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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12월 10일)
제목: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의 초대"
말씀: 마태복음 11:25~30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강도사님), 영광찬양대-'사랑이 예 오셨네'
대표기도: 윤주은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ㅡㅡㅡㅡㅡ

*마태복음 11:25~30,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ㅡㅡㅡㅡㅡ

사랑하는 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낭독한 본문은 주일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추천의 본문으로 자주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듣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해석자들은 이 구절이 공관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려고 하면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첫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라고 했는데 그러면 무엇을 수고하고 어떤 무거움 을 진자들은 이야기하는가?
둘째, 주님께서는 내가 쉬게 해주리라. 라고 하시고 내 멍에를 메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셋째, 주님께서는 나의 먹매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우유하고 겸손함이라. 라고 했는데, 그런 온유와 겸손은 예수님의 마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이렇게 이 본문은 쉬워 보이지만 막상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하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세상의 슬기로운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빈 그릇이고, 그 안에 무엇이든지 채워 넣으면 되는 그런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내용이 없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에 25절에서,
‘천지의 주제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25,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태도를 버리고, 어린 아이들처럼 단순하게 주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들으면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복된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첫 번째 질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여기에 수고하다. 라고 하는 동의어는 헬라어로 ‘코피아오’입니다. 우리 한글로 코피나오!, 굉장히 비슷하기 때문에 코피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요. 이 ‘코피아오’ 라는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는 ‘일상적인 삶의 노동’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특별히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일상적인 육체적 ‘노동’을 가리킵니다. 마태복음 6장 28절에 보면,

*마태복음 6:28,
28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둘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라고 한 걸 보면,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노동의 수고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5장 5장 5절을 보면,

*누가복음 5:5,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이라고 했는데, 여기에 수고하였으되. 라고 하는 동사는 어부들의 고기를 낚는 육체노동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수고하다. 수고하고. 라고 할 때 이 동사가 현재 분사형으로 쓰였기 때문에 현재 분사는 지속적인 일상적인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수고하는 자들이란 매일같이 일상적인 삶의 요구를 요구로 애쓰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 후에는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수고하는 존재고, 이것이 일상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고기를 낚기 위해 밤새 수고하는 어부들과 같습니다.

특별히 요즘 젊은 세대는 밤새 컴퓨터와 핸드폰을 켜놓고, 비트코인이나 암호 화폐를 사고파느라 밤을 새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수고한 결과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무거운 짐을 진 자, 라는 것은 짐을 싣다. 는 동사의 완료 수동 분사 형태인데, 이미 완료된 행동에 결과로 현재 존재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매일같이 반복되는 수고로운 행동으로 인해 현재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상태가 되었다. 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그러면 그렇게 만든 것인가요? 어떤 학자들은 말로 쓰던 OO형으로 이해하여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자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짐을 지운 것도 사실이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지고 있는 대부분의 짐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짐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이든 구한 사람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흔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 그러면 외적으로 도로한 환경에 있던 나는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이 내일의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 힘들게 수고하며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자들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를 부유층에서 찾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부자 관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신이 근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관리는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얻었지만 내면은 기쁨과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질적 부로 인해 생긴 내면의 고통과 불안함이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빈부를 물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수고하고 끝내는 무거운 짐진자들이 되는 것일까요? 수고하여 재물을 많이 얻으면, 영혼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에서 주님은 이 점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16-19,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여기에 평안히 쉬다, 내 영혼을 평안히 쉬자. 라고 했을 때 이 평안히 쉬다. 라는 단어가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내 영혼이 힘을 얻으니 우리 한글 성경에는 내 마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기억하면 영혼이 똑같은 언어입니다. 이 부자가 소출이 많아지자 국가를 더 크게 짓고 급식과 물건을 쌓아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 위해서입니다. 옛날만 그런 게 아니라 현재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 돈을 많이 벌려는 것이 대부분의 현대인들의 삶의 목표가 아닙니까? 그러나 이 큰 재물을 얻는다 하여도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혼의 양식은커녕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날에는 자신의 영혼마저 잃어버리게 된다고 주님이 경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비유의 끝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이유가 영혼을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한 것인데,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영혼의 안식은커녕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수고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까? 따라서 주님은 마태복음 16장 25절 이하에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 26,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주님이 이렇게 경경하신 거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영혼의 안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뭐냐면, 영혼의 안식은커녕 영혼을 잃어버리게 되면 천하를 얻은 데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경고하시면서 지금 우리를 향해 이렇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앉아 있는 우리 가운데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마 한 분도 계시지 않을 겁니다. 겉으로는 남부럽지 않고 행복해 보여도 깊은 내면에 외로움과 두려움, 불안과 공포에 무거운 짐을 안고 사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은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를 향한 초청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우성 우리는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전문가들이 나와서 이런저런 조언과 폭로로 우리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들고, 결국은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식을 사라. 아니다. 펀드를 해야 된다. 아니다. 안전자산의 금을 살 때다. 지금이 암호 화폐에 투자하여 적기이다. 아니다. 환율을 보면 1번 화폐 n에 투자해야 된다. 지금은 부동산 투자하고 아파트를 살 마지막 기회다. 8일만 바르면 얼굴이 하얘진다. 샴푸만 해도 머리가 까맣게 바뀐 거죠. 몇 년 전에 8일만 바르면 하해진다는 비타민 앰플을 지혜로운 전문가에게 듣고 샀습니다. 제가 웬만해가지고는 광고에 안 넘어갔는데 테니스를 치면서 이제 얼굴이 검게 박힌 데다가 아내가 툭툭 그냥 얼굴이 왜 그래 뭐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스트레스가 생겼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사람 이렇게 사람들처럼 큰 대형 화면 가지고 외울 때마다 제 얼굴이 나오니까 신경이 쓰여서 얼굴이 하얘진다는 말에 그만 귀가 솔깃해졌어요. 지금은 잘 안 보이는 이유는 BB크림을 발라서 그렇습니다. 특히 그 기대를 가지고 이제 한국 사람들이 비타민 앰플을 샀어요. 8일 동안 발랐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거죠. 몇 달 바르면 낫겠지만 몇 달리를 바랐는데 하나도 효과가 없어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왜 이래 비타민 에플을 사야 되나 엄청 비싸서 때려 치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그 광고에 넘어가서 비타민 앰플을 샀겠습니까? 얼굴이 하얘지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니까 마음이 귀가 얄팍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말에 너무 많이 귀를 기울이면 안 됩니다. 이들은 종종 옛날 바리새인처럼 자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1장 45절에 보면,

