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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11월 15일)
제목: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말씀: 요나 4:6~11
찬양인도: 쉐키나(유재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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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4:6~11,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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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앞에 다시금 엎드립니다. 이 시간 말씀 가운데 나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맞닿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우리 가운데 넘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여러분 이 저녁 참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많은 깨달음과 은혜를 주시는 시간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러분 식사하셨습니까? 네 잘하셨습니다.
4명의 사람이 한 자리에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네 사람이 맛있는 식사를 먹는 도중에 갑자기 이유 없이 한 사람이 먹던 숟가락과 포크롤을 탁 내려놓더니 화를 내면서 나가버립니다. 남은 3명은 도무지 그 사람이 왜 나갔는지 영문을 알지 못합니다. 몇 초간의 정막이 흐르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립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밥을 먹다 갑자기 나간 것은 나 때문일 거냐,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나가지 않았나, 스스로를 자책하며 밥을 먹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식사를 중단합니다. 이에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을 안아주며 다독이며 위로하며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 우리 먹던 밥을 마저 먹자. 하고 이 사람을 위로하며 이 분위기를 식탁의 분위기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런 와중에도 남은 한 사람은 누가 나가든 누가 눈물을 흘리던 누가 위로를 하든 관계없이 자신의 식사를 꿋꿋이 이어나갑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 이야기는 서로 다른 혈액형을 가진 4명의 사람이 식사하는 장면을 묘사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a형이고, 어떤 사람이 b형이고, 어떤 사람이 o형이고, 어떤 사람이 ab형인지 아시겠어요? 네 식사를 하다 갑자기 화를 내며 나간 사람은 어떤 형이죠? 네 이렇게 각자 다른 대답을 하는 건 나와 가까운 그 누군가를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네, 자리에는 a형을 가지신 분도 있고 b형을 가지신 분도 있고 o형을 가지신 분도 있고 ab형을 가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아닌데요. 이 이야기의 결론은 식사를 하다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이유 없이 나간 사람은 ab형이라고 합니다. ab형에는 좀 괴자가 있고 다른 사람이 이유 알지 못하는 행동들을 하는 분들이 조금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책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형은 무슨 형일까요? 이건 잘하시네요. a형 모든 게 내 탓일 거야. 약간은 작은 마음을 가지신 분들이 a형 그보다 더 작은 마음을 가지신 분들은 어떤 형이죠? 네 소문자 a형입니다. 네 그리고 그 사람을 위로하는 사람은 무슨 형이죠? 네 o형입니다. 어떤 상황을 상황이 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은 사람은 o오형이고, 네 남은 형이 하나 있죠. 주변과는 관계없이 꿋꿋이 너는 나가라 너는 눈물을 흘려라 위로를 해라 나는 내 할 일을 할 일이라 할 것이다 하는 사람 무슨 형인가요? b형입니다. 네, 여러분 저는 무슨 형 같으세요? a형이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고 o형이라고 말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왜 의견이 분분할까요? 여러분들은 제가 무슨 형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소심한 면을 보신 분들은 제가 a형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고, 제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오영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 약간 제가 제멋대로 하는 면을 알고 계시면 a병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편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많은 부분에 있어서도 사람들을 이리저리 재단하면서 그 사람의 범위를 정하고 그 외에 벗어나는 부분들을 보려고 하지 않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비단 사람을 보는 시각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러 가지 다른 판단 결정에 있어서도 내가 가진 고정관념이 분명히 있고 나는 그 고정관념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습성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오늘 요나서를 읽었는데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자 요나 또한 이런 고정관념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이고 끝까지 꺾이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고집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4장을 읽었는데 4장의 앞부분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고 요나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요나는 그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자신의 행선지를 정하고 다시스행 배를 타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요나를 물고기를 동원하시면서 까지 꺾으시고 그를 리누웨로 끝내 가게 하십니다. 