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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년 10월 21일)

제목: ''고난의 유익''

말씀: 데살로니가후서 2:13~17절

설교자: 강대인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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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것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 좋은 이유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주께 사랑받는 자들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1〕은혜로운 선택의 부동성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처음부터 택하셨다.

(1) 선택의 시기: 그것은 처음부터였다.

(2) 선택의 목적: 그것은 구원, 곧 완전하고 영원한 구원이다.

(3) 구원을 얻는 방법: 그것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는 것'이다. 우리는 거룩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택하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거룩함과 복됨 뿐 아니라 믿음과 거룩함 역시 반드시 서로 결합된 것이어야 한다.

 

〔2〕복음으로 부르심의 효력(14절):그들은 또한 복음으로 부르심을 입었다.

그것은 영예롭고 복된 부르심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의 부르심이다. 그러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그의 영광을 보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이며 그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2. 굳게 설 것을 권고함.

바울은 결코 "너희가 구원을 받을 자로 택하심을 입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주의하지 않아도 되며 안심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굳게 서라고 말하고 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자신들이 고백한 기독교 신앙 안에 견고히 설 것을 권고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위한 바울의 진정어린 기도.

1. 기도의 대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직접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2. 바울에게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그들을 위해서 이미 행하신 것을 숙고함으로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곧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가지기를 바라는 모든 선의 발상이 되며 근원이 되는 것이고, 이 근원에서부터 우리의 온갖 위안이 나온다. 또한 성도들이 받는 위안은 영원히 계속되는 위안이다. 성도들이 받는 위로는 스러져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위로는 영생의 소망과 성도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긍휼이며 또한 성도들의 소망은 이것들에 근거한 것이다.

 

3. 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한 내용은...

그는 그들이 더욱 넘치는 위로를 가지기를 위해서, 그리고 굳게 서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위로는 굳게 서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하나님의 길 안에서 즐거움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그 안에서 우리가 굳게 서는 것 역시 위로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머뭇거리거나 멈칫거린다면 우리는 분명히 신앙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선한 일과 선한 말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주시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것을 얻을 수 있는가?

첫째로, 고난은 위로의 능력을 주신다.

- 모든 환난 중에 위로를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고난은 하나님만 의지하게 한다.

- 바울은 능히 굳건하게 서라고 한다. 말씀을 의지해야만 고난을 이길 수 있다. 바울은 내 의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다. 고난이 견고하게 하고

셋째로, 고난은 기도하고 감사하게 한다.

-바울은 기도를 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 합심하며 기도하며 간구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기 때문이다. 기도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는 것이다.

새 창조, 새 하늘이 일어나면 이 모든 고난은 사라진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만 의지하며 등불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

 

요약

고난은 하나님이 위로를 주시며,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며, 기도하고 감사하게 하신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우리는 살 수 없다. 어떠한 고난에도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서 서로 위로하고 기도와 감사를 하나님께만 기도하게 하시며, 고난 가운데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줄 믿기에 우리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자이다. 하나님이 입혀주시고 안아 주시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떤 유혹의 사탄에도 흔들리지 않고 진리의 말씀으로 굳건하게 영적 성장이 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가 고난 가운데 성도들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굳건하게 서게 한 것처럼 위로의 사람,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사용되기를 소망한다. 처절한 인생길에서도 책임지시고 이끌어 가실 것을 믿기에 진리를 붙잡고, 주시는 힘과 믿음 안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다시 하나님 앞에 선 것처럼, 이 코로나의 어두움에서 고난이 유익임을 깨달아서 온전히 빚어져서 무장되길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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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년 9월 30일)

제목: “하나됨의 秘訣”

말씀: 다니엘 2:46-49절

설교자: 박인기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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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2:46-49절)

46.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48.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또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으며.

49.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

*다니엘은 굴러온 복을 차버리는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11절-13절에 보면,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첫째=>서로에 대한 지지로 공동체는 하나가 된다.

