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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10월 30일)
제목: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말씀: 누가복음 17:11~19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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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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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024년 올해 하반기 사역을 시작하면서, 8월 11일 청계산 산상 기도회부터 글로벌 리더 사경회와 가을 특새 그리고 한교섬 마침내 10.27 연합 예배에 이르기까지. 공교회적 사명을 위해 마음 달려 온 헌신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언제나처럼 공동체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마주한 우리는 이제 조용히 우리 각자 나 개인은 과연 하나님 앞에 어디에 있는지 묵상 가운데 다시 한번 질문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될 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와 같은 우리 일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미국 국방부가 한국을 방어하는 주한 미군의 준비 태세를 두고 단언한 표현이 있습니다. 군대 구호인데요. 바로 ‘오늘 밤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우리는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뜻의 구호가 뭘까요? ‘파이트 투 나잇’입니다. 파이트 투 나잇, 이 표현을 들으신바 그대로 대단히 실전적이면서도 그 어떤 구호보다도 압도적입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과연 지금 당장 오늘 밤에 훈련이 아닌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 태세를 실전 력을 갖출 수 있는 군대는 과연 얼마나 강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떠오르실 겁니다.
 
전쟁은 고사하고 이사만 가도 힘든 것이 우리 일상인데 오늘 수요 예배를 마치고 부부가 오셨다면 남편분이 교회가 서초동이니 우리 집은 남양주지만 여보 오늘 우리 저녁에 이사를 합시다. 하면 그 남편은 조용히 두고 가셔도 될 거 같애요. 해맑은 을 견딜 수 없죠 이사도 쉽지 않은데 오늘 밤 전쟁이 일어나서 그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합리적으로 체계를 만드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파이트 투나잇’ 이 전투 구호는 우리의 신앙생활과도 음미해 볼 만한 연결 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어떤 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바로 내 믿음의 결단과 나의 말과 언어로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삶으로 입증해야 할 신앙 믿는 자로서의 결기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그런 비장함의 고민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상고해 볼 누가복음 17장 말씀은 예수님의 배려 사형 말기 행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제자의 생활 원리 믿음의 능력 그리고 재림의 시기 등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었던 17장에서 11절부터 19절까지는 나병 환자 10명이 깨끗함을 봤다. 라는 소제목으로 성경 가운데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스라엘의 북동부 지역에 사마리아와 갈릴 사이에서 동서로 이동하고 계세요. 11절과 13절에 소개된바 그대로 예수님은 10명의 나병 환자를 만나십니다.
 
이 사건이 접경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나병 환자 집단이 인종적으로 뒤섞여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긍흏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13절에 표현된 대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은 곧 치유에 대한 요청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들의 요구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4절에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에 담긴 함축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의 순종에 따라서 믿음은 드러날 것이며, 치료도 일어나게 되리라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따르면 제사장들에게 도착할 즈음에는 나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 것이죠. 제사장들에게 향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실제로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10명의 나병 환자들 모두 믿음을 보여주고 고침을 받았지만, 단 한 사람만 자신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돌아와 그분 앞에 엎드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읽은바 그대로 15절과 16절에 설명되어 있죠. 예수님은 17절에서 오늘 설교 제목 그대로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10명의 나병 환자와 깨끗함을 받았을지라도 치유 받았음에도 정작 다른 아홉은 보이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으로써 반응하십니다. 그리고 18절 말씀 그대로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렸던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의 반응을 확증하십니다.
 
예수님은 19절에서, 이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시고 ‘일어나 가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9명 모두가 받은 육체적인 치유 외에도 구원까지 받았음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예수님의 질문 앞에 내 필요와 요구만 해결되면 정작 감사는커녕, 그 절실했던 간절함이 아주 쉽게 사라지는 저와 여러분의 곧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마주하지 않습니까? 절망(切望)과 좌절(挫折)의 고통에서 찾아와 만나주시고 치유(治癒)해주신 예수님께 다시 돌아오지 않은 그 9명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깨달음이 지금 이 순간 저와 여러분의 가슴을 심장을 그리고 마음의 자소를 강타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그 질문에 대해 내 삶의 자리에서 믿는 자로서 실존적으로 답해야 할 의무와 함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각자 믿음의 분량과 신앙의 수준은 어떻습니까? 실제 고난 가운데 연단(鍊鍛)의 상황에 있을 때 정작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폰회퍼 목사님의 글입니다. ‘그리스도인에 감사에 관하여’ 라는 깊이 음미해 볼 내용입니다. 우리가 통상 얘기하는 감사의 어떤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부분을 지적하고 있어요. 잘 들어보십시오.
 
