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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3월 06일) 제목: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공동체" 말씀: 사도행전 9:19~31 찬양인도: 쉐키나( 오준석 부목사님)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 *사도행전 9:19~31,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고 살아간다면 잘 믿는 자들이 모여 있는 가정과 공동체가 늘 평안함과 든든함으로 서 일 수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각 가정마다 평안함, 다시 말하면 살롬이 가득하다고 느껴지십니까? 여러분이 속한 다락방은 어떻습니까? 든든히 세워져 가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락방을 할 때마다 경험하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말씀은 바울의 회심 직후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또 회심 직후 그 예수님을 만난 그 일생을 통하여서 그의 인생이 바뀐 강력한 이야기가 그다음 이야기 다음에 기록되어 있어서 어쩌면 쉽게 지나치거나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할 본문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몸 된 교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편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비결을 얻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본문의 앞부분을 살펴보면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를 잡아 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그 예수님을 만나고 그 즉시 그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울에게 한 제자를 보내셔서 그의 눈을 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세례까지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를 잡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왔지만, 예수님을 만난 경험 이후에 몸을 회복한 후에는 그 다메섹에서 즉시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사도행전 9:20,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그곳에 있던 유대인들을 무척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으러 예루살렘에서부터 오고 있다. 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은 다메섹에 도착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제자들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무척 놀라고 당혹스러워했습니다. 바울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호칭,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나오는 그 호칭은 결코 쉬운 호칭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호칭은 단순하게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참된 대표자이시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심을 인정하는 표현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존재는 감히 사람과 비교할 수 없거나 연관 지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니까, 이것은 그동안 바울이 배우고 익혔던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나오니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도 당혹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유대인의 반응에도 바울은 더욱 힘을 얻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다메섹 도상에서 다시 말하면 다메섹으로 가던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남을 통해서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그가 확신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서 29절 말씀을 우리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23-29,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멘. 바울은 오랫동안 하나님 앞으로 가려고 하는 유대인의 노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 바울 자신도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난 그 즉시로 자신이 개시될 믿음 때까지 율법에 갇혀 있었다. 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닌 계시된 믿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 라는 사실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자신도 하나님 앞에 양자의 특권을 얻게 되었다. 라는 사실을 예수님을 만나는 그 현장에서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바울로 하여금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죠. 이제는 어느 곳을 가든지, 어떤 환경이든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담대히 말하고 증거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변화된 바울이 적응되지 않아서 당혹해 했던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바울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증거 하는 그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바울의 입을 막고자 죽이기를 계획했고, 바울은 그들을 피해서 밤중에 광주리에 몸을 실어서 성벽을 내어 달려 도망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의 강력한 위협에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도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도 여전히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변론하는 가운데에 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죽음의 위협이 있었지만, 그는 곳에서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모두 죽음을 멈추지 않았고, 바울을 예루살렘에서부터 다소로 보내어 그 죽음으로부터 피하게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록을 통하여 이렇게 바울이 핍박 가운데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교회로 하여금 우리 주님을 경외하고 자기 위로로 가득 드리고 있어 제가 더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던 현장에 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 밤낮으로 성문을 지켜서 바울이 어쩔 수 없이 한밤중에 광주리를 타고 도망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있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회심을 믿지 않아 의심하던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또한 그곳에서도 복음을 증거 하다가 죽음의 위협도 당하게 되죠.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오직 게시된 믿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른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그의 열정은 교회들로 하여금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열매를 낳게 했습니다. 