본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함께 먹지 않고 있다. 믿음의 친구들도 음식을 거절했다. 서로 지지해주는 것이며, 믿음의 결단인 것이다. 서로가 큰 힘이며 능력인가를 보여준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는 다는 것이 가장 힘이 된다. 결혼도 그렇다. 서로가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다니엘 11절과 13절을 보면, 함께 동참하는 친구들을 보면 믿음의 결단의 친구들이다. 그래서 다니엘과 서로 격려하며 인내하는 것이다.

잠언 4:12절에 보면 “한 사람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공동체도 이렇게 서로 밀어주고 격려해 줄 때 든든한 버팀목이다. 레드우드 뿌리가 서로 지지해 주고 연결해 엮어져 있는 것처럼 서로가 이어지듯, 어떤 상활에서도 쓰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공동체의 믿음과 같다. 서로 지지해 주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믿어주고 사랑해주고 인정해 줄 때 더 서로가 더 큰 힘이 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인내하시고 격려하시고 지지해 주셨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여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우리에게 강권한 것이다. 그래야만 공동체가 하나가 된다.

 

▷둘째=>서로를 위한 중보기도로 공동체는 하나가 된다.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줄 때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중보기도가 서로 터져 나올 때에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이다. 중보기도가 그래서 가장 중요하다. 공동체를 세우는 힘이니 우리는 서로 함께 기도해야 한다. 특별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는 다니엘이 2절:17-18절에 친구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다니엘은 집으로 가기전에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서로 구하게 하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서로 중보기도 한 것이며 기도의 동역자가 된 것이다. 마음을 모아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도 기도하고 있다는 것에 힘을 얻고 용기를 얻는 것이기에 중보기도가 중요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에스더의 중보기도처럼 민족의 위기 앞에서 모르드개에게 유다민족을 향해 기도를 요청한 것처럼 에스더4:15-17절에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더니 에스더가 유다민족에게 먹지 말고 중보 기도한 것처럼 그대로 행했더니 승리했다. 하나님은 중보를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심을 알게 했다. 중보기도는 내가 그 자리에, 아픔과 고통, 슬픔의 자리에서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다. 동참한다는 것이다. 많으면 더욱 좋은 것이다. 중보기도가 수없이 함께 함에 승리가 있다. 중보기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잘 모른다. 중보기도는 공동체를 세우는 힘이다. 장작불처럼 불 붙어서 합치어져 더 잘 타는 것처럼, 쇠까지 녹이는 풀무불이 되는 것이다. 중보기도의 수많은 역사가 일어나길 소원한다.

 

▷셋째=> 서로를 향한 섬김으로 공동체는 하나가 된다.

섬김으로 하나가 된다. 다니엘은 왕에게 이야기 하는데, 정확하게 해석한다. 과거, 미래에 대한 해석을 잘하게 되었다. 승승장구한 미래가 있었지만, 2:40절에 보면.> 다니엘이 왕에게 요구한 것은 친구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세워주는 자였다. 서로를 위한 섬김이다. 마태복음 20:28절에 예수님이 자기의 목숨으로 우리를 섬기셨다. 우리는 나 중심이 아닌 타인 중심인 것이다. 상대편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이다. 그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처럼, 그 섬김이 깊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 돌보아서 그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 성령님으로 인도함에 따라 서로 내어 놓아야 한다. 필요를 따라 채우면 가난한 자가 없게 된다. 공동체가 부요해진 것이다. 공동체가 따뜻해 주는 하는 이야기도 있다. 한 예화로,,,귀국이라는 아이이다. 질병을 가진 자이다. 키가 자라지 않는 병이다. 귀국이를 붙잡고 함께 운동장에서 뀌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 귀국이에게 가장 추억이 되었을 것이며 그 친구들도 참 아름답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다. 가정과 우리 공동체에서 어떤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리도 잘 섬기고 있는가, 중보기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한 희망과 생명을 주실 것을 믿는다. 함께 은혜의 열매를 심고 따기를 소원해햐 한다.