*누가복음 11:46,
46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 도다.
-여기에 어려우심을 사람에게 지우고 라고 할지 지우사, 자나가 오늘 무거운 짐을 쥔 자들하고 똑같은 단어에요. 우리는. 그런데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의 조언, 특별히 돈을 쉽게 벌게 해주겠다는 전문가들의 말에 넘어가선 안 됩니다. 이들의 마을에 넘어가서 숙식을 하고, 비트코인을 하고 영 끌, 아파트를 샀다가 재산을 탕진하고 빚더미 짐에 달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의 욕망을 호소하면서 결국은 자신의 명예와 도를 추구하는 소위 세상에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 인간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세상의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는 걸까요? 인간은 다 풍요와 만물을 생성하기 때문에 풍요롭게 해주겠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망원의 우상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우리에게 큰 짐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끝내는 많은 현대인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가 이제 지난 11월 28일에 은퇴 예배를 드리고 이제 내년 2월에는 은퇴를 하게 되는데, 어떻게 제 생년월일을 알아가지고 유튜브나 아니면 이렇게 광고가 계속 와요. 은퇴 현금을 어떻게 관리해야 되는지 그거를 알아보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퇴직금을 한꺼번에 받아라. 아니다. 나누어서 어디다가 뭐라 제가 몇 개를 봤는데요. 전문가들이랑 말이 다 달라요. 다 달라, 더 이상 안 듣기로 했어요. 이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승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한 그 말씀을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순진하고 순박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쉬게 하실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에게 그를 돕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의 어깨에서 짐을 내려주고 목에서 멍에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고 가는 짐을 계속 질 수 있도록 짐을 조금 가볍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방법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전혀 예상치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왜냐하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라 그리하면 너의 영혼이 쉼을 얻으리라.”
-힘을 얻는 방법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 배우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의 멍에를 매라. 라는 것은 이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에게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씀이에요. 따라서 어떤 유대교 교사나 선지자들도 제자들이나 백성에게 내 멍에를 매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매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그야말로 독특하기 그지없는 특이한 초청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따라서 ‘내 멍에를 매라’는 속성은 그 누구도 알거나 가르치지 않았던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들어오라는 주님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초청하는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멍에를 매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14,
14 너희는 잊지 않는 자의 명에를 함께 내지 말라. 의와 율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섞이며,
-그러니까 함께 멍에를 맨다는 것은 함께 살고, 함께 사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의 교제 안으로 초청을 하신 거죠.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면 멍에는 서로 묶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과 함께 사귀는 것을 의미해요. 따라서 주님의 멍에를 매면 주님과 함께하고 주님 곁에 머무르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으로부터 배우게 된다는 것이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영원히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주님과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 문에서
“오 하나님, 내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 나의 인생에는 진정한 휴식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은 창이 하나님의 형상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신성한 삶의 방식으로 살라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 밖에 모르는 인간들에게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초청이야말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무엇을 배우라는 것일까?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왜냐하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너의 영혼이 힘을 얻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한글 성경에 순서를 보니까 알죠? 내게 배우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게 배우라고 하시면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성품은 온유와 겸손인데,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서 오이와 겸손을 배우면 비로소 우리의 영혼이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왜 우리의 영의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그 이유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라고 하면 우리 한글 표현으로 보면은 성격과 태도 따위가 온화하고 부드럽다. 라고 정의되어 있기 때문에 온유하고 그러면 온유라고 그러면 더 따뜻하고 부드러움으로 이해하는데 성경에 온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온유의 인문서라고 불리우는 시편 37편을 보면 성경에서의 온유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전적인 의존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37편을 읽어보면 온유한 자란 오직 이것만을 의지하고 여호와만을 바라보고 여호와만을 소망하면서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선을 행하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물론 온유한 자가 살아남는 세상은 불평하고 희귀할 수밖에 없음을 시편 기자로 인정해요. 그래서 37편 12, 14, 21절에 보면,

