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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

2020. 4. 18.

제목: ''선한 사마리아인''

말씀: (누가복음 10:30~37)

설교자: 이기원, 남동우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

 

이기원 목사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에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율법 교사들을 만났다. 그 교사들에게 질문을 받으시는 내용이다.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한다.“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다. 이 질문을 하면서 율법 교사들이 두 가지 말씀을 인용하는데 신명기6:5절과 레위기 19:18절을 합쳐서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여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옳다 행하다. 그러면 살리라 하신다. 이때 율법 교사들이 자기들이 옳게 보이려고 가지고 율법적 지식을 피력하고 과시해 보이려고 두 번째 질문을 더 한다.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한다.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 이야기에는 다섯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첫째는 신분이 확실치 않은 어떤 사람이다.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있는 강도를 만난 사람, -옷이 벗겨지고 죽게 되고 거의 버려져 있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한 제사장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간 사람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 같이 그냥 지나간 레위인이다. 이 두 사람은 종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볼 때 어려움에 처에 있는 자들을 정성스럽게 돌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치에 있고, 책임에 있는 사람들임에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이 사람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꾼다. 이 사람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다. 위헤 두 사람과는 달리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붓고 싸매고 자기의 짐 싣는 곳에 태워서 주막에 가서 돌봐주는 사람이다. (다섯 번째는 주막 주인이다).

그 어떤 사마리아 인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주막에서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주인에게 이 사람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인부의 하루 품삯이며 주막에 묵는 하루 비용이 12분의1 데나리온의 비용인데 과 24일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양의 분을 두 데나리온을 숙박비와 치료비를 주면서 게다가 또 한 가지를 추가하며 나중에 더 갚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신다. 그 순간에는 어렵지 않게 대답한다. “자비를 베푼자입니다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하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보면 그 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끝난 것 같지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해주신 이웃 사랑에 대한 개념은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했고 그리고 자기들이 갖고 있던 생각 등이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을 순수하지 못하다하여 개처럼 동물처럼 여기기까지 했다. 이런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을 도왔는가? 어떤 사람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고 있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아마도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는 대상이 유대인이고, 도움을 준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그런 대조적인 강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통 기록에 보면 이 지역의 도둑들이 금품을 갈취하는 일은 흔하게 있었지만 사람이 죽기까지 해를 가하여서 버려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죽도록 때린 후 옷을 벗기고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을 가지고 학자들이 추측하는 근거는 아마도 이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어떤 한 사람이 옷이 벗겨진 상태로 확인 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에 있는 그 대상이 누군지 상관없이 도왔다. 만약 유대인이라면 자신의 가족들을 민족들을 경멸한 자신들을 경멸한 유대인일 수도 있는데, 그냥 도왔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고 피하고 지나치지 않고 원수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도운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새로운 차원의 이웃사랑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제사장과 레위인 들에게 길에서 버려져 의식이 없는 어떤 사람을 도와 줄 수 없고, 도와서는 안 되는 정당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러면 레위인은 12지파 중에 성결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이다. 제사장은 레위인 중에서도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지파로서 다시 성별되어서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 당시 자기 반열 4개의 반열이 있었는데 반열 순서가 되면 일 년에 2주간 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일 년에 2주간 성전에 봉사를 하게 되는데 제사장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이 살지 않았다. 전국에 흩어져 살다가 어쩌다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데, 특히 여리고가 제사장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자기 반열 순서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봉사를 하면 된다. 딱 두 주간 너무 중요했다.

 

하나님께 섬기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당시 가장 부정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시체와의 접촉이다. 레위기에도 나오는데 심지어 부모의 시체도 가까이 가면 안 되었기 때문에 벗겨진 사람이 죽은 사람일 수도 있기에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부정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도와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남을 도와야 할 때, 할 수 있는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합리화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셨다. 이런 말씀에는 방향이 있다. 성경에 예루살렘은 올라가는 곳이다. 지리적으로 그렇다. 여리고는 좀 낮은 곳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언제 어디서나 올라간다. 그런데 제사자은 그 길로 내려가다가 나온다. 레위인도 이와 같이 모든 임무를 마치고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중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상황에도 오르던 내리던 부정해 지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는 사람이라면 곤경에 처에 있는 이런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교훈을 예수님께서 주고 계신다. 33절에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보면서 가졌던 그런 마음으로, 하트 봉으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교회로, 주님의 제단으로, 성전으로 올라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최선을 다해 돕는 대사회적 시대적 사명을 담당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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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우 목사님.