우리 함께 31절 말씀을 읽어볼까요? *사도행전 9:31,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정말로 많은 고통과 위협 앞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바울, 그 한 사람을 통하여 그 영향력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모든 지역의 교회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역사가로 나타났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31절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하다 보면 상식적으로 이러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평안하고 든든히 설 수 있는지, 어떻게 주님을 더 경외하고, 성령의 위로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어떻게 평안함과 든든함의 결과를 낳게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 겁니다.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해왔던 문제가 없고 안정되었다. 라는 의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평안했다라고 하는 말, 그때 그 말로는 ‘에이레네’ 라고 하는 의미는 문맥적으로 볼 때 스데반이 순교 이후 시작된 박해가 끝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유대 지도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이러한 정치적인 의미의 평안뿐만 아니라 히브리어에서의 ‘살롬’ 이라고 하는 의미처럼 약속의 땅에서 개인적인 만족감과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구주이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기쁨과 만족감을 모두 말하는 것으로 쓰여 진 것 같습니다. 좀 쉽게 얘기하면 평안하다고 하는 것이 또 든든히 세워져 간다는 것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온전함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평안하고 관계가 잘 되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샬롬이 일어나고 든든해져가는 의미도 담고 있다. 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온전함을 말하고 있으니까 내 삶의 의심과 오해와 핍박과 위험 등 어떠한 어려움이 가득하더라도 평안함을 말할 수 있다. 라는 겁니다. 삶의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정말로 그것이 아프고 힘들어서 너무나 절절 매워지는 그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그 현장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복음이 선포되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 어떤 상황, 어떤 감정 속에서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복음을 증거하며 어려움과 고난, 아픔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곳에 선포된 복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평안하고 든든히 세워져 가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며 아픔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곳에 선포된 복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관계 속에 평안하고 든든히 세워가는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은 어떤 의심과 오해와 위협과 절망에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그리고 그것을 이기는 힘이 있는 줄 믿습니다. 상황이나 환경과 때론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고 더욱 주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의 위로를 받아 누리는 능력이 말씀 속에 있는 줄 확신합니다. 심지어 안 될 것 같아 보이는데 도리어 그 수가 많아지고 부음이 되어 지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가득 넘쳐나는 결과를 낫는 줄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복음을 중심으로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과 다락방과 훈련반 등 모든 신앙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선포되는 말씀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 말씀의 능력은 우리의 가정과 다락방, 훈련반 등 모든 신앙 공동체에 참된 변화와 부흥을 이룰 힘이 있어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말씀이 가진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가 함께 기억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적용을 해볼 수 있을까요?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이 중심이 된 삶을 위해 저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마다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갈 수 있도록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먼저 첫 번째로 우리가 우리의 공동체가 말씀이 중심이 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I. 첫 번째로, 우리가 우리의 공동체가 말씀이 중심이 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복음이 증거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주일 강단에서부터 수요 기도회와 토요일 비전, 새벽 예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배 강단에 참된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된 복음이 증거 됨을 사모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때로는 마음을 흡입하고 찌르고 날카로운 칼에 썩어 문드러진 살이 도려내는 그 아픔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고 사모하며 듣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말씀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를 사모하고 소망해야 될 줄 믿습니다. 함께 말씀을 읽어볼까요? 잠언 8장 17절 말씀입니다. *잠언 8:17, 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아멘 말씀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나 자신이 하나님을 사모하며 간절히 찾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우선순위에 두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 라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것이 말씀이 중심이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살을 도려낸 듯한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배의 자리에 끊임없이 찾아가는 것이 바로 말씀이 중심이 되는 삶입니다. 