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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헌신토요새벽예배(주후 2023년 12월 02일) 제목: "제자의 길 십자가" 말씀: 고린도전서 1:22-25 찬양인도: 23년 훈련생 찬양대 대표기도: 이명진 집사님(여사역6반 총무) 말씀읽기: 윤주한 어린이(소년부), 이은찬어린이(유년부) 설교자: 박삼열 부목사님 ㅡㅡㅡㅡㅡ *고린도전서 1:22-25,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ㅡㅡㅡㅡㅡ ▶올해 제자 훈련 모든 과정이 이제 이번 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다음 주 수요일 우리 수요 예배를 앞두고 있는데요. 이렇게 제자훈련의 시간들을 보내면서 참 힘들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하고 영적인 동지와 또 영 가족이 되고, 이런 말씀 안에서 몸부림하던 시간들이 지나고 이제 우리 수료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훈련을 마칠 때쯤 되면은 이제는 됐구나 하는 이런 마음이 아니고요. 이제는 내가 진짜 부족하구나, 나는 은혜 없이는 정말 하루도 살 수가 없구나, 하나님 은혜로 살 수 없는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게 훈련의 시간의 은혜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관찰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요. 보다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도표로 제가 정리를 해 보았는데요. 혹시 도표 볼 수 있나요? 도표를 봐주시고요. 제가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도표로 잘 정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우선 22절 말씀을 보면요. *고린도전서 1:22,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라라고 하는데요. 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류를 구분하는 익숙하고 분명한 방식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23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또 표현이 되죠. *고린도전서 1:23,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과 헬라인 혹은 유대인과 이방인 이 말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어쨌든 이런 구분을 지칭할 때, 이 구분에는 어떤 뚜렷한 차이가 있는 근거가 있기 마련이죠. 오늘 본문처럼 인류를 유대인과 헬라인 혹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양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들 두 그룹 사이에는 차이가 분명합니다. 마치 인류를 남자와 여자로 구분할 때의 차이 같은 그런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서로 구별되는 두 그룹이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기준으로 놓고 보자면 서로 매우 일치하게 됩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구분되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십자가를 기준으로 일치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그 앞에 나오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18,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유대인과 이방인 이 유대인과 고린도 입장에서는 이방인의 대표자인 헬라인 이 십자가를 중앙선으로 놓고 보자면 같은 방향을 가고 있는 거죠.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어서 한 방향 정렬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달랐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우리 묵상거리들을 생각하게 되는데요. 우리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우리가 가는 제자의 길을 동의하지 않고, 또 거꾸로 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들을 우리가 겪곤 하는데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믿음이 흔들리게 하고 불신에 빠지도록 하는 그런 경우들이 있죠. 여기에는요. 다양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이유들은 다양하고 또 이들은 이유의 종류들은 여러 가지이지만은 십자가를 반대하는 데 있어서는 일치단결할 수 있다는 거죠. 만일 십자가에도 십자가에 이 복음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다양한 이유들과 시련들과 도전과 시험들을 만나게 되면요. 이유를 불문하고 우리는 아니구나, 십자가의 길을 우리는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서로 원수같이 지내다가도 이 십자가 앞에서는 일치할 수 있다는 거죠. 다시 본문으로 가보면요.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일치하여서 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데요. 거기 그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서로 좀 다른 이유들이 있죠. 22절 23절을 보면요. *고린도전서 1:22~23,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앞서 도표를 통해서도 정리했지만은, 유대인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요. 거리끼는 것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리낀다는 것은 헬라어로 ‘스칸달론’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이 단어에서부터 ‘스캔들’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 정반대로 믿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신명기 율법에 의하면요. 이 십자가의 와 같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요. 정말 십자가를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죠. 구원과 해방을 가져 오기는 커녕 정반대로 아무것도 아니고 너무도 약한 것입니다. 구원을 일으키기에는요. 너무 부끄럽고 너무 약한 것이죠. 그러니 걸림돌일 수밖에 없죠. 십자가라는 복음은 그들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안 받아들이는 게 상책이었습니다. 반면에 헬라인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에게는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미련하다는 말은요. 어리석다는 말이죠. 바보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것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고 바보이신 것이에요. 때문에 헬라인 입장에서는요. 십자가가 복음이라는 것은 말할수록 어리석은 것이 되는 것이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쓸데없는 짓이 되는 것이죠. 헬라인들이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는요. 그들은 지혜를 찾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지혜를 찾는 경향은요. 이 고린도라는 도시를 생각해 보면 더욱 잘 좀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 후서에 반영되어 있는요. 이 고린도의 중요한 특징들은요. 십자가의 복음을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이 변론과 지혜와 이 설득력 논리력이 뛰어난 도시였죠. 또 다른 하나는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다. 라고 말하는 이 복음은요. 약한 것일 수밖에 약한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이적, 기적, 능력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였습니다. 인간의 이성의 합리성을 우위로 여기는 도시라고 할 수 있겠고,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특징들은 당시 무역과 우상의 종교에서 아주 중요한 도시 중에 하나였던 고린도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 헬라인과 유대인들의 특징이기도 했죠. 그렇기 때문에 23절처럼 십자가의 복음은 유대인에게는 꺼리 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말하면 십자가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아예 십자가라는 단어는요. 멀리하는 게 그냥 상책이라 할 정도로 안 좋은 단어였어요. 이와 같은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 크게 두 가지를 적용 적으로 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길은, 이 믿음을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은요. I. 세상이 볼 때 미련해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너무 맞죠. 영원한 저주와 심판으로 영원한 멸망에 처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인 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유대인과 헬라인, 모든 인류는 확실한 것을 찾는다고 하는 지혜와 논리와 기발한 아이디어를 추구한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볼 때는요. 십자가는 정말 어리석고 미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제자의 길이요. 걸어가고 있는 이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도전이고 시험이요. 또 흔들림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고난으로 다가오기도 하죠. 