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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주후 2020. 7. 1.)

제목: “다른 신은 없습니다”

말씀: 신명기 5:1-7절

설교자: 박상열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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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I. 말씀의 토대가 된 언약.

 

(1)모세는 회중들을 불러 모은다. 그는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였다(1절).

(2) 그는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한다(1절).

(3) 그는 이스라엘이 호렙산에서 맺었던 언약에 의해 스스로를 규제해 나아가야 할 계약에 대하여 그들에게 언급한다. 명령, 또는 계명을 이러한 언약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강림을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살펴볼 수 있다.

 

①이 언약의 대상자들 : "이 언약은 우리와, 아니 시내 산 앞에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부모들이 세운 것이요, 우리를 위해서 처리한 것이다."

 

②이 언약의 선포 : 계약의 공표는 하나님 자신이 하셨으니 이를테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조목조목을 읽어주셨던 것이다(4절). 여호와께서…너희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매.

 

II.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말씀을 전한 모세.

 

③계약의 중계자 :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5절). 여기에서 모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에서 계신 분이다. 그가 우리의 머리 위에 축복의 손을 얹고 계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며 두려움 없이 하나님께 말씀을 올리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와 세우신 언약 ( 5:2, 3 )모세는 시내 산 언약이 그들 조상이 아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현재적인 효력을 가지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새롭게 대해야 하는 것이다.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서 말씀을 전한 모세 ( 5:5 )이스라엘 백성이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현현인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게 됨으로써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규례를 그들에게 전달했는데, 이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바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예표하는 것이다.

 

자신을 계시하시는 여호와 ( 5:6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하나님 여호와로 계시하셨다. 즉 모세가 가져온 십계명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낸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밝히심으로써 십계명의 신적인 권위를 입증하셨던 것이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받아들여서 이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일어내고 이겨내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시름과 아픔을 아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다른 신은 없는 여호와 한 분 밖에 없는 우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이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길 기도하며,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임을 알게 하시며,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행동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하신 참 신이신 것을 우리가 고백하여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를 받기를 바라며, 기록된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는 말씀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 말씀으로 주님께로 돌아가고 회복되는 은혜가 되기를 소원하며, 우리는 다른 신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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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0년 6월 27일)
제목:"믿음의 세대계승(世代繼承), 수선대후(守先待後)"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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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믿음의 축복을 담아서 다음 세대와 이 아이들과 함께 씨름하는 교사들을 축복합시다.
수선대후는 명말 청초(明末 淸初)의 사상가 천췌(1604∼1677)의 말로 선대가 남긴 좋은 전통과 유산을 지키며 후대를 키우고 세우겠다는 뜻이다. 훗날 청나라의 성군 옹정제가 이 말을 편액으로 만들어 맹자의 묘에 바치기도 했다. 오 목사는 이 말처럼 선배들로부터 받은 영적 정신적 혜택을 계승하고, 후배들을 양성해야 할 무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선대가 남긴 좋은 전통과 유산을 지키며 후대를 세우고 키우겠는 뜻이다. 담임 목사님의 책, 통찰과 예견을 보면 수선대후는 어떻게 사랑의 교회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중국 주성에 맹자의 묘가 있다. 그 묘에 청나라 송군 옹정제가 편액(액자)을 내렸는데, 그 안에 글귀가 바로 ‘수선대후’였다. 중국의 정신사의 핵심 중에 핵심은 바로 공자이다. 하지만 그 공자의 사상을 후대로 전하여 계승하지 않았다면 그이 사상은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다음세대로 건널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했기에 전해진 것이며 맹자가 있었기에 지금도 중국 사사을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중국 주성에 있는 이 ‘수선대후’ 이 맹자의 이 편액의 글씨를 담임 목사님이 보시고 목사님 마음 가운데 쑥 들어왔다라고 되어있다. 아마도 그 맹자의 묘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을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과 목사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 글귀가 담임 목사님의 마음에 확 들어온 것은 아마도 우리 사랑의 교회와 한국 교회에 주신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함께 해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믿음과 신앙의 절개가 있다.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들보다 먼저 복음이 들어왔다. 1884젼 첫 선교사는 먼저 알렌 선교사이다. 공관의로 입국되었고, 그보다 20년이 앞 선 1866년에 요동강변에 제너럴 셔먼호를 통하여서 토마스 선교사님을 통해 성경 말씀이 한국 교회인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선대의 말씀 사람은 정말 대단했다. 사경회가 열리면 멀리서 2박 3박4일을 마다하지 않고 산 넘고 물 건너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집을 떠나왔다. 또 한국교회 안에는 부르짖는 기도가 있다. 간난아이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대고 몇 시간이고 기도하는 선대들의 기도, 새벽이면 곤한 잠을 멈추어 깨고 자녀들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 불씨, 금요일 저녁이면 간절히 통성기오의 소리들, 기도하는 함성들이 그것이 바로 우리 선대의 기도였다. 찬양의 뜨거움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할머니의 찬송가를 본 적이 있다. 악보는 없고 글만 있는 찬송가였다. 정확히 음절이 없는 그 찬송가는 목사님의 입만 보고 따라 하는 찬송가였다. 심지어 8절 9절 10절까지 있는 찬송도 보았다. 요즘은 4절도 부르기 어려운데 10절을 불렀다는 것을 생각하니 전율이 흘렀다. 그런데 인도하시는 목사님은 후렴이 끝날 즈음에 목사님이 다시 “처음부터”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 그 10절의 찬송가가 20절이 되고 30절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선대의 믿음과 정신을 다음 세대로 전해야 되는 것이 수선대후의 정신이다. 부흥의 진원지였던 유럽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그 교회가 황페화(荒廢化) 되었는가? 다시 한 번 우리가 새긴다면 다음 세대를 우해 온 마음으로 집중하여 골든타임을 꼭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2020년 주일학교에서는 수선대후라는 주제아래 가정과 교회가 아름답게 연합하여 후대에게도 계승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주제로 잡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달여 동안에 여름 수련회의 대 장정을 시작할 것이다. 성도님들의 관심과 기도가 우리와 다음 세대로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선대의 말씀 사랑과 기도 찬양의 모습을 떠 바치고 있는 핵심중의 핵심을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버지의 신앙이 어떻게 아들이삭에게 계승되고 전수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다. 오늘 우리가 22장 1절에 먼저 보면 ‘그 일 후에’ 라고 시작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21장의 내용을 잠시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 가운데 어려운 문제 두 가지를 해결해 주신 것을 만나게 된다.


1.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는 이삭이다. 이 이삭을 태어나는 것을 이 위기 가운데 탐탁지 않는 눈으로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는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이삭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권리와 권한을 빼앗아 가는 장본이 될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이삭을 부모님이 보지 않을 때에 많이 괴롭힌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많이 놀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라가 그것을 지켜보던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한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이제 집안의 분란이 없어지는 것이며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가 이 문제가 해결 되었다.