“감사하지 않는 것은 망각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망각은 무관심으로 연결됩니다. 무관심은 불만을 낳습니다. 불만은 절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절망은 저주(詛呪)를 초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가 정직한 회심과 실천하는 사랑으로 변할 때까지 쉬지 않고 나를 고소합니다. 그러나 회심과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은 악하고 곤궁(困窮)한 세상 가운데서도 기꺼이 기쁨 가운데 감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양심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 -폰회퍼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징계 혹은 우리가 자초한 인생의 실수와 잘못도 아닌 일생을 일상을 살아가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비통(悲痛)한 슬픔과 가슴 아프도록 아픈 상실(喪失)에 대해서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며 견뎌낼 수 있을까요? 과연 성경이 말하는 인내와 오래 참음은 우리 삶의 고통의 정점에서 어떻게 감사로 전환(轉換)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쉽습니까? 전 어렵던데요.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이와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사랑의 교회 가을 특새와 한교섬(한국교회 섬김의 날)에 오셔서 귀한 말씀을 전해주신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이 편집해서 엮은 책이기도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도 됐어요. 이 책인데요. 이 책은 ‘성도의 불행에 답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신대원 때 읽었는데요. 2014년에 나왔습니다. 미국에서는 2011년, 근데 영어 원제가 더 실질적으로 와 닿습니다. 영어원제가 뭐냐면 한국어 제목은 뭐라구요. ‘성도의 불행에 답하다.’ 25개의 설교 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는 이렇습니다. ‘더 하디스트 서먼스 유 윌 에버 헤브 투 프리치’("The Hardest Sermons You’ll Ever Have to Preach") 무슨 뜻이죠? 당신이 선포해야만 하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설교들 정도의 제목이 되겠습니다.
 
실제로 이 책 안에 담긴 설교문 중에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습니다. 비난의 비극 갑작스러운 돌연사 어린 자녀의 죽음 젊은 가장에 비명횡사(非命橫死), 장애(障礙)를 가진 성도의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자살 문제까지 그리고 그 자살에는 ‘브라이언 채플 목사님’이 다룬 하나님을 안 믿는 자의 자살도 아니고 성도의 자살도 아니고, 이 책에는 목사의 자살 문제도 다루고 있어요. 저 같은 목사가 자살했을 때, 어떻게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그 설교 문이 이 책에 있습니다. 이 책을 추천한 우리나라의 어느 신학자는 추천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잘 들어 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실제 성도들의 고단한 혹은 잔인하기까지 한 삶의 여정에서 과연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단순히 하나의 개념적인 신앙적인 확신으로만 그치는 것은 아닐까? 상실과 고통으로 인하여 눈물을 쏟거나 혹은 그런 눈물조차 메말라버린 아픔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어떤 위로(慰勞)와 답을 줄 수 있을까? 목사인 우리는 고난과 역경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 갇혀서 출구를 찾지 못해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이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무엇을 설교하며 권면할 수 있을까? 이 책에 담긴 이 질문들은 여유롭게 즐길 만한 지적 사색에 속한 것들이 아니다. 사방이 꽉 막혀버린 듯한 절망적인 어려움 속에서 깊이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몸을 떨면서 차디찬 돌 하나가 들어있는 듯 메인 가슴을 움켜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던진 이 질문들은 사느냐 죽느냐 내가 믿는 신앙이 믿음이 서느냐 무너지느냐는 실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 가운데 어린 자녀의 죽음에 대해 설교한 로버트 레이먼 목사님의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소망이라는 설교 내용을 발췌해서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집중해서 한 사람의 고난에 찬 신앙의 분투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들어주십시오. 247페이지 정도부터 있는데요.
 
‘오랜 교회사를 통해 통틀어 살펴보면 사랑스러운 어린 자녀들이 죽었고 부모들은 자녀를 잃은 것으로 크게 낙심하고 슬퍼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청교도 목사 토마스 보스턴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보스턴의 아내는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일은 그녀에게 단지 힘든 일이 아니라,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9월 8일 보스턴 목사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주님은 나의 첫 아들 에벤에셀을 죽음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보스턴 목사님이 고백한 내용을 목사님이 정리한 것이죠. 나는 내 아들이 우리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깊이 확신한다. 나는 내 첫 아들을 주님께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것을 평소보다 더욱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내 아들의 죽음은 나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며 매서운 훈련이다. 아들의 몸을 땅에 묻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내 아들의 이름 에벤에셀을 내 가슴에 묻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1년이 지나고 나서 8월에 보스턴 목사의 아내는 또 아기를 낳았습니다. 보스턴은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아기의 이름을 다시 똑같이 에벤에셀로 짓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에 이 아기도 홍역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보스턴은 아무도 없는 헛간으로 가서 아들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아들 에벤에셀을 살려달라고 그의 생명을 건져달라고, 하나님께 전심을 다해 간구했다. 그러나 내 모든 전부를 쏘아부은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나빠지고 있었다. 실제로 몇 시간 후에 나의 두 번째 아들 에베에셀은 숨을 거두었다 첫째, 아들이 죽어서 이름이 에벤 에셀이었는데. 그 아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둘째, 아들을 얻은 기쁨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에벤 에셀이라고 지었는데 그 두 번째 아들도 죽은 거죠. 첫째, 아들에 이어 둘째, 아들의 장례식을 치른 후에 보스턴 목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내가 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경비하게 몸을 낮추고 주님을 따라 미지의 길을 걸어가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죽은 아이를 관에 누일 때 아내는 아들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얼굴에 덮인 수의를 들추어 내 아들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덮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내 아들을 하나님의 나라 복판에서 만난 날을 확신하면서....’
 