*시편 37:12-15,
12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
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려뜨리고, 악인은 꾸고 갚지 않지만 그 길이 형통하고 큰 세력을 유지하고 무성하게 된다. 인정해요. 그러나 시편 기자는 37편 1절부터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편해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쉬게 하지 말라. 라고 권면해요. 왜냐하면 이 악인들의 길이 형통한 것 때문에 분노하고 화를 내고 불평하고 시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들의 형통과 부우는 잠시 있다가 개입을 당하는 풀과 같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온유한 자들은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고 의지하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자들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악인들이 잠시 형통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시기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온유한 자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기에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않으니까 영혼의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고 하시면서 나는 온유하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죠. 그리고는 그렇게 되면, ‘내 영혼이 쉼을 얻게 될 거다.’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영혼의 안식을 누리려면?
-예수님의 마약을 매고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겸손은 우리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렇게 성경적인 겸손을 이해하지 못하고 겸손이라고 그러면 그냥 인식의 문제로만 봅니다. 우리나라 표준 국어 대사전을 보면 겸손이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내세우지 않는 태도, 이것을 온유라고 말해요. 룩맨이라고 하는 이제 영영 사전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자신에 대해 너무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성격, 이게 겸손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 철학이나 세속 문화에서는 겸손을 자기를 낮게 생각하는 인식의 방식을 가리켜요. 자기를 높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이렇게 대할 때 자기를 존중하기보다는 남을 존중하며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는데,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겸손을 이 정도의 인식의 어떤 문제로만 보면 평안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비교해 보면 자신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알고, 하나님 앞에서 악하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고,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면 충분히 겸손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인식만으로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오랜 동안 자신은 하나님 앞에 별것 아닌 존재며 자신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한순간도 설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안식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록에서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 자신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는 인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악한 성적인 나쁜 습관을 오랜 동안 버릴 수가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자기를 낮게 생각하는 인식의 변화만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겸손, 예수님의 겸손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의 겸손일까요? 라고스는 빌립보서 2장 6절과 8절에서 예수님의 겸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6-8,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신데 하나님과 동동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신 거 이거는 인식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자신을 하나님과 원래 본체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는 면에서 인식의 문제에서 겸손한 것도 사실이지만, 실제로 예수님은 거기에 머무신 게 아니라,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과 같이 계셨다는 거죠. 이것이 예수님의 첫 번째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자기의 의지를 꺾고 성도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겸손하셨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두 번째 겸손이라는 거죠. 그러기에 예수님의 겸손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성도에게 복종하는 의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영혼의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 죽기까지 복종하는 전문성이 있어야 되는 건데, 죽기까지 복종하는 이 겸손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죠. 어거스틴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죽음에 이르는 심정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하신 예수님에게서 겸손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본이 아니었다면 이런 불순종이 기쁨에 이르는 길임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겸손은 의지의 문제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깨닫고 비로소 어거스틴은 그의 악한 성적 습관을 버릴 수만 있었고, 비로소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겸손은 이 세상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알지 못하는 기독교만의 신비로운 하늘의 비밀인 거예요.