 

♣요약

서로를 향한 지지, 격려, 우리 안에서 행해지는 서로를 향한 간절한 중보기도, 도고기도, 끝까지 함께하며 필요를 채우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우리는 경험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상대방의 잘못을 이해해주고 용납해 주어야만이 사랑이며 주님의 실천이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하며, 가정과 공동체에서 내가 먼저 기도하고 내가 먼저 필요를 채워주며 나아갈 때에 우리 공동체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주께서 원하시는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가운데 말씀 가운데 열어 가실 줄 믿는다. 장작이 모여서 풀무불이 되듯, 온라인에서 기도의 장작이 하나하나 모여서 쇠도 녹이는 풀무풀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에 감사하며 다니엘처럼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느부갓네살의 꿈에 대한 다니엘의 해몽을 증거 한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은 앞으로 전개될 세상 역사와 그 역사의 종말에 관한 것이다. 다니엘은 이 꿈을 해석함으로써 바벨론 왕의 인정을 받고, 전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게 된다. 그러니까... 다니엘의 꿈과 해석을 들은 왕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생각하여 분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여기서 왕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가에 대해서 보게 된다. 다니엘에게 꿈과 해석을 주신 하나님이 참신인 것을 고백했고,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하였으며 예물과 향품을 하사했다. 그리고 다니엘을 바벨론의 제 2인자로 세우고 그의 친구들로 바벨론의 도를 다스리게 했다. 우리도 서로 지지해주고 사랑해 주고 중보기도 해주며, 서로 섬기면서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워가야 한다.

www.sarang.org/tv/sermon.asp?sflag=wed&db_idx=20371

 
★박인기 목사님은 더 멋지시고 젊어지셨다. 그것은 성도님들만이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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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6. 10)

제목:''흩어진 나그네들에게 ''
말씀::베드로전서 1:1~7
설교자: 김경덕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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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 대한 추억을 한두 개 쯤은 가지고 살고 있다. 편지함을 오래된 통을 꺼내 읽어보기도 한다. 모든 편지에는 이유가 목적이 있다. 개구쟁이 초등학교 아이가 갑자기 편지를 쓰는 것은 어버이 날이어서 쓴다. 유학 중인 딸이 왜 장문으로 아빠에게 이 메일을 쓰는가? 그것은 용돈이 떨어져서이다. 청년이 자매에게 밤바다 편지를 쓰는가? 좋아해서이다. 모든 편지에는 목적이 있다. 병무청장께서 편지를 보내는 것은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는 뜻이고, 경찰서장께서 편지를 쓰는 것은 신호위반의 편지이다. 신약성경 27권중에 22권에 성경이 편지였다는 것이 편지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의 저자요, 교회 지도자였던 사도들에게 편지를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교회가 갓 태동했던 시기에 교회들마다 당면한 이슈와 혹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뜻이다. 편지 한 통을 누군가 건네 준 두루마리 한 통을 받게 된다. 두루마리 편지를 읽으면서 일고 난 사람은 평온하고 담담함으로 변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공동체에게 전했다. 읽는 사람과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학자들은 이 편지를 AD 63년에 기록된 것으로 말하고 있다. 황제 네로가 교회를 핍박할 때이다. 대 재앙과 대 환난을 앞둔 신앙 공동체에 보낸 편자라는 사실이다. 신앙 때문에 받는 이 시련은 언제까지 계속 되는가? 이 땅의 성도들은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이 편지를 받은 이 성도는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을 발견하고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느꼈을 것이다. 헬라어로 기록된 이 편지는 페트로스 ~~ 아파스톨로스 ~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다. 이 편지는 베드로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최고의 사도 베드로가 썼다. 이 편지를 왜 썼는가?