니느웨에 도착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요나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니누웨 성에는 큰 회개의 물결이 일어나고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는 역사가 1장부터 3장까지 기록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4장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요나의 심적인 상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니느웨의 성의 회개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라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말씀을 전하였으나 그의 마음속에는 누가 자신이 전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고, 혹여 받아들여서 그 성 가운데 회개 운동이 일어나더라도 그 회개 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지금 설교를 하는 제 입장에서는 요나가 굉장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의 입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전해들은 사람이 변화되고 회개하며 돌이키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그것만큼 기쁘고 보람된 일은 분명히 없습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일이고 설교자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기 많은 훈련생들이 와 계실 텐데요 훈련 교육자가 가장 절망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1년을 열심히 훈련을 했는데도 전혀 변하지 않는 훈련생의 모습을 보면서 훈련 교역자는 절망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훈련으로 사람이 변하지 않는 건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많은 변화된 분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내가 훈련을 잘 못한 것인가 하면서 자책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훈련생들은 제자 훈련과 사역 훈련의 그 과정을 겪으면서 정말 말할 수 없는 많은 변화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가끔 변화된 것처럼 위장해 있다가 위장하려면 끝까지 위장하고 있지, 마지막 때쯤에 그 본색을 드러내는 훈련생들이 가끔 있습니다. 마지막 수업에 갑자기 손을 들더니 평소에는 시켜도 잘 안 하던 대답을 자발적으로 손을 들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요 목사님, 저는 1년 동안 훈련을 받았지만 아직 제 마음은 그대로입니다. 제 삶은 변한 게 없습니다. 저는 훈련 시간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훈련 교육자는 정말 절망하게 됩니다. 혹시 이런 분이 있다면 끝까지 숨기시기를 바랍니다. 요나 선지자는 물론 자기가 자발적으로 니느웨에 간 것은 아니지만 정말 죽을 고비를 넘겨서 니누웨의 성에 갔고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회개한 미누의 성을 보면서, 회개를 통해서 재앙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을 보면서 요나는 화가 치밀기 시작했습니다. 4장 1절을 보면,
*요나 4:1,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이렇게 시작합니다. 자신이 말씀을 전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재앙을 면한 니네를 보면서 요나는 싫어하면서 성을 내었다라고 기록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 요나는 처음부터 니느웨 성에 가기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 성이 회개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요나의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재앙이 니느웨 성에, 아수르 민족 가운데에 내려지는 것은 정말 합당하다. 이것은 마땅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아수르 민족, 니느웨 성 모든 사람들은 재앙을 당해서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비참하게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정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즉각적으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고 자신을 굳이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유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물고기에게 삼킴을 당해서 니느웨 성에 가서 말씀을 전했지만 요나는 자신의 마음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혹여 라도 자기가 전한 말씀을 듣고 니느웨 성이 돌이키고 회개할까 봐 요나는 겁이 났습니다. 요나는 말씀을 전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만큼 마음이 선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행한 악을 보면 물론 이스라엘 민족들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배교하고 악을 행하였으나 이 니느웨 성에 살고 있는 앗수르 민족이 자신의 동족에게 행한 악을 생각한다면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들은 너무나 잔혹하고 죄악 된 민족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구속이 조금도 없다. 라고 요나는 결론 내리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혹여 라도 자신이 선포한 말씀을 받아들이더라도 듣다 마는 것처럼 그들의 회개가 곧 멈춰지기를 그것이 요나가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요 최상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생각과는 달리, 니느웨 성은 큰 회개 운동, 큰 영적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니느웨 성은 하나님의 재앙으로부터 구원받게 됩니다. 요나가 화가 났던 이유는 그의 정의감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의가 무엇입니까? 요나가 생각했던 정의는 못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악한 민족은 그들이 못된 짓을 한 만큼, 그들이 악한 만큼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는 심판을 받는 것이 정말로 마땅하고 그게 정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는 민족이며 그들은 구원받아서도 안 되는 민족이라는 것이 요나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요나는 이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고집을 절대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기대도 절대로 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요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택한 이스라엘 민족의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니 누에는 망할 것이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받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을 가지고 니느웨 성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재앙을 면했지만 그는 여전한 기대를 가지고 니느웨 성을 지켜보기로 합니다.
우리 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5절 읽겠습니다.