감사하게도 사랑의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님을 통해서 매주 주일 강단에 예수님은 누구신가 강의 시리즈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요즘 예배를 함께 드리다 보면 예배를 참여하는 성도님들이 말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왜냐하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 평안함과 든든함이 회복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주일 예배를 참여하는 성도님들 중에 아픔이 절망과 낙심과 고통이 없이 앉아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분명히 그들 가운데에 앉아 있는 많은 분들 속에 육체적인 아픔과 감정적인 동요와 삶의 많은 문제들과 염려와 근심과 눈물을 가지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더 굳건해지고 단단해지니까 그 마음속에 참된 회복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매주 선포되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통해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음이 감사하고, 여전히 삶의 문제가 내 안에 켜켜이 쌓여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듣는 그 순간 마음의 평안함과 든든함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고, 주님을 경외하며 성령의 위로를 받게 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주일 말씀을 사모하며 말씀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복음으로 인하여서 세상의 유혹과 시험, 유혹과 도전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힘을 더 얻어 복음을 증거 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세상을 당혹하게 만들어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는 줄 믿습니다. 아직까지도 이런 복음의 현장, 말씀의 현장을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어서 빨리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매주 마다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자 되시며, 예수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이심을 선포되는 그 말씀의 현장에 계속해서 나오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다락방, 여러분 다락방도 말씀 중심이 되어야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의 교회 다락방은요 단순히 교재에 치우친 모임이 아닙니다. 말씀의 주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함께 공유하고 도전하며 변화를 도모하는 자리인 줄 믿습니다. 때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생각과 의식 때문에 서로에게 불편한 마음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말씀 중심보다는 관계 중심으로 다락방을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을 위로해 주고 또한 보듬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변화를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죄인을 어쩔 수 없는 죄인을, 스스로는 도저히 변화될 수 없는 그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복음의 말씀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도전하고, 선포하면서 그것이 그것을 위해서 간절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다락방 자리가 된다면 여러분 그 자리에 복음의 역사가 나타날 줄 확신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통해 아닌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는 다락방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번 주부터 시작되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라는 다락방 교재를 통해서 이번 상반기 다락방 말씀이 우리 가운데 가득가득 녹여지고 그 행하는 모든 다락방마다 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다락방마다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은혜가 있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직까지 다락방에 들어오지 못한 분들이 있다 면은 그 놀라운 말씀의 능력이 가득가득 담아져 있는 다락방으로 속히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 다락방에 참여하셔서 그 다락방을 통해 말씀의 역사를 깊이 경험하시고 그 말씀의 능력을 다시 시작하는 능력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 두 번째로, 우리는 말씀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다가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고 싶어서 야심차게 도전했지만 짧으면 하루 정도 넘기기 쉽지 않고 길어도 몇 년을 지속하여 지속하는 것이 쉽지가 않음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내 삶의 중심으로 세워서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는 삶을 살고는 있지만 그런 삶에 지쳐서 내려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어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나 자신만 봐도 그렇습니다. 다락방을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내려놓는 분들도 계시고요. 주의 말씀을 정말로 현장에서 듣고자 시간이 늦지 않게 다가왔다가도 어느 날은 늦게 말씀만 듣는 그 시간에 겨우겨우 참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른 분을 찾아보지 않고 저를 바라봐도 똑같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의 말씀 큐티를 훈련반이나 이렇게 올리기 위해서 사실은 제가 살기 위해서 말씀을 계속 올렸다가 한 5년 정도 올리다 보니, 이것이 익숙하고 나의 능력이 되는 것 같아 정말로 쉽게 말씀 큐티를 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큐티를 하는 게 너무 힘겨워지는 시간이 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루를 쉬었습니다. 하루가 한 주가 되고, 한 주가 한 달이 되니 한 달이 몇 년이 되더라고요. 익숙해짐이 내 안에 있었고, 습관이 되었다라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내 삶에 온전히 나타내는 것들을 지켜내는 것이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들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사역 반에 선포를 했습니다. 매일 아침 제가 큐티를 올리겠습니다. 그 약속을 오늘만 빼고 계속 지키고 나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 준비하느라고 치열한 삶을 살다 보니 아직 올리지 못했는데 올릴 겁니다. 오늘 저녁에 가서 오늘의 큐티 말씀을 가지고 치열한 씨름의 흔적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무언가를 이루어가고 지켜나가는 것들이 쉽지 않다. 라는 것을 제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하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은 주변을 돌아볼 필요 없이 나 자신만을 봐도 얼마나 부족하고 우리는 말씀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순간을 절절히 느낄 때가 참 많이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서는 어떻습니까? 다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아침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마다 이 영적 전쟁을 언제까지 치러야 하나라면서 힘겨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정 예배를 시작했다가도 어느 순간 가족의 비유를 맞추느라 환경과 상황에 억눌려서 멈춰버리는 경험은 없으신가요? 여러분들의 훈련 반은 어떻습니까? 말씀이 중심이 된 나 자신과 공동체를 만들어 보겠다고 모여서 기도하며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고 있다. 라고 느끼십니까?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지금도 잘 유지하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다락방도 마찬가지겠죠. 