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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년 12월 13일)

제목: "정결함의 회복"

말씀: 스가랴 13:1-9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사회: 윤하중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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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환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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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간절한 예배를 받으실 줄 믿는다. 참 예배자의 예배를 통해 가정과 사회 공동체가 든든히 서야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성찬식을 하게 되었다. 감사한 일은 온 성도들이 미라클 밀이 떡과 술을 미리 받아가셔서 다시 더 준비했다. 성찬 키트를 모두 함께 해주셨음에 감사한 일이다. 그만큼 간절한 심령을 주님은 만족시켜 주시길 기도한다.

 

“정결함의 회복” (스가랴 13:1~9)

.1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영적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고린도전서11: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Ⅰ. 정결의 샘을 통하여 죄와 더러움이 정화된다.(1절)

-우리는 죄와 더러움으로 인해 나파된 배와 같이 침몰될 자였다.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자, 외롭고 고독하고 처절한 자이다.

이것을 씻는 정결의 샘을 주셨다. 다윗의 족속으로 인해 우리가 모든 계층이 함께 깨끗해진다.

모두가 다 남녀노소가 정결함을 받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잘못된 길, 과녁을 놓인다면 주님이 정해 주시길 바란다. 부정한 것들도 해결해 주시길 바란다. 모두 제거해 하길 바란다.

 

1. 스가랴13:1,“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 누구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주는가? 1절b,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 모든 계층을 말한다.

2. 씻어야 할 두 가지

1) 죄: 잘못된 길로 가는 것

2) 더러움: 피하거나 도망쳐야 할 어떤 추한 것.

3. ‘정결의 샘’은 고여 있는 웅덩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샘’이다.

▷마코르 –생수의 근원이다.

4. 본래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아야 한다.

1)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2) 수많은 비누로도 씻을 수 없는 죄(렘 2:22), 금강석 끝 철필로 새겨진 죄(렘 17:1)

5. 이 죄를 어떻게 씻는가?

• 요한일서 1:7b,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Ⅱ. 거짓 선지자의 우상 숭배와 거짓말로부터 정화된다 (2~6절)

1. 거짓 선지자의 ‘거짓 예언’과 ‘선동’ 때문에 우상 숭배가 널리 퍼졌다.

2. 2절의 우상의 이름, 3절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고, 4절의 거짓 선지자 노릇 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

3. 스가랴 13: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스가랴 13:6,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문신 같은 것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몸에 자해를 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탄은 스스로 사람들을 자멸하게 만든다. 여호와의 날이 되니 과거 거짓을 선지자들이 숨긴다.

 

• 열왕기상 18: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Ⅲ. 목자의 칼이 정화시킨다 (7~9절)

1. 참 목자의 죽음을 통하여 깨끗해진다.

• 스가랴 13:7a,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2. 7절에서 ‘칼아’는 ‘칼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참목자의 죽음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씀한다.

-우리의 죄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은 칼로 내리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짝된 목자를 치라하신다. 출생으로 인한 가족관계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한다.

• 이사야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

 

3.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짝(My Associate) 된 목자’께 죽음의 칼을 허락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정화시키신다.

• 스가랴 13:7b,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 마태복음 26: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작은 자들 위에 내 손을 드리우리라 하신다. 모든 고통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다.

 

4. 그 결과 심판 가운데서도, 살육과 죽음의 파멸 가운데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살아남게 하신다.

• 스가랴 13: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대부분 3분의 1은 적은 자들을 보호하셔서 살아남는 것이다. 아마겟돈에서 그러듯이 문자적으로 파멸이다.

 

5. 살아남은 3분의 1이 누구인가?

-오늘 성찬에 참여한 우리를 말씀하신다. 우리의 구원자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1) 스가랴 12: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 죄와 정욕을 씻는 자들, 믿고 감사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다.

 

2) 3분의 1은 믿기 힘들 정도의 환난과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이다.

-우리가 모두가 금과 은으로 남기를 바란다. 온 성도들이 불가운데에서도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련된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라신다.

 

결론---

1. 이렇게 정화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

• 스가랴 13:9b,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성찬의 날 주님은 부르실 때 주님은 들으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최고의 축복이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것이다.

 

1) 하나님과의 관계에 막힘이 없다.

2) 로암미에서 암미(내 백성)가 되는 축복

• 호세아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

 

2. 정결의 샘을 통하여 우리는 새 언약에 들어간다.

주님이 칼에 찔리신 보혈의 은혜로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다.

• 누가복음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언약이다. 이 새 언약에 참여하는 사람마다. 어린 양의 피에 참여자로 인해 마귀를 모두 보냈다.

말씀으로 참 승리가 되었다. 새 언약으로 인해 참 기쁨이고 새 언약에 참여한다. 보혈의 경계선에 나가지 않으면 지켜 주신다.

 

3. 새 언약의 백성들은 보혈의 경계선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

-떡과 잔을 놓고 말씀으로 받아서 새 언약으로, 보혈로 나를 씻기를 바란다.

-정결하게 하는 셈물이다. 재미있는 말씀이 있다.

 

ex)12월25일에 산타할아버지가 못 오신다고 한다. 2주간 자가격리이시기 때문이다. 1월 9일에 성탄이 오심을 믿고 성탄을 보내기를 바란다.

모든 성도의 집에 문설주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라지기를 기도한다.

 

4.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평생 변호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 두면

진학, 직장도, 주님이 잡아주신다. 날마다 삶의 여정에서 승리를 주신다.

*요한계시록12:11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주님께서 이 성찬식으로 우리를 정결한 샘으로 뿜어져 나오는 성찬의 은혜를 더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문설주에 임하셔서 모든 계층에 죄와 더러움을 깨끗이 정화하여 주시길 원한다.

♣요약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날,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은 사라지고 참 목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신다.

정결함을 이루는 능력의 시작 ( 13:1 )
-정결함을 이루는 길은 더러움을 씻는 샘에서부터 시작하며,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상과 거짓 선지자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정결함을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와 성령의 사역이 성도의 죄를 대속하시고 정결케 하신다.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 13:9 )이스라엘이 환난을 이기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은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슥9:8의 남은 자 사상으로, 이들은 시련을 통과한 하나님의 군사이며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자들이다. 또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자기 백성을 온전히 멸절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간절한 예배를 받으실 줄 믿는다. 참 예배자의 예배를 통해 가정과 사회 공동체가 든든히 서야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성찬식을 하게 되었다. 감사한 은 온 성도들이 미라클 밀이 떡과 술을 미리 받아가서 다시 더 준비했음이 감사하고, 성찬 키트를 모두 함께 해주셨음에 감사한 일이다. 그만큼 간절한 심령을 주님은 만족시켜 주실 것이다. 우리는 항상 정결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이 성찬식으로 우리는 더욱 주님을 사모하여 남은 자로서 주님과 늘 동행하여 주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느낀 점
오늘 성찬식을 인터넷으로 하면서 난 생 처음으로 준비해 준 키트로 성찬식을 했다. 주님은 이 코로나 시대에 온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줌과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각 가정에서 드림도 사랑으로 인도하셨음에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이 어려운 시기에서도 한마음으로 오직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갖게 하시고 정성으로 드려진 예배를 기뻐 받으실 줄 믿는다. 어제 순장님께서 손수 전달해 주신 키트에는 떡과 포도주가 담긴 프라스틱 팩이 앙증스럽게 보였다. 그것을 순장님은 각각의 순원들 집에 차를 가지고 전달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순장님의 헌신이 이러한 세밀한 일까지도 순종하시는 마음을 배우게 되었다. 넘 감사한 주말을 보내면서 또한 주일 성찬식을 드리면서 나도 그 믿음을 본받아서 진정한 주님 자녀로 살아야 함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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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차 특별새벽부흥예배 (주후 2020. 11. 9(월) ~ 13(금) 새벽 4시25분, 14(토) 새벽 5시25분) - 사랑의교회 ☆