종종 내 나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가고 믿음의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이런 오해와 이런 도전과 시험거리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전히 미련한 것으로 보고 여전히 걸림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도 예외 없이 은혜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하나님의 구원으로 여겨지지 않았었어요.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고, 미련한 것으로 여기던 자들이 아니던가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믿는 길을 히브리서 식으로 표현하면요. 믿음의 선진들이 나그네로 살고 본향을 찾아가는 그 불편함, 고난 받는 자의 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마태복음 식으로 표현하자면 좁은 문이요, 좁고 협착한 수고로움이 있는 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러므로 이 십자가의 복음을 따르는 믿음의 길에 능력도 응답도 기쁨도 열매도 반드시 있지만 수고도 있고, 오해받는 일도 있고, 인내도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함께 묵상하면서 적용해 보고 싶은 것은요. II. 하나님의 강함과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이 강함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우리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요구하는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헬라인이 추구하는 지혜의 방식으로가 아니라 미련해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방식으로,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죄의 모든 저주와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 십자가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서 드디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의인이 될 수 있죠. 자녀가 됩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말로 선포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고자 하는 이유가 있는데요. 2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5절 보면요. *고린도전서 1:25,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즉 미련해 보이고 약해 보이고 부끄러워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듣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게 하는데요. 이것은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이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지혜도 없고, 논리도 없고, 통찰력도 없고 그리고 돈도 없고 명예나 권력이나 학벌도 없는데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진짜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심의라는 것이 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설명은요. 또 하나의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 주는데요.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장 26절 이하의 말씀에서 하시는 말씀인데요. 한마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29절에서 *고린도전서 1:29, 29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 하고 있습니다. 또 31절에서는, *고린도전서 1:31, 31 주님만을 자랑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어떤 우리의 조건 때문이라면 그런 구원은 우리가 자랑할 거리가 있겠죠? 그런 구원은 오직 은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겠죠? 그런 구원에는 이미 우리의 노력, 우리의 자격, 우리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뭐라도 자랑거리가 있는 구원이 될 수밖에 없겠죠. 게다가 그런 구원은요. 사실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실로 오라기 하나만큼이라도 우리에게 구원의 이유와 근거나 조건이 찾아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오직 은혜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은 이미 차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온전하시고 공정하시고 차별이 없으시고 완전하시고 정의로우시죠. 그것의 최고의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 곧 기적 이적 이런 것을 구한다고 했죠? *고린도전서 1:22,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런데 여러분 최고의 표적 최고의 이적이 무엇입니까? 사실은 십자가 아닙니까? 부활 아닙니까? 곧 기념하게 될 성탄절에 이 예수님의 성육신이고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또한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는데요. 지혜야말로 성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최고는 최고의 지혜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표적을 요구하면서도 부활이라고 하는 참 표적, 예수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이라고 하는 참 표적을 안 보고 지혜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진짜 지혜이신 예수님을 못 보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봅시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미련하다는 소리, 어리석다는 소리, 그래서 시험과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십자가의 길로 함께 가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의 지혜와 논리, 확증과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사람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한 이 놀라운 믿음에 희열을 경탄을 맛보는 이 믿음의 길을 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차별 없으신 주님 때문에 한없는 위로와 기쁨을 맛보고, 오직 주님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오직 은혜의 복음을 누리는 믿음의 길을 가도록 합시다. 십자가 외에는 구원의 길이 아예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로 갈 자가 없다.” 이와 같은 믿음의 길 가시는 모든 우리 제자 훈련생들, 또 모든 우리 영 가족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위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을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느라.” 이런 말씀의 성취를 기다리는 경탄할 만한 하나님의 위로가 기다리고 있는 믿음의 길을 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요약 하나님 지혜를 찾고 분명한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찾는 이 시대 속에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영생과 구원의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가 어떤 오해, 고난, 또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약속하신 것 바라보며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붙잡아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첫째,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었다. 비록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에 맞는 표적으로 그들을 만족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멸하고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던 것이다. 둘째,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구주의 사건을 실소에 붙였다. 그들은 지혜를 찾았다. 평이한 십자가의 교리는 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경멸하였다. 자신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에게 구원받을 소망을 품으라니! 비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죄인으로 판결을 받아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믿으라니! 이것은 학식과 인간적인 이성과 교만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인간적 자만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경멸하는 자들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명심하자. 셋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셨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사람은 그의 다른 어떤 사역에서보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교훈에서 훨씬 더 큰 지혜와 능력을 깨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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