*요나 4:5,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가 무엇을 지었죠? 초막을 지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텐트를 지은 것입니다. 초막에도 종류가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텐트에도 종류가 굉장히 많은 거 알고 계시죠? 저는 얼마 전 아들과 텐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캠핑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캠핑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굉장히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저는 캠핑은 굉장히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희 아들이 캠핑 가기를 원하는 것 같아서 아들과의 추억을 한번 쌓아보려고 하루저녁 캠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큰마음 먹고 거금 10만 원을 들여서 텐트를 장만했습니다. 제가 아들과 함께 들고 간 텐트는 원터치 텐트였습니다. 어떤 건지 아시죠? 그냥 던지면 펴지고 접는 데 1분, 이런 아주 작고 간단한 텐트를 가지고 캠핑장에 당당히 입성했습니다. 그런데 캠핑장에 들어서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가지고 들고 간 원터치 텐트와는 다른 이걸 텐트라고 해야 되나? 집이라고 해야 되나? 하는 텐트들이 펼쳐져 있는 저희 집보다 더 안락하게 보이고 아늑하게 보이는 텐트를 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텐트를 장박 텐트라고 합니다. 저희처럼 하루 그냥 임시로 자고 가는 것이 아닌, 아주 며칠 동안 오랫동안 한 달 두 달 묵을 목적으로 설치된 텐트를 장박 텐트라고 합니다. 이런 텐트들은 오랫동안 지낼 목적이기 때문에 아주 튼튼하게 또 많은 공을 들여서 설치해야 됩니다. 하지만 저희 텐트는 얼마 걸린다고 했죠? 네 10초, 던지면 펴지고 접는 데 1분, 왜 제가 그 텐트를 갖고 갔을까요? 저는 하루만 자면 되니까요. 네, 요나가 지은 장막은 여러분 장박 텐트가 아니고 지금으로 말하면 제가 가지고 간 원터치 텐트입니다. 이 텐트의 특징은 빨리 치고 빨리 거둘 수 있으나, 비가 오면 비가 뚝뚝 떨어지고 햇빛이 들면 해 빛이 그대로 쪼인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나가 장박 텐트를 치지 않고 이렇게 원터치 텐트와 같은 간단한 초막을 지은 이유는? 요나는 이 니느웨 성읍이 망하는 것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기대와 소망, 예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잠깐의 시간이라도 50℃를 오르내리는 건조한 날씨와 뜨거운 태양 그리고 뜨거운 바람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이 요나를 괴롭게 하기에는 충분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때 요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시고 요나를 가리게 하셨습니다. 우리 6절을 한번 읽겠습니다. 6절 다 같이 보겠습니다.
*요나 4:6~11,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더위에 지쳐 있던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예비하셨죠? 박 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조그마한 박 넝쿨이 뭐가 그리 대단할까, 싶기도 하지만 여러분 뜨거운 햇빛이 비출 때 여러분 아무것도 없으면 우리 어떻게 합니까?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죠. 그럼 어때요? 조금 시원합니다. 너무 더운 여름날 우리 본당에서 에어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여러분 어떡합니까? 손바닥을 확 부치잖아요. 작은 주보를 가지고 주보는 교회의 알림 소식인데 이걸 막 부치잖아요. 알림은 보지 않고 네 그렇습니다. 아주 조금만 손바닥이라도 햇빛을 가리면 우리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50℃를 웃도는 이 건조한 기후와 햇빛 속에서 이 박 넝쿨로 그늘이 내려진다는 것은 정말로 요나에게는 잠시나마 그늘로 인하여서 시원함을 맛볼 수 있고 청량감을 맛볼 수 있는 이 지친 요나에게 큰 위로와 쉼을 주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를 통한 요나의 감정이 뭡니까? 여러분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라.’ 크게 기뻐하였더라.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있어요? 박 넝쿨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는요. 요나서 1장을 쭉 보면 알겠지만 요나는 하나님 앞에 매번 하나님 죽여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징징거리던 선지자였습니다. 3절에서도 “하나님 내 생명을 거두어가소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마땅합니다. 내게 낫습니다.” 이랬던 선지자입니다. 이랬던 요나가 햇빛을 막는 그 작은 박 넝쿨 이 박 넝쿨 하나에, 기뻐하는 어떻게 기뻐해요 크게, 크게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참 모르겠습니다. 요나를 위해서 박 넝쿨을 준비하시고 그늘로 그를 위로하시고 시원케 하셨는데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은 또 다른 것을 요나를 위하여 준비하셨습니다. 무엇을 준비했냐면 작은 벌레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벌레는 요나가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해 하던 박 넝쿨을 갉아먹습니다. 박 넝쿨은 이제 시들어 더 이상 요나에게 비추는 햇빛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거기에 더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시고 요나를 향해서 불게 하시고 요나의 머리에 뜨거운 해 빛을 쪼이십니다. 이에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이야기를 또 하나님께 이야기합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내게 낫습니다.” 하나님 이런 뜨거운 태양 아래 뜨거운 바람 아래 하나님 사는 게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나를 죽여주십시오. 