제2일차 (마이클 리브스(영국 유니온 신학교총장), 권성수 목사님(대구동신교회))

제목: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말씀:마태복음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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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차 특별새벽부흥예배 (주후 2020. 11. 9(월) ~ 13(금) 새벽 4시25분, 14(토) 새벽 5시25분) - 사랑의교회(서초역)
제 2일차 ☆

--권성수 목사님--
요약: 말씀 붙잡고 순종하라

지금도 성령은 역사하신다.

성령충만을 체험하라. 가랑비 축복, 소낙비 축복이 되어야 한다.
1. 청산회개-누추하고 오염된 것을 청산하라.
2. 찬양감사-감격이 터지고 절박하게 간구하면 주님은 축복의 문을 열어 주신다.  


 


                                                        성령께서 온전히 지배해 주시길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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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 6. 17.)

제목: “더욱 깊어진 갈망”
말씀:시편 42:1-5
설교자: 임상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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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는 것이다.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는 절망과 낙망뿐이다. 그렇지만 주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절대 낙망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모든 책임을 지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기 때문이다.
고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주님께 소망을 두기를 소원한다. 예기치 않는 고통과 어려움으로 지쳐있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절대 진리의 말씀으로 살아나고, 신앙과 절망의 간극사이에서 담대히 믿음의 걸음으로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 우리를 도우실 하나님을 경험하길 원한다. 절박한 기도가 회복되게 하시고, 물 댄 동산, 영적 근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간구한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길 원한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야 할 때이며 우리는 회개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믿고 우리가 의지하고 우리가 소망해야 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할 때이다.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돌아오면 회복 된다’는 스가랴서로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이 말씀은 지금 이렇게 암흑같이 어두워진 가운데 우리의 어두워진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 회개와 회복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다시 한 번 질문하겠다.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무디어진 영혼을 깨웁시다.
코로나로 삼행시를 지어보겠다.


☆ 코로나 삼행시
코 → 코스프레 그만 멈추고,
로 → 로고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라.
나 → 나 자신부터.

☆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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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2020. 66
)