대부분 복음이 증거 되고 말씀의 중심의 공동체에 늘 의심과 오해와 위협과 절망과 실망과 낙심이 뒤따릅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가치관과 기준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다른 관점과 기준을 가진 죄인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그 시대에도 그랬는데 하물며 우리의 시대도 피할 수 있을까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을 우리의 삶의 중심으로 온전히 세워야 되는 줄 믿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매주 나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 서면 삶의 많은 문제보다 더 큰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함께 시편 121절 1절에서 2절 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21:1-2,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저와 여러분들이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그 어떤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신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과 공동체 속에서 말씀을 기준 삼는 것을 놓치지 말고 계속해서 말씀을 붙드는 것들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요즘 사육 훈련을 하면서 훈련생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IBS를 어떻게 할 수 있지? 하는 것입니다. IBS를 강의를 마치고 함께하는 훈련생들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해하셨어요? 어떻게 하는지는 알게 됐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그런 표정이었어요.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과정이 없이 말씀 사역자로 설 수 없겠죠. 지금은 비록 서툰 모습이지만 말씀 하나하나를 연구하고 묵상하고 계시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씀과 씨름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를 만나주신다라고 하셨사오니까 간절함으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치열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넉넉히 이길 힘과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훈련뿐만 아니겠죠. 우리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말씀 중심이 되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여러분들의 노력을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작했다가 멈춰버린 가정, 예배, 온 가족이 함께 나누었던 규티 시간, 냉장고 위에 그날의 말씀을 붙여놓았던 수고, 100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가족에서 함께, 가정에서 함께 붙들고 기도하는 그 시간, 불신자 가족들을 위해서 카톡방에 생명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그 애끓는 마음 등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말씀이 중심이 되는 일련의 노력을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시도했다가 멈춘 상황이라면 지금 다시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을 향한 유대인의 공격은 아주 집요했습니다. 어디를 가나 복음을 증거 하는 바울을 향해서 죽음의 위협을 가했던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확신한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메섹의 도상에서 만났던 그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나를 연결 지어진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들을 확신했기에 그는 어떠한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그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 하니 온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님을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가득하여서 성도의 수가 더 많아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절대 포기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바울 같은 사람을 통해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섰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수고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도 말씀 중심의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과 다락방과 훈련반과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힘은 참된 복음이 선포되고 그 복음이 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말씀이 아니라 다른 것을 붙드는 것은 결국 그 공동체의 영적인 능력을 고갈시키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참된 변화를 꿈꿀 수도 없고, 겉치레에 빠져서 공동체를 떠나거나 계속 반복된 연약한 일상을 살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말씀이 중심이 되고 말씀을 기준 삼는 수고를 포기하지 않고 감당하게 된다면 참된 변화를 기대하고 의심을 거두고 오해를 풀어주며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며 인내하는 은혜의 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말씀처럼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이번 상반기 모든 사역 중에 이러한 은혜로 가득한 사랑의 교회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약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가 복음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을 결단하고, 우리의 가정과 다락방, 훈련 반을 비롯한 모든 신앙 공동체가 말씀을 중심으로 기준 삼아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공동체에 참된 변화와 온전한 회복을 위해 먼저 말씀을 사모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서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공동체로서 실천하는 복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유대인들을 굴복시켰다. 유대인들로서는 그리스도인 박해자로 소문난 사울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는 그의 변화된 모습이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갑자기 돌변한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한 후 사울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다. 즉, 사울의 전도는 유대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핍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이 기회를 장차 올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사울의 회심과 그가 복음 전한 일을 증거 했다. 바나바는 관대하고 포용적인 사람이었으나 후에는 마가에 대한 문제로 인해 생긴 바울과의 의견 대립으로 전도 여행 중에 결별하기도 했다.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되는 삶의 기준을 지켜내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우리는 살아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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