*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한 이후 전 세계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이 용어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나그네 신분으로 살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나그네요 이방인으로 살지만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베드로는 그것을 삼위 일체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미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둘째, 그들은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셋째,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삼위 하나님의 전폭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얻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배척을 당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핍박이 극심해서 마치 불로 연단하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은 소망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 그 소망은 금보다도 귀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것이며,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에 ‘산 소망’이라고 말한다. 그 소망은 하늘에 간직된 기업으로써 우리가 종말의 구원을 통해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거듭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시험 가운데서 보호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소망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요약-
어려운 시간을 지나며 흩어져 있는 우리 성도들을 성령께서 말씀으로 연결하여 주시는 것을 믿고 나그네 같은 지금의 삶 속에서 말씀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산 소망되시니 이 모든 고난과 근심은 잠깐일 것을 믿어서 주님 앞에 강한 척도 약한 척도 말고 겸손하게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살기를 바란다. 금보다 더 귀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라 하신 말씀을 소망으로 두고 흩어져 있기에 서로를 위해 더 기도하고 나그네 인생이기에 서로를 더욱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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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5. 6.)

제목: ''큰 믿음의 비밀''

말씀 (마태복음 15:21~28)

설교자: 장광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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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1) 자아를 깨뜨리는 자.

문제(수치심)를 주께 드러내며 경멸. 관계를 깨뜨리는 요인수치와 굴욕 속에도 딸을 살리려는 내 자신 내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주를 바라라.

2) 주가 구원자(메시아)라는 믿음.
이사야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3) 주 앞에 엎드려 말씀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딸만 바라보면 예수님을 도구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
27“주여 옳소이다마는 (자격 없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지만 주의 긍휼을 받고저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 프로스퀴네오.절하다, 경배하다.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내 뜻대로 안 될때  그때 말씀 앞에 엎드리라. 은혜받을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삼아주셔서 감사하라는 말씀.

 

 

1.어떤 문제 상항 속에서도 나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을 돌이켜 주님만을 바라보고, 순순한 사랑과 믿음의 연합으로 큰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기 바란다.

2. 나의 생각과 뜻이 맞지 않아도 먼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나의 소원과 우상을 내려놓고, 주의 위엄 앞에 엎드리는 예배자가 되어야 함.

3. 문제의 자리를 은혜의 자리로, 수치의 자리를 칭찬과 영광의 자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작으로 의지하고 자랑하며, 내 뜻보다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가 영광스럽게 이루어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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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여자의 딸로부터 귀신을 내어쫓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이방인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는 매우 진기하고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진기한 사랑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이방인을 비추는(2:32) 희미한 빛이 드러난다.

그 여자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이야기 한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자녀들이 괴로움을 당하면 부모들이 걱정을 하게 된다. 다정한 부모들은 자신의 분신인 자녀들의 불행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한 그 여자의 간청 속에는 "귀신들리신 했지만 그 아이는 여전해 내 딸입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의 가족이 가장 큰 불행을 당했다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애정을 베풀지 않으면 안된다. 가나안 여자가 그리스도에게 나온 것도 그 여자의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믿음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어떤 필요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런 이유로 우리를 내쫓지 않으실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간청한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여자의 간청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이었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제한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구했다. 다시 말해서 그 여자는 필요한 것만을 간청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고 그리스도의 자비에 의지했다.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그 부모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과 같다. 곧 우리의 자녀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기의 자녀들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부모들의 의무다. 그러므로 믿음과 기도를 통하여 그 자녀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데려오라.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그들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간청을 한 뒤 가나안 여자가 직면했던 좌절감.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는 늘 그를 찾아 온 모든 사람들에게 호의를 보이시며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소리치기 전에 응답해 주시거나 아니면 그들이 말하는 동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여기에선 그와 다른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떤 학자는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과 다름없이 이방인들에게도 같은 호의를 베풀어 유대인들을 화나게 하려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인에게 등을 돌리셨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여자를 시험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대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믿음이 강하다는 것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여자가 그와 같은 좌절감을 얼마나 훌륭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를 알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에게 실망을 안겨주셨던 것은 그 여자의 믿음의 시련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대하실 때, 그들에게 자신의 섭리를 특히 자신의 은혜를 베푸시는 방법 중에 모호하고 어리둥절하게 했던 대부분의 방법들이 이 이야기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불쾌한 모습을 보이신다 해도 그의 마음 속에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 여자가 특별히 심한 실망을 받게 된 것을 살펴보자.