제목: ''마른 땅에 굳게 서라''
말씀: (여호수아 3:14~17)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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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적 통일 쥬빌리티 기도회. 800차 기도회를 주신 하나님께 다함없는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우리가 다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부르셔서 이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심을 확신한다. 800차가 왜 소증한가면 1000회에 할 때에 반드시 평양에서 특새와 예배하도록 환경을 주시리라 믿는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을 믿고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믿음의 용량을 넓혔으면 좋겠다. 기도의 용량을 넓혀서 모든 순서 하나하나를 우리가 마음을 모아 기도하기를 바란다. 마음의 기도를 가지고 하면 천회가 되기 전에 평양에서 특새 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한다. 포에버 어른 들 찬양이 너무 좋다. 10년은 젊어지셨을 것이다. 현충일인 오늘 큰 의미가 있다. 나라가 바로 가느냐는 좌우를 뛰어 넘어서 하나님과 바로서서 좌우가 아니며 야당 여당도 아니고 예배당이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좌우가 아니다. 오늘 이 시간으로 인해 복음 역사가 새롭게 지필 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길 바란다. 800차에 여기 화분을 가져왔다. 평양에서 이관우 목사님(전사무총장님 목사님)이 통일의 재물로 쓰셔서 먼저 가셨는데, 사모님이 이렇게 작은 나무를 심어서 가져다 주셨다. 누군가가 물을 주고, 애를 써서 오늘까지 온 것이다. 800차라는 것인데, 비가 오나 눈이오나 상록수 신앙이 쉬운 것이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 마음으로 흙으로 가꾸고 나무를 가꾸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를 원한다. 설교가 오늘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설교제목과 본문을 미리 주었다.
쥬빌리티 기도회에서 6개월 동안 여호수아 프로젝트라고 지금 17절에 보면,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이것이 기도의 제목이다. 그래서 이 말씀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사역을 해오면서 결국은 사역은 믿음의 문제이기에 신앙도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 문제는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이다. 본문에 앞서
여호수아서 2:24절에,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굉장한 말씀이다. 아직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는 뭐라고 하는가?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다고 한다. 아직 받지도 않았는데 주셨다 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찌르시며 보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제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밤새워서 열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모두가 다 우리는 저 가나안 사람들에 비해서 메뚜기 같다고 한다. 소위 잠재적 불신앙이 전염병이 확 확산되어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밤새도록 울고 안 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그 믿음 갖고는 안 된다고 하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3:19절을 보면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여호수아 갈렙 외에 이스라엘의 모든 민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딱하나이다.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교회, 가정, 믿음 공동체, 민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늘 믿음을 테스트 한다. 현실은 이런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25살에 죽어가지고, 80세에 묻힌다’ 25살에 죽는다는 것은, 그 나이에 설렘과 꿈과, 믿음과, 소망과, 비전과 하나님 나라 환상과, 기대와, 가슴 뛰는 것이 다 죽어버렸다. 그때 다 죽고 영적으로 하나님나라의 꿈으로 봐서 25살에 다 죽은 것이다. 그리고 육체는 70-80까지 살다가 죽는다는 것이다.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이 너무 많다. 지난주에 노량진에 LABLY 청년센터를 마련했다. 거기 보니 12만명의 공시 생들이 거기서 공부하고 방황한다. 노량진에 청년들이 힘들다. 3퍼센트만 합격하고, 5천여 명만 합격하고 나머지는 무엇이겠는가? 영적으로 다 죽어가고 한국으로 봐서 너무나 큰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적인 쉼터 라블리로 영적인 회복이 되도록 라플리티를 마련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신다. 그 잠재적 불신앙과, 메뚜기 신앙을 불식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럼 어떻게 불식시키시는가?
믿음을 테스트 하신다.
1.먼저 기다리게 하신다. 오늘 본문 12절 앞에 보면 요단강을 백성들이 앞에서 3일 동안을 기다리게 하신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으로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 하신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도 한국교회에도 종교 지도 자들끼로 모여서 다 그렇지만 초파일을 연기한다고 하였지만 우리는 죽어도 부활절 지킨다. 했다. 애를 썼지만... 이태원으로 인해 지금 난리로 확진자 0가 있다가 또 생기니 일들이 생겨 기다리게 하신다. 평양에서 특새 할 것을 준비를 이미 해오고 있고, 특새할 장소와 심지어 전세 비행기까지 마련해 두었다. 갑자기 촛불혁명 등이 일어났고, 모든 것을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영적의 비전의 수준이 되도록, 테스트 하시고, 기다리게 하신다. 그게 요단을 건너기 위하여 히브리어로 소위 아바르(Abar)타임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요단의 물이 멈추고 마른 땅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요단강 물이 깊지가 않다. 크지도 않다. 당시 이 시기에 깊이 30미터가 넘었는데, 그걸 건너야 했다. 건너기 위해서 건너다라는 말이 20번 이상 나온다. Abar는 경계선을 넘는다는 뜻이다. 강과 산을 넘는 물리적 경계선도 있고, 국경을 넘거나 정치적 경계선도 있다. 물리적이든 정치적이든 다 건너는 것이다. 기금 남북문제 경계선을 우리는 넘어야 한다. 좌우의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 코로나 경계선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이 경계선을 넘기 위해서는 아바르 타임이 필요하다. 인간이 생각해서는 불가능한데 믿음으로 건너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인간, 공동체는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그 일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바르 타임인 것이다. 거저 되는 것이 없다. 가치 있는 것 치고 아바르 타임이 있는 것이다. 오늘 여호수아 3:15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강물이었고, 그 장정과 여인 아이들이 20만 명이 강물이 세게 흐르는데 여리고 성과 철병거와 거인들까지 앞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압도하는 두려움이 있고 3일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감당했겠는가? 내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다시 돌아갈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통일에 있어서 우리에게도 그 문제도 아바르 타임을 주시고 계신다. 이 아바르 타임에 잘못 방향을 정하지 말고 이때에 이 시간을 통해 올바른 기도에 집중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아바르 타임에 도망갈 필요도 없고, 싫어할 이유도, 무시할 이유도, 덮어버리고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요단강 법칙-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믿음 없는 시대에 하나님은 아바르타임을 주시는데 어떻게 하시는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홍해의 법칙이 있듯이 요단강 법칙이 있다.
1. 언약궤를 따르라.
백성에게 이르데 여호수아 3:3절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언약궤 뒤를 따르라는 것이다. 200만의 사람들이 따라간 초대형 GPS이다. 그 앞에 제사장들이 가는데 다 따라간다. 1킬로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지나면서 소중한 것과 덜 소중한 것, 그냥 지나가도 되는 것과, 꼭 지켜야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선명하게 구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과 깨달음을 주셨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선명하게 지켜야 할 것은?
1).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 - 오늘도 기도제목과 본문을 보았고, 말씀 자체가 능력이다. “Let the Bible Speak“이다. 말씀 자체가 말하게 하라. 그것을 믿고 기도의 제목을 삼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의 절대권위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 주님 앞에서
2). 예수님의 유일성.
3). 성령님의 주권적 인도.
4). 거룩한 공교회의 중요성.
5). 세계선교의 절박성.
6). 평신도 사역의 소중성.
이 여섯 가지는 우리교회가 지켜야 할 실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궤에 뭔가? 언약궤 안에는 두 돌비,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다. 주님을 집중하고 마음을 모아라. 죽음의 지팡이가 생명의 싹이 나겠나? 설령의 기름 부어서 역사가 아님 안 된다. 우리가 믿어야 할 약속의 언약을 그것을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특별히 축복받았다. 기본적으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믿는 교회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약의 말씀으로 절대적 권위를 믿어야 한다. 이 은혜가 계속 지속 될 것이다.
요단강 법칙-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2. 성결하게 하라.
여호수아 3: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우리에게 하나님은 일보다 성결을 중요시 하신다. 거룩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성결해야 한다. 성결한 가정, 민족, 공동체가 성결해야 한다. 무엇을 성결해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바래야 한다.


3. 지도자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야 한다.
여호수아 3:11-12,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고 그리고 지도자들이 먼저 앞장서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앞장섰다. 언약궤 성결, 지도자가 앞장서라. 요단물이 말랐어도 같이 건너가게 되지만 요단 물이 마르지 않을 때에 물속에다 지도자들은 집어넣으라는 것을 말씀 하고 계신다. 자기희생이다. 이런 마음으로 사랑의 교회 토비새 나온 성도들은 코로나 사태에 모이기가 어려운 가운데도 모여서 기도하고, 우리가 사명을 가지고 모여서 기도할 때에 800차 소원을 이루어야 한다. 절대적 언약의 말씀을 따르기를 다짐하여 주님을 따르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영적인 아바르 타임으로 믿음의 용량을 넓혀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기를 바란다. 영적인 앞장 선자들은 더욱 주님이 인도하시라 본다. 믿음의 용량, 기도의 용량을 넓히자.
요약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복은 자녀들이 번성하고 그 중에서 왕들이 나올 것을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큰 민족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430년간 애굽에 이스라엘이 살게 하셨고 마침내 큰 민족이 되게 하셨다. 430년 간의 종살이는 고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기간이였으며 그의 약속을 이루시는 기간 이였다. 우리의 살아온 날 들이 힘들었어도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하심이며 아바르 타임이시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곧 들어 갈 줄 알았는데, 40년이 걸려서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앞에 도착한다. 이제 저 강 요단강만 건너가면 되었다. 멀리 강 건너 어렴풋이 여리고 성읍이 보였다. 얼마나 숙망했던 약속의 땅이었겠는가. 낮에는 불볕더위로 살이 타고 밤에는 추위로 벌벌 떨던 광야, 불 뱀과 전갈이 득실거리던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가. 날마다 죽어 넘어지는 동료들의 시체 썩는 냄새를 맡으며 오로지 저기 강 건너 꿈의 땅 하나만 바라고 살아온 인고의 세월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요단강의 수위는 한껏 높아 있었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언약궤를 메고 간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니 하나님이 원하는 때에 반드시 그 약속을 성취하시니 그 약속을 잊어버리고 환경을 보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가 잘 모여서 이때 일수록 더욱 예배하고 모여 기도하면 그 아바르 타임에 크고 비밀한 능력을 말씀 가운데 주신다. 우리는 더욱 주님 앞에 모여서 기도하고 주님 말씀을 받아서 앞장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요단강 건너는 법칙-우리가 그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1. 언약궤를 따르라.
2. 성결하게 하라.
3. 지도자들이 언약궤를 메고 앞장서야 한다.
말씀 안에서 꼭 지켜서 우리는 순간마다 모여 기도하고 예배해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그 마른 땅에 굳게 서서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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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 예배 (2020. 5. 2)

제목: ''교육의 열매, 선교의 비전''

말씀: (디모데후서1:1~5)

설교자: 김경덕백승준 목사님  

김경덕 목사님.