라고 또다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요나가 지금 왜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요나는 지금 자신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이 우울하고 불행한 자신의 삶 속에 위로하는 것이 박 넝쿨이었고, 앞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그 박 넝쿨이 시들어서 이제 나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하나님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죽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서 박 넝쿨을 준비하시고 또 시원하게 살게 놔두시지? 또 벌레를 보내셔서 그것을 갉아먹게 하시고, 왜 뜨거운 바람을 준비하셔서 요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셨을까요? 왜요? 말로 해서 안 되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처음부터 요나를 바다에 빠뜨리셨나요? 처음부터 물고기 이렇게 삼키게 하셨나요? 아니에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요나야 내가 너를 니느웨에 보낼 거야. 너는 니느웨에 가서 내가 너에게 명령한 것을 전하기만 하면 돼.” 하나님께서 정말 젠틀하게 신사적으로 요나에게 말씀하셨어요. 요나가 들었어요? 안 들었어요? 안 들었습니다. 전하고도 요나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하나님도 말씀으로 이렇게, 이렇게 해라 이런 계획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고집 센 선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 자신이 정해놓은 정의, 자신이 결정한 한 민족의 운명이 뒤바뀌는 것을 결코 용납 치 못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도 이 계획에 내가 결코 참여할 수 없고, 결국에는 내 생각대로 내 예상대로 흘러갈 것이다. 라는 이 생각을 요나는 조금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말로 해서 안 되니까, 물고기 뱃속에 요나를 넣으시고, 니느웨에 보내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박 넝쿨을 준비하시고 그것을 갉아먹게 하시고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요나 내면에 있는 불편한 마음, 동의할 수 없는 생각, 잘못된 기대감, 잘못된 신념, 결정 이 모든 것들을 깨부수시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요나에게 작은 기쁨을 주셨다가 그것마저 빼앗아 버리면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실물 교육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에게 말씀하시죠. “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 넝쿨도 아끼는데, 이 니느웨의 성에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12만이고, 가축들도 많이 있는데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이 요나에게 물어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 참 고집 세죠? 하나님 말씀 안 듣죠? 요나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요나의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요나에게 질문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니가 누구냐?” “니가 누구냐?”입니다. 네가 어떤 사람이냐 네가 뭐 하는 사람이냐? 여러분 요나는 누구예요? 어떤 사람이에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 선지자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선지자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선지자는 죄인의 회개를 돕는 자입니다. 죄인이 말씀 앞에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요나가 전혀 정체성이 없었던 선지자는 아닙니다. 요나는 분명히 자신이 뭐 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선지자인 것도 알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민족에게는 자신이 정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끓는 심정으로 열과 성을 다하여서 그들이 회개할 것을 그들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할 것을 권하며 설교하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정해놓은 울타리, 그 울타리를 벗어났을 때에 자신이 바라지 않았던 사람들, 마땅히 심판을 받고 그들이 죽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 더 이상 자신은 선지자로 설 수 없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구원에 그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요나가 잊은 것, 요나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나는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 또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았을 때는 자기도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왜 택하셨습니까? 아무 이유 없습니다. 하나님의 그냥 강권적인 선택하심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 뿐입니다. 무언가 이스라엘의 조건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온 열방의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요나도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선택하셨고 구원의 은총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요나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목적, 하나님께서 요나를 택하신 목적,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은 여러분 분명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구원의 도구, 열망의 복음의 도구로 그들을 사용하시기 위해서 요나도 택하시고, 이스라엘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기뻐하는 마음으로 열과 성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했으며 회개의 메시지를 회개의 마음을 촉구해야 했습니다. 