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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5년 1월 8일)
제목: "사랑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것"
말씀: 고린도전서 13:1-7
찬양인도: 쉐키나(이동선 부목사님)
사회: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방요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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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13:1-7,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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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을 앙망하며 은혜를 사모하는 수요 저녁 기도에 참여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시간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3장 1절에서 7절의 말씀을 저와 함께 교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는 고린도교회 가운데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그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분쟁(分爭)하고 분열(分裂)했죠.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공동체를 더 사랑하도록 허락하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은사를 그 능력을 추구하다가 도리어 가장 중요한 사랑을 놓쳐버린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 12:31,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여기에서 바울이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한 것은 은사(恩賜)의 크고 작음이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넘어 교회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을 사모(思慕)하라라는 의미죠. 여러분 그 길이 어떤 길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여러분 2025년도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앙망(仰望)하는 우리 사랑의 교회 가운데 경탄(驚歎)할 만한 새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그 길이 사명(使命)의 길, 순명(順命)의 길, 그리고 사랑의 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럼 함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으로 너무 유명한 말씀이죠. 바울은 15가지의 동사로 사랑을 정의하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 첫 번째 나오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함께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 고린도전서 13:1,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러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은사 중 하나가 바로 방언(方言)의 은사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지금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방언의 은사가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은사는 의미 없는 소음에 불과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거죠.

여러분, 사실 이 말에는 그 문자 그대로의 이면에 더 충격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세기 헬라 문화에서는 우상숭배(偶像崇拜)가 성행했죠. 보통 우상숭배할 때 어떤 의식이나 제사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그리스도 문헌들을 찾아보면 구리와 꽹과리는 우상숭배의 의식이나 그 제사 때 사용했던 도구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이 플루타르코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그리고 루키아노스가 쓴 신드레 데와 같은 문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1절을 다시 해석해 보면 바울이 지금 내가 방언을 하면서 천사의 말을 하는 것 같이 아주 신령해 보이는 은사를 가졌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거 우상숭배 같은 거야! 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하셨죠. 첫째는 무엇입니까? ⓵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⓶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랑의 본질이시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의 핵심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믿는 성도에게는 무엇이 있어야겠습니까? 바로 사랑이 있어야겠죠. 그런데 그런 성도에게 사랑이 없다. 그것은 일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없는 은사는 우상숭배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바울이 강하게 꼬집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2절 말씀을 또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 고린도전서 13:2,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여러분, 고린도교회가 방언의 은사와 함께 자랑했던 은사가 또 있는데요. 그것은 예언의 은사 그리고 지식의 은사였습니다. 예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여러분, 본문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설교와 같다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하고 그 신령한 지식을 대현하는 것 이게 얼마나 값진 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지금 아무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나눌 지식이 있고, 그 지식을 뒷받침하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사랑이 없다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절의 말씀 우리 또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 고린도전서 13:3,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러분은 이 3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 인간은 자기 의를 위해서 사랑 없이도 구제(救濟)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 몸까지도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 본문을 보면서 예전에 한 목사님께서 해 주셨던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이분은 다음 세대를 대상으로 목회(牧會)를 하셨던 분인데요. 목사님이 쉬는 날도 없이 사역을 하셨어요. 그리고 자기가 받는 사례비 이상의 이상의 물질로 그 아이들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쉬는 날도 없이 이렇게 무리해서 사역을 하시다 보니 병이 나셨어요. 그래서 사역을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사역이 쉬면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드셨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헌신한 것이 정말 순수한 사랑이었을까? 만약 이 내 헌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헌신해도 아무도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나를 따르지 않고,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조건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헌신을 할 수 있었을까? 정말 예레미야가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들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계속해서 눈물로 씨를 뿌릴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헌신하고 내 몸을 이렇게 이렇게까지 불사르게 내어준 것은 순수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내 헌신의 대가로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취하기 위한 조건적인 헌신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회개(悔改)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과 사람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의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위해 자기 것을 내어주고 심지어 자기 몸까지도 내던질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여러분,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구제도 합니다. 때때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은사(恩賜)가 우리의 헌신(獻身)이 정말 의미 있는 은사와 헌신이 되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맞습니다. 진실한 사랑 그 진실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그 진실한 사랑이 그 진실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4절에 앞부분만 우리 한목소리로 힘차게 읽겠습니다.