그 여자가 그리스도의 뒤에서 소리칠 때 그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리스도는 늘 귀를 기울이시며 자기에게 간구하는 불쌍한 자들의 소리를 경청하셨다. 그런데 이 불쌍한 여인에게 그리스도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어떤 자비나 답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시의 행한 일을 알고도 아무 대답을 하시지 않은 것은 그 여자가 더 열심히 기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자에게 자비를 바랄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그 여자로 하여금 자비를 얻기 위하여 훨씬 더 끈질기게 간구하도록 했다. 하나님께 열납되는 모든 기도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지 않는다.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기도에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믿음을 시험함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개선시키기 위한 것이다.

제자들이 그 여자를 위하여 친절한 말을 하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시는 이유를 밝혀 그 여자를 더 실망하게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 여자를 대신하여 간청한 것은 그 여자에게 어느 정도의 위안을 주었다. 그들은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비록 제자들도 그 여자의 요구가 해결되기를 바랬겠지만 그들은 불쌍한 여인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보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편안함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건의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한 말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말이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질러 우리를 성가시게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창피하게 하오니 그 여자의 딸을 고쳐주어 그 여자를 보내소서"라는 뜻이다. 계속해서 끈질기게 간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은 선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뒤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을 좋아하신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 여자의 기대를 완전히 좌절시켰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한다고 해도 현명한 사람의 확고한 이유는 좀처럼 변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요구에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여자를 반박하셨으며 하나의 이유를 들어 그 여자의 입을 막았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속해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큰 시험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여자가 계속 끈질기게 간구하자 그리스도는 그 여자의 간청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하여 그 여자의 간청을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겉으로 보기엔 그 여자를 거의 꾸짖기까지 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26).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그 여자의 모든 희망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그 여자가 진정으로 아주 강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이 말을 듣고 절망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복음의 은혜와 그 부속물로 생기는 기적적인 치유들이 바로 자녀들에게 주어진 떡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베풀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열방에게 결실이 맺어지는 시기를 주어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다(14:16,17). 이들은 곧 특별한 백성에게만 어울리는 특별한 은혜들이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간주하여 개로 불렀을 만큼 매우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그런 점을 인전 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은혜를 이방인이 나누어 갖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기신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 가나안 여인의 간청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하신다. "가족도 아닌 이 여자가 어떻게 자녀의 떡을 먹으려고 생각할 수 있느냐?" 그리스도는 먼저 가장 두드러진 영광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낮추시고 그들을 천하고 무가치하게 떨어뜨리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명예를 얻고, 특권을 누리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개와 같은 존재로 여겨야 한다. 그리스도는 큰 시험을 주셔서 큰 믿음을 갖게 하시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시험을 받고 정금과 같아지도록 가장 고통스러운 마지막 시험을 준비해 두신다.

이와 같이 시험을 받으면 많은 사람이 침묵 속에 빠져들거나 갑자기 격분하게 될 것이다. 그 여자가 신앙이 약했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불쌍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달갑지 않은 말만 하는구나. 내가 차라리 집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무시할 뿐만 아니라 개라고 부르기까지 하다니!" 그 여자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란 말인가? 정말 이 사람이 친절하고 다정하며 동정심이 많다고 소문난 그 사람이란 말인가? 나는 개가 아니라 여자다. 나는 불쌍한 처지에 빠져 있는 정직한 여자일 뿐이다. 분명 나를 개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다." 겸손한 믿음을 가지고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영혼은 모든 것을 선한 쪽으로 말하고 행동할 뿐 아니라 그것을 최선으로 생각한다. 그 여자는 이런 모든 절망을 다음과 같은 태도로 헤쳐 나간다.