 

김경덕 목사님.

사랑의 교회는 지난 10주차 정오기도회를 통해 마음을 모으면서 한마음으로 기도해 왔다. 오늘 토비새를 통해 이 기도의 은혜가 이어져 다음 세대가 실력과 영성과 정서를 겸비한 글로벌 인재가 세워지길 소원한다. 본문은 사도바울의 손으로 기록된 편지의 한 부분이다. 선교사요, 신학자요, 또 목회자였던 사도 바울이 선교의 현장에서 기록했던 13통의 편지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신약의 정점이 되었다.. 이 중 두 편의 편지는 이 한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다. 이 사람은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었고 바울이 밤낮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쉬지 않고 생각할 만큼 특별한 존재였다.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 사람을 간절히 보기를 원했다. 거짓 없이 깨끗한 믿음을 가진 이 사람은 바울에게 기쁨의 존재였다. 세계 전역을 다니면서 다양한 선교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가운데 사도 바울의 마음의 각인이 되었던, 이 사람의 이름은 신약성경 두 권의 제목이 되었고, 훗날 바울이 사역한 에베소 사역을 계승했던 이 사람은 디모데이다. 디모데의 믿음은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났던 이 아이는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기는 여종으로 성경을 생명처럼 사랑했던 어머니 유니게의 기도 속에 자란 자였다. 이 두 여인이 가졌던 거짓 없고 순수한 믿음을 아름답게 계승했다. 성령께서는 신앙계승의 주역이 된 이 위대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여 영원히 기억되게 하셨다.

 

지금 이 말씀을 듣는 남성 성도들 가운데 신앙교육에 여성이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바울은 디모데의 신앙을 외조모와 어머니의 신앙의 공으로 돌리고 있지만, 실은 디모데 신앙의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바울 자신이었다. 디모데가 고향 루스드라에서 처음 바울을 만났을 때,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바울이 병자들를 고치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 선교 사역의 모습이 디모데에게 반복적이 되었다. 디모데가 바울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바울의 동역 자가 되어있었다. 바울과 디모데는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성인이 되어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에게 이 디모데가 가 가진 뿌리 깊고 요동하지 않는 신앙이, 고요하고 평온하며 품격 있는 믿음으로 그 바울에게 감동과 부끄러움에 대상이었다. 모태 신앙으로 자란 디모데에게, 바울이 가진 체험과 뿜어져 나오는 야성과 화산 같은 열정이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지중해 세계 어디에서도 지위를 보장 받을 수 있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가말리아 문화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종교적인 명예도 모두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자랑하며 한 생애를 전제와 같이 남김없이 부어드리는 선교사 바울의 모습은 디모데에게 경이로움과 경탄 그 자체였다. 깊은 호수처럼 디모데의 열정과 우뚝 솟은 거대한 산맥 같은 바울의 영성이 만나 AD1세기 당시 지중해 전역이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이 두 사람의 신앙의 조화가 이루어 낸 선교 적인 쾌거였다. 우리가 가진 질문을 이것이다. 작은 아이 디모데를 위대한 선교사 바울의 동역자로 성장시킨 힘은 무엇인가? 본문이 우리에게 주신 대답은 이것이다. 성경을 사랑하고 복음의 헌신된 어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한 아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좋은 어른들 잘 만났기 때문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설교자인 체플엔더슨은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8가지 이유라는 것의 글을 보았다. 그가 내린 대답 가운데에 한 가지는 성경을 읽는 부모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디모데가 성경을 사랑하며 복음의 헌신된 사람은 된 것은 성경을 사랑한 어른들을 보며 자랐고, 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하는 어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 315절을 보라. 우리의 기도의 제목인 줄 믿는다. 우리의 자녀들이 성경 사랑을 주시고, 성경을 통해 세상을 이길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성경을 읽을 때 저들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경을 암송하는 중에 성령을 체험하게 되길 원한다. 우리 아이들이 진리와 비진리을 날카롭게 구별하게 되길 원하며 성경을 통해 주의 세밀한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우리 자녀들이 그 사랑을 깨달아 치밀어 오른 감격이 있기를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성경의 사랑으로 자란 아이 디모데는 성경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 하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바울 선교 팀의 일원이 되었다. 이 뿌리 깊고 친절하며 거짓 없는 믿음이 찬란한 빛을 바란 곳은 선교 지였다. 후에 바울이 에베소 사역을 계승하였을 때 디모데는 목회자로서의 탁월한 능력은 오직 성경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바울이 사랑한 아들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참수되어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이 사역은 디모데를 통해 계승되어졌다. 오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이 편지를 통하여서 우리세대가 누린 은혜와 승리와 영광을 다음세대에게 전달하기 원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어주세요.~~!!! 성경을 읽는 부모들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이 성경을 사랑하게 되고, 복음에 헌신하는 부모들을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각자의 세상에서 선교사로서 살아간다면 오래 황페 하였던 이 땅에 마침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실 줄로 믿는다. 사랑의 교회 주일하교는 주일학교 교장이신 담임 목사님의 비전과 지도에 따라 교육정책에서 선교정책으로 전환하여 다음세대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에게 바울의 열정을 품은 교사들이 보내주시며, 로이스와 유니게 심정을 가진 부모들을 일으키시며, 선교사의 절박함과 선교사의 야성으로 교육하길 기도한다. 사랑의 교회 주일 학교는 21세기의 선교같이 교육하고 양육하는 선교센터가 되고, 대학부와 청년부는 캠퍼스의 선교사로 보내며 청년들은 일터 선교사로 파송하는 선교의 전진기지가 되게 함께 기도하자. 우리 사랑의 교회는 사랑 ON에서 Sarang Together사역으로 나아가길 소원하고 있다. 지난 주일에 유투브 영상에서 호산나 찬양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 세계의 젊은이들은 연결되어 있고, 세계 크리스천 공동체는 이미 하나가 되어있다. 세계적인 전염병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네트워크가 되어 이미 형성되었음을 본다.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는 세 겹 줄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음악과 문화로 연결된 세계 젊은 자들이나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연결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연결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리라 본다. 사랑 투게더를 사역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열방에 다음 세대를 통하여 세세 무궁토록 영광 받으시길 간절히 소원한다.