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

 또 한 가지는 22장 2절 이후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당시 강국 블레셋의 왕의 방문을 받게 된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되자 그랄 왕 아비멜렉은 그의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과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찾아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제의에 應하고 이제 상호 불가침 조약을 締結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국의 한 왕이 일국의 족장이 和親條約을 맺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 성경을 봅시다.
*창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렇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화친조약을 맺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가문에 입장으로 본다면 이제 가정 안의 문제도 해결되었고, 또 가정 밖에 있는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이제 평안을 누릴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주변을 정리 시켜 주시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두시지 않는 상황 가운데 본질적인 가장 중요한 문제 속으로 아브라함을 초청하신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하신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험에는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었던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이 설교를 통해 그 내용이 무엇이며 다음 세대에 우리가 무엇을 계승할 지를 핵심적인 내용을 찾아보고자 한다. 시험의 내용은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올라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처음 이 성경을 접했을 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 많으시고 사랑의 결정체인 하나님께서 그것도 아브라함이 백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다시 번제로 달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가나안의 문화를 살펴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게 된다. 가나안 땅에는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함과 가나안의 노아의 수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절상태이다. 하나님을 없는 이들은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고 자신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고수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가나안 땅의 모습은 치열한 전투장의 모습이기도 하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타락의 땅이기도 하였다. 이 우상 제단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을 자해하고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는 제사의식이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아이들을 불 가운데에 지나가게 하거나, 혹은 제물을 바치는 인신 제사가 있었다. 바알을 섬기는 우상중에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런 시대적인 관점으로 볼 때,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청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아브라함은 지체함 없이 이삭과 종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했다. 산이 가까이 눈앞에 가까이 왔을 때에 종들을 머물라 하고 이삭과 함께 아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둘이서 또 다른 출발을 하게 된다. 그때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번제 드릴 나무와 불은 준비가 되었는데 이상합니다. 왜 제물이 없는 것인지요?”라고 묻는다. 그 아들의 질문에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아이가 아플 때에 병원에 가서 주사를 여러 번 맞힌 경험이 있다. 작은 주사바늘 하나가 아이의 피부를 뚫고 있는 모습도 지켜보기가 어렵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삭은 백세에 얻은 아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다. 그 아들을 이제 번제로 바쳐야할 상황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삭의 질문을 아마도 回避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질문을 한 번 하겠다. 우리는 결말을 잘 알고 있기에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잘 파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정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 작정이었을까요? 이삭은 죽이고, 각을 뜨고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불태워 올리는 이 번제를 드릴 마음이 있었을까요? 속으로 대답해보자. 있다. 없다. 아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성경을 읽어보고 보자.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오늘 아브라함은 아들과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모두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고 올 것이라고 모두들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5절을 읽으니 조금은 햇갈리기도 할 것이다. 읽어보니 같이 오겠다는 말에 의하면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정답은 없다. 다시 말씀을 진행 후에 하겠다. 이윽고 아브라함과 이식이 제단 앞에 도착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제사를 드릴 준비를 위해서 분주했을 것이다. 이때 이삭의 나이을 살펴보면 보통 학자들은 15-20세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 유대 전승에는 30세가 넘은 이삭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장성한 아들이었고, 아브라함이 나무를 쌓고 이를 주도하는 가운데 마지막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위 나무에 올려놓았을 때에 이삭은 아브라함의 이 일을 피해 도망을 할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다그치고 훈계할 때에 3학년까지는 어머니의 훈계를 잘 듣는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 어머니가 아이들 앞에 꼼짝을 못한다. 때로는 너무 화가 나서 체벌하려면 그 아이가 어머니의 그 손을 붙잡고 오히려 억제한다. 이삭은 최소 15-20-30세까지의 장성한 모습이었다면 멀찌감치 도망가며 아버지를 항하여서 아버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하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이삭은 순종적이었고 결박당한 체 그대로 누워있다. 참으로 이상한 모습이다. 아브라함이 이제 이삭을 잡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아까 질문의 정답을 찾아봅시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찾아봐야 한다.


*히브리서 11:19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은 비장의 마음을 먹고 그를 정말 죽일 작정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마음은 이미 번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 드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장면이 너무나 극적이기에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당신들의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램브란트가 그린 그림이 참 좋아한다. 지금 보는 이 그림을 보아라. 이 그림은 1635년에 그렸다. 이삭에 희생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 보여 지는 부분이 있다. 천사가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고 힘주어 칼을 떨어뜨리게 만든다. 그런데 그 반대의 손을 보면 얼마나 다급했으면 아브라함의 의지를 꺾기 위해 마치 때리려고 하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대답이라고 하는 듯이 아브라함이 쫄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브라함은 당황했다. 아브라함이 당황하는 저 모습은 이미 그 마음 가운데서 이삭을 죽이려는 결연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아브라함의 믿음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그 이삭을 정말로 죽였다. 그런데 그가 이삭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히브리서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히브리서에 나와 있다.


히브리서 11:17~18: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서 자손들을 주실 거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붙잡고 믿었던 것이다. 믿음이란 막연하게 상황이 열릴 것을 기대하거나 혹은 막연하게 잘 될 거라는 희망, 포기하지 않는 어떤 신념, 이런 것들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통해서 함께 살펴볼 수 있는 믿음은 일반적인 기대와 희망, 신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은 신실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태도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다. 왜 그런가? 그의 평생의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늘 질척거리며, 늘 의심하였던 그의 삶과는 정 반대로 늘 신실하게 주신 그 약속을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나타내고, 드러내고, 이루시고,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 우리 이전 선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신실한 약속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신뢰하며,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뢰하며, 그 신뢰하는 믿음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 그것이 우리 믿음의 선대에게 필요한 믿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종중 학생들이 세상 불안한 느낌으로 부모님을 바라본다. 세상 불안한 눈빛으로 목사님을 바라보고 선생님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입으로는 이제 자기가 소망이 없다고 더는 틀린 인생이라고, 누구에게도 소망이 없는 자라고, 자기만 없으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하면서 부모님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비관하는 자신을 흔들리고 두려움의 모습가운데 오히려 확신에 찬 모습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다라는 것을 부모님의 눈빛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오히려 부모님이 더 그것을 보고 떨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을 모르기에 불안해하는 것이다. 코로나의 사태가 다가올 때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코로나 뿐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녀들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녀의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에? 우리 자녀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아니다. 그런 것 보다. 이 자녀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자녀를 끝까지 약속의 자녀로 키워주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과 현실이 조금은 불안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향하여서 우리의 눈을 고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확신에 찬 눈빛으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야” 하나님이 너를 부르셨고, 너를 세상 가운데 보내시고, 부르시고 널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표현 하고 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사지로 이삭이 비록 내 몰릴지라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겠지만 하나님은 어떤 상황도 해결하실 수 있는 그 믿음만을 붙잡고 아브라함은 나아갔던 것이다. 눈을 질금 감고 아브라함은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꽂으려는 순간 ”아브라함아!“ 급하게 멈추시고 이삭의 생명을 구하셨다. 나는 너의 아들이삭을 바치는 것이 기뻐하는, 인신제물을 바치는 여러 신과 같지 않다. 나는 그런 이방신이 아니다, 나는 비인격적인 이방신이 아니라고 하신다. 내가 너와 화평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은 내가 준비하게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길에서만 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준비하심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탈락, 실패되지 아니하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여호와 이레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 떨어져도 침묵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어쩌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거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 언어를 통하여서 우리가 붙잡아야할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수선대후, 우리가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을 때 상황 가운데 열어줄 것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너를 감당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너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원형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이 우리에게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자녀의 신앙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선대인 우리는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다음 세대를 위해 먼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붙자고 있는가를 점검해봐야 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20년 여름학교는 단순히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수선대후는 우리 아이들만이 아닌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께 달려 나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본 것이다. 계속되어지는 스가랴를 통해서 회복되고, 재건, 그것이 하나님이 온전하게 주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믿음이 되고 이 시간이 선대의 신앙과 후대의 순종이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다시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사랑의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서 나아가 한국과 나아가 세계 가운데로 하나님의 부흥이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는 기회로 그 놀라운 날개짓과 초석이 놓일 수 있는 여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후 예배.
 오늘 주일 학교 축복 송에 감동했다. 대포를 쏘고 시작하고 축하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보니 이 아이들을 보니,,,성도는 신앙 따라서 신앙 지켰네를 생각하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를 생각했다. 워쉽 댄스를 할 때도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환난과 팹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오늘 설교 소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듯이 우리 아이들 이 시대의 옷을 입고, 또 시대에 앞서서 선도를 하지만, 신앙의 본질 헌신과 충성, 영적 전쟁, 겸손, 깨어짐, 고난, 자기 죽음, 십자가, 이런 어떻게 믿음으로 가르칠 것인가? 복음의 순수성에 사랑 의교회가 승리하길 바란다. 왕성교회에서 코로나가 나타나 마음이 짐이 컸다. 우리가 철저히 지켜서 방역을 지키고 이 마음을 가지고 주의 전을 지키고 교회를 죽도록 충성하겠네를 믿고 지켜야 한다. 어려운 교회들이 많은 것도 마음이 아프다. 승리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다. 이 것 외에는 없다. 기도는 타종교도 한다. 우리의 기도의 차이는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는 것이다.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Niothing이고 헛것이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사랑의 교회는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어 기도를 잘 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누가 뭐라해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생각하여 이 신앙 지켜 기쁨이 충만했듯이 그래서 이 여름을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쉽지 않다. 멀리서도 교회를 온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안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사명으로 순교적인 정신으로 모두가 조심하자.


