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한시...
 
 

 

              - 怨歌行[원가행] 원망의 노래를 부르다 -  班婕妤[반첩여]

       

          新裂齊紈素 [신열제환소] 새로 재단한 제나라 흰 비단이

            皎潔如霜雪 [교결여상설] 서리나 눈 같이 희고 깨끗하네.

       

            裁爲合歡扇 [재위합환선] : 마름질해 합환선 만드니
            團圓似明月 [단원사명월] : 밝은 달처럼 둥글구나.
            出入君懷袖 [출입군회수] : 님의 품과 소매를 드나들며
            動搖微風發 [동요미풍발] : 흔들어서 미풍을 일으켰네.

       

            常恐秋節至 [상공추절지] : 늘 두려운 것은 가을이 되면
            凉飇奪炎熱 [량표탈염열] :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

            棄捐篋筍中 [기연협순중] : 대나무 상자안에  버려지듯이
            恩情中道絶 [은정중도절] : 님의 정 중도에 끊어질까 함이네.
        

            新裂[신열] : 새로 뜯어내다. 새로 자르다.

            齊紈素[제환소] : 제나라에서 생산된 무늬가 없고 고운 비단.

            合歡扇[합환선] : 남녀간의 애정과 결합을 상징하는 부채.

            棄捐[기연] : 버리다. 그만두다.

            篋筍[협순] : 옷이나 책 따위를 보관하는 대나무로 만든 사각 상자.

 

            이 시는 부채를 통해 버림받은 여인의 원망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의 소재인 부채는 곧 작가 자신으로, 자신의 감정을 사물에 이입시켰다. 

            전반부에서는 부채의 재질과 모습이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출생,

            성품, 미모를 은유적으로 나타냈고, 이어서 더위를 쫓는 기능을

            황제를 위한 자신의 헌신적인 시중으로 비유하였으며, 끝 구절에서는 가을이 되어

            필요 없게 된 부채 신세가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사람이 쓸모 없는 가을부채 신세가 되는 것,

            환경이 바뀐다고 해서 가까웠던 사람에게 잊어지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가을부채는 다시 찾을 날 있어도,

            이 몸은 님이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 신세가 되었다며

            시에서 노래하듯이 부채는 여름이 오면 다시 찾아주지만,

            사람은 버림받으면 세월이 흘러도 다시 찾아주지 않는 신세가 되기 십상이다.

            애인 사이만이 아니다. 친구나 직장동료 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반첩여는 과연 어떤 여인이었는가?

   

 

반희(班姬)는 흔이 반첩여(班婕妤) 라고 일컬어지는데,

성이 반이고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첩여는 후궁들에게 주어지는 직첩의 일종이었다. 

반황(班況)의 딸이자 역사가인 반고(班固)의 고모할머니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몰연대는 BC 48~BC 6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하지 않고,

어려서 재주가 있었고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으며 자라면서 교양이 매우 높고

언행에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한나라 성제(成帝)가 즉위한 후 후궁으로 선발되었고 소사(少使), 대행(大幸)을 거쳐

첩여로 발탁되었다.

 

그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일화 한토막이 전한다. 

하루는 성제가 궁궐 뒤의 정원을 산책하다가 자기의 수레에 같이 타자고 했다. 

그러자 반첩여가 말하기를

 

觀古圖書        [관고도서] 옛날의 그림을 보오니

聖賢之君        [성현지군] 성현이 된 임금은

皆有名臣在側 [개유명신재측] 모두 옆에 명신이 있었는데

三代末主        [삼대물주] 하,은,주 삼대 말의 임금들은

有嬖女           [유폐녀] 옆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得無近似之乎 [득무근사지호] 제가 상감과 더불어 수레를 타면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제는 반첩여를 매우 총애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사랑이 조비연에게로 옮겨갔다. 

이때 성제의 후실인 반첩여가 황후 허씨와 짜고

임금의 사랑을 받고 있는 후궁들을 저주하고, 

또 임금에 대한 중상을 했다는 혐의로 하옥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실은 임금의 총애를 독점하던 조비연자매가 일을 꾸며

허황후와 반첩여를 무고하는 옥사가 일어났다. 