 

백승준 목사님

코로나 이후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지만 세계 많은 석학들과 메스컴에서는 이 팬더믹이 종식되면 이후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특별한 도약이 있을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번에 담임 목사님께서 V자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보배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반드시 V자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를 열방으로 섬길 수 있는 선교의 기회를 활짝 펼쳐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3,5,7비전이다. 이 비전을 가지고 달려왔다. 또한 제자훈련의 선교교회로서 전 세계 교회를 깨워 그리스도의 완전한 세우는 일을 계속 준비해 왔다. 더 큰 결정체로 사랑글러벌 아카데미의 사역이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전 세계를 섬기며 세계 복음화를 마무리하기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것이 본문에 담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세계 복음화를 위한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에 보면 디모데 외할머니 로이스, 그의 어머니 유니게 그리고 디모데로까지 흘러내려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의 전통, 바로 그 아름다운 신앙의 전 유산을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다. 이 디모데 가문의 흘러내려오는 믿음의 전통은 이들에게만 주신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축복은 디모데가 목회할 에베소교회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이후 오늘 세대들을 위한 축복의 산물이 되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우리에게 결국 사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것을 우리만 누릴 게 아니라 바로 전 세계로 흘려보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랑의 교회에 주신 축복, 우리 가운데 계속해서 흘러내려오게 하신 이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은 무엇인지 마음에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많은 축복과 아름다운 신앙의 전통을 주셨다. 고난의 자본, 합심의 기도의 능력도 많지만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믿음의 자본인 제자훈련에 대해 생각해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사람으로 세워, 복음을 위해서 재생산하는 제자훈련의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하고 익숙해서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전 세계 가운데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선교지에 나가 있으면서 사랑의 교회가 얼마나 특별하고 교회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제자훈련이 얼마나 소중함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말한다. 영국 웨일즈에서 사역한 스티브 리비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해 주고자 한다. 컨퍼런스에 참여하신 분이다. 그분께서 우리 교회 칼 세미나에 참여하신 후 그 감동을 한마디로 말하고 있다. 바로 기독교회가 잃어버린 성경의 참된 교회 모습이 사랑의 교회라고 했다. 제자훈련과 다락방의 모습에서 살펴보았다고 했다. 유럽교회의 모습은 참담하다.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서 많은 교회가 훼파되었고, 개인주의라는 그 물결의 의해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개인주의란 내 것이니 아무도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는 의미이듯이, 이 개인주의가 성경의 권위 위에서 교회를 지배했기에 교회는 유럽교회는 힘을 쓰지 못했다. 스티브 리비 목사님은 제자훈련이나 다락방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 모습은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그것을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하고 있다. 이 귀납법적인 응답이 나오고, 말씀을 통해서 충돌하여 회개가 나오고 그 삶이 느끼기 위한 결단이며 기도하고, 서로 돕는 공동체의 모습을 그 목사는 배워서 자신의 교회를 변화시킨다. 개인주의로 만연되었던 그 교회를 바꾸기가 쉽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을 오픈하고, 성경을 같이 읽고 읽는 데서 끝이 아니라 그 말씀이 삶으로 적용되게 하고 그 삶을 서로 돕고 함께 제자로 세워지기 위하여서 한 단계 한 단계 제자훈련을 도입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제자훈련은 세계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선교의 전략이다. 세계 복음화를 위해서 제자훈련의 국제화를 꿈꾸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교지를 바꾸기 위해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할지 전력을 모은다. 가나 교회 선교사님을 통해서 제자훈련의 철학이 흘러가게 되었고, 미얀마에도 제자훈련이 펼쳐져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자훈련을 통해서 전 세계 교회와 선교지 현장을 깨울 수 있는 놀라운 신앙의 유산을 우리 가운데 주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을 사랑의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우셨다. 사단은 사랑의 교회를 얼마나 많은 공격을 가했는가?!!! 코로나사태 이후에 우리가운데 잘못된 신앙의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않을까 그런 걱정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제자훈련의 가장 본질을 붙잡아야 될 그런 책임이 있다. 제자훈련의 본질이 무엇인가? 성경말씀에 보라. 누가복음7:23이다. “또 우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제자훈련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데 있다. 담임 목사님은 몸이 하자는 대로 하면 망한다고 하셨다. 사랑 ON으로 우리 몸이 게을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점점 더 우리 몸을 게으르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이 우리 안에 싹트고 있는지 잘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제자훈련의 철학을 통하여서 전 세계를 섬겨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 귀한 다음 세대들이 신앙의 계승을 통하여서 믿음의 선배들을 삶을 통해서 세계를 섬기는 선교사로 길러야 될 우리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깨어나야 한다.

 

후예배--- 담임 목사님.

특별한 시간이다. 사랑 ON 사역에서 Sarang All Together 집중해야 하는데 투게더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토비새를 통하여 신앙의 계승이 이어가야 한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은혜가 축적이 되어서 자연히 되어야 한다. 기도할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게 된다.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긴 속뜻을 알아야 한다. 그 안에 뭐가 있을까를 보아야 한다. 이 교회가 현대적이기에 교회의 전통이 들어가 있다. 모든 스토리를 알고 있다. 있는 그대로 구상되어있다. 전 세계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온 탕자와 사랑목자가 양쪽에 있고 중앙에는 Jejus christ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나무가 있고 저 안에 여러 가지를 놓친 것이 너무 많다. 생명의 역사가 있다. Sun of 소더 God가 있다. Messia The truse, 이런 모든 내용들이 보통은 잘 모른다. 왜냐면 디자인하고 그 뜻을 담았다.스테인드 글라스도 불이 없음 아무것도 안 보인다. 빛이 비쳐져야 보이듯이 아무리 좋은 자료가 있고 많은 것들이 갖춰져도 성령의 조명, 말씀의 빛, 생명의 빛, 은혜의 빛이 투과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빛이 아니면 투과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고 빛을 투과하고 그렇게 해야 선명하게 본래의 용도가 된다. 주일학교 정책이 교육이 선교정책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신앙의 계승이 순도 높게 투명하게 더 환한 빛으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요약