사실은 우리 목사님이 임직예배 때에 축사를 동영상을 하시면서 리타이어먼트는 이게 바퀴를 다시 갈아 끼우는 정도가 아니라, 리파이어다, 이러면서 저한테 설교를 맡기는 바람에 제가 은퇴 후에 쉬지 못하고 설교 준비하다가 입술이 터졌어요. 그러면서 사실은 몸의 안식을 누리지 못했지만,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를 어거스틴을 통해서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거 아닙니까? 이게 그냥 들으면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이 왜 안식을 못 누리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시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그냥 인식할 뿐이지, 실제로 나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며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걸 이해할 수가 없으니까 기껏해야 겸손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또 어떤 학자들은 겸손이 미덕이냐 그런 건 미덕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속으로는 안 그런데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면서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과연 진정한 미덕일 수 있느냐? 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이야기한다면 이 예수님의 겸손은 미덕중에 미덕이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경륜을 본받지 않고는 진정한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거스틴은 자신의 삶에서 절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내게 기독교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무리 자주 묻는다 해도 나의 대답은 항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목이 곧아가지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목이 곧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우리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여 죽기까지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충분히 겸손한 것 같은데, 진정으로 안식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예수님의 경선을 아직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어거스틴은 가르칩니다.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세상의 겸손이 오히려 교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한 반에 한 반에서 가장 이제 운동 실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람이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운동 신경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기 평가를 하고 있다고 해서 이 사람을 겸손하다고 할 수 없다는 거죠. 아무리 운동 신경이 모자라도 운동 실력을 높이려면 열심히 노력을 해야 되는데, 운동 연습을 게을리 하면서 나는 원래 운동력이 없다. 나는 원래 무능하다. 운동 신경에 있어서는, 라고 인정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기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행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겸손인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였기 때문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흥부와 공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에요. 만약에 나를 어려운 상황 고통 가운데 주님께서 이렇게 밀어 넣으시면 내 뜻을 꺾고, 주님의 뜻에 불복하면서 살아내니까 비천해 할 수도 있는 거고, 때로는 풍부한 가운데 우리를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면 그 풍부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내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면 풍부에 처할 줄도 알게 된다는 거죠.

보통 이렇게 이제 의지가 저는 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요. 내가 이제 아내한테 스트레스를 주면은 당신은 의지가 강하니까 오래 잘하지만 나는 의지가 원래 약하기 때문에 못한다. 이러거든요. 수술이나 약한 경이 자랑하지 않는 이상이라고 이야기 지금 나도 그냥 안 해 가지 집도 쉽게 닦고 그럴 텐데 이해를 할 게 별로 없어요. 다른 사람 예 들면 또 이제 실망하니까 서로 꾸준히 그게 있습니다. 당신은 원래 의지가 제가 원래 의지가 조금 더 강한 건 사실일지 모르지만 의지가 약하다고 뒤로 물러서면 안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뭐예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라고 이렇게 말을 하시면 말씀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꺾고 그래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내가 한번 해보겠다. 라고 자기 의지를 꺾고 주님의 의지에 굴복하여 순종하게 되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거고, 그래서 바울이 내가 약한 데서 강한 욕심이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뭐냐 하면 의지인 거예요. 왜 못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은 그냥 바울이 그냥 어쩌다가 하늘에 던 번개 같은 계시를 받고 한 말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죽기까지 복종했을 때,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 안에서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 라고 고백을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우리 사랑 교회 성도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멍에를 메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독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길은 우리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면 시련과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짐이 가볍다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7절 이하에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17-18,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 환란에 경한 것이라고 할 때 그 경함이 핼라어라는 ‘내 짐은 가벼움이라.’의 가벼움과 같은 답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다가 받아야 하는 환난의 짐은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에요. 환난은 잠시지만 영광은 영원한 것입니다. 지극히 큰 영광에 임하면 환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잠시 동안의 환난이 끝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영원한 영광 민족이 한다면, 그 환난은 가벼울 수밖에 없는 거고, 이에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 성도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십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를 안식으로 초대하는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은, 자기 의지를 꺾고 성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겸손이었음을 기억하고 나를 현재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과 안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남은 생에 여러분과 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멍에를 멘 자로서 그리스도의 평안을 함께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삶의 방식 외에는 알지 못했던 우리를 불러 전혀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 우리를 초대하심에 감사를 올려드려야 한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에게 온유와 겸손을 배우며, 그 말씀에 우리의 뜻을 굴복시켜 죽기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안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기대하며, 믿고 신뢰하며 우리 남은 생애가 주님과 멍에를 메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겸손은, 자기 의지를 꺾고 성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겸손이었음을 기억하고 나를 현재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의 의지를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과 안식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어린아이들에게 복음의 비밀들을 나타내신 그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말씀이 대답이라고 불리운 것은, 그 말씀이 앞에 나타난 우울한 생각들에 대해 아주 위로를 주는 회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생각을 함으로써 원기를 되찾으신다. 그리고 그 생각을 더욱 새롭게 하기 위해 그는 그 사실에 대해 감사를 드리신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 보아도 우리를 낙담케 하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가운데서 커다란 격려를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감사하나이다. 감사는 어둡고 불안한 생각들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며, 그 생각들을 잠재우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찬양의 노래는 의기소침해지는 영혼에 잘 듣는 최상의 강심제이다. 우리가 슬픔과 두려움의 생각들에 대처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해답을 갖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라는 이 말씀에 호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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