* 고린도전서 13:4a,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첫 번째로 정의한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다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마크로 디메오라는 단어인데요. 이 단어의 의미와 용래가 궁금해서 제가 헬라어 사전 세계와 그리고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좀 찾아봤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0번 그리고 70인경에서 2번, 외경에서 6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용례를 좀 찾아보니까 이 ‘마크로 디메오’라는 단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고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 필로가 기록한 모세의 생애와 같이 꽤 유명한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단어더라고요. 그래서 찾아본 용례를 종합해 보면 이 단어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보는 것처럼 ⓵오래 참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그리고 두 번째는요. ⓶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견뎌낸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더라고요. 조금만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내게 어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내며 인내하고 기다린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의하면 마크로 디메오의 뜻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것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 이 정의를 따른다면 사랑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나 내 이성으로 동의가 되는 부분 혹은 내가 선호하는 부분만을 품으며 인내한다라는 것이 아니겠죠.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또 어떤 부분은 내가 선호하지 않는 모습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견디고 기다려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영가족 여러분,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정말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까?

내가 동의 되는 부분만이 아니라, 내가 선호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정말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까? 우리는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상대를 바꿔서 품고 싶어 하죠. 교회 안의 지체, 직장의 동료, 친구, 배우자, 심지어 자식에게도 그렇지 않습니까? 있는 그대로 품고 견뎌주기보다 칼을 대서라도 자꾸만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버리고 바꿔서 내 곁에 있게 하고 싶은 것이죠. 그런데 그게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단절하거나 멀어집니다.

여러분, 여기서 있는 그대로를 견뎌준다. 라고 할 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견뎌준다라는 것은 불리한 것을 알면서도 불리한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묵인하고 덮어준다라는 뜻이 아니죠. 그것은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맥락(脈絡)은 이 본문의 맥락은 공동체의 지체됨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면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를 깨뜨리는 불의와 악의에 대해서 그것을 그렇게 하도록 돕거나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서 있는 그대로를 견뎌준다는 것은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어떤 이의 특징과 특성, 그리고 그 고유의 것을 내 불편함 때문에 혹은 내가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바꾸거나 깨뜨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것이 바울이 정의한 사랑의 첫 번째 정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를 이렇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청년을 지도하면서 특히나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원하는 청년들의 모양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대로 커주면 너무 좋은 거예요. 근데 그 고요한 모양을 무시하면서 내가 원하는 모양으로 깎아내고 다뤄내면서 그게 안 되면 막 화가 나서 바꾸려고 하고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동역자, 동료 그리고 배우자 또한 자녀를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까? 여러분, 우리는 왜 이렇게 사람을 있는 그대로 견뎌주지 못하는 걸까요? 쉽게 말하면 불편한 게 싫은 거죠. 세상이 너무 편리를 추구하기 때문일까요? 사람들은 조금만 불편해도 못 견디는 거예요. 그래서 기어코 내가 편한 방식으로 내가 편한 상황으로 바꿔내야만 하는 것이죠.

