 썰번트 킹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설번트 로드가 로드쉽, 부님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절한 자리에서 영광스러운 부활을 경험하게 해주시고, 하늘의 승천을 승귀하게 하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철저한 자기 비하가 놀라운 거룩한 승귀가 되게 하시고 그야말로 로드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그 말을 구약의 제호바 여호와 하나님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로드라는 뜻은 권리를 가졌다는 뜻입니다. 권리를 포기하고 설번트가 되니까. 로드가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로드(Rord)가 되었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성 캐슬 성을 소유하고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 하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어떤 것이든 열 수 있는 키를 가졌다 성을 다스리는 권세(權勢)와 부요(富饒)의 창고(倉庫)를 여는 키를 주셨다. 그래서 이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웬만한 인생의 어려움을 맞닥뜨려도 여유가 생기고 평안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의 속에 있는 수많은 자기 의의와 자기주장의 불순물을 처리하면, 하늘나라에 성의 부요를 주시고 하늘나라의 부요의 창고에 문을 열 수 있는 영혼의 놀라운 극적인 부요함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시 웬만한 어려움에 처해도 우리의 프라이드가 상처받고 우리 자기주장에 상처받고 그런 고통 가운데서도 이 예수님 때문에 참으면 하나님께서 희한하게도 여러분과 저에게 삶의 여유를 주시는 겁니다.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의 얼굴과 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안을 주는데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그림은 이 평안과 이 여유와 이 하늘의 부요는 이 세상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깨달을 수 없는 타협하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신앙의 부요와 비밀이 되는 겁니다. 오늘 이 내용을 여러분 교리적으로 와 닿으면 안 되는 것이고,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들이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드디어 우리에게 적용하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5절의 말씀을 더 강조합니다. 적용이 뭐냐, III.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서 2:5,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오늘 설교 제목대로 적용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앞으로 여러분들 저와 여러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어떤 마음으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실력으로 일할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마음과 그리스도의 태도로 일할 것입니까? 5절에 다시 한번 너의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 이것이 2인칭 명령형 현재형 복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배를 드릴 모든 성도들 예외 없이 너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도 되고 안 돼도 되고 하는 곤면한 정도가 아니에요. 이 마음을 안 품으면 안 된다. 이 마음을 꼭 품어야 한다. 그리고 한 번만 품으면 되는 것이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품어야 하느니라. 그럴 때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사고와 감정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온전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온전론 할 때 사고의 온전함이라고 했는데, 주님의 이 사고방식 가치관이 우리의 삶에 감정을 이끌고 가는 강력한 열차가 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것이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에요. 어려움이 생기고 갈등이 있고 다 있을 때마다 오늘 주님께 주신 이 마음 이 사고를 품게 될 때, 그 자리가 주님의 수치 그 자리가 문제 해결을 나가는 출발점이 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평안을 물 붓듯 그래서 앞으로 하나 방법이 있습니다. 막 갈등이 있고 어려울 때 주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부부 간의 갈등이 치받을 때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겉으로 또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그러지 말고 속으로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사랑의 교회 모든 상황 사역 가운데 조금 마음이 힘들 때마다 속으로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주님의 마음은 신성의 권리가 있었지만 신성은 그대로셨지만 그 권리를 포기하신 그 나자심과 그 십자가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자리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모든 우리 성도들의 갈등을 치유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다시 한번 축원합니다. 속으로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우리 함 해보시겠어요?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예수님 세 분만 해보세요.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예수님 마음 되겠습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생애를 목표로 한 건 아니지만, 놀랍게 높여주시고 여유를 갖게 하시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연말연시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가슴에 손을 얹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요약 갈등과 충돌의 시대에 '겸손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 되게 하사, 분열의 아픔을 '거룩한 전화위복(해류품)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낮고 낮은 십자가의 모욕과 수치의 자리'가 '모든 고통에서 일어나는 강력한 출발점'이 되어, 주님이 '지극히 높여주시는 겸자무적의 미래'를 확신하며, 우리 사랑의교회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세계복음주의 교회들을 섬길 때, '이 민족의 상처 난 마음'이 치유되고, 전세계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온전히 회복되기를 간구해야 한다. -갈등과 충돌의 시대에 교만과 자기주장 자기의 일을 처리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비밀인 주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이 시대의 아픔과 갈등과 충돌을 해결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가 모욕과 수치로 고통당할 때에 예수님께서 고통당하신 십자가의 바로 그 자리에서 내 자기비하와 권리의 포기로 모든 고통을 이기는 극적인 대반전을 감당하는 그 모습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민족의 상처난 감정을 품어 치유하는 한국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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