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945년 겨울,누군가와 '사랑'을 나눈 죄로 러시아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추방된 남자가 있습니다.
독일계 루마니아인이고 아직 앳된 청년이에요.
앞으로 우리에게 '숨그네'라 불리는 다소 낯선 조합의 단어에 엮인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청년의 얼굴을 잘 기억해두도록 하세요. 그가 떠날 때 본 세상과 돌아온 뒤 세계는 전혀 다른 것이 돼 있을 테니까요.
이 소설의 첫 대목에는 이송 열차에 관한 일화가 나옵니다.
물론 모든 이야기는 저 루마니아 청년의 눈을 통해 그려지고요.
청년 말에 따르면 그날 밤 그는 군인들의 총구를 뒤로 한 채 바지를 내리고 사람들과 나란히 똥오줌을 눴다고 해요.
어두운 설원 위론 지린내 나는 김이 무럭 올라오고…… 그 와중에도 '자신들을 버려두고 열차가 떠날까봐 미칠 듯이 두려워'하는 사람들 틈에서 수치와 공포를 느꼈다고 하고요.
당시의 풍경은 '그 밤의 세계가 얼마나 인정머리 없고 고요하던지'라는 문장으로 정리돼 있네요.
그런데 그 사이 누군가가 외칩니다. -이것들 보라고,살고들 싶지.
황량한 겨울밤,누군가의 한마디에 사람들이 웁니다.
열흘 넘게 갇혀 있던 기차 안에서도 노래하고,농담하고,이성의 몸을 더듬기까지 했던 사람들이 말이에요.
더욱이 저 얘기를 한 사람은 러시아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저들과 같이 용변을 보던 또 한 명의 추방자였지요.
그런데 저 사내,그렇게 말해놓고 자기도 웁니다.
대체 말(言)이 뭐기에,사람 맘을 이리도 송두리째 흔들고 그것도 모자라 무너지게 하는 걸까요.
어쨌든 작가는 저 사내로 하여금 빈정대다 바로 훌쩍이게 만든 뒤,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려 한 것 같아요.
-인간은 참 이상해…… 그렇지?
뒤로 갈수록 이상한 사람들은 계속 늡니다.
정신이 살짝 나간 탓에 모두의 사랑을 받는 경비원 카티라든가,죽어가는 아내의 수프를 빼앗아 먹는 파울과 다른 이의 목숨보다는 자신의 스카프에 관심이 많은 프리쿨리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보다 이상한 건,그 이상함이 건드리는 몇몇 통점이 가장 보통의 우리,혹은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과 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물에 닿아 꺾이고 휘는 빛처럼 말에 닿아 반사된 진실의 풍경처럼 말이에요.
그러니 이쯤에서 미리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어쩌면 이 소설은 사건보다 사람에게 더 몸을 기울인 작품일지도 모르겠다고…… 헤르타 뮐러는 실로 이 이야기 안에서 각 인물들의 혈관을 섬세하게 만지고 있습니다.
작가가 그걸 어떻게 해냈느냐고요?
음,당장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겠네요.
-단어들로.
말은 사치이고,관념이며,기만일 수 있던 시대에,말에 매달려 말로 버티는 인물이 여기 있습니다.
그것도 강제수용소라는 장소에서.
소설 속 청년이 자기가 한 비밀스러운 연애,즉 '랑데부'를 일컬어 표현한 것처럼,그렇게 '특별하고,더럽고,수치스럽고,아름다운' 단어들로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게 왜 시가 아니고 소설이 됐는지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육체와 정신을 집요하게 갉아먹는 고통 속에서,누군가 하도 만져 닳고 너절해진 낱말들이,아름답되 먹지 못하는 열대어처럼 잔인하게 빛나고 꼬리치며 달아나는 모습 또한 보시게 될 거고요.
말에 매달려,말과 싸우며,말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얼마나 간단치 않은지,그 또한 말을 빌려 온 힘으로 설명하고 있는 청년의 목소리가 먹먹합니다.
그리고 문득,여기 떠오르는 이미지 하나.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이 가까스로 잡고 있는 나뭇가지 한 개…… 말.언어.혹은 문학.그래서 그게 대체 무얼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그럼 다시 이 소설의 첫머리로 돌아가 볼까요. 거기 이런 말이 나와요.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살면서 우린 많은 일을 겪게 되겠지요?
그중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테고요.
지저귀듯 노래하며 시를 읊을 시절도,기도하듯 무릎 꿇고 말을 줍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숨그네]는 한 인간이 처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허기와 고통의 시간에 대해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거기서 사람이 만든 말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또는 어떤 일을 돕고 있는지 목격하는 건 이제 여러분의 몫이겠지요? 네? 저요? 이걸 이미 읽은 당신은 그럼 뭘 할 거냐고요?
무얼 하기는요,저도 이야기를 지어야죠.
다시,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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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수용소로 이송된 17살 소년의 삶
'숨그네' 줄거리
헤르타 뮐러는 1953년 루마니아 니츠키도르프에서 태어나 독일계 소수민족 가정에서 성장했다.
나치의 몰락과 루마니아 독재정권의 횡포를 침묵으로 지켜보았던 시골 마을의 강압적인 분위기는 어린 뮐러에게 정체 모를 공포와 불안을 심어주었다.
당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탓에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1987년 독일로 망명했다.
망명지 베를린에서 전후 전체주의의 공포를 생생히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하였고,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9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숨그네]는 2차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된 열일곱 살 소년의 삶을 강렬한 시어로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2차대전이 끝나고 루마니아에 살던 독일계 소수민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소련은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하기 위해 그들을 강제로 징집한다.
"순찰대가 나를 데리러 온 건 1945년 1월15일 새벽 세시였다.
영하 15도,추위는 점점 심해졌다.
" 열일곱 살의 소년 레오폴트 아우베르크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노동 수용소에서의 5년 동안 기본적인 욕구만 남은 고통스러운 일상과 단조롭고 끝없는 고독을 경험하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흔들린다.
고향으로 돌아와 대도시로 이사를 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의 숨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네처럼 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상징하는 [숨그네]는 철저히 비인간화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삶의 한 현장을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게 포착해낸다.
원제; Atemschaukel
저자; Herta Muller
발표; 2009년
분야; 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숨그네
옮긴이; 박경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1(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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