♣요약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준비하신 번제물은 숫양으로 하고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친히 숫양을 준비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준비하실 것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순종하여 큰 시험에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이 임한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들도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인내로 승리하여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수선대후인 믿음의 다음 세대들과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믿고 붙잡고 나아갈 때에 오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다음 세대는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오니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주심으로 어린양을 준비하여 주시고 그 어린양을 통하여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줄로 믿기에 그 아름다움 만남과 기쁨의 회복이 모든 성도와 우리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가슴마다 새겨지기를 원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준비하심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탈락, 실패되지 아니하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여호와 이레인 것이다.
선대의 신앙과 후대의 순종이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다시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사랑의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서 나아가 한국과 나아가 세계 가운데로 하나님의 부흥이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는 기회로 그 놀라운 날개 짓과 초석이 놓일 수 있는 여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쳤다기보다는 철저한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임을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세 번이나 나온다(하늘의 소리1,11,15,). 이로 미루어보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게 된 것은 그의 믿음이 좋아서나 당시 고대근동의 인본주의적 인신제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본문을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400년 후 모세의 제도(레1:1-9)와 맥을 같이하면서 또한 2천년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요19:17,18)과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 직결되는 예표(豫表)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제물은 흠 없는 어린양이어야 한다는 점, 제물은 자발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물은 희생되어 그 피가 뿌려져야 된다는 점 등이다(히9: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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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0. 6. 24일)

제목:''아버지와 아들''
말씀:누가복음 15:11-20절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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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본문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는 '복음중의 복음이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당시 유대사회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향한 원망에 대한 대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예수께서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러 그에게 나아옴을 용납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 사람(예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까지 함께 먹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5장 11절에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하였다. 여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그리고 '두 아들'은 크게 나누면 '유대인과 이방인', 혹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죄인들'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 중에 '그 둘째'(아들)에 대한 주님의 비유를 생각해 본다.


Ⅰ. 그 둘째는 자율 방종하는 탕자였다.


1) 그 둘째는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였다. 12절에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청하였다. 여기 '내게 주소서'라는 말 은 청원이 아니고 일종의 명령적 어투의 강요를 의미한다. 그는 구약 신명기 21장 17절에서 명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아버지의 재산 중 2/3는 장자의 몫이고, 1/3은 차자들의 몫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마음껏 자유하고, 독립하고, 자주하며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반역적 어투로 아버지께 감히 강요를 하였다. 누가복음 15장 12절 하반 절에 보면 이에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의 몫을 떼면 나머지는 자연히 맏아들의 것이었다.


2) 그 둘째는 먼 나라로 떠났다고 하였다.
눅 15: 13절에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고 했다. '재산을 다 모았다'고 했다. 여기 '다'는 '무엇이든지'를 의미하며,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다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 나라(distant country)! 그곳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상거가 먼 곳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을 등진 죄인들의 거처는 언제 어디서나 먼 나라이다. 영적으로 애굽이라고도 하고, 소돔이라고도 하고, 바벨이라고도 하는 이 세상은 실로 하나님 편에서 먼 나라들이다.
하나님의 집 교회가 바로 자기 옆에 있지만 사탄의 지배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하나님 떠난 인생(죄인)들은 실로 멀고도 먼 나라입니다. 암흑의 권세가 주장하는 이 세상 나라입니다.


3) 그 둘째는 허랑방탕했다.
눅 15: 13절 하반절에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라고 했다.
여기 '허랑방탕'은 어떤 기준의 한계를 넘어서 버린 낭비생활을 뜻한다. 나중에 집에 있던 큰아들은 그 둘째의 허랑방탕을 설명하기를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눅 15:30)이라고 그 동생의 죄를 지적했다. 이는 하나님 떠난 인생의 영적, 육적 타락의 생활을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유한 지위와 신분과 달란트들을 모조리 사탄에게 빼앗겨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야말로 그 둘째는 '탕자'하였다.


4) 그 둘째는 기생(寄生)하는 종이 되고 말았다.
누가복음 15장 14절에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라고 했다.
다 없이한 후」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설상가상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결국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더 가난하고, 더 어렵게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남에게 붙어살아야만 하는 기생(寄生)하는 인생의 걸음을 걷게 되었다. 누가복음 15장 15절에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도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갔다는 말이다. 사람의 어떤 필요에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말았다. '붙어산다'는 말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기생하는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돼지에게 붙어사는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가복음 15장 15절 하반 절부터 16절에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쥐엄열매'는 돼지의 사료이다. 결코 사람의 식료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주는 자가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실로 그 둘째는 육체의 마지막을 만나는 저주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결코 인생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복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그 둘째!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절망과 싸움을 하는 탕자의 모습이다. 그 둘째! 그는 아버지(하나님)를 떠나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고', 결국 육체의 상징인 돼지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Ⅱ. 그 둘째에게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말씀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키다'라는 말은 '자기 자신에 와서 보니'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게 '내 아버지'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8절에 보면 '아버지'란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 20절에는 '아버지'란 말이 두 번 나온다.


1) 「내 아버지」라고 했다.
누가복음 15장 17절 상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이라고 하며, 결정적인 부자관계(父子關係)를 뜻한다.


2) 양식이 풍족한 품꾼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아버지라고 하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하반 절에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 고로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였다.


3) 그 아버지는 탕자의 소망이다.
누가복음 15장 18-20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곧 탕자의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부요한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는 탕자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힘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 아들의 모든 재활의 힘이요 용기요 소망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둘째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였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실로 위대한 회개와 재기와 재생의 힘이 아버지였다.
4) 선수적(先手的) 사랑의 아버지였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선수적(先手的)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
①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먼저 보고 마중을 나갔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떠나 버린 '그 둘째를 잊지 않고 늘 고대하며 기다린 사랑의 표'이다.


② 측은히 여겼다. 이는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 준다. 아버지의 눈에는 자식의 죄와 죄로 인해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고 오직 '그 둘째만', 자식만 보인 결과이다.


③ 달려갔다. 바로 사랑은 여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④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했다. 이것은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 둘째를 향한 아버지의 선수적 사랑(initiative love)이다.
저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과 그 아버지 야곱이 30년 세월 후에 만났을 때, 그 부자(父子)도 이렇게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5) 온전한 회복의 아버지였다.
돌아와도 겸손하게 성령 충만으로 돌아가야 한다. 큰아들은 욕심을 내지만 나중에 받을 상급보다는 지금 현재 누리지 못하는 것에 불만하고 있다. 예수님께 찾아온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습이다. 아버지는 문밖에 큰 아들을 향해 위로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폼페이의 웅장함이 지진으로 어마어마한 폼페이가 묻힌다. 폼페이를 후에 발굴하고 보니 발굴자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보초병이었다. 무기를 손에 들고 있다. 그림의 설명을 보라. “하늘에서 화산대와 불이 눈송이처럼 품페이 성 안에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살기 위해 성문 밖으로 밀려 나가기에 온통 아수라장이 돼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성문을 지키는 군인 한 사람이 성문 곁에 서서 전혀 동요 없이 보초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보초 임무를 완수하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제목이 '충성'이다. 우리는 한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내가 감당할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그 충성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주님을 찾는 자가 되어라. 주님께로 돌아오는 은혜가 있기를 원한다.