하나님의 뜻으로 예수 안에서 생명의 약속대로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한다. 먼저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구하며 바울은 밤낮 간구하며 쉬지 않으며 디모데를 생각하는 것은 그의 조상 적부터 내려오는 청결한 양심의 섬김을 감사하고 기쁨 가운데 있기 위해 보기 원한다고 한다. 이것은 외조모와 그의 어머니의 거짓 없는 믿음이 디모데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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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 4. 26.)
제목: ''순도(純度) 높은 사랑의 능력''
말씀: (요한복음 20:15~20)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코로나 극복 시리즈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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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에서 이렇게 10주 만에 부활주일의 감사예배 드림이 감사하다. 부림절이 재현하는 것 같다. 영적 이 자리가 영적 부림절이 되길 바란다. 부림절에는 되어서 함께 예배 드리는 일이 안식과 평안과 기쁨의 잔치가 되었음 한다.
*부림절이 무엇인가?
경제가 무너지면 가정이 흔들린다. 교육이 무너지면 다음 세대 미래가 무너진다. 정치가 무너지면 백성들이 마음이 힘들어진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의 현장 예배가 무너지면 신앙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다. 이것은 공동체 안에서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01.시편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평생에 여호와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다윗의 평생소원이 주의 성전에서 주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우리도 교회를 건축 후에 - 예수님 안에서 하루 교제가 세상의 천 날 교제보다 낫다.고 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일을 잘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의 영적인 토대와 영적인 힘을 주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교제가 세상에서 천 날 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사회적 거리두기’ (Social distance)이다. 우울증 등 불안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만연하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 사태 이후에 새롭게 나온 단어가 ‘Untact’(언택트) 비접촉이란 단어가 일상화 되었다. 이제 한국 교회가 많이 회복이 되고는 있다. 세상이 희한한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비첩촉(Untact)이 아니라 ONtact(온택트)가 되어야 한다. 그 결과 사랑의 투게더가 되길 원한다.
I.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면 주님이 기쁨을 주신다.
1. 요한복음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그 결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말자 마리아의 눈물이 기쁨으로 변하였고, 막달라 마리아 두려움도 기쁨이 되었다. 심지어 베드로도와 요한 남자 제자들도 두려움에 사람에서 용기의 사람이 되었다. 제자들과 마리아만 경험한 것이 아닌 베드로는 훗날 오늘 우리가 이때를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전서를 아래 말씀에 놀라운 말씀을 한다.
2. 베드로전서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주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면 기쁨을 주신다. 오늘 이 기쁨이 한국 교회 전체에 충만하기를 바란다. 기쁨의 은혜를 받아 문제를 뛰어넘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한 순도 높은 사랑을 고백하면 마리아든지 제자들이든지 오늘 21세기에 살아가는 모든 주의 백성들 다 동일하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질 수 있다. 이 기쁨이 있으니 두려움에 도망친 겁쟁이 베드로가 대담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변했고, 의심의 찬 도마가 확신의 삶으로 바뀌었고, 비겁한 요한이 사랑의 사람으로 되었다.
3.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비례한다.
사랑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사랑이 부족하면 기쁨도 부족하다. 유대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듣고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열받았다.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니까...유독 막달라 마리아 별 볼일 없었던 제자들은 그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서 외친다. 주님을 사랑하니까 그렇다. 주님을 사랑하면 기쁨이 올 것이다. 사랑의 크기가 기쁨의 크기를 결정한다. 이처럼 사랑과 기쁨은 동면의 양면과 같다. 참사랑에는 참사랑의 기쁨이 있는 것이다.
II. 순도 높은 사랑을 하면 영가족이 되게 하신다.
1. 요한복음20:17 “...너는 내(예수님)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2.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3.‘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보다 ‘아빠 아버지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가 도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의 영적 용량이 결정된다.
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부활 전’에는 ‘내 양, 친구들’이라 하셨으나 ‘부활 이후’에는 ‘나의 형제들’이라고 재조정(Reset) 하셨다.
5. 베드로의 새로운 언어 습관
사도행전1:6 “형제들아”~
6. 바울 사도의 형제 신학
* 로마서 12:1 고전12:1, “형제들아”*고전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즐거워하느라”
7. 우리는 영가족이다. 영가족이란 ➀‘영적인 가족’ ➁‘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는 가족’ ➂‘영원히 함께하는 가족’ ➃‘영원한 유업을 아버지로부터 함께 받아 누릴 가족’ ➄’마음이 젊은 영(Young)가족‘을 말한다.
이 놀라운 차원은 구약에서도 히브리 문학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예수님 십자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 영광스런 순간이 의존과 순종을 통하여 한이 은혜의 평온으로 가는 것이다. 내가 실력이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믿음의 용량이 커지며, 우리 아빠 아버지가 얼마나 능력이 계신가, 놀라우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장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다가 오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이 깨닫는 순간 역사가 시작된다. 바울도 자기가 최고인줄 알았다.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후 철저하게 세계를 품게 했다.
III.지금, 주님은 누구를 찾으시는가?
1. 능력 있는 자가 아니라 순도 높은 사랑을 하는 자를 찾으신다.
2. 요한복음 21:15-17... “15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16, 또 두 번째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17,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3. 마가복음 12: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를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4. 하나님을 순도 높게 우선순위로 사랑해야 남편과 아내와 자녀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5. 인생의 한 번이라도 순도 높은 100% 사랑을 주님께 드린 적이 있는가?
♧느낀 점
오늘 예배에서 담임 목사님은 예배를 많이 함께 드리니, 너무 좋은 마음이심을 보이시고 즐거워하셨다. 우리도 정상 예배를 드리니 너무 좋다. 모든 지체가 즐거우면 다 즐겁듯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서 좋고, 예배에서 은혜를 누리는 일이 중요함을 깨닫는 본당 예배였고, 헌금 봉사로 기쁨이 넘치는 예배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영가족으로서 영광과 고난을 함께하고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이 너무 감사로 넘치는 시간이었다. 은혜로운 예배가 항상 이렇게 드려지길 소망하고, 다시는 코로나 이런 바이러스가 없으면 좋겠다. 정말 서로가 주님의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는 예배가 되고 모두가 위로와 치료가 되길 기도하면서 매일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하는 자 되고, 순도 높은 사랑의 능력을 주시길 기도한다. 우리 훈련에 이렇게 봉사도 함께 하면서 주님의 능력을 바라면서 주시는 은혜에 늘 순종하기를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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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새

2020. 4. 18.

제목: ''선한 사마리아인''

말씀: (누가복음 10:30~37)

설교자: 이기원, 남동우 목사님

오정현 목사님

 

이기원 목사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에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시점에 율법 교사들을 만났다. 그 교사들에게 질문을 받으시는 내용이다. 율법 교사들은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한다.“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다. 이 질문을 하면서 율법 교사들이 두 가지 말씀을 인용하는데 신명기6:5절과 레위기 19:18절을 합쳐서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여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옳다 행하다. 그러면 살리라 하신다. 이때 율법 교사들이 자기들이 옳게 보이려고 가지고 율법적 지식을 피력하고 과시해 보이려고 두 번째 질문을 더 한다.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질문한다. 이 부분에 대한 답을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해 말씀하신다. 이 이야기에는 다섯 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첫째는 신분이 확실치 않은 어떤 사람이다.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에 있는 강도를 만난 사람, -옷이 벗겨지고 죽게 되고 거의 버려져 있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한 제사장이다 길거리에 버려진 있는 사람을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간 사람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와 같이 그냥 지나간 레위인이다. 이 두 사람은 종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볼 때 어려움에 처에 있는 자들을 정성스럽게 돌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치에 있고, 책임에 있는 사람들임에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네 번째는 이 사람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꾼다. 이 사람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다. 위헤 두 사람과는 달리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붓고 싸매고 자기의 짐 싣는 곳에 태워서 주막에 가서 돌봐주는 사람이다. (다섯 번째는 주막 주인이다).