‘시간이 흘러 나중에 삶을 마감할 즈음 보스턴 목사의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동시에 가슴 저미는 신앙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일까요? 우리 한국어의 위대한 표현이 있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죠. 나에게는 마땅히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다. 두 아들을 먼저 잃은 아버지 목사로서 노년에 선 보스턴 목사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좀 뭐라구요. 나에게는 마땅히 주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있다. 나는 6명의 자녀를 둔 목사이자 아버지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이미 무덤 속에 있고 한 명은 아주 짧게 나와 함께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모두 에벤에셀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자녀들 중 단 한 명도 결코 잃지 않았다. 뭐라구요? 그러나 나는 내 자녀들 중 단 한명도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나는 부활의 날에 내 모든 자녀들을 지금 살아있는 자녀들과 함께 이미 죽은 2명의 아들 첫째와 둘째, 에베에셀을 포함하여 모든 자녀들을 다시 만날 것이다. 나에게 목사로서, 아버지로서, 하나님 언약의 말씀 안에 있는 이 단 한 마디 내 자녀의 하나님이라는 약속은 달콤하고도 시원한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으로 간절히 소망하는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아버지의 집으로 달려온 여러분의 간구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신앙인으로서 믿음을 가진 자임에도 정작 여러분이 꿈꾸고 목적하는 삶의 목적이 단지 이 땅 가운데서 성공해서 우리 스스로의 이름을 드높이고, 내 인생 가운데 걱정과 어려움 한 번 없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내 자녀들과 더불어 편안히 살아가는 것에만 매여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진정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임하도록 밀알로 쓰여 지는 것 아니었습니까? 죄인 된 우리가 감히 복음에 감격하여 회심한 그 순간부터, 우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자 헌신과 성김을 위해 결단한 것 아니었습니까? 우리 주변에 여전히 고단한 삶의 어려움과 고통에 힘겨워하는 사람들, 특히나 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분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제약된 세상에 길들여져서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신앙인이라는 우리는 성도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부여받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오늘을 또 내일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결코 나 개인의 삶에만 고립되거나 매몰되어 있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난에 처절하게 직면할 때 비로소 마침내 타인의 고통이 눈에 보이며 그의 고통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고통과 정직하게 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교회 지역사회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게 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 주변 이웃들에 대해 아무런 고민도 관심도 연민도 없다면 과연 내 신앙과 믿음의 실체가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내 삶의 모습이 비록 때때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과 저는 다리처럼 초라해 보일지라도 분연히 떨쳐 일어나 믿는 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 기도와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세상에 가치 하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 이 교회의 담장 밖을 넘어 세상 가운데 조용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얼마 전에 돌아가신 목사들의 목사라고 평가받는 유진 피터스 목사님이 생전에 말씀하신바 그대로 영광스러운 사역을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저 스스로도 하나님 앞에 다시 다짐해 봅니다.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목사로서 내 일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사람들에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목사로서 내 일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사람들이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속에 언제나처럼 운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문화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는 어느 정도 자신이 똑똑하고 제대로 적당히 도움만 받으면 당신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행복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는 행복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고단한 극단의 삶 속에서조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자기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맛보며 자신들의 삶을 살아낸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대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분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을 신뢰함으로 우리 삶을 에워싸는 모든 삶의 정황을 넉넉히 이기며 무엇보다 의지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유진 피터스-
 
요약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 저는 다리’와 같은 우리 믿음의 한계를 넘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강력히 경험해야 한다. 피 묻은 복음의 그 원초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끝내 승리로 이끄시는 선하신 하나님을 목도하며, 우리 교회의 공교회적 헌신과 섬김 가운데 겸비(兼備)함을 가지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위로가 되는 사명 공동체로 온전히 사용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무슨 희망이 있으며, 우리 가정의 역전이 가능할지, 내 자녀들이 성경이 말하는바 그대로 장수의 화살이 될까, 막막하기만 하고, 도대체 이 경제적인 어려움은 삶의 질 권은 우리의 부모님의 병환과 그리고 억눌리는 삶의 모든 고단함의 이유들이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라는 걱정과 맨 정신에 잠을 잘 수 없는 때가 우리를 강타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지나감과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 하늘 보좌를 박차고 우리를 위해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그 보혈의 피를 뿌리셔서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는 역전될 줄 믿어야 한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실 때,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 모든 믿음으로 지켜나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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