♧ 요약
예수님이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자신의 분깃을 받아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하게 살며 재산을 낭비합니다. 쥐엄열매조차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게 되자 그는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며 큰 잔치를 베풉니다.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 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 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 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내 몫을 달라 하며 먼 타국으로 떠나려는 죽어 마땅한 패역한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음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돌이켜 돌아올 수 있게 인도하심에 감사한다. 아버지 품 안에서 내 것을 찾기 위해 어쩌면 위장된 성실, 위장된 순종을 하고 있는 큰 아들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면 이 또한 스스로 돌이켜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돌아올 때도 제대로 돌아와야 한다. 겸손하고 완벽하게 회개하여 주님 앞에 회복되어 온전한 자세로 충성 되이 바로 서야 한다.그 날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받은 때까지 내 것을 챙기지 않고 우직하고 충성스런 사명을 다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내가 회개와 회복을 위해 속히 제자리로 돌아와 보초병처럼 충성하는 자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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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 6. 21)
제목: ''소망의 포로들''
말씀: (스가랴 1:3, 4:10, 9:12)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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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면 회복 된다II. 오늘 311명 학습 입교 세례식을 하게 됨이 기적이다. 세례식을 통하여 ‘나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제자이다’, ‘나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공교회의 충성된 성도이다’, ‘나는 다른 사람까지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전파자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이 세레식을 거행할 때 하나님은 이 자리를 복주시고 새롭게 하실 것을 믿는다. 3절이 중요하다. 돌아오라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 ‘슈브’이다. 주님이 율법으로 돌아온다든지 아니면 과거의 전통으로 돌아 온다든 지가 아니고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하셨다. 주님이 아닌 어떤 것도 돌아가는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돌아오라는 말씀은 스가랴 전체의 첫 예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 첫 예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며 만군의 여호와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시며, 권세자이시다. 만군의 여호와는 자명하고 존귀한 것이다. 왜 중요하냐면 이 내용이 뒤에 나오는 모든 구절의 기본이 된다. 우리의 삶의 목표나 우리의 삶의 모든 것들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에 보면 모든 하늘의 주관자이시다. 장엄과 존귀하시다. 그러니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우리같이 부족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날마다 확인하고 꿈꾸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다. 오늘은 이 예배에 온 성도는 잘 이해하리라 본다.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到來가 임하는 것이다. 개인, 가정,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임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메이커의 말처럼 영역 주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모든 삶과 인생의 부족한 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다. 우리 모든 성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며 영역 주권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표에 맡기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원한다면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핵심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마가복음 1:15절에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구약과의 매칭이다 신약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내가 너희를 사용하겠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소중하기에 이 말씀을 받아 표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은 강력하고도 예리한 요청인 동시에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다. 우리가 돌아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돌아감은 하나님의 도래는 같은 것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무슨 역사인가? 스가랴가 돌아가야 한다는 이 말씀을 한 것은 유대나라가 예후들(유다)은 작은 지방이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일 그곳에 일어나니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겠는가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선다면 인생의 대 반전이다. 스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스가랴와 학개. 말라기가 비슷한 말로 기록했다. 마태와 마가가 공관복음인 것처럼, 스가랴와 학개가 공시적인 예언서이다. 이런 내용들이 다 서로 연결된다. 학개 2:22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驚天動地)이다. 이렇게 한 번 뒤집어지고 반전되기를 바란다. 그럴려면 무슨 뜻인가? 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 예후드라는 작은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님나라의 작은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고 새 창조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경탄할만한 사건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공동체와 세상에 침투해 들어온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여기에 우리에게 말씀의 권세가 있기를 원한다. 우리가 제대로 깨닫고 뒤집어지면 네이버나 구굴보다 영적으로 더 영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약한 자들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은 그냥 돌아오라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돌아오라고 하신다. 그 당시 예후드 공동체는 성전을 재건하는데 16년이나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절망하고 지치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오면 하나님은 돕겠다고 하셨다. 신원의 날이 있을 것이라 하시며, 원통함을 갚아주신다고 하셨는데 16년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개인적인 일도 정말 신원의 날을 주시길 원할 때가 있다. 그동안 포로생활에 나름대로 신앙을 지켜서 돌아와 남은 자들이 되었는데, 어떻게 주님이 이렇게 박대하시냐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우리는 이렇게 초라하냐고 묻고 있다. 이것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제대로 성취되기 않고 더딘 것처럼 보이자 포로기에 공동체는 무기력과 좌절감에 맞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를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판벽(板壁)한 집이나 짓고 현실에 만족하고 살고 싶어 했다. 소확행이었다. 그들이 무실론 자가 된 것은 아니다. 문제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 나라의 큰 비전과 소망이 사라져서 현실에 안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만군의 하나님, 온 우주의 권세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시게 되었다. 결코 소망을 포기 말고 돌아오라고 하신다.


스 9:12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사로 잡혔있어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소망의 포로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1만군의 여호와, 2여호와의 날, 3우리는 소망의 포로이다.


*소망의 포로가 무엇인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심지어 13절에 하나님 나라의 확실한 화살과 확실한 활이라고 한다. 소망의 포로는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로잡힐 것이 소망의 포로인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는 통치를 받는 것이 소망의 포로이다. 나는 예수님만으로 참 만족을 누리네~~ 나는 소망의 포로자입니다. 우리는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적 통일을 원하고 기도한다. 그래서 소망의 포로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의 포로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스 9:12절에 보면 돌아올 때 하나님은 갑절이나 갚아준다고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기를 바란다. 갑절로 갚아주신다. 갑절이라는 말은 *슈브(히브리어):돌아오라는 말, *미쉬네(히브리어): 갑절로 갚다이다. 주님은 돌아오면 갑절로 갚으신다는 것이며, 돌아오면 갑절로 갚아서 돌려보낸다는 뜻이다. 완전한 복귀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게 엄청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주셔서 말씀의 화살과 말씀의 능력을 주시길 바란다. 이사야 61장7절: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면 모든 수치가 물러갈 것을 믿는다. 우리 성도들이 배가 얻기를 바라며 즐거움과 능력이 회복되길 바란다. 돌아온다는 것은 갚아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승리가 된다.
유즌 피터슨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부족한 것은 신앙인으로 거룩한 상상력의 부족이다’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이 되어 승리가 될 것이라 믿는다. 모두가 다 상상력을 회복하여 소망의 포로가 되어 주님이 주실 역사를 기다리며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스 9:13절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우리 가족과 자녀가 이 소망의 포로가 되길 바란다. 초청 받은 자였지만 그들은 페르시아 통치를 받는 식민지의 사람들이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사회적으로는 포로로 끌려간 자였다. 사마리아 사라들로 인해 심신이 지친 자였고, 영적으로 메말랐다. 왕도 없고 나라도 없고 예배드릴 성전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초청장을 보내주시며 시대를 반전시켜 주시겠다며 갑절로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갑절로 갚아주실 것을 믿는다.
♧ 요약
우리 모든 성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到來이며 영역 주권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표에 맡기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원한다면 그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핵심이다. 돌아오면 갑절로 갚으신다는 것이며, 돌아오면 갑절로 갚아서 돌려보낸다는 뜻이다. 완전한 복귀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게 엄청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말씀의 능력을 주셔서 말씀의 화살과 말씀의 능력을 주시길 바란다. 이는 포로 생활 중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약속을 바라보며 기다린 자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방의 약속이란 아직 바벨론에 남아 있는 유다 백성을 구원할 것과,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죄인들을 구속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배가 얻기를 바라며 즐거움과 능력이 회복되길 바란다. 돌아온다는 것은 갚아준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승리가 된다.


♣ 느낀 점.
세례식에 오늘 말씀을 세례자와 우리에게 잘 맞게 해주신 것 같다. 왜냐하면 코로나로 침체기에 지금 우리는 더 깊이있게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려면 이 말씀을 받아서 주님과 더 친밀하여 예배하고 찬앙을 드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례자들의 간증 문이 참으로 눈물겨웠고, 그들은 절대로 주님을 멀리하지 않고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목사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서 이해하고 실천하는 자가 될 것 같다. 그들은 소망의 포로가 되리라 믿는다. 주님께 돌아와 절대적인 진리를 믿어서 주님 안에서 능력을 받아 주님이 돌아오면 회복되게 해주시고 갑절로 갚아주시니 우리는 소망의 포로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주님의 지상 명령을 이루어가기를 나와 그들이 함께 하여 주님께 아름답고 거룩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한다.            
☆ ☆☆  

세상에는 눈물뿐이고 고통만 닥쳐와도
내 심령은 예수님으로 기쁜 찬송 부르네
나는 예수님만으로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한숨 쉬는 불행이 변해 기쁜 찬송 부르니
괴로움을 주던 환경이 천국으로 변했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금은보화 다 준다 해도 예수님만 못하며
명예 지위 훌륭한 대도 주님만은 못하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속지 마라 세상 허영에 마음 뺏기지 마라
세상 것은 일장의 춘몽 물거품과 같도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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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 5. 3.)
제목: “평강
말씀: (요한복음 20:19-26)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코로나 극복시리즈11

 
인터미션 예배 아름다운 동산 찬양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을 줄 믿는다. 이 자리가 아름다운 동산, 평화의 동산, 예배의 동산의 자리임에 확신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요연하고도 낮은 피조물 인생이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건강하게 나와 주님을 찬양과 예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특권이요, 크신 은혜요, 목이 메일 정도로 감사하다.
 