그 여자는 자기의 간청을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시기를 열심히 구했다. 이런 태도는 방금 전에 그리스도로부터 거절을 당했을 때도 나타났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25). 그 여자는 계속해서 간구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자들을 잠잠케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응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부담을 더 민감하게 느끼면 느낄수록 그 부담을 제거하기 위하여 더욱 굳은 결의로 기도해야 한다. 그 여자는 더욱 간청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를 욕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실수한 것이 아닌가 하고 돌이켜 보는 것 같다. 그 여자는 더욱 겸손하게, 자신의 행동이 예수님께 혹시나 거만하게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와서 예수께 절하였다.' '또한 그 여자는 자기의 열심히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여 이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외쳤던 것이다. 기도의 응답이 늦춰질 때 하나님은 응답이 늦어지는 것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좋은 기도를 하도록 가르치신다.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고 실망을 당하게 될 때 기도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도 보내셨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다. 믿음이 약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에 대한 선택 때문에 질문하고 의심함으로써 당황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좋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한 그 여자의 기도는 매우 간절하지만 포괄적이고도 열렬했다. 그 여자가 이와 같은 기도를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었다.

 

첫째, 그 여자는 자기의 처지를 슬퍼했다. 상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 슬퍼하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때에 그들을 살피시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 그 여자는 시험을 당하는 이때에 자기를 도와주시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그 여자는 이처럼 언짢은 일을 당했을 때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셋째, 그 여자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한 본래의 요구를 굳게 주장했다. 이 말은 곧 "주여 제가 오게 된 목적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 여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도울 수 있으며 또 기꺼이 도우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 여자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선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자기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기도가 웃음거리로 되고 또 우리가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한다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여자는 경건하고 훌륭한 믿음으로 매우 놀라운 간청을 했다. 이 가련한 여인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응하기로 결심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 "주여 옳소이다"라고 한 그 여자의 고백은 매우 겸손했다. 우리는 겸손한 신도를 그와 같이 비천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는 언제든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주여 옳소이다. 제가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녀의 떡을 함께 나눌 권리가 없습니다." 그 여자가 이 말을 하고 나서 간청을 한 것은 매우 영리한 행동이었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여자가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통하여 논증을 한 것은 매우 총명하고 영적으로 기민하고 영민했기 때문이었다. 생동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은 우리를 곤란하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를 실망케 하는 것 속에서도 믿음을 통하여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그 믿음은 우리를 밀어내려고 뻗어진 손을 잡음으로써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도록 한다. 그 여자의 간청은 바로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진실로 충분한 정식은 자녀들만을 위하여 마련되지만 그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리는 작은 부스러기들은 개들이 먹어도 아까와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여자의 겸손과 궁핍은 그 여자로 하여금 부스러기라도 기뻐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에 감사할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신자에게는 귀한 것이며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부스러기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의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부스러기를 기대하도록 자극했다. 부자의 식탁에서 그 자녀가 먹듯이 개도 떡 부스러기를 먹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식탁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 여자는 그리스도의 식탁을 주인의 식탁이라고 부른다. 진정 그 여자가 개라면 그 여자는 주인인 그리스도의 개가 될 것이다. 비록 우리가 문지방에 거한다 해도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면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모든 간청에 대한 좋은 결과의 성공 : 그 여자는 이 노력을 통하여 신뢰와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비록 가나안 사람이었지만 진실한 이스라엘의 딸임을 입증하였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28). 이제 그리스도는 본심으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시는 것은 바로 그 여자의 믿음이다. 그 여자가 기지를 발휘하여 이 일을 잘 처리한 것은 여러 가지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곧 지혜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꾸준한 기도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로 그 여자가 지니고 있는 믿음의 산물이었다. 믿음은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는데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은혜들로 말미암아 믿음에 대해 가장 큰 영광을 돌리신다. 그것이 바로 그 여자의 믿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성도들의 믿음이 다 귀중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모두 다 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모두 같은 정도의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위대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원수로 대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여 친구로 여겨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 있다. 진실하기만 하다면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절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큰 자는 칭찬까지 받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여자의 딸을 고쳐 주셨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곧 "내가 너의 간청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으니 네가 온 목적을 이루고 가라"라는 뜻이다. 믿음이 큰 자들은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뜻과 부합되었을 때 그의 의지도 우리가 바라는 뜻과 일치할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를 거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비록 한동안 자신의 모습을 그들로부터 숨기시는 것처럼 보여도 그들을 끝까지 거절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화답하였다.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 어미의 믿음이 딸을 치유하게 한 것이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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