겉으로만이 아닌 자신의 온 마음과 온 전심을 다해서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야 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 성이 구원받았을 때 그는 누구보다 기뻐해야 하였으며 돌이킨 대로 그들이 진실이 그들의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요나의 목적이고 요나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 안에 있는 단단히 굳어진 마음과 고정관념과 잘못된 생각은 그가 올바른 선지자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유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기뻐해야 할 것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요나가 기뻐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니느웨 성이 자신이 선포한 말씀, 하나님의 말씀에 회개한 것을 보고 그는 누구보다 기뻐해야 했습니다. 도리어 니느웨 성의 이 회개가 지속되지 못할까 노심초사(勞心焦思) 하는 마음으로, 아비의 마음으로 그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 잘 성장하기를 기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작은 박 넝쿨, 그늘에서 기뻐하고 그것을 갉아먹은 벌레, 그 벌레 때문에 분노하고 이러한 것들에 기뻐하고 분노하는 모습은 여러분 결코 선지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 새 생명 축제를 앞두고 제 자신을 비롯해서 많은 사랑의 교회 영 가족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작정하고 여러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고 계시죠? 아멘 소리가 너무 작아서 제가 낙심하려고 합니다. 그러고 계시죠? 아멘!! 너무나 귀한 생명의 축제이고 사역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반드시 새 생명 축제를 해야만 하는가? 입니다. 여러분 혹시 1년에 한 번 오늘은 밥 먹는 날 정해놓고 식사하는 분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시죠? 혹시 오늘은 숨 쉬는 날 정해놓고 숨 쉬는 분계십니까? 아무도 안 계십니다. 내일이 수능인데요. 내 자녀가 수험생인데 1년 중에 3박 4일 이날만 공부하는 날 정해놓고 3박 4일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보면 여러분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그 학생은, 학생은 학생이지만 공부하는 학생은 아닙니다. 여러분, 제 마음에 노파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새 생명 축제 기간에만 전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그 우선순위를 둬야 합니다. ‘온 세상을 위하여 이 복음 전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정체성입니다. 그 우선순위를 우리가 잃은 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잠시 주신 박 넝쿨 하나에만 기뻐하는 요나 선지자처럼 살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 여러분을 덮고 있는 잠시 시원한 바람과 햇빛을 피하면서 그 그늘 안에 있으면서 쉼을 누리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요나처럼 그 그늘에만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작은 벌레가 그 박 넝쿨을 갉아 먹었을 때에, 나를 시원하게 해주던 그 그늘이 없어졌을 때에 하나님에게 하나님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라고 분노하고 항변하고 울부짖는 그 선지자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놓으신 박 넝쿨에 우리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마땅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더 크고 근본적인 감사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나를 덮고 있는 잠시 나를 시원하게 해주는 박 넝쿨이 아닌 한 영혼이 구원받고,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한 영혼이 생명을 얻었을 때의 기쁨,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이 구원의 방주인 사랑의 교회, 안아주신 본당에서 함께 많은 사람들이 예배하며 생명이 살아나는 이 생명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누구보다 기뻐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고 그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그런데 어떤 분들은 새 생명 축제를 앞두고 어떤 분들은요. 작정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세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래서 왜 작정하는 게 힘드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물었더니 내가 사랑의 교회 20년도 넘게 다녔는데, 작정을 매년 하다 보니 이제 작정할 사람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왜 작정할 사람이 없을까요? 여러분 혹여나 이스라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 내 머릿속에, 내 생각 속에 있는 내 가족, 내가 정한 이웃, 내가 정한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만 복음의 대상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생각하지 못한 니느웨 성에 관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요나를 니느웨 성에 보내십니다. 그들이 비록 자신의 동족을 괴롭히고, 하나님 앞에 상상할 수 없는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그들이 돌아오고 구원받기를 바라셨습니다.