오늘은 평강에 대해서이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적 불안을 많이 호소한다. 오죽하면 코로나 불루’(blue)라는 말일 생길 정도이다. 코로나 불루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일어난 사회적 현상으로 우울증이나 심리적 불안을 의미한다. 두 달 전에 비하면 엄청 줄었고, 국내 확진 어제는 확진 자가 O이었고 그래서 토비새에 그것을 기념하여 동그란 도넛을 나누어 주었다. 확진자 수가 줄면 코로나 두려움이나 인생의 두려움도 실제로 두려움도 줄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런 코로나 사태가 없고 모든 것들이 우리들이 원하는 대로 순조롭게 되어져 간다면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가? 다 잘 되면 평안을 늘 누릴 수 있는가? 우리가 평안한 지, 불안한 지를 점검할 수 있는 미터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떻게 자고 어떻게 깰 것인가가 점검지가 될 수 있다. 눕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0.1.(시편35절에 보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 , 시편 4: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그러나 누워서 평안하게 자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또 평안이 쉬기 위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야외를 갔다. 어떤 쉼의 장소를 찾는 것과 실제로 쉰다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환경적으로 아무리 비싸고 좋은 침대에 누웠더라도 불안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면 그것은 평안한 것이 아니다. 쉬기 위하여 바캉스, 홈캉스를 누려도 참된 평안함이 없다면 뭔가 불안한 것이다. 내가 늘 기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 성도가 단잠을 자는 것이다
0.2.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자가 발전적인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다.
. 이 말씀의 평강은 세상의 평안이라는 말과 비슷하지만 신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자가 발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평강은 위로부터 주셔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평강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단어이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듯이 평강도 스스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심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듯이 평강도 위로부터 부어주셔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 단어에 속할 것이다. 의심, 실패, 두려움, n원한, 부끄러움과 수치, 고민 후회 비애, 미래에 대한 염려, 좌절 억울함, 누구에게 부당하게 대우를 받거나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우리의 지위나 소유가 침해받거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염려, 이런 것들은 이 인생길에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고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위에서부터 부어주시는 평강은 삶의 붙임, 삶의 인생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평강이요,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늘 평강이다. 정리하면,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참된 평강은 하나님께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믿어야 한다. 오늘 안아주심 본당에서 예배드리는 분들에게 참된 평안이 넘치기를 바란다. 본문에 예수님은 3번이나 선포하신다. "중요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3번이나 강조하신 것이다.
요한복음20:19, “너희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20:2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20:26,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넉넉한 자원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평강이 중요하니 3번이나 예수님이 강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제자들에게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두려워해서이다(20:19).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했다. 같은 상황인데 - 누가복음 24:38-“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그래서 먼저 생각할 것은 두려움 많은 세상이다. 주님이 3번이나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I. 두려움 많은 세상
첫째, - 정치적 불안 때문에,
둘째,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셋째, 내적 불안 때문에.
 
첫째, - 정치적 불안 때문에, 예측으로 불안해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할 것이라는 정치적 예측 때문에 불안하고 제자들의 마음이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문을 꼭꼭 닫고 있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만 하더라도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하면서 환영 일색이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이 기세 등등 했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후에 군중들에 의하여 인민재판 같은 무법의 시대가 되었을 것이다. 인민재판의 증거는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다. 제자들이 이런 이유로 두려움에 떨었다. 그것을 당할 까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시간은 저녁이었고 사람들이 저녁에 불안을 더 느낀다. 우리 교회는 서초역에 붙어 있고 지하철에서 10미터 상에 있다. 대법원은 가까이에 있다. 대법원은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고, 우리 교회는 죄의 용서를 받는 곳이다. 그러니까 죄의 대가는 두려움의 장소이고, 우리교회는 평강의 장소이다. 그러니까 두려움과 평강이 공존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절묘할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기가막히다는 절묘함을 느꼈다. 어떤 장로님이 우리 교회분이 아니시다. 중요한 판결을 두고 법원에 갔다가 우리교회 십자가를 보고 지나가다 내려와서 울면서 기도하고 주님 앞에 통곡하고 매달렸더니, 하나님께서 놀랍게 판결을 내려 주시고 놀랍게 평안을 주시고, 해결해 주셨다고 한다. 그 감사를 담임 목사님께 표현했다. 꽃다발도 보내왔다. 갈 때는 두려웠으나 우리 본당에서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니까 무슨 판결이 내려도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갔다는 것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 안아주심의 본당은 정치적인 불안이 있어도 평강의 장소가 된다는 것을 믿기를 바란다.
 
둘째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두려워했다. 왜냐면 인생을 걸고 따라간 제자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없어지니까 갑자가 불안했던 것이다.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할지가 눈앞이 캄캄했다. 제자들도 자기들도 못 박을 거라고 두려웠던 것이다.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삶에 리듬이 깨어졌다. 심지어 몸에 리듬이 깨어진 것이다. 하루에 세끼씩 먹어서 운동을 안 하니까 확~ ~(살이 쪘다)가 되었다는 것이다. 몸의 균형이 깨어지니까 마음의 균형까지 깨지고, 관계리듬, 신앙의 리듬, 신뢰, 미래에 대한 계획도, 깨어진 것이다.
 
셋째 내적 불안 때문에
내적 불안 때문에 두려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십자가 앞에서 도망가 버리고 그리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 때문에 수치와 부끄러워서 베드로 같은 경우는 정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한 행동 때문에 죄책감 때문에 불안했고, 배신에 대한 상처이다. 오늘 이 시대도 비슷하다. 정치적으로 어렵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고 내적으로 한국 사회가 두려움의 바다에 빠져버렸다. 전 세계가 육체의 질고와 인생의 경쟁구도와 전염병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2.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박사는 "우리는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안개 자욱한 잿빛 바다 위를 떠돌고 있는 존재이며, 이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확실성의 섬에 찾아가서 그곳에 정착하여 해답을 얻기를 원하고 있다... 잿빛 바다를 떠돌며 확실성의 섬을 찾다가 실패한 우리는 이제 믿음의 섬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철학적이고 세속적 인본주의자들이 그들의 신념을 통하여 현대인들의 불안증을 해결해 보려고 노력을 했으나 해답을 못 찾았다. 따라서 잿빛 바다를 떠돌며 확실성의 섬에서 찾다가 실패한 우리는 이제 믿음의 섬에 정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학자들은 정말 쉬운 말을 어렵게 이야기 한다. 그냥 주님으로부터 평강을 주시면 되는데, 인간이 아무리 학문적으로 철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불만을 해결할 불안, 어려움, 심리적 확실한 해결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섬에 정착할 때야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평강의 은혜가 있을 때에만 인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세상의 학문이나 철학이나 심지어 의학적 치료의 약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믿음의 닻을 내리므로 해결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3. 평강의 유효기간을 확장시켜야 한다.
이 평강의 유효기간이 있다. 평강의 유효기간은 7일 인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평강의 유효기간이 7일이 아니라 평생을 가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제대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현장예배가 평강의 유효기간을 확장 시켜서 평생 시종일관하는 평강을 누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문제가 하나 있다. 도마 같은 현실이다. 회의와 의심이다.
II. 도마 같은 현실.
도마의 의심/, 될까?이다.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제일 평강을 누려야 했던 제자 도마가 환경적으로 평강을 누리지 못했다. 이유는 딱 하나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다.
1. 요한복음20:24,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함께 있지 아니해서이다. 아웃어브사이드 아웃어브마인드(Out of side, out of mind) 이다. 우리가 안보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는가! 현장에 있지 않아서 도마가 없었던 것처럼, 은혜 받는 현장에 빠지면 평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은혜의 현장에 있지 않아 고통의 일주일을 보냈다. 평강이 다 날아갔다. 그 불안의 표현이
 