여러분, 사회가 점점 발전할수록 우리의 자기 중심성은 굉장히 강해지는 것 같아요. 풍요하게 되면 풍요하게 될수록 이상하게 이기심은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아요. 그럴수록 어떻습니까? 그럴수록 우리 안에 사랑이 얄팍해지는 것이죠. 여러분,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서 왜곡된 사랑과 비틀린 사랑을 가르쳐준다는 사실 아십니까? 여러분, 수많은 노래와 영화와 드라마를 보십시오. 여러분, 그곳에 나오는 사랑 다 엉터리입니다. 실제랑은 너무 다른 거예요. 여러분, 수많은 매체와 미디어가 말하는 사랑은 다 어떻습니까? 다 핑크빛입니다. 막 하얀 구름이 핑크빛 솜사탕으로 변하는 감정이 사랑인 것처럼 세상은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아니죠 여러분 사랑은 핑크빛이 아닙니다. 핏빛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피 흘리고 아픈 것이죠.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랑을 한번 보십시오. 본문에서 쭉 보시면 사랑은 무엇이라고 시작합니까? 오래 참고로 시작해요. 그리고 뭐로 끝날까요? 견디느니라로 끝납니다. 사랑은 감정이라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이 세상이 말하는 핑크빛 감정이 아니라 사랑은 피 흘림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굳센 의지인 것입니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훈련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에 속습니다. 그래서 그게 사랑인 줄 알고 덤볐다가 실패하고 너무 많이 아파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너무너무 모르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좀 배우라고 그 사랑을 좀 훈련하라고 때때로 우리에게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를 허락하시죠. 그런데 그렇게 상황과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연단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우리는 그것에 직면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렇게 그런 상황과 그런 사람을 직면하게 되면 기도합니다. 주여, 저 인간만 좀 사라지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이 훈련될 수 없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사람 하나 바르게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 사랑에 대한 개념 중에서 여러분 15개 개념 중에 딱 하나 봤습니다. 근데 이 하나도 잘 안 되는 게 저와 여러분의 연약(軟弱)함인 것이죠. 여러분, 이 사랑에 자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사랑을 온전하게 완전하게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것이죠. 여러분, 그런데도요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랑을 보여주길 원하세요. 우리가 이런 사랑을 구현해냄으로써 하나님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 하나님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드러내고 보여주기를 원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에 우리는 항상 실패합니다. 이러한 절망 앞에 소망이 되는 기쁜 소식이 있다면 여러분, 그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연약(軟弱)함을 다 아시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을 실천하고 보여주기 전에 그 사랑을 먼저 경험(經驗)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요 저와 여러분이 좀 괜찮아서가 아니라요. 좀 괜찮았을 때가 아니라요. 여전히 죄인인 상태에 있었을 때, 그 죄인은 그 상태를 그대로 견뎌주시고, 이 사랑을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무수히 많은 죄(罪)로 얼룩진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먼저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5장 8절,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우리가 의인이었을 때인가요? 우리가 조금 괜찮은 짓을 했을 때인가요? 아니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여러분 혹시 이런 얘기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왕이 범죄자(犯罪者)를 사랑해서 그 범죄자 대신 죽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러분, 이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서요. 동화에도 나오지 않아요. 그런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實存) 앞에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創造主)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그 죄인에 대한 사랑을 확증(確證)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신 놀라운 사랑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이 말도 안 되는 사랑, 이 설명할 수 없는 이 사랑을 이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신 이 사랑을 디모데전서 1장 16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6절,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사랑하는 우리 영 가족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이 완벽한 사랑을 값없이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배우자, 내 자녀, 내 동료, 내 동역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는 그대로 견뎌주는 사랑에 실패하지만 우리 구주께서는 실패하지 않는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있는 그대로 견뎌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울을 부르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을 향해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삶의 현장으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죠.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각 가정과 직장과 삶의 현장,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내가 받은 그 사랑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떠한가를 깊이 깨닫고 감격할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감격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본이 되어 그 사랑을 보여주도록 저와 여러분을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 시간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그 사랑,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우리 교회와 우리 일터와 그리고 우리 가정 가운데 흘려보내기로 작정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여러분, 올해 우리는 우리 모든 영가족들은 남은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순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 순명할 때 담임 목사님의 말씀처럼 경탄할 만한 새 길이 반드시 열릴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들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할까요? 