예수님이 누가 강도만난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신다.

내 입장에서 강도를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강도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볼 것인가? 본문에 나타나는 두 사람은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상을 바라보니까 지금 당장에는 도와주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자신의 입장을 돌아보니 도저히 도울 수 없어 피하여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강도 만난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니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도와 줄 수 없지만, 강도만난 형편을 보니 도와 줄 수밖에 없어 가까이 가서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자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빈들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배고파하는 제자들을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 백성들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고 도우신다. 우리 사랑의 교회 대사회적 섬김도 마찬가지다. 교회나 성도들의 입장에서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았다면 결코 그들을 도우지 못하고 그들을 피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 교회는 연약한 자들과 장애인들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들을 필요를 채워지며 지금까지 달려왔다. 때로는 내가 힘들고 어려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을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섬기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대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사랑의 교회에 24년 전에 사랑의 복지 재단을 세워주셨다. 지역사회를 섬기게 하신 것이다. 특히 서초 구립 요양센터를 우리 직원들이 섬겨오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섬기고 있는데 지금 코로나19가 있어 면회가 안 되었고 섬기지 못하고 있지만 속히 회복되어서 발걸음이 이동되어 섬기기를 바라고 있다. 어르신들을 돕기를 바란다. 그곳에 노인들이 행복해 한다는 이야기와 매주 마다 예배드림과 프로그램이 좋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한 행복한 꿈 터가 있다. 문제아가 있는데 60여명의 아이들이 양육 받고 보호받고 있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돌봄을 통해서 행복한 꿈을 갖고 주님이 쓰시는 자녀가 되리라 본다. 오늘 말씀을 준비 중에 복음성가가 생각이 났다.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한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가지고 더 섬기기를 바란다.

사랑은 더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더 버리는 것” ~~이라 한다. 이 코로나19로 인해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베푸는 믿음의 성도가 되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웃을 향해 실천하고 베품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았음 좋겠다. 위기가 곧 기회임을 느껴서 실천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고 복음의 약속을 실천하길 원한다.

 

- 요약-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마침 제자장과 레위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주막주인에게 부탁하여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비용을 대주었다. 예수님은 자비를 베푼 사람처럼 너도 실천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살아있었던 그는 누군가 자기를 구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제사장도 레위사람도 그를 피하여 돌아갈 뿐 이었다 그러나 유대사람에게 멸시를 받던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측은히 여겨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까지 데려가 돌보아 주었으며 주막집 주인에게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그 비용까지 대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런 대가 없이 생면부지의 사마리아 사람을 통하여 긍휼함을 입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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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예배

 

담임 목사님.

드디어 모였다. 우리가 늘 주일예배 드리면서 본당이 꼭 차면 즐겁고 기뻤듯이 오늘 그래도 함께 모이니 본당뿐만 아니라 아래층과 몇 곳에 사회적 거리 등 흩어져 앉아 예배하니 너무 감사하다. 본령 첫 번째이다. 우리가 장애사역과 북한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칭찬하고, 우리 장애인, 북한 선교 등 격려하자. 우리는 영 가족 여러분 본령이니 기쁘다. 예수님 때문에 보혈의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적 차원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에 눈이 열려야 한다, 세속역사를 고민하지 말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우리의 본질 사역에 집중을 주시길 원한다. 온라인 등 모두가 주님 앞에서 찬송과 경배로 이 코로나 사태가 벗어나길 기도한다. 삶의 모든 짐들이 벗겨지길 바란다. 고민하지 말고 복음의 영광을 알아 본질 사역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기업인 회사를 잘 지켜야 하고 학자는 학문을 연구를 잘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예술가는 좋은 예술성을 펼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한다. 교회는 뭘 하는가? 본질은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웃사랑, 주님이 교회에 주신 대 사명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고 대 계명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 둘을 잘해야 한다. 잘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 가족을 주셨다. 영 가족은 영원한 가족, 영적가족 동시에 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는 가족이다. ‘Young 가족은 젊은 대학, 청년부 주일학교이다. 교회는 위임명령과 대 계명을 잘 실천하고 영 가족을 치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 앞에 올바른 가치관으로 젊은이들을 잘 키워내야만 한다. 이제 우리 모든 중직자를 포함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예배에 집중하도록 기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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