그 어떤 사마리아 인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주막에서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주인에게 이 사람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인부의 하루 품삯이며 주막에 묵는 하루 비용이 12분의1 데나리온의 비용인데 과 24일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양의 분을 두 데나리온을 숙박비와 치료비를 주면서 게다가 또 한 가지를 추가하며 나중에 더 갚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신다. 그 순간에는 어렵지 않게 대답한다. “자비를 베푼자입니다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하신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 보면 그 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끝난 것 같지만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 해주신 이웃 사랑에 대한 개념은 사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했고 그리고 자기들이 갖고 있던 생각 등이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을 순수하지 못하다하여 개처럼 동물처럼 여기기까지 했다. 이런 사마리아인이 어떤 사람을 도왔는가? 어떤 사람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고 있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아마도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란 추측을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는 대상이 유대인이고, 도움을 준 사람이 사마리아인이라고 그런 대조적인 강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통 기록에 보면 이 지역의 도둑들이 금품을 갈취하는 일은 흔하게 있었지만 사람이 죽기까지 해를 가하여서 버려지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죽도록 때린 후 옷을 벗기고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나오고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을 가지고 학자들이 추측하는 근거는 아마도 이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어떤 한 사람이 옷이 벗겨진 상태로 확인 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처에 있는 그 대상이 누군지 상관없이 도왔다. 만약 유대인이라면 자신의 가족들을 민족들을 경멸한 자신들을 경멸한 유대인일 수도 있는데, 그냥 도왔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보고 피하고 지나치지 않고 원수일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도운 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새로운 차원의 이웃사랑이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 제사장과 레위인 들에게 길에서 버려져 의식이 없는 어떤 사람을 도와 줄 수 없고, 도와서는 안 되는 정당하고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러면 레위인은 12지파 중에 성결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이다. 제사장은 레위인 중에서도 레위인 중에서 아론의 지파로서 다시 성별되어서 직접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 당시 자기 반열 4개의 반열이 있었는데 반열 순서가 되면 일 년에 2주간 성소에 가서 제사를 드렸다. 일 년에 2주간 성전에 봉사를 하게 되는데 제사장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이 살지 않았다. 전국에 흩어져 살다가 어쩌다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데, 특히 여리고가 제사장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자기 반열 순서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봉사를 하면 된다. 딱 두 주간 너무 중요했다.

 

하나님께 섬기는 일을 잘 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당시 가장 부정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시체와의 접촉이다. 레위기에도 나오는데 심지어 부모의 시체도 가까이 가면 안 되었기 때문에 벗겨진 사람이 죽은 사람일 수도 있기에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부정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도와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남을 도와야 할 때, 할 수 있는 일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합리화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셨다. 이런 말씀에는 방향이 있다. 성경에 예루살렘은 올라가는 곳이다. 지리적으로 그렇다. 여리고는 좀 낮은 곳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언제 어디서나 올라간다. 그런데 제사자은 그 길로 내려가다가 나온다. 레위인도 이와 같이 모든 임무를 마치고 집이 있는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중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상황에도 오르던 내리던 부정해 지는 것을 피하려고 노력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는 사람이라면 곤경에 처에 있는 이런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교훈을 예수님께서 주고 계신다. 33절에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보면서 가졌던 그런 마음으로, 하트 봉으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교회로, 주님의 제단으로, 성전으로 올라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랑을 통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려운 이웃들을 최선을 다해 돕는 대사회적 시대적 사명을 담당하는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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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우 목사님.

예수님이 누가 강도만난 이웃이 되겠느냐?고 하신다.

내 입장에서 강도를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강도의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볼 것인가? 본문에 나타나는 두 사람은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대상을 바라보니까 지금 당장에는 도와주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자신의 입장을 돌아보니 도저히 도울 수 없어 피하여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강도 만난자의 입장에서 살펴보니 내 입장에서는 도저히 도와 줄 수 없지만, 강도만난 형편을 보니 도와 줄 수밖에 없어 가까이 가서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자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빈들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배고파하는 제자들을 돌려보내고 싶었지만 그 백성들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고 도우신다. 우리 사랑의 교회 대사회적 섬김도 마찬가지다. 교회나 성도들의 입장에서 연약한 자들을 바라보았다면 결코 그들을 도우지 못하고 그들을 피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랑의 교회는 연약한 자들과 장애인들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들을 필요를 채워지며 지금까지 달려왔다. 때로는 내가 힘들고 어려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을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들을 섬기며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대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사랑의 교회에 24년 전에 사랑의 복지 재단을 세워주셨다. 지역사회를 섬기게 하신 것이다. 특히 서초 구립 요양센터를 우리 직원들이 섬겨오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섬기고 있는데 지금 코로나19가 있어 면회가 안 되었고 섬기지 못하고 있지만 속히 회복되어서 발걸음이 이동되어 섬기기를 바라고 있다. 어르신들을 돕기를 바란다. 그곳에 노인들이 행복해 한다는 이야기와 매주 마다 예배드림과 프로그램이 좋다는 소식을 듣는다. 또한 행복한 꿈 터가 있다. 문제아가 있는데 60여명의 아이들이 양육 받고 보호받고 있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돌봄을 통해서 행복한 꿈을 갖고 주님이 쓰시는 자녀가 되리라 본다. 오늘 말씀을 준비 중에 복음성가가 생각이 났다.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한다. 주님이 주시는 것을 가지고 더 섬기기를 바란다.

사랑은 더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더 버리는 것” ~~이라 한다. 이 코로나19로 인해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베푸는 믿음의 성도가 되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웃을 향해 실천하고 베품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았음 좋겠다. 위기가 곧 기회임을 느껴서 실천하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사랑을 나누고 복음의 약속을 실천하길 원한다.

 

- 요약-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마침 제자장과 레위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주막주인에게 부탁하여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비용을 대주었다. 예수님은 자비를 베푼 사람처럼 너도 실천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고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살아있었던 그는 누군가 자기를 구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제사장도 레위사람도 그를 피하여 돌아갈 뿐 이었다 그러나 유대사람에게 멸시를 받던 그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측은히 여겨 그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까지 데려가 돌보아 주었으며 주막집 주인에게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그 비용까지 대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런 대가 없이 생면부지의 사마리아 사람을 통하여 긍휼함을 입었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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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예배

 

담임 목사님.