2. 요한복음20:25,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여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니라
도마는 증거를 넣어 보지 못하면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냉소적인 비판자였다. 평강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들으셨으면 민망하셨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은혜 받을 자리, 주님의 임재의 자리에 없으면 의심과 불안이 가중이 된다. 대표적으로 중직자가 특새벽 예배를 자주 빠지면 평안하겠는가? 계속 빠진다 합시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는 짐이 있는 것이다. 그 짐 때문에 수많은 아픔과 짐과 회의가 생길 수가 있다. 만약에 2~3년 빠지고 내 영혼 평안해 ~ 할 수 없다. 현장예배 두세 달 빠지면 그것은 안 된다. 공동체 주시는 은혜의 영광이 있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은혜의 자리에 없으면 평안이 없는 것이다. 의심과 불안이 가중되니 그래서 영적 예배가 중요하다. 다음 주부터는 예배가 다 되니 문제가 없으니 본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있어야 할 다락방현장, 훈련의 현장, 있어야할 가정예배의 현장에서 의심을 날려버리길 바란다. 주님은 이 도마를 그렇다고 해서 꾸중하거나 뭐라고 하시지 않으신다. 다시 8일 뒤에 감사하게도 직접 만져보라고 하신다.
3. 요한복음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도마가 만지는 그 순간 하늘부터서 놀라운 평강이 임했다. 현장예배가 평강이 임할 것이다. 도마의 평강이 임하는 순간 신구약 중에서 최고의 고백 중에 하나인 도마가 주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4. 요한복음 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을 나의 주 나의 주로 진실 되게 순간순간 고백할 때마다 평강을 부어주시게 된다.
 
III. 평강을 선포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직도 도마처럼 의심의 안개를 걷어내지 못한다면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서 어떻게 평강의 언덕에 오를 수가 있겠는가?’를 생각한다면, 먼저 도마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통하여 평강을 얻기를 바란다. 축약하면 모든 평강은 주님께로부터 온다. 그럴 때에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는 한 우리는 두려움이 없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면 다른 것은 두렵지 않다. 반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두려운 것이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잘나든 못나든 아무 상관이 없이 그 얼굴에 하나님 주시는 평강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 앞장서 일하는 우리 성도들의 평강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평강의 사도, 사신, 대사가 되어야 한다. 매 일주일 마다 새 힘을 주시니 설교를 한다. 그래서 말씀을 나눈다. ‘나의 주, 나의 주예수님 때문에 평강이 온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바울 사도가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딱 맞는 구절 하나를 주셨다.
 
1.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평강의 주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길 원하노라이다. 평강의 주께서 주시는 것은 무슨 뜻이다.
2. 구약의 평강평강을 대표하는 단어가
1) 샬롬(Shalm)’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적인 축복이며 고귀한 선물이다. 샬롬은 위로부터 부어주는 단어이다. 그래서 샬롬은 인간세계에 없는 것이다. 위로부터 부어주는 단어이다. 이 샬롬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고귀한 축복이다. 이 샬롬은 커버하지 못하는 인간의 영역이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 가족간의 관계, 직장인과 관계, 나라, 자연, 영혼 육체, 감정 간의 관계, 모든 영역에서 커버한다. 이 자리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나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샬롬이 위로부터 임하면 다 켜버가 된다. 영이 임하면 다 해결된다. 한국어로 번역하기 힘든 단어이다.
 
닥터윅스빈 비스트 유 - ‘샬롬라켐’,,, 속으로는 영어를 히브리어로 하니 샬롬라켐이 어려울 때 자주하니까 자주외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생겨서 히브리어를 열심히 하기위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복습을 했더니 포텐셜 히브리어 학자(잠재적 히브리어작가) = 그 능력을 주심을 잊을 수가 없다. 뜻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샬롬):하늘로부터 부어 주신다. 수많은 인생의 문제가 정리가 될 것이다.
2) 우리가 함께 모일 때마다 샬롬라켐의 은혜를 받아라.
속으로 계속 믿지 않는 남편에게 매일 아침마다 샬롬라켐!!!!!! 자주 해보라~
 
가정예배에도 그렇게 해라, 라켐은 투유로서 복수의 단어이다.
 
2. 신약의 평강
1) 샬롬에 대구는 신약의 에이레네(Eirene),는 동사 에이로에서 나온 단어이다. 헬라어로 첨여하다, 연결되다, 영어로 Join 의 뜻이다. 모든 평강은 누구에게 연결 되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조인(join) 된 것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목 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조인 된 것이다.
2)예수님과 접붙여 있으면 자동적으로 평강결과가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평강의 은혜가 있으면 자동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과 접붙임 되었다면 평강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4. 데살로니카 3:16 때마다의 평강이다.
바울이 이를 깨닫고 모든 서신서에
1) “때마다의 평강 (“평강이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할 때 그런 수직적 평강이 아닌 때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라도 때마다 내적으로 누릴 수 있는 평강이다.
2) “일마다의 평강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또한 코로나 사태처럼 세상이 흔들리고 사회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종말론적일 때에도 때마다 평강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어떤 좋은 환경이 있어도, 주님께서 때마다 쓰디쓴 환경을 통해서도 평강을 주신다. 이익이 아닌 손실일 때도 평강을 주실 때도 있다. 심지어 주님을 죽음을 통해서도 평강을 주신다.
3) “친히의 평강 (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가을 주시고...”)
친히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약속을 되새김질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친히 샬롬과 에이레네 축복을 주실 것이다. 찬송가 중에 너 근심 걱정 말아라를 우리의 삶의 주제가가 되기를 바란다.
 
IV. 적용
첫째 인생을 더 넓고 깊게 바라보아야 한다. 인생을 넓게 바라본다면 최후의 승리를 얻을 것이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 넓고 깊게 바라보면 마음의 평강이 임할 것이다. 지금 고난당한 것이 전부가 아니다.
둘째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한다. 내가 Join에 따라서 에이레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주님과 화평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주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하면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의심 없이 신뢰하여 모든 성도들이 평강을 누리기를 바란다.
한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평강의 DNA가 없는 인종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우리나라는 전쟁도 많았고, 특별히 지구상에 가장 불안한 지역이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의 에이레이네 하늘에서 주시는 평강의 DNA가 확장되는 것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투게더 평강이 있게 하시고 평강의 백신을 확산 시키는 축복을 주시길 원한다. 부부가 손을 잡고 생각해 보라, 내 인생에 언제 최고의 평강의 시대였던가를 생각하면서 지금이 가장 평강할 때라고 이야기 하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도록 온 성도의 가정마다 축복한다. 평강은 환경 때문이 아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가정 가정마다 단잠을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We go together!!! 다음 주일 현장예배 주실 줄 믿는다.
 
 
 
느낀 점
참된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그분의 선물이다. 나에게 주신 그분의 선물을 내가 충분히 누리함은 도마처럼 은혜의 현장에 없었으므로 인해 생겨난 의심과 두려움인 것이다. 그러니까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때마다 일마다 친히 평강의 은혜를 주시는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하여 은혜 받는 현장에서 최후 승리를 믿는 주의 자녀가 되길 기도하며 나아가겠다. 오늘부터 정상적인 예배가 되었다. 이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예배에 준수하고 헌신하는 자 되며 가족을 더 잘 챙기고 음식도 골고루 해주면서 믿음을 굳건이 세워가길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로 접붙여서 생활하기를 간구한다. 남편이 이번 주부터 교회에서 미루던 파노라마를 시작했다. 감사한 일이다. 걸음마를 하나님이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 좋겠다. 또한 내가 받는 훈련이 나의 삶에 평강이 되기를 더욱 구하며 모든 일들이 해결되고 주님 앞에 찬양과 경배만이 길이라는 것을 알고 전심으로 가족과 함께 나아가길 원한다. 샬롬, 에이레네가 선포되어 우리 가정에 평강과 내 이웃의 평강이 함께 하길 소망한다. 려움과 의심으로 불안해하는 우리를 주님과 나만 아는 참된 평강을 위로부터 부어 주셔서 은혜의 현장인 안아 주님의 본당에서 믿음의 섬에 정착하는 믿음의 평생 되길 기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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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2020. 4. 29.)