후에 반첩여의 혐의는 풀렸지만

그녀의 처지는 그 옛날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때와

같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별궁에 유폐되어 있는 허황후의 말벗이 되겠다고 자청하여

성제의 허락을 받았다.

이후 장신궁(長信宮)에 머물면서 과거 임금의 사랑을 받던 일을 회상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도부(自悼賦), 도소부(悼素賦), 원가행(怨歌行) 등

세 편의 시가를 지었으나 후세에는 겨우 원가행 한 편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지만

일 문사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한다. 

 

황태후의 말벗을 하면서 호젓하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반첩여는

성제가 죽은 후에 그의 무덤을 돌보는 정절을 보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40여세의 나이로

처연한 일생을 마감했다.

 

조비연은 어떤 여인이며 반첩여와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중국에서 미인을 표현 하는 대표적인 어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沈魚落雁[침어낙안], 閉月羞花[폐월수화]이다.

 

西施 [서시]
沈魚[침어] :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王昭君 [왕소군]
落雁[낙안] :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고 땅으로 떨어졌다.

貂嬋 [초선]
閉月[폐월] :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

楊貴妃 [양귀비]
羞花[수화] :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아쉽게 4대미인에서 탈락한 미녀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趙飛燕[조비연]이다.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燕瘦環肥[연수환비]'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趙飛燕[조비연]은 말랐으나 瘦[여윌 수] 미인이었고,
양귀비[본명 : 楊玉環(양옥환)]는 뚱뚱했으나 肥[살찍 비] 미인이였다.

또한 흔히 일컬어 조비연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臨風楊柳[임풍양류]형 미인,
양귀비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富貴牡丹[부귀모란]형 미인이라 한다.
 

혼군(昏君)인 성제는 사방으로 유람을 하였는데

어느 날 우연히 양아공주(良阿公主)의 집을 들였다.

공주는 가녀(歌女) 수 명을 불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게 하여 성제를 즐겁게 했다. 

그 중의 한 여인이 목소리도 곱고 춤추는 자태도 매우 날렵해 보였는데 성제가 환궁한 후에

공주에게 그 여인을 보내 달라 해서 얻은 여인이 바로 중국사대미인 중의 하나요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는 일화를 남긴 저 유명한 조비연이다. 

그에게는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가 조의주(趙宜主: 조비연의 본명)요, 

동생이 조합덕(趙合德)이었다. 

 

조씨자매는 차례로 성제를 모셨고 성제도 다른 후궁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그들만 총애했고 황후인 허씨도 냉대를 받아 내심 불만이 많았다. 

이때 조비연이 황후자리를 노리고 황제에게 참소했다.

허황후가 후궁들을 저주하고 황제를 모함했다는

죄명을 씌우고 후궁들도 이에 연루시켰다. 

 

성제는 매우 분노해서 황후의 인수를 회수하고 별궁에 유폐시켰다. 

반첩여는 총명하여 황후가 유폐된 장신궁으로 몸을 옮기고

허황후와 외로움을 나누면서

목숨을 보존하고 시와 부를 지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성제는 비록 음란했지만 나이 40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후궁들을 기웃거렸고

조씨자매는 질투심이 많아 이를 심히 경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후궁에게서 차례로 아들이 태어났고

두 후궁과 두 아들은 모두 조씨자매에 의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으며

황제도 이를 막지 못했다고 하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랬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결국은 왕망(王莽)에게 정권을 빼앗기어 전한(前漢)이 망하고

잠시나마 신(新)나라가 세워졌지 않았던가.

 

당시 장안에는 동요 하나가 유행하였는데

'燕飛來 啄皇孫[연비래 탁황손] 제비가 날아와서 황손을 쪼았다' 는 뜻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조비연자매가 황손을 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후에 성제는 조합덕의 침상에서 급사했다.

조합덕이 성제를 독살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자기가 저질렀던 일들을 떠올리고

독주를 마시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조비연은 나중에 황후가 되기도 하였지만 왕망이 정권을 잡자 신분이 계속 하락하여

후에는 서인(庶人)이 되었고 어쩔 수 없이 그도 자결하고 말았다고 하니

조씨자매야 자업자득이라 하겠지만

행실이 바르고 명민했던 여류시인 반첩여의 생애가 더욱 애처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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