여러분, 제가 작은 간증 하나 하겠습니다. 올해 초에 저희 사촌 형수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저보다 몇 살 이셨는데 수년간 암 투병을 하다가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소천하시기 몇 달 전까지 저를 비롯한 친지들이 그 형수가 암 투병으로 여러 해 동안 고생하고 힘들어했던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말씀을 안 하셔서 심지어는 그것을 숨기면서 가족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셨습니다. 지나보니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많이 힘드셨을 텐데, 제가 목사인데 그런 말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기도해 주는 사람인데, 사촌인 저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그렇게 소천하신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저희 친지들이 모였습니다. 그 식탁에 장례식장 식탁에 친지들이 모였고, 그곳에 고모님 두 분이 계셨습니다. 요즘은 집안에 아주 큰 대소사가 아니면 여러분 고모님을 제가 뵐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랜만에 고모님을 뵙습니다. 고모님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시고 더군다나 한 분은 독실한 불자로서 절에서는 보살님으로 불리십니다. 여러분 보살님이란 호칭 아세요? 보살님은 우리 교회의 권사님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주 열심 하십니다. 절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모르세요. 하지만 부모님들은 가끔 저를 만날 때마다 제 이름은 부르지 아니하시고 저를 존중해 주시면서 목사님이라고 부르십니다. 절을 다니면서, 그런데 그 자리에서 고모님이 제게 뜻밖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김 목사님, 다니는 교회가 사랑의 교회인가? 네 고모님 서초동에 있는 그 크고 좋은 교회 맞지?” 그래서 “네 맞아요.” 어떻게 아세요? 그때 고모님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김 목사는 왜 고모들을 한 번도 교회에 부르지 않는가? 교회가 그렇게 크고 좋다면서?” 제가 머리를 한 데 딱 맞은 듯 했습니다. 그 순간 제가 목사고, 새 생명 축제를 지금 3년째 담당하는데, 한 번도 작정 자 이름에 고모를 써야겠다. 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제가 보살님도 저를 한 번도 안 초대하셨잖아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고모님 죄송합니다. 저희 교회에 11월 달에 새 생명 축제가 있는데, 고모님 꼭 오세요. 연예인도 오고 선물도 드리고 좋은 말씀도 들을 수 있고, 제가 강남에서 제일 맛있는 곳에서 식사 대접받을 테니, 꼭 오세요라고 고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고모님들은 다음 주 수요일 새 생명축제에 참석하기로 하셨습니다. 박수... 제가 박수 받을 일은 아니고요. 이제 정말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저는요. 저희 고모가 구원받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고모를 몇 년에 한 번 뵙는 게 전부고, 고모는 또 저래 너무 열심히 다니시고 하니까, 고모가 구원받을 거라는 생각 그러니까 태신 자 명단에 저는 한 번도 쓴 적이 없죠. 그러니까 요나 같은 마음이 제 안에도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근데 누군가 고모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고모의 오빠이신 저희 부친께서 열심히 기도하셨을 것 같은데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우리 주위에도 분명히 이런 분들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제 주위에도 여전히 이런 분들은 많이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 딱딱한 껍질을 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전도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작정할 수 있는 사람의 고정관념을 우리가 모두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몇 년간 연락이 두절되었어도 내게 조금 멀리 있는 사람들도, 심지어 나를 괴롭게 하는 자들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작정한 4만 5천 명의 놀라운 이름들이 있습니다. 우리 어떠한 마음으로 작정했습니까? 혹여나 니느웨 성에서 확신 없이 설교한 요나처럼 적긴 적지만 안 될 거야, 이러한 마음으로 작정하진 않았습니까? 혹은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어 내가 정한 교만한 마음으로 복음조차 전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으로 작정하고 전할 때에 구원의 역사가 니느웨 성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였던 것처럼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이들까지 변하게 하시고 구원케 하시는 이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주일부터 시작되는 새 생명 축제 기간에, 다섯 번의 집회 기간에 우리의 생각의 틀을 뛰어넘고, 우리의 마음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본당 가운데 가득 부어지는 역사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동참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요약
나의 결정과 나의 판단, 나의 선입견 모두 하나님 말씀 앞에 내려놓아서, 그 하나님의 계획에 날마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 박 넝쿨의 그늘과 같은 작은 것에 내가 기뻐하는 인생이 아닌, 한, 영혼이 돌아올 때, 가장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삼는 인생이 되는 자가 되며, 한 영혼의 영적 필요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준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닿는 곳에 기쁨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일익을 감당해야 한다. 새 생명 축제를 앞두고 온 교회가 부흥의 물결을 소망하며 실천하는 자가 되고, 교회 사역과 담임 목사님과 새 생명 축제 강사님들을 위한 기도 제목을 하나님 앞에 함께 올려드리며, 2023 새 생명 축제를 통해 주님의 귀한 행적이 나타나는 기적을 체험하며, 2천만이 주님께 돌아오는 2033 50 비전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새 생명의 결정적 역사가 일어도록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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