제목: ''사람아, 아들아''

말씀: (마가복음 5:35-43)

설교자: 박유관 목사님

ㅡㅡㅡㅡㅡㅡ

 

인터미션 --- 물 댄 동산 수요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따뜻한 사랑으로 축복하시길 간절히 바란다.!!!

 

만약에 이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안전하다고 매일 음식을 먹는다. 버스나 지하절이 사고 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까지 우리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에도 내가 있는 이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기에 밤에 잠자리에서 잠을 잔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 모든 일상을 유지시켜 주는 기초가 된다. 믿음 없이는 사람이 살 수 없고, 믿음 없이 이 세상은 가능하지 않고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서지 못한다. 우리가 그런 현실을 부분적으로 범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모든 믿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감염되지 않는다는 믿음, 감염이 되어도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우리에게 없다. 그래서 누구도 편히 만나지 못하고 또 마음 놓고 가지 못하고 사람과 거리를 두고 살고 있다. 이런 현실을 그동안 우리가 겪으면서 중요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은 결국 믿음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면 불편한 삶을 넘어서 고통이 우리들에게 찾아온다. 이 또한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의 사망자가 20만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약 59만 명이나 실직을 했다고 한다. 고용절벽을 만난 것이다. 이 모든 겪는 사람들과 가족은 큰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슬픔과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회당장야이로이다. 그의 외동딸이 죽기 직전이다. 부모라면 야이로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죽고 딸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나아가길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회장장으로서 예수님께 나아가가 엎드리고 간절히 구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는 일이었다. 그것을 행하고자 원한다면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당시 예수님은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해서 지탄을 받고 있었다. 야이로도 회당장이었기 때문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과 동일한 종교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그의 종교적 입장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자신이 회당장이라는 사회적 지위, 체면 사람들의 시선, 수근거림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나와야 했다. 야이로는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3개의 동사가 있다. 와서 엎드려 구하여, 이 세 사를 살펴보겠다. 야이로는 바로 엎드려 오랜 시간 동안 간곡히 예수님께 구했다. 한 번만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주님께 매달리고 매달렸다. 특히 야이로가 이렇게 예수님께의 발 앞에 엎드린 행동은 나병환자나 거라사의 광인이나 이방 여인이 취했던 그런 행동과 동일한 것이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춘 겸손한 행동이었다. 그의 종교적 지위 사회적 신분을 고려한다면 정말 파격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은 지위가 높아도 권력이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그것보다 더 큰 세력 앞에 직면할 때 얼마나 그것이 무기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야이로는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대단한 사람일지 몰라도 죽음의 세력 앞에 장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했다. 왜 야이로가 체면과 사회적 신분과 종교적 입장을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려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렇게 예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 앞에 있는 딸을 구원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질병과 가난과 죽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는가요?? 물론 죄 때문이다. 인간의 질병과 죽음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대한 생각을 가장 많이 할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내 고통이 있을 때 나와 하 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당하는 고통이 알고 하나님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고통당할 때 자신에 대해서 가장 많이 한다. 그런데 신앙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통당할 때 나와 하나님을 생각한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고통이 시작 되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겪는 고통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고 하나님이 누구인지 생각하게 하신다. 욥도 그렇다. 나의 삶의 고통의 답이 있을까요? 왜 고통이 나에게 있어야 되냐고 묻는 순간에 답은 없다. 욥은 하나님을 찾는다. (욥기 42:5) 욥은 피조물이 연약하고 무지한지 낮은지를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도 위대하신 지를 깨닫는다. 전 세계 코로나 확진 자가 300만명이 넘고 사망자도 20만명이 넘었다. 아프리카가 폭발할지 모른다고 한다. 국가마다 문을 걸어 잠갔고 사람마다 직장을 잃었다. 기업들은 부도의 위기에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생필품이 없어지고, 부족한 마스크를 가지고 싸운 자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교회를 겨냥한 사회적 책임이 부족하다는 비난과 분노,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 이 세계는 야이로의 딸처럼 죽음 직전에 놓인 것처럼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코로나19로 전 지구적인 고통과 두려움 속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무

엇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인가?

 

첫째,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았기에 나왔기에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내려놓고 눈물로 기도했던 것이다.

그에게 찾아온 고통을 한 순간에 내려놓게 했다. 문제는 생각할수록 고통이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나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자리 바꾸기 시선 바꾸기라 여긴다. 서있는 위치가 다르면 모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인다. 도라산에 전에 효도관광으로 노인들을 모시고 간적이 있다. 도라산 젊은 봉사자들은 꽃을 보며 환호성을 쳤지만, 할아버지들은 북한 땅을 바라보셨고, 할머니들은 쑥을 캤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보는 지리가 현실을 바꾼다.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정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다는 뜻이다. 내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자아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자리로 고통에서 자리로, 고통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리바꿈 시선 바꿈이 있을 때 나를 진정으로 도우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드려졌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의 생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없던 힘이 생겨나고 잃어버린 용기는 되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만성적인 고통에 산다.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이 시대는 인생의 문제가 고통에 단기적인 처방이 난무하다. 일본 동경대 강상균 교수는 고민하는 힘이라 한다. 이 시대의 환경은 사람들에게 생각하는 힘을 빼앗아 간다. 그러다 보니 본질을 바라보는 삶의 테도가 부족하다. 예수님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부족해진다. 야이로가 겪는 교통이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 예수님 앞에 나오게 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어려움이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이 영적인 기폭제가 되길 바란다.

둘째, 기도해야 합니다.(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야이로에게는 심장이 절박했겠는가! 예수님이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 간절한 기도가 드디어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신 것이며, 응답의 신호탄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고난 중에 기도해야할 이유의 타종교와 차이가 있겠는가? 그들도 그들이 믿는 신에게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기도를 경건하게 한다. 우리가 타종교도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그들도 간절히 기도한다. 우리는 야이로의 태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 간곡히 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야이로는 전심으로 오래도록 기도했고 줄기차게 기도했던 것이며 한 번으로 끝나기 않게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왜 우리가 세상에 휘둘리면서 살고 있는가? 예수님의 발걸음이 움직이기까지 줄기차게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사람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가는데, 유독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다면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 그 사람은 세상의 북소리가 아니라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사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세상이 주눅들고 위축들고 있을 때,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세상사람들이 걸어가는 사람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예수 그리드소의 제자인 줄로 믿는다. 왜 우리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가 멈추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도 멈추게 된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당장 문제 해결이 아니라 줄기차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이 고통의 때에 야이로처럼 멈춰선 예수님의 발걸음이 다시 움직일 때까지 줄기차게 기도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힘, 더 힘차게 의지하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셋째,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야이로의 집을 향하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사건이 있다. 열 두 해를 혈루 증으로 고통당하는 여인으로 인하여 시간이 지체가 되었다. 한시가 급한 야이로가 얼마나 초조했겠는가? 그런데 야이로의 시선은 그녀에게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오직 그녀가 믿음으로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의 딸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딸에게 손만 얹으시면 그냥 살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야이로의 집에서 비보가 왔다. 네 믿음이 구원하였다는 순간에 예수님을 가로 챈다 그러면서 상황은 종료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야이로는 간곡히 기도한다. 야이로는 선택을 하게 된다. 딸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한다. 혈루 증 여인과는 다른 두려움이 야이로에게 왔다. 신적 경이로움에서 오늘 것이다. 호명하니 하나님의 경외로움으로 그런 두려움이 온다.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이 벗어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듣고 야이로는 힘을 얻는다. 그의 집으로 간다. 도착하니 직업적으로 곡을 사람들이 죽었다고 리를 불면서 곡을 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소녀가 잔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그 소녀에게 가셔서 말씀으로 일으키신다. 인류 역사 속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있게 된다. 처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릴 때 요한처럼 터져 나왔던 야이로의 눈물은 기쁨과 감사가 되었고, 사랑하는 딸이 음식을 먹고 걸어 다니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믿게 된 것이다.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 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질병과 죽음의 고통 앞에 떨고 있는 인간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무엇이며 누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 지를 말씀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두려움과 불안을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불안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대신 올바로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라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두려움, 불안 염려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영혼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신앙과 믿음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이 모든 것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모습을 가리켜 성경은 인간의 비참함이라고 말한다. 이 인간의 비참함을 극복할 유일 한 길은 하나님을 믿는 것뿐이다. 이 인간이 비참함을 극복하는 것은 다시 하나님께도 돌아오는 길이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성령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온몸을 던져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단한 반석처럼 의지하며 반석처럼 튼튼하신 분이시기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사야 7:9절에 굳게라는 단어는 아만이다. 아멘과 같다. 너희는 하나님을 굳건히 믿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멘이 없는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전통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의지 한다는 것이며 아멘의 믿음이며 의지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많은 절망과 두려움이 있다. 절망의 이 자리에서 무엇이 그렇게 일으킬 수 있는가? 절망의 그 자리에서 백신인가 아니다 오직 예수님뿐이시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향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고통과 절망이 점령당하지 않도록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만 단단하고 굳건하게 믿음의 자리까지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안에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음 안에서만이 사라지게 된다. 그 믿음으로 우리교회도 일어서고 한국교회가 일어서는 믿음으로 극복하기를 소망한다.