드디어 모였다. 우리가 늘 주일예배 드리면서 본당이 꼭 차면 즐겁고 기뻤듯이 오늘 그래도 함께 모이니 본당뿐만 아니라 아래층과 몇 곳에 사회적 거리 등 흩어져 앉아 예배하니 너무 감사하다. 본령 첫 번째이다. 우리가 장애사역과 북한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칭찬하고, 우리 장애인, 북한 선교 등 격려하자. 우리는 영 가족 여러분 본령이니 기쁘다. 예수님 때문에 보혈의 능력이 있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적 차원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에 눈이 열려야 한다, 세속역사를 고민하지 말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우리의 본질 사역에 집중을 주시길 원한다. 온라인 등 모두가 주님 앞에서 찬송과 경배로 이 코로나 사태가 벗어나길 기도한다. 삶의 모든 짐들이 벗겨지길 바란다. 고민하지 말고 복음의 영광을 알아 본질 사역에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기업인 회사를 잘 지켜야 하고 학자는 학문을 연구를 잘하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 예술가는 좋은 예술성을 펼치고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한다. 교회는 뭘 하는가? 본질은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웃사랑, 주님이 교회에 주신 대 사명은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는 것이고 대 계명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 둘을 잘해야 한다. 잘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 가족을 주셨다. 영 가족은 영원한 가족, 영적가족 동시에 영광과 고난을 함께 받는 가족이다. ‘Young 가족은 젊은 대학, 청년부 주일학교이다. 교회는 위임명령과 대 계명을 잘 실천하고 영 가족을 치유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 앞에 올바른 가치관으로 젊은이들을 잘 키워내야만 한다. 이제 우리 모든 중직자를 포함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예배에 집중하도록 기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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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0. 4. 12)

제목: ''부활의 영이 내게 임하면''

말씀: 요한복음 12:23~27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부활 주일은 주님은 죽음을 이기셨다. 그 우리 교회의 주인이신 것과 이 공동체의 머리이신 것임을 믿고 찬양합시다. 카이로스의 신앙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죄악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다. 성도들의 사진을 랜덤으로 골라서 좌석에 붙였으니 마음이 전달되기 바란다. 사랑 올 투게더가 되기를 바란다. 카이로스의 신앙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의 죄악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다. 리셋하길 바란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의 영이 내게 임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이 3일 만에 정말 살아나셨는가? 를 가지고 평생 씨름하다가 어정쩡하게 무덤으로 가는 자가 있다. 부활의 교회를 다녀도 평생 의심도 확신도 아닌 회색지대에 머물다가 부름 받는 자의 경우도 있다.

예수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평생 씨름하다가 어정쩡하게 의심도 확신도 아닌 회색 지대에 머물다가 이땅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교회 역사와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가장 보편적인 부활의 3가지 증거가 있다.

--- 예수그리스도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적 사실의 부활을 성령님으로 믿어지면 그 마음속에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생각할 때 기쁜 것이다. 그 주님을 반드시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선포하고 증거 하는 증인이 되는 것이다.

 

 

I. 부활의 증거에 대해서 가장 보편적인 증거 3가지 .

첫째, 빈 무덤이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무덤을 화려하게 만들어서 참배한다. 중국공자무덤, 메카도 이슬람 무하메드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 부활하신 주님의 무덤은 부활하셔서 그 무덤이 비어있는 것이다. (법의학자인 던런 대학장인 노먼 엔더슨경은 -빈 무덤은 부활을 논박하는 모든 이론을 단숨에 파괴해 버리는 바위와 같다

 

2.둘째, 제자들의 혁명적 변화이다. - 제자들은 본래 겁쟁이들이었다. 다 도망갔던 자들이 자기 목숨을 내고 예수님을 증거 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참고고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사도 요한을 제외한 11명이 순교했다. 마지막으로 사도요한도 그런 셈이다. 사도바울에 속한 전도 팀에 속한 바나바 실라 누가 디모데 디도 대부분 순교했다. 부활이 확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순교할 수 있겠는가? 이런 혁명적인 순교가 있겠나...!!!

 

3.셋째, 허다한 부활의 증인들. - 고전 15장은 부활장이다. 육신의 몸으로 부활하신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수백 명이며 수천 명이었다. 그래서 부활을 숨길수가 없다. 이 모든 사람의 입을 막는 불가능하다.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증인들이 너무 많았다. 이것이 거짓이었다면 지난 2천역사가 모든 것이 어떻게 밝혀지지 않았겠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큰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 부활이 문제겠는가?! 우리는 이 세상 끝 날까지 그래서 시공을 초월하고 목숨 걸고 땅 끝까지 증거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요약하면,,,,

첫째 예수님은 확실하게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이다. 죽음에 대해서 긴가 민가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과 피를 흘리셨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죽었을 때 분리되었을 때 나온다. 로마병사를 통하여 의학적인 증거가 있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수님께서 그 후에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나타나셨는가? 이다.

(고전15:6) - 목격자들이 대부분이 살아있다. 막달라 마리아 엠마오로 내려간 두 제자 도마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 죽은 자는 산 자들 앞에 나타날 수 없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줄 믿어야 한다. 이걸 베드로가 도장을 찍는다. 사도행전 부활이후에 기록한 우리가 다 증인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리셋 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 사건 이후에 완전히 한국교회도 새롭게 리셋 되길 원한다. 온 교회가 새롭게 될 거다 v자로 상승되길 기도한다.

 

 

II. 고백인가? 실체인가?

요한복음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선포는 마르다는 24절의 고백,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에 대한 응답이셨다. 예수님 자체가 부활자체요, 부활의 창조주요, 공급자이시다.

 

2. 마르다는 부활 신앙의 고백은 확실한 것이었지만, 그 고백이 자신이 당면한 현재의 슬픔을 극복하게는 못했다. 정신 차리라고 하는 내용이다. 주님이 신앙이 그거밖에 안되냐며 상기시킨다. 자기 체화가 아직 되지 못했다. 그것은 부활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실체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처럼 누구누구야!~ 너는 예수님을 믿느냐 하고싶다.

 

III. 현재적 삶의 부활

1.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이 성령 안에서 확실히 고백되면 예수님의 부활의 영과 예수님의 생명의 영이 내게 전가(轉嫁)된다. Transfer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명과 부활이 내 몸을 뚫고 들어가서 내 속에서 역사하시기 시작한다.

 

2. 부활의 영이 임하는 자에게는 부활적 삶현재적 삶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 현재적 삶도 부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한결 같은 자 되어야 한다. 부활의 영이 계시기에....

 

로마서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3. 부활 신앙은 미래에 있을 부활 사건을 현재의 삶에 침투시킴으로 현재를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한다. 고전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4.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상의 질서(죽음의 질서)에서 하늘의 질서(부활의 질서)로 바꾸어 준다.

1) 이것은 추상명사나 관념명사가 아니고 현재를 전투적 바폭력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2) 현실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걸으시고(24:15), 말씀을 주시고(24:27),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마음을 뜨겁게 하신다(24:32). 그리서 우리는 옛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사명지로 그러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3) 몽구스처럼 우리에게도 모든 독을 해독하는 부활과 생명의 DNA가 있다.

 

그래도 안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매 순간 아버지의 이름을 부릅시다.(7:11)

아버지여 감사합니다로 외쳐라!~~~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부활의 영과 생명의 영을 가지고 부활 불패의 기백을 가지자. 열왕기하 19장에 앗수르 군대 185천 대군을 천사 하나가 하루아침에 물리친 것처럼 부활 필승의 확신을 주실 것이다.

느낌...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 말씀처럼 한결같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저도 부활을 믿습니다. 진정한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더욱 힘을 얻고 살아감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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