저는 그것이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야기 하나를 끝으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엔 이라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가 5살이 되던 해 바이러스가 걸리면서 눈을 실명하게 됩니다.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것이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엄마는 갑자기 돌아가셨고, 아빠는 실의에 빠져서 알코올 중독에 빠집니다. 엔 동생과 함께 보호소로 보내졌는데 곧 동생마저 죽어버립니다. 어떻게 그걸 이 아이가 감당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래서 갈수록 이상해져 갑니다. 결국엔 정신병원(精神病院)에 수용(受用)되죠. 아무도 이 아이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라’라는 간호사가 이 아이를 찾아옵니다. 로라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엔을 있는 그대로 받아줍니다. 엔은 2년 뒤에 극적으로 정상인 판정을 받고 시각(始覺)장애(障礙) 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을 하면서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開眼手術)을 하게 돼요. 그리고 나서 졸업하고 그다음 해에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신문에 기사가 난 거예요.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짐승 같은 사나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한다. 라는 기사를 본 거죠. 근데 이때 엔은 이 기사를 보면서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합니다. 엔이 그 아이를 만나서 처음 했던 일은 무엇이었냐면 아이가 짐승처럼 물면 물려주는 거였어요.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그냥 그렇게 물려주었습니다. 물건을 던지면 맞았고요. 그 아이가 발작을 하면 꼭 안아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랬던 이 아이가 먼 훗날 글을 하나 쓰는데요. ‘3일만 볼 수 있다면’ 이라는 짧은 책을 냅니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에는 이런 내용이 써 있었습니다. ‘내가 3일만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내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준 앤 선생님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제 마음에 깊숙이 새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선생님이 무려 45년간을 이 아이를 위해서 헌신하고 돌봤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주인공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엔은 바로 엔 셜리번 그리고 이 글을 쓴 주인공이 바로 헬렌 켈러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았고,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일터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다락방과 훈련의 모든 현장이,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사랑을 낳고 또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랑을 낳는 온전한 사랑의 산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요약 (고린도전서 13:1-7)
오늘 설교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다룹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받았지만, 그 은사를 자랑하며 분쟁과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은사들이 사랑 없이 사용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사랑의 중요성
바울은 사랑이 없는 은사는 소음에 불과하며, 이는 우상숭배와 같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도들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다면 은사와 헌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의 정의
본문은 사랑을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특히 "오래 참음"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상대방을 바꾸려는 시도 대신 그들의 본래 모습을 견뎌주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실천
우리의 사랑은 종종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도 있는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그 완전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이 사랑을 본으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오래 참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결론
성도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받은 사랑을 실천하고,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와 훈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우리가 받은 그 사랑을 가정과 교회, 일터, 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요약1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통해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과 본질을 설명하며, 성도들이 그 사랑을 실천하도록 권면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지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해야 합니다.
♣요약2
우리 사랑의교회가 2025년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열어주실 경탄할 만한 새 길을 걸어갈 때, 모든 영 가족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견뎌주는 사랑’으로 그 길을 걸어가며, 주신 사명에 순명할 때, 더 큰 기적의 새역사를 집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우리 사랑의교회 영 가족의 각 가정마다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에게 용납과 용서와 인내를 통해, 믿음과 사랑이 계승되는 수선대후의 은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 나라, 이 민족이 자기 유익을 위해 분쟁하고 다투는 나라가 아니라, 전 공동체적인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며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라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매번 있는 그대로를 견뎌주는 사랑에 실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는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있는 그대로 견뎌주심을 확신하며, 주님의 그 완전한 사랑이 있기에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설 수 있음을 깨닫고, 주님의 그 완전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관절과 뼈 마디마디를 관통하게 하여 주시길 사모하며, 나의 가정, 나의 일터 그리고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사역의 현장에서도 그 사랑이 거룩한 선순환을 이루어 가기를 간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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