 

요약---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신의 딸이 죽어 가고 있음을 알렸으나, 혈루증 앓던 여인과 대화하는 도중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야이로는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을 보면서 분명 자신의 딸의 목숨도 시급한 사항이라 안절부절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비보를 들었으니, 아버지로서 그의 비통함은 매우 컸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셨으며, 회당장의 집에서 통곡하는 자들을 향해서도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말씀으로 일으키시며, 신적 권능을 다시 한 번 보이신다. 이처럼 모든 일을 바라보고 행할 때는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자들은 자신의 이성적 한계에 갇혀 예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하며,. 오직 예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바라며 가르치고 있다.

 

- 우리가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모든 두려움의 안개가 사라지게 하시고 영 가족 모두가 아멘의 삶을 살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길 바라며. 믿음으로 일어나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굳게 믿어 은혜의 삶으로 인도하시길 간구하며 예배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뜨겁게 찬양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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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 :2020. 4. 1. 여사역11: 이향애
제목: ''바꿔주시는 주님''
말씀: 이사야 61:1~3
설교자: 이한길 목사님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온 국민이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이걸로 인해 사회 경제 교육 문화 모든 곳에서 불안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염려가 가득하고 근심과 슬픔이 있으며 웃음을 잃었고 노래가 없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폐망했다. 나라 잃은 설움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했다. 이스라엘은 폐허가 되어 잡초와 가시덤불이 가득하였고 성전은 무너져 돌무더기가 되었다. 이사야 61장 전체를 보면 그들의 비참한 형편은 황폐한 곳 무너진 곳 황폐한 성읍들, 황폐함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소망이 없었고 그들은 상처입고 포로로 갇혀있고, 그들의 삶은 슬픔이었고 근심과 아픔이었다. 모든 것이 잿빛이었다. 도저히 소망을 품을 수 없었던 바벨론 포로의 삶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임하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며 소망이 없이 슬퍼하는 그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기쁨으로 변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바벨론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장차 오시게 될 메시아를 통하여 성취될 구원의 말씀이었다.
 
기름 부은 자 곧 메시아를 통하여 예언의 말씀이 성취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리셨다는 것은 여기서 나는 이사야 선지자이지만 실질적인 자는 바로 메시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에서 첫 번째 설교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읽으시고 자신의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다.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기름은 받은 자이며 메시아라 하였고 사명을 선포하신다. 아름다운 사역을 선포하신다.
 
1.예수님이 선포하신 아름다운 소식은 무엇인가?
1)우리에게 회복과 치유를 주신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신음하고 고통 받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소셔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케 되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매어 종노릇 한 자에게 자유를 주셨고 마귀의 권세 아래 눌린 자 갇힌 자들을 구원해 주셨다. 또한 예수님께서 슬픔과 절망에 고통에 빠진 자들에게 죄 대신 화관을 주셨다. 슬픔대신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시고, 근심대신 찬송의 옷을 주시고, 고통과 절망에 있었던 백성들에게 기쁨과 찬송이 넘치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여 주신 아름다운 소식이다. 이뿐 아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수치대신 보상을 배나 얻으며 그들이 겪었던 수치와 능욕이 완전히 사라지는 영원한 기쁨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임하셔서 우리를 치유하시고 자유케 하시고 회복하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의 삶은 실패의 연속이었고 절망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피했고, 사람들도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찾아오셔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주셨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절망과 고통 두려움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았다. 죄 대신 화관을 쓰고 기쁨의 삶을 살게 되었다.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게오를 기억하는가? 높은 명예와 부유함으로 그의 삶은 그럴싸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무너졌고 상처투성이였다. 그는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받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았다. 키도 작아 열등감이 아주 컸다. 이런 삭게오를 예수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셨다. 함께 먹고 지내셨다. 삭게오는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었다. 가진 것은 많았지만 늘 어둡고 힘들었던 인생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셔서 찬송과 기쁨이 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 생명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를 자유하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었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주신 회복과 치유는 우리에게 삶의 일부를 고치는 것이 아닌 전 영역을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존재 방식이 본질적으로 변화되고 치유되고 회복되었다.
 
2. 예수님이 선포하신 아름다운 소식은!
우리에게 존귀한 신분과 사명을 주신다.
예수님은 고통과 슬픔이 있는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회복케 하시어
영화롭게 하나님을 섬기는 존귀한 신분과 사명을 허락하셨다.


1). 존귀한 신분과 사명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심으실 의의나무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자, 바로 우리의 신분이며 사명이다. 의의 나무는 사람들이 심어 놓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셔서 심으셨다. 이처럼 의의 나무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와 힘 능력으로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본문에는 예부터 무너진 것이 그곳은 완전히
오래 황폐한 성읍들을 소생불가였고 폐허였지만 하나님이 심으신 의의 나무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생수로 다시 쌓고 다시 일으키고 다시 중수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물이 끊어지지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물댄 동산에 의의 나무 삼으셨다, 그리고 의의 나무를 통하여 다시 쌓고 다시 세우는 사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세상은 메마른 황무지와 같다. 근심에 쌓여있고 곤고하다.
 
어떻게 물댄 동산으로 회복 할 수 있나?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시작된 이 물이 흐르는 곳곳마다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를 통하여 무너진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길 원한다.
 
2). 존귀한 신분과 사명은 무엇인가?
여호와의 제사장, 하나님의 봉사자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존귀한 신분과 사명을 주셨다. 온 우주 만물이 다 주께 속하여있다. 그 안에 특별히 우리를 선택하여 어두움과 절망에 있는 자들에게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아름다운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여호와의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봉사자이다. 복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풍성한 삶이 있다. 그러므로 절망과 낙심 슬픔과 고통이 있는 곳에 생명의 빛과 은혜의 빛을 복음의 빛을 우리가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목적이고 사명이다. 악한 마귀가 틈을 타 절망 가운데로 몰아넣으려 방해하지만 주님의 능력으로 담대하게 여호와의 제사장적인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한다.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하나님을 예비하는 자로로 감당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축복하는 자로 삼았다. 백성들을 축복하는 자로 살아간 자들이다. 제사장은 은혜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이다. 그들의 제사장이 축복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부르셨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다.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잘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 하고 불안하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정오 기도회를 통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지키실 것이다. 한숨짓는 자를 위해 기도할 때 축복할 때, 세상은 여호와로 